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산은 대신이라더니… 산으로 가는 동남권투자공사 논의
정부가 KDB산업은행 부산 이전의 대안으로 제시한 동남권투자공사 설립이 정치 공방에 휩싸이면서 배가 산으로 가는 격이 됐다. ‘공사냐 은행이냐’ 논쟁이 내년 부산시장 선거를 앞두고 쟁점으로 비화한 탓에 지역 발전 방향을 모색하는 논의가 실종되고 있다는 우려가 크다. 게다가 지방시대위원회가 ‘5극 3특’ 국가균형성장 전략으로 권역별 투자공사를 설립하겠다고 나서면서 논란이 불거지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이 부산 시민에 공약했던 투자은행이 ‘공사’로 뒷걸음을 치더니 이제는 5개 권역에 나눠져 ‘요란한 빈 수레’로 비치는 것이다. ‘산은 대신 투자은행’의 진정성을 믿었던 부산 시민은 허탈함을 감출 수 없다. 우선 공사와 은행의 양자택일 충돌이 건전한 토론을 막고 있다. 박형준 부산시장과 여권의 시장 후보로 거론되는 전재수 해양수산부 장관 사이에 날 선 대립 탓이다. 전 장관은 “은행 규제를 피하려면 공사가 바람직하다”는 입장이다. 반면, 박 시장은 “고래(산업은행)를 참치(동남권투자은행)와 바꾸는 게 아니라, 멸치(동남권투자공사)와 바꾸는 것”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부산일보〉 보도에 따르면 지역의 기업과 금융권은 눈치를 보면서 입을 닫고 있다. 논란의 핵심인 공사와 은행의 장단점과 도입 시 활용 방안을 따지는 논의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투자 재원 마련에 참여할 부울경 지자체가 논의 구조에서 빠져 있는 것도 문제다. 산은의 지방 이전은 수도권에 쏠린 정책금융을 지역 산업 발전에 투입하려는 취지로 시작됐다. 부산은 금융 중심지이자 해양산업의 거점으로, 산은 이전의 당위성과 실효성이 모두 확보된 곳으로 평가된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산은 부산 이전을 추진했지만 결국 불발됐고, 이 대통령이 제시한 대안이 투자은행이다. 그러다 동남권투자공사로 변경됐는데, 이를 지역에서는 산은을 대체하는 역할을 하게 될 동남권 고유 기구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전국적으로 동일한 형태의 권역별 투자공사 설립이 추진되면 본래의 목적과 차별성을 잃는다고 볼 수밖에 없다. 내년 총선을 앞둔 선심성 정책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정부가 투자공사 설립을 제시했다면 산은 이전과 동일한 정책적 효과를 얻을 수 있는 실효적 방안을 내놔야 한다. 본래 취지대로 지역 전략산업에 대한 투자 기능을 온전히 갖추는 것이 필요 조건이다. 문제는 이대로라면 산은 소속 권역 센터나 정책금융 기능을 각 지역에 분산하는 것에 그칠 수 있다. 투자 재원이 흩어질 것이고, 전문성과 인력 확보도 어렵다. 각 지역 공사의 권한과 역량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고, 이는 부산이 해양수도로 도약하고 금융 중심지의 위상에 부합하는 것과 거리가 멀다. 부산 시민에 ‘희망 고문’을 강요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정부와 정치권, 지자체는 국토균형발전의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사설] 극단 대결 치닫는 여야 정치권 추석 민심 귀 기울여야
이재명 대통령 취임 이후 첫 추석 연휴가 시작됐다. 바쁜 일상을 보내던 가족과 친지들이 모처럼 만나 이야기꽃을 피울 것이다. 정치권은 추석 민심을 선점하기 위해 연휴에도 민생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이번 추석 연휴 민심은 향후 국정과 정당 지지도는 물론 내년 지방선거 여론에도 큰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하지만 현재까지의 민심은 싸늘하다. 여야는 연휴 직전까지도 김현지 비서관 인사 논란, 종교인 동원 의혹, 조희대 청문회, 검찰청 폐지 등의 사안을 놓고 극단 대결에 몰두했다. 더욱이 부산 등 지역 경제는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불황과 정치권의 날선 공방, 관세협상 난항 등에 따른 불안감과 불만이 어느 때보다 높은 상황이다. 여야는 2일부터 추석 민심을 겨냥한 본격적인 활동에 나섰다. 민주당 정청래 대표 등 의원들은 이날 용산역 대합실에서 귀성객들을 만났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 등은 이날 서울의 한 노인종합복지관에서 봉사활동을 벌였다. 부산 여야도 부산역에 집결해 본격적인 추석 민심 잡기에 나섰다. 이날 발표된 이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은 2주 전보다 2% 포인트 하락한 57%를 기록했다. 정당 지지도는 민주당이 41%, 국민의힘 22%를 기록했다. 여야 모두 이번 추석 연휴를 지지율 반등 계기로 삼는다는 전략이다. 그러나 국민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겸허한 자세로 국민과 지역의 목소리에 제대로 귀 기울이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여야가 소모적 정쟁을 되풀이하는 동안에도 부산 경제는 끝없이 추락 중이다. 공실이 늘어가고 소상공인들은 하루하루 힘겨운 삶을 이어가는 등 모든 경제 지표가 곤두박질치고 있다. 지난해 9월부터 올 8월까지 부산 기업 파산은 전년보다 34%, 법인회생은 16% 각각 증가했다. 지역 산업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지역 산업구조를 고도화하려고 해도 벤처기업 10곳 중 7곳은 수도권에 쏠려 있는 것이 현실이다. 최근 4년간 수도권에서 지방으로 이전한 477개 기업 중 부산행을 결정한 업체도 19곳에 불과하다. 현 정부가 지역 균형발전을 계속 외치고 있지만 정작 시민들은 효과를 전혀 체험하지 못하는 절망적인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민생과 지역 경제 활성화다. 해양수산부 부산 이전과 북극항로 추진 결정 등으로 인해 부산 지역 경제 회생과 활성화에 대한 기대감은 무척 높다. 그러나 제조업 위주 산업 구조가 한계에 도달하다 보니 당장 지역 경제를 견인할 동력 자체가 부족하다. 정부가 추진하는 굵직한 국정 현안들은 결실까지 긴 시간이 필요하다. 동남권 성장동력인 가덕신공항도 지지부진하다. 이대로 가다가는 정부에서 수도권 일극화를 타파하기 위해 추진 중인 부산 미래 동력들의 의미마저 퇴색될까 우려된다. 내년 지방선거를 앞둔 여야는 지역 활성화 방안 마련에 더욱 집중해야 한다. 여야가 연휴 동안 지역의 아우성을 제대로 살펴주길 기대한다.
