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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장미 대선, 아들의 선택은?
지난 주말 대학생 아들과 식사 자리에서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누구를 뽑을지 슬쩍 물어봤다. 지난 대선에서 누구를 지지했는지 알고 있기에 이번에는 지지하는 당이 변했는지 궁금해서였다. 아들의 대답은 나중에 TV 토론을 몰아서 본 뒤 결정하겠다는 거였다.
정치 저관여자인 아들의 입장에서는 최소의 시간적 비용을 들여 검증하겠다는 의도였다. 그 또한 한 유권자의 선택이기에, 현재 TV 토론은 너무 이미지화됐다, 자극적이고 네거티브한 질문과 답변만이 난무한다, 품격 있는 태도보다는 공격적인 모습이 부각된다, 후보들의 공약을 심층적으로 검증하기에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이 때문에 TV 토론 방식은 개선이 절실하다 등의 말을 미처 꺼낼 수가 없었다.
부모의 잔소리가 싫을 유권자를 위해 조용히 “그래도 공약 정도는 한번 보렴”이라는 말로 마무리 지었다. 나중에 〈부산일보〉에 게재된 대선 후보들의 공약 기사를 링크해서 보내 줄 생각이다.
최근 언론의 선거 보도를 보면 예전과 달리 대선 후보들의 공약을 검증하는 기사들이 눈에 많이 띈다. 바람직하다. 어쩌면 후보 간 지지율 격차가 많이 나서 기존의 경마식 보도가 재미없고 3년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탄핵당한 전 대통령에 대한 견제 심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래도 국민의 눈높이에 많이 근접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줄 만하다.
한 마디 더 얹자면, 자화자찬일지 모르나 지금까지의 〈부산일보〉의 대선 보도는 소위 수도권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 미디어’들을 압도한다. 어느 정파에도 치우치지 않고 중립적인 입장에서 철저하게 공약을 검증해 오고 있다. 특히 지방지 답게 부산·울산·경남의 지역 공약에 대해서는 지역민의 입장에서 낱낱이 분석하고 있다.
하지만 이같은 언론의 돋보기 검증에 비해 이번 대선 후보들의 공약은 설익은 부분들이 많다. 탄핵에 따른 조기 대선으로 미처 준비할 시간이 상대적으로 적었다는 면죄부를 주기에도 성의가 많이 부족하다. 주로 예전 공약의 ‘판박이, 재탕’에 불과한 것들이 다수여서 실망감을 감출 수가 없다. 경기 침체와 ‘잃어버린 3년’으로 국민들이 이번 조기 대선에 거는 기대감과 열망이 높음에도 대선 후보들은 준비 부족을 여실히 드러냈다.
우선, 김문수 국민의힘 후보는 글로벌허브도시특별법 제정, 산업은행 본사 부산 이전 등 기존 윤석열 전 대통령이 추진하던 정책들을 다시 내놨다. 전혀 새롭지도 않다. 지역 특화 전략도 부족하다. 글로벌허브도시특별법이나 산은의 부산 이전은 번번이 국회에서 막혀왔지만, 이에 대한 해법은 없다. 특히 산은 이전의 경우 인력이나 시스템 이전에 대한 로드맵조차 없다.
또 GTX(광역급행철도) 전국 확대 공약은 부산만의 공약도 아닐뿐더러 이미 부산시에서 추진하고 있는 부산형 광역급행철도(BuTX)와 겹친다. 기존 정권의 정책을 다듬은 수준에 불과하다. 막대한 재정과 시간이 소요되는 만큼 실현 가능성마저 의문이 간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해양수산부의 부산 이전, HMM 본사의 부산 이전, 해사전문법원 신설 등 ‘해양수도 부산’ 비전을 중심으로 한 공약을 내놨다. 해수부와 HMM의 부산 이전은 그동안 지역 해양수산계에서 지속적으로 요구해 왔던 현안이었다. 민주당에서 지역의 요구사항을 대폭 수용한 파격적인 공약이다. 덕분에 지역 공약의 주도권을 이 후보가 선점했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이 후보 측의 ‘해양수도 부산’ 공약으로 그동안 지역에서 최대 현안이었던 글로벌허브도시특별법과 산은 이전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또한 제기되고 있다. 또 해사법원의 경우 인천의 반발로 부산과 인천에 두 곳의 본원을 둔다는 것 또한 선심성 공약을 남발했다는 비판을 면키 어렵다.
이준석 개혁신당 후보는 ‘금융중심지 부산’에 방점을 찍었다. 부산에 본점을 둔 금융기관에 증권거래세 인하 등 파격적인 세제 혜택을 부여해 실질적인 금융중심지로 도약시키겠다는 것과 더불어 데이터 허브 도시 조성, 북항 바다 야구장 건립 등 신선한 공약을 제시했다. 어느 정도 고민을 한 흔적이 엿보인다. 다만 해수부, HMM, 산은 등의 이전에는 부정적인 입장이어서 지역 현안과는 동떨어졌다는 지적도 나온다.
후보들의 공약이 아쉽지만, 그래도 누군가를 선택해야 한다면 현실적이고 실현 가능한 공약을 ‘성의 있게’ 제시한 후보가 낫다. 대통령을 공약만 보고 뽑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공약도 보지 않고 뽑아서는 안 된다. 부산의 유권자라면 조금의 손품을 팔아서라도 후보들의 지역 공약을 살펴보길 권한다. 잔소리가 싫을 유권자 아들에게도 다시 한번 그렇게 권하겠다.
2025-05-25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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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북항 바다 야구장에서 꿈꾸는 부산 프로 스포츠
지난 주말 부산 사직야구장과 구덕운동장은 부산 시민들의 함성으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부산 연고 프로 구단인 롯데 자이언츠와 부산 아이파크가 나란히 삼성 라이온즈, 수원 삼성블루윙즈와 홈 경기를 치렀다. 사직야구장에는 만원 관중이 들어찼다. 17일 구덕운동장에서 열린 경기에도 올 시즌 홈 경기 중 가장 많은 8529명의 팬이 모여 열띤 응원을 펼쳤다. 롯데 자이언츠와 부산 아이파크는 올 시즌 초반 좋은 기세를 이어가고 있다. 두 구단은 각각 올 시즌 ‘가을야구 진출’과 ‘K리그 1 승격’이라는 오랜 꿈을 이룰 가능성을 높여가고 있다.
부산 프로 스포츠는 오랫동안 힘든 시기를 보냈다. 다른 지역 연고 구단들이 잇따라 좋은 성적을 내면서 프로 스포츠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시민들의 높은 관심은 여러 지자체들이 프로 스포츠 인프라를 개선하는 데 중요한 원동력이 됐다. 팬들은 좀 더 쾌적하고 좋은 경기장과 인프라 속에서 프로 스포츠를 즐기고, 팬들의 더욱 뜨거워진 응원 속에 각 프로 구단은 더욱 좋은 성적을 냈다. 프로 스포츠 속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진 셈이다.
반면 부산 프로구단과 부산시는 그동안 선순환 구조를 만들지 못했다. 팀 성적은 하위권을 밑돌았고, 구장 신축에 대한 논의는 불붙지 못했다. 그동안 사직야구장과 구덕운동장은 낡아갔고, 엄청난 유지보수 비용은 늘어갔다. 그 사이 한국 프로야구에서 서울·인천·경기를 제외한 비수도권 5개 구단 중 신축 구장이 없는 구단은 이제 롯데 자이언츠뿐이다. ‘조류 동맹’으로 일컬어지는 한화 이글스는 올 시즌부터 신축 구장을 이용하고 있다. 부산 아이파크와 K리그 3(3부 리그) 부산교통공사 홈구장인 구덕운동장 역시 1928년 준공부터 지금까지 보수공사를 거듭하며 명맥을 잇고 있다.
롯데 자이언츠와 부산 아이파크가 시즌 중반으로 향하는 5월 중순까지 좋은 성적을 내면서 부산 시민들 사이에서는 올해는 ‘함 해보입시더!’라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롯데 자이언츠와 부산 아이파크는 경기장 밖 힘든 정치·경제 상황 속에서 시민들의 깊은 시름을 조금이나마 덜어주는 ‘비타민’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 다시 한번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는 북항 바다 야구장 추진 소식은 ‘구도’ 부산 시민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고 있다.
부산 원도심 상권 부활의 심장이라고 할 북항 지역에 야구장을 짓자는 논의가 시작된 것은 벌써 10년이 훌쩍 넘었다. 10년 전인 2015년 2월 당시 서병수 부산시장과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겸 롯데 자이언츠 구단주는 함께 북항 부지를 바라보며 바다 야구장을 짓기로 의기투합(부산일보 2015년 2월 12일 자 1면 보도) 했다. 두 사람의 의기투합 속에 양측 실무진들은 야구장 예정부지와 면적 등 세부적인 문제까지 검토하기도 했다. 당시만 해도 북항 야구장 건설은 손에 잡힐 것 같았지만, 부산시와 롯데의 대내외 여건 변화 속에 이뤄지지 못했다.
꺼진 줄 알았던 북항 바다 야구장 논의가 다시 달아오르고 있다. 롯데 자이언츠가 탄탄한 전력을 바탕으로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고, 점차 부산 시민들과 롯데 팬들의 가을야구 진출 기대감이 커지면서 북항 바다 야구장 건설에 대한 열망도 높아지고 있다. 롯데 자이언츠 선수와 팬들이 더 멋지고 나은 환경에서 모두 ‘행복 야구’를 즐기자는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있다. 정치권도, 지역 언론도 북항 바다 야구장 건설에 목소리를 키우고 있다. 여기에다 정철원 협성종합건업 회장이 북항 바다 야구장 건립을 위해 2000억 원을 기부하기로 약속했다. 야구장 신축 논의가 늘 예산 확보에 발목이 잡혔던 상황을 떠올리면 정 회장의 기부 약속은 반가울 수밖에 없다.
북항 바다 야구장은 단순히 야구를 즐기는 공간이 아니다. 바다를 배경으로 야구, 쇼핑, 문화, 컨벤션 기능이 어우러진 복합 문화 공간으로 조성돼야 한다. 북항 바다 야구장은 부산 원도심을 되살리고 북항 재개발 사업을 이끌 핵심 사업이 될 수 있다. 더 나아가 북항 바다 야구장은 ‘구도 부산’을 지켜온 부산시민들의 자존심과 자부심을 끌어올릴 수 있는 시설이 될 수 있다. 부산의 도시 브랜드에 활기와 열정을 더할 기회이기도 하다.
