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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창의 클래식 내비게이터] 세상의 모든 아침을 위하여
“나는 아무것도 작곡한 적이 없어. 내 음악은 내가 기억하고 있는 어떤 이름, 즐거운 날들의 회상, 비에브르 강을 흐르는 물, 강가의 개구리밥, 쓰디쓴 쑥, 꽃 사이를 날아다니는 나비와 꿀벌, 그런 것들이 내게 가져다주는 선물일 뿐이지.” 알랭 코르노 감독의 ‘세상의 모든 아침’이라는 영화에서 생트 콜롱브는 제자가 된 마랭 마레에게 이렇게 가르침을 준다.
흔히 고음악으로 분류되는 르네상스나 바로크 시대의 음악은 클래식 초보자에겐 아득하게 느껴진다. 우리가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비발디, 바흐, 헨델 정도? 조금 더 간다면 스카를라티, 몬테베르디, 퍼셀 정도를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시기의 명인은 수없이 많이 있다. ‘태양왕’으로 불리던 루이 14세 시절, 프랑스에 살았다는 생트 콜롱브와 마랭 마레라는 음악가 역시 프랑스를 제외한 다른 나라 사람들에겐 ‘남쪽물고기자리 알파별’ 정도로 생소한 이름이었다.
그러나 파스칼 키냐르의 소설을 영화화한 ‘세상의 모든 아침’이 나오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1992년 세자르상 7개 부문을 휩쓴 이 작품은 개봉 첫해 프랑스에서만도 200만 장의 티켓이 팔렸다. 영화의 명성이 조용히 번져가면서 고전-낭만주의 음악에 치우쳐 있던 음악 감상이 바로크음악 붐으로 이어졌다. 영화에 사용된 고음악은 CD로 발매되어 전 세계적으로 300만 장 넘게 팔렸고 지금까지도 계속 재발매되고 있다. 음악을 맡은 고음악 연주자 호르디 사발 역시 국제적인 스타가 되었다.
초야에 묻혀 비올라 다 감바를 연주하던 생트 콜롱브에게 구두 수선공의 아들 마레가 찾아와 음악 배우기를 청했다. 몇 번의 거절 끝에 생트 콜롱브의 제자가 되었지만, 출세에 목적이 있는 마레는 스승을 버리고 화려한 궁정 악사의 길로 뛰어들었다. 그는 당시 음악계 최고의 권력자인 장 바티스트 륄리의 눈에 들어 왕립오케스트라 단원이 된 후, 륄리가 죽으면서 직책을 이어받아 음악계 최고의 권력을 누렸다. 당시로선 드물게 72세까지 살면서 500여 곡의 음악을 작곡했다. 마레는 19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아이들에게도 음악을 가르쳐 차례로 악장직을 맡게 했다.
‘성 주느비에브 성당의 종소리’는 영화의 시작 부분에서 왕실의 화려한 옷을 입은 마랭 마레의 모습과 함께 흘러나오는 곡이다. 늙은 마레는 단원들에게 이 곡을 가르치면서 스승이 가르쳐준 진실된 음악의 길을 떠올리게 된다. “태양이 떠오를 때마다 아침은 오지만, 한 번 지나간 세상의 모든 아침은 다시 오지 않는다”라는 멋진 말이 위대한 음악과 어우러진 명작이었다.
2025-05-29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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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창의 클래식 내비게이터] 자신의 발등을 찍은 지휘자와 '파사카유'
장 밥티스트 륄리(Jean Baptiste Lully, 1632~1687)는 바로크 시대 프랑스 음악계에서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던 음악가였다. 궁정 작곡가가 된 륄리는 당시 15세이던 루이 14세가 아폴론 신으로 출연하는 ‘밤의 발레’를 작곡하여 총애를 받았다. 이 곡으로 루이 14세는 ‘태양왕’이란 별명을 얻게 되었고, 륄리는 그때부터 ‘왕의 남자’가 되었다. 왕은 화려한 연회와 예술을 정치적 선전도구이자 통제 수단으로 활용했고, 륄리는 충직하게 이를 뒷받침해주었다.
1661년 5월 16일, 륄리는 왕실 작곡가이자 음악감독으로 임명되었고 그때부터 프랑스 음악의 전권을 장악하게 된다. 그는 작곡가이자, 연주자, 무용가로 활동했다. 예술적인 재능과 노력도 탁월했지만 동시에 뛰어난 아첨 실력과 권모술수를 겸비하였기에 대적할 상대가 없었다. 그는 이탈리아식 오페라가 아니라 프랑스 특유의 ‘서정 비극’ 양식을 확립했으며, 프랑스 발레의 기본 구조를 만드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또한 ‘프랑스의 셰익스피어’라 불리는 극작가 몰리에르와 함께 코미디 발레 ‘서민 귀족’ 등을 완성하여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 왕으로부터 프랑스 오페라 제작의 독점권을 따내 전무후무한 권력을 휘둘렀으며, 그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오페라를 올릴 수 없었다.
륄리는 왕의 전속악단에서 길고 화려한 지팡이로 바닥을 치며 박자를 맞추는 지휘를 했다. 이런 식으로 지휘봉을 휘두른 사람은 륄리가 처음이었다. 어느 날, 루이 14세가 병에서 회복한 것을 기념하고자 ‘테 데움’을 지휘하던 륄리는 지팡이로 자기 발등을 내려찍는 바람에 큰 상처가 생겼다. 상처 부위가 괴사하기 시작하자 의사는 발가락을 잘라내야 한다고 했다. 륄리는 그러면 춤을 출 수 없게 된다며 수술을 거부했고, 그 때문에 파상풍이 악화하여 죽음에 이르고 말았다. 권력의 어이없는 말로였다. 2000년에 개봉한 영화 ‘왕의 춤’이 루이 14세와 륄리, 몰리에르의 이야기를 다뤘다. 영화의 첫 장면이 바로 륄리의 지팡이 사고로 시작했다.
‘파사카유’(Passacaille)는 륄리가 세상을 떠나기 한해 전, 권력의 최정상에 있던 시절인 1686년에 초연된 오페라 ‘아르미드’ 5막 1장에 삽입된 춤곡이다. 파사카유는 스페인에서 생겨난 춤곡 ‘파사칼리아’가 프랑스로 흘러들어와 발레 춤곡으로 사용된 것이다. 그 후 이 춤곡은 바로크 시대 기악 모음곡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기악 합주곡으로 연주하면 장엄하고 흥겨운 맛이 나지만, 피아노나 기타로 편곡된 곡을 들으면 꿈꾸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는 곡이다.
