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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정치인의 TPO
이재명 대통령의 ‘냉장고를 부탁해’ 프로그램 출연에 대한 정치권의 논쟁이 뜨겁다. 길고 길었던 추석 연휴가 끝났지만, 정치권의 공방은 끝나지 않고 있다. 여야는 프로그램 방영 이후 상대 진영이 명예를 훼손했다며, 발언이 거짓말이라며 고소하고 고발했다. 이번 이슈는 오늘부터 시작되는 2025년 국정감사에서도 등장할 것이 뻔하다. 더 좋은 정치, 더 나은 민생을 부탁하며 표를 던진 상당수의 시민에게 정치권의 이번 논쟁이 마뜩하지 않다.
대통령 부부의 이번 예능 출연은 국민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인기 예능 프로그램에 대통령과 영부인이 동시에 출연한 경우는 한국 정치에서 보기 드문 장면이었다. 하지만 프로그램 제작 시점이 국가 전산망 화재로 국가적 혼란이 극심한 시점이었던 것은 비판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대통령 부부가 출연 목적으로 밝힌 ‘K푸드 세계화’에 대한 관심을 온전히 국민들에게 전달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 대통령은 한국 역대 대통령 중 대중과의 소통에 능한 지도자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여권에서는 이 대통령이 20여 년 전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중친화적인 언어로 시민들과 소통하던 모습과 비슷하다는 평가도 나온다. 그는 노 전 대통령 재임 당시와는 비교할 수 없는 규모로 성장한 온라인 SNS를 통해 국민과의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이 대통령은 더불어민주당 당대표이자 국회의원이던 지난해 12월 3일 밤 윤석열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언하자 국회로 향하는 차 안에서 SNS에 “국회로 모여달라”는 내용의 동영상을 올렸다. 이 대통령의 해당 게시물은 순식간에 온라인으로 퍼져나갔다. 최근 화제를 모은 경주 APEC 홍보 영상에서 이 대통령이 항공기 유도원으로 출연한 것 역시 그 연장선이다.
정치권에서 각종 SNS와 유튜브, 숏폼 영상 등은 정치인들의 중요한 의사소통 창구가 됐다. 정치인의 말과 행동은 온라인을 통해 짧은 시간에 시민들에게 퍼져나가며, 여러 해석이 덧붙여져 재가공된다. 메시지 전달력이 커진 만큼 의도하지 않은 파장도 그만큼 크다. 결국 정치인들의 미디어 노출은 소통인 동시에 위험 관리가 필요한 영역이다. 특히 국가 정책의 최고 결정권자인 대통령의 예능 프로그램을 비롯한 미디어 노출은 누구보다 철저한 메시지 관리가 필요하다. 대통령은 예능 프로그램이라는 무대에서 친근함을 얻을 수 있지만, 한순간에 신뢰와 정책 추진 동력을 잃을 수도 있다.
달변가로 알려진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사례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현직 대통령 신분이던 2014년 TV 채널이 아닌 당시 미국 최고 인기 온라인 코미디 프로그램인 ‘Between Two Ferns’에 출연했다. 그는 풍자가 난무하는 해당 프로그램에서 ‘오바마 케어’로 불렸던 자신의 의료보험 개혁 정책을 홍보했다. 대중들은 현직 대통령이 풍자의 대상이 된 것에 열광했다. 출연 파장은 컸다. 출연 직후 미국 내 정부 의료보험 홈페이지 방문자 수는 프로그램 방영 전보다 40%나 증가했다.
파장은 컸지만 효과는 적었다. 달아올랐던 미국 국민들의 의료보험 개혁에 대한 관심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그라졌다. 관심이 사그라들면서 개혁을 위한 추진 동력은 더 얻지 못했다. 오바마의 예능 출연은 국민들의 관심을 끄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가 얻고자 했던 신뢰를 기반으로 한 정책 추진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후에는 정치의 품격이 희화화됐다는 비판과 국정 책임자로서의 권위가 훼손됐다는 부정적 평가가 뒤따랐다.
정치와 미디어의 연관성 연구로 잘 알려진 미국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소속 매튜 바움 교수는 “(예능이나 토크쇼 같은)소프트 뉴스는 정치 무관심층을 정치로 끌어들이지만, 정보의 깊이를 얕게 만들 수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정치인들에게 예능이나 토크쇼가 소통의 통로이지만, 던지고자 하는 메시지를 단순화시키는 위험이 뒤따른다고 설명했다. 이 대통령이 출연한 프로그램이 방영된 지 일주일밖에 안된 지금 ‘K푸드 세계화’라는 메시지는 온데간데 없고, 정치권의 싸움거리로 넘어간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정치인의 미디어 활용은 그 시점과 목적, 메시지의 일관성이 동시에 확보될 때만 긍정적인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명확하다고 해도, 시점과 상황이 맞지 않다면 메시지는 왜곡된다. 이번 예능 출연 역시 국가정보자원관리원 화재로 전국 곳곳에서 국민들의 생활에 피해가 발생한 상황이었으므로 메시지의 전달력은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정치의 본질은 신뢰다. 대중들로부터 신뢰를 얻으려는 정치인들의 미디어 활용은 피할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다. 대통령의 미디어 참여가 국민들의 신뢰와 정책 추진력을 얻는 기회로 활용되려면 소통의 진정성과 시점, 상황이 더욱 면밀하게 검토돼야만 한다.
2025-10-12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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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대법원장 청문회와 사법부 독립
국회가 사법부 수장인 대법원장을 청문회 증언대에 세우려 한다. 전례가 없던 일이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는 지난 22일 더불어민주당 단독으로 조희대 대법원장에 대한 청문회를 의결했다. 대선 전 이재명 대통령 선거법 위반 상고심 파기환송부터 한덕수 전 총리와의 비밀 회동설까지 대선개입 의혹을 오는 30일 청문회를 열어 따져 묻겠다는 것이다. ‘대선 개입 의혹’이라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근거는 약하다. 비밀 회동설 제보자의 신원과 발언의 맥락은 불투명하고, 당사자들은 모두 부인했다. 그럼에도 민주당은 현직 대법원장을 국회 증언대에 세워 정치적 추궁을 하겠다고 한다. 이는 정치 공세를 넘어 헌정 질서의 근간인 삼권분립에 대한 도전이란 비판도 나온다.
조 대법원장은 사법부 독립과 헌법상 재판 개입 금지 원칙을 이유로 불출석 의견서를 제출했다. 이에 민주당 소속 법사위원들은 26일 이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출석을 촉구했다. 민주당은 고발 조치, 대법원 현장 검증 등 후속 대응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사법부 독립은 민주주의의 기둥이다. 입법·행정·사법의 삼권분립이 제대로 작동해야 국가 권력이 균형을 이루고, 그 속에서 국민의 기본권이 지켜진다. 그러나 최근 국회는 특정 재판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사법부를 압박하는 위험한 길로 가고 있다. 법조계 안팎에서 “도를 넘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사실 정치와 사법의 긴장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다. 정권은 사법부를 늘 불편해했다. 이명박 정부 시절 광우병 촛불집회 관련 판결 등에서 법원이 정부의 기대에 어긋나는 결정을 내리자, 여권은 “법원이 국민 정서를 외면한다”며 공개적으로 불만을 표출했다. 하지만 정치적 공세 수준에서 그쳤을 뿐, 현직 대법원장을 증언대에 세우는 시도까지는 나아가지 않았다. 박근혜 정부 때도 정권 말기 각종 국정농단 사건 재판이 이어지며 법원은 여론의 압박을 강하게 받았다. 청와대와 여권은 일부 판결에 불편함을 드러냈지만, 대법원 자체를 정치 청문회의 대상으로 삼은 적은 없었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는 이른바 ‘사법농단’ 수사가 본격화되며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가 강한 정치적 타격을 입었다. 법원행정처 문건이 공개되며 재판 거래 의혹이 터져 나왔고,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결국 피의자 신분으로 법정에 섰다. 그러나 이 역시 구체적 증거와 수사 과정을 통한 사법적 절차의 문제였다. 국회가 근거 없는 의혹을 앞세워 현직 대법원장에 대한 청문회를 강행하지는 않았다.
윤석열 정부 시기에도 사법부와 정치권의 갈등은 이어졌다. 정치적 사건이 법원으로 넘어올 때마다 판결이 여당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코드 판결”이라는 비난이 여권에서 쏟아졌다. 그러나 여권 역시 대법원장 개인을 겨냥한 청문회 압박 같은 시도는 하지 않았다.
이처럼 역대 정부가 사법부와 갈등을 빚은 전례는 많지만, 지금까지는 권력이 사법부를 비판하거나 불만을 표출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그러나 민주당은 대법원장을 국회 증언대에 세워 사퇴를 압박하겠다는, 전례 없는 방식을 택했다.
이는 사법부에 대한 단순한 ‘간섭’을 넘어선다. 입법부가 사법부를 공개적으로 심판대에 올려놓고 길들이겠다는 신호다. 이 선례가 굳어지면, 대법원장은 정권과 국회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정치가 재판을 지배하는 위험한 구조가 제도화되는 것이다.
민주당은 제보를 근거로 의혹을 제기했지만, 그 제보가 누구인지조차 명확히 설명하지 못한다. 확인되지 않은 소문으로 대법원장을 증언대에 세우겠다는 발상 자체가 비상식적이다. 국회의 면책특권을 방패 삼아 법관의 명예를 훼손하는 행태는 민주주의를 위한 특권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해치는 특권 남용이다.
사법부 독립은 법관의 특권을 위한 구호가 아니다. 그것은 권력으로부터 국민의 권리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다. 대통령도, 국회도, 정당도 법 위에 서지 못하도록 막는 장치가 바로 독립된 사법부다. 정치권이 이 보루를 무너뜨리면, 가장 큰 피해자는 국민이다. 만약 대법원장이 정치 공세 앞에 위축된다면, 앞으로 국민 누구도 공정한 재판을 보장받을 수 없을 것이다. 법정이 법과 증거가 아니라 정치의 힘겨루기에 따라 움직인다면, 법치주의는 이미 무너진 것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사법부가 정쟁의 도구로 전락하는 악순환은 이제 멈춰야 한다. 대법원장 청문회 강행은 그 악순환을 극단으로 내모는 행위다. 민주당은 국민 앞에 사법부 독립을 존중하겠다는 정치적 책임감을 보여야 한다. 정치권은 더 이상 사법부를 흔들어선 안 된다.
