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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가지치기 유감
올해 여름도 매우 무더웠다. 부산은 111년 만에 가장 이른 열대야를 맞았고, 서울은 117년 만에 가장 뜨거운 밤을 맞았다고 한다. 대한민국이 동남아 국가들보다 더 더운 나라가 돼 온열 질환이 기성을 부리기도 했다.
그러나 나무가 많은 육지의 숲세권은 한낮의 평균 기온이 섭씨 3~7도 낮아진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이야기이다. 또 한 그루의 나무는 2.5t의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산소 1.8t을 내뿜어 공기도 정화해 준다고 한다. 박정희 대통령 때 시작된 대대적인 녹화사업으로, 이제 우리의 산야는 선진국의 우거진 숲이 부럽지 않다. 하지만 아직도 도시의 숲은 선진국에 비해 열악하고 부산은 서울보다 더 열악한 것이 사실이다.
선진국 중에 우리처럼 도시주택 모두를 콘크리트로 짓는 나라는 드물다. 대다수 국민이 살고 있는 콘크리트 아파트는, 한여름 햇볕에 노출되면 달궈진 바위 덩어리처럼 뜨거워진다. 단독주택에 살아본 적이 있다. 더운 여름, 지붕에 올라 호스로 물을 뿌리면, 홈통으로 흘러내리는 물이 웬만한 목욕탕 물처럼 뜨거웠다.
콘크리트 덩어리 아파트단지에는, 그래서 여름에 나무가 많아야 한다. 나무는 그 잎으로 그늘을 제공하고, 수분으로 기온을 내리게 하고, 산소로 공기를 정화하고, 그 푸르름으로 우리의 심신을 달래주며, 그 속에 둥지를 튼 새소리로 자연의 생명력을 느끼게 해준다.
그러나 우리 주변의 가로수는 상가 간판을 가린다거나, 전선을 보호해야 하거나, 쓰러질 우려가 있다며 잘려 나가고. 아파트의 조경수도 마찬가지로 저층 주민의 민원이라며 잘려 나가고, 낙엽이나 꽃이 떨어지면 청소하기 번거롭다며 잘려 나가고, 대나무는 죽순일 때 미리 꺾여 버린다. 웬만한 나무는 가혹한 가지치기로 고유한 수형을 잃어버릴 정도가 되었고, 가지 끝에 달린 부실한 잎사귀들은 그 사이로 보이는 휑한 하늘로 더 처량하게 보인다.
떨어진 꽃잎을 보기도 하고, 낙엽을 밟기도 하는 것이 도시에서 보기 힘든 자연의 혜택인데, 애꿎은 나무만 잘려 나간다. 오래전 모 아파트에서 임원을 할 때였다. 가을에 떨어지는 낙엽을 날마다 쓸지 말고 가끔 쓸도록 한 적이 있었는데, 주민들 모두 가을의 낙엽을 밟으며 좋아했다.
20년을 넘기며 잘 자라 무성해진 우리 아파트의 나무들이 몇 년 전 무분별한 가지치기로 싹둑 잘려 나간 이후 매년 잘려져 나가고 있다. 큰 소나무는 가지치기로 나무의 외곽 끝에만 겨우 잎이 몇 가닥 달려, 죽거나 고사 한 나무도 있고, 메타세콰이어는 긴 막대기처럼 위와 옆이 몽땅 잘려 나가 괴물이 되어, 그 우거진 그늘에 둥지 틀던 새 소리에 대한 추억도 사라져 버렸다. 수형이 아름답던 단풍나무는 심한 가지치기로 잘린 가지가 앙상한 잎새 사이로 솟아 하늘을 향하고 있다.
용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건강한 성장과 아름다운 수형을 위해 가지치기는 필요하다. 안쪽으로 향하거나 교차한 가지, 간격이 좁은 곁가지, 도장지 등은 제거되어야 하겠지만 그런 원칙이 지켜지지 않은 가지치기는 보기에도 흉하고 나무에게도 스트레스만 줄 뿐이다. 이런 까닭에 외국에서는 가지치기의 량을 25% 이내로 제한하고 있다고 한다.
