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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대선과 암살의 기술
“야 우리나라 대통령 없어졌어.”
KBS 예능 개그콘서트의 한 코너에 개그맨 김원훈이 조진세와 고등학생 이진(일진보다 아래 단계란 뜻) 역할로 출연해 대뜸 내뱉은 대사다. 대통령을 다시 뽑아야 하는 상황이라고 김원훈이 설명하더니 조진세에게 “너 누구 뽑을 거야”라고 묻는다.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조진세. 결국 “학생 신분이라 투표하기는 애매하기는 해”라며 위기를 넘긴다.
그리고는 경찰관 역할인 개그맨 송필근에게 “경찰관 아저씨는 투표권도 있는데 누구를 뽑을 거냐”고 묻는다. 송필근은 “경찰관복은 정당과는 무관하다”고 오해(?)를 푼 뒤 화를 내며 상황을 넘긴다.
이 장면은 커뮤니티에서 ‘개그콘서트 암살단’이란 제목으로 화제가 됐다. 정치적 소신을 밝히는 것이 ‘댓글 테러’는 물론 여러 곤란한 상황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분위기를 개그맨들도 알았기에 이를 개그 소재로 썼을 터이다. 과거 정권의 블랙리스트에 자신의 이름이 올라 자신도 모르게 슬그머니 활동이 끊기는 ‘사실상 암살’이 이뤄진 적도 있다.
암살 가능성은 수치로도 드러난다. 2023년 발표된 한국의 사회지표에 따르면 사람들이 크게 느낀 사회갈등은 ‘보수와 진보’(82.9%)가 가장 많았다. ‘빈곤층과 중상층’(76.1%), ‘근로자와 고용주’(68.9%)보다 더 높았다. 2년이 지났지만 이 갈등이 줄었다고 느끼는 이들은 없다. 굳이 수치를 나타내지 않더라도 체감되는 정치 성향에 갈등은 극에 달해있는 느낌이다.
여론과 트렌드에 민감한 마케터들이 이런 분위기를 놓칠 리 없다. 부산 향토기업 대선주조는 제21대 대선 한정판 특별 에디션을 출시했다. 대선주조의 브랜드 ‘대선159’가 대선과 동음이의어라는 점을 활용한 캠페인이다. 상표에는 ‘함께 대선 합시다’라는 간결하고 핵심적인 메시지를 흰색 배경 상단에 배치했다. 암살을 우려했기 때문일까. 태극기 이미지로 대통령 선거의 중요성을 강조함과 동시에 주요 정당 상징 색상을 디자인 요소로 활용하는 다소 ‘수비적인’(?) 모습도 보였다.
대선주조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매번 비슷한 전략을 쓰고 있다. 2017년 당시 카피는 ‘대선으로 바꿉시다’였다. 2017년 1월 ‘시원’(C1)을 대체하는 ‘대선’을 출시하고 5월 대선을 겨냥해 ‘대선으로 바꿉시다’라는 대선 마케팅을 펼친 셈. 이런 마케팅이 잘 통했기 때문일까. 당시 대선주조의 시장 점유율은 10%대에서 50%대로 올랐다. 5년 뒤인 2022년 대선을 앞두고도 대선주조는 ‘대선, 당신의 선택은’이라는 카피를 내걸고 캠페인을 진행했다. 아쉽지만 결과는 신통치 못했다. 이유야 다양하겠지만 소비자에게 크게 각인되지 못한 것은 확실하다.
이번 대선주조의 ‘함께 대선합시다’ 마케팅이 성공하기를 기대한다. 요즘 지역 기업 대선주조의 시장점유율은 2017년에 비해 많이 떨어져 있다. 대선 마케팅의 성공으로 지역 기업이 살고, ‘함께’해야 한다는 고민도 깊어진다면 더 바랄 것도 없다. 다행히 시장에서는 대선주조 마케팅 분위기가 좋다는 말도 들린다. 이것저것 재지 말고 소주 한잔 하며 속을 터놓으면 오해하고 미워할 일도 좀 준다. 이번 대선도 제발 좀 그랬으면 좋겠다.
2025-05-26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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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입만 터는 문과놈들' 행동할 차례다
기승전‘의료수가’.
의료담당이 된 지 두 달동안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의료수가(의료행위에 대한 대가)’다. 진료 과목·기관 규모에 관계없이 첫 만남의 통과의례와도 같은 말이기도 했다. 이들은 ‘의료수가 현실화’가 지역·필수의료 분야 공백을 메우기 위한 첫걸음이라고 강조했다. 의대 정원‘만’ 확대하는 것은 소위 돈 되는 진료분야의 쏠림 현상만 가속화할 뿐이라는 주장이다.
의료수가는 국민 모두가 기본적인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로 도입된 공공의료보험제도 아래 책정된 기준이다. 적정 수가 기준은 따로 없지만 OECD의 세계 각국 비교 자료를 보면 우리나라의 현행 의료수가가 상대적으로 낮은 것은 분명하다. 그 덕분에 의료 문턱이 낮아지고 병원 이용에 대한 국민 부담도 크게 줄어들었다.
문제는 진료과목별 급여진료 기준 비용 대비 수입(원가보전율)이다. 안과 등 특정과목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100%를 넘기지 못한다. 병원 입장에선 급여진료를 하면 할수록 손해를 보는 구조인 셈이다. 원가보전율이 특히 낮은 소아과, 산부인과는 인구 감소와 맞물려 줄폐업이라는 직격탄을 맞았다. 병원들은 대신 비급여 항목을 늘려 수익을 보전한다. 최근에 만난 한 의사 역시 ‘손’으로 수술을 성공적으로 해낼수록 적자가 커지는 바람에 비급여인 ‘보조’ 수술용 로봇을 활용해야 하는 현실을 자조했다.
필수의료 대부분은 낮은 의료수가로 인해 인력 부족이 디폴트가 됐다. 대한의사협회(의협) 의료정책연구원이 2023년 국민·의사 2159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필수의료 인식 조사’에서 국민은 과도한 업무부담(39.1%)과 낮은 의료수가(19.2%)를, 의사들은 낮은 의료수가(58.7%)와 법적 보호 부재(15.8%)를 필수의료 분야의 인력 부족의 주된 원인으로 꼽았다. 의협이 같은 해 전국 의대 본과 학생 811명을 대상으로 한 인식조사 결과도 마찬가지. 의대생 2명 중 1명(49.2%)는 필수의료 기피 현상의 원인으로 ‘낮은 의료수가’를 꼽았다. 낮은 의료수가가 필수의료 인력부족의 주된 원인으로 두루 인식된 것이다.
중증외상분야 권위자이자 드라마 ‘중증외상센터’ 주인공의 모델이 되기도 한 이국종 국군대전병원장이 지난달 군의관을 대상으로 한 강연에서 한 작심발언은 의료수가 문제에 더욱 힘을 실었다. 강연에서 “한평생 외상외과에서 열심히 일했지만 바뀐 건 하나도 없었다. 내 인생은 망했다”고 토로한 그는 ‘탈조선’과 ‘NO 바이탈(필수의료)’을 권했다. 이는 치료를 하면 할수록 적자 규모가 커지는 우리나라 필수의료체계에서 평생 헌신한 그의 절망이었다.