2025-05-15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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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창의 클래식 내비게이터] 음악이 소환해준 풍경, '소녀의 기도'
대만의 문화에 대한 칼럼을 검색하다가 제목 하나가 눈에 확 들어왔다. “소녀의 기도-우리의 모든 쓰레기를 버리라는 부름”이었다. 가오슝의 청소차가 ‘소녀의 기도’를 울리며 나타나면 너도나도 쓰레기를 들고 모여든다는 내용이었는데, 아니 이럴 수가! 십수 년 전 한국에서도 똑같은 풍경이 있지 않았던가. 그 곡이 들리면 자다가도 일어나서 쓰레기를 버려야 했다. 어쩌다 늦게 나서면 “아저씨. 기다려요!” 하면서 슬리퍼를 끌고 뛰어가야 했다. 음악은 그렇게 추억을 소환해준다.
‘소녀의 기도’는 폴란드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테클라 봉다제프스카-바라노프스카(1834~1861)의 작품이다. 우리에겐 독일식 표기인 바다르체프스카로 알려졌다. 어떤 자료에는 1829년생 또는 1838년생으로 되어 있기도 한데, 죽은 해는 똑같은 1861년이니 많아야 32세, 적게 잡으면 23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는 말이 된다. ‘소녀의 기도’는 1856년에 출판한 소품으로 작품번호 4번이다. 그 외에도 다수의 피아노 소품을 남겼지만 다른 것은 모두 잊히고 오직 이 곡만 유명하다. 한국과 대만의 쓰레기차에서도 울리고, 일본 신칸센 열차가 출발할 때도 울리고, 학교에선 수업시간이 끝났을 때도 흘러나왔다.
이런 식으로 한 시대의 추억을 담당한 음악이 많다. 에디슨 와이먼이 작곡한 피아노곡 ‘은파’라든가, 리처드 클레이더먼(본명 필립 파제)의 히트곡 ‘아들린을 위한 발라드’ 같은 곡은 피아노 약간 배운 애들이 가장 뽐내며 치던 곡이었다.
우리의 일상은 나도 모르게 많은 클래식 음악으로 엮어져 있다. 대표적인 음악으로 하이든 트럼펫 협주곡 3악장을 들 수 있다. 연륜이 있는 사람에겐 ‘장학퀴즈’의 시그널 음악으로, 젊은 층에겐 ‘오징어 게임’에 흘러나온 음악으로 친근하다. 보케리니 현악5중주 3악장 미뉴엣은 영어 듣기평가에 단골로 흘러나오던 음악이다. 슈베르트 피아노5중주 ‘송어’ 4악장은 세탁기 종료음이나 식기 세척기 알람음으로 줄곧 우리 곁에 붙어 있다.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봄’의 1악장, 멘델스존 ‘봄 노래’는 회사의 단골 통화 대기음으로 사용된다.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를 들으면 어디선가 차가 후진하는 듯한 느낌이 들고, 비발디의 사계 중에서 ‘봄’의 멜로디를 들으면 지하철 환승을 해야 할 것 같다.
클래식 음악을 몸에 붙이는 방법은 이렇게 생활 속에 있는 음악 중에서 맘에 드는 것을 골라 제대로 들어보는 것에서 출발한다. 한 번쯤 들어봤을 클래식, 멀리하기엔 너무나 가까운 클래식에서 하나씩 자신의 레퍼토리를 쌓아가노라면 언젠가 그 속에 풍덩 빠져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2025-05-01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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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창의 클래식 내비게이터] 말 달리자! 주페의 경기병 서곡
클래식 음악이 좋은 이유 중 하나는 레퍼토리가 정말 방대하다는 것이다. 텔레만이 쓴 곡만 3천 개를 헤아린다. 바흐, 하이든, 슈베르트도 1천 개 정도 되는 곡을 썼다. 비발디, 보케리니, 모차르트, 리스트, 글라주노프도 600곡이 넘는다. 그러니 매일 다른 곡을 열 곡씩 듣는다고 해도 죽을 때까지 얼마나 듣겠는가?
나 역시 꽤 긴 세월 동안 클래식 음악을 들었고, 방송과 강의를 하고 몇 권의 책까지 썼지만, 여전히 수시로 튀어나오는 미지의 곡 때문에 당황한다. 아, 이런 곡을 여태 몰랐다니, 하면서 머리를 치는 것이 다반사다.
1819년 4월 18일에 태어난 주페도 우리나라에선 과소평가되는 작곡가라 할 수 있다. 그는 빈 오페레타의 전성기를 연 작곡가다. 스팔라토(현재의 크로아티아 스플리트)에서 태어났으며, 파도바대학에서 법률을 배우다가 빈 음악원으로 가서 작곡을 공부했다. 1846년에 안데어 빈 극장에 지휘자로 취임했고 같은 해에 오페레타 ‘시인과 농부’를 발표하여 인기 작곡가로 떠올랐다. 이후 칼 극장의 지휘자로 일하면서 ‘아름다운 갈라테아’ ‘경기병’ ‘이사벨라’ ‘보카치오’ ‘빈의 아침, 오후, 저녁’ 등을 발표하여 빈 오페레타의 거장이 되었다. 약 30개의 오페레타와 180 여개의 무대작품을 발표한 후, 1895년 76세로 세상을 떠났다.
오페레타와 그리 친하지 않은 한국에선 주페라고 하면 ‘시인과 농부 서곡’ ‘경기병 서곡’ 정도로 알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경기병’은 1866년 빈에서 활동하던 시인인 카를로 코스타의 대본으로 만든 2막의 오페레타다. 경기병은 중무장한 기병이 아니라 가벼운 갑옷을 입은 채 말을 탄 기병을 의미한다. 특히 헝가리 마자르족의 후사르 경기병 부대는 유명했다. 그러나 이 오페레타에 나오는 경기병은 극 중에서 으스대는 발레단 사람들을 비꼬아서 부르는 말로 쓰였다.