나무는 나무답게 자랄 수 있어야 한다. 서울의 경우 아파트단지의 숲은 그 속이 어두울 정도지만 그대로 잘 보존되고 있다. 갖다 대기만 하면 싹둑 잘리는 날 일꾼의 기계 톱 놀이에, 수십 년 자란 나무가지가 잘려 나가, 그 어둡고 서늘하던 음지가, 태양이 내리쬐는 뜨거운 양지로 변하는 일은 없어야 하겠다.
런던은 그 많은 도시공원의 숲에 대해서 잎의 총량이 많아지도록, 수목의 UTP(Urban Tree Canopy, 수관층 면적 및 부피의 총량) 지표를 현재 21.9%에서 30%로 높여 목표를 세웠다고 한다. 우리도 무성한 나무가 잘 자라 새소리가 울려 퍼지고, 무더운 여름에는 기온을 낮출 수 있도록 이런 기준을 만들어 적용하면 좋겠다.
2025-10-15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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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부산, 국제관광도시의 ‘진짜 얼굴’ 만들기 위해
2017년 파견 근무로 처음 부산에 발을 디뎠을 때 가장 먼저 마주한 풍경은 부산역 앞 노숙자들의 모습이었다. 솔직히 당황스러웠고, 마음이 무거웠다. 그리고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과연 이 모습이 세계인들이 처음 마주하게 될 국제도시 부산의 첫인상이어도 괜찮은 걸까?”
그 질문은 곧 내 안에서 하나의 사명으로 바뀌었다. 이후 8년 동안 부산의 수많은 관광 현장을 누비며, ‘부산 관광의 본질적인 변화’를 고민하고 실천해왔다. 말로 하는 비전보다, 눈앞의 불편에 먼저 반응하는 것. 그게 내가 생각한 관광의 시작이었다.
부산 해운대구 구남로는 늘 혼잡하고 무질서했다. 플래카드와 불법 주차 문제는 시민과 관광객 모두의 불만이었다. 하지만 관련 기관들과 몇달간 의견을 조율한 끝에, 구남로는 단 4개월 만에 깔끔하고 열린 공간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부산역 앞의 풍경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부산시장, 관광국장, 코레일 관계자들과 협의하면서 조금씩 ‘부끄러운 첫인상’이 ‘환영의 공간’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모든 변화는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현장의 불편함을 바로 보는 데서 시작된다는 걸 몸으로 체감했다.
물론, 아직도 부산에는 해결되지 않은 숙제들이 많다. 달맞이길 상권 활성화를 위한 주차 문제, 오랑대의 낙서와 환경 훼손, 외국인을 위한 관광 안내판의 오류들. 이들은 작고 사소해 보일 수 있지만, 사실은 도시의 품격을 결정짓는 요소들이다. 누군가 해주겠지 하고 넘기면, 관광도시는 외형만 화려한 껍데기로 남을 수밖에 없다.
관광은 단순한 산업이 아니다. 사람을 반기는 기술이고, 배려와 감성의 경제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우문현답’(우리의 문제는 현장에 답이 있다)이라는 말을 믿는다. 현장을 있는 그대로 보고, 시민과 여행자의 눈으로 불편을 찾아내고, 관계자들과 함께 작게라도 움직이면, 그게 바로 관광이 살아 숨 쉬는 순간이 된다.
부산은 이미 매력적인 도시다. 해운대, 감천문화마을, 송도, 오시리아 등. 부산의 곳곳이 이야기를 품고 있다. 하지만 진정한 경쟁력은 도시의 하드웨어보다,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시선과 마음가짐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관광의 완성은 멋진 사진을 찍는 데 있지 않다. 도시를 어떻게 기억하게 만들 것인가, 그 ‘마지막 인상’까지 책임지는 데 있다.
이제 부산은 ‘보여주는 도시(SHOW)’가 아니라, ‘마음을 전하는 도시(LOVE)’가 되어야 한다. 오고 싶은 도시, 다시 찾고 싶은 도시, 그리고 오래 머무르고 싶은 도시. 그렇게 되기 위해 필요한 건 거창한 정책이 아니라, 오늘 내가 느낀 불편함을 솔직히 말하고, 그것을 바꾸려는 작은 용기다.
부산은 국제관광도시로서 충분히 멋진 도시다. 그리고 이미 세계인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다. 이제는 이 도시가 세계인에게 단지 ‘새로움’과 ‘휴식’을 넘어서, ‘마음을 움직이는 경험’을 줄 수 있는 진짜 글로벌 관광도시로 나아갈 차례다.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고, 지금 우리의 선택과 행동이 글로벌 허브 도시를 추구하는 부산의 내일을 바꿀 수 있다.
