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부산 글로벌허브도시특별법 처리, 더 이상 미룰 명분 없다
부산 글로벌허브도시특별법의 입법 절차가 본격화한다.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법안심사 제1소위는 오는 11일 입법 공청회를 열어 의견을 수렴하고, 16일 법안소위를 열기로 했다. 22대 국회 개원 직후 발의되어 1년 9개월이나 허송세월한 점을 생각하면 분통이 터진다. 윤석열 전 정부 시절 월드엑스포 유치 실패 이후 추진된 이 법안에 민주당은 줄곧 미온적이었다. 공청회조차 열리지 못했고, 내용이 겹치는 북극항로 특별법이 발의되기도 했다. 부산 유일의 민주당 소속 전재수 의원이 발의에 앞장섰다는 점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법안 처리가 본궤도에 오른 것은 뒤늦었지만 다행스럽다. 입법 파행이 되풀이되는 일만큼은 없어야 한다. 글로벌특별법은 부산을 남부권 거점도시로 육성해 수도권과의 상생과 국가 균형발전을 이루려는 취지로 출발했다. 단순히 부산 지역만 잘살자는 게 아니라 국가 성장 전략 측면에서 기획된 것이다. 다가오는 북극항로 시대에 대비하고 변화하는 글로벌 해운·물류 질서 속에서 대한민국이 주도권을 확보하려면 글로벌 허브도시의 확보는 필수 불가결하다. 그러려면 싱가포르, 홍콩, 두바이와 겨룰 수 있는 글로벌 자유 비즈니스 도시가 필요하고, 이를 위한 법적 기반이 글로벌특별법인 것이다. 글로벌 기업·투자 유치와 항만·물류 산업 고도화로 새로운 산업 생태계 조성을 위해 규제 철폐와 권한 이양은 필수적인 과제다. 지역의 성장 엔진을 교체하려던 법안은 정치공학의 틀에 갇히면서 기약 없이 표류했다. 100만 명이 넘는 시민 서명도, 시민단체와 박형준 부산시장의 호소와 천막 시위도 거대 여당의 몽니 앞에 별무소용이었다. 국회의 반전은 행정통합과 ‘3특 특별법’ 개정이 본격화한 덕분이다. 광주전남특별시 출범에 형평을 맞춰 전북·강원·제주특별자치도(3특) 지원 확대를 늦출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재명 정부가 ‘5극 3특’을 국정 과제로 내세운 마당에 21대에서 22대로 넘어온 글로벌특별법은 더 이상 미룰 명분이 없다. 정부가 해수부 이전으로 추진하는 해양경제권 형성의 전제 조건이기도 하다. 정부와 여당에 결자해지의 책임감이 필요하다. 특별법 공청회 소식은 갑작스럽긴 하지만, 2년 가까이 문전박대의 수모를 견딘 덕분에 얻어낸 성과다. 법안 심의와 처리가 속도를 낼 수 있도록 지역 정치권과 부산시는 총력을 펼쳐야 한다. ‘5극 3특’ 국가 균형발전 구상과 글로벌특별법은 동일체라는 점을 설득해야 한다. 여야 정치권의 트집과 견제로 기약 없는 도돌이표가 되지 않도록 이 법안이 부산만을 위한 시혜가 아니라는 점을 각인시켜야 한다. 특히 정부와 여당은 국가의 명운이 걸린 법안이라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지역의 성장으로 국가의 미래를 바꾸자던 이재명 대통령 공약에 가장 적확한 실행 사례다. 신속한 법안 통과가 지역의 ‘희망 고문’을 끝내는 신호탄이다.
[사설] 국힘 '윤 어게인' 반대 결의문, 당 통합과 정상화 계기로
국민의힘이 지난 9일 긴급 의원총회를 열고 장동혁 대표를 포함한 소속 국회의원 전원 명의로 윤석열 전 대통령의 정치적 복귀에 반대한다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결의문에는 12·3 비상계엄 사과, 윤석열 전 대통령의 정치적 복귀 반대, 당내 갈등을 증폭하는 행동과 발언 중단 등이 담겼다. 전날 오세훈 서울시장이 당 노선 변화를 요구하며 후보 등록을 보류하자 긴급 의총을 열고 ‘윤 어게인’ 세력과의 단절을 선언한 것이다. 오 시장은 “선거를 치를 최소한의 발판이 마련됐다”고 밝혔다. ‘절윤’ 필요성을 강조해 왔던 PK(부산·울산·경남) 지역의 반응도 긍정적이다. 국힘이 ‘윤 어게인’ 세력과의 절연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것은 늦었지만,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번 결의문 채택은 석 달도 남지 않은 6·3 지방선거에서 참패할 수 있다는 의원들의 위기의식이 반영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의총에서는 당내 의원들의 ‘절윤’ 요구가 터져 나왔으며, “국민의힘 로고가 있는 선거 운동복을 입고 밖에 나가지 못할 정도로 민심이 심각하다”는 성토도 많았다. 