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커피 도시 부산, 생산·유통 중심 산업으로 키우자
부산은 국내 대표적인 커피 도시다. 수입 생두 90% 이상이 부산항을 통해 들어온다. 1만 개가 넘는 카페, 다양한 커피 축제, 관광 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커피 산업을 매개로 도시 경쟁력을 강화할 인프라를 충분히 갖춘 셈이다. 〈부산일보〉가 15일 개최한 ‘커넥트 커피 부산 2026’은 부산이 커피 소비 도시를 넘어 산업 도시로의 확장 가능성을 모색한 장이었다. 후안 루이스 전 스페셜티커피협회 이사장의 기조 강연을 비롯해 2개 세션을 통해 커피 산업 밸류체인 구축과 글로벌 협력, 로컬 브랜드 성장, 커피를 통한 도시 문화 재편 전략 등이 다뤄졌다. 글로벌 커피 도시의 잠재력을 알리고 유통·브랜드·교육·기술을 아우르는 비전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전문가들은 부산의 강점인 물류 인프라가 아직 커피 산업으로 연결되지 못한 상태라고 진단했다. 생두가 부산항에 들어오지만, 그중 80% 이상이 수도권으로 이동해 로스팅된 뒤 다시 부산으로 유통된다. 보관 중심 구조에 머물러 고부가가치 창출 기회가 외부로 유출되는 구조다. 원두 수입, 물류, 가공, 유통 단계가 기업별·산업별로 분절돼 시너지 효과를 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커피가 도착하는 도시일 뿐 커피의 가치가 시작되는 도시가 아닌 셈이다. 커피 산업은 생두 수입, 저장과 보관, 가공, 물류와 유통, 브랜드, 소비까지 이어지는 전형적인 연결 산업이다. 커피 연관 산업 밸류체인을 지역에 구축하는 것이 급선무다. 첫 번째 세션 ‘커피도시 부산, 밸류체인으로 여는 미래’에서 제시된 글로벌 사례는 부산이 나아갈 방향을 명확히 보여줬다. 두바이의 DMCC는 단순한 물류 거점이 아니라 거래와 가공, 금융과 교육까지 결합된 하나의 커피 산업 생태계를 만들고 있다. 벨기에의 앤트워프 역시 단순한 항만이 아니라 커피의 품질과 가격, 유통이 결정되는 산업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부산도 두 도시처럼 산업적 확장을 위해 거래·가공·금융이 결합된 산업 클러스터를 만들고, 대규모 저장과 유통 기능을 기반으로 시장을 움직이는 커피 허브로 발전해야 한다는 지적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부산에는 우수한 로컬 커피 브랜드도 있고 경쟁력 있는 프랜차이즈가 많다. 단순히 좋은 브랜드가 있는 도시를 넘어 생산·유통 중심 산업을 지닌 도시로 나아가야 한다. 커피 산업 육성의 정책 방향을 단순 지원 확대가 아닌 산업구조 재설계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 것이다. 부산은 생두의 생산과 물류 과정을 추적하는 블록체인 기반 플랫폼을 이미 구축한 상태다. 나아가 로스터리, 브랜드, 데이터 기업 등 고부가가치 영역을 전략적으로 육성해 산업의 질적 수준을 높여야 한다. 글로벌 앵커기업 유치, 규제 완화, 산업 간 융합 구조 구축을 통해 클러스터를 만들 필요가 있다. 그것이 부산이 글로벌 커피 산업을 연결하는 핵심 플랫폼으로 성장하는 길이다.
[사설] 부울경 맞춤형 '메가특구' 유치 전략 필요하다
정부가 대규모 지역 단위 규제특구인 ‘메가특구’ 조성을 공식화했다. 15일 청와대에서 열린 규제합리화위원회 제1차 전체회의에서 이재명 대통령은 국가균형성장 전략인 ‘5극3특’과 연계해 로봇, 재생에너지, 바이오, AI자율주행차 등 4대 분야를 중심으로 광역·초광역권 메가특구를 조성하기로 했다. 정부는 이를 핵심 성장거점으로 삼아 선도기업과 인재를 유치하고 지역 특화산업을 집적해 지역경제 활성화와 국가전략산업 육성을 동시에 이루겠다는 구상이다. 기존의 제한 중심 규제를 허용 중심으로 전환해 산업 성장의 속도를 높이겠다는 것이다. 이번 구상은 규제개혁을 성장 전략의 핵심 수단으로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 이번 정책의 핵심은 규제 방식의 전환이다. 이날 이 대통령은 “기존의 포지티브 규제에서 벗어나 금지된 것만 제외하고 허용하는 네거티브 규제로 전환하라”고 주문했다. 자율주행 실증을 도시 전체로 확대하고 무인 소방로봇의 도로 통행을 허용하는 방안은 이러한 변화의 단면이다. 그동안 현장에서는 새로운 사업을 시도할 때마다 허가와 규정 변경을 기다리다 경쟁력을 잃는 일이 반복돼 왔다. 수도권 집중이 자원 배분의 비효율과 국가 경쟁력 저하로 이어지고 있다는 진단도 나왔다. 특히 부산을 비롯한 비수도권 대도시가 인구 유출과 산업 기반 약화라는 이중고를 겪는 상황에서 이번 발언은 규제의 문을 열어 지역에 활력을 불어넣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정부가 제시한 메가특구 모델은 기존 특구 정책과 결을 달리한다. 로봇, 바이오 등 4대 분야를 중심으로 ‘메뉴판식 규제특례’ ‘수요응답형 규제유예’ ‘업그레이드 규제샌드박스’를 결합했다. 기업과 지방정부가 필요한 규제완화를 선택하거나 요청하면 심의를 거쳐 즉시 적용하는 방식이다. 여기에 재정·세제·인재·연구개발(R&D)을 묶은 7대 정책 패키지와 1조 원 규모 메가펀드도 더해졌다. 자율주행차 임시운행 권한의 지방 이양, 데이터 활용 확대 등은 산업 현장의 요구를 반영한 조치다. 특히 창업기업 행정서류를 줄이고 행정조사를 정비하겠다는 계획은 실질적 규제개혁을 겨냥한다. 단편적 규제개혁을 묶어 지역 혁신과 연결하려는 시도로 평가된다. 관건은 이러한 정책이 지역 현장에서 얼마나 현실화되느냐다. 메가특구는 기업과 지자체가 계획을 수립해 신청하면 위원회 심의를 거쳐 지정되는 구조로 권역 간 경쟁이 불가피하다. 수도권은 물론 각 지방이 전략 산업을 앞세워 유치전에 뛰어들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부울경 역시 경쟁의 중심에 설 수밖에 없다. 동남권은 조선, 자동차, 우주항공 등 기존 산업 기반을 갖추고 있지만 이를 로봇, 바이오, AI자율주행차 등과 어떻게 결합하느냐에 따라 성패가 갈릴 전망이다. 결국 부울경의 위치는 지금의 준비와 선택에 달려 있다. 메가특구가 지역경제를 살릴 성장 거점이 될지, 또 하나의 정책 실험에 그칠지는 각 지역의 전략에 달렸다.