강희경 사회부장 himang@busan.com
2025-09-28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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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61년을 버티게 한 응원 목소리
지난 10일 전국 언론을 비롯해 여성·시민단체의 눈과 귀는 모두 부산 연제구 부산고등법원으로 향했다. 사실 성폭력 피해자였지만, 억울하게 상해 가해자로 몰려 61년을 범죄자로 낙인 찍혔던 최말자 씨의 재심 판결이 있는 날이었다.
신문 방송이 모두 속보로 판결을 알리며 결과는 이미 많은 사람이 알고 있다. 10여 일 지난 이 시점, 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다시 하려는 건 여전히 여성을 향한 폭력과 오해로 고통받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먼저 1964년 발생한 최말자 씨의 사건부터 요약해 보자. ‘56년 만의 미투’로도 알려진 이 사건은 당시 만 18세였던 최 씨에게 접근한 노모 씨가 강제로 최 씨에게 입맞춤하려 했고, 성폭력을 저항하는 과정에서 최 씨는 노 씨의 혀를 1.5cm가량 절단했다. 이후 최 씨를 향한 노 씨의 괴롭힘이 시작된다. 집까지 찾아와 난동을 피웠고 최 씨를 겁박하기 위해 경찰에 상해죄로 고발한다. 경찰은 피해자인 최 씨를 오히려 중상해죄로 기소했고, 부산지법에서 최 씨에게 징역 10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한다.
반면, 성폭행 가해자인 노씨는 특수주거침입과 특수협박 혐의로 오히려 최씨보다 가벼운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성범죄 가해자였지만 정작 강간미수 혐의는 적용조차 되지 않았다.
18세 평범한 소녀는 갑자기 당한 성폭력의 피해만으로도 엄청난 고통이었지만, 이후 펼쳐진 상황에서 또 한 번 가해를 당한다. 6개월간 불법으로 체포, 감금당해 조사를 받았고, 당시 검찰과 재판부는 최 씨에게 “노 씨와 결혼해라” “당신은 이제 평범하게 결혼할 수 없는 사람이다” “노 씨와 좋게 합의하라”라며 강요했다고 한다.
최 씨의 재심 변호를 맡은 김수정 변호사는 “최말자님 고통의 시작은 가해자에서 비롯됐지만, 이를 가중한 것은 검찰과 법원이었다”라며 “보호해 줄 것으로 믿었던 검찰과 법원은 피해자의 행실을 탓하고 가해자와 결혼까지 강요하며 피해자를 가해자로 둔갑시켰다”라고 지적했다.
60년대 시대상을 고려해도, 당시의 기소와 판결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 누가 봐도 명백한 정당방위로 보이지 않는가. 그런데 나는 다시 한 번 재판부의 태도에 놀랐다. 무려 56년이 지나 용기를 낸 최씨는 법원에 재심 요청을 했지만, 현시대 재판부마저 2번이나 이 요청을 기각했다는 점이다. 사실상 여성 폭력의 심각성과 고통을 현시대 재판부마저 여전히 인지하지 못한다는 걸 드러낸 셈이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았던 최 씨의 용기는 마침내 대법원으로부터 원심 파기 환송을 끌어냈다.
무죄 선고공판 직후 최 씨는 “주위에서 ‘달걀로 바위치기’라고 만류했지만, 이 사건을 묻고 갈 수가 없었다. 나와 같은 운명을 가진 피해자들에게 희망이 되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최 씨의 재심을 지원했던 송란희 한국여성의전화 상임대표는 “오늘 판결은 재심으로 여성 폭력 사건을 바로잡은 최초의 사례”라며 “여성 폭력 피해자의 정당한 방위 행위조차 폭행으로 인지하는 관행을 이제 끝내야 한다”라고 밝혔다.
최 씨는 그 오랜 세월에도 포기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건 1964년 공판 당시 자신을 응원하던 목소리였다고 강조했다. 당시 재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40, 50대 엄마들이 법원에 몰려와서 아우성을 쳤고, “죄 없는 최 양을 풀어줘라!”라는 그들의 목소리는 50여 년간 생생하게 최 씨 안에서 살아있었다. 1964년 응원의 목소리가 61년의 세월을 넘어 2025년 법정으로 이어졌다. 최 씨의 재판에는 그녀의 방통대 동기와 교수부터 전국의 여성단체, 변호인단, 일반 시민 등 수많은 조력자가 함께했고, 공판 당일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사람이 기차와 비행기를 타고 최 씨를 응원하기 위해 부산을 직접 찾았다.
최 씨의 투쟁을 가까이서 지원한 배은하 부산여성의전화 성·가정폭력상담센터 소장은 “여성 폭력 현장은 여전히 한 방울, 한 방울의 물방울이 바위를 뚫어야 하는 현실”이라고 표현했다. ‘물방울로 바위를 뚫는다’는 말은 불가능한 상황을 뜻하는 관용어구로 많이 사용된다. 그러나 수많은 물방울이 모여 시내가 되고 강으로 불어나 폭포처럼 쏟아진다면 바위를 뚫고 지형마저 바꿀 수 있지 않을까.
1964년 시작된 응원의 목소리가 이어져 2025년 폭포로 변해 두꺼운 벽을 뚫은 것이다. 여전히 숨어 울고 있는 여성폭력 피해자들이 언제라도 용기를 낼 수 있도록 우리의 목소리를 모아보자. 한 명의 목소리는 작지만, 많은 이들이 모이면 파렴치한 가해자를 벌벌 떨게 하는 천둥과 벼락이 될 수 있다.
김효정 젠더데스크 teresa@busan.com
2025-09-21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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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가을, 맥주, 그리고 롯데 자이언츠
롯데 자이언츠의 올 시즌 가을야구를 의심하지 않았던 6월 어느 날, 8년 전 부산일보 지면에 보도된 롯데의 포스트시즌 진출 기사를 찾아봤다. 정규리그 막바지 4위 롯데 자이언츠와 3위 NC 다이노스의 순위 다툼이 한창이었다. 팬들은 와일드카드전 대신 3위로 준플레이오프전을 치르기 바랐다. 팬들의 기대에 부응하듯 롯데는 당시 정규 리그를 3위로 마쳐 준플레이오프에 직행했다. 그해 롯데는 준플레이오프전에서 NC 다이노스와 5경기를 치르며 2승 3패로 아쉽게 탈락했다.
8년 전 신문을 찾아보며 올해는 잘하면 한국시리즈 진출도 가능하지 않을까 기대했다. 올 시즌 전반기 롯데는 예전과 달랐기 때문이다.
전반기 롯데는 47승 39패 3무, 승률 0.528로, 정규리그 3위에 올라 중위권 경쟁에서 확실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특히 전반기 롯데의 팀 타율은 0.280으로, 리그 1위를 찍으며 ‘공포의 소총부대’로 불렸다.
주장 전준우의 타율은 4월 0.284에서 6월 0.322까지 상승하며 팀 공격을 이끌었고, 빅터 레이예스는 리그 최다 안타로 팀 득점에 절대적 비중을 차지했다.
마운드에서는 김원중이 안정적으로 뒷문을 책임졌으며 복귀한 최준용은 필승조의 한 축으로 자리 잡았다. 여기에 알렉 감보아는 6월에만 5승 무패, 평균자책점 1.72로 KBO ‘이달의 선수’에 선정되며 선발진 불안을 상당 부분 해소했다.
무엇보다 황성빈, 윤동희 등 주전 선수들의 부상 공백을 신예들이 든든하게 채웠다. 장두성, 김동혁, 한승현, 이호준 등이 잇달아 나타나면서 팬들은 ‘마트료시카 야구’라는 애칭까지 붙여줬다. 롯데의 취약점이자 강팀의 조건인 선수층 뎁스가 강화됐다는 평가마저 나왔다.
팀이 지고 있더라도 끝까지 따라붙어 기어이 경기를 뒤집는 폭발력, 몸에 공을 맞고도 박수를 치고 진루하는 젊은 선수들의 패기, 펜스에 몸이 부딪히는 것을 겁내지 않고 공을 쫓는 집요함…. 롯데는 지난 시즌과 완전히 다른 팀이었다.
하지만 외국인 투수 터커 데이비슨이 한국에서 마지막으로 승리를 챙긴 8월 6일 이후, 롯데는 악몽같은 시간을 보냈다.
당시 10승 투수를 시즌 후반 교체하는 승부수에는 비장함마저 느껴졌다. 후반기 투수 교체는 롯데의 목표가 ‘가을야구를 넘어 한국시리즈’라는 것을 공표한 것이었다.
비장한 목표가 선수들에게 부담으로 느껴졌을까? 이후 롯데는 충격의 12연패 늪에 빠졌다. ‘타격 좋은 팀은 투수 좋은 팀보다 믿을 수 없다’는 말을 입증이라도 하듯 롯데 타선이 얼어붙어 급기야 8월에는 1할대까지 떨어졌고, 팀 순위도 6위로 추락했다.
여기에 롯데가 야심 차게 영입한 벨라스케즈는 6경기 24이닝 동안 평균자책점 10.50, 1승 4패라는 처참한 성적을 내고 있다. 13일 선발 경기서 5실점 후 1이닝도 못 채우고 내려갔을 때 관중석에서는 야유가 나올 정도다. 토종 에이스 박세웅은 불안하고, 홍민기와 이민석 등 전반기 활약했던 투수들도 부진에 시달렸으며 안정적인 클로저 김원중마저도 종종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 여기에 어이없는 수비 실책이 더해지며 한때 가을야구 희망은 고사하고 하위권 추락을 걱정할 지경까지 이르렀다.
롯데는 올해 포스트시즌에 진출할 수 있을까? 요즘은 매 경기마다 일희일비하게 된다. 최근 5연패를 가까스로 탈출한 롯데는 13일 오랜만에 살아난 타격으로 SSG를 12-11로 이기면서 5위로 다시 올라갔다. 하지만 끝까지 가슴을 졸이며 경기를 지켜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불안과 희망, 둘 다 놓을 수 없는 팬들의 심정은 역설적으로 사직야구장의 만원 기록을 낳고 있다. 올 시즌 롯데 사직구장에는 144만 명이 넘는 이들이 찾아 구단 역사상 최다 관중 기록을 세웠으며, 최근 홈 경기는 연일 관중이 가득하다. 연애 고수의 ‘밀당’처럼 롯데의 들쑥날쑥한 경기력이 팬들을 들었다 놨다 하고 있다.
