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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진규의 법의 창] 사기 없는 세상, 신뢰 사회로 가려면
“절대 남에게 말하지 마세요.” “지금 송금하지 않으면 큰일 납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평생 후회합니다.” 사기범들의 대사는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매번 속는다. “설마 내가 그렇게 당할 줄은 몰랐어요.” 사기 피해자들의 공통된 말이다. 누군가는 고수익 투자로, 누군가는 지인의 부탁으로, 또 누군가는 말 한마디에 인생을 송두리째 잃었다. 우리 사회에 사기 범죄는 이제 특별한 일이 아니다.
최근 경찰청 자료에 따르면 전국의 사기 피해 신고는 하루 평균 1000건을 넘긴다고 한다. 보이스피싱, 투자사기, 전세사기, SNS 쇼핑몰사기, 코인사기, 부업사기, 그리고 지인 간 금전사기까지. 사례는 너무나 다양하고, 수법은 점점 교묘해지며, 그 피해는 점점 일상 속으로 스며들고 있다. 이제는 단순히 ‘사기범’의 처벌만을 논할 수 없다. 왜 사기가 이렇게 끊이지 않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막을 수 있는지를 본질적으로 질문해야 한다.
전국 사기 피해 하루 평균 1000건 넘어
사기범 처벌 속도 늦고 피해 회복도 더뎌
법, 마음까지 규제 못 해…내면 성찰 필요
형법 제347조는 사기죄를 명확히 규정하고 있다. ‘사람(타인)을 기망하여 재물이나 재산상 이익을 얻은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또한 특별법은 피해액에 따라 가중 처벌하는 규정을 두고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사기범의 처벌 속도가 느리고, 피해 회복은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특히 디지털 기술과 결합한 지능형 사기는 수사도 쉽지 않다. 사기 피해의 70% 이상에 달하는 지능형 사기의 피해자들은 분노와 무력감 속에서 좌절한다.
사기 범죄가 과거보다 더 만연한 원인으로 사회적 환경 변화에 따른 경제적 불안, 온라인 거래 활성화로 인한 사회적 디지털 환경의 변화, 처벌의 느슨함으로 인한 범죄자에게 ‘리스크 대비 수익이 높은’ 범죄로 인식되는 현실, ‘나만 아니면 된다’는 식의 태도가 가져온 사회적 신뢰 저하 등을 들 수 있겠다. 이러한 원인에 대해 첫째, 진화하는 사기 범죄에 대응하여 법과 제도의 정비를 통하여 사기 범죄에 대한 처벌 강화, 범죄수익의 박탈, 피해회복을 실질적으로 보장하는 제도적 장치, 디지털 범죄 대응 전담 기구의 확대와 기술적 감시 시스템이 요구된다. 둘째, 금융·디지털 문해력 교육 강화가 필요하다. 아이들에게 금융과 디지털 문해력을 체계적으로 가르치고, 성인을 대상으로도 지속적인 예방 교육이 필요하다. 셋째, 온라인 플랫폼 책임 강화가 필요하다. 중고 거래 앱, SNS, 투자 플랫폼 등 사기 발생 가능성이 높은 온라인 환경에 대해 피해 보상 제도를 포함한 운영자의 책임을 명확히 해야 한다. 넷째, 신뢰 회복을 위한 사회, 문화적 변화가 절실하다. 이익보다 양심, 경쟁보다 연대의 가치를 회복해야 한다. 정직이 손해가 되지 않는 사회, 타인을 속이기보다 배려하는 문화가 자리 잡아야 사기는 설 자리를 잃는다.
위와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기의 근절은 쉽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한계는 ‘법의 예방 기능’만으로는 부족함을 의미한다. 법은 ‘범죄 이후’에 개입할 수 있지만, ‘범죄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사회적 기획’이 따로 필요하다. 사기 범죄의 심리적 본질을 불교의 통찰, ‘탐·진·치’에서 참고해 볼 수 있다. 불교는 인간의 고통과 악행의 뿌리를 ‘탐욕(탐), 분노(진), 어리석음(치)’의 세 가지 독으로 설명한다. 사기 범죄 역시 예외가 아니다. 피해자는 쉽게 돈 벌고 싶은 마음으로 유혹에 빠지고, 사기범은 더 많은 이득을 탐해 범죄를 저지른다(貪·탐). 사회에 대한 불만과 분노는 “나만 당할 수 없다”는 방식으로 또 다른 피해자를 낳는다(瞋·진). 경계심 없는 어리석음은 사기를 반복하게 만든다. 정보는 넘쳐나지만, 진실을 분별하는 지혜는 부족하다(癡·치). 법은 이러한 마음의 문제를 직접 규제하지 못한다.
사기 예방의 최후 방어선은 ‘나 자신의 판단력’이다. “나한테만 너무 좋은 기회는 없다” “믿고 싶은 마음을 경계하라” “모르면 물어보라”는 단순한 원칙이 사기를 막는다. 불교에서 말하는 ‘보시(나눔)’ ‘자비(공감)’ ‘지혜(통찰)’ 중 ‘지혜’는 단지 수행의 덕목이 아니라 현대사회 범죄 예방의 또 하나의 실질적인 전략이 될 수 있다. 사기를 줄이기 위해선 속이는 사람을 막는 법과 속지 않는 사람을 만드는 교육,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내면의 성찰이 함께 작동해야 한다.
사기는 단순한 범죄가 아니다. 그것은 사회 구성원 간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행위이며, 공동체를 파괴하는 해악이다. 대한민국이 진정으로 선진국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경제성장뿐 아니라 ‘신뢰 사회’로의 도약이 병행되어야 한다. 사기에 대한 단호한 대처와 함께, 정직이 살아남을 수 있는 사회적 토양을 마련하는 일, 그것이 우리 모두가 함께 해야 할 과제다. 누군가가 “돈을 쉽게 벌 기회가 있다”고 귀에 속삭인다면, “변호사나 전문가에게 물어 보고 답해주겠다”고만 해도 사기 피해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2025-05-27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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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연의 도시 공감] ‘50+ 세대’ 곱하기 0.7
부산의 인구는 현재 325만 명을 조금 넘는다. 그 중 중장년 이상이 46%로 인구 절반을 차지한다. 부산 인구에 관련된 연관어도 인구 소멸, 2025년 초고령 사회 진입, 노인과 바다 등이 주로 거론된다. 하지만 암울한 데이터들과 달리 현장에서 만나는 50~64세 장년층인 이른바 ‘50+ 세대’의 활동력을 보면 과연 암울함만 존재할까라는 의문이 든다.
최근 새로운 소비문화의 중심으로 ‘50+ 세대’를 주목한다. 1970년을 전후해 태어난 세대는 10대 자녀와 비슷한 라이프스타일을 공유하고 있다. 온라인명품쇼핑몰 고객 중 ‘50+ 세대’ 비율이 약 45%를 차지한다. MZ세대를 주요 고객으로 삼던 온라인 쇼핑몰에서도 이제 자연스럽게 ‘50+ 세대’가 주 고객으로 자리매김 중이다. 방탄소년단을 좋아하는 덕후 중에도 이 세대는 빠지지 않는다. 방탄소년단의 사회적 가치에 대한 세미나를 개최하고 자연스럽게 10대들과 교감한다. 액티브 시니어(Active Senior) 세대는 어떠한가? 사회 활동 및 소비 활동에 적극 참여하는 세대로서 취미, 여가 생활 등 자기만족을 위한 소비를 즐기는 중장년 남성 ‘골드 파파(Gold Papa)’, 제2의 전성기를 맞아 돈을 아끼지 않는 세련된 노년 여성 ‘어반 그래니(Urban granny)’ 등 초고령화 사회이지만 여전히 활동력과 다양한 경험을 가진 연령대가 ‘50+ 세대’인 것이다. 요즈음은 나이도 자신 나이에 0.7을 곱한 활동 나이, 즉 사회적 나이에 초점을 맞추는 추세다. 필자도 계산해보니 30대가 된다.
부산시는 액티브 시니어인 장노년층에 초점을 맞춘 센터들을 운영 중이다. 부산시는 2030년까지 60세 이상 고용률을 45%로 높이는 것은 물론 장노년층 일자리도 대폭 늘릴 계획이다. 13만 명 이상의 일자리를 만들겠다는 목표로 온라인 플랫폼인 장노년일자리센터와 지역 거점공간 중심의 우리동네ESG센터를 운용 중이다. 그 외 신노년 세대의 소통과 교류, 친목 형성을 통해 건강하고 행복한 노후 생활을 지원하는 하하센터 등이 있다. 그중 장노년일자리센터를 살펴보니 전문적인 일자리보다는 경비원, 미화원, 생산직, 주차관리원 등 한정된 일자리에 대한 구인구직 정보가 대부분이었다. 각종 커뮤니티, 인생학교 등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좀 더 양질의 일자리와 정보의 확장을 위한 다양한 방법이 필요한 것으로 보였다. 이를 위해 퇴직한 시니어를 위한 기술 중심의 직무교육 제공과 함께 일자리를 연결하는 천직(1000jobs) 일자리 플랫폼을 벤치마킹 했으면 한다. 정보 전달 방식도 통일된 이미지와 짧은 길이의 영상 콘텐츠 중심으로 개선한다면 민간 기업의 참여를 높이고 좀 더 양질의 일자리까지도 담을 수 있는 플랫폼으로 변모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우리동네 ESG센터는 지역적 특성, 기업 참여, 탄소발자국이라는 사회적 가치를 기반으로 운영 중에 있다. 현재 지역마다 유형을 조금씩 달리하여 핵심 가치를 실천할 수 있는 다양한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예를 들면 올해 오픈한 영도센터의 경우 기본적으로는 재생 플라스틱의 활용과 시제품 생산 그리고 자원순환 프로그램은 유지하되 지역 카페와 연계해 커피박을 활용한 제품과 프로그램을 선보이고 있다. 이러한 지역성을 반영한 아이템으로 서로 다른 활동력을 보인다면 지역마다 다양한 활동들을 기대할 수 있다.
