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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가해자도 피해자와 똑같은 방식으로 폭행을 당해보길 바란다
그는 직장 내 폭행과 폭언의 피해자이다. 믿었던 상사에게 상습적으로 폭행과 폭언을 당했다. 술자리만 되면 그 상사는 늘 그를 때리고 모욕했다. 그러나 다음 날이면 자신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며 일상을 이어갔다.
가해자를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피해자가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는지 그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우선 피해자의 얘기를 하기 전에 “아무런 이유 없이 폭행과 폭언을 당해봤는가? 그것도 같은 직장 동료들 앞에서?”라고 묻고 싶다. 피해자의 마음을 좀 더 헤아려보자는 취지이다. 그리고 그는 늘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간다. “가해자도 피해자가 겪은 똑같은 방식으로 폭행과 폭언을 당해보길 바란다.”
피해자인 그의 일상은 폭력과 폭언을 당하는 순간 180도 달라졌다. 그가 겪은 가장 절망적인 점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감’이다. 이유 없이 폭행과 폭언을 당했는데 “쟤는 왜 가만히 있을 수 있어?”라는 시각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린다는데. 그는 지렁이보다 못하다는 생각을 매일 한다. 다른 동료들에게 폭력과 폭언 없는 문화를 전해주고 싶은데…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의 삶을 짓누른다.
이로 인해 관계의 단절이 생긴다. 그는 다른 동료들 앞에서 얼굴 들고 다니는 게 너무 부끄럽다. 격려의 말도, 응원의 말도 그리고 위로의 말도 전하기가 두려웠다. 동료들에게 말 걸고 웃는 것조차 쉽지 않다. “난 직장 내 폭력과 폭언에도 아무것도 못하고 있어야 하는 나약한 사람이니” 월급만 받기 위해 회사를 다니는 ‘월급충’이라 자책한다.
그리고 업무의 단절도 쉽지 않은 일이다. 예전에 그는 열심히 했고 큰 상도 받았다. 그러나 폭행과 폭언을 당한 순간, 그는 일에 대한 의지를 잃었다. 정신적 충격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가해자가 그의 업무를 평가한다는 사실이다. 공정하고 올바른 평가가 가능할 리 없었다. 그 사실이 그에게는 소름 그 자체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폭행과 폭언을 겪으며 자신을 바라보던 관점이 무너졌다. 다시 말해 정체성의 상실이다. “나는 가치 없는 사람인가?”라는 자기 인식이 가슴 깊이 새겨졌다. 그는 더 이상 직장을 성장의 공간이 아닌, 존재 의미를 의심하게 만드는 장소로 느끼기 시작했다.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살아가는 가해자를 보면 자아 상실이 더 심해진다.
위 사례는 대다수 피해자들의 경험담을 바탕으로 각색한 글이다. 이러한 이유로 피해자 10명 중 9명이 퇴사한다. 그런데 통계적으로도 가해자 대다수는 퇴사하지 않고 남아 있다. 이러한 불공정한 문제는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그 이유는 당연하다. 가해자는 피해자의 마음을 알 수 없으니. 그래서 앞서 가해자도 피해자와 똑같은 방식으로 폭행과 폭언을 당해 봐야한다고 얘기했다.
어쨌든 그는 수치스럽지만 회사를 그만 둘 생각은 없다. 그만 두는 순간 좋은 건 가해자뿐이기 때문이다. 그는 당당히 남아 조직 내 폭행과 폭언이 사라질 때까지 하나의 증거로 남고자 한다. 가해자가 다시는 그러지 않도록. 다만, 조직 내에서 피해자인 그를 응원하고 격려하는 동료들도 많다. 진심으로 고마운 분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조직 내 폭행 폭언 가해자들은 발 붙일 곳이 없을 것이다. 가해자에게 평생의 ‘주홍글씨’를 달아주고 싶다.
2025-11-17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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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누리마루를 넘어 나래마루로
지난달 말 대한민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뜨거웠다. 세계 21개국 정상이 모이는 APEC 정상회의가 20년 만에 경주에서 열렸다. ‘세기의 담판’이라 불린 미국과 중국의 정상회담도 열렸다. 최첨단 AI 생태계를 이끄는 젠슨 황 엔비디아 CEO가 우리나라에서 ‘치맥’을 즐겼다.
부산도 예상과는 달리 달아올랐다. 경주 APEC 정상회의에 참석하는 주요 인사들의 김해공항 이용은 예정돼 있었다. 주요 인사들이 부산을 거쳐 경주로 향하게 되면 부산은 큰 사건이 없을 것이라는 예상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부산 중에서도 ‘이 곳’이 가장 조명 받았다. 부산 사람들마저도 잘 몰랐던 장소. ‘누리마루 아니고?’라고 반문하게 했던 장소. 김해공항 공군기지 나래마루로 세계의 이목이 쏠렸다.
세계 패권을 다투는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중국 시진핑 국가 주석이 나래마루에 마주 앉았다. 의전이 갖춰지고 화려한 장소는 아니었지만 양국의 사정이 맞아 떨어진 최적의 장소였다. 지난달 29일 방한해 30일 출국을 계획했던 미국 트럼프 대통령과 30일 김해공항으로 입국하는 시진핑 주석의 접점은 30일 김해공항 뿐이었다. APEC 정상회의 개최 수개월 전부터 경주냐, 서울이냐로 각종 회담 장소 추측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베일에 쌓인 나래마루는 경호와 안보를 지킬 ‘묘수’이기도 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나래마루는 올해 리모델링도 마쳤다. 나래마루 회담 사실이 본보 보도로 알려진 다음 날인 지난달 29일 두 국가는 회담 성사 사실을 알리며 개최 장소로 ‘BUSAN’을 발표했다.
나래마루는 2005년 APEC 부산 정상회의 당시 조성됐다. 국민들에게 익숙한 해운대 동백섬 누리마루와 조성 시기가 같다. 누리마루처럼 해운대의 절경을 품고 있지는 않지만 이번 회담을 통해 단시간에 외교적 가치를 드높였다. 미국과 중국이 단독 회담을 가진 건 2019년 일본 오사카 G20 회담 이후 6년 만이었다. 미중 갈등이 최정점을 향해 치닫던 시기에 만난 두 정상은 이 자리에서 관세 인하, 희토류 규제 유예 등 세계적 무역 현안에 합의했다. 세계 정세의 변곡점에서 두 정상의 회담 장소가 부산 나래마루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부산이라는 도시 홍보 효과는 컸다.
APEC 정상회의가 끝나고 경주는 APEC 이후를 준비하고 있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경주 호텔에 투숙하며 아메리칸 치즈, 케첩을 추가했던 치즈 버거는 별도 상품으로 판매를 계획 중이다. 시진핑 주석이 극찬했던 경주 황남빵은 예약 대기가 한 달가량 걸려 있다. APEC 정상회의가 열렸던 화백컨벤션센터에도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국립경주박물관은 한미, 한중 정상회담이 실제 진행된 회의장을 다음 달 28일까지 공개한다.
부산은 조용하다. 전 세계가 부산을 주목했던 그 이후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공군 기지 내 위치해 있는 나래마루의 개방, 관광은 부산의 좋은 콘텐츠가 될 수 있다. 보안 시설인 탓에 상시 개방이 어렵다면 비정기적으로라도 역사의 장소를 알리는 방법은 가능할 것이다. 사례는 가까이에 있다. 2005년 APEC 이후 누리마루에는 2000만 명 이상이 방문했다. 2005년 누리마루를 넘어 2025년 세계 최정상 국가의 외교 무대였던 나래마루의 시대를 열기 위한 적극적인 행정, 협의가 필요한 때다.
