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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션 뷰] 여객선 공영제, 다시 논의해야 할 때
집으로, 일터로, 병원으로 가야 하는데, 갈 방법이 없다. 그렇다고 다른 대체 교통이 있는 것도 아니고, 길이 없어 걸어갈 수도 없다. 섬사람들의 이야기다. 우리나라에 사람이 거주하는 유인도서는 총 481개인데, 이 중 정기선이 다니지 않는 섬이 73개로 15.7%에 달한다. 이들 섬은 육지와 연결되지 않았고 일반 항로는 물론 국가 보조 항로조차 없어 공식적인 해상 교통편이 없는 상태다. 설령 여객선이 다닌다 해도 민간 선사들이 수익성을 이유로 운항을 자주 결항하거나 높은 요금을 부과하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여객선이 기항하지 않는 섬 중 100여 곳의 섬에서는 주민들이 자체적으로 운영비를 마련해 도선을 운영하고 있다. 정규 항로마저 없는 섬들의 주민들은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하며 낚싯배에 이동을 의존하기도 한다.
섬 주민 생존·이동권 여전히 외면당해
대중교통법 개정에도 현실은 제자리
준공영제 한계… 공영제로 가야 할 때
안전·공정·접근성 담보할 현실적 해법
그런 섬들에 사람들이 산다. 섬 주민들에게 여객선은 단순한 교통수단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생존권, 이동권, 안전권, 그리고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권리와 직결된다. 한동안 여객선 공영제에 대한 논의가 있었던 것도 국민의 교통 기본권과 행복추구권 보장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늦었지만 2020년 ‘대중교통의 육성 및 이용촉진에 관한 법률’(대중교통법)이 개정되면서 연안여객선과 유·도선이 대중교통에 포함됐다. 그러나 제도상에서 대중교통에 편입되었다고 해서 기존 대중교통과 동등한 수준의 지원이나 정책적 우선순위가 보장되진 않았다. 실제로 산간벽지 주민을 위한 철도나 도로 인프라 구축·운영 예산과 연안여객선 관련 지원 예산을 단순 비교해 보더라도 10배 이상 차이가 난다. 법은 바뀌었지만, 현실은 여전히 갈 길이 멀다.
이미 2022년, 당시 정부는 섬 주민들의 이동권을 보장하기 위한 방안으로 ‘연안여객선 공영제’를 국정과제(120대 과제)에 포함하고, 2025년을 목표로 추진 계획을 발표했다. 또한 해상교통 소외 도서 제로화와 연안여객선 전체 항로를 당일 육지 왕복이 가능한 1일 생활권으로 전환하겠다는 구상도 내놓았다. 그러나 정작 섬을 오가는 여객선은 오히려 해마다 감소하고 있다. 2013년 168척이었던 여객선은 2023년에는 155척, 2025년(4월 기준)에는 147척으로, 여객운송사업면허 업체 수도 2021년 62개에서 2022년 58개, 2025년에는 54개가 되었다. 정책 방향과 실제 현장 간의 괴리가 점점 커지고 있는 셈이다.
여객선 공영제는 당연히 누려야 할 이동권 보장과 더불어 해상 안전에 기여하는 바도 크다. 현재 우리나라 연안여객선은 대부분 영세한 민간 선사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2025년 현재 전체 54개 여객선운송업체 중 18개 업체가 10억 미만의 자본금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40개 업체는 3척 이하의 선박만을 보유하고 있다. 2023년 기준 기본 선령(船齡)인 20년을 넘겨 운영 중인 선박도 31척으로 20%에 달한다. 영세한 경영, 노후 선박, 안전 투자 부족 등의 구조적 한계가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이유다. 2023년 일본에서는 연안여객선 2102척 가운데 55척만이 사고가 난 반면, 같은 해 우리나라에서는 전체 연안여객선 155척 중 58척이 기관 손상(30%) 등 다양한 원인으로 사고를 겪었다. 우리나라 연안여객선 운용과 안전 실태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여객선 공영제는 또한 대중교통임에도 지나치게 비싼 요금을 조절해 줄 수 있다. 교통수단별 km당 운임 단가를 비교해 보면, 연안여객선은 306원으로 항공(209원)보다 높다. 특히 인천-대이작도, 인천-백령도, 포항-울릉도 등 일부 항로의 경우에는 1km당 요금이 KTX의 5배 수준이다. 운임 현실화는 비단 섬 주민들에게만 혜택이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여객선 이용객의 75%는 일반 국민이다. 섬을 방문하고, 섬의 가치를 아는 관광객들에게도 도움이 되며, 이는 곧 지역 경제의 활성화로 이어질 수 있다.
현재 일부 지자체가 시내버스와 같이 연안여객선 준공영제를 추진하고 있지만 이는 근본적 한계가 존재한다. 제도적으로 지자체는 여객선 항로와 운임에 대한 인·면허권이 없어 운항 계통 서비스 개선이나 운항 적자 관리에 실질적으로 개입할 권한이 없다. 권한이 없는 상태에서 재정지원만 늘리는 준공영제는 결국 민간 선사의 도덕적 해이를 유발할 수 있고, 서비스 개선은 기대하기 어렵다. 결국 운영 적자까지 공공이 모두 떠안게 되는 구조로 귀결될 수 있다.
따라서 이제는 준공영제의 한계를 넘어 공공이 직접 항로와 운임을 관리하고 서비스 품질을 책임지는 공영제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2016년부터 꾸준히 여객선 공영제를 시행 중인 전남 신안군의 사례는 주목할 만하다. 여객선 공영제는 섬과 육지를 잇는 선박을 안전하고 합리적인 대중교통으로 자리매김하게 해 섬 주민의 이동권 보장은 물론, 국민 모두의 편리한 접근성을 동시에 실현할 수 있는 현실적인 해법이 될 수 있다.
2025-05-25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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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션 뷰] 미국발 변화와 한국 해운조선업계 대응
미국은 무역적자 해소와 해양에서의 중국 견제를 위해 자국우선주의에 기반한 조선 및 해운 분야 법·제도에 대대적인 변화를 추진하고 있다. 미국 조선업의 부활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한국 조선소의 협력을 구한다는 점이 큰 정책 변화다. 중국의 해군력에 대응하기 위해 군함과 전략물자 수송선이 많이 건조되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한국 조선소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해군력 강화를 위해서는 전략 물자를 운송할 선박 확보가 필수적이다. 현재 80척에 불과한 전략물자 수송선을 250척까지 확대하겠다는 것이 핵심이다. 일반적으로 전략 수송선은 자국에서 건조되고, 자국의 깃발을 달며, 자국 선원이 승선하고 자국 회사가 운항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당장 자국 내 건조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한국이나 일본 등에서 건조한 선박도 전략 상선대에 들어갈 수 있도록 했다. 이에 우리 조선업과 해운업에도 기회가 주어진 셈이다.
수요 몰릴 우리나라 중소형 조선소
RG 발급 문제가 수주 확대 ‘관건’
민간 선주사 육성·금융 지원 통해
경쟁력 회복하고 새 기회 열어야
우리나라 3대 대형 조선소는 이미 2027년까지 건조할 선박으로 독이 꽉 차 있어 당장 미국의 선박 주문을 받아줄 여유가 없다. 그런데 미국이 원하는 선박은 선종과 크기 면에서 매우 다양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 중소형 조선소에 기회가 주어진다. 부산에 있는 중형 조선소인 대선조선은 얼마 전 카페리 선박을 성공적으로 건조해 인도한 바 있다. 그런데 중소형 조선소는 선수금환급보증서(RG) 발급을 받지 못해 어려움에 처해 있다. 조선소에 건조가 가능한 철판을 사 오도록 선주가 제공하는 선수금을 확실하게 되돌려주겠다는 약속이 적힌 보증장이 RG이다. 조선소가 이를 은행으로부터 발급받지 못하면 선주는 건조 계약에 서명하지 않는다. RG만 발급받을 수 있다면 많은 수주를 할 수 있고 건조를 통해 수익을 올릴 수 있다.
전략 상선대에 편입될 170척 중 상당수는 미국이 해외에서 직접 매입하거나 연불 방식으로 확보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선주 사업이 발달한 일본과 그리스의 선주들은 큰 기회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들 선주사는 싼 가격으로 건조된 선박을 많이 보유해 미국에 유리한 조건으로 선박을 매각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는 선박만 소유하고 있는 회사가 거의 없어 기존 보유 선박을 미국에 매각할 기회를 얻기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그간 우리 선사는 소유와 운항을 병행해 선박을 보유해 왔고, 선박 건조 가격이 낮은 해운 불경기 때 은행으로부터 건조 자금을 빌릴 수 없었기 때문에 저가의 선박을 확보하기 힘들었다. 이러한 점에서 그동안 민간 선주사를 체계적으로 육성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이렇게 중소형 선사에 대한 RG 발급 문제와 선주사 육성이라는 큰 이슈가 미국이라는 외생변수에 의해 다시 한번 크게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중형 조선소를 더 튼튼하게 해 다양한 선종의 선박 수주를 받아 수요를 만족시켜 주어야 한다. 진정으로 조선 강국이라면 모든 선종의 선박을 차별 없이 건조할 수 있어야 한다. 최근 선가 경쟁력에서 뒤처진 우리나라는 벌커 선박과 같은 재래 선박 건조는 하지 않고 있다. 우리 선사들은 오히려 중국에 가서 벌커 선박을 건조하고 그곳에서 수리하는 형국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산업은행을 중심으로 은행권이 모여 RG 문제를 풀어 주어야 한다. RG 구상을 당해 손해를 입은 은행을 구제하는 방안도 필요하다.
일본은 대형 조선소가 선박을 소유하고 불경기 때 조선소에 선박을 발주하는 기능도 한다. 일본 선주사는 1%대의 낮은 이자율로 선박을 건조한다. 우리나라는 5%대의 높은 이자율로 선박을 건조해야 한다. 용선주들이 우리보다 일본 선주의 선박을 선호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세계 시장이 개방돼 있는 만큼, 일본 선주사와 우리나라 선주사는 경쟁하게 된다. 이자율 4% 차이는 엄청나게 크다. 이에 특별법 등을 통해 선박 건조 시 대출금의 이자율을 낮춰주는 금융지원 정책이 필요하다. 다행히 코로나 시기를 거치면서 대형 회사들의 재무 구조가 많이 개선됐다. 과거보다 은행 차입금 의존도가 낮은 지금이야말로 민간 선주사들이 신규 선박을 발주할 수 있는 적기다. 선가가 조금 더 떨어지면 신조 발주를 넣어서 경쟁력 있는 선박을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 300척 규모의 선주사는 연간 약 5조 원의 매출을 일으킨다. 부울경으로서는 큰 매출이다.
