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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윤경 칼럼] '5극 3특'이라고 뭐가 다를까
연초부터 국가균형발전이 화두다. 무엇보다 이재명 대통령이 국정과제로 앞세우고 있는 데 따른 영향이 크다. 새해 첫날 신년사를 통해 병오년을 대도약 원년으로 삼겠다며 다섯 가지 국가 대전환을 제시했는데 그 첫째가 ‘수도권 중심 성장’에서 ‘지방 주도 성장’으로의 대전환이었다. 수도권 1극에서 5극 3특 체제로의 전환은 지방에 대한 시혜가 아니라, 대한민국 재도약을 이끌 필수 전략이라고 했다. 신년 기자회견에서는 행정 통합을 통한 균형발전은 국가 생존 전략이라고 했다.
이 대통령은 한발 더 나아가 ‘관성과 기득권’이라는 표현까지 동원했다. 23일 울산전시컨벤션센터에서 진행된 ‘울산의 마음을 듣다’ 타운홀미팅 자리에서다. 수도권 ‘몰빵’을 바꿔 5극 3특으로 재편하려는데 관성과 기득권의 저항이 너무 크다며 균형발전에 대한 국민적 공감과 지지를 당부했다.
이 대통령의 일관된 균형발전 메시지는 소멸 위기에 처한 지역 입장에서는 반가운 일이지만 지방선거를 앞둔 정략적 행보라는 회의적 시선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새해 첫 타운홀미팅 장소를 울산으로 정한 것이 6·3 지방선거를 앞두고 요동치는 부산·울산·경남 민심을 잡기 위한 행보라는 분석이 나오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어찌 됐든 수도권 쏠림을 타개하기 위한 구조개혁이 시급한 상황이지만 늘 그랬듯 정부의 균형발전 전략은 변죽만 울리다 끝났다.
전임 윤석열 대통령도 균형발전에 진심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취임 후 첫 국무회의를 정부세종청사에서 주재한 후 어느 지역에 살든 상관없이 국민 모두 공정한 기회를 누리는 균형발전이 새 정부가 지향하는 공정의 가치라고 했다. 기회발전·교육자유·도심융합·문화특구 정책도 앞세웠다. 무엇보다 서울·부산 두 바퀴 성장 전략은 지역의 심장을 뛰게 했지만 2030월드엑스포, 한국산업은행 이전, 글로벌허브도시특별법 등 뭐 하나 제대로 이뤄진 게 없다.
균형발전에서 가장 뒷걸음질했다고 평가받는 이명박 전 대통령조차 지역 성장이 곧 국가 성장이라며 지역 특화 성장 전략을 강조했다. 전국을 5+2 광역경제권으로 나누고 동남권 수송 기계, 수도권 지식정보, 충청권 의약 바이오, 대경권 IT 융복합, 호남권 신재생에너지 등 권역별 특화 전략을 내세웠다. 5극 3특에서도 동남권 자동차·조선·항공, 수도권 글로벌 금융, 충청권 바이오, 대경권 이차전지, 호남권 AI 등을 성장엔진으로 추진 중이다. 이쯤 되면 5극 3특이 5+2와 어떻게 차별화되는지도 궁금할 수밖에 없다.
국가균형발전이라는 큰 물줄기를 만든 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었다. 행정수도를 만들고 공공기관을 지방으로 이전하며 균형발전 기조가 불가역적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대못을 박겠다는 결기까지 보인 그였다. 하지만 후임 정부를 이어오는 동안 수도권 집중은 더 심화했고, 그에 따른 초저출생과 고령화가 국가적 재앙으로 닥쳤다. 국가 성장 에너지를 지역으로 분산하려는 정책적 노력이 수도권 구심력을 이겨내지 못한 결과다.
마침,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최근 ‘수도권 집중은 왜 계속되는가’를 주제로 보고서를 냈다. 수도권 생산성이 비수도권을 압도하기 때문이라는 당연한 이야기였다. 수도권에 개발이 집중되면 혼잡 비용 증가로 투자 효율이 낮아지고 지역으로 투자가 분산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흐름인데 정부가 정책 수단을 동원해 수도권 효율을 유지시켜 왔기 때문에 가능했던 결과다. GTX를 깔고 그린벨트를 해제하면서까지 주택을 공급하고 지역 전력을 끌어다 반도체클러스터를 조성하는 따위의 정책 이야기다. 문제는 해법인데 KDI는 비수도권 소수 대도시에 자원을 집중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2차 공공기관 이전도 거점 대도시에 집중해 효율을 극대화해야 한다고 했다.
일찍이 한국은행도 비수도권 소수 거점에 투자를 집중해야 한다는 주장을 줄기차게 제기해 왔다. 2024년 부산에서 진행된 ‘BOK 지역경제 심포지엄’에서는 여러 군데에 분산하는 전략보다 소수 거점 대도시에 집중하는 게 인접 중소도시에도 긍정적이라는 연구 결과까지 내놓았다. 대한민국의 현실을 수도권이라는 한 그루의 과일나무에 모두가 매달려 살벌하게 경쟁하는 상황에 비유했다. 각자가 과일나무를 키우려면 노력과 자원이 분산돼 열매를 얻기 어려우니 좋은 과일나무 몇 그루를 함께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다양한 정치적 이해와 지역적 갈등이 수반될 수밖에 없는데 그걸 해결하지 못하고 국토를 이리 나누고 저리 나누고 하면서 온 게 지금까지의 균형발전 전략이었다. 현실은 수도권과 같은 과일나무를 한 그루라도 더 키우는 성공적 경험을 만들어낼 수 있느냐다. 5극 3특의 전략 속에는 이런 고민과 현실적 방안이 내재해 있을까.
2026-01-27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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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윤경 칼럼] 미군의 '확고한 결의'와 정보전의 진화
미국의 첨단 과학기술 발전이 군대에서 비롯됐다는 것은 제법 알려진 사실이다. 1957년 소련의 스푸트니크 발사에 허를 찔린 미국은 이듬해 고등연구계획국(ARPA)을 설립한다. 1960년대 접어들면서 냉전이 심화하자 미군은 과학 연구 필요성을 더 절실히 깨닫는다. 아르파는 탄도미사일 방어, 핵 실험 탐지 등 국가 안보와 직결된 프로젝트를 맡으며 연구 범위를 확장한다.
1972년 국방고등연구계획국(DARPA)으로 이름을 바꾸고 단순 군사기술을 넘어 신호처리, 음성인식 등 첨단 과학기술 투자를 확대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미국 빅테크 기업들의 혁신을 이끈 원천 기술 대부분이 다르파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터넷의 원형인 아르파넷, GPS, 드론, AI, 심지어 반도체 기술도 다르파에서 시작됐다. 양자컴퓨터 연구개발을 주도하고 있는 곳도 다르파다.
미국이 초격차 기술로 세계 패권을 유지하는 배경에 다르파가 있는 것이다. 정부의 막대한 재정 지원을 등에 업고 공격적 연구개발을 수행한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기술이라면 가장 먼저 만들어내야 하는 게 다르파의 존재 이유다. 인간의 욕망이 극단적으로 충돌하는 전쟁 상황이 인류에게 기술적 진보를 가져다준다는 게 아이러니이기는 하다.
미군이 새해 벽두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에서 마두로 대통령을 생포한 일명 ‘확고한 결의’ 작전은 첨단기술로 무장한 정보전 위력을 만천하에 과시한 사건이었다. 작전은 사이버 공격으로 카라카스 도심을 암흑에 빠트린 후 전광석화처럼 진행됐다. 첫 폭발음이 들리고 3분 만에 미군 특수부대 요원이 안전실로 대피하려는 마두로 부부 앞을 가로막았다. 이 압도적 작전 전개 과정 곳곳에는 다르파의 첨단기술이 숨어 있다.
미 중앙정보국(CIA)은 베네수엘라 정부 내부 정보원을 통해 마두로의 이동 정보를 확보했고 생활 패턴을 장기간 추적했다. 마두로가 특정 시간대에 어디에 있는지, 어떤 옷을 입는지, 애완동물은 어떤 종류인지까지 알아냈다. 스파이를 통한 ‘휴민트 정보’뿐 아니라 인공위성, 스텔스 드론으로 정보를 수집한 후 AI 알고리즘으로 최적의 침투 동선을 찾아냈다.
이 과정에서 부끄러운 민낯을 드러낸 것은 공교롭게도 한때 세계 최고를 자랑하던 쿠바 정보기관이었다. 이번 작전으로 희생된 56명 중 32명이 마두로를 근거리에서 지키던 쿠바 특수 요원이었다. 미군은 단 한 명의 희생자도 없었다. 쿠바는 냉전시설 소련 KGB와 손잡고 첩보 수출국으로 이름을 날렸다. CIA의 집요한 피델 카스트로 암살 시도를 차단하고 아프리카와 중남미 국가 원수 경호를 담당하며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이번 작전 과정에서 그 전설 속 ‘아바나의 독거미’는 ‘종이호랑이’로 판명 난 것이다.
우크라이나전을 압도하지 못하고 있는 러시아에 이어 쿠바까지 낮은 기술력과 인력 중심의 정보망에 의존해 온 공산권 특수부대와 정보기관이 허수아비로 전락하고 있다는 국제사회의 분석이 나오고 있다. 냉전시대 낡은 이념의 틀에 갇혀 조직 문화에서 정치적 충성심이 전문성을 압도하고 급격한 기술 변화에 대응하지 못한 결과라는 설명이다. 이번 베네수엘라 작전 개시를 앞둔 시간 미 전쟁부인 펜타곤 주변에는 직원들의 비상근무로 피자 주문이 늘었다며 이른바 ‘펜타곤 피자지수’로 작전 개시 징후까지 읽어내는 시대다.
이쯤 되면 우리 정보기관과 정보전 수준에 대해 궁금증이 생길 수밖에 없다. 한반도를 둘러싼 안보 환경이 엄중한 상황이라 더 그렇다. 하지만 우리 정보기관은 전문성에 대한 고민보다 정권 부침에 따라 정치적 논란거리가 되는 게 현실이다. 국가정보원은 대공 수사권 폐지로 안보 공백에 대한 우려가 커져 있고 국군 방첩사령부는 12·3 비상계엄을 주도한 혐의로 해체 수순을 밟고 있다.
