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훈의 포커스온] 세대를 넘어 삶을 잇다
부산도시공사 메모리얼스토리 사업
귀감 어르신 웹툰·영상 자서전 제작
부산근현대구술자료집 결과물 꾸준
도시 정체성과 역사 보존에 긍정적
개발·노후화로 세대 간 유대·신뢰 약화
지역민 소중한 삶의 기록 공유·확산을
1970년 베트남전 참전 뒤 전쟁의 참혹함을 가슴에 새긴 채 40여 년간 장애인 복지에 헌신한 강충걸 씨, 국내 최초로 유도 8단 승단의 위업을 달성한 ‘여자 유도계의 대모’ 서경애 씨, 국내 최연소 국가기능검정 재단 1급 자격증을 따고 부산의 복식문화를 개척한 이영재 씨, 부산 영도구 제1호 여성 통장으로 수십 년간 봉사에 앞장선 이옥자 씨, 부산시 무형유산 부산고분도리걸립 예능보유자로 전통문화 보전과 전승에 일생을 바쳐 온 정우수 씨.
부산도시공사 도시재생지원센터가 지난달 펴낸 웹툰 자서전 〈세대이음 메모리얼스토리〉에서 이들의 삶을 접했다. 부산도시공사 유튜브 채널인 ‘바다가튜브’에 나온 영상 자서전도 보았다. 70대인 이들의 공통점은 부산에 오랫동안 살면서 특유의 집념과 성실함, 재능을 바탕으로 각자 분야에서 빛나는 성취를 이뤘다는 점이다. 이들의 삶에는 한국전쟁과 피란, 신발 공장 취업, 베트남전 참전 등 부산과 한국의 현대사가 녹아 있었다. 이들은 부산시와 부산도시공사가 진행하는 도시재생 문화콘텐츠 ‘세대이음 메모리얼스토리 사업’에 귀감이 되는 어르신으로 올해 참여했다. 이 사업은 지역 전문가와 관계 기관의 추천을 받은 어르신들의 일생을 재조명해 영상 자서전과 웹툰으로 서사화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도시의 정체성과 역사를 보존하는 것이 취지다. 이들은 도시재생 사업 고유 목적에 맞는 경제·사회·문화 재생 분야 어르신으로 참여했다. 사업 첫해인 작년에는 피란 수도 부산이라는 공간의 ‘과거-현재’를 연계해 어르신 5명을 조명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주목할 점은 청년 크리에이터와 어르신들의 만남과 교감이다. 영산대 웹툰학과 재학생 등은 어르신을 인터뷰해 웹툰 자서전과 영상 자서전을 만들어냈다. 시니어 세대의 지혜와 인생 경험을 소재로 삼아 MZ 세대들이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담아 헌정 취지의 자서전을 제작한 것이다. 교감과 공감을 바탕으로 시니어와 청년들이 세대를 넘어 관계를 맺고, 삶을 잇는 콘텐츠를 협업한 셈이다. 부산도시공사는 지난달 16일 부산 중구 신창동 청년작당소에서 ‘세대이음 메모리얼스토리’ 문화 교류 행사를 개최했다. 영상 자서전 상영과 웹툰 전시, 사진전, 공연 등 세대 간 네트워크 강화의 장을 마련했다.
2021년 전국 특광역시 최초로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부산의 산업은 점차 쇠퇴하고 주거 환경은 노후화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고령자들의 삶은 소외되고, 공동체의 가치와 관계성은 와해돼 이웃 간 유대감과 신뢰가 옅어지는 게 현실이다. 청년들은 떠나고 노인과 빈집이 늘어나면서, 부산은 소멸 위기에 처해 있다. ‘세대이음 메모리얼스토리 사업’은 도시 소멸의 고착화를 막고, 활기를 되찾게 하는 상상과 노력을 시도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본다.
이 사업을 접하면서 부산시의 ‘부산근현대구술자료집 사업’이 떠올랐다. 부산근현대구술자료집은 부산시가 2010년부터 지금까지 총 17곳의 자연마을을 선정해 구술 채록을 한 결과물을 바탕으로 발간하는 책자다. 부산에 인구 유입이 집중됐던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산업화 시기에 자연스레 조성됐던 마을이 도시 개발로 점차 사라지면서 이들 자연마을에 대한 생생한 구술 기록물을 남기는 작업이다. 특히 이 과정에서 배제되고 주변화될 수밖에 없었던 보통 사람들의 기억과 경험을 복원하는 것이 취지다. 마을 토박이 어르신을 심층 면접해 나온 구술과 증언을 영상과 기록물 형태로 수집한다. 구술부터 자료집 발간까지 수년은 걸린다고 하니 그 깊이와 의미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부산시 시사편찬실은 그동안 닥밭골 마을, 매축지 마을, 외양포·대항 마을, 임기 마을, 남산동 마을, 무지개 마을, 감천문화 마을, 대천 마을, 학리 마을, 안창 마을, 물만골, 돌산벽화 마을, 소막 마을 등에 관한 구술자료집을 펴냈다. 2021년 시도한 구술 채록을 바탕으로 마지막 열일곱 번째인 흰여울 마을 자료집을 내년 여름 발간할 예정이다. 시사편찬실은 2021년 마을을 주제로 한 구술 채록을 마무리한 뒤, 다양한 부산 현대사 발굴을 위해 2022년부터 음악, 영화, 연극, 무용 등 주제별 구술 채록을 진행하고 있다. 부산의 근현대 생활상과 역사를 담은 어르신들의 구술을 모아 지역사의 빈틈을 하나씩 채워나가는 것이다. 이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시민과 미래 세대를 위해서도 꼭 필요한 작업이다. 거대한 역사의 흐름에서 벗어나 있었던 지역의 미시사를 풍성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부산의 역사와 문화, 정체성을 보존하고 확산하는 길이다. 이를 위해 부산시와 지역 공공기관의 의지와 역할이 중요하다. 지역민들의 소중한 삶의 기록을 후세대와 공동체로 확산하고, 세대를 넘어 삶을 잇는 뜻깊은 걸음을 지속하기를 바란다.
김상훈 논설위원 neato@busan.com
김상훈 논설위원 neato@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