이처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바다에서 큰 변화를 불러올 때 우리도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국익을 챙겨야 한다. 전문가들은 미국에서의 조선소 경영이 수익을 내기 어려운 구조라는 데 의견을 같이한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중소형 조선소의 RG 발급’ ‘한국형 선주사의 육성’이라는 간접적인 방식에서 새로운 기회가 열릴 수 있다. 마침, 이 두 가지는 오랫동안 한국 조선과 해운 산업의 숙제이기도 하다. 지금이야말로 그 숙제를 풀어낼 적기다.
2025-04-20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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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션 뷰] 해양 허브 도시 성공 전략은 이랬다
글로벌 해양산업은 지금 거대한 전환의 기로에 서 있다. 단순 화물 운송과 항만 운영 중심에서 벗어나, 친환경·디지털화·고부가가치 서비스 중심의 ‘해양비즈니스 산업’으로 진화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복합적 해양 비즈니스 기능을 갖춘 글로벌 해양허브 도시의 필요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세계 곳곳의 해양도시들은 시대의 흐름에 발맞추어 자신만의 전략으로 해양산업 생태계를 키우고 있으며, 그 중 몇몇 도시는 확고한 성공 모델로 주목받고 있다.
싱가포르는 인구 600만의 도시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인 해운국가로 자리 잡았다. 그 비결은 단연코 정부의 전략적 정책과 통합형 생태계 구축에 있다. 싱가포르는 1996년 해운항만청(MPA)를 설립해 해운, 항만, 해양기술, 인재 양성, 국제 협력 등을 총괄하는 중앙 거버넌스를 확립했다. 이를 통해 선박 등록, 세제 혜택, 인재 인증, 해사중재까지 모든 해양비즈니스 기능을 원스톱으로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Maritime Singapore’라는 브랜드 아래 해운회사, 해운금융, 해사법률, 보험, IT기술, R&D 기관 등이 밀집된 통합 클러스터를 형성했다. 세제감면제도(Maritime Sector Incentive, MSI)는 글로벌 해운기업과 금융기관 유치에 핵심 역할을 했으며, 싱가포르 해사중재센터(SMA)는 아시아 해사분쟁의 핵심 플랫폼으로 성장하고 있다.
싱가포르, 전략적 정책과 통합형 생태계
로테르담, 유연한 민관 거버넌스의 혁신
오슬로, 해양 스타트업 테스트베드 매력
두바이, 자유무역지대 모델로 거점 구축
유럽 최대의 항만도시인 로테르담은 디지털 기술과 친환경 전환을 중심으로 해양도시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다. 세계 최초로 항만의 디지털 트윈 시스템을 구축한 로테르담은 실제 항만의 운영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디지털 환경에서 시뮬레이션하고, 최적의 물류 흐름과 에너지 소비를 관리한다. 이를 기반으로 PortBase라는 전자물류 플랫폼을 도입해 선박 입항, 통관, 물류 연계 등을 자동화했고, 이는 유럽의 대표적인 ‘스마트 항만’ 사례로 주목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로테르담은 수소 항만으로의 전환도 선도하고 있다. 이 모든 전략은 공공과 민간이 공동으로 항만을 운영하는 로테르담항만공사(Port of Rotterdam Authority)의 유연하고 혁신적인 거버넌스 덕분에 가능했다.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는 규모는 작지만 세계 해양기술 분야에서 가장 혁신적인 도시 중 하나다. 오슬로를 중심으로 한 노르웨이 해양산업 클러스터는 자율운항, 전기추진, 무탄소 선박 등의 분야에서 세계를 선도하고 있으며, 이를 위한 실증 프로젝트와 연구개발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는 세계 최초의 자율운항 전기화물선인 ‘Yara Birkeland’이다. 이 프로젝트는 노르웨이 정부의 친환경 선박 육성 정책과 국영기업인 Yara, 기술기업 Kongsberg가 협력한 결과로, 기술 실증과 동시에 상업적 운항까지 이뤄냈다는 점에서 상징적이다. 오슬로는 또한 해양산업 스타트업에 대한 적극적인 금융 지원, 대학 및 연구기관과의 유기적 협력을 통해 ‘해양기술 혁신 허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중동의 두바이는 전통적인 해양국가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해양비즈니스 허브를 구축했다. 바로 자유무역지대 모델이다. 두바이는 자벨알리 자유무역지대(JAFZA)를 중심으로 외국계 해운·물류기업에 세금 면제, 외국인 100% 소유 허용 등 파격적인 인센티브를 제공했고, 그 결과 수많은 글로벌 해운기업들이 두바이에 아시아-아프리카 거점 지사를 두고 있다. 두바이항을 운영하는 DP World는 이제 전 세계 70여 개 항만을 관리하는 글로벌 해운물류 그룹으로 성장했으며, 이 자체가 두바이를 글로벌 해운네트워크의 전략적 거점으로 만들고 있다. 해운뿐 아니라 해사 중재, 항만 솔루션 개발, 디지털 물류 서비스 등으로 기능을 확장하며 차세대 해양도시로 도약 중이다.
이러한 도시들의 공통된 성공 요인은 분명하다. 첫째, 중앙 또는 지역정부 주도의 일관된 거버넌스 체계, 둘째, 해운·금융·법률·기술·R&D가 어우러진 산업 클러스터 구축, 셋째, 디지털·친환경 인프라에 대한 선제적 투자, 넷째, 국제기구 및 해외 기업과의 전략적 연계 강화, 다섯째, 무엇보다 중요한 해양비즈니스 인재육성이다.
부산은 세계 6위 컨테이너 물동량을 자랑하는 대표 항만도시이지만, 아직 해양비즈니스 허브로의 완결형 생태계는 부족하다. 글로벌 해운기업 본사 유치, 해운금융·보험 서비스 고도화, 해사법률·중재 기능 강화, 친환경 항만 인프라 구축 등 종합적 기능 확대가 절실하다. 해양수산부와 부산시를 비롯해 관련 공기업, 산업계, 학계 등이 함께 해양도시 부산의 미래를 설계하고 투자해야 할 때다. 부산시에서 추진하는 부산형 라이즈(RISE)사업과 글로컬대학30 사업을 잘 활용한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글로벌 경쟁 속에서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부산형 해양비즈니스 허브 전략’이 필요한 시점이다.
2025-04-13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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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비평] 혼돈과 불확실성의 시대
극단과 극단이 교차하는 혼돈의 시대였다. 찰스 디킨스식으로 표현하자면, 과학 기술이 눈부신 미래를 약속하는 희망의 시대이자, 전 세계가 파괴와 살상 경쟁에 뛰어든 암흑의 시대이기도 했다. 유럽 대륙의 전쟁은 아프리카와 아시아에까지 번져 280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세계 경제는 풍요의 시대를 구가하는 듯했지만 동시에 파국의 조짐도 드러냈다. 한쪽에서는 소비재와 식량이 썩어 가고 다른 쪽에서는 빈곤과 기아에 허덕이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이 와중에 인종주의, 노사 갈등, 전체주의의 망령이 고개를 쳐들었다. 1차 대전의 포화가 채 가시기도 전에 대공황의 공포가 휩쓸었고, 또 한 차례 세계대전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던 1920~1930년대의 이야기다.
언론은 전 세계의 충격적인 뉴스를 매일매일 빠르게 전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때로는 서서히 때로는 급박하게 다가오는 이 모든 불안과 공포의 원인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치 세계가 혼돈과 불확실성의 늪에 빠져버린 듯했다. 언론인들은 여전히 사건을 가능하면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전달하는 직업 규범을 고수했지만, 이러한 감각은 사람들이 새로운 세상을 이해하는 데 별 도움을 주지 못했다. 지금까지의 언론 보도 관행에 뭔가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는 자각이 업계 내부에서 싹트기 시작했다.
1920년대 대공황·전쟁 불안·공포 확산
객관주의 한계 넘은 ‘해석 저널리즘’ 등장
트럼프 2기, 혼란 커져 ‘해설 뉴스’ 필요
전통 언론, 정파성 아닌 차별화 혁신해야
새로운 실험은 1920년대에 시작됐다. 1923년 시사주간지 〈타임〉은 단순한 뉴스 전달이 아니라 사건에 관한 좀 더 분석적인 해석을 제공하는 기사 양식을 선보였다. 이른바 ‘해석 저널리즘’(interpretive journalism)으로 불리게 된 보도 양식의 시작이었다. 해석 저널리즘은 이후 언론 전반에서 ‘해설 보도’라는 기사 양식으로 발전했다. 물론 이러한 시도가 전례가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의 시급한 시대적 과제를 간파한 언론의 혁신 조치로서 의미가 있었다.
해석 저널리즘은 구체적인 사건 자체보다는 사건의 배후, 맥락, 효과 등의 분석에 초점을 둔다. 이는 사건의 맥락 파악을 통해 복잡한 이슈를 발굴하거나, 여러 사건과 사례를 관통하는 패턴과 추이를 발견하며, 기존의 통념과 편견을 수정하고 주변적인 목소리를 반영하는 역할도 한다. 1930년대의 대공황은 경제에 관한 기존의 통념을 모두 부정하는 새로운 현상이었다. 국가 경제를 위해 높은 관세라는 보호막이 필요하고 개개인에게는 절약과 저축이 최고의 미덕이라는 상식이 지배하던 시대에, 대규모 소비를 통한 수요 창출이라는 새로운 접근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언론은 해설 보도를 통해 대중에게 전파했다.
해석 저널리즘이 언론의 호응을 얻게 된 데는 외적 환경 뿐 아니라 언론계 내부의 변화라는 맥락도 작용했다. 20세기 초반까지도 신문은 언론의 기능을 독점했다. 하지만 신생 매체인 라디오는 속보성을 무기로 신문의 위상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1933년에는 신문업계가 라디오의 위협을 차단하기 위해 전면전을 벌이기도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라디오와 차별화할 수 있는 새로운 전략이 절실했고, 해설 보도는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자구책이기도 했다.