서곡은 극 중에 나오는 5개의 멜로디를 엮어 3부 형식으로 만들었다. 관악기의 울림으로 시작하여 경기병의 말발굽 소리와 같은 행진곡이 나오는 부분이 1부, 용사들을 애도하는듯한 단조의 현악 선율이 멋진 2부, 다시 경쾌한 행진곡으로 마감하는 3부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1부에 나오는 관악 멜로디는 방송의 시그널 음악으로 애용되는 부분이라서 듣는 순간, “아, 이 곡이 그 곡이구나”하고 알아차릴 것이다.
‘경기병 서곡’을 들어보고 괜찮다는 생각이 들면, 주페가 작곡한 다른 서곡과 ‘내 사랑 플로렌티나’ 같은 아리아로 옮겨가 보자. 좀 더 뒤져보면 주페의 ‘레퀴엠 D단조’처럼 멋진 곡이 도사리고 있는 걸 발견하게 될 것이다.
2025-04-17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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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창의 클래식 내비게이터] 구레츠키 교향곡 3번, 슬픔의 강을 건너는 음악
‘바흐트랙’ 같은 자료에 의하면 최근 몇 년 동안 전 세계 공연장에서 현대음악 레퍼토리가 급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한국도 현대음악이 장사 안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무려 36년이나 지난 일이지만, 1991년 빌보드 클래식 차트에서 벌어진 기이한 현상을 떠올리게 된다. 그 해에 헨리크 구레츠키(Henryk Gorecki, 1933~2010)라는 폴란드 작곡가의 음반이 느닷없이 등장하여 무려 31주 동안 정상을 지키며 100만 장 이상 팔리는 일이 벌어졌다. 데이비드 진먼의 지휘로 런던신포니에타가 연주하고 소프라노 돈 업쇼가 노래한 음반이었다. 연주 시간만 50분이 넘는 대작이며 세 개의 악장 모두 렌토(아주 느리게)로 진행하는 곡인데, 우리나라에서도 3만 장 넘게 팔렸으니 엄청난 사건이었다.
더욱 이상한 것은 그해 나온 신작이 아니라 이미 1977년 4월 4일에 초연된 후 14년 동안 무시당한 채 있던 곡이라는 것이다. 각종 매체는 이에 대해 여러 가지 형태로 분석했다. 몇 가지 이유를 보자면, 동유럽이 민주화되고 보스니아 전쟁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희생당한 사람들에 대한 애도곡처럼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이 시기가 음악사적으로 미니멀리즘과 명상음악, 뉴에이지 음악이 유행하던 시기라는 것도 무시할 수 없다. 게다가 음반을 발매한 ‘넌서치 뮤직’이 “슬픔을 치유하는 음악” “신비로운 힐링 사운드” 등으로 홍보한 덕도 보았다. 어쨌거나 구레츠키 교향곡 3번은 단순한 클래식 음악을 넘어, 시대와 감성을 반영하는 문화적 현상이 되었다.
원래 남서독방송교향악단이 아우슈비츠에서 학살당한 폴란드인들을 추모하기 위해서 구레츠키에게 의뢰한 곡이다. 구레츠키 역시 수용소에서 가족을 잃었기 때문이다. 1악장은 25분 정도 되는 거대한 악장이다. 나지막한 소리로 시작해 점점 비통한 분위기가 고조되며 소프라노 목소리가 가세하여 절정에 도달한다. 15세기 후반 폴란드의 성십자가 수도원에서 부른 ‘스타바트 마테르’의 한 부분이다. 십자가에 달린 아들을 향해 부르는 어머니의 노래가 가슴을 찌른다.
2악장 노래는 더욱 애절하다. 폴란드 작은 마을에 있는 독일군 지하 감옥에 적힌 소녀의 기도문에서 발췌한 것이다. “엄마, 울지 말아요. 천상의 정결한 분께서 우리를 언제나 지켜주실 거예요. 아베마리아.” 3악장은 폴란드 오폴레 지방의 민요를 사용했다. 전쟁터에서 죽은 아들을 그리는 어머니의 통곡을 담은 노래다. 그래서 이 곡의 부제가 ‘슬픔의 노래’다. 한마디로 울지 않을 도리가 없는 음악이다. 슬픔으로 슬픔을 치유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준 명작이다.
2025-04-03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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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창의 클래식 내비게이터] 베토벤의 '카바티나', 우주로 날아간 소리
흔히들 현악 4중주를 ‘실내악의 꽃’이라 한다. 악기로 표현할 수 있는 최소공배수를 구현하고자 하는 작곡가들의 정신이 현악 4중주에 녹아들어 있다. 바로크 시대 트리오소나타에서 통주저음부가 독립하여 하나의 성부를 이루게 되면서 4개의 성부를 지닌 현악 4중주로 발전했다. 보통은 바이올린 2대, 비올라 1대, 첼로 1대 구성으로 연주하는데, 이런 현악 4중주 형태는 스카를라티, 타르티니 등에서 시작되어 하이든에 와서 정착되었다. 이후 모차르트는 27개 현악 4중주를 작곡했고, 베토벤은 16개 현악 4중주로 이 분야의 금자탑을 쌓아 올렸다.
일찍이 프랑스의 작가 로맹 롤랑은 베토벤 현악 4중주를 “베토벤 음악 미궁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 통하는 비밀의 문”이라 했다. 교향곡 9번까지 끝낸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이 인생의 마지막 시점인 1825년과 1826년에 기력을 다해 써 내려간 분야가 현악 4중주였다. 이 시기에 작곡된 12번부터 16번까지의 다섯 곡을 후기 현악 4중주라고 한다.
그중에서 현악 4중주 13번은 1825년 11월 작곡하여 이듬해 3월 21일 빈에서 슈판치히 4중주단의 연주로 초연했다. 초연 후 2년이 지난 1827년 갈리친 후작에게 헌정하면서 출판했다. 원래 6개 악장으로 되어 있었는데 마지막 6악장이 ‘대푸가’라는 어마어마하게 격렬하고 현대적인 곡이었다. 출판사가 이대로는 출판할 수 없다고 설득하여 다른 곡으로 6악장을 대체하고 ‘대푸가’는 Op.133으로 독립시켰다. (그러나 요즘은 베토벤의 정신을 존중하여 6악장에 ‘대푸가’를 배치하여 연주하기도 한다.)
