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정부 대책에도 현장서는 주사기 품절, 의료 대란 막아야
중동 전쟁 장기화 여파로 석유화학 원료인 나프타 확보에 문제가 생기면서 의료 소모품 수급 불안정 사태가 이어지고 있다. 정부가 지난 14일부터 주사기와 주사침 매점매석 행위를 금지하고 집중 단속을 하고 있지만, 일선 현장에선 주사기 구입이 어렵다고 아우성이다. 식품의약품안전처는 매일 ‘주사기 생산 등 일일 수급 동향’을 발표하고 있다. 지난 21일 17시 기준으로 주사기 생산량은 435만 개, 출고량은 555만 개, 총재고량은 4646만 개에 달한다. 보건복지부는 22일 주사기, 주사침, 약포지, 시럽병 등 주요 의료 제품 생산량이 전년과 비교해 차이가 없다고 밝혔지만, 정작 의료 현장 체감도는 확연히 다른 셈이다. 실제로 부산 지역 의료 현장에서 벌어지는 의료 소모품 품귀 현상은 심각하다. 의료 소모품 전문 쇼핑몰에선 주사기, 주사침 등이 품절 상태라고 한다. 의료기 재료상도 비슷한 상황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병원들은 주사기, 주삿바늘, 거즈, 알코올 솜 등 의료 소모품 확보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심지어 치과 원장이 생리식염수 팩을 사기 위해 동네 약국을 전전하는 상황까지 발생했다. 대학병원도 주사기류 수급 곤란을 겪기는 마찬가지다. 입찰을 통해 도매상에서 납품받고 있지만, 1주일 단위로 버티는 형편이라고 한다. 정부가 이달 “나프타를 의료 제품 생산에 우선 공급하겠다”고 밝혔지만, 시장 불안은 가라앉지 않는 게 현실이다. 병원들은 재고 부족에 더해 가격 급등으로 인한 이중고를 겪는 상황이다. 부산 지역 대학병원 한 곳은 납품업체로부터 주사기 가격 25% 인상을 비롯해 약 포장지와 투약 병 가격 15~16% 인상을 이미 통보받았다. 의료폐기물 플라스틱 박스값은 벌써 올랐고, 폐기물을 처리하는 골판지 박스도 기름값 상승에 따른 운송비 급등으로 16.7% 인상을 요구받은 상태라고 한다. 의료 소모품 수급난이 갈수록 악화한다면 환자 진료에 차질을 빚을 우려가 크다. 나아가 지역민의 생명과 직결되는 필수 진료까지 영향받는다면 여간 심각한 일이 아니다. 의료 소모품 수급난이 개선되지 않으면 의료진과 환자의 불안감이 가중될 수밖에 없다. 정부는 지난 20일부터 의료 소모품 유통망 안정화를 위해 특별 단속을 시행 중이다. 부산시도 23~24일 6개 판매업소를 대상으로 현장 점검에 나선다고 한다. 사재기 금지, 현장 단속 등을 통해 시장 불안을 잠재우고, 의료 대란까지 번지는 일은 막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중동 전쟁과 호르무즈 해협 봉쇄가 길어질수록 주사기, 의료용 장갑 등을 만드는 나프타 확보에 차질을 빚을 수 있다. 공급망 위기가 고착된다면 의료 소모품 품귀 현상 해소는 쉽지 않다. 정부가 장기적으로 나프타 등 원료 배분과 비축, 대체 조달 체계 구축 등 국가 차원의 공급망을 재설계해야 한다. 위기 때마다 땜질 처방만으론 혼란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설] PK에서도 독자 선대위 움직임, 결단 요구받는 장동혁 대표
한 정당의 대표는 정당의 방향을 정하고 당을 대표해 대외적인 책임을 지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선거 전략 수립과 당내 갈등 조정, 주요 정책 결정 등에서 중심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 같은 당 대표의 역할 중에서도 일반적으로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선거를 앞둔 정당의 선거 전략 총괄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지방선거를 바로 눈앞에 둔 시점에 당 대표를 향해 국민의힘 내부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행태는 아주 이례적이다. 당 대표가 주도하는 중앙 선대위와 별도의 독자 선대위를 구성하겠다는 움직임이 줄을 이을 정도이니 당 대표의 리더십 자체가 궁지에 몰린 형국이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부산시장에 재도전하게 된 박형준 부산시장은 지난 21일 국회에서 “지역 선대위의 역할과 기능을 훨씬 높이는 쪽으로 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당 중앙 선대위와 별도로 독자 선대위를 구축하겠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다. 