올해 건강보험 수가협상 막이 올랐다. 의정갈등 장기화로 인한 상급 종합병원 피해 복구에 수조 원이 투입된 상황에서 의료수가 현실화는 논란이 된 세월만큼 갈 길이 멀다. 지역·공공의료 공백이 갈수록 커지는 상황에서 현실화 해법을 찾기란 녹록지 않다. 하지만 일차의료 강화, 국민주치의 제도 도입, 중증질환·전문의 중심의 상급 종합병원 구조전환 등 의료전달체계 재정비 논의가 이뤄지는 지금이 기회가 될 수 있다. 의대 정원 확대를 기반으로 한 공공 인프라 확충 등의 움직임도 호기라면 호기다.
이 원장이 분노했던 ‘입만 터는 문과놈들’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때가 왔다. 정권 창출에만 급급하거나 갈라치기로는 국민을 위한 길을 찾을 수 없다. 의료 붕괴를 막고 양질의 의료 시스템이 유지되도록 행동으로 나설 차례다. onlypen@
2025-05-19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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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역성장 시대의 건설업
한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대만에 추월당할 처지에 놓였다. 국제통화기금(IMF)의 전망이니 신빙성이 상당히 높다. 손에 닿을 것만 같았던 GDP 4만 달러 시대는 5년 뒤에나 점쳐볼 수 있게 됐다.
역성장의 중심엔 건설업이 있다. 1분기 건설 투자는 건물 건설을 중심으로 3.2% 줄었다. 지난해와 비교하면 무려 12.2%나 감소했다. IMF 외환위기 이후 가장 큰 감소 폭이다. 건설업 총생산은 1.5% 줄었다. 국내 1분기 GDP 성장률이 -0.2%니 건설업이 한국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별달리 내세울 만한 주력 산업이 없는 부산에는 건설업 위기가 더욱 크게 다가온다. 사업이 지체되거나 무산되면서 지역 경제에 돈줄이 막혔고, 현장에 나가야 하는 근로자들은 일자리를 잃고 실직 상태에 놓였다. 중견 건설사들이 부도나 기업회생 절차에 돌입하니 수많은 하도급 업체들은 대금 받을 길이 묘연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건설업을 대체할 만한 새로운 먹거리를 찾았어야 했다. 금융이나 IT, 첨단 제조업 등 대안은 많다. 어느 것 하나 마땅한 산업을 육성하지 못했고, 지역 경제는 여전히 전통 산업인 건설업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장기적으로는 새 먹거리를 찾는 일에 발 벗고 나서야 하겠지만, 당장은 지역 건설업을 살리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조기 대선은 지역 건설업의 위기이자 기회다. 대권 결과에 따른 리스크가 분명히 존재하지만, 대선 과정을 통해 지역 업계의 요구사항과 목소리를 중앙 무대에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지금 업계 상황이 너무나도 엄중하다보니 누가 대권을 잡든 ‘지방 건설업부터 살리자’는 정책이 나와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지방 미분양 물량이 전국적으로는 11년 만에, 부산은 16년 만에 최대치를 경신하고 있다. 정치적 성향에 따라 부동산 정책이 좌우될 여지가 없어야 한다는 뜻이다.
부동산 실수요자들이나 투자자들을 ‘투기꾼’으로 바라보는 시각부터 바뀌어야 한다. 문재인 정부는 다주택자 양도소득세율을 70%까지 높이는 징벌적 세금을 거둬들였다. 부동산 대책만 28차례 발표했다. 그럼에도 집값이 잡히기는커녕 천정부지로 뛰었다. 누가 정권을 잡든 이런 과오를 반복해선 안 된다.
지금은 수도권과 지방을 이원화하는 부동산 경기 부양책을 써야 할 때다. 지방에 한해 다주택자 중과세를 폐지하고 미분양 주택에 대한 지원을 늘여야 한다. DSR 규제도 지방에서는 풀어주고, 멈춰버린 지방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도 활성화 방안을 찾아야 한다. 지방 건설업부터 정상화해야 한국 경제가 다시 중심을 잡을 수 있다.
지역 업계도 뼈를 깎는 자세로 쇄신해야 한다. 정부가 보따리 풀어주기를 기다리고만 있어선 안될 일이다. 세금으로 미분양 아파트를 사달라 요구하는 대신 분양가를 낮춰야 한다. 1군 건설사와 견줘도 쉽게 밀리지 않을 경쟁력을 길러야 가덕신공항 등 대형 프로젝트에서 지역 몫이 커질 것이다. 이참에 지방에 산재한 한계기업들에 대한 구조조정도 적절하게 이뤄져야 한다. 20~30대 젊은 직원들이 왜 건설사를 탈출하려 하는지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이번 대선은 건설업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짜는 계기가 돼야 한다.
2025-05-12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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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트럼프 말하길
그의 말 한마디는 전 세계 주요 언론사의 기사가 된다. 그게 단순한 농담이거나 ‘헛소리’라고 할지라도. 여기서 ‘그’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다.
매일 아침 엄청나게 쌓여 있는 외신 이메일을 확인하면서 일어난다. 최근 두 달 남짓 동안 못 해도 이메일로 받은 뉴스의 절반 이상은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에 따른 기사였다. 대부분 이런 기사의 제목은 “트럼프가 말하길”(Trump says)로 시작한다. “트럼프가 말하길, 앨커트래즈 교도소를 다시 열 것이다”(5일), “트럼프는 경제 상황은 바이든 탓이라고 말하지만, 기업과 경제계는 동의하지 않는다”(2일) 같은 종류다.
최근에는 “교황으로 선출되고 싶다”는 농담인지 진짜인지 모를 발언을 해서 전 세계를 경악하게 했다. 처음에는 다들 짓궂은 농담이라고 생각했지만, 트럼프 대통령과 백악관은 교황 옷을 입은 모습으로 합성한 트럼프 대통령의 모습을 SNS에 올렸다.
최근 전 세계를 대상으로 벌이고 있는 ‘관세 전쟁’을 두고도 마찬가지다. 어느 날은 “중국을 제외한 모든 나라는 협상 가능하지만, 중국에는 145% 초고율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으름장을 놨다가, 바로 다음 날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매우 똑똑한 사람이고, 그는 내 친구다”며 “협상의 문은 얼마든지 열려 있다”고 달랜다. 그의 말 한마디로 뉴욕 증시는 급락했다가, 다시 치솟는다. 촘촘히 연결된 세계 금융시장도 마찬가지다.
국제 뉴스를 다루는 기자로서 종잡을 수 없는 그의 발언에 전날 썼던 기사와 정반대되는 내용의 기사를 다음 날 쓰면서 허탈할 때가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지면에 쓸 외신 사진을 검색하다가 눈에 들어오는 사진이 있었다.
영국 런던의 한 벽면에 그려진 아트 작품이었다. 누가 그렸는지는 모르지만, 트럼프 대통령을 비롯한 전 세계 수장들과 주요 인물을 과장되게 그리고 그에 따른 설명을 붙인 풍자화(2025년 3월 25일 자 12면 보도)였다. 그래피티 아티스트이자 사회운동가 뱅크시의 나라답게 작품은 위트가 넘쳤다.
그 작품에 묘사된 트럼프 대통령은 이랬다. 왕관을 쓴 트럼프 대통령 밑에는 ‘거짓말하는 왕’(LYIN’ KING), 원숭이처럼 묘사한 모습 밑에는 ‘초거대 일진’(XL BULLY) 이라는 설명이 붙었다. 그가 마치 왕이 된 것처럼 국정을 주무르고, 누가 되었든 약자라면 공격하고 혐오하는 일진처럼 행동한다는 점을 꼬집었다.
