[사설] 조선-해운 상생 협의회, 해수부 기능 이전 출발점 되길
조선과 해운산업을 둘러싼 글로벌 패권 경쟁이 격화일로를 걷고 있다. 북극항로와 같은 미래 먹거리뿐만 아니라 중동전쟁 이후 해양 중심의 안보 상황까지 무한 경쟁에 놓인 상태다. 이 때문에 해양강국 대한민국을 향한 양대 산업 축인 조선과 해운이 각자도생보다 동반성장을 위해 뭉쳐야 한다는 지적이 일찌감치 제기돼 왔다. 이 같은 지적에 따라 마침내 국내에서 두 산업의 상생 협력과 산업 경쟁력 동반 강화를 위한 민관 협력체계가 본격 출범했다는 소식이다. 지역에서는 벌써부터 ‘코리아 원팀’의 주체가 될 해당 협력체계가 해양수도 부산을 이끄는 주축으로 범정부적 발걸음을 내딛길 기대하는 목소리가 높다. 해양수산부와 산업통상부는 28일 ‘조선-해운 상생발전 전략협의회’ 발족식을 공동으로 개최했다. 이날 행사에는 두 정부 부처의 장관을 비롯해 국내 주요 조선사와 해운사 대표들이 대거 참석해 조선과 해운의 전략적 연대 강화를 다짐했다. 이날 발족한 전략협의회는 초격차 기술 확보와 두 산업의 연계 동맹 구성, 국적 선대 확충과 조선사 일감 확보, 지역경제 기반 상생 생태계 구축 등 네 가지 방안을 추진할 방침이다. 이 가운데 최우선적으로는 국내 해운사의 국내 조선사에 대한 전략적 집중 발주 방안이 거론된다. 이를 위해 두 정부 부처는 각각 실증 수요 발굴과 핵심기술 개발을 정책적으로 뒷받침할 태세다. 두 정부 부처가 이처럼 조선과 해운산업 등 민간 산업계까지 아우르는 전략적 동반 관계를 만들고 나선 것은 조선·해운업이 더 이상 ‘개인전’이 아닌 ‘팀전’이 됐다는 인식에서다. 중동전쟁 과정에서 보듯 호르무즈해협 봉쇄 등 위기 사태 발생 때 외국 선박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것은 치명적이다. 자국 건조 능력이 부족하면 유사시 운송수단 확보가 곤란해지는 것도 자명하다. 한때 조선과 해운 분야에서 강대국의 지위를 누리던 미국과 일본의 사례에서 보듯 조선·해운산업의 붕괴는 한순간에 발생하며 이를 복원하는 것은 너무나 어렵다. ‘코리아 원팀’으로 조선·해운산업 경쟁력 동반 강화에 나선 것은 박수받을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책적 전환을 통해서만 조선·해양산업 경쟁력 동반 강화를 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두 정부 부처가 합동으로 정책을 발표하면서까지 전략적 연대를 내비치는 것은 그동안 두 부처로 갈려 시행돼 온 정책의 시너지 효과에 아쉬움이 많았다는 방증이라서다. 해양강국을 지향한다는 대한민국에서 부산으로 해양수산부를 이전하면서까지 내세운 해양수도의 밑그림을 고려하면 아쉬움은 더욱 커진다. 두 정부 부처의 전략적 동반관계가 조선·해운산업을 필두로 한 해양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면 이번 정책 전환은 향후 해양수산부로 해양 관련 기능을 결집하는 첫걸음이 돼야 옳다.
[사설] 로봇·사람 '일자리 전쟁' 시작, 사회적 대타협 모색해야
인공지능(AI)과 로봇 개발 기술이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AI와 로봇이 인간의 현재 일자리를 완전히 대체할 것이라는 불안감도 확산되고 있다. 더욱이 산업 현장의 패러다임은 이미 큰 변화를 맞고 있다. AI로 무장한 휴머노이드 로봇을 제조 현장에 투입하는 것을 둘러싼 갈등도 증폭 중이다. 산업수도 울산의 핵심 기업인 HD현대중공업과 현대자동차 등에서는 로봇 투입 관련, 노사가 정면충돌 조짐을 보이고 있다. 제조 공정 무인화는 거부할 수 없는 미래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노조는 생존권을 위협한다고 반발하고 있고, 사측은 기술 혁신을 하지 않으면 공멸한다며 서로 접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부산일보〉 보도에 따르면 금속노조 현대중공업지부는 “사측이 2024년 6월 이후 노사 합의 없이 82대에 달하는 로봇을 용접 현장 등에 일방 투입했다”고 강력 반발 중이다. 2028년 투입 예고된 휴머노이드 로봇 앨리스를 두고도 노조는 기술 설계 단계부터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현대자동차 노조도 휴머노이드 로봇 아틀라스를 합의 없이 생산라인에 배치하는 것을 거부한다며 도입에 제동을 걸었다. 로봇을 둘러싼 노조 주장의 핵심은 일자리 축소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겠다는 것이다. 노조는 또 로봇 투입으로 근로 시간이 감소할 경우 사실상의 임금 삭감에 직면한다며 완전 월급제 쟁취 등을 촉구하고 있다. 노동계와 학계는 울산에서 촉발된 로봇 도입에 따른 무인화 갈등이 향후 전국 모든 사업장의 노사 관계를 규정할 이정표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사측의 이익 극대화 논리와 노조의 일자리 방어 논리가 정면으로 부딪히는 첫 사례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미 우리 기업들이 운용 중인 산업 로봇은 2024년 기준 3만 9190대에 달한다. 로봇 시장 규모도 미국, 일본, 중국에 이어 세계 4위에 달한다. 이미 산업 현장에서는 설비 자동화 등 산업 고도화가 꾸준히 진행되고 있음을 엿보게 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울산에서 촉발된 제조 공정 무인화로 인한 로봇과 사람의 일자리 전쟁은 이미 예고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문제는 사측과 노조의 주장이 모두 일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무인화를 둘러싼 노사 갈등은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을 것으로 전망된다. 극한 충돌도 우려된다. 따라서 그동안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이런 주제의 갈등 해법 마련을 각 기업 노사에만 떠넘기는 것은 국가 전체적으로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지금은 정부가 노사 양측을 선제적으로 중재해 노동시장 충격과 갈등을 최소화할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시급하다. 로봇이 창출할 부가가치를 근로 시간 단축과 임금 보전 등을 통해 노동자와 분배하는 방안 등에 대한 사회적 대타협도 서둘러 모색해야 한다. 노사도 공생 모델 마련을 위해 끝까지 머리를 맞대주길 당부한다.