이제 ‘50+ 세대’의 활동력을 반영한 정책과 프로그램은 시작되었다. 다만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세밀한 기획들이 조금 더 필요한 때다. 중앙동 소재 한 게스트하우스 대표가 털어놓은 경험담이 생각난다. 서울에서 내려와 사업을 준비하던 그는 게스트하우스 사업 초기에 주변 상인들의 소개를 받아 보일러 공사를 의뢰했다. 그런데 공사 당일 온 작업자가 70대 어르신이어서 깜짝 놀랐다고 한다. 엘리베이터가 없다 보니 4층까지 계단으로 혼자서 큰 보일러를 옮길 수밖에 없었기에 “어르신은 못 하신다”라고 손사래를 쳤다고 한다. 왜소한 몸집의 그 어르신은 “걱정 말라고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했지만 부상을 염려해 쉽게 작업을 진행하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수십 분의 실랑이 끝에 어르신은 작업을 시작했다. 어르신은 허름한 이불 몇 장을 보일러 밑에 깔아 요리조리 움직이더니 4층까지 손쉽게 옮기고 공사도 깔끔하게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지금까지 보일러는 잘 작동되고 있다고 한다. 게스트하우스 대표는 당시 자신의 선입견 때문에 보일러 공사 전문가인 어르신의 자존심을 건드렸다는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털어놨다. 어쩌면 우리는 전문적인 지식과 오랜 세월 동안 체득한 현장 노하우를 가진 노년층을 단지 외모와 나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대하는 것은 아닐까? 사회적 나이로 치면 아직도 왕성한 ‘50+ 세대’를 위한 세부적인 맞춤형 정책들을 본격적으로 준비해야 할 때가 되었다.
2025-05-20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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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성수의 과기세] 양자역학 100년과 닐스 보어
올해는 양자역학이 탄생한 지 100년이 되는 해다. 이에 발맞추어 유엔은 올해를 ‘세계 양자과학기술의 해’로 정했다. 세계 곳곳에서 양자역학 1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리고 있는데, 필자가 속한 한국과학사학회도 지난 4월 26일 개최된 춘계학술대회에서 양자역학 100년을 돌아보는 특별 세션을 마련했다.
양자역학은 1925년에 행렬역학과 파동역학의 두 갈래로 세상에 태어났다. 1925년 7월 하이젠베르크는 행렬역학에 관한 첫 논문을 발표했고, 그것은 1926년 3월 보른, 하이젠베르크, 요르단을 저자로 하는 소위 ‘3인 논문’으로 진화했다. 슈뢰딩거는 1925년 12월 양자 현상에 대한 파동방정식을 구상했으며, 1926년 1월 파동역학의 탄생을 알린 첫 논문을 발표했다. ‘양자역학’이란 용어는 보른이 처음 사용했고, 슈뢰딩거는 행렬역학과 파동역학이 수학적으로 동일하다는 점을 증명했다.
양자역학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플랑크, 아인슈타인, 보어, 조머펠트 등을 만나게 된다. 플랑크는 흑체복사를 설명하기 위해 1900년 ‘플랑크 상수(h)’를 도입했고, 아인슈타인은 1905년 플랑크 상수를 활용해 ‘광전효과’를 멋지게 분석했다. 보어는 1912년 전자가 일정한 궤도를 따라 운동한다는 ‘궤도 모형’을 통해 수소의 선스펙트럼을 설명했으며, 그것은 1916년 ‘보어-조머펠트 원자모형’으로 거듭났다. 1900~1912년 양자가설, 1912~1925년 고전 양자론, 1925년 이후가 양자역학의 시대로 평가된다는 점도 흥미롭다. 처음에는 가설에 불과했던 것이 학자들의 인정을 받으면서 이론이 되었고 결국 수학적 표현을 갖춘 역학의 수준에 이르렀던 셈이다.
필자가 주목하고자 하는 인물은 닐스 보어(1885~1962)이다. 보어는 당시 과학의 주변국이던 덴마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1년 코펜하겐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케임브리지 대학의 캐번디시 연구소로 갔다. 전자를 발견한 조지프 톰슨 밑에서 1년 정도 수학하다가 뉴질랜드 출신인 러더퍼드가 재직 중이던 맨체스터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러더퍼드는 알파입자 산란실험을 바탕으로 1911년 원자핵이 중심에 있고 전자가 핵 주위를 회전한다는 ‘행성 모형’을 제안한 바 있었다. 보어는 행성 모형이 전자기학과 모순된다는 점에 착안하여 자신의 궤도 모형을 개발했다. 보어는 1916년 30세의 나이로 코펜하겐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1921년에는 덴마크 정부와 칼스버그 양조회사의 지원을 바탕으로 코펜하겐 대학에 이론물리학 연구소가 설립되었다. 보어는 연구소의 소장을 맡아 성심껏 운영했으며, 이에 따라 이론물리학 연구소는 ‘보어 연구소’로 회자되었다.
덴마크의 보어 연구소는 독일의 괴팅겐 대학, 영국의 캐번디시 연구소와 함께 현대물리학의 산실이 되었다. 사실상 양자역학의 성립과 발전에 공헌했던 거의 모든 이론가가 1920~1930년대에 보어 연구소를 거쳐 갔다. 파울리의 배타 원리, 윌렌벡과 호우트스미트의 스핀 개념,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 보어의 상보성 원리 등이 이 연구소에서 나왔다. 오늘날 양자역학에 대한 주류 해석으로는 ‘코펜하겐 해석’이 꼽히는데, 여기서 코펜하겐은 다름 아닌 보어 연구소를 지칭한다.
보어 연구소의 독특한 분위기를 나타내는 용어로는 ‘코펜하겐 정신(Copenhagen spirit)’이 자주 사용된다. 그것은 격식을 따지지 않는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의미한다. 보어는 한참 아래의 젊은이들이 어떠한 의견을 내더라도 경청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산책하면서 젊은 과학자와 단둘이서 자유로운 대화를 즐겼던 사람도 보어였다. 이 때문에 보어 그룹은 ‘소요학파’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보어가 내건 거의 유일한 규칙은 “어느 누구도 모국어만을 고집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보어 연구소를 거쳐 간 인물 중에는 일본 현대물리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니시나 요시오도 있다. 그는 1923~1928년 보어 연구소에서 공부한 후 일본으로 돌아가 코펜하겐 정신을 전파하는 데 앞장섰다. 니시나는 양자역학에서 중요한 연구 업적을 남겼고, 이화학연구소(리켄)에서 핵심적인 관리자로 활동했으며, 자유로운 토론과 적절한 격려로 후학을 양성했다.
조지프 톰슨의 아들로 1937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조지 톰슨은 보어가 과학계에 미친 공헌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출판된 논문만을 가지고 보어가 과학계에 끼친 영향을 전부 평가할 수는 없다. 그는 갈릴레오와 뉴턴 이래 가장 근본적인 과학의 변화를 앞장서서 이끌었다. 세계의 많은 과학자들이 보어의 뛰어난 업적에 무한한 찬사를 보냈으며,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애정을 품었다.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가 하는 점이 그의 과학적 업적보다 더 중요하다.” 보어는 세대 간에 다리를 놓고 다음 세대를 키워낸 훌륭한 스승이자 리더였다.
2025-05-13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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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욱의 글로벌 산책] 어설픈 ‘상호관세’ 돌멩이에 지구촌 피멍
지난 1월 취임 직후부터 미국의 무역 상대국을 상대로 날선 반응으로 일관하던 트럼프 대통령은, 3월부터 철강·알루미늄에, 4월부터 자동차와 자동차 부품에 품목별 관세를 부과했다. 그리고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지난 3일 트럼프 대통령은 5일부터 모든 수입품에 10%의 소위 ‘보편 관세’를, 그리고 9일부터 57개 주요 무역상대국에 소위 ‘상호관세’를 부과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그리고 3일 발표된 ‘상호관세’에서 중국 34%, EU 20%, 일본 24%를 필두로 미국과 FTA를 체결하고 있는 한국도 25%의 관세를 부과받았다. 그리고 9일 상호관세 부과가 시작된 지 13시간 만에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을 제외한 나머지 국가에 ‘상호관세’ 부과를 90일 유예했다. 그리고 미국과 중국은 이후 관세 인상 치킨 게임을 벌여서, 중국은 미국산 수입품에 최대 125% 관세를, 미국은 중국산 수입품에 최대 145% 부과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각국의 보호무역 장벽의 절반 수준만큼 미국이 관세를 매긴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백악관이 공개한 산출 방식에 모두가 경악 내지는 폭소를 금할 수 없었다. 그 산출 방식은 미국이 해당 무역상대국에 받는 무역적자를 해당국의 대미 총 수입으로 나눈 것을 상대국의 보호무역 장벽이라는 어떤 경제학 이론도 설명하지 못하는 정말 기괴한 논리에 기반하고 있었다. 그리고 더욱 기가 막힌 것은 미국이 관대하기에 이들 무역장벽의 절반 수준만 ‘상호관세’로 받겠다고 한 것이다.
경제학 이론 뒤엎는 트럼프식 관세
미국이 만들어온 질서 스스로 파괴
대만은 LNG 투자에도 관세 덤터기
한국, 무너진 질서 속 대응책 '숙제'
현재 WTO에 기반한 다자주의적 무역질서의 성립 배경은 1929년 전 세계를 휩쓴 대공황과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미국을 필두로 각국이 채택한 보호무역주의가 정치적인 극단화를 낳았고 결국 세계대전으로 이어진 데 대한 반성에서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다자주의적 무역질서의 탄생을 주도한 건 미국이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이 만든 다자간 무역질서를 미국의 대통령인 도널드 트럼프가 파괴하려 하고 있다.
일본의 이시바 총리는 2월 7일 트럼프 대통령과 개별 정상회담을 통해서 최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기분을 맞추려고 노력을 했지만, 결국 미국이 부과하는 24%의 상호관세를 피하지 못했다. EU는 트럼프 집권 초기 미국의 관세 압박에 미국 빅테크 기업에 디지털세를 부과하는 것을 포함한 강경 대응을 예고했다가, 미국이 상호관세 부과 90일 유예를 결정하자 미국과 현재 양자협상을 진행 중이다.
그러나 2018년 트럼프 1기 행정부 시기 관세압박 상황과 차이점은 미국과 중국의 관세 갈등이 관세 치킨게임으로 격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은 미국과 관세 치킨게임을 진행하다가 현재 대미 수출관세는 최대 145%까지 인상된 상황에 직면했고, 이에 대한 대응으로 7가지 희토류 광물의 수출 제한을 발표했다.