방첩사는 방첩과 보안, 수사 기능을 각각 분리하는 쪽으로 논의가 진행 중인데 이 과정에서 안보 역량 강화라는 본질적 고민은 보이지 않는다. 최근의 안보 환경이 사이버전, 심리전, 내부 교란을 포함한 하이브리드전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는 점을 고려하면 방첩사 재편 방향에 우려를 갖지 않을 수 없다. 2024년 국군정보사령부의 대북 블랙요원 신분이 외부로 유출되는 참사가 알려진 것도 우리 군의 안보 역량에 대한 우려를 키우는 대목이다.
미군의 ‘확고한 결의’ 작전은 철저히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계 질서의 단면을 보여줬다. 이제 진영조차 냉전의 추억일 뿐 우리 앞 현실은 냉혹한 각자도생의 길뿐이다. 스스로 안보 역량을 키우는 방법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그 핵심적 역할을 하는 게 정보기관이다. 정보력이 국가의 생존을 좌우하는 시대다. 국내 정치에 휘둘리고 있는 우리 정보기관에 대한 걱정이 앞서는 이유다.
2026-01-13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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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윤경 칼럼] 변동불거의 시대에 던져진 분노 미끼
어느덧 한 해의 끝자락에 섰다. 돌아보면 참으로 다사다난했다. 12·3 비상계엄의 후폭풍으로 시작된 2025년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불확실성의 연속이었다. 국가적 위기 앞에 국론은 분열되고 통합과 화합을 이뤄야 할 광장은 갈등과 분열의 현장이 됐다. ‘주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 마침내 헌법재판소의 탄핵 결정이 내려지고 조기 대선을 통해 이재명 대통령의 국민주권정부가 들어섰다.
하지만 새 정부 출범에도 나라 안팎의 위기와 정치적 혼란은 여전했다. 우여곡절 끝에 한미 관세 협상은 타결됐으나 트럼프 2기 행정부의 미국 우선주의를 앞세운 통상 압력은 자유무역 질서에 기반한 우리 경제에 상존하는 위협으로 등장했다. 미국의 새 국가안보전략은 동맹이 더 이상 보호가 아니라 비용 회수 대상이고 국제 질서는 유지해야 할 자산이 아니라 현금화할 수 있는 자본이라는 인식을 분명히 하고 있다. 미국의 태세 전환이 단기적 충격이 아니라 국제 질서의 구조적인 변화를 의미한다는 이야기다.
외환보다 더한 게 내우였다. 이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통합을 역설했지만 정치 세력 간 갈등의 골은 더 깊어졌다. 22대 국회 개원식에서 한복과 상복으로 갈린 여야의 드레스 코드는 제도권 정치의 현주소를 극명하게 드러냈다. 내란 청산과 사법 개혁을 둘러싼 소모적 정쟁은 우리 사회가 구조 개혁을 통해 미래로 나아가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여권의 내란 몰이는 해를 넘길 기세고 야권 또한 잘못된 과거와의 단절과 성찰 없이 새해를 맞으려는 모습이다.
교수신문이 올해의 사자성어로 ‘변동불거’(變動不居)를 선정한 것은 이렇듯 격변한 한국 사회를 압축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였을 것이다. 〈주역〉 ‘계사전’에 등장하는 변동불거는 세상의 만물과 질서는 항상 변화하며 어느 한 곳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뜻이다. 한국 사회가 거센 변동의 소용돌이 속에 놓여 있으며, 미래가 불확실한 시대에 안정과 지속 가능성을 고민해야 한다는 시대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것이 교수신문의 설명이다.
동양의 고전에서 골라낸 단어가 변동불거였다면 서양의 시각에서 찜한 신조어는 ‘Rage bait’(분노 미끼)였다. 영국 옥스퍼드 출판부는 사용 빈도가 세 배 이상 늘었다며 올해의 단어로 선정했다. 분노 짜증 격분을 유발하도록 설계된 온라인의 미끼 콘텐츠를 뜻하는 이 단어가 온라인상 감정 조작과 정신 건강 문제에 대한 현대인들의 우려를 가장 잘 포착했다는 게 선정 이유였다.
과거와 현재, 동양과 서양을 넘나드는 변동불거와 분노 미끼는 전혀 다른 틀의 별개 사건처럼 보이지만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분노 미끼가 개인의 감정이 자극과 시장 논리에 흔들리는 모습을 포착한 것이라면 변동불거는 사회 구조 전체가 예측 불가능한 속도로 변화하는 불안정한 현실을 반영한다. 불안 속 ‘분노 팔이’는 사회적 분열과 혼란을 자극하고 극단으로 갈라선 사회는 다시 분노를 소비하는 악순환을 반복한다. 이게 바로 한 해 동안 목도했던 우리 사회의 모습이었다.
변동불거와 분노 미끼는 알고리즘에 휘둘리지 않는 개인의 주체성, 격랑 속에서도 앞으로 전진할 수 있는 사회적 균형 감각과 방향 감각을 회복하라는 경고일 터인데 어디서부터 실마리를 찾아야 할지가 세밑에 던져진 새해 숙제일지도 모른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서 확인됐던 K컬처의 저력일 수도 있겠고 APEC 기간 ‘깐부 회동’에서 엿봤던 한국의 산업 경쟁력에 대한 기대일 수도 있다.
문제는 성장 잠재력 한계에 갇힌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어떠한 희망도 사상누각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망국적 수도권 일극주의와 그로 인한 인구 절벽 문제 말이다. 올해 사상 첫 수출 7000억 달러 돌파와 주식시장 활황에도 환율이 급등하는 등 불안한 장세를 이어가는 것도 한국 사회가 지속 가능성 측면에서 충분히 매력적이지 않다는 의미다.
누군가는 올해 10월까지 16개월째 출생아 수가 상승 흐름을 이어가고 0.72명까지 추락했던 합계출산율이 0.8명대로 회복하는 등 아이 울음소리가 커지고 있다는 데서 희망의 불씨를 찾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또한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미뤘던 혼인이 늘어나면서 나타난 일시적 현상일 가능성이 크다.
결국 수도권 일극에 대응할 새로운 국가의 성장축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마침, 그 해법을 찾는 공론의 장이 새해에 열린다. 6월 3일로 예정된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다. 변동불거의 시대를 넘어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찾고 같은 방향으로 에너지를 집중하는 2026년이 되기를 소망한다.
강윤경 논설주간 kyk93@busan.com
2025-12-30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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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윤경 칼럼] 블록체인 도시 부산의 미래
우리 사회에서 블록체인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폭발하기 시작한 게 2017년 즈음의 일이다. 비트코인 가격 급등과 함께 ICO(암호화폐 공개) 붐을 통한 코인 광풍이 몰아친 시기였다. 젊은 층을 중심으로 한 코인 투자 열풍은 경제적 불안과 부동산 가격 급등, 기성세대에 비해 불리한 사회적 위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대중의 관심에 민감한 정치가 이를 그냥 두고 봤을 리 없다. 2018년 6월 13일 실시된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암호화폐 도입이 이슈로 등장했다. 경기도지사에 출마한 자유한국당 남경필 후보는 암호화폐와 핀테크를 결합한 지역화폐 ‘G코인’ 발행을 공약했다. 판교 스타트업 캠퍼스 내에는 ‘블록체인랩’을 신설하겠다고 했다. 당시 무소속으로 나선 원희룡 제주도지사 후보는 ‘제주코인’ 발행과 함께 블록체인 특구 조성을 공언했다. 오거돈 더불어민주당 부산시장 후보가 부산형 사회복지 코인인 ‘B코인’ 공약을 발표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미래 첨단산업으로 포장된 후보의 이미지는 선거 전략의 일환이기도 했다.
문재인 정부 내에서도 암호화폐 열풍을 둘러싸고 ‘신산업 육성 파’와 ‘투기 과열 방지 파’의 논쟁이 팽팽했다. 박상기 법무부 장관은 “범정부 차원에서 거래소를 통한 암호화폐 거래를 금지하는 특별법을 준비 중”이라고 밝혀 논란에 불을 붙였다. 유시민 작가가 한 토론회에서 정재승 카이스트 교수와 논쟁을 벌인 후 “블록체인과 암호화폐는 인류 역사상 가장 난해하고 우아한 사기”라며 특유의 대중적 언어로 전문가를 제압하려 했던 것도 그런 논란의 연장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록체인 산업 육성 필요성은 정부 내에서도 꾸준히 제기됐고, 중소벤처기업부는 2019년 7월 부산을 블록체인 규제자유특구로 지정하기에 이른다. 제주와 경기뿐만 아니라 서울까지 가세한 특구 유치전이 부산의 승리로 끝난 데에는 유재수 당시 경제부시장의 역할이 컸다. 정통 금융 관료 출신인 그는 부산시 블록체인특구 추진단장을 맡아 특구 지정과 사업을 주도했다. 그렇게 부산은 블록체인을 기반으로 위변조가 불가능한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첨단 신산업을 키우는 ‘신뢰 도시’로 나아가겠다고 선언했다.
그 후 6년여 세월 부산에서는 물류, 관광, 공공안전, 금융, 부동산, 의료 등의 분야에서 블록체인 실증 사업이 진행됐고 항만 정보공유 플랫폼, 맞춤형 AI 의약품 등에서 의미 있는 혁신의 결과물이 축적되고 있다. 블록체인 기술을 이용한 커피 이력 추적 등도 커피 도시 부산에서 눈에 띄는 시도다. 부산시가 앵커 사업으로 의욕적으로 추진한 부산디지털자산거래소(비단)는 우여곡절을 거쳤지만 민간 주도로 출범했고, 올해로 4회째를 맞는 ‘블록체인 위크 인 부산’도 블록체인 인식 확산에 기여하고 있다.
하지만 부산은 세계적 블록체인 도시와는 여전히 거리가 있다. 다양한 시도와 혁신의 축적에도 불구하고 산업생태계 조성은 미미한 수준이다. 기존 산업과의 폭발적 시너지도 아직 보이지 않고 시민의 일상 속 블록체인 도시로서의 경험이나 공공 서비스 등도 체감하기 쉽지 않다. 블록체인 산업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방향성도 보이지 않는다. 그 사이 세계적으로 암호화폐 시장은 크립토 윈터와 서머를 거치며 4차 산업혁명의 핵심 기술로 떠올랐다. 트럼프 2기 행정부는 비트코인을 전략자산으로 선언하고 현물 ETF를 제도화함으로써 블록체인 산업에 불을 질렀다. 스테이블코인과 암호화폐 기업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담은 지니어스법도 만들어 생태계 전환을 가속화하고 있다.