이에 앞서 서울시장 후보인 오세훈 서울시장은 아예 장동혁 당 대표를 겨냥해 “후보들에게 짐이 되고 있다”고 직격하며 독자 선대위 구상을 내비쳤다. 강원도지사 후보인 김진태 강원도지사는 22일 강원도 현지에서 진행된 장 대표의 현장 공약 발표 일정에 참석해 면전에서 “결자해지”를 요구하기도 했다. 이는 사실상 장 대표의 2선 후퇴를 요구한 것으로 해석된다. 국힘 지방선거 후보들이 당 대표와 절연에 가까운 움직임까지 보이고 나선 것은 장 대표의 갑작스런 방미가 계기가 됐다는 분석이 많다. ‘빈손 방미’ 자체도 비판의 대상이 됐지만 국힘 내부적으로는 “각종 공천 파동을 제어하지 못하고 논란만 키우던 당 대표가 미국에 가 있으니 오히려 당이 더 평온한 느낌”이라는 말까지 나돌 정도였다. 외부적으로는 장 대표의 방미 기간과 탈출 기간이 겹친 동물원 늑대 ‘늑구’와 비교하는 평행이론이 눈길을 끌며 희화화했다. 당내에선 벌써부터 홍준표 전 당 대표가 지원에 나섰다가 인기가 없어 패싱당하고 당이 대패한 2018년 지방선거의 악몽을 떠올리는 분위기까지 감지된다. 비판과 외면에 이어 결단을 요구받고 있음에도 국힘 장 대표는 태연한 모습이다. 그의 이 같은 행보 뒤에는 ‘빈손 방미’까지 추켜세우는 강성 지지층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당 지지율 급락세에도 그가 합리적인 보수층이나 중도층으로 외연을 확장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던 이유라는 얘기도 나돈다. 하지만 선거일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고 외연 확장 없이 승리의 가능성이 희박해지는 건 자명하다. 정치권을 대표하는 제1야당의 궤멸적 붕괴는 권력의 견제와 균형 측면에선 비극이다. 결단을 요구받은 이상 공당의 대표로서 장 대표는 결정을 내려야 할 것이다. 그 결정이 유권자들에게 어떻게 다가갈지 궁금하다.
[사설] '부산 글로벌법' 폐기 수순, 시민 열망 끝내 외면한 민주당
집권여당이 결국 ‘부산 글로벌허브도시특별법’ 폐기 입장을 굳혔다. 더불어민주당 한정애 정책위원장은 21일 글로벌법이 변화된 환경을 반영하지 못한다며 해양수도 육성을 골자로 전면 재설계한 새 법안 추진을 공식화했다. 그러나 폐기 결정 과정과 배경이 석연치 않고, 새 법안에 담길 내용과 추진 계획도 안갯속이어서 지역 사회는 수긍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이재명 대통령의 ‘포퓰리즘·형평성’ 언급 이후 민주당이 급선회한 점도 납득하기 어렵다. 정부 부처 검토 후 여야가 함께 발의해 이견이 전혀 없었고, 160만 명이 입법 청원에 서명한 점을 감안하면 정치적 고려 때문에 시민의 열망에 찬물을 끼얹은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글로벌법은 한때 서광이 비치는 듯했다. 박형준 부산시장이 삭발까지 감행하며 법안 처리를 요구하고, 대표 발의자인 전재수 의원이 ‘여권 설득’을 장담하고 나서자 국회 행안위를 순식간에 통과한 것이다. ‘이럴 걸 지금껏 끌었나’하며 2년 문전박대의 설움을 잊고 감격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대통령이 “대구·경북은요?”라면서 제동을 걸자 상황은 급반전됐다. 글로벌법은 또다시 민주당의 침묵과 방관 속에 길을 잃었다. 21대 국회 때 제출됐다가 폐기되고, 22대 때 재차 여야 공동발의된 뒤에도 거대 여당의 일관된 무시 끝에 글로벌법은 사라질 운명에 처했다. 신산의 고비고비를 지켜본 부산 시민의 마음은 까맣게 타들어 가고 말았다. 글로벌법 몽니의 이면에는 정책의 타당성이 아닌 여야 주도권 경쟁에 있다는 의구심은 합리적이다. 민주당이 폐기의 이유로 6·3 지방선거에 출마한 박형준 시장과 박완수 경남지사 주도로 국민의힘이 발의한 행정통합법안과의 충돌을 지적하기 때문이다. 글로벌법은 산업·기능 중심의 거점도시 전략이고, 통합특별시법은 행정 체계와 권한 재편이 초점이다. 특별시로 묶인다 해도 부산과 경남 각 도시의 기능과 전략이 없어질 수 없고, 오히려 글로벌법에 따른 물류·금융·교육 특구 지정이 부산 경계를 넘어선 광역화를 촉진할 수도 있다. 글로벌법이 선행되는 것이 행정통합을 견인하는 데 도움이 되고 종국에는 시너지 효과를 낼 가능성이 크다. 거대 여당의 글로벌법 폐기는 지역민에게 ‘희망 고문’을 강요하는 것이다. 민주당은 ‘부산의 대도약을 위해… 보완하고 기능은 더 강화하는 방향으로 재설계’하겠다고 한다. 더 좋은 법안을 마다할 수는 없지만 문제는 지금까지 민주당이 보인 방식과 태도다. 지난 2년간 아무런 이유 없이 청문회조차 미루면서 철저히 외면하더니, 돌연 급행 처리 수순에 들어갔다가 또 석연찮은 이유로 폐기를 결정한 과정에서 이미 신뢰를 잃었다. 민주당은 폐기의 이유와 재설계 방향, 입법 시한을 명확히 밝히고 공론에 부쳐야 할 책임이 있다. 만약 정치적 셈법으로 도시의 미래 설계도를 흔드는 시도로 드러나면 거센 시민 저항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아무도 관심 없는 클래식