역사는 똑같은 형태로는 아니지만 되풀이되기도 한다. 최근 국내외 정세나 미디어 업계의 동황을 보면 자연스레 100년 전의 상황을 떠올리게 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집권 이후 우리가 알던 국제 질서는 무너지고 있다. 미국이 유럽이나 기존의 동맹국과 등을 돌리고 우방 국가의 영토에 노골적으로 군침을 흘리는 야만의 시대가 부활했다. 높은 관세를 무기로 삼는 새로운 보호주의의 등장은 세계화의 흐름 속에 이미 그물처럼 얽힌 세계 경제 질서를 소용돌이 속에 몰아넣고 있다. 정보와 뉴스 홍수 속에서 우리는 세상을 속속들이 알게 됐는데도 오히려 알 수 없는 혼란과 불안감에 갈팡질팡하고 있다. 이처럼 혼란의 시대를 헤쳐 나갈 지혜를 얻기 위해 어떤 조치가 필요하다면, 이는 결국 전통적 언론의 책임이 될 수밖에 없다. 해석 저널리즘은 서구에서는 거의 100년 전에 등장했지만, 지금처럼 불확실성의 시대에는 여전히 시민들의 갈증을 채워 줄 유효한 방안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혁신을 한가한 딴 나라 이야기로만 여기기에는, 국내외 뉴스 지형이 언론 매체들에게 너무나 불길하게 변해가고 있다. 한국언론진흥재단 조사를 보면, 뉴스 매체로서 신문과 방송의 위상은 크게 하락했고, 전반적인 뉴스 소비도 감소하고 있다. 공짜 뉴스와 정보가 넘쳐나는데 굳이 별 차별성도 없는 전통 매체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는 이용자들의 영리한 판단을 탓하기는 어렵다. 이제는 국내 언론 매체도 정파성이라는 근시안적 전략이 아니라 진정한 차별화와 혁신이 필요해졌다. 100년 전에도 그랬듯이, 혁신은 사회적 책임뿐 아니라 언론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
2025-03-30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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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션 뷰] 우리가 새 배를 짓는 이유
최신예 여객선 ‘선플라워 쿠로시오호’가 운항 4년여 만인 2001년, 한국의 한 선사에 매각된다는 소식은 당시 일본에서 큰 뉴스거리였다. 이 배는 일본 국기와 태양을 상징하는 ‘해바라기’(선플라워)라는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당시 일본 선사의 자부심과 같았다. 일본의 전통 목욕 가운인 유카타만 입고도 선내를 돌아다닐 수 있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편의성과 고급 취향이 잘 접목된 여객선으로도 유명했다.
하지만 그 배는 한일 양국이 함께 개최하는 2002년 FIFA월드컵을 앞두고 ‘팬스타 드림호’라는 선명으로 대한민국 깃발을 달고 일본 세토내해를 가로질렀고 지금도 그 기세를 이어가고 있다. 당시 그 배를 인수한 한국 기업은 당연히 팬스타다.
드림호는 지난 23년 동안 부산과 오사카를 무려 6600여 차례 운항하면서 155만여 명을 실어 날랐다. 주말에는 부산항 인근을 돌면서 불꽃놀이와 뷔페, 선상 포장마차를 즐길 수 있는 ‘부산항 원나잇 크루즈’로 변신하며 인기몰이했다.
4월 13일 새 여객선 ‘미라클호’ 운항
부산∼오사카 편도 2시간가량 단축
한일 수교 60년, 협력의 새로운 물결
선상 여행·크루즈 투어 확산 기대
그 배가 오는 4월 13일 새로운 크루즈 여객선 ‘팬스타 미라클호’로 대체된다. 길이 171m, 폭 25.4m의 새 선박은 객실 102개에 승객 355명, 승무원 46명이 탈 수 있다. 야외 수영장을 포함해 5성급 호텔 수준의 부대시설은 물론이고 웬만한 파도에는 꿈쩍도 하지 않는 특수장치가 설치된다. 한일 항로의 선박 여행에 대한 고정관념이 크게 바뀔 것 같다. 새 선박의 교체 투입으로 부산∼오사카의 운항 시간도 편도 2시간가량이 단축된다.
미라클호는 부산 선사와 부산 조선소, 국내 선박 의장 기업, 그리고 국내 자본의 합작품이다. 특히 팬스타그룹과 대선조선, 두 향토 기업의 협력은 지역경제 발전을 위한 새로운 상생 모델로 주목받아 왔다. 일본과 중국에서는 미라클호의 취항에 진즉부터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고 한다. 대한민국이 세계 최고의 조선 강국이라고 해도 크루즈선 건조에서는 후발 주자라는 지적을 받았지만, 이제는 사정이 조금 달라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부산∼오사카 항로는 팬스타그룹이 처음 개설한 ‘개척 항로’다. 부산항에서 출발하는 항로가 가장 가까운 대마도의 히타카츠항부터 같은 섬의 이즈하라항, 후쿠오카의 하카타항, 시모노세키항, 그리고 가장 먼 거리에 있는 오사카항까지 모두 다섯 갈래에 이르지만 대마도를 제외하면 한국 기업이 개척한 항로는 부산∼오사카가 유일하다.
미라클호가 취항하는 날, 오사카에서는 ‘오사카 엑스포’가 개막한다. 국제여객터미널에서 넘어지면 코 닿을 듯 가까운 인공 섬 ‘유메시마’에서 열리는 세계적인 축제다. 미라클호로선 특별한 기회가 될 수 있다. 덧붙여 올해는 대한민국과 일본이 ‘수교 60년’을 맞는다. 1965년 새로운 미래를 꿈꾸며 수교를 맺은 지 벌써 한 갑자가 된 것이다. 한국에서는 환갑, 일본에서는 ‘칸레키(還曆)’라고 한다. 이른바 제2의 삶이 시작되는 만큼 새로운 기운이 필요할 테다.
그런 차원에서 지난달 남산서울타워와 도쿄타워에서 서로의 믿음을 보여주는 수교 60년 기념 조명 쇼는 의미가 컸다. 유럽의 솅겐조약처럼 여권 없이 자유롭게 왕래하는 방안이 최근 정부 차원에서 모색된 것도 새로운 이해와 협력, 소통이 시원스레 시작될 것 같아서 훈훈하다.
그렇지 않아도 한일 양국은 함께 넘어야 할 험난한 파도가 많다. 미국과 중국의 무역 갈등은 대표적인 사례다. 원수라도 한배에 타면 공동운명체가 될 수 있다는 ‘오월동주’의 지혜를 두 나라 정치인이 함께 깨달으면 좋겠다. 과거의 잘못은 끊임없이 성찰해야겠지만 참회와 용서로 새로운 미래를 기약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팬스타 미라클호도 그런 기대에 부응하고 싶다. 부산∼오사카 항로에 훈풍이 불어서 두 나라의 많은 시민이 대한해협과 세토 내해의 아름다움을 더 자주 함께 감상할 수 있으면 좋겠다.
부산∼오사카 항로가 시작되는 부산항국제여객부두는 부산역과 공중 보행로로 이어져 있다. 철도와 여객선이 이렇게 탯줄처럼 가깝게 연결된 교통 인프라는 세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시원한 바다 풍광까지 곁들이면서 부산 최고의 명소로도 부족하지 않다. 해양수산부와 부산항만공사는 물론이고 부산시, 코레일도 한일 여객 항로에 더 큰 관심을 가져주길 기대해 보며, 우리가 새롭게 시도하는 이동 수단을 넘어서는 여행, 선상 활동이 목적이 되는 여행, 진정한 크루즈 투어의 확산을 기대해 본다.
두 나라 바닷물이 함께 흐르는 대한해협에서 새로운 미래를 논의하는 선상 포럼도 좋은 축제가 될 수 있다. 한일 수교 60년은 그런 축제를 기획하기에 너무 좋은 소재다. ‘새 배를 짓는 마음으로’ 앞날만 생각하면 풀 수 없는 문제는 없다고 생각한다.
2025-03-16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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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션 뷰] 2025년 해운·조선산업의 기회와 도전
개인이나 조직은 목표를 세워 앞으로 나아간다. 그 과정에서 예측 가능성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2025년은 불확실성 속에서 시작됐다. 정치·경제적으로 불안정성이 커지고 있는 가운데 트럼프 정부는 미국 우선주의를 추진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겪으면서 각국은 자국 내 혹은 자국 근처에서 제품을 생산하려는 경향이 강해졌고, 이로 인해 국제무역은 줄어들었다. 각국의 수출이 줄어들면 선박을 통한 운송 수요도 감소하고 이는 결국 선박 건조 수요의 감소로 이어지게 된다.
하지만 우리나라 해운과 조선업은 상황이 다르다. 상품의 수요와 공급 외적 요소들이 우리를 도와준다. 조선업은 LNG 혹은 메탄올 추진선 건조와 같은 탈탄소화 관련 신조선 수요가 발생하면서 3년 치 건조량을 확보했다. 또한 자율운항선박이라는 미래의 새로운 분야도 있어 조선업은 호황을 맞이하고 있다. 미국이 해양력 강화를 위한 정책을 지난해 추진키로 하면서 우리 조선소는 미국 군함의 수리보수와 건조를 맡을 기회를 얻게 됐다. 지난해 12월 미국 의회는 미국 내 조선소를 부활시키고 미국 소유 상선대를 보강하는 법안(조선해운 인프라법)을 제출했다. 미국은 향후 10년간 전략상선대를 250척까지 늘릴 계획이라고 한다.
탈탄소화 관련 신조선 수요 발생
미국 해양력 강화에 기회 확장
선박 공급 과잉… 운임 급락 전망
선원 육성 등 국가적 지원 필요
전략상선대는 평시에는 상업적 목적으로 활용되다가 전시에는 물자 수송에 동원되는 선박을 말한다. 미국 선주들이 이 선박들을 전략상선대에 편입하려면, 미국에서 건조되고 미국 선원이 승선해야 한다. 그러나 현재 미국 조선소는 상선 건조 능력이 부족해 외국에서 건조한 선박도 임시 선박으로 인정하기로 했다. 이는 우리 조선소에 기회다. 특히 중국에서 건조된 선박은 제외되기에 실질적으로 일본과 우리나라만이 경쟁을 하게 된다. 100여 척의 건조 수요가 기다리고 있는데, 척당 건조가를 2000억으로 보면 총 20조 원의 매출이 예상된다. 올해부터 수주가 시작될 전망이다. 다양한 선종과 크기의 선박이 필요할 것으로 예상돼 부산, 울산, 경남 지역 대형 및 중형 조선소와 기자재 업체들이 수혜를 입을 것으로 보인다.