2025-11-10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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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2025 경주 APEC이 남긴 것들
지난주 경주에서 열린 2025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는 정말 많은 뉴스들을 남겼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필두로 한 회원국 정상들이 경주에 속속 집결하면서 각국 간 교류와 협력이 이어지는 ‘외교 슈퍼위크’가 펼쳐졌다. APEC 21개국 정상들은 무역·투자, 디지털·혁신, 포용적 성장 등을 담은 ‘경주 선언’을 채택했으며, 인공지능과 인구구조 변화 대응에 대한 협력 의지도 확인했다.
비록 트럼프 대통령은 1박 2일 짧은 일정으로 방한해 APEC에는 불참한 채 돌아갔지만, 이재명 대통령 취임 이후 ‘최대 관문’으로 꼽혔던 한미 관세협상이 정상회담을 통해 비교적 성공적으로 일단락됐다. 우리가 요청한 핵 추진 잠수함 개발에 대한 트럼프의 ‘조건부 승인(?)’ 의사도 확보했다. 이어진 시진핑 주석,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와 각각 처음 마주한 한중, 한일 정상회담도 우호적인 분위기로 마무리됐다. 한미동맹과 한미일 협력을 기본 축으로 하되 중국과의 관계도 안정적으로 관리하겠다는 우리 정부의 ‘국익중심 실용외교’ 기본 틀을 이번 정상회의를 계기로 다졌다는 평가도 나온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의 눈과 귀를 사로잡은 건 이런 외교적 성과보다 한국을, 경주를 찾은 글로벌 최고경영자(CEO)들이었다. 역대 최대 규모인 1700여 명의 국내외 글로벌 CEO들이 ‘APEC CEO 서밋’에 참석했고, 그 중에서도 엔비디아의 CEO 젠슨 황은 그야말로 독보적인 뉴스 메이커로 활약했다. 15년 만에 방한한 그가 서울 삼성동 깐부치킨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과 치킨을 먹으면서 ‘소맥’으로 러브샷을 했던 장면은 엄청난 밈(Meme)을 만들어냈다. 뒤이어 사람들의 바이럴(viral)을 타고 치킨 주문을 폭발시켜 결국 깐부치킨 1호점을 임시휴업하게 만들기도 했다.
세계 어느 국가를 방문하더라도 가장 서민적인 식당에서 밥을 먹는다는 젠슨 황이 이번 방한에 앞서 이재용·정의선 회장을 동석자로 초대하고 ‘친한 친구’라는 뜻의 ‘깐부’라는 이름을 가진 치킨집을 선택해 굳이 창가 자리에 앉아 맨손으로 치킨을 뜯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 어느 정도 계산된 이벤트였다고 해도, 재산 총합 300조 부자들의 치맥 회동은 해외에서도 이목이 쏠릴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곧바로 이어진 엔비디아 그래픽카드 행사에서 젠슨 황은 “한국 치킨은 세계 최고”라고 외쳤고, “지금의 엔비디아를 만든 건 대한민국이다” “한국이 인공지능(AI) 중심지, 프런티어가 될 것이다” “한국 정부와 기업에 최신 GPU 26만 장을 우선 공급하겠다”고 말하며, 우리에게 큰 선물을 안겨줬다.
천년고도 경주에서의 화려한 일주일은 흐뭇함을 남기고 지나갔다. 안정적 개최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키고 성공적으로 APEC 정상회의 주간을 마무리한 정부와 기업은 이제 경주의 성과를 가시화해야 할 차례다. 한미 관세협상의 디테일을 보다 명확하게 잡음 없이 정리하고, AI가 주도하는 글로벌 경제 흐름을 따라가는 걸 넘어 주도할 준비에 매진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APEC에서 보여준 ‘지붕 없는 박물관’ 경주의 문화 유산, 그것이 배경이 된 덕분에 더욱 빛난 K컬처를 보다 널리 세계에 확산시키는 기민한 움직임도 필요하다.
경주국립박물관 신라 금관 특별전을 보기 위한 관람객들의 오픈런이 지난 주말 일찌감치 시작됐다는 뉴스가 반갑고 놀랍다. APEC으로 활기가 실린 경주를 느끼러 늦지 않게 가봐야 할 것만 같다.
2025-11-03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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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울산 도시철도’ 첫 삽 뜨기 전에…
‘울산의 대치동’ 문수로와 공업탑로터리가 출퇴근길 거대한 주차장으로 변할 것이라 상상하니 아찔하다. 울산 도시철도 1호선 착공이 당초 계획보다 늦춰졌지만, 예고된 교통 대란에도 뾰족한 대책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도시 미래를 좌우할 중대한 현안을 놓고 ‘숙원 사업’이라는 명분과 ‘이미 되돌릴 수 없다’는 현실론에 눌려, 문제 제기조차 쉽지 않다.
애초 울산시는 2028년 국제정원박람회에 맞춰 올해 11월 착공을 목표로 사업을 서둘렀다. 하지만 도시철도 건설 사업자 입찰이 두 차례 유찰되는 우여곡절 끝에 최근 한신공영이 사업자로 선정됐고, 착공은 내년으로 미뤄졌다.
분명 친환경 수소트램은 태화강역에서 신복교차로까지 10.9km 구간을 달리며 도심에 활력을 불어넣을 것으로 보인다. 울산의 고질적인 대중교통 문제를 해결하고 친환경 도시 이미지를 높이려는 트램 도입의 취지를 부정할 시민은 많지 않다.
문제는 그 과정이다. 트램 도입이 초래할 각종 부작용에 대해선 충분히 숙의했는지 의문이다. 울산시는 자가용 이용을 불편하게 만들어 시민을 대중교통으로 유도한다는 ‘교통 수요 관리’를 명분으로 내세운다. 과연 운전자들이 순순히 자가용을 포기할까? 전국 최하위 수준의 대중교통 분담률(11.6%)을 보면 고개를 갸웃하게 만든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우려는 울산시가 올해 초 확인한 용역 결과에서 수치로 드러난다. 트램이 차지할 2개 차로로 인해 울산의 핵심 교통축인 삼산로와 문수로는 극심한 교통 혼잡이 예상된다. 가뜩이나 체증이 심한 문수로의 경우 교통량이 도로 수용 능력을 17%나 초과(V/C=1.17)해 사실상 ‘도로 기능을 상실한 수준’이 될 것이라 경고한다. 지역 최대 학원가에서 쏟아지는 수백 대의 통학 차량을 제외한 가장 보수적인 예측이라는 점에서 우려를 더한다. 울산시는 이런 상황에서도 용역 보고서를 시민에게 공개하지 않고 있다.
상습 정체 구간인 공업탑로터리는 막대한 세금을 들여 평면교차로로 개선해도 차량 지체 시간이 지금보다 10초 가량 길어진다. ‘10초 정도야…’ 하고 넘길 사안일까? 위급한 환자를 태운 구급차가 이 10초의 장벽에 갇힌다면, 그 시간은 생사를 가르는 골든타임이 된다. 우회도로조차 마땅찮은 문수로의 마비는 도시 전체의 혈맥에 지장을 초래하는 진앙이 될 것이다.