이런 우려가 확산하면서 국힘에선 광역단체장 출마자 기근 현상까지 벌어지고 있다. 국힘 전통적 강세 지역인 대구·경북에만 광역단체장 후보가 몰리고, 서울·경기는 현역 의원들이 후보 공천을 신청하지 않았다. 부산에선 주진우 의원만 신청했다. “이러다 TK 자민련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당내 우려가 잇따르는 상황이다. 장동혁 대표는 이날 의총에서 발언을 전혀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의총 뒤 박성훈 대변인이 “장 대표는 의원들의 총의를 존중한다는 입장”이라고만 했다. 장 대표가 ‘윤 어게인’ 세력과 실제로 절연하는 모습을 당의 정책과 행동으로 보여줄 수 있을지에 대해선 아직 의문이 가시지 않는 상황이다. 강성 지지층의 반발과 지도부의 후속 조치 여부가 변수로 갈등의 불씨는 남아 있다. 당장 극우 유튜버 전한길 씨는 장 대표를 향해 “윤석열 어게인을 지지할지, 절윤할지 분명히 밝혀야 한다”고 압박하고 나섰다. 장 대표가 윤 어게인 세력의 반발을 무릅쓰고 당 통합을 위한 실질적 조치에 나설지 지켜볼 일이다. 6·3 지방선거를 앞두고 야당인 국힘은 국정의 건전한 견제 세력으로서 정책 경쟁에 몰두하는 것이 본연의 역할이다. 하지만 그동안 ‘윤 어게인’ 세력과의 절연을 둘러싼 당의 노선과 운영을 놓고 극심한 갈등에 빠져 들었다. 지리멸렬한 모습에 실망한 민심으로부터 외면받으면서 지지율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이번 결의문 채택이 단순히 지방선거 표심을 얻으려는 쇼에 그쳐서는 안 된다. 장 대표가 절윤을 못 박는 입장을 직접 밝히고, 한동훈 전 대표 및 친한동훈계 징계 문제 해결을 통해 통합을 모색해야 한다. 결의문 채택을 당 통합과 정상화의 계기로 삼아 보수의 미래와 재건을 위해 제대로 된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다.
[사설] 경선부터 불붙은 부산시장 선거전, 지역 미래 경쟁해야
6·3 지방선거를 84일 앞두고 부산시장 여야 후보군의 윤곽이 드러났다. 서울과 함께 부산의 민심 향배가 한국 정치의 주요 변수로 부각되면서 경선 초반부터 열기가 뜨겁다. 국민의힘에서는 박형준 시장이 3선 도전을 선언했고, 초선인 주진우 의원(해운대구 갑)이 도전장을 내면서 대결 구도가 가시화됐다. 더불어민주당은 전재수 의원(북구 갑)과 이재성 전 부산시당위원장 간의 경선이 유력하다. 하지만 원내 양당은 중앙 정치의 프레임에 갇힌 정쟁과 계파 갈등을 답습하고 있다. 지방선거의 의의를 제대로 살리는 핵심은 중앙 정치 예속의 탈피다. 부산을 책임지겠다고 나선 여야 후보들은 지역의 미래 비전으로 경쟁해야 한다. 국민의힘 내부 상황은 우려스럽다. 현직 시장이 3선에 나서고 여기에 젊은 도전자가 맞서면서 경선 흥행 가능성은 커졌다. 하지만 경선 초반부터 ‘낙동강 전선’ ‘보수의 명운’ 같은 선명성 발언이 쏟아지고 있다. 여기에 당권파 주도의 징계 갈등과 ‘윤(석열) 어게인’ 논란이 촉발한 당 내분이 지자체장 경선 구도에서 재연될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런 계파 갈등은 시민의 눈높이와는 거리가 멀다. 지방선거는 중앙 정치 세력의 결속을 시험하는 장이 아니다. 국민의힘이 부산 시정을 책임진 정당이라면 성과와 한계를 냉정히 평가하고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 우선이다. 정치 구호를 앞세운 경선 전략으로 지역 유권자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 민주당은 최근 여러 여론조사에서 국민의힘에 앞서는 결과가 나왔다. 하지만 이는 상대의 실책과 혼란에 기인한 반사 효과라고 겸허히 받아들이는 것이 옳다. 국회 다수당의 입법 독주에 대한 문제의식을 과소평가해서도 안 된다. 유력 후보로 거론되는 전재수 의원은 통일교 관련 의혹이 말끔히 해소되지 않은 상태다. 공직에 나서려면 도덕성 의혹을 해소하는 것이 기본이다. 여론조사의 수치로 경쟁력을 과대평가하는 것을 민주당은 경계해야 한다. 