올 시즌 롯데 경기 중 잊을 수 없는 장면들이 많다. 펜스 위쪽으로 날아가는 공을 끝까지 쫓아가며 잡아내고야 말겠다는 김동혁의 의지가 만든 슈퍼캐치, 4시간 13분의 혈투 끝에 연장 11회 말에 나온 이호준의 짜릿한 끝내기 안타, 견제구에 맞아 피를 토하면서도 2루를 향해 몸을 던진 장두성, 시속 157km를 찍은 좌완 알렉 감보아의 역대급 강속구, 6점차로 패색이 짙었던 경기를 12대 7로 뒤집으며 대역전극을 펼쳤던 6월 12일 kt위즈전….
올 시즌 최종 성적이 어떻게 마감되든지, 그 순간의 짜릿함과 뭉클함은 잊지 못할 것 같다. ‘경기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고, 야구는 9회말 2아웃부터’라는 말을 주문 걸듯 되뇌며, 남은 롯데 경기를 지켜볼 것이다. 가을야구 희망을 안고, 혹시나 모를 울화병 진정을 위해 맥주와 함께.
2025-09-14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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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이선좌'는 어쩔 수가 없다?
‘이선좌’. ‘이미 선택된 좌석’을 뜻하는 신조어다. 인기 있는 공연, 스포츠, 영화 등의 표를 온라인 예매할 때 자주 보게 되는 악몽 같은 단어다. 예매자가 좌석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이미 다른 사용자가 선택한 좌석을 클릭하면 ‘이미 선택된 좌석입니다’라는 메시지가 뜨는데, 손이 느린 사람들은 이 과정을 몇 번 반복하다 보면 곧 매진 사태를 맞는다. 온라인 예매 전쟁이 치열해지면서 이름난 연주자나 대중 가수의 공연 티켓은 1분 안에 매진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지난 5일 시작된 부산국제영화제(BIFF) 개폐막작 예매 과정은 어땠을까? 6일(현지 시간) 폐막한 제82회 베네치아국제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은 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수가없다’를 아시아 프리미어로 볼 수 있는 제30회 BIFF 개막식 티켓은 평소보다 빠르게 매진될 것으로 예상됐다. 하지만 이날 오후 2시 시작된 온라인 예매는 집중된 트래픽을 소화 못한 서버 탓에 지연을 반복했다. 예매 시작 40~50분이 지나서야 겨우 예매에 성공했다는 게시글들이 온라인에 올라오기 시작했다. 예매에 성공한 이들조차 기뻐하기보다는 “2시 44분에 예매 성공했어요. 이게 말이 되나요? 진짜 어이없어서 헛웃음 나왔음” 같은 후기를 남길 정도였다.
SNS에는 분통을 터뜨리는 관객들의 댓글이 넘쳐 났다. 한 예매 시도자는 △들어가자마자 무한 대기해야 하는 페이지 △대기해서 들어가고 좌석 선택했더니 무한으로 나오는 이선좌와 또 다시 무한 대기 △현황이랑 다른 좌석 선택 창 △유효 시간 만료로 중간에 튕김 △핸드폰 사용 시 화면도 제대로 로딩이 안 됨 등을 ‘열 받는 점’으로 열거했다.
‘이선좌’를 ‘이선자 씨’로 의인화해 “한 시간 동안 약 100분(명)의 이선자 씨를 만나고, 결제창으로 넘어갔을 땐 정말 믿기지 않았어요. 그런데 말입니다. 좌석만 잡으면 될 줄 알았지 결제창이 안 뜰 줄 누가 알았겠어요?”라는 허탈한 후기를 남긴 이도 있었다.
9일 시작될 일반 상영작 예매는 제대로 진행될 수 있을까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다. 지난 5일 속 터지는 예매를 경험한 이들은 “지금까지 예매하면서 역대급으로 불편했고, 최고로 기분 나쁜 예매 시스템을 경험했다” “모든 페이지 버튼마다 무한 대기, 오류 나는 예매는 난생 처음” “9일 일반 상영작 예매는 또 얼마나 전쟁 같을지…” “일반 예매는 다른 의미로 매우 기대되네” “일반 예매는 제발 순조롭도록 에러 해결해 주세요” 같은 댓글을 달고 있다.
앞서 BIFF는 2022년(27회)과 2024년(29회)에도 예매 오류 문제로 사과문까지 올리는 사태를 빚었다. 29회 행사 때는 트래픽 과부하로 인해 예매에 실패한 이들에게 결제가 진행되는 황당한 문제가 벌어졌다. 2022년에는 보다 빠른 결제를 위해 예매권을 미리 구매한 영화 팬들이 티켓 시스템 운영사의 설정 오류로 예매권을 쓰지 못하는 일도 있었다.
이처럼 온라인 예매 오류가 계속되자 30회를 맞은 올해 BIFF 측은 운영사를 바꾸며 시스템 안정화에 나섰다. 그러나 이용자들의 평가는 ‘오히려 예전만 못하다’는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로 좋지 않은 상황이다. “서버 진짜 역대급으로 최악이네요. 예매권도 다 사 놨는데, 호텔이고 기차표고 지금 다 취소할까 생각 중” “한국 사람도 이렇게 예매가 어려우면 외국인은 어떡하나. 영화제가 내수용이냐”라는 비아냥 섞인 목소리도 나온다.
일부에선 “부국제 30주년이라고 서버 30년 된 거 쓰는 거냐” “그냥 모르쇠로 가는 건가요? 나날이 좋아지는 기술에, 쇠퇴하는 시스템이라 신선하긴 하네요” 같은 말로 BIFF의 후진적 행사 운영을 꼬집기도 했다.
올해 BIFF 개폐막식 예매에 이처럼 접속이 폭증하고, 그에 따른 불만이 쇄도하는 것 역시 영화제에 대한 관심이 그만큼 크기 때문일 거다. 30회 행사를 맞아 BIFF 측은 역대급 게스트를 초청하고 경쟁 부문을 도입해 ‘부산 어워드’를 신설하는 등 관객들의 기대감을 높였다. 그렇기에 ‘예년보다 접속자가 많아서’라는 식의 해명은 영화 팬들의 불만을 누그러뜨리기엔 역부족일 듯하다.
200여 편의 일반 상영작에 대한 예매가 시작되는 9일에는 이 같은 불만이 재현되지 않아야 할 것이다. 30년간 시민들과 영화 팬들의 사랑으로 성장해 온 BIFF가 앞으로 펼쳐갈 30년의 미래 비전을 확인시켜 주는 의미 있는 행사로 올해 영화제가 잘 마무리되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선 온라인 예매 시스템 서버 점검을 비롯한 철저한 행사 대비는 필수다. 영화 팬들이 이번엔 ‘이선좌’의 악몽에서 벗어나 ‘어쩔수가없다’의 GV(관객과의 대화) 등 보고 싶은 영화 예매에 시원하게 성공하길 기대한다.
이자영 문화부장 2young@busan.com
2025-09-07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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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노란봉투법 마주한 '가짜 사장들'을 위한 항변
10명가량 둘러앉은 최근 저녁 모임에서 A 씨는 노란봉투법 얘기를 여러 번 꺼냈다. 자동차 협력사 대표인 A 씨 얘기에 개인 사업자이거나 월급쟁이인 동석자들은 “기업들이 외국으로 다 떠나면 어떻게 하느냐” “하루가 멀다 하고 파업으로 날 새게 생겼다” 같은 말로 맞장구를 쳤을 뿐, 대화는 번번이 다른 화제로 옮겨 갔다. 자리가 파할 때까지 A 씨 표정은 내내 어두웠다.
20년 노동계 숙원인 노란봉투법(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2·3조 개정안)이 지난달 24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 6개월 유예기간을 거쳐 시행에 들어간다. 수많은 근로자와 기업에 영향을 미칠 새 노사 관계 기준이다 보니 숱한 논란과 갈등이 벌어졌지만 제대로 된 사회적 합의는 거치지 못했다는 게 중론이다.
직접 당사자인 중소 하청업체 목소리가 전혀 담기지 못했다는 점이 무엇보다 안타깝다. 출범 3개월 만에 노란봉투법을 밀어붙인 정부여당과 노동계의 기세에 눌려서일까. 하청업체 목소리는 이따금 언론에 ‘익명의 하청업체 대표’ ‘기업 관계자’로 등장해 “원청 파업이 잦아지면 회사 운영이 될지 모르겠다”거나 “원청에서 계약을 끊을까 걱정”이라는 하소연 정도로 전해졌다.
당장 경제계가 우려하는 것처럼 해외로 생산시설을 옮기는 ‘코리아 엑소더스’가 벌어질 것 같지는 않다. 그것도 대기업이나 외투 기업에 해당되는 일이지 국내에서 공장을 옮기려 해도 직원 눈치를 살펴야 하는 중소 하청기업엔 ‘남의 일’일 뿐이다.
대신 기업인들은 향후 고소고발이나 파업이 잦아질 것이라 보고 살길 찾기에 나선 분위기다. 법조계 판단도 다르지 않다. 국내 주요 로펌들은 법 통과 이후 노사관계 대응팀을 꾸리고 노란봉투법 관련 세미나를 연이어 열며 호응했다. 세미나마다 1000명 안팎의 기업인이 몰렸고, 제조 부문 기업 관계자 발걸음이 많았다는 전언이다.
특히, 제조업을 산업 근간으로 한 동남권의 중소 협력사들은 타 지역보다 걱정이 더 크다. 원·하청 구조가 강고한 조선 자동차 기계 철강 등이 부울경에 몰려 있다. 이런 종속관계는 한때 ‘수출강국 대한민국’을 만드는 발판 역할을 톡톡히 했다. 하청기업들은 단가 후려치기 등 원청 횡포에 항변도 못한 채 한국 제품 가격 경쟁력 유지에 일조했다. 대기업은 돈을 벌어도 이윤을 나누는 일에는 인색했다. 그들이 지금 와서는 다단계 하청구조를 바꾸기 위한 노란봉투법이라는 또 다른 장벽을 만났을 뿐이다.
노사가 교섭 테이블에 앉아도 문제 해결은 쉽지 않아 보인다. ‘사용자 범위 확대’ ‘교섭·쟁의 대상 확대’ ‘손해배상·가압류 제한’ 등 노란봉투법 조항들이 모호하고 다툼의 여지가 많다는 평가가 노사 모두에서 나온다. ‘실질적 지배력’을 가진 사용자 여부를 가리는 일부터 책임 범위, 예상치 못한 돌발 변수 등 풀어야 할 과제가 적지 않다. 사안마다 장기 법적 분쟁이 이어질 가능성도 농후하다.