지자체 대책은 무엇일까? 최근 울산시는 시공사에 교통 체증 대비책을 강구하라고 ‘주문’했지만, 뚜렷한 해법 제시로 보기 어렵다. 장기적으로 1200억 원을 들여 우회도로를 만든다는 계획 역시 ‘2026~2030년 국가계획’ 반영을 목표로 하는 불확실한 밑그림에 불과하다. 눈앞의 화재를 끄겠다며 5년 뒤에 올지 모를 소방차를 부르는 격이다. 결국 합리적 비판과 대책 없이 공론화의 공백 상태만 지속되는 분위기다.
울산시는 이제라도 최악의 교통 체증을 경고한 시뮬레이션 데이터를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무엇보다 공업탑과 문수로의 교통량을 분산시킬 단기·장기적 계획을 구체적인 예산과 함께 제시해야 한다. 긴급차량의 비상 통행로 확보 방안도 마련해야 한다. 성공적인 트램 도입을 위해서도 지금이 문제를 바로잡을 마지막 골든타임이다.
2025-10-27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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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악마는 '디테일 없음'에도 있다
최근 대법원에서 주휴수당 지급 방식에 대한 중요한 판결이 나왔다. ‘1주일 동안 실제 근로한 시간에 비례해 주휴수당을 지급하라’는 취지다. 판결의 핵심은 예컨대 격일제 근무 등으로 일주일 소정근로일이 5일에 미치지 못하는 근로자에게는, 주 5일 근무자보다 적은 주휴수당을 지급해도 된다는 것이다. 이는 오랜 기간 현장의 혼란을 야기했던 ‘하루치’ 임금의 해석 기준을 명확히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근로기준법 제55조는 ‘사용자가 1주일 동안 소정의 근로일수를 개근한 노동자에게 1주일에 평균 1회 이상의 유급휴일(주휴일)을 보장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또한 동법 시행령은 주휴수당의 대상을 ‘1주 동안의 소정근로시간이 15시간 이상인 자’로 명시하고 있다.
사용자는 이 주휴일에 통상적인 근로일의 ‘하루치’ 급여를 주급과 별도로 산정해 지급해야 한다. 쉽게 말해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소정근로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근무한 노동자는 5일치가 아닌 6일치 급여를 받을 수 있다는 의미다.
이번 판결의 쟁점은 바로 이 ‘하루치’의 기준이었다. 가령 택시 근로자 중 하루 8시간씩 주 3일(총 24시간)을 일하는 근로자와, 하루 8시간씩 주 5일(총 40시간)을 일하는 근로자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두 그룹 모두 ‘주 15시간 이상’ 기준을 충족하며, 각자의 ‘하루치’ 근로시간은 8시간이다.
그동안 일부 행정 해석이나 현장에서는 두 경우 모두 ‘하루치’인 8시간분의 주휴수당을 받아야 한다고 보기도 했다. 반면 하루 3시간씩 주 5일(총 15시간) 일하는 근로자의 주휴수당은 ‘하루치’인 3시간으로 명확했다. 이로 인해 근로감독관마다, 사업장마다 적용 기준이 다른 혼선이 빚어졌다. 주휴수당 제도가 1953년 근로기준법 제정 당시부터 도입됐다는 점을 고려하면, 70년이 넘도록 제도의 허점이 방치되어 온 셈이다.
주휴수당은 단기 일자리 시장에서 다툼의 요소였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70년이 넘도록 이어진 구멍은 더욱 어이없게 느껴진다. 자영업 카페에서는 주휴수당 고소고발 관련 게시글이 끊이지 않는다. 이러한 것을 피하고자 사용자들은 소위 ‘알바 쪼개기’와 같은 편법이라면 편법적인 고용 방식이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고 있다. 주휴수당 지급 기준인 ‘주 15시간’을 피하기 위해, 한 명의 근로자를 30시간 고용해 숙달시키는 대신 두 명의 근로자를 14시간씩 나누어 고용하는 방식이다. 이로 인해 단기 근로자들은 안정적인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워지고, 여러 곳에서 아르바이트를 전전해야 하는 비자발적 ‘N잡러’가 되기도 한다. ‘윈윈’이 아닌 ‘루즈루즈’의 일자리 구조가 만들어진 셈이다.
최근 우리 사회는 주 4.5일제 도입, 주휴수당 폐지 논의, 정년 연장, 최저임금 인상 등 다양한 노동 의제를 두고 격렬한 토론을 이어 가고 있다. 사용자와 노동자, 기업과 직군마다 처한 상황과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다르다.
이러한 논의는 과정이 쉽지는 않겠지만 사회가 합의를 하면 될 문제다. 확실한 것은, 정교한 디테일이 없는 제도는 결국 현장의 어려움만 가중시킬 뿐이라는 사실이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기도 하지만 때로는 ‘디테일 없음’에도 있다.
2025-10-20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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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백신 논란, 과학과 공포 사이
지난주 공개된 코로나19 백신 관련 연구 결과가 논란에 불을 지폈다. 이대목동병원 천은미 호흡기내과 교수팀이 2021~2023년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등록된 성인 약 840만 명의 자료를 분석한 것인데, 코로나19 백신 접종이 암 발생 위험 증가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백신 종류별로는 cDNA 백신(아스트라제네카·얀센)은 갑상선암·위암·대장암·폐암·전립선암의 위험을 높였다. mRNA 백신(화이자·모더나)은 갑상선암·대장암·폐암·유방암, 교차 접종은 갑상선암·유방암 위험 증가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연구진은 “백신이 암을 직접 유발한다고 볼 수는 없고, 장기적인 인과관계를 확인하기 위해선 후속 연구가 필요하다”고 선을 그었다. 하지만 오는 15일 고위험군을 대상으로 한 코로나19 무료예방 접종 시행을 앞둔 지금 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 같다.
백신의 위험성 문제는 백신 탄생과 궤를 같이 한 해묵은 난제다. 최근 번역 출간된 〈과학이 말하는 백신 접종 VS 백신 비접종〉 역시 백신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백신 논쟁의 핵심이 과학이 아닌 ‘감정’에 있다고 지적한 대목에 시선이 머문다. 감염에 대한 공포와 도덕적 압박이 먼저 작동해 ‘다른 사람을 위해 맞아야 한다’는 명분이 생겼지만, 정작 백신의 안전성에 대한 근거는 충분히 검증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코로나 백신 2차 접종을 받은 청소년의 심근염 위험이 29.61배 높았고, 2020년 12월 이후 자연유산 3576건이 보고됐다는 책의 통계는 코로나19 백신 안전성에 대한 반박 근거가 된다.
의학계는 정면 반박하고 있다. 백신 부작용의 발생률과 심각성은 백신이 예방하는 질병의 위험성에 비하면 현저히 낮다는 것이다. 질병관리청 역시 13일 정례브리핑을 통해 “암 발병 기전을 규명하는 데 수년이 걸리는 점을 감안하면 해당 연구 결과로는 백신 접종으로 인해 암이 발생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히기도 했다. 사실, 백신이 인류에 가져다준 혜택은 명백하다. WHO 통계 결과 소아마비의 경우 1988년 아프리카에서만 연간 약 35만 명의 환자가 발생했지만 백신 접종 캠페인을 통해 2017년 22명으로 급감했다. 홍역 역시 1963년 백신 개발 이후 사망이 90% 줄어든 바 있다.