[사설] 부산형 BuTX 민자 적격성 통과, 부울경 30분 시대 첫발
부산 도심 교통난을 해소하고 가덕신공항의 접근성을 높여 동남권 관문 공항으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한 차세대 부산형 급행철도(BuTX) 구축 사업이 본궤도에 오른다. 1일 한국개발연구원의 민간투자사업 적격성 조사를 통과했기 때문이다. 민자 도입으로 재정 부담을 줄이고 사업 효율성을 높일 수 있게 됐다. 박형준 시장의 핵심 공약인 BuTX는 가덕신공항에서 명지, 하단, 북항, 부전, 센텀, 오시리아를 연결하는 급행철도다. 총길이는 54.43km로, 사업비 4조 7692억 원이 투입된다. 시는 전략환경영향평가 등 행정 절차를 신속히 진행해 가덕신공항 개항 시기에 맞춰 개통할 예정이다. 동서 부산권을 15분 생활권으로 연결하고, 부울경 30분 시대가 첫발을 뗀 것은 고무적이다. 국내 최초로 수소 철도차량을 도입하는 BuTX 사업은 부산이 친환경 수소 첨단 도시로 도약하는 계기가 된다. 부산이 미래 친환경 수송 수단을 선제적으로 도입해 운영하는 시범 모델 도시가 되기 때문이다. 친환경 수소 차량은 지하 대심도 터널을 통과해 가덕신공항에서 북항까지 18분, 오시리아까지 33분 만에 주파한다. 교통 혼잡 완화, 대중교통 이용 편의 증대, 탄소 저감과 친환경 교통체계 구축 등 다각적인 효과가 기대된다. 부산시는 민자 적격성 조사 과정에서 수소 열차의 안전성을 면밀히 검토했다고 한다. 그러나 대심도를 달리는 수소 열차로는 첫 운행 사례인 만큼, 안전성 확보를 위한 지속적인 노력을 게을리해선 안 된다. BuTX는 부울경을 하나의 생활권으로 묶는 지역 균형발전의 핵심 동력이다. 시는 BuTX 도심 구간과 연계해 가덕신공항에서 각각 울산 태화강(A 노선), 울산 신복(B 노선), 창원(C-1 노선)을 잇는 구간과 창원~부전~태화강 구간(C-2 노선)까지 동남권 광역 연계 구간을 제5차 국가철도망 구축 계획(2026~2035년)에 반영해 줄 것을 국토교통부에 건의해 협의 중이라고 한다. 부산 도심 구간의 종점인 오시리아역에서 기존 동해선 선로를 타고 울산 태화강역까지 가는 A 노선 정도라도 국가철도망 구축 계획에 포함된다면 울산과 부산 간 이동 시간이 획기적으로 단축된다. 부울경이 지리적으로 한층 가까워지는 것이다. 부울경 광역 교통망은 초광역권의 필수 기반이자 가덕신공항으로 촉발될 남부권 상생 발전을 완성할 핵심 열쇠다. BuTX가 광역 교통망 형성의 핵심 인프라가 된다는 점에서 의미는 실로 크다. 이를 발판으로 수도권에 대적할 유일한 경제권인 부울경은 BuTX의 광역화에 더욱 힘을 쏟아야 한다. 만약 현실화된다면 비수도권 최초의 광역급행철도(GTX)가 된다. 수도권 주요 거점을 연결하는 GTX는 수도권 1극 체제를 가속화하고 있다. 이에 비해 부울경은 제대로 된 광역 교통망조차 없다. 부울경이 정부의 ‘5극 3특 국가균형성장 전략’과 연계해 BuTX 광역화와 부울경 30분 생활권을 꼭 이뤄내길 바란다.