어쨌거나 내가 생각하는 현악 4중주 13번의 심장은 5악장 ‘카바티나’(Cavatina)에 있다고 생각한다. 베토벤이 부른 ‘백조의 노래’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적적한 아름다움이 빛난다. 알반베르크 4중주단, 이탈리아노 4중주단, 린지 4중주단, 에머슨 4중주단 등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명반이 있지만, 오늘은 부다페스트 4중주단의 고색창연한 연주를 다시 들어본다.
지금으로부터 48년 전인 1977년에 미국이 무인 우주탐사선 보이저호를 발사했는데, 그 속에 ‘골든 레코드’라는 걸 실어놓았다. 레코드 속에는 혹시나 만날지 모르는 생명체에게 지구의 소리를 전하기 위해 각 나라의 인사말과 함께 24곡의 음악을 새겨넣었다. 그중에 한 곡이 바로 부다페스트 4중주단이 연주한 베토벤 ‘카바티나’였다.
보이저호는 ‘인류가 만든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물체’이자 가장 먼 곳에서 통신을 계속해오고 있는 항해자이다. 아직도 우주의 어느 곳을 떠돌고 있을 이 물체에 실린 ‘카바티나’를 듣고 답할 수 있는 미지의 통신원이 있을까?
2025-03-20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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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창의 클래식 내비게이터] 라벨 피아노 협주곡 2악장이 흐르는 밤
올해는 어느 때보다 풍성한 라벨 연주회가 기다리고 있다. 7일은 라벨(Maurice Ravel, 1875~1937)이 탄생한 지 정확히 150주년 되는 날이다. 조성진이 라벨 피아노 솔로 작품으로 해외 공연을 하고 있으며, 손열음과 고잉홈 프로젝트는 라벨 교향악 전곡 시리즈를 올리고 있다.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도 라벨의 ‘라 발스’로 정기 연주회를 장식해 놓았으며, 부산에도 캐나다 국립아트센터 오케스트라가 내한해 손열음과 함께 라벨 협주곡을 선보일 예정이다.
라벨은 드뷔시와 함께 인상주의 음악가로 분류된다. 그러나 두 사람은 공통점보다 차이점이 더 많았다. 음악평론가 해럴드 숀버그는 이렇게 표현했다. “드뷔시는 쇼팽, 구노, 마스네의 계보를 잇는 관능주의 작곡가였다. 반면 라벨은 리스트, 생상스, 포레처럼 객관적이고 정확한 음악을 썼다. 드뷔시의 음악은 공중을 두둥실 떠다닌다. 라벨의 음악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딱거리는 메트로놈 같다.” 동시대에 활동했지만 두 사람은 거의 교류가 없었다. 드뷔시는 두 명의 여인이 자살 소동을 일으켰을 정도로 요란한 연애사로 유명했던 반면, 라벨은 평생 독신으로 지냈다. 그저 말쑥하게 잘 차려입은 신사의 품위를 항상 유지했을 뿐, 흔한 사랑 이야기조차도 남아 있지 않다.
라벨은 1929년 두 개의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한 곡은 제1차 세계대전에 오른손을 잃어버린 피아니스트 파울 비트겐슈타인을 위해서 작곡한 ‘왼손을 위한 협주곡’ D장조였고, 다른 한 곡은 협주곡 G장조였다. 라벨은 두 곡을 초연한 그해 10월에 자동차 사고를 당해 뇌를 크게 다쳤다. 그 후 투병 생활을 하다가 1937년 뇌수술을 받은 후 깨어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피아노 협주곡 G장조는 1932년 마르게리트 롱의 피아노와 작곡가 자신이 지휘한 파리 라무뢰 오케스트라 연주로 초연했다. 라벨은 평소 협주곡에 대해 “유쾌하고 화려해야 하며, 너무 심각하거나 극적인 효과를 겨냥할 필요는 없다”고 말해 왔는데 그 심정이 잘 나타난다. 모차르트적인 쾌활함이 1, 3악장에 가득 차 있고, 그 사이에 서정적인 2악장이 배치돼 있어 대비를 준다.
아다지오로 흐르는 2악장은 이 협주곡의 심장과 같은 부분이다. 라벨은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5중주 2악장을 모델로 썼다고 했다. 피아노의 긴 독백으로 시작되는 솔로 부분의 멜로디부터 가슴이 먹먹해진다. 후반부에 오보에가 주제 선율을 받고 피아노가 아르페지오를 연주할 때쯤 되면, 시간이 이대로 계속 흘러가 버렸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 바람에 부서지는 햇살처럼, 구름 사이 흐르는 달빛처럼, 음악이 몸을 감싼다. ‘몽환적’이라는 표현은 이럴 때 사용하는 단어인 것 같다.
2025-03-06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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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창의 클래식 내비게이터] 세고비아, 기타의 선지자
“기타는 영혼을 잠들게 하고, 우리를 매료시키고, 꿈과 환상의 세계로 손짓하는 악기다… 기타는 인간 창의성의 아름다움에 대한 증거다.”
1893년 2월 21일,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에서 ‘기타의 선지자’ 안드레스 세고비아(1893~1987)가 태어났다. 세고비아가 태어나면서 기타 역사는 새로운 부흥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가 이룬 업적은 짧게 말할 수 없다. 기타의 주법을 종합 정리하고, 바흐의 ‘샤콘’을 비롯한 고전 명곡들을 기타로 편곡했으며, 방대한 녹음으로도 남겨놓았다. 말년의 세고비아는 자신이 젊어서부터 세워온 다섯 가지 소원에 관해 얘기했다. 세고비아 이전엔 아무도 믿지 않았던 이야기지만, 그 소원은 세고비아 당대에 모두 이루어졌다.
1. 기타가 일상적 놀이를 떠나 예술성을 가진 악기라는 것을 인식하게 만드는 것-지금은 아무도 기타를 민속악기로만 생각하지는 않는다. 2. 현대의 진지한 작곡가들에게 기타 곡을 쓰게 만드는 것-세고비아 당시에 로드리고를 비롯하여 카스텔누오보, 퐁세, 빌라-로부스 등이 모두 새로운 기타 곡을 헌정했다. 3. 기타를 선술집에서 꺼내어 유명 콘서트홀로 끌어들이는 것-세고비아는 16세 때 그라나다 예술회관에서 연주회를 했다. 4. 기타에 관한 전문 매체를 가지는 것-이미 1946년 뉴욕에서 ‘기타 리뷰’지가 창간되었다. 5. 세계 주요 음악원에 기타 학과를 개설하는 것-지금은 한국에도 클래식 기타 전공자가 많다.