지난 2월 백악관에서 열린 트럼프 대통령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회담은 그런 ‘초거대 일진’ 행동의 절정이었다. 말이 대화지 사실상 트럼프 대통령과 J.D 밴스 미국 부통령이 젤렌스키 대통령을 공격하며 설전을 벌이는 모습이었다. 이날 트럼프 대통령과 미국 보수 매체 기자가 정장을 입고 있지 않은 젤렌스키 대통령을 대놓고 조롱하는 모습이 전 세계에 생중계 되는 참사도 벌어졌다.
다행히 지난달 프란치스코 교황 장례식에서 마주 앉은 두 정상은 15분간 대화한 끝에, 광물 협상을 마무리하고 평화를 위해 한 발자국 나아갔다. 결국 필요했던 것은 ‘보여주기식 대화’가 아니라 ‘진정한 대화’였다. 앞으로 트럼프 대통령이 혐오와 조롱보다는 진정성이 담긴 목소리를 내기를 진정으로 기원한다.
2025-05-05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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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세계 STO 시장 뜨지만 법조차 못 만든 한국
부동산이나 채권 같은 자산을 블록체인 기술로 조각 내어 거래할 수 있다면 어떨까? 기술적으로는 충분히 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증권형 토큰 발행(STO)’이다. 기존에는 수십억짜리 빌딩이나 기관 전용 채권 같은 자산에 개인이 접근하기 어려웠다. STO는 그런 자산을 토큰으로 잘게 나눠 누구나 투자할 수 있게 만든다. 거래는 블록체인 위에서 이뤄져 더 투명하고 빠르다. 고금리와 부동산 불안정이 겹치는 시대에, 소액으로 안정적인 자산에 분산 투자할 수 있다는 게 큰 장점이다. 개인 투자자도 거대 자산가만 누리던 시장에 진입할 수 있게 된 셈이다.
전 세계는 STO 시장을 빠르게 키워나가고 있다. 28일 글로벌 통계 플랫폼 RWA.xyz에 따르면 전 세계 온체인 실물연계자산(RWA) 시장 규모는 약 216억 달러(약 31조 원)에 달한다. 참여 투자자는 약 9만 8439명, 자산 발행 기업은 189곳이다. 미국 국채, 사모 대출, 원자재 등이 주요 자산으로 거래되고 있다.
한국은 그 흐름에서 한참 뒤처져 있다. 법, 제도를 정비해 기관투자자까지 적극 유입되는 미국이나 유럽과는 다른 추세다. 규제 정비가 투자 유입을 가속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제도 마련의 속도가 시장 선점의 핵심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일본이 이를 잘 보여준다. 일본은 2020년 금융상품거래법 개정으로 토큰증권을 ‘유가증권’으로 인정하고, 전통 금융과 유사한 규제 체계를 구축했다. 이를 바탕으로 부동산, 회사채 등 다양한 분야로 STO를 확장했으며, 누적 발행금액도 1600억 엔(1조 6000억 원)을 넘겼다. 일본은 자본시장 활성화와 국민 자산 형성, 지방경제 부흥을 목표로 규제 친화적 시스템을 정착시켜 실질적 성과를 거두고 있다.
국내에서도 시장 선점 시도가 이어진다. 부동산은 물론 음원, 미술품, 심지어 한우를 조각 내어 투자 상품으로 만든 플랫폼도 등장했다. 부산에서는 지난해 부산디지털자산거래소(BDAN·비단)가 출범, 디지털 실물자산 유통 중심지가 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하지만 제도적 기반 부재가 걸림돌이다.
업계 관계자들은 “금융당국 허가를 일일이 받아야 하는 구조 때문에 속도감 있는 사업 추진이 어렵다”거나, “정식 인허가가 없어 대출을 활용한 대규모 프로젝트를 시작조차 못 한다”고 토로했다. 한 지역 기반 기업은 “특구 사업으로 시작했지만 중앙 제도권과 괴리가 크다”며 “특정 지역에 국한된 사업자 취급을 받을까 우려된다”고 한숨을 쉬었다.
기업들이 잘못한 게 아니다. 법이 발목을 잡고 있을 뿐이다. 국회에는 이미 관련 법안이 발의돼 있다. 그러나 대통령 탄핵 정국 속에서 국회는 입법 기능을 사실상 방기했다. 그 피해는 시장을 준비해온 스타트업들과 투자자들에게 돌아가고 있다. 시간은 돈이고, 시장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다행히 최근 여야를 가리지 않고 STO 정책토론회가 열리고 있다. 이 흐름이 단지 6월 3일 조기 대선을 앞둔 ‘보여주기 이벤트’로 끝나지 않으려면, 법안 통과라는 실질적 성과로 이어져야 한다. 더 늦기 전에 국회는 서랍 속에 잠든 STO 법안을 꺼내 바로 처리하라는 것이 민생의 열망이다.
2025-04-28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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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민생회복지원금 20만 원 놓고 갈라진 거제
얼마전 새 시장을 뽑은 경남 거제가 초장부터 시끌하다. 징검다리 재선으로 3년 만에 시정에 복귀한 변광용 시장이 공언한 ‘민생회복지원금’ 때문이다. 지난 재선거 때 벼랑 끝에 몰린 민생경제 회복을 위해 당선되면 거제 시민 모두에게 1인당 20만 원을 지급하겠다고 공언했던 변 시장은 지난 16일 취임 후 첫 기자회견에서 약속을 지키겠다고 다시 한번 확언했다. 이를 위해 전담 TF를 구성한 거제시는 관련 조례안까지 입법예고하며 준비를 마쳤다.
수혜 대상은 23만여 명, 소요 예산은 470억 원 상당이다. 지원금은 관내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거제사랑상품권이나 선불카드로 지급한다. 자금의 외부 유출을 막으려는 조처다. 사용 기한도 정해 단기간에 효과를 극대화한다는 복안이다. 재원은 ‘통합재정안정화기금’을 활용한다. 이 기금은 안정적인 지방 재정 운용과 대규모 재난, 지역 경제 악화 등 긴급한 상황에 사용하려 적립해 둔 일종의 ‘비상금’이다. 민선 7기 변 시장 초임 시절이었던 2021년 1월 1일 시행에 들어가 1669억 원까지 적립금을 늘렸다. 그러나 코로나19 팬데믹 여파로 정부 교부세가 줄어들면서 2023년 753억 원, 2024년 400억 원 그리고 올해 100억 원을 당초예산 부족분으로 충당했다. 지금은 585억 9900만 원이 남았다. 기금 설 및 운용 조례에 따라 최대 90%, 526억 원까지 집행할 수 있다. 국비 지원이나 지방채 발행 없이도 재정건정성을 유지하며 충분한 재원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게 거제시 설명이다. 시는 ‘5월 원포인트 임시회’에서 입법 예고한 조례가 통과되면 7월 추경에 사업비를 편성해 여름 휴가철 전에 지급한다는 목표다.