할리우드 배우 티모시 샬라메가 올 2월 오페라와 발레를 “아무도 관심 없는 공연 예술”이라고 지칭했다가 거센 후폭풍에 휩싸였다. 배우 샬리즈 세런은 “경솔하다”며 일침을 가했고,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영화만큼 발레와 오페라도 특별한 감동의 경험을 준다”고 지적했다. 패션 잡지 〈엘르〉도 반박에 가세했다. 3월 1일 자 ‘오페라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에서 화려한 옷차림의 젊은 여성들이 오페라 극장을 순례하는 영상을 소셜 플랫폼에 올리는, 이른바 ‘오페라 걸’ 유행을 소개했다. 이어 팝 가수 로살리아·비욘세·레이 등이 ‘오페라 미학’의 부활을 이끄는 데 힘을 보태고 있다고 전했다. 로살리아의 ‘Lux’나 비욘세의 ‘Daughter’는 성악적 발성과 극적 표현을 차용했다. 오페라식 합창과 극적 서사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 이후에도 클래식의 영향력은 다른 장르에 스며들며 변주되고 있다.클래식은 유행이나 소비에 그치지 않는다.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매개로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일본 동일본대지진 피해 지역에서 어린이들의 자존감 회복을 위해 시작된 음악 교육 프로그램 ‘엘시스테마 재팬’이 좋은 사례다. 시민 성금으로 운영되는 오케스트라 교육에서 아이들은 하모니를 배우며 치유되고, 기부자들은 공연을 보면서 성장하는 기쁨을 나눈다. 이 운동은 1975년 빈곤과 범죄에 노출된 베네수엘라 청소년 대상의 ‘엘시스테마’가 원조다. 미국의 ‘LA청소년오케스트라’(YOLA), 한국의 ‘꿈의 오케스트라’를 비롯해 전 세계 70개 나라에서 클래식이 청소년들의 삶을 바꾸고 있다.부산에서도 의미 있는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다. 기업 23곳(개인 2명 포함)이 20일 ㈔부산클래식문화재단에 35억 원을 기부했다. 지난 연말에도 업체 두 곳이 성금 20억 원을 전달했다. 특정 회사의 개별 후원 사례는 흔하지만 향토 기업들이 지역의 클래식 문화 진흥을 위해 십시일반 힘을 보탠 경우는 드물다.부산콘서트홀에 이어 올 연말 부산오페라하우스가 완공된다. 최고 시설의 공연장이 들어선다고 곧바로 세계적인 문화 도시로 발돋움하는 것은 아닐 테다. 관객을 불러들일 콘텐츠 전략과 함께 지역 사회 내부에서 클래식을 매개로 다양한 연결점과 공감대가 형성돼야 한다. 이번 기부금이 공연 지원, 교육, 소외 계층 음악 나눔 사업에 쓰일 계획이라니 ‘아무도 관심이 없다’는 편견을 깨고 클래식의 저변을 넓히는 전환점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문화로 융성한 도시’에 가까워진다.김승일 수석논설위원 dojun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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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내 데이터로 돈 버는 기업, 데이터 배당 어떤가
최근 미국 빅테크 기업 메타가 새로운 AI 모델 ‘뮤즈 스파크’를 발표했다. 메타는 뮤즈 스파크가 ‘개인 맞춤형 AI’를 지향한다고 밝혔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 사용자의 사용 경험을 AI가 학습해 ‘개인화 경험’을 제공한다는 설명이다. 메타가 수집한 방대한 양의 사용자 정보가 AI 서비스에서도 수익화의 핵심 요소가 되는 셈이다. 메타는 올해 광고 수익이 처음으로 구글을 넘어설 것이라는 예상이 나온다. AI 기반 맞춤형 추천 시스템으로 광고 효율을 높인 결과다. AI 추천 기능으로 메타의 숏폼 서비스인 릴스 시청시간도 30% 이상 증가했다. 이는 광고 노출 확대와 수익 증가로 이어졌다. 메타는 35억 명 이상의 1일 사용자를 확보하고 있다. 페이스북의 ‘좋아요’ ‘공유’ ‘댓글’에서 가입자 위치정보, 기기 정보 등은 메타의 ‘초정밀 개인 데이터’로 변한다. 메타는 이를 기반으로 ‘타깃 광고’를 판매 막대한 수익을 올린다. 구글도 가입자의 검색어, 유튜브 사용 행태, 지도 사용 행태 등을 분석해 타깃 광고를 판매한다. 아마존도 가입자의 구매 이력, 검색 기록, 장바구니 데이터, 배송 주소, 동영상 서비스(아마존 프라임) 시청 이력 등으로 구매 의도를 분석해 수익으로 전환한다. 