롯데 자이언츠와 부산 아이파크의 올 시즌 활약은 북항 바다 야구장 신설 논의 시작의 중요한 씨앗이다. 이제 롯데 자이언츠의 가을야구 진출·한국시리즈 우승으로 떡잎을 틔우고, 부산시는 적극적인 행정 지원과 검토로 튼튼한 줄기를 뻗게 해야 한다. 든든한 밑거름이 될 부산 시민들의 열정 넘치는 응원은 이미 준비돼 있다. 북항 바다 야구장에서 롯데 자이언츠 선수들의 9회 초 마지막 아웃 카운트, 9회 말 끝내기 홈런을 보며 환호할 수 있는 순간이 이뤄지길 기대해 본다.
김한수 편집부장 hangang@busan.com
2025-05-18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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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희망 고문 대선 공약
또다시 대선이다. 12일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된다. 대선은 지역이 중앙에 존재감을 보일 수 있는 중요한 기회로 여겨져 왔다. 그래서 각 지자체는 물론 시민사회단체 등도 대선 때마다 지역 현안들의 대선 공약 반영을 위해 분주하다. 이번에도 부산에선 시와 부산상의, 시민단체 등이 최근 대선 공약에 포함되어야 할 과제들을 선정했다.
그러나 대선이 갈수록 보수 진보 양 진영의 정략적 대결로 치닫고 있는 데다, 지난 대선 때 부산 공약의 진척 상황을 보면 대선 공약이 그렇게 중요한가라는 의문이 드는 게 사실이다. 직전 대선 주요 공약들이 결국 공수표가 돼 그간 지역에서 기울여온 노력이 허사로 돌아간 현실을 보면서 허탈하기만 하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공약한 2030 월드엑스포 부산 유치전은 결과를 다시 떠올리기도 민망할 정도로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 완패했다. 당초 리야드와의 승부에서 대등할 것이라고 판단했던 정부와 부산시의 준비 부족이 그대로 드러났다. 이에 노무현 전 대통령 때부터 시작된 북항 재개발 사업도 여전히 답보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동남권의 염원인 가덕신공항 건설 사업도 우여곡절을 거치며 드디어 첫삽을 뜨는가 했지만 다시 차질을 빚고 있다. 시공사인 현대건설 측이 공사 기간을 입찰 공고에서 제시한 84개월(7년)이 아니라 108개월(9년)로 고집하면서 국토부가 수의 계약 절차를 중단했다. 다시 입찰을 하든, 어떤 방식이든 당초 정부가 약속했던 2029년 개항에는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 사이 중·장거리 해외 노선을 이용하기 위해 인천공항을 오가는 동남권 주민들의 불편과 손해는 계속되고, 트라이포트 운영을 통한 동남권 발전은 지연될 수밖에 없다.
윤 전 대통령의 부산 핵심 공약이던 산업은행 본사 부산 이전도 결국 이뤄지지 않았다. 산업은행 이전이 부산을 실질적인 금융중심지로 성장시키고 동남권 산업 생태계를 업그레이드시킬 촉매제가 될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대통령과 국민의힘 주도의 공약에 의회를 장악한 더불어민주당이 철저히 반대했다. 월드엑스포 유치 실패의 상처를 치유하고자 부산시와 정부가 추진한 부산 글로벌 허브도시 특별법 역시 민주당이 외면했다.
결국 지난 대선에서 제시된 주요 대선 공약 중 실제로 이행된 것은 없다. 각 당 모두 서로 비난하기 바쁘지만, 쇠락하는 부산을 되살리기 위한 진심어린 노력은 양측 어디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국민의힘은 야당 설득에 소극적이었고, 민주당은 정부와 여당이 추진하는 모든 일에 반대만 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윤 전 대통령의 뜬금없는 계엄령 선포와 그에 따른 탄핵으로 인해 대선은 예정보다 2년 일찍 찾아왔다. 아무것도 이뤄놓은 것 없이 완전히 새롭게 판을 짜야 할 가능성도 있다. 탄핵 이후에도 자중지란인 국민의힘은 이제야 후보를 정해 아직 발표된 지역 공약이 없다. 반면 이재명 후보를 내세운 민주당은 일찌감치 공약을 발표했다. 3년 전 공약이었던 부울경 메가시티 구축과 해운·물류 클러스터 조성 외에 해양수산부 부산 이전과 해사전문법원 설치라는 깜짝 공약을 내놨다. 해양산업의 기반을 강화하면서 부산을 명실상부한 해양강국의 중심도시로 육성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여기에 북극항로를 개척해 대륙철도와의 연결을 통해 부산을 동북아 물류 플랫폼으로 발전시키겠다는 구상도 더했다.
부산의 십수년 된 과제였던 해사법원 설립과 함께 해양수산부 이전까지 발표한 이 후보의 공약에 설렌 것도 잠시, 그는 수도권 공약을 발표하면서 인천에도 해사법원을 설립하겠다고 했다. 인천에 들어설 법원은 국제 해사사건 전문으로 특화 발전시키겠다고 강조했다. 이 후보의 구상대로면 향후 해사사건은 ‘국내 부산, 국제 인천’으로 이분화한다. 해사사건 대부분이 국제계약과 관련한 분쟁을 다루는 해외 소송이다. 부산과 인천의 표를 의식해 해사법원 공약을 이용한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온다. 여기에 부산이 크게 목소리를 내지 않았던 해양수산부 부산 이전 공약도 단순히 선거용이란 의문을 낳는다.
지난 3년을 또 허송세월하면서 부산은 더 힘들어졌다. 올해 65세 이상 노인 인구가 18~39세 청년 인구를 추월할 정도로, 부산은 더 노쇠해졌고 경기는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소멸하는 지방을 살려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선 지금 당장 뭐라도 해야 할 때다.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산업은행 이전과 해양수산부 이전 등 각 당 공약 가리지 말고, 바로 행동에 옮기길 바라본다.
2025-05-11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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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연휴를 잘 보내는 법
이번 주말부터 4일간의 연휴가 시작된다. 근로자의 날과 하루를 더 쉰다면 최장 6일간의 휴일을 보낼 수 있다.
연휴를 잘 보내는 법은 제각각일 것이다. 그럼 연휴를 최악으로 보내는 방법은 무엇일까?
의외로 많은 이들이 꼽는 휴가를 망치는 법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스마트폰 사용이나 텔레비전 시청 같은 수동적 활동으로 휴일을 다 보내고 나면 쉬었다기보다는 허무함과 시간을 낭비했다는 후회가 든다는 것이다.
지난해 말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2024 국민여가활동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사람은 하루 평균 3.7~5.7시간의 여가 시간을 갖는데, 여가 시간에는 텔레비전이나 동영상 시청, 인터넷 등 수동적으로 시간을 보내는 이들이 가장 많았다.
흥미로운 것은 여가 활동에 참여한 종류가 많을수록 여가생활에 대한 만족도가 높아지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연간 5개 이상의 여가 활동에 참여한 이들은 여가생활 만족도(7점 척도 기준) 평균이 5.4점에 달했다. 반면, 1~2개 활동에 그친 이들의 만족도는 평균 4.8점에 머물렀다.
휴식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단순히 하던 일을 멈추는 것을 넘어, 자신의 만족감을 높이는 의도적인 행위가 필요하다는 것을 방증한다. 결국 잘 쉬려면 자신이 어떤 행위를 할 때 즐거운지 자기 이해가 먼저이다.
사람들은 나이 들수록 자신의 즐거움을 잘 모르는 경향이 있다. 결혼을 앞둔 이들에게 짖궃게 한 번씩 들려주는 섬뜩한 비유가 있다. ‘결혼은 연필깎기’라는 말이다. 연필깎기는 연필을 연필답게 만들지만, 깎이다 보면 연필은 몽당연필이 되었다가 결국 사라진다(!). 결혼뿐일까? 사회생활도 비슷할 것이다.
부모, 직장인 등 자신에게 주어진 사회적 역할에 충실하다 보면 책임에만 익숙해져, 자신을 제대로 돌보기 어렵다. 역할만 있고, 존재가 사라지는 것이다. 직장 맞춤형 인간으로 수십 년을 살아오다 퇴직 후 무한정 주어진 시간 앞에서 막막함을 느끼는 것도 그 때문이다.
연필이 아닌 만년필이 되려면 자기를 잘 돌보고, 필요할 때 잘 쉬어야 한다. 자신이 어떤 쉼을 추구하는지 아는 것은 자신을 잘 돌본다는 것이고, 그만큼 건강하다는 뜻이다. WHO는 자기 돌봄을 ‘개인이 자신의 건강을 증진하고, 질병을 예방하며, 질병에 대처하고, 장애를 관리하기 위해 취하는 능동적인 행동’으로 정의한다.
충분한 수면, 균형 잡힌 식사, 규칙적인 운동과 같은 신체적 돌봄부터 자신의 감정을 인식하고, 정신적 자극과 휴식을 균형 있게 유지하는 것도 자기 돌봄의 영역에 포함된다.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 맞는 방식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식사만 하더라도 건강한 식사를 하려면 자신의 몸 상태에 따라 식사량이나 식사의 종류가 달라진다. 평균은 참고 사항이지 모범 답안이 아니기에 자신의 몸 상태를 주의 깊게 관찰하며 시행착오를 겪는 과정이 필요하다. 자신을 돌본다는 것은 적극적으로 내 몸이나 정서 상태와 끊임없이 소통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과 소통하려면 별도의 노력이 필요하다. 호흡에 집중하는 호흡 명상을 한 번이라도 해보면, 단 몇 초만이라도 잡생각 없이 자신의 들숨과 날숨을 조용히 관찰하는 행위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있다. 천천히 음식을 씹으며 맛을 음미하는 것, 몸을 움직일 때 근육의 긴장도를 느끼는 것 등도 말처럼 쉽지 않다.