노란봉투법이 순조롭게 자리 잡아 노동자 권리가 신장돼도 하청기업들은 더 힘겨워지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원청이 권한과 교섭권이 강화된 하청 노동자와 직접 교섭을 벌이는 한편 그 손실은 원가 절감을 요구하며 하청업체에 떠넘기는 상황도 예상된다. ‘대화의 장’에 끼지도 못하는 하청기업들은 인건비 상승, 파업 리스크, 원청과의 거래 단절까지 걱정할 판이다.
노사 갈등이나 제도 개선 기간이 길어지는 것은 하청업체엔 더 암울한 상황이다. 노란봉투법 성공 여부는 법률의 모호함을 최대한 구체화하고 그 과정을 얼마나 단축시키냐에 달렸다. 정부와 노동계도 한동안 혼란이 불가피하다는 점은 인정한다. 하지만 “법을 시행한 뒤 문제 있으면 고치자”는 정책 핵심 당국자 언사는 지나치게 안이하다. 대립이 격화된다면 하청 중소기업 현실까지 고려될 기회는 더 줄어든다.
무엇보다 일순간 추락한 하청업체 기업인들 자존심은 어떻게 살려야 할지 걱정이다. “진짜 사장이 나서라”는 노동계의 외침에 수십 년 한국 경제 성장의 주역이라는 자부심으로 살아온 수많은 중소 기업인이 ‘가짜 사장’ 신세가 돼버렸다. 직원 월급 주려고 은행을 쫓아다니며 손을 벌리고, 제품을 개선하려고 국내외를 찾아다닌 노력은 노란봉투법에 짧은 수식어로도 담기지 않았다. 그저 ‘돈만 벌면 그만인 사람’으로 치부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재계는 정부에 입법 보완을 요구하고 있지만 유예기간 6개월간 제대로 된 목소리가 담길 수 있을지 우려한다. 사용자 범위, 노동쟁의 개념, 경영상의 권한 침해 여부 등 하나하나가 논란과 갈등의 요소인 만큼 보완책이 나온다 해도 부정적 영향이 제대로 제거될지 미지수다. 정부와 노사가 또 다른 ‘힘의 사각지대’로 내몰리는 경제 주체를 만들지 않겠다는 각오로 최선의 해법을 내주길 기대한다.
2025-08-31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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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지역을 위해 다시 공공의대 추진을
국립공공보건의료대학, 이른바 ‘공공의대’ 논의는 대입 수시와 닮았다. ‘현대판 음서제’가 될 거란 우려 속에 입시 결과나 졸업생 능력에 노골적인 의구심을 드러내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수능 시절 상대적으로 부진했던 서부산권 고교가 수시 이후 사립학교를 중심으로 돌풍을 일으켰다. 국영수 일변도를 벗어던진 고등학교 풍경도 한결 자유로워 보인다. 제도의 기본 취지는 이해할 생각도 않고 폄하만 하지 않았나 반성해 보는 요즘이다. 수많은 이해관계가 상충하는 사회다. 어느 제도든 그에 대한 작용과 반작용은 있기 마련이었던 거다.
수시 이야기를 꺼낸 건 공공의대에 대한 거부감을 누그러뜨려야 할 시점이 됐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다. 특히나 지역에서는 말이다.
공공의대 논의는 10년 전 박근혜 정부 시절 순천대 의대 관련 법안을 놓고 시작됐다. 사관학교처럼 학비와 기숙사를 전액 국비로 지원하고, 면허 취득 후에는 일정 기간 국가에서 지정하는 의료 취약 지역 공공의료기관에서 의무적으로 복무하도록 하는 게 골자다. 논의는 문재인 정부 시절까지 이어졌지만 반발이 상당했다. 그 후 바통을 넘겨받은 윤석열 정부는 공공의대 대신 의대 증원 쪽으로 가닥을 잡으며 논의는 수면 아래로 가라 앉은 상태다.
지금도 ‘공공’의대가 배출한 의사와 그들의 의료 서비스를 믿을 수 있겠느냐는 의구심이 크다. 그러나 지난해부터 불거진 의정 갈등에서 가장 큰 피해자가 된 건 지역이었다. 이제는 지역이 나서서 공공의대를 더 강하게 요구할 시점이다. 현장을 지킬 필수 인력도 아쉬운 터라 공공의대의 입시 결과와 의사의 질은 따질 계제가 아니다.
이달 경남 밀양에서는 밀양윤병원이 지역응급의료기관 지정을 자진반납했다. 응급실을 운영해야 하는데 의사 5명 중 전공의 출신 3명이 수련병원으로 돌아간다며 동시에 사직서를 낸 것이다. 이 병원은 밀양의 유일한 지역응급의료기관이었다. 강릉의료원 응급실에서도 의사 2명이 수도권 수련병원으로 복귀하겠다는 의사를 밝혀 비상이다.
과연 이 난리통이 밀양과 강릉에만 그치고 말까. 모르긴 해도 하반기 전공의 모집이 가속화될 수록 지역의 응급의료 체계는 더 흔들릴 게 뻔하다. ‘우리 요구 안 들어줬으니 잠시 지방에 가셔 알바라도 하고 오겠다’고 생각한 전공의들이 과연 저들뿐이었을까.
급한 대로 경남도 등 일부 지역에서 지역 필수 의사제가 시범 운영에 들어갔고, 순조로운 출발을 보이는 모양새다. 경남으로 전입온 필수과 의사에게는 병원 약정 급여 외에 매달 400만 원의 근무 수당을 주기로 했다. 전입 환영금에 매달 양육 지원금까지 약속했더니 정원 24명에 19명이 지원했다.
그러나 지역의사제 자체는 대증 요법에 지나지 않는다. ‘의료 태업’ 사태를 거치며 수당 몇 푼으로는 고삐 풀린 의료진을 붙들어 둘 수 없다는 게 드러났다. 시급한 지역의 필수 의료 인력은 지역 필수 의사제로 충당하고, 장기적으로 부울경처럼 3~4개의 광역지자체가 뭉쳐서 지역별로 공공의대를 도입할 수 있도록 고삐를 조여야 할 타이밍이다.
이번 사태를 거치며 의료야말로 그 어느 분야보다 더 로컬이 강조되고 공공성을 부여해야 한다는 걸 다들 여실히 깨달았다. 수도권을 제외한 지역 의대 출신 의사의 지역 정착률은 30% 안팎. 그 동네에서 의사 면허를 따도 그 동네에서 장사는 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지역에서 의사를 하는 게 싫다면 차라리 ‘로컬 보이’에게 그 기회를 주고 그에 대한 충성심과 의무를 요구하는 게 맞다. 적어도 40대까진 면허를 받은 지역에서 의술로 보답할 수 있도록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이후 거취는 스스로 자신이 정하도록 하면 될 일이다. 추가적인 지역 봉사에 대해서는 지역 필수 의사제 등으로 이를 보전한다면 더 큰 시너지가 기대된다.
다들 제 자식 의사 만들지 못해 안달인 시절에 의사 진입 장벽이 낮고, 지원도 파격적이라는 인식이 확산하는 건 지역 입장에서도 반길 일이다. 당장 지난해 의대 증원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수도권 극성 학부모의 전학 문의로 부산시교육청 전화통에 불이 났던 해프닝을 기억해 보라.
다행스러운 건 의외로 공공의대 추진에는 여야가 큰 대립각이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물론, 의료계는 공공의대 논의마저도 반발할 게 뻔하다. 그러나 지금 와서 의료계의 입장에 공감할 이들은 극소수다. ‘공공의대는 제대로 된 의사를 배출할 수 없다’는 논리로 다시 여론을 호도하겠지만 그간 의료계가 보여준 민낯이 너무 추했다.
서글프게도 당장 지역에서 필요한 건 의료진의 질에 앞서 의료진의 숫자다. 새 정부와 광역 지자체들의 빠르고 탄력 있는 공공의대 추진을 기대한다.
2025-08-24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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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지연된 정의'마저 내팽개친 광복절 특사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지연된 정의’조차 아쉽기만 하다. 국고보조금 부정 수급과 횡령 등의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뒤늦게 징역 1년 6개월(집행유예 3년) 형을 확정 받은 윤미향 전 국회의원이 판결 선고 불과 4개월 만에 특별사면됐다.
징역 1년 6개월은 의원직 상실형에 해당한다. 그러나 윤 전 의원은 임기 4년을 보란 듯 채웠다. 터무니없이 지연된 재판 덕이다. 검찰 기소 후 무려 4년 2개월이 지나서야 판결이 났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윤 전 의원 사례를 두고 법철학의 오래된 경구를 떠올렸다.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그런데 이번 사면은 ‘지연된 정의’마저도 헌신짝으로 만들었다.
더 황당한 것은, 일부 정치권이 이번 사면을 ‘죄의 사면’이 아니라 ‘억울한 피해자 구제’로 포장한다는 점이다. 민주당 추미애 의원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윤 전 의원을 ‘사법 피해자’로 표현했다. 돈만 세탁되는 것이 아니다. 범죄도 세탁된다.
굳이 다시 확인하지만, 법원 판결에 따르면 윤 전 의원은 명백한 범죄자다. 단순히 회계 절차를 소홀히 한, 예를 들어 단체 명의의 통장을 사용해야 함에도 개인 명의 통장을 사용했다던지 하는, 그런 수준이 아니다.
2019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고(故) 김복동 할머니의 장례 당시, 조문객들이 낸 현장 조의금만으로도 장례비는 충분히 충당됐다. 그럼에도 윤 전 의원은 장례 후로도 한 달 가까이 SNS에 ‘장례비가 부족하다’는 글을 남겨 1억 2000만 원가량을 모금했다. 기부자들은 당연히 그 돈이 장례비로 쓰일 줄 알았지만, 그 중 1억 원 이상이 여러 시민단체 후원과 단체 활동가 자녀 장학금 등 엉뚱한 용도로 사용됐다.
그뿐 아니다. 윤 전 의원은 십수 년 동안 단체 지원금과 위안부 피해자 후원금 8000만 원 상당을 용도 불명으로 사용했고, 국고보조금 6000여만 원을 부정하게 사용한 혐의도 법원에서 인정됐다.
