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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APEC 앞두고 미중 무역 전쟁 격화 왜?
이달 31일과 11월 1일 경북 경주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앞두고 미국과 중국의 무역 전쟁이 다시 불붙고 있다. 중국은 미국을 겨냥해 희토류 통제를 대폭 강화했고, 미국은 대(對)중국 100% 추가 관세로 맞불을 놓았다. 중국의 희토류 수출 통제 강화 선언으로 붙은 불은 해운·조선과 대두(콩) 등으로 번지며 양국 간 전선은 점점 확대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6년 만에 가질 것으로 예상되는 대면 회담을 앞두고 ‘강 대 강’ 대치 상황으로 흐르는 것이다. 서로에 대한 양국의 압박은 협상에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한 ‘기싸움’으로 해석되지만, 만일 물밑 조율에 실패해 ‘전면전’으로 비화할 경우 세계 경제에 큰 격랑이 예상된다.
■ 미중 치열해지는 ‘샅바싸움’
미중 무역 전쟁은 올 1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하며 본격화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4월 중국 등을 포함해 각국에 상호관세 조치를 발표하자 중국은 바로 희토류 7종 등 핵심 광물에 대한 수출 통제에 나서며 보복했다. 두 나라는 5월에는 서로 관세를 낮추기로 하며 휴전에 들어갔지만, 미국은 8월 ‘위구르족 강제노동 금지법(UFLPA)’에 따라 중국산 철강·구리·리튬 등에 대한 단속 강화를 발표하는 등 공세를 재개했다. 미국은 이후 중동 정세를 이유로 군용 드론 부품 조달에 관여한 중국 기업들을 제재 대상에 포함시키거나, 반도체 설계 소프트웨어의 중국 수출을 제한했다가 해제하는 등 중국 기업에 대한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이달 들어 중국의 대반격이 시작됐다. 수세적 방어에서 벗어나 미국의 약한 고리를 정확하게 파악해 정교한 공세에 나선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희토류 무기화’다. 희토류는 반도체, 전기차, 전투기 등의 부품에 핵심 소재로 쓰이는 전략 광물이다. 세계 희토류 공급망을 장악한 중국은 희토류를 대미 무역 협상에서 요긴한 무기로 사용하고 있다. 중국은 세계 희토류 채굴의 70%와 희토류 가공 능력의 90%를 점유하고 있다.
중국은 지난 9일 희토류의 채굴·제련·분리 등 생산 기술까지 당국 허가 없이 수출할 수 없도록 통제를 강화했다. 미국이 자체 희토류 개발을 시도하자 제조 기술까지 틀어쥔 것이다. 중국이 희토류 채굴·가공 기술 통제에 나서면 미국은 희토류 자체 개발과 생산은 어려워진다. 미국은 첨단 무기와 전기차, 반도체 생산 등 핵심 산업에 필수적인 희토류를 안정적으로 조달할 방안이 거의 없는 상태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를 문제 삼아 지난 10일(현지시간) 기존 관세에 100%를 추가하는 초고율 관세와 핵심 소프트웨어 수출 통제 조치를 발표하며 중국을 압박했다.
희토류뿐만 아니라 대두(콩)도 미중 무역 전쟁의 뇌관으로 떠올랐다. 미국산 대두 최대 수입국이었던 중국은 무역 전쟁이 격화되면서 5월 미국으로부터 주문을 아예 끊었다. 중국은 전 세계 돼지고기 생산·소비의 절반 이상을 담당하는데, 돼지 사료의 핵심이 대두다. 자체 생산량이 턱없이 부족해 80%를 수입에 의존한다. 중국은 대두의 전략적 활용을 치밀하게 준비해 왔다. 대미 수입 의존도를 낮추고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 남미 국가에서 수입량을 늘렸다. 중국 판로가 막히면서 미국의 올해 대두 수출은 23%가량 급감하고, 대두 가격은 폭락했다. 미국 농가들의 피해와 불만도 커지고 있다. 대두는 미국의 최대 농산물 수출 품목이자 가장 돈이 되는 작물이다. 대두의 단위 면적당 순이익은 밀의 5배에 달한다. 게다가 미국의 주요 대두 생산지는 트럼프의 강력한 지지 기반 지역인 중서부의 일리노이, 아이오와, 미네소타, 네브래스카, 인디애나주 등이라는 점이다. 트럼프 대통령으로서는 내년 11월 중간선거의 승리를 위해서라도 중국을 압박해야 하는 상황이다.
■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한국
미중 통상 갈등이 다시 커지면서 한국의 성장 동력인 조선, 반도체, 배터리 분야도 큰 영향을 받을 수 있다. 당장 국내 조선업 분야에 불똥이 튀었다. 미중 간 고래 싸움에 한국 기업의 피해가 발생하는 것이다. 중국은 지난 14일 한화쉬핑(한화해운), 한화필리조선소, 한화쉬핑홀딩스, 한화오션USA인터내셔널, HS USA홀딩스 등 한화오션의 미국 내 자회사 5곳을 겨냥한 제재를 발표했다. 미중 무역 전쟁 여파로 한국 기업이 중국의 제재 대상이 된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들 기업은 앞으로 중국 조직·개인과의 협력·거래가 전면 금지된다. 중국 정부는 제재 이유로 이들 회사가 미국 정부의 해사·물류·조선업(무역법) 301조 조사 활동을 협조, 지지한 것을 들었다.
이번 조치는 ‘강 대 강’으로 치닫던 미중 해운·조선 갈등의 연장선상에서 나왔다. 앞서 미국은 4월 발표한 무역법 301조 조사 최종 조치를 적용해 14일부터 중국 해운사가 소유 및 운용하는 선박에 대해 t당 50달러(약 7만 2000원), 중국산 선박에 대해 t당 18달러(약 2만 5000원)의 수수료를 부과하고 있다. 외국산 자동차 운반선에 대해서도 t당 46달러(약 6만 6000원)의 입항 수수료를 물리기 시작했다. 이에 맞서 중국도 미국 기업이 소유했거나 건조한 선박에 t당 400위안(약 8만 원)의 입항 수수료 부과에 나섰다.
이어 중국은 이례적으로 개별 기업인 한화오션 미국 자회사들을 직접 겨냥한 제재를 내놓았다. 한국이 미국의 조선 협력 최대 파트너국으로 부상하고, 특히 한화오션이 이를 주도하면서 중국의 경계심을 자극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한화오션은 한미 조선업 협력 사업인 ‘마스가(MASGA·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 프로젝트의 핵심 참여 업체다. 8월 이재명 대통령이 한화 필리조선소를 방문해 미국 정부 발주 선박 명명식에 참석하는 등 한미 조선 협력의 상징이 됐다. 이번 제재가 한미 조선협력이 강화되는 시점에 해운·조선 경쟁국인 한국을 견제하고, 한미 공급망 결속에 균열을 내기 위한 전략적 견제라는 분석이 나온다. 입항 수수료, 관세 등을 둘러싼 미국과의 기싸움 속에서 미국의 동맹국인 한국을 우회적으로 때렸다는 것이다.
특히 이번에 한국 조선업이 미중의 패권 경쟁 속에 ‘양자택일’을 강요받는 상황이 확인된 만큼 정교한 대응 전략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국 조선업을 추격하며 조선업을 국가 전략산업으로 키운 중국이 미국의 해군력 재건을 견제하기 시작하면서 지정학적 리스크로 확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조선업은 이제 단순한 산업이 아니라 국제 안보와 외교 전략의 연장선에 있는 산업으로 떠오른 셈이다.
중국의 이번 제재는 한미 경제 협력에 경고 메시지를 보내는 상징적 의미가 크다. 하지만 산업계는 희토류를 고리로 반도체, 배터리, 이차전지 제품 등을 추가로 문제 삼을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반도체, 배터리, 철강, 기계 부품 분야는 현지 투자를 진행하는 등 미국과 관계가 깊으면서 중국과의 거래 규모도 큰 만큼 제재 범위에 들어가면 상당한 타격이 발생할 수 있다.
■ 미중 협공에서 살아남으려면
이번 미중 무역 전쟁이 단기 충돌에 그칠지, 장기 재격돌로 이어질지는 당분간 지켜봐야 한다. 미중 간 신경전은 APEC 정상회담과 다음 달 1일 종료되는 미중 관세 유예 등을 앞두고 힘겨루기라는 분석도 제기된다. 실제로 양국은 관세 부과나 희토류 수출 통제 등 주요 조치의 적용 시점을 모두 다음 달 1일 이후로 잡아놨다. 미중 무역 갈등이 파국으로 갈 경우 결국 막대한 경제적 손실로 이어지기 때문에 양국이 어떤 식으로든 돌파구를 찾을 것이란 전망이 우세한 편이다. 만일 양국의 충돌이 현실화하면 단순한 무역 마찰을 넘어 글로벌 공급망과 무역 질서 근간을 뒤흔들 수 있다.
이럴 경우 두 나라에 대한 경제 의존도가 심한 우리나라로서는 실물 경제는 물론 금융·외환시장에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미국과 중국의 협공에서 질식하지 않으려면 양국에 대한 과도한 의존에서 벗어나야 한다. 올해 상반기 한국 수출에서 미국과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이 각각 36%에 이르고, 수출 품목도 자동차, 반도체 등에 몰려 있다. 한국은 세계 10대 수출국 중 수출 품목과 시장 편중이 가장 심하고, 중국에 대한 공급망 의존도가 높다. 미중 갈등 장기화에 대비하려면 이러한 구조부터 개선해야 할 것이다. 강대국 갈등의 샌드위치가 된 한국의 딜레마는 쉽게 해소되지 않을 것이다. 정부와 기업의 긴밀한 소통과 외교적 노력, 민첩한 대응을 통해 위기를 돌파하고 새로운 기회를 찾아야 한다. 이번 APEC 정상회의를 그 무대로 잘 활용하길 바란다.
2025-10-1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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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몰래 AI 쓰는 당신과 ‘사짜 직업’의 미래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바둑이 두 배로 강해지는 책>은 일본에서 활동하던 바둑 기사 조치훈이 1985년 출간한 필살기 모음집이다. ‘두 점 머리는 두드려라’ 등의 바둑 격언을 소개한 뒤 그에 따른 행마 전략을 알려주는 식이다. 저자가 서문에서 밝힌 책 제목의 이유가 흥미롭다. 바둑을 배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몰래 실력을 배가시키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바둑은 맞수가 있고, 자존심이 걸린 경우가 많아 갑자기 일취월장해 상대를 깜짝 놀라게 하고 싶은 심리를 간파한 제목이었다.
인공지능(AI) 자동화 도구 사용에서도 남몰래 성과를 내고 싶은 직장인들의 속내가 투영된다. 한국의 챗GPT 유료 구독자가 미국에 이어 전 세계 2위일 만큼 AI는 일상이 됐다. 그런데 직장 내 상급자나 동료 사이에 AI 활용 여부를 안 밝히는 문화는 현실적으로 존재한다. 직장 내 뚜렷한 원칙이 없는 경우가 많고, 굳이 드러내지 않으려는 정서가 겹친 결과다. 최근 미국 직장인 대상 설문 조사에서는 응답자 3분의 1이 AI 도움을 받는다는 사실을 숨기는 것으로 나타났다.
■ 美 직장인 36% “AI는 비밀 경쟁력”
미국 포춘지는 최근 직장인들이 업무에 AI를 활용하면서도 숨기는 이유가 ‘비밀 경쟁력(Secret Advantage)’이라고 믿기 때문’이라고 보도했다. 업무 자동화 IT 회사인 이반티(Ivanti)의 조사를 인용한 이 보도에 따르면 AI 활용을 감추는 가장 큰 이유는 남몰래 동료보다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서(36%)였다. AI 의존도가 드러나면 실직할 수 있다는 걱정 때문에 숨긴다(30%)는 응답에서는 일터를 휩쓸고 있는 AI 공포마저 읽힌다. 미국 글로벌 IT 기업에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들이 하던 작업에 AI가 투입되면서 대규모 해고가 발생하는 등 거의 모든 산업 분야의 일자리에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는 사정 탓이다.
산업 현장만큼 교육계도 혼란스럽다. 어떤 대학은 과제 제출에 생성형 AI 사용을 막지만, 다른 곳은 권장한다. 고교 교사는 생기부 작성 때 챗GPT나 구글 제미나이를 활용하지만 이를 교장, 교감에 노출하기를 꺼린다. 학생들은 쉬쉬하며 AI를 활용해 과제를 작성한다. 부모 입장에서는 속이 탄다. 디지털 네이티브도 모자라 AI 네이티브 세상에 살아갈 자녀의 진로가 고민이다. 많은 연구에서 의사, 변호사, 판사 등 소위 ‘사짜 직업’이 AI에 가장 노출되어 있다는 결과가 속속 나왔기 때문이다.
■ AI 시대, 아이들은 무엇을 배워야 하나
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수가없다’는 로봇으로 자동화된 공장에서 쫓겨난 한 가장의 직장 복귀 사투를 그린다. 기계화·자동화 시대의 어두운 면을 드러낸 블랙 코미디다. 영국 BBC가 ‘암울하면서도 웃긴 코미디’라고 논평한 이유다. 다만, 그저 픽션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 닥친 일이라 웃기지만 웃을 수만은 없는 이야기다.
‘어쩔수가없다’는 산업용 로봇이나 소프트웨어가 일터를 장악해 파생된 부작용을 다루는데, AI는 훨씬 더 거대한 쓰나미를 몰고 올 예정이다. 기계는 비반복적 육체적 역량을 대체할 뿐이지만 AI는 분석 업무의 영역을 빠르게 잠식하기 시작했다. AI는 그 이름 그대로 ‘지능’을 모방하는 데 뛰어나다. 기존에 고숙련 고임금 노동자들이 노동시장에서 상대적 우위를 점하던 영역이 위협받을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는 건 당연지사다. 그래서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자라나는 후세대는 앞으로 무엇을 배워야 하나? 어떤 전공을 선택해야 하나? 기술에 대한 수용도가 높고 사회안전망이 부족한 한국 사회는 새로운 기술에 대한 공포와 불안이 더 크게 느껴진다.
■ 고소득 전문직이 AI 희생양?
새로운 기술의 도입은 항상 특정 직업군의 흥망으로 귀결된다. 산업용 로봇이나 소프트웨어 자동화가 저숙련 노동의 가치를 떨어뜨린 것이 대표적 사례다. AI 시대에 어떤 직업군이 승자가 되고, 패자가 될까. 초기 연구에선 AI에 많이 노출된 직업일수록 위험하다고 봤다. ‘AI 노출 지수’(AI Occupational Exposure, AIOE)’는 대체 가능성을 수치화한 것이다. 공학기술자, 의사, 데이터 분석가 등 대용량 데이터를 활용하거나 정형화된 판단이 필요한 직업군에서 노출도가 높고, 대면 응대, 상담이 주된 일은 낮다. <위 표 참조>
2023년 11월 한국은행이 발표한 ‘AI와 노동시장 변화’ 보고서에 따르면 AI 노출 지수가 가장 낮은 직업은 점성술사였다. 표준 직업 분류 체계에서 무속인, 관상가 등을 아우르는 이 직업의 핵심은 대인 관계 형성과 감정 노동이다. 같은 이유로 성직자도 대체 가능성이 낮다. 기자직과 교수직은 ‘예상보다 낮아서’ 고개를 갸우뚱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 이유는 인간적 상호작용과 창의적 사고를 AI가 대신해 줄 수 없기 때문으로 풀이됐다.
이 조사에 따르면 의사, 회계사, 변호사 등 고소득 종사자들의 미래가 암울한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전문직 업무 프로세스에는 데이터로 처리될 수 있는 부분과 정형화될 수 없는 업무가 혼재되어 있는데, 이를 뭉뚱그려 자동화시킨다는 것은 과도한 일반화일 수 있다. 자격, 면허와 관련된 법적 규제, 사회적 윤리 규범과도 충돌이 일어나는 지점이다.
그리하여 AI 노출 지수를 보완해서 AI 시대 직업의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하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국제통화기금(IMF)은 AI가 전담할 수 없는 정도를 지표로 만든 보완 지수를 내놨다. 책임감, 중대성 등에서 불가피하게 사람이 수행해야 할 역할 비중을 노출 지수와 상계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노출 지수가 높아도 보완 지수가 함께 높으면, 대체 가능성은 그만큼 낮게 평가되는 식이다.