[사설] 지선 최대 승부처 된 북갑, 정치 공학 아닌 지역 비전을
6·3 지방선거와 함께 치러지는 부산 북갑 국회의원 보궐선거가 전국적 관심이 집중되는 격전지로 떠오르고 있다. 하정우 청와대 인공지능(AI) 미래기획수석이 27일 사의를 표명하고 부산 북갑 보궐선거 출마를 공식화하면서다. 더불어민주당은 이르면 29일 하 수석에 대한 인재 영입식을 열고 부산시장 후보로 나선 전재수(부산 북갑) 의원의 지역구를 지키기 위한 전략공천에 나설 방침이다. 보수 진영에서는 이미 무소속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와 국힘 박민식 전 국가보훈부 장관이 출사표를 던졌다. 부산 18개 지역구 중 2024년 총선에서 민주당이 유일하게 차지한 북갑이라는 점에서 이번 선거는 상징성과 파급력이 크다. 높아진 관심과 달리 선거 과정은 혼란스럽다. 민주당은 전재수 의원 사퇴 시점을 둘러싸고 보선을 내년으로 미룰 수 있다는 발언으로 논란을 키웠다가 4월 30일 이전 사퇴로 정리했다. 하 수석 역시 대통령의 만류성 발언과 당 지도부의 ‘러브콜’ 사이에서 입장 표명을 미루며 혼선을 키웠다. 국가 AI 전략을 총괄해 온 그가 “향후 3~5년이 골든타임”이라고 강조해 온 점까지 고려하면 이는 유권자에 대한 예의와 국정 운영의 우선순위를 흐리는 처사다. 재보선 특성상 일정이 촉박하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선거를 앞두고 급작스레 출마를 결정하는 모습은 유권자의 숙고 시간을 제한한다. 결국 유권자의 선택권보다 당략이 앞선 정치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이는 보수 쪽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한 전 국힘 대표는 대구 출마설에서 방향을 틀어 부산 북구갑 출마를 택하며 주소지를 옮겼지만 과거 부산고검 근무 외에는 뚜렷한 연고가 부족해 유권자 혼란을 키운다. 더욱이 특정 후보의 출마를 둘러싸고 정당이 후보를 내지 말아야 한다거나, 반대로 출마를 접어야 한다는 식의 논쟁이 벌어지는 모습은 유권자를 철저히 배제한 정치권의 민낯을 드러낸다. 선거는 유권자의 선택으로 완성되는 제도인데 정작 유권자는 배제된 채 정치 세력 간 이해득실만 앞세우는 양상이다. 선거가 임박했음에도 그동안 후보조차 명확히 확정하지 않은 것은 한마디로 유권자 무시라 할 것이다. 지역의 미래를 제시하는 일은 선거의 출발점이자 최소한의 책무다. 하지만 지금 부산 북갑 보궐선거의 흐름은 정반대다. 정치적 셈법에 따라 후보가 움직이면서 선거의 본질은 흐려지고 있다. 6·3 지방선거의 핵심인 부산시장 선거마저 북갑 보선 이슈에 가려지는 기현상도 이와 무관치 않다. 선거의 중심이 지역 발전이 아닌 정치공학으로 이동한 결과다. 정작 부산 북갑의 변화와 미래에 대한 고민은 뒷전으로 밀려나 있다. 이제라도 후보들은 제대로 답을 내놓아야 한다. 부산에 내려와 무엇을 바꾸고 어떤 비전을 실현할 것인지 구체적 청사진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왜 부산 북갑이어야 하는지, 이 지역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지부터 분명히 밝혀야 한다.
포켓몬 고? 부산 고!