마침 국내에서도 늦었지만, 토큰증권(STO) 근거 규정이 담긴 자본시장법·전자증권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 통과를 기다리는 중이다. STO는 블록체인 기반의 디지털 자산 형태 증권으로 기존 전자증권만으로 담기 어려웠던 부동산, 미술품, 음원 저작권 등 실물자산과 권리를 주식처럼 거래할 수 있다. 금융위원회가 STO 가이드라인을 공개한 지 3년 가까이 지난 시점에서야 법제화를 앞두게 된 데에는 정치권의 직무 태만이 한몫했다. 어쨌든 STO 도입은 국내 블록체인 생태계에 새로운 전환점으로 기대를 모은다.
현재 금융 당국은 장외거래소 인가를 진행 중인데 3개 컨소시엄이 신청한 상태다. 부산에서는 한국거래소 컨소시엄이 도전장을 던졌는데 블록체인 특구에 유통 플랫폼이 허가돼야 하는 게 당연한 수순이다. 사실 STO는 가이드라인 설정 당시부터 블록체인 특구 사업 안에서 논의됐어야 하는 사안이다. 이제 블록체인 특구 부산이 보여 줘야 하는 것은 더 이상 담론이 아니라 산업화의 경험과 실질적인 생태계의 진전이다. STO 시장 선점과 활성화가 그 새로운 출발일 수 있다.
강윤경 논설주간 kyk93@busan.com
2025-12-16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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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윤경 칼럼] 비상계엄 후 1년, 지방선거 전 6개월
딱 1년 전 오늘 밤의 일이다. 가짜 뉴스 같았던 비상계엄 소식을 접하고 TV 모니터 앞으로 달려가 지켜봐야 했던 초현실적 장면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으로 시작한 윤석열 대통령의 긴급 대국민 담화, 국회의사당 앞에서 벌어진 계엄군과 시민들의 몸싸움, 국회 상공으로 날아든 헬기와 무장 군인들이 국회 유리창을 부수고 본회의장 진입을 시도하는 일촉즉발의 상황. 그렇게 시민들의 평범한 일상을 뒤흔든 비상계엄은 다행히 국회와 시민들의 빠르고 적극적인 대응, 계엄군의 느리고 소극적인 대응 덕분에 6시간 만에 막을 내렸다.
그리고 태극기와 응원봉으로 갈라진 광장, 국론 분열 속 국가 신인도와 경제의 추락은 비상계엄의 값비싼 대가였다. 헌법재판소의 탄핵 인용에 따라 대통령 윤석열은 파면되고 조기 대선을 통해 이재명 대통령의 국민주권정부가 출범했다. 윤 전 대통령은 구속과 탄핵, 석방과 재구속의 과정을 거쳐 구치소와 법정을 오가는 중이다. 법정에서 쏟아내는 피고인 윤석열의 언어는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품격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고 부끄러움은 생중계를 지켜보는 국민의 몫이 됐다.
동시 출범한 3대 특검을 통해 드러난 국정 난맥상에 말문이 막힌다. 비상계엄의 동기 또한 국가적 위기보다 ‘김건희 사법리스크’를 덮기 위한 것이었다는 혐의가 더 짙어지는 상황이다. 아무리 ‘윤 어게인’을 외친다 한들 국민적 공감을 얻기 어려운 이유다. 어쨌든 지금은 윤석열 정권 청산과 함께 역사 속으로 떠나보내고 미래로 나아가야 할 시간이다.
하지만 국가적 혼란과 국민적 고통 속에 사계절을 보낸 우리 사회는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국론 분열은 더 심화했고, 도탄에 빠진 민생 경제도 기대감만 한껏 부풀어 있을 뿐 여전히 백척간두다. 정부와 집권 여당은 압도적 권력으로 국가의 미래 비전을 주도할 절호의 기회인데도 ‘내란 몰이’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이 비상계엄 1년을 맞아 내놓은 게 내란전담재판부와 2차 종합 내란 특별검사다. 추경호 의원 구속 여부에 따라 야당을 ‘내란 정당’으로 몰아 정당 해산까지 밀어붙일 기세다. 헌재가 탄핵 결정문에서 비상계엄의 위법성과 함께 ‘줄탄핵’을 남용한 민주당 폭주도 지적했건만 자성은커녕 승자인 양 의기양양이다.
‘빛의 혁명 1주년, 대통령 대국민 특별성명’과 외신 기자회견을 예고한 이 대통령이 어떤 메시지를 내놓을지도 우려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저녁에는 시민단체 주최 ‘시민 대행진’에 참석한다. 국론 분열 행보로 비칠 수도 있는 대목이다.
이런 정부와 집권 여당의 ‘내란 몰이’에 에너지를 공급하고 있는 것이 국민의힘이다. ‘계엄의 강’을 건너지 못하고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다. 비상계엄 1년이 지나도록 사과는 고사하고 윤 전 대통령과도 단절하지 못한 채 자중지란에 빠졌다. 집권 여당의 사법개혁 폭주와 검찰의 대장동 항소 포기 등 유리한 정치적 국면에서도 ‘우리가 황교안이다’를 외치며 모든 이슈를 비상계엄의 공포 속으로 함몰시킨다. 1년 내내 20%대 초반에 갇혀 있는 지지율도 이런 상황의 반영이다.
마침 오늘은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6개월 앞둔 날이기도 하다. 지금 정국 상황이라면 소멸의 벼랑에 선 지역의 미래도 ‘내란 몰이’와 ‘계엄의 강’에 휩쓸려 내려갈 공산이 크다. 민주당은 내란 프레임을 지방선거까지 몰고 갈 생각이고 국민의힘 또한 개전의 정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재명 정부의 수도권 일극주의 극복에 대한 진정성을 가늠할 골든타임도 놓치게 된다.
특히 해양수산부 시대를 맞는 부산은 지역의 힘을 모아야 할 현안이 한둘이 아니다. 해양수도와 글로벌 허브도시는 어떻게 시너지를 낼 수 있는지, 한국산업은행과 동남권투자공사의 기능과 역할을 어떻게 정리해야 하는지, 지방시대위원회의 ‘5극 3특’과 부울경 행정통합은 어느 지점에서 만나게 되는지 숙의해야 한다. 가덕신공항의 미래도 주요 이슈다. 해수부 기능 강화, HMM 등 해운 대기업과 해양 공공기관 이전도 지방선거 기간에 못 박아야 할 일들이다.
이는 지역 현안만이 아니라 국가적 과제이기도 하다. 수도권 집값과 국가 잠재성장률 저하라는 구조적 문제의 근본적 해결은 수도권에 대응할 새로운 성장축을 키우는 일이고 그게 바로 부산을 중심으로 한 해양권이다. 이 대통령 스스로 윤 정부의 과거로의 퇴행을 비판하며 AI 기술 경쟁에서 하루 늦으면 한 세대가 뒤처진다고 말했다. 국가의 구조개혁도 마찬가지다. 한가하게 ‘내란 몰이’와 ‘윤 어게인’이나 외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계엄 1년의 혹독한 대가가 헛되지 않게 지방선거 6개월의 골든타임을 잘 보내야 한다.
강윤경 논설주간 kyk93@busan.com
2025-12-02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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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윤경 칼럼] 산업은행 부산 이전을 다시 생각한다
국가균형발전 관점에서 보면 윤석열 정부 최악의 참사는 한국산업은행 본점 부산 이전 무산이 아닐까 싶다. 메가 이벤트로 치자면 2030월드엑스포 부산 유치 실패 충격이 컸던 게 사실이지만 지속 가능성 측면에서는 산은 이전 무산이 보다 본질적 문제로 남을 대목이다. 느닷없는 계엄 선포와 탄핵, 조기 대선을 거치면서 윤 정부 균형발전 정책의 상징과도 같았던 산은 부산 이전까지 정국 풍랑에 휩쓸려 버린 것이다.
산은 이전은 2022년 1월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부산 유세 현장에서 지역 공약으로 발표하면서 현실화했다. 당시 캠프 내부에서는 산은을 여의도에 존치하는 방향으로 중론이 모아진 상황이었는데 전격적으로 공약 발표가 이뤄진 것으로 알려진다. 윤 대통령은 취임 후에도 국정 과제로 채택하며 뚝심 있게 밀어붙였고 그렇게 서울과 부산, 두 바퀴 국가 성장 전략의 핵심 정책이 됐다.
산은 이전을 공격하는 진영에서는 전격적 공약 발표를 근거로 지역 표심을 잡기 위해 급조한 정치적 결정으로 폄하한다. 하지만 산은 이전은 동북아 금융중심지를 향한 부산의 숙원이었다. 국내 중요 금융기관들의 부산 이전 논의가 구체화한 것은 2008년 ‘금융중심지 조성과 발전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면서다. 이듬해 금융위원회는 서울 여의도와 부산 문현단지 두 곳을 금융중심지로 확정했다. 서울과 함께 부산을 선정한 데는 금융 분야 수도권 일극화를 막는다는 취지가 배경에 있었다.
2010년 12월 부산서 열린 ‘금융중심지 활성화 정책간담회’에서 국책은행인 산은과 수출입은행의 부산 이전 논의가 공식화한다. 진동수 금융위원장, 허태열 정무위원장, 한나라당 서병수 최고위원을 비롯해 정부와 금융·정치권 관계자들이 대거 참석한 가운데 진행된 일이었다. 그렇게 지역 염원이 쌓여 윤 정부 국정 과제에 이른 것이다. 국가균형발전위원회가 2023년 5월 산은을 부산 이전 공공기관으로 지정·고시하며 행정 절차까지 마쳤지만, 본사를 서울로 한다는 산은법 개정이 더불어민주당 반대에 막혀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대선 기간이던 5월 부산을 찾은 이재명 후보는 산은 이전 논쟁에 마침표를 찍었다. ‘표를 얻기 위해 안 될 약속을 하는 건 사기’라는 강한 표현을 동원했다. 산은 이전 반대의 원죄를 덮기 위해 꺼낸 카드가 해양수산부 이전과 동남권투자은행 설립이었다. 그렇게 이 후보는 대통령이 됐고 취임 후 해수부 부산 이전에 강한 드라이브를 걸면서 산은 이전 논란도 자연히 사그라들었다.