올 2월 한국은행의 ‘AI와 한국경제’ 보고서에서 보완 지수를 적용해 재차 분석한 결과는 앞선 분석과 일부 달랐다. 노출도와 보완도가 모두 높은 직업이 AI 도입을 통해 생산성 향상과 임금 상승 혜택을 누릴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나온 것이다. 의사, 한의사, 기업 대표 및 기업 고위 임원, 금융 전문가, 대학 교수, 고객 서비스 관리자 등이 이에 해당한다. 또 노출도가 낮았던 건설·운송·전기·배관·경찰·소방·교정·선박 등은 보정해도 여전히 노출도가 낮아 대체하기 어려운 직업군으로 꼽혔다.
■ 중요한 건 AI 활용 경쟁력
자동화로 인한 노동 대체 효과뿐만 아니라 ‘증강(Augmentation)’ 가능성에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인간의 역량을 강화하고 협업을 통해 생산성을 높이는 가능성을 잣대로 AI의 파급력을 분석하자는 접근법이다. 이 개념은 국제노동기구(ILO)가 노출 지수를 보완하기 위해 개발한 것인데 생산성 향상 측면을 살펴보는 데 용이하다.
ILO 방식은 ‘직업은 여러 직무로 구성된다’고 전제한다. 각 직무의 노출 지수를 평균을 내어 표준편차를 비교 분석하는 것이 핵심이다. 신간 <진격하는 AI와 흔들리는 노동자>에서는 변호사의 사례를 들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판례 검색과 문서 작성 업무는 자동화할 수 있으나, 현장 조사, 면담과 분쟁 조정은 사람이 할 수밖에 없다. 이 경우 평균 노출 지수는 낮고 표준편차는 큰 ‘증강형 직업’에 가깝다. 즉, 변호사는 AI의 보조로 단순, 반복 업무를 줄이고, 창의적이고 판단이 필요한 업무에 집중해 생산성과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 반면 콜센터 상담사의 여러 직무를 AI로 대체해도 무방하다면 노출 지수의 평균은 높아지고 표준편차는 낮아진다. 이 경우는 ‘대체형 직업’이다. 이 방식으로 분석한 결과 증강 가능성이 높은 직업은 변호사, 웹 개발자, 영업·판매 관리자, 약사 등이고, 대체 가능성이 높은 직업은 텔레마케터, 번역가, 통역가, 비서, 아나운서 등으로 나타났다. 전체 근로자로 보면 10%는 대체 가능성이 높고, 16%는 증강 가능성이 높다.
한국은행 조사국 고용연구팀이 지난 15년 간 한국의 일자리 추이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수학적 이해와 응용을 뜻하는 ‘인지적 능력’과 인간 관계에 바탕한 ‘사회적 능력’ 모두가 높은 일자리는 크게 늘어났다. 반면 두 가지 능력 모두가 낮은 일자리는 가장 많이 줄어들었다.
이상의 연구 결과를 종합하면 AI 자동화가 모든 일자리를 사라지게 만들 수 없다는 점은 확연하다. 특히 AI를 활용한 새로운 증강형 일자리는 더 많이 창출될 가능성이 높다. 예컨대 인지적 능력이 필요한 업무는 AI를 보조적 도구로 활용하되, 사회적 능력이 필요한 부분에서 사람의 진가가 발휘되는 방식으로 직업이 진화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어떤 일자리는 안전하고, 어떤 일자리는 위험하다는 결론은 아직 섣부르다. 분명한 것은 대체될 수 있는 위험을 줄이고, 증강시킬 기회를 잡는 능력이다. AI 활용력이 경쟁력이 되는 시대의 도래는 피할 수가 없다.
2025-10-11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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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흥민, MLS 게임 체인저?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그는 골 하나만으로도 역사를 쓰지만, 이제는 그라운드 밖의 문화까지 지배하고 있다.” 손흥민 이야기다. 그가 새 유니폼을 입자 미국 메이저리그사커(MLS)마저 달라졌다. 리그는 이제 손흥민 이전과 이후로 구분할 정도다. 그의 움직임에서 팬들은 새로운 스포츠 문화를 목격한다. 한때는 아시아 선수라는 이유만으로 폄하되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그가 골을 넣고, 손을 흔들고, 팬들과 눈을 맞추는 순간, 누군가는 그 안에서 새로운 축구 문화를 발견한다. 그의 존재는 MLS를 흔들고 미국 축구 문화를 바꾸며, 나아가 세계 축구 생태계의 지형을 다시 그려가고 있다. 처음 그의 MLS 진출 소식이 들려왔을 때, 세간에는 “왜?” 혹은 “이젠 내리막 아닌가”라는 의문이 뒤따랐다. 하지만 그 물음표는 곧 느낌표로 바뀌었다. 무엇보다 관세 압박 등 미국발 불확실성으로 국민의 일상이 무거워진 시점에 그의 활약은 훈풍처럼 다가오고 있다.
이적 후 두 달도 채 되지 않아 MLS 전체의 판도를 흔들며 축구 문화의 심층까지 건드리고 있는 손흥민. 어쩌면 그의 이야기는 이제부터 시작일지 모른다. “그래도 MLS 아닌가”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미국은 2026 월드컵 개최지이자 여전히 세계 문화의 중심이다. 그 한복판에서 손흥민이라는 ‘게임 체인저’의 돌풍이 거세게 불고 있다.
■그라운드 활약 경이롭다
“잘할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일 줄은 몰랐다.” MLS 이적 이후 단 8경기 만에 8골 3도움. 손흥민이 남긴 기록은 경이로움 그 자체다. 단순히 골을 넣는 스트라이커를 넘어 팀 전체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존재임을 입증한 셈이다. LAFC 체룬돌로 감독은 “손흥민의 움직임, 공간 창출, 동료 지원은 최고 수준”이라며 찬사를 보낼 정도다. 팀 동료 데니스 부앙가와의 공격 호흡은 리그 최고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들의 연계 플레이는 ‘흥부 듀오’라는 별칭까지 얻으며, 한 시즌 17골을 합작해 LAFC의 공격 축을 굳건히 세우고 있다. 이는 개인 기량 의존도가 높던 MLS 팀들에게 월드클래스 선수가 어떻게 시스템을 업그레이드하고, 동료들의 잠재력까지 끌어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라 할 만하다. MLS 역사 속 위대한 듀오들이 있었지만, 손흥민과 부앙가가 최근 6경기에서 보여준 폭발력에 견줄 만한 존재는 없었다. MLS 사무국이 지난 1일(한국시간) 발표한 최신 파워랭킹에서, 서부 콘퍼런스 4위에 불과한 LAFC가 전체 2위에 올랐다. 극적인 상승세의 중심에는 다름 아닌 ‘흥부 듀오’가 있었다. 남은 4경기 결과에 따라 서부 정상 등극도 충분히 노려볼 만한 상황이다. 부앙가는 “손이 내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 자신감이 생긴다”고 말한다.
이제 손흥민은 단순한 공격수가 아니라 팀 전술의 핵심 축이자 흐름을 바꾸는 동력이 되었다. 그의 움직임은 동료들을 살리고 팀 플레이에 깊이를 더한다. 마치 거대한 퍼즐의 마지막 조각처럼 그의 합류는 LAFC를 완성시키고 MLS라는 리그 전체의 전술과 기술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고 있는 것이다. 손흥민은 그라운드 위에서 승리 그 이상의 가치를 선물하며, 살아 있는 레전드로서의 품격을 증명하고 있다.
물론 과제도 남아 있다. 향후 MLS 수비진은 빠르게 손흥민을 겨냥한 전술을 준비할 것이고, 전담 마크나 집중 견제는 더욱 거세질 것이다. 시즌 강도와 체력 관리, 심리적 피로 등 변수 역시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손흥민의 자기 관리 능력과 구단의 세심한 운영이 뒷받침된다면, 그의 활약은 결코 단발성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LAFC는 추석 연휴가 한창인 오는 6일 오전 10시(한국시간),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의 BMO 스타디움에서 애틀랜타 유나이티드와 맞붙는다. 손흥민의 활약은 여전히 계속될 가능성이 높다.
■MLS 변화를 견인하다
손흥민의 MLS 합류는 경기장 밖 시장에도 거대한 파급을 일으켰다. 이적 직후부터 티켓 판매, 스폰서 문의, 미디어 노출, 온라인 조회 수 등 모든 지표가 폭발적으로 상승했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유니폼 판매다. 입단 일주일 만에 전 세계 스포츠 종목을 통틀어 판매 1위를 기록했고, 온라인 매장은 매진 사태로 배송 안내문을 따로 띄워야 했다. 미국 현지 언론은 ‘리오넬 메시가 2023년 7월 인터 마이애미에 입단한 뒤 한 달간 유니폼 50만 장이 팔렸는데, 손흥민의 유니폼은 그보다 세 배 더 팔렸다’고 전했다.
홈 경기 티켓 역시 품귀 현상을 빚었다. 샌디에이고FC전은 새로 마련한 입석까지 매진됐고, 재판매 가격은 최저 172달러(약 24만 원)에 달했다. 이는 LA의 또 다른 축구팀 LA 갤럭시의 리그스컵 준결승 주중 경기 티켓 재판매 최저가가 34달러(약 5만 원)인 것과 비교된다. 심지어 LA 코리아타운에는 손흥민을 주인공으로 한 대형 벽화가 등장했고, 새너제이 어스퀘이크스전은 ‘손흥민 효과’ 덕분에 구단 홈경기 최다 관중 기록까지 갈아치웠다.
디지털 반응도 폭발적이다. SNS 팔로워가 수십만 명 단위로 늘었고, 구단 콘텐츠 조회 수는 339억 회, 언론 보도량은 289% 증가했다. 구글 트렌드 검색 지수도 단숨에 최고치로 치솟았다. 그의 세리머니나 팬 서비스는 짧은 영상으로 재가공되며 새로운 서사를 만들고 있다.
이쯤 되면 LAFC가 아니라 ‘SON FC’라 불러도 무리가 없다. 손흥민은 단순한 스타를 넘어 문화적 현상이 되어 구단과 리그의 성장을 견인하고 있는 셈이다.
■SON, 인성까지 극찬받다
손흥민의 존재감은 경기장 안팎을 가리지 않는다. 그의 가치는 숫자가 아닌 태도와 진정성에서 더 빛난다. 미국 LA타임스는 “손흥민은 골 이상의 것을 보여주며, 훌륭한 인간으로도 존경받고 있다”고 전했다. 긍정적인 태도와 친화력은 팀 문화를 바꾸고, 동료와 코치진까지 그를 ‘놀라운 사람’이라 부르게 했다.
특히 EPL(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시절부터 유명했던 팬 서비스는 미국에서도 큰 화제다. 훈련장 밖에는 그를 보기 위해 수많은 팬이 몰리고, 손흥민은 사인과 사진을 기꺼이 함께한다. 골닷컴은 “MLS 슈퍼스타 대부분은 팬과 거리를 두지만, 손흥민은 다르다”고 평가했다. 포브스는 그를 메시와 비교하며 “내성적인 메시와 달리 손흥민은 팬과 소통하며 팀에도 긍정적 영향을 준다”고 전할 정도다. 또 손흥민이 MLS에서 입지를 더 넓히면 앞으로 더 많은 유망 아시아 선수들이 이 리그를 주목하게 될 것이라는 분석했다.
그의 팬 서비스는 가볍지 않은 진정성으로 이어진다. 작은 손짓, 환한 웃음, 팬을 향한 시선 하나가 모두 ‘이야기’가 되고, 이야기는 쌓여 ‘문화’가 된다. 글로벌 매체들은 손흥민을 두고 “그는 골만 넣는 스타가 아니다. 그가 도착한 도시에는 문화가 생긴다”고 평한다.
이제 손흥민은 축구 선수를 넘어 ‘문화 아이콘’으로 자리 잡고 있다. K 컬처라는 이름 아래 BTS(방탄소년단)가 무대에서 시대를 뒤흔들었다면, 손흥민은 축구장에서 또 다른 문법을 써 내려가고 있는 셈이다. 그의 몸짓 하나, 눈빛 하나가 새로운 스포츠 문화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축구 문법’ 다시 쓰다
손흥민의 진짜 영향력은 ‘확산성’에 있다. 그의 행동 하나가 선수들에게 영감을 주고 팬들에게 감동을 주며, 더 많은 사람을 축구장으로 이끈다. 축구가 단순한 90분 경기가 아니라 삶의 일부가 되는 것, 이것이 손흥민이 바꿔가고 있는 ‘축구의 문법’이다.
한국 축구 스타들이 세계 무대에서 빛난 적은 제법 있었다. 박지성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산소탱크’로 불리며 헌신의 가치를 보여줬다면, 차범근은 분데스리가에서 한국인의 저력을 알렸다. 그러나 손흥민은 그 이상의 문화적 파급력을 만들어낸다. 그의 플레이는 물론이고 웃음과 제스처, 팬들에게 보내는 눈빛 하나까지 ‘손흥민식’이라 불리며 밈(meme)으로 확산되고, SNS의 흐름을 바꾸고 있다. 이쯤 되면 그는 단순한 축구 선수가 아니라 ‘상징적 아이콘’에 가깝다.
그의 영향력은 경기장 안팎을 동시에 관통한다. 경기장 안에서는 여전히 결정적인 존재로, 경기장 밖에서는 사회적 메시지를 전하는 문화 행위자로 자리 잡았다. 선수의 궤적을 넘어, 세계인이 공유하는 축구 문화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고 있는 것이다.
MLS에서의 활약은 미국 스포츠 지형에도 변화를 일으킨다. 야구·농구·미식축구가 지배하던 나라에서 축구를 ‘힙한 스포츠’로 인식하는 흐름이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퍼지고 있다. 아시아계 이민자들에게는 자부심의 아이콘으로, 현지 팬들에게는 새로운 스타로 다가서며 문화적 접점을 만들어낸다.
손흥민은 이제 ‘잘 뛰는 선수’에 머물지 않는다. 그는 한국과 아시아를 대표하는 얼굴이자, 글로벌 스포츠 문화의 문법을 다시 쓰는 상징이다. BTS가 음악을 바꿨듯, 손흥민은 축구 문화를 새롭게 써 내려가고 있다. 그의 질주는 K 컬처의 다음 장(章)을 여는 선언이다.
2025-10-04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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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 전기요금 반값의 비밀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지난달 한국 첫 원전 건립 후보지로 행주산성 인근 한강변이 최종 3곳에까지 포함된 바 있다는 사실(원전은 한강변에 지었어야 했다·https://n.news.naver.com/article/082/0001341306?type=journalists)과 함께 전국 산야를 뒤덮고 있는 4만 개가 넘는 대형 송전탑 문제를 지적하자 대안을 묻는 질문들이 쏟아졌다. 가까운 지역에서 지역별로 생산된 전기를 소비하는 것이 가장 타당한 방안이겠으나 현실적으로 단시간 내 해결이 어려우니 다른 방편을 찾아야 한다는 지적들도 많았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기회에는 가장 단시간 내에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 보려 한다. 단순하고 명쾌한 논리에 입각한 이 방안조차 전기 기득권(먼 곳에서 싸게 전기를 끌어 쓰는 지역을 이렇게 부르지 않을 수가 없다)에서는 애먼 소리들을 해대니 숫자로 하나하나 따져가며 세세하게 그 내용을 살펴보자.
■답보 거듭하는 차등화
그 방안의 이름은 지역별 차등 전기요금제다. 지난해 정부 계획 수립에 따라 올해 도매가격부터 차등화 우선 도입이 논의되고 있으나 별다른 진척을 보지 못하고 있다. 가장 인구수가 많은 수도권의 반발에 부닥쳐서다.