오늘 소개하는 영상은 세고비아가 직접 연주한 ‘아스투리아스’다. 스페인의 작곡가 이사크 알베니스가 만든 ‘스페인 모음곡’은 총 8개의 곡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중에서 제5곡이 ‘아스투리아스’이고 ‘전설’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아스투리아스는 스페인 북부의 지방 이름이다. 원곡은 피아노 곡이지만 기타 편곡이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영상물은 1976년 세고비아가 알람브라궁전에서 연주하는 모습을 담아 놓았다. 당시 세고비아의 나이는 83세였다. 그 나이에 이런 연주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이후에도 세고비아는 연주를 쉬지 않았다. 세계 일곱 군데 음악원의 강의를 맡았고, 3개 도시의 시민권과 10여 개의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2년엔 통산 1000번의 연주회를 돌파했다. 누군가 그에게 연세도 많으신데 피곤하지 않냐고 물었다. 그러자 세고비아는 웃으며 대답했다. “내 생각을 말해줘? 지금 피곤한 것쯤은 상관없어. 왜냐하면 내게는 쉴 수 있는 영원한 시간이 있으니까.” 세고비아는 1987년 4월 3일 미국 마이애미 공연을 마친 후 심장에 이상을 느껴 마드리드로 돌아왔다. 그리고 두 달 지난 6월 3일, 96세의 나이에 ‘영원한 시간’ 속으로 떠났다.
2025-02-20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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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창의 클래식 내비게이터] 알레그리의 미제레레, 어둠 속 교훈을 위해
그레고리오 알레그리(Gregorio Allegri, 1582~1652)는 지금부터 443년 전인 1582년 오늘(2월 7일), 로마에서 태어난 테너 가수이자 작곡가였다. 조반니 나니노의 제자이며 교황 우르바노 8세 시절에 교황청 성가대 가수이자 작곡가로 활동했다. 다수의 미사곡과 모테트, 기악곡을 작곡했지만, 그가 남긴 작품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성경의 시편 51편을 가사로 쓴 ‘미제레레’(Miserere Mei, Deus)일 것이다.
이스라엘의 왕 다윗이 부하 장군의 아내 밧세바를 탐냈다. 결국 다윗은 충직한 부하를 죽게 한 후, 밧세바와 결혼한다. 이를 알아차린 선지자 나탄이 와서 맹렬히 꾸짖자 그제야 자신의 잘못을 깨달으며 “하느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참회하는 내용이다.
곡 전체가 다섯 부분으로 나뉘어 아카펠라로 반복되는데, 5성부의 합창과 4명의 솔로가 서로 번갈아 가면서 노래를 이어간다. 입체적인 음의 연속이 알 수 없는 신비 속으로 인도한다. 특히 제1 소프라노가 높은 C 음을 낼 때는 몸에 전율이 일 정도다.
‘미제레레’는 해마다 성주간에, 시스티나성당에서 연주되었다. 곡이 너무나 아름다워 단 세 부의 필사본만 간직했고, 악보를 더 필사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래서 ‘미제레레’를 들으려면 누구나 로마에 있는 시스티나성당에 가야만 했다. 1770년 당시 14세 모차르트가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시스티나성당을 찾았다. 그 당돌한 천재는 이 곡을 딱 두 번 듣고서 완벽하게 암보해 악보에 옮겨 적었다고 한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교황 클레멘트 14세는 천재 소년 모차르트를 벌하지 않고 오히려 ‘황금박차 훈장’을 수여했다는 훈훈한 뒷얘기까지 남아 있다. 모차르트의 이야기는 사실 여부가 불투명하지만, 어쨌거나 그만큼 귀한 대접을 받던 곡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필사 금지라는 봉인을 해제하고 공식적으로 출판한 것은 작곡된 지 133년이나 지난 1771년에서야 가능했다. 그 후로 지금까지 이 곡은 아카펠라 교회 합창곡 중에서 가장 인기 있는 곡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가톨릭교회에선 성주간에 바치는 저녁 기도 예식이 있는데, 이를 ‘테네브르’(어둠)라고 부른다. 성당의 초를 하나씩 천천히 끄면서 기도를 바치는 예식이다. 점점 사위어가는 어둠 속에서 이 음악이 울려 퍼지는 광경을 떠올리며 ‘미제레레’를 들어 보자. 날은 춥고 밤은 길고 세상은 혼미하다. 이럴 때 400년이 넘은 신비 속으로 들어가서 지혜를 구해 보자. 사람은 때로 정신 나간 짓을 저지른다. 지나간 과오를 용서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진정으로 참회하는 것이다. 바꿔 말하자면 참회가 없으면 용서받지 못한다.
2025-02-06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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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창의 클래식 내비게이터] 파리넬리, 바로크 시대의 슈퍼스타
“그의 억양은 순수했고, 트릴은 아름다웠으며, 호흡 조절은 비범했고, 성대는 민첩했다. 그는 가장 넓은 음정을 쉽고 빠르고 명확하게 소화해 냈다.” 바로크 시대의 작곡가 요한 콴츠는 가수 파리넬리에 대해 이렇게 극찬했다.
지금으로부터 320년 전 오늘, 당시 나폴리 왕국의 안드리아에서 파리넬리가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카를로 브로스키(Carlo Broschi, 1705~1782)였다. 열두 살 때 아버지에 의해 거세를 당했고, 당시 유명한 작곡가이던 포르포라의 제자가 되어 노래를 배웠다. 그의 목소리는 아름답고 힘이 있었으며, 고난도의 기교를 완벽하게 소화했다. 그는 이름을 ‘파리넬리’라는 예명으로 바꾸고 이탈리아를 넘어 전 유럽으로 기세를 확장해 나갔다. 말년에는 스페인 궁정에서 활동했으며, 은퇴 후에도 볼로냐로 가서 유유자적하게 지내다가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왜 굳이 거세 가수를 써야 했을까?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이해하기 힘든 일이지만, 서양 중세 시대엔 교회에서 여성들이 노래할 수 없었다. 높은 음역의 노래는 사춘기 이전의 어린 소년에게 맡겨 부르게 했다. 그러나 르네상스 이후로 음악이 급격히 발달하고 화성이 복잡해지면서 소년성가대로만 높은 음역을 대체하기엔 한계가 왔다. 소년들은 변성기라는 치명적인 문제점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변성기가 되기 전에 ‘거세된 가수’라는 뜻의 ‘카스트라토’를 만들었다.