카보베르데의 꿈
2024 파리올림픽 남자 복싱 51kg급에서 동메달을 딴 데이비드 데 피나는 경기력만큼이나 ‘미키마우스 머리’로도 큰 화제를 모았다. 그는 서아프리카의 섬나라 카보베르데 출신으로 자국 역사상 첫 올림픽 메달리스트라는 기록을 세웠다. 카보베르데는 1996 애틀랜타 이후 7차례 올림픽에 나갔지만 한 번도 메달을 따내지 못했다. 피나의 메달은 그 긴 기다림의 종지부였다.아프리카 서쪽 대서양 한가운데 떠 있는 섬나라 카보베르데는 15개의 섬으로 이뤄진 군도 국가다. 국토는 한국의 25분의 1, 인구는 53만 명 남짓한 작은 나라다. 15세기 포르투갈에 의해 발견된 뒤 500여 년간 식민지로 머물다 1975년에야 독립했다. 비록 작지만 축구 열정만큼은 뜨겁다. 1986년 국제축구연맹(FIFA)에 가입한 이후 아직 월드컵 본선에는 오르지 못했다. 하지만 2014년엔 FIFA 랭킹 27위까지 치솟으며 아프리카의 다크호스로 불렸다. 현재 순위는 70위권으로 인구 14억 명의 중국보다도 높다. 카보베르데 대표팀 선수 중 상당수는 유럽 무대에서 활약한다. 유럽 빅클럽 소속은 없지만 대부분 중소 리그나 2부 리그, 중동 리그에서 뛴다. 축구 인프라도 생활 속에 깊이 자리 잡아 바닷가와 산 중턱에도 경기장이 있으며, 10개 거주 섬 중 9곳에서 자체 리그가 운영된다. 어떤 섬은 두 개 리그를 둘 정도다. 대표팀 홈경기 날이면 팬들이 선수단 버스를 따라다닐 만큼 인기도 높다.카보베르데의 월드컵 본선 진출은 오랜 꿈이었다. 축구 전문가들은 이번이 그 어느 때보다 현실에 가까워졌다고 본다. 본선 참가국이 48개로 늘어난 영향도 있지만, 실력 또한 뒷받침되기 때문이다. 지난 8일 2026 FIFA 북중미 월드컵 아프리카 예선에서 리비아와 3 대 3으로 비겨 본선행을 확정짓지는 못했다. 그러나 여전히 조 1위를 지키고 있다. 오는 14일 조 최약체 에스와티니를 꺾는다면 사상 첫 월드컵 본선 진출이 확정된다. 그 순간은 곧 또 하나의 축구사로 기록될 것이다. 역대 참가국 중 인구 기준으로는 2018 러시아 월드컵 때 인구 40만 명의 아이슬란드에 이어 두 번째로 작은 나라가 된다. 2002 한일월드컵에서 첫 본선에 나선 세네갈이 디펜딩 챔피언 프랑스를 1-0으로 꺾으며 세계를 놀라게 했듯이 카보베르데 역시 새로운 기적을 준비하고 있다. 작은 섬나라가 세계 축구의 지도를 흔들 날이 머지않았다. 기회를 온전히 현실로 만드는 건 이제 그들의 몫. 하지만 지금까지의 여정만으로도 이미 세계는 그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있다.정달식 논설위원 dos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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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훈의 포커스온] 세대를 넘어 삶을 잇다
1970년 베트남전 참전 뒤 전쟁의 참혹함을 가슴에 새긴 채 40여 년간 장애인 복지에 헌신한 강충걸 씨, 국내 최초로 유도 8단 승단의 위업을 달성한 ‘여자 유도계의 대모’ 서경애 씨, 국내 최연소 국가기능검정 재단 1급 자격증을 따고 부산의 복식문화를 개척한 이영재 씨, 부산 영도구 제1호 여성 통장으로 수십 년간 봉사에 앞장선 이옥자 씨, 부산시 무형유산 부산고분도리걸립 예능보유자로 전통문화 보전과 전승에 일생을 바쳐 온 정우수 씨. 부산도시공사 도시재생지원센터가 지난달 펴낸 웹툰 자서전 〈세대이음 메모리얼스토리〉에서 이들의 삶을 접했다. 부산도시공사 유튜브 채널인 ‘바다가튜브’에 나온 영상 자서전도 보았다. 70대인 이들의 공통점은 부산에 오랫동안 살면서 특유의 집념과 성실함, 재능을 바탕으로 각자 분야에서 빛나는 성취를 이뤘다는 점이다. 이들의 삶에는 한국전쟁과 피란, 신발 공장 취업, 베트남전 참전 등 부산과 한국의 현대사가 녹아 있었다. 이들은 부산시와 부산도시공사가 진행하는 도시재생 문화콘텐츠 ‘세대이음 메모리얼스토리 사업’에 귀감이 되는 어르신으로 올해 참여했다. 이 사업은 지역 전문가와 관계 기관의 추천을 받은 어르신들의 일생을 재조명해 영상 자서전과 웹툰으로 서사화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도시의 정체성과 역사를 보존하는 것이 취지다. 이들은 도시재생 사업 고유 목적에 맞는 경제·사회·문화 재생 분야 어르신으로 참여했다. 사업 첫해인 작년에는 피란 수도 부산이라는 공간의 ‘과거-현재’를 연계해 어르신 5명을 조명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주목할 점은 청년 크리에이터와 어르신들의 만남과 교감이다. 영산대 웹툰학과 재학생 등은 어르신을 인터뷰해 웹툰 자서전과 영상 자서전을 만들어냈다. 시니어 세대의 지혜와 인생 경험을 소재로 삼아 MZ 세대들이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담아 헌정 취지의 자서전을 제작한 것이다. 교감과 공감을 바탕으로 시니어와 청년들이 세대를 넘어 관계를 맺고, 삶을 잇는 콘텐츠를 협업한 셈이다. 부산도시공사는 지난달 16일 부산 중구 신창동 청년작당소에서 ‘세대이음 메모리얼스토리’ 문화 교류 행사를 개최했다. 영상 자서전 상영과 웹툰 전시, 사진전, 공연 등 세대 간 네트워크 강화의 장을 마련했다. 2021년 전국 특광역시 최초로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부산의 산업은 점차 쇠퇴하고 주거 환경은 노후화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고령자들의 삶은 소외되고, 공동체의 가치와 관계성은 와해돼 이웃 간 유대감과 신뢰가 옅어지는 게 현실이다. 