수도권의 논리는 이렇다. 전기 도매가격에 지역별 차등을 적용할 경우 수도권에는 연간 최대 14조 원의 전기 비용이 상승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도권에서는 그 제도 도입에 따라 기업이 전기요금이 싼 지역으로 이전하는 등의 입지 변화는 제한적일 것이며 제조업의 경우 소매가격 상승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는 주장을 편다. 입지 변화가 제한적일 것이라는 주장의 이면에는 인력 확보와 정주여건 등의 조건에서 수도권이 탁월하기 때문이라는 평가까지 곁들인다.(이 내용들은 지난해 9월 한국경제인협회가 발표한 ‘지역별 차등 전기요금제 도입, 업종별 파급효과 및 시사점’을 토대로 구성한 것임을 밝힌다. 관심 있는 이들의 정독을 권한다.) 인력 양성과 정주여건 개선 등을 숙제로 삼아 비수도권이 더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만 수도권의 수도권 중심적 사고방식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이런 고통 분담이라니
이런 주장들을 시원하게 논박할 내용이 지난달 11일 부산상공회의소에서 열린 동남기후에너지포럼 창립 세미나에서 나왔다. 이날 세미나에서는 현행 전기요금제의 구조를 다층적으로 분석한 내용이 눈길을 끌었다. 그 내용의 첫 머리는 한전의 제11차 장기송변전설비계획의 소개로 시작한다. 여기에는 용인 반도체클러스터에 10GW 규모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 발전연계용 설비 약 50조 원, 첨단산업용 공급 설비 약 22조 원 등 향후 15년 동안 총 72조 8000억 원의 한전 설비투자 계획이 담겨 있다. 이날 분석의 핵심은 그럼 저 투자비는 결국 누가 부담하느냐와 수도권 전력 공급을 위한 비용을 전국 전기요금에 나눠 매기는 것이 지역 균형발전에 부합하느냐였다.
전기요금에는 전력 사용에 따른 요금 이외에 송전 관련 비용이 포함돼 있다. 2022년을 기준으로 1회선 기준 1500km의 전선을 구축하느라 들어간 송전선로 구축 비용은 4조 8000억 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송전 과정에서 손실되는 비용인 송전손실비도 한 해 송전량의 1.6%인 1조 1600억 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부산은 원전과 가까워 전선 구축 비용도 미미하고 송전손실도 0에 수렴할 것으로 추정되지만 저 비용을 수도권과 똑같이 나눠 부담하고 있다. 수도권 송전을 위해 필요한 송전선로 구축 비용과 장거리 송전으로 인한 송전손실비를 전력자급률 200%에 가까운 부산지역에까지 동일하게 부담하는 것은 논리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명확히 불합리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사실만으로도 지역별 차등 전기요금제는 시급히 도입돼야 하며 단순히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두 부류로만 전기요금을 나눌 게 아니라는 점은 명확하다. 결국 지역별 전력자급률에 따라 전기요금을 차등 적용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결론이 가장 타당해 보인다.
■여야 협치는 이것부터
이처럼 명백한 팩트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지역별 차등 전기요금제 도입을 놓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지역 정치인은 가뭄에 콩 나듯 찾기가 어렵다. 여권에서 김영춘 전 의원과 최인호 전 의원 정도가 반값 전기료와 관련해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했을 뿐 부산지역 현역 국회의원 대다수를 이루고 있는 야권에서는 그 인원 수에 걸맞은 목소리를 듣기가 어려웠다. 지역별 차등 전기요금제 혹은 반값 전기요금제는 부산의 입장에서 긴급하고도 중요한 이슈다. 기업 이전 등 전기요금 차등화에 따른 지역 발전 동력 회복을 위해서라도 더욱 그러하다. 따라서 부산지역의 여야가 협치를 논한다면 그 대상으로 차등 전기요금제를 최일선에 내세워야 마땅하리라 본다. 전기 기득권인 수도권만을 위한 전기요금제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데에 여야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전 세계 최대 원전 밀집지를 곁에 두고 사는 지역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이기도 하다. 정권마다 대한민국의 소멸을 막기 위한 필요조건으로 소리 높이 외치는 지역 균형발전은 그런 배려가 쌓여가는 길목의 끝에서야 마주칠 수 있을 것이다.
2025-09-2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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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국제영화제에 웬 ‘케데헌’?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는 K팝 아이돌 그룹 ‘헌트릭스’가 악령을 물리치고 세상을 구하는 과정을 그린 넷플릭스의 애니메이션 영화다. ‘케데헌’의 글로벌 열풍이 드디어 부산에 상륙했다.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케데헌’이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개막을 맞아 ‘영화의 바다’ 부산을 찾은 관객과 만난다. 그 만남은 너무나 뜨겁고 역동적이다.
■ ‘케데헌’, BIFF까지 접수?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가 지난 17일 개막해 오는 26일까지 열흘간의 일정에 들어갔다. 전 세계 64개국의 공식 초청작 241편과 커뮤니티 비프 상영작까지 포함해 총 328편의 영화를 상영한다. 이 가운데 이색적인 관객 참여형 상영회가 눈길을 끈다. 바로 국내 최초로 ‘케데헌’ 싱어롱 상영회가 20일 오후 8시 동서대 소향씨어터 신한카드홀에서 열리는 것이다. 공연 전용홀에서 열리는 만큼 원작의 사운드를 그대로 구현하는 것이 장점이다.
‘케데헌’은 K팝의 화려한 세계와 오컬트 장르를 결합해 전 세계 관객들의 열광적인 반응을 끌어내며 하나의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How It’s Done’ ‘Soda Pop’ ‘Golden’ ‘Your Idol’ 등 다채로운 넘버를 통해 전 세계인을 사로잡았다.
이 애니메이션 영화의 성공 비결은 바로 음악이다. BBC도 “K팝은 이 영화의 심장이고,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는 초자연적인 무기가 되어 감동의 순간을 더 증폭시킨다”고 분석했다. 케데헌의 음악이 자연스럽게 녹아 들어 이야기 몰입을 방해하지 않고, 오히려 풍성하게 만든다.
이번 싱어롱 상영회에서 관객들은 영화를 보면서 OST(오리지널 사운드 트랙)를 직접 따라 부른다. 한국의 전통문화와 현대 K팝을 절묘하게 융합한 영화의 음악적 매력을 현장에서 생생하게 만끽할 수 있다. ‘케데헌’ 싱어롱 이벤트는 북미 지역에서 먼저 시작됐다. 넷플릭스는 미국, 영국, 호주, 뉴질랜드 극장에서 ‘케데헌 더 싱어롱’을 개최해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한국도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싱어롱 상영회의 열기를 이어가게 된 셈이다. ‘케데헌’을 만든 매기 강 감독도 지난 17일 열린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에서 레드 카펫을 밟았다.
■ 매일 새로 쓰는 역사
‘케데헌’은 매일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다. 넷플릭스 콘텐츠 가운데 사상 최초로 누적 시청 수 3억 회를 돌파한 것이다. 넷플릭스 공식 사이트 투둠에 따르면 6월 20일 공개된 ‘케데헌’의 누적 시청 수는 지난 14일 기준 3억 1420만 뷰를 기록했다. 이는 지금까지 공개된 넷플릭스의 모든 영화와 쇼를 통틀어 가장 높은 수치다. 2위는 ‘오징어 게임 시즌1’의 2억 6520만 뷰다. 그뿐만 아니다. 케데헌의 OST ‘골든’(Golden)은 4주 연속 빌보드 메인 싱글차트 ‘핫100’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여기에 빌보드 메인 앨범차트인 ‘빌보드 200’까지 석권하며 K팝 전성시대를 다시 열었다. 이는 2020년 12월 방탄소년단이 앨범 ‘비’(BE)와 타이틀곡 ‘라이프 고스 온’(Life Goes On)으로 나란히 두 개 차트 정상을 차지한 이후 약 5년 만에 일군 쾌거다.
■ 인기 요인은 무엇인가?
‘케데헌’은 단순히 K팝을 소재로 삼은 것을 넘어, 한국의 신화와 일상적인 문화 요소를 모든 장면에 진정성 있게 담아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케데헌은 서울을 배경으로 K팝과 아이돌 문화, 한국적 생활상을 세밀하게 담아냈다. 여기에 K팝의 화려한 시각적 요소와 음악을 스토리와 캐릭터에 완벽하게 결합했다. K팝이라는 장르와 초자연적 퇴마물의 성공적인 융합은 흥행의 핵심 동력이었다. 강력한 글로벌 K팝 팬덤을 바탕으로 작품 속 노래들이 현실의 음원 차트까지 석권하면서 ‘케데헌 신드롬’을 이끌었다는 것이다.
케데헌의 성공에는 여러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우선, 우정과 자기 수용과 같은 스토리의 보편성과 한국 고유의 문화적 정체성이 조화를 이루며 전 세계적인 공감대를 형성했다는 것이다. 여기에 K팝의 글로벌 인기, 배경이 된 서울의 아름다움, 음식·패션·굿즈 등 K라이프의 신선함을 친숙하면서 세련되게 전달했다. ‘케데헌’이 K브랜드가 월드클래스의 주류 문화로 자리 잡게 한 작품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케데헌'을 연상시키는 기념품을 사기 위해 ‘오픈런’까지 벌어지고, 명동이나 북촌한옥마을 등 애니메이션 배경지에 ‘성지순례’를 오는 관광객도 많은 이유다. “한국 문화가 앞으로도 세계적인 사랑을 받는 유일한 길은 자신감 있게 우리 문화와 관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매기 강 감독의 작품 철학이 영화와 현실에서 제대로 작동되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 화려한 빛 뒤에 남긴 과제는
‘케데헌’의 성공은 K컬처와 K콘텐츠의 경쟁력을 증명하는 계기가 된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이 영화를 제작한 곳은 소니픽처스이고, 투자와 배급을 맡고 지식재산권(IP)을 가져간 곳은 넷플릭스다. ‘케데헌’의 성공은 글로벌 자본과 제작 노하우, 플랫폼이 결합해 만든 성과다. 이를 보고 국내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업체가 제작해서 흥행이 되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든다.
하지만 국내 현실은 녹록지 않다. ‘케데헌’ 제작비만 약 1억 달러(약 1390억 원)에 달한다는 말이 나오지만, 한국 콘텐츠업계의 제작과 유통 여건은 열악하다. 글로벌 진출 시스템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국내 시장만을 타깃으로 수백억 원에 달하는 영화를 만들기도 버거운 것이다. 국내 대표 OTT 업체인 티빙과 웨이브도 합병을 추진해 몸집을 불리려고 하지만, 논의는 제자리걸음이다.
그사이 전 세계 1위 OTT 넷플릭스는 자본력과 시장지배력을 더 키워 글로벌 시장 장악을 가속화하고 있다. 흥행 리스크와 제작비를 책임지는 대신 IP를 독점한다. 콘텐츠가 흥행하면 굿즈, 팝업스토어 등 파생 수익은 모두 넷플릭스 차지다. 하지만 국내 제작사들은 막대한 제작비를 지원하고, 글로벌 시장에 진출하는 막강한 창구인 넷플릭스를 외면하기 어렵다. K콘텐츠 산업이 유통과 수익 구조에서 글로벌 플랫폼에 의존하게 되는 것이다. 콘텐츠는 세계적으로 주목받아도, 국내 제작사는 주도권과 재투자 여력을 상실하는 셈이다. 이러한 구조가 고착화되면 넷플릭스 종속 현상은 더 심화할 수밖에 없다.
쉽지 않겠지만, 국내 OTT가 힘을 모아 몸집을 키우고, 넷플릭스와 경쟁할 만한 규모의 경제를 이뤄내야 한다. 또 유망 콘텐츠 제작 프로젝트에 제작비를 공동으로 투입하고 IP를 공유하는 ‘IP 주권 펀드’ 조성도 필요하다. ‘케데헌’ 흥행 열풍 속에서 국회에서도 K콘텐츠 지원을 위한 법안을 내고 있다. 전통 문화적 요소를 기반으로 한 K콘텐츠를 지원하는 ‘콘텐츠산업 진흥법 일부 개정안’과 ‘문화산업진흥기본법·콘텐츠산업진흥법·지역문화진흥법 개정안’이 여야에서 각각 발의됐다. 여야가 K콘텐츠 산업 육성 필요성에 공감대를 이룬 만큼 법안 통과 등 후속 조치가 필요하다. 이재명 대통령도 대선 후보 시절부터 K콘텐츠 산업을 시장 규모 300조 원, 문화수출 50조 원으로 늘리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 K콘텐츠의 지속 가능한 생태계를 구축하기 위해 국가 차원의 체계적 대응이 절실한 때다.
2025-09-2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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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식당 업주 울린 ‘노쇼 사기’ 왜 검거 못하나
노쇼(No-Show)는 식당 등에 예약을 한 고객이 예약 취소를 하지 않은 채 제시간에 나타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는 노쇼로 인한 피해를 호소하는 소상공인들의 안타까운 사연이 이어진다. 그런데 요즘은 음식점 등을 운영하는 소상공인들로부터 돈을 뜯어내는 ‘노쇼 사기’까지 기승을 부린다. ‘노쇼 사기’는 기업이나 공공기관 관계자를 사칭, 전화나 메신저로 음식점 등에 예약을 하면서 해당 가게에서 취급하지 않은 고가의 음식이나 주류를 특정 업체에서 미리 구매해 준비하도록 유도한 뒤 잠적하는 것이 일반적인 수법이다. 이 과정에서 음식점 점주 등 소상공인들은 예약 고객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 특정 업체에 돈을 송금했다가 낭패를 본다. 단순한 노쇼와 완전히 다른 명백한 사기 범죄인 것이다. 하지만 ‘노쇼 사기’ 검거율은 1%에도 못 미친다. 검거율이 이렇게까지 낮은 것은 도저히 납득하기 어렵다. 더욱이 피해자들은 대부분 영세한 소상공인들이다. 도대체 무슨 이유일까.
■ 진화하는 ‘노쇼 사기’
일반적인 노쇼의 의미는 예약한 고객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예약 부도’라고 할 수 있다. 통상적인 노쇼의 사유는 악감정에 의한 피해 유발 의도, 장난 또는 고객의 변심, 잊어버림 등이다. 노쇼가 발생하면 영세업체들은 그 시간에 다른 고객을 받지 못하거나 음식 재료를 과다하게 준비하는 등에 따른 피해를 본다.
하지만 ‘노쇼 사기’ 가해자들은 해당 업체를 적극적으로 기망해 금전적인 이득을 취하려는 고의성을 갖고 있다. 더욱이 이 범죄의 피해자는 대부분 영세한 소상공인인 경우가 많다. 더욱이 최근 깊어진 불황 때문에 소상공인들의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는 상황을 고려하면 ‘노쇼 사기’는 소상공인들의 의지를 꺾는 악랄한 범죄라고 할 수 있다.
지난 6월 부산 서구의 한 중식당에 한 남성이 전화를 걸어왔다. 이 남성은 다음 날 오후 2시까지 24인분 음식과 함께 이 식당에 없는 고가의 술 6병을 준비해달라고 예약했다. 특히 술은 자신이 알려주는 주류 업체를 통해 주문해 달라고 요청했다. 업주는 남성이 지정한 거래 업체에서 술을 구입하고 음식을 마련했지만 단체 손님은 나타나지 않았다. 전화로 예약한 남성도 연락이 두절됐다.
지난 5월 울산의 한 고깃집 업주는 유명 배우가 방어진에서 촬영을 마친 뒤 단체 회식을 한다며 30여 명 분의 음식을 준비해달라는 예약 전화를 받았다. 예약자는 배우가 원하는 와인이 있다며 특정 업체까지 지정해 8병을 구매해 준비해달라고 요청했다. 예약자가 지정한 와인을 구입하려면 1병에 90만 원, 총 720만 원이 필요했다. 업주는 자신이 감당하기에 무리한 주문이어서 와인을 사둘 수 없다고 말하자 예약자는 일방적으로 예약을 취소했다. 업주가 해당 배우의 소속사에 문의한 결과 연예인을 사칭한 것으로 확인됐다.
지난 5월 전남의 한 숙박업소 업주는 자신을 '대선 후보 캠프 관계자'라고 소개한 인물의 전화를 받았다. 그는 "고흥 지역에서 선거운동하는데 방 15개를 예약하고 싶다"며 예약을 진행했다. 예약자는 이튿날 다시 숙박업소에 전화해 "선거보조금을 현금으로 받은 탓에 선거운동원들의 도시락 대금을 결제하지 못하고 있으니, 도시락 대금을 대신 결제해주면 숙박비 결제 시 함께 지급하겠다"고 제안했다. 곧이어 '도시락 납품 업체' 역할을 맡은 또 다른 사람이 숙박업소에 "도시락 주문이 들어온 것이 사실이니, 840만 원을 주면 배달해주겠다"고 했다. 예약자의 말을 믿은 업주는 송금한 돈을 떼인 뒤에야 사기라는 것을 알았다. 지난 4월 강릉에서는 교도관 행세를 한 예약자에게 속아 자영업자 5명이 총 6355만 원의 피해를 입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자영업자들에게 예약을 하면서 방문 당일 줄테니 방검복 등을 대신 구매해달라고 요구하는 수법이었다.