음악사에는 카파렐리, 세네시노, 포르포리노 등 바로크 시대에 전 유럽을 열광케 한 슈퍼스타의 이름이 전해져 온다. 그중에서도 파리넬리의 인기는 특별했다. 하이브리드적인 매력이라고나 할까? 남성의 힘과 여성의 관능미와 어린이의 깨끗함을 함께 지닌 듯했다.
프랑스혁명 이후 인권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바뀌고 오페라의 취향도 달라지면서 카스트라토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다가 1994년 제라르 코르비오 감독 영화 ‘파리넬리’가 발표되면서 카스트라토라는 역사적 존재가 전 세계에 다시 알려졌다. 오늘의 영상은 파리넬리가 오페라 ‘이다스페’ 중에 나오는 아리아, ‘행복의 그늘에서’를 부르는 장면이다. “행복의 그늘에서 사랑하는 그대와 축배를 드네. 행복의 그늘에서 우리 사랑이 아름답게 빛나네. 행복의 그늘에서 우리 사랑이 영원하길 간절히 빌며 기쁨에 젖네.”
지금은 당연히 카스트라토를 찾아볼 수 없다. 그 대신 남성이 가성을 이용하여 높은음을 내는 카운터테너가 활동하고 있다. 안드레아스 숄, 필립 자루스키, 프랑코 파지올리, 야쿠브 오를린스키 등의 카운터테너 스타가 나왔으며, 한국에서도 이동규, 정민호, 장정권, 최성훈 등이 활발하게 무대를 이끌고 있다.
2025-01-23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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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창의 클래식 내비게이터] 크라이슬러의 아름다운 거짓말
“크라이슬러의 음악에는 빈의 낭만적 기운과 인간적인 매력이 함께 담겨 있다. 그의 연주는 항상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말을 거는 듯하다.” 독설가로 유명한 작가 버나드 쇼마저도 이렇듯 찬사를 보내게 만든 연주자가 있었다. 프리츠 크라이슬러(1875~1962)는 동시대 음악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작곡가이자 바이올리니스트였다. 1923년 한국을 방문해 연주회를 가졌을 정도였다.
1875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났으니, 올해는 크라이슬러 탄생 150주년이 된다. 빈 음악원을 거쳐 13세에 파리 음악원을 졸업한 음악 천재였다. 역사상 최초로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전곡을 녹음한 사람이었으며, 오늘날도 여전히 애용되는 베토벤과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의 카덴차를 쓰기도 했다. 사랑스럽고 재치 있는 바이올린 소품도 많이 남겼는데, 그중에는 본인이 작곡해 놓고서 시침 뚝 떼고 과거 거장의 곡을 발굴한 것처럼 소개한 게 꽤 있다. ‘쿠프랭의 프로방스풍 오바드’ ‘포르포라의 미뉴엣’ ‘타르니니의 코렐리 주제에 의한 변주곡’ 그리고 오늘 소개하는 ‘푸냐니 스타일의 프렐류드와 알레그로’ 같은 작품이 그렇다. 곡 제목에 나오는 가에타노 푸냐니(1731~1798)는 이탈리아의 작곡가이며 연주자다. 크라이슬러는 푸냐니의 미발표 바이올린 곡을 발굴해서 초연한다고 거짓말을 했다가 나중에야 웃으면서 본인이 작곡한 것이라 밝혔다. 워낙 인간적이고 유머러스한 연주자였기에 청중 역시 “그러면 그렇지” 하는 정도로 웃으며 손뼉을 쳤다고 한다. 크라이슬러의 레퍼토리를 ‘사랑의 슬픔’ ‘아름다운 로즈마린’ 정도로만 알고 있는 사람은 꼭 들어보기 바란다.
내친김에 올해 특별하게 주목해야 할 작곡가를 50년 단위로 살펴보자. 올해는 작곡가 피에르 불레즈, 미키스 테오도라키스, 루치아노 베리오가 탄생 100주년을 맞는다. 크라이슬러와 함께 모리스 라벨이 탄생 150주년,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탄생 200주년이 된다. ‘폴리포니 음악의 구원자’라고 불린 조반니 다 팔레스트리나는 무려 탄생 500주년이 된다.
사망 시점으로 보자면 작곡가 에릭 사티의 사망 100주기가 되는 해다. 조르주 비제는 150주기, 안토니오 살리에리 200주기,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는 300주기가 된다. 또한 ‘4계’가 포함된 비발디 바이올린 협주곡 ‘화성과 창의의 시도’가 출판된 지 300년, 로시니의 오페라 ‘랭스 여행’과 베를리오즈 ‘장엄미사’가 초연된 지 200년을 맞는다. 비제 오페라 ‘카르멘’과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이 초연 150주년 되는 해이기도 하다. 이들 레퍼토리가 풍성하게 무대를 장식하는 한 해가 될 것이다.
2025-01-09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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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창의 클래식 내비게이터] 연말이면 '합창'을 연주하는 이유
흔히 ‘연말 3대 프로그램’이라 부르는 공연이 있다. 차이콥스키 ‘호두까기인형’, 헨델 ‘메시아’ 그리고 베토벤의 ‘합창’이다. 공연장 정보에 이런 레퍼토리가 나열되면 “아, 드디어 올해가 가는구나”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중에서도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은 압도적이다. 1824년 5월 7일, 오스트리아 빈의 케른트너토어극장에서 초연된 후 딱 200년이 지났지만, 이 곡의 힘은 시간이 흐를수록 강해졌다. 올해도 서울시향, KBS교향악단, 인천시향, 강릉시향, 부천필하모닉 할 것 없이 너도나도 송년 공연으로 선택했다.