[사설] 메가시티 vs 행정통합, 실익과 실현 가능성 잘 따져야
부산·울산·경남이 한데 뭉쳐야 한다는 주장은 오래전부터 제기돼 왔다. 망국적인 수도권 일극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재명 정부가 광역 행정통합을 추진하기 전부터 제기돼 온 필요성이다. 그 필요성에 의해 2020년 전후로 추진됐던 게 부울경 메가시티 조성 계획이었으나 광역 지자체장 교체 이후 2022년 백지화하고 말았다. 그랬던 메가시티가 이번 지방선거를 앞두고 되살아나고 있다. 부울경 여권 후보들의 입을 통해서다. 반면 야권에서는 정부 주도 추진에 반발하며 미뤘던 행정통합안을 들고 나왔다. 야권이 특별법까지 발의하고 나섰기에 지방선거 기간 내도록 여야의 치열한 경쟁은 불가피할 전망이다. 더불어민주당 부울경 시도지사 후보들은 14일 ‘해양수도 메가시티’를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함께 밝혔다. 해양수도라는 명칭이 새로 붙었지만 대체적인 얼개는 2020년 전후 추진된 메가시티 조성 계획과 유사하다는 평가다. 여권이 밀어붙인 행정통합이 부울경에서 무산된 뒤 3개 지자체장만 합의하면 당장 가동할 수 있는 방안을 들고 나왔다는 점에서 성사 속도를 최우선시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대규모 인센티브를 걸고 특별법에 의해 추진된 행정통합에 비해 정부의 재정 지원은 약할 수밖에 없다. 3개 지자체가 합의해야 사업 진행이 가능한 점 등 강제력에도 한계가 뚜렷해 옥상옥만 만들게 된다는 비판도 나온다. 박형준 부산시장과 박완수 경남도지사는 같은 날 ‘경남·부산행정통합 특별법’을 발의하고 나섰다. 자치법규의 범위를 확대하고 매년 8조 원 상당의 자주재원을 확보하는 방안과 가덕신공항 관리위원회 설치 등의 내용이 담긴 것으로 알려진다. 하지만 현재 75%와 25%인 국세와 지방세 비율을 각각 60%와 40%로 조정하는 재정 분권안 등 정부 권한의 대폭 이양을 요구하는 내용도 담겨 있어 논란이 예상된다. 지나치게 파격적인 권한 이양을 요구하는 조항이 줄줄이 명시돼 실제 법제화 가능성이 낮은 게 아니냐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정부 주도 행정통합 거부로 난처해진 두 지자체장의 선거 전략이라는 해석도 있다. 여야가 같은 날 동시에 들고 나온 메가시티와 행정통합 방안은 실익과 실현 가능성 측면에서 반비례 관계를 보여 준다. 실익이 크면 실현 가능성이 낮거나 실현 가능성이 크면 실익이 적다고 할 수 있다. 여야의 방안 모두 선거용 전략에 불과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금세 뒤따르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야가 내놓은 방안은 동남권에 큰 의미를 지닌다. 이번처럼 본격적으로 여야 모두 동남권을 어떻게든 한데 뭉치려는 시도를 한 것은 처음이어서다. 모처럼 선거 앞에 의미 있는 지역 이슈가 던져진 마당이라면 선거 기간 동안 실익과 실현 가능성을 제대로 따져 동남권 미래 전략을 현실화해야 마땅할 것이다.