제2의 도시 부산마저 소멸 위험 진단을 받은 데에 집권 여당은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부산 시정을 맡게 해달라고 지지를 호소하기 전에 지역 재도약 방안을 제시해야 한다. 지선을 앞두고 각축전처럼 펼쳐진 행정통합 논의를 지켜보면서 부산 시민들은 묘한 상실감을 느꼈다. ‘20조 지원’ 당근책을 놓쳤기 때문은 아니다. 부산이 처한 위기가 악화일로여서다. 부산은 아기 울음소리가 잦아들고 청년이 떠나는 도시가 됐다. 첨단 산업 전환·유치, 가덕도 신공항, 북항 재개발, 인구 감소 등에 과감하고 신속한 대응이 필요하다. 부산이 다시 성장 동력을 회복하려면 핵심 과제에 대한 해법을 찾고 실행할 리더십이 필요하다. 지선이 정쟁과 계파 갈등으로 흐른다면 지역은 미래가 아닌 과거로 뒷걸음칠 수밖에 없다. 정치 구호 대신 변화의 청사진이 필요하다. 시민들이 매의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
무기 전락한 '평화 상징'
비둘기는 평화의 상징이다. 피카소가 1949년 파리평화회의 포스터에 흰 비둘기를 그리면서 국제 평화운동 상징이라는 이미지가 전 세계에 확산됐다. 이에 앞서 성경 속 노아의 방주 이야기에 비둘기가 올리브 잎을 물고 돌아오자 물이 빠지고 평화가 찾아왔다고 묘사되는 등 역사 속에서도 비둘기는 고귀함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 6·25전쟁 전사 유엔군을 기리는 부산 유엔기념공원 위령탑에 비둘기를 조각한 것도 이런 이유일 것이다. 특히 비둘기는 귀소 본능이 뛰어나 편지를 전달하는 ‘전서구’로 활용되는 등 인간과 친밀한 관계를 이어왔다.하지만 비둘기는 2009년 유해야생동물로 지정됐다. 건물 틈, 다리 교각 등 도심 건축물에 둥지를 틀고 번식하는 능력이 뛰어난 데다 천적이 없고 음식물 쓰레기 등 먹이도 풍부하다 보니 개체 수가 급증한 데 따른 것이다. 1988년 서울올림픽은 물론 20세기 각종 국가적 행사에서 각광받던 ‘비둘기 전성기’ 때는 상상도 하기 어려운 일이다.이런 상황에서 러시아가 최근 살아있는 비둘기를 드론화하는 기술 개발을 추진 중인 것으로 나타났다. 평화를 상징하던 비둘기가 이제는 파괴적인 전쟁 도구로 활용된다는 섬뜩한 소식이다. 영국 일간지 텔레그래프에 따르면 러시아의 신경기술 분야 스타트업 기업이 비둘기의 뇌에 신경 칩을 심어 원격으로 조종하는 이른바 ‘사이보그 비둘기’를 개발 중이다. 비둘기 두개골에 초소형 전극을 삽입해 신경 신호를 자극하는 방식으로 비행 방향을 원격 제어한다. 비둘기 가슴에는 카메라를, 등에는 태양광으로 작동하는 소형 비행 제어 장치를 각각 장착한다고 한다. 비둘기 드론은 하루 최대 480㎞를 이동할 수 있고, 레이더나 시각 감시로 포착하기 어렵다는 게 장점으로 꼽혔다.살아있는 비둘기를 무기로 만든다는 소식은 기술혁신을 둘러싼 윤리 의무 위반과 동물 학대 논란을 촉발시키고 있다. 더욱이 러시아는 비둘기 이외에도 돌고래와 개 등을 군사 도구로 이미 활용하고 있다. 중국도 ‘사이보그 벌’을 만들 수 있는 초경량 곤충 두뇌 조종장치 개발에 성공한 상황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미국-이란 전쟁 등 최근 발생한 현대전 양상을 보면 드론의 중요성은 한층 커지고 있다. 그렇다고 생명체의 뇌와 신경을 자극해 드론화하는 것까지 면죄부를 받을 수 있을까. 잇따르는 생체 드론 개발 소식을 보면서 승리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전쟁의 냉혹함을 다시 한번 절감한다.천영철 논설위원 cyc@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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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AI로 무장한 전쟁보다 더 무서운 것