현재 트럼프 행정부는 알래스카 LNG투자 문제로 한국, 일본, 대만을 압박하고 있다. 알래스카 LNG사업은 트럼프 1기 행정부 때 추진했다가, 바이든 행정부에서 야생동물 보호지역 환경파괴 문제로 중단시켰던 사업이어서 리스크가 크다. 대만은 트럼프의 알래스카 LNG개발 참여 압박에 굴복해 알래스카 LNG 구매·투자 의향서(LOI)를 체결했지만 32% 상호관세를 피하지 못했고, 이후 미국과 상호관세를 낮추는 협상을 진행할 때 알래스카 LNG를 더 이상 레버리지로 활용하지 못하는 실수를 하였다. 미국의 LNG 투자 참여 요구와 방위비 인상 등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대만의 선택은 한국에 주는 시사점이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바이든 행정부 시기 중국 의존도를 줄이는 아시아-태평양 공급망 질서 구축을 위해 ‘인도-태평양 경제 프레임워크(IPEF)’가 2022년 5월 23일 출범했다. 그리고 미국, 한국, 일본, 호주와 뉴질랜드, 브루나이, 인도,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싱가포르, 태국, 베트남이 회원국으로 참여하여 미국의 아시아-태평양 공급망 질서 재편 전략에 동참했었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는 미국의 아시아-태평양 공급망 질서 구축에 협력해 온 IPEF 참여국가에도 가혹한 ‘상호관세’를 부과했고, 미국 스스로 ASEAN 지역에서 구축해온 신뢰를 무너뜨리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의 섣부른 조치로 발생한 미국과 ASEAN 국가들 간에 균열을 활용해 중국 시진핑 주석은 베트남, 말레이시아, 캄보디아를 잇따라 방문했다. 중국의 영향력이 큰 캄보디아 이외에도 말레이시아와 베트남은 시진핑 주석의 방문을 적극 환영했다.
미국에 실망한 ASEAN 국가와 중국 간 협력이 확대될 경우, ASEAN 국가와 협력 강화에 노력을 기울여 온 한국의 입지가 보다 좁아질 가능성이 클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가 무너뜨리고 있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기존 국제질서 변화에 면밀하게 대응해야 한다.
2025-04-29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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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우석의 기후 인사이트] 뜨거워지는 지구에서 살아남기
경북, 경남, 울산 지역의 산림을 잿더미로 만든 이번 산불은 규모와 피해 면에서 역대 최악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작은 불씨 하나가 강한 바람을 타고 순식간에 산 전체로 퍼졌다. 수많은 인력과 장비가 투입됐지만, 결국 불길을 잡은 건 잦아든 바람과 내린 비 덕분이었다. 불의 시작은 사람의 실수였지만, 그 이후의 전개는 달라진 기후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예년보다 훨씬 더 건조했던 날씨는 불을 키운 주요한 배경이 되었다.
요즘 날씨는 예전과는 확실히 달라졌다. 단순히 계절이 어긋나는 정도가 아니라, 날씨 자체가 더 극단적이고 강렬해졌다. 이런 날씨의 변화는 지구온난화와 관계가 있을까? 단일 사건을 기후 변화와 직접 연결 짓는 것은 쉽지 않지만, 기본적인 물리 현상만으로도 우리가 겪고 있는 변화가 무엇 때문인지는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 있다.
지구 대기는 우리가 숨 쉬는 공기로 이루어져 있고, 이 공기는 온도나 압력 차이에 따라 끊임없이 움직인다. 이런 움직임은 우리가 아는 고체의 움직임과는 아주 다르다. 고체는 따로따로 움직일 수 있지만, 공기처럼 이어진 연속체는 한쪽에서 변화가 생기면 그 영향이 자연스럽게 다른 쪽으로도 퍼져나간다. 대기의 움직임 중에서도 가장 기본이 되는 현상이 바로 ‘대류’다.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예가 라면을 끓일 때의 냄비 속 물이다. 냄비 바닥에서 뜨거워진 물은 가벼워져서 위로 올라가고, 상대적으로 차가운 물은 아래로 내려온다. 이처럼 따뜻한 물과 차가운 물이 서로 자리를 바꾸며 일어나는 순환 운동을 ‘대류’라고 부른다. 과학자들은 이 현상을 이론적으로 설명하며 ‘레일리-버나드 대류’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대류는 위아래로 움직이는 수많은 셀로 구성되어 반복되는 패턴을 만들어낸다. 특히 육각형 모양의 패턴이 자주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벌집이나 제주도의 주상절리처럼, 자연 속에서 볼 수 있는 육각형 구조들도 이와 비슷한 물리적 원리와 관련이 있다.
대류의 중요한 특징은, 어느 한 지역에서 운동이 강해지면 다른 지역도 함께 반응하게 된다는 것이다. 공기나 물처럼 연속된 물질에서는 한 쪽만 유별나게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다. 냄비의 한쪽만 더 뜨겁게 해도, 그 영향은 전체로 퍼져나간다.
대기 속 대류는 여기에 지구 자전, 수증기, 열 교환까지 더해지며 훨씬 복잡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기본 원리는 비슷하다. 어느 지역에서 공기가 강하게 상승하면, 다른 지역에서는 그에 반대되는 하강 운동이 강하게 형성된다.
지구온난화는 지표면의 온도를 높인다. 따뜻해진 땅 위의 공기는 가벼워져 더 빨리 위로 올라가고, 이는 대류를 전반적으로 강화한다. 또한, 따뜻한 공기는 더 많은 수증기를 품을 수 있는데, 이 수증기가 상승하면서 차가운 상층에서 물방울로 변할 때 주변에 열을 방출한다. 이 열은 다시 상승을 더욱 가속한다. 이러한 과정 중에 강한 폭우가 일어나고 지역적으로는 홍수가 일어날 수 있다.
어딘가에서 상승 운동이 강화되면, 그 주변에는 반드시 하강 운동이 일어난다. 이러한 하강 운동이 일어나는 지역은 구름이 거의 없고, 날씨는 더욱 건조해지게 된다. 산불은 이렇게 건조한 날씨와 강한 바람을 타고 빠르게 퍼진다. 시작은 인간의 실수였지만, 이후의 확산은 기후 변화의 영향이 크다고 볼 수 있다. 온난화의 영향이라고 단정 짓기 위해선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기본적인 물리 원리만으로도 충분히 가능성을 추정할 수 있다.
만약 지금처럼 한반도의 건조한 날씨가 이어진다면, 조만간 비가 오는 날조차도 극단적인 모습으로 바뀔 수 있다. 예전처럼 보슬보슬 내리는 장맛비 대신, 짧은 시간에 쏟아지는 폭우가 홍수를 일으키고, 또 다른 형태의 재난을 만들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상기후’라는 이름 아래 흘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떤 방식으로 우리 삶을 바꾸고 있는지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대기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변화를 바라보는 시선은 단순한 과학 지식을 넘어, 우리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로 다가오고 있다. 그리고 그 변화 속도에 비해 우리가 대처하는 속도는 여전히 느려 보인다. 탄소 배출을 줄이고, 기후 정책을 세우고, 산불 같은 재난에 대응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는 일은 거창한 계획만으로는 부족하다. 일상에서, 정책의 작은 조각들에서, 교육과 기술을 통해 우리는 이 거대한 흐름을 조금씩 바꿔 갈 수 있다. 지금의 이 변화는 단지 날씨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 전체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신호다.
2025-04-22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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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진규의 법의 창] 대한민국, 마약의 그늘 벗어나려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촉발한 관세전쟁으로 세계 경제가 요동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멕시코와 캐나다에 대한 관세를 부과하면서, 이들 국가가 펜타닐(마약)의 미국 유입을 차단하지 못하고 있고, 마약 밀매를 방지하기 위한 노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하나의 이유로 들었다. 그 이유의 합당성은 제쳐두고라도 일면 세계 최강국 미국조차 마약과의 전쟁에서 고전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한때 ‘마약 청정국’이라 불리던 대한민국의 현실이 변하고 있다. 과거에는 마약 문제라 하면 해외 사례로 여겨졌지만, 이제는 뉴스에서 연예인, 유튜버, 국회의원의 자녀, 심지어 청소년까지 마약 관련 사건에 연루되는 모습을 접하게 된다. 최근 강원도 강릉 옥계항에서 다량의 코카인이 발견된 사건,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학원가 마약 음료 사건 등 충격적인 사례도 적지 않다. 대한민국 사회가 더 이상 마약으로부터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이 분명해지고 있다.
과거 10년 전에 비해서 최근 몇 년 사이, 마약 유통은 단순한 지하 세계의 문제가 아니라 온라인 플랫폼과 SNS, 메신저 앱을 통해 일반 대중에게까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문제로 확산하였다. 10대 청소년이 마약을 접하는 사례도 점점 늘어나고 있으며, 일각에서는 마약이 ‘가볍게 체험할 수 있는 약물’로 왜곡된 채로 소비되고 있다.
마약 문제의 심각성은 단순한 개인의 일탈로 끝나지 않는다. 중독으로 인한 건강 문제, 다수의 범죄와의 연결성, 사회적 비용 증가 등은 국가적, 사회적 차원에서 큰 부담을 가져온다. 특히 최근에는 필로폰, 케타민, 엑스터시, 펜타닐 등 강력한 중독성을 지닌 약물의 유입이 증가하며 피해가 더 심각해지고 있다.