아마존의 경우 실제 구매 행동 데이터라는 점에서 더 높은 광고 단가를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 플랫폼 기업 역시 마찬가지다. 검색어, 쇼핑, 지도, 블로그, 카페 등의 이용 데이터를 기반으로 개인화 검색·디스플레이 광고를 판매해 수익을 올린다. 빅테크 기업들이 수익화에 열을 올리는 개인 데이터는 실제로 어느 정도의 시장 가치가 있을까. 사이버보안 기업 프로톤(Proton)의 분석에 따르면 2024년 기준 미국 거주자의 개인 데이터는 구글과 메타(페이스북)에서만 연간 최소 700달러의 수익을 만든다. 빅테크 수익의 원천인 개인 데이터는 ‘브로커’를 통해 대규모로 거래되고 있다. 시장분석기관에 따르면 글로벌 데이터 브로커 시장 규모는 2024년 기준 약 2704억 달러로 평가됐다. 전 세계적으로 최대 5000개의 데이터 브로커가 활동하는 것으로 추산됐다. 전체 데이터 브로커 시장에서 68%는 소비자 데이터라는 분석이 나온다. 국내에서도 데이터 거래는 거대 산업으로 성장했다. 한국데이터산업협회의 ‘2025 데이터산업 백서’에 따르면 국내 ‘데이터 판매 및 중개 서비스업’ 시장규모는 2024년 기준 3조 3818억 원으로 추산됐다. 이처럼 개인 데이터가 빅테크의 수익화 원천으로 활용되고 대규모로 거래되는 상황에서도 데이터의 주인인 개인은 자신의 데이터에 대한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다. 빅테크 기업은 개인 데이터 수집과 활용의 대가로 자신들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SNS 등 서비스를 공짜로 제공하는 대신 개인 데이터를 사용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개인들이 자신과 관련된 수많은 정보를 팔아서 빅테크의 서비스를 이용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개인들이 자기 데이터의 시장 가치를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서비스 대가로 공짜로 주고 있다는 설명이다. 개인이 자기 데이터를 직접 판매해 수익을 창출하는 것은 현행 제도에서 불가능하다. 현재 정부 주도로 ‘마이데이터’ 제도가 시행되고 있지만 개인이 본인 정보 열람에 대한 권한을 일정 부분 행사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이와 관련, 해외에선 개인에게 데이터 사용료를 직접 지불하는 여러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미국에서는 ‘데이터 배당’(data dividend) 제도가 제안됐다. 캘리포니아 주지사 개빈 뉴섬이 제안한 데이터 배당은 개인 데이터로 창출된 부를 기여자인 개인에게 배당금 형식으로 되돌려 주는 방식이다. 데이터 의존성에 따라 기업에 세금을 부과, 이를 재원으로 공공재에 투자하자는 제안도 나왔다. 영국에서는 민간 기업이 운영하는 데이터 거래 플랫폼에 개인이 직접 참여하는 방식이 제안됐다. 개인이 자신의 금융, 의료, 신체활동, SNS 활동 등 정보를 직접 저장, 관리할 수 있고 데이터 수요처에 이런 데이터 사용을 허락하는 대신 보상을 받는 방식이다. 개인 데이터 수익화에 대한 개인 보상은 규제 방식으로 시행될 경우 자국 기업의 부담만 커지는 ‘역차별’을 낳을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 때문에 개인이 자발적으로 데이터를 제공하고 정당한 대가를 받을 수 있는 민간 시장 육성이 중요하다. 이 경우 기업도 데이터 수집과 거래 비용을 줄일 수 있다. 정부가 태양광 산업에서 추진하는 ‘햇빛연금’처럼 개인 데이터 사용 대가에도 관심을 가진다면 데이터 배당도 현실화될 수 있다. 김종우 서울경제부 부장 kjongwoo@busan.com
[중앙로365] 이것이 왜 산업재해가 아닌가
지난 2월, 경찰행정학을 공부하며 아르바이트를 하던 19세 여성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일하던 직장에서 고용주인 40대 남성에 의해 성폭력 피해를 겪고, 즉시 이를 경찰에 신고했다. 그러나 경찰은 범행 전후 CCTV에서 피해자가 웃고 대화하고 보행하는 모습이 확인된다는 점, 가해자가 ‘합의한 관계였다’고 진술했다는 점과 주변 진술을 근거로 피해자가 항거 불능 상태가 아니었다며 가해자에 대하여 무혐의 불송치 결정을 내렸다. 그 결정이 이뤄진 지 3일 만에, 피해자는 “(성관계) 동의 의사를 보인 적이 없으며, (수사 결과를)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마지막 메시지를 남기고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 피해자의 죽음으로 사건이 공론화하는 일이 여전히 반복되는 현실이 참담하다. 