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인재 육성과 일자리 확대… 부울경이 함께 가야 할 길
부산시가 행정권역에 앞서 노동시장의 경계를 먼저 허물자는 취지로 ‘초광역권 일자리 프로젝트’를 제시했다. 부울경을 넘나드는 통근자에게 교통비를 지원하고, 거주지와 근무지가 다를 경우 지역화폐 연계 혜택을 줘 역내 출퇴근이 수월해지도록 하자는 것이다. 또 지역 인력 채용 때 기업과 노동자 모두에게 인센티브를 주는 방안도 제기됐다. 51억 원의 예산이 투입되는 이 프로젝트는 단순한 고용 지원책을 넘어 동남권을 하나의 경제권으로 재편하려는 구조적 시도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부산과 울산, 경남이 인재 육성과 일자리의 공유로 공동 성장할 수 있다는 믿음이야말로 번갯불에 콩 구워 먹기식 행정통합보다 실속이 있다 할 것이다. 동남권이 ‘둥지와 먹이’를 공유하는 보다 확장된 경제권이 될 때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는 사례는 현장에서 구체화하고 있다. 경남 사천에서는 경상국립대 캠퍼스 조성을 계기로 항공우주 인재 양성이 본격화되고 있다. 울산은 20m 바닷속에 데이터센터를 설치해 실증하는 사업과 조선업의 AI(인공지능) 전환을 통한 산업 구조 고도화에 나서고 있다. 경남 김해는 가덕도신공항, 부산항신항, 철도 등 트라이포트 인프라를 배경으로 물류와 항공, 컨벤션 기능을 결합한 국제 비즈니스 거점으로 도약을 모색하고 있다. 제각각 경쟁력이 확보된 지역 산업에 기반하면서 디지털·AI 등 미래 첨단산업의 전환이 진행된다는 점에서 기대가 크다. 해양수도 부산은 북극항로 개척 등을 통한 해양경제권의 중추를 지향하고 있다. 여기에 항공우주, 제조, 에너지, 조선해양, 물류로 약동하는 경남과 울산과의 화학적 결합으로 동반 성장하자는 것이 초광역 경제동맹의 비전이다. 그 목표를 실현하려면 구인·구직 불일치를 푸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인력 양성과 일자리 창출이 맞물리면서 정주 여건이 뒷받침되어야만 자생적 경제권 형성이 가능해진다. 가장 중요한 과제는 행정의 칸막이를 없애는 것이다. 이익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출발점이다. 각 지자체가 각자의 성과에 급급하면서 투자와 사업이 중복·누락되거나 기업·대학 연계가 헛도는 것은 절대 피해야 한다. 사천의 하늘, 울산의 바다, 김해의 관문 그리고 부산의 항만이 따로 움직여서는 미래는 없다. 전국이 하루 생활권인데 행정 경계에 매몰되면 수도권 집중과 지방 소멸 구조의 탈피는 요원하다. 노동권역의 경계를 허물고 인력과 기회를 공유하자는 ‘초광역권 일자리 프로젝트’는 반전의 출발점이어야 한다. 동남권의 인재가 유출되지 않고 역내 기업에서 선순환하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핵심이다. 정주 여건, 교통망, 육아 환경 개선 등도 병행돼야 한다. 부울경은 수도권 밖에서 성장 산업과 인재 육성 기반을 유일하게 갖춘 지역이다. 부울경의 미래는 산업 벨트 형성에 달려 있다. 지역이 이익 공동체로 변모해야 살아남는다는 절박감이 중요하다.
[사설] 미국 호르무즈 역봉쇄, 중동사태 충격 장기화 대비해야
미국이 이란 항구를 오가는 해상교통 전반에 대한 봉쇄에 나섰다. 이란과의 종전 협상이 결렬된 직후 나온 첫 조치로, 미국은 13일 오후 11시부터 이란 항구를 오가는 선박을 대상으로 해상봉쇄에 돌입했다. 호르무즈 해협 통제를 강화해 온 이란에 맞선 ‘역봉쇄’가 현실화된 것이다. 이는 단기적인 유가 급등 부담을 감수하더라도 협상력을 높이고 동시에 해협 통제권을 확보하려는 미국의 의도가 다분히 깔린 것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이란이 강하게 반발하면서 해협의 긴장 수위는 빠르게 높아지고 있다. 또한 그 여파는 에너지와 국내 산업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 이에 이번 사태의 장기화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세계 원유와 천연가스 물동량의 20% 이상이 지나는 이 해협에서 양측이 동시에 통제권을 행사하는 상황은 그 자체로 위험 신호다. 시장은 즉각 반응했다. 이날 서부텍사스산원유(WTI) 선물은 7.23% 상승(오후 4시 20분 기준)했다. WTI는 장중 한때 9%대까지 치솟았다. 코스피는 내렸고, 환율은 뛰었다. 유럽 천연가스 가격도 급등하는 등 세계적으로 원자재 비상 경고등이 켜졌다. 에너지 가격의 급등은 단순한 시장 변동을 넘어 인플레이션과 성장 둔화를 동시에 자극할 수 있다. 일각에선 전쟁 장기화에 따른 스태그플레이션 우려도 나온다. 중동의 군사적 긴장이 곧바로 글로벌 물가와 성장 전망을 흔드는 구조가 다시 확인된 셈이다. 해상봉쇄 파장은 에너지 가격을 넘어 국내 산업 전반으로 번지고 있다. 한국무역협회 자료에 따르면 헬륨과 브롬 등 핵심 소재의 중동 의존도가 매우 높다. 헬륨은 반도체 공정에 필수적인 냉각재로 수입의 64.7%가 카타르에 집중돼 있다. 브롬 역시 대부분을 이스라엘에 의존한다. 특히 헬륨은 LNG 생산의 부산물이라 해협 봉쇄로 공급이 줄면 생산 자체가 위축될 수 있다. 실제 카타르 생산시설 일부가 영향을 받으면서 공급 차질 우려가 커지고 있다. 대체 항로로 거론되는 홍해 역시 후티 반군의 위협 속에 안정성이 떨어진다. 에너지, 원자재, 물류가 동시에 흔들리는 복합 위기 양상이 뚜렷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번 사태의 본질은 단순 봉쇄가 아닌 ‘이중 봉쇄’에 있다. 그만큼 향방을 가늠하기 어려운 국면이다. 미국의 역봉쇄가 ‘2주 휴전’ 합의처럼 막판 타협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유가 급등과 공급망 불안은 이미 현실이 됐다. 원유와 LNG는 물론 나프타·요소·헬륨·브롬 등 중동 의존도가 높은 핵심 소재의 공급 차질이 가시화될 경우 산업 전반의 충격은 불가피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급망의 내구성을 높여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기업은 소위 ‘맷집’도 키워야 한다. 정부도 비상 대응 체계를 가동 중이지만, 품목별 의존도를 점검하고 대체 공급망 확보에 차질이 없도록 더 철저한 대비가 필요하다. 아울러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장기전에도 대비해야 한다.