그동안 우리는 무방비 상태였나? 대한민국은 오랫동안 마약에 대한 경각심이 높았지만, 예방 교육과 사회적 감시 체계는 미비했다. 또한, 마약 사용자를 범죄자로만 보는 시선이 강해, 이들이 재활보다는 처벌의 대상으로만 다뤄지며 오히려 재범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외국처럼 약물 사용자에게 치료 중심의 접근이 아닌, 낙인과 배제의 방식은 오히려 문제 해결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지금부터라도 국가와 사회는 우리 공동체의 마약 실태 점검을 통하여 다시 체계적인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첫째,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약물 오남용과 관련해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예방 교육이 시급하다. 공포 유발 방식이 아닌, 실질적이고 공감할 수 있는 콘텐츠로 접근해야 한다. 둘째, 마약 유통 경로가 온라인으로 옮겨간 만큼, 디지털 수사 인력을 확충하고 AI 기술을 도입해 유통 채널을 사전에 차단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 셋째, 약물 중독자는 범죄자 이전에 치료와 회복이 필요한 환자다. 중독자에 대한 상담, 치료, 사회 복귀 프로그램을 통해 재범률을 줄여야 한다. 넷째, 마약은 국경을 넘는 범죄다. 외국 수사 기관과의 협력, 공조 수사를 통해 해외에서 유입되는 마약 루트를 차단해야 한다. 다섯째, 마약의 문제가 이제는 우리 공동체와 먼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직시하고, 사회적 인식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 마약 사용자에 대한 낙인을 줄이고, 사회 복귀를 돕는 포용적 분위기를 조성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이러한 실천을 담당할 국가 차원의 ‘중앙 컨트롤타워’를 설치하는 것이다. 마약은 국가 안보의 문제다. 미국의 전담 기구 마약단속국(DEA)은 자체적으로 정보 분석 시스템과 첩보망을 갖추고 있어 마약 밀매 조직을 체계적으로 추적한다. 대한민국도 이처럼 데이터 기반 수사를 통해 마약의 유통 경로, 밀수 루트, 신규 약물 트렌드 등을 선제적으로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마약 수사는 일반 형사 사건과는 다르다. 약물에 대한 화학적 이해, 중독 심리에 대한 지식, 암호화된 디지털 수사 역량이 모두 요구된다. 독립적인 기구가 있다면 전문성 있는 수사관과 분석관을 장기적으로 양성할 수 있다. 대한민국도 해외 마약 수사망과의 네트워크 강화를 위해 중앙 전담 조직을 설립하는 것이 절실하다. 나아가 단속만으로 마약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수사, 중독 예방 교육, 중독자 치료, 사회 복귀 지원까지 통합 정책을 설계하고 관리할 수 있는 컨트롤타워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대한민국은 지금 중대한 갈림길에 서 있다. 단호하고도 현명한 대처가 필요하다. 마약과의 싸움은 단순한 법 집행을 넘어 교육, 복지, 기술, 문화가 함께 움직여야 가능한 일이다. 지금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대한민국이 다시 ‘마약 청정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결정될 것이다.
2025-04-15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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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연의 도시 공감] 어느 4년 차 청년 창업가의 고민
부산에서 활동 중인 청년 창업가를 최근 만났다. 창업 4년 차인 그는 지역에서 소형 선박을 건조하면서 공간 운영, 가구 제작, 체험 프로그램 등도 함께 하고 있다. 현재 하고 있는 일들이 줄어 국가가 지원하는 공모사업 5개 정도를 신청했다고 한다. 몇몇 사업들은 떨어졌고 1차를 통과한 사업의 최종 통과를 위해 프레젠테이션을 준비 중이라고 했다. 사업 자금이 부족한 초기 창업자들의 대부분은 매년 지원 사업 공모에 도전한다. 선정되면 지원금을 활용해 사업을 유지할 수 있는 데다 사업화를 위한 실험 기회가 생기기 때문이다. 이러한 다양한 정부 지원 사업들이 동시다발적으로 공개되고, 발표되는 시기가 바로 4월이다.
사실 기술기반이 아닌 이상 지역에서 창업하기는 쉽지 않다. 그나마 5년 전 시작된 로컬크리에이터 사업이 지역 소규모 창업자들을 지원하는 유일한 사업일 것이다. 이 사업은 ‘가장 지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다’는 슬로건으로 시작됐다. 지역 고유의 특성과 자원을 기반으로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접목, 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한 사업이다. 로컬크리에이터는 비즈니스의 초점을 지역가치, 로컬푸드, 지역기반, 지역특화 관광, 거점 브랜드, 디지털 문화체험, 자연 친화 활동으로 구분해 창업 지원 신청을 받는다. 올해 영남권만 하더라고 약 29개 사를 선정하는 사업에 약 940개 사가 지원했다고 한다. 경쟁률은 약 32.4 대 1 정도이다.
청년 창업가는 이미 지역에서 이름난 기업들이 선정된 것 같다면서 초기 창업자인 자신처럼 경력이 적고 매출 규모가 크지 않는 지원자들에겐 진입장벽이 더 높아진 것 같다고 한다. 그는 이어 소상공인 대출을 알아보니 AI(인공지능)가 접목된 사업이 아닌 이상 직원 포함 5명이 한 해를 버틸 수 있을 만큼의 자금을 확보하기도 어려웠다고 했다. 청년 창업가는 지역 활동기반사업을 지속할 것인지, 기술 기반으로 재창업을 할 것인지를 두고 고민하면서 재취업까지 고려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이렇듯 초기 창업에 대한 기대감은 크지만 현실적인 벽이 높다보니 ‘2023년 창업기업 5년차 폐업률’은 66.2%에 달했다. 10개 업체 중 6개가 창업 5년을 넘기지 못하고 문을 닫는 셈이다. OECD 평균 폐업률이 54.6%인 것을 감안할 때 한국의 폐업률은 여전히 높은 수준임을 알 수 있다.
현재 지역에서는 다수의 창업자들이 배출된다. 최근 부산기술창업투자원이 개소함에 따라 지역 기술 기반 스타트업을 대상으로 보육과 컨설팅, 투자를 패키지로 묶어 지원하는 활동도 시작됐다. 이번 ‘2025년 부산창업패키지지원사업’도 예비, 초기, 도약 3단계로 구분하여 창업 맞춤 지원을 실시한다. 120개의 창업기업을 지원한다고 한다. 초기 창업자의 경쟁률이 7.6 대 1 이라고 하니 부산에 기술 기반 창업기업들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외 예비 창업자를 위한 신창업사관학교에서는 매년 40명 이상의 창업자가 배출된다. 청년창업사관학교, 강한소상공인, 관광벤처기업 등까지 포함한다면 지역 내 창업기업 수는 더 많아진다. 그리고 창업기업 중에는 빠른 성장세를 보이는 혁신 스타트업도 있지만 대부분은 브랜드 가치를 기반으로 한다. 그래서 창업 이후 5년 이상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다양한 조치들이 절실하다.
가장 시급한 것은 정보 제공과 네트워크 구축이다. 창업자들의 대부분은 일과 지원 사업을 동시에 수행하다보니 사업 안정화를 위한 정보가 필요하다. 이들이 손쉽게 정보를 구할 수 있도록 정보체계화가 필요하다. 공모사업뿐만 아니라 마케팅, 디자인 전반에 대한 통합 서비스센터 기능도 강화되었으면 한다. 현재도 관심만 가지면 각 기관 홈페이지 등에서 다양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으나, 업무에 쫓기는 창업자들은 정보를 찾는 시간조차도 내기 힘들다. 따라서 시기, 서비스 등의 유형별 키워드 검색으로 정보를 쉽게 찾았으면 한다. 네크워크 구축도 강화해야 한다. 1년에 2회 정도라도 각 기관의 실무자들과 창업자들이 함께 만나 정보를 교류할 수 있으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런 네트워크가 구축되면 창업자들은 인적 교류와 정보 교류를 한층 손쉽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모 대학 창업학과에서 강의를 한 적이 있다. 20대의 청년들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강의실에 들어섰지만 생애 전환을 위해 다시 배움의 길을 선택한 만학도가 적지 않았다. 서로의 창업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질의응답까지 끝내니 2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수업을 마치고도 유망 직종과 사업계획서 작성법 등을 묻는 학생들이 많았다. 지역에는 창업을 꿈꾸며 열정적으로 준비하는 예비 창업자들이 많다. 부산이 세대를 아우르는 창업의 도시로 자리매김하려면 이들을 위한 한층 다양한 지원책 마련을 서둘러야 한다.
2025-04-08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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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성수의 과기세] 반도체산업의 변동과 기술경영
한 번은 친구가 ‘과기세’가 뭐냐고 물었다. ‘과학과 기술로 읽는 세상’의 준말인데, 세상을 볼 때 과학과 기술을 꼭 포함시켜야 한다고 답했다. 그러자 친구는 반도체에 관심이 많다고 했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엔비디아(NVIDIA), TSMC(Taiwan Semiconductor Manufacturing Company) 등이 거론되었다.
반도체(半導體)는 도체와 부도체의 중간에 해당하는 것으로 외부의 조건에 따라 그 특성이 민감히 변화하기 때문에 다양한 용도로 사용된다. 반도체는 1947년에 트랜지스터가 발명되고 1958년에 집적회로(IC)가 개발되면서 산업화하기 시작했다. 페어차일드와 인텔의 공동 창립자인 고든 무어는 1965년에 반도체의 집적도가 매년 2배씩 증가한다고 예견했으며, 1975년에는 그 기간을 2년으로 수정했다. 반도체의 집적도는 1개의 칩에 들어가는 트랜지스터의 숫자에 의해 규정된다.
반도체는 정보를 저장하는 기능을 가진 메모리 반도체와 기능이 특별하게 설계된 시스템 반도체(비메모리 반도체)로 나뉜다. 메모리 반도체는 기록된 정보를 읽을 수만 있는 롬(ROM)과 정보를 기록하고 읽는 것은 물론 수정하여 써넣을 수 있는 램(RAM)으로 구분된다. 램의 대표적인 유형인 D램(Dynamic RAM)은 정보를 처리하는 속도가 빠르지만,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기록해 둔 정보가 없어지는 특성이 있다.
주지하듯, 한국의 반도체산업은 1980년대에 들어와 D램에 집중적으로 투자하면서 급속히 성장했다. 삼성전자는 1988년에 4M D램을 개발하면서 선두그룹에 편입되기 시작했고, 1994년 256M D램의 개발을 계기로 기술적인 면에서도 세계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D램 생산량에서 삼성전자는 1992년부터, 우리나라 전체로는 1998년부터 세계 1위가 되었다. 메모리 반도체에서는 삼성전자가 1993년부터, 우리나라는 2000년부터 세계 1위를 기록하고 있다.