2024년에는 수에즈운하가 막혀 선박들이 남아프리카로 우회해야 했고, 이로 인해 선박 수요가 약 15% 증가하며 공급 부족 현상이 발생해 운임이 크게 상승했다. 그러나 올해는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 휴전이 성사되면서 후티 반군의 상선 공격이 중단될 것으로 예상된다. 우회하던 선박들이 다시 수에즈운하를 이용하게 돼 유럽으로 가는 항해 거리가 단축되고, 상품 수요에 비해 선박 공급이 많아져 운임은 급락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로 인해 정기선사들 간 치열한 경쟁이 벌어질 것이며, 경쟁력이 없는 회사들은 도산 위험에 직면할 수 있다.
따라서 화주와의 장기계약 체결을 통해 안정적인 화주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며, 적자를 견딜 수 있는 재력도 필요하다. 다행히 우리나라 외항 해운선사들은 탄탄한 재무구조를 갖추고 있으며 코로나19와 홍해 사태를 겪으면서 운임이 상승하고 수익이 증가했다. 해운사들은 한 척당 70~90%까지 대출을 받아 선박을 건조해왔고, 벌어들인 현금으로 부채를 많이 갚아 재무구조가 튼튼해졌다. 특히 국내 최대 컨테이너 선사인 HMM은 비축된 유보금으로 불경기를 견딜 수 있는 상태여서 안심이 된다. 게다가 미국의 전략상선대는 임시선박을 허용하기 때문에 우리 선주들이 미국의 선주들에게 선박을 빌려주거나 매각할 수 있다. 250척 중 상당 부분이 이런 형태일 것이다. 중국 회사가 소유하거나 운항한 선박은 제외되므로 우리 선주들에게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질 것이다.
선박 운항에는 선원들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인구 감소와 선원직 기피 현상으로 선원을 구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우리나라는 우수한 해기사를 국가에서 양성하는 시스템이 잘 정착돼 있다. 미국은 전략상선대를 갖추기 위해 선원이 필요함을 인식했다. 이번 법률 개정의 3분의 1은 선박에서 근무할 해기사를 양성하는 내용일 정도로 인력 양성을 중요하게 다룬다. 늦은 감은 있지만, 미국은 연방상선대학(한국해양대 해사대학에 해당)과 4곳 주립해양대의 학생수를 늘리고 7년 이상 미국 선박에 근무하는 선원에게는 연방정부에 경쟁 없이 취업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한다. 이를 위해 독자적인 예산도 마련했다. 한국해양대와 목포해양대는 통합을 추진해 ‘글로컬 30’에 선정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번 미국의 조치가 이 과정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불확실성을 그 특징으로 하는 2025년, 조선과 해운은 긍정적 요소를 가지고 출발한다. 조선과 해운 강국이었던 미국이 현재의 열악한 상태를 회복하기 위해 입법 조치를 취하고 있다. 해운과 조선산업은 국가 기간산업으로 선박 건조 능력, 해운회사 및 선원의 육성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점임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2025-01-26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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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션 뷰] 바다의 도시, 부산의 바닷길을 열자
예전 가족과 함께 살았던 호주 시드니의 추억은 언제나 ‘수상버스’와 함께 떠오른다. 시드니 중심에 있는 세계 최대의 선착장 달링하버는 200년 역사의 항구를 재개발한 곳인데, 여기서 수상버스 페리를 타고 10여 분 달리면 하버 브리지를 지나 밀슨스 포인트 터미널에 닿는다. 박태환 선수가 훈련하던 노스올림픽수영장과 테마파크인 루나 파크가 있는 그곳은 오페라하우스를 가장 아름답게 볼 수 있는 곳이다. 황금빛으로 물든 하늘은 신만이 만들 수 있는 오묘함 그 자체였다.
‘오팔’ 교통카드 하나로 교통체증 없이 바닷바람을 맞으면서 항구의 풍경에 빠져들곤 했다. 시드니는 남북을 잇는 교량과 터널이 부족해 출퇴근 때마다 인근 고속도로와 일반도로 모두 심한 정체를 겪는다. 반면 수상버스는 시간에 따라 정확히 움직이고 좌석도 넉넉하다. 시드니 시민에겐 수상버스가 완벽한 대중교통 수단이다.
유명 항만도시마다 수상버스 보유
부산, 예전 논의 불구 규제에 막혀
천혜의 조건 못 살린 현실 안타까워
수상버스를 타면서 한껏 여유로워진 마음으로 골목을 걸으면서 단골 식당을 찾아가고, 테라스에 앉아서 음식과 함께 ‘바다와 햇살을 먹던’ 그 시간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됐다. 밀슨스 포인트 터미널 인근은 다양한 레스토랑이 밀집해 현지인뿐만 아니라 관광객에게도 인기 있는 장소이다. 저녁 페리에 어떤 이는 관광객으로, 어떤 이는 퇴근하는 시민으로 한데 섞여 있다. 수상버스가 관광과 출퇴근의 좋은 교통수단이다. 또 도시 매력을 키우고 관광 활성화와 일자리 창출 등 지역경제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시드니에서 수상버스를 탈 때마다 이렇게 매력적인 대중교통 수단이 왜 해양도시 부산에는 없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마침, 서울시가 한강에 ‘수상버스(River Bus)’를 띄우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승객이 실신할 정도로 혼잡한 경전철인 김포골드라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책 중 하나로 여겨진다. 행주대교 남단부터 잠실까지 약 30㎞ 구간에 급행과 완행 등 다양한 수상버스 노선을 짜고 있다고 한다. 시드니와 일본 도쿄, 미국 보스턴 등 해외의 수상버스와 페리를 벤치마킹해 국내에 적용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해양수도 부산에서도 2019년 해상택시에 관한 논의가 있었다. 지방 규제혁신 토론회에서 부산시가 도선 운항 규제 개선을 건의했는데, 정부가 화답한 것이다. 행정안전부가 2해리(약 3.7㎞)로 제한된 만 해역의 도선사업 영업 가능 범위 규제를 풀도록 입법 예고하면서 부산에도 해상택시 시대가 열리는 듯했다. 당시 부산시 안에 따르면 기존 선착장인 암남항·남항·북항·영도·동백섬 등 8곳을 중심으로 48개의 코스가 계획됐다. 만약 곧바로 수상버스를 추진했다면 부산의 교통을 획기적으로 바꿀 수 있었고, 나아가 국내외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효과도 거뒀을 것이다. 하지만 이 계획은 온갖 규제에 묶여 지금껏 감감무소식이다.
부산에서 수상버스의 도입과 안착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법과 행정의 협조가 절실하다. 해양수산부, 부산항만공사, 해양경찰 등 관련 기관 간 조속한 행정 처리와 도선법 규제 완화가 시급하다. 시와 정부, 국회가 적극적으로 나서 풀어야 할 부분이다.
그리고 개발되는 노선은 관광객과 시민이 원하고, 수익도 낼 수 있도록 설계돼야 한다. 해운대 미포~동백섬~수영강~광안리~용호만 일대 등 관광객이 몰리는 곳과 시티투어버스나 대중버스 노선을 연계하는 방안도 바람직하다. 또 수상버스를 시내버스 공영제처럼 대중교통 체계에 포함하고 민간 투자를 끌어내는 방법까지 고려해야 한다. 노선이 지나는 자치구 간 협력도 필수적이다.
안정적인 사업 진행과 수익의 지역 환원을 위해서는 거버넌스도 중요하다. 부산시 등 공공 부문과 지역 기업이 머리를 맞대야 한다. 수상버스가 제 궤도에 오르기 위해서도 민간의 혁신적인 아이디어는 필수적이다. 민간과 공공의 협업을 통해 지역 자본을 축적하고, 지속 가능한 ‘로컬리즘’을 창출하는 것이 성공의 전제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가장 매력적인 도시는 ‘가장 로컬다운 곳’이다. 로컬다운 공간은 로컬에 대한 깊은 애정과 이해가 있는 이들을 통해서만 만들어진다. 부산만의 정체성을 고민하면, 수상버스야말로 부산의 훌륭한 콘텐츠가 될 수 있다. 해운대~수영강~민락항~남천항~용호부두~오륙도~북항~한국해양대~몰운대~가덕도신공항을 연결하는 바닷길은 부산의 다양한 매력을 발산하고, 많은 사람을 부산으로 오게 하는 좋은 자원이 될 수 있다. 그런 매력적인 교통수단이 부산에도 조만간 등장하길 바란다. 언젠가 이기대와 오륙도 풍광을 감상하면서 바로 옆을 스치듯 지나가는 요트, 윈드서핑과 함께 출퇴근하는 날이 오기를 손꼽아 기대한다. 그 시간은 바다의 도시 부산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일 것이다. 수상버스는 해양도시 부산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관광상품 역할을 할 것이다.
2025-01-19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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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비평] 저널리즘이 죽어 가고 있다
정치판이 혼란하다.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말 그대로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형국이다. 작금의 정치 상황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가 크지만 언론학자의 입장에서는 사실 언론이 더 우려스럽다. 저널리즘이 죽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디지털 환경 변화로 인해 언론이 위기에 처한 지금의 상황에서 기성 언론은 스스로 구시대의 유물이 되는 길을 자처하는 듯하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주류 언론이 신뢰를 잃어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신뢰도 하락으로 유능한 젊은 기자들이 언론계를 떠나고 있고, 기성 언론을 외면하는 이탈자의 증가는 가히 기하급수적이라 할 만하다.
복수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최근 한국과 미국에서의 언론 신뢰도는 역대 최저 수준으로 추락하였다. 지난해 10월 한국언론진흥재단이 발표한 ‘디지털 뉴스 리포트 2024 한국’에 따르면 한국의 뉴스 전반에 대한 신뢰도는 31%에 그쳤다. 이는 미국, 일본, 핀란드 등 조사 대상 47개국 중 38위에 그친 순위이다.
언론, 갈등 증폭·국가 불안정 심화 보도
정치와 국민 매개 역할 불신·외면 자초
사실·의견 분리 않으면 신뢰 회복 요원
미국 여론 조사업체 갤럽은 지난해 10월 미국인의 3분의 1 미만만이 언론을 신뢰한다고 발표하였다. 퓨리서치센터의 지난 12월 조사에 따르면 미국 국민 4명 가운데 3명이 미국 언론의 보도가 편향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응답자의 77%가 미국 언론사가 사회 문제와 정치 보도에서 공정한 보도를 하지 않고 있다고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인과 미국인 대다수가 뉴스 매체를 불신하고 있어서 정치적 분열 속에서 언론의 신뢰 회복이 주요 과제로 대두되고 있다.