그렇다면 산은 이전은 못다 핀 지역의 꿈으로 영영 사라지는 것일까. 그건 어디까지나 해수부의 완전한 기능 이전과 동남권투자은행이 산은 이상의 역할을 온전히 수행한다는 전제하에서다. 최근 동남권투자은행이 동남권투자공사로 바뀌고 지방시대위원회가 ‘5극 3특’ 균형성장 전략으로 각 권역에 지역투자공사를 설립하는 안을 발표하면서 동남권투자은행은 출범도 전에 위상과 역할에 대한 의구심을 갖게 한다. 고래가 참치가 되고 멸치가 됐다는 정치적 레토릭이 등장하는 걸 보면 내년 지방선거에서 다시 이슈로 부상할 공산이 크다.
따지고 보면 산은 이전은 대형 금융기관 하나 부산에 가져오는 이상의 의미다. 지역 산업생태계 혁신에는 자본이 뒤따라야 하고 그 컨트롤타워로 산업은행의 역할이 절실한 것이다. 마리아나 마추카토는 〈기업가형 국가〉에서 민간이 투자를 꺼리는 미래 기술과 선도 산업에 리스크를 안고 과감히 투자하는 국가 주도 개발은행의 중요성을 이야기했다. 그렇게 과감히 투자하고 돌아온 수익을 다시 미래에 투자하는 선순환으로 국가 주도 혁신을 이뤄야 한다는 것이다. 독일 국영투자은행, 중국개발은행의 녹색혁명 투자를 사례로 소개한다. 우리에게는 산업은행이 바로 그런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곳이다.
이미 수도권은 사람과 자본이 포화 상태다. 새로운 혁신의 바람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곳은 부산을 중심으로 한 남부권이다. 특히 제조업과 첨단기술의 결합을 통한 미래 혁신 산업생태계가 강조되고 있는 지금, 산업은행이 남부권 혁신을 주도하고 국가 미래 성장동력을 키울 절호의 기회다.
글로벌 기술 패권 경쟁이 심화하면서 그 어느 때보다 국가의 혁신 역량이 강조되는 요즘 산은 부산 이전을 다시 생각하는 이유다. 마침 정부는 2차 공공기관 이전을 본격화했다. 산은도 당연히 이전 대상이다. 애초 산은 부산 이전에 대한 더불어민주당 당론도 2차 공공기관 이전 때 함께 다루자는 것이었다. 국가균형발전 특별법 상 산은은 부산 이전 공공기관으로 이미 결정돼 있다. 2차 공공기관 이전 시 이행만 하면 된다. 국가 미래를 위해 산은의 입지와 역할을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2025-11-18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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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윤경 칼럼] 북한 비핵화와 '개꿈'
2일 폐막한 경주 APEC 정상회의의 또 다른 관전 포인트는 북미 정상회담 성사 여부였다. 트럼프 방한을 앞두고 CNN이 북한 땅을 바라보는 임진각 인근 카페 하나를 통째로 빌려 생중계를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지면서 북미 대화가 현실화하는 것 아니냐는 추측이 돌았다. 북한이 올해 들어 처음으로 판문점 북측 시설물에 대한 청소, 풀 뽑기, 화단 정리, 가지치기 등 미화 작업을 벌이는 장면이 포착됐다는 점도 트럼프와 김정은의 만남을 점치는 징후로 해석됐다.
마침, 트럼프는 아시아 순방길에 오르면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만나고 싶다”라는 뜻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그(김 위원장)도 내가 (한국에) 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며 “나는 그와 매우 잘 지내 왔다”고 했다. 그러면서 북한을 일종의 ‘뉴클리어 파워’라 지칭했다. 이 표현을 쓴 게 처음은 아니지만 이번엔 북한의 핵 보유를 인정할 거냐는 기자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어서 사실상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한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대목이었다. 북측의 묵묵부답에도 순방 일정 연장과 대북 제재 해제 카드까지 내비쳤다. 누가 봐도 몸이 단 쪽은 트럼프였다.
김정은은 끝내 트럼프의 ‘러브콜’에 응하지 않았다. 대신 대미 협상통인 최선희 외무상을 러시아로 보내 푸틴을 접견하게 하고 트럼프 방한 날에 맞춰 서해상에서 함대지 전략순항미사일을 시험 발사했다. 한마디로 연애편지에 퇴짜를 놓은 것이다. 트럼프는 귀국길 에어포스원 안에서 “그를 만나러 다시 올 것”이라며 한국을 떠났다.
APEC 기간 트럼프의 일방적 ‘구애’와 김정은의 ‘퇴짜’는 2019년 북미 하노이 노딜 이후 달라진 북한의 지정학적 위치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하노이 회담 당시 전제 조건이던 북한의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 비핵화(CVIA)’는 이제 ‘불가역적 핵 보유’로 바뀌었다. 북한은 대북 제재에도 맷집이 생겼다. 우크라이나 전쟁 덕에 러시아라는 든든한 뒷배를 얻었고, 이는 대중 관계에서도 지렛대로 작용하고 있다. 트럼프의 돌발행동에 깨춤을 출 이유가 없는 것이다.
북한의 이 같은 태도 변화는 한국과 미국의 대북 정책이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는 현실을 확인시킨다. 북한은 한 번도 핵무장 야욕을 버린 적이 없었다는 점만 깨닫게 되는 꼴이다. 1991년 12월 31일의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지도 모른다. 당시만 해도 미국이 한반도에 다수의 전술핵을 전개한 상황에서 핵무기 존재를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는(NCND) 정책을 고수했다. 북한은 조선 반도 비핵지대화를 강하게 밀어붙였고, 미군은 한반도에서 핵무기를 철수하고 한반도 비핵화를 천명한다. 하지만 북한의 비핵화 공동선언이 사기극으로 판명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북한은 1993년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시작으로 핵무기 보유를 선언하고 수차례 핵 실험을 통해 핵무기를 완성했다. 진보 정권의 평화 제스처도 보수 정권의 강경 노선도 결과적으로 북한의 핵 폭주를 막지 못했다.
북한은 이제 유엔총회에서 주권과 생존권, 헌법까지 운운하며 핵 보유를 천명하고 있는 상황이다. 북한의 표현대로 그야말로 북한 비핵화는 이제 개꿈이 된 것이다. APEC 기간에서 보듯 트럼프가 미국 본토의 안전을 확보하는 선에서 북핵을 용인하며 협상에 나서는 경우의 수도 배제할 수 없다. 우리로서는 하루빨리 북한 비핵화라는 미몽에서 깨어나야 한다. 한반도 비핵화라는 환상만 붙잡고 있다고 해서 안전이 보장되는 것도, 북한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핵무장으로 맞서는 것은 현재로서는 판타지에 가깝다. 우리 나름의 현실적 대북 억지력과 협상력을 높이는 방안을 찾는 게 중요하다.
미국으로부터 핵추진잠수함 건조 승인을 이끌어 낸 것이 반가운 이유다. 잠수함 건조 능력과 소형원자로(SMR)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도 우리에겐 큰 자산이다. 미국과의 원자력협정 개정을 통해 우라늄 농축과 사용 후 핵연료 재처리 권한을 확보하는 후속 조치도 이뤄내야 한다.
북한도 언제까지 미국의 러브콜을 뿌리치지는 못할 것이다. 트럼프의 뒤끝도 생각해야 한다. 핵무기가 자신들의 안전보장에 필요조건이기는 해도 충분조건까지는 아니다. 내년 4월 트럼프 중국 방문이 되든 언제가 되든 자신들의 몸값이 최고에 이르렀다고 판단할 때 북미 대화에 응할 공산이 크다. 그때 우리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스스로의 힘을 키우는 현실적 준비를 해야 한다. 물론 핵추진잠수함 건조에 따른 주변국 견제와 경제적 리스크도 해결해야 할 문제다. 이재명 대통령의 실용 외교가 진가를 발휘해야 하는 게 바로 이 대목이다.
2025-11-04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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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윤경 칼럼] 배 들어왔을 때 미래 준비해야
대한민국 조선업이 진가를 발휘하고 있다. 교착 상태에 빠졌던 한미 관세협상의 길을 터 준 것도 세계 최고 수준의 우리 선박 건조 기술이었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해양 패권 경쟁에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한국 조선업에 러브콜을 보냈고 우리 정부가 마스가(MASGA·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로 응답하면서 협상의 물꼬가 트였다. 3500억 달러 대미 투자 방식을 둘러싸고 한미 간에 막판 줄다리기가 벌어지고 있는 지금도 조선업은 협상의 파국을 막는 든든한 뒷배가 되고 있다. ‘조선업이 없었으면 어쩔 뻔 했나’하는 생각까지 들게 하는 요즘이다.
2025년 현재 우리 조선업은 세계 최고다. 자본도 기술도 없었던 1970년대 500원짜리 지폐 속 거북선과 울산 미포만 백사장에서 시작해 세계 1위의 신화를 이뤄낸 게 한국 조선업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결단,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의 뚝심, 그리고 테크노크라트들의 열정이 그 신화의 출발점이었다. 50년 역사 속 풍랑에도 위기를 기회로 바꾸며 세계 정상에 올랐고,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 속에 조선소 노동자들의 피와 땀이 서려 있는 것은 물론이다.
조선업은 호황과 불황이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사이클 산업이다. 사이클에 따라 패권이 이동하고 그때마다 혁신 기술이 등장했다.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영국은 글로벌 선박 건조의 60%를 차지하는 절대 강자였다. 두 개의 철판에 구멍을 뚫고 가열한 리벳을 꽂아 접합하는 ‘리벳 공법’으로 100년 이상 조선업 최강자 지위를 누렸다. 영국 템스강 변의 한 카페에서 출발한 로이드선급의 조선 규칙이 현재까지도 국제 기준으로 통용되는 이유다.