울산과 전남, 강릉 등 전국에서 발생한 이 사건들은 최근 급증하는 ‘노쇼 사기’의 전형을 보여준다. ‘노쇼 사기’ 가해자들은 공무원, 정치 관계자 등 신뢰를 주는 직함을 사칭해 예약을 잡고 고가의 물품 구매를 유도, 돈을 송금받은 뒤 잠적한다. 한 명의 고객이 아쉬운 소상공인들의 심리를 이용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보이스피싱이나 스미싱에 못지 않은 교묘한 범죄 양태를 보인다. 심지어 공공기관의 직인이 찍힌 위조된 공문서를 범죄 도구로 활용하는 사례도 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소상공인들의 피해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 커지는 피해, 미미한 검거율
더불어민주당 박정현 국회의원이 최근 경찰청으로부터 제출받은 '시도경찰청별 노쇼 사기 현황' 자료에 따르면 2025년 1월부터 7월까지 총 2892 건의 ‘노쇼 사기’가 발생했다. 피해액만 414억 원에 달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역별로는 부산이 110건에 피해액 10억 원, 울산이 99건에 피해액 22억 원, 경남이 117건에 피해액 18억 원 등이다. 부울경 전체를 합하면 올 들어 7개월 만에 총 326건에 50억 원의 피해가 발생했다. 피해자가 모두 소상공인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노쇼 사기’가 불황의 늪에 빠진 자영업자들의 희망까지 무너뜨리는 심각한 부작용을 유발 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제는 검거율이다. 이렇게 심각한 피해가 발생하고 있지만 검거된 건수는 22건으로 전체 0.7%에 불과하다. 부산과 울산, 서울, 인천, 세종, 경기 북부, 충남, 경북, 제주의 검거율은 0%를 기록했다. 신종 ‘노쇼 사기’가 기승을 부리고 있지만 검거는 사실상 거의 불가능한 상황인 것이다.
■ ‘노쇼 사기’ 왜 검거 못하는가?
흔히 ‘노쇼 사기’를 예약 부도 사기 정도로 치부한다. 하지만 ‘노쇼 사기’는 일반의 생각과 달리 굉장히 지능적이면서도 조직적인 범죄 양상을 보인다. ‘노쇼 사기’ 조직은 통상 전화를 거는 예약자, 업주들이 예약자의 부탁을 받아 대리 구매하는 업체 관계자 역할을 하는 공범, 업주들로부터 돈을 송금받을 통장 계좌를 제공하고 입금된 돈을 주범에게 전달하는 현금 수거책 등으로 역할이 분담되어 있다.
더욱이 현금 수거책들은 피해자들에게 송금 받은 돈으로 코인 등을 구매해 주범의 해외 환전소 지갑으로 송금한다. 사실상 추적이 어려운 것이다. 특히 국내에 있는 현금 수거책을 잡았다고 하더라도 이들은 주범의 정체도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수고료를 받기 위해 대포 통장 등을 지급한 단순 가담자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실제로 앞서 전남에서 발생한 도시락 대금 사기 사건에 현금 수거책으로 가담했다가 체포된 피의자는 사기 조직이 범죄를 실행하기 이틀 전에 '코인 거래가 가능한 계좌를 제공해 불법 수익금을 입금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면 수당을 벌 수 있다'는 제안을 받고 범행에 가담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노쇼 사기’는 대포 통장 소지자들을 모집하는 보이스피싱 조직들의 범죄 행태와 매우 흡사하다. 일각에서는 노쇼 사기범들이 해외에 근거지를 둔 보이스피싱 조직에서 파생된 범죄조직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노쇼 사기’가 보이스피싱의 진화된 형태일 수 있다는 추정이다.
사정이 이런데도 ‘노쇼 사기’에 대한 대처는 소극적이다. 피해 신고를 받고 경찰이 사건을 수사할 즈음이면 이미 피해금은 해외 주범의 손에 넘어갔을 가능성이 높다. 주범들은 기존 보이스피싱 조직들처럼 법 사각지대인 해외에 체류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보니 한국 경찰이 주범 등 사기 조직원들을 모두 검거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보이스피싱 범죄 검거가 쉽지 않은 것과 같은 이유인 것이다.
특히 현행 통신사기피해환급법은 ‘재화의 공급 또는 용역의 제공 등을 가장한 행위’는 법 적용 대상에서 제외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자영업자 등 소상공인들이 사기라는 것을 깨닫고 사기 범죄에 이용된 계좌에 대한 지급 정지, 피해금 환급 등을 하려고 해도 ‘노쇼 사기’는 법이 정하는 통신사기 규정에서 제외되어 있는 것이다. 법 개정을 통해 피해금을 신속하게 회수하고 사기 계좌를 동결시킬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통장을 제공해 현금 수거책 역할을 했거나 공공기관 종사자를 사칭했을 경우 가중 처벌하는 제도 마련도 검토해야 한다.
경찰의 인식 전환도 필요하다. 신고 접수 즉시 발빠르게 대응하는 수사 시스템을 구축한 뒤 한층 적극적인 국내외 공조 수사를 통해 ‘노쇼 사기’ 조직을 뿌리뽑아야 한다. ‘노쇼 사기’에 대해 경찰을 비롯한 범정부적인 대응이 필요한 것이다. 피해 예방을 위해 소상공인에 대한 적극적인 홍보도 이뤄져야 한다. ‘노쇼 사기’ 대응 매뉴얼을 대대적으로 배포해 피해가 지금처럼 급증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사기범들이 사칭하는 직책의 진위 여부를 신속하게 확인할 수 있는 단일 창구를 마련하는 것도 시급하다.
2025-09-13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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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 아닌 ‘AI와 바다’가 부산의 미래다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는 대자연의 시련에 맞서는 늙은 어부의 사투를 그린다. 험난한 파도와 상어 떼의 공격 앞에서도 끝내 좌절하지 않는 인간 의지의 숭고한 승리다. 이 불굴의 정신이 부산에서 자조의 표현으로 변질된 대목은 무참하다. 젊은 세대가 떠나 활기를 잃으면서 노인과 바다뿐이라는 낙담이 뼈아픈 것이다.
부산은 항상 바다에 도전했다. 포기한 적이 없다. 바다에서 절망했던 적은 있어도 항상 희망을 건져 올렸다. 지금 부산은 새로운 미래를 향한 갈림길에 서 있다. 해양수산부의 부산 이전이 확정되면서 ‘글로벌 해양수도’ 도약이 가시화된 것이다. 해양수산 관련 기관, 기업, 연구소의 집적화도 본격 추진된다. 해양수도특별법과 국가 예산 등 법적, 제도적 지원을 받고 부산을 중심으로 한 해양권을 형성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는 절실함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이 지점에서 부산은 방향성의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부산은 이미 항만·물류의 도시인데, 관성적인 몸집 불리기에만 치중해서는 금세 한계에 부딪히기 마련이다. 데이터와 인공지능(AI)을 기반으로 한 산업 전환의 시대에서 기회를 찾아야 한다. AI와 바다, 두 축이 교차하는 부산은 ‘해양 AI’에서 신성장 동력을 찾을 수 있다. 스마트 항만, 자율운항 선박, AI 기반 어업 관리, 북극항로 데이터 허브 등 미치지 않는 영역이 없다. 해양 AI는 가 보지 않은 길이지만 부산을 세계가 주목하는 도시로 만들 수 있는 미래 전략이 될 수 있다.
■ 해양 AI, 수산·항만에서 북극항로까지
해양산업은 AI와 결합할 때 비약적인 변화를 기대할 수 있다. 우선 항만·물류는 AI 기술로 성장이 유망한 분야다. 부산항에 AI 기반 자율 하역 장비와 물류 최적화 시스템을 구축하면, 작업 효율은 높이고 안전사고는 크게 줄일 수 있다. 전 세계에서 치열한 기술 경쟁이 붙은 자율운항 선박도 부산이 선도할 수 있다. 국제해사기구(IMO)가 자율운항 규제를 논의하는 가운데, 부산은 세계적 항만 인프라와 조선·해양플랜트 산업 기반을 동시에 갖춘 드문 도시다.
스마트 어업과 양식업도 부산의 기회다. 해양 빅데이터와 AI 알고리즘을 활용하면 어군 분포, 수온·해류 변화, 양식장 질병 예측을 정밀하게 할 수 있다. 이는 수산업 생산성을 높이는 동시에 기후변화에 따른 리스크 관리에도 효과적이다. 나아가 해조류를 활용한 바이오 신소재, 해양 신약 개발 등 신산업 영역에서도 AI가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다.
부산은 북극항로 개척의 첨병이다. 부산항은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핵심 거점으로, 러시아 무르만스크와 직선으로 연결되는 북극항로의 남쪽 끝에 자리한다. 부산이 북극항로의 기착지가 된다면 글로벌 해운 질서에서 전략적 지위를 확보할 수 있다. 문제는 이 항로가 기상·해빙 상황에 따른 리스크 관리가 필요한데도 항행 데이터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해양 AI의 역할이 커진다.
AI 기술을 활용하면 위성관측·기상데이터·해류 패턴을 실시간 분석해 최적 항로를 제시할 수 있다. 자율운항 선박 기술과 결합되면 안전성을 높일 수 있다. 또한 쇄빙선 운영 효율화, 항만 접안 예측, 긴급상황 대응 시뮬레이션까지 가능하다. 부산이 북극항로 관련 데이터를 축적하고 AI 알고리즘을 개발한다면 환적 거점을 넘어 ‘북극항로 데이터 허브’ 지위를 선점할 수 있다.
■ 국가 AI 투자·해수부 이전, 부산의 기회
정부는 2026년도 예산안에서 AI 투자에 사상 최대 규모인 10조 원 이상을 책정했다. 지난해 3조 원대와 비교하면 세 배 가까이 늘었다. 특히 ‘피지컬 AI’라 불리는 분야, 즉 항만·물류·자율운항 선박·로봇·스마트 제조와 같은 실세계 적용형 AI에 무게를 두고 있다. 부울경에는 해양항만 AX(인공지능 전환)에 370억 원이 배정됐다.
AI를 통한 해양산업의 부흥 측면에서 부산은 이미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부산과학기술고등교육진흥원(BISTEP)이 올 5월 발간한 ‘해양수산 AI 연구개발 동향과 시사점’ 보고서에 따르면 2019~2023년 해수부 소관 AI 관련 국가연구개발과제 1033건 중 부산이 356건(34.5%)을 수행해 수도권(서울·경기·인천)의 37.0%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부산 산·학·연의 유기적 협력은 해양수산 AI 연구개발에서 선도적 역할을 기대할 수 있게 한다. 또 부산정보산업진흥원은 지난달 부산 해양 AI 융합 신산업 육성을 목표로 ‘해양 AI TF’와 ‘해양 AI 전략위원회’을 신설하고 로드맵 수립, 국비 연계 프로젝트 기획, 인재 양성에 나섰다.
그러나 아직은 실망과 우려가 큰 게 현실이다. 내년 해수부 예산이 전체의 1%에도 못 미치는 데서 국정에서 해양이 차지하는 비중이 단적으로 드러난다. 더구나 부산시가 신청한 해양과 AI 신규 사업 상당수가 예산 심의 단계에서 탈락하기도 했다. 이는 ‘해양수도 부산’ 비전이 실질적 성과로 이어지기 위해 반드시 극복해야 할 문제다. 스마트 항만과 자율운항 선박, 북극항로 데이터 허브 구축은 모두 초기 투자 없이는 불가능하다. 데이터 수집·가공, 알고리즘 개발, 테스트베드 구축에 장기간 안정적 투자가 필요하지만, 현재 구조로는 단편적 실증에 그칠 우려가 크다. 정부의 추가 예산 편성과 지원 확대에 지역의 힘을 모아야 할 대목이다.
■ 과제는 인재, 데이터, 제도
해양 AI 도시를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도 많다. 가장 큰 과제는 인재 확보다. 현재 국내 AI 전문 인력은 수도권에 집중돼 있다. 부산에서 해양 특화형 AI 대학원과 연구소가 활성화되지 않으면 해양수도 비전은 언감생심이다. 현장 기반 교육과 연구, 산학 협력 네트워크가 절실하다.
그 다음은 데이터 거버넌스다. 항만 물류, 선박 운항, 어업, 기후·해류 데이터는 공공 기관과 민간 기업에 분산돼 있다. 이를 표준화하고 통합 관리하는 플랫폼 없이는 AI 실증도, 산업화도 어렵다. 데이터 독점 문제를 해소하고 공유 체계를 만드는 것이 필수다.
제도적 뒷받침도 핵심적인 과제다. 부산시와 정치권은 ‘해양수도특별법’ 제정을 추진 중이다. 법안에 규제 특구 지정, 세제 혜택, 기업 지원 방안이 담겨야 기업 유치 효과가 생긴다. 특히 스마트 항만·자율운항 선박·해양 빅데이터 관리 같은 신산업 육성이 법적 틀 안에서 보장될 수 있게끔 AI와 데이터 산업 지원책은 구체적으로 명시돼야 한다.
해수부 이전의 효과와 정부의 AI 투자 흐름은 부산에서 교차되고 시너지 효과를 내야 한다. 지금은 부산이 항만·물류의 도시를 넘어 해양 AI 허브 도시로 도약할 수 있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다. 오늘날 부산 바다가 던지는 화두는 ‘노인과 바다’의 도전 정신이다. 게임 체인저인 AI를 앞세워 바다로 나아가야 한다. 부산이 북극항로로 연결될 때, 또 여기에 해양 AI 기술이 입혀질 때, 부산은 명실상부 글로벌 해양수도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AI와 바다가 어우러지는 새로운 해양 르네상스 시대를 열어야 할 과제가 우리 앞에 높여 있다.
2025-09-06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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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pen), 팬(fan)을 심다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외교 무대는 늘 무겁다. 회담장에는 계산된 미소가 오가고 기자들의 카메라 셔터는 그 순간을 박제한다. 한데 최근 한미정상회담을 기념하는 서명식에서 그 무거움을 덜어내는 뜻밖의 장면이 있었다. 이재명 대통령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건넨 것은 값비싼 선물이 아니라 손에 쥐고 있던 펜 한 자루였다. 한데 그 펜 하나가 외교의 온도를 바꿔 놓았다. 나아가 뉴스의 헤드라인이 되었으며, SNS를 뜨겁게 달궜다. 해당 펜을 제작한 업체는 주문이 폭주해 잠시 판매를 중단해야 할 정도였다. 말 그대로 펜(pen)이 팬(fan)을 만든 셈이다. 외교 현장에서 펜은 역사를 만들지만, 때로는 누군가의 마음을 훔치기도 한다.
■소박한 네임펜, 진심은 ‘명품’
정치가 늘 멀게만 느껴지는 시대에 대통령이 건넨 작은 펜 하나는 국민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정치적 계산으로는 얻기 힘든 자연스러운 공감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25일(현지 시간) 미국 워싱턴 DC 백악관에서 가진 방명록 서명식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이 대통령이 서명하는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좋은 펜(nice pen)”이라고 말하며 관심을 보였다. 이어 “펜의 두께가 매우 아름답다”라고 감탄했다. 트럼프의 입에서 ‘아름답다’라는 단어가 나온 것은 의외의 순간이었다. 이 대통령은 “대통령님의 다소 복잡한 서명에 유용할 것”이라며 펜을 선물했고, 두 정상은 이 짧은 대화 속에서 자연스러운 교감을 나눴다.
사실 이 펜은 특별할 것이 없는 물건이었다. 원목을 다듬어 봉황과 태극 문양을 새기고, 값비싼 만년필촉 대신 흔한 ‘모나미 네임펜’ 심을 넣어 만든 대통령 전용 사인펜이었을 뿐이다. 브랜드 로고도, 고가의 펜촉도 없었다. 그러나 장인의 손길이 더해지자 평범한 펜은 품격을 갖추었고, 겉으로는 소박했지만 그 속에는 한국적 정체성과 진심이 담겨 있었다.
이 같은 형태의 펜이 만들어진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2018년 9월 문재인 당시 대통령은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 공동선언문 서명식에서 평소 즐겨 쓰던 네임펜으로 서명했다. 반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몽블랑 만년필을 사용했다. 그러자 일부 언론과 온라인에서는 “국격에 맞지 않는다”, “의전 실패”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그러나 “서명 도구보다 중요한 건 선언문의 내용”이라는 옹호론도 적지 않았다. 펜 하나를 두고 나라 전체가 갑론을박했던 것이다. 이를 계기로 당시 청와대 참모들은 대통령 서명을 위한 전용 네임펜 제작을 추진했다. 나무와 금속으로 외형을 다듬고, 내부에는 네임펜 심을 넣어 편의성을 높였다. 작은 펜일지라도 정성과 의미가 더해지면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음을 보여 준 사례라 할 수 있겠다.