2016년 7월 미국 게임 제작사 나이앤틱이 증강현실 게임 ‘포켓몬 고’를 출시했다. 스마트폰을 들고 동네 카페와 편의점 앞에서 앱을 켜면 눈앞 테이블 위에 포켓몬이 나타났다. 하지만 게임사가 한국 지도 데이터를 확보하지 못하면서 국내는 지원 대상에서 빠졌다. 이때 동해안 일부 지역이 일본 서비스 영역에 걸쳐 있다는 사실이 SNS에 퍼졌다.서울에서 가장 가기 쉬운 강원도 속초는 순식간에 ‘포켓몬 성지’로 떠올랐다. 속초행 고속버스와 시외버스는 연일 매진됐다. 포켓몬이 자주 출몰한다고 입소문이 난 엑스포광장 주변 편의점과 음식점의 매출은 평일 기준 20% 이상 뛰었다. “수백억을 들여도 못할 홍보 효과”라는 평가까지 나왔다. 속초시가 대규모 시설을 짓거나 새 항공 노선을 유치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사람이 몰렸다. 게임 콘텐츠와 지역의 희소성이 만났을 때 도시의 매력이 배가될 수 있음을 보여준 사건이었다.같은 일이 다른 도시에서도 가능할까. 10년이 지난 지금, 이번엔 부산이 ‘게임 무대’로 변신했다. 부산관광공사는 민간 기업과 협업해 다음 달 5일까지 ‘더 스카우트 인 부산’이라는 체험형 관광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이른바 ‘야외 방탈출’이다. 방탈출이란 연출된 공간에서 단서를 모아 과제를 해결하고 빠져나오는 게임인데, 통상 실내에서 진행되는 것을 도시 전체로 확장한 점이 독특하다.참여자는 부산역에서 스마트폰으로 비밀 지령을 받는다. 이어 차이나타운, 남포역, 광복로 패션거리, 용두산 부산타워 등 원도심 곳곳을 누빈다. 관광안내도와 도심에 그려진 벽화를 단서로 도시에 발생한 균열의 원인을 추적한다는 설정이다. 얼리버드 티켓 2000장은 조기 매진됐다. 이미 갖춰진 부산이라는 하드웨어에 게임이라는 소프트웨어를 입힌 것만으로 호응은 뜨거웠다. 게임을 즐기러 온 이들은 부산에서 세 끼를 먹고, 잠을 자고, 대중교통을 탄다.이처럼 관광과 게임 요소를 결합하기에 부산만한 도시도 드물다. 바다와 산, 항구와 산복도로가 뒤엉킨 지형 자체가 천혜의 게임판이다. 영도 깡깡이마을의 오래된 철공소, 동천을 따라 이어지는 도시 재생의 흔적, 감천문화마을의 미로 같은 골목까지. 다른 도시가 갖고 싶어도 쉬이 가질 수 없는 지형과 이야기가 곧 부산이 가진 희소성이다. 국내외 관광객들이 스마트폰을 들고 ‘부산 고’를 외치는 장면은 상상만으로 즐겁다.
논설주간/상무이사
강윤경
수석논설위원
김승일
논설위원
정달식
이상윤
김상훈
천영철
[김승일 칼럼] 자원은 없고 사람만 있는 나라
‘적이 실수할 때 방해하지 말라.’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지난 1일 나폴레옹의 격언을 인용해 중국이 미국의 이란 침공에 방관하는 방식으로 어부지리를 노린다고 분석했다. 미국이 오판한 데다 무모함이 겹치면서 결국 쇠퇴를 가속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인식이 중국 지도부에 퍼져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전쟁이 어떻게 종결되든 중동 석유 의존은 변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중국의 부작위는 선택지가 없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우선 미 해군의 통제를 벗어난 우회 수송로를 확보하려던 일대일로(一帶一路) 프로젝트가 흔들린다. 천문학적 재원을 쏟아부어 탈미국 노선을 걸었지만 호르무즈 해협이 막히면 우회는커녕 출발부터 막힌다. 호르무즈 봉쇄로 비산유국의 에너지 안보 취약성이 명확해졌는데, 여기에 중국도 예외가 될 수 없다. 반면 이스라엘의 무리한 무력행사는 에너지 굴기에 힘입은 점에서 대비된다. ‘자원은 없고 사람만 있다.’ 60~70년대 한국에서는 국가 발전 서사에 이스라엘이 비교 대상이었다. 일촉즉발의 지정학적 위기에다 자원 빈곤을 교육과 기술로 극복하자는 성장 담론을 공유하고 있다는 논리였다. 당시 이스라엘은 군사 강국이었지만 에너지만큼은 약소국이었다. 산유국들이 이스라엘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으니 중동 내 수입은 언감생심이었다. 유전 탐사는 반세기에 걸쳐 실패를 거듭했고, 전력 수요는 석탄 발전으로 충당해야 했다. 절치부심한 끝에 반전의 기회가 찾아왔다. 지중해 영해에서 가스전이 터진 것이다. 2009년과 2010년 타마르·레비아탄에서 천연가스가 발견되자 이스라엘은 단순한 군사 강국이 아닌 에너지 패권의 한 축으로 부상했다. 전력 생산의 70%를 가스로 충당하고도 남아 이집트와 요르단에 파이프라인을 연결해 수출까지 하게 된 것. 이집트와 요르단은 1차 중동전쟁을 주도했으니, 불구대천의 적대국 사이에 산업의 젖줄이 이어지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 벌어졌다. 에너지 자립을 이룬 이스라엘과 일부 아랍국가 사이의 갑을 관계는 중동 내 반이스라엘 전선을 이완하는 효과를 불렀다. 민간인 피해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무장 정파 하마스와 헤즈볼라에 무차별 폭격을 가하고, 급기야 이란을 침공해 전 세계 공급망을 마비시키는 무리수의 배경에 자원 강국의 자신감이 있다. 에너지 종속이 국가 안보를 뒤흔든 독일 사례는 자원 빈국 한국의 반면교사다. 원전 3기를 폐기하는 대안으로 값싼 러시아 천연가스를 선택했다가 후회막급이다. 러시아와 직통 연결되는 해저 가스관 노르트스트림 1·2는 기간 산업을 떠받친 전략 인프라였다. 