더욱 비극적인 것은, 이번 사건에서 피해자는 최선을 다해 용기를 냈고, 적극적으로 국가에 구조 신호를 보냈다는 점이다. 피해자의 유언이나 다름 없었던 이의신청에 따라 재수사가 이루어졌지만, 경찰은 수사에 문제가 없다는 결론을 반복했다. 이에 지역 시민단체가 모여 꾸린 공대위에서는 기자회견을 열어 “수사 시스템은 40대 사장과 10대 알바생의 권력 격차를 완전히 무시했다“며 ”청소년이라는 사회적 약자, 노동자라는 경제적 약자를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는 공권력의 사법적 사살”이라고 분노했다. 공대위의 이와 같은 지적은 이 사건이 형사사법 시스템과 노동 보호 시스템이 동시에 실패한 사건이라는 점을 짚고 있다. 고용주가 성폭행한 10대 알바생 사법과 노동 보호 시스템 실패에 항의유서 남기고 스스로 삶 마감 단시간 노동자 인권 침해 사안이 남녀 관계 문제로 돌변했던 현실 산업재해 본질 되묻게 하는 죽음 먼저 형사사법의 실패부터 보자. 한국성폭력상담소는 성명서를 통해 준강간 사건에서 피해자가 사건 정황을 기억하고 구체적으로 진술하면 심신 상실과 항거 불능이 아니었다고 하고, 반대로 기억하지 못하면 진술이 부족하다며 범죄 성립을 부정하는 수사기관의 전형성을 비판한다. 고용주와 단시간 노동자 간의 권력 관계를 이용한 가해를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는 수사라는 것이다. 경찰이 아직도 현행 강간죄와 준강간죄의 구성요건에 갇혀 사건의 실체를 규명하지 못한다면 비동의 강간죄 도입이라는 입법적 해결이 필요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실제로 우리보다 앞서 강간죄를 ‘부동의 성교죄’로 바꾼 일본 역시 4건의 성폭력 무죄 판결로 뒤떨어진 성인지 감수성을 드러낸 사법부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가 촉매가 되어 입법 활동을 이끌었다. 일본의 사례는 한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가해자의 ‘합의’ 주장은 근거도 없이 수용하면서 피해자의 ‘동의’ 여부는 고려조차 하지 않는 수사 관행은 국민 눈높이와도 맞지 않는 뒤떨어진 인식으로 분노만 자아낼 뿐이다. 노동 보호의 실패는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공무원 사이에는 간이며 쓸개를 집에 걸어두고 출근해야 한다는 농담이 있다. 비단 공무원 사회뿐만이 아니다. 직장생활에서 마음속 진의와 상관없는 사회적 미소를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짓도록 요구받는다. 거기다 직장에서 갖는 회식 자리는 엄연히 업무의 연속이다. 경찰은 CCTV 속 피해자의 미소를 성관계 합의의 증거로 읽었지만, 그것은 업무의 연장선인 회식 자리에서 10대 아르바이트생이 40대 고용주 앞에서 지어야 했던 노동 현장의 언어였다. 그러나 수사 시스템은 그 권력 관계를 사적인 남녀 간의 문제로 환원해버렸다. 모든 사업장에 적용되는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르면 사망자가 1명 이상 발생한 재해는 중대재해에 해당한다. 이 사건은 단시간 노동자로서 직장에서 가장 악질적인 형태의 직장 내 괴롭힘 혹은 성희롱 피해로 인권을 침해받은 사안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노동자의 인권 침해를 막아서고 안전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인 근로기준법이나 남녀고용평등법, 산업안전보건법은 이 사건에서 전혀 작동하지 못했다. 정부는 이 사건을 통해 단시간 노동자가 인권을 침해받고 안전을 보호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책임을 느끼고 뼈아픈 성찰을 해야 할 것이다. 안희정 전 지사의 성폭력 사건을 공론화했던 김지은 씨는 “내가 지키고 싶은 나의 전부인 ‘노동자 김지은’으로서의 삶을 걸고 미투를 해야만 했다. 그 분야에서 쌓아온 저의 미래도 함께 버려야만 했다”고 회고한다. 이처럼 갑의 위치에 선 고용주의 성폭력은 노동자의 생존에 대한 위협이다. 단시간 노동자가 고용주의 갑질에 의해 성폭력 피해를 입었다. 피해자는 충격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가해자를 처벌하고 일상을 회복하고자 했으나 수사기관은 사적인 남녀 관계의 문제로 사안을 보았음은 물론 피해자의 권리를 제대로 보호하지 못했다. 비동의 강간죄가 부재하고, 근로기준법과 고용평등법이 침묵하고, 경찰이 성인지 감수성을 망각한 바로 그 사각지대에서 한 10대 청년 여성 단시간 노동자가 죽었다. 그렇다면 이것이 왜 산업재해 혹은 중대재해가 아닌가.