■펜은 언제나 역사의 현장에
외교 무대에서 대통령이 사용하는 펜은 단순한 필기구가 아니다. 한 자루의 펜 끝에서 국익이 좌우되고 역사가 기록된다. 그래서 정상들이 사용하는 펜은 언제나 화제가 되곤 했다. 특히 역사 속 만년필은 그 존재만으로 빛을 발했다. 국가 간 조약이나 협정 체결 같은 중대한 순간에 늘 함께한 것도 만년필이었다. 1919년 1차 세계대전 종결 후 체결된 베르사유 조약에는 영국 총리 로이드 조지가 ‘워터맨’ 만년필로 서명했다. 1945년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일본 항복 문서에는 맥아더 장군의 ‘파카 듀오폴드 오렌지’ 만년필이 사용됐다. 1987년 워싱턴에서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이 공동 서명한 ‘중·단거리 핵미사일 폐기협정’(INF)에도 ‘파카 75’ 만년필이 등장했다. 냉전 시대 종식을 상징하는 이 협정에서, 두 정상은 이름이 새겨진 만년필로 서명한 뒤 서로의 펜을 교환했고, 그 장면은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았다. 1990년 10월 3일 독일 통일 조약에 서명할 때도 서독의 헬무트 콜 총리와 동독의 로타어 데메지에르 총리는 몽블랑 만년필을 사용했다. 펜 하나가 조약을 완성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었던 것이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2009년 취임식에서 크로스(Cross)의 ‘타운젠트 라카블랙 575’ 볼펜으로 선언문에 서명했다. 이듬해인 2010년에는 건강보험개혁법안에 서명하며 크로스 볼펜 22개를 사용했고 이를 법안 통과의 주역들에게 나눠주면서 이 펜은 더욱 큰 명성을 얻었다. 한국에서도 박정희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이 서명 시 자주 사용한 펜은 다름 아닌 모나미의 수성펜 ‘프러스펜 3000’이었다. 이처럼 펜은 언제나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역사 한가운데 있었다.
■작은 것의 힘, 그리고 남겨진 메시지
외교는 차갑고 냉정한 계산의 연속이다. 국익이라는 저울 위에서 한 치의 양보도 허락되지 않는 곳. 그러나 때때로 그 모든 계산을 무력화하는 따뜻한 순간이 찾아온다. 이번 백악관의 펜 선물이 바로 그런 순간이었다. 작은 펜 한 자루가 촉매제가 된 것이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전한다. 진정한 가치는 가격표가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의미와 진심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평범한 펜심에 장인의 손길이 더해져 세계 정상의 마음을 움직였듯, 우리의 일상 속 작은 것도 충분히 세계적 가치를 지닐 수 있다. 외교가 복잡한 계산의 산물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인간적인 교감과 따뜻한 순간들이 숨어 있으며, 때로는 가장 소박한 것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정치 역시 흔히 차갑고 계산적인 영역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 안에서도 작은 배려와 진심은 늘 감동을 주고 빛을 발한다. 펜 하나가 팬을 만든 것처럼, 이런 정성과 진심이 우리 정치에도 더해져 국민의 마음을 움직이기를 기대해 본다. 이는 우리의 일상에서도 다르지 않다. 누군가에게 건네는 작은 배려, 손수 쓴 메모 한 장이 때로는 큰 울림을 남긴다. 결국 외교든 정치든 일상이든, 진정한 가치는 크기나 값이 아니라 의미와 마음에서 비롯된다. 화려함이 아닌 진심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다.
물론 이번에 선물한 펜이 실제로 트럼프의 손끝에서 사용될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펜이 두 정상이 보여준 소통과 공감의 상징으로 오래 기억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한 자루의 펜이 만들어낸 감동이다.
2025-08-3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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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은 한강변에 지었어야 했다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세계 최대 원전밀집지역인 동남권의 주민들은 수도권에는 왜 원전을 짓지 않느냐는 의문을 가지고 있는데 기술적으로 문제가 있는지요?”
2012년 4월 고리1호기 문제와 관련해 부산시청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당시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 김종신 사장은 이런 질문을 받는다. 이에 김 사장은 두고두고 동남권에서 회자되는 답을 남겼다. “수도권은 인구밀집 지역이라 원자력발전소 입지로 적합하지 않습니다.”
귀를 의심한 기자들이 분노에 찬 목소리로 “동남권도 인구밀집지역이지 않느냐”고 반박하자 김 사장은 “반경 몇 km 이내라는 기준이 있고…”라며 얼버무렸고 기자회견장은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한강변 원전' 밈의 등장
원전 문제가 이슈로 떠오를 때마다 자주 소환되는 이 에피소드는 원전을 이고 사는 지역민의 분노를 넘어 원전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으로 발전한다. 수도권은 2023년 기준 한전이 그해 판매한 전체 전력량의 40%에 가까운 전력을 소비할 만큼 전력 사용량이 많은 지역이다. 이런 '전기 먹는 하마' 수도권에 원전을 지으면 될 텐데 굳이 수도권 대척점인 동남권을 세계 최대 원전 밀집지역으로 만들고 전국 산야를 4만 개가 넘는 대형 송전탑으로 뒤덮는가에 대한 물음이다. 전문가들이 한수원 사장처럼 얼버무리는 사이 그 물음에는 답이 달리기 시작했고 결국엔 ‘원자력 발전소를 서울 한강 가에 지으면 좋은 점’이라는 밈으로까지 발전했다. 풍부한 수자원에다 송전 과정의 비용 절약, 수도권 일자리 창출 등 절묘한 풍자를 곁들인 밈에 많은 이들이 집값 안정화와 수도권 인구 밀집 현상 해결까지 가능하다며 호응하기도 했다.
다시 들여다 봐도 기발한 밈을 보면서 드는 의문점 하나. 과연 원자력 발전소에 대해서는 처음 지을 때부터 동남권 등 수도권에서 먼 지역에만 짓자는 논의를 했던 것일까. 그래서 원전 부지를 처음 결정할 때의 과정을 밟기 위해 한전의 1970년 ‘원자력발전소 건설현황’을 직접 찾아봤다.
■첫 원전 부지 후보였던 한강변
당시 정부는 1964년부터 원전 부지 선정에 착수해 부산·울산 지방 외에 경인, 목포, 군산까지 모두 4곳에 대한 예비조사를 실시했다. 이듬해엔 국제원자력기구(IAEA) 조사단과 함께 경인 지방의 경기도 고양시 행주 지역과 부산·울산 지방의 고리와 송정(공수포) 등 3곳으로 후보군을 압축했다. 원전 입지 조건 검토에 있어선 행주 지역, 즉 한강변도 별다른 문제가 없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그러던 것이 한전이 최종적으로 ‘행주 지역은 인구조밀한 서울에 인접할 뿐만 아니라 계절에 따라 탁월풍(편서풍을 뜻하는 듯)이 서울을 향하여 부는 빈도가 높다’는 이유로 행주 지역을 최종 부지에서 제외하면서 고리 쪽으로 입지가 결정되고 말았다. 서울만 인구밀집 지역으로 챙기는 분위기는 그때부터 시작된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는 내용이다. 탁월풍을 문제로 삼는다면 이후 전남 영광 같은 지역에는 원전을 설치해선 안 되는 거였다. 영광 한빛원전에서 사고가 난다면 탁월풍의 영향을 받게 되는 그 동쪽 지역 사람들은 어쩌란 말인가.
■전기 더 필요하다는 수도권
이 와중에 지난달에는 최근 11개월 동안에만 수도권에서 데이터센터 사용 목적으로 엄청난 전기 사용 신청이 접수됐다. 산업통상자원부와 한전에 제출된 전력계통영향평가 현황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8월부터 올해 상반기까지만 한전에 접수된 전기 사용 신청은 모두 290건으로 집계됐다. 이 가운데 70%에 가까운 195건이 수도권에 집중됐으며 그 용량은 20GW에 이른다. 원전 하나의 전력 생산량이 1GW 내외인 점을 감안하면 무려 원전 20기를 가동해야 할 판인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지금이라도 원전을 한강변에 지으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AI에게 원전을 한강변에 지을 때 나타나는 영향을 물어봤다. 널리 퍼져 있는 데이터를 AI가 학습한 결과물일 터이므로 타당성이 꽤 있는 답이 나오리라 기대했다. 역시나 AI가 내놓은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1. 송전 비용 절감: 수도권에서 전기 수요가 가장 많은데, 한강변에 원전을 지으면 소비지 근처에 발전소가 위치해 송전선로 설치와 유지 비용이 크게 줄어든다. 실제로 원전 송전망 구축 비용이 원전 전체 건설비의 1/3에 달한다는 분석이 있다.
2. 에너지 효율 상승: 전기 생산 지역과 소비지가 가까울수록 송전 과정에서 발생하는 에너지 손실이 감소한다.
3. 풍부한 냉각수 확보 가능: 한강은 냉각수 공급량과 수온 면에서 원전의 기술적 조건을 충족한다는 평가가 있다. 냉각수로 충분히 활용이 가능하며, 일부 내륙국가들도 강을 발전소 냉각수로 활용하고 있다.
4. 사회적 갈등 비용 감소 및 지역 일자리 창출: 수도권 주민이 원전 수용에 적극적인 경우, 기존 해안지역 원전 수용 주민들의 부담을 완화하고, 서울 근교에 관련 일자리도 창출될 수 있다.
5. 인구 밀집 지역 내 사고 위험: 한강변은 수도권 인구가 밀집한 지역으로, 만에 하나 원전 사고가 발생할 시 그 피해 규모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질 수 있다. 안전 문제에 대한 국민적 정서와 심리적 저항이 매우 크다.
6. 생태계 영향: 냉각수로 활용한 뒤 배출되는 온수로 인해 한강 생태계가 변형될 가능성이 높다. 예를 들면 방류된 온수로 인한 평균 수온 상승, 국지적 생태계 파괴 등이 우려된다.
7. 폐기물과 안전 관리 문제: 발전 과정에서 발생하는 방사성 폐기물 처리와 사고 후의 대규모 피난 및 관리 문제가 인구가 많을수록 복잡해진다.
5~7번의 경우 원전을 전부 폐기한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반드시 수반되는 문제이며 동남권이 늘 머리에 이고 사는 문제이기도 하므로 논외로 하고 나머지 이점들을 고려한다면 한강변에 원전을 짓지 않아야 할 논리를 찾기가 더 어려울 듯하다.
■이제라도 한강변에?
수도권에서만 원전 20기 수준의 추가적인 전력 소비를 예고하는 나라에서 원전을 지역에만 잔뜩 지어놓은 기존 정책이 한계에 다다른 것은 명확해 보인다. 가동 중단 원전을 해체하겠다는 애드벌룬 이면에 사용후핵연료 처리 문제를 얼버무리며 영구 핵폐기장화 할 수 있다는 우려까지 나오는 게 현실이고 보면 정책의 한계를 인정하고 방향 전환을 시급히 모색해야 옳다. 수도권용 전력 송전을 위해 전국 산야에 4만 개 이상 설치된 거대 송전탑은 서해안 에너지 고속도로 등을 위해 앞으로 얼마나 더 늘어나야 할지 모른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갈등 비용은 민도가 높아진 만큼 천문학적으로 올라갈 공산이 크다. 이 같은 비용까지 고려한다면 원전만큼은 혹시 추가 건립을 고려한다면 이제 한강변도 후보에 넣는 게 맞을 듯하다. 다행히 해외에서 새로 각광받는다는 SMR(소형 모듈 원자로) 같은 신기술의 등장은 부지 확보 문제 같은 것도 쉽사리 해결 가능하다니 더욱 고려해 봄직 하지 않은가.
특정 지역 주민들만 위험에 놓여도 괜찮은 사람으로 취급하는 전력 생산 정책은 이제 그만둘 때가 됐다.
2025-08-23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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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금 ‘뚝딱’ 연금술 성공…금값 대폭락?
금은 매우 특별한 금속이다. 인류 역사 속에서 금은 귀금속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했다. 기원전 3000년경 메소포타미아인들이 금으로 투구를 만든 데 이어 세계 전역에서 최상위 지배 계층의 권위를 상징하는 왕관과 팔찌 등의 제작에 금을 사용했다. 금을 신성하게 여겨 궁전이나 신전을 금으로 장식하기도 했다. 금은 인류 역사를 바꾼 금속이기도 하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스페인 왕실의 후원으로 1492년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는 등 15~17세기 유럽에 대항해시대 열풍이 분 것도 ‘황금 제국’을 발견하려는 열망에서 기인한다. 금은 오늘날까지도 세계 화폐 경제를 떠받치는 기둥이기도 하다. 통용 화폐들은 기본적으로 금본위제에 의해 그 가치를 인정받기 때문이다. 이 밖에 의료와 전자공업 등 많은 분야에서 금은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인류는 고대부터 흔한 금속을 금으로 바꾸는 연금술을 성공시키기 위해 끊임없는 시도를 이어왔다. 특히 중세 들면서 연금술이 크게 유행했다. 이후 실증적인 과학적 방법론이 도입되면서 연금술은 점차 퇴색됐다. 과거의 연금술은 실제로 금을 만들어내지는 못했지만 화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런데 과학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최근 납 등을 활용해 금을 만들어내는 데 마침내 성공했다. 인류가 고대부터 갈망하던 연금술이 우연이 아닌 정교한 연구 계획에 의해 결실을 거둔 것이다. 다이아몬드의 경우 인공 다이아몬드가 시장에 나오면서 희소성 하락으로 가치가 많이 떨어졌다. 그렇다면 이제 금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 유럽입자물리연구소, 납을 금으로
인류 최초로 연금술사들의 꿈을 현실화시킨 곳은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 CERN은 주로 거대한 입자 가속기를 포함한 고도의 과학장비를 이용해 여러 가지 실험과 관찰을 진행한다. 이곳의 연구진은 프랑스에 설치한 거대강입자충돌기(LHC)를 통해 납을 금으로 바꾸는 데 성공한 연구결과를 지난 5월 국제학술지인 '물리학 리뷰 저널(Physical Review Journals)'에 발표했다. 납을 금으로 바꾸는 과정을 실험적이고 체계적으로 구현한 최초의 사례로 평가받는다.
LHC는 지하 100m 아래 설치된 거대 과학 실험 장치로 가속 터널 길이가 27km에 달한다. 입자를 빛에 가까운 속도로 가속시켜 충돌 때 발생하는 물리 현상을 탐구하는 최첨단 장비이다. 원자핵은 양성자와 중성자로 이뤄져 있다. 양성자와 중성자, 전자가 몇 개인지에 따라 원자의 성질이 달라진다. 납은 82개의 양성자, 금은 79개의 양성자를 갖고 있다. 이런 특성을 고려해 CERN 연구자들은 LHC를 통해 빛에 가까운 속도로 납에 광자 빔을 충돌시켜 3개의 양성자를 방출하도록 했다. 그 순간 납이 금으로 변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연구원들은 2015~2018년 실시한 충돌 실험을 통해 860억 개의 금 원자핵(약 29조 분의 1g)이 생성됐다고 계산했다. 금 원자의 대부분은 약 1마이크로 초(백만 분의 1초) 동안 짧게 존재했다. 게재된 논문에서 연구진들은 "납을 금으로 바꾸는 것은 중세 연금술사의 꿈"이라며 "LHC에서 이 꿈이 실현됐다"고 밝혔다.
비록 연금술사들의 꿈은 이뤘지만 이 실험 결과의 미래 가치를 무조건 낙관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연구 결과가 전해지자 지구촌에서는 인류 역사와 함께 한 ‘금 불패 신화’가 이제 막을 내릴 것이라는 관측도 일각에서 제기됐다. 하지만 충돌 실험을 통해 얻은 금의 양이 극히 미미한 데다 이마저도 불안정해 이내 다른 입자로 분해됐다. 반면 LHC 운용에 소요되는 비용은 천문학적이다. 전기 비용만 수천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추산됐다. 즉, 연금술을 구현했지만 경제성을 확보하지는 못한 것이다. 따라서 LHC의 이번 성과가 당장 국제 금 가격 등에 영향을 줄 가능성은 없을 것으로 전망됐다.