야당은 이번 사면에 대해 격분하고 나섰다. 국민의힘 송언석 비상대책위원장 겸 원내대표는 사면 발표 직후 “사면권이 대통령 고유 권한이라고 하지만, 일말의 반성도 없는 파렴치한 범죄자들에게 면죄부 주는 사면은 모독”이라며 “국민의힘은 어떤 비리 정치인 사면에도 반대한다”고 밝혔다.
‘야당이 모처럼 옳은 말을 하는구나’ 놀랐고, 그 말이 송 위원장의 발언이라는 점에서 재차 놀랐다. 송 위원장은 격분하기 며칠 전 대통령실 관계자에게 자당 홍문종·정찬민·심학봉 전 의원의 사면을 부탁하는 문자를 보냈다. 홍 전 의원은 횡령, 정·심 전 의원은 뇌물수수로 각각 징역형을 선고받았고, 이들 모두 윤 전 의원과 함께 사면됐다. 송 위원장은 자신의 문자 내용 따윈 며칠 새 모조리 잊어버린 듯 하다.
송 위원장은 윤 전 의원을 ‘파렴치범’으로 규정했다. 같은 사면 명단에 오른 당 동료들에 대해선 뭐라고 평가할지 궁금하다. 혹여 추 의원이 그러했듯 ‘사법 피해자’라 우길 생각일까. 이렇게 제 식구는 사법 피해자로, 상대는 파렴치범으로 규정해 목소리를 높이고, 정작 뒤로는 포로 교환하듯 사면 거래를 한다. 이쯤 되면 대통령 특별사면권의 존재 이유 자체가 무색하다.
윤 전 의원은 사면 직전 페이스북에 자신을 비난하는 이들을 향해 “참 불쌍하다”고 썼다. 맞다. ‘파렴치범’임에도 ‘사법 피해자’로 둔갑한 힘있는 사람들을 보며, 힘없고 빽 없는 선량한 서민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곤 메마른 욕지거리 정도일 테다. 힘있는 사람들의 시선엔 그런 그들이 그저 불쌍하게만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윤 전 의원은 당신이 불쌍하게 여기는 사람들 중 과거 당신이 활동했던 단체에 기부한 이도 적지 않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결국 당신이 함부로 쓴 후원금 또한 (일부이나마) 바로 힘없고 빽 없는 그들의 주머니에서 나온 셈이다. 그들 중 일부는 자신의 후원금이 엉뚱한 곳에 쓰인 것에 분노해 후원금 반환 소송을 벌였고, 법원은 “후원금을 모두 돌려주라”고 화해 권고 결정했다. 윤 전 의원은 반환을 거부하고 있다. 윤 전 의원은 그들이 불쌍하다고 혀를 차기 전에 법원의 결정부터 따라야 할 테다.
그리고 이번 사면을 결정한 집권 여당의 모든 사람들, 또 사면을 거래하려 했던 야당 정치인들은 “법무부는 이용수 할머니에게 사면 여부를 여쭤봤나”라는 김재련 변호사의 질문에 답해야 한다.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 중 생존자는 이제 이용수 할머니를 비롯해 6명밖에 남질 않았다. 이용수 할머니는 윤 전 의원의 사면에 대해 말을 아꼈다. 윤 전 의원 사면에 대한 그분들의 심경을 함부로 추측할 순 없지만, 하나만큼은 확실하다. 어떤 권력도 그분들보다 먼저 윤 전 의원의 죄를 용서할 순 없다.
김종열 정치부장 bell10@busan.com
2025-08-17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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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가짜뉴스와 인포데믹
가짜뉴스가 아예 사라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지 모른다. 역사를 돌아보면 진실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너만 알라’고 귀띔하는 저잣거리 소문이나 ‘카더라’ 마타도어가 민심을 이리저리 흔들기 일쑤였다. 누군가 의도하든 아니든, 그렇게 역사는 다른 방향으로 출렁거렸다. 순전히 오프라인 입소문을 타고 다녔던 과거와 달리 요즘은 분초 단위 온라인 소통을 하는 상황이니 심각성이 더할 수밖에 없다.
대통령은 얼마 전 국무회의에서 가짜뉴스에 대해 ‘징벌적 손해배상 도입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오로지 돈 벌려고 상습적으로 불법을 넘나드는 행태를 없애겠다는 의지가 확고하다. 손해배상을 강조한 것은 형사 처벌에만 의존해선 개선될 여지가 없다고 판단한 데 따른 것이다. 검증 시스템을 갖춘 신문과 방송, 통신사 등 기성 언론과 달리 ‘아니면 말고’ 식의 허위 정보를 생산하는 이들에게 금전적 이득을 환수하는 등 경제적 부담을 줘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이 핵심이다.
많은 국민이 유튜브 등 동영상 플랫폼, 인스타그램과 같은 SNS, 네이버나 다음 등 포털사이트 앱으로 정보와 뉴스 소비 욕구를 채운다. 이들 플랫폼의 영향력이 기성 언론을 압도하면서 뉴스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가 갈수록 자극적인 정보와 뉴스를 쫓는다. 영상 조회수와 구독자 수, PPL 등 광고 수익 규모가 그들 사이에 부와 영향력을 상징하는 지표가 됐다.
‘신문·방송은 심심해서 안 본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크리에이터, 인플루언서라 불리는 이들이 속 시원하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그 이상을 쏟아내니 ‘도파민 미디어 중독’에 빠지고, 알고리즘은 이용자와 결이 다른 콘텐츠를 시야에서 지워 버린다. 이용자들은 그렇게 정보가 사실이냐 아니냐를 따지지 않고 믿고 싶은 것만 믿으면서 점점 좁은 동굴 속으로 들어간다. 나무 몇 그루가 숲인 양 착각한다. 사회적 갈등이 커지면서 유무형의 비용도 폭등한다.
이러한 구조를 악용해 독버섯처럼 퍼지는 가짜뉴스는 너무 많은 해악을 우리 사회에 남긴다. 전염병 대응이나 선거 등 국가적 의사 결정이 필요한 지점에서 늘 가짜뉴스는 눈앞을 흐리게 만든다. 정상적인 비판을 가짜 뉴스로 치부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논리가 허위정보 생산자의 뒷배가 된다. 온라인 상의 갑론을박이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민주적 광장의 절차인지, 가짜뉴스가 만든 난장판에 불과한지 헷갈리는 상황까지 와 버렸다.
바이러스가 항공기를 타고 세계를 넘나들듯, 근거 없는 음모론과 가짜 뉴스는 국경 없는 디지털 랜선을 따라 퍼진다. 검증되지 않은 가짜 정보와 뉴스가 디지털 공간에서 전염병처럼 퍼지는 이른바 ‘인포데믹(Infodemic)’ 위기다.
창궐하는 가짜뉴스가 일종의 바이러스라면, 결국 면역력 강화와 백신 접종이 해결책이 될 수 있다. 우선 미디어 면역력 강화가 시급하다. 학생과 성인을 대상으로 언론의 역할을 제대로 알리는 동시에 이용자 태도 교육을 확대하는 것이다. 영상 속 누군가가 명확한 출처와 근거를 가지고 말하는 것인지, 의심하고 검증하지 않고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악순환이 반복될 뿐이다.
지금껏 언론이 저널리즘을 추구하면서 어떤 노력으로 수많은 역사적 변곡점을 탄생시켰는지 교육을 통해 배울 필요가 있다. 단순히 권력 감시와 비판, 정보 전달, 여론 형성 역할을 한다는 원론적인 얘기로는 부족하다. 변화와 혁신에 둔감한 언론의 반성도 필요하다. 생산하는 뉴스가 깊이와 신뢰를 주지 못하니 독자와 시청자가 대안을 찾아 떠난 것이라는 얘기다.
대통령이 제안한 손해배상 집행에는 현실적인 한계가 물론 뒤따른다. 많은 플랫폼과 계정 이용자가 국외에 있거나 자신을 숨긴 익명 가짜뉴스 제작자가 많아서다. 표현의 자유 침해와 실효성 부족을 우려하는 반발에 주춤할 가능성도 있다. 비슷한 입법 시도가 수차례 좌초되었던 전례도 있다. 손해배상 대상 범위를 반복적이고 조직적인 경우로 좁히고, 불법 수익 환수와 함께 실질적인 피해 회복에도 눈길을 주는 등 여러 논의가 진행돼야 한다.
대통령이 던진 화두가 이번에도 일회성에 그치면 곤란하다. 정치적 진영을 떠나 악의적이고 반사회적인 가짜뉴스 정화를 위해 여러 겹의 단단한 조치와 집요한 노력을 다할 필요가 있다.
최소한 힘 있는 사람을 디딤돌로 입신양명만 쫓는 이들이 아닌, 국민의 행복과 발전에 자신을 불태우는 이들이 미래를 이끌 수 있도록 건강한 민주적 공론의 장을 만들고 지켜야 한다.
박세익 디지털영상센터장 run@busan.com
2025-08-10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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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아직은 샴페인을 터뜨릴 때가 아니다
지난주를 달궜던 화두는 단연 한미 관세협상과 정부의 세제개편안이다.
우선 지난달 31일 극적 타결을 봤던 한미 관세협상은 한마디로 ‘절반의 성공’이라고 평가할 만하다. 물론 이같은 평가는 새 정부의 첫 외교 시험대라는 경험 미숙과 정부를 구성한 지 채 얼마되지 않았다는 준비 부족, 현시점 우리나라의 국력 등을 십분 감안해서다.
이재명 대통령은 이날 고위공직자 워크숍에서 “노심초사하고 정말 어려운 환경이었다. 나라의 국력을 키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밝혔다. 협상의 어려움을 토로했지만, 이 대통령의 하소연은 아쉽다.
우리나라가 힘을 키워야 한다는 진부한 표현은 말 그대로 진부하다. 미국 같은 세계 제1의 국가가 되지 않는 이상 모든 국가가 결국 무릎 꿇는 승자독식의 세계다. 자국 우선주의의 극치를 달리는 트럼프의 미국이 아니더라도 전 세계는 이미 각자도생의 시대에 들어섰다.
이 시점에 우리나라는 얼마나 힘을 더 키워야 한다는 걸까. 명목 GDP로 보면 지난해 기준 우리나라는 세계 11위 수준이다. 현재 인구 등을 고려할 때 우리나라가 세계 최상위권으로 올라가기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다.