언론 신뢰도 하락의 주요 원인은 주류 언론의 정치적 편향성에 있다. 실제로 미국의 뉴욕타임스나 워싱턴포스트를 포함한 주류 신문이나 ABC, NBC, CNN 등의 주요 방송 매체들이 친민주당 성향이라는 것은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며, 이들은 좌파 진영의 기관지가 되었다는 노골적인 비판에 직면해 있기도 하다. 앞서 소개한 미국의 갤럽 조사는 정당별 언론 신뢰도를 발표하였는데, 공화당 지지층 중 언론을 신뢰한다는 비율이 12%에 그친 반면, 민주당 지지층의 54%가 언론을 신뢰한다고 답하여 양당 지지층 간 큰 차이를 보였다. 조사 결과는 미국의 불균형적 언론 지형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기성 언론의 정치적 편향성으로 인해 사람들은 다른 정보를 찾아 팟캐스트, 유튜브, 블로그, 틱톡으로 이동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소셜 미디어를 통한 뉴스 이용률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미 대선 기간 중 소셜 미디어 엑스(X)는 기성 언론이 다루지 않는 대안적 정보 취득 경로가 되면서 대선 결과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된다.
‘디지털 뉴스 리포트 2024 한국’에 따르면 한국의 경우 뉴스 이용에 있어서 유튜브의 점유율이 47개국 평균 31%를 훨씬 웃도는 51%로 기록됐다. 정치 이슈를 다루는 국내 유튜버들은 사회적인 파장이 큰 이슈가 터질 때마다 영향력을 넓혀 왔는데, 이는 여러 이유 중에서도 기성 언론의 편향성에 대한 이용자들의 반작용에 기인하기도 한다.
기성 언론들이 자기편만 바라보는 태도에서 변화하지 않으면서도 언론이 잃어버린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까?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유튜버들을 극우나 극좌로 명명하는 프레임이 언젠가는 부메랑이 되어 자신들을 향할 수 있음을 잠시 멈추어 서서 돌아보아야 할 때다. 기성 언론이 회생하는 길은 무엇보다도 저널리즘 원칙을 사수하는 데에 있다. 그것의 핵심은 사실과 의견의 분리 원칙이다.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객관적 사실의 전달이 보도의 출발점이어야 하며, 의견은 반드시 객관적 사실을 기반으로 개진되어야 한다. 그렇지 아니할 때 기자나 언론사들이 추종 세력을 확보할 수는 있을지언정 기성 언론으로서의 신뢰를 회복하기는 요원하다.
편향되지 않고 공정하고 정확한 보도의 근간인 사실과 의견의 분리라는 저널리즘 원칙을 지키기 위해 계속 정진하는 게 언론 본연의 역할이다. 이를 외면하고 진영 추종적 편향을 보이는 언론들이 서로 상대 언론을 향하여 공정과 불공정을 논하며 대결하는 것은 도토리 키재기일 뿐이다.
옛말에 ‘때리는 시어미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했던가. 최근 정치와 국민 사이를 매개하는 언론의 태도를 보면 흡사 ‘말리는 시누이’ 같아 씁쓸하다. 혹여 기성 언론이 국민의 갈등을 증폭시키고 국가의 불안정을 심화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다. 난장판인 정치판 못지않게, 이를 매개하는 언론을 보며 국민은 망연자실해진다. 언론을 외면할 수밖에 없다. 저널리즘은 죽어 가고 있는가.
2025-01-05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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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션 뷰] 연말연시에 즐기는 겨울 생굴의 맛
어려운 경제 상황과 예측할 수 없는 정치적 격변 속에 2024년도 이제 딱 하루를 남겨놓고 있다. 늘 그렇듯 12월은 각종 송년회로 분주한 달이다. 한 해를 뒤돌아보며 주변 사람들과 친목을 다지는 자리에 빠질 수 없는 것이 있다면 바로 맛있는 음식이다. 지금 이때 딱 어울리는 해산물이 바로 겨울 굴이다. 겨울은 굴의 계절이다.
우리나라에서 굴 양식이 본격화한 시기는 정부의 장려 정책이 시작된 1960년대다. 굴은 크기가 작은 개체를 한 줄에 500개씩 꿰어 바다 수심 30m 아래에서 키운다. 사계절 내내 청정함을 자랑하는 통영과 거제 인근의 다도해는 겨울이면 살이 오른 탱글탱글한 굴을 내놓는다. 통영 굴은 부드럽고 풍부한 맛이 일품이다.
추위가 매서운 지금 통영의 바다는 더 뜨거워진다. 겨울이 돼야 농익는 통영의 대표 먹거리 굴을 채취하기 위한 어민들의 열기 때문이다. 전국 굴 생산량의 80%를 차지하는 통영 굴은 어민들에게 1년을 책임지는 바다 농사나 다름없다. 채취된 굴은 뭍으로 나오는 즉시 굴을 까는 작업장인 박신장으로 옮겨진다. 박신장마다 인원 규모는 다르지만 적게는 25명 남짓, 많게는 60명 이상이 작업을 한다.
기계로는 할 수 없는 작업은 사람의 손이 도맡는다. 수십 년 경력의 ‘통영 아지매들’의 손길 끝에서 굴은 보드라운 속살을 드러낸다. 굴은 갓 짜낸 우유에 비견할 만한 부드러운 맛뿐 아니라 겨울철 움츠러드는 우리 몸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천연 종합영양제로 ‘바다의 우유’라고 불린다.
국내의 굴은 양식 굴과 자연산 굴로 나뉜다. 굴은 주로 남해와 서해에서 수확하는데, 조류가 거친 곳에서는 잘 자라지 않는다. 일찍이 서해안에서 굴이 유명했던 것도 그런 이유다. 대규모 굴 양식은 조류가 거칠지 않은 내해의 만에서 이루어진다. 통영과 거제, 여수는 이런 점에서 최적의 양식 장소다.
바다에서 생산되는 양식 굴은 ‘참굴’, 서해안의 갯바위에 붙은 것을 채취하는 굴은 ‘갯굴’이라고 한다. 또 강 하구에서도 굴이 수확된다. ‘강굴’ 또는 ‘벚굴’로, 봄이 제철이다. 겨울이 제철인 남해안 굴은 경남 통영, 고성, 거제, 마산 그리고 전남 여수를 중심으로 매년 10월부터 늦게는 이듬해 4월 말까지 5만 톤 이상이 생산된다. 전국 생굴 생산량의 절대량이 이곳에서 나온다.
채취된 굴은 모두 통영에 있는 전국 유일의 굴수하식수협을 통해 전국으로 보내진다. ‘수하식 굴’은 양식 굴을 말하는데 굴을 바다에 늘어뜨려 양식하는 방식이다. 이전에는 조간대가 넓은 서해안에서 투석, 지주식으로 주로 키웠다. 수하식 방식이 도입되면서 굴 주산지도 서해에서 남해로 바뀌었다.
천북 굴 단지는 서해 굴의 대명사다. 천수만 일원은 서해안 최대의 굴 산지다. 특히 충남 보령시 천북면 장은리 포구는 80여 곳의 굴 전문점이 성업 중으로, 겨우내 굴 굽는 냄새가 진동한다. 천북 굴이 유명한 것은 천수만의 풍부한 미네랄 덕분이다. 이 일대는 해·담수가 고루 섞인 개펄이 발달해 굴 서식에 좋은 곳이다. 많은 일조량도 최고의 별미를 만들어 준다.
우리나라 굴 생산은 수산업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통영 생굴은 수출 품목으로 인기가 높다. 농식품수출정보(KATI)에 따르면 국내 굴 생산량은 2019년 32만 톤, 2023년 31만 톤이었으며, 2024년산(작년 9월~올해 2월)은 28만 톤으로 전년보다 10.4% 줄었다. 또한 2023년 기준 한국산 굴의 전 세계 수출실적은 5597만 달러로 이 중 일본 수출액이 43%로 가장 많았다. 이어 미국, 홍콩, 대만, 중국 순이다. 이들 상위 5개국의 수출 비중이 압도적이다. 유럽은 아직 비중이 낮은 편이지만 향후 가능성은 주목받고 있다.
이처럼 굴은 주요한 수출 수산물로서 지역경제에 크게 기여를 하고 있다. 앞으로 건강식품으로 가치가 높아 생굴뿐 아니라 가공식품으로도 상품화가 필요하다. 지난달 해양수산부는 굴을 포함한 4대 수산물을 선정하고 다양한 가공 조리법을 통해 굴 수출을 확대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조만간 한국산 굴이 세계인의 건강식품으로 도약할 미래를 기대해 본다.
굴은 영양 만점의 식품이지만 먹을 때는 다소 주의를 기울이는 편이 좋다. 노로바이러스 감염 등으로 인해 식중독 위험이 있어 잘 골라야 하고 섭취 방법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채취 해역의 물이 오염됐거나 위생 관리가 문제가 있으면 식중독 위험이 있어 신뢰할 만한 공급처에서 구매하는 것이 중요하다.
경상도 지방에서는 굴을 ‘꿀’이라고 한다. 겨울이 깊어지는 지금 굴에는 달짝지근한 단맛이 난다.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와인 한 잔에 달짝지근한 통영 굴로 연말연시를 보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2024-12-29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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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션 뷰] 국가는 어떻게 실패하는가
‘혹자는 조선이 반드시 망한다고 했다. 조선을 망하게 한 자는 처음에는 중국인이고, 이어서 러시아인, 그 끝에 일본인이 있다. 그러나 정작 조선을 망하게 한 것은 조선인 스스로다.’
100여 년 전, 중국 사회개혁가 량치차오(梁啓超)가 조선 망국의 원인을 분석해 당시 언론에 기고한 글의 일부다. 그는 조선이 내부 교란으로 망국에 이르렀다는 결론을 내린 뒤 그 책임을 정치 갈등과 사회 분열을 획책한 군왕과 지배계층에 돌렸다.
‘12·3 계엄’ 후폭풍에 경제 전반 악영향
해양산업도 마찬가지… 동력 잃은 듯
뺄셈 정치로 시대 오판 땐 미래 비관적
한국 정치적 갈등 선 넘어… 관리 시급
그때의 조선이 지금의 대한민국과 같을 수는 없다. 그럼에도 두 상황이 묘하게 겹쳐 보이는 것은 기우일까. 나라가 망하는 순간까지 이전투구를 일삼으며 사회 분열을 조장한 조선의 정치를 반면교사로 삼는다면 지나친 비관론일까.
2024년 갑진년 한 해가 저물고 있다. ‘푸른 청룡의 해’라며 국운 상승을 한껏 기대하게 만든 용꿈은 세밑의 기습적인 ‘12·3 비상계엄’으로 인해 전국민적인 악몽이 됐다. 계엄 후폭풍은 경제 전반에 막대한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혼란이 없다”는 정부의 공언과 달리 증시와 외환시장은 이미 출렁이기 시작했다.