■ 핵융합 기술, 수은을 금으로
지난달 미국의 한 스타트업 기업이 핵융합 기술을 이용해 수은을 금으로 바꿀 수 있다고 주장해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에너지 뉴스 매체인 에너지 리포터에 따르면 캘리포니아 실리콘밸리에 자리한 ‘마라톤퓨전’이 핵융합 기술을 이용해 수은을 금으로 변환하는 방법을 발견했다. 마라톤퓨전은 핵융합로 내부에서 수은-198 동위원소에 중성자를 충돌시키는 방법을 사용하면 금으로 변환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중성자 충돌로 수은-198은 수은-197로 변환되고, 다시 이 수은-197은 며칠이 지나면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안정적인 형태의 금인 금-197로 변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마라톤퓨전은 이 방식을 사용하면 1기가와트(GW)급 핵융합 발전소에서 연간 최대 5.4t의 금을 생산할 수 있을 것으로 추산했다. 금액으로 환산하면 연간 5억 5000만 달러 이상에 달한다. 이 업체는 “이 방법이 대규모로 확장 가능하고, 실용적으로 달성 가능하며, 경제적으로 거부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 기술이 실현될 경우 일반적인 핵융합 발전소의 수익을 거의 두 배로 늘려 핵융합 에너지를 단순한 청정에너지 대안을 넘어 경제적으로도 매우 매력적인 대안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평가도 이어진다.
마라톤퓨전이 발표한 논문은 아직까지 전문가들이 논문을 평가하고 의견을 제시하는 ‘동료심사’ 과정을 거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조금 더 추이를 지켜봐야 하는 상황이다. 또 이렇게 생산된 금은 방사성 물질이기 때문에 안전성을 위해 14~18년 정도 보관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이 기술이 상용화될 경우 핵융합 발전소는 전력을 생산하면서 부산물로 금을 대량 생산할 수 있다. 이렇게 될 경우 기존 금의 가치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을 전망이다.
■ 눈부신 기술 발전, 금의 미래는?
금은 대표적인 안전자산으로 꼽힌다. 가장 큰 이유는 희소성이다. 유통되는 금의 양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공급 과잉에 따른 폭락 우려가 적어 가치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14일 한국거래소 기준 국내 금값은 3.75g(한 돈)당 56만 1788원. 2014년에는 17만 원 대에 거래됐다. 금은 인플레이션 등 경기 변동에 대비하는 헤지 기능뿐만 아니라 투자 측면에서도 ‘불패 신화’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더욱이 내구성이 강해 오랜 세월이 지나도 물성이 변하지 않는다.
금이 희소성을 현재까지 유지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금을 얻으려면 땅에서 캐내거나 사금을 채취하는 등 여전히 전통적인 방법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세계금협회는 지난해 말 기준으로 현재까지 채굴된 금의 양을 21만 6265t으로 추산한다. 채굴된 금의 대부분은 귀금속으로 가공돼 개인, 기업들이 갖고 있거나 각 나라 중앙은행과 금융기관들이 보관하고 있다. 경제성을 가진 미 채굴 상태의 금은 5만 4770t에 달한다. 1년 평균 지구에서 채굴되는 금의 양은 3t 내외로 추정된다. 이 속도로 향후 15년가량이 지나면 더 이상 전통 방식으로 금을 생산할 수 없을 것이라는 추정도 가능하다. 물론 금은 지구 곳곳에 널려있다. 심지어 바닷물에도 섞여있다. 문제는 경제성이다. 예를 들어 바닷물의 경우 100만t당 약 6g의 금이 포함되어 있지만 채산성을 맞추려면 한층 획기적인 방법이 필요하다.
과학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하면서 값싼 물질을 금으로 변환하는 ‘연금술 방식’의 금 생산 방식, 채산성이 떨어지는 장소인 심해 등에 매장되어 있거나 바닷물에 미량 포함된 금을 경제적으로 채굴하는 기술 등의 등장과 상용화는 이미 예고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유럽입자물리연구소와 마라톤퓨전이 전한 소식은 그 서막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다만 실제로 금을 인위적으로 대량 생산하는 데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그런 시대가 온다고 하더라도 국제 협약을 통해 금 생산량을 조절할 가능성이 높다. 무분별한 생산으로 금의 희소성이 흔들릴 경우 금본위제에 근거한 기존 화폐 체계 등도 큰 충격을 받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금술’의 채산성을 높이려는 도전은 계속 이어질 전망이다. 금이 언제까지 ‘희소성’을 유지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2025-08-16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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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K조선, 트럼프 마음 사로잡은 이유는?
최근 타결된 한미 관세 협상에서 가장 주목받은 키워드는 ‘마스가(MASGA·Make America Shipbuilding Great Again) 프로젝트’였다. 이 프로젝트는 단순한 산업 투자를 넘어 쇠퇴한 미국 조선업을 한국 기술력으로 되살리겠다는 전략적 제안이었다. 마스가 프로젝트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대표적 정치 구호인 마가(MAGA·Make America Great Again)에 ‘조선업’을 의미하는 ‘Shipbuilding’을 더해 붙인 이름으로, ‘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뜻이다. 마스가 프로젝트는 1500억 달러 규모의 투자 펀드로 미국 현지 신규 조선소 건설뿐 아니라 기존 조선소 인수, 선박 건조, 공급망 재구축, 유지·보수·운영(MRO), 인력 양성 등을 하는 것이다.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달 31일 기자회견에서 “오늘 합의에 이르도록 가장 큰 기여를 한 부분은 마스가 프로젝트”라며 “트럼프 대통령도 한국 조선업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고 밝혔다. 트럼프는 왜 K조선의 매력에 빠진 것일까.
■ 트럼프와 한국 조선업의 인연
트럼프와 한국 조선업의 인연은 2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세계적인 부동산 투자가였던 트럼프는 1998년 6월 4일 나흘 체류 일정으로 방한해 대우그룹 계열사였던 대우중공업(현 한화오션)의 거제 옥포조선소를 방문했다. 당시 트럼프는 개인 요트로 사용하기 위해 구축함 1척을 발주하겠다는 의향을 내비쳐 화제를 모았다. 방한 당시 옥포조선소에서 건조 중인 구축함을 둘러보면서 즉석에서 발주 의사를 피력한 것이다. 본체를 인수한 후 미국에서 내·외장 인테리어 작업을 거쳐 요트로 개조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계약까지 성사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트럼프는 지난해 11월 재선에 성공한 뒤 당선인 신분으로 윤석열 전 대통령과의 첫 통화에서 “미국의 조선업에 한국의 도움과 협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트럼프는 “한국의 세계적인 군함과 선박 건조 능력을 잘 알고 있으며, 우리 선박 수출뿐만 아니라 보수·수리·정비 분야에서도 긴밀하게 한국과 협력을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27년 전 거제도의 한국 조선소를 직접 방문해 선박 발주까지 검토했을 정도니 한국 조선업에 대한 관심이 예전부터 있었던 셈이다.
■ 마스가, 관세 협상의 게임체인저
이러한 맥락을 간파했던 우리 정부는 K조선을 지렛대로 삼아 미국과 막판 관세 협상을 벌이면서 마스가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정부는 관세 협상 당시 ‘마스가’ 프로젝트를 제대로 설명하기 위해 ‘마스가’를 인쇄한 모자를 만들어 갔다. 마스가 협력안을 담은 가로, 세로 1m 패널을 이용해 프로젝트 내용을 압축적으로 담는 치밀함을 발휘했다. ‘마스가’ 모자 시안은 6월에 이미 챗 GPT를 이용해 디자인해뒀다고 한다. 골프를 좋아하는 트럼프의 취향을 반영해 빨간색 모자를 최종 발탁했다. 그 뒤 동대문의 섬유 업체들을 수소문해 직접 찾아가 비밀리에 제작했다. 마스가 모자는 관세 협상이 급진전함에 따라 워싱턴 직항 항공기를 통해 김정관 산업부 장관 등 협상단에 전달됐다. 협상단은 이 모자와 마스가 프로젝트 개요를 담은 패널을 가져가 트럼프 대통령, 하워드 러트닉 상무부 장관 등 미 고위급에 양국 산업 협력의 필요성을 설명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지난 3일 KBS ‘일요진단’에 출연해 ‘마스가 모자’ 실물을 공개하며 “조선이 없었으면 협상이 평행선을 달렸을 것”이라며 “마스가 프로젝트 제안이 이번 협상의 열쇠로 작용했다”고 설명했다. 조선 투자 아이디어가 협상의 게임체인저가 된 것이다.
■ 미국은 왜 조선업 재건에 매달리나
조선업 재건은 트럼프 행정부가 추진하는 제조업 부흥 계획의 핵심 퍼즐 조각이자, 중국의 해양 패권 장악 시도를 견제하는 주요 수단이다. 미국은 한때 세계 최강의 조선 강국이었지만, 이제는 산업 기반 자체가 붕괴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민간·해군 조선소를 막론하고 시설 노후화, 인력 유출, 투자 부족 등으로 선박 건조 역량이 급감했다. 미 해군은 기존 함정을 유지·보수하는 것도 벅찬 상태다.
미국 조선업 쇠락을 야기한 원인의 하나로 꼽히는 게 20세기 초 제정된 ‘보호무역주의’ 법률이다. 1920년 제정된 ‘존스법’은 미국 내 연안 해상 운송은 미국에서 건조된 선박과 승무원에 대해서만 허용하고 있다. 1960년대 제정된 ‘번스-톨레프슨 수정법’은 국방·군사 관련 선박은 반드시 미국 내에서 건조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두 법률 모두 외국 기업의 미국 내 조선시장 진입을 사실상 가로막아 왔는데, 자국 산업 보호를 위해 시행된 법률이 오히려 산업 경쟁력을 저하하는 부메랑으로 작용한 것이다. 여기에다 1980년대 이후 보조금 축소와 과도한 산업보호정책 등으로 경쟁력을 상실하며 현재 세계시장 점유율이 1% 미만으로 떨어졌다. 지난해 전 세계에서 발주된 1910척 중 미국 조선소가 수주한 물량은 2척에 불과하다. 특히 간신히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핵항공모함, 이지스함 등 첨단 군함과 달리 상선 부문의 건조능력이 사실상 상실됐다. 이 때문에 상선 건조 능력 부활은 미국에서도 주요 과제다.
미국이 조선 약소국으로 전락한 사이 글로벌 물류의 90%가 움직이는 바닷길을 중국이 잠식하고 있다. 세계 129곳 항만과 글로벌 물류 데이터도 장악하고 있다. 중국의 세계 조선 시장 점유율은 50%를 넘겼고, 보유 군함 수는 미국을 앞질렀다. 미 의회조사국(CRS)은 4월 “중국 해군은 이미 370척 이상을 보유한 세계 최대 해군으로 2030년까지 435척의 함정을 보유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미 해군은 지난해 기준 296척을 보유하고 있다. 중국에 비해 조선업 인프라가 절대적인 열세에 처한 미국의 위기감이 점점 커질 수밖에 없다.
■ 조선업계 미국 진출 기회 삼아야
이번 마스가 프로젝트는 한국 조선업계의 미국 시장 진출 물꼬를 터줄 계기가 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업계가 특히 주목하는 부분은 미국 해군 함정 건조 및 MRO 시장 진출 가능성이다. 미국은 2054년까지 연간 300억 달러(약 42조 원)를 투입해 기존 296척의 보유 함정 수를 381척으로 늘린다는 계획이다. 마스가 프로젝트를 통해 이 가운데 일부 물량을 한국 조선업체가 수주할 수 있을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현재 한국 조선소는 미국이 안보를 이유로 외국 조선소에서 미 해군 함정 건조를 금지한 ‘번스-톨레프슨 수정법’ 때문에 비전투함 MRO만 담당하고 있다. 하지만, 트럼프 행정부가 ‘예외’를 인정하면 전투함 MRO나 공동 건조도 가능해질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또 상선 건조 기술이 일본보다 우수하고, 이지스함 등 전투함 구축 능력과 크레인 제작 기술을 모두 갖춘 한국 기업들이 미국 조선업 부활 시장에 올라탈 기회가 될 수 있다. 미국의 조선업 재건 의지는 정권이 바뀌어도 계속 될 수 있어 한국엔 장기적 먹거리가 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또 미국 조선업 부흥은 한국 조선업에 장기적 성장 기회 제공, 글로벌 시장 진출 교두보 확보, 기술 확산 및 국방·안보 협력 확대에 긍정적 기여를 할 것으로 기대된다.
반면 조선은 단기간에 성과를 내는 분야가 아니어서 장기적인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초기부터 과도한 투자에 나서기보다는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내주는 식의 ‘살라미식 투자’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미국 조선업의 공급망이 끊겨 있고, 숙련 인력도 고갈돼 정상 궤도에 올리기까지 예상보다 시간과 비용이 더 들어갈 수도 있다. 또 미국에 산업 생태계 자체를 이전하는 수준의 기술∙인력 유출을 주의해야 한다는 지적도 업계 안팎에서 제기된다.
2025-08-0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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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하는 AI 댕냥이, 누구나 성공할까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SNS를 열면 눈이 휘둥그레지는 이미지와 영상이 쏟아지는 세상이다. 댕냥이(개와 고양이) 셰프의 활약은 흔하고, 코끼리와 사자가 올림픽 다이빙 챌린지를 벌이는 초현실적인 장면도 낯설지 않게 됐다. 의인화된 동물 주인공이 사랑과 배신을 연기하는 ‘AI(인공지능) 펫 시네마’가 유튜브 쇼츠, 틱톡에서 1억 뷰를 기록하는 것도 예사다. 사람은 드러나지 않은 채 AI 아바타와 합성 음성을 내세워 팟캐스트와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익명 콘텐츠’(Faceless Content)도 급부상하고 있다.
독창적이고 기술적 완성도도 높은 콘텐츠는 거대한 트래픽을 일으키고, 그에 비례한 수익을 가져간다. 기획 단계에서 제작, 홍보, 수익화까지 일관된 흐름이 확립된 상황에 AI 기술 발전이 더해지면서 새로운 디지털 크리에이터 산업은 빛의 속도로 진화하고 있다. SNS에는 체험기를 가장해 “몇백만 원의 월 수입을 놓치지 말라”는 제작 노하우 강의 홍보가 넘친다. 굿즈(기념품) 시장도 꿈틀대고, 조회수 쏠림으로 온라인 광고 시장까지 재편되고 있다.
브랜드·제품·업소 홍보 영상이나 유튜브 촬영 때 필요했던 장비와 모델, 전문 인력이 모두 AI로 대체되면서 초래된 파급 효과는 크다. 숏폼과 AI 기술의 화학적 결합은 크리에이터 진입 장벽을 허물었다. AI 서비스가 무한 경쟁에 들어가면서 간단한 지시문(프롬프트)으로, 혹은 명령어 입력 없이 사진만 업로드해도 영상물로 바꿔주는 템플릿과 프리셋이 넘쳐난다.
정말 초보자도 동물을 춤주게 하고, 하늘을 날고, 괴수로 변신하는 영상을 만들 수 있을까. 기자가 직접 AI 도구를 활용해 숏폼을 제작하면서 최근 경향을 진단하고 향후 전망까지 짐작해 봤다.
■ 숏폼과 AI 결합 새 콘텐츠 산업 부상
인스타그램 릴스, 유튜브 쇼츠, 틱톡 등 숏폼은 AI가 만들어 낸 요지경 볼거리로 넘친다. 깜찍한 미니어처 사람은 제품과 업소 홍보용으로 인기다. 미니어처 일꾼들이 음식 주변에 깨알같이 붙어 요리를 하거나, 여성의 얼굴에 매달려 메이크업에 분주한 장면은 입소문을 전파하는 데 효과 만점이다. 현실 세계를 압축한 디오라마(입체 모형)도 공간 이미지 홍보에 곧잘 이용된다. 반려동물 의인화는 가장 인기가 많은 장르다. AI로 탄생한 고양이와 강아지 캐릭터에 서사가 겹쳐 공감대를 얻으면 인기 폭발이다. 일시적인 유행을 넘어 새로운 콘텐츠 산업으로 부상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댕냥이가 회식을 하면서 건배하거나, 김밥을 썰고 찌개를 끓이는 영상 제작의 문턱은 그리 높지 않았다. 챗GPT로 생성한 캐릭터 이미지를 클링(Kling)에 업로드한 뒤 영상 변환 지시문을 입력해서 숏폼을 얻었다. 이어 <부산일보> 제작진을 미니어처로 만들어 취재에서 윤전과 배달까지 신문의 전 과정을 동적으로 구현한 것도 챗GPT와 영상 생성기를 순차적으로 거쳤다. <부산일보> 팟캐스트에서 뉴스를 전달하는 ‘익명 콘텐츠’ 형식은 헤이젠(Heygen)에 5세 아바타 이미지를 올린 뒤 음성 합성을 입혀 제작했다. 배경 음악이 필요하면 수노(Suno)를 이용했다.