회사와 가정에서 맡은 역할에 숙련도를 높이기 위해 오랜 시간 노력하는 것만큼이나 자신의 몸과 마음에 집중해 자신을 돌보는 것도 훈련이 필요하다.
초고령사회에서는 각 개인이 자신에게 집중해 스스로를 돌보는 인프라가 더욱 필요하다. 한국의 기대수명은 2022년 기준 82.7세인데 건강수명은 65.8세에 불과하다. 기대수명과 건강수명의 차이는 약 17년. 수많은 이들이 삶의 후반부를 질병이나 불편과 싸우며 살아간다는 의미다.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불행한 일이다. 의사 등 전문가들을 이 간극을 줄이는 방법으로 자기 돌봄을 꼽는다.
이 때문에 최근 유튜브 등 자기 돌봄에 관한 콘텐츠가 크게 늘고 있다. 많은 이들이 자기 돌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반가운 일이다. 부산일보도 여행과 음식, 건강, 문화생활 등의 콘텐츠를 더 강화할 예정이다. 지역을 기반으로 여가를 즐기고, 자신을 잘 돌보는 방법이나 사람들의 이야기를 풍성하게 담는다. 헬스장 운동 영상을 누워서 보면서 대리만족하는 방식이 아니라,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자신을 돌보는 행위를 직접하는 이들이 늘었으면 한다.
이번 연휴, 특별한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면 자기로의 여행을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 내 몸과 마음은 어떤지, 그리고 나를 위해 무엇을 하면 좋을지 탐색하는 여행 말이다.
2025-04-27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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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기로에 선 한국 영화 그리고 부산
다음 달 개막하는 프랑스 칸국제영화제에 초청된 한국 영화는 20일 현재까지 단 한 편. 부산에서 활동하는 정유미 감독의 단편 애니메이션 ‘안경’(Glasses)이 유일하다. 장편영화의 경우 칸영화제 집행위원회가 발표한 경쟁, 비경쟁, 주목할 만한 시선 등 모든 부문의 초청 리스트에 한 편도 이름을 올리지 못해 충격을 줬다. 우리 장편영화가 칸영화제에서 한 편도 초청받지 못한 건 2013년 이후 12년 만이라고 한다. K팝과 함께 K컬처의 대표 주자로 손꼽히며, 잘나가던 영화산업에 적신호가 켜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물론, 칸영화제 초청 여부가 한 나라의 영화 수준을 결정짓는 척도라고 볼 수는 없다. 간혹 영화제 개막 전에 추가 초청작을 발표하는 경우도 있어 정 감독의 ‘안경’을 이을 낭보가 들려올 가능성도 아예 배제할 순 없다. 하지만 우리 영화계에서는 이번 성적표를 무겁게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이미 우리 영화산업은 곳곳에서 위기 신호를 보내고 있다. 올 3월 극장 관객 수는 지난해 대비 45%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매출액 역시 47% 줄어들었다. 관련 통계를 집계하는 영화진흥위원회 측은 장재현 감독의 ‘파묘’가 1000만 영화 반열에 오른 지난해 3월과 달리, 올해는 그만한 히트작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극장가의 실적 부진도 심각하다. 국내 최대 멀티플렉스 운영사인 CJ CGV가 희망퇴직과 영화관 폐쇄 등 구조조정에 나섰다. 코로나의 직격탄을 맞았던 영화관 산업은 팬데믹 이후 잠시 회복세를 보이는 듯했지만, OTT(온라인동영상서비스)의 급성장 속에 콘텐츠 소비 패턴이 다변화하면서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코로나 시기 제작됐다 미처 개봉하지 못한 이른바 ‘창고 영화’조차도 이제는 바닥을 보이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영화도시’를 표방하는 부산 역시 관련 산업의 부진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지난해 부산영상위원회의 촬영 지원작은 총 74편으로, 12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지역 로케이션 촬영 수요가 줄어든 탓이다. 국내 제작사와 방송사 등이 수도권에 밀집된 탓에 대규모 인원이 이동해야 하는 지역 촬영이 더 큰 타격을 입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부산영화촬영스튜디오의 지난해 총 대여 일수도 315일(5개 작품)로, 2023년 694일(6개 작품)과 비교해 절반 이상 줄었다. 코로나19 이전에 스튜디오 대여율이 90%대를 기록하는 등 매년 ‘포화’ 상태였던 것과는 상황이 180도 달라졌다. 부산영상위원회는 해외 작품을 적극 유치하는 방식으로 어려움을 헤쳐나간다는 입장이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아 보인다.
‘아시아 영화 허브’로 자리매김한 부산국제영화제(BIFF)도 갈 길이 멀다. 지난 2년간 공석이었던 집행위원장 자리에 지난달 BIFF 프로그래머 출신 정한석 위원장이 선임되긴 했지만, 조직 재정비 등 쌓인 과제가 적지 않다. 특히 올해 BIFF는 30주년을 맞아 경쟁 부문 신설 등 대대적인 변화를 예고하고 있기에 더욱 더 철저한 준비가 요구된다. 이런 가운데 올해 행사는 추석 연휴와 전국체전 일정 등으로 10월이 아닌 9월로 앞당겨져 행사 개최까지 남은 시간도 촉박하다.
기로에 선 한국 영화와 영화도시 부산의 재도약을 위해 영화진흥위원회, 부산시, BIFF, 부산영상위원회, 영화의전당 등 관련 기관이 머리를 맞대야 한다. 영진위는 봉준호, 박찬욱, 이창동, 홍상수 등의 뒤를 이을 신진 감독의 발굴과 지원에 힘을 쏟아야 한다. 부산시와 부산영상위, BIFF는 생각의 전환과 새로운 시도에 과감히 나서야 할 때다. 인천이나 대전 등 서울에서 가까운 도시들과의 로케이션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을 차별화된 전략이 필요하다. 전주국제영화제를 비롯한 국내 영화제들이 프로그램 다양화와 영화인 참여 확대 등으로 매해 성장하고 있는 만큼 BIFF도 과거의 영광에 머무르지 않고 새 역사를 써 나가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부산이 BIFF의 명성에만 기댄 채 현실에 안주하고 있다가는 영화도시라는 타이틀마저 다른 도시에 뺏길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젊은 영화인들이 만든 수준 높은 작품이 대중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더 많이 제공할 수 있도록 관련 행사나 정책을 확대할 필요도 있다. 올해 칸영화제에 초청된 정유미 감독은 “칸 비평가주간에 초청된 게 영광스럽다”면서 “(이를 계기로)관객을 만날 기회가 늘어나는 게 더 큰 의미가 있는 것 같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칸 이후 한국에서도 상영을 많이 하고 싶다. 관심을 갖고 많이 봐주셨으면 좋겠다”고 희망했다. 그동안 우리 영화산업을 키워온 관객들의 애정과 영화도시 부산을 지탱해 온 시민들의 열정도 지속되길 바란다. 그런 의미에서 오는 24일 개막하는 부산국제단편영화제에도 뜨거운 관심을 가져주길 기대해 본다.
이자영 문화부장 2young@busan.com
2025-04-20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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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좋은 청년 일자리라는 허상
큰 아이가 중학교에 입학하던 날, 쪼그라든 전교생 수에 놀라던 차에 경남에서 초등학교 입학식을 촬영한 포토뉴스가 한 건 올라왔다. “올해는 신입생 있어요!”라며 한 명뿐인 1학년을 둘러싸고 군 관계자들이 축하 선물을 전하고 있었다. 반나절 사이 접한 소식들에 걱정보단 헛웃음이 나와 스스로도 놀랐던 기억이 난다.
지역 소멸은 경각심이 생기기도 전에 일상에 빠르게 뿌리를 내리는 중이다. 백약이 무효라며 나라 전체가 자포자기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인지도 모르겠다.
문득, 도시 재생이란 단어가 회자되던 시절이 떠올랐다. 지자체마다 원도심이 깨어나면 주민이 돌아올 거라며 낡은 골목에 페인트칠 하기 바빴다. 보조금에 눈먼 사회적 기업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이성이 아니라 감성에 사회 문제를 호소하던, 돌아보면 실소만 나오는 장면이다.
헛구호가 된 도시 재생 이야기를 꺼내는 건 지역 소멸을 막을 대안으로 자꾸만 그 시절 감성의 정책과 해법이 도드라지는 게 걱정이 되어서다. 수도권을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좋은 기업과 일자리만 있으면 청년 유출을 막을 수 있다고 부르짖는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진작부터 수도권 팽창을 견제했더라면 지역 소멸의 우려는 사라졌을까. 모르긴 해도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수도권 집중화는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고, 이촌향도 역시 수십 년 전부터 국가적 난제였다. 이제 출생율 하락까지 맞물리며 지역 소멸이란 새로운 이슈로 부상하고 있을 뿐이다.
얼마 전 한 경제단체 관계자에게 들은 이야기는 쓴웃음을 짓게 했다. 강서구 산단에서는 그렇게 보기 힘들던 청년 인력이 시내 한복판 신축 워케이션 건물에서 구인 공고를 내자 구름처럼 몰려오더란 이야기다. 대단한 급여나 복지가 보장되는 일자리가 아니어서 더 놀랐단다.
화려한 일자리만 쫓는다고 청년을 비웃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청년은 다들 딴세상 일자리를 꿈꾸는데 지역의 경제 사령탑들은 급여 보조나 기술 교육에만 예산을 쏟아붓는다. 그게 목이 말라 고향을 떠나는 게 아닌데도 말이다.
아이에게 부모가 극복의 대상이듯, 청년에게 고향은 극복의 대상이다. 수도권이란 큰 무대를 동경하는 이들에게 고향의 일자리는 같은 값이라도 큰 매력이나 울림을 주지 못한다. 가뜩이나 양질의 일자리가 없는 판에 이런 심리적 간극까지 메우지 못 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좋은 청년 일자리’란 말이 지역에선 얼마나 가성비 떨어지는 구호인가 말이다.
춘추전국시대 경마광이던 제나라 장군 전기를 승리로 이끈 손빈의 비책은 ‘삼사법’이다. 손빈은 전기에게 경쟁자인 제나라 공자들이 가진 상등마에 하등마를 붙이라고 조언했다. 그리고 공자들의 중등마와 하등마를 전기의 상등마와 중등마로 상대하게 했다. 자존심을 버린 배팅은 승리로 이어졌다.
