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일의 곰곰 생각] 노동절의 미래

김승일 논설위원 dojune@busan.com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논설위원

美 메이데이 발생지 '러스트벨트' 전락
관세 무기 투자 강요 MAGA 본산 돼
일자리 뺏기 무리 요구엔 국익 최우선

'근로자의 날'을 '노동절'로 법 개정
국가 경쟁력에 기업·노동 가치 새겨야
지방 소멸 저지도 미래형 일터에 달려

노사 협상의 관행 중 ‘절값’이란 게 있다. 삼일절, 광복절, 개천절 등 ‘절(節)’이 붙은 5대 국경일에 추가로 지급되는 특별수당이나 상여금을 ‘절값’으로 부른다. 5대 국경일은 국가의 정체성을 경축하는 데 의미를 두고 있다. 어린이날 등 공휴일과 근거 법률도 다르다. 그런데 국경일도 아니고 공휴일도 아니지만 ‘절값’ 대우를 받는 예외적인 날이 있다. 근로자의 날, 즉 노동절이다.

노동절은 일제 강점기 시절부터 사용된 용어인데, 1963년 ‘근로자의 날’ 법률이 제정되어 오늘날까지 이른다. 그간 근로자와 노동자를 두고 정부·사용자와 노동단체가 맞선 것은 사실이다. 근로(勤勞)는 ‘부지런히 일하다’, 노동(勞動)은 ‘몸을 움직여 일하다’로 의미 차이는 미미하다. 하지만 시대적 성격으로 읽으면 구별되는 지점이 있다. 자본주의는 임노동이 기본이다. 사전적으로는 ‘자기의 노동력을 자본가에게 제공하고 그 대가로 임금을 받는’ 사람이 노동자다. 근로자는 역사 전반을 아우르는 개념이되, 노동자는 현시대의 산물이다.

노동절을 둘러싼 오랜 논란에 종지부가 찍힐 전망이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는 19일 ‘근로자의 날’을 ‘노동절’로 변경하는 법안을 여야 합의로 통과시켰다. 이르면 25일 국회 본회의에서 가결되면 62년 만에 명칭을 되찾는다.

여야가 죽기 살기로 격돌하는 난리통에 대체 어떻게 합의가 이루어졌을까? 노동절 회복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이다. 일자리의 미래가 시대적 화두라는 점을 정치권이 외면하지 않은 결과라면 다행이다. 인공지능(AI)의 진격으로, 또 미국이 관세를 무기로 한국 기업의 투자를 압박하면 결과적으로 우리 미래 세대의 일할 기회가 위협받는 게 현실이다. 지방 소멸도 수도권이 기업과 인력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면서 나타난 망국적 현상 아닌가. 노동절 복원을 계기로 투자와 고용의 사회적 가치를 되새겨야 할 대목이다.

노동절의 역사를 일자리의 키워드로 읽다 보면 오늘날 전 세계 평지풍파의 진앙인 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와 맞닥뜨린다. 1886년 5월 1일 미국 시카고 노동자들이 하루 8시간 근로제를 요구하는 집단행동에 돌입했다. 농기계 제조사 맥코믹 노조의 파업에 경찰이 발포해 사망자까지 발생하면서 사태가 겉잡을 수 없게 커졌고, 결국 전 세계적인 사건으로 발전했다. 이를 계기로 전 세계에서 5월 1일을 메이데이(May Day), 즉 노동절로 기념하게 된다.

당시 미국은 세계의 공장으로 부상하는 참이었다. 시카고에 있던 카네기 철강을 유에스스틸(USS)이 인수하며 철강 도시로 우뚝 섰고, 디트로이트의 자동차 기업 제너럴모터스(GM)와 함께 공급망을 이루면서 미국 산업화를 이끌었다. 2차 세계대전에 이르면 하루에 선박 한 척 씩 찍어낼 정도로 제조업 경쟁력에서 독보적이었다. 이후 금융자본이 득세하고 산업자본이 쇠퇴하며 제조업이 공동화되기 시작했다. 메이데이의 기원인 철강 도시, 자동차 도시는 순식간에 유령 도시가 됐다. 이른바 ‘러스트벨트(쇠락한 공업지대)’다. 일터에서 쫓겨난 중산층이 몰락하면서 도시와 공동체까지 무너졌다. 이에 대한 반대급부가 미국판 문화혁명에 비견되는 MAGA 운동이다.

‘제조 약소국’으로 전락한 미국의 실패가 오늘날 한국 지방의 현실과 겹치는 대목은 무참하다. 한때 우리 경제의 견인차였던 울산·창원·거제·구미·군산은 기업과 인력 유출로 성장의 시계가 멈춘 도시가 되고 말았다. 부산을 위시한 지방 대도시 역시 소멸 위기에 처했다. 한국은 수도권 집중이라는 불균형 체제 속에 ‘제조 강대국’으로 부상했지만 한계에 부닥쳤다. 이대로 두면 한국판 러스트벨트가 현실화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산업자본이 흔들리면 국가 경쟁력을 지킬 수 없고, 후세대의 일터는 위협받는다. 미국 수렁에 빠지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제조업의 부활은 사회, 문화적 요인까지 감안할 때 간단치 않은 문제다. 무리한 요구에는 철저히 국익 우선으로 접근해야 한다. 한편, 국난으로 치닫고 있는 지방 소멸에는 일터를 키워드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미래형 기업과 젊은 인재의 수도권 쏠림이 사라져야 국가는 지속 성장할 수 있다.

노동절은 노동자만의 힘으로 지켜지지 않는다. 공장이 문을 닫으면 노동절도 가뭇없이 사라진다. 미국의 실패가 반면교사다. 일자리 뺏기 국가 대항전에 나라의 운명이 걸려 있다. 국가와 기업, 노동 세 주체가 공유하는 전략적 공동선이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대다. 다행히 한국은 아직 기회가 있다. 노동절 복원을 기업과 고용의 가치를 되새기는 계기로 삼자. ‘노동절을 경축할 수 없는 나라를 후세대에 물려주지 않겠다.’ 국가 경쟁력을 지키는 길이자, 다음 세대에 대한 연대 책임의 다짐이다.


김승일 논설위원 dojune@busan.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