[밀물썰물] 평화가 손실인 사람들
기원전 1세기 로마에는 누군가의 집에 불길이 치솟으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사내가 있었다. 로마 최고의 부자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다. 그는 노예 500여 명으로 꾸린 사설 소방대를 거느렸으나, 화재 진압비를 미리 낸 사람의 불길만 잡았다. 그렇지 않은 이의 집은 팔짱 낀 채 지켜만 봤다.한술 더 떠, 발을 동동 구르는 집주인에게 크라수스는 흥정을 걸었다. 집을 헐값에 넘기면 그제야 물을 뿌렸고 버티면 내버려뒀다. 잿더미가 된 부지는 시세보다 싸게 사들여 새 집을 올린 뒤 세를 놓았다. 집터를 팔지 않고 제 손으로 집을 다시 짓겠다는 이에게는 비싼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줬다. 로마 시대 역사가인 플루타르코스는 저서에서 크라수스의 이런 방식을 ‘타인의 재난으로 배를 채우는 탐욕’이라 꾸짖었다.미국과 이스라엘이 지난 2월 28일 이란을 공습한 이후 중동의 포성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다. 휴전을 놓고 정치적 줄다리기가 계속되는 사이 인명 피해는 불어난다. 이란 법의학청은 지난 12일(현지 시간) 수습한 시신 3375구의 신원 확인을 마쳤다고 밝혔다. 이 가운데 어린이를 포함한 18세 이하 미성년자만 383명이다. 미처 수습하지 못한 시신과 레바논 등 인접국 피해까지 고려하면 최소한의 수치다.그사이 지구 반대편에서는 ‘쩐의 전쟁’이 벌어진다. 세계 최대 예측시장 플랫폼 ‘폴리마켓’엔 전쟁의 향방을 두고 수십억 달러어치 베팅이 오간다. 미국의 이란 공습 날짜, 이스라엘의 이란 내 핵시설 공격 여부 등 그 종류도 다양하다. 이란에서 실종됐던 미군 조종사의 구조 시점이나, 핵무기 사용 예측까지 등장했다가 들끓는 비난에 중단하기도 했다. 실제 돈이 걸리는 만큼 여론조사보다 솔직하고 정확하다는 평가도 있다. 양대 예측시장 플랫폼인 폴리마켓과 '칼시'의 합산 기업가치는 약 420억 달러, 한화 58조 원대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그러나 자본의 인정이 옳고 그름의 잣대가 될 수는 없다. 전쟁에 돈을 건 사람에게 전쟁은 비극이 아니다. 조속한 종식과 평화는 곧 손실이다. 베팅 참여자가 많아질수록 우리 사회의 집단 윤리는 마모된다. ‘디지털 크라수스’가 자신의 성공 확률을 높이려 정보 조작과 여론 호도를 서슴지 않으리란 우려는 지나친 것인가. 미국 의회는 사망이나 전쟁 관련 베팅을 금지하고 공직자 참여를 막는 법안을 초당적으로 발의한 상태다. 다른 사람의 비극을 비극으로 받아들이는 것. 우리가 문명인임을 자처한다면 마땅히 지켜야 할 선이다.
논설주간/상무이사
강윤경
수석논설위원
김승일
논설위원
정달식
이상윤
김상훈
천영철
[천영철의 사리 분별] 트럼프가 던진 숙제… 민주주의를 어떻게 할 것인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기행 이력은 경이로울 지경이다. 인종차별 발언이나 비속어를 남발하는 저급함은 더 이상 특별한 놀라움을 자아내지 못한다. 그가 세계사 주역으로 등장한 지 11년째로 접어들면서 지구촌 사람들도 트럼프 발 충격에 다소 무덤덤해진 모양새다. 돌이켜 보면 트럼프 대통령의 출현은 인류사적 맥락에 부합한다는 생각이다. 인터넷 발달, 포퓰리즘 기승, 미국 제조업 붕괴와 양극화 심화, 중국 등 신흥 강자들의 거센 도전 등을 고려할 때 그의 등장과 지지층 급증은 어쩌면 불가피해 보이기까지 한다. 더욱이 국가와 개인 이익에 충실한 보수 리더를 원하는 경향성이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로 확산되면서 트럼프주의는 뉴노멀로 자리매김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그간 정책은 미국 중심의 질서 회복에 방점을 두고 있다. 지지층들은 부적절한 일방적 관세 부과와 베네수엘라 마두로 대통령 납치, 이란 전쟁과 최고지도자 하메네이 제거, 돈로주의 표방 등에 대해 달러·AI 패권 유지, 중국 견제, 자원 안보, 영토 방어를 위한 선제적 대응이라고 평가한다. 즉, 그의 정책이 거칠고 상식에 부합하진 않지만 나름대로 어느 정도 일관성 있는 목표를 갖고 진행됐다는 의미로도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절대 넘지 말아야 하는 선까지 넘나들고 있다. 인명을 대거 희생시킨 이란과의 전쟁 기간 중에도 골프를 하고 UFC 대회를 관람했다거나, 교황을 비난하고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로 연상케 하는 그림을 SNS에 공유한 정도의 몰상식을 지적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 전쟁과 관련해 최근 대국민 연설 등을 통해 다양한 발언과 글을 쏟아냈다. 이 과정에서 ‘석기시대’와 ‘문명 말살’ 표현을 서슴지 않았다. 이란을 겨냥해 “앞으로 2~3주 동안 그들을 극도로 강하게 타격할 것이다. 우리는 그들을 마땅히 있어야 할 석기시대로 되돌려 보낼 것이다”라고 밝혔다. 또 “그들이 장기간 석기시대로 접어들고 핵무기를 가질 수 없게 되면 우리는 떠날 것”이라고도 했다. 이어 ‘하나의 문명이 오늘 밤 완전히 사라질 것이며 다시는 되돌릴 수 없을 것’이라는 글을 SNS에 올렸다. 