비상계엄은 그 자체로 끝나지 않고 탄핵 정국이라는 더 큰 뇌관의 폭발로 이어졌다. 경제는 한순간에 정치의 종속변수로 전락했고 경제 주체들은 방향을 잃은 채 우왕좌왕하고 있다. 크리스마스 특수는 고사하고 새해 경기도 낙관하기 어렵다. 자영업자들은 망연자실한 상태이며 기업들은 신년 투자계획보다 정국의 향방에 더 큰 관심을 두고 있다. 정부는 존재하지만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대통령 권한대행조차 국회로부터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호통을 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해양산업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다. 글로벌 해운동맹 재편과 미중 무역 갈등 등 당장 헤쳐 나가야 할 현안이 수두룩하지만 어디에서도 추동력을 찾기는 힘들다.
진해신항 건설과 같은 중장기 투자, 각종 시급한 수산 정책, 해양과학과 연동된 스타트업 지원사업 등이 모두 동력을 잃은 듯하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경고는 정치적 수사로 끝나지 않았다. 부산항만공사 사장을 포함한 공공기관장 인사는 중단됐고 이는 부산항의 컨트롤타워 약화로 이어지고 있다.
모든 게 ‘불안’에서 빚어졌다. 구체적으로는 정치적 불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불안 상황은 국민이 걱정하는 것보다 훨씬 더 오래갈지 모른다. 계엄이나 탄핵과 같은 사건이 다시 발생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처럼 예측하지 못한 불안이 ‘상수’가 될 때, 그것은 집단적 공포로 돌변한다. 지금 대한민국은 어떤 상황에 처해 있을까.
도대체 정치란 무엇인가? 독일 정치·사회학자인 막스 베버는 저서 〈소명으로서의 정치〉에서 정치인의 치명적인 죄악으로 객관성과 책임성의 결여를 꼽았다. 가장 객관적인 시각과 강한 책임성이 요구되는 직업인데도 정작 현실 정치에서는 그런 면모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얘기다. 객관성 결여로 대의 정치는 진영논리에 푹 빠졌고, 책임성 결여로 여야는 국가 경제가 파탄에 이를 상황에서도 서로 남 탓만 일삼고 있다. 지금의 한국 정치도 이와 크게 다를 바 없다.
〈경제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의 저자인 기 소르망은 한국어판 서문 ‘두 개의 한국, 살아 있는 경제의 교훈’에서 남북한 두 체제를 극명하게 비교했다. 올해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대런 애쓰모글루도 공저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에서 남북한을 성공한 국가와 실패한 국가로 나눴다. 소수 엘리트에게 권력이 집중된 ‘착취적 국가’ 북한은 거듭된 경제 정책의 실패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가 되었지만, 자유경제와 민주주의로 ‘포용적 국가’가 된 대한민국은 같은 시기에 세계 10대 무역 강국으로 성장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처럼 ‘좋은’ 정치와 ‘나쁜’ 정치의 결말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는 없다고 결론짓고 있다.
그런데도 덧셈 정치가 아닌 뺄셈 정치로 시대를 오판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낙관적이지 않다. 국민을 둘로 나누는 정치적 갈등에 대한 관리가 시급하다. 〈극한 갈등〉의 저자 아만다 리플리는 “갈등은 그 자체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데 그 심각성이 있다”고 봤다. 우리의 정치적 갈등은 이미 선을 넘었다. 비상계엄과 탄핵은 이러한 갈등을 방치한 관리 부재의 결과다.
늘 그랬듯이, 상생의 정치는 차이를 인정하는 데서 시작된다. 상대를 탓하기보다는 서로를 인정하고 의견을 겸허히 듣는 것으로 새해를 준비하면 좋겠다. 100년 전 조선 망국론이 다시 거론되지 않도록 말이다.
2024-12-22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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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션 뷰] 미국은 왜 글로벌 컨테이너 선사가 없을까
전 세계에 컨테이너 선사는 약 100개가 있다. 하지만 세계 양대 기간항로인 아시아~북미, 아시아~유럽 정기노선을 운영하는 선사는 10개에 불과하고, 이를 글로벌 컨테이너 선사라고 한다.
컨테이너 선박은 전 세계에 약 6300척이 있는데, 이는 전체 상선(약 10만 척)의 약 6%에 불과하다. 하지만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공산품 운송 대부분을 담당한다.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글로벌 해상 공급망 혼란도 컨테이너 해상 운송에서 발생한 문제다.
해운업 특성상 '장기적 성장' 불가피
주주 위한 '단기 실적' 압박 땐 못 버텨
유럽은 직원·지역사회 관계까지 감안
기업 문화 차이가 지속 가능성 갈라
HMM은 글로벌 컨테이너 선사 중 유일한 한국 국적이다. 전체 선복량 중 비중은 2.9%를 차지해 세계 8위 규모다. 상위 10대 글로벌 선사가 전 세계 컨테이너 선복의 약 85%를 차지하고 있다.
메이저 선사들의 국적은 스위스(MSC), 덴마크(머스크), 프랑스(CMA CGM), 중국(COSCO), 독일(하파그로이드), 일본(ONE), 대만(에버그린, 양밍), 한국(HMM), 이스라엘(ZIM)로 모두 9개 나라다. 대만만 유일하게 글로벌 선사 두 곳을 보유하고 있다. 이 지점에서 세계 최대 경제 규모를 자랑하는 미국에 글로벌 선사가 전무하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컨테이너를 이용한 해상 운송을 최초로 도입한 나라는 미국이다. 베트남 전쟁 당시 군수 물자를 효율적으로 운송하기 위해 컨테이너를 활용한 것도 미국 기업이었다.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컨테이너 화물을 수입하는 국가도 미국이다. 그러나 미국에 글로벌 선사가 없다는 점은 아이러니라고 할 수밖에 없다.
세계 최초의 컨테이너 선사이자 1990년대 최대 컨테이너 선사였던 미국 국적의 시랜드(Sea Land)는 1999년에 덴마크의 머스크에 인수되었으며, 그 이후 미국 국적의 글로벌 컨테이너 선사는 등장하지 않고 있다.
이유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미국의 해운 규제, 높은 운영비, 미국 정부 정책의 우선순위 변화 등 다양한 이유가 거론된다. 그러나 필자는 미국의 독특한 기업 문화에서 그 이유를 찾는 견해가 가장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대부분의 미국 기업은 주주 가치 극대화를 기업 운영의 핵심 목표로 삼는다. 주가 상승과 이익률 개선은 최고경영자(CEO) 평가의 주요 기준이며, 이에 따라 CEO들은 단기 성과에 집중하게 된다. CEO의 성과 기반 보상은 평균 연봉보다 주식과 옵션 비중이 매우 크며, 평균 CEO 연봉은 일반 직원 대비 200~300배에 달한다.
그러나 해운업계에서는 ‘단기 성과’라는 개념 자체가 매우 비현실적이다. 첫째, 자본집약적 산업이기 때문에 초대형 컨테이너 선박의 경우 발주 시 수조 원의 비용과 2~3년의 건조 기간이 소요된다. 둘째, 선박은 운항 후 10~20년 이상 운영을 전제로 하므로 수익 실현 시점이 매우 길어 단기 성과 압박과 맞지 않는다. 셋째, 시장의 수요·공급 변동성으로 인해 단기 성과 평가가 어렵다.
예를 들자면, 필자가 부산항만공사에 입사했던 2005년에는 글로벌 선사가 20개였지만, 2014년부터 2018년까지 선박 공급 과잉으로 해상 운임이 원가 이하로 떨어지면서 한진해운을 포함해 10개 선사가 시장에서 사라졌다. 이 시기에 미국 선사가 있었다면 매년 CEO가 교체되지 않았을까 싶다.
반면, 유럽의 기업 문화는 미국과 사뭇 다르다. 미국이 주주 중심주의(Shareholder Capitalism)를 고수하는 반면, 유럽은 이해관계자 중심주의(Stakeholder Capitalism)를 강조한다. 유럽 기업은 주주뿐만 아니라 직원, 지역사회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를 고려한다. CEO에 대한 평가는 장기적인 지속 가능성과 사회적 책임을 포함하는 경우가 많다. 가족 경영을 통해 장기적 성장을 목표로 하는 기업도 많다. 머스크는 가족이 소유를 유지하되 경영은 전문 경영인에게 위임하는 방식을 통해 장기적 성장을 도모하는 대표적 사례다.
상위 10개 선사 중 유럽 선사는 4개에 불과하지만, 선복량 기준 1~3위(MSC, 머스크, CMA)와 5위(하파그로이드)를 포함하고 있어 합계 선복량이 전 세계의 54%(약 1685만TEU)에 달한다. 아시아 4개 국가(중국, 일본, 대만, 한국)는 5개 선사를 보유하고 있으나, 선복량 점유율은 28%(약 862만TEU)에 그친다.
기업 문화의 차이가 글로벌 해운 시장에서 뚜렷한 차이를 만들어 내는 핵심 요인이라면, 이는 우리 국적 선사의 지속 가능성과 경쟁력 강화를 위해 깊이 고려해야 할 부분이 아닐까 생각된다.
2024-12-15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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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비평] 무례한 질문
지난 11월 7일 윤석열 대통령의 기자 회견은 여러모로 화제가 됐다. 대통령의 지지율을 까먹은 개인적 스캔들과 총선 패배, 정책 실패 등에 대한 사과 성격을 띨 것으로 예상됐으나, 오히려 정치권의 비판과 국민의 분노에 기름을 붓는 부메랑이 됐다. 대통령 측근인 홍철호 정무수석의 부적절한 발언도 도마에 올랐다.
사건의 전말은 대강 이렇다. 윤 대통령이 기자 회견에서 “모든 것이 제 불찰”이라며 머리를 숙이면서도 구체적인 사과 내용이나 이유를 밝히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자기 변호와 정적 비난에만 몰두했다. 그러자 회견 말미에 〈부산일보〉 박석호 기자가 대통령의 사과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지칭하는지 보충 설명을 해 줄 수 있는지 질문한 것이다. ‘맹탕 회견’의 정곡을 찌른 질문이었다. 홍 수석은 이에 대해 11월 19일 “대통령에 대한 무례”라며 열을 올렸는데, 사실상 대통령의 불편한 심기를 대변한 발언이었다. 발언의 파장은 컸다. 여야 정치권과 지역기자단, 심지어 조선, 중앙, 동아 등 보수 일간지들도 홍 수석의 발언을 비판하고 나섰다. 홍 수석이 발언 이틀 만에 사과하면서 사건은 마무리되는 듯했다. 하지만 이 사건은 관계자의 일탈성 해프닝에 그치지 않고, 오래된 사건의 기억을 일깨우는 계기가 됐다.
