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해머' '김 부장' 그리고 '태풍' 속 우리

이자영 기자 2young@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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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영 문화부장

알렉산더 에크만 안무 무용극 ‘해머’
스마트폰 중독·자의식 과잉에 경종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제목부터 허울뿐인 중년 애환 그려

불황에 IMF 다룬 복고 드라마도 인기
나 넘어 우리, 이웃·동료 돌아보게 해

무용수가 객석으로 난입한다. 의자 위까지 점령한 29명의 다국적 무용수들은 관객들에게 스마트폰을 켜고 자신을 촬영하라며 포즈를 취해 준다. 합법적으로 공연을 촬영할 수 있게 된 관객들이 신이 나서 동영상을 찍고 ‘셀카’를 찍어 대던 것도 잠시. 자아도취에 빠진 무용수들은 다른 사람 말고 오로지 자신만 찍으라고 소리를 지르며 흥분하기 시작한다. 광기 어린 그들의 몸짓에 넋이 나갈 때쯤 1막의 무대는 정신 없는 카메라 플래시 조명과 함께 막을 내린다.

지난 21일과 22일 부산문화회관과 부산일보 주최로 열린 무용극 ‘해머’ 공연은 무엇이 진실이고, 진짜 나는 어디에 있는지를 묻는다. 안무가 알렉산더 에크만은 그리스의 한 레스토랑에서 ‘해머’의 아이디어를 떠올렸다고 한다. 젊은 관광객 1명이 스마트폰을 꺼내 친구들을 촬영하기 시작했는데, 모두들 카메라와 상관 없이 행동하는 듯 보였지만 안무가의 눈에 비친 모습은 달랐다. 무리의 머릿속엔 온통 카메라 생각밖에 없다는 게 에크만의 눈엔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SNS에 전시할 멋진 나의 모습과 일상을 포착하는 데 혈안이 된 현대인들은 점점 더 ‘나, 나, 나’를 외친다. 다른 사람의 처지나 의견, 어려움, 감정 등에는 별 관심이 없다. 어떻게 하면 내가 더 근사해 보일까가 가장 큰 관심사다. 이기와 기만, 가식이 지배하는 세계에 경종을 울리는 묵직한 한 방. ‘해머’는 진짜를 향한 여정, 진짜 나를 찾기 위한 망치질을 의미한다.

요즘 화제가 되는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 외우기도 힘들 만큼 긴 제목은 그 자체가 허울이다. 서울에 자가를 가지고 있고 대기업에 다니는 부장쯤 되면 사는 게 만만하고 여유로울 것 같지만 현실은 녹록하지 않다. 인생 내리막길에 접어든 50대 김낙수의 삶은 찌질하고 비루하고 짠하기만 하다. 그나마 그런 그의 노고를 이해해 주고, 처지를 헤아려 주는 가족이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싶을 정도다. 퇴직금을 상가 사기로 날릴 처지가 된 그에게 찾아온 것은 공황 증상. 그러나 정신과 진료를 권하는 의사에게 그는 사람을 정신병자 취급한다며 되레 화를 내며 현실을 부정하기 바쁘다.

드라마가 많은 시청자들의 공감을 얻고 있는 중에도 일부는 반감을 드러낸다. 애초에 상위 5% 인생인데 힘겹다는 서사를 씌우는 게 억지스럽다는 반응도 있고, 대부분의 중소기업 노동자들에 비하면 상황이 나은 거 아니냐는 볼멘소리도 나온다. 날로 치열해지는 취업 경쟁에 시달리는 젊은 세대들 입장에선 ‘김 부장 이야기’가 누릴 것 다 누린 기성세대의 넋두리로밖에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작가가 보여 주고자 한 진짜 현실은 다 가진 것처럼 보이는 누군가의 인생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살아남기 위한 생존 투쟁, 발버둥의 연속이라는 점일 것이다.

현실이 힘들수록 과거에 대한 향수가 커진다고 했던가. 불황과 단짝이라는 복고 트렌드가 최근 대중문화 속에 스며들고 있다.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시절 상사맨들의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 ‘태풍상사’의 인기가 그 예다. 이에 앞서 막을 내린 드라마 ‘백번의 추억’은 1980년대 버스 안내양들의 우정과 성장을 그린 바 있다. 그때 그 시절 이야기에 시청자들이 잠시라도 가슴 따뜻해지는 이유는 ‘그래도 사람 사이의 정이 살아 있었구나’ 느낄 수 있는 장면들 덕분이다. ‘태풍상사’ 속 남자 주인공 ‘태풍’의 어머니가 여자 주인공 ‘미선’의 집에 얹혀 살며 초등학생 막내 ‘범이’를 자식처럼 살뜰히 챙기는 모습이 특히 그렇다. 어느새 한 지붕 아래 한 가족이 돼 버린 그들의 에피소드를 보고 있으면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다시 ‘해머’로 돌아가 보자. 카메라에 비친 근사한 나의 모습에 도취해 성형과 꾸밈에 중독된 현대인을 비꼰 이 무용극은 관객들에게 쓴웃음을 남겼다. 객석까지 쳐들어와 나를 봐 달라고 소리치는 무용수들의 과장된 몸짓에 몸서리치다가 가족과 사람의 중요성을 말하는 주말 드라마에 잠시나마 위로를 받는다. 스마트폰에 고정된 우리의 시선이 화면 속 반짝이는 나와 누군가가 아니라 내 주변의 너, 그리고 현실에 발을 디딘 동료와 이웃으로 확장되기를 기대해 본다. ‘셀카’를 찍던 렌즈의 방향을 공동체로 돌려 보는 건 어떨까. 가령 본보가 매주 금요일 연재 중인 ‘사랑의 징검다리’ QR코드에 카메라를 갖다 대 보자. 번거롭더라도 댓글 한 줄만 남기면, 나를 대신해 부산은행이 1000원을 기부해 준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연말이 다가온다. 태풍 같은 험난한 세상에서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어쩌면 ‘허세’라는 보호막으로 위장하고 치열하게 달려 왔을 한 해를 되돌아보며, 이제는 진짜 나 그리고 우리와 마주할 때다.


이자영 기자 2young@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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