하지만 백신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1988년 이후 백신 부작용 피해자에게 50억 달러 상당을 보상한 미국 보건복지부의 사례 등은 백신이 절대적으로 안전하지 않다는 근거가 될 수 있다. 백신에 대한 더 많은 연구와 개인별 맞춤 접종 도입이 필요한 대목이다.
어쩌면 우리가 직면한 진짜 문제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무엇을 믿어야 할지 모르는 ‘불확실성’과 ‘불신’일 것이다. 의학계 일각에서 지적하듯 “현재 아동 예방접종 일정은 완전 접종자와 비접종자를 비교해 검증된 적이 없다”는 점은 타당한 우려다. 백신의 장기적 효과에 대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이 백신 자체를 거부할 이유가 되지 않는 것 또한 설득력 있다.
백신의 위험성을 줄곧 알려온 동의의료원 송무호 의무원장은 “백신은 과학이지 종교가 아니다”고 했다. 감정이 아닌 과학으로, 공포가 아닌 데이터로 백신을 평가할 수 있도록 부작용을 호소하는 이들의 외침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관련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는 동시에 지속적인 안전성 모니터링, 개인의 선택권 존중도 뒷받침돼야 한다. 무조건적인 거부가 답이 아니듯 일방적인 강요도 답이 될 수는 없다.
2025-10-13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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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위기는 저절로 끝나지 않는다
국토교통부는 매년 전국 건설사를 대상으로 ‘시공능력평가액’(시평액) 순위를 매겨 발표한다. 시평액이란 간단히 말해 건설사가 어느 정도 규모의 공사를 수행할 수 있는지 돈으로 환산한 수치다. 공사 실적이나 재무 상태, 기술력 등을 종합 평가한다. 대형 프로젝트의 시공사 선정이나 입찰 제한의 근거가 되기에 업계에서는 매우 중요한 성적표다.
올해 부산 지역 건설사들 성적표는 낙제점이나 마찬가지다. 지난해 전국 100위권 내 6개였던 부산 건설사는 올해 4개로 줄었다. 전국 200위권으로 넓히면 작년까지 18개였던 업체가 12개로 급감했다. 중견 건설사들이 잇따라 기업회생 절차에 돌입했다고는 하지만, 이는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였다. 전반적인 시평액 감소 수준이 업계 예상을 뛰어넘는다는 평가다.
물론 지난 수년간 건설업 경기 악화는 건설 대기업보다 지방 건설사들에게 더욱 치명적이었다. 원자잿값이 널뛰자 공사비가 치솟아 원가율을 맞출 수 없게 됐고, 부동산 PF 부실 여파로 은행 연체율은 높아져만 갔다. 모기업의 재정적 지원이나 위기를 견뎌낼 펀더멘탈이 갖춰진 대기업과 달리 지방 건설사들은 위기에 그대로 노출됐다.
이런 사정들을 감안하더라도 부산 건설업 규모는 다른 도시들에 비해 너무도 초라하다. 두산에너빌리티(시평액 14위·본사 경남), 계룡건설산업(15위·대전), 제일건설(17위·전남), 우미건설(21위·광주), 금호건설(24위·전남) 등 경기도를 제외하더라도 20위권에 오르내리는 중견 건설사가 다른 지방 도시에는 여럿 있다. 부산에는 시평액 32위 동원개발과 34위 HJ중공업만이 전국 50위권 안에 겨우 드는 수준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부산 대형 인프라 사업을 타 지역 건설사가 수주하는 일이 허다하다. 올해 부산 최대 공공 공사인 서부산 행정복합타운 입찰에도 태영건설과 금호건설이 오래전부터 눈독을 들여왔다. 반면 부산 건설사들은 소극적인 행보로 일관하고 있다. 타 지역 대형 프로젝트는 고사하고, 부산 외 지역에 아파트 브랜드 하나 내는 일에도 좀체 나서지 않는다.
부산의 일부 건설사는 자기 땅에 자기 건물을 직접 지어 시행과 시공을 자체 해결하는 방식을 오랫동안 고집해오고 있다. 리스크를 최대한 줄이는 방식이기는 하지만, 공격적이거나 선도적인 경영 방식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부산의 핵심 요지 곳곳에 땅을 사두고 부동산 경기가 좋아지기만을 기다리며 하염없이 묵혀두는 일이 허다하다.
툭하면 불거지는 지역 건설사 브랜드에 대한 품질 논란은 스스로 종식시켜야 한다. 지역 하도급 업체와의 관계도 재정립해야 한다. 부산의 한 하도급 업체 대표는 “협력업체 사장을 뒤로 불러내 가격을 후려치는 일이 여전히 벌어진다”며 “대기업들은 지역 업체를 잘 안써줘서 그렇지 거래 부분은 깔끔하다. 이런 일 몇 번 겪으면 지역 건설사와 일을 하기 싫어진다”고 말했다.
지역 건설업계에는 변화의 바람이 필요하다. 정부가 부양책 보따리를 풀어놓을 때까지, 지방 부동산 경기가 살아날 때까지 넋 놓고 기다리기만 해서는 안된다. 사업 구조를 다변화하고 기술 경쟁력을 확보해야 위기를 버틸 수 있다. 젊은 인재를 불러 모아 활력을 불어넣고 과거의 틀에 얽매여있던 경영 철학과 조직 문화도 과감하게 바꿔야 할 때다.
2025-09-29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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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로컬 매터스’
로컬 매터스(Local Matters). 우리말로 '지역이 중요하다' ‘지역 문제들’ 쯤으로 해석되겠다. 굳이 영어로 쓴 이유는 고유 명사이기 때문이다. 로컬 매터스는 미국 전역의 지역언론 보도 중 좋은 기사를 엄선해 소개하는 뉴스레터 서비스다. 세계 이슈, 전국뉴스 흐름을 따라가기도 벅찬데 지역뉴스를 다룬 뉴스레터를 누가 받아볼까 싶지만, 내년이면 10돌을 맞는다.
지난 1년, 미주리 저널리즘 스쿨에서 해외연수를 진행하며 마주한 미국 언론계 현실은 우리나라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최근 20년 동안 미국 지역신문의 3분의 1 이상이 사라졌다. 해당 지역의 뉴스를 다루는 매체가 단 하나도 없는 카운티, 소위 ‘뉴스 사막’(News Desert)이 200곳이 넘는다. 뉴스 사막화 속에서 길을 찾아 헤매다, 오아시스처럼 발견한 것이 로컬 매터스다. 매주 일요일, 이메일로 도착하는 뉴스레터를 열어 보면 탬파베이·디트로이트·뉴올리언스·시애틀 등 미 전역의 지역언론에서 선별한 알찬 기사가 배달돼 있었다. 문득 궁금해 AI에게 물어 보니, 로컬 매터스 구독자는 2020년 기준 4600명 수준이다. 메일함에 도착한다고 모두 열어 보는 건 아닐 테니 많아야 수천 명 정도에게 읽히는 셈이다. 온라인에서 눈에 띄는 제목만 달아도 기사 한 건에 수만 조회수가 나오는 시대인데, 고작 1만 명도 안 되는 독자라니. 로컬 매터스 운영진은 무슨 생각으로 서비스를 이어가는 걸까.