미군의 ‘베네수엘라 마두로 대통령 체포 작전’은 완벽에 가까운 성공이었다. 1월 3일 오전 2시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 항구와 주요 군사시설에 공습이 이뤄진다. 사이버공격으로 정전도 발생한다. 혼란을 틈타 미군 헬기가 마두로 대통령의 안전가옥으로 향한다. 안전가옥은 여러 채이지만, 헬기는 정확한 은신처로 향한다. 엄호를 받고 특수부대 델타포스팀이 헬기에서 내린다. 마두로 대통령의 침실 옆엔 이런 날을 위해 만든 튼튼한 대피소가 있었다. 총소리에 놀란 마두로는 대피소로 달려가지만, 철문을 닫기 직전 붙잡힌다. 그만큼 속전속결로 침투가 이뤄졌다. 미군은 중상자도 없었다. 모든 걸 꿰뚫어 보고 가장 효율적인 경로로 짜인 체포 작전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놀랍게도 작전의 설계자는 사실상 AI로 지목된다. 앤트로픽사의 ‘클로드’와 ‘팔란티어 테크놀로지’는 전략적 파트너십으로 미 국방부에 AI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AI는 위성 영상·감청 데이터·드론의 실시간 스트리밍 등 방대한 정보를 초 단위로 분석해, 마두로 대통령의 위치를 파악했다. 최적의 시뮬레이션 과정을 통해 가장 효과적인 공습 후보지와 침투 경로를 뽑아냈다. 사람이 설계를 전담했으면, 단기간에 수립하기 어려운 작전이었다. 두 달이 안돼, 2월 28일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을 공습했다. 하메네이 최고지도자를 비롯해 국방장관, 총사령관 등 이란의 주요 인물들이 무더기로 피살됐다. 하메네이 사망으로부터 5거래일 만에 팔란티어 주가는 14% 올랐다. 자본시장도 알고 있다. 적중률 높은 공습은 AI 결과였고, 당연히 AI 방산회사들에게 큰 호재였다. 이미 팔란티어 시총은 전통 방산업체 록히드마틴의 3배 정도다. 지금 전장은 AI 능력이 재래식 무기보다 더 중요하다는 게 자본의 평가인 셈이다. 2022년 본격화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도 AI는 활약하고 있다. AI 기반 표적시스템 덕에 드론 명중률이 몇 배가 올라갔다. 특히 이 전쟁에선 유난히 드론 시점에서의 공격 영상이 많이 공개됐는데, 상당히 실감이 난다. 자폭드론은 망설임 없이 표적을 향해 날아간다. 굶주려 앙상한 젊은 병사들이 살려고 도망치거나, 벙커에 숨어도, 자폭드론은 귀신같이 쫓아가 임무를 완수한다. 거기에 비하면 조종사가 폭탄을 직접 떨어뜨리는 수동 드론은 인간적이다. 드론을 본 어떤 병사들은 살려 달라고 두 손 모아 애원하고, 어떤 이는 죽음을 받아들이고 성호를 긋는다. 그들은 폭탄의 희생자가 되기도 하고, 살아서 포로가 되기도 한다. AI가 전쟁 수행 능력을 끌어올리는 건 명백하다. 효율적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길을 제시해 준다. AI가 대신 판단해주면, 군인도 살상에 따른 책임이나 양심적 가책을 덜 수 있다. 아마도 전쟁은 더 잔인해질 것이다. 이런 우려 탓에, 대량 살상 무기에 자신의 기술 활용을 금지할 것을 공식화하는 AI 기업들도 나오고 있다. 인간이 판단하는 게 AI보다 더 인간적이고 덜 잔인할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믿음이기도 하다. 2월 28일 미국의 공습이 한창일 때, 이란 호르모즈간주 ‘샤자레 타예베’ 여자 초등학교에 폭탄이 떨어졌다. 여러 정황상 미군의 오폭이 확실시 된다. 사망자 180여 명 대다수는 7~12세 여자 아이였다. 전쟁과는 아무 상관없는 아이들이었다. 시신 훼손이 심해, 부모들은 얼굴이 아닌 팔찌나 옷문양으로 자식의 신원을 확인했다. 유례없는 비극이지만, 묘한 건 이후 반응이다. 이란을 제외하면 어느 나라도 딱히 초등학생들의 희생을 크게 문제를 삼지 않고 있다. 미국 안에서도 전쟁 중 발생한 안타까운 참사 정도로 다뤄지는 분위기다. 우리나라에선 전쟁 중 크고 작은 사건 정도로 보도됐다. 주변에 주가 폭락으로 전쟁에 분개하는 이는 많지만, 초등학생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이는 드물다. 아니, 없다. 대부분 기억에서 지운듯하다. 베트남전 당시 ‘네이팜 소녀’ 사진이 반전 여론에 불을 지폈다. 온몸에 화상을 입은 채 울부짖으며 달려오는 9살 소녀의 모습에 인류가 분노했다. 비슷한 사진이 지금 찍힌들, 큰 변화가 있을까. 사실 마두로 체포 작전에서도 베네수엘라에서 민간인을 포함해 80여 명이 숨졌다. 관심이 없기에, 이들의 죽음을 알려고 하지 않는 게 현실이다. 이제 전쟁에서마저 인간은 밀려가고 있고, 인간적인 갈등 없는 살상은 늘어날 것이다. 더 무서운 건 인간마저 인간미를 잃어가는 거다. 아픔을 공감하는 우리의 능력이 퇴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전쟁이 잔인해지는 것 이상으로 우리도 무서워지고 있는 듯하다.