이런 말과 글은 이란의 인프라 등 현대 국가 기능을 완전히 무력화하겠다는 의미를 넘어 집단학살 위협을 가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핵심은 세계 최강 국가 리더라고 해서 무시무시한 반인륜적 협박을 반복적으로 일삼아도 되느냐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미 2017년 유엔총회서 “북한 완전 파괴” 발언을 한 전력도 있다. 더군다나 미국이 민주주의 절차에 의거해 선출한 트럼프 대통령은 힘이 곧 정의라는 논리로 국제질서를 연이어 파괴하고 있지만 그를 제재할 방법조차 제대로 없다. 미국 민주당은 트럼프 대통령이 전쟁 범죄를 예고한 것이라며 탄핵 소추안을 제출하고 직무수행 불능 결정을 위한 수정헌법 제25조 발동도 촉구하지만 현실화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이번 발언을 계기로 국민이 위임한 대통령 권력의 한계와 제재 방안에 대한 논란과 함께 민주주의 제도에 대한 근본적 보완을 서둘러야 한다는 지적이 거세지고 있다. 1776년 독립선언과 1787년 헌법 제정을 주도한 토머스 제퍼슨 등 당시 계몽주의 엘리트들이 예상치 못한 트럼프 대통령 같은 반지성적 지도자의 등장이 건국 이념을 위협한다는 위기의식도 확산되고 있다. 더욱이 건국의 아버지들은 자유롭고 깨어있는 국민, 덕성을 갖춘 리더를 전제로 현대적 민주주의 국가를 설계하고, 삼권 분립 등 견제 장치를 만들었다. 그러나 포퓰리즘과 양극화 때문에 이기주의에만 몰두하는 국민이 급증하는 등 지난 250년 동안 민주주의 환경 자체도 급변한 상황이다. 이것은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나라와 일본 등 상당수 국가들은 현대 민주주의 국가의 모체인 미국의 제도를 차용하거나 이식받았다. 미국 민주주의 위기와 유사한 상황이 연쇄 발생하는 것은 이런 이유다. 우리는 이미 2024년 12월 불법 비상계엄을 경험했다. 최근엔 입법 만능주의를 앞세운 여당의 사법개혁으로 삼권분립이 흔들리는 과정도 목격했다. 민주주의가 변질되고 폭주하는 지도자를 통제할 방법조차 없으면 자유와 평등, 다양성 등은 심각한 위험에 노출된다. 현재 청와대와 여당은 비상계엄에 대한 국회 통제를 강화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헌법 부분 개정을 추진 중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1987년 체제 이후의 엄청난 사회·가치관 변화, 트럼프 대통령을 닮은 포퓰리즘적 정치 기인의 등장, 권력 남용과 전제주의로의 변질 우려 등을 염두에 둔 광범위한 헌법 개정 논의가 필요하다. 나아가 우리 실정에 맞는, 한층 더 미래지향적이면서도 성숙한 ‘K 민주주의 제도’에 대한 숙의도 이어지길 기대한다.
[허동윤의 비욘드 아크] 애도의 공간, 생명의 건축
하나씩 피고 지며 봄의 진행을 스펙트럼처럼 보여주던 꽃들이 올해는 한꺼번에 폈다. 순서를 무시하고 동시에 피어버리는 이 기형적인 현상 앞에서 아름다움보다 기후 위기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찬란하게 아름다워야 할 4월은 꽃 피기도 전에 떨어져 버린 슬픔의 시간을 머금고 우리 앞에 기억을 소환한다. 제주 4·3사건, 어제 12주기를 맞은 세월호 참사, 그리고 모레 있을 4·19 혁명 기념일. 이 사건들은 서로 다른 내용이지만 기억은 사회 속에서 어떻게 구성되는지, 더 나아가 어떤 미래를 만들어가는가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우리는 오랫동안 애도란 죽음을 정리하고 다시 일상으로 복귀하기 위한 통과의례처럼 여겨왔다. 그러나 오늘날 애도는 ‘죽은 대상을 기리다’를 뜻하는 일반적인 추모가 아니라 타자의 슬픔을 느끼고 그 슬픔을 함께 극복하는 개념으로 변하고 있다. 그것은 더 이상 과거를 정리하는 행위가 아니라, 현재를 견디는 방식이자 미래를 구성하는 태도가 된다. ‘애도 불능 사회’란 상실과 죽음이 끊임없이 발생함에도 불구하고 그 상실을 충분히 말하고 느끼고 기리는 장이 부재한 사회이다. 그 예로 삼풍백화점 붕괴 자리에 세워진 ‘아크로비스타’를 들 수 있다. 비극의 공간에서 재탄생한 고급 주거지 어디에도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에 대한 표식이나 서사는 남아 있지 않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의 자리에 아무런 기억의 흔적 없이 일상이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은 사회가 특정한 죽음을 공적 기억으로 승인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동시에 그 죽음이 우리 삶의 조건을 바꾸지 못했음을 드러낸다. 기억되지 않는 죽음은 구조를 변화시키지 못한다. 과거와의 단절은 반복의 조건이 되어 세월호로, 이태원 참사로 이어졌다. 참사는 우연이 아니라 보이지 않던 위험이 표면으로 드러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참사 이후의 과정이다. 재난 현장에서 반복되어 온 통합 컨트롤타워의 부재, 신속한 구조의 실패, 그리고 책임의 불분명 등 시스템 단절의 패턴은, 사건은 달라도 대응은 놀라우리만치 유사하다. 슬픔은 있었지만, 그것이 구조를 재편하는 힘으로까지 나아가지 못한 것이다. 