부산시의회에 따르면 5년간 청년 정책의 카테고리로 투입한 예산만 6000억 원대에 달한다고 한다. 수도권 상등마에 같은 상등마로 승부수를 띄운 부산의 패착이다. 지역이 수도권과 인구 쟁탈전을 벌이며 청년 정책, 일자리 정책으로 맞대결을 벌여봐야 승산은 뻔하다.
미국 마이애미가 아마존 창업자인 제프 베이조스 등 자본가들을 끌어들이는 건 파격적인 법인세 제도다. 제주가 공공기관과 공기업 직원들의 전근지로 인기를 누리는 건 국제학교와 빼어난 자연경관이다. 부산이라면 온화한 기후와 저렴한 주택 가격, 그리고 상대적으로 나은 문화 인프라 정도가 ‘전략마’가 되겠다.
기업과 일자리 유치만이 만병통치약이라던 부산이 최근 구역별 국제학교 설립과 서울 빅5 분원 유치, 소득세 감면 등을 새 청사진으로 언급하고 있다. 늦게나마 정주 여건에 대한 공직사회의 인식이 바뀐 점이 반갑다.
국민의 반 이상이 몰려들며 수도권의 정주 여건은 임계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그 위험한 신호는 앞으로 크고 작은 사건을 통해 더 자주, 더 충격적으로 표출될 것이다.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지만 코로나19가 ‘돈 버는 곳=사는 곳’이라는 그간의 직주근접 공식을 깨버렸다. 유목민의 삶을 꿈꾸는 경제 인구가 늘어나면서 정주 여건에 꾸준히 투자해 온 지역에는 반대로 새로운 기회가 찾아올 가능성이 높다.
배가 고픈 게 아니라 꿈이 고파서 고향을 떠나겠다는 청년에게 없는 ‘얄팍한 비스킷’을 주려고 지역의 역량을 소진하진 말자. 잠시 고향을 떠난 그들이 기회비용 없이 돌아와 기댈 수 있는 교육과 주거, 의료와 교통에 역량을 쏟아야 한다. 울며불며 매달리는 연인보다 자신감 넘치게 돌아선 연인 앞에서 이별의 순간 한 번 더 망설이게 마련이다.
물론, 돌아온 이들이 청년이 아니라 경제적으로 더 성숙해진 중장년이라면 지역 입장에서 이보다 고마울 일은 없을 터다.
권상국 지역사회부장 ksk@busan.com
2025-04-13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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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리더십 부재 속 날아든 관세 청구서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탄핵의 강’을 건너야 했던 국민들은 동시에 미국발 무역 질서 재편을 불안한 심경으로 지켜봐야 했다. 리더십 공백이 커진 사이 정부가 어쩔 줄 모른 채 허둥대자, 기업들은 저마다 도생을 꾀해야 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생필품과 서비스 가격도 뛰기 시작하면서 서민 지갑도 닫히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 파면으로 불확실성이 어느 정도 걷혔다고는 하나, 한국 경제는 여전히 불투명하기만 하다. ‘수출’이 ‘국가 생존’과 동의어인 한국에 미국이 던진 관세 폭탄의 영향은 실로 지대하다. 거대한 내수 시장을 둔 중국이나 침체 속 30년을 버틴 ‘저력’을 지닌 일본과는 압박의 강도 자체가 다르다.
몇몇 장면만 추려도 정부와 기업 모두에서 대응력 부족이 여실히 드러난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은 국제법이나 자국법 조문 등에 전혀 개의치 않고 속전속결로 관세 부과 조치들을 쏟아내고 있다. 비단 한국만의 위기는 아니지만 협상 상대국에 대응 시간조차 주지 않겠다는 태세인데도 정부는 속수무책이다.
정부는 최상목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주도로 경제부처가 머리를 맞댔고 산업통상자원부 장관과 실무진을 중심으로 미국 정부와 물밑 협상을 벌였다고 했다.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지난 2월과 지난달, 두 차례 방미길에 올랐다. 하지만 탄핵 사태로 대통령 직무 정지가 된 탓에 정부는 트럼프와 전화통화 한 통 못한 채 고지서를 받아들었다.
최종적으로 지난 3일(한국 시간) 미국 정부는 한국에 25%라는 높은 수준의 상호관세율을 매겼다. 앞으로 미국과의 개별 협상에 따라 결과는 바뀔 수 있다고 해도 정부의 ‘물밑 노력’은 얻어낸 것이 없다는 평가가 따른다. 정부 인사들은 “계엄으로 인한 리더십 공백” 탓을 했다.
기업들도 허둥대긴 마찬가지였다. 현대자동차는 선제적으로 미국 현지에 31조 원에 달하는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정의선 회장을 백악관까지 불러 ‘모범 사례’로 추켜세웠다. 하지만 한동안 한국에서 생산돼 미국으로 가는 현대차 차량들은 25% 관세를 물고 미국차와 경쟁해야 한다. 미국에 모든 협조를 한 현대차가 미국 측으로부터 모종의 ‘감사 표시’를 받을지 궁금하기는 하다.
상당한 관세 부과가 확정적인 반도체 부문 대표 기업,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이 시기 중국과 일본에 다가섰다. 삼성전자 이재용 회장과 곽노정SK하이닉스 사장은 직접 중국으로 건너가 BMW, 메르세데스-벤츠, 퀄컴, 페덱스, 화이자 등 글로벌 CEO들과 함께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만났다.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국제공상계 대표 회견’ 자리였다. 시 주석이 “중국은 이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외국 기업인들에게 이상적이고 안전하며 유망한 투자처”라며 러브콜을 보냈지만 두 기업은 미중 양국 눈치를 부지런히 봐야 하는 처지가 됐다.
대기업의 경우 ‘관세 25%를 무느냐’ ‘미국의 높은 생산 비용을 감당하느냐’ 사이에 선택지라도 있다. 대기업에 기대는 하청 중소·중견기업 처지는 더 암울하다. 해외 생산기지를 갖출 여력이 없어 기업 규모를 줄일 수밖에 없는 곳이 대다수다. 낮은 인건비를 찾아 베트남이나 인도네시아 등에 진출한 기업들은 한국에 있느니만 못하게 됐다.
가계 부문에는 머지 않아 인플레이션 폭탄이 떨어질 것으로 보인다. 막대한 대출 이자에 허덕이며 소비 여력마저 줄었는데, 물가상승 압박이 더해지는 형국이다.
조기 대선으로 두 달 후 새로운 리더십이 탄생하지만 그동안 한덕수 권한대행이 국정을 책임지는 불완전한 혼란기를 보내야 한다. 준비 안 된 대선이다 보니 새 대통령은 인선, 정부 조직 개편, 국가 전략 수립 등을 마치고 완전한 리더십을 발휘하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하다. 늦어지면 올해 하반기까지 우리 경제는 외부 위기에 노출된 채로 견디는 수밖에 없다.
전문가들은 관세 전쟁에 대해 트럼프 대통령의 ‘횡포’만이 아닌, 장기간 세계 무역을 이끌 새로운 질서가 정해지는 주요한 변곡점으로 보고 있다. 최강국 미국이 폭력적이고 억압적으로 첫발을 뗐지만 각국은 앞으로 자국 이익을 최우선에 두는 보호무역 전쟁에 속속 가세할 것이 틀림없다. 대응은 나라마다 다르다. 일본은 적극적으로 미국의 ‘품’에 안길 자세고, 중국은 ‘마이 웨이’ 외에 방법이 없다.
한국 경제는 막대한 수출 감소가 불가피하고 그에 따른 경제 침체를 감내해야 할 처지다. 서두른다고 능사는 아니니 차분히, 무엇보다 세심하게 우리의 계산기를 두드려야 한다. 마지막 골든 타임을 놓치지 않으려면 정부는 차기 리더십이 들어서기까지 두 달간 온 지혜와 역량을 모아 가능한 대응책을 세워야 한다. 글로벌 경제 전쟁을 수행할 역량을 지닌 지도자를 뽑는 국민 지혜가 더 중요해진 시기다.
2025-04-06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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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그렇다면, 기꺼이 '양비론자'가 되겠다
요즘처럼 양비론자의 설 자리가 없던 시절이 과거 또 있었던가.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 12·3 계엄사태 이후 “너도 잘못이 없진 않잖아”라고 하면 ‘내란세력’으로 몰아가고, 굳이 “물론 상대의 잘못이 더 크지만”이라 말을 보태면 그땐 ‘양비론자’라 매질한다.
양비론을 비난하는 그 마음을 아주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지금껏 아주 많은 경우에, 특정 사안의 논점을 흐리기 위한 수단으로 양비론이 악용돼 왔다. 많은 논쟁적 사안에서 양쪽 모두 잘못이 있다한들 늘 똑같은 무게를 가지는 것은 아닐 터, 그걸 마치 대등한 듯 ‘등호’를 붙여 뭉뚱그리는 것에 물론 찬성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큰 잘못 앞에서 상대적으로 작은 잘못이라 해서 아예 없었던 것처럼 눈감아지는 것 또한 반대다. 계엄 전후의 상황을 두고 치킨게임처럼 마주 보고 달리는 여야 모두를 탓하는 것이 그렇게 비난받을 일인가. 그런데, 시대의 양쪽 어느 한쪽에 서지 않으면 양쪽 모두에게서 비겁한 회색분자 취급을 받는다.
사사로이 군대를 동원하고도 무렴하게 애국을 핑계 삼았던 위정자를 위해 법조문 속 ‘날’(日)의 개념조차 제멋대로 해석한 사법부를 욕할 땐 정의롭다 하더니, 야당 대표의 유죄를 무죄로 뒤바꾼 사법부를 탓하면 흰 눈부터 치켜뜬다. 사법부는 ‘마치 내가 골프를 친 것처럼 사진을 공개했던데, 조작한 것’이라고 했던 야당 대표의 말에 대해 ‘골프를 치지 않았다고 해석할 수 있는 어떠한 단서나 근거도 없다’라고 판단했다.