[중앙로365] 유가 급등에 관광도시를 다시 묻는다
드디어 봄이 왔다. 농장의 이중 비닐을 걷어도 될 만큼 날씨가 풀리고 봄꽃이 피어날 준비를 하고 있다. 이맘때면 늘 기대되는 것이 벚꽃 시즌이다. 하지만 올해 봄은 예년과 조금 다른 느낌이다. 설렘보다는 이동이 먼저 걱정된다. 나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부산에서 경북 왜관을 다녀온다. 그렇게 다닌 지도 벌써 10년이 되어 간다. 평소 같으면 일요일 경부 고속도로와 부산·대구 고속도로는 관광버스와 나들이 차량으로 꽤 붐비는 편이다. 그래서 조금만 늦게 출발해도 상당한 정체를 각오해야 한다. 그런데 최근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이번 주말에는 올라가는 길도 내려오는 길도 예상보다 한산했다. 사람의 이동이 기반인 관광 산업 중동전쟁 따른 유가 급등에 민감 운임 인상 등에 따른 영향도 다양 국제·국내 관광 희비 엇갈릴 수도 급변하는 환경 속 관광도시 부산 진지하게 새 전략 고민 시작해야 그 이유를 짐작하게 한 장면이 있었다. 돌아오는 길 다른 곳보다 비교적 저렴한 가격표가 붙은 한 주유소 앞에 자동차들이 길게 줄을 서 있는 모습이었다. 그제서야 왜 도로가 한산했는지 이해가 갔다. 치솟은 기름값 때문이다. 유가가 급등하면서 사람들의 이동이 눈에 띄게 줄어든 것이다. 꼭 필요한 외출이 아니라면 이동을 줄이려는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는 듯하다. 최근 중동 정세가 심상치 않다. 특히 이란을 둘러싼 긴장이 고조될 때마다 국제 유가는 빠르게 반응해 왔다. 중동은 세계 원유 공급의 핵심 지역이기 때문에 작은 정치적 충돌이나 군사적 긴장만으로도 국제 유가는 크게 출렁인다. 문제는 유가 상승이 단순한 에너지 가격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 경제와 관광 흐름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관광 산업은 사람의 이동을 기반으로 하는 산업이다. 이동에는 교통비가 따른다. 대표적 교통수단인 항공기 관련 산업에서도 항공유 가격은 가장 중요한 비용 요소가 된다. 국제 유가가 상승하면 항공유 가격도 오르고 결국 항공 운임 상승으로 이어진다. 여행 비용이 높아지면 관광 수요 역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다만 유가 상승이 관광 시장에 미치는 영향은 단순하지 않다. 국제 유가 상승은 장거리 이동 비용을 높여 국제 관광을 위축시키는 요인이 될 수 있다. 동시에 환율 상승이라는 변수도 함께 작용한다. 환율이 오르면 외국인 관광객 입장에서는 한국 여행 비용이 상대적으로 낮아지는 효과가 생기기 때문이다. 실제로 원화 가치가 약세를 보일 때 외국인 관광객이 증가하는 현상은 여러 차례 나타난 바 있다. 내국인 관광 흐름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유가 상승과 항공료 인상은 해외여행 수요를 줄이는 요인이 된다. 이때 일부 여행 수요는 해외 대신 국내 관광으로 이동하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은 국내 관광 시장에 일시적인 활력을 가져올 수도 있다. 하지만 유가 상승이 장기화하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교통비와 물가 상승이 동시에 나타나면 여행 자체를 줄이는 소비 위축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유가 상승은 국제 관광과 국내 관광 모두에 복합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관광도시에도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관광객 이동이 줄거나 관광 패턴이 바뀌면 관광도시 경제에도 영향을 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관광은 숙박, 음식, 쇼핑, 교통 등 다양한 산업과 연결되어 있는 도시 경제의 중요한 축이기 때문이다. 부산 역시 이러한 흐름 속에서 관광 전략을 다시 점검할 필요가 있다. 지난해 부산은 외국인 관광객 300만 명을 돌파하며 글로벌 관광도시로서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중국과 대만 관광객뿐 아니라 동남아시아 등 다양한 국가에서 부산을 찾는 관광객들도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부산이 국제 관광도시로 성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글로벌 관광도시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관광객 수 증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부산이 지향하는 도시 비전은 ‘시민이 행복한 도시’, ‘즐거운 도시’, 그리고 ‘글로벌 허브도시 부산’이다. 관광 역시 이러한 도시 비전과 함께 발전해야 한다. 관광객이 찾는 도시이면서 동시에 시민이 즐길 수 있는 도시가 될 때 관광도시는 지속 가능한 경쟁력을 갖게 된다. 이를 위해서는 관광 인프라 역시 더욱 세밀하게 준비되어야 한다. 다양한 국적의 관광객을 위한 언어 서비스뿐 아니라 할랄 음식, 채식 식단, 종교적 생활환경 등 문화적 차이를 고려한 관광 환경이 필요하다. 단순히 방문하는 도시가 아니라 머무르고 싶은 도시가 되어야 한다. 치솟은 유가는 단순한 에너지 가격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국제 관광 흐름과 국내 관광 구조를 동시에 바꾸는 신호일 수 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관광도시는 새로운 전략을 고민해야 한다. 부산이 시민에게는 행복하고 즐거운 도시가 되고 세계인에게는 매력적인 관광도시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변화하는 관광 환경 속에서 더욱 탄탄한 준비가 필요하다. 지금이야말로 부산 관광의 방향을 다시 점검해 볼 때다.