이는 사회의 기억이 제도와 공간의 서사로 이어지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재발 방지는 안전 기준 강화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감정의 환기와 이성적 성찰이 동시에 이루어질 때 애도는 비로소 사회적 힘을 갖는다. 이때 건축은 그것을 보여주는 장치의 역할을 한다. 베를린 ‘홀로코스트 기념물’에는 특별한 이름이 없다. 설계를 맡았던 미국의 건축가 피터 아이젠먼은 누군가에게는 묘비로, 누군가에게는 거대한 감옥처럼 느껴질 수 있는 재량을 부여하고 싶었다고 한다. 끝없이 반복되는 콘크리트 기둥들 사이로 걸어 들어갈수록 바닥은 낮아지고 비석이 높아지기 때문에 어느 순간 길을 잃은 듯한 압박감에 발걸음은 불안하게 된다. 기념비들은 질서 정연해 보이지만 나치 체제하에서 파괴된 인간상과 혼란을 느끼게 된다. 뉴욕의 ‘911 메모리얼 파크’ 역시 마찬가지다. 911 메모리얼 파크는 9·11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부재의 반추(Reflecting Absence)’라는 개념으로 설계된 추모 공원이다. 쌍둥이 빌딩 자리에 두 개의 사각형 반사풀을 두고, 풀 중심부로 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리게 해서 상실이 결코 봉합될 수 없음을 느끼게 한다. 그렇게 애도는 계속 흘러가는 시간과 함께 있음을 알게 되고 애도의 공간은 안타까운 죽음만을 기리는 건축물이 아니라 죽음을 통해 삶의 조건을 재구성하는 생명의 건축이 된다. 생명이란 단순히 살아 있음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관계 맺는 상태를 의미한다. 여기서 건축은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우리의 감각과 행동을 깨어있게 하는 사회적 학습의 매개체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상처를 지우지 않고, 오히려 그 상처를 드러냄으로써 새로운 관계의 가능성을 여는 작업이다. 애도의 공간이 살아 있는 이유는, 그곳이 과거를 보존하기 때문이 아니라 현재를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얼마 전, 달 왕복 비행을 마치고 돌아온 아르테미스 2호의 우주비행사 크리스티나 쿡은 “달 근처에서 지구를 바라보았을 때 지구는 우주 공간에 아주 고요하게 떠 있는 한 척의 구명정 같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지구라는 행성에서 살고 있는 모두가 하나의 팀이라고 느꼈다고 했다. 그 시선에서 보면 우주 공간에 구명정처럼 떠 있는 이 행성은 거대한 애도의 공간일 수도 있겠다. 팀이란 무슨 일이 있어도 언제나 함께하는 사람들이다. 수많은 슬픔을 소환하는 이 봄, 안타까운 죽음들을 애도하며 우리의 감각과 행동이 찬란한 생명을 잉태하는 봄으로 깨어나기를 소망한다.
[조희창의 클래식내비게이터] ‘외로운 양치기’, 그 시절엔 말이야...
무척 오래된 얘기지만, 음악을 좀 듣는다는 집이라면 경음악단 연주를 담은 카세트 한두 개쯤은 꼭 있던 시절이 있었다. 현악이 폭포수처럼 쏟아진다는 ‘캐스캐이딩 스트링스’로 유명한 만토바니 오케스트라를 비롯하여 제임스 라스트(James Last), 폴 모리아, 프랑크 푸르셀, 레이몽 르페브르 등 이른바 ‘팝스 오케스트라’의 전성시대가 있었다. 그들은 클래식 명곡, 오페라 아리아, 왈츠, 뮤지컬, 영화음악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너무 심각하지 않은 음악으로 프로그래밍해서 대중의 취향을 저격했다. 19세기 후반부터 시민층이 확대되면서 교양은 갖추되 어렵지 않은 음악을 감상하려는 콘서트가 많아졌다. 특히 20세기 들어 라디오와 가정용 오디오가 보급되면서 팝스 오케스트라의 붐이 일었다. 제임스 라스트 오케스트라도 그 시절의 산물이다. 1929년 4월 17일 독일 브레멘에서 태어난 제임스 라스트의 본명은 한스 라스트였다. 젊은 시절에는 재즈밴드의 베이시스트로 유명했고, 방송국에서는 편곡자 겸 작곡가로도 활동했다. 1960년대 중반에 ‘논스톱 댄싱’ 음반으로 성공하자 본격적으로 오케스트라를 조직하여 순회공연을 다니면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제임스 라스트의 음악은 한국에서도 라디오 프로그램의 시그널, 방송국 캠페인 배경음악, 각종 광고음악 등으로 흘러넘쳤다. 그의 음반에는 아스트루드 지우베르투, 리샤르 클레드망 등 유명한 게스트 연주자들이 참여했는데, 그중에서도 잊을 수 없는 사람으로 루마니아의 작곡가이자 팬플루트 연주자인 게오르그 잠피르(Gheorghe Zamfir)가 있었다. 1941년생으로 올해 85세의 나이가 되었다. 제임스 라스트는 1977년에 작곡한 ‘외로운 양치기’라는 곡의 솔로를 잠피르에게 맡겼고, 이 녹음으로 잠피르는 세계 곳곳에 ‘팬플루트의 거장’으로 이름을 알렸다. 이후 최초로 비발디의 ‘사계’를 팬플루트로 녹음했고, 클래식, 재즈, 영화음악에 다양하게 참여했다. 팝스오케스트라 열풍은 보스턴 팝스오케스트라, 아서 피들러 오케스트라 등으로 이어져 1980년대 초까지 레코드 산업으로 명맥을 유지했다. 그러나 이후엔 더욱 강렬하고 직접적인 대중음악이 늘어나면서 중간 영역에 서 있던 팝스오케스트라의 인기도 시들어갔다. 제임스 라스트의 마지막 공연은 2015년 4월 26일, 쾰른에서 열렸다. 그는 이 공연을 진행하고서 두 달도 안되어 세상을 떠났다. 사는 동안 세계적으로 약 2억 장의 음반을 판매했으며, 그중에는 200장의 골드디스크와 14장의 플래티넘 디스크가 포함되어 있다. 오늘, 어쩌다가 제임스 라스트-게오르그 잠피르의 ‘외로운 양치기’를 다시 듣게 되었다. 듣자마자 풍경이 몇십 년 전으로 타임슬립한다. 어머니가 이 곡을 무척 좋아하던 기억도 난다. ‘클래식’이라는 단어가 오랜 세월 동안 검증된 작품에 붙이는 것이라면, ‘외로운 양치기’는 슬며시 클래식의 반열에 올려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기고]성실납부가 존중받는 사회로…사회보험료 징수체계의 전환 필요하다