남은 건 시의회 ‘동의’인데, 이게 쉽지 않다. 공약 발표 당시부터 ‘노골적인 매표 행위’라며 날을 세웠던 국민의힘 시의원들은 아예 공약 철회를 요구하고 있다. 이들은 가뜩이나 빠듯한 지방재정에 비상금을 털어 시장 공약 사업을 한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상당하다. 현재 거제시의회는 민주당 7명, 국민의힘 7명, 무소속 2명 구성이다. 양당 출신인 무소속 2명의 정치 성향을 고려하면 사실상 동수다. 첫 관문인 경제관광위원회는 민주당 4명, 국민의힘 2명, 무소속 2명이라 어렵지 않게 통과할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본회의 표결 시 ‘8 대 8’ 가부동수로 부결될 공산이 크다. 설령 조례가 제정돼도 ‘추경 심사’라는 큰 산을 또 넘어야 한다. 국민의힘 소속인 신금자 의장은 집행부가 요청한 5월 임시회를 거부했다. 시의회와 사전 교감이나 공감도 형성도 안 된 조례를 통과시키려 없던 회기를 만드는 건 적절치 못하다는 이유다.
정치권 공방에 시민 사회도 덩달아 갑론을박이다. 이 때문에 위기를 극복하려 준비한 지원금이 되레 분열과 위기를 자초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작년 10월부터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을 맡아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심판을 이끈 문형배 전 재판관은 18일 퇴임식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 적용되는 원칙과 너에게 적용되는 원칙이 다르면 어떻게 통합이 되겠는가. 관용은 의견이 다른 사람에 대한 존중이고 자제는 힘 있는 사람이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이다. 관용과 자제가 없다면 민주주의는 발전할 수 없다”. 20만 원 지원금을 놓고 갈라진 거제가 곱씹어봐야 할 대목이다.
2025-04-21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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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법 위에 선 자의 착각
한 사람이 법 위에 올라서는 순간 민주주의는 숨을 멈춘다. 스스로 국가를 구할 존재라며 국민과 공동체 위에 서려 했던 윤석열 전 대통령이 결국 탄핵 됐다. 헌법재판소의 탄핵 사유를 보면 윤 전 대통령은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속 라스콜니코프와 너무 닮았다. 인류 공동체의 약속인 법과 도덕을 넘어선 개인의 절대적 확신이 얼마나 위험한지 우리는 다시 마주했다.
도스토옙스키는 〈죄와 벌〉을 통해 물었다. “자신을 법 밖에 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그 의문은 〈죄와 벌〉의 라스콜니코프를 통해 풀린다. 라스콜니코프는 자신이 법 위에 있는 ‘비범한 인간’이라 믿었다. 법과 도덕을 초월했다. 그러니 한 노파를 살해해도 정당하다고 여겼다. 그 살인은 세상을 더 낫게 만들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논리. 그것은 곧 도스토옙스키가 경고한, ‘비범한 인간의 착각’이었다.
윤 전 대통령도 ‘국가적 혼란을 바로잡을 자’로 생각했을까? 그는 자신만의 신념을 감행하기 위해 민주주의 질서를 멈춰도 괜찮다고 여겼던 모양이다. 라스콜니코프가 살인을 해도 괜찮다고 여겼던 것처럼, 윤 전 대통령은 비상계엄을 통해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살해하려 했다.
‘혼란을 바로잡기 위한 계엄’ ‘탄핵은 불순한 세력의 시도’. 윤 전 대통령은 누구보다 옳고 비범하니 국민의 선택으로 구성된 국회를 ‘통제해야 할 대상’으로 간주했다. 또 자신을 반대하는 목소리는 하나의 ‘음모론’이나 ‘불순 세력’으로 여겼다. 권력자가 이러한 신념을 가질 경우 민주주의가 어떻게 후퇴하는지 우리는 이미 뼈아프게 경험했다.
이러한 사실을 도스토옙스키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라스콜니코프는 반성했다. 그는 범죄를 저지른 후 자신의 사상이 허상임을 깨달았다. 죄책감에 시달리고 사랑과 고통 앞에서 비범한 자의 껍질을 벗기 시작했다. 도스토옙스키는 그를 통해 말했다. “절대적 신념은 인간성을 대신할 수 없다.”
윤 전 대통령은 무너졌지만 현재까지 반성은 없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판단이 옳았다고 말한다. 계엄령은 국가 안정을 위한 합리적 조치였고, 탄핵은 정치적 음모였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대다수 시민들은 ‘착각’이라 생각하지 않을까? 특히 그는 검사 출신으로 법의 허점을 누구보다 잘 아는 ‘법 기술자’이다. 일반 시민에게는 어려운 법이 그에게는 참 쉬울 수도 있다.
라스콜니코프나 윤 전 대통령은 법보다 신념을 앞세우고 사회 질서를 자기 방식으로 재단하며 결국 공동체를 통제하려 했다. 그 모습은 신념이 아니라 오만이다. 그들이 알아야할 점은 민주주의를 통해 형성된 공동체는 책임지는 시민을 원한다는 점이다. 헌법은 개인의 신념이 아니라 늘 시민의 동의와 절차를 통해 정당화돼야 한다.
또 거대 야당인 민주당도 별반 다르지 않다. 친명계와 이재명 전 대표를 중심으로 한 ‘1인당’의 기득권 역시 그들의 생각과 신념이 다른 목소리에는 극도의 폭력성을 보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공동체의 기반은 대다수 시민들이다. 민주주의 공동체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절차와 합의를 우회해선 안 된다. 그것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깊게 무너진다. 이미 역사로 증명된 사실이다. 공동체의 약속인 법과 도덕을 초월한 비범한 사람은 없다. 그저 비범하다고 착각한 자들만 있을 뿐이다. 라스콜니코프의 반성을 돌이켜보길 바란다.
2025-04-14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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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마음까지 태운 산불… 이제는 온 마음을 나누자
지난주는 역대급 산불에 마음 졸이는 시간이었다. 전 국민 모두가 언제쯤 불길이 잡힐지 노심초사 걱정하며 애를 태웠다.
경북 동북부 5개 시·군을 초토화시킨 이른바 ‘경북 산불’은 축구장 6만 3245개, 여의도 156개 면적을 잿더미로 만든 뒤 149시간 만인 지난주 29일에 주불이 잡혔다. 성묘객 실화로 시작된 이번 산불은 역대 최고인 시간당 8.2㎞ 속도로 동해안까지 이동하며 26명의 소중한 목숨을 앗아갔다.
그보다 앞서 경남 김해시와 울산시 울주군, 전북 무주군과 충북 옥천군에도 산발적으로 산불이 번졌다.
지난달 21일 경남 산청군에서 발생한 산불은 약 213시간 만인 30일에 꺼지면서 역대 두 번째로 길게 지속된 산불로 기록됐다. 산청군 산불로 축구장 2602개에 달하는 면적이 피해를 봤고, 진화작업 중 불길에 고립된 창녕군 소속 산불진화대원과 공무원 등 4명이 숨지기도 했다.
영남 지역 산천을 태우던 불길은 사그라들었지만 곳곳에 상흔이 남았다. 화마가 할퀴고 지나간 야산은 울창했던 숲 대신 시커멓게 타다 남은 앙상한 나무들만 숯으로 남았다. 마을은 폭격을 맞은 듯 초토화돼 삶의 터전이 통째로 사라져 버렸다. 매캐한 냄새가 가득한 산불 피해 지역은 다니는 사람도, 차량도 없이 적막한 모습으로 변했다.