청년들은 떠나고 노인과 빈집이 늘어나면서, 부산은 소멸 위기에 처해 있다. ‘세대이음 메모리얼스토리 사업’은 도시 소멸의 고착화를 막고, 활기를 되찾게 하는 상상과 노력을 시도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본다. 이 사업을 접하면서 부산시의 ‘부산근현대구술자료집 사업’이 떠올랐다. 부산근현대구술자료집은 부산시가 2010년부터 지금까지 총 17곳의 자연마을을 선정해 구술 채록을 한 결과물을 바탕으로 발간하는 책자다. 부산에 인구 유입이 집중됐던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산업화 시기에 자연스레 조성됐던 마을이 도시 개발로 점차 사라지면서 이들 자연마을에 대한 생생한 구술 기록물을 남기는 작업이다. 특히 이 과정에서 배제되고 주변화될 수밖에 없었던 보통 사람들의 기억과 경험을 복원하는 것이 취지다. 마을 토박이 어르신을 심층 면접해 나온 구술과 증언을 영상과 기록물 형태로 수집한다. 구술부터 자료집 발간까지 수년은 걸린다고 하니 그 깊이와 의미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부산시 시사편찬실은 그동안 닥밭골 마을, 매축지 마을, 외양포·대항 마을, 임기 마을, 남산동 마을, 무지개 마을, 감천문화 마을, 대천 마을, 학리 마을, 안창 마을, 물만골, 돌산벽화 마을, 소막 마을 등에 관한 구술자료집을 펴냈다. 2021년 시도한 구술 채록을 바탕으로 마지막 열일곱 번째인 흰여울 마을 자료집을 내년 여름 발간할 예정이다. 시사편찬실은 2021년 마을을 주제로 한 구술 채록을 마무리한 뒤, 다양한 부산 현대사 발굴을 위해 2022년부터 음악, 영화, 연극, 무용 등 주제별 구술 채록을 진행하고 있다. 부산의 근현대 생활상과 역사를 담은 어르신들의 구술을 모아 지역사의 빈틈을 하나씩 채워나가는 것이다. 이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시민과 미래 세대를 위해서도 꼭 필요한 작업이다. 거대한 역사의 흐름에서 벗어나 있었던 지역의 미시사를 풍성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부산의 역사와 문화, 정체성을 보존하고 확산하는 길이다. 이를 위해 부산시와 지역 공공기관의 의지와 역할이 중요하다. 지역민들의 소중한 삶의 기록을 후세대와 공동체로 확산하고, 세대를 넘어 삶을 잇는 뜻깊은 걸음을 지속하기를 바란다. 김상훈 논설위원 neato@busan.com
[정훈의 생각의 빛] '몬도가네'의 환한 홀씨들
지난달 초 10년간 누렸던 ‘원도심 주민’ 생활을 청산하고 감천동으로 이사를 했다. 영주동에서 8년, 보수동에서 2년 거주했기에 정확히 10년을 채우며 살았던 부산 중구를 떠난 것이다. 물론 거주지만 옮겼을 뿐 주로 활동하는 공간은 여전히 중구다. 이런저런 이유로 가재도구는 양산에 있었는데, 양산에서 감천동으로 이사하는 일이 만만치가 않아서 걱정했다. 이삿짐센터에 연락해 우선 견적을 보고 이사 날짜를 정한 후, 이사하기 편하게 정리해야 할 물건들을 틈틈이 쟁여두거나 버리다가 이사 전날 양산으로 가서 하룻밤을 보내는데, 마음이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고작해야 한 달에 두어 번 들르는 게 전부였던 양산 공간이었지만 막상 떠나려니 찾아오는 서운함 때문이 아니었다. 당장 다음날 이른 아침부터 이사를 해야 하는 상황을 떠올리며 빨리 이 시기가 건너갔으면 하는 심정 때문이었다. 물론 이사 스트레스야 어디 나뿐만이겠는가. 인공지능이 창작마저 대체하는 시대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열정·의지 작가들이 느끼는 불안감은 기우일뿐 요즘엔 이삿짐센터에도 외국인들이 많이 들어왔는지 4명의 직원 중 팀장으로 보이는 사람만 한국 사람이었고, 나머지는 중국인이었다. 가을 초입이라고는 하지만 막바지 무더위가 절정이었던 날이었다. 반바지에 운동화 차림으로 팔과 다리에 온통 문신을 한 사람이 끼어 있었고, 다른 이들도 차림은 간편했지만 일하러 나온 사람보다는 동네 마실이라도 나온 듯 행색이 헐렁해 보였다. 나는 이들의 모습에 조금은 긴장했지만, 군소리 없이 땀을 뻘뻘 흘리며 성실하게 짐을 내리고 올리는 모습을 보면서 잠시나마 첫인상만 보고 불안했던 내가 부끄러웠다. 집 앞 골목으로 진입한 5톤 트럭이 우리 집을 얼마 두지 않고 앞집 정원수 나뭇가지에 걸려 하는 수 없이 중간쯤 차를 세워 짐을 내려야 했다. 그런데도 이들은 불평하는 듯한 표정 없이 묵묵히 주택 2층에 있는 내 공간으로 짐을 부리고 대강이나마 정리를 해주었다. 산적들처럼 갑작스레 양산 집엘 들이닥쳤다고 스스로 상상하곤 피곤한 이사를 어떻게 마무리 짓나 내심 불안했던 나는, 한바탕 소나기가 지나간 것처럼 사태가 수습되고 나서야 비로소 생각하게 되었다. 워낙 세상 인심이 험해 어제까지 상상도 못했던 일들이 눈앞에 버젓이 벌어지더라도 하등 놀랍지 않은 요즘이다. 여기저기 정리되지 못한 가재도구들이 산적했던 집을 옮겨야 하는 처지에서도 이삿짐센터 직원 첫인상만 보고 오늘날의 흉흉한 인심과 곧바로 연결 지었던 나 자신만 봐도 그렇다. 업무 중 간혹 스마트폰으로 유튜브나 짧은 영상을 보노라면 세상이 참으로 넓고, 다양한 가치관과 의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무수히 많다는 생각이 곧잘 든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세상이 천지개벽할 정도로 뒤바뀌었고, 불안한 미래가 가져다주는 의심과 불안이 팽배하였던 기억을 떠올린다. 