2000년대에는 반도체업체의 유형이 다변화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종합반도체 회사(IDM), 팹리스(fabless) 회사, 파운드리(foundry) 회사 등이 그것이다. 메모리 반도체는 대부분 IDM이 설계와 생산을 함께 수행하고 있으며, 시스템 반도체의 경우에는 팹리스가 설계를, 파운드리가 위탁생산을 담당하는 분업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파운드리 분야에서 최고의 강자로 오른 기업은 모리스 창이 설립한 TSMC다. 옛날에는 패키징이 단순조립에 불과해서 뒷방 신세에 놓여 있었지만, 지금의 패키징은 고객의 주문을 척척 알아서 반영하는 첨단 분야로 변신했다. TSMC가 파운드리에서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자, 메모리 분야의 삼성전자나 시스템 반도체의 강자인 인텔도 파운드리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최근 들어서는 반도체산업에 대한 게임의 법칙이 다시 바뀌고 있다. 2022년에 ‘챗GPT’로 상징되는 생성형 AI 서비스가 시작되면서 AI 서버에 들어가 데이터 학습과 추론을 돕는 반도체 패키지가 필요해졌다. 그것은 흔히 ‘AI 가속기’로 불리는데, 그래픽처리장치(GPU)를 중심으로 고대역폭 메모리(HBM)를 배치하여 만들어진다.
GPU의 선두 주자는 젠슨 황이 이끄는 엔비디아다. 처음에 엔비디아의 GPU는 게임용 컴퓨터를 위한 그래픽 카드에 불과했다. 그러던 중 ‘딥러닝의 아버지’로 작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제프리 힌턴이 2012년 이미지넷 대회에서 엔비디아의 GPU를 활용했고, 이를 계기로 엔비디아는 가파른 성장세에 들어섰다. 엔비디아에서 비싼 AI 가속기를 수만 개씩 구매해야 하는 고객사들의 부담은 점점 커지고 있다.
SK하이닉스는 엔비디아에 HBM을 공급하면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이에 반해 삼성전자의 납품은 계속 지연되고 있다. 사실상 HBM은 AI 서비스에 특화되긴 했지만, 대용량 D램에서 파생된 것에 해당한다. 그동안 D램의 최강자로 군림하면서 ‘초(超)격차’를 운운하던 삼성전자가 HBM에서는 맥을 못 추고 있는 셈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분석과 진단이 등장하고 있는데, 필자에게는 삼성의 조직문화에 주목하는 논의가 와닿는다. 이전에는 엔지니어들이 의사결정의 주도권을 쥐었지만, 최근에는 재무관리 쪽이 득세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구조 속에서는 새로운 기술에 대한 담대한 도전이 이루어지기 어려워지는 게 당연하다.
기술 중심의 경영, 즉 기술경영의 중요성이 다시 떠오르는 지점이다. 기술경영은 글로벌 플레이어는 물론이고 기술집약적 중소벤처기업에도 필수적인 덕목이다. 더 나아가 기업은 물론 국가 차원에서도 기술경영이 필요하고, 기술집약이 떨어지는 기업도 기술경영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왜냐하면 국가든 기업이든 미래의 성장동력을 기술혁신에서 찾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2025-04-01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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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래의 메타경제] 케인스와 하이에크
시간이 지나면 이념의 지평도 변하기 마련이다. 이념이 정책으로 직접 나타나는 경제에서도 그런 흐름을 본다. 냉전이 지배하던 시절 경제학의 양극에는 마르크스(K. Marx)와 하이에크(F. Hayek)가 있었다. 마르크스가 사회주의 이념을 뒷받침했다면 하이에크는 시장경제의 강력한 옹호자였다. 계획경제는 반드시 자유를 희생하게 된다는 것이 하이에크의 굳은 신념이었다.
그 중간에 케인스(J. Keynes)가 있었는데, 그에 대한 평가는 이중적이었다. 케인스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진보는 케인스를 보수주의자로 몰아붙였다. 마땅히 더 심한 경제위기를 겪었어야 할 자본주의가 케인스의 처방에 의해 회생하고 순항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반면 시장주의자들은 케인스를 직접 비판하지는 않았지만 언제나 의혹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그러면서 진정한 케인스 정책이 무엇인지에 대해 궁금해 했다.
한국 이념적 지평은 점점 오른쪽으로
케인스보다 하이에크 이론 득세할 듯
시장주의적 극단편향 경계해야 할 때
1989년 냉전체제가 무너지고 소련이 붕괴되면서 사회주의를 뒷받침했던 이론도 함께 타격을 입었다. 하이에크의 대극에 있던 마르크스의 영향력은 급격히 퇴조하였다. 그러면서 아주 이상하게도 진보에 의해 보수로 비판받았던 케인스가 진보의 자리에 서게 되었다. 이제 경제학에서 진보와 보수는 매우 단순하게 정리되었다. 정부의 개입을 옹호하면 진보이고 시장의 역할을 강조하면 보수로 구분되었다.
불법 비상계엄 정국이 오랫동안 이어지면서 우리가 미처 몰랐거나 막연히 생각하고 있던 것들이 속속들이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 과거의 지배적인 언론을 대신하여 다양한 정보유통 채널들이 더 힘을 얻으면서 얼마나 많은 가짜뉴스와 혐오가 만들어지고 증폭되는지 적나라하게 알게 되었다.
그와 함께 아주 놀라웠던 것은 그동안 진행되어온 우리사회의 이념적 지평의 이동이다. 비상 정국의 대치 속에서 국민의힘을 중심으로 한 보수 진영은 대부분 극우의 논리와 행동양식을 보여주었다. 합리적 보수를 대신하여 극단적인 주장과 선동이 보수의 집회를 이끌어가는 핵심동력이 되고 있다.
극우로 이동한 보수의 비어있는 공간으로 진보로 불려 왔던 더불어민주당이 조금씩 이동하고 있다. 이재명 대표가 실용노선을 강조하고 민생행보를 하고 기업인을 만나는 것은 그러한 움직임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사실 별로 놀라운 것은 아니다. 원래부터 크게 진보적이지 않았던 더불어민주당이기에 큰 변신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념적 지평의 변화는 국민들의 생각에 조응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보수의 흐름이 강화되고 극우의 논리들이 득세하는 것은 세계적인 현상이다. 다만 나라마다 처한 상황이 다르고 갈등이 다르기 때문에 이념적 스펙트럼과 강도만 조금씩 다를 뿐이다. 그렇지만 보수와 극우의 논리에는 공통점이 있다.
기술의 변화와 함께 기존의 일자리는 줄어들고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고령화와 저출산으로 노동의 공급이 부족해지면서 많은 이주 노동자들을 받아들이고 있다. 이런 나라들에서 예외없이 나타나는 것은 없어진 일자리에 대한 불만이 이주 노동자로 향하고 있는 혐오이다. 혐오는 항상 사회적 약자에게로 향하는데, 그 대상자가 이주 노동자들인 것이다.
한국에서는 중국 국적의 조선족이 이주 노동자를 대체하면서 중국 혐오가 자라왔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이주 노동자가 적었던 한국에서는 혐오의 많은 부분이 오랫동안 사회적 약자의 지위에 있었던 여성으로 향했다. 여기서 기인한 젠더갈등은 세계 최저의 저출산을 가져온 핵심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혐오에 기반을 둔 이 같은 갈등에서 우리 사회를 지킬 방법은 무엇인지 진심으로 걱정하게 된다.
다시 케인스와 하이에크로 돌아와 보자. 실업급여가 노동자와 실업자의 상태를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되는지 경제학자들은 논의를 하고 있다. 좀 극단적인 비유를 해보자. 기술이 빠르게 변하는 시대에는 실업급여를 주고 교육을 받게 하여 새로운 일자리를 찾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면 그것은 케인스의 입장이다. 반면 시장에 맡겨 일을 하여 돈을 벌게 만들어야 한다면 그것은 하이에크의 주장에 가깝다.
모두가 보수로 이동하면 향후 케인스보다는 하이에크의 주장이 더 득세할 가능성이 크다. 문재인 정부 시절 인천공항 공사 비정규직 사태가 던진 충격적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만들려 했던 정부의 선의의 시도는 수많은 젊은이들의 반대에 부딪혀 실패하였다.
정규직이 될 줄 알았다면 자신도 비정규직에 미리 응시했을 것이라는 주장에서 극단적인 시장주의적인 편향을 읽는다. 국민들의 가치와 생각에 정치가 따라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지나친 하이에크의 득세는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2025-03-25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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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욱의 글로벌 산책] 교육혁신이 도시를 젊고 새롭게 바꾸려면
오늘날 전 세계 도시들은 경제 침체, 인구 감소, 산업 변화 등의 도전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시들은 다양한 전략을 모색하고 있으며, 그중에서도 교육혁신이 도시 활력을 되살리는 핵심 요소로 주목받고 있다. 교육은 단순한 지식 전달을 넘어, 도시의 경제를 활성화하고, 창의적 인재를 육성하며, 지역 사회를 변화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특히 교육혁신이 기존에 강점이 있었던 산업과 맞물렸을 경우에 그 효과는 더욱 극대화될 수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휴대전화 제조기업인 노키아 중심의 산업도시였던 핀란드의 오울루가 노키아의 쇠퇴 이후 도시의 침체를 교육혁신으로 극복한 사례다.
노키아의 고향 오울루의 극적 변신
지역에 걸맞은 교육혁신이 그 바탕
해양항만 인프라 강점 보유한 부산
산업 맞춤 교육혁신해야 도약 가능
1980~1990년대 오울루는 노키아의 핵심 연구개발(R&D) 센터가 위치한 도시로 성장했었다. 그러나 노키아는 휴대전화가 스마트폰으로 진화하는 시장변화에서 애플과 삼성에 밀리며 2000년대 후반 대규모 구조조정을 했고, 그 결과 오울루의 숙련된 엔지니어들이 실직하면서 지역 경제에 심각한 타격이 있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오울루대학교 중심으로 정보통신(IT) 관련 교육 및 연구를 강화했고, 오울루시와 기업이 협력하여 소프트웨어 및 ICT 관련 창업을 지원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기술 창업 교육을 제공해 스타트업 생태계를 조성했다. 그 결과 핀란드는 이후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IT·게임·헬스테크 스타트업 허브 중 하나가 됐다. 현재 700개 이상의 기술 스타트업이 오울루에서 활동 중이다. 그 중심에는 오울루대학교가 있었다.