[김종기의 미술 미학 이야기] 세계 여성의 날, 기억의 기념비
지난 8일은 세계 여성의 날이었다. 이날은 1908년 뉴욕에서 1만 5000여 명의 여성 노동자들이 더 나은 근로조건과 참정권을 요구하며 벌인 시위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 흐름을 국제적 의제로 끌어올린 인물이 독일의 사회주의 운동가 클라라 체트킨이다. 그녀는 1910년 코펜하겐에서 열린 국제사회주의여성회의에서 여성의 참정권과 노동권을 요구하는 ‘국제 여성의 날’을 제안했다. 이후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러시아의 여성 노동자들은 ‘빵과 평화’를 외치며 대규모 파업 시위를 벌였다. 시위 4일 만에 차르가 폐위되었고, 여성들은 임시 정부로부터 투표권을 얻어냈다. 당시 시위가 시작된 날이 율리우스력으로 2월 23일(일)이었는데, 이날이 현재의 그레고리력으로 3월 8일이었다. 이후 3월 8일은 세계 여러 나라에서 여성의 정치적·사회적 권리를 요구하는 날로 자리 잡았다. 우리는 종종 여성의 날을 꽃과 축하의 이미지로 소비한다. 그러나 그 기원은 축제가 아니라 거리 행진, 구호, 피켓, 체포, 해고 등으로 점철된 투쟁이었다. 이처럼 여성의 권리는 인권과 마찬가지로 선물처럼 주어진 적이 없다. 그것은 끈질긴 집단적 행동의 결과였다. 주디 시카고의 ‘디너 파티’는 단순한 예술 작품을 넘어 역사에서 지워진 여성들의 이름을 다시 불러내 계보로 작성한 기념비적 설치 작품이다. 거대한 삼각 테이블 위에는 39인의 여성을 위한 식탁이 놓여 있고, 바닥에는 999명의 여성 이름이 금박으로 새겨져 있다. 39인의 여성은 신화와 고대로부터 현대까지 이르는 여성 문명의 계보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여신 이슈타르로부터 흑인 여성 노예해방 운동가 소저너 트루스를 거쳐, 화가 조지아 오키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물이 포함된다. 이들 모두는 각자의 시대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에도, 역사 서술의 중심에서는 종종 밀려나 있었던 ‘여성’들이다. 그리고 바닥에 새겨진 999명의 여성 이름은 역사 속에서 업적을 남겼지만, 제대로 기록되지 않았거나 주변부로 밀려난 ‘여성’을 상징한다. 이 이름을 기록하는 것은 지워진 역사를 복권하는 작업이다. 시카고는 왕이나 장군, 남성 영웅을 내세우는 기념비의 형식을 전복시켜 식탁을 기념비로 만들었다. 권력의 동상이 아니라, 공동의 식사 자리를 통해 여성의 역사를 기억하게 하였다. 또한 자수, 도자기, 직물처럼 ‘여성 공예’로 폄하되던 매체를 대형 설치 미술의 영역으로 확장했다. 이렇듯 ‘디너 파티’는 역사의 한 축을 담당했던 여성들의 ‘이름과 기억’을 요구한다. 그렇지만 이 작품은 동시에 서구 중심적 여성 역사를 서술하는 1970년대 페미니즘의 한계를 드러내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역사에서 지워진 여성들 이름을 복권한 최초의 기념비적 시도였다. 미술평론가·철학박사
[시간은 거꾸로 간다] 초고령사회, 연명치료를 묻다
며칠 전, 어머니가 무심코 툭 던지듯 말씀하셨다. “나는 나중에 산소호흡기 끼고 그런 거 안 할 거다.” 지나가는 일상적인 대화 속 짧은 한마디였지만, 딸인 나에게는 당신의 생애 마지막 순간 무의미한 기계적 연장을 거부하겠다는 단호하고도 명확한 의사 전달이었다. 어머니의 그 덤덤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내 머릿속에는 오랫동안 가슴 한편에 묻어뒀던, 묵직하고 아픈 기억 하나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시어머니가 중환자실에 누워계실 때의 일이다. 당시 의료진은 더 이상 회복할 가망이 없다고 판단했고, 우리 가족에게 무거운 질문을 던졌다. 생사의 기로를 결정해야 하는 그 서늘한 질문 앞에서 가족 중 어느 누구도 선뜻 입을 떼지 못했다. 치료를 중단한다는 것은 마치 우리 손으로 어머니를 죽음으로 등 떠미는 것 같은 끔찍한 죄책감을 불러일으켰다. 반대로, 병을 고칠 약도, 고통을 줄일 더 높은 강도의 진통제조차 없는 상황에서 그저 기계에 의존해 생물학적 숨만 쉬게 하며, 하루 한 번 짧은 면회 시간 동안만 얼굴을 보는 것이 과연 어머니를 위한 일인지도 알 수 없었다. 혹시 모를 아주 작은 기적의 불씨라도 남아있지 않을까 하는 미련, 그리고 더 이상의 고통은 무의미하다는 절망 사이에서 가족들은 모두 서로의 시선을 회피한 채 침묵할 뿐이었다. 이제 우리 사회는 본격적인 초고령사회로 접어들었다. 늘어난 수명만큼 노년기의 돌봄과 생애 말기 삶의 질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는 시점이다. 우리 가족이 병원 복도에서 겪었던 딜레마를 마주해야 할 가족들이 무수히 많아질 것이다. 현대 의학의 발달로 생명 유지 장치를 통한 기계적인 수명 연장은 가능해졌다. 다만 그것이 곧 ‘존엄한 삶의 연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거부하고 자연스러운 죽음을 받아들이는 연명치료 중단에 대한 논의는 더 이상 금기가 아니다. 우리 삶의 질과 존엄을 위해 반드시 공론화돼야 할 화두다. 기계음에 의존해 혹시 모를 기적 때문에 고통의 시간을 늘릴 것인지, 아니면 자연스러운 순리로 죽음을 맞이할 것인지는 환자 본인이 맑은 정신으로 정확한 의사 표현을 할 수 있을 때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우리 사회의 어르신들이 자신의 생애 말기 돌봄과 연명치료 여부를 미리 고민하고, 제 뜻을 가족에게 명확히 밝혀두는 문화가 자연스럽게 자리 잡기를 바란다. 삶의 마지막 페이지를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한 결정은 단지 개인의 존엄을 지키는 권리다. 사랑하는 가족들이 겪어야 할 막막한 슬픔과 죄책감을 덜어주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따뜻한 배려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제 ‘어떻게 살 것인가’를 넘어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에 대해 스스로 답해야 할 때다.