길이만 해도 부산~서울 직선거리(약 325km)의 4배에 달한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은 국가 전략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독일이 우크라이나를 지원한 데 대해 러시아가 공급 축소와 가격 인상으로 보복했기 때문이다. 독일은 전략적 실수를 인정하고 러시아 가스를 끊을 수밖에 없었다. 일찍이 미국의 석학 노엄 촘스키는 미국의 석유 통제권을 ‘세계 권력의 지렛대’라고 규정했다. 석유 수도꼭지를 틀어쥠으로써 한국과 일본 등 비산유국 겸 주요 제조국을 종속시키는 구조라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중국이 태양광 발전과 전기차 시장에 집중해 세계 시장을 제패한 것은 미국의 화석 연료 패권의 그늘을 피하겠다는 고육지책의 산물로 읽힌다. 중국의 도전은 유효하지만 문제는 아직 석유 시대가 저물지 않았다는 점이다. 더구나 미국은 셰일 가스 덕분에 세계 최대 산유국이 됐고 여전히 중동을 쥐락펴락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국·일본·중국을 콕 집어 ‘자유항행 보장 책임’을 반복적으로 상기한 것은 비산유국의 약점을 꼬집는 것이다. 미국과 이란의 협상은 지지부진하고 호르무즈 해협 봉쇄는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어떤 경우라도 전쟁의 결말은 산유국 승자, 비산유국 패자 구도다. 게다가 미국의 ‘무임승차는 없다’는 선언은 한국처럼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에 가장 뼈아프다. GDP(국내총생산)의 8%, 연간 수입액의 20% 이상을 석유와 가스가 차지하고, 그 대부분을 중동에 의존하는 나라로서는 공급망 불확실성 대비를 넘어선 국가 존립의 위기의식이 필요하다. 반도체와 자동차, 조선, 방산 등 하이테크 강국으로 올라섰지만, 에너지 무기화에 취약해 주사기, 쓰레기봉투, 도로포장용 아스콘 생산이 중단되는 게 현실이다. 자원은 없고 사람만 있는 한계를 극복하자고, 인재를 키우고 기술을 개발해 이뤄낸 한국의 성공 신화가 변곡점을 맞았다. 자원의 자립이 없으면 성장과 번영은 지속되기 어렵고, 영원한 종속을 피할 길이 없다. 자체 탐사와 자원 외교 등 에너지 굴기에 국가 미래가 걸렸다.
[송하주의 AI 톡] AI시대의 '토큰' 경제
필자와 연배가 비슷하거나 높은 독자들은 ‘토큰’이라는 말을 들으면 예전에 버스를 탈 때 사용하던, 가운데 구멍이 뚫린 동그란 금속 조각을 떠올릴 것이다. 일정한 요금을 내고 이동할 수 있는 권리를 상징하던 그 작은 물건은 이제 사라졌지만, 토큰이라는 개념은 뜻밖에도 인공지능 시대에 다시 등장했다. 오늘날 인공지능 기술의 핵심인 대규모언어모델(LLM)에서 토큰은 텍스트를 이해하고 처리하는 최소 단위다. 인공지능은 우리가 입력하는 문장을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잘게 쪼갠 토큰으로 변환해 처리한다. 예를 들어 ‘안녕하세요!’라는 문장은 ‘안녕’, ‘하세요’, ‘!’와 같은 조각으로 나뉜다. 이렇게 나뉜 토큰들은 다시 고차원의 숫자 벡터로 변환되는데, 이는 단어의 의미를 수치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이다. 설명을 단순화하면 ‘안녕’은 어떤 좌표, ‘하세요’는 또 다른 좌표로 표현된다고 볼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의미가 비슷한 단어일수록 이 공간에서 서로 가까이, 의미가 다른 단어일수록 멀리 위치한다는 것이다. 마치 지구상의 위치를 위도와 경도로 나타내듯, 언어의 의미가 좌표 공간 속에 배치되는 셈이다. LLM은 이렇게 변환된 토큰들을 바탕으로 다음에 올 확률이 가장 높은 토큰을 선택하는 과정을 반복하며 문장을 만들어낸다. 입력과 출력이 모두 토큰 단위로 이루어지는 만큼, 토큰은 곧 인공지능의 사고와 표현을 구성하는 기본 단위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변화가 있다. 이 기술적 단위가 이제는 곧 경제적 단위로 작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 대부분의 AI 서비스는 입력과 출력에 사용된 토큰 수를 기준으로 사용량을 측정하고 요금을 부과한다. 이는 단순한 과금 방식의 변화에 그치지 않는다. 사용자 행동 자체를 바꾸고 있다. 만약 사용료가 접속 시간 기준이라면 사람들은 시간을 줄이기 위해 서둘러 질문하고 빠르게 답을 확인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토큰 기반 과금에서는 상황이 정반대다. 얼마나 오래 머무르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적은 토큰으로 원하는 결과를 얻느냐가 중요해진다. 그 결과 질문은 점점 더 간결해지고, 불필요한 설명은 줄어들며, 구조화된 입력이 선호된다. 긴 문서를 그대로 입력하기보다 먼저 요약한 뒤 핵심만 전달하는 방식, 여러 단계로 나누어 질문을 최적화하는 전략도 등장했다. 이른바 ‘토큰 다이어트’가 새로운 경쟁력이 된 것이다. 기업 입장에서는 이 변화가 더욱 직접적이다. 예를 들어 고객 상담에 LLM을 도입하면, 대화가 길어질수록 이전 대화 내용까지 함께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토큰 사용량이 빠르게 누적된다. 전체 대화 기록을 계속 포함하는 방식은 이른바 ‘토큰 폭발’로 이어질 수 있고, 이는 메모리 사용량 폭증으로 이어진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같은 메모리 업체의 입장에서는 환영할 일이나 서비스 업체로서는 설비 투자 비용이 급증하게 된다. 