귀국을 몇 달 앞둔 올여름, 미국탐사보도협회(IRE)가 주관하는 연례 콘퍼런스인 ‘IRE25’ 행사장에서 로컬 매터스 제작진을 만났다. 그러고 의문 부호는 느낌표로 바뀌었다. 로컬 매터스는 별도 직원 없이 전국 각지 기자들이 자발적으로 운영에 참여한다. 자신이 속한 언론사에서 취재하고 기사를 쓰다 짬을 내 뉴스레터를 만드는 식이다. 사실상 자원봉사나 다름없지만 운영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한 기자는 “로컬 매터스를 제작할 때마다 ‘훌륭한 지역보도’란 주제의 강의를 듣는 것 같다”며 “덕분에 기사 아이디어도 정말 많이 얻고, 뛰어난 기자들도 알게 됐다”고 했다. ‘후배’의 반짝이는 눈빛이 17년 차 기자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생각해 보면 언론이, 신문이, 지역언론이 어렵지 않은 시기가 있었던가. ‘이성으로 비관하되 의지로 낙관하라’는 안토니오 그람시 말처럼, 묵묵히 행동하는 이들이 있어 뉴스는 계속되고 세상은 나아간다. 로컬 매터스 하나로 뉴스 사막화를 막을 수는 없지만, 그 속도를 조금이나마 늦춘 건 분명하다.
로컬 매터스에서 또 하나 눈여겨볼 건 IRE와 나이트재단의 후원을 받는다는 점이다. 미국은 사회 각 분야에서 공익적인 활동을 지원하는 비영리기관이 수두룩하다. 언론도 주요 대상 중 하나다. 의지로 낙관할 수 있도록 돕는 지원군 덕분에, 사라지는 속도만큼은 아니지만 새 지역언론이 꾸준히 생겨나고 있다. 미국 이야기는 여기까지. 이제 한국 땅을 밟은 이상, 먼 나라 상황을 마냥 부러워하고 있을 수는 없다. 비슷한 고민을 가진 선후배 동료 기자들과 함께 우리 고장의 ‘로컬 매터스(지역 문제들)’를 조명하고 뉴스 사막을 줄이려 부지런히 뛰겠다고 다짐해 본다. 쓰고 보니 ‘이런 글은 일기장에나 쓰라’는 댓글이 달릴 것 같다. 악플이라도 감사하다. 독자의 관심은 지역언론에 오아시스다.
2025-09-22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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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세 개의 벽'에 막힌 부산 블록체인
부산은 ‘블록체인 규제자유특구’라는 타이틀을 내세우고 6년째 달려오고 있다. 다시 말하면 부산은 블록체인 기술을 마음껏 실험할 수 있는 거대한 ‘테스트베드’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동안 부산의 물류·금융·공공안전·관광 등 다양한 산업 현장에서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한 실증 사업이 진행돼 왔다. 블록체인기술혁신지원센터 설립을 통해 기업 인프라 지원·네트워킹·맞춤형 컨설팅 등을 제공하며 지역·외부 기업의 성장과 기술혁신을 견인한 성과도 분명히 있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최근 본보 기획시리즈 ‘블록체인 DNA 심는 첨병들’ 취재차 만난 여러 기업 관계자들의 표정이 밝지만은 않았던 이유다. 이들은 하나같이 제도적 한계와 인력난, 투자유치의 장벽을 기자에게 토로했다.
가장 아이러니한 점은 부산의 블록체인 산업을 키우기 위해 마련된 블록체인 규제자유특구가 지역 기업의 확장을 가로막는 경우였다. 특구 내 부동산 조각투자 플랫폼을 운영 중인 한 회사가 이 점을 지적했다. 특구 사업이 부산에만 묶여 있다 보니 전국 단위의 사업 확장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회사 관계자는 “특구 사업을 2년 실증하고 3년 임시허가까지 연장했지만 ‘부산 한정’ 조건 때문에 다른 부동산 조각투자 플랫폼보다 불리한 여건에서 경쟁한다”며 “부산에서는 상업용 건물 공실률이 40%를 넘는 상황에서 좋은 물건을 확보하기 어렵다”고 하소연했다.
이 모든 문제의 뿌리는 제도 미비에 있다. 국회는 토큰증권발행(STO) 법안을 곧 통과시킬 듯 말만 반복하며 업계에 ‘희망고문’만 안기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인력난은 또 다른 벽이다. 블록체인과 AI, 데이터 전문 인력은 대부분 수도권으로 흡수되고 지방 기업들은 구인 자체에 어려움을 겪는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개발과 기획, 영업을 CEO 1인이 챙길 수밖에 없다. 인력 부족은 기술 개발 속도를 늦추고 결국 사업의 성장 잠재력마저 떨어뜨린다.
항만·물류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 한 업체 관계자는 “인력 확보가 가장 큰 과제다. 부산은 수도권보다 중간급 인력이 훨씬 부족해 우수 인재를 확보하기가 어렵다”며 “투자 없이 매출만으로 회사를 키우고 있어 인력 확충 속도도 느릴 수밖에 없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기술을 확보하고도 시장 확장을 위한 자본 유치도 지역 업체들이 넘어야할 허들이다. 사업 초기에는 정부 과제나 공공 프로젝트를 통해 버텼지만, 민간 투자로 이어지지 않아 성장 속도가 더디다. “지역에서 기업설명회(IR)를 100번이나 했어도 투자받지 못했다”는 한 CEO의 절규가 이를 잘 보여준다. 결국 기업들은 자체 매출과 제한된 공공 투자에 의존하며 운영을 이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고 걱정만 할 때는 아니다. 정부와 국회, 지자체가 현장의 목소리를 제대로 듣고 정책과 지원에 반영할 때 비로소 부산은 성공적인 블록체인 도시로 성장할 수 있다. 이들 벽을 넘어선다면 부산의 블록체인 산업은 다양한 분야에서 글로벌 시장을 선도할 잠재력을 충분히 품고 있기 때문이다.
2025-09-15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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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거제시 민생회복지원금 3라운드…또 정쟁에 그칠까
경남 거제시의회 여야가 추석 명절을 앞두고 다시 격돌할 조짐이다. 앞서 야당 반대로 연거푸 무산된 거제시 자체 민생회복지원금 조례안이 여당 주도로 재 발의된 탓이다.
거제시 민생회복지원금은 변광용 거제시장이 지난 4·2재선거 때 내건 대표 공약 중 하나다. 현금성 지원을 통해 지역 내 소비를 촉진하고 침체한 상권을 활성화하는 게 핵심이다. 수혜 대상은 거제 전 시민, 소요 예산은 470억 원 상당이다. 재원은 ‘통합재정안정화기금’을 활용하기로 했다. 이 기금은 안정적인 지방 재정 운용과 대규모 재난, 지역 경제 악화 등 긴급한 상황에 사용하려 적립해 둔 일종의 ‘비상금’이다. 현재 500억 원 넘게 남았다. 국비 지원이나 지방채 발행 없이도 재정 건전성을 유지하며 충분한 재원을 확보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거제시는 애초 6월 중 조례 제정을 마무리하고 7월 추경에 사업비를 편성해 여름 휴가철 전에 지급하기로 했다. 그런데 관련 조례안이 시의회 문턱을 넘지 못하면서 일이 꼬였다. 현재 거제시의회는 국민의힘 8명, 더불어민주당 7명, 무소속 1명 구성으로 ‘여소야대’ 형국이다.
거제시가 준비한 조례안은 5월 임시회 상임위 예비 심사에서 부결돼 본회의 상정조차 못 했다. 이에 민주당은 ‘부의 요구권’을 발동했다. 지방자치법 제81조에 따라 재적의원 3분의 1 이상의 요구가 있으면 부결된 의안도 본회의에 부칠 수 있다. 덕분에 6월 정례회에선 상임위 심사를 건너뛰고 곧장 본회의에 부의됐다.