하지만 지금은 그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AI(인공지능)의 놀라운 발전도 그 풍경 가운데 하나다. 그 기술과 기능의 고도화는 혀를 내두를 정도다. 글 쓰는 일이 업이다 보니 작가들과 만날 기회가 많은데, 요즘은 AI 때문에 작가 노릇도 이젠 접어야겠다는 식의 푸념도 자주 듣는 편이다. 이들에게 지금의 세상은 어찌 보면 몬도가네(mondo cane·개 같은 세상)다. 즉, 세상이 편리해진 만큼 창작마저 인공지능으로 대체되는 세태에 대한 일종의 불만이나, 그동안 비록 돈은 안되지만 ‘작가’라는 특수 신분이 주는 자부심도 이젠 내려놓아야 한다는 낭패감이 그런 말로 드러낸 것이다. ‘AI와 문학’이라는 타이틀로 각종 세미나나 학술대회를 비롯하여 잡지마다 기획 특집으로 분석하고 전망하면서, ‘문학’이 놀랄만한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지금의 시대에 응전하는 방법과 태도를 모색하고 있다. 이제 인간과 기계가 함께 작업해 한층 ‘업그레이드된’ 작품이 ‘제작’되어 독자의 소비를 이끄는 문화 시스템 속으로 작가들도 동참해서 걸어 들어갈 것인지, 아니면 여전히 작가의 고유 영역인 창작의 독창성을 존중해야 하는지의 판단은 오롯이 작가 개인의 몫으로 남았다. 작가의 고유성을 역설하는 이도 AI가 주는 편리성과 절묘한 구성력에 유혹을 느끼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듯이, 시대에 발맞춰 이제 작가들도 구태의연한 창작 의식에서 벗어나 기술을 십분 활용해야 한다는 이 또한 문학 고유의 창조적인 영역을 부정하지 않는다. 차림새부터 영락없이 가벼운 MZ 세대처럼 보였던 이삿짐 직원들이 물건을 손에 쥐고 옮기는 순간 보통 사람으로서는 흉내도 내지 못할 장인의 손길처럼 섬세하고 노련했던 기억을 새삼 되살린다. 과정이나 형식도 중요하지만 창작하는 내내 열정과 의지가 얼마나 지속되느냐가 작가에게 부과된 본래 능력이요 기능이다. 이 점을 잊지 않는다면 4차 산업혁명이라 일컫는 요즘, 글 쓰는 사람이 느낄 만한 불안감은 괜한 기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마음을 견지하는 태도야말로 작가 개개인이 하나의 홀씨처럼 우리 사회에 던지는 귀중한 선물이 되리라 믿는다.
[이상훈의 시그니처 문화공간 이야기] 모더니즘 최후의 거장이 남긴 걸작, 킴벨 아트 뮤지엄
문화적 퍼실리티(facility)는 인구수에 비례한다. 포트워스는 미국 내 인구로 13번째 도시이지만, 30분 거리의 댈러스와 함께 광역권으로는 미국 내 4번째 규모이다. 심지어 DFW 댈러스-포트워스 국제공항은 세계에서 2번째로 많은 취항지와 승객수를 가지고 있다. 1994년부터 30년 이상 국적기 직항노선이 있어서 어떤 이에게는 친숙할 수도 있지만, 포트워스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생경한 도시라고 여겨진다. 포트워스 다운타운 인근 한적한 공원 언덕 위에 자리한 ‘킴벨 아트 뮤지엄’은 1972년 완공, 건축가 루이스 칸의 건축 세계가 완숙기에 달했을 때 남긴 최고의 걸작이다. 단순히 전시 공간이 아니라, 빛을 재료로 삼은 건축의 시로 예찬될 만큼 건축학도들에게는 성지와도 같은 곳이다. 칸은 콘크리트와 석재, 알루미늄이라는 투박한 재료를 통해 인간의 감각과 사유를 일깨우는 공간을 만들었다. 고대 로마의 돔에서 영감을 받은 16개의 반원형 천정 중앙에 좁은 틈을 두고 그 아래 알루미늄 반사판을 설치, 자연광이 내부로 부드럽게 확산되도록 디자인했다. 하늘의 빛은 반사판을 타고 흩어지며 벽면과 바닥을 감싼다. 아침의 백색광이 전시실을 깨우고, 일몰시간 붉은 석양빛이 석재 벽을 따뜻하게 감싸면, 관람객은 마치 살아 있는 건축의 호흡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루이스 칸에게 건축은 기술이 아니라 생명에 가까운 존재였고, 킴벨 아트 뮤지엄은 단순히 눈으로 보는 공간이 아니라, 몸으로 체험하는 공간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재료의 물성, 빛의 흐름, 인간의 감각이 하나가 되는 건축가의 이상이 실현된 공간인 것이다. 오늘날 킴벨 아트 뮤지엄은 가장 완벽한 미술관 건축으로 평가되고 있는 이유이다. 킴벨의 컬랙션은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전체 350점의 소장품은 서양미술사 최고의 거장들이 남긴 걸작들이다. 미켈란젤로부터 카라바조, 루벤스, 엘 그레코, 램브란트, 벨라스케스, 세잔, 모네 등이 있다. 하지만 킴벨 아트 뮤지엄에 들어서는 순간 작품보다 공간의 존재가 더 기억에 남는다. 10개의 전시실 내부는 천정의 곡률과 빛의 각도가 달라, 걸음을 옮길 때마다 리듬감 있게 공간의 표정이 바뀐다. 2013년, 킴벨 아트 뮤지엄 옆에는 건축가 렌초 피아노가 설계한 신관이 완공되었다. 루이스 칸을 존중하며 이어받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작업하는 동안 그는 건축가가 아니라 학생이었다라고 회상했다고 한다. 칸의 건축은 거장에게도 배움의 대상이라는 뜻이다. 인근의 포트워스 현대미술관을 디자인 한 건축가 안도 다다오 역시 킴벨 아트 뮤지엄을 의식하며 작업했다고 한다.