그러다보니 실제로 일부 AI 서비스에서는 대화 길이를 제한하거나, 중간 요약을 통해 맥락을 압축하는 방식이 도입되고 있다. 결국 필요한 정보만 선별하고 효율적으로 콘텍스트를 관리하는 능력이 서비스 수익성을 좌우하는 요소가 되었다. 하지만 이 토큰 경제에는 흥미로운 긴장도 존재한다. 비용이 정보의 의미나 가치가 아니라 ‘토큰의 양’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이다. 핵심만 간결하게 전달하면 비용은 낮아지지만, 같은 내용을 장황하게 풀어내면 비용은 더 커진다. 반대로 의미적으로 복잡한 내용이라도 표현이 압축되어 있으면 상대적으로 저렴해질 수 있다. 이는 결국 ‘말의 길이’가 비용이 되는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낸다. 최근 AI 에이전트의 활용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이 문제는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 여러 단계를 거쳐 작업을 수행하는 에이전트는 토큰을 반복적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효율적인 토큰 관리 없이는 비용이 급격히 증가할 수밖에 없다. 이제 토큰을 어떻게 쓰느냐는 단순한 기술 문제가 아니라 운영 전략의 핵심이 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큰이 지니는 의미는 분명하다. 과거에는 보이지 않던 연산 자원이 토큰이라는 단위로 가시화되었고, 우리는 이를 통해 인공지능의 사용량과 비용, 나아가 생산성을 측정하고 있다. 토큰은 더 이상 단순한 텍스트 조각이 아니라, 성능과 비용, 서비스 설계, 사용자 행동까지 좌우하는 중심 개념이 되었다. 과거 버스 토큰이 이동의 권리를 상징했다면, 오늘날의 토큰은 지식 생산과 정보 처리의 연료를 상징한다. 보이지 않던 연산이 이제는 비용으로 드러나고, 우리는 언어를 사용하는 방식 자체를 효율의 관점에서 바라보기 시작했다. 어쩌면 지금 우리는, 말과 사고가 곧 경제 활동이 되는 새로운 시대의 입구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
[데스크 칼럼] 양산선, 부울경을 연결하는 미래의 길
오는 11월, 경남 양산 시민들이 오랫동안 기다려온 양산도시철도(이하 양산선)가 마침내 개통한다. 애초 계획보다 6년이나 늦어졌다. 예비타당성 조사와 주민 공청회 등의 행정절차까지 포함하면 무려 16년 만에 맺은 결실이다. 사업 추진 과정에서 각종 인허가와 설계 변경, 예산 확보 등 복잡한 행정절차가 반복되면서 상당한 시간이 소요됐다. 대형 사회간접자본(SOC) 사업이 갖는 구조적 한계가 그대로 드러난 셈이다. 그만큼 시민들의 기대도 크다. 현재 양산선은 개통을 위한 마지막 단계에 들어섰다. 종합 시운전과 시설물 점검, 비상 대응 훈련, 운영 인력 교육 등 막바지 준비가 한창이다. 말 그대로 ‘개통 초읽기’에 돌입했다. 양산선은 부산 금정구 노포동 부산도시철도 1호선 종점역에서 양산 북정동을 잇는 노선이다. 부산과 양산을 하나의 생활권으로 묶는 핵심 교통축이다. 특히 부산도시철도 1·2호선이 양산선을 통해 이어진다는 것은 단순히 환승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양산 시민의 일상 이동 반경이 넓어지고, 부산 도심과의 시간적 거리는 획기적으로 줄어든다. 이는 도로 중심 교통체계에서 벗어나 철도 중심의 정시성과 안정성을 갖춘 구조로 전환하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이번 개통은 양산 교통체계를 한 단계 끌어올리는 전환점이다. 그동안 양산은 고속도로와 국도 등 도로망 중심 구조에 의존해 왔다. 그러나 양산선이 본격 가동하면 철도·버스·도로가 입체적으로 연결되는 복합 교통체계가 구축된다. 향후 광역철도망까지 갖춰지면, 양산은 부울경을 잇는 동남권 교통 허브로 도약할 가능성이 크다. 철도가 도시를 어떻게 바꾸는지 양산 시민들은 이미 경험했다. 부산도시철도 2호선 양산 연장선은 양산신도시 분양 시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교통 접근성 개선은 곧 주거 선호도 상승으로 이어졌고, 이는 인구 유입과 도시 확장을 견인했다. 양산선 역시 사송신도시의 가치 상승과 정주 여건 개선에 핵심 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철도는 단순한 이동 수단을 넘어 도시의 미래를 설계하는 기반 시설이다. 따라서 양산시는 개통에 맞춰 연계 교통망 정비를 서둘러야 한다. 각 역을 중심으로 환승 체계를 촘촘히 구축해 접근성을 높이고, 도시 전역을 유기적으로 연결해야 한다. 철도와 버스가 유기적으로 연결될 때 비로소 ‘사통팔달’ 교통망이 완성되는 것이다. 하지만 기대만큼 우려도 존재한다. 가장 큰 문제는 단선 구조다. 양산선은 복선이 아닌 단선으로 건설됐다. 세계적으로도 드문 사례다. 향후 수송 능력과 운행 효율성에 한계가 따를 수밖에 없다. 경제성을 고려한 선택이지만, 장기적인 도시 성장과 교통 수요 증가를 감안하면 아쉬움이 남는다. 장기적으로 복선화를 고려해 최소한 터널 구간만이라도 복선화에 대비하는 설계를 했어야 한다는 지적이 여전히 설득력을 갖는다. 역세권 인프라도 과제로 남아 있다. 각 역마다 주차장 확보를 위한 용역까지 진행됐지만, 일부 역은 부지 문제 등으로 충분한 주차 공간을 확보하지 못했다. 철도 이용의 출발점인 ‘접근성’이 흔들릴 수 있는 대목이다. 