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희창의 클래식 내비게이터] 석탄 1000t을 삽으로 푸는 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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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평론가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위키피디아 제공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위키피디아 제공

11월 28일은 ‘피아니스트의 영원한 경전’이라 할만한 두 개의 피아노 협주곡이 초연된 날이다. 1809년 오늘,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가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에서 초연되었다. 그로부터 딱 100년이 지난 1909년 오늘,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3번이 뉴욕에서 초연되었다.

라흐마니노프는 3번 협주곡을 미국에서 초연하기로 했는데, 작곡 후의 일정이 너무 빠듯해서 연습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미국으로 배를 타고 가는 도중에 약음 키보드로 연습했다고 한다. 마침내 11월 28일, 뉴욕에서 발터 담로쉬(Walter Damrosch)가 지휘하는 뉴욕 심포니 소사이어티와의 협연으로 처음 연주되었고, 몇 주 후에는 구스타프 말러에 의해 두 번째로 연주되었다. 이미 미국에서도 피아노의 거장으로 입소문이 난 라흐마니노프였기에 청중이 몰려들었고, 초연은 대성공이었다. 초연의 성공으로 라흐마니노프에게 공연 계약이 쇄도했고, 보스턴 심포니에서 상임 지휘자 자리까지 제안받게 되었다.

3번 협주곡은 잘 알려진 2번 협주곡을 쓴 지 8년 만에 만든 작품으로 그의 협주곡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곡이다. 피아니스트의 진을 쏙 빼놓는 곡으로 유명한데, 라흐마니노프 스스로 “코끼리를 위해 작곡했다”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1악장 ‘알레그로’에선 슬라브풍의 멜로디와 카덴차 부분의 가속도가 일품이다. 2악장 ‘인터메초-아다지오’는 동양적인 음색이 매력적이며, 3악장 ‘피날레’는 고난도의 카덴차와 함께 박진감 있는 피아노의 돌진을 맛볼 수 있다. 라흐마니노프는 곡을 피아니스트 요제프 호프만에게 헌정했는데, 정작 호프만은 너무 어렵다는 이유로 한 번도 무대에서 연주하지 않았다. 블라디미르 호로비츠라는 피아니스트가 나타나기 전까지 라흐마니노프 자신만 연주할 수 있는 곡으로 여겨지던 곡이다.

스코트 힉스 감독의 영화 ‘샤인’에선 이 곡에 대해 “석탄 1000t을 삽으로 푸는 듯하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태어난 데이비드 헬프갓은 비범한 음악 재능을 가진 아이였다. 그러나 라흐마니노프 3번 협주곡을 연주하다가 무대에서 쓰러지고 신경쇠약이 극에 달해 결국 정신병원에서 지내게 된다. 분에 넘치는 영혼을 꿈꾼 죄라고나 해야 할까?

그런데 요즘은 석탄 1000t을 거뜬히 삽으로 퍼내는 연주자들이 많아졌다. 다닐 트리포노프, 안나 페도로바, 유자왕, 조성진, 손열음, 임윤찬 등이 모두 그런 피아니스트들이다. 2022년 임윤찬이 밴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우승할 때의 영상은 다시 봐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3번 -임윤찬(피아노), 포트워스심포니, 매린 앨솝(지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3번 -임윤찬(피아노), 포트워스심포니, 매린 앨솝(지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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