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진의 디지털 광장] 이토록 폭력적인, 이토록 아름다운
모바일국장
계엄 사태 뿌리 극우 유튜브 망상
급기야 사상 첫 법원 폭동 이르러
부당 지시 거부한 계엄군·경호관
응원봉 시위대 모두 민주화 결실
공감·공존 vs 배제·혐오의 세상
혼란 있어도 생명의 언어가 승리
내란 우두머리 혐의로 구속된 윤석열 현직 대통령이 지난 1일 관저 앞 지지자들에게 보냈다는 편지를 보면 계엄에 이르게 된 논리 흐름은 이렇습니다.
‘투·개표 부정과 특정 정치세력이 장악한 여론조사 조작으로 거대 야당 출현→주권 침탈 노리는 외부 세력과 거대 야당 야합→국회 독재로 입법·예산 봉쇄→국정 마비, 헌정 질서 붕괴, 반국가 행위→전시·사변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 이 상황을 국민에게 알리고 경고하기 위해 ‘소규모 미니 병력으로 초단시간 계엄’을 했다고 항변합니다.
지난 칼럼에서 기자는 윤 대통령의 확증 편향과 인지 부조화의 원인으로 극우 유튜브를 꼽았습니다. 지난 19일 새벽에는 극우 유튜버와 극렬 지지자들이 법원을 찾아가 사상 초유의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닥치는 대로 깨고 부수며 윤 대통령 구속영장 발부 판사를 수색하는 장면이 그들의 영상에 그대로 남았습니다. 온 국민이 12·3 계엄 사태에 맞먹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떤 피의자·피고든 법원 판단에 불만이 있어도 ‘일단 승복할 수밖에 없지만 향후 수사와 재판에서 다투겠다’는 한결같은 반응을 보이는 것이 상식입니다. 대법원 확정판결이 나오면 아무리 억울해도 따릅니다.
윤 대통령도 법치를 누차 강조해 왔습니다. 하지만 그는 다른 판사, 다른 법원이 여러 차례 정당하다고 판단했는데도 체포영장부터 구속영장까지 위법·부당하다고 항변합니다. 이런 입장이라면 헌법재판소에서 대통령 파면 결정이 나오더라도 수긍하지 않을 태세입니다. 이미 서부지법을 망가뜨린 일당은 헌재를 다음 목표로 삼았습니다.
서부지법 폭동의 충격과 동시에 이 말이 떠올랐습니다. ‘인간은 어떻게 이토록 폭력적인가? 동시에 인간은 어떻게 그토록 압도적인 폭력의 반대편에 설 수 있는가?’ 윤 대통령에 대한 국회의 첫 탄핵 표결이 여당의 투표 불참으로 무산된 12월 7일, 이 혼란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불안에 떨고 하루가 지났을 때 스웨덴 한림원 노벨문학상 수상 기념 강연에서 소설가 한강이 한 말입니다.
돌이켜 떠올려 봅니다. 지난해 12월 3일 국회에 투입됐을 때 일부러 시간을 지체하며 소극적으로 임했던 계엄군, 지난 15일 한남동 관저에서 차벽으로 쌓은 버스에 열쇠를 남겨두고 경호처 차장의 설득에도 대기동을 벗어나지 않았던 경호관들, 여의도 국회 앞과 광화문, 한남동 관저, 헌재 앞, 그리고 부산 서면과 대구 동성로 등 전국 곳곳에서 아껴둔 빛을 밝혀온 젊은이들. 민주화 이후 무상급식과 민주시민 교육을 충실히 받고 성장한 그들을 보며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압도적인 폭력의 반대편에서 과거와 전혀 다른 방식의 자유롭고 밝은 에너지로 한국식 민주주의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간 그들이 지난해 12월 22일 만든 ‘남태령 대첩’은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동학농민운동의 정신을 잇겠다며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소속 ‘전봉준 투쟁단’이 트랙터를 끌고 한남동 관저로 향하다 경찰의 저지로 남태령에서 막혔을 때 응원봉을 든 젊은이들이 어디선가 구름처럼 몰려들어 한남동까지 길을 뚫어낸 것입니다. 약 8년 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때도 서울 진입에 실패했던 투쟁단은 ‘한성 탈환을 꿈꾸던 전봉준의 꿈이 130년 만에 이뤄졌다’며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전통적인 노·학, 농·학 연대의 틀을 뛰어넘은 새로운 연대였고, SNS와 유튜브가 이들의 무기였습니다. 어떤 폭력도 없었습니다.
유튜브든 SNS든 그 내용은 ‘언어’로 전달됩니다. 다시 한강의 강연으로 돌아가면, 그는 언어가 단순한 의사소통 도구를 넘어 인간의 경험과 감정을 연결하는 실이자 생명의 빛과 전류가 흐르는 매개체라고 봅니다. 또 인간의 존재와 경험에 대한 깊은 질문을 탐구하고 고민하는 도구이자 역사와 기억을 전달하는 매개체가 언어라고 그는 말합니다.
남태령이나 광장에 응원봉을 들고 나타난 그들의 언어는 타인의 고통을 함께 느끼는 실이자 생명의 빛이었습니다. 타자에 대한 배제와 혐오, 심지어 “OOO는 죽여도 돼” 같은 공포스러운 발언을 서슴지 않는 극우 유튜브에서 공존을 꿈꾸는 생명의 언어, 타자의 고통에 공감하는 언어를 읽기는 어렵습니다.
특정 성향 응답자가 과대 표집된 여론조사 결과와 유튜브 슈퍼챗 수입에 잠시 희희낙락할 순 있어도 결국은 생명력을 가진 공존·공감이 배제와 혐오를 이깁니다.
이호진 기자 jiny@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