특히 경제규모 세계 3위의 EU도, 세계 4위의 일본도 트럼프에게 굴복한 마당에 국력을 핑계 삼는 것은 현실 회피다. 우리나라의 경제적 위치는 이미 정해져 있고, 이를 바탕으로 협상을 한다. ‘힘이 더 있었더라면’ 이라는 변명은 패배자의 자기 위로일 뿐이다.
8월 1일이라는 시간에 쫓겨 우리나라의 경제규모 2배를 넘는 일본과 비슷한 퍼주기를 한 것은 사실상 협상의 실패다. 우리나라의 외환보유고를 감안할 때 너무 큰 규모이고, 향후 대기업의 미국 공장 신설과 이전으로 인해 국내 산업의 공동화가 심각하게 우려된다.
관세협상 기한을 넘기지 않았다는 것에 만족할 뿐이다. 불확실성을 없앴다는 것에 협상의 성과를 부여할 만하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협상 비하인드로 쏟아져 나오는 정부의 자화자찬은 지나치다. 관세 협상 타결이라는 큰 호재에도 불구하고 이날 국내 주식시장이 약세를 보였다는 점은 관세 협상 결과가 미흡했다는 또 다른 방증이기도 하다.
더 심각한 것은 사실 정부의 세제개편안이다.
관세 폭탄은 트럼프라는 특이한 캐릭터에 의해 전 세계가 눈물을 머금고 ‘삥’을 뜯기는, 대외적인 문제였다. 즉 우리나라만 피할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관세 협상의 결과와 같은 날 발표된 세제개편안은 우리 정부의 ‘의지’로 결정된 것이다. 계속 ‘설’로만 흘러나오다가 결국 정부 확정안으로 나온 세제개편안은 지난 1일 국내 증시를 폭락시켰다. 코스피는 이날 하루 만에 3.8%, 코스닥은 4% 하락했다.
증권거래세 인상, 대주주 주식 양도소득세 기준 10억 원으로 강화, 배당소득 분리과세 도입 등의 세제개편안에 실망한 투자자들이 매물을 쏟아냈다. 물론 그동안 코스피의 상승에 따른 피로감, 세계 증시의 조정기 등과 겹친 측면이 있지만, 세제개편안이 폭락의 트리거가 됐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국내 증시 투자자들의 실망을 넘어선 분노의 핵심은 정부의 정책 불신에 있다.
국내 증시는 올해 세계 상승률 1위를 기록할 만큼 가파르게 올랐다. 이는 이 대통령이 공약한 ‘코스피 5000 시대’에 기인한다.
자산이 부동산에 지나치게 몰린 우리나라 국민의 자산 배분 병폐를 없애기 위해 이 대통령은 증시 부양을 핵심 공약으로 잡았다. 이에 따른 상법 개정안 등은 증시에 불을 지폈다. ‘박스피’에 실망해 미국 증시에 투자했던 ‘서학개미’들도 많이 돌아왔고, 국내 주식 투자자들도 많이 늘었다. 국내 증시가 변했다고 보고 외국 투자자들의 투자금액도 대폭 늘었다.
기업의 실적이 갑자기 늘어난 것도 아닌데, 이 대통령의 증시 부양에 대한 강력한 의지, 즉 말만으로 이 모든 것들이 이뤄졌다.
이 때문에 이번 세제개편안은 정부의 정책에 일관성이 없다는 비판이 잇따른다. 집값을 잡기 위한 대체 수단으로 증시에 힘을 몰아준다고 했다면 그에 따른 정책의 일관성이 유지돼야 함에도 그러지 못했다. 마치 코스피가 이미 5000이 된 것처럼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렸다.
이 대통령은 지난 6월 4일 취임해 임기를 시작한 지 불과 두 달밖에 되지 않았다.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내각조차 다 구성하지 못한 시기에 벌써부터 새 정부에 대한 비판을 쏟아붓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윤석열 정권에 비해 새 정부는 국민의 기대치가 높다. 많은 기대를 모으고 있는 만큼 새 정부는 능력과 신뢰를 보여줘야 한다. 한 번 신뢰를 잃으면 회복하기 힘들다.
2025-08-03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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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최고의 파도는 아직 오지 않았다
부산이 모처럼 떠들썩하다. 한낮 기온이 35도를 훌쩍 웃도는 숨 막히는 폭염이 이어지고 있지만, 폭염이 끝난 뒤 올해 가을 그리고 겨울, 그 이후에 다가올 변화의 기대감은 어느 때보다 높다. 부산 시민들은 그 기대감에 올해 더위를 견디고 있는 듯하다.
얼마 전 퇴근길에 부산 동구 수정동 부산일보 본사 바로 옆 수정골목시장에 들렀다. 최근 해양수산부 이전 청사로 결정된 건물과 10여m 떨어진 시장이다. 시장 입구 만두 가게 사장님과 횟집 사장님은 더위에 지친 모습이었지만, 해수부 부산 이전 소식이 반가운 표정이었다. 만둣집 사장님은 “죽어가던 수정동 상권이 이젠 좀 살아날 것 같네요. 오시는 해수부 손님들 정성껏 모셔야지요”라며 미소 지었다. 횟집 사장님도 “해수부 직원분들 회 맛있게 성글어 드려야지예”라며 굵은 땀방울을 흘렸다. 숨이 턱턱 막히는 더위 속에서도 시장 상인들과 웃으며 대화할 수 있는 것이 기뻤다.
세계적 행사의 부산 유치 소식도 줄을 잇고 있다. 지난 15일에는 프랑스 파리와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열린 두 행사에는 “Busan, Korea!”가 불렸다. 부산은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결정하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와 ‘마술 올림픽’으로 불리는 세계마술연맹 월드챔피언십 개최지로 결정됐다. 지난 23일에는 세계 최대 도서관·정보 분야 국제 행사인 세계도서관정보대회 개최지도 부산으로 확정됐다. 2030 월드 엑스포 유치전 탈락의 아픔이 여전히 남아 있지만 ‘국제도시’로서의 부산의 명성을 쌓기엔 더없이 좋은 기회임에 틀림이 없다.
롯데 자이언츠도 올해는 다르다. 올 시즌 가을야구를 볼 수 있는 날이 점점 눈앞에 다가오고 있다. 2017년 이후 8년 만에 가을야구 진출 확률은 어느 때보다 높은 상황이다. 롯데는 한화 이글스, LG 트윈스에 이어서 올 시즌 10개 팀 중 세 번째로 50승을 넘어섰다. 롯데의 좋은 성적에 사직야구장 홈 경기 입장권 구하기는 ‘하늘에서 별 따기’를 넘어 ‘우주에서 별 따기’다. 사직야구장을 찾는 관중이 늘면서 구단 관계자들조차 입장권을 확보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이미 롯데 팬들은 올가을 롯데 선수들이 써 나갈 이야기를 감상할 준비를 마쳤다.
이 같은 부산의 변화와 성과는 매우 반갑다. 하지만 부산 곳곳에 활기를 불어넣기에는 아직 부족하다. 여전히 부산 시민들이 체감하는 경제 상황은 꽁꽁 얼어붙어 있다. 민생회복 소비쿠폰이 전통시장과 상권에 활기를 넣고 있지만 충분하지 않다. 부산 인재들이 더 좋은 일자리를 찾아 서울과 수도권, 해외로 떠나는 현상은 큰 흐름이 되고 말았다. 부산으로 본사를 옮기는 기업들은 찾기 어려운 상황이다. 부산에 찾아온 좋은 발전 기회를 더 가꾸고 발전시킬 동력을 만들 인재들이 부산을 떠나고 있다. 서울·수도권에서 하루가 멀다고 들려오는 집값 폭등 소식에 부산 시민들의 허탈감은 커져만 간다.
지난 2021년 대한민국 서핑 국가대표팀 송민 감독은 2020 도쿄 올림픽 당시 한 지상파 중계 방송에서 한 발언으로 큰 화제를 모았다. 당시 송 감독은 ‘똑같은 파도는 오지 않는다’며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자신이 올라탈 미래의 파도를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최고의 파도는 아직 오지 않았다’는 한 마디도 덧붙였다. 현재에 만족할 것이 아닌 다가올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부산은 해수부 부산 이전이라는 ‘파도’를 잘 준비해야 한다. 이번 파도는 그동안 바다 아래 가라앉아 있던 부산의 경기를 수면 위로 끌어올릴 중요한 기회다. 이번 파도에 올라타 파도 속을 항해할 기회이기도 하다. 해수부에 이어 해양 공공기관·대기업 이전과 해사법원 설치, 동남권 투자은행 설립 역시 또 한 번의 파도가 될 것이 분명하다. 두 번의 파도를 잘 준비하고 활용한 뒤에는 더욱 큰 파도에 올라탈 체력을 가질 수 있다.
부산은 울산, 경남과 함께 해수부 이전을 계기로 동북아 시대의 진정한 ‘해양 수도’로의 도약을 준비해야 한다. 부울경 지역의 조선, 자동차, 기계 등 전통적인 제조업 분야의 밑바탕에다 관광, 해운, 물류 분야가 더해져 다시 한번 성장해야 한다. 이 분야는 부울경이 가장 한국에서 잘 하는 분야임에 틀림이 없다.
여기에다 AI 시대를 맞이한 디지털 경제와 금융 기능이 강화된다면 부산 경제의 성장 엔진은 더 늘어날 수 있다. 해수부 부산 이전이라는 첫 파도는 마지막 파도가 아닌 오랜 기간 꿈꿔온 ‘세계 최고의 해양 도시, 부산’으로의 성장을 위한 첫걸음이어야 한다. 부산시는 물론 부산 상공계, 부산 시민은 파도를 맞이할 준비에 나서야 한다. 부산에 최고의 파도는 아직 오지 않았다.
2025-07-27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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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아이들이 홀로 죽지 않도록
지난 2일 밤 부산의 한 아파트에서 발생한 화재로 6세와 8세 자매가 목숨을 잃었다. 이 사고 8일 전인 지난달 24일에도 부산의 또 다른 아파트에서도 화재가 발생해 미처 대피하지 못한 어린 자매가 숨졌다. 부모는 외출 중이었고, 멀티탭이나 스탠드형 에어컨 주변에서 발화한 것으로 추정되는 전기적 요인에 스프링클러가 없는 노후 아파트라는 공통점이 있다.
부모가 집을 비운 사이 잇따라 발생한 참사는 우리 사회 돌봄 시스템의 사각지대, 특히 야간 돌봄의 공백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드러낸 것이다. 맞벌이는 이제 평범한 삶의 조건이 됐고, 핵가족화는 보편적 현실이다. 그러나 이 변화에 걸맞은 안전망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 아이들은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위험에 노출되고, 비극이 되풀이되고 있다.