[김필남의 영화세상] 버리고 싶지만 버릴 수 없는 가족
가족은 때로는 피난처가 되지만, 동시에 깊은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가족의 문제는 최대한 이해하려 애쓰지만 가끔은 외면하고 싶어질 때도 있다. 적당히 거리가 유지될 때는 참을 수 있지만, 그 거리가 가까워질 때는 어김없이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요아킴 트리에 감독의 ‘센티멘탈 밸류’는 바로 그 균열의 순간을 기어코 우리 앞에 세우는 영화다. 요아킴 트리에는 ‘리플라이즈’, ‘오슬로, 8월 31일’,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로 이어지는 이른바 ‘오슬로 3부작’으로 세계 영화계에 이름을 알린 노르웨이 출신 감독이다. 그는 인물의 표정과 침묵, 음악과 리듬감 있는 편집을 활용해 인물의 내면과 트라우마를 섬세하게 시각화하는 연출로 잘 알려져 있다. 이러한 연출 세계는 신작 ‘센티멘탈 밸류’에서도 또 다른 방식으로 확장된다. 요아킴 트리에 ‘센티멘탈 밸류’ 부녀간 깊은 균열 보여주는 작품 가족 관계 비추는 섬세한 연출로 세대를 넘는 오래된 상처 조명해 영화는 이혼한 아내의 장례식장에 아버지 ‘구스타브’가 찾아오면서 시작한다. 한때 유명 영화감독이었던 그는 집을 떠나면서 두 딸 ‘노라’와 ‘아그네스’와도 멀어진 인물이다. 노라는 떠난 아버지 때문에 가족이 무너졌다고 믿으며 깊은 상처를 안고 자랐다. 이제 노라는 연극배우로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지만,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로 인해 과거의 기억이 다시 떠오른다. 게다가 구스타브가 자신이 만드는 영화의 주인공 역할을 노라에게 제안하면서 가족의 갈등은 본격화된다. 그 사이에서 동생 아그네스는 중재하려 애쓰지만, 상황은 좀처럼 해결되지 않는다. 영화 제목 ‘센티멘탈 밸류’는 말 그대로 정서적 가치를 의미한다. 영화와 연결한다면 정서적 가치는 돈으로는 환원할 수 없는 것들, 추억과 감정이 담긴 물건의 가치를 뜻한다. 나에게는 중요한 가치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중요치 않아 보이는 것. 즉 영화에서는 가족이 함께 살았던 낡은 집이거나 어머니의 손길이 머문 꽃병일 수 있으며, 어린 시절 가족의 이야기를 몰래 엿들었던 장소 등에서 감정적 무게를 포착한다. 그리고 버리고 싶지만 버릴 수 없는 아버지와의 기억은 노라의 감정을 격랑 속으로 밀어 넣는다.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 가족은 가까워질 수 없음을 알지만 그렇다고 멀어지지도 못한다. 서로의 주변을 배회하지만 서로를 이해할 수 없어 힘들다. 심리적으로는 부정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어 고통스러운 노라는 아버지와 거리를 두려고 하며, 이제 구스타브는 자신이 떠날 수밖에 없었음을 딸들에게 말하고 싶어진다. 이때 이 가족의 역사는 거슬러 올라간다. 구스타브의 어머니 ‘카린’은 나치 점령 시절 저항군을 돕다 체포되어 2년간 투옥되었다. 카린은 전쟁이 끝난 뒤 결혼을 하고 구스타브를 낳지만, 어린 아들을 잠시 밖에 내보낸 사이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그 죽음은 어린 구스타브에게 설명되지 않은 상처로 남게 되었고, 어머니가 죽은 그 집에서 아내와 함께 살았고, 또 그 집에서 두 딸이 태어났다. 자신의 아픔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한 그가 남편과 아버지 역할을 제대로 해냈을 리 만무하다. 그래서 이제 어머니의 이야기 혹은 자신과 딸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 과거와 직면하려고 한다. 하지만 노라에게 아버지의 시도는 화해보다는 아직 끝나지 않은 기억을 끌어내는 일이다. 구스타브에게 예술이 정리의 방식이라면 딸에게는 여전히 현재형의 감정인 것이다. 이때 영화 속 ‘집’은 3세대의 기억이 켜켜이 쌓여 있는 장소이다. 과거와 현재가 연결되고, 누군가는 숨기고 싶고, 누군가는 말하지 않았던 감정들까지 모두 알고 있는 집은 조용한 화자로 기능한다. 이로 인해 ‘센티멘탈 밸류’는 가족의 갈등을 보여주는 드라마가 아니라 한 집안의 시간이 어떻게 다음 세대의 삶을 규정하고 이어지는지 보여주는 이야기가 된다.