사회보험은 질병, 실업, 노령, 산업재해 등 국민이 일상에서 직면하는 다양한 사회적 위험을 함께 나누는 제도이다. 건강보험, 국민연금, 고용보험, 산재보험으로 이어지는 4대 사회보험은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핵심적인 안전망이다. 제도의 지속 가능성을 위해서는 공정한 부담과 성실한 납부라는 원칙이 현장에서 충분히 구현돼야 하며, 부담과 납부의 균형을 살펴봐야 한다. 다수의 국민과 사업자가 성실하게 보험료를 납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영역에서는 제도의 사각지대나 납부 회피 가능성에 대한 인식이 여전히 존재한다. 문제는 이러한 상황이 단순한 제도 운영상의 이슈를 넘어, 성실납부에 따른 이점이 국민에게 충분히 인식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사회보험 제도 전반에 대한 점검과 보완이 필요하다. 이러한 구조는 몇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우선, 소득 파악 체계는 지속적으로 개선되고 있으나 경제 환경 변화 속도를 충분히 반영하기에는 여전히 보완의 여지가 있다. 근로소득은 비교적 투명하게 반영되지만, 사업소득이나 플랫폼 기반 소득 등 다양한 소득 형태에 대해서는 보다 정교한 반영 체계가 요구된다. 또한 체납 관리 역시 사후 대응 중심의 성격이 강해 예방적 관리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여기에 성실납부에 대한 체감 가능한 유인이 충분히 크지 않다는 점도 함께 작용하면서, 납부가 ‘의무’에 머무르고 ‘합리적인 선택’으로까지 이어지지 못하는 구조가 형성될 수 있다. 이제는 이러한 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정책의 초점을 한 단계 전환할 필요가 있다. 단순한 징수 강화에 머무르기보다 납부 행태를 개선하는 접근이 병행되어야 한다. 핵심은 성실하게 납부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선택이 되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이를 위해 첫째, 소득 기반 부과체계를 더욱 정교화해야 한다. 관계기관 간 협력을 통해 다양한 소득 정보를 합리적으로 연계하고, 변화하는 경제 환경을 반영한 부과 기준을 지속적으로 개선해 나가야 한다. 이는 공정한 부담에 대한 신뢰를 높이는 출발점이다. 둘째, 체납 관리의 방향을 예방 중심으로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데이터 기반 분석을 활용하되 개인정보 보호 원칙을 전제로, 체납 가능성이 있는 경우 사전 안내와 분할납부 지원 등 맞춤형 관리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는 제재 중심이 아닌 지원 중심의 관리 방식이다. 셋째, 성실납부에 대한 긍정적 인식이 확산될 수 있도록 정책적 유인을 정교하게 설계하는 보완이 필요하다. 성실납부 이력이 사회 전반적인 영역에서 신뢰를 보여주는 참고 요소로 활용되거나, 행정절차 간소화, 금융·신용 측면의 우대 등 실질적으로 체감 가능한 지원이 확대될 필요가 있다. 이는 특정 집단을 배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성실한 참여를 장려하는 방향의 제도적 보완이다. 넷째,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서비스 혁신도 중요하다. 모바일 기반의 간편 조회와 납부, 맞춤형 안내, 디지털 상담 기능 강화 등을 통해 납부 과정의 불편을 줄이고 접근성을 높여야 한다. 사회보험 수급권은 개인의 권리이면서 동시에 공동체의 책임을 전제로 한다. 성실납부는 이러한 권리와 책임을 연결하는 가장 기본적인 참여다. 공정한 부담과 성실한 납부가 함께 작동할 때 제도에 대한 신뢰는 유지된다. 따라서 성실납부가 존중받는 환경을 만드는 것은 사회보험의 지속 가능성을 위한 중요한 조건이다. 이러한 지속 가능성의 문제는 최근의 환경 변화 속에서 더욱 중요한 과제로 부각되고 있다. 특히 고령화의 가속화, 의료 이용 증가, 경제 구조의 변화는 사회보험 재정에 새로운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기존의 방식만으로는 제도의 안정성을 충분히 담보하기 어렵다. 지금이야말로 징수 체계의 정교화와 납부문화 개선을 균형 있게 추진해야 할 시점이다. 성실납부가 당연한 사회를 넘어, 성실납부가 존중받는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 성실함이 신뢰로 이어지고, 그 신뢰가 사회 전반에서 긍정적으로 작동하는 구조가 만들어질 때 사회보험 제도는 더욱 안정적으로 지속될 수 있다. 이제 그 변화를 차분하지만 분명하게 시작해야 한다.