‘괴물 산불’을 피해 겨우 몸만 빠져나온 이재민들은 또 어떤가. 고령층이 대부분인 이재민들은 곳곳에 마련된 대피소 텐트에서 하루하루 버티고 있지만, 건강 상태가 악화되고 있는데다, 생계 걱정에 앞이 깜깜하다. 그나마 한때는 3만여 명에 육박했던 대피소 이재민의 수가 일주일 사이 6000여 명으로 줄어들었다고 하니 조금은 다행스럽다.
역대급 산불 사태를 제대로 수습하는 건 지금부터다. 이재민 대책에 산림·문화재 복구 등 풀어나가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다. 정부는 이재민들이 하루 빨리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서둘러 재난 복구 대응에 나서야 한다. 정치권은 대승적 차원에서 소모적인 논쟁은 자제하고 추경 예산 10조 원 편성을 신속하게 합의 처리해야 한다.
더불어 정부와 정치권의 움직임이 본격화될 때까지, 우리 모두는 산불 피해 지역에 더욱 마음을 모았으면 한다. 대피소에서 이재민들의 식사와 잠자리를 챙기는 봉사자들의 모습을 보면 참으로 감사하다. 잔불을 정리 중인 많은 소방 관계자들과 함께 봉사자들이 피해 현장을 든든히 떠받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 등 SNS(사회관계망)에서도 산불 진화와 이재민 지원을 위해 써달라며 적게는 10만 원부터 많게는 수 천만 원까지 십시일반 성금을 내놓는 이름 모를 사람들의 게시글이 눈에 띄었다. 삼성과 SK, 현대차, LG 등 4대 그룹은 이번 산불 피해 복구와 피해 주민 지원을 위한 성금으로 총 90억 원을 내놨다. 유재석, 아이유, 임영웅 등 유명 연예인들의 기부 소식도 줄을 이으면서 ‘선한 영향력’이 번지고 있다. 이밖에 심리 상담, 진료 봉사, 물품 기부를 하는 이들의 도움도 답지하고 있다.
봉사와 기부, 그 둘이 아니라도 작게나마 무언가 도울 일이 없을지 고민하게 된다. 이번 주말에는 아이와 함께 산불 피해 현장으로 가볼 참이다. 참담한 현장을 직접 마주한다면 화재 예방에 대한 교훈을 가슴에 새길 수 있을 것이다. 미처 수습이 안 된 현장이 있다면 청소와 정리에 손을 보탤 수도 있을 것이다.
마음까지 까맣게 태워버린 이번 산불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 모두의 마음을 더할 때다.
2025-03-31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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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죽어도 되는' 노동자는 없다
‘죽어도 되는’ 노동자가 있다. 그것도 16번이나 죽임당했다. 이름은 미키 반스. 얼음행성 개척에 투입돼 온갖 위험한 임무를 도맡는다. 마루타처럼 생체 실험에도 동원된다. 얼음행성은 어떠한 사회적 안전망도 없는 죽음이 예정된 일터다. 미키가 믿을 건 죽고 나면 신체와 기억이 복제된다는 사실 뿐. 그는 다시 태어나는 게 아니라 다시 죽는 노동자다. 고통스러운 죽음이 반복되면 두려움마저 사라지는 건지…. 미키가 죽음의 고비마다 보여주는 체념 섞인 평정심(?)은 기이할 정도로 놀랍다. 비인간적인 공동체는 임무를 수행하는 미키가 살아있는지, 아니 ‘죽었는지’ 확인하지도 않는다. 그저 프린트하면 그만인 ‘익스펜더블,’ 인간 소모품이기 때문이다.
영화 ‘미키17’은 자연스레 한국사회에 만연한 산업재해 현실을 떠올리게 한다. 올해 2월 부산 반얀트리 화재는 6명 노동자의 생명선이 타들어 간 대가로 휘황한 도시에 숨겨진 안전불감증의 민낯을 한순간에 들춰냈다. 10명의 인부가 숨지거나 다친 서울·세종고속도로 다리 붕괴 사고는 충격 그 자체였다. 툭하면 어선 침몰 사고로 목숨을 잃는 이주노동자는 얼음 행성에 투입된 미키나 다름없다.
지난해 12월 ‘노동의 메카’를 자부하는 울산에선 20대 잠수 노동자가 차디찬 겨울 바다에 들어갔다가 주검이 돼 돌아왔다. 2018년 태안 화력발전소에서 죽어간 24살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 씨, 그보다 2년 전 서울 구의역에서 열차에 치여 숨진 19살 하청 노동자 김 군을 우리는 어느새 잊어버린 걸까. 세 사건 모두 기본적인 2인 1조 수칙조차 지키지 않아 발생한 참극이었다. 위험의 외주화에 희생당한 제2, 제3의 김용균은 시나브로 영화 속 열일곱 번째 미키를 넘어선 지 오래다. 동일한 형태로 반복되는 죽음은 어쩌면 ‘죽임’에 가깝다. 고용노동부가 펴낸 ‘2024 중대재해 사고백서’에 따르면 2023년 전국에서 일하다 숨진 노동자는 593명에 달한다.
언제나 그랬듯 법의 처벌은 약하기 짝이 없다. 산재 다발 사업장 고려아연은 2021년 노동자 2명이 질식사한 사고와 관련, 4년 뒤 법원에서 원하청 책임자 모두 벌금 700만~1000만 원을 받는 데 그쳤다. 2019년 9개월간 4명의 노동자가 숨진 HD현대중공업에선 사업부 대표 3명이 집행유예와 벌금형을 받았다가 이마저 “형이 무겁다”고 항소했으나 기각당했다. 대중의 관심이 시들대로 시든 지난 2월에 있었던 일이다. 이 또한 산재공화국을 떠받치는 숱한 사건 중 작은 조각에 불과하다.
10명의 사상자를 낸 2022년 5월 에쓰오일 폭발 사고는 중대재해법을 빠져나간 채 1심 재판을 받고 있다. 비슷한 처지에 놓인 대기업들이 쾌재를 불렀다. 중대재해처벌법이 산업안전중점검찰청을 둔 울산에서조차 종이호랑이로 전락했다는 노동계의 자조 섞인 한숨이 들린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기업이 노동 현장의 재해를 두려워하겠나.
일터에서 돌아오지 못한 노동자는 대부분 온갖 통계에 묻혀 기억에서 멀어진다. 이러한 숫자들은 때로 우리를 현상에 무감각하게 만든다. 재해와 죽음에 둔감한 사회. 영화 미키17은 기실 인간의 존엄성이 죽어가는 현실을 겨냥하듯 반복해서 한 가지 질문을 던진다. “죽는 건 어떤 기분이야?”
2025-03-24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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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해태껌 롯데껌 논쟁을 끝낼 때
“우리는 해태껌 이런 건 취급 안하지예. 롯데 이런 것만 딱 갖다 놓지.”
영호남 지역 갈등은 ‘껌’에서도 드러난다. 부산을 연고로 하는 프로야구팀 롯데 자이언츠 따라 영남 지역은 롯데껌을, 호남 지역은 광주를 연고로 하는 해태 타이거즈(KIA 타이거즈의 전신)를 따라 해태껌을 주로 찾았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호남에서 롯데껌을 찾는다거나 영남에서 해태껌을 찾는 것이 매우 위험한 일임을 장난처럼 보여주는 장면도 많았다. 정치적으로도 영남은 보수색이 강했고, 호남은 진보색이 강했기에 둘 사이 간극은 메우기가 쉽지 않았다.