[사설] 박형준-전재수 시장 후보 확정, 부산 재도약 비전 보여줘야
부산시장 선거 대진표가 확정되면서 본격적인 경쟁이 시작됐다. 더불어민주당 전재수 의원과 국민의힘 박형준 현 시장이 최근 잇따라 당내 경선을 돌파하며 맞대결 구도가 형성됐다. 선거일까지 50일 남짓 남은 시점에서 현직 시장과 여당 중진 정치인의 대결은 단순한 인물 경쟁을 넘어 부산의 향후 진로를 가늠할 중대한 시험대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최근 여론조사 등을 놓고 보면 여권 우세론이 제기 되지만 부산 특유의 보수 결집력과 막판 변수 역시 여전히 유효하다. 2018년 지방선거에서 드러난 부산 민심의 변화가 재연될지, 아니면 현 체제가 유지될지는 쉽게 단정하기 어렵다. 결국 승부는 유권자의 선택에 달려 있다. 박 후보는 치열한 경선을 거쳐 본선에 올랐다. 경선 과정에서 대여 비판과 강경 메시지를 강화하며 지지층 결집에 나섰고 부산 글로벌허브도시특별법 통과를 촉구하며 단행한 삭발은 상징적 장면으로 평가된다. 지난 11일 경선 승리 직후 박 후보는 이번 선거를 단순한 지방선거가 아닌 정치적 의미가 큰 승부로 규정했다. 박 후보는 경륜과 안정성을 내세워 시정 연속성을 강조하고 있다. 재임 기간 취업률 개선, 투자 유치 확대, 관광객 증가 등의 성과를 설명하며 여당의 ‘무성과’ 비판에 대응하고 있다. 경선에선 행정 경험과 안정성을 선택했지만, 결국 박 후보가 직면한 과제는 여당의 비판을 넘어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며 중도층까지 설득할 수 있느냐다. 전 후보의 ‘부산 유일 민주당 3선’ 이력은 여당 취약 지역에서의 확장성을 상징하는 자산으로 평가된다. 해수부 장관 시절 해운기업 이전 추진 등 정책 실행 경험을 강조하며 중앙정부와의 협력을 통한 부산 발전을 주요 메시지로 내세운다. 여기다 최근 검경 합동수사본부가 통일교 금품 수수 의혹을 불송치하며 이른바 ‘사법 리스크’를 덜어냈다는 평가도 나온다. 다만 불송치 이후에도 관련 의혹을 둘러싼 정치 공방은 이어지고 있다. 국힘은 “짜인 시나리오”라며 공세를 늦추지 않고 있다. 해수부 이전을 관철한 추진력과 여당 후보로서 정책 실행력을 강조하는 전략이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는 이러한 정치적 부담을 어떻게 관리하느냐가 관건이 될 것이다. 이번 선거는 다분히 인물과 구도 중심으로 흐르는 양상이다. 하지만 부산에는 가덕신공항 건설, 글로벌허브도시특별법 통과 등 굵직한 현안이 산적해 있다. 여기다 청년 유출로 도시 활력은 떨어지고 이란 전쟁 여파로 인한 유가와 원자재 가격 상승까지 지역 경제를 압박한다. 그럼에도 여권은 중앙 권력과의 연계를, 야권은 견제론을 앞세우는 전형적 대결 구도에 머물러 있다. 이는 유권자가 바라는 바가 아니다. 결국 이번 선거의 본질은 분명하다. 누가 현재의 복합 위기를 돌파하고 부산이 다시 도약할 수 있는 희망을 보여줄 수 있느냐다. 남은 기간 후보들은 부산이 재도약할 수 있는 비전과 리더십을 제대로 보여야 할 것이다.