[데스크 칼럼] 늘 피가 모자라
얼마 전 ‘헌혈의 집’ 문을 두드렸다. 기자가 헌혈하기 위해 팔을 걷은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10년도 더 전 일이라 기억에서 가물가물했다. 기자가 헌혈에 나선 건 해군작전사령부 이현주 하사 취재 때문이다. 이 하사는 올해 2월 헌혈 100회 달성 기록으로 ‘헌혈 명예장’을 수상했다. 30대 초반의 나이임에도 벌써 100번째 헌혈을 기록한 게 예사롭지 않았다. 기사를 쓰면서 나 스스로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매년 동절기가 되면 혈액이 부족하다는 뉴스가 신문과 방송에서 나온다. 그런 뉴스를 접하고, 또 생산하는 언론사에 근무하면서 애써 헌혈을 외면해 왔던 게 사실이다. “헌혈이 가능한 만 69세까지 생명을 나누고 싶다”는 이 하사의 말은 기자에게 작은 울림으로 다가왔다. 나 스스로 팔을 걷어부치고 싶었고, 늦었지만 그 첫걸음을 뗐다. 혈액은 인공적으로 만들 수 없어 대체할 물질도 없다. 오직 건강한 사람의 자발적인 헌혈만이 수혈이 필요한 환자의 생명을 구하는 유일한 수단이다. 몸 밖으로 나온 혈액은 유효기간이 최대 35일로 짧다. 특히 혈소판의 유효기간은 단 5일에 그쳐 장기 보관이 불가능하다. 우리나라에선 하루 평균 5000~7000명의 환자가 수혈을 필요로 한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헌혈 참여율은 인구 대비 5%도 안 된다. 대한적십자사 통계에 따르면 2024년 기준 국내 헌혈 실인원이 126만 4525명인데, 이는 헌혈가능인구(16~69세) 대비 3.27%에 불과한 참여율이다. 보통 수혈은 대형 교통사고 등 중증 외상 응급환자에게 시급하나, 실제 통계를 보면 암 환자(약 40%)와 일반 수술 환자(약 30%)에게도 많이 쓰인다. 조산아와 미숙아를 살리는 데도 혈액은 필수적이다. 헌혈은 어쩌다 발생하는 사고에 대비하는 것을 넘어, 평범한 이웃들이 병원에서 온전히 치료받고 삶을 지탱하게 해 주는 가장 필수적인 ‘의료 인프라’라 할 수 있다. 혈액은 겨울철에 특히 부족하다. 유행성 독감 등 호흡기 질환이 돌면서 헌혈 적격자가 크게 줄어드는 탓이다. 헌혈 인구의 불균형 문제도 크다. 과거 단체 헌혈 위주로 혈액 사업이 진행된 영향으로, 현재 헌혈자의 60~70%가 10·20대 학생과 군인·경찰·회사 등 단체에 집중돼 있다. 학교가 방학에 들어가면 혈액 보유량이 뚝 떨어지는 현상이 매번 반복된다. 여기에 저출산 고령화가 가속화되면서 청년 인구는 줄어드는 반면, 수혈이 더 필요한 고령층 인구는 가파르게 늘고 있다. 헌혈과 수혈의 ‘미스매치’가 가속화되는 것도 고령 사회가 직면한 문제다. 혈액의 적정 보유량은 5일분이라고 한다. 겨울철에는 ‘주의’ 단계인 3일분 미만으로 떨어지는 날들이 잦다. 하지만 겨울이 지난 지금도 적정 혈액 보유량을 채우는 날이 많지 않다는 게 혈액원 관계자의 얘기다. 겨울철뿐만 아니라 사계절 내내 피가 모자라는 게 현실이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혈액 수급 최전선에 있는 실무자들은 한 팩의 피라도 더 구하기 위해 다양한 아이디어를 내놓는다. 지난 2월 부산혈액원에선 헌혈자에게 ‘두바이 쫀득 쿠키(두쫀쿠)’ 증정 이벤트를 벌이기도 했다. 지역 카페 사장님들도 핼액원을 돕고자 두쫀쿠 기부에 나섰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이 덕분에 이벤트 기간 헌혈 인원이 평소보다 두 배가량 몰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일시적인 이벤트에 불과하다. 혈액 부족은 모두가 함께 책임져야 할 사회적 과제다. 대한적십자사 혈액관리본부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면 혈액 보유 현황판을 볼 수 있다. 매일 혈액 보유 현황이 업그레이드된다. 기사를 쓰는 14일도 적정 보유량인 5일에 못 미치는 것(3.6일)으로 나온다. 5일 이상의 안정적인 보유량을 확보할 있도록 적극적인 개인 헌혈 참여가 필요하다. 특히 30대 이상 중장년층의 참여가 절실하다. “한 번의 헌혈로 세 명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란 말이 있다. 전혈(적혈구·백혈구·혈장·혈소판 등 혈액의 전체 성분) 헌혈을 하면 혈장, 혈소판, 적혈구 등 혈액 제재로 분리돼 필요한 사람에게 제공되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이렇게 보면 헌혈은 가장 ‘가성비’ 좋은 나눔 방식인 셈이다. 최근 헌혈 200회라는 대기록을 달성해 ‘명예대장’에 이름을 올린 김형찬 씨는 “습관이 되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고귀한 실천이 헌혈”이라며 많은 이들의 동참을 당부하기도 했다. 만약 당신이 10~15분 정도만 시간을 내 팔을 걷어붙인다면 누군가의 생명을 구할 수도 있다.
