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철의 정가 뒷담화] 사과가 부재한 시대
정치부 기자
정치인에게 구설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숙명과도 같다. 본인은 물론 가족 관련 비위 의혹으로 도마에 오르는 경우가 적지 않으며, 그 의혹이 사실과 달라 억울한 경우도 많다. 그러나 대한민국 헌정사의 주요 지도자들은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먼저 국민 앞에 고개를 숙이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변명이나 정당화보다는 진정성 있는 사과가 대중에게 더욱 진실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지난 21일, 서거 10주년을 맞은 고 김영삼(YS) 대통령이 그러했다. 1997년, 퇴임을 1년여 앞둔 시점에 차남 현철 씨가 한보 특혜대출 비리 사건에 연루됐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당시 YS는 “아들의 허물은 곧 아비의 허물”이라며 “만일 제 자식이 이번 일에 책임질 일이 있다면, 응분의 사법적 책임을 지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고 김대중(DJ) 대통령도 다르지 않았다. 2002년 차남 김홍업 씨와 3남 김홍걸 씨가 비리 의혹에 휩싸였을 때, DJ는 “자식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책임을 통렬하게 느껴왔으며, 국민 여러분께 마음의 상처를 드린 데 대해 부끄럽고 죄송하다”고 고개 숙였다.
두 사례는 어찌 보면 국가 지도자로서 당연한 처사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정치 현실에서는 이런 ‘당연함’을 기대하는 것조차 사치가 되어 버렸다.
최근 부산에서는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직을 상실한 전직 A 구청장이 각종 행사장에 모습을 드러낸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히 퍼지고 있다. 심지어 주요 인사가 불참할 경우, 그 자리에 대신 앉는다는 소문까지 돌고 있다. 구정 공백을 초래한 그의 모습을 바라보는 주민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상대 진영 인사를 ‘포용한다’는 명목으로 직원을 채용한 B 정치인에 대한 이야기도 뜨겁다. B 정치인은 관련 기사를 작성한 기자에게 “아무런 불만도 듣지 못했다”, “누가 문제를 제기하느냐”며 긴 시간을 따져 물었다. 그가 내년 지방선거에서 특정 인사 C 씨를 지원하기 위해 C 씨의 친형과 가까운 인물을 영입했다는 소문을 그 또한 들었을 텐데도 말이다.
A의 경우는 법적 사안이고 B의 경우는 정치적 판단의 영역이지만, 당사자가 당당히 행동한다는 점에서 두 경우는 닮았다. 공직선거법 위반 정도는 일상다반사라 생각할 수도 있고, 인사(人事)의 문제로 시비를 거는 일에 기분이 상할 수도 있다. 공직선거법 위반의 경우 이미 그 대가를 치렀으니 뭐가 문제냐 싶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정치인이라면 떳떳함을 내세우기에 앞서 우선 고개를 숙여야 한다. 정치인이 응당 가져야 할 정치적, 도덕적 책임의 무게가 법적 책임 이상으로 무겁기 때문이다. 국민이 그들에게 바라는 정치적 혹은 도덕적 기준이 범부의 그것에 비해 다소 높다고 해서 “억울하다”는 소리부터 나온다면, 단언컨대 그에게는 정치인으로서의 자격이 없다.
이은철 기자 euncheol@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