망신당하는 심판
“심판 판정도 경기의 일부분이다.”스포츠계에서는 오래전부터 이런 말이 있다. 심판 판정이 잘못되더라도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이다. 잘못된 판정을 잊고 경기에 집중해야 한다는 긍정적인 마인드로 읽히지만, 잘못된 판정에 울분을 삭혀야 하는 선수와 감독의 심정을 생각하면 늘 안타깝다.스포츠 경기에서 심판의 권위는 절대적이다. 그래야만 한다. 냉혹한 승부의 세계에서 중심을 잡고 경기를 이끌고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판정에 불복해 항의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선수나 감독 할 것 없이 퇴장까지 할 수 있는 강력한 권한이 심판에게 있다.하지만 심판 판정에 오류가 많다는 사실이 누적되면서 스포츠에 과학기술이 접목되기 시작했다. 수년 전부터 축구와 야구 등 각종 스포츠에서는 앞다퉈 과학기술을 도입해 운용하고 있다. 심판의 권위보다는 “스포츠는 공정해야 한다”는 기본 명제가 더 중요시 되는 요즘이다.스포츠계에 과학기술이 도입되면서 망신을 당하는 심판들이 많아졌다.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가 대표적이다.MLB는 올 시즌부터 자동투구판정시스템(ABS)을 도입했다. ABS는 투수가 던진 공의 스트라이크와 볼 판정을 심판이 아닌 로봇이 하는 시스템이다. 한국프로야구(KBO)에서는 지난해부터 도입해 시행하고 있다.MLB의 시스템은 우리와 조금 다르다. 한국은 전적으로 ABS에 판정을 맡기지만, 미국은 ‘챌린지’ 형태로 운영된다. 기본 판정은 주심이 내리고, 양 팀이 경기 당 두 차례까지 판독을 요청할 수 있다. 판독이 신청되면 전광판에는 공의 궤적과 스트라이크존 통과 여부가 표시된다. 심판의 판정 정확성이 관중과 시청자에게 실시간으로 공개된다. 심판이 미세한 오차로 오심했다면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명백한 오심이 발생할 경우 즉각적인 비판이 쏟아진다. 3만~4만 관중 앞에서 심판이 망신당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망신도 망신이지만 ABS가 단순한 판정 보조 시스템을 넘어 심판 평가 장치로 활용될 수 있다는 시각이 나오면서 심판들이 긴장하고 있다. 심판들에게 부정적인 측면만 있는 건 아니다. 오심으로 경기 결과가 바뀌었다는 비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 보다 정확한 판정을 해야 한다는 각성의 계기가 마련된 측면도 있다.공정성이 뒷받침되지 않은 절대적인 권위가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바람직한 일이다.
논설주간/상무이사
강윤경
수석논설위원
김승일
논설위원
정달식
이상윤
김상훈
천영철
[김상훈의 포커스온] 레바논의 눈물
20여 년 전 찾았던 레바논 베이루트는 독특한 도시였다. 중동 국가지만, 미국 팝이 거리에서 자주 들렸다. 영어, 프랑스어, 아랍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젊은이들은 음악 리듬에 맞춰 거리에서 흥겹게 춤을 췄다. 노천 카페에서 여유로운 일상을 즐기는 모습은 서구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베이루트가 프랑스 식민 통치의 영향으로 한때 ‘중동의 파리’로 불린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반면, 전쟁으로 파괴된 건물이 방치되거나 중무장한 군인들이 경계를 서는 모습은 이질적이었다. 서구의 자유와 아랍의 절제, 문화의 융성과 전쟁의 피폐라는 상반된 풍경이 공존했다. 동지중해 연안에 있는 레바논은 페니키아 문명의 발상지로 동서양 문명을 잇는 가교 역할을 했다. 베이루트는 그리스, 로마, 비잔틴, 이슬람 등 지중해 주요 문명의 흔적이 혼재돼 있다. 비잔티움제국 시기(330~1453년) 이후 기독교를 믿던 레바논 사람들은 15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까지 오스만 제국의 지배 아래 놓이면서 무슬림으로 개종하는 이들이 늘었다. 이것이 오늘날 레바논이 종교적 다양성을 보이는 역사적 배경이다. 하지만 미국·이스라엘과 이란의 전쟁에 휩쓸리면서 ‘다문화 공존 국가’였던 레바논은 지금 ‘비극의 땅’이 됐다. 지난 7일 이란과 조건부 휴전에 합의한 이스라엘은 헤즈볼라 격퇴를 명분으로 걸고 레바논을 휴전 대상에서 제외했다. 미국은 공세 수위를 낮추라고 요구하는 상황이다. 지난달 초부터 이어진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레바논에선 헤즈볼라 대원과 민간인 등 80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보도가 나온다. 국제사회와 주변 아랍 국가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이스라엘의 레바논 공격이 지속될 경우 미국과 이란의 휴전 협상을 복잡하게 만들 공산이 크다. 이스라엘이 레바논 공습을 멈추지 않는 배경에는 친이란 시아파 무장 단체인 헤즈볼라를 타격해 안보 위협을 줄이겠다는 계산이 깔려 있다.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최대한 전선을 확대한다는 분석도 있다. 네타냐후 총리는 레바논과 이란에 대한 강경 대응을 토대로 이스라엘 보수 진영의 지지를 받아 왔다. 