환승 편의성을 강조하면서도 실제 이용자가 체감할 기반 시설이 부족하다면 이용률 저하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양산선은 하나의 노선에 그치지 않는다. 향후 부울경 광역철도와 동남권 순환 광역철도 구축과 연계되며 동남권 교통망의 핵심 축으로 자리 잡게 된다. 부울경을 하나로 잇는 광역철도망이 완성되면 양산은 단순한 경유지를 넘어 중심 거점으로 부상할 가능성이 높다. 최근 본격화하는 부울경 행정 통합 논의와 맞물려 보면, 양산선의 전략적 가치는 더욱 커진다. 행정 통합은 제도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사람과 물류가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물리적 기반이 뒷받침돼야 한다. 이런 점에서 양산선은 부울경을 하나의 생활권으로 묶는 ‘마중물’을 역할을 할 수 있다. 사통팔달 교통망이 곧 광역 경제권 형성의 토대이기 때문이다. 결국 관건은 개통 이후다. 늦어진 시간을 만회하려면 운영의 완성도는 높여야 한다. 단선 구조의 한계를 보완할 운행 전략과 부족한 주차시설 확충, 연계 버스망의 효율적인 재편 등 해결해야 할 과제가 분명하다. 개통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시민이 얼마나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느냐다. 양산선은 이제 출발선에 섰다. 16년 기다림 끝에 맞이하는 개통이 일회성 이벤트에 그치지 않으려면 냉정한 점검과 지속적인 보완이 필요하다. 이번 개통이 양산 교통망을 사통팔달로 한층 더 업그레이드하는 계기를 넘어 부울경 지역 전체를 연결하는 핵심 인프라로 자리 잡기를 기대한다.
[노트북 단상] 진짜 '1억짜리' 프리미엄 소음입니다
부동산 커뮤니티나 임장 카페를 둘러 보기 전 원소기호처럼 외워야 하는 말이 있다. 이름하여 ‘브역대신평초’다. 이는 부동산에서 투자 가치가 높은 아파트를 고를 때 자주 쓰는 6가지 핵심 요소를 줄인 말로 브랜드·역세권·대단지·신축·평지·초품아(초등학교를 품은 아파트)를 뜻한다. 이 공식에서 주목할 점은 ‘초’의 위상이다. 당당히 육각형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초품아 아파트들은 안전한 등하굣길이 보장되고, 학교를 중심으로 학원가와 상권이 형성돼 주변 인프라가 상대적으로 좋아질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초품아는 인근 단지보다 상당한 수준의 프리미엄이 붙는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에게 학교는 단순한 교육 기관을 넘어 자산 가치를 지탱하는 핵심 인프라인 셈이다. 하지만 프리미엄에도 단점은 존재한다. 역설적이게도 그 균열은 학교가 가장 생동감 있게 살아 움직일 때 발생한다. 바로 1년에 한 번 찾아오는 운동회날이다. 요즘의 초등학교 운동회는 풍경부터가 예전과 다르다. 호루라기를 입에 문 선생님 대신, 마이크를 잡은 전문 사회자들이 운동장을 진두지휘한다. 아이들의 문화를 꿰고 있는 이들은 최신 유행하는 아이돌 음악을 틀고 ‘랜덤플레이 댄스’로 흥을 돋운다. 스피커를 타고 흐르는 비트와 사회자의 재치 있는 입담에 아이들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몇 옥타브가 높아질 수밖에 없다. 운동회의 백미인 계주가 시작되면 분위기는 절정에 달한다. 아드레날린이 폭발한 아이들은 목이 터져라 응원전을 펼치고, 이를 지켜보는 학부모들 역시 자식의 질주 앞에선 목소리 톤을 조절하기가 힘들다. 그러나 이 활기찬 소동은 담장 너머 아파트 단지에 닿는 순간, 누군가에게는 견디기 힘든 소음으로 변질된다. 즐거운 비명 소리가 커질수록 학교 교무실의 전화기는 쉴 새 없이 울려댄다. “시끄러워 잠을 잘 수가 없다” “애들 목소리와 음악 소리가 너무 크다. 좀 조용히 시켜라”는 민원 때문이다. 축제가 한창인 운동장이지만 선생님 한 명은 교무실을 지키며 이 날 선 항의를 온몸으로 받아내야 한다. 전화를 받지 않거나 대응이 미흡하면 더 날카로운 항의로 돌아오거나 교육청, 국민신문고로 민원이 옮겨가기 때문이란다. 민원을 의식한 사회자는 결국 흥이 오른 아이들에게 “주변에서 민원이 들어오니 조금만 조용히 해달라”며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을 수밖에 없다. 아이들의 흥을 올리기 위해 섭외된 사회자가 힘들게 끌어올린 흥을 가라앉히는 아이러니한 모습이 연출된다. 물론 평온한 일상을 방해받는 주민들의 스트레스를 무시할 수는 없다.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휴식 시간일 것이고, 소음에 예민한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운동회는 1년에 단 하루다. 과거처럼 한 달가량 ‘칼각’을 맞추던 연습 기간도 없다. 많아야 운동회를 앞두고 간단한 연습 1~2회와 당일의 소동이 전부다. 게다가 점심 시간 전에 행사는 종료된다. 우리가 ‘초품아’라는 이름표에 지불한 그 프리미엄 안에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활기, 그리고 학교라는 공동체가 주는 유무형의 혜택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하루 반나절만 운동장에서 들려오는 저 시끄러운 함성을 ‘1억짜리 소음’이라고 생각하며 웃어넘겨 보면 어떨까. 아이들이 맘 놓고 뛰어놀 수 있는 동네야말로, 당신의 재테크가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값비싼 신호다.