대통령에 ‘무엇을 사과했나’ 정곡 찔러
한국 권력과 언론 사이 오랜 관행 깬 것
날카로운 질문·능숙한 답변 주고받아야
2010년 서울 G20 정상회의 폐막식 기자 회견에서 있었던 일이다. 방한 중이던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한국 기자들에게 질문을 받겠다고 말했다. 한국 기자들은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고 결국 발언권은 중국 기자에게 돌아갔다. 질문을 할 줄 모르는 한국 기자들의 부끄러운 자화상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역대 대통령의 기자 회견은 대개 일방적 미사여구만 늘어놓는 의례적 행사에 그쳤고, 질문자와 내용을 미리 조율해 각본대로 진행됐다. 사전에 준비된 내용을 벗어난 질문도 없고, 답변이 겉돌아도 추가 질문은 나오지 않는다.
박근혜 대통령 시절은 이런 식의 알맹이 없는 기자 회견의 전성기였다. 박 대통령 취임 1년 후 첫 기자 회견에서는 청와대 출입 기자단이 질문 내용을 사전에 취합해 홍보수석실에 전달한 사실이 폭로되어 한국 언론 전체가 조롱거리가 됐다. 박 대통령은 유난히 기자 회견을 기피해, 취임 후 2년 반 동안 단 두 차례 기자 회견을 여는 데 그쳤고, 그나마 기자 회견을 사전에 작성된 발표문을 읽는 낭독회로 바꿔 놓았다. 질문을 할 줄 모르는 기자가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못하는 대통령을 낳은 것인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는 모르겠다.
물론 기자 회견과 질문 회피가 권위주의적인 대통령의 개인 성향과 관련이 있다는 반박도 가능하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대국민 소통이 상대적으로 활발했던 문재인 대통령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 2021년 5월 문 대통령은 미국 방문 중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합의 내용을 발표한 후 기자들의 질문을 받았는데, 이때도 11년 전처럼 한국 기자들은 침묵을 지켰다. “미국의 이익을 위해 동맹국인 한국에 손해를 입히는 것이 타당하냐”라는 질문이나 미국의 청와대 도청처럼 한국 입장에서 제기할 법한 껄끄러운 질문도 미국 기자에게서 나왔다.
이쯤 되면 대통령 취재 기자들 사이에서는 질문을 하지 못하는 것이 체질화한 직업 습관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오바마 대통령 기자 회견 해프닝은 이 어처구니없는 직업 풍토의 치부를 적나라하게 폭로한 사건인 셈이다. 이러한 분위기에서는 대통령의 발언을 일방적으로, 미사여구대로 옮겨 적을 뿐 사안의 허점을 찌르는 질문도, 비판적인 분석도 불가능하다. 홍 수석의 발언 역시 실수라기보다는 이처럼 오랜 불문율을 위반한 데 대한 대통령 측의 불만을 대변한 셈이다.
반대로 미국의 기자 사회에서 질문을 던지는 능력은 기본적인 직업적 자질로 여겨진다. 대통령 역시 기자들과 늘 대화하면서 예리한 질문에 능숙하게 대처하는 자질을 갖추어야 한다. 가령 오바마 대통령은 임기 중 연평균 20회 이상 기자 회견을 열었고, 기자 회견은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이루어졌다. 여기서는 예상 밖의 질문이 튀어나올 수도 있고, 우리처럼 질문자와 내용을 미리 조정하는 식의 기자 회견은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러한 조율 시도 자체가 큰 정치적 스캔들이 되는 분위기다.
우리는 왜 그렇게 할 수 없을까? 최근 우리는 ‘6시간 비상계엄’ 사태를 경험하면서, 언론의 보호막 아래 감춰져 있던 권력자의 적나라한 면모를 목격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무능, 독선, 부패, 권력 남용의 징후들이 언론과 대통령 간의 협조나 예우라는 명분하에 무시되었을지 생각하면 소름이 돋는다. 정치의 후진성은 정치 보도의 후진성과 동전의 양면과 같다. 언론이 대통령을 가까이에서 감시하고 날카로운 질문으로 늘 긴장하도록 하는 것만이 정치와 언론을 제자리에 돌려놓을 수 있는 해법이다. ‘무례한 발언’ 사건이 침묵의 카르텔을 깨고 개혁으로 가는 작은 전환점이 되기를 바란다.
2024-12-08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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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션 뷰] 해운사를 통해 본 HMM의 향방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우리나라에서는 해운이 국가의 존망을 좌우하는 생명선이나 다름없다. 이에 따라 역대 정부는 자국 화물 자국 선박 우선 적취제, 국기 차별, 계획 조선, 해기사 병역 특례 등 다양한 정책적 수단을 마련해 해운산업을 보호하고 육성해 왔다. 이러한 정책들의 시행 결과 1970년대에는 해운업이 급성장했다. 선박만 확보하면 수출입 화물을 먼저 선적할 수 있었기 때문에 화물과 상품을 수출입해야 하는 기업들은 앞다퉈 중고선을 들여와 해운회사를 설립했다.
그러나 1980년대 초 제2차 오일 쇼크로 인해 해운 불황이 찾아오면서 해운업계뿐만 아니라 해운업계에 자금을 대출해 준 은행들까지 쓰러질지 모르는 연쇄적인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에 정부는 1980년대 중반 ‘해운산업 합리화 정책’을 시행해 업체 간 통폐합을 유도했고, 그 결과 115개에 달하던 외항해운업체가 34개 사로 재편되었다. 이러한 조치로 인해 집단 도산의 위기에서 벗어난 외항해운산업계는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완만하게나마 성장세를 이어갈 수 있었다.
우리나라 수출입 화물 98% 해상 운송
원양 컨테이너 국적 선사 보유할 필요
중요성 감안 HMM 완전 민영화보다는
정부·공기업 일정 지분 보유 더 바람직
1995년 무역자유화를 기치로 내건 세계무역기구(WTO)의 출범과 1996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으로 우리나라는 더 이상 정부 주도의 보호육성 정책을 지속할 수 없게 되었다. 해운산업 보호 정책의 근간이었던 ‘해운산업육성법’마저 폐지됐다. 이후 1997년에는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가 발생하면서 상황이 더욱 악화됐다. 정부는 외환위기 원인 중 하나로 대기업의 과도한 부채를 지목하고 부채비율을 200% 이하로 낮추는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이에 따라 현대상선, SK해운, 한진해운, 조양상선 등 주요 해운사들이 보유 선박을 매각하고 자본을 증자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이 과정에서 2001년 조양상선이 파산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정부는 ‘제주선박등록제’, ‘선박투자회사제’, ‘톤세제도’ 등을 도입해 해운업계가 IMF 위기를 극복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우리 해운기업들은 2003년 중반부터 이른바 ‘중국 효과’로 초호황을 누렸다. 2004년 1261만 총톤이던 우리 외항선박량은 2010년 2806만 총톤으로 2.2배 증가했고, 한국해운협회 회원사 수 또한 2004년 50개 사에서 2010년 181개 사로 3.6배 늘어났다. 이처럼 배만 확보하면 막대한 이익을 얻을 수 있었기에 해운업계는 빌린 배를 다시 빌려주는 이른바 ‘다단계 용선’ 계약이 성행했다. 이에 해운선사와 해사 관련 업계 종사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해운시장에 뛰어들었고, 급기야 시장에서 배를 구할 수 없게 되자 직접 배를 만들기 위해 조선업에도 진출하게 되었다.
그러나 베이징 올림픽과 상하이 엑스포를 대비한 중국의 경제 활황으로 촉발된 중국 효과가 끝이 나고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으로 2008년 세계 경제는 침체로 급반전됐다. 초호황을 누렸던 해운업계는 다시 생존을 걱정해야 할 판이었고 이에 정부가 나서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 되었다. 정부는 외항해운업 등록 기준을 5000톤, 5억 원에서 1만 톤, 10억 원으로 상향하는 한편, 자산관리공사와 산업은행, 수출입은행을 통해 선사의 선박을 매입해 재용선하는 등의 지원책을 마련했다. 또한 해운회사별로 채권단의 신용위기 평가를 실시하고 그 결과에 따라 지원 정책을 차별화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정책적 지원에도 불구하고 대한해운과 STX팬오션은 법정 관리에 들어갔으며 2016년 한진해운이 파산했다. 2007년부터 2015년까지 모두 111개 해운회사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런 과정을 겪은 뒤 대한해운은 SM그룹, 팬오션은 하림그룹으로 경영권이 각각 넘어갔다.
현대상선은 자동차 선대, LNG 선대, 컨테이너 터미널 등의 자산을 매각하며 경영 정상화를 추진했으나, 결국 KDB산업은행에 주식의 40%를 매각하고 나서야 파산을 면할 수 있었다. 이후 2020년 사명을 HMM으로 변경하였으며, 현재 KDB산업은행과 한국해양진흥공사가 67%의 지분을 보유한 국영선사로 운영되고 있다. 2023년에는 KDB산업은행과 해양진흥공사가 HMM의 주식 매각을 시도했지만, 이는 무산된 바 있다.
수출입 화물의 98%를 해상으로 운송하는 우리나라로서는 원양 컨테이너 선사를 보유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우리나라 해운업에서 HMM이 차지하는 위상은 더욱 긴요하고 특별해졌다. 하지만 해운업은 변동성이 심해 미래를 전망하기 어렵고, 호황기보다 불황기가 더 길게 지속되는 경향이 있어 정부의 정책적 지원이 계속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HMM을 완전 민영화하기보다는 대만의 양밍이나 독일의 하파그로이드 선사처럼 정부나 공공기관이 일정 지분을 보유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2024-12-01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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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션 뷰] 부산항 터미널의 부익부 빈익빈
해마다 연말이면 항만 업계는 전년 대비 물동량 증감을 분석하며 다음 해 준비에 분주해진다. 터미널 간 집계 물량 통계에 따르면 올해 10월 말 누적 부산항의 총 처리 물량은 전년 대비 5.7% 증가했다. 부산항 신항은 9.8% 늘었다. 현재 추이가 지속된다면 올해 말 부산항은 총 처리 물량 2400만TEU를 돌파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나, 부산항 개항 이래 최대 물량 기록을 앞두고 각 터미널 운영사들은 부익부 빈익빈으로 그 희비가 엇갈린다.