이를 바탕으로 자신이 장기간 이끌고 있는 극우 정권을 연장한다는 시각이 많다. 각종 부정부패와 비리 혐의로 이스라엘 수사 당국의 수사를 받아 온 그가 최대한 전시 상황을 이어가는 게 수사를 피하는 데도 유리하다는 전망이다. 그는 지난 12일(현지시간) 헤즈볼라와 대치하고 있는 레바논 남부 접경지대를 방문해 장병들을 격려했다. 그러면서 미·이란 종전 협상과 별개로 레바논에 대한 공격을 이어가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위기 상황에서 레바논의 대응은 무력하기만 하다. 이는 건국 과정부터 잉태된 비극이라는 평가가 적지 않다. 1943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할 때 지도자들은 기독교·이슬람을 아울러 18개 종파가 얽힌 권력 배분 방식을 놓고 타협했다. 그 결과 인구 등을 고려해 대통령은 기독교, 총리는 이슬람 수니파, 국회의장은 이슬람 시아파가 맡는 ‘삼두 체제’가 만들어졌다. 미리 갈등·분열의 여지를 없애고 국가의 화합과 발전을 도모하자는 게 취지였다. 그러나 이런 시스템은 되레 족쇄가 됐다. 주변 강대국 개입과 만성적인 정파 간 갈등을 초래하며 국정 혼란으로 이어진 것이다. 지정학적 환경과 정치 체계, 정부를 능가하는 헤즈볼라의 영향력까지 얽힌 레바논 상황에 근본적 변화가 없는 한 수난은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김재명 국제 분쟁 전문가는 저서 〈오늘의 세계 분쟁〉에서 “전쟁은 무한 폭력이 합법적으로 벌어지는 특수한 공간”이라고 했다. 그의 말처럼 전쟁의 광풍은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대고, 폭력의 희생양을 만들어낸다.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겁에 질린 채 구조를 기다리는 레바논 여인과 식량 배급을 받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어린이들의 모습이 그러하다. 전쟁은 장엄한 서사시나 위대한 영웅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처럼 민초들의 눈물과 고통, 피를 남긴다. 폐허가 된 절망 속에서도 이들은 힘겨운 일상을 이어가려고 한다. 레바논 사람들뿐만 아니라 전 세계인들이 미국·이스라엘과 이란 전쟁으로 고통받고 있다. 이스라엘이 헤즈볼라의 거점인 레바논 남부 빈트 즈베일을 사실상 점령했다는 소식도 나온다. 헤즈볼라 수장은 레바논 정부에 평화 협상 파기를 요구하고 있고 독자적으로 맞설 태세다. 강 대 강 대치 속에 레바논과 이스라엘은 14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에서 휴전을 위한 최고위급 회담을 갖는다. 이번 회담에서 이들은 지리한 전쟁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을까. “영구 평화는 무덤에서나 가능하다”는 독일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의 말이 이번에는 빗나갔으면 한다.
[홍순연의 도시 공감] 시장이 살아야 도시가 산다
지난 주말 오랜만에 경남 통영을 찾았다. ‘푸드 스케이프’라는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오전 8시에 도착한 서호시장에서 붕장어가 들어간 김치찌개를 먹었다. 낯선 음식이지만 생선이 들어간 시원한 국물 덕분에 밥 한 그릇을 금세 비웠다. 후식은 시장 끝 리어카 커피집에서 먹은 설탕이 들어간 달달한 커피 한 잔이었다. 통영과 시장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달콤한 커피를 마시는데 옆에 앉아있던 주민이 불쑥 “통영이 옛날 통영이 아닙니다. 사람이 없어요, 그러니 돈이 안 돌아요”라고 한탄 섞인 말씀을 하셨다. 이 주민은 “그럼에도 시장은 관광객들로 붐비고 줄 서는 맛집들은 몇 시간 지나지 않아 마감을 한다”고 덧붙였다. 시장을 걸으며 통영 식생활에 대한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통영 음식의 맛을 내려면 재료를 아낌없이 넣어야 한다고 한다. 그것을 대변하는 것은 시장 떡집에서 본 진달래 밀키트였다. 진달래와 쑥을 듬뿍 넣어 찹쌀과 버무린 뒤 지져서 먹는 음식이었다. 설탕을 듬뿍 쳐서 먹어야 더 맛있다는 ‘푸드 스케이프’ 안내자의 말을 들으며 음식 실물을 직접 보니 통영의 푸짐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이후 인근 동네 공유주방에서 어육장을 담그고 멸치 시락국, 조갯살에 무친 방풍나물 무침을 함께 만들어 먹으며 프로그램을 마무리했다. 어육장을 가르쳐 준 강사는 “음식은 맛있어야 한다. 그리고 시대에 따라 음식도 쉽게, 현실에 맞게 만들어야 한다”라고 했는데 무척 인상 깊었다. 과거 시장은 물건과 사람이 모이고 돈과 정보가 교환되는 지역의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인 중심지였다. 생필품을 거래하는 경제적 기능 외에도, 전국 각지의 소식을 접하고 정보를 공유하는 소통 창구였다. 그리고 자영업자와 지역 생산자를 연결하며 지역 내부를 순환시키는 경제 생태계의 핵심이 되는 곳이다. 더불어 사회문화적 커뮤니티와 장소를 제공하여 지역민의 유대감을 형성하는 곳이기도 했다. 덤, 흥정, 단골 문화 등으로 상징되는 한국 특유의 ‘정(情)’과 인간적인 거래가 이루어지는 문화적 공간이 바로 시장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주차 공간 부족, 불편한 동선, 냉난방에 취약한 구조 등의 문제로 시설은 더욱 노후화되고 있다. 