단순히 지역 갈등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말인 줄 알았는데 수도권에서는 영남과 호남을 진짜 ‘껌’으로 알았나 보다. 수년 전부터 호남 지역은 농협중앙회 본사를 호남으로 이전하기 위해 공을 들였는데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산업은행 본사 부산 이전 반대 논리가 그대로 농협 본사 이전 논의에도 거의 ‘복붙’(복사해 붙여넣기)처럼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일단 노조들은 산업은행과 농협중앙회의 본사 이전이 시행되면 노동자의 거주지 이전이 불가피한데 이는 노동자의 삶과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라며 반대한다. 산업은행과 농협중앙회의 본사 이전이 졸속 행정이자 정치적인 표 계산 때문으로 실적 악화 등 부작용이 우려된다는 목소리도 있다. 결국 이러한 복붙 반대 논리에 정치권과 정부는 지역민의 염원을 씹던 껌 뱉듯이 무시하고 있다.
영호남을 비롯한 지역이 공공기관 이전을 원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산업은행 이전과 농협중앙회 이전은 단순한 위치 이동이 아니다. 국가 균형발전과 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한 중요한 정책적 움직임이다. 특히 수도권에 인구와 돈이 몰리는 상황에서 새로운 경제 활성화를 위한 트리거로서도 매우 중요하다.
최근 박형준 부산시장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충돌한 영상이 화제였다. 박 시장이 이 대표와의 비공개 회담 후 굳은 표정으로 취재진과 만나 “산업은행 이전이 단순히 하루이틀에 걸친 사안이 아니고 2년여 동안 부산 시민들이 요청하고 심지어 부산 민주당도 함께 요청한 사안인데 일언반구도 하지 않은 것은 대단히 안타깝고 실망스럽다”고 말한 영상이다. 비슷한 영상 클립이 많았는데 대부분 수만 건의 클릭을 기록했다. 이는 산업은행 이전에 대한 지역의 관심이 크다는 것을 방증한다. 아마 전남도지사나 전북도지사가 같은 식으로 반응을 했다 해도 이 같은 화제성은 따놓은 당상일 것이다.
같은 논리로 반대라니 차라리 잘됐다. 그동안 껌으로도 싸웠던 지역 감정을 해소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산업은행, 농협중앙회의 본사 이전은 국가 균형발전이라는 명분도 같고 지역 경제가 살아난다는 기대 효과도 같다. 이를 계기로 부산과 호남 지역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수도권의 논리에 대응할 수도 있겠다. 부산과 호남이 함께 벌이는 이색 이벤트도 좋을 것 같다. 적의 적은 동지라는 말을 넘어 강력한 우군을 만난 느낌이다. 에어부산의 분리 매각도 어려워 보이고, 글로벌허브도시 특별법의 통과도 요원하지만 이번에는 꼭 보여주기를 바란다. 우리가 롯데껌이든 해태껌이든 껌 좀 씹던 언니야 오빠야들이라는 것을.
2025-03-17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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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다시 원점이라니… 국민들이 견딘 1년은 무엇인가
응급실행은 남의 일이라고 치부했는데, 그건 자만이었다. 기어이 일은 터졌다.
긴 연휴 마지막날 아이의 상태가 평소와 좀 달랐다. 학교 가기 싫어 꾀병을 부리나 했다. 퇴근길에 30분 이상 떨어진 한 아동병원으로 가고 있다는 연락을 받자마자 병원으로 황급히 발길을 돌렸다. 의사는 “100% 충수염 증세”라며 당장 큰 병원으로 갈 것을 권유했다. 의사는 의료 대란 상황을 안타까워했다. “평소 같으면 큰 일도 아닌데…. 우선 응급실 전화부터 돌려보세요. 헛걸음하면 큰일이니까요.”
살면서 가장 많은 식은땀을 흘린 시간이었다. 흔한 수술이라고는 하지만, 아이 수술을 맡을 의사가 없었다. 심지어 어린이 전문 병원인데도 수술은 불가능했다. 이리저리 닥치는 대로 전화를 돌리던 와중에 한 병원 응급실로부터 “일단 데려와보라”는 말을 들었던 순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모처럼 만난 지인들에게 이를 무용담처럼 말하자 다들 한마디씩 거들며 각자 경험담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바로 곁에서 죽음을 겪어냈다는 지인 앞에서 난 그저 행운아였다. 오고 가는 위로 속에 마무리는 한결 같았다. “견뎌내야지 별 수 있나. 아프지 말자.”
그렇다. 지난 1년여 간 국민들은 제때 치료받지 못하는 불편함과 치료받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감에 시달렸다. 국민이 치른 희생은 수치로도 확인된다. 서울대 의대 의료관리학교실 교수 출신인 김윤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건강보험공단 자료를 토대로 분석한 결과 지난해 2~7월 의료공백 기간 ‘초과 사망자’ 수는 3136명이다. 고령 환자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한계가 있지만, 의료 대란이 없었다면 잃지 않았을 목숨들이다. 예산은 또 어떤가. 의료 공백을 메우기 위해 지난해 정부가 쏟아부은 예산만 3조 3000억 원에 달한다.
국민들이 이처럼 고통과 희생을 감내한 것은 의사 추가 양성의 중요성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현 정권을 지지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의대 증원은 꼭 필요하다고 지지 의사를 밝힌 시민단체들도 상당수다. 필수·지역의료가 위기를 맞은 지역에선 지역의사제와 공공의대 도입과 관련한 법안 통과에 기대를 걸기도 했다.
이 와중에 지난해 말 전국 의과대학에서 수시 합격자가 배출됐다. 1509명이 늘어난 4567명이 의대 신입생에 이름을 올렸다. 1998년 제주대 의대 신설 이후 27년 만에 증원이 실현되면서 의료 전반에 대한 개혁 논의의 길도 열리는 듯했다. 하지만 지난 7일 정부가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 등의 건의안을 수용해 의대생 학업 복귀를 전제로 내년도 의과대학 모집 인원을 증원 전인 3058명으로 되돌리기로 결정하면서 또다시 격랑에 휩싸였다.
의대생들은 증원이 ‘완전 백지화’가 아니라는 점을 들며 여전히 학교 밖에 머물러 있다. 지역의료 강화, 필수의료 수가 인상 등을 포함한 ‘필수의료 정책 패키지’ 철회는 물론 향후 의대 정원 축소까지 요구하는 실정이다. 국민들의 반발은 당연지사.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입장문을 통해 국민과 환자를 기만하는 정부의 행태가 개탄스럽다고 일갈했다. 보건의료노조 역시 “2026년 의대 정원이 동결된다면 앞으로 어떤 의료 개혁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1509명 의대 증원은 국민들이 견딘 지난 1년에 대한 보상의 전부가 될 수 없다. 전부를 만족시킬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국민을 최우선에 둬야 했다. 국민은 여전히 빠져 있는 정부 대응, 국민만 고통을 짊어지게 됐다.
2025-03-10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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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극우의 무거움
참 무거워 보인다. 자신만의 신념과 가치관에 사로잡혀 있는 모습이. 족쇄에 채여 감옥에 갇힌 듯한 느낌마저 든다. 탄핵 정국에서 극우 세력이 보인 태도가 그렇다. ‘계엄 정당성’ ‘탄핵 반대’ 라는 주장에 매몰돼 다양한 관점이나 의견을 수용해야 하는 여유를 잃어버렸다.