그러나 교육혁신이 지역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이루어질 때 사상누각이 되기도 한다. 2000년대 후반, 디트로이트는 제조업 쇠퇴로 인해 경제가 침체되자, STEM(과학·기술·공학·수학) 중심 교육 개혁을 추진했었다. 고등학교와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IT·기술 직업교육을 확대해 자동차 산업 쇠퇴 이후 도시의 산업생태계를 주도하는 것이 인재 육성의 목표였다. 그러나 지역의 산업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IT교육 일변도의 교육개혁은 교육을 받은 학생들이 취업할 곳이 없어 대도시(샌프란시스코, 시카고)로 유출되는 현상을 만들어 내고 말았고, 결국 실패했다.
이와 비슷한 실패 사례가 중국의 둥관에서 있었던 교육혁신을 통한 도시재생 시도다. 둥관은 중국의 대표적인 제조업 도시였으나, 2010년대 후반 첨단산업 전환을 위해 교육개혁을 추진했다. 공업 기반을 넘어 AI, 반도체, 첨단 기술 산업을 키우기 위해 관련 전공 개설 및 기업-대학 협력을 강화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기존 둥관의 저임금 제조업에 종사하던 노동자들이 첨단산업으로 전환할 교육을 받기 어려웠고, AI·반도체 산업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AI·반도체 관련 고급 인재들이 대거 필요했으나, 둥관에는 높은 수준의 대학과 연구소가 부족했다. 그리고 지역 내 AI·반도체 산업생태계가 존재하지 않아서 둥관의 대학 내에서 이루어진 AI·반도체 인재 양성은 지역 기업과 연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우리 도시 부산에서 교육혁신이 도시의 재도약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관련 산업과 교육의 인프라가 부산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경우라야 성공을 거둘 가능성이 크다. 부산은 해양·항만 인프라, 조선·해양기자재 산업, 해양수산업 등 다양한 해양산업 분야에서 글로벌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고, 해양 관련 교육인프라에서는 국내 다른 지역을 선도하고 있다. 그러나 지속적인 성장과 국제적 위상 강화를 위해서는 여러 도전과제가 존재하며, 이를 해결하기 위한 대학-산업체-지방자치단체 간의 협력을 통한 전략적 노력을 필요로 하고 있다. 부산항은 국내 컨테이너 물동량의 76.8%, 특히 환적 물동량의 97% 이상을 처리하며, 2015년 이후 세계 환적 2위 항만의 위상을 유지하고 있지만, 현재 항만 운영의 비효율성을 개선하기 위해 터미널 대형화 및 스마트 항만 구축이 필요하다. 또한 항만 및 선박의 친환경성이 강화되는 현재 상황에서 관련 산업에 대한 대학-산업체-지방자치단체 간의 협력을 통하여 R&D 혁신의 성과를 내야 한다. 부산이 강점을 가져온 수산업도 기후변화 대응과 관련해 축산업의 온실가스 배출을 절감한다는 목표에서 다시 주목받을 필요가 있으며, 노르웨이 등 수산업 선진국에 비해서 경쟁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부산의 관련 산업 노후 인프라에 대한 정비와 이를 위한 기술 혁신이 이루어져야 한다. 게다가 시베리아 지역 및 최근 트럼프 대통령이 언급한 알래스카에서 개발되는 천연가스가 시장으로 도입되기 위해서는 극한 환경에서 천연가스를 개발하고 이를 운송하는 조선해양산업에서 혁신이 이루어져야 한다.
부산이 강점을 가진 분야의 교육혁신이 지역 내 산업과 지방자치단체의 전략적 지원과 접목돼 부산이 다시 우수한 청년 인재들이 꿈을 펼치는 공간으로 거듭나기를 기대해 본다.
2025-03-18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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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우석의 기후 인사이트] 기후 시스템의 균형
북쪽에서 밀려온 차가운 공기가 물러가면서 변덕스러운 봄 날씨가 시작되고 있다. 잦은 저기압과 고기압의 이동으로 날씨는 며칠 간격으로 주기적으로 변한다. 이러한 변화 뒤에는 상층에서 흐름을 조절하는 제트 기류가 있다. 제트 기류는 남쪽의 따뜻한 공기와 북쪽의 차가운 공기 사이의 경계를 따라 대기 상층에서 빠르게 흐르는 공기 흐름이다. 제트 기류의 세기는 남북 간 온도 차이에 비례하며, 온도 차이가 클수록 제트 기류는 강해진다. 그러나 온도 차이가 일정 임계치를 넘으면 제트 기류는 불안정해져 남북으로 요동친다. 이때 따뜻한 공기는 북쪽으로 밀려가고, 차가운 공기는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남북 간 온도 차이를 줄인다. 이러한 흔들림이 중위도에서 저기압과 고기압이 형성되는 원인이다.
저기압과 제트 기류의 상호 작용
남쪽 잉여 에너지 북쪽으로 운반
자연계의 정교한 조절 지속돼야
제트 기류가 남북으로 크게 굽이치면, 그 아래에서는 상승 기류를 동반한 저기압이 형성되어 비를 내리고, 하강 기류가 형성된 곳에서는 고기압이 자리잡아 맑은 날씨를 만든다. 저기압과 고기압이 순차적으로 이동하며 우리가 경험하는 날씨 변화를 이끈다. 일반적으로 저기압은 지표면 근처에서 발달한다. 북쪽의 차가운 공기가 남쪽으로 내려오며 가벼운 따뜻한 공기 아래로 빠르게 파고들어 제트 기류의 흔들림이 관측된다. 일기도에서 하층의 등고선이 요동치는 모습을 보면 저기압 발달의 징후를 알 수 있다. 에너지 이동 관점에서, 저기압은 제트 기류의 에너지를 흡수하면서 성장하고, 이 과정에서 제트 기류는 점차 약화된다. 결국 제트 기류의 에너지를 이용해 저기압이 빠르게 발달한다.
제트 기류에서 에너지를 받은 저기압은 상층으로 이동하며, 동시에 제트 기류의 남쪽인 적도 방향으로 서서히 움직인다. 약 3~4일 후, 저기압은 제트 기류 남쪽에서 소멸하며, 이 과정은 바닷가에서 파도가 부서지는 현상과 유사하다. 구조가 붕괴되며 주변 흐름에 흡수되고 대기 흐름 속으로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에너지 관점에서, 저기압의 역할은 명확하다. 남쪽은 햇빛을 받으며 과잉 에너지가 공급되고, 북쪽은 에너지가 부족하다. 저기압은 남쪽의 잉여 에너지를 북쪽으로 운반하며, 중위도에서는 적도에서 공급된 에너지를 북극으로 이동시키는 독특한 공기 흐름 구조가 형성된다. 따라서 저기압은 자연이 효율적인 에너지 수송을 위해 선택한 최적의 구조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저기압의 소멸 과정을 자세히 보면, 이러한 해석에 의문이 생긴다. 저기압은 소멸하면서 자신이 가진 역학적 에너지를 제트 기류에 돌려주고, 이를 통해 제트 기류를 다시 강화시킨다. 제트 기류가 강해지면 남북 간 온도 차이가 다시 커지게 된다. 즉, 저기압이 온도 차이를 줄이기 위해 발생하고,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수송하는 구조로 형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소멸 직전에 온도 차이를 다시 증가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발생 전의 온도 차이로 완전히 되돌리지는 않지만, 감소시킨 온도 차이를 일부 되돌려 놓는다. 이러한 현상은 저기압이 단순히 온도 차이를 해소하는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라, 더 복잡한 이유를 가지는 대기 순환의 일부임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저기압의 역할에 대해 다시 고민할 필요가 있다. 저기압이 단순히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수송하기 위한 구조체라고만 보기보다는, 특정 조건에서 적절한 에너지를 이동시키는 시스템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물리학의 기본 원리인 뉴턴의 법칙이나 생태계에서 나타나는 진화의 법칙에는 최적화라는 개념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물체는 위치 에너지와 운동 에너지의 차이를 누적시킨 값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며, 생명체는 주어진 환경에서 가장 최적의 구조로 진화한다. 이러한 최적화 개념을 중위도 제트 기류에 적용해 보면, 이 시스템이 무엇을 최적화하려는 것인지 아직 명확하지 않다.
오랜 세월 동안, 중위도의 대기는 적절한 에너지를 고위도로 전달하기 위해 끊임없이 변덕스러운 날씨를 만들어 왔다. 아직 그것이 정확히 어떤 원리에 의해 조절되는지 설명할 수 있는 완벽한 이론은 없지만, 이러한 자연계의 정교한 조절 속에서 인간을 비롯한 수많은 생명체가 삶을 이어왔다. 그런 무수한 생명들의 연속된 삶을 떠올려 보면, 산업혁명 이후 인간이 만들어 낸 지구 온난화가 어쩌면 인류의 가장 큰 실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자연계는 인간이 미처 이해하지 못하는 어떤 목적 속에서 거대한 행성의 공기 흐름을 조율하며, 수많은 생명체가 번성할 수 있는 환경을 오랜 세월에 걸쳐 구축해 왔다. 그러나 우리는 현대 과학이라는 불완전한 지식을 바탕으로, 오로지 우리의 편의와 이익을 위해 그 섬세한 균형을 무너뜨려 왔다. 이제, 기후 변화의 거대한 위기에 직면한 지금,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자연이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들어 온 조화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로서, 우리는 과연 얼마나 현명한 결정을 내릴 수 있을까?
2025-03-11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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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진규의 법의 창] 미래 세대의 헌법
대한민국은 선진국인가? AI에게 물어보니, 그렇다고 한다. 대한민국은 다른 나라에 비해서 경제적, 사회적 안정성이 높고, 고도의 기술력, 인프라, 생활수준 등을 갖춘 나라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선진국이 되기에는 갈 길이 멀다고 느껴진다.
대한민국이 선진국이 된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원제: Why Nations Fail, 저자: 다르온 아셈오글루·제임스 A. 로빈슨)라는 책에서 설명하듯이 대한민국이 ‘포용적인 제도’를 가진 국가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는 저자의 견해에 동의한다.
포용적인 제도는 대다수 사람들이 경제적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하고, 인권과 법의 지배를 보장하며, 개인의 창의력과 혁신을 장려하는 제도 등을 말하는데, 우리나라가 포용적인 제도를 갖추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성문의 근거는 대한민국 헌법이다. 우리 헌법은 국민주권, 민주주의, 법치주의, 기본권 보장,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 존중 등을 규정하여, 포용적 제도임을 증명하고 있다.