리벳을 대체한 게 용접이었다. 2차 대전 당시 미국은 블록을 나눠 용접하는 방식으로 배를 붕어빵처럼 찍어냈다. 미국의 군수용 블록·용접 기술을 발전시켜 1960년대 조선업 강자로 부상한 게 일본이다. 1970년대 오일 쇼크로 조선업이 장기 침체에 빠져들자, 노동집약적 사양산업으로 판단, 구조조정과 표준화에 매달리면서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한국이 그 과정에서 공격적 투자와 현장의 설계·제조 기술 혁신을 통해 세계 정상에 올라선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로 조선업이 다시 위기를 맞자, 중국이 저가 물량 공세에 나서 한국도 일본과 같은 운명의 길로 접어드는 듯했다. 그런데 기후변화로 인한 친환경선박으로의 전환은 우리 조선업에 재도약의 기회가 됐다. 그 중심에 액화천연가스(LNG)선이 있다. 중국이 물량 면에서 우리를 추월했지만, 고부가가치 LNG선과 대형 컨테이너선 등 기술력을 앞세운 한국이 단연 최고다.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빛과 그늘이 공존한다. 조선업의 근간인 원천기술은 앞선 유럽 국가들에 여전히 의존하고 있다. LNG선의 운반탱크(화물창) 원천기술은 프랑스 GTT사가 독점하고 있다. 국내 조선 3사는 라이센스 비용으로 선가의 5%를 낸다. 2000억 원짜리 LNG선을 만들면 GTT사가 가만 앉아서 100억 원을 챙겨가는 구조다. 2010년대 GTT사가 매물로 나온 적 있는데 국내 조선사들은 원천기술 독점 기회를 놓쳤다. 그 과정에서 중국 자본이 GTT에 유입됐고 GTT를 통해 국내 조선소 현장 기술까지 중국으로 흘러가고 있다.
우리가 굳건히 세계 1위를 지키기 위해서는 뉴노멀을 창조하는 퍼스트 무브가 되는 수밖에 없다. 조선업은 이제 국가의 명운을 건 안보산업이자 첨단산업으로 변화하고 있다. AI 기술을 결합한 스마트조선소와 자율운항선박 경쟁이 이미 시작됐고 LNG선에 이은 수소선박 전환도 미래 조선업 패권을 결정할 중요한 요인이다. 한국 조선소의 독은 이미 가득 찼다. 3년 치 일감을 쌓아둬 배가 부른 상태다. 하지만 여기서 안주하면 경기 사이클에 쓸려내려가는 것은 한순간이다. 미중 해양 패권 경쟁은 세계적 조선업 경쟁에 다시 불을 붙였다. 미국과 일본이 조선업 재건에 나섰고 유럽과 중국도 신기술 경쟁에 뛰어들었다. 국가적 차원의 전략적 대응이 중요한 상황이다.
마침 정부가 세계적 연구를 선도할 대학연구소 4곳을 국가연구소로 지정해 10년간 1000억 원씩 투자키로 했는데 최종 후보에 올랐던 부산대 초저온연구소가 탈락했다는 소식은 그래서 더 안타깝다. 수소선박과 북극항로 개척 시 선박 환경에 필요한 원천기술 등의 개발과 관련한 연구를 수행할 계획이어서다. ‘서울대 10개 만들기’에 따른 배려 차원에서 사립대 4곳을 선정했다는 이야기가 있어 더 납득이 어렵다. 국가 균형발전을 내세운 새 정부 대학 정책의 진정성까지 의심하게 하는 대목이다.
100년 전 ‘바다를 지배는 자, 세계를 지배한다’고 했던 알프레드 마핸의 말은 지금도 유효하다.
2025-10-21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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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윤경 칼럼] 전자정부, 디지털정부, AI정부
코로나19 팬데믹 아래에서 치러진 2020년 총선은 대한민국 디지털정부의 위상을 세계에 드높이는 계기가 됐다. 많은 국가가 바이러스 확산을 우려해 선거를 미룬 상황에서 한국은 높은 투표율 속에 성공적으로 선거를 치러냈다. 당시 CNN 등 외신은 총선 투표 현장을 생중계하며 “한국이 팬데믹 속에서도 무엇이 가능한지 증명했다”라는 평가를 내놓았다. 당시 기자도 신문사 인근 좌천동 행정복지센터에서 사전 투표를 했는데 마스크와 비닐장갑을 착용하고 자동으로 출력된 투표용지로 간편하게 주권 행사를 마치면서 ‘우리나라 참 대단하다’라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팬데믹 속 성공적 총선을 가능하게 했던 배경에는 세계 최고 수준의 전자정부 시스템이 자리하고 있었다.
대한민국 전자정부의 기틀을 놓은 건 김대중 정부다. 김 대통령은 1998년 2월 취임사에서 21세기 첨단산업 시대 기술 강국으로 나아가기 위한 정책을 과감하게 추진하겠다고 공언했다. 세계에서 컴퓨터를 가장 잘 쓰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했다. 세계 최초로 전자정부법을 제정하고 2002년 12월부터 전자정부 서비스를 시작했다. 당시 비전이 ‘단번에 통하는 온라인 정부’였다.
이런 기반 위에 업그레이드를 거듭한 한국의 전자정부는 유엔과 OECD 평가에서 수차례 1위를 차지하는 등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했고, 개발도상국이 벤치마킹하는 모델이 됐다. 행정안전부는 2020년 기존 전자정보국을 디지털정보국으로 개편하고 디지털정부로의 대전환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단순히 정보를 제공하는 것에서 벗어나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국민 요구를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한국의 디지털정부가 지난달 26일 국가정보자원관리원(국정자원) 대전센터 화재로 한순간에 멈췄다. 화재는 무정전전원장치(UPS)용 리튬 배터리를 지하로 옮기는 작업 중 불꽃이 튀면서 발생한 것으로 알려진다. 리튬 열 폭주로 진화에 어려움을 겪었고 국가 행정업무 시스템과 민원 서비스 등이 마비되는 초유의 사태를 맞게 됐다. IT 강국 대한민국에서 수기로 민원을 처리하는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복지부 ‘e하늘장사정보시스템’도 마비되면서 고인을 떠나보내는 길에도 어려움이 따른다고 한다.
국민을 더 속 터지게 하는 것은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디지털정부의 이면에 감춰져 있던 시스템 미비와 관리 부실의 민낯을 마주하게 됐다는 사실이다. 비상시 국가 전산망 보호를 위한 이중화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 않아 피해가 커졌다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2022년 카카오톡 먹통 사태 당시 IT 인프라 이중화 미비가 지적되자 통신사에 의무를 강제했던 게 정부다. 이어 2023년 발생한 전국 행정망 먹통 사태까지 겪고도 국가 전산망 보호를 게을리한 책임을 어떻게 물어야 하나.
1년 전 수명을 다한 노후 배터리에 대한 경고가 있었다고 하고 90cm 이상 돼야 하는 배터리 이격 간격이 60cm에 불과했다고 한다. 시스템과 관리 부실이 이 지경인데도 카카오톡 먹통 사태 당시 국정자원 원장은 ‘화재 시 3시간 내 시스템 복구’를 호언장담했다고 하고 1년 전 대전센터에서 화재 상황을 가상한 모의 훈련까지 진행했던 것으로 알려지면서 이런 영혼 없는 공무원들에게 국민 안전을 믿고 맡겨도 되냐는 탄식이 절로 나온다.
이재명 대통령의 신속한 복구 지시에도 행정 시스템의 정상화까지는 한 달 정도 걸릴 전망이다. 실시간 백업은커녕 통째로 날아간 데이터도 있어 보인다. 차제에 사태의 원인을 정확히 규명하고 책임을 엄중하게 물어야 마땅한 일이다. 동시에 그동안 속도전 속에 달려오면서 우리 사회가 놓치고 지나왔던 중요한 기본들을 다시 돌아봐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든다. 기본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곳이 어디 대전센터뿐일까.
이재명 정부는 출범 후 디지털정부에서 나아가 인공지능(AI)을 활용한 유능하고 효율적인 AI 민주정부를 만들겠다며 ‘세계 1위 AI정부 실현’을 국정과제로 내세웠다. 하지만 이번 사태에서 보듯이 안전과 보안이 전제되지 않은 AI정부는 허상이고 사상누각일 뿐이다. 디지털 전환이 가속할수록 국가 안보마저 위태롭게 할 뿐이다.
이 대통령이 국민주권정부를 표방하며 국민 안전을 최우선 가치로 누차 강조하고 있지만 호언장담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다. 안전에는 비용이 소요되고 행정의 실천도 따라야 한다. 국가 전산망 이중화를 위한 공주센터가 예산 부족으로 제 기능을 못 하고 있다는 사실이 무얼 말하겠는가. 평소에는 폼도 나지 않고 중요성도 간과하기 쉽지만, 마땅히 비용을 감수하고 묵묵히 매뉴얼에 따라 행정을 작동시켜야 하는 일, 그게 재난으로부터 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일이다.
강윤경 논설주간 kyk93@busan.com
2025-09-30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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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윤경 칼럼] 누가 사법 신뢰를 무너뜨리나
사법부를 향한 정부와 여당의 공세가 거세다.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15일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조희대 대법원장의 사퇴를 공개 요구했다. “대법원장이 그리도 대단하냐, 대통령 위에 있느냐, 국민의 탄핵 대상이 아니냐”라는 거친 언사까지 동원하면서다. 민주당이 추진 중인 내란특별재판부에 대해서도 “조희대의 정치적 편향성과 지귀연의 침대 축구가 불러온 자업자득”이라고 날을 세웠다.
여권 내 강경파들의 맹공은 대법원이 민주당의 사법개혁 속도전에 우려를 표명한 가운데 나왔다. 대법원은 12일 전국법원장회의를 열고 “사법 독립은 반드시 보장돼야 한다”며 대법관 증원, 법관 평가 등에 신중한 접근을 주문했다. 그러면서 “사법제도 개편은 국민과 사회 전반에 미칠 영향을 충분히 고려해야 하며, 폭넓은 논의와 숙의 및 공론화 과정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공식화했다.
여권의 대법원장 사퇴 요구는 대법원의 반발에 대한 반격의 성격이 강하지만 앞서 이재명 대통령이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삼권 서열’ 발언을 한 게 기름을 부은 측면도 있다. 이 대통령은 “대한민국에는 권력의 서열이 분명히 있다. 최고 권력은 국민, 그리고 직접 선출 권력, 간접 선출 권력”이라고 서열을 밝혔다. 이 대통령은 “내란특별재판부, 그게 왜 위헌인가. 사법부 구조는 사법부 마음대로 정하는 게 아니다. 입법부 권한이다”고 못 박았다.