더욱이 대형마트, 기업형 슈퍼마켓, 이커머스의 성장 때문에 시장의 전통적인 유통 방식은 소비자들에게 외면받고 있다. 그리고 현대 소비자가 원하는 품질 보증 및 신뢰 중심 서비스의 상대적 미흡과 상인 고령화 등으로 시장은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그나마 관광객들의 수요가 있는 일부 시장들은 맛집, 볼거리를 제공함으로써 집객 효과를 거두고 있으나 대부분의 시장들은 침체 터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시장의 침체는 도시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기존 도시의 중심지에 위치하고 있어 시장이 쇠퇴하면 주변 상권과 주거지까지 함께 슬럼화된다. 도시 전체의 활력이 없어지는 연쇄 작용이 발생하는 것이다. 시장에 활력을 불어넣을 다양한 방법이 필요하다. 사실 시장은 그 도시만의 역사와 문화를 담고 있는 유일무이한 콘텐츠이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산타 카테리나 시장은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 낙후된 시설을 리모델링하여 지역을 재생시킨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시장에서 판매하는 농산물과 수산물 색상을 상징하는 67가지 색상의 육각형 타일 32만 5000개로 화려한 지붕을 만들어 상징성을 부여하였다. 외형뿐만 아니라 단순한 전통시장을 넘어 지역 주민과 상생하는 복합 커뮤니티 거점으로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운영되고 있다. 시장 부지 내에 노인 전용 공공 주택을 통합 운영하여 주민들의 생활 지원 및 돌봄이 이루어지는 역할도 수행하고 있다. 그리고 시장 내에 박물관을 운영하여 바르셀로나의 도시 역사를 교육하는 장소로도 활용되고 있다. 특히 통영과 같이 시장의 신선한 식재료를 활용한 다양한 미식 투어와 쿠킹 클래스를 운영하고 있다. 그 외 바르셀로나 전통시장 중 최초로 디지털 전환과 환경 보호를 결합한 주민 편의 프로그램을 운영하여 지역 주민의 이용률을 높이는 동시에 시장 내부에 현대적 폐기물 수집 및 처리 센터를 설치, 환경 보호에도 기여하고 있다. 산타 카테리나 시장은 주거, 교육, 복지가 결합된 커뮤니티 허브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시장의 장소적 강점을 살려 사람들이 모이는 ‘앵커 시설’로 재탄생시킨다면 도시의 문제를 해결하는 창구의 역할이 가능해진다. 시장들이 디지털 배송 시스템을 갖추고 문화·복지 시설과 결합된 근거리 생활권의 핵심 장소, 지역 커뮤니티들의 교류를 제공하는 일명 ‘도시의 거실’로 재탄생되었으면 한다. 이를 통해 시장 발 도시 활력 프로젝트가 시작되었으면 한다. 부산 지역 또한 현재 189곳의 전통시장이 있다. 부산의 각 지역 중심부에 위치한 시장들의 다양한 변화를 기대한다.
[데스크 칼럼] 20년 묵은 부산 야구장 신축 논의
벌써 20년이다. ‘구도 부산’에 새 야구장을 짓자는 논의가 정치권에서 등장한 기간이다. 그동안 부산시장은 4명이나 바뀌었지만, 부산 야구장 신축 공사는 착공은 커녕 첫 삽조차 뜨지 못했다. 부산 정치권의 야구장 신축 논의가 지지부진한 사이, 그동안 한국에는 6개 구장이 새로 지어졌다. 새 구장이 들어선 지역에서도 지방선거가 치러졌다. 그 지자체와 부산이 달랐던 건 공약이 아니라 실행 여부였다. 부산에서 야구장을 새로 짓자는 논의가 처음 시작된 것은 2006년이다. 당시 한나라당 부산시장 후보 경선에 나선 고 권철현 국회의원이 북항 재개발 지역에 해변 야구장을 짓자는 공약을 세운 것이다. 당시 북항 야구장 추진은 권 의원이 당내 경선에서 탈락하며 소문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1985년 개장한 사직야구장을 재건축하자는 제안이 2010년에 본격화됐다. 당시 3선 부산시장이 된 허남식 시장이 사직야구장을 돔구장으로 짓겠다고 언급했다. 허 시장은 여러차례 돔구장을 언급했지만 구체적인 행정 추진은 없었다. 비슷한 시기 풍산그룹이 해운대구 반여동 해운대사업장에 돔구장을 짓겠다며 기본 설계까지 진행했지만,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지지부진하던 야구장 신축 사업에 다시 불이 붙은 것은 2015년 서병수 시장 때다. 서 시장은 롯데 자이언츠 구단주 신동빈 롯데 회장과 만나 북항 야구장을 짓기로 했다. 부산시와 롯데그룹 간 실무진 협의도 진행됐다. 이듬해인 2018년 부산시는 사직야구장 부지에 개폐형 돔구장을 짓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하지만 계획 발표 3개월 뒤 서 시장이 부산시장 선거에서 낙선하며 야구장 신축은 동력을 잃었다. 새롭게 부산시장이 된 오거돈 시장은 서 시장의 사직구장 돔구장 계획을 전면 백지화했다. 대신 북항에 개방형 야구장을 짓는 것으로 계획을 변경했다. 하지만 오 시장은 시장 취임 이듬해에 야구장 신축 사업을 원점에서 재검토하기로 했다. 야구장 사업이 재검토에 들어간 사이, 최종 결정권자인 오 시장은 개인의 성추행 사태로 부산시청을 떠났다. 2021년 부산시장이 된 박형준 부산시장은 다시 사직야구장을 돔구장이 아닌 개방형 야구장으로 짓기로 방향을 정했다. 