변 시장은 재심의를 앞두고 모든 시민에게 20만 원을 일괄 지급하는 보편 지원 방침을 접고 계층별로 10~20만 원을 차등 지급하는 선별 지원으로 한 발짝 물러났다. 그러나 공약 발표 당시부터 ‘노골적인 매표 행위’라며 반대 입장을 고수해 온 야당을 돌려세우긴 역부족이었다. 본회의 현장에서 조례안을 놓고 여야 간 격론이 벌어졌다. 이후 표결 끝에 찬성 7표, 반대 8표, 기권 1표가 나왔고 거제시 조례안은 폐기됐다.
그러자 여당이 다시 전면에 나섰다. 민주당 최양희 의원이 대표 발의한 조례안은 앞선 거제시 조례안과 맥락은 동일하다. 다른 부분은 유효기간을 뒀다는 점이다. 부칙에 ‘이 조례는 2026년 6월 30일까지 효력을 가진다’고 명시해 변 시장 임기가 끝나면 자동폐기 되도록 했다. 야당에서 우려하는 지원금 남발을 막기 위한 안전장치인 셈이다.
조례안은 9일 경제관광위원회 예비 심사를 거쳐 임시회 마지막 날 본회의에서 최종 시행 여부가 판가름 난다. 하지만 여전히 야당이 과반을 차지하고 있어 결과를 장담하긴 어려운 상황이다. 기권은 반대, 가부동수도 부결로 치는 만큼 통과를 위해선 야권에서 이탈 표가 나와야 한다. 설상가상 정부의 소비쿠폰 정책과 맞물려 ‘중복 지원’이라는 지적까지 나오고 있다. 그나마 야당 내부에서 ‘취약계층 한정 지원’ 수준의 절충안은 고려할 여지는 있다는 의견도 있어 ‘조건부 통과’는 가능하다는 분석도 나온다.
그동안 지원금을 둘러싼 정치권 공방에 시민 사회도 덩달아 갑론을박했다. 이를 두고 위기를 극복하려 준비한 지원금이 되레 분열과 위기를 자초한다는 비판도 상당했다. 이번엔 정치가 정쟁이 아닌, 아닌 희망을 주는 도구가 될지 지켜볼 노릇이다.
2025-09-08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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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트라우마, 상처는 보이지 않고 고통만 남는다
이태원 참사에 투입됐던 소방관이 또 세상을 등졌다. 참사 이후 트라우마로 인한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와 불안 장애에 시달려 왔다. 악몽과 불안 발작 때문에 근무를 이어가기 어려웠고, 병가와 휴직을 반복했다. 공무상 요양을 신청했지만 번번이 불승인 통보를 받으며, 끝내 극단적 선택으로 내몰렸다. 사람을 살린 이들이 정작 자기 삶은 지키지 못하는 현실. 우리는 그들의 트라우마를 개인의 나약함으로 치부해선 안 된다.
트라우마란 충격적인 사건 이후에도 기억과 감정이 반복적으로 되살아나 일상 전체를 흔드는 고통을 말한다. 단순히 ‘힘든 경험을 떠올리는 정도’가 아니라, 수면·집중·대인관계까지 무너뜨리며 삶의 기반을 뒤흔든다. 특히 반복적으로 위험과 참혹한 장면에 노출되는 직업군은 트라우마가 쉽게 만성화된다. 2024년 조사에 따르면 전체 소방공무원 중 약 7.2%가 PTSD를 겪고 있다. 자살 위험군은 5.2%, 우울증은 6.5%로 모두 늘었다. 소방관의 PTSD 유병률이 최대 16%에 달한다.
일반인에게도 트라우마는 결코 낯선 일이 아니다.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의 70% 이상이 생애 한 번 이상 외상 사건을 겪었고, 그 중 약 15%는 PTSD 위험군으로 분류된다. 실제로 국내 성인 평생 PTSD 유병률은 약 4.7%에 이르며, 치료받는 환자 수도 해마다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문제는 트라우마 증상이 객관적 진단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트라우마는 마음 깊숙이 파고드는 상처라 겉으로는 멀쩡해 보일 수 있다. 증상은 주로 악몽, 불면, 불안 발작, 회상과 같은 ‘내면적 체험’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골절이나 전치 진단처럼 눈에 보이는 지표가 없다 보니 대수롭지 않게 치부되는 경우가 많다. 의학적으로도 객관적 수치나 영상 검사로 확인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결국 진단은 환자의 진술과 심리 검사에 의존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주관적”이라는 이유로 주변이나 조직에서 가볍게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겉으로는 멀쩡히 근무하거나 일상생활을 이어가는 듯 보여도, 실제로는 집중력 저하·대인관계 회피·심장 두근거림 같은 심리·신체적 고통이 일상 전반을 무너뜨린다. 그래서 트라우마는 눈에 보이지 않기에 더 쉽게 방치된다. 이렇다 보니 가해자는 “그 정도는 별일 아니다”라며 자기합리화를 하는 경우가 많다.
그 대표적 장면이 바로 용산구청의 ‘축제 관리·안전 우수사례 대상’ 수상 해프닝이다. 용산구청은 지난달 22일 서울시가 주최한 행사에서 해당 부문 대상을 받았다가, 논란이 커지자 곧바로 취소됐다. 특히 이태원 참사와 관련해 재판을 받고 있는 박희영 용산구청장이 활짝 웃으며 상을 받는 장면이 공개되자 국민적 분노가 커졌다. 참사의 기억이 여전히 생생하고 많은 이들이 트라우마 고통을 겪고 있는데, 박 청장은 책임 여부를 떠나 어떻게 그렇게 웃을 수 있는가. 상처 받은 피해자만 고통 속에 갇히는 사회의 축소판 같았다.
이런 사회나 조직에서는 제2의, 제3의 피해자가 끊임없이 생길 수밖에 없다. 특히 가까운 주변에서 받은 상처는 훨씬 흔하다. 그러한 일상의 반복된 상처가 깊은 트라우마로 자리 잡는다. 다만, 그것이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트라우마가 남기는 사회적 비용은 결코 적지 않다. WHO(세계보건기구)는 정신적 트라우마로 인한 세계적 손실을 연간 1조 달러(약 1300조 원)로 추산한다. 우리는 이 어마어마한 대가를 더 이상 방치해선 안 된다. 우리가 외면하는 순간, 또 다른 비극은 예정된 일이다.
2025-09-01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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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노란봉투법과 마스가의 이름값
표준국어대사전에 ‘이름’이라는 단어를 찾아보면 이름을 ‘다른 것과 구별하기 위하여 사물, 단체, 현상 따위에 붙여서 부르는 말’로 정의한다. 이름은 중요하다. 하지만 이름을 잘 짓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부르기 쉬워야 하고 의미도 잘 담아야 한다. 우리는 통상적으로 다른 것과 구별하고 구별되는 것을 넘어 기억에 남으면 잘 지은 이름으로 인식한다. ‘이름값 한다’는 말은 최고의 칭찬 중 하나다.