[중앙로365] 흔들리는 국제 질서와 부산 금융의 기회
최근 국제 정세의 불안은 더 이상 외교·안보에 그치지 않고 자본의 이동과 금융기관의 입지를 바꾸는 변수로 작동하고 있다. 전쟁의 장기화, 제재의 상시화, 공급망 불안, 통화 질서의 긴장은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을 키우고 있다. 그러나 금융의 관점에서 보면 지금은 단지 위기의 시기만은 아니다. 글로벌 자본과 금융 기능이 더 안전하고 예측 가능한 곳으로 옮겨가는 시기이기도 하다. 부산에는 이 흐름을 금융중심지 도약의 기회로 살릴 여지가 있다. 평상시 금융중심지는 효율과 편리의 공간처럼 보인다. 그러나 불안의 시기에는 그 본질이 드러난다. 자본이 먼저 보는 것은 수익률만이 아니다. 자산이 안전하게 보호되는지, 계약이 안정적으로 유지되는지, 결제와 청산이 멈추지 않는지, 정책과 규제가 쉽게 흔들리지 않는지를 본다. 결국 금융중심지는 위기 속에서도 거래 질서를 지켜낼 수 있는 도시다. 역사도 이를 보여 준다. 국제 질서가 흔들릴 때마다 중심은 이동했다. 르네상스 이후 유럽의 금융 중심이 베네치아와 제노바에서 앤트워프, 암스테르담, 런던으로 옮겨간 것은 우연이 아니다. 더 크고 화려한 도시가 아니라 더 안정된 제도와 더 예측 가능한 질서를 갖춘 도시가 중심 기능을 끌어들였다. 반대로 정치적 갈등과 제도 혼란을 겪은 도시는 금융 기능을 지켜내지 못했다. 금융은 결국 가장 큰 도시보다 가장 믿을 수 있는 도시를 선택한다. 이제 부산 금융중심지 논의도 국내 다른 도시와의 경쟁 틀에만 갇혀서는 안 된다. 시야를 국제 질서 재편과 글로벌 금융 기능 이동이라는 더 큰 흐름으로 넓혀야 한다. 중요한 것은 다른 도시를 이기는 일이 아니다. 변화하는 국제 환경 속에서 부산이 어떤 대안이 되는 금융도시, 어떤 믿을 만한 보완 도시가 될 수 있느냐이다. 금융허브의 불안정성이 커질수록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보완 도시의 가치는 더 커진다. 부산도 세계 금융 질서의 변화 속에서 새로운 금융 수요를 흡수할 수 있는 실질적인 금융도시로 자리매김해야 한다. 기회는 언제나 준비된 곳으로 간다. 지금 중요한 것은 부산이 그 기회를 받아들일 준비를 갖추고 있느냐이다. 금융중심지의 경쟁력은 결국 세 가지다. 첫째, 안전성이다. 외부 충격 속에서도 거래와 자산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다. 둘째, 예측 가능성이다. 규제와 세제, 감독과 정책의 방향이 일관돼야 한다. 셋째, 개방성이다. 외부 자본과 기관, 인력이 실제로 들어와 활동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지금과 같은 시기에는 세 가지 조건이 함께 갖춰져야 비로소 힘을 갖는다. 부산의 현실적 강점은 분명하다. 해양·항만·물류는 물론 부울경 동남권 제조업과 연결된 실물 기반이 두텁다. 공급망과 해상 물류가 국제 정세와 지정학의 영향을 직접 받는 지금, 실물 금융, 해양 금융, 무역 금융, 물류 연계 금융의 중요성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부산이 이 기반을 금융 기능과 정교하게 연결해 나간다면, 단순한 지역 금융도시를 넘어 차별화된 금융 거점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 금융중심지는 구호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실제 산업, 실제 거래, 실제 서비스의 축적 위에서 형성된다. 그런 점에서 이는 부산이 가진 가장 현실적이고도 강한 자산이다. 다만 기회는 저절로 오지 않는다. 부산 금융중심지 전략의 가장 큰 위험은 외부보다 내부에 있다. 사업 이름이 바뀌고, 우선순위가 뒤집히고, 선거 때마다 정책의 틀이 흔들리면 어느 금융기관도 장기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자본은 단기적 열정보다 장기적 일관성을 더 높게 평가한다. 부산이 먼저 흔들리지 않는다는 신호를 줘야 한다. 중앙정부의 역할도 중요하다. 금융 규제, 외환, 세제, 감독의 핵심 권한은 대부분 중앙정부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앙의 지원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두바이와 아스타나의 사례가 보여주듯, 제도 실험과 신속한 집행이 가능한 자율적 운영 기반이 함께 뒷받침돼야 한다. 현장 중심의 자율성과 실행력이 있어야 금융중심지 전략도 실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지금 부산 앞에는 두 갈래 길이 있다. 세계의 불안을 남의 일처럼 바라보다가 기회를 놓치는 길, 그리고 금융 기능 이동의 흐름을 읽고 부산을 새로운 대안으로 키우는 길이다. 금융의 역사는 반복해서 같은 사실을 보여준다. 중심은 영원하지 않다. 더 믿을 수 있는 곳, 더 오래 버틸 수 있는 곳으로 옮겨갈 뿐이다. 부산이 놓쳐서는 안 될 것도 바로 그 변화다. 변화의 방향을 정확히 읽고, 흔들림 없는 전략과 지속적인 실행으로 자기 자리를 만들어가는 일이다. 세계적 불확실성은 분명 부담이다. 그러나 준비된 도시에 그것은 위기가 아니라 재편의 기회가 된다. 부산이 금융중심지로 도약할 수 있느냐는 외부 환경보다 먼저, 그 기회를 끝까지 붙들 의지가 있느냐에 달려 있다.