이 대통령 발언은 견제와 균형이란 민주주의 기본 원리인 삼권분립의 취지를 잘못 이해한 위헌적 측면이 있다는 법조계의 우려가 뒤따랐다. 법을 만드는 사람, 법을 집행하는 사람과 법에 따라 심판하는 사람을 분리하는 게 삼권분립의 정신이자 법치의 기본이라는 것이다. 우리 헌법은 권력은 오로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선언하지만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입법·행정·사법의 서열을 매기지 않는다. 국민주권조차 절대적이지 않으며 ‘다수결의 한계’까지 받아들인 결과가 삼권분립이라는 게 법학자들의 해석이다. 국민은 선거를 통해 민주당에 국회 다수 의석을 몰아줬지만 위임한 권한이 사법부까지 좌지우지하라는 건 아니라는 이야기다.
사법권 독립의 본령은 법과 양심에 따른 법관의 공정한 재판을 의미하지만 이를 위한 법관 구성과 조직상의 독립을 아우르는 개념이다. 내란특별재판부에 대한 위헌 논란이 불거지는 이유다. 사건은 재판부에 무작위로 배당되며, 내란 재판부도 그에 따라 사건을 배당받았다. 법원의 정당성은 그 무작위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조 대법원장도 지 부장판사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다는 게 사법권 독립이다.
대법관 증원도 마찬가지다. 증원 자체의 문제라기 보다 시기와 방법을 둘러싼 사법권 독립 침해 우려가 본질이다. 국민의 헌법상 재판받을 권리를 두텁게 보호하기 위한 대법관 증원 요구는 법원 내에서도 꾸준히 제기된 사안이다. 그러나 이 또한 하급심 강화, 대법원 전원합의체 기능 약화 등 다양한 논란이 뒤따라 근본적 해결책에 대한 숙의가 필요하다. 민주당이 14명인 대법관 수를 26명으로 증원하는 법안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것은 베네수엘라 차베스 같은 권위주의 정권의 사법부 장악 시도와 다를 바 없다.
물론 사법부 스스로 불신을 자초한 측면도 있다. 자기 확신과 고집으로 스스로를 성역화한 높은 담장에서 세상을 바라보며 국민의 삶에서 멀어진 건 아닌지도 돌아봐야 할 일이다. 그렇다고 정치권이 사법부를 마음대로 흔들어도 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재명 대선 후보의 선거법 위반 사건 1·2심 판결이 유·무죄로 엇갈린 것도, 재판이 오랜 기간 지연된 것도, 대법원이 신속하게 유죄 취지로 파기환송한 것도 모두 재판의 결과다. 특정 판결만 떼어내 편향적이라 공격하는 것 자체가 정략적이다. 대법원장이 대선에 개입한 자업자득이라지만 정치 보복으로 비치는 게 더 문제다. 그 또한 법적 절차를 통해 해소돼야 하는 게 법치다.
특히나 대통령이 대법원장 거취를 압박하는 듯한 인상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여당의 대법원장 사퇴 공세에 공감을 표시했다는 오해가 일자 대통령실이 긴급하게 진화에 나섰지만, 더 신중해야 할 일이다. 사법부에 대한 신뢰 실추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 국면에서 우리는 서부지방법원 폭동 사태를 지켜보며 사법부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목도했다. 당시 폭동 사태 배후로 지목돼 경찰 수사를 받는 전광훈 목사가 내세운 게 국민저항권이었다.
미국 국민이 가장 신뢰하는 기관에 늘 꼽히는 게 군대와 함께 연방대법원이다. 세계를 주도하는 미국의 배후에 연방대법원이 있다. 지금 우리 사회에 절실한 과제의 하나가 국민으로부터 신뢰받는 사법부다. 사법개혁의 방향은 이런 공감대 속에 숙의돼야 한다.
2025-09-16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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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윤경 칼럼] 부산의 마지막 기회
해양수산부 부산 이전이 지역 최대 이슈로 떠올랐다. 글로벌 해양수도 부산을 향한 지역민들의 꿈도 한껏 부풀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의 대선 공약에서 출발해 새 정부 출범과 함께 국정과제로 채택되고 연내 이전이라는 로드맵까지 확정되면서다. 부산시가 ‘해양수도 부산’을 선포한 지 25년, 정부가 해수부를 신설한 지 30년 만에 해수부 부산 시대가 활짝 열린 것이다.
오는 9월 10일 창간 79주년을 맞는 〈부산일보〉가 창간 기획의 주요 테마로 ‘부산, 대한민국 해양수도’를 선택한 것도 이런 시민들의 열망을 담기 위한 노력이다. 해수부 이전이 단순히 청사를 옮기는 문제가 아니라 해양수도 부산, 나아가 해양강국 대한민국을 만드는 초석이 돼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해양수도특별법, 북극항로, 산업 집적, 금융 허브, 해사법원, 해양 전문 인재, 북항재개발 등은 글로벌 해양수도 도약을 위한 최소한의 과제들이다.
현시점에서 지역사회가 해수부 부산 이전에 목을 매는 것은 소멸의 벼랑 끝에 선 지역의 마지막 실낱같은 희망처럼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추락하는 도시의 위상을 반등시킬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절박함에서다. 부산이 제2 도시로서의 위상을 잃은 지는 이미 오래고 전국 대도시 중 처음으로 초고령사회에 진입했다는 게 객관적으로 드러나는 지표다.
소멸의 시계를 되돌리기 위한 부산의 노력은 지금도 진행 중이지만 수도권 블랙홀에 맞서기에는 역부족이다. 정부의 국가균형발전 전략은 언제나 ‘희망 고문’이었을 뿐 수도권 집중은 더 심화했다. 노무현 참여정부의 행정수도 조성과 공공기관 이전을 통한 혁신도시 ‘대못’은 혁신 역량의 분산으로 그 효과가 미흡했고 이어진 ‘5+2 광역경제권’ 등 역대 정부의 균형발전 전략은 정치적 레토릭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했다. 그 사이 수도권 인구는 전국의 절반을 넘어섰고 GDP 비중도 압도적이다. 수도권 블랙홀은 이제 충청과 강원까지 빨아들이며 국토의 기형적 개발을 가속화하고 있다.
수도권의 대척점에 있는 부산의 추락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게 고용 지표다. 통계청이 1일 발표한 지난해 부산의 고용률은 57.8%로 17개 광역시도 중 가장 낮았다. 월평균 임금도 284만 원으로 전국 17개 시도 가운데 12위에 머물렀다. 전국 평균보다 30만 원 적고, 서울과 비교하면 66만 원 낮은 수치다. 부산 청년 근로자 월평균 임금은 247만 원으로 전국 평균(270만 원)보다 약 9%(23만 원) 낮았다. ‘이러니 서울 가지’라는 말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이 같은 부산의 추락이 하루아침에 이뤄졌을 리 만무하듯 그 반전 또한 한순간에 만들어질 수 없을 것이다. 해수부가 부산으로 이전한다고 부산이 곧장 해양수도로 도약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해수부 기능 강화 등 이뤄가야 할 과제가 한둘이 아니다. 궁극에는 해양 신산업 육성을 통해 해양 산업생태계를 이뤄내지 못하면 해양수도의 의미도 퇴색할 수밖에 없을 터인데 그게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한국해양과학기술원, 한국해양수산개발원, 국립수산과학원 등 해양 공공기관 집적에도 불구하고 지역에서 해양산업 혁신이 일어나지 않는 지금의 현실을 곱씹어 봐야 한다. 대한민국을 대륙의 수도와 해양의 수도로 나누는 정도의 파격적 지원을 쏟아부어야 서울을 중심으로 수도권이 형성됐듯 부산을 중심으로 해양권을 만드는 일이 현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도전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최종 정책 결정권자의 의지겠지만 지역사회가 한마음 한뜻으로 힘을 모으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부산 경제의 속절없는 추락에도 불구하고 지역사회가 위기 돌파를 위해 한 방향으로 힘을 뭉쳤던 적이 있느냐를 생각해 보면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해수부 이전을 둘러싼 정치적 공방의 조짐은 그래서 우려스럽다. 지역 정치권의 맹주인 국민의힘 내부에서 해수부 이전을 둘러싸고 불협화음이 나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정부와 민주당이 해수부 부산 이전을 내년 지방선거를 위한 정략으로 접근한다면 그 또한 위험천만한 일이다.
해양수도 부산은 특정 정치 세력의 전유물이 아니다. 2000년 12월 18일 해양수도 부산을 선포한 것은 당시 한나라당 소속이었던 안상영 시장이었다. ‘시민이 행복한 해양수도 부산’을 시정 슬로건으로 앞세웠던 것은 해수부 장관을 지냈던 더불어민주당 소속 오거돈 시장이었다. 해양수도 부산은 시민들의 오랜 염원이었고 이뤄야 할 꿈이었다는 이야기다. 해수부 이전을 통해 온 마지막 기회를 지역사회가 지혜를 모아 부산 도약의 계기로 만들어야 한다. 이는 대한민국 성장잠재력 회복의 새로운 돌파구도 될 것이다. 해양수도 부산의 꿈이 용두사미가 되면 부산의 도약도 대한민국의 미래도 끝이다.
강윤경 논설주간 kyk93@busan.com
2025-09-02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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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윤경 칼럼] 우리는 다른 나라에 산다
집값 이야기다. 서울의 부동산 열기가 좀처럼 식을 줄 모른다. 강남을 중심으로 집값이 급등하자 결국 정부가 칼을 빼 들었다. 이른바 6·27 대책을 통해 수도권 주택담보대출 한도를 6억 원으로 제한하는 대출 규제에 들어가자 지난달에는 거래량이 줄어들며 시장이 관망세를 보인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비강남권의 마용성(마포·용산·성동)을 중심으로 집값 급등 조심이 나타나는 등 상승 추세는 여전히 굳건하다. 서울이라는 지역적 희소성을 감안하면 상승세가 꺾일 것 같아 보이지도 않는다. 정부는 시장을 이길 수 없다는 학습효과도 한몫한다. 진보 정권에서 집값이 더 오른다는 역설이 오히려 시장의 믿음인 듯하다.