지난 22일 국회에서 노동자의 권리 신장 내용을 담은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2·3조 개정안이 통과됐다. ‘노란봉투법’이다. 2014년 법원이 쌍용차 파업 사태에 참여한 노동자들에게 47억 원의 손해배상액 청구 판결을 내리자 한 시민이 노란색 봉투에 작은 성금을 전달하기 시작한 데서 유래했다.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를 제한한 법인만큼 노동자들의 권익에 영향을 끼친 한 사건이 법의 이름이 됐다. 법의 유래, 의미를 곱씹어본다면 다른 것과 구별되고 기억에도 남는다. 연일 노란봉투법을 다루는 뉴스가 쏟아지면서 노란봉투법은 유명세를 치르고 있다.
이달 초 미국과 우리나라의 관세 협상의 키워드 ‘MASGA(마스가)’. ‘Make American Shipbuilding Great Again(미국 조선 산업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의미의 한미 조선업 협력 프로젝트다. 미국 조선소에 우리 조선 기업들이 투자하고 미국 해군 경비함 등의 건조에도 우리 기업이 참여하는 것이 핵심 내용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핵심 구호인 ‘MAGA(마가·미국을 다시 위대하게)’의 변형이다.
관세 전쟁 속에서 정부의 조선업 투자 의지가 5글자의 알파벳에 담겼다. 다른 나라와 구별됐고 트럼프 대통령의 마음도 움직였다. 자신의 대선 캠페인 구호를 차용한 재치에 트럼프도 엄지를 치켜들었다는 후문도 들린다. 마스가는 수조 원의 관세 폭탄을 막았다.
노란봉투법과 마스가. 우리나라 노동계, 산업계 전반의 대변화를 이끌 수 있을까. 제대로 이름값을 하기 위해서는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노란봉투법의 취지가 진정한 노동자 권익 신장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산업계의 반발을 넘어야 한다. 한국경영자총협회와 등 경제 6단체는 노란봉투법 국회 본회의 통과 후 바로 입장문을 배포해 “사용자 범위와 노동쟁의 개념을 확대하고, 불법 쟁의에 대한 손해배상 책임을 제한한 노란봉투법이 통과된 데 대해 유감을 표한다”고 밝혔다.
노란봉투법으로 외국 투자기업들의 투자가 위축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6개월의 유예 기간 동안 노사정은 다시 머리를 맞대야 한다. 법은 도구일 뿐이다. 법이 현실에서 적용돼 우리 사회의 노동자 권익 신장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치열한 논의와 고민이 필요하다.
대대적인 조선업 투자를 약속한 마스가의 투자 방식이 자칫 우리나라가 미국에 퍼주는 형태의 투자여서는 안 된다. 미국 선박을 외국에서 건조하는 시대를 마스가가 처음 연다면 K-조선과 부울경의 조선 산업은 다시 한번 전성기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후대가 2025년 8월을 우리 사회, 산업 발전의 변곡점으로 떠올리길 바란다. 노란봉투법과 마스가를 기억하길 바란다. 이름은 잘 지었다. 이름값을 할 차례다.
2025-08-25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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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케데헌' 시즌2를 기다리며
한 달 전쯤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던 일. 처음엔 회사 선배로부터 우스갯소리처럼 듣게 됐다. “만화 영화가 일종의 K무당 이야기인데, 여자애들 3명이 아이돌 그룹인데 악귀를 잡으러 다니고, 근데 그 악귀가 남자 아이돌이고….” 다음엔 친구가 “정말 재미있다”며 호들갑스럽게 한참을 떠들곤 유튜브에서 대표곡까지 찾아 들려주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심드렁했다. 마지막엔 초등학생 아들이 금요일 저녁에 꼭 같이 봐야 하는 애니메이션이 있다고 강력 주장해 함께 시청하게 됐다. 결과는 대만족!
이미 예상했겠지만,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 이야기다. 줄여서 ‘케데헌’. 올여름 가장 핫한 콘텐츠다. 애니메이션 영화는 넷플릭스 역대 흥행 영화 2위 기록을 만들었고, 스토리보다 강력한 중독성을 가진 오리지널사운드트랙(OST)에 영화의 배경인 한국, 서울을 상징하는 각종 굿즈까지 큰 인기를 얻으면서 현재 10억 달러(약 1조 3900억 원) 이상의 가치를 평가받는다고 한다. 놀랍고, 자랑스럽다.
‘케데헌’은 특히 OST 곡들이 하나같이 귀에 꽂히는 듯한 매력을 뽐내고 있다. 영화 속 아이돌 헌터스가 부른 대표곡 ‘골든(Golden)’은 이달 들어 글로벌 음악 차트를 강타하고 있다. 지난 11일(현지 시간) ‘골든’은 미국 빌보드 메인 싱글 차트 ‘핫 100’ 1위를 기록했다. 빌보드는 이를 두고 “‘핫 100’ 차트를 정복한 K팝과 관련된 아홉 번째 노래로, 여성 보컬리스트들이 부른 첫 번째 1위 곡이기도 하다”고 전했다. 앞서 이달 1일에는 ‘골든’이 영국 오피셜 싱글 차트 ‘톱 100’에서 1위에 올랐다. 싸이가 ‘강남스타일’로 2012년 같은 차트에서 정상을 차지한 이후 13년 만이었다.
‘골든’을 따라 부르는 유명 가수와 연예인들의 ‘커버 챌린지’ 동영상이 쏟아지는가 하면, 북미와 영국 등에서는 오는 23·24일 1100여 개 이상의 영화관에서 ‘싱어롱 상영회’(영화 속 음악을 관객들이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즐기는 상영 방식)로 ‘케데헌’을 상영할 것이라는 소식도 전해졌다.
덕분에 넷플릭스는 속편 제작과 영화 실사화, 뮤지컬 제작까지 논의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판매하는 기념품을 사기 위해 관람객들의 대기줄이 끊이지 않는다는 소식 때문일까. 넷플릭스는 완구 등을 포함한 상표권도 단독 출원하며 사업 확장까지 예고하고 나섰다. 물론 넷플릭스가 ‘케데헌’의 수익을 독차지하고 있다는 점은 꽤나 배가 아프지만, K팝을 포함한 K컬처의 세계화를 확장할 수 있다는 관점에서는 반갑지 않을 수 없다.
K팝은 어떤 매력이 있기에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걸까. 한 대중문화 전문가는 “북미나 영국 등 서구의 대중음악은 개인적 성향이 두드러져서 폭력, 자살, 성관계, 마약 같은 어둡고 암울한 정신세계를 포함하는 반면, K팝은 BTS의 ‘Love yourself’ 처럼 보편적 사랑과 자기애, 꿈과 미래 등의 밝고 건전한 가치를 다룬다. 여기에 음악성까지 더해져 확산력과 잠재력이 크고 전 세계 많은 이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을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80주년 광복절이 있는 올해 8월이라 그런가. 다소 생뚱맞지만, K컬처가 세계로 한껏 뻗어나간 이 여름, ‘케데헌’ 시즌2 소식을 기다리며 백범 김구 선생이 쓴 〈나의 소원〉 속 문장이 떠오른다. ‘나는 우리나라가 가장 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오직 한없이 갖고 싶은 것은 문화의 힘입니다.’
2025-08-1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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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녹조라떼에 잠긴 세계유산, 언제까지 방치할 건가
한반도 선사 유적의 상징인 반구대 암각화가 세계유산에 등재된 지 불과 일주일 만에 폭우로 잠겨 한 달 가까이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등재의 감격을 채 누리기도 전에 짙은 녹조 속에서 훼손 위기에 놓인 현실은 국가적 부끄러움이 아닐 수 없다.