[다른 시선으로] 젠더의 천륜
일본 야스쿠니 신사 참배의 문제는, 첫째로 전쟁을 일으킨 가해자와 전쟁으로 인한 피해자가 거기에 함께 합사된 것이고, 둘째는 그 모두를 함께 추모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으로서 마땅한 일이며, 거기에 가해와 피해를 따지는 일이 덜 인간답다는 인식이 그로 인해 유포되는 것이다. 이런 구도 속에서는 전쟁의 피해와 가해를 엄정하게 따지는 일이 마치, 사람이면 마땅히 기리고 애도해야 할 추도를 하지 말자는 냉혈한의 입장으로 보이게 된다. 성폭력 가해자에 대한 추모도 마찬가지다. 어떤 성폭력 가해자가 유명을 달리했을 때, 그 사람을 어떻게 추도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쟁이 으레 따라붙는다. 성폭력 사건에 대한 진심어린 사과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경우, 그 죽음은 피해자에 대한 최종적인 가해에 가깝기 때문에 가해자를 공적으로 추모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그럴 때 마주하는 목소리 중 하나는, 그래도 사람이 죽었는데 추모는 할 수 있는 것 아니냐며, 젠더 외치는 사람들은 어쩜 그렇게 피도 눈물도 없느냐는 반응이다. ‘피도 눈물도 없이’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반대하고 성폭력 가해자 공개 추도를 반대하는 것은, 그걸 말하는 사람에게 피도 눈물도 없기 때문이 아니다. 삶과 죽음의 값이 피해자와 가해자에게 부디 공평히 배분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잊지 않기 위해서다. 가해자에 대한 인간적 추모를 강조하는 사람이, 그 사건 피해자의 죽음에 대한 인간적 추모에 그만큼 관심을 갖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온갖 사회적 지탄을 감당할 가해자가 앞으로 대체 어떻게 살아가란 말이냐며 가해자에 대한 인간적 연민을 강조하는 사람이, 그 사건 피해자가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 비슷한 관심을 갖는 경우도 거의 드물다. 핵심은 가해자의 삶과 죽음을 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의 삶과 죽음을 그보다 조금 더 많이 말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모든 사람의 삶과 죽음이 이미 같은 값을 가졌다고 믿고는, 자기와 좀더 친하거나 아무리 봐도 힘세 보이는 사람들의 삶과 죽음에 먼저 감정이입한다. 그렇게 자유주의적으로 구성된 연결망이 피해와 가해를 따지는 일을 만나 한번 깨어지면, 그 사람은 그걸 따지려는 상대가 마치 천륜을 깬 것만 같은 강렬한 거부감을 느낀다. 그러나 젠더를 외치는 사람이 내가 알던 천륜을 깬 것 같은 이유는, 같은 하늘 아래 내가 짐작하지 못한 곳에서 그 천륜을 마땅히 함께 누려야 했을 다른 사람을 마주하기 위해서다. 세상에는 놀랍게도 내가 믿어온 추모와 슬픔의 항아리가 깨지는 편이 정의로울 때가 있다. 내 천륜만이 천륜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의 삶과 죽음이 마침내 같은 값을 지니기 위한 길은 그처럼 멀고 험하다.
[김필남의 영화세상] 미로 속에 갇힌 정의
국가 폭력은 종종 과거의 일로만 정리된다. 기록 속에 봉인되고, 기념일에만 호출되며, 더 이상 현재의 문제가 아닌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권력은 형태를 바꾸며 이어지고, 법과 제도라는 이름 아래 폭력은 종종 더 정교해진다. 그로 인해 누군가에게는 끝난 이야기일지 몰라도,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현재진행형이기도 하다. 세르히 로즈니차 감독의 ‘두 검사’는 바로 지속되는 폭력의 기원을 응시하게 만든다. 영화는 1937년 소련 대숙청이 한창이던 시대를 다룬다. 모스크바 남서쪽 브랸스크의 한 교도소에는 수많은 탄원서가 읽히지도 못한 채 난로에 태워지고 있다. 그러던 중 기적처럼 한 통의 혈서가 신임 감찰 검사 ‘코르니예프’에게 전달된다. 혈서를 쓴 사람은 원로 법학자 ‘스테프냐크’이다. 그는 스탈린 체제를 지탱하던 비밀경찰 기구 내무인민위원부(NKVD)의 공작으로 억울하게 수감되어 고문당하고 있다고 증언한다. 세르히 감독이 응시한 신입 검사의 여정 30년 만에 세상에 공개된 원작소설 바탕 영화 속 돋보이는 데칼코마니 연출 거대한 관료 시스템 속 인간의 무력함 ‘두 검사’는 억울한 피해를 밝히고 정의를 회복하는 이야기처럼 보인다. 하지만 영화는 코르니예프를 억압적 체제와 대결하는 영웅으로 그리지 않는다. 감독은 이 시대의 문제를 몇몇 악한 개인이나 부패한 관리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시스템 전체의 구조로 확장해서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정의를 바로잡을 수 있다고 믿는 그의 신념이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 드러낸다. 이제 코르니예프는 감찰 검사로서의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향한다. 하지만 그 여정은 해결로 나아가지 못하고, 권력의 중심부를 확인하는 과정에 가깝다. 영화 전반부는 교도소 내부를 파고든다. 그 공간은 복잡한 규칙과 절차로 가득 차 있고, 교도소 정문에서부터 스테프냐크가 있는 감옥까지 누군가의 허락 없이는 한 걸음도 내디딜 수 없는 폐쇄적인 곳이다. 