돌봄의 공백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긴급 돌봄 서비스, 방과 후 돌봄 확대 등 정부와 지자체의 다양한 노력이 있지만, 현실의 사각지대를 메우기에는 역부족임을 이번 사고가 여실히 보여준다.
부산 전역에서 24시간 긴급돌봄이 가능한 센터는 단 한 곳. 그러나 그마저도 최근 3개월 동안 심야 시간대 이용자 수는 0명이었다. 홍보 부족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데다, 이용하려면 최소 4시간 전 예약이 필요하다. 가정으로 찾아가 아이를 돌봐주는 정부의 아이돌봄서비스도 긴급한 상황에서도 사전 소득 판정이 필요하고, 돌보미와 매칭이 되지 않으면 신청이 자동 취소된다. 지난해 시범 사업 기간에는 전국 기준 긴급 돌봄을 신청한 10명 중 6~7명, 단시간 돌봄을 신청한 10명 중 4명이 매칭에 실패했다.
돌봄 체계의 허점과 함께, 노후 주거지의 전기 안전 문제도 더는 외면할 수 없다. 건조하고 화기 사용이 많은 겨울철 화재가 많았던 과거와는 달리 에어컨 등 전자 기기 사용이 많은 요즘은 화재가 계절을 가리지 않고 많이 발생하고 있다. 2020년부터 지난해까지 5년 동안 아파트 등 부산의 공동주택에서 발생한 화재의 약 30%가 전기적 요인이었다.
최근의 화재도 스탠드형 에어컨과 실외기가 동시에 연결된 멀티탭에서 전기적 발화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고 당시 멀티탭에는 에어컨 본체와 함께 베란다 실외기도 연결돼 있었다. 에어컨 실외기처럼 전력 소모가 큰 전자제품의 경우 화재 예방을 위해 멀티탭에 다른 기기와 동시에 연결하지 않도록 권장된다. 하지만 법적 규제 사항은 아닌 탓에 일상에서 잘 지켜지지 않는다.
‘문어발식 콘센트’는 이제 단순한 생활 습관의 문제가 아니다. 화재를 유발하는 구조적 위험이다. 콘센트 화재는 부산에서 최근 5년간 27% 증가했다. 그럼에도 이를 규제하거나 점검할 제도는 미흡하다. 정기적인 전기 안전 점검은 법적 의무가 아니며, 노후 주택의 전기 시설 개선에 대한 지원도 턱없이 부족하다.
정부는 다음 달 국정현안관계장관회의에서 부산 화재 참변과 관련한 범정부 종합대책을 발표할 계획이다. 이에 앞서 부산시는 원스톱으로 돌봄 시스템을 관리하는 ‘아동 돌봄 핫라인 콜센터’를 개설하기로 했다. 또한 야간 돌봄 공백 해소를 위해 돌봄 시설의 운영 시간도 늘린다. 여성가족부는 야간 시간대 긴급돌봄 서비스를 이용하는 저소득 가구를 대상으로 본인 부담금을 경감하고 긴급돌봄에 참여하는 아이돌보미에 대한 인센티브를 추가 지원하는 시범사업을 시작할 예정이다. 복지부도 오후 10시 이후 연장형 돌봄시설 확대 방안을 검토할 방침이다.
정부는 신속한 화재 감지·경보가 가능한 ‘단독경보형 연기감지기’를 부산지역 돌봄 취약 세대에 우선 보급하고 향후 전국으로 확대할 예정이다. 전기안전멀티탭 교체·보급 사업도 추진한다. 산업부는 노후 주거 시설 아크(전기불꽃)차단기 설치 확대, 주택 임대·매매 거래 시 안전 점검 의무화, 금속 배관 교체, 비상차단기 보급 등 안전 대책을 논의 중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다. 이 모든 계획이 현장에서 작동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핵심이다. 취약계층의 경우 특히 더 세심한 점검과 지원이 필요하다.
돌봄과 화재 예방의 1차 책임은 물론 개인에게 있다. 그러나 돌봄은 가정의 책임만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사회적 과제다. 아이가 있는 가정이라면 누구나 돌봄 사각지대의 당사자가 될 수 있다. 아이들이 홀로 집에 남겨지지 않아도 되는, 설령 남겨지더라도 위험에 노출되지 않는 사회. 그 기본은 돌봄 체계의 재설계와 안전 인프라의 공공적 보장이다. 취약 계층 주택의 경우, 정부와 지자체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안전 점검 비용을 지원하고, 필요한 경우 직접 시설 개선을 도와야 한다. 가장 기본적인 삶의 터전에서조차 안전을 위협받는 일이 없도록 사회 시스템을 꼼꼼히 정비해야 한다.
2025-07-20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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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여가부 잔혹사를 끝내자
얼마 전 부산시립박물관에서 ‘큰별쌤’으로 유명한 최태성 역사 강사를 만났다. 최 강사는 광복 80주년 기획전이 진행 중인 부산 박물관에 특강하기 위해 찾았다. 박물관 대강당이 가득 찰 만큼 사람이 많이 왔고, 최 강사는 ‘그날을 만든 사람들-부산의 독립운동가’라는 제목의 강의를 할 예정이었다.
강당에 들어서니 대형 화면에 ‘위대한 사랑의 역사’라는 큰 글씨가 적힌 영상이 비치고 있다. 최 강사는 “오늘 저는 위대한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라는 말로 강의를 시작했다. 알려지지 않은 부산의 독립운동 이야기를 한다고 들었는데 뜬금없이 무슨 사랑 타령인가 싶었다.
그런데 정말로 최 강사는 1시간 30분 동안 뜨거운 사랑 이야기를 전했다. 독립운동가들은 거사에 나가기 전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세상에 남기는 마지막 기록이다. 영화 ‘밀정’에서 이정재 배우는 독립운동가에서 친일파로 변절한 인물을 연기한다. 독립운동 동지가 변절의 이유를 묻자 “독립이 될 줄 몰랐다”라고 답한다. 실제로 당시 많은 지식인, 지도자가 독립은 포기하고 일제와 타협해 조금 더 편하게 사는 길을 찾자고 주장했다.
그런 분위기에서 독립운동가는 죽음을 각오하고 거사에 참여했을 것이다. 어쩌면 자신은 독립된 세상을 누릴 수 없다는 걸 이미 알았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망설이지 않고 폭탄과 함께 뛰어들었고, 살아서 일제 경찰에 붙잡혀도 타협 없이 죽음을 택했다. 그 마음은 조국과 민족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었다. 후손들은 독립된 나라에서 자유롭게 살게 해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자유는 앞서 싸운 이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사실 독립운동뿐만 아니라 현재 민주주의 역시 앞서 싸운 이들의 피와 땀으로 완성된 것이다.
최 강사의 이야기가 떠오른 건 여성가족부의 탄생 상황을 회상하다가 독립운동가들의 위대한 사랑과 비슷한 점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95년 부산일보에 입사해 처음 맡은 분야가 ‘여성·가족’이었다. 30년 전 ‘여성·가족’ 기사는 대체로 ‘슬기로운 주부 생활’에 관한 내용이었다. 가족 돌봄과 알뜰한 살림은 주부의 일이고, 그들의 희생과 봉사를 바탕으로 이뤄지는 것이었다. 같은 직종, 비슷한 경력에도 남성 직원이 여성보다 승진, 연봉에서 유리했던 차별 상황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그러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결국 돌봄, 젠더 폭력, 차별 등을 전문적으로 고민하고 정책을 펼칠 독립 부처를 요구하게 되었다. 당시 인권 운동, 여성 운동, 시민 운동을 하는 이들이 모여 여성부 설립을 위해 국민 서명을 받았고 집회도 열었다. 정부 관계자를 만나 설득하기도 했다. 어려움이 많았고 몇 년의 시간이 걸렸다. 조금 더 나은 세상을 물려주겠다며 선배들은 광장에서 몸과 마음을 다쳐 가며 싸웠다.
그렇게 2001년에야 여성부가 출범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성부는 정권마다 위상이 크게 출렁였다. 남성 표심을 잡기 위해 ‘여가부 폐지’를 선거 공약으로 들고 나온 윤석열 정부 때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반대에 부딪혀 부서를 폐지하진 못했어도, 16개월째 장관을 공석으로 두며 여가부는 사실상 ‘식물 부서’로 전락했다.
그렇다고 윤 정부 3년간 남성의 삶은 더 나아졌는가. 그렇지도 않다. 청년층의 고립, 구조적 차별은 심해졌고 ‘남성다움’에 대한 사회적 압박도 여전히 크다. 모든 국민이 보는 대통령 후보 토론회에서 버젓이 여성 신체에 대한 성희롱 발언을 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그 후보를 국회의원에서 제명시키자는 청원이 60만 명을 넘을 정도로 많은 국민이 분노했다. 하지만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선 후보가 그 발언이 성폭력이라는 걸 사전에 인지조차 하지 못했다는 점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재명 대통령은 후보 시절 여성가족부를 확대 개편하겠다고 말했다. 성평등은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지속가능성과 직결된 문제이다. 성평등가족부로 확대해 차별과 혐오, 고립과 폭력을 걷어내고, 다양성과 돌봄, 공동체를 회복하는 국가 비전을 만들어야 한다. 국가 소멸 위기에서 출생은 한 가족의 문제를 넘어 사회가 돌봐야 할 일상의 단위라는 인식도 필요하다.
정권 변화에 따라 예산도 인원도 정책 방향마저 흔들리던 여가부 잔혹사는 이제 끝나야 한다. 다시 한 번 지극한 사랑을 바탕으로, 모든 국민이 공정과 평등을 누리는 세상을 열어 보자.
2025-07-13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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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건강한 부산의 미래를 위해
생활에 활기를 느끼고 싶다면 스포츠만큼 확실한 해답은 없다. 직접 운동을 해도 좋고, 다른 이들의 경기를 응원하는 것도 좋다. 땀 흘리고, 박수를 보내며, 공동의 감동을 나누는 경험은 개인의 건강을 넘어 공동체 전체에 긍정적인 에너지를 불어넣는다.
올해 부산의 스포츠 현장은 어느 때보다도 뜨겁다.