만들고 보니, ‘AI가 뚝딱 만들어 줄 것’이라는 통념은 절반만 맞았고, 절반은 틀렸다. 손품을 팔지 않고 허투루 뽑아 내는 것도 물론 가능하지만, 의미를 부여할 만한 수준을 얻을 수는 없었다. 영상에 작은 허점이라도 남으면 시청 몰입감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기술적으로는 장면이 바뀔 때마다 캐릭터가 동일성을 유지하는 게 관건이었다. 정확한 지시문이 없으면 얼굴이나 옷차림, 연령대가 갑자기 달라지기 십상이었다. 또 카메라 각도와 움직임, 조명, 빛깔 톤 등 시각적 기획도 정확히 명령하지 않으면 의도를 벗어나기 일쑤다. 즉, 프롬프트 엔지니어링(명령어 설계)의 정교함이 성공을 좌우한다.
■ 반려동물 귀여움에 스토리 힘 더해야
조회수 대박을 터뜨린 AI 영상의 공통점은 공을 들인 프롬프트 엔지니어링과 함께 치밀한 기획 능력을 꼽을 수 있다. 애완 동물을 앞세운 AI 영상물도 귀여움에 그치지 않고 문화적, 감정적 서사가 결합될 때 바이럴(viral·빠른 확산) 효과를 얻는다. 건배하고 요리하는 댕냥이를 보는 건 즐겁지만, 압도적 관심을 모으는 건 다른 차원의 문제다. 즉, 스토리의 힘이 있어야 한다.
김치찌개 끓이는 진돗개 영상을 보면 반려견에 투영된 인간의 삶을 느낄 수 있다. 찌개가 바글바글 끓을 때 진돗개가 비장의 신라면 스프를 탈탈 털어 넣는 장면은 무릎을 치게 만든다. K푸드에 호감을 가진 외국인에도 어필할 수 있는 지점이다. AI의 생성 기술도 중요하지만 동시대인의 공감이 핵심이라는 의미다.
하지만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기 마련이다. 돈이 되자 영혼 없는 불량품이 소셜 공간을 어지럽힌다. AI의 무한 복제·생산 기능을 악용한 대량의 부실 콘텐츠가 횡행하는 것이다. 급기야 유튜브, 페이스북 등에서도 수익 배분 차단 조치로 칼을 빼들었다.
■ AI 쓰레기 ‘슬롭’ 퇴출될 수 있을가?
개나리광대버섯은 예쁘게 생겼지만 먹으면 큰일난다. 맹독성이기 때문이다. 가관인 것은 개나리광대버섯이 “항산화 작용이 뛰어나 체내 유해물질을 제거하고 노화를 예방한다”고 소개하는 블로그가 많다는 점이다. 검색하는 수고를 조금만 들이면 “아마톡신이라는 맹독을 가지고 있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사망자를 낸 버섯”이라는 정보를 알 수 있지만, 팩트 확인을 등한시한 것이다. 가끔은 생성형 AI조차도 틀린 정보를 제공할 때가 있다.
이런 허위 정보가 버젓이 활개치는 것은 조회수가 광고 수익에 직결되는 탓이다. 구글 애드 센스나 쿠팡 파트너스 수익을 얻으려면 콘텐츠는 다다익선이니 베끼거나 짜깁기를 동원하는 것이다. 하향 평준화가 나타나는 이유다. 생성형 AI 기술이 발달하자 뉴스 링크나 본문을 업로드하기만 하면 짧은 영상을 뚝딱 만들어 주는 서비스까지 생겼다. 언론사가 아닌 데도 대량의 최신 뉴스를 전달하며 조회수를 가져가는 채널이 존재하는 이유다. 유튜브 파트너 등에 등록하면 광고 수익을 배분받기 때문에 생겨난 편법이다. AI 도구로 대량 생산된 콘텐츠가 범람하자 이를 지칭한 ‘AI 슬롭(Slop)’이라는 신조어까지 생겨났다. 쓰레기나 오물을 뜻하는 영어 단어에서 유래했다.
SNS에 흔한 ‘가장 위험한 동물 TOP 10’ 따위의 부실하고 반복적인 영상물이 바로 ‘슬롭’이다. 자극적인 썸네일로 클릭을 유도하지만, 내용은 천편일률적이다. 화를 내거나 우는 동물 등 비현실적이고 억지스러운 장면도 많다. 경제 전문지 포브스는 올 3월 ‘우리가 알아야 할 AI 통계 15가지’에서 “소셜 미디어 이미지의 71%가 AI로 생성된 것”이라면서 ‘비진정성 콘텐츠’(Inauthentic Content)의 도전에 맞닥뜨렸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미국인 SNS 사용자 조사에서는 ‘낚시성(Clickbait) 제목에 짜증’(80%), ‘조작·연출된 비진정성 콘텐츠에 피로감’(69%), ‘반복적인 콘텐츠에 불쾌감’(58%) 등 불만이 커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유튜브를 운영하는 구글은 지난 7월 15일 공지를 통해 대량 생산되거나 반복적인 콘텐츠 등 ‘비진정성 콘텐츠’를 수익화 대상에서 제외한다고 발표했다. 페이스북 운영사 메타 역시 ‘독창적이지 않은 콘텐츠’를 퇴출한다고 밝혔다. 앞으로 대량 생산·반복·비독창적 콘텐츠의 수익화가 제한되거나, 알고리즘 추천에서 배제되는 정책이 확산될 가능성이 크다.
이 같은 정책 변화는 창의적인 1인 크리에이터에게 문호가 열린다는 점에서 바람직하다. 진정성과 독창성 우선 원칙을 매개로 소셜 플랫폼 간에 사용자와 광고주의 신뢰를 얻으려는 경쟁 체제가 유지되는 것이 관건이다. 문제는 수익이 우선인 거대 플랫폼이 광고를 유인하는 트래픽에 초연할 수 있을지 여부다. 인터넷 ‘스팸’을 계승한 AI ‘슬롭’을 퇴출시키려면 소셜 플랫폼의 자정 노력도 필요하지만 공공적인 통제를 병행하는 방안도 고민해야 한다.
2025-08-02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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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흥민·이강인, 이번 싸움은 다르다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드디어 진짜 승부가 시작된다. 전 세계 축구팬들의 시선이 쏠린 UEFA(유럽축구연맹) 슈퍼컵이 오는 8월 14일 새벽 4시(한국 시간) 이탈리아 작은 도시 우디네의 스타디오 프리울리에서 열린다. 이제 20일도 채 남지 않았다. 단판 승부로 펼쳐지는 이 대결은 특히 한국 팬들에게 각별하다. UEFA 챔피언스리그(UCL) 우승팀 파리 생제르맹(PSG)과 UEFA 유로파리그(UEL) 우승팀 토트넘 홋스퍼가 맞붙는 이번 경기에서 손흥민과 이강인이라는 두 한국 축구의 아이콘이 마주 서기 때문이다. 유럽 무대 한복판에서 펼쳐지는 K-더비다. 이 특별한 맞대결은 이미 한국 축구팬들의 뜨거운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다. 물론 변수도 있다. 손흥민이 이적할 가능성, 혹은 두 선수 중 한 명이라도 주전 명단에서 제외될 가능성이다. 그 불확실성마저 팬들의 심장을 뛰게 만들고 더 기다려지게 한다.
*UEFA 슈퍼컵, 그리고 그 상징
슈퍼컵은 UEFA이 주관하는 클럽 대항전으로 챔피언스리그(UCL) 우승팀과 유로파리그(UEL) 우승팀이 단판 승부로 맞붙는다. 1972년 아약스와 레인저스 간 비공식 경기로 시작돼 이듬해 UEFA 공식 대회로 격상됐고, 매년 유럽 정상의 두 팀이 ‘진짜 유럽 챔피언’을 가리는 무대다. 우승팀은 단순한 트로피가 아닌 유럽 최강 클럽이라는 상징성을 얻는다. 레알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AC 밀란 등 명문 구단들이 이 대회의 역사에 이름을 올렸다.
초기에는 컵위너스컵 우승팀이 참가했으나 1999년 대회 폐지 이후부터는 유로파리그 우승팀이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2013년까지는 모나코에서 고정 개최됐지만, 이후 각국 주요 도시로 무대를 옮기며 유럽 축구팬들의 기대를 모으고 있다. 시즌 개막을 알리는 전초전이자 클럽의 전력과 전술을 가늠해보는 상징적 경기로 자리매김했다. 상금은 크지 않지만, 팀의 위상과 브랜드 가치를 드러낼 기회라는 점에서 그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PSG와 토트넘, 팀 전력 분석
PSG와 토트넘 모두 이번 UEFA 슈퍼컵이 첫 출전이자 첫 우승 도전이라는 점에서, 어느 때보다 뜨거운 맞대결이 예고된다. 객관적인 전력에서는 PSG가 한발 앞서 있다. 이번 시즌 챔피언스리그, 쿠프 드 프랑스, FA컵을 모두 휩쓸며 구단 역사상 첫 트레블(3관왕)을 달성했고, UCL 결승에서는 인터 밀란을 5-0으로 대파하며 유럽 정상에 올랐다. 데지레 두에와 뎀벨레를 중심으로 한 빠르고 창의적인 공격진, 안정된 중원과 조직력까지 갖췄다.
하지만 토트넘도 만만치 않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1대 0으로 꺾고 41년 만에 유로파리그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당시 손흥민은 “오늘만은 나를 전설이라 불러라”며 감격을 드러냈다. 손흥민을 중심으로 브레넌 존슨, 제임스 매디슨, 도미닉 솔란케 등이 이끄는 전방 압박과 날카로운 역습은 토트넘만의 색깔을 드러낸다.
PSG가 정제된 예술이라면, 토트넘은 날것의 에너지 속에서 질서를 만들어가는 팀이다. 축구 스타일에서도 두 팀은 선명하게 대비된다. PSG는 속도와 창의성, 토트넘은 절제된 리듬과 직선적인 돌파가 강점이다. 하지만 단판 승부는 오롯이 전력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간절함과 집중력, 그날의 흐름이 판도를 가른다. 결국 이 경기도, 한순간의 집중력과 실수가 운명을 가를 가능성이 높다.
*손흥민과 이강인, 결이 만든 한판 승부
손흥민과 이강인. 한국 축구의 현재이자 미래다. 손흥민은 이미 하나의 장르다. 한국 축구를 그 이전과 이후로 나눌 정도다. 유럽 무대에서 쌓아올린 기록들은 물론이고, 팀을 위해 포지션을 바꾸고 자신을 던지는 플레이가 그를 특별하게 만든다. 말없이 책임지는 토트넘의 주장, 침묵 속에 일을 내는 해결사. 그의 경기는 늘 드라마다.
이강인은 더 이상 유망주가 아니다. PSG의 10번이자 중심을 책임지는 플레이 메이커. 감각적인 왼발, 공간을 읽는 눈, 경기의 리듬을 조율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마요르카의 눈물과 발렌시아의 외로움을 거쳐 파리에서 정교하게 성장 중이다.
두 선수는 대비되는 성장 배경을 지녔다. 손흥민은 아버지 손웅정 씨의 철저한 기본기 훈련 속에서 절제와 희생을 배웠다. 이강인은 어린 시절부터 스페인 무대에서 경쟁하며 창의성과 공격성을 키웠고, 1대 1 돌파와 기싸움에서 밀리지 않는 싸움닭 기질이 자연스럽게 체화됐다. 손흥민이 성실함의 결정체라면, 이강인은 감각의 총아다. 같은 한국인이지만 다른 환경과 문화 속에서 자란 두 선수는 오늘날 전혀 다른 색깔의 축구로 만개했다.
지난해 아시안컵 준결승을 앞두고 두 선수는 잠시 신경전을 벌인 바 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른 의미의 충돌이다. 슈퍼컵은 손흥민의 돌파와 이강인의 패스가 충돌하는 무대다. 빌드업과 창조, 완결의 미학이 이들의 발끝에서 교차한다. 광고 문구처럼, 진짜 싸움은 이제부터다.
*한국 축구 새 역사 보고 싶어
대한민국 축구의 시작은 1882년, 제물포(인천)에서 영국 선원들이 공을 차던 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1905년에는 첫 공식 축구 경기가, 1921년에는 전국 규모 대회가 열렸으며, 1933년엔 조선축구협회가 창립됐다. 이후 FIFA 가입(1948), 월드컵 본선 진출(1954), K리그 창설(1983), 한일 월드컵 4강(2002)까지, 짧지만 치열했던 축구의 여정을 함께 걸어왔다.
그리고 이제 유럽 클럽 축구의 정점인 슈퍼컵 무대에 손흥민과 이강인이 나란히 선다. 이날 이들이 경기에 뛰는 것만으로도 한국 축구사에 있어 전례 없는 장면이다. 유럽 무대 한복판에서 한국 선수 두 명이 ‘유럽 최강’을 놓고 맞붙는 것은 그 자체로 시대적 상징이 된다. 경기 내용이나 결과를 떠나 손흥민과 이강인의 존재 자체가 한국 축구 팬들과 미래의 꿈나무들에게 오래도록 남을 울림이 될 것이다. 아직 이적이나 부상 등 변수는 남아 있지만, 국내 팬들과 언론은 벌써 ‘K-더비의 정점’이라며 기대를 쏟아내고 있다.
전문가와 도박사들은 PSG의 우세를 점친다. 특히 도박사들은 토트넘의 승리 가능성을 15% 내외로 낮게 평가한다. 그러나 숫자는 중요하지 않다. 승부의 향방과 관계없이, 팬들이 응원하는 진짜 주인공은 ‘우리’이기 때문이다. 이날 밤 우리는 TV 앞에 앉아 “저들이 바로 우리나라 선수야”라고 중얼거릴 것이다. 경기 후 유니폼을 맞바꾸고, 서로 어깨를 두드리는 두 사람의 모습. 그 순간이야말로 한국 축구의 또 다른 역사가 될 것이다. 그 장면을 애타게 기다려 본다.
2025-07-26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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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세 도시철도' 문전박대 넋두리[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안녕하세요, 저는 올해로 딱 마흔이 된 부산도시철도입니다.
서울 도시철도에 이어 1985년 7월 19일 전국에서 두 번째로 태어나 지금까지 부산시민들의 발이 돼 온 녀석이지요. 그렇습니다. 이 편지가 배달되는 오늘이 바로 제 생일입니다. 범어사역에서 출발한 제가 범내골역까지 처음 달리던 때가 아직 생생한데 벌써 마흔 중년이 됐네요.
태어날 때부터 국내 최초로 중형 전동차를 도입했다는 얘기들로 떠들썩했는데 마흔이 되고 보니 조금 왜소해 보여 체급을 서울만큼 키워서 태어날 걸 그랬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체급이 작다 보니 터널이나 역 같은 시설까지 함께 작아서 유사시에 국철 형님들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단점이 있어 아쉬움이 많이 남거든요.
그래도 마흔이 되는 동안 시민들의 응원 속에 4호선까지 근육도 좀 키우고 하루에만 85만 명이 넘는 분들을 실어나를 정도로 명실상부한 부산 대중교통의 등뼈가 됐다는 자부심은 큽니다. 코로나 팬데믹 이전에는 하루 승객이 100만 명에도 육박할 정도였지요. 아마도 내년이면 그동안 실어날랐던 분들이 100억 명에 이를 거 같아요. 부산시민 모두가 1인 당 3000번씩 저를 이용한 셈이 되니 저 스스로도 뿌듯하기 그지없어요. 한 연구에 따르면 통행·교통시간 감소에 따른 사회적 비용 절감, 건강증진 등 저로 인한 사회적 효과가 한해 평균 6800억 원에 달한다네요. 이용 승객 당 한해 90만 원 정도의 이익을 보는 셈이라더군요.
이 정도면 마흔 인생이 헛살진 않았다고 봐도 되겠지요? 그럼에도 제가 한 번은 이런 넋두리를 꼭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됐습니다. 시민 여러분께는 그냥 알고 계시라고 드리는 말씀이고요, 정책을 쥐고 흔드는 분들께 드리고 싶은 얘기들이에요.