극우 세력의 모습에서 자연스럽게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속 테레자가 떠오른다. 쿤데라는 이 작품에서 “가벼운 삶과 무거운 삶 중 무엇이 더 나은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여기서 ‘무거움’ 은 고집스럽게 신념과 규범을 절대적으로 숭배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특정한 가치관을 절대적으로 고수하다 보면 결국 다른 의견을 받아들일 여지가 사라진다는 것이 쿤데라의 메시지다.
소설 속 테레자는 사랑을 삶의 필연적이고 절대적인 책임으로 받아들인다. 그녀는 이를 숙명으로 여기며, 관계 속에서 무거운 짐을 스스로 짊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오히려 자신을 옭아매는 결과를 초래한다. 사랑이라는 무게에 짓눌려 결국 자유를 찾지 못하고, 삶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으로 몰리며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다.
오늘날 한국의 극우 세력도 이와 다르지 않다. 이들은 자신들의 신념을 절대적 정당성으로 간주하며, 특히 비상 계엄의 타당성을 주장하고 탄핵 반대를 외친다. 그들의 태도는 마치 그리스 신화 속 시지푸스를 연상시킨다. 시지푸스가 감당하기 힘든 무거운 바위를 끝없이 밀어 올리는 것처럼, 극우 세력은 편협한 사고라는 무거운 바위를 짊어지고 간다.
신념이 지나치게 무거우면 다양한 부작용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에서 테레자는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지만, 한국의 극우들은 사회적 폭력으로 그 무게를 표출한다. 폭동과 난동을 일으키며, 심지어 다른 사회 구성원을 향한 가학적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이들은 한국 사회가 쌓아온 헌법과 사법 체계를 무시할 뿐만 아니라, 법 질서에 직접적인 위협을 가하기도 한다.
역사에서 이러한 극단적 사고가 파시즘과 나치즘 같은 광란의 시대를 불러온다는 점은 이미 증명됐다. 이런 경직된 사고방식이 집단적으로 확산되면 개인의 신념이 절대적 진리가 되고, 이는 강경한 이념 대립으로 이어져 전체주의로 발전할 가능성이 커진다.
이 문제는 극우 세력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현실에서도 사고의 경직성은 개인을 무너뜨린다. 흔히 말하는 ‘꼰대’ 와 ‘갑질’ 같은 용어도 여기서 비롯됐다. 자신의 가치관만을 기준으로 삼아 타인을 평가하고 억압하는 태도가 이러한 문제를 낳는다. 이러한 경직성이 심화되면 직장 내 폭력, 권위주의적 조직 문화, 수직적 구조 강화 등으로 이어질 위험이 크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극우 세력이나 꼰대들이 스스로 잘못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자신이 가해자라는 사실조차 모른 채, 오로지 자신의 신념에 짓눌려 있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지속되면 결국 피해자들만 상처를 짊어지고 살아가야 한다. 이러한 집단은 사회와 조직, 그리고 개인에게 짐이 될 뿐이다.
좀 가벼워지자. 가벼워지면 다양한 생각과 가치관을 볼 수 있다. 가벼움은 절대성에서 벗어나는 첫 걸음이다. 지나친 신념의 무게는 극단주의를 낳지만, 사회가 건강하게 발전하려면 다양한 시각을 인정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신념의 무게를 내려놓을 때, 우리는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
2025-03-03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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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통영-여수 '최초 통제영' 논쟁 이참에 마침표 찍자
경남 남해안의 항구 도시 통영은 조선시대 경상·전라·충청 지역 수군을 통치한 삼도수군통제영(통제영)이 있던 곳이다. 지금으로 치면 대한민국 해군본부다. 통영이란 지명도 통제영에서 유래했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선조 25년) 한산대첩을 통해 제해권을 장악한 전라좌수사 이순신 장군은 이듬해 해로 방어 최대 요충지인 통영 한산도로 군영을 옮겼다. 남해안 서쪽에 치우쳐 방어에 취약한 전라좌수영의 지형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다. 이후 초대 통제사로 제수돼 3년 8개월간 한산도에 주둔하며 조선 수군을 이끌었다. 학계는 이를 근거로 한산 진영을 최초 통제영으로 인정해 왔다.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역시 ‘통제영이란 충청·전라·경상도의 삼도수군을 통할하는 통제사가 있는 본진으로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의 한산진영이 최초’라고 기술해 놨다.
그런데 1983년 여수대학교 문영구 전 교수의 ‘임진왜란 중 여수 전라좌수영은 통제영’ 논문 발표 이후 전남에서 ‘최초 통제영은 여수’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최초 통제영=통영 한산도’가 이미 정설로 굳어진 탓에 기대만큼의 반향을 얻지 못했다.
그러다 2021년 여수를 중심으로 역사바로잡기 추진위원회가 꾸려지고 이듬해 범시민연대까지 출범하면서 한동안 잠잠하던 역사 논쟁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각종 세미나와 지방의회 공론화 시도가 잇따랐고, 작년 10월과 11월 전남도의회와 여수시의회가 ‘빼앗긴 최초 삼도수군통제영 여수 역사바로잡기 촉구 결의안’을 연거푸 채택하면서 제대로 불을 댕겼다.
이들은 △임진왜란 무렵에는 통제영이란 용어가 없어 ‘본영’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는 점 △제1대 이순신부터 제4대 이시언 통제사까지 전라좌수사로 하여금 삼도수군통제사를 겸하도록 했다는 사실 △한산도는 최소한의 필수적인 기능을 지닌 임시 전초 전진기지로 병참, 군수물을 거의 모두 본도인 전라도에서 충당했다는 주장 등을 근거로 최초 삼도수군통제영은 전라좌수영 본영인 여수라고 주장했다. 여기에 (사)여수종고회, (사)여수여해재단, (사)여수진남거북선축제보존회 등 시민단체가 가세해 논란을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
결국 ‘대응할 가치가 없다’며 외면하던 경남 지역도 맞대응에 나섰다. 통영시의회는 지난 14일 ‘전남과 여수시의 최초 삼도수군통제영 침탈행위 및 역사 왜곡 중단 촉구 결의안’을 채택하고 “역사적 기록과 고증이 명백함에도 왜곡된 주장을 펼치는 전남도와 여수시는 통영시민에게 공식 사과하고 국가유산청과 경남도는 재발 방지책을 마련하라”고 촉구했다. 전남도 발끈했다. 여수종고회는 지난 18일 기자회견에서 “적반하장식 역사 왜곡을 중단하라”고 맞받았다. 여수시의회도 재반박 결의안 채택을 예고했다.
역사는 관점에 따라 이견이 존재하는 영역이다. 지금처럼 여론전을 앞세우면 이성적 사고보다 감성적 욕망에 매몰될 공산이 크다. 이대로는 해묵은 지역감정까지 자극해 영호남 갈등으로 번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그렇다고 어영부영 넘어가면 갈등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학술대회든 끝장토론이든 양측이 수긍할 수단과 방법을 통해 더는 재론의 여지가 없도록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
2025-02-24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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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엄청난 세대'가 기다리고 있다
아들과의 전쟁은 스마트폰이 생기면서 시작됐다. 초등학생 아들은 눈물을 보이며, 친구들과 연락이 안 돼 함께 놀 수 없다며 폰을 원했고 학원을 빠지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뒤 폰을 사줬다. 하지만 아들은 사용 시간 제한을 푸는 방법을 알아내 밤새도록 앱과 게임에 몰두했다. 낮에도 친구들과 노는 게 아니라 놀이터 구석에 죽치고 앉아 게임을 하느라 학원은커녕 전화도 일절 받지 않았다.