연초 부산의 여자 프로농구팀 BNK 썸의 드라마 같은 우승이 시작이었다. 지난 시즌 6개 팀 중 꼴찌였던 BNK 썸은 올해 창단 6년 만에 첫 승을 올리며 부산에 승리의 기운을 불어넣었다.
프로야구에선 롯데 자이언츠가 봄을 지나 여름에도 리그 상위권을 유지하며 ‘가을야구’에 가까워지고 있다.
남자 프로농구 KCC는 스타 플레이어 허훈 영입과 ‘영원한 오빠’ 이상민 감독의 부임으로 다가올 시즌에 기대를 높이고 있고, 남자 프로배구 OK저축은행은 안산시에서 부산으로 연고를 이전해 부산의 배구 팬들은 올해 10월부터 안방 경기장에서 직관할 수 있게 됐다.
여기에 더해 오는 10월 부산에서는 25년 만에 전국체전과 전국장애인체전이 연이어 개최될 예정이다. 전국체전은 단순한 스포츠 행사를 넘어 부산의 체육 역량을 전국적으로 확인받을 기회다.
이러한 흐름을 반영하듯 부산시는 지난 3월 전국 광역자치단체 최초로 ‘체육국’을 신설했다. 생활체육과 전문체육을 아우르는 전담 부서가 생긴 것이다. 시민 건강과 여가, 도시 브랜드를 동시에 끌어올릴 수 있는 체계적인 정책 기반이 마련됐다는 점에서 고무적인 변화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다. 문화체육관광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부산의 공공 체육시설은 총 1866개로, 전국 17개 시도 중 9번째 규모다. 부산의 도시 위상에는 한참 못 미친다.
공공 체육 인프라 부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는 공인 육상경기장이다. 전국에 공인 육상경기장이 43개 있지만 놀랍게도 부산에는 한 곳도 없다. 부산에는 공인 경기장이 없어 전국 단위 육상대회를 개최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10년 전에도 〈부산일보〉와 지역 체육계 등에서 공인 경기장의 필요성을 역설했지만, 바뀐 것이 없다는 것도 황당한 대목이다.
전국체전 개최지는 의무적으로 전국육상선수권대회를 개최해야 해서 부산시는 사직 아시아드주경기장을 보수해 급하게 공인을 받을 예정이다. 이마저도 사직야구장이 재건축 되면 아시아드주경기장은 임시 야구장으로 사용될 예정이어서 다시 공인 육상경기장은 사라질 위기에 처한다.
부산의 대표적인 체육시설 중 하나인 구덕운동장은 개발이 지연되며 사실상 방치되고 있다. 과거 시민들의 추억이 서린 공간이지만, 현재는 낙후된 시설과 불투명한 활용 계획으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구덕운동장을 리모델링해 지역 체육의 허브로 만들겠다는 계획은 해마다 발표되지만, 실질적 착공이나 투자 확대는 지지부진한 상태다.
KCC 프로농구단의 경우, 연고지 경기는 부산에서 열리지만 훈련장이나 숙소는 다른 지역에 있다. 이름만 ‘부산 연고’일 뿐, 실질적으로 지역 경제나 체육 생태계에 기여하는 바는 미미한 상황이다.
이처럼 ‘열기는 뜨겁지만 기반은 취약한’ 구조는 오래가지 못한다. 스포츠는 단발성 이벤트로 꽃피지 않는다. 훈련하고, 참여하고, 관람할 수 있는 일상 속 공간이 갖춰질 때 비로소 시민들과 함께 성장할 수 있다. 단순히 경기장 몇 곳을 새로 짓는 문제가 아니다. 모든 연령과 계층이 일상적으로 스포츠를 접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
특히 부산의 체육 시설 인프라는 지역별로 큰 차이를 보인다. 구·군 단위로 실내 체육관, 수영장, 트랙, 다목적 구장을 균형 있게 배치하고, 기존 시설의 개보수를 통해 지역 간 체육 인프라 격차를 해소해야 한다. 또 프로 구단 유치에만 머무르지 말고, 실제로 지역 체육 생태계 안에서 상생할 수 있도록 기반 인프라와 시스템을 체계적으로 구축해야 한다.
체육 인프라는 도시의 건강을 측정하는 척도이기도 하다. 부산이 진정한 스포츠 도시로 도약하려면, 내실 있는 인프라에 더 많은 관심과 투자가 필요하다. 시민들이 집에서 가까운 곳에서 마음껏 운동하고, 아이들이 뛰노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어야 한다. 부산의 내일을 더 건강하고 활기차게 만들기 위해선 무엇보다 체육 인프라 확충이 필요하다.
그래서 부산시의 체육국 신설은 반갑다. 단순히 기존에 각 부서에 흩어졌던 업무를 한 곳에 모아 놓은 것 이상의 역할을 기대한다.
송지연 스포츠라이프부장 sjy@busan.com
2025-07-06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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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공원 속 콘서트홀, 바닷가 오페라하우스
‘숲속 공연장’이라는 별칭을 가진 부산콘서트홀. 부산 첫 클래식 전용 공연장으로 지난 20일 개관했다. 부산진구 부산시민공원 내에 위치한 덕분에 창밖으로 푸른 나무와 잔디를 볼 수 있어 더욱 매력적인 곳이다. 지난 주말, 공연 중간 휴식 시간에 콘서트홀 바깥 풍경을 바라보다 문득 떠오른 장면이 있다. 잔디밭 위에서 바람을 쐬는 관객들의 여유로운 한때를 보고 있으니, 그동안 즐겨 찾던 경남 통영국제음악당 야외에서 탁 트인 바다를 조망하던 관객들의 행복한 얼굴이 겹쳐졌다.
매년 봄 통영국제음악제가 열리는 기간이 되면, 클래식 애호가들은 설레는 마음으로 그곳을 찾는다. 부산·경남 지역뿐 아니라 수도권을 포함한 전국구 팬들이 몰려들어 음악제 기간엔 숙소 구하기도 쉽지 않다. 특히 올 3월 행사 땐 국내 클래식 팬들이 현재 가장 보고 싶어하는 연주자로 손꼽히는 피아니스트 임윤찬이 개막 공연 무대에 서게 되면서 그야말로 ‘피켓팅’(피가 튀는 전쟁 같은 티켓팅)이 벌어졌을 정도다.
이제는 부산도 그런 공연장과 음악 축제를 보유한 도시가 됐다. 피아니스트 조성진과 클래식부산 정명훈 예술감독이 함께하는 부산콘서트홀 개막 페스티벌 티켓은 일찌감치 매진됐다. 게다가 2027년엔 바닷가 공연장인 부산오페라하우스도 부산항 북항에 문을 열 예정이다. 통영국제음악당처럼 바닷바람을 맞으며 좋은 공연을 기다리는 설렘을 부산에서도 곧 느낄 수 있게 된다.
부산의 랜드마크가 될 두 공연장의 장소성도 눈여겨봐야 한다. 콘서트홀이 위치한 부산시민공원은 일제강점기 서면 경마장, 광복 후 주한미군사령부(캠프 하야리아)를 거쳐 100년 만에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오페라하우스가 건설 중인 부산항 북항 역시 1876년 개항한 후 146년 만에 친수공간으로 재개발돼 시민에게 환원됐다. 이런 이야깃거리까지 더해진 두 공연장이 시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문화예술공간으로 자리매김하길 기대해 본다.
장밋빛 전망만 나오는 건 아니다. 부산콘서트홀이 개막 페스티벌을 화려하게 치러내기는 했지만, 개관 초기 화제성을 이어갈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도 적지 않다. 특히 유명 연주자나 오케스트라 공연에만 관객이 몰리는 편중 현상은 공연예술계의 해묵은 과제다. 한 지역 음악계 관계자는 개막 페스티벌의 관객 층이 눈에 띄게 젊어진 것에 대해 놀라움을 표했는데, 이 역시 개관 효과에 따른 일시적 현상은 아닌지 염려하는 시선이 적지 않다. 새로운 장소를 방문하고 SNS에 인증하기 좋아하는 젊은 층의 특성을 고려하면, 이들을 지속적으로 유인할 좋은 콘텐츠 기획이 필수적이다. 미래 관객 발굴 노력도 다각적으로 시도해야 한다.
지역 음악 단체와의 상생 노력도 필요하다. 지난 20일과 21일 개관 기념 공연 ‘하나를 위한 노래’를 관람한 관객 중 일부는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 공연을 부산시립합창단이 아닌 창원시립합창단이 맡은 데 대해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물론 개관 페스티벌을 마무리하는 지난 27일과 28일 콘서트 오페라 ‘피델리오’ 공연에 국립합창단과 부산시립합창단이 함께하긴 했다. 그러나 개막 공연의 상징성을 생각하면, 부산시립예술단의 적극적인 참여가 아쉽다는 반응이 나온다. 개막 페스티벌에 부산시립교향악단의 무대가 빠진 것 역시 비판이 제기되는 부분이다. 일각에선 “의도적 배제 아니냐”고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
부산문화회관, 부산시민회관 같은 기존 노후 공연장 시설 개선도 남은 숙제다. 공연을 보는 관객 입장에서도, 무대에 서는 연주자 입장에서도 상대적으로 시설이 더 좋은 공연장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 부산콘서트홀이 클래식 전용 홀의 특성을 가진 만큼, 부산문화회관과 시민회관은 다양한 장르의 공연으로 시민에 더 가까이 다가간다는 차별화 전략을 세우고 있다. 그럼에도 향후 시설 투자가 병행되지 않으면, 관객의 발길이 끊길 것이란 위기감마저 감돈다. 장기적으로는 부산콘서트홀과 부산오페라하우스, 부산문화회관과 시민회관을 통합 운영할 컨트롤 타워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온다. 발전적 경쟁도 필요하지만, 효율적인 시설 운영을 위해선 좋은 프로그램을 선별해 각 공연장에 배정하는 방식의 통합 운영이 장기적으로 상승 효과를 낼 수 있을 거란 목소리다.
부산콘서트홀과 오페라하우스가 지역의 랜드마크로 우뚝 서는 것은 물론이고, 기존 공연장들도 제 역할을 다해 다채롭고 풍성한 문화예술이 숨쉬는 도시 부산이 되길 바란다. 이 같은 문화예술 자산은 국내외 관광객을 지역으로 끌어들이는 매력 요소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부산의 새로운 먹거리, 성장 동력이 될 수도 있다. 부산시의 치열한 고민과 지속적인 투자가 필요한 시점이다.
이자영 문화부장 2young@busan.com
2025-06-29 [17: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