제가 태어나기 한 해 전에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65세 이상 노인들을 대상으로 도시철도를 무료로 탈 수 있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서슬이 퍼런 시기였기에 대통령의 말은 법이나 마찬가지였고 이듬해 태어난 저에게도 그 지시는 그대로 적용이 됐지요. 노인들에 대한 복지가 그다지 두텁지 못한 이 나라에서 그나마 저런 복지라도 노인들에게 제공하는 것은 환영해야 마땅한 일이라 봅니다. 하지만 이걸 그냥 도시철도 네가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만 내팽개치는 건 좀 아니지 않나 싶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저의 업계부(집이 아니니 가계부라 할 수는 없고 공기업이라고들 부르니 업계부라 부르는 게 맞지 않겠나 싶네요)에는 해가 갈수록 빨간색 숫자가 늘어만 갑니다. 그 중 60% 정도가 노인 무임승차 봉양으로 발생하고 있으니 허리가 휠 지경이지요. 6년 전만해도 노인 무임승차 봉양으로 인한 적자가 한해 1000억 원을 조금 넘는 수준이었으나 지난해엔 1700억 원을 넘어섰습니다. 그렇게 쌓인 적자만 1조 원이 넘을 정도랍니다. 업계부 적자 폭이 너무 빨리 커지는 바람에 낡은 전동차 교체 등 안 그래도 마흔에 접어들면서 여기저기 들어가야 할 비용들조차 감당하기가 힘들어졌네요.
도무지 혼자 감당하기가 어려워 옆집 코레일 형님네를 기웃거려 보니 그 형님네는 무임 수송에 따른 손실액의 60%를 정부로부터 국고보조금 형식으로 받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저도 정부에 전체 무임 수송액의 절반 정도인 890억 정도라도 좀 주십사 했는데 매몰차게 문전박대를 당했네요. 저는 지자체 소속이라 국고보조금 지급 대상이 아니라면서요….
40년 동안 허리가 휘도록 노인 봉양을 해 왔는데도 그런 논리로 냉정하게 얘기하시니 저도 논리적으로 좀 얘기해 볼게요.
서슬 퍼런 시절 내려진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도입된 노인 무임승차를 놓고 제가 어디 소속인지 여부를 따질 필요가 있나요. 노인 무임승차는 당연히 도입 주체가 정부이고 코레일 형님이 적자 보전을 받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지자체가 발의해 추진하지도 않은 시책을 수십년 동안 등이 휘도록 감당해 온 저를 지자체 소속이라는 이유만으로 내팽개친다면 누가 정부를 믿고 기꺼이 일을 하려 할까요.
다음으로 노인 복지는 새로 출범한 이재명 정부가 추구하는 복지정책의 이념과도 궤를 같이하는 ‘기본’복지에 해당하기 때문에 당연히 정부에서 일정 부분을 떠맡아야 한다고 봐요. 다른 복지와는 달리 노인에 대한 복지는 누구나 나이가 들 수 있으므로 차별을 얘기할 수 없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기본복지의 이념에 가장 잘 들어맞기 때문이지요. 특히 부산은 전국 대도시 중에 가장 빨리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으니 선제적으로 이 같은 복지 정책 도입이 필요한 곳 아닌가요.
노인 무임승차에 대한 직접적인 적자 보전이 타지역과의 형평성 문제로 힘들다고 끝내 외면하시려 한다면 다른 방법도 있어요. 부산에만 해당하는 논리적 근거를 적용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세계 최고 원전 밀집지 인근 지역에 대한 반값 전기료를 제게 선제적으로 적용해 주는 거죠. 그것만 하더라도 한 해 전기료 760억 원의 상당 부분을 아낄 수 있으니 노인 무임승차 적자분을 감당하기가 수월해질 테죠.
전 이제 막 마흔이 됐을 뿐입니다. 100세가 넘은 외국 도시철도 아저씨들에 비하면 아직 젊디 젊은 교통수단이지요. 앞으로도 부산시민과 함께 더 나은 가치를 만들기 위해 힘차게 뛸 각오가 돼 있어요. 다만, 등이 휠 것 같은 봉양 독박만큼은 정부가 어떻게든 지혜롭게 덜어주시길 바랄게요. 쉰에는 훨씬 건전해진 업계부를 들고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부산시민의 영원한 발 부산도시철도 올림.
2025-07-1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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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요리] 예언, 합리적 전망일까 사기일까
예언 전성시대다. 대지진, 3차 세계대전, 대홍수, 핵전쟁 등 대재앙을 불러올 사안들에 대한 예언이 이어지고 있다. 최근엔 일본에 대지진이 발생할 것이라는 한 만화가의 예언이 큰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예언은 앞으로 다가올 일을 미리 알거나 짐작하여 말하는 것이다. 합리적인 근거를 들어 말하는 것은 예언이라기보다는 전망이나 예측에 가깝다. 전망이나 예측은 주식 등을 거래하는 자본시장이나 국제 관계 등에서는 이미 일상화된 범주다. 흔히 말하는 통상적인 예언은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비합리적 근거를 통해 미래 상황을 확정적으로 예단하는 것을 일컫는다.
비과학적, 반지성적인 것으로 의심되는 각종 예언의 사기성 여부를 판별하는 것은 무척 어렵다. 인류가 현재까지 구축한 지식 체계로는 예언의 근거인 꿈이나 직감, 종교적 해석 등이 완전히 비합리적이라는 것을 완전히 규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언의 핵심 기저인 ‘운명론’도 같은 이유로 아직까지 논란의 대상으로 분류되는 상황이다. 특히 예언이 실현되지 않았을 경우 교묘한 말바꾸기 등을 통해 책임을 회피하는 경우도 많다보니 이런 경우엔 사기 여부를 둘러싼 논란만 가열될 뿐이다. 예언은 인간의 불안한 심리를 파고든다. 난세일수록 다양한 예언이 속출, 사회적인 피해를 유발하는 사례가 많은 것도 이런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현재까지 등장한 수많은 예언 중 일부라도 적중했다면 인류가 현재까지 생존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 꿈에서 본 7월 일본 대지진 예언
일본 만화가 타츠키 료가 발간한 ‘내가 본 미래’에는 올 7월 5일 새벽 4시 18분 동일본 대지진의 3배에 달하는 거대 쓰나미가 발생한다는 예언이 나온다. 1999년 처음 출간된 ‘내가 본 미래’는 타츠키 작가가 어린 시절부터 반복해서 꾼 꿈을 기록한 일기 형태의 만화다. 그는 1998년 인도 여행 중에 일본 대지진과 관련한 예지몽을 꾸었다고 주장한다. 일본 열도의 남쪽 태평양 부근이 '펑'하고 솟아오르는 장면을 보았다는 것이다. 이번 예언이 큰 파장을 몰고 온 것은 해당 만화에 2011년 동일본대지진과 2020년 코로나 팬데믹을 예견하는 장면이 묘사돼 큰 관심을 끌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일본 정부는 지난해 시즈오카현 앞바다에서 규슈 앞바다까지 800㎞에 이르는 난카이 해구에서 수십 년 내 대지진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또 일본 정부가 이 문제와 관련해 꾸린 태스크포스는 지난 1월 “30년 내 이 지역에서 규모 8~9의 대지진이 발생할 확률이 80%”라고 발표하기도 했다. 7월 5일을 전후해 규슈 가고시마현 남쪽 해상의 유인도 7개, 무인도 5개로 이뤄진 도카라 열도에선 소규모 지진도 장기간 계속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7월 일본 대지진설’까지 퍼지면서 불안감은 갈수록 증폭됐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7월 5일 우려했던 대지진은 발생하지 않았다. 예언이 현실화하지 않은 것과 관련, 이 작가는 당시 7월 5일이라는 구체적인 날짜를 지목한 것은 출판사의 의향이 많이 반영된 것 같다는 다소 알쏭달쏭한 해명을 내놨다. 그러면서도 ‘2025년 7월’에 중대한 일이 발생할 수 있다는 주장은 계속 이어갔다. 이에 따라 그의 예언의 진위 여부는 7월이 지난 뒤에야 판가름 날 전망이다.
일본 정부와 기상청은 이 예언에 대해 허위 정보라며 일축하고 있다. 일본기상청 장관은 지난달 기자회견을 통해 “지진은 날짜·장소·규모를 특정해 예측하는 것이 과학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 소동 전락한 실패한 예언의 역사
1992년 한국은 다미선교회의 이장림 목사의 휴거 예언 때문에 발칵 뒤집혔다. 휴거는 예수가 재림했을 때 믿음을 가진 자들은 하늘나라로 들려 올라가고, 지상에 남겨진 사람들은 7년 동안 환란을 겪다 종말을 맞이한다는 것이다. 시한부 종말론인 셈이다. 이 목사는 당시 1992년 10월 28일 자정이 되면 전 세계 10억 명이 들려 올라갈 것이라며 정확한 시간까지 예언했다. 다미선교회 신도는 10만 명으로 추산됐다. 신도 중 상당수는 머리에 헬멧을 쓰고 휴거를 기다렸다.
1992년 10월 28일에 휴거가 발생한다고 한 근거는 무엇이었을까. 휴거론자들은 이 날짜를 추출하기 위해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과 요한계시록을 차용했다. 노스트라다무스는 1503년 프랑스에서 태어난 의사 겸 예언가로 1999년 지구 멸망을 예언한 인물로 유명하지만 이 예언도 맞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휴거론자들은 요한계시록 종말 부분에 ‘7년간의 짐승의 지배기’에 대한 언급이 있는 점을 감안, 노스트라다무스가 예언한 지구 멸망 시점에서 7년 앞인 1992년에 휴거가 와야 한다는 앞뒤가 맞지 않은 논리를 펼쳤다. 휴거 날짜 추출 근거가 합리적이지도 논리적이지도 않지만 당시 휴거 예언은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언론사들이 취재 경쟁을 벌인 데 이어 외신 기자들까지 몰려와 취재 경쟁에 합류했다. 하지만 휴거는 없었다. 휴거 예언은 결국 휴거 소동으로 막을 내렸다.
미국에서는 1954년 12월 21일 자정에 대홍수로 종말을 맞는다는 이른바 ‘사난다 대홍수 예언’이 있었다. 가정주부와 대학교수 등이 대홍수를 예언한 편지를 받았는데 구원을 받으려면 ‘사난다 신’을 믿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편지를 받은 이들은 사난다 신을 숭배하는 종교를 만들어 종말론을 알리며 포교에 나섰다. 신도들은 재산과 사회적 지위를 버리고 종말을 준비했다. 하지만 종말의 날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신자들은 신이 자신들의 열성적인 기도에 감응해 홍수를 일으키지 않았다는 어이없는 반응을 보였다.
바바 반가(1911~1996)라는 불가리아 예언가의 예언도 유명하다. 어린 시절 사고로 시력을 잃은 뒤 미래를 예지하는 능력을 갖게 됐다고 주장했다. 그는 구체적인 날짜나 지역을 명시하지 않고 두루뭉술한 표현을 사용해 예언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수많은 이들이 울고 바다가 육지를 삼킬 것이다’라는 식이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거대한 국가가 조각날 것이다’라는 그의 예언이 1989년 소련 붕괴를 예견했다는 식으로 해석하곤 한다. 하지만 2010년 유럽 인구 멸종, 2014년 핵전쟁 발발, 2016년 유럽의 이슬람화, 2018년 중국의 세계 지배 등 연도를 지정한 그의 예언은 연이어 빗나갔다. 인도의 점성술사 쿠샬 쿠마르도 행성 정렬 등을 근거로 2024년 6월 18일 또는 29일에 3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고 예언했으나 역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 밖에도 인류의 역사는 예언의 역사라고 할만큼 각 시대마다 다양한 예언들이 난무했다. 우리 역사를 돌아보더라도 조선 중기 이후 민간에 널리 퍼진 예언서인 정감록이 있다. 정감록의 핵심은 ‘진인 정 도령이 나타나 조선을 멸망시키고 새 나라를 세운다’는 것. 하지만 이는 실제 역사와 괴리를 보였다. 이와 관련, 구원을 목적으로 하는 종교의 영역에서는 예언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신약성경 테살로니카 전후서와 베드로 전후서 등의 서간문, 요한계시록(요한묵시록) 등에서도 미래에 대한 예언이나 종말론 등에 기반한 기록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 예언에 대처하는 바람직한 자세
예언은 대체적으로 어떤 목적성을 갖는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상당수 예언은 자신의 존재 부각, 모종의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 등의 감춰진 의도를 갖고 있다. 다미선교회처럼 종교적 정체성 구축이나 신도 확보 등을 위해 예언을 활용하는 사례도 많다. 이밖에 예언을 하는 사람이 정신질환이나 장애로 인해 망상을 실제 현실이라고 믿는 경우도 상정할 수 있다. 특히 예언은 그 시대상과 가치관을 적극적으로 반영하거나 이용하는 경우가 상당수다. 예를 들어 정감록은 당시 무능한 지배권력의 폭정에 지친 민중들이 꿈꾸던 새로운 시대에 대한 희망을 담았다고 볼 수 있다. 다미선교회 휴거 사태는 20세기에서 21세기로 향하는 시점에 대중들이 느끼는 세기말적 불안감을 교세 확장의 동력으로 삼았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인류는 현재 인터넷과 SNS 등으로 모두 연결된 시대를 살고 있다. 지구촌 82억 명의 사람들이 실시간으로 뉴스와 가치관 등을 공유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신자유주의 확산으로 인해 개인과 국가의 빈익빈 부익부 등 경제 양극화 현상은 한층 이 시대 민중들의 삶을 한층 고단하게 만든다. 신냉전 체제가 갈수록 공고해지면서 국가 간 갈등도 깊어지고 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과 이란의 대치 등 자칫 세계대전을 촉발할 수 있는 상황들도 이어지고 있다. 더욱이 지구촌 국가들이 보유한 핵탄두가 지난 1월 기준 1만 2241개에 달한다. 인류는 핵전쟁으로 인한 멸절 위험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다. 기후 위기도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세계 곳곳에서 초대형 산불과 가뭄, 폭염 등이 발생하면서 불안감을 증폭시킨다.
이런 시대 상황을 고려할 때 앞으로도 각종 예언은 이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예언들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더욱이 요즘은 가짜뉴스 등 고의적으로 왜곡한 정보들이 온라인을 통해 무분별하게 유통되는 데다 개인들이 자신의 입맛에 맞는 정보만 편식하는 경향도 무척 강해졌다. 특히 자기가 틀렸음을 인정하는 것이 고통스럽기 때문에 틀린 사실조차 진실이라고 자기합리화하려는 경향성도 갈수록 커지고 있다. 즉, 우리 사회엔 인지부조화 현상이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객관적으로 합리적이지 못한 예언일지라도 개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칠 우려가 무척 커진 것이다.
결국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위를 분별할 수 있는 건강한 ‘생각 근육’을 키우는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특히 인류는 오랜 역사를 통해 세대를 이어가며 지적 체계를 한걸음씩 발전시켜왔다. 인류가 구축한 인문학적인 지적 체계들은 수많은 시간 동안 관찰과 실험, 가설 구축, 검증 등의 지난한 과정을 거친 끝에 확보한 귀중한 유산인 것이다. 이 지적 체계에 대한 지속적인 탐구를 통해 ‘속여도 속지 않는 지적인 인간’을 지향해야 한다. 예를 들어 지진의 경우 인공지능까지 등장한 현재의 기술력으로도 예측 불가능한 돌발적·즉각적 영역에 속한다. 또 일본에서 진도 1 이상 지진이 해마다 2000회 정도 발생하고 많을 때는 6500회까지 일어나는 데다 수십 년을 주기로 대형 지진도 반복된다는 과학적 사실을 안다면 이번 대지진 예언에 대한 다소 객관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또 누군가가 일본 지진과 관련된 예언을 한다면 우연히 적중할 확률이 높다는 점도 알게 된다.
하지만 어느 정도 과학적 지식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왜곡된 정보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면 인지부조화 현상을 겪을 우려가 있다. 특히 지진과 같이 경험칙에 기반한 예언은 인간의 불안감을 더욱 증폭시켜 객관적인 입장을 유지하기 어렵게 만든다. 왜곡된 정보를 제공하는 매체 또는 SNS 접촉을 중단하고 공신력을 가진 정보 매체를 이용하는 습관을 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2025-07-12 [09: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