수도권을 벗어나면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수도권 부동산이 불장을 이어오는 동안 부산을 비롯한 비수도권은 하락세를 지속했다. 최근 부산의 하이엔드 아파트를 중심으로 분양시장이 반짝 열기를 보이고 있지만 전반적인 비수도권 부동산 시장은 냉기가 가득하다. 쌓여있는 악성 미분양 물량을 감안하면 당분간 회복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다. 부산 아파트 가격은 몇억씩 떨어진 게 예사인데 서울이 몇억씩 올랐다는 건 다른 나라 이야기처럼 들린다. 쌓이는 미분양 물량만큼이나 상대적 박탈감도 쌓여간다.
문제는 수도권과 비수도권 부동산 양극화가 추세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점이다. 올해 들어 전개되는 양상은 양극화를 넘어 초양극화다. 이전의 부동산 시장은 양극화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는 동조화 현상이 있었다. 서울이 뜨거워지면 부산은 따뜻해지고 대구는 미지근해지는 정도의 온도차였다. 하지만 이제는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디커플링(탈동조화)이 뉴노멀이 되고 있다. 부동산 정보 플랫폼 ‘부동산지인’이 지난 10년간 전국 주요 도시의 공동주택 실거래 가격을 분석한 결과 서울의 아파트값 상승률이 부산의 3배가 넘었다고 한다. 이 기간 부산의 평당 아파트 매매가격이 823만 원에서 1226만 원으로 48.9% 상승했는데 서울은 1750만 원에서 4482만 원으로 156.1%나 올랐다.
부동산 가격은 결국 해당 지역 경제력을 반영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망국적 수도권 집중의 구조적 문제가 가장 극단적으로 드러나는 게 집값이라는 이야기다.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초양극화가 진행된 지난 10년간은 인구와 GDP에서 수도권이 비수도권을 추월한 시기와 일치한다. 수도권 집중에 따른 초저출생 누적으로 우리나라 총인구가 내리막길로 접어든 상황을 감안하면 집값 초양극화는 이제 시작이라고 봐야 한다.
상황이 이런데도 정부는 말로만 균형발전을 내세울 뿐 어설픈 부동산 정책으로 수도권 쏠림을 더 부추긴다. 대표적인 게 문재인 정부의 다주택자 양도세 중과다. 다주택자에 대한 세금 규제는 ‘똘똘한 한 채’ 현상을 낳았고 강남 3구의 아파트값 급등을 불렀다. 지역 부자들까지 한강 변 아파트 매수에 가세했다고 하니 말 다 한 거다. 애초의 부동산 정의는 온데간데없고 일부 고위 관료 소유 강남 부동산 급등이라는 내로남불만 남았다. 정책은 의도가 아니라 결과로 이야기한다.
수도권 공급 확대도 마찬가지다. 집이 모자라는 게 아니라 수도권에 수요가 과도하게 쏠리는 게 문제인데 공급 확대는 수도권 쏠림만 더 가속화할 게 불을 보듯 뻔하다. 수도권 집중을 완화하는 게 답일 터인데 늘 정책은 변죽만 울린다. 비수도권 부동산에 대한 다주택자 규제 완화 등 차별화된 특례 조치가 필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지적인데 중앙 관료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다.
새 정부라고 별반 다르지 않다. 최근 내놓은 ‘지방 중심 건설투자 보강방안’에 따르면 소멸에 처한 지방 도시의 집 한 채를 추가로 매입할 경우 1주택자와 같이 세제 감면 혜택을 주는 ‘세컨드 홈’ 제도를 확대한다는 것인데 정작 광역시는 빠졌다. 광역시에 같은 혜택을 줄 경우 집값 상승 등 시장이 불안해질 우려가 있다는 것인데 지역민들의 체감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새 정부 국정과제로 채택한 국가균형발전 정책도 부동산 초양극화 대책과 함께 가야 한다. 망국적 수도권 집중과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부동산 초양극화는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다.
한국은행은 집값 초양극화가 국가 통화정책마저 왜곡시키는 지경이 이르렀다고 진단한다. 높아진 수도권 부동산 가격은 국민 간 위화감을 조성하고 사회갈등을 초래하며 궁극에는 국가 경제를 파탄으로 이끌 것이라는 경고다. 수도권 집중 완화를 위한 뼈를 깎는 구조개혁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이다. 부동산 정책은 그 징검다리 역할을 해야 한다. 당장의 구조를 바꿀 수 없다면 부동산 정책을 통해 초양극화를 완화하려는 노력이라도 해야 할 것 아닌가.
강윤경 논설주간 kyk93@busan.com
2025-08-19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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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윤경 칼럼] 관세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자강의 길
우여곡절 끝에 한미 관세 협상이 타결됐다. 미국이 일방적으로 공표한 25% 관세율 적용 시점인 1일을 목전에 두고 한미 간에 극적 합의가 이뤄진 것이다. 한국이 미국에 3500억 달러를 투자하는 대신 상호 관세를 15%로 조정한다는 게 골자다. 대미 투자 규모를 둘러싼 엇갈린 평가에도 불구하고 일본과 유럽연합(EU) 수준으로 관세율을 맞추는 데 성공함으로써 큰 고비는 넘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관세 발효 시한을 앞두고 피를 말리는 전쟁 같은 협상이 어어졌다는 뒷이야기도 전해진다.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이 우리 협상단이 말만 꺼내면 관세율 25%로 하자며 의자에서 일어나려고 해 이를 붙잡느라 진땀을 흘리는 장면이 자주 연출됐다고 한다. 결국 K조선을 지렛대로 MASGA(Make American Shipbuilding Great Again) 프로젝트를 제안해 미국 측의 마음을 움직였다. 협상 타결 후 리얼미터가 전국 18세 이상 남녀 1016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63.9%(매우 잘했음 40.5%, 대체로 잘했음 23.4%)가 잘했다고 답해 여론도 긍정적이다. 기업들은 불확실성이 해소된 데 대해 안도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냉혹한 현실은 이제부터다. 트럼프의 ‘미치광이 전술’ 때문에 우리가 선방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래 봐야 관세 협상의 결과 남은 것은 자유무역 시대의 종언과 보호무역 시대의 개막이다. 우리나라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따라 무관세로 미국에 수출해 왔는데 앞으로 15% 관세를 물어야 한다. 우리 제조업 평균 이익률이 5~10%인 점을 고려하면 이제부터 손해 보고 수출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트럼프는 자신의 저서 〈거래의 기술(The Art of the Deal)〉에서 목표가 50이면 100을 요구하고 상대를 배려하는 척 80, 다시 50으로 낮춰 상대로 하여금 이겼다고 믿게 만드는 ‘앵커링 효과’를 말했다. 이번 관세 협상에도 적용 가능한 분석이다.
한미 정상회담 때 청구서를 또 내밀 수도 있다. 온라인 플랫폼법, 구글 정밀지도 반출 허용 등 디지털 규제와 농축산물 시장 개방을 둘러싼 이견, 3500억 달러의 투자 방식과 수익 배분, 방위비와 환율 문제 등이 말끔하게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다. 미 뉴욕타임스는 4일(현지시간) 트럼프의 관세 협상을 ‘글로벌 강탈’이라는 표현까지 동원하며 비판한다.
자유무역 시대의 종언은 수출 중심의 한국 경제에 치명적인 일이다.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 체제 출범 후 자유무역 질서 아래서 가장 성공한 나라가 한국이었다. 30년간 이어진 세계화 시대를 지나며 한국은 중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했다. 2012년 발효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으로 한국 경제는 눈부신 성장을 이뤘다. 이젠 그런 세계화가 막을 내리는 것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미국의 보호무역 전환이 트럼프의 변덕이나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는 데 있다. 트럼프 무역 정책의 설계자로 불리는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전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저서 〈자유무역이라는 환상〉에서 자유무역을 미국의 일자리를 뺏는 재앙으로 묘사한다. 트럼프는 세계 최대 소비처인 자국 내수시장을 무기화해 세계경제 질서를 새로 짜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던 세상은 이제 없다. 패권 국가인 미국이 먼저 민주적 시장 질서를 부정하고 미국 우선주의로 돌아선 마당이다. 관세전쟁의 본질은 글로벌 일자리 싸움이다. 미국 투자를 유도하고 관세 장벽을 쌓아 제조업을 부활시키겠다는 것은 결국 역외로 빠져갔던 일자리를 다시 찾겠다는 것이다. 지금 세계는 인구 감소와 기후 위기에다 기술의 일자리 잠식으로 더 이상 고속 성장이 어려운 수축사회로 돌입했다. 우리 기업이 미국에 자동차와 반도체 공장을 지으면 그만큼 국내 일자리는 사라지는 것이다. 윈윈 게임이 아니라 치킨 게임일 공산이 크다.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살아나려면 스스로 기술력과 힘을 키울 수밖에 없다. 자강이 답이다. 우리는 그동안 국제 자유무역질서 속에서 빠른 추격(패스트 팔로우) 전략으로 성공을 이뤘다. 이제 우리 경제의 위상은 퍼스트 무브로 가지 않으면 경쟁력을 키울 수 없다. 우리 스스로 인재를 키우고 첨단기술을 축적해야 한다. 힘이 없으면 미국과의 협상에서도 찬밥 신세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트럼프로 부터 ‘당신의 카드가 없다’고 공개적으로 모욕을 당하는 장면을 목도하지 않았나. 이번 미국 관세협상에서도 세계 최고 수준의 K조선이 돌파구가 됐다.
외부의 도전은 내부의 개혁으로 맞서야 한다.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정세를 판단하고 실사구시 해야 한다. 이제는 동맹의 시대가 아니라 자강의 시대다. 우리 경제 펀더멘털과 국제 경쟁력 강화가 최우선이다. 정부와 정치권, 기업과 노동자가 뜻을 모아야 한다. 우리 스스로 분열하면 싸움도 하기 전에 파탄의 길로 간다.
2025-08-05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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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윤경 칼럼] 원전 해체, 끝이 아닌 시작
국내 첫 원자력발전소 고리 1호기가 공식적인 해체 절차에 돌입한다. 원자력안전위원회는 지난달 26일 고리 1호기 해체를 최종 승인했다. 영구 가동 중단과 함께 폐로 결정이 내려진 지 8년 만이다. 대한민국 원전의 출발이었던 고리 1호기는 국내 최초의 해체 원전이라는 또 다른 역사를 시작한다.