[이상윤의 세상톡톡] 기자는 기도하는 직업
언론중재법은 그냥 놔두자는 대통령의 언급 이후 주춤하긴 했지만 집권 여당은 여전히 언론 관련 법을 들여다 보며 손질을 모색 중이다. 그 과정을 지켜보다 문득 트라우마 같은 민사소송 피소의 기억이 떠올랐다. 대기업의 무분별한 개발행위를 비판하다 800억 원대 민사소송을 당했던 사내 선배에 비하면 새발의 피에도 못 미치지만 소송 이후 기사 쓸 때마다 멈칫거리던 경험은 좀처럼 잊히지 않는 트라우마였다. 사회부 경찰기자로서 매일 경찰서의 사건과 사고를 챙기는 루틴으로 하루를 시작하던 시절이 있었다. 한 경찰서를 방문해 각 과를 돌며 오전 일과를 마무리지으려던 오전 9시 30분께. 평소 알고 지내던 한 경찰이 지나가며 한마디를 던진다. “어제 저녁에 모 국회의원이 수사과에 온 모양이던데요.” 총선을 불과 몇 개월 앞둔 시점에 지역 국회의원이 수사과에 조사받으러 온 것은 당연히 큰 뉴스지만 순간 기자는 망설인다. 당시 석간이었던 〈부산일보〉의 기사 마감 최후 마지노선은 오전 10시 30분께. 1시간 남짓 시간 안에 취재가 가능할 것인가. 내일로 미루는 것이 더 낫지 않나. 그러는 사이 다른 기자가 낌새를 채지는 않을까. 10초도 안 되는 순간 숱한 고민이 머리 속을 오간 끝에 결국 당일 취재 송고를 결정한 기자. 뛰다시피해 달려들어간 수사과에서는 해당 의원이 다녀 간 사실만 인정할 뿐 혐의 사실을 밝히기를 꺼려하는 눈치가 역력하다. 그렇게 시작해 경찰서 내 간부들에게까지 크로스체크를 하며 진행된 좌충우돌 취재는 1시간 만에 겨우 선거법 위반 혐의로 입건된 사건의 윤곽을 밝히는 데 이르렀다. 모자라는 취재를 보충하려고 부산지검에 선을 넣어 검찰이 입건 장부에 해당 사건 번호를 부여한 사실까지 확인한 뒤 급히 ‘모 국회의원 선거법 위반 혐의 입건’ 내용으로 기사를 송고했다. 그렇게 시간에 쫓기며 어렵사리 송고한 기사의 결과가 해당 국회의원으로부터의 민사소송 피소였다. 이유는 허위사실 공표에 의한 명예훼손. 짧은 취재 시간이었지만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 기자는 기사를 ‘허위사실’이라 규정한 이유가 너무 궁금했다. 해당 국회의원은 보도 시점에는 경찰 조서에 본인이 아직 날인하지 않았기에 입건이라 표현한 것은 중과실로 인한 허위라 주장했다. 그런 이유로 기자는 5000만 원 상당의 손해배상 민사소송 피고가 됐다. 상식적으로 검찰 입건 장부에까지 번호가 올라간 사건에 대해 입건 여부를 따지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지만 일단 제기된 민사소송은 1년 가까이 진행됐다. 결국 승소를 했지만 그 사이 가슴에 돌 하나를 올려놓은 듯한 고통이 남긴 생채기는 깊었다. 민주당이 한때 고려한 언론중재법 개정안의 핵심 내용은 허위·조작 보도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이다. 악의나 고의에 의한 허위·조작 보도는 반드시 근절해야 할 사회악이다. 프레임을 짜놓고 거기에 퍼즐을 맞추듯 사실을 왜곡하는 보도는 신문이든 방송이든 유튜브든 매체를 가리지 않고 최대한 엄히 다스려야 옳다. 하지만 민주당은 악의나 고의 없이 중과실만으로도 징벌적 배상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내용을 추가하려 했다. 심지어 공인에 해당하는 정치인과 공직자 뿐만 아니라 대기업까지도 언론을 상대로 징벌적 배상 청구가 가능하다며 법 적용 대상 범위를 최대한 넓히려 했다. 기자가 보도한 기사의 당사자인 국회의원은 기사의 가장 지엽말단적인 부분을 문제 삼아 중과실로 인한 허위 보도로 명예가 훼손됐다며 수천만 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공인인 국회의원의 형사사건 입건 사실 보도조차 이처럼 얼마든지 공격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만약 팩트의 진실을 다투는 사안이었으면 어떻게 됐을까. 최근 들어서는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된 사안조차 혐의를 부인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이 경우 팩트를 다투는 보도는 거의 100% 중과실로 인한 허위사실 보도 논란을 피하기 힘들 것이다. 매일 피가 마르는 마감으로 인해 취재 시간에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게 기자의 숙명이다. 거기에다 검찰이나 경찰처럼 수사권을 가지고 있지도 않으니 취재가 수사를 앞서는 건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지금까진 언론의 순기능을 인정하고 합리적인 취재로 진실임을 신뢰할 근거가 있을 때 법적으로 면책을 해주는 장치가 있었다. 하지만 이젠 그런 장치로도 보호를 받기가 점점 어려워질 듯하다. 수습기자 시절 한 선배는 이렇게 말했다. “검사처럼 강력한 수사권도 없고 교수처럼 충분한 시간도 없는 너희들이 해야 할 건 기도다. 제한된 여건 속에서 최선을 다해 취재하고 기사를 쓴 뒤 사실에 부합했기를 기도하라는 말이다.” 앞으로 그런 기도조차 통하지 않게 되는 현실이 도래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서상호의 오픈 스페이스] 문화도시는 세계적인 꿈을 꾸어야 하는가!