노자의 도덕경에 이르길, ‘대교약졸 대지약우’(大巧若拙 大智若愚)라 했다. 뛰어난 솜씨는 서툰 듯 하고, 큰 지혜는 어리석은 듯 하다는 의미다. 무려 100페이지나 되는 판결문은 복잡한 법률적 수사로 빼곡하지만, 오히려 진실은 단순하다. 문제가 된 허위사실공표의 여러 핵심 중 하나는 그가 (과거 특정 시점에는) 몰랐다고 주장한 그의 부하직원을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니냐에 있다. 그래서 그가 (예의 부하직원을 모른다고 했던 그 시점에) 부하직원과 함께 이국땅에서 골프를 쳤는지의 여부가 궁금한 거다.
그런데, ‘마치 내가 골프를 친 것처럼 사진을 공개했던데, 조작한 것’이라는 말의 뉘앙스 뒤로 ‘(사진은 조작된 것이니) 나는 골프를 친 적이 없다’라는 의미가 포함되었다고 느끼는 나의 뇌 구조가 이상한 것인가. 하긴, 우리는 ‘날리면’을 ‘바이든’처럼 들었던 수많은 사람의 청각 구조가 이상하다고 주장하는 세력을 이미 경험한 바 있다. 굳이 덧붙이자면, 그는 당시 예의 부하직원과 함께 골프를 쳤다.
나의 이상한 뇌 구조보다 더욱 나를 걱정스럽게 하는 것은 따로 있다. 그것은 더이상 사법부를 신뢰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의 항소심 재판 결과가 불만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항소심 판결이 잘못됐다고 하겠지만, 또한 누군가는 그것이 1심의 잘못을 바로잡은 판결이라고 반길 수도 있다.
두 판결 중 어디에 손 드는 것과 별개로, 하나의 사안에 대해, 심지어 새로운 증거나 진술도 없는 상황에서, 전혀 다른 판단을 내린 두 재판부를 지켜 본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사법부의 판단은 그저 한 재판부의 생각일 뿐, 그것이 사회정의의 실현이라 믿을 수 있을까. 결국, 재판부가 바뀌면 판단 역시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누군가는 재난영화를 좋아하고 누군가는 로맨스물을 좋아하는, 그런 취향의 차이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그런 재판부의 취향에 우리 사회의 정의를 맡겨야 한다. 공연히 마음 한구석이 얹힌다.
사사로이 위법한 군대를 동원했던 위정자의 탄핵심판 선고가 계속 미뤄지고 있다. 헌법재판관들의 취향 차가 엔간해선 좁혀지지 않는가 보다. 이번 선고만큼은 헌법재판관들의 취향이 부디 일반 대중의 상식에 가까운 것으로 모아지길 기대해보지만, 자꾸만 미뤄지는 것이 어째 영 불안하다. 소문도 흉흉하다. 인용에 손들 재판관 6명을 못 채워 선고일을 못 정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리는가 하면, 헌법재판소 기능을 마비시키기 위해 2명의 재판관 임기가 끝나는 내달 18일까지 선고가 나지 않을 것이라는 괴담도 떠돈다. 헌재 선고가 4월로 미뤄지면서 3월 마지막 주 전국 지표 여론조사에서 헌재의 탄핵심판 과정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는 일주일 전에 비해 7% 가까이 하락했다.
이제라도 하루빨리 위정자의 탄핵심판 선고가 이뤄지길 바란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야당 대표의 대법원 판결도 조속히 진행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어디 한둘일까. 그런 사람을 향해 양비론자라 손가락질한다면, 나는 당당하게 양비론자임을 자처하련다.
2025-03-30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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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너와 나의 거리
1990년대 중반, 처음 미국을 방문했을 때 발견한 가장 큰 문화적 차이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였다. 말 그대로 ‘나’에게 타인이 물리적으로 얼마나 가까이 다가오느냐에 관한 것이다. 살면서 그 거리에 대해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미국의 어느 카페나 가게 계산대 앞에서 줄을 설 때, 어느 순간 뒤에 선 사람이 일정한 거리 이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형마트에서도 카트를 부딪거나, 어깨를 툭 치는 일도 거의 없었다. 실수로 접촉이 발생하면 꼭 미안하다는 인사를 건넸다. 그렇게 대한민국에서의 일상이 당연하지 않다는 걸 인지하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들은 나에게 무언가 이야기할 상황이 생겼을 때도 조심스럽게 다가와 말을 건네는 매너를 지켰다. 그런 행동들이 사람에게서 받는 스트레스를 많이 줄여 주었다. ‘역시 사는 곳이 넓으니 삶의 여유도 다르구나’라고 생각했다.
인구 밀도가 높은 대한민국에서는 때때로 나의 등 뒤에 바짝 붙어 줄을 선 사람이 내뿜는 숨을 고스란히 느낄 지경이었다. 거기서 대화를 하거나 통화를 하면 듣고 싶지 않은 개인사가 어지러이 귀에 들어와 박히는 걸 막을 도리가 없었다. 정중하게 “조금만 떨어져 달라”고 말해도 ‘왜 그러냐’는 표정이 돌아왔다.
서양 문화에서 말하는 사회적 거리의 마지노선은 1.2m라 한다.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개인적인 공간’을 지켜주는 것을 매우 중요한 가치로 여긴다. 관계 유지는 나의 필요에 따라 결정되며, 무엇보다 개인의 독립성과 사생활 보호를 중시한다.
이후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런 두 문화에 장단점이 존재한다는 사실 역시 알게 됐다. 상호 의존적이고 연고주의와 공동체 문화가 강한 대한민국에서 사람들 사이의 거리는 분명 당황스럽게 가깝다. 하지만 그만큼 인간적인 정이 존재했다. 누군가의 가족을 가까이에서 지켜주려는 DNA가 몸속에 흘렀다. 나이 지긋한 택시 기사와 인생 이야기를 나누며 가슴이 훈훈했던 적도 많았다. 거리에서 불의의 사고가 나면 누구랄 것 없이 달려와 도와주는 모습이 그 증거다.
네트워킹을 그저 비즈니스 수단이라 여기는 외국인들이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를 보면서 정이 많은 공동체를 가진 K문화를 칭송하는 시대가 됐다. 공동 경제 커뮤니티 속에서 서로 의지하며 팍팍한 삶을 헤쳐가는 모습을 잘 보여준 덕이다.
그런 대한민국에서 갈수록 낯선 일들이 계속 벌어진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등장한 뒤 알고리즘과 SNS, AI라는 말이 상황을 급속히 악화시킨다. 2020년부터 코로나19 팬데믹이 ‘거리두기’라는 차가운 말과 함께 휩쓸고 지나간 뒤에 사람들 사이의 거리는 서로를 밀어내는 자석의 양극처럼 멀어졌다.
설상가상으로 2025년 3월을 지나는 대한민국은 어느 때보다 잔인한 시간을 견디고 있다. 가족과 친구들이 모인 자리에서도 조심스러워서 정치 이야기를 꺼낼 수 없다. SNS에서는 정치적인 토론 자체가 불가능해 보인다. 서로 눈치를 보며 입을 닫는 사이에 심리적인 거리감이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어 버렸다. 정치적 양극화가 선을 넘어선 탓이다.
정치는 혐오의 대상이 아니다. 오롯이 우리의 미래다. 어디서든 자연스럽게 어떤 정책이 좋은지 이야기하고, 이를 정치인들이 수렴해 현실화하는 것이 우리가 바라는 민주 사회다. 정치 문화 선진국에서는 견해가 다르다고 인간 관계까지 단절하는 경우가 드물다.
알고리즘의 미로에 갇혀 혐오만 하는 대한민국은 미래가 없어 보인다. 그런 사회는 결코 건강할 수 없다. 일상의 민주주의와 헌법의 가치를 훼손하는 생각과 언행은 비판 받고 배척되어야 하나, 생각이 다르다고 단절을 택할 이유는 없다. 서양식 문화에 익숙해진 젊은 세대는 다가오는 사람들을 꽤나 난처한 존재로 여길 테다. 개인 중심의 수평적인 문화가 강해지는 현실에서 공적인 영역에서조차 너와 나의 거리를 무조건 좁혀야 하는 것도 답이 아니다. 그렇다고 역사와 사회적 환경이 만든 가치를 애써 부정할 이유 역시 없다.
가까운 곳에서 서로를 부둥켜 안고 고된 삶을 견뎌온 그 DNA는 분명한 우리의 강점이다. 미국식 개인 존중이 가진 장점을 취하되, 공동체 정신을 온오프라인에서 균형감 있게 발전시키는 것이 더 현명하고 합리적이다. 그런 사회가 미래를 담보한다. 디지털 알고리즘이 주는 편리함 속에서도 우리 사회의 DNA를 품은 아들딸을 길러내는 것 역시 우리의 의무다.
‘폭싹 속았수다’에서 ‘같이 안 속상해야 더 좋아서’ 누군가를 도왔다는 주인공의 말처럼, 이해하며 공존하는 대한민국이 힘의 근원이다.
박세익 디지털영상센터장 run@busan.com
2025-03-23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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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교육감 선거에 대한 단상
아름다운 해변을 끼고 있는 부산은 외지인들이 보기엔 한 번쯤 살아보고 싶은 곳이다.
서울에서 부산으로 이전한 금융 공공기관이나 해양수산 공공기관의 관계자들을 만나보면, 한결같이 부산에서의 삶에 만족하는 듯하다.
그런데 이들의 공통점은 부산에 혼자 산다는 점이다. 아이들을 비롯한 배우자는 서울에 거주하고 있고, 본인만 부산에 내려와 있다. 물론 미취학 아동의 경우는 부산으로 데리고 오지만, 초등학교 고학년만 돼도 웬만해선 서울에 두고 온다.
아이들을 키우기엔 사교육뿐만 아니라 부산의 공교육도 믿음을 주지 못한다는 의미다.
비단 외지인들의 경우만 그런 것은 아니다. 부산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아이를 키우는 학부모의 입장에서는 아이들이 제대로 된 교육을 받는지 의구심이 든다. 단순히 ‘인 서울’ 명문대 입학생 수만을 따지는 게 아니다. 학력 신장만이 아니라 특기교육이나 인성교육 등 특색있는 교육이 필요한데, 그냥저냥 시간만 보내는 교육이 아닌가 하는 그런 의구심.