박 시장은 두 번째 도전 만에 정부 공모사업을 통해 국비를 확보했고, 사직야구장을 대체할 구장까지 지정했다. 야구장 신축 논의가 진행된 이후 가장 진전된 모습이었다. 이런 사이 부산은 오는 6월 또 지방선거를 앞두고 있다. 이번 부산시장 선거에 나선 두 후보는 모두 북항 야구장 신축을 주요 공약으로 내세웠다. 박형준 현 시장은 북항 야구장 신축에 부정적이지만 최근 입장을 바꿨다. 북항에 야구장을 짓고 프로야구단까지 유치하겠다는 공약을 세웠다. 전재수 의원은 자신이 대표 발의한 항만공사법 개정안을 바탕으로 북항 돔구장 건설을 추진하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20년째 이어진 부산 야구장 신축 논의의 흐름을 정리해본다. 역대 부산시장들은 ‘노후 문제 제기→지방 선거 공약 발표→당선 후 용역→재원 마련·롯데 구단 협의 난항→시장 교체 후 무산’의 패턴을 반복했다. 20년간 지방선거는 부산 야구장 신축 계획을 일으킨 기폭제이기도, 계획을 뒤엎는 시발점이기도 했다. 부산시장 선거에서 북항 야구장, 돔구장, 사직야구장 재건축 등은 당시 부산시장으로 나선 여야 후보들의 선거 공약 중 대표 공약이었다. 하지만 2026년 오늘의 모습은 냉혹하다. 이미 사용 중인 6개 야구장은 차치한다. 서울 잠실야구장은 올 시즌을 끝으로 철거돼 2032년 돔구장으로 바뀐다. 인천은 2028년 시즌부터 지금 한창 공사 중인 새 돔구장에서 경기를 시작한다. 부산은 신축 야구장이 없는 유일한 프로야구 도시가 된다. 20년이라는 긴 세월이 말해준다. 부산의 야구장 신축 문제는 어느 한 시장의 의지나 공약 하나로 해결될 사안이 아니다. 야구장 신축은 재원 조달, 구단과의 협의, 사업 구조 설계까지 풀어야 할 복잡한 프로젝트다. 물론 새 야구장을 바라는 부산 시민의 열망은 이어져야 한다. 하지만 야구장 공약 하나로 다가오는 차기 부산시장 선거에서 후보를 결정해서는 안 된다. 부산은 지금 해양수도로의 도약이라는 거대한 과제 앞에 있다. 북항 재개발, 인구 감소, 부울경 메가시티, 가덕신공항 건설. 차기 부산시장이 풀어야 할 과제는 이미 차고 넘친다. 야구장은 그 큰 그림 안에서 함께 풀어야 할 하나의 퍼즐일 뿐이다. 지난 20년, 야구장 공약이 선거를 달굴수록 실현은 오히려 더 멀어졌다. 유권자들이 더 집중하고 살펴야 할 것은 공약의 화려함이 아니라, 후보의 실천 역량이다.
[노트북 단상] 황금어장과 해상풍력 공존의 길
지난 2일 오전 11시 경남 통영시립박물관 1층 세미나실. 모처럼 비린내 나는 작업복을 벗고 말끔하게 차려입은 어민 100여 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통영해상풍력어업인대책위원회가 한 민간 해상풍력사업자와 상생 협약을 체결하려 마련한 자리다. 대책위는 해상풍력을 둘러싼 사업자와 어민 간 갈등 속에서 지역 어업인 권익을 보호하려 통영 연안어선 종사자 700여 명이 뭉쳐 작년 9월 공식 출범한 단체다. 이후 어민들을 대표해 사업자와 협의를 진행해 왔고 꼬박 반년 만에 결실을 맺었다. 협약서에는 △사업 추진 전 과정 지속적 정보 공유·협의 △어업인 참여 기반 상생·보상·이익공유 방안 검토 △실무협의체 구성·운영에 상호 협력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어민들 입장에 해상풍력은 삶의 터전을 빼앗는 경계의 대상이었다. 대규모 풍력발전단지 건설과 가동이 유발할 소음과 진동, 전자파 등으로 바다 생태계가 심각하게 훼손돼 어장도 초토화될 게 뻔하다는 이유였다. 게다가 하필 그 중심에 통영 욕지도가 있었다. 통상 해상풍력은 수심 20~50m에 평균 풍속이 초속 6m를 넘어야 사업성이 확보되는데, 동·서·남해안을 통틀어 이런 환경적 요건을 충족하는 몇 안 되는 해역 중 하나가 바로 욕지도 주변인 탓이다. 현재 욕지도를 중심으로 발전사업 허가를 받았거나 추진 중인 대형 프로젝트만 4건이다. 총계획 면적은 146㎢, 축구장 2만 3000여 개를 합친 크기다. 이곳에 에펠탑 높이 구조물 130기 이상을 세운다. 문제는 이 일대가 경남 어민에게 마지막 남은 황금어장이라는 점이다. 각종 어류 서식·산란장이자 난류를 따라 회유하는 멸치 떼와 이를 먹이로 하는 각종 포식 어류가 유입되는 길목으로 전국 최고 수준의 조업 밀도를 보인다. 이 때문에 2021년 12월 고시된 ‘경남해양공간 관리계획’에선 ‘어업활동 보호구역’으로 지정됐다. 제대로 뿔난 어민들은 사업 백지화를 요구하며 대규모 궐기대회와 해상 시위로 맞섰다. 어민들 반발에 대다수 프로젝트는 가다 서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정부의 신재생 에너지 장려 정책 기조와 어수선한 정치 상황 등으로 어민들 요구는 좀처럼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대로는 끝이 없다고 판단한 어민들은 결국 타협에 나섰다. 2024년 4월 ‘남해군해상풍력발전대책위원회’가 처음 민간사업자와 손잡은 이후 꼬박 2년 만에 통영대책위도 협상테이블에 앉기로 한 것이다. 10년 넘게 갈등을 겪어온 양 측이 손을 맞잡을 기회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일단은 긍정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대책위는 실질적인 협력 구조를 통해 해법을 모색해 나가는 출발점이라는 의미를 부여했다. 하지만 기대만큼이나 우려도 적지 않다. 해상풍력에 대한 반감 역시 여전한 데다, 사업 추진에 따른 생태계 교란과 어업 피해를 외면할 수 없는 현실에 섣부른 속도전은 또 다른 어민 간 갈등을 부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여기에 이번 협약이 난개발을 부추기는 수단이나 면죄부가 될 수 있다는 우려도 상당하다. 대책위 김종찬 위원장도 이를 의식한 듯 “이번 협약을 장애물 걷어내는 수단으로 삼지 말고, 진정성을 갖고 대화에 임해달라”고 당부했다. 갈등을 넘어 공존을 택한 어민들 선택이 결코 틀리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중앙로365] 블록체인 도시 부산, 이제 '돈 되는 구조'가 필요하다