‘제2의 도시’는 ‘제1의 도시’를 꿈꿔야만 하나. ‘문화의 불모지’ 부산시는 민선 8기 시정 슬로건으로 ‘글로벌 허브 도시’를 내세우며 부산 엑스포 도전을 선언했다. ‘119 대 29’ 전대미문의 참패였다. 객관적인 희망의 데이터는 처음부터 찾아보기 힘들었다. 2022년 1월 19일, 현 부산시장은 엑스포 유치를 위해 방문한 프랑스 파리에서 퐁피두센터 관장과 만나 부산 분관 설립을 합의했다. 2024년 7월 22일 부산시의회 행정문화위원회에 이를 제안해 비공개로 심의했다. 비공개 이유는 퐁피두 측과 비밀리에 협의한다는 합의 때문이었다. 결국, 같은 해 10월 14일 국회 국토위 국정감사에서 당시 업무협약(MOU) 체결 문서가 공개되며 만천하에 알려졌다. 이후 지역 문화예술인들의 거센 반발이 일어나고 228명의 대학 교수까지 성명에 동참하면서 상황이 극도로 악화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퐁피두센터 부산 분관 설립은 지난달 9일 부산시의회 기획재정위원회의 ‘2026년도 정기분 공유재산관리계획안’ 심사를 통해 진통 끝에 통과되었다. 합의 내용을 몇 개만 살펴보자. 제2조 ‘사업 설명’에 ‘퐁피두센터 부산’을 퐁피두 측이 5년 동안 점유한다고 되어 있다. 즉 땅과 건물, 유지 보수, 퐁피두 센터 인력 등 모든 것은 부산시가 부담하는 것이다. 또한 ‘기획전 혹은 일부의 콘텐츠가 전 세계의 타 문화 시설에 제공될 수 있다는 것도 동의한다’라고 적시되어 있다. 5조 ‘재무 조건’에는 상설전, 기획전, 교육비와 브랜드 사용료를 합친 연간 120억 원과 세금, 운반비, 보험료 등의 모든 비용을 부산시가 부담한다고 되어 있다. 제9조 ‘언어와 준거법’에 따르면, 부산시와 퐁피두센터 양측은 이 기밀 문서를 프랑스어와 영어로만 작성하기로 하고, ‘본 양해각서는 프랑스법에 따른다’라고 협약했다. 기밀 협약 문건을 만들어 가며 ‘세계적인 미술관’ 분관을 부산에 세운다? 여기에는 어떠한 비밀이 내재되어 있을까. 곧 한화그룹은 서울 여의도 63빌딩에 퐁피두 분관을 개관하는데, KTX로 불과 2시간 30분 남짓 거리에 서양의 근대 미술을 추종하며 부산이 엄청난 기회비용을 지급하는 퐁피두 분관 유치. 그 까닭을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의문투성이다. ‘지역 문화 주권 시대’라는 말은 정치판에서 자주 등장하는 용어이다. 실제 지역의 현장에서 체감하는 온도는 싸늘하기 짝이 없다. 왜 지역은 세계적인 꿈을 꾸어야만 지방이라는 촌스러움에서 벗어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요즘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없지 싶다. 부산에서 만들어지는 문화와 미술 생태계가 비교되어야 할 일은 아니지 않은가. ‘세계적인 것’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얼마 전 국립중앙박물관의 올해 8월까지 관람객 수가 400만 명을 넘었고, 연말까지 600만 명에 달할 거라는 예상을 다룬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이는 세계 박물관 순위에서 5위권 안에 드는 수치다. 한국의 문화를 알기 위해 매일 줄을 서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부산 혹은 한국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지역’을 보고 싶어 한다. 굳이 부산에서 ‘퐁피두센터’를 만날 이유가 없다. 파리에 가면 된다. 굳이 ‘퐁피두’라는 이름을 빌려 서구적 세계화에 종속관계의 빌미를 만드는 일을 후세에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문화 사대주의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공공 행정과 욕망을 시민들에게 강요할 수는 없다. 인정 욕망의 과잉 시대를 추종하듯 관의 주도가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된다. 지역의 예술가와 시민들 각각의 삶을 존중하며 각자의 모습을 담아내는 도시가 되어야 세계적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부산다운 도시로 살아간다. 이미 부산은 산과 바다를 품은 아름다운 도시로 소문나 관광객들이 몰려오고 있다. 또한 많은 예술가도 문화 이민을 오고 있다. 거시적 관점에서 생태계를 유지해야 함에도 예술인복지센터 하나 없는 게 현실이다. 생태계의 숙주와도 같은 문화 생산자들의 유입을 받아들일 장치 하나 없는 셈이다. 제일 우선시 되는 문제는 이것이다. 지금 기후위기 앞에서 무슨 발상인가! 앞으로 닥칠 자연의 엄청난 재앙에 속수무책이다. 여태껏 잘 지켜온 천혜의 이기대 숲은 64%나 훼손될 우려가 있다. 콘크리트 건물 9개가 들어서면 숲은 사라진다고 보아야 한다. 무리한 일정으로 환경영향평가나 절차 없이 이 사업을 굳이 밀어붙이는 부산시의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올해 말까지 계약이 체결되어야 한다고 한다. 부디 없던 일로 돌아가기를 바란다. 예술가들은 지금도 자기 자리에서 하루하루를 작두 타듯 하는 삶을 살아가기에도 벅차다. 이들이 더 이상 거리로, 현장으로 나가 모질음을 쓰게 하지 말자. 투명하고 상식적인 도시에 살고 싶다. 시민들도 마찬가지일 테다.