원전을 둘러싼 찬반 논쟁은 여전히 뜨겁지만, 고리 1호기가 우리나라 산업 발전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하기 어렵다. 1960년대 말 도입 논의가 시작될 당시만 해도 국가적 리스크를 안고 출발한 국책 사업이었다. 전체 사업비 1560억 원은 국내총생산(GDP)의 5%에 달하는 규모였다. 경부고속도로 공사비가 429억 원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국가적 명운을 걸다시피 한 대규모 프로젝트였던 셈이다. 1978년 상업 운전을 시작할 당시 설비용량 58만 7000㎾는 국내 전체 발전 용량의 9%를 차지했다.
고리 1호기로 인해 1979년 2차 오일쇼크의 파고를 넘어설 수 있었고 에너지 자립과 산업화의 기틀을 마련했다. 더불어 원전 전문 인력 양성과 기술 축적이 가능했고, 지금의 대한민국이 아랍에미리트와 체코에 한국형 원전을 수출하는 원전 강국으로 도약하는 데 밑거름이 됐다.
미국 스리마일, 러시아 체르노빌,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안전성 논란이 끊이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부산 기장군 장안읍에 고리 1호기가 들어서면서 이 일대는 원전 밀집지로 변했고 부울경 800만 주민은 머리맡에 원전을 이고 사는 신세가 됐다. 원전 가동을 둘러싼 크고 작은 사고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고리 1호기에 대한 영구 정지 결정도 설계 수명을 넘어선 노후 원전 안전성에 대한 지역사회의 우려가 반영된 결과였다.
고리 1호기는 이제 1조 713억 원의 사업비가 투입돼 12년에 걸쳐 길고 힘든 해체의 과정이 진행된다. 원전 해체는 기본적으로 방사능 오염을 제거하고 환경을 복원하는 작업이지만 그 자체로 갖는 산업적 의미가 크다. 현재 22개국에서 215기의 원전이 영구 정지된 상태인데 해체가 진행된 것은 25기에 불과하다.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따르면 2050년까지 588기의 원전이 영구 정지 대상인데 시장 규모만 500조 원 이상으로 추산된다.
세계적으로 원전 해체 경험이 있는 국가는 미국 독일 일본 스위스 4개국에 불과하고 대규모 상업 원전 해체 경험은 사실상 미국이 유일하다. 원전 해체는 산업 특성상 트랙 레코드(현장적용실적)가 중요하다. 고리 1호기 해체를 통해 실적을 쌓으면 글로벌 시장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현재 우리의 원전 해체 기술은 선진국 대비 80% 안팎에 머물러 있는데 이를 끌어올리는 게 급선무다. 글로벌 원전 해체 시장은 로봇과 디지털 트윈, 신소재 등 첨단기술이 융복합된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높다. 전문가들은 우리가 원전 건설 경험을 통해 빠르게 원전 강국으로 도약했듯이 해체 기술도 따라잡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정부가 R&D와 실증을 지원하고 민간에 기술을 이전하는 유기적 협력 체제가 필요하다. 부산과 울산의 경계 지역에 원자력환경복원연구원을 설립한 것도 이 때문이다.
문제는 정책 리스크다. 정권에 따라 친원전, 반원전으로 에너지 정책이 극단을 오가는 게 산업생태계에 치명적이다. 고리 1호기 영구 정지가 결정된 후 해체 승인이 예상보다 늦어지면서 부울경을 중심으로 사업 참여를 준비 중이던 중소기업이 많이 이탈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원전 해체 시장은 각국의 정책 결정에 따라 변화가 많아 정부가 의지를 갖고 정책을 밀고 가지 않으면 지속 가능성을 담보하기 어렵다. 국가 에너지 안보 차원의 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원전 해체 경험은 우리가 원전 산업 전 주기에 걸쳐 기술력을 확보하게 된다는 의미다. 원전 건설에서부터 해체에 이르기까지 턴키(일괄)로 수주할 수도 있고 고도화된 기술로 공정별 참여도 가능하다. 물론 전제 조건은 안전이다. 원전 해체는 사용후핵연료 냉각 및 반출, 오염 구역 제염, 건물 철거, 폐기물 처분, 부지 복원 등의 순으로 진행되는데 방사성 폐기물 관리가 핵심이다. 이 과정에서 안전이 담보되지 않으면 산업생태계고 뭐고 끝이다.
원전 해체가 시작되면서 영구처분장 문제도 발등의 불이다. 근본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그동안 외면한 핵발전의 숨은 비용을 다시 따져야 하는 ‘진실의 순간’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 모든 과정은 과학적이고 실용적인 관점에서 따지고 접근해야 한다는 게 당연한 전제다. 이재명 국민참여정부가 ‘실용’을 내세우고 있는 만큼 에너지 정책에서도 이름값을 하기를 기대한다.
2025-07-22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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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윤경 칼럼] 이재명 대통령의 콘크리트 인사론
대통령의 국정 철학과 통치 스타일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게 인사다. 대통령이 모든 국정 현안을 직접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널리 인재를 구하고 적재적소에 등용함으로써 자신의 국정 철학을 구현해야 한다. 그래서 인사가 만사다. 인사가 곧 메시지고 대통령은 인사를 통해 국민과 소통한다. 인사의 성패가 정권의 명운을 가르는 이유다.
유독 인사의 중요성을 강조한 인물이 김영삼 전 대통령이다. 대통령의 능력은 유능한 인재를 발탁해 국정 현안을 해결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보안에도 철저했다. 낙점한 인물도 언론에 이름이 오르내리면 단칼에 잘랐다. 이런 그의 인사 스타일을 상징하는 말이 “깜짝 놀랐제?”다. 취임 직후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군 수뇌부 인사를 전격 단행하며 했다는 말이다. 철저한 보안 속에 군내 사조직 ‘하나회’ 척결을 시작했고 문민정부 정체성을 그렇게 세상에 알렸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탕평 인사로 그의 집권에 대한 불안한 시선을 불식시켰다.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비서실장에 노태우 정부 인사였던 김중권 전 의원을 앉혔다. 경제부총리에 상대 캠프 전력의 이헌재 전 금융감독위원장을 중용해 외환 위기를 돌파했다. 훗날 이 전 부총리는 자서전에 “DJ는 나를 동지가 아니라 기술자로 발탁했다”라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그런 YS와 DJ도 초심을 잃고 민주화 투쟁을 함께한 가신들을 능력과 무관하게 중용하다 화를 자초했다. DJ는 정권 말기 소위 ‘DJ 수첩’에 적혀 있는 사람만 대거 중용하면서 비선 라인 개입 논란에 시달렸다. 널리 인재를 구해야 하는데 측근과 비선의 유혹을 떨치지 못한 것이다.
참여정부에 이르면 아예 ‘코드 인사’가 상용어가 된다. 코드 인사는 정권의 정치적 편향성을 강화하고 다양성에 기반한 합리적 의사결정구조를 왜곡해 국가 경쟁력 저하로 이어진다. 역대 정권의 코드 인사를 둘러싼 조어들은 결국 정실 인사를 통해 어떻게 민심과 멀어졌는지 말해준다. 이명박 정부의 ‘고소영’(고려대·소망교회·영남), 문재인 정부의 ‘캠코더’(캠프·코드·더불어민주당), 윤석열 정부의 ‘서오남’(서울대·50대·남성)이 대표적이다.
이재명 정부의 초기 진용이 모습을 갖춰가고 있다. 대통령실 주요 인사는 마무리됐고 국무총리 임명을 포함해 국토교통부·문화체육관광부를 제외한 17개 부처 장관 인선이 마무리됐다. 민정수석의 낙마와 국무총리 부실 검증, 일부 장관 후보자의 의혹이 불거지고 있음에도 지금까지의 여론은 대체로 호의적이다.
전직 대통령의 추락과 국민의힘의 지리멸렬에 따른 반사 효과도 있겠지만 ‘실용’을 앞세운 이 대통령의 인사 스타일에 연유하는 바가 적지 않다. 내각에 경험 많은 현직 의원을 포진시키고 민주노총 위원장 출신을 노동부 장관에 앉히면서도 대기업 출신을 장관에 등용해 균형을 맞춘다. 외교 라인에도 ‘자주파’와 ‘동맹파’가 공존하고 법무부 장관과 민정수석 인사도 안정 속 개혁이라는 실리를 챙긴다.
취임 30일 기자회견에서는 “국민 눈높이나 야당, 우리 지지층 안의 기대치에 좀 못미치는 측면도 있다”며 먼저 몸을 낮춘다. 그러면서 “색깔이 맞는, 즉 한쪽 편에 맞는 사람만 쓰면 좀 더 편안하고 속도도 나겠지만 같은 쪽 색깔만 쭉 쓰면 위험하다”면서 콘크리트 인사론을 꺼내 든다. 물과 모래 자갈 시멘트가 골고루 잘 섞여야 콘크리트가 더 단단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역의 관점에서 들여다보면 새 정부 진용이 콘크리트인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수도권 정권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경북 안동 출신이지만 대통령의 정치적 고향은 수도권이다. 서울을 지역구로 둔 국무총리를 포함해 내각에 진입한 8명의 현역 의원 중 6명이 수도권이다. 대통령실 참모는 물론이고 여당 지도부도 수도권 일색이다. 해양수산부 부산 이전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전재수 의원이나 지방시대위원장을 맡은 김경수 전 경남도지사 정도가 부울경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을 텐데 새 정부 진용에서 차지하는 영향력이 커 보이지는 않는다.
민주당이 총선에서 수도권을 싹쓸이한 영향이 크겠지만 수도권 중심의 맨 파워로 균형발전을 뚝심 있게 밀고 나갈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균형발전을 중요한 국정 과제로 여러 번 언급했지만, 경험이 사람 의식의 많은 부분을 결정하기 마련이다. 수도권 지옥철에서 인파에 부대끼며 지역 소멸을 체감하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 대한민국이라는 구조물을 부실하게 하는 것이 수도권 일극주의다. 사상누각이 무너지듯이 대한민국 미래를 위태롭게 하는 일이다. 인사에서부터 이런 고민이 담겨야 하지 않았을까.
2025-07-08 [18: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