[2030 칼럼] 당신은 '월급' 말고 무엇을 벌고 있는가
모든 것에 가격표가 붙는 세상이라지만, 우리 삶에는 죽어도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비매품(Not for Sale)’ 영역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마이클 샌델 교수는 그의 저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서 시장의 논리가 도덕적 성역을 침범할 때 발생하는 가치의 훼손을 경고했다. 이 날카로운 통찰을 우리의 일터로 가져와 보자. 우리는 매일 노동력을 팔아 월급을 받는 시장 경제의 최전선에 서 있지만, 정작 직장이라는 공간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귀한 ‘보너스’는 우리가 회사와 체결한 연봉 계약서에는 적혀 있지 않다. 외국계 기업에서 재택근무를 하며 홀로 모니터를 마주하는 나는, 역설적이게도 이 차가운 디지털 환경 안에서 ‘돈으로 살 수 없는 경험’의 가치를 더 절실히 체감한다. 흔히들 대학을 지성의 전당이라 부르지만, 사회에 나와 보니 대학에서조차 가르쳐주지 않는 본질적인 것들은 모두 직장에서 동료들과 부대끼며 배운 것들이었다. 책장 속 이론이 아니라 사람의 온기가 섞인 노하우, 그리고 타인의 성장을 진심으로 돕는 마음 말이다. 나 역시 새로운 팀원이 합류하면 대학 강의실에서는 결코 배울 수 없는 실무의 ‘결’과 조직의 문화를 요약해서 건네곤 한다. 정답을 맞히는 법은 대학에서 충분히 배웠겠지만, 직장에서는 누군가의 빈틈을 메워주고 함께 속도를 맞추는 법을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먼저 겪은 시행착오를 기꺼이 나누고, 그 과정에서 동료가 건네는 진심 어린 감사 인사는 내 연봉 고과를 올리는 수치보다 훨씬 더 묵직하게 가슴에 남는다. 이는 성과 지표로 환산되지 않는, 인간 대 인간으로서 느끼는 효능감이자 시장이 결코 가격을 매길 수 없는 영역이다. 이것은 단순히 ‘운이 좋아서 좋은 동료를 만났다’는 식의 감성팔이가 아니다. 샌델은 모든 인간관계가 거래로 치환될 때 생기는 공동체의 붕괴를 경고했다. 현대의 직장은 비단 노동력을 파는 장소를 넘어, 타인과 연결되는 법을 배우는 마지막 ‘인간 학교’로 기능하고 있다. 동료의 성공을 진심으로 축하하고, 서로 다른 부서임에도 새로운 기술이나 효율적인 일 문화를 나누며 뜨겁게 토론하는 순간들. 인센티브 몇 푼으로 유도할 수 없는 이 자발적인 유대감이야말로 시장의 논리가 침범해서는 안 될 삶의 품격이다. 더 나아가, 나는 우리가 지금 지겨워하는 이 ‘소속감’이 머지않은 미래에 가장 희소한 자원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AI가 업무를 자동화하고 1인 사업가들이 넘쳐나는 파편화한 세상이 오면, 타인과 부대끼며 공통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경험 자체가 일종의 사치가 될지도 모른다. 그때가 되면 우리는 지금의 출근길과 지루한 회의 속에서 나눴던 농담 한마디를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흩어지기 쉬운 개인들이 모여 하나의 조직이라는 큰 그림을 그려내는 경험은, 기술이 발전할수록 더욱 귀해질 수밖에 없다. 나 역시 화면 뒤에 숨어 일하는 재택러로서 고립의 위협을 늘 느낀다. 하지만 그렇기에 다른 팀 동료가 건네는 따뜻한 메시지 한 줄, 지식 공유 세션에서 느껴지는 동료애의 무게를 더 소중히 여긴다. 기성세대가 지켜온 끈끈한 조직 문화의 ‘정’과 우리 세대가 추구하는 ‘느슨하면서도 단단한 연대’가 만나는 지점. 그곳에 우리가 직장에서 벌어들여야 할 진짜 보너스가 있다. 기록은 전시될 때가 아니라 내면에 쌓일 때 역사가 되듯, 직장 생활의 가치 역시 통장 잔고가 아니라 내 영혼에 새겨진 관계의 깊이로 결정된다고 믿는다. 자본의 논리로 계산기를 두드려서는 결코 답이 나오지 않는 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끈끈한 화학 작용이야말로, 척박하고 냉혹한 경쟁 사회를 버티게 하는 진짜 연료인 셈이다. 이처럼 타인과 부대끼며 나의 모난 모서리가 둥글게 깎여 나가고, 동시에 누군가의 부족함을 나의 고유한 장점으로 채워주는 일련의 상호작용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기능적인 직업인 너머의 성숙한 ‘어른’으로 완성되어 간다. 모든 것이 상품이 되어버린 세상 속에서 나다운 진정성을 잃지 않으려 분투하는 우리에게, 직장은 여전히 돈으로 살 수 없는 성장을 선물하는 고마운 공간이다. 이제 우리는 매달 찍히는 월급 통장의 숫자 너머를 바라봐야 한다. 세상이 당신의 가치를 직급과 연봉으로 매기려 들 때, “나는 이곳에서 돈으로 살 수 없는 사람의 마음을 배우고 있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하다. 타인과 연결되어 있다는 안도감,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효능감이야말로 전시되지 않는 은밀한 자부심이 된다. 거대한 시장이 되어버린 세상 속에서, 당신은 오늘 하루 월급 말고 또 무엇을 벌었는가. 당신의 마음 한구석에 결코 가격표를 허락하지 않은 ‘동료의 이름’ 하나쯤은 품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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