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시선으로] 양육의 사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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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현 연세대학교 글로벌한국학연구소 연구교수

자기 자식이면 마음껏 때려도 되던 시절이 있었다. 2021년 1월 26일 민법 제915조에 명시된 친권자의 징계권이 폐지되기 전까지는 그랬다. 이것이 폐지되었다는 것은 다음 두 가지를 의미한다. 첫째로 아동·청소년의 인권이 이전보다 더 두터이 보장되는 길이 열렸음을 뜻하고, 둘째는 그들을 양육할 의무가 있는 친권자 스스로 그 훈육의 방도를 무책임한 폭력에 맡기지 않고 그것을 궁리할 책임이 주어졌음을 뜻한다.

사람이 알아서 큰다는 속설이 있지만, 그것은 사람이 자라면서 누군가에게 받는 양육의 몫을 삭제할 때 비로소 가능한 이야기다. 한 사람이 일견 쉽게 자란 걸로 보인다면, 그 사람의 ‘쉬운’ 성장 아래 어떠한 노동이 들어가는지를 이 사회가 아직도 모르거나 별반 알고 싶지 않아한다는 증거다. 근래 TV에 방영되는 ‘금쪽이’들의 사례는, 남의 가족 사정을 왜 까발리냐든가, 결혼하여 임신·출산·육아를 치르면 자칫 저렇게 되나 싶은 공포 이전에, 육아와 가정교육과 관련된 지식들이 여태껏 얼마나 사회화되지 못한 상태에 머물러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그것은 가정 내의 일이란 이유로 사적인 폭력이 친권의 이름 아래 방조되었을 시절에는 딱히 필요하지도 주목되지도 않았을 내용들이다. 우리 사회가 때리지 않는 방식으로 자식을 훈육하는 법을 본격적으로 고민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사람이라면 이 정도는 알겠지’ 라는 것을 부러 가르치는 것이 교육이다. 우리 모두는 그런 교육과 훈육을 받으며 자랐다. 살인하면 안되고, 강간하면 안되고, 도둑질하면 안되고, 그건 사람이 타고 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가르쳐 배우는 것이고, 그런 규범들은 그저 체득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인도와 돌봄과 반면교사가 필요하다. 이는 비단 부모자식의 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인간은 모두가 내 옆의 인간을 힘겹게 버티고, 여러 시행착오 가운데 사람이 마땅히 치러야 할 무언가의 도리를 학습한다. 그걸 때리고 맞지 않는 방식으로 배우고 훈육하는 방식을 필사적으로 강구하고 체득하고, 그것을 서로가 서로에게 등 두드리며 권장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나아가 우리 후대 스스로 인간이 되기 위해 서로를 마땅히 훈육해야 한다. 거기엔 반드시 얼마간의 비인간적인 제한과 권력이 깃들고, 그것을 감수한 채 손수 남을 돌보기로 결심하는 궂은 일이 바로 훈육이다. 그것이 아무 도움 없이 그저 굴러가는 일로 치부되지 않고 거기에 어떤 곤경과 노고가 뒤따르는지에 대한 논의가 지금보다 더 많이 필요하다. 폭력이 무시로 있던 시대의 다음 세대에 놓인 우리는, 맞지 않고도 인간으로 자랄 수 있음을, 때리지 않고도 인간으로 훈육할 수 있음을 서로에게 증명해야 하는 세대다. 퇴로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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