게다가 겹겹이 열쇠로 잠긴 문들을 통과해야만 스테프냐크를 겨우 만날 수 있으며, 코르니예프 또한 누군가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다. 이를 통해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문 안에 있든 문밖에 있든 모두 제약 속에 갇혀 있음을 확인시킨다. 증거와 증언을 확인한 코르니예프는 곧바로 모스크바행 기차에 몸을 싣는다. 부패한 중간 관리자가 아닌, 체제의 최상층에 있는 검찰총장 ‘비신스키’가 정의를 회복해 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총장을 만나는 일은 쉽지 않다. 총장실을 찾아 계단을 오르내리거나, 접견 허가를 무한정 기다리거나, 무표정한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장면에서는 권력의 층위를 확인할 뿐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교도소와 검찰총장 관저가 서로를 옮겨놓은 듯한 데칼코마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영화 배경은 확장된 듯 보이지만, 본질은 여전히 밀실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런 의미로 코르니예프가 진실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믿는 모스크바는 해결의 장소가 아니다. 모든 결정이 내려지는 곳이며, 아래로 명령을 내리는 중심부에 가깝다. 그래서 그가 도달하는 곳마다 결정은 미뤄지고, 진실은 접수되지 않는다. 애초에 열리는 문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고 철창으로 가로막혀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영화는 거짓과 진실의 여부가 아니라, 시스템 안에서 모든 말들이 무화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실패로 끝난 여정에 집중하기보다는 거대한 관료 시스템으로 끌려 들어가는 인간의 무력함을 그린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는 시베리아 강제 수용소에서 14년 동안 수감됐던 우크라이나 출신 과학자 게오르기 데미도프가 쓴 자전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그의 원고는 1980년 KGB(국가보안위원회)에 의해 압수되었다가 2009년에야 세상에 공개되었다. 한 개인의 경험과 기억이 30년 가까이 봉인되었다는 사실이, 이 영화가 말하려는 폭력과 억압의 성격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어 씁쓸하다.
[김종기의 미술 미학 이야기] 보이지 않는 폭력이 보이는 순간 - 한강의 <채식주의자>
평범한 아내 영혜가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순간, 세계는 그녀를 ‘비정상’으로 규정한다. 마찬가지로 평범한 사회인인 남편은 그녀를 정신병자로 취급하여 이혼을 택하며, 베트남 참전용사이자 권위적인 가부장제의 대표로 묘사되는 아버지는 그녀를 폭력으로 교정하려 한다. 미셸 푸코가 말했듯, 근대 사회의 억압은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설정함으로써 유지된다. 정상의 경계에서 벗어나는 개인은 곧바로 병리의 대상으로 분류된다. 권력은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정상성을 만들어낸다. 정상적인 식사와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폭력은 보이지 않도록 조직된다. 우리는 고기를 먹지만, 그것이 죽음이라는 사실을 느끼지 않는다. 그런데 영혜에게 고기는 더 이상 음식이 아니라 죽음으로 보이고, 가족은 더 이상 보호가 아니라 폭력의 공간으로 드러난다. 프로이트가 말한 ‘운하임리히(Unheimlich/uncanny)’, 즉 익숙한 것이 낯설어지는 불안이 바로 여기서 발생한다. 가족의 식사 장면에서 아버지는 영혜의 입에 고기를 억지로 밀어 넣고 거부하는 그녀의 뺨을 거세게 갈긴다. 설득은 강제로, 강제는 폭력으로 이어진다. 이 장면은 낯설지만 익숙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익숙하게 살아온 질서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나의 작품을 떠올린다. 1964년 카롤리 슈니먼의 퍼포먼스 ‘Meat Joy, 환희의 육체’이다. 신체를 예술의 재료로 사용하는 퍼포먼스 예술의 기념비적 작품이다. 사람들은 날고기와 생선, 생닭을 몸에 문지르며 뒤엉킨다. 그것은 육체의 해방이자 동시에 산 육체와 죽은 고깃덩이가 하나임을 드러낸다. 여기서는 음식과 생명, 쾌락과 폭력의 경계가 무너진다. 슈니먼은 폭력을 비판하지 않는다. 그녀는 그것을 감각의 한가운데로 끌어들인다. 그 순간 해방과 폭력은 더 이상 구분되지 않는다. 퍼포먼스는 쾌락을 추구하는 일탈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세련된 문명 뒤에 숨겨진 육체적 고통과 죽음, 그리고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가해지는 근원적 폭력을 직면하게 한다. 〈채식주의자〉 역시 마찬가지다. 영혜는 숨겨진 폭력을 보이게 만든다. 그래서 그녀는 위험하다.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보다 폭력을 보이게 만드는 사람이 더 위험하기 때문이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인혜는 자신 역시 같은 질서 속에서 살아왔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질문은 우리에게 돌아온다. 우리는 정말 정상인가? 〈채식주의자〉는 우리가 일상이라고 부르는 그 정상성을 찢어놓는다. 영혜가 위험한 이유는 폭력을 숨기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보이지 않는 폭력을 드러내는 순간, 세계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폭력이 만연하고, 그 폭력에 감각이 무뎌진 세계에서 채식주의자 영혜는 우리가 보지 않기로 한 것을 끝내 보이게 한다. 미술평론가·철학박사