나중엔 데이터도 꺼둬 위치 추적도 되지 않았다. ‘현질’ 할 돈이 모자란다며 투덜대는 아들 생각에, 청소년 사이버 도박이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할 때마다 심장이 벌렁거린다. ‘요즘 아들’을 둔 ‘보통 엄마’ 이야기다.
실제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만 10~19세 청소년 10명 중 4명(40.1%)이 스마트폰 과의존 위험군에 속했다.
〈불안세대〉의 저자 조너선 하이트는 2010년대 초반부터 스마트폰 기반 아동기가 시작됐고 이 때부터 청소년들의 정신 질환 비율이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사회심리학자인 저자가 든 네 가지 해악은 사회적 박탈, 수면 박탈, 주의 분산과 중독인데, 이는 그로부터 불과 몇 년 전인 2007년 스티브 잡스가 최초의 아이폰을 소개하던 당시에는 감히 상상할 수 없던 것들이었다. 저자는 전두 피질(자기 통제와 만족 지연, 유혹에 대한 저항에 필수적 역할을 담당)이 아직 발달하지 않아 의지력이 약하고, 또래 압력에 쉽게 휩쓸리며, 조종에 취약한 사춘기 전후 아동들에게 스마트폰을 주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1996년 이후 태어난 세대가 불안세대가 된 데에는 현실 세계에서는 과잉보호를 하고, 온라인에서는 오히려 과소보호를 하는 부모의 뒤바뀐 태도 탓도 있다고 했다. 저자는 우리가 저지른 실수를 되돌리기 위해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전까지는 스마트폰 사용을 금지하고, 16세 이전까지는 소셜 미디어도 차단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스마트폰을 손에 쥐는 ‘포노 사피엔스’가 대세가 된 세상에서 그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 속도는 더디기만 하다. 사실 규제와 제재만이 능사인지, 현실적으로 가능한지도 의문이다.
더 큰 문제는 앞으로다. 10년 뒤, 아니면 더 가까운 5년 뒤 우리는 이 글의 스마트폰 자리에 인공지능(AI)를 대신 써넣어야 할지도 모른다.
역사학자이자 철학자인 유발 하라리 교수는 최근 저서 〈넥서스〉에서 “AI는 우리 종의 역사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의 진화 경로를 바꿀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미국 미래생명연구소 맥스 테그마크 소장 또한 “가장 큰 문제는 많은 권력자가 우리가 AGI(모든 분야에서 인간과 동등하거나 더 뛰어난 AI)를 어떻게 제어할지 알아내는 것보다 더 빨리 AGI가 구축될 것이라는 걸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라며 “최악의 경우 미국이나 중국 기업이 통제권을 잃게 되고, 그 이후에는 지구가 기계에 의해 운영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AI 발전에 대응해 ‘인간의 통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마련된 ‘AI 행동 정상회의’가 올해 3회째를 맞았지만 AI 패권 경쟁을 위한 각축장이 되고 있을 뿐 AI 안전 장치를 마련했다는 희소식은 들려오지 않는다.
2025-02-17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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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그래도 희망은 있다
돌이켜보면, 경제부 기업 담당을 맡은 이래 좋은 소식을 쓴 기억이 그리 많지 않다. 지난 한 해동안 기업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 현안 가운데 해결된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금방이라도 통과될 것 같았던 ‘글로벌 허브도시 특별법’은 햇수로 두 해를 넘겼다. 2023년 엑스포 부산 유치가 실패로 끝나면서 상심한 지역 민심을 달래기 위해 마련됐지만 21대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정부 입장을 고려해 차 떼고 포 뗀 특별법을 재차 마련했지만, 이번 국회에서도 관심이 없다. 이미 행정 절차까지 마무리된 산업은행 본점 부산 이전은 어떠한가. 산업은행법에서 ‘부산’ 단 두 자를 넣지 못해 2년 가까운 시간을 흘려보냈다. 국회가 국가균형발전이라는 대의명분에 충실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에어부산 분리매각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2020년 한국 항공 경쟁력 강화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정부가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기업결합을 추진 이래 에어부산의 운명은 가시밭길이었다. 이들 자회사의 통합LCC 본사를 지역에 두겠다는 정부의 약속은 휴지 조각이 됐다. 지역과 함께 성장한 지역 거점 항공사를 지키기 위해 시민 사회가 분리매각을 외쳤건만 돌아온 것은 외면이었다.
이에 지역 경제는 더욱 얼어붙었다. 수년째 고환율·고금리·고물가 등 3고가 이어진 데다 지난해 말 12·3 비상계엄에 따른 윤석열 리스크까지 더해지면서 일촉즉발의 위기에 내몰렸다. 이 와중에 트럼프 2기가 출범하고 관세 전쟁이 확전되면서 위기는 더욱 커졌다. 기사를 준비할 때마다 마음이 천근만근이었다. 지역 경제, 나아가 한국 경제를 바라보는 우려의 시선들은 가늠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웅숭깊었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고 말하고 싶다. 지역 경제를 이끄는 향토 기업들이 대내외 리스크를 이겨내기 위해 전력투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역 대표 기업 HJ중공업은 1년 만에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 HJ중공업의 지난해 영업이익은 93억 원으로, 전년도 1088억 원 적자에서 흑자로 돌아섰다. 당기순이익 역시 전년도 1143억 원 적자에서 87억 원 흑자 전환한 것으로 잠정집계됐다. 올해도 최첨단 LNG 벙커링선 수주를 알리며 순항을 예고한다. MRO(유지·보수·운영) 사업 역량을 토대로 미국 진출도 꾀하면서 실적 상승세가 이어질 것으로 기대된다.
올해 초 대규모 무상증자를 통해 주주들에게 이익을 환원한 SNT모티브는 지난달 21~24일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총기·사냥·아웃도어 박람회 ‘SHOT Show 2025’에서 미국 총기시장 진출을 예고해 현지의 큰 관심을 모았다. SNT모티브는 지난해 미국 현지 법인 ‘SNT디펜스’를 설립, 미국 네바다주 현지에 공장을 세우고 현지 영업을 준비 중이다.
부산에 본사를 둔 완성차 업체 르노코리아는 국내 업계 최초로 단일 생산 라인에서 내연기관과 전기차를 동시 생산할 수 있는 설비를 완비하고 이번주 본격적인 차량 생산에 들어간다. 부산에코클러스터 설립 등 미래차 전환을 위한 단계를 차근차근 밟아나가면서 지역 경제계에 긍정적인 시그널을 전한다.
선보공업, 화승, 동원개발, 동일, 태웅 등 부산형 착한 결제 캠페인에 동참하면서 지역 경제 살리기에 힘을 보태는 향토 기업들도 줄을 잇는다. 부산 기업의 구심점인 부산상의는 정치계, 시민사회와 함께 산업은행법 개정을 촉구하는 국회 청원에 돌입했다. 이들의 노력이 올해는 새로운 결실로 이어졌으면 한다. 시민들에게 경제 낭보를 전할 날, 간절히 바라본다.
2025-02-10 [17: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