교육감은 지역의 ‘교육 대통령’이라고 불리는 중요한 자리다. 각 시도의 막대한 교육재정과 교육자치를 책임진다. 부산의 경우 연간 5조 원이 넘는 예산이 배정된다. 올해 부산시교육청의 예산은 5조 3351억 원에 달할 정도다.
교육감 선거는 교육의 자치 및 전문성 강화 등의 요구로 2006년 직선제가 도입됐다. 그전까지는 학교운영위원회가 투표하는 식의 여러 가지 간선제 방식이었으나 대표성이 떨어지고 조직선거나 금권선거 등의 비리에 취약하다는 지적이 제기되면서 변화를 겪었다. 교육의 정치적 중립을 위해 정당의 교육감 후보 추천은 금지됐다. 부산시교육감 선거는 2007년 2월 첫 직선제 선거가 치러졌다.
하지만 부산시장 선거와 구청장 선거 등 지방선거에서 함께 치러지는 교육감 선거는 상대적으로 유권자의 관심도가 떨어진다. 아이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해 버린 50대 이상의 유권자, 아이가 없는 미혼의 유권자들에게는 마치 남의 일로 치부된다.
이 때문에 초기의 교육감 선거는 ‘로또 선거’ ‘깜깜이 선거’ ‘묻지마 선거’로 희화화되기도 했다. 후보가 난립하면서 공약이나 인물보다는 투표용지 기재 순서가 당선을 좌우했기 때문이다. 1번 혹은 2번 등 앞번호를 뽑은 후보가 전국적으로 교육감으로 당선되면서 번호 추첨만 잘하면 당선되는 로또 선거로 전락한 것.
이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자 이후 진영 간 단일화 바람이 불었다. 난립하던 후보는 보수 진영이나 진보 진영이라는 진영 깃발로 모이면서 이념 대결로 치달았다.
로또 선거는 사라졌지만, 교육의 정치적 중립을 위해 정당의 교육감 후보 추천 금지라는 정당공천 배제 원칙은 사실상 유명무실화됐다. 보수와 진보 진영으로 나뉜 교육감 후보자들은 특정 정당의 상징색을 입고 다니거나 선거 현수막과 포스터 등에 활용하고 있다.
다음 달 2일 치러지는 부산시교육감 재선거도 예외 없다. 정책이나 인물 대결이 아니라 사실상 이념 대결로 굳어지고 있다. 정책이나 인물 검증은 뒷전이고 진영 간 단일화에 목매달고 있다.
지난 15일 정승윤 후보와 최윤홍 후보가 단일화에 전격 합의함으로써 이번 선거도 보수 진영과 진보 진영의 양자 대결로 치러질 것으로 보인다. 여론조사 기간 등을 고려할 때 보수 단일화 결과는 오는 23일쯤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선거일인 다음 달 2일까지 열흘도 채 남지 않은 시간 동안 정책 검증이나 인물 검증의 기회는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그동안 정책 홍보보다는 단일화에만 목맨 후보들은 교육감 선거를 정치인들의 선거와 다를 바가 없는 이념·진영 대결로 만든 책임이 있다.
2022년 6월 치러졌던 지방선거에서 부산시교육감 선거의 투표율은 49.1%였다. 지난해 10월 서울시교육감의 보궐선거 투표율이 겨우 23.48%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번 부산시교육감 재선거 투표율도 극히 저조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지 않아도 이념 대결로 치닫는 교육감 선거가 진영 간 조직 대결로 전개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그동안 매치업이 결정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정책과 인물 검증에 소홀히 했던 언론도 남은 기간 분발해야 한다. 날카로운 검증의 칼을 들이대 유권자들에게 제대로 된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교육감 선거는 아이들이 창의적이고 시민적 소양이 있는 사람으로 자라날 수 있는지를 선택하는 문제다. 아이들이 좋은 대학에 진학하는 것만을 목표로 삼는 선거로 보면 안 된다. 교육감 선거에 관심을 가져야만, 부산의 교육이 살아날 수 있고 부산의 미래가 희망적일 수 있다.
최세헌 편집국 부국장 cornie@busan.com
2025-03-16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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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공교육, 어떻게 생각하세요?
지난주 부산 모든 학교가 새 학기를 시작했습니다. 학생, 학부모 모두 긴장된 한 주 보내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특히 초등학교에 첫 발을 디딘 어린이와 엄마, 아빠는 정말 잊지 못할 한 주를 보내셨을 것 같습니다. 학부모들은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아이가 어떤 교육을 받을지 궁금증과 생각이 많으셨을 줄 압니다. 초등학교가 아이에게 많은 지혜와 다양한 경험을 제공해 주길 기대하셨을 것 같습니다. 학부모들은 ‘정말 공교육이 살아 있어야 한다’는 마음이 어느 때보다 절실했으리라 생각해 봅니다.
최근 한 EBS 한국사 강사가 종편 예능 프로그램에서 한 발언이 화제가 됐습니다. 강사는 섬에서 사는 한 학생이 자신에게 보낸 이메일을 소개했습니다. 학생은 ‘자신도 유명 사교육업체 강사의 강의를 듣고 싶지만, 돈이 없어 EBS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자신이 처한 상황을 편지에 담았습니다. 해당 강사는 EBS 강의가 한 학생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는 “EBS 강의가 돈이 있는 사람도 들을 수밖에 없도록 질 높은 강의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EBS라는 질 높은 공교육 체제가 학생 누구나 평등하게 들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지난 1년여 간 교육 분야 기자로서, 초등학생 학부모로서 공교육을 바라봤습니다. 공교육이 사교육과 어떻게 달라야 하는지 생각했습니다. 다행히 공교육 체제가 할 수 있는 긍정적인 사업을 확인했습니다. 지난해 9월 부산 강서구 명지동에 문을 연 늘봄전용학교는 공교육이 할 수 있는 새로운 역할을 본 사례였습니다.
늘봄전용학교는 개별 초등학교에서의 방과후수업 수요를 모두 해소하지 못하자, 여러 학교 학생들이 한곳에 모여 방과후수업을 들을 수 있도록 만들어진 ‘제2의 학교’입니다. 학생이 모이니 학생 수가 많은 학교에서만 누릴 수 있었던 질 높은 수업이 가능해졌습니다. 덕분에 학생과 학부모의 공교육에 대한 만족도는 높아졌습니다. 늘봄전용학교가 학부모들의 입소문을 타면서 부수적인 효과도 나타났습니다. 늘봄전용학교 주변 아파트 단지의 전셋값도 덩달아 올라간 것이죠. 별빛 도서관도 공교육만이 할 수 있는 사업입니다. 그동안 밤에는 아이들이 갈 수 없었던 학교 도서관의 문이 열리면서 초등학생들을 위한 도서관이 생겨났습니다. 별빛 도서관은 아이들이 주중은 물론 주말에도 책을 읽을 수 있는 도서관으로 변신하게 됩니다. 아이가 엄마·아빠와 함께 손잡고 자신이 다니는 학교에서 책을 읽는 모습, 부산 모든 어린이가 이런 혜택을 누리게 하는 것, 바로 공교육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난주 부산 해운대구에 개교한 부산해군과학기술고 역시 좋은 사례입니다. 해군과학기술고 학생들은 일정 학습 기준을 충족하면 졸업 후 해군 부사관이 됩니다. 학생들이 다양한 꿈을 꾸고, 다양한 진로를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 역시 공교육이 해야 할 역할이겠죠.
공교육은 사교육과 경쟁해서는 안 됩니다. 공교육은 기존 인프라를 십분 활용해 공교육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합니다. 부산교육청이 올해 집행하는 예산만 5조 3000억 원이 넘습니다. 울산광역시 전체 예산 5조 1500억 원보다 더 많습니다. 공교육은 이제 ‘현상 유지’를 넘어 ‘도약’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올해 초등학생이 된 자녀를 둔 부모들의 마음일 것입니다.
다음 달 2일 부산교육을 이끌 부산시교육감을 뽑는 재선거가 치러집니다. 오는 13일에는 재선거 후보 등록이 시작됩니다. 보수, 진보 진영 후보 모두 자신이 부산교육을 이끌 적임자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후보들의 말에는 아직 공교육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교육감 후보들은 이제 5조 원이 넘는 부산교육청의 예산을 활용해 공교육을 어떻게 발전시킬 수 있을지 방안을 명확하게 제시하시길 바랍니다. 어린이집부터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연령별·학교별로 공교육이 뻗어나갈 수 있는 ‘정책 미세혈관’을 찾길 제안합니다. 사교육 영역에서 하고 있는 교육 프로그램을 공교육에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공교육만이 할 수 있는 역량을 발휘해야 합니다. EBS 역사 강사가 언급했듯 돈이 없는 사람도, 돈이 많은 사람도, 사교육을 하지 않는 사람도, 사교육을 하는 사람도 부산교육청의 공교육을 선택할 수밖에 없도록 교육 체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유권자 역할도 중요합니다. 부산교육감 선거 투표율은 그동안 60%를 넘긴 적이 없었습니다. 내 아이가 더 좋은 공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제시한 교육감 후보에게 투표하십쇼. 공교육에 대한 지금의 관심과 열정이 식지 않도록 소중한 한 표를 사용하시길 바랍니다.
김한수 편집부장 hangang@busan.com
2025-03-09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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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다시 부각되는 산업은행 이전
산업은행 이전 문제가 최근 다시 화두에 오르고 있다.
부산상공회의소는 최근 산업은행 본점 부산 이전을 위한 산업은행법 개정 촉구 국회 국민동의청원에 나섰다. 국가균형발전위원회가 2023년 5월 산업은행을 부산이전 공공기관으로 고시했지만, 산업은행 본점을 서울로 명시한 산업은행법 개정안은 더불어민주당의 반대로 국회에서 논의조차 되지 않고 있다. 여기에 12·3 비상계엄과 그에 따른 탄핵 정국으로 윤석열 대통령이 국정과제로 추진해 온 산업은행의 부산 이전이 사실상 올스톱됐다. 이에 부산상의는 추진 동력을 상실할 위기에 처한 산업은행 본점 부산 이전 불씨를 살리기 위해 국회 청원 카드를 꺼내 들었다. 부산상의 양재생 회장은 “정부의 행정절차가 완료된 산업은행 본점 부산 이전이 국회에서 2년 가까운 시간 동안 제대로 된 논의조차 되지 않고 있는 것에 지역 경제계는 참담함을 느낀다”면서 “국회 청원 방식으로라도 산업은행법이 개정될 수 있도록 지역사회의 힘을 결집하겠다”고 강조했다.