베토벤은 젊은 시절부터 프리드리히 실러의 시를 좋아했다. 특히 ‘환희의 송가’(Ode An die Freude)를 좋아해서 언젠가 자신의 음악 속에 구현하려고 갈무리해 두었다. 마침내 1824년, 베토벤은 아홉 번째 교향곡을 무대에 올렸다. 청중은 당혹스러워했다. 당시의 기준에서 볼 때 작품이 터무니없이 길고 복잡했다. 악기 편성의 규모, 곡의 구조와 길이, 연주의 난이도가 모두 기준치를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다. 게다가 교향곡에 4중창과 합창까지 집어넣다니….
4악장 앞부분에서 폭풍 같은 관현악이 연주된 후, 바리톤이 일어나서 노래를 시작한다. “오, 벗들이여, 이런 소리가 아니지 않은가, 좀 더 환희에 찬 노래를 부르지 않겠는가!” 이 부분은 실러의 시가 아니라 베토벤이 직접 써넣은 것이다. 귀가 들리지 않은 채 혼자만의 세계에 칩거해 있던 베토벤은 세상에 말을 건네기 시작한다. 그 말에 오케스트라가 술렁이고, 네 사람의 앙상블이 이어지고, 마침내 합창이 가세한다. “환희여, 신의 아름다운 광채여, 낙원의 딸들이여….”
원래 교향곡은 악기의 교감을 극대화하려고 만든 장르였다. 그 방식으로 8개의 교향곡을 완성한 베토벤이 왜 마지막 교향곡에 사람의 목소리를 집어넣은 것일까? 슬픔과 분노를 넘어 자유와 환희의 세계로 나가기 위해서는 노랫소리가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악기만으로 응집한 차가운 순수의 세계가 아니라, 말과 음악을 통합한 세계가 필요했고, 그 철학적 결정체가 교향곡 9번 ‘합창’이 된 것이다.
“악한 현실이 갈라놓은 것을 결합하고” 마침내 “백만의 사람들이 서로 끌어안는” 세상이라니. 베토벤인들 그것이 불가능한 표현이란 걸 몰랐을까? 하지만 그는 마지막까지 이념의 끈을 놓지 않았다. 베토벤은 실러의 시를 읽던 스무 살 시절부터 그런 메모를 남겨놓았다. “할 수 있는 한 선한 일을 하고, 자유를 모든 것보다 사랑하고, 왕 앞에 불려가서도 진리를 부인하지 말자.” 그 오랜 의지가 있었기에 교향곡 9번 이 나올 수 있었다. 2025년 12월, 한국 땅에서 ‘합창’을 다시 들어야 하는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다.
2024-12-19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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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창의 클래식 내비게이터] 신파의 힘, 푸치니 ‘그대의 찬 손’
1838년, 파리의 싸구려 방에 네 명의 젊은이가 세 들어 살고 있었다. 직업은 시인, 철학자, 음악가, 화가다. 겨울이 되었는데 방세는 밀리고 난로에 넣을 땔감마저 다 떨어졌다. 그때 음악가가 레슨비를 벌었다며 신이 나서 들어온다. 어라, 돈이 생겼네, 집세는 무슨 집세, 술이나 마시러 가자! 너무나도 익숙한 청춘의 공식을 따라 그들은 술을 마시러 간다. 시인 지망생인 로돌포가 잠시 남아 있는데, 그때 운명적인 노크 소리가 들린다. 옆집에 사는 미미가 열쇠를 떨어트렸는데, 촛불이 없어서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촛불 좀 빌려주세요.” 이 대목에서 오페라 ‘라보엠’은 음악사를 밝히는 불빛이 된다.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의 손이 맞닿는다. 로돌포는 미미의 손이 너무 차다면서 그 손을 잡고 녹여 주겠다고 한다. 지금의 관점에서 보자면 너무나도 구태의연한 설정이지만, 이런 점이 ‘라보엠’의 매력 포인트다. 이 오페라에는 귀족도 없고 영웅도 없으며 악당도 나오지 않는다. 치정과 배신과 탐욕으로 죽고 죽이는 드라마가 아니라 서민들의 구질구질한 일상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자, 손을 잡았으니 기회를 놓칠 수 없다. 이때 로돌포가 부르는 노래가 테너 역사에 남는 명곡 ‘그대의 찬 손’이다. “내가 누구냐고요? 나는 시인이에요. 뭘 하냐고요? 시를 쓰지요. 어떻게 사냐고요? 그냥 살아요. 가난하지만 마음만은 백만장자랍니다.”라고 허세를 떨며 그동안 미미를 마음에 두었음을 얘기한다. “내 마음의 금고에 간직해 온 꿈들이 당신의 두 눈 때문에 모두 날아가 버렸어요. 대신 그곳에 달콤한 희망이 자리 잡았죠”라는 식의 유치 발랄한 고백을 한다.
만일 이것이 연극의 대사였다면 형편없는 장면으로 전락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어설픈 고백은 대사가 아니라 막강한 오케스트라가 뒷받침하고 있는 푸치니의 아리아다. 그 찬란한 음악의 힘 때문에 청중은 꼼짝할 수가 없게 된다. 신파조의 가사는 멜로디를 타고 향기를 내뿜기 시작한다. 몽롱하게 시작된 노래는 점점 끓어오르다가 하이 C의 막강한 고음으로 불을 댕긴다. 이 노래가 끝나면 미미가 답가를 보내고, 마침내 사랑의 이중창을 부르면서 오페라의 1막이 끝난다.
올해는 자코모 푸치니(1858~1924)가 세상을 떠난 지 딱 100주년이 되는 해다. 푸치니의 오페라에는 멋진 장면이 산더미처럼 많지만, 그중에서 딱 하나만 고르라면 나는 ‘그대의 찬 손’을 가장 먼저 꼽을 수밖에 없다. 나로선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에 난생처음 본 오페라였으며, 테너의 위력을 체험한 첫 오페라였기 때문이다. 위대한 푸치니여, 편히 쉬시길!
푸치니 ‘라보엠’ 중 '그대의 찬 손'
2024-12-05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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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창의 클래식 내비게이터] 라벨의 '볼레로', 변화의 미학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말했다. “당신은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들일 수 없다”라고. 변화의 관점에서 보자면 세상은 단 한 치도 같은 것이 없고, 동일성의 관점에서 보자면 어제나 오늘이나 다를 것이 없다. 카오스와 코스모스, 다양성과 동일성이라는 형이상학의 비밀을 음악은 너무나(?) 쉽게 풀어낸다. 그 대표적인 예가 모리스 라벨의 ‘볼레로’ 같은 작품이다.