부산은 국내에서 가장 먼저 블록체인을 정책으로 끌어올린 도시다. 규제자유특구 지정 이후 물류, 관광, 공공안전, 금융, 의료 등 다양한 분야에서 실증 사업이 이어졌고, b-space와 기술혁신지원센터 같은 공간도 갖춰졌다. 제도, 예산, 시설 모두 준비됐다. 형식적으로는 인프라가 완비된 상태에 가깝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긴다. 블록체인 기업은 왜 부산으로 오지 않는가. 인프라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 눈에 보이는 공간과 시설, 특구 지정이나 규제 완화 같은 제도, 그리고 기업이 실제로 돈을 벌 수 있는 사업 구조다. 부산은 앞의 두 가지는 갖추었다. 하지만 세 번째가 없다. 고객이 있고 거래가 반복되며 수익이 쌓이는 생태계, ‘여기서 사업하면 돈이 된다’는 확신을 갖게 하는 구조 말이다. 기업은 공간이 아니라 기회를 따라 이동한다. 지난 몇 년간의 실증사업들은 분명 의미가 있었다. 관광 통합 플랫폼, 공공안전 영상 제보 시스템, 디지털 바우처, 의료 데이터 활용 사업은 블록체인이 실제 서비스에 적용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가능성을 증명한 PoC(개념검증)는 많았지만, 수익을 증명한 사례는 과연 얼마나 되는가. 실증 이후 민간 고객이 붙었는가. 부산이 아니면 안 되는 사업이 만들어졌는가. 이 질문들 앞에서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구조적 문제는 더 있다. 특구 사업에 참여한 기업 중 상당수가 부산에 본사를 두지 않는다. 참여는 했지만 정착으로 이어지지 않은 것이다. 특구의 성과가 지역 경제에 얼마나 뿌리내리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하는 지점이다. 이제는 접근 방식 자체를 바꿔야 한다. 블록체인 실증 자체를 목적으로 사업을 설계한 결과, 실증을 수행한 기업에는 도움이 됐지만 부산 블록체인 특구에는 별다른 변화가 남지 않은 것은 아닌지 돌아볼 때다. 블록체인 기업을 유치하는 데 집중하기보다, 부산이 이미 강점을 가진 산업에서 블록체인이 진짜 필요한 곳을 먼저 찾는 것이다. 기술이 산업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산업이 기술을 불러오는 구조가 되어야 한다. 가장 먼저 떠올려야 할 산업은 커피다. 국내 커피 수입의 대부분이 부산항을 거친다. 그런데 부가가치는 수도권에서 만들어진다. 콜롬비아, 과테말라, 온두라스 농장을 떠난 커피가 부산 창고에 도착하기까지 물류는 이미 실시간으로 추적된다. 그런데 정작 대금 정산은 여러 나라의 은행을 거치며 수일이 걸리고, 수수료가 쌓이며 거래 위험도 남는다. 화물은 도착했는데 돈은 아직 은행 어딘가에 묶여 있는 구조다. 블록체인 스마트 계약을 활용하면 선적이 확인되는 순간 대금 일부가 자동 지급되고, 화물이 부산항에 도착하면 나머지가 즉시 정산된다. 부산이 커피의 관문에서 무역 금융 정산의 플랫폼으로 올라서는 순간, 데이터 흐름을 쥔 도시가 돈의 흐름도 쥔다. 부산의 또 다른 핵심 산업인 수산도 블록체인이 절실한 분야다. 부산은 국내 수산업의 중심 도시로, AI를 접목한 스마트 양식 빅데이터 센터를 추진 중이다. 그런데 양식장이 스마트해질수록 보안 위협도 함께 커진다. AI가 사료 공급과 수온·산소 관리를 자동화할수록, 해커가 시스템에 침투해 이를 조작하면 어류가 집단 폐사할 수 있다. 단순한 경제적 손실이 아니라 어족 자원 고갈과 식량 안보 위협으로 이어지는 문제다. 부산시가 추진 중인 AI 데이터 센터도 마찬가지다. 대규모 데이터 인프라일수록 사이버 공격 표적이 되기 쉽다. 블록체인 기반 분산 보안 구조는 단일 장애 지점을 없애고 데이터 무결성을 보장하는 유효한 대안이 된다. 생산부터 수출까지의 이력을 검증 가능한 형태로 연결하면, 부산 수산업은 단순 이력 관리를 넘어 신뢰를 수출하는 산업이 될 수 있다. 항만은 이미 블록체인 도입이 진행 중인 영역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개별 서비스가 아니라 선사·터미널·통관·보험·정산을 하나로 묶는 데이터 연합 구조다. 부산항이 물류 거점을 넘어 신뢰 데이터의 거점이 될 때, 기업이 부산에 와야 할 이유가 비로소 생긴다. 정책의 성과를 측정하는 기준도 바뀌어야 한다. 몇 건의 실증을 완료했는지가 아니라, 반복되는 매출이 얼마나 생겼는지, 부산에 정착한 기업이 몇 곳인지를 봐야 한다. 블록체인 특구, 디지털금융 정책, 스타트업 투자 및 육성, AI·데이터 인프라 사업이 각자 따로 움직이면 산업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부산은 블록체인을 위한 도시를 만드는 데는 성공했다. 이제 넘어야 할 단계는 하나다. 블록체인이 필요한 도시를 만드는 것. 실증 성과를 산업 성과로 전환하는 것, 그것이 지금 부산 블록체인 특구 앞에 놓인 진짜 숙제다. 부산이 블록체인을 ‘도입한 도시’를 넘어 ‘주도하는 도시’로 갈 수 있을지는, 바로 이 전환에 달려 있다.