야권 잠룡 중 한 명인 김경수 전 경남지사는 지난주 부산을 찾아 산업은행 등 국책 금융기관 이전을 역설했다. 그는 “부산은 금융중심지로 지정됐지만 주택금융공사, 예탁결제원 등 몇 개 기관이 이전한 이후 중단돼 있다”며 “부산 금융중심지에는 정부의 정책 금융 기관들이 모두 와야 한다”고 말했다. 김 전 지사는 특히 “산업은행 하나 오는 것 가지고도 씨름을 해야 된다”며 반대 기류가 강한 당 내 분위기를 우회적으로 비판하면서 “정책금융기관은 부산에 집중하고, 민간 금융은 서울에 집중해 발전시키는 쪽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해법을 제시하기도 했다. 조기 대선 가능성에 산업은행 이전 문제가 지역의 주요 이슈로 다시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산업은행 이전이 좌초되다시피 한 것은 부산으로선 어이가 없는 일이다. 2022년 대선 당시 윤석열 대통령이 주요 공약으로 내세워 당선 이후 국정과제로 추진돼, 당장 실현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산업은행 부산 이전은 부산의 산업 구조 재편을 위해 추진돼 왔다. 기존 제조 산업 위주로는 돌파구를 못 찾는 부산 경제 부흥을 위해 산업과 물류 금융 기능을 결합하자는 취지다. 이런 이유로 노무현 정부 때 부산을 국제금융도시로 조성하겠다는 계획이 발표되고, 이후 일부 금융기관들이 이전됐다. 그러나 기존의 이전 금융기관들이 지역 경제와 연계해 금융중심지 역할을 수행하기엔 한계가 명확했다. 이에 부산을 비롯한 부울경에선 지역 개발에 앞장설 수 있는 대형 정책금융기관인 산업은행 유치가 꼭 필요하다고 역설해 왔다. 수도권에 대응하는 또 다른 성장 축인 남부권 성장을 위한 필수 기관이라는 것이다.
민주당도 대선 당시 “수도권 일극주의로는 대한민국의 발전을 기약할 수 없다”며 균형발전을 위한 공약을 쏟아낸 바 있다. 그러나 대선 이후 민주당은 산업은행 이전을 철저히 반대했다. 21대 국회는 물론 현재 22대 국회까지 법 개정 문제는 전혀 진척이 없다. 지난해 4월 총선을 앞두고 민주당 부산시당이 산업은행 이전을 1호 공약으로 내걸었지만, 중앙당의 반응은 없었다. 지난해 부산지역 선거에서 민주당의 참패는 산업은행 이전과 부산 글로벌 허브도시 특별법 제정 등에 몽니를 부린 영향도 컸다. 지난해 총선에서 전국적으로 압승을 거둔 민주당은 부산에선 고작 1개 의석을 지키는 데 그쳤다. 지난해 10월 금정구청장 보궐선거에서도 민주당 후보는 40%도 안되는 득표율로 고배를 마셨다. 대권주자 선호도에서 압도적 1위를 달리는 이재명 대표의 지지율이 부산을 비롯한 PK(부산·울산·경남)에서 상대적으로 저조한 것에도 이러한 영향이 있다. 정부와 여당이 하겠다는 것을 막고 있는 민주당에 대한 지역민들의 불만이 많다.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한국갤럽이 지난달 11~13일 전국 만 18세 이상 남녀 1004명을 대상으로 장래 정치 지도자 선호도 조사(무선 전화 인터뷰 방식,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 ±3.1%포인트(P), 자세한 내용 여론조사심의위 참조)에서, 이 대표의 PK 지역 지지율은 23%에 그쳤다. 전국 평균인 34%에 크게 못미쳤다. 또한 이 대표에 대한 ‘적극 반대’ 비율도 PK에서 높게 나타났는데, ‘절대 지지하지 않는다’는 응답이 46%에 달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심판 결과에 따라 조기 대선이 올봄 열리게 된다. 이재명 대표가 민주당의 대권주자가 되면, 이 대표는 산업은행 이전과 글로벌 허브도시 특별법을 두고, PK 민심을 두고 이번에는 어떤 선택을 할까.
2025-03-02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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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개헌이라는 기회
현재 대한민국의 정치 체제는 6공화국이다. 공화국의 구분은 헌법 개정을 통해 전면적으로 정치 구조가 바뀐 것을 기준으로 한다. 1987년 개헌을 통해 군부독재를 끝내고 대통령 5년 단임제를 시행한 이후 약 37년 동안 6공화국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개헌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나온 것은 10년 가까이 됐다. 급변한 시대적 가치를 담은 헌법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왔다. 직접적인 이유는 역대 대통령들의 불행한 임기 말과 정치적 혼란이었다. 6공화국 출범 후 총 8명의 대통령 중 5명이 본인이나 자녀가 구속됐으며, 1명은 검찰 조사를 받다가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대통령들의 불행은 극심한 정치적 혼란으로 이어졌다. 임기 중반 총선을 통해 여소야대 지형이 되고, 권력 변환기에 대통령과 주변은 검찰 수사의 대상이 되는 일이 반복됐다. 협력보다는 권력을 향한 투쟁의 구도가 굳어졌다. 12·3 비상계엄 사태는 그 정점에 나타난 현상으로도 해석된다.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 심판 이후 개헌 논의는 가속화 할 것이다. 비상계엄 직후 개헌을 먼저 언급 한 여당의 진정성부터 시험대에 오를 것이다. 헌정 유린의 내란 공범 정당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위해 개헌 이슈를 내놓았다는 의구심이 거둬질지 지켜볼 일이다.
조기 대선 국면에서 유리한 고지에 선 더불어민주당도 개헌안을 내놓을 것이다. 이재명 대표는 지난 대선 후보 시절 대통령 4임 중임제를 공약으로 내세웠다. 하지만 당시 개헌의 구체적 시기가 언급되지 않아 신뢰를 얻기 힘들었다. 이번에는 다를까?
개헌을 추진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는 문재인 정부 때 한 차례 경험한 바 있다. 2018년 3월 문재인 대통령은 4년 연임 대통령제를 내건 개헌안을 발의했으나, 한 달 만에 무산을 선언해야 했다. 여야 합의 불발로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전례로 볼 때 누구나 개헌의 필요성을 언급하지만, 당리당략에 얽혀 현실적으로 통과가 어렵다는 비관론이 제기된다.
정치적 셈법 뿐만 아니라 개헌 절차의 난관도 만만치 않다. 개헌을 위해서는 우선 국회 재적의원 3분의 2가 찬성해야 하고, 국회 의결 후 30일 안에 국민투표를 해야 한다. 국민투표에서는 국회의원 선거권자 절반 이상이 투표에 참여해, 투표자 과반 이상의 찬성을 받아야 한다. 폭넓은 국민적 공감대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지금처럼 국론이 극한으로 분열된 상황에서 개헌이 어려워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비상계엄선포와 이후 극심한 갈등을 거치면서 개헌은 미룰 수 없는 시대적 과제가 됐다.
전쟁 때나 발동할 수 있는 계엄을 국회와 언론, 그리고 뜬금없이 전공의를 탄압하는 데 사용하려 한 12·3 비상계엄 사태는 국민들이 비상식적인 대통령을 선출했을 때, 대통령에게 계엄 권한을 주는 것이 맞는지 질문을 던진다.
한편으론 윤석열 대통령이 탄핵을 당하고 사법 처벌을 받고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지도 의문이다. 거대 야당이 탄핵과 특검 남발로 국정 발목 잡는 행태가 반복된다면 대한민국은 좌초하고 말 것이다. 기존의 정치적 혼란을 최소화할 권력 구조 개편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무엇보다 한국의 성장 속도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이 기회에 국가 개조의 틀을 마련하지 못한다면 성장이 멈추고, 결국 국가 소멸의 길로 접어들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개헌 논의에서 빠져서는 안 될 대목은 중앙 정부에 집중된 권력의 분산, 즉 지방 분권 개헌이다.
수도권이라는 하나의 엔진으로 대한민국의 성장을 더 이상 견인할 순 없다. 수도권과 같은 성장 거점을 지역에도 만들어야 한다. 우는 아이에게 떡 주듯이 중앙정부가 지방에 예산을 나눠주는 형태의 지역균형발전 정책은 더 이상 실효성이 없다.
헌법에 국가균형발전 규정을 강화해 지방정부가 독자적으로 발전 전략을 세울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 지방정부의 법적 지위를 명확히 하고, 실질적인 입법·행정·재정권을 보장해야 한다.
부울경은 수 년동안 통합을 위한 노력을 진지하게 해 왔다. 현실적으로 가장 빠른 시간 안에 수도권에 버금가는 성장 동력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는 지역이다. 그 가능성이 사라지지 않도록 법 정비가 필요하다.
개헌 논의가 단순히 중앙 정치권의 권력 구조 개편에 머문다면 반쪽짜리 개헌이 될 것이다. 큰 사회적 혼란 속에서 개헌의 공감대가 고조되고 있는 이 시기를 놓쳐서는 안 된다. 그래야 비상계엄이라는 위기가 국가 성장의 새 판을 짜는 기회가 될 수 있다.
2025-02-23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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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하얼빈 빛낸 '태극전사들'
8년의 기다림 끝에 찾아온 아시아 최대의 겨울 스포츠 축제인 2025 하얼빈 동계 아시안게임이 8일간의 열전을 끝으로 지난 14일 막을 내렸다.
‘겨울의 꿈, 아시아의 사랑’을 슬로건으로 내건 이번 대회엔 역대 동계 아시안게임 중 가장 많은 34개국, 1200여 명의 선수들이 출전했다. 6개 종목 222명의 선수단이 참가한 대한민국은 이번 대회에서 금메달 16개, 은메달 15개, 동메달 14개를 획득해 종합 2위를 확정했다. 우리나라가 역대 동계 아시안게임 최다 금메달을 획득한 2017년 삿포로 대회(금 16·은 18·동 16개)에 버금가는 성적이다.
