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진의 기록으로 그림 읽기] 올가을 설악 단풍도 예전만큼 이쁠까요.
김경진 부산현대미술관 학예실장
어떤 산이라도 단풍이 이쁘지 않을 리 없지만, 유독 설악산 단풍에 빠져드는 이들이 많은 것은 웅장하면서도 아기자기한 설악 산세가 만드는 색채 묘미 때문일 것이다. 이런 산을 그린 화가는 많이 있지만 박고석만큼 반평생 동안이나 산을 예찬한 작가는 없다.
1917년생인 그가 2002년 세상을 떠나자, 기사에서는 ‘산과 하나가 된’, ‘산이 된 사람’, ‘산의 화가’ 등등 이구동성으로 산을 그린 작가라고 설명했다. 하긴 살아생전 ‘설악 예찬’을 남겼을 정도이니 그가 얼마나 산을 사랑했는지 충분히 알고도 남는다. 박고석은 아버지가 형을 데리고 중국으로 망명한 뒤부터 불량기 가득한 청소년으로 홀어머니 밑에서 컸다. 공부는 뒷전이고 당시 말로는 딴따라 같은 짓만 일삼다가, 그림도 나름 잘 그린다는 자부심에 상처가 생기는 사건이 있었다. 일본에서 서양화를 배우고 평양에 돌아온 길진섭에게 혹독한 핀잔을 들은 것이다. 그 뒤로 마음을 다잡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서 그림 공부에 매진했다.
해방된 뒤 귀국한 그는 곧 월남해 고등학교 미술 교사가 된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해에 친구 소개로 훗날 유명한 건축가가 되는 김수근 친누나인 김순자와 10월 결혼하고서 1·4후퇴 때야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이때 그린 ‘범일동 풍경’(국립현대미술관 소장)이 남아 있어 이 시기 그의 화풍을 엿볼 수 있다. 그 어려운 시절에 손재주를 살려 판잣집과 화실을 만들어 친구들과 제자들이 드나들게 했다. 1955년 정릉에 정착해 대학에 출강하면서도 가족보다 제자들이 먼저였고, 적십자병원에 무연고자로 방치되던 이중섭 장례도 그가 수습했다고 한다.
이 시기는 국외 미술 흐름도 그랬지만, 한국 화단은 뜨거운 추상미술이 휩쓸던 시절이었다. 박고석도 1957년부터 60년까지 모던아트협회를 결성해 추상미술에 몰두하다 이내 붓을 놓고 만다. 자신의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곤 십여 년 가까이 흐른 1967년 구상전에 참가하면서부터 다시 붓을 들었고, 이때부터 산행을 시작하면서 산을 그리기 시작했다. 도봉산, 설악산, 유달산 등 유명하다는 전국의 산은 모두 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산행을 했음에도 박고석은 많은 작품을 남기지 않은 작가로 알려져 있다.
제자 김정의 일화에 의하면 “구리는거 보단 구릴 시간 이쑤문 더 봐야디. 볼 시간도 부족한데 구릴 시간이 업디…”라면서 박고석은 산과 대화하듯 행동했다고 한다. 1990년에는 아예 설악으로 화실을 옮겨 아침저녁으로 울산바위를 보며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이미 커피와 담배, 불규칙한 식사로 거동이 불편했기에, 1992년 그린 이 작품은 젊은 시절 그렸던 위세 당당한 산은 아니다. 대신 여유롭고 천진한 붓놀림으로 순화된 산 풍경이 남아 있을 뿐이다.
김은영 기자 key66@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