이는 우선 증가한 물량이 대부분 대형 원양 선사들의 추가 물량이기 때문이다. 대형 얼라이언스 선사와 장기 계약을 확보한 터미널들은 연중 시설 대비 초과 물량 처리를 고민하였다. 반면 후발 주자 터미널들은 신규 계약 물량을 확보하지 못하고 인근 터미널의 초과 물량을 임시로 대리 작업해 오고 있다.
'제미니 협력' 출범 뒤 항만 요동 불가피
400만TEU 넘는 대형화 합종연횡 초래
협력·통합 요원, 무한 경쟁 반복 가능성
양적 성장 이어 서비스 구조 개선 필요
부산항에는 터미널이 계약한 선사의 선박을 선석 대기나 야드 정체 등의 사유로 적절하게 처리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 인근 터미널과 계약을 체결하여 서비스를 제공하는 전배(Overflow)가 있다. 이는 일시 물량 증대나 터미널 시설 보수가 필요한 경우 터미널 간 협력으로 선사에 안정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방안이기도 하다. 하지만, 전배 물량이 과다해지거나 고정화되는 경우 터미널 운영사 간 주력 계약 터미널과 전배 터미널이라는 계급 차이가 야기될 수도 있다.
신규 터미널 입장에서는 선사가 기존 계약 터미널이 처리 능력을 초과하는 경우 신규 터미널을 확보해 계약하기를 기대하지만 선사 입장에서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무엇보다 환적 물량을 서로 다른 터미널에서 처리하는 경우 각 터미널에서 타 부두 환적 물량에 대한 하역비가 증가하고 터미널 간 운송 비용이 추가로 발생하기 때문이다.
추가 비용 이외에도 추가 게이트 반출입과 장치에 소요되는 운영 비효율은 선사의 경쟁력 저하로 이어지기도 한다. 선사들은 최대한 충분한 처리 능력을 보유한 터미널과 계약을 체결하거나 기존 계약 터미널이 터미널 비용으로 일시 추가 물량을 처리하는 방안을 선호한다. 따라서 현재의 선사 얼라이언스 구조에서는 올해 터미널 이용 행태가 지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관전 포인트는 내년 2월 출범하는 신규 ‘제미니 협력’(Gemini Cooperation)이 부산항의 이러한 터미널 부익부 빈익빈 현상에 변화를 야기할 것인가 여부이다.
제미니 협력의 회원사인 덴마크 머스크와 독일의 하파그로이드는 올해 각각 240만TEU, 170만TEU를 처리해 내년 합계 400만TEU 이상일 것으로 예상된다. 두 선사 모두 부산항에 지분을 보유한 자가 터미널이 없기 때문에 어느 터미널과도 계약이 가능하다.
하지만 연간 400만TEU 이상을 동일 터미널 시설 내에서 안정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터미널 운영사는 많지 않다. 머스크와의 ‘2M 얼라이언스’ 해체를 선언한 스위스 MSC는 올해 부산항 처리 물량 400만TEU 수준을 예상하고 있다. MSC는 신항 1부두의 지분을 확보하고 있어 자가 터미널을 우선적으로 고려하고 추가 터미널 계약 필요 여부를 검토할 것이다. MSC는 ‘프리미어 얼라이언스’(Premier Alliance)와의 선복 교환도 계획하고 있어 현재 ‘디얼라이언스’(The Alliance), 내년 ‘프리미어 얼라이언스’가 이용할 터미널과의 계약도 불가피하다. ‘프리미어 얼라이언스’에는 한국 HMM이 회원사로 소속되어 HMM의 자가 터미널인 신항 4부두 중심 터미널 계약 확정이 예상된다.
물론 이들 대형 얼라이언스 회원사들 이외 부산항을 이용하는 국적, 외국적 선사들이 있지만 부산항 총 처리 물량의 70% 수준을 얼라이언스 회원사가 처리하고 있다. 이에 따라 높은 초기 투자비와 고정비를 감당해야 하는 신규 터미널 운영사가 얼라이언스 회원사를 계약 선사로 확보하는 것은 필수불가결하다.
글로벌 선사들과 선사 얼라이언스의 대형화로 단위 선사, 단위 얼라이언스의 연간 물량이 400만~500만TEU를 초과하게 됐다. 현재 대다수 터미널 운영사의 처리 능력이 300만TEU에 미치지 못하는 구조에서는 주력 터미널(선사의 자가 터미널 또는 글로벌 협력 터미널)과 전배 터미널 간 계급 차이나 잉여 시설 보유 터미널 간 무한 경쟁이 반복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분 구조가 상이하고 경쟁하는 운영사 간 협력이나 통합은 쉽지 않다.
부산항을 관리하는 정부 부처나 업계 오피니언 리더들이 부산항의 물량 증대라는 양적 성장뿐 아니라 터미널 서비스 구조 개선 방안 강구를 통한 질적 성장에도 보다 관심을 기울여 줄 것을 호소한다. 이는 부산항이 향후 3000만TEU 수준의 항만으로 지속 성장해 나갈 수 있는 동력 확보에도 주요한 이슈가 될 것이다.
2024-11-24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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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션 뷰] 대한민국 미래는 해양력 강화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한국과 조선업 협력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미국이 중국의 해양굴기와 해양력 강화를 우려하며 자국의 해운·조선산업을 재건하려는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최근 미국 의회는 ‘국가 해양전략을 위한 의회지침’을 발표하며, 미국의 해양력이 쇠퇴하고 있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중국의 해양세력에 대응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 지침은 미국의 해운·조선산업을 빠르게 강화하기 어려운 현실에서, 동맹국들과 협력하고 외국의 투자를 유치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미국은 동맹국과의 협력을 통해 해양산업을 재건하고, 미국 선단을 늘리고 해양 수송 능력을 확장할 계획이다. 미국 국방부는 민간과 군용 조선 시설을 활성화하려는 전략을 추진하며, 한국과 일본 등의 동맹국에 조선업 투자를 요청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향후 수십 년간 세계 해양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화그룹은 미국 필라델피아에 위치한 필리조선소를 인수했고, 한화오션이 미국 해군 함정 유지·보수·정비(MRO) 사업을 지난 8월에 이어 수주했다. 도널드 트럼프 당선인이 최근 한국 조선업과 협력을 공언한 상황이어서 관련 수주가 더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미국, 중국 해양굴기 대비 동맹국 협력 시사
국가 경제·안보·외교·과학기술 발전과 직결
해양 관련 전문가 육성과 인식 제고 필요
해양력 키우기 위한 국가 관심과 지원 절실
해양 국가들은 다양한 미래 비전을 제시하며 지속 가능한 해양 활용과 발전을 도모하고 있다. 중국은 일대일로(해상 실크로드) 프로젝트를 통해 해양 협력을 확대하고 있고 싱가포르는 첨단 물류 기술과 스마트 항만 구축을 통해 해운 허브 지위를 강화하고 있다. 노르웨이는 탄소 배출을 줄이는 해양 연료 및 친환경 선박 개발을 선도하고 있으며 러시아와 일본은 심해 자원 탐사와 수중 드론 기술 개발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리스는 해운업 강화, 친환경 기술 도입, 국제 협력, 해양 관광 활성화 등을 통해 지속 가능하고 경쟁력 있는 해양 강국으로 자리매김하고자 한다. 해양 국가들은 해양을 지속 가능한 성장의 기반으로 활용하며, 글로벌 도전에 대응하기 위해 국제적 협력을 확대하고 있다.
이를 통해 대한민국이 왜 해양력을 강화해야 하는지를 확인하고,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 해양력은 한 국가의 해양 관련 능력과 자원을 통합적으로 관리하고 활용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이는 국가의 경제·안보·외교·과학기술 발전에 직결된다. 첫째, 경제적 이유다. 전 세계 무역의 약 80%는 해상을 통해 이루어진다. 해양력은 주요 해상 교역로의 안정적 확보와 효율적 활용을 보장한다. 어업, 해저 자원(석유·천연가스·광물 등), 신재생 에너지(해상 풍력 등) 등 해양 자원은 경제적 가치를 제공한다. 이를 관리하려면 해양력이 필수이다. 해양 관광은 국가의 중요한 수입원이 될 수 있으며, 이를 뒷받침하는 해양 안전과 인프라가 필요하다.
둘째, 안보적 이유다. 해양 영토(배타적 경제수역 등)의 보호는 국가의 자원과 주권을 지키는 데 핵심이다. 이를 위해 해군과 해경 등의 해양 안보 능력이 필수이다. 주요 교역로를 위협하는 해적, 테러, 또는 분쟁 상황에 대응하려면 강력한 해양력이 필요하다. 해군력을 강화하면 해양에서의 전략적 억제력을 통해 국가의 안보를 한층 강화할 수 있다. 해양교육기관에서 양성하는 선원과 해기사는 국가의 비상사태 시 선박 운항을 통해 물자나 사람을 수송하는 제4군의 역할을 수행한다.
셋째, 외교적 이유다. 해양 영토와 관련된 국제 분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 위해 강한 해양력이 필요하다. 해양 환경 보호, 구조 및 구호 활동, 해양 과학 연구 등에서 국제적 협력을 주도할 수 있다. 넷째, 과학기술 및 환경적 이유다. 해양 생태계와 기후 변화 연구는 전 지구적 과제로, 이를 위한 연구 역량을 확보하려면 해양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다섯째, 국가 위상 강화이다. 강력한 해양력을 보유한 국가는 국제사회에서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으며, 국제적 역할을 확장할 수 있다.
해양력은 국가의 미래를 결정짓는 핵심 요소이다. 따라서 해양력 강화는 국가의 지속 가능성과 번영을 위한 필수 과제라는 것을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고 정부의 적극적인 해양산업 육성, 해양 인재 양성에 투자해야 할 것이다. 세계 해양 국가들의 공통적인 해양력 강화 방안으로 해양 관련 교육과 인식 제고를 중요시하고 있다. 해양 관련 대학과 연구소에서 글로벌 수준의 해양 전문가를 배출하고 해양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캠페인과 교육을 통해 국민적 관심과 지원을 유도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해양 영토 주권, 해양 경제, 해양 안보, 해양 외교, 해양 환경, 해양 과학기술 분야 등 해양력을 키우기 위해 국가의 관심과 지원이 절실하다. 대한민국의 미래는 해양 인재 육성을 통한 해양력 강화에 있음을 명심하길 바란다.
2024-11-17 [17: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