2025-10-15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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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금융 대전환 시대, 지역금융의 존재 이유와 소명
행원 시절 지점에서 근무하던 때가 생각난다. 당시 발 디딜 틈 없던 객장은 단순한 금융창구 이상이었다. 시민들 일상의 중심이었고 대한민국 수출 전초기지의 맥박이 뛰던 현장이었다. 섬유·신발·의류·수산물가공품 등 대표 수출품들은 지역은행 창구를 지나 세계로 향했다. 월말이면 셔터문이 내려가도 어음 할인과 외환 업무를 위한 거래처 직원들로 붐볐다.
당시 지역은행은 시중은행보다 앞선 기업대출·무역금융 경쟁력을 갖추고 있었다. 문턱은 낮았고 대응은 빠르며 무엇보다 지역기업의 리듬을 가장 잘 이해하는 파트너였다. ‘지역은행’에 일이 몰리는 건 당연했다. 이름 없는 수출업자들의 꿈은 그렇게 지역은행 유리창 너머에서 시작되었다. 지역은행과 지역경제도 활황기였고 자부심도 있던 시기였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며 많은 것이 변해갔다. 산업 구조가 바뀌었고 공장은 해외로 이전했으며 부산은 ‘산업의 중심지’ 타이틀을 잃어갔다. 금융도 그 흐름을 따라갔다. 시중은행의 공세뿐 아니라 인터넷전문은행이라는 경쟁자도 나타났다. 지역은행의 존재감은 작아졌고 생존의 고민까지 해야 하는 처지에 이르렀다. 지역기업들의 현실도 고달팠다. 수도권 중심 심사와 규제 속에서 지역은행은 여전히 숨 쉴 틈 같은 존재였다. 그렇다고 비가 오는데 우산을 뺏을 수는 없었다. 지역은행은 지금도 지역의 체온과 정서에 가장 가까운 금융의 역할을 이어오고 있다.
최근 금융당국의 ‘금융의 대전환’ 제안은 이런 지역금융에게 다시금 ‘존재의 이유’를 묻고 있다. 자본·자산의 성장 중심에서 벗어나 산업과 지역을 살리는 생산적 금융으로의 전환. 이는 단순히 규제나 정책을 조정하는 수준이 아니라 자금흐름·금융기능·금융생태계를 노동·산업·미래성장 중심으로 재편하겠다는 정부 차원의 큰 그림이다.
해양수산부를 포함한 유관기관 부산 이전 가시화, 국정과제에 포함된 북극항로 개척 어젠다로 인해 지역에는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지역금융이 단지 ‘지역에서 영업하는 금융’이라면 그 존재 이유는 더 이상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 지역을 읽고 지역산업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상생형 금융, 정책금융과 민간의 가교 역할을 하는 신(新)금융플랫폼으로 발전해야 한다.
또한 순이익의 약 15%를 지역에 환원하고 70% 이상 일자리를 지역인재에게 제공하고 있지만 지역금융은 앞으로 그 생산적 역할은 더 강화해야 한다. 이러한 지방금융의 존재 이유가 곧 국가균형발전의 핵심전략이자 ‘금융 대전환’의 기반 인프라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시절 객장을 찾던 거래처는 예전 같은 호시절은 아니지만 여전히 지역을 지키고 있다. 간혹 “지역에만 너무 몰두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을 들을 때면 필자는 지역 기업인들의 얼굴이 먼저 떠오른다. 누군가는 함께 경청하고 공감하며 손을 잡아줘야 한다. 그들과 함께 지역의 옛 명성을 되찾고픈 지역금융 수장으로서 작은 희망이기도 하고 자존심이기도 하다.
2025-10-01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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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청년의 날, ‘사회복지사’라는 이름 다시 묻는다
필자의 외조모 고 진봉연 여사님은 6·25 전쟁 직후 부산 동구에서 ‘호림천사원’을 운영하셨다. 정부 지원이 부족하던 시절, 부모를 잃은 아동에게 시설은 삶의 울타리였다. 그 영향으로 어머니는 ‘고아원 출신이 아니냐’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훗날 닮은 얼굴이 헛소문을 지웠지만, 우리 가족 삶 속에 사회복지의 뿌리가 깊다는 사실만은 남았다.