[기고] 부울경이 아닌 대한민국의 가덕신공항 추진하자
중동 전쟁 이후 요즘 부쩍 항공에 관한 질문을 많이 받는다. 중동을 지나는 비행기는 안전하냐, 유가가 많이 오르면 비행기값도 올라 여행하기 어려운 거 아니냐, 지방공항 장거리 직항노선은 언제쯤 생기느냐 등이다. 그중에는 인천공항공사와 한국공항공사, 가덕도신공항공단을 합치는 것이 좋은 지에 대한 질문도 적지 않다. 결론부터 말하면 3개 공항건설·운영기관의 통합으로 ‘K항공산업’을 발전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부울경 지역민의 항공교통 편의와 지역 내 외국인 관광객 500만 명 시대, 그리고 대한민국의 지역균형발전과 글로벌 항공강국 도약을 위해서다. 부산은 대한민국 제2의 도시이지만, 수도권 사람들과 외국인들에게는 아직도 ‘촌’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특히 김해공항에 가면 이러한 현실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국제공항이라는 이름과 달리 터미널은 늘 좁고 붐빈다. 미국이나 유럽으로 가는 장거리 직항노선이 없어 해외 출장이라도 가려면 인천을 들러 목적지까지 가는 데 꼬박 이틀이 걸린다. 불편함을 겪어보지 못한 수도권 사람들은 절대 이해하지 못하는 지역의 웃픈 현실이다. 대한민국의 관문공항인 인천국제공항은 개항 이후 25년간 ‘전략적 허브공항’이라는 정책적 지원을 받아 왔다. 그 결과 우리나라 국제선 수요의 약 80%가 인천공항에 집중됐다. 이 과정에서 지역민의 항공교통 소외문제는 점점 심화됐다. 특히 김해공항의 국제수요를 인천공항으로 실어 나르는 환승내항기는 오히려 외항사의 지역공항 직항 취항을 가로막는 요인으로 지적된다. 이는 인천공항 쏠림 현상을 더욱 강화하는 요인으로 꼽힌다. 문제는 현재의 공항 운영 체계와 국가 재정 여건만으로는 가덕신공항의 미래를 낙관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국가재정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항공물류를 중심으로 한 가덕신공항 글로벌 경제권 조성을 위해서는 국가적 차원의 공항자원 배분과 지원 등 ‘선택과 집중’이 불가피하다. 더구나 현 단계의 가덕신공항건설공단은 과도기적 조직에 머물러 있어 자체적으로 예산을 편성·집행할 수 없는 구조다. 애초 재정 자립이 어렵기 때문에 사업 추진 과정 전반에 걸쳐 불확실성에 대한 우려를 지우기 어렵다. 문제 해결을 위해선 무엇보다 공항 건설∙운영 전반에 대한 통합적 거버넌스 구축이 필요하다. 현재 공단이 안고 있는 한계를 해소하고 향후 성공적으로 공사 체제로 전환하려면 인천공항과 지방공항을 각각 운영하는 양 공사가 경쟁하듯 중복 투자하고 있는 공항 개발(R&D)과 관리기능을 통합 정리해야 한다. 실제 공항을 이용하는 이용객 중심의 서비스 체계로 재편할 필요가 있다. 정부 역할도 분명해져야 한다. 전국 공항의 안전과 공공 기능을 총괄하는 컨트롤타워로서 앞으로 우리나라에서 건설∙운영될 가덕신공항, 제주2공항, TK공항 등에 최고 수준의 안전과 최첨단 기술이 투입되도록 지휘·감독해야 한다. 지난 국가관광전략회의에서 논의된 지방공항의 연결성 강화와 지역관광 활성화 역시 실행 주체와 체계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공허한 구호에 그칠 수밖에 없다. 일각에서는 인천공항과 지방공항 통합 운영이 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한다. 그러나 이는 공항의 공공성과 국가균형발전이라는 가치보다 수도권 중심 논리에 치우친 시각에 가깝다. 인천공항만을 세계적 허브로 키우는 전략은 국토균형발전이라는 국가적 과제와도 맞지 않고, 결국 수도권 밖 지역민들에게는 14개 지방공항을 계속 불편하게 사용하라는 말과도 같다. 가덕신공항이 인천공항과 같은 글로벌 관문공항으로 성장하려면 인천공항과 전국 지방공항 운영 과정에서 축적된 경험과 역량을 유기적으로 결합해야 한다. 동시에 김해공항에서는 다양한 국제노선 운영 경험을 지금부터 축적해 나가는 것 역시 필요하다. 가덕신공항은 대한민국의 새로운 관문공항이자 미래 항공산업의 성장 거점이 될 국가적 프로젝트다. 공항의 통합된 안전관리와 서비스 체계, 항공 네트워크의 유기적 활용을 통해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해야 한다.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공항을 새로운 K항공산업의 핵심 인프라로 인식하고 공항건설·운영기관의 거버넌스 통합을 모색하는 정부 정책은 긍정적이다. 이제는 지역 논리를 넘어 국가 전략의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 가덕신공항은 결코 부울경만의 지방공항이 아닌 대한민국의 미래 공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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