[기고] 가덕도신공항, 더 이상 좌절은 없다
우여곡절 끝에 가덕도신공항 부지조성공사가 다시 착수하게 되었다. 현대 컨소시엄의 입찰 부적격 결정과 불참 선언 후 대우컨소시엄이 새롭게 참여하면서 멈춰섰던 사업이 재가동 국면에 들어섰다. 20여 년 넘게 이어진 숙원사업이 더는 지체되어서는 안 된다. 김해공항의 구조적인 안전문제를 차치하더라도, 지난해 국제선 이용객이 1000만 명을 돌파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부울경 시도민 입장에서는 한시가 급한 상황이다. 그동안 부울경 시도민들은 유럽이나 미주 등 장거리 노선을 이용하기 위해 인천공항이나 해외 허브공항을 거쳐야 하는 불편을 겪어 왔다. 지체할수록 이러한 항공 이용의 불편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가덕도신공항은 단순한 SOC 사업이 아니다. 좌절과 희망이 반복된 20년의 역사다. 2006년 남부권 신공항 검토가 공식화된 이후, 입지 논쟁과 지역 갈등, 동남권지역 현실을 잘 이해 못하는 일부 수도권의 그릇된 시각 등으로 사업은 번번이 방향을 잃었다. 시민들의 기대는 번번이 유보되었고, 고스란히 그 피해는 800만 시도민들에게 돌아갔으며 불편하고 실망스러운 세월을 보냈다. 2021년 ‘가덕도신공항 건설을 위한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사업은 비로소 국정 과제로 확정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순탄하지 않았다. 특히 부지 조성공사의 공사기간을 둘러싼 이견은 사업을 다시 멈춰 세운 결정적 변수였다. 해상 매립과 연약지반 개량이라는 초고난도 공사의 특성상 공사기간 산정은 가장 민감한 기술적 쟁점이었다. 그러나 국토부의 기술 검토 결과와 건설업계의 요구사항이 접점을 찾지 못하면서 사업은 또다시 표류했다. 문제는 견해 차이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차이를 조정하지 못한 채 시간을 흘려보냈다는 점이다. 공사기간은 데이터와 공법, 위험관리 계획에 기반해 합리적으로 수렴되어야 할 기술 영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의 지연이 반복되면서 기본설계 착수마저 늦춰졌고, 지역사회는 또다시 기다려야 했다. 더 이상의 공기 논쟁은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 이제는 검증된 자료와 책임 있는 결단으로 마무리해야 할 시점이다. 가덕도신공항 부지 조성공사는 대규모 해상 매립과 깊은 연약지반 처리를 수반하는 고난도 사업이다. 일각에서는 간사이국제공항의 지반 침하 사례를 언급한다. 그러나 간사이공항은 수백 미터에 이르는 심층 연약지반 상부 일부만 개량한 반면, 가덕도신공항 활주로 예정지는 약 22~42m 깊이 연약층의 전면 개량 적용이 가능하다. 이는 국내외 해상 매립 기술 범위 내에서 충분히 관리 가능한 영역이다. 비전문가가 주장하는 막연한 불안이 사업 지연의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컨소시엄 대표사인 대우건설은 최근 토목 분야 시공능력평가와 항만 분야 건설에서 최고의 성과를 내면서 대형 해상 토목 분야에서 기술력을 입증해 왔다. 이라크 알포 신항만 공사를 통해 초연약지반 매립과 침하 관리 경험을 축적했고, 거가대로 해저 침매터널 시공으로 가덕도 인근 해상 공사 경험도 보유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기대가 아니라, 축적된 실적이 말해주는 역량이다. 가덕도신공항은 단순한 공항이 아니다. 부산항과 연계될 경우 항공·해운·물류가 결합된 복합물류 허브로 도약할 수 있다. 이는 부산만의 과제가 아니라 북극항로 시대를 대비한 핵심 전략 인프라다. 또한 106개월에 이르는 공사 기간 동안 지역 건설업과 연관 산업 전반에 안정적 수요를 제공하여 지역 경제에 장기적 활력을 불어넣는 기반이 될 것이며 이는 현 정부의 모두가 잘 사는 균형성장이라는 국정과제와도 맞닿아 있다고 할 것이다. 우리는 오랜시간 기다려 왔다. 이제는 다시 묻지 않아도 된다. 필요한 것은 또 다른 논쟁이 아니라, 책임 있는 완주다. 가덕도신공항이 이번에는 반드시 실행으로 이어져, 더 이상 좌절의 상징이 아니라 새로운 도약의 관문이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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