정확히 104년 전 오늘, 라벨(1875~1937)의 ‘볼레로’가 초연되었다. 1927년 라벨은 당시에 발레리나로 유명하던 이다 루빈슈타인에게 무용 음악을 한 곡 의뢰받았다. 그 춤은 술집의 탁자 위에서 무용수가 춤을 추다가 점점 격렬해지는 리듬을 따라 손님들과 함께 춤을 춘다는 내용이었다. 라벨은 이듬해인 1928년에 그 음악을 발표하면서 스페인의 민속 무용인 ‘볼레로’라는 제목을 붙였다.
볼레로는 작은북의 반복적인 리듬 위에 두 개의 주제를 끈질기게 반복한다. 곡이 반복될 때마다 플루트, 클라리넷, 바순, 트럼펫, 색소폰 등이 더해지면서 음악을 점점 키워간다. 라벨은 이 집요한 반복을 통해 독특한 음향적 색채와 극도의 긴장감을 연출한다. 마침내 베이스 드럼과 심벌즈가 등장하면서 음악은 절정으로 치닫는다. 라벨을 두고 왜 ‘오케스트레이션의 제왕’이라고 부르는지 알 수 있는 곡이다.
그는 정말 다양한 음악적 소재를 자유자재로 구사한 작곡가였다. 재즈, 폭스트롯, 찰스턴 등 다양한 대중음악 양식도 다루었고, 스페인의 민속 음악에도 폭넓게 관심을 보였다. ‘스페인 랩소디’ ‘스페인의 한때’처럼 이국적인 상상력이 풍부한 작품들로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관현악법에 능통했던 그는 무소륵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을 비롯한 숱한 명곡을 편곡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1930년엔 전쟁 중 오른손을 잃은 오스트리아의 파울 비트겐슈타인을 위해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을 완성했고, 이어 ‘피아노 협주곡 G장조’를 완성했다. 그러나 자동차 사고로 인해 머리를 심하게 다친 후 뇌 질환으로 폐인의 삶을 살다가 1937년 세상을 떠났다.
‘볼레로’는 라벨이 살아 있을 때 이미 대성공을 거뒀다. 라벨 자신은 그저 실험 삼아서 만든 곡이었는데, 너무나 인기를 끌게 되자 오히려 당황했다고 한다. 이 곡은 현재에도 가장 자주 연주되는 클래식 레퍼토리 중 하나다. 모리스 베자르 발레단의 안무 이후, 무용계에서도 안무가의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최고의 작품이 되었다. 변화의 원리를 이처럼 재미있고도 명확하게 들려준 음악을 찾기는 힘들다.
2024-11-21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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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창의 클래식 내비게이터] 겨울의 길목에서 듣는 '콜드송'
며칠 사이에 기온이 뚝 떨어졌다. ‘자, 이렇게 겨울이 시작되는구나’하고 마음을 다잡으며 겨울의 음악, 퍼셀(Henry Purcell, 1659~1695)의 ‘콜드송’(cold song)을 들어본다. 원래의 제목은 ‘너는 어떤 힘이냐’(what power are thou)이지만 ‘콜드송’이란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1691년 초연한 세미 오페라 ‘아서왕’ 3막에 나오는 아리아다. 이 곡은 오페라 ‘디도와 아이네아스’ 중에 나오는 ‘내가 땅에 묻힐 때’, ‘오이디푸스’에 나오는 ‘음악은 잠시 동안’과 함께 퍼셀의 가장 유명한 아리아로 꼽힌다.
“너는 대체 어떤 힘이냐? 저 땅 밑의 영원한 눈밭에서 날 억지로 일어서게 만드는가. 너는 보지 못하는가? 내 몸이 늙고 경직되어서 혹심한 추위를 견딜 수 없다는 것을. 내가 거의 움직일 수 없으며, 숨쉬기조차 힘들다는 것을. 날, 나를 얼어붙게 해 다오. 나를 얼려서 다시 죽게 해 다오.”
색슨족 마법사가 영국을 얼음 나라로 만들었는데, 사랑의 신 큐피드가 나타나서 얼어붙은 대지를 풀어놓으려 한다. 이때 잠에서 깨어난 겨울의 신이 부르는 노래다. 꽁꽁 얼려 두었던 마음이 깨어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감정을 드라마틱하게 포착해 놓았다. 카운터 테너의 목소리로도 자주 들을 수 있지만, 역시 베이스 바리톤이 불러야 제맛이 난다. 비발디 ‘사계’의 겨울 1악장을 연상시키는 오케스트라 반주도 멋있다. 그래서 영화나 광고의 배경으로도 자주 사용된다. 영화 ‘요리사, 도둑, 그의 아내, 그의 정부’에선 편곡 버전으로 흘러나왔고, 앤서니 홉킨스에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안겨준 영화 ‘더 파더’에도 삽입되었다.
바로크 시대의 영국에는 천재적인 작곡가가 많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퍼셀은 36세라는 짧은 기간에 정말 대단한 업적을 쌓았다. ‘디도와 아이네아스’, ‘아서왕’, ‘요정의 여왕’, ‘메리 여왕의 장송 음악’ 등 그야말로 ‘영국의 오르페우스’라고 불릴 만한 작품을 쏟아냈다. 그런데 문제는 술. 술을 너무 좋아해서 밤늦게 취해 들어오는 일이 잦았다. 일설에 의하면 어느 날 이를 지겨워하던 부인이 문을 닫고 열어주지 않았다고 한다. 술에 취해 밖에서 잠든 퍼셀은 추위에 몸을 상했고, 결국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게 329년 전인 1695년 11월 21일이었다.
퍼셀의 기일에 맞춰 부산문화회관에서 ‘아서왕’을 콘서트오페라 형식으로 공연할 예정이다. 장진규가 연출을 맡았으며, 이태영(아서왕), 박현진(큐피드), 이수정(비너스), 강태경(요정) 등이 출연한다. 이성훈이 지휘하는 드림문화오케스트라와 르보야즈 보칼레 앙상블이 연주와 합창을 맡았다. 퍼셀의 ‘콜드송’을 제대로 들어볼 기회가 될 것 같다.
2024-11-07 [1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