대한체육회는 이번 대회를 앞두고 경기 단체의 분석 등을 토대로 우리 선수단의 목표 금메달 수를 11개로 잡았는데 태극전사들이 기대 이상의 선전을 펼치며 목표를 초과 달성했다. 특히 이번 대회에서 대한민국 선수단은 삿포로 대회에 이어 종합 2위를 수성해 1년 앞으로 다가온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 올림픽의 기대감도 더욱 커졌다.
태극전사들의 종합 2위 수성을 이끈 일등공신 종목은 역시 쇼트트랙이었다. 한국 대표팀은 이번 대회에 걸린 9개 금메달 가운데 6개를 수확하며 역대 동계 아시안게임 쇼트트랙 최다 금메달 타이기록을 썼다.
1999년 강원 대회와 2003년 아오모리 대회에서도 한국은 6개 금메달을 가져온 바 있다. 한국 대표팀은 이번 대회에서 금메달 6개 외에도 은메달 4개와 동메달 3개를 목에 걸어 총 13개 메달을 따냈다.
아시안게임 기록을 두 차례나 경신한 최민정은 한국 여자 선수 최초로 대회 3관왕에 올라 쇼트트랙 강국다운 위용을 뽐내는 데 앞장섰다. 또 지난 시즌 세계 랭킹 1위에 오른 김길리는 첫 국제종합대회 무대에서 2관왕에 등극하는 뛰어난 기량을 과시했다.
다만 쇼트트랙 마지막 종목이었던 남녀 계주에서는 아쉬운 모습을 보였다. 남녀 모두 결승선을 앞두고 중국 선수들과 충돌해 메달 획득에 실패한 것이다.
스피드 스케이팅에선 ‘신빙속여제’ 김민선이 예상대로 2관왕을 차지했고, 2005년생 ‘샛별’ 이나현도 처음 출전한 아시안게임 무대에서 2관왕에 오르며 쾌속 질주를 함께 이끌었다. 김민선과 이나현의 맹활약으로 한국 빙속은 금메달 3개, 은메달 5개, 동메달 4개를 따내 쇼트트랙과 더불어 메달 사냥을 주도했다.
특히 한국 빙속의 간판으로 부상한 이나현을 재발견한 것이 큰 성과였다. 이나현은 노원고 재학 중이던 2024년 1월 여자 500m 주니어 한국 신기록, 주니어 세계 신기록을 연거푸 갈아치우며 한국 빙속의 기대주로 떠올랐다. 그는 조명을 받은 지 1년 만에 출전한 국제종합대회에서 굵직한 성과를 내며 내년 동계 올림픽 전망을 밝게 했다.
설상 종목의 선전도 특히 빛났다. 스노보드 슬로프스타일에서 이채운, 하프파이프에서 김건희가 정상에 올랐고, 프리스타일 스키 하프파이프 우승 후보로 꼽혔던 이승훈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를 비롯해 스키·스노보드를 통틀어 금메달 3개, 은메달 3개, 동메달 6개가 나왔다. 러시아 출신의 귀화 선수 예카테리나 압바꾸모바는 한국 바이애슬론에 사상 첫 동계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안기기도 했다.
하지만 빙속 장거리 종목 세대교체 숙제는 이번 대회에서도 드러났다. 만 36세 이승훈이 여전히 대표팀 장거리 선수들을 이끌었다. 이승훈은 남자 팀 추월에서 후배들과 은메달을 획득하며 역대 한국 선수 아시안게임 최다 메달(9개) 금자탑을 쌓았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나를 넘어설 기대주가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우수한 선수를 키워내기 위해서는 국내 훈련 환경이 개선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내에서 유일한 스피드 스케이팅장은 낡은 태릉 빙상장뿐이다. 이마저도 철거 이슈가 맞물리면서 제대로 된 보수 작업이 이뤄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피겨 스케이팅에선 차준환과 김채연이 일본 출신 아시아 최고 피겨 스케이터인 가기야마 유마, 사카모토 가오리를 꺾고 극적으로 금메달을 거머쥐었다. 차준환은 이번 대회 금메달로 병역 혜택을 받아 문제없이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올림픽을 준비할 수 있게 됐다.
이제 ‘포스트 차준환’ 찾기는 한국 피겨의 당면한 과제가 됐다. 차준환과 함께 출전한 김현겸은 국제 무대와 큰 격차를 보였다. 어린 유망주가 많은 여자 싱글과 비교했을 때 남자 싱글의 선수층은 너무 얇고 허약하다.
차준환의 컨디션에 따라 한국 피겨 남자 싱글의 성적이 좌지우지될 수 있는 환경이다. 당장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 올림픽 국가별 쿼터가 다음 달에 열리는 세계선수권대회 결과에 따라 배분된다. 차준환의 몸 상태에 쿼터 확보 수가 달렸다. 대한빙상경기연맹 차원에서 좀 더 전폭적인 지원이 필요해 보인다.
2025-02-16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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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위로와 공감에 인색한 시대
2025년 새해가 시작된 지 40여 일이 지났지만, 올해는 유난히 새롭게 시작하는 느낌이 아니다. 국민 일상을 뒤흔든 12월 초 계엄령과 이어진 대통령 탄핵 심판은 진행 중이고 12월 말 무안에서 발생한 제주항공참사도 명확히 해결되지 못한 채 유족은 아픔을 호소하고 있다.
비극적인 상황은 끝나지 않았지만, 한편에선 벌써 대한민국 특유의 조급증이 등장했다. 큰 사건이고 비극인 건 맞지만, 이제 비슷한 이야기 그만할 때가 되지 않았냐는 말이다. 실제로 언론사로 전화해 계엄령, 탄핵, 제주항공참사 같은 기사 대신 밝고 희망적인 기사를 요구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물론 올해만 이런 건 아니다. 앞서 겪었던 국가적 참사 때도 모진 말을 쏟아내는 혐오의 목소리가 있었다. 수백 명의 아이를 잃어야 했던 세월호 사건 때도 그랬고 2022년 이태원 참사 역시 그랬다. “인제 그만 하자” “보상을 더 많이 받기 위해서 이러는 것이냐” “유족 뒤 특정 정치세력이 의심된다” “죽은 가족 팔아 이득을 보자는 거냐” 같은 주장이 인터넷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예사로 들을 수 있었다. 심지어 유족의 행사에 나타나 행패를 부리는 이들도 있었다. 이태원 참사 당시 유족은 국민의 안전을 지켜주지 못했던 국가, 사고에 대처하지 못한 기관에 대한 원망으로 무너졌지만, “쓸데없이 그런 곳에 왜 놀러갔냐”는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더 아팠다고 토로했다.
이번 제주항공참사 역시 유가족 대표는 자신을 향한 악플에 대해 눈물로 호소했다. 실제 유가족이 아니라는 거짓 주장부터 다른 의도가 있는 것 같다는 억측이 그랬다. 사망자와 유족을 비하하는 글을 작성한 이들을 찾아내 법적으로 처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많았지만, 여전히 오늘도 인터넷 세상에서 혐오의 목소리는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우리 사회가 언제부터 이렇게 공감과 위로가 인색하게 된 걸까. 서종택 고려대 명예교수는 ‘우리는 무엇에 공감하나’라는 글에서 인간이 그동안 추구해 오던 편안하고 고통 없는 문명은 비인간화를 초래했다고 분석한다. 비인간화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느끼지 않으려는 일명 ‘무통 사회’라는 병리 현상을 낳았다.
서 교수는 마치 지금의 인간은 아픔이나 슬픔이 전이되지 못하는 절연체가 된 것 같다고 표현했다. 형광등의 불빛이 우리를 안도케 하는 것은 불이 켜지기까지 순간의 긴장감에 있다. 스위치를 눌렀을 때 짧은 시간의 깜박거림, 그 감응의 시간이 우리를 초조하게 하지만 마침내 불이 켜지며 경이롭게 한다. 감응하지 않은 센서는 늘 우리를 어둠 속에 서 있게 한다.
인간적인 문명사회를 찾아가다가 비인간화가 나타났지만, 우리는 그 현상과 싸우며 다시 인간화를 회복하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아픔을 공유하고 공감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수많은 감응 연습이 필요하다. 미세한 울림과 떨림에 주목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적인 삶이다. 위로와 공감이 인색한 현재, 우리는 다시 감응하는 훈련을 시작해야 한다.
참사를 대하는 태도 역시 비슷한 맥락이다. 그들의 고통을 헤아려보고 그들의 슬픔을 존중하고 기다려줄 수 있어야 한다. 애도와 슬픔을 끝내는 시간을 타인이 정해줄 수 없다. 그 이야기는 그만하자는 식의 대응은 혐오의 사회를 심각하게 할 뿐이다.
탄핵 심판이 진행 중인 윤석열 정부의 실패 원인 중 하나는 국민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했고 제대로 사과할 줄 몰랐다는 것이다. 소통을 통해 이해관계와 갈등을 조정하는 것이 정치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민과의 소통이란, 국민의 삶에 대한 ‘공감’ ‘이해’ ‘책임’이 전제될 때 비로소 가능하다.
참사에 대한 정부의 사과는 피해자에 대한 공감과 이해, 책임감의 발로이자 정부가 피해자에 대해 그런 자세를 가지겠노라고 공식적으로 알리는 결의의 표시다. 그런 점에서 정부의 사과는 말 한마디로 끝내는 일회성 행위가 아니라 후속 실천까지 아우르는 일련의 행위 목록이다. 윤 정부는 이태원 참사를 비롯해 일제강제동원피해자, 산업재해 희생자 등 정부의 사과를 기다리는 이들과 소통하지 못했고 그들의 아픔을 공감하지 못했다.
‘갈등을 대하는 자세가 한 사회의 실력이다’라는 말이 있다. 사람마다 살아온 삶의 조건이 다르므로 공동체에서 갈등은 필연적으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개인화가 심해지며 갈등의 형태는 다양해지고 커질 수밖에 없다. 소통과 공감, 위로야말로 이를 해결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들이다.
김효정 젠더데스크 teresa@busan.com
2025-02-09 [17: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