필자의 아이가 중학교 3학년일 때, 아이는 학교에서 헌법을 배우고 있으나, 법전에서 헌법 조문을 직접 본 적은 없다고 했다. 필자는 아이에게 헌법 읽기를 제안하여, 매주 한 번 헌법 130개 조문을 하나씩 같이 읽고, 내용을 얘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다행히 아이는 재미있어 했고, 약 1년 동안 헌법 읽기를 통하여 필자와 아이는 소통하는 시간을 가졌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민주공화국이며,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조문을 읽으면서, 국가란 무엇인지를 같이 생각했다. 아빠로서 허세를 더해 막스 베버는 국가를 “합법적인 폭력을 독점하는 조직”으로 정의했다고 얘기했다. 당시 아이는 국가와 폭력이라는 단어의 연결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대한민국 국가권력의 정당성이 국민에게 있다는 것은 이해하는 것 같았다.
인간의 존엄과 가치, 자유권, 평등권 등 기본권을 보장한다는 조문을 읽으면서는 ‘인권’이 무엇인지에 대해 서로 얘기했다. 철학자 아르투르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중대한 권리는 자신이 겪고 싶지 않은 일을 타인에게 강요하지 않는 것이며, 자신이 기뻐하는 일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선택의 자유다”라는 글을 남겼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을 이해하면, 공동체 구성원 상호 간 타인의 권리를 존중할 수 있다는 얘기를 했다. 아이는 학교에서 배운 논어의 “자기가 타인으로부터 강요받고 싶지 않은 것은, 자기도 타인에게 강요하지 말라”(己所不欲, 勿施於人)라는 구절을 필자에게 얘기해 주었다.
헌법 조문을 읽는 횟수를 거듭할수록 아이는 진지한 눈으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간혹 필자가 답하기 어려운 질문도 했다. 아이와 함께 헌법 읽기를 통해 얻게 된 것은 헌법을 통한 세대 간 소통의 경험이라 할 수 있다. 헌법 읽기로 조부모와 손자녀, 부모와 자녀 세대 간 소통을 시도해 보는 것은 어떨까. 긍정적일지 알 수 없지만, 서로의 생각을 깊이 이해하는 하나의 수단은 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기사에, 서울의 한 대학에서 비인기 과목이었던 ‘헌법’ 강의가 수강 신청에서 큰 인기를 끌고, 헌법 관련 강의인 ‘시민교육과 헌법’, ‘민주시민과 헌법’, ‘한국정치사 입문’ 등의 수강 신청률이 지난해에 비해 높아졌다고 한다. 대학생들이 우리 헌법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좋은 일이다.
대한민국 헌법은 1987년 개정된 것으로 현재의 모습을 갖추고 있으나, 여러 이유로 약 38년 동안 개정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헌법을 배우려는 젊은 세대가 늘어나면, 그들은 대한민국의 권력구조를 이해하고, 시민의 자유와 권리에 대한 의식이 지금보다 더 높아질 것이다. 또한 지금의 헌법이 가진 한계나 문제점에 대하여도 고민하게 될 것이다. 2025년 3월 현재 한국 정치 상황을 고려할 때, 늦었지만 세대, 지역 등 사회의 다양한 층위의 통합을 위해서 헌법 개정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시작할 때다.
영국의 정치철학자인 로드 액턴은 “권력은 부패를 일으키고,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Power tends to corrupt, and absolute power corrupts absolutely)”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권력이 너무 집중되거나 절대적인 형태로 존재할 경우 그 위험성에 대한 지적이다. 제왕적 대통령제라고 일컬어지는 지금의 헌법 아래 대통령뿐만 아니라 반수 이상의 의석을 가진 정당이 실질적인 대화와 타협 없이 독단적인 입법권을 행사할 때, 둘 다 절대 권력이 될 수 있고, 시민에게 악영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머지않은 미래에 헌법 개정이 이루어진다면 지금의 헌법보다 국가 권력을 더 나누어 놓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아이들이 살아갈 대한민국이 선진국에 걸맞은 더 나은 헌법을 갖기를 희망해 본다.
2025-03-04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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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연의 도시 공감] 지역산업, 관광 콘텐츠로 확장하기
2월은 졸업 시즌과 봄방학이 겹쳐 새로운 시작과 끝이 공존하는 달이다. 설 연휴가 지나면서 다소 차분해질 즈음, 지역에서 초기 창업가들에게 투자하는 대표들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이들은 한목소리로 국내 경기의 불확실성이 커지는 만큼, 이제는 ‘글로컬(Glocal)’ 시장에서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상품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처음에는 다소 먼 이야기처럼 느껴졌지만, 이내 궁금증이 생겼다. 글로컬 시장에서 통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 기준은 어떻게 설정해야 할까? 지역에서도 가능할까? 수많은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얼마 전, 미국 세인트마리대학(Saint Mary’s College)에서 2주간 기업 탐방 프로그램을 위해 한국을 방문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20명의 학생이 대기업이 아닌, 지역의 스토리를 가진 기업을 방문하고 싶다는 요청을 해왔다. 이에 부산 영도를 추천했다. 대평동 깡깡이 마을 주변의 수리조선 산업이 밀집한 공업소와 삼진어묵, 모모스커피, 스페이스 원지 등이 모여 있는 봉래동 물양장 지역을 소개했다.
학생들과 삼진어묵 매장 앞에서 만났을 때, 이들이 어묵을 잘 먹지 않을 것이라 예상하여 ‘고로케’만 권했다. 그러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학생들은 매장 안으로 들어가 어묵을 직접 담기 시작했고, 직원이 “매운 고추튀김 어묵이 시그니처”라고 설명하자 즉시 집어 들고 맛보며 감탄을 연발했다. 이어 어묵의 제조 과정, 판매량 등에 대한 질문이 쏟아졌고, 매장 카운터 앞에서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이후 물양장 지역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모모스커피로 이동했다. 학생들은 커피 생산 과정과 이동 경로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유리창 너머에서 커피 제조 과정을 유심히 지켜봤다. 그리고 커피 드립백을 2~3박스씩 구입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투어가 끝날 무렵, 한 학생이 “이곳에서 인턴십을 할 수 있느냐”라고 물었다. 이에 교수님은 “우선 한국어부터 배워야겠지”라며 웃었고, 내년에는 지역산업과 마케팅을 주제로 워크숍을 열고 싶다는 제안을 남겼다. 그 순간, 상품뿐만 아니라 지역의 전통산업 자체가 하나의 글로컬 산업관광 콘텐츠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 산업관광은 교육이나 연구 목적으로 방문하는 관광객이 중심이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일반 관광객들도 단순한 정보 전달을 넘어, 체험과 스토리텔링을 통해 도시의 이미지를 형성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예를 들어 독일 뮌헨과 슈투트가르트에는 BMW, 벤츠, 포르쉐 박물관이 있다. 이 박물관들은 단순히 자동차 마니아들만 찾는 곳이 아니다. 자동차 관련 전공자뿐만 아니라 건축가와 디자이너들에게도 ‘성지’ 같은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이곳에서는 지역 경제의 역사, 기술 발전, 차량 연구뿐만 아니라 혁신적인 공간 디자인까지 함께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전시 디자인과 굿즈들이 스토리와 함께 다채로운 콘텐츠로 구성되어 있어 방문객들의 몰입감을 높인다.
이뿐만이 아니다. 암스테르담, 삿포로, 칭다오, 더블린 등은 특정 산업과 도시 이미지를 연결하는 대표적인 사례다. 굴뚝이나 로고 앞이 자연스레 ‘포토존’이 되고, 내부에서는 맥주를 매개로 지역산업과 연계된 전시와 시음 프로그램이 운영된다. 이 과정에서 방문객들은 해당 도시를 찾는 명분을 얻는다. 스와로브스키 크리스털 월, 허쉬파크 등도 기업 브랜드와 도시 이미지를 결합한 성공 사례다. 결국, 이러한 도시들은 참여 기업과 지역 경제에 추가적인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있다.
부산은 제조업 기반의 다양한 산업군을 보유한 도시다. 100년 이상의 항만도시 역사를 지닌 부산은 물류 중심지로서 신발, 섬유, 수산가공, 주류, 식품가공, 자동차 등 경공업부터 중공업까지 폭넓은 산업군을 형성하고 있다. 따라서 산업관광 콘텐츠의 잠재력은 무궁무진하다.
물론, 당장 지역의 산업체들이 국내외 관광객을 대상으로 견학·시찰·체험을 제공하는 관광 형태로 전환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이를 가능하게 할 테스트 프로젝트가 먼저 진행되었으면 한다. 우선 장소와 인적 자원을 연결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 부산상공회의소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상공회의소에 전시된 내용과 발간된 자료만으로도 지역산업과 현장을 충분히 연결할 수 있다. 또한, 산업 유산, 기업 전시관, 구술 자료 등 흩어진 정보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더 나아가 지역 대학과 협력해 ‘지산학(지역-산업-학계) 협력 프로젝트’를 통해 산업관광 콘텐츠를 기획하고 아이디어를 공유했으면 한다. 아울러 특정 장소에 스토리를 부여하는 작업도 중요하다. 이를 위해 공공건축가 제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고려해야 한다. 이러한 활동이 모이면, 부산은 단순한 관광도시를 넘어 지역산업을 기반으로 한 ‘소프트 파워’를 갖춘 도시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2025-02-25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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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성수의 과기세] 챌린저호 사고의 교훈을 찾아서
1986년 1월 27일 밤, 미국항공우주국(NASA·나사)과 로켓 추진기 설계·제작 업체인 모턴 티어콜사는 원격 회의를 열었다. 다음 날 아침에 우주왕복선 챌린저호를 발사할지 여부를 놓고 긴급히 소집된 회의였다. 회의에서 티어콜의 몇몇 엔지니어들은 챌린저호 발사를 다시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오링(O-ring)의 성능에 대한 우려에서 비롯되었다.