[편집국에서] 분기 영업이익 57조 원의 무게
‘57조 2000억 원’. 지난 7일 삼성전자가 잠정실적으로 발표한 1분기 영업이익 수치다. 그동안 한국 기업 실적에서 처음보는 어마어마한 수치다. 글로벌 기업들 중에서도 이 같은 숫자를 적어내는 곳은 손에 꼽는다. 글로벌 시가총액 1위 기업인 엔비디아가 최근 분기 기준 약 63조 원으로 삼성을 넘어서는 정도이고, 세계 최대 정유사 사우디아라비아의 아람코는 지난해 4분기 약 41조 원을 냈다. 글로벌 파운드리 1위 기업인 대만 TSMC의 올 1분기 영업이익도 약 30조 원대로 삼성전자 아래다. 재계에선 반도체 가격 상승이 계속되고 있어서 연말까지 가면 삼성전자가 영업이익 면에서 엔비디아와 비슷하거나 앞설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하지만 요즘 삼성전자 경영진은 이 같은 숫자나 전망치를 보고도 웃지 못하고 있다. 노조의 5월 총파업 예고 때문이다. 삼성전자 초기업노조는 지난 23일 경기 평택시 삼성전자 평택캠퍼스 인근 대로에서 대규모 투쟁 결의대회를 열었다. 이 현장에는 약 4만 명이 모인 것으로 파악됐다. 노조는 성과급 상한 폐지와 영업이익 15%를 성과급 재원으로 요구하고 있다. 올해 예상되는 삼성전자의 영업이익은 대략 300조 원. 이 영업이익의 15%면 45조 원을 나눠달라는 얘기다. 근로자 1인당으로 치면 6억 원이 넘는다. 삼성은 오랫동안 ‘무노조 경영’의 상징으로 불렸다. 이는 창업주 이병철 회장의 경영 철학에서 나왔다. 삼성그룹 창업자인 고 이병철 회장이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노조를 인정할 수 없다”는 신조를 가지고 있었고, 아들인 고 이건희 회장도 이를 따랐다. 하지만 2018년 검찰이 삼성그룹이 노조 설립을 막기 위해 조직적으로 개입한 내부 문건을 다수 확보했고, 이에 이듬해 서울중앙지방법원은 당시 임원들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당시 부회장)은 대국민 사과를 통해 ‘무노조 경영 폐기’를 발표했다. 그로부터 7년후 삼성전자는 사상 최대의 영업이익을 내는 시점에 총파업이라는 거대한 파도를 맞게 됐다. 노조의 파업예고에 대한 여론은 가히 좋지 않다. 이익이 나면 근로자는 그에 상응하는 수익을 회사와 나눠가져야 한다는 건 당연하지만 요구조건이 과하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도 당초 입장에서 한발 물러나 영업이익 10% 이상을 장기보유 주식으로 지급한다는 중재안을 제시했지만 노조는 거부했다. 만약 노조의 예고대로 파업이 강행되고 24시간 가동이 필수인 반도체 라인이 멈출 경우, 재가동에만 한 달 이상의 기간이 소요되며 이에 따른 경제적 손실은 수십조 원대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반도체는 국내 총수출의 약 38%를 차지한다. 삼성전자 파업이 1764개 소부장(소재·부품·장비) 협력사로 구성된 산업 생태계 전반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최근 대만 언론은 삼성전자의 생산 차질이 현실화할 경우 대만 반도체 기업들이 반사이익을 얻어 가격 협상력을 높이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 대한민국 주주운동본부 소속 일부 회원들이 노조 집회 장소 인근에서 “반도체 호황 사이클에서 공장을 멈추면 주주들의 재산에 직접적인 피해를 주는 것”이라며 노조를 맹비난했다. 삼성전자 사측도 지난 16일 수원지방법원에 ‘위법 쟁의행위 금지 가처분’을 신청했다. 삼성전자는 초과이익성과급(OPI)은 성과 인센티브여서 임금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대법원판결에 따라 노조의 성과급 요구가 파업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시위 행태에 대한 비난론도 거세다. 23일 시위 현장에는 이재용 회장, 전영현 대표이사 부회장, 노태문 사장의 대형 얼굴 사진이 깔렸는데, ‘째째용’(이재용), ‘전시황’(전영현), ‘노때문’(노태문)이라는 조롱성 별칭이 적혀 있었다. 일부 조합원은 사진을 밟으며 지나가기도 했다. “300조 버는데 45조 정도 줄 수 있지 않느냐”는 얘기도 할 수 있지만 삼성은 현재 국내외에서 반도체 업체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수백조 원에 달하는 막대한 투자를 계속하고 있다. 8세대 HBM(고대역폭메모리)5, HBF(고대역폭낸드플래시) 등이 대표적이다. 삼성전자 노조의 발목잡기가 계속된다면 삼성은 ‘세계 1위 반도체 기업’이라는 장밋빛 대신 바위를 정상까지 올리면 다시 굴러 떨어지는 ‘시지프스의 형벌’을 경험하게 될 수도 있다. 수시로 이재용 회장을 행사장으로 불러대던 청와대도 이번 사태에는 침묵하고 있다. 삼성전자 노사가 미래 투자를 해치지 않으면서 적정한 성과보상을 하는 합의안을 빨리 찾기를 기대해 본다. 배동진 지사장 겸 서울경제부장 djba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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