반구대 암각화는 지난달 12일 천전리 암각화와 함께 ‘반구천의 암각화’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 목록에 올랐다. 그러나 등재의 기쁨도 잠시, 암각화는 쏟아진 비로 상부 일부만 물 위로 내민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다. 지난달 19일 물에 잠긴 뒤로 3주가 넘었다. 대곡천의 물빛은 현재 ‘녹조 라떼’를 방불케 하고, 비릿하고 역한 냄새가 뒤섞여 코를 찌른다. 하류의 사연댐은 수문이 없는 월류형 구조여서 하루 약 30cm 배수 외에는 뾰족한 대책이 없다.
댐 수위는 현재 56m 정도. 지난달 침수 당시와 같아 암각화가 수면 위로 올라가는 52m까지 내려가려면 한 달 이상 걸린다고 한다.
이 답답한 현실은 이달 1일 울산컨벤션센터에서 열린 국가유산청 주최 시민토론회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정부는 사연댐 수문 설치를 2030년까지 추진하겠다고 밝혔지만, 시민들은 5년 뒤 대책으로는 역부족이라며 크게 반발했다. 일부는 사연댐 해체와 반구천 일대 자연 복원 등 근본적 방안을 거듭 요구하기도 했다. 기후위기로 폭우가 반복되는데 장기 계획만으로는 유산을 지킬 수 없다는 우려에서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이대로 가다간 유네스코 ‘위험 유산’ 지정 가능성을 우려하는 목소리까지 나온다. 위험 유산 지정은 선언적 경고에 그치지 않는다. 2007년 오만 ‘아라비아 오릭스 영양 보호구역’, 2009년 독일 ‘드레스덴 엘베 계곡’ 등이 경관 가치가 훼손됐다는 이유로 세계유산 자격을 박탈당했다. 반구대 암각화가 해마다 몇 달씩 ‘녹조라떼’에 잠긴다면 이런 불명예를 피하기란 어려워 보인다.
물론 당장 반구대 암각화를 물에서 건져낼 특단의 묘책을 찾기는 녹록지 않다. 울산 시민이라면 누구나 바가지라도 들고 가서 물 한 바가지씩 퍼내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식수원 문제도 여전히 핵심 걸림돌이다. 울산환경운동연합은 “암각화가 세계유산이 됐는데 물이 중요하냐”라면서도 “시민들이 사연댐 물을 양보한다면, 대체 식수원 마련은 정부가 책임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수문 설치가 오히려 유적 주변 환경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1965년 완공된 사연댐이 상류 대곡댐 건설 이후 식수 댐으로서 제 기능을 하는지 구체적인 검증도 필요하다. 암각화를 지키기 위한 단기 대책이든 장기 대책이든, 울산시가 안정적 대체 수원을 확보하도록 국가가 적극 지원하는 것이 사실상 유일한 해법이다.
내년 반구천의 암각화에서 차로 1시간 거리인 부산 벡스코에서 세계유산위원회가 열린다. 그러나 자랑해야 할 유산이 녹조 속에 잠겨 훼손된다면 과연 어떤 평가를 받을까. 5년 뒤 완공될 수문만 바라보다가는 갓 등재된 세계유산의 참상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국제적 망신을 자초할 수 있다.
세계유산 등재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등재 직후의 침수는 암각화 보존을 소홀히 한 우리 사회에 던지는 마지막 경고다. 반구대 암각화가 더는 ‘자맥질 유산’이라는 오명을 쓰지 않도록, 지금 당장 침수를 막을 즉각적이고 가시적인 대책을 세워야 한다.
2025-08-11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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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K조선과 지역 내 인구 이동
K조선이 인기다. K조선의 대표적인 기업인 삼성중공업, 한화오션, HD현대중공업의 주가는 연일 고공행진이다. 이들의 주요 생산 거점을 보면 삼성중공업과 한화오션은 경남 거제, HD현대중공업은 울산에 있지만 주요 관련 부품업계가 부산에 있기에 부산 지역 경기에도 영향을 미친다.
지난달 부산 지역 상용근로자가 100만 명을 처음으로 넘었다. 상용근로자란 1년 이상 계약이 유지되고 4대 보험을 적용받는, 이른바 안정적인 일자리를 뜻한다. 상용근로자 100만 명 돌파의 이면에는 K조선 훈풍의 수혜가 있다는 것이 부산시의 설명이다.
K조선 훈풍의 숨은 수혜도 있다. 지난달 HD현대중공업의 특수선 설계 파트가 부산에도 사무실을 열었다. 이로써 삼성중공업, 한화오션은 물론 대기업 조선 3사의 R&D 및 설계 파트가 부산에 둥지를 틀게 됐다.
부산에 둥지를 튼 배경에는 인력 확보의 용이성이 있다. 울산, 거제에 비해 도시 인프라가 잘 갖춰진 부산에 인재들이 거주하기를 희망한다. 심지어 울산, 거제에서 일하지만 이미 거주를 부산에서 하는 직원들이 많았다는 것이 조선 3사 관계자들의 공통된 설명이다.
부산 입장에서야 대기업 R&D 관련 일자리가 생기기에 환영할 일이다. 한편으로는 경남, 울산은 일자리와 인구를 빼앗기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까 우려스럽기도 하다. 수도권으로 지역의 인재가 ‘블랙홀’처럼 빨려가듯 지역 내에서 부산이 또 다른 블랙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다.
하지만 부산에서 울산과 경남으로 가는 인구는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2024년 동남권 인구 이동 통계에 따르면 부산은 서울(-5795명), 경기(-3574명) 다음으로 경남(-3473명)으로 인구 순유출이 진행 중이다. 주된 사유는 직업이었다.
부산시 입장에서는 수도권 유출 외에도 경남으로의 인구 유출을 걱정하고 있다. 하지만 시는 수도권 유출처럼 우려하지 않는다. 오히려 환영한다. 지난달 17일 상용근로자 100만 명 돌파 기념 행사에서 박형준 부산시장은 “울산, 경남으로의 인구 유출은 동남권의 경제가 원활해 일자리가 늘어난다는 뜻이고 이는 결과적으로 부산도 도움이 되는 선순환 구조”라고 밝히기도 했을 정도다. 대기업 조선 3사의 부산 R&D 센터 개소 역시 울산, 경남에서의 좋은 실적 덕이다. 사실상 이론적으로 생각하던 동남권 선순환 구조의 ‘실사판’이다.
최근 꺼진 줄 알았던 부산, 울산, 경남의 통합이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오는 모양새다. 지난달 경남 김해에서 박형준 부산시장, 김두겸 울산시장, 박완수 경남지사가 만나 부산-경남 행정통합은 예정된 일정에 따라 차질 없이 추진한다는 데 공감했다. 김두겸 울산시장은 부산-경남 행정통합이 성사되면 울산도 행정통합을 검토한다는 입장을 내기도 했다.
부울경이 본격적으로 힘을 합치면 ‘K조선 선순환 실사판 시즌2’가 더 많이 나올 수 있으리라고 보는 이들이 많다. 일자리로 인한 수도권으로 순유출이 여전히 많은 상황에서 경남, 울산에 좋은 일자리가 생기고 이로 인한 선순환으로 부산에 좋은 일자리가 생기길 기대한다. K조선 훈풍이 부는 이때가 ‘동남권호’가 본격 출항하기 딱 좋은 시기다.
2025-08-04 [17: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