오링은 주 엔진에 부착된 두 개의 로켓 부스터를 조립하기 위해 끼워 넣은 부품이다. 만약 오링이 부식하여 복원력을 잃어버리면 마디 사이를 밀봉하는 데 실패할 수 있다. 그 결과 고온의 가스가 새고 저장 탱크에서 연료가 점화되면서 전체적인 폭발로 이어질 수 있다. 당시에는 오링의 온도가 53F(11.7℃)가 되면 누출이 발생한다는 실험 결과가 있었으며, 이보다 낮은 온도에서는 누출이 더욱 심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챌린저호 발사 때 예상된 기온은 26F(-3.3℃)였고, 오링의 온도는 29F(-1.7℃)로 계산되었다.
일탈의 정상화 시정 안 돼 결국 참사로
위험 요소 무시한 제주항공 사고도 유사
국내 기반 시설 정비·관리 신경 써야
나사는 챌린저호의 성공적인 비행을 간절히 원했다. 많은 예산이 소요된 우주왕복선 사업의 성과를 보여주어야 했을 뿐만 아니라 챌린저호 발사일 저녁에는 레이건 대통령의 시정연설이 계획되어 있었다. 티어콜의 메이슨 부회장을 포함한 경영진은 이러한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결국 나사와 티어콜은 챌린저호를 발사하기로 결정했다. 원격 회의가 잠시 중단된 사이에 메이슨은 공학 부서의 책임자에게 “공학자의 직함에서 벗어나 경영자의 입장이 돼라”고 말하기도 했다. 다음 날, 챌린저호는 발사된 지 73초 만에 폭발했고, 7명의 우주비행사가 목숨을 잃었다. 챌린저호 사고는 비극적인 인명 손실뿐만 아니라 수백만 달러의 값어치가 있는 장비를 파괴시켰으며 나사의 명성에도 심각한 손상을 입혔다.
사고가 발생한 지 10년이 지난 후에 사회학자 다이앤 본은 〈챌린저호 발사의 의사결정〉이란 묵직한 연구서를 내놓았다. 그녀는 ‘엔지니어와 경영자’ 혹은 ‘영웅과 악당’이라는 이분법적 구도로는 챌린저호 사고를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대신에 본은 생산 위주의 문화(culture of production), 구조적 비밀주의(structural secrecy), 일탈의 정상화(normalization of deviance) 등에 주목했다. 생산 위주의 문화는 빡빡한 스케줄을 이유로 들어 발사를 강행하는 관행을 뜻하며, 구조적 비밀주의는 현장의 의견이 상부로 전달되면서 중요한 부분이 축소되는 현상을 지칭한다.
본이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내세운 것은 일탈의 정상화였다. 이 개념은 일탈을 ‘허용할 만한 위험’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이 생겨나는 조건을 수정하지 않는 경향을 의미한다. 일탈의 정상화가 계속되면 일탈의 범위 자체가 확대됨으로써 결국 커다란 재앙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사실상 오링은 시험 비행에서도 계속 문제가 되었다. 24번의 시험 비행 중에 7번이나 오링의 부식이 발견되었다. 다만 오링 두 개가 모두 부식된 경우는 없었고, 하나가 작동하지 않으면 다른 하나가 이음새를 지탱해 주었다. 오링의 부식은 처음에 심각한 일탈처럼 보였지만 점차 정상적인 위험으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일탈의 정상화 과정을 거쳐 챌린저호가 발사되었는데, 두 오링이 모두 손상되면서 크나큰 참사로 이어졌다.
지난 연말에는 우리나라의 무안공항에서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가 발생했다. 아직 공식적인 조사 결과는 나오지 않았지만, 사고의 원인을 두고 조류 충돌, 콘크리트 둔덕, 무리한 운항 일정 등이 거론되었다. 항공사의 정비사들이 인력 부족으로 인해 매우 높은 노동강도에 시달렸다는 폭로도 있었다. 이 중에서 조류 충돌을 제외하면 모두 일탈의 정상화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콘크리트로 둔덕을 만든 것, 무리한 일정으로 운항을 계속한 것, 충분한 정비 인력을 확보하지 않은 것은 모두 위험의 요소를 증가시키는 일탈인 셈이다. 이러한 일탈을 시정하려는 조치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사고의 가능성은 일상화될 수밖에 없다.
보다 거시적인 맥락에서는 우리나라에 오래된 기반 시설이나 산업시설이 적지 않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1960년대 이후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설치되었던 시설물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새로운 것을 개발하고 설치하는 일에 못지않게 오래된 것을 정비하고 관리하는 일도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새로운 것에는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면서도 오래된 것을 보살피는 데는 별다른 투자를 하지 않는 것 같다. 이런 생각을 하던 중에 ‘어르신 틀니, 수리, 유지, 관리’라는 지하철 광고와 마주쳤다. 한 사람의 틀니에도 투자가 필요한데, 많은 사람들의 안전과 직결된 시설 관리에는 더욱 큰 노력을 쏟아야 하지 않겠는가?
2025-02-1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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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욱의 글로벌 산책] 미국발 자국우선주의 대응 지혜 모아야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한 지 2주일 남짓한 현재 전 세계는 이미 미국발 자국우선주의로 대격변에 돌입했다. 트럼프는 취임 당일 파리기후변화협정을 탈퇴한다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미국 행정부가 조약에 서명했어도 의회의 비준이 없으면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던 교토의정서와 달리 파리협정은 의회 비준을 거쳐야 하는 국제법적 조약이 아닌 유연한 협정의 형태로 귀결돼 국내법에 따라 행정명령(executive order)으로 처리할 수 있도록 틀이 만들어졌다. 이 때문에 파리협정은 미국 정권 교체 때마다 가입-탈퇴-재가입-재탈퇴가 반복되는 불확실성에 직면하게 되었다. 국제협정을 손바닥 뒤집듯이 가입과 탈퇴를 반복하는 가운데 미국의 에너지-환경 정책도 정권 교체 때마다 심하게 요동치고 있다.
바이든 행정부 정책에 대한 전면적 개편을 예고한 트럼프 행정부는 바이든 행정부에서 인플레이션감축법(IRA)에 따라 도입한 전기자동차 구매 시 7500달러 세액공제를 주는 혜택을 폐지하려 하고 있다. 2024년 미국 내 전기자동차와 하이브리드자동차는 전체 자동차 신규 판매량의 20.2%를 차지하였고, 2024년 미국 내 전기자동차 판매 시장점유율은 테슬라 49%, 현대-기아자동차 9.3%, GM 8.7%, Ford 7.5%, BMW 4.1%였다.
트럼프 행정부의 급격한 정책 변화는 한국 기업의 대규모 미국 투자에 불확실성을 초래하고 있다. 현대자동차그룹은 IRA 보조금 혜택을 위해서 76억 달러를 투자해 미국 조지아주에 전기·하이브리드차 전용 공장인 메타플랜트를 건설하여 2024년 10월 가동을 시작하였고, 한국 배터리 제조사인 삼성SDI, SK온, LG에너지솔루션도 IRA 보조금 혜택을 위해서 대대적으로 미국 내 신규 공장 건설을 위한 투자를 진행하고 있다. 삼성SDI-GM 35억 달러 투자, SK온-현대차 50억 달러 투자, LG에너지솔루션-현대차 43억 달러 투자 등이다. 따라서 IRA 보조금 폐지는 한국의 자동차와 배터리 제조사에 큰 악재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트럼프 행정부는 민주당 행정부와 대중국 압박 정책 운용에서도 큰 차이를 보여 왔다. 미국의 민주당 행정부는 오바마의 TPP(환태평양 동반자협정), 바이든의 IPEF(인도-태평양 경제 프레임워크) 등과 같이 동맹국과의 공급망 질서 구축을 통해서 중국을 압박하지만, 트럼프 행정부는 일방적 관세 부과를 통해서 대중국 압박을 해왔다. 문제는 트럼프 행정부가 자국의 이해를 관철하기 위해서 관세 부과를 중국과 같은 체제 경쟁국뿐만 아니라, 캐나다, 멕시코, EU, 한국, 일본과 같은 동맹국을 대상으로도 활용한다는 점이다.
이미 트럼프 1기 행정부 시기 미국은 중국산 제품에 25%라는 고율의 관세를 부과했을 뿐만 아니라, 2018년 3월 모든 국가에서 수입되는 철강과 알루미늄에 관세 부과를 발표하였다. 이러한 미국의 일방적 관세 부과에 EU, 일본, 한국 등 동맹국들이 반발하였다. EU는 이러한 미국의 일방적 관세 부과 조치에 맞대응하였고, 미-EU 통상 갈등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트럼프도 EU를 적으로 언급할 만큼 강하게 압박했다. 결국 EU와 미국은 2018년 7월 극적인 합의를 하면서 양측 간 무역 갈등을 마무리했다. 그러나 EU와 같이 거대 시장을 갖지 않은 한국과 일본은 미국의 일방적 관세 압박에 많은 양보를 해야 했다. 트럼프 1기 행정부는 2018년 한국 정부를 압박해 한국의 대미 수출 화물자동차에 대한 관세 철폐를 2021년 1월에서 20년 늦추는 내용의 한미 FTA 개정안을 밀어붙였다. 일본에 대해서도 일본산 자동차에 대한 20% 관세 부과 압박을 하였고, 2019년 미일 무역협정이 체결됐다.
그런데 트럼프 2기 출범과 함께 관세 압박의 역사가 다시 시작된 것이다. 캐나다와 멕시코는 트럼프 행정부 조치에 맞대응 중이고, 캐나다-멕시코 간 연대도 표명했다. 트럼프는 2월 2일 앤드루스 공군기지에서 기자들의 “다음 관세 부과 대상국은 어디인가”라는 질문에 EU와 영국 등 다른 국가에도 관세를 부과할 것이라며 확전을 예고했다. EU 집행위원회도 트럼프 행정부가 부당한 관세를 부과하면 보복관세로 대응할 것이라고 맞대응했다. EU 집행위원회는 2024년 트럼프 대통령 당선에 대비해 대미 보복관세 리스트 준비를 시작했고, 이를 블룸버그가 지난해 10월 16일에 보도한 바가 있다.
이제 전 세계는 제1기 트럼프 행정부 때와 같이 미국발 자국우선주의에 따른 대격변의 시기에 돌입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다가오고 있는 거센 파고를 현명하게 헤쳐 나갈 수 있도록 준비가 되어 있는가?”라고 누군가 질문을 하면 가슴이 막막해진다.
2025-02-04 [18: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