[조희창의 클래식 내비게이터] 여름날의 마지막 장미'와 바이올린
아일랜드의 국민 시인이라 불리는 토머스 무어는 1805년 초가을에 젠킨스타운 공원을 거닐다가 마지막으로 매달려있는 장미 한 송이를 보게 되었다. 애처로운 그 모습과 시간의 무심함을 담아 시를 썼다. “여름의 마지막 장미가 홀로 피어있네. 곱디고운 친구들 모두 시들어 사라져버렸네. 한때 친구이던 꽃도 없고 꽃망울조차 볼 수 없네. 붉게 빛나던 시절을 그리며 그저 한숨을 쉬고 또 쉴 뿐이네…. 이윽고 나 또한 그들을 따라가리니. 오! 이 황량한 세상에 누가 홀로 머무르려 하랴!” 무어의 시는 낭만주의 시대에 큰 인기를 얻었고, 아일랜드 민속 멜로디에 실려 19세기 유럽에서 가장 사랑받은 노래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자 클래식 작곡가들도 이 노래를 편곡하거나 변주했다. 멘델스존의 피아노를 위한 판타지 작품15에서 이 선율을 들을 수 있다. 결정적으로는 1847년 프리드리히 폰 플로토가 만든 오페라 ‘마르타’에서 여주인공 마르타가 부르는 아리아로 쓰이면서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다. 그리고 체코 작곡가이자 바이올리니스트인 하인리히 빌헬름 에른스트(Heinrich Wilhelm Ernst, 1751~1829)도 이 노래를 주제로 한 바이올린 곡을 작곡해서 자신의 명성을 알렸다. 에른스트는 단순한 민속 선율을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초절 기교 변주곡으로 편곡했다. 주제선율이 나온 후 6개의 변주가 이어지는데, 이 과정에서 더블 스톱, 왼손 피치카토, 하모닉스 등 바이올린의 각종 테크닉을 화려하게 선보이는 난곡이다. 에른스트는 오늘날 체코의 땅 모라비아에서 태어난 유태계 바이올리니스트다. 빈음악원에서 요제프 뵘과 요제프 마이세더에게 배웠고, 일찌감치 탁월한 바이올린 실력을 자랑했다. 그러던 중 1828년에 빈을 방문했던 파가니니의 연주를 듣고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는 파가니니의 뒤를 잇는 명인이 되기 위해 미친 듯이 연습했다. 심지어 파가니니 연주회를 따라다니며 그가 묵던 숙소 옆에 방을 잡고서 훔쳐 들으며 주법을 연구했다고 한다. 그 결과 파가니니와 함께 무대에 오르는 영광을 누렸으며, 그를 잇는 당대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라는 평가를 얻었다. 1844년에 런던으로 이주하여 요제프 요아힘, 헨릭 비에니아프스키, 카를로 피아티와 함께 베토벤 현악4중주단을 결성하여 활동했고, 이후에는 프랑스 니스에서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이 곡 외에 ‘엘레지’ ‘오텔로 환상곡’ ‘론도 파파게노’ 등 멋진 바이올린 곡을 남겨놓았다. 인생도 계절도 뜨겁던 한 시절을 보내고 서늘하게 반추하는 시기를 맞게 된다. 그럴 즈음에 시와 함께 들어볼 만한 곡이다.
“자칫하면 참사”… 김해공항 아찔한 ‘선회 착륙’ 급증
수도권-지방 집값 격차, 17년 만에 최대
2년째 계속된 가자지구 포성, 1단계 휴전 전격 합의
美 셧다운 여파, 연일 천장 뚫는 금·은
2030년 부산 초등생 9만 명… 코앞 닥친 '학생 없는 교실'
‘기장 8경’ 죽도, 사유지 매입으로 관광자원 조성 본격화
“비수도권 세제 혜택 확실하게 나와야” 지방 부양책 ‘절실’
부산 민주 신구 친이재명계 갈등 수면 위
금정산 국립공원 지정, 이달 중 최종 판가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