[편집국에서] HMM, 자부심만큼 책임감 새기길
“해수부 이전, 해사법원 설치에 이어 동남권투자공사 설립은 물론 HMM 이전도 곧 합니다. 한다면 합니다! 대한민국은 합니다!” 지난 2월 중순 대통령이 SNS에 게시했던 약속들이 부산에서 하나씩 현실이 되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국내 최대 국적 해운사인 HMM의 본사 부산 이전이 가시권에 들어오는 모습이다. HMM 이사회는 지난달 26일 열린 정기 주주총회에서 서울 여의도에 위치한 본사의 부산 이전을 위한 정관 변경 안건을 전격적으로 처리했다. 이는 부산지역 학계 인사와 산업은행 출신 인사를 사외이사로 선임한 지 나흘 만에 이뤄진 것으로, 본사 부산 이전을 위한 HMM 사측의 의지가 읽힌다. 다음달로 예정된 임시 주주총회에서는 이 안건에 대한 확정 여부가 정해지는데, 사실상 HMM 본사 부산 이전을 위한 마지막 절차가 될 전망이다. 이에 발맞춰 해양수산부도 지난 8일 HMM 등 해운기업의 부산 이전을 지원하기 위한 ‘이전기업 지원 협의체(TF)’ 첫 회의를 열었다. 이전 논의 주체인 HMM을 비롯해 해수부, 부산시, 한국해양진흥공사가 처음으로 얼굴을 맞대고 앉았다. 해수부는 HMM의 건의 사항에 대해 ‘부산해양수도 이전기관 지원에 관한 특별법’ 등 관계 법령에 따른 국가·지자체의 지원 범위와 방안 등을 중점적으로 논의했다고 밝혔다. 특별법은 지난해 해수부 이전 때와 마찬가지로 산하 공공기관과 부산 해양수도 조성을 위해 부산으로 이전하는 기업에 대해서도 이전 비용 지원과 융자, 공공택지 우선 공급, 건축물 분양·임대 및 국유재산·공유재산의 임대료 감면 등의 지원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근거를 두고 있다. 정주환경에 큰 변화를 겪어야 하는 직원들을 위해 주거 안정, 자녀 교육, 생활여건 개선 등을 지원하는 것도 포함된다. 지난해 말 본사 부산 이전을 발표한 에이치라인과 SK해운을 비롯해 국내 최대 국적선사인 HMM이 적용을 받을 수 있는 대목이다. 이참에 HMM에 대해 좀더 알아보자. 1976년 설립된 HMM, 옛 현대상선은 올해 50주년을 맞았다. 1900여 명의 직원이 근무 중이며, 이 가운데 육상 직원이 1057명으로 해상 직원(893명)보다 많다. 공식 홈페이지에 실린 50년사에는 기업의 역사부터 비전과 CI 변천, 조직도, 경영진, 선박 및 선복량, 재무제표와 연표까지 상세하게 담겨 있다. 3척의 유조선을 가진 아세아상선으로 시작해 1983년 현대상선으로 바뀌었다가, 2019년에 Hyundai Merchant Marine을 줄인 HMM으로 CI를 변경했다. 1999년 현대부산감만터미널을 개장하고, 당시로서는 세계 최대이자 최고 속도였던 6500TEU급 컨테이너선 5척을 신규 발주하며 대형 선사로의 도약에 나섰다. 2000년대 초반, 당시 현대상선의 컨테이너 선복량은 14만TEU 규모였으나 2025년 HMM은 세계에서 8번째로 선복량 100만TEU를 넘어섰다. 또한 2025년 말 기준 12척의 2만4000TEU급 컨테이너선 등 94척의 컨선과 51척의 벌크선 총 145척을 보유한 글로벌 8위 선사로 성장했다. 하지만 HMM의 눈부신 성장의 뒤에는 국가적 지원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글로벌 해운 불황이 정점에 이르며 국내외 해운산업 전반에 구조적 위기가 폭발했던 2016년, 한때 대한민국 대표 선사였던 한진해운이 파산했다. 한진해운에 뒤처졌던 HMM 또한 2013년 말부터 유동성 위기를 겪었지만, 한진해운 파산 후폭풍으로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의 해운업의 근간이 흔들리자 7조 원의 공적자금을 수혈받고 파산 위기를 넘겼다. 국가 해운 재건 프로젝트에 의해서 다시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 HMM은 현대그룹에서 분리됐고 최대주주가 산업은행(36.2%), 2대 주주가 한국해양진흥공사(35.67%) 등으로 변경됐다. 물론 용선료 부담과 운임 급락, 과도한 부채로 인해 직면한 심각한 유동성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HMM 직원들이 장기간 선대 감축과 인력 구조조정, 대규모 용선 계약 조정 등 생존을 위해 강도 높은 자구 노력을 해온 것 또한 사실이다. 지난주 HMM 육상노조 위원장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공공기관이 아닌 사기업에 대해 사측이 본사 부산 이전을 강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데, 이는 정치적 논리로 결정해선 안 되는 사안”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해운업은 국가기간산업이고, HMM은 10년 전 국민 세금이 들어간 공적자금으로 위기를 넘어서지 않았나. 막대한 액수의 공적자금에는 HMM이 기업 가치에 걸맞은 사회적 역할을 담당해 주길 바라는 국민적 염원이 들어가 있다. 정부가 수도권 일극주의 타파를 위해 추진하려는 국가균형발전이라는 대의에 HMM이 함께하는 것은 이 같은 염원에 부응하는 공적 책임이라 할 수 있다. 대한민국 해운산업을 이끄는 1등 선사라는 자부심만큼 HMM 노사 모두 그 책임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자세를 보여주길 바란다. 김경희 해양수산부장 mis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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