2년 전 자원봉사자 대상 강연을 마치자 한 봉사자가 “원장님 잘 계세요?”라고 물었다. 짧은 인사였지만 당시의 기억, 사람들의 모습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외할머니가 시설을 이어 2·3세 경영으로 갔다면, 필자도 ‘복지 금수저’ 비판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외할머니는 아이들이 자라자 더 받지 않고 시설을 정리했다. 필자는 정서적으로는 족벌의 후예일지 몰라도, 현장에서는 ‘맨땅에 헤딩’해온 사회복지사이다.
이 경험은 ‘가족 경영’을 다르게 보게 했다. 우리 사회복지는 전쟁 직후 해외 원조와 민간 구호, 교회·구호단체, 가족·친척의 돌봄에서 출발했다. 그 흐름 속에 가족 중심 운영은 자연스러웠다. 실제로 성실히 운영되는 가족 법인이 많고, 회계·인사 규정을 스스로 더 엄격히 지키려 애쓴다. 그럼에도 일부 세습·비위가 전체를 낙인찍으며 ‘가족 경영=문제’로 단순화한다. 현장을 묵묵히 지켜 온 사람들에게는 가혹한 프레임이다.
필자는 2007년 자격증 발급자가 30만 명도 안 되던 때 현장에 들어왔다. 10년 뒤 100만 명을 넘었고 지금은 160만 명에 육박한다. 한때 연간 5만 명도 안 되던 발급이 이제는 해마다 10만 명 가까이 쏟아진다. ‘이러다 대한민국이 복지국가 되겠네’라는 냉소가 나올 정도다. ‘사회복지사입니다’라는 말이 ‘운전면허 있습니다’처럼 흔해졌고, 현장에서는 이 호칭을 꺼내기 민망해졌다.
그럼에도 ‘사회복지사’라는 이름은 여전히 내 가슴을 뜨겁게 한다. 명함에도 직함보다 사회복지사를 먼저 새긴다. 문제는 전공·비전공의 구분이 아니다. 어떤 경로든 교육·시험·실습으로 전문성을 담보해야 한다. 학점은행제나 평생교육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이를 느슨하게 운영하는 구조와 일부 교육기관의 상업화다. 국가장학금과 저렴함을 내세우고 ‘곧 시험이 도입된다’는 불안을 팔아 자격증 장사를 하는 관행은 멈춰야 한다.
지난 9월 7일 사회복지의 날, 보건복지부 타운홀에서 예비 사회복지사들은 낮은 임금, 과중한 업무, 폐쇄적 문화, 허술한 자격제도를 지적하며 “내가 이 길을 걸어도 괜찮을까”라고 자문했다. 이는 개인의 푸념이 아니라 체계의 균열에 대한 경고이다.
해법은 분명하다. 생활임금과 휴식권, 합리적 근로시간으로 처우를 바로잡고, 민주적 운영과 공정 인사로 근무환경을 개선해야 한다. 더불어 교육·실습기관 관리와 사회복지사 2급 시험 도입으로 자격의 신뢰를 복원해야 한다. 본질은 가족경영 여부가 아니라 사회복지사의 수준을 어떻게 지켜낼 것인가이다.
사회복지사는 자격증 소지자가 아니라 복지국가로 이끄는 전문 인력이다. 이 이름이 다시 무게와 존중을 회복할 때, 예비·청년 사회복지사에게 희망과 목표가 선다. 청년의 날은 지났지만, 전문성 회복과 안전한 일터라는 질문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 앞에 남아 있다.
2025-10-01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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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대만의 ICAO 참여, 세계 항공 안전 위한 필수 조건
교통은 문명의 진보를 떠받치는 토대이다. 20세기 비행 기술이 등장한 이래 인류의 활동 반경은 끊임없이 확장되었고, 문명 또한 그만큼 번영하였다. 특히 항공 운송은 거리와 시간의 개념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세계화와 공급망 형성을 가속화하였다. 그러나 항공 교통의 발전은 새로운 과제를 동반한다. 점차 혼잡해지는 공역 속에서 어떻게 안전성과 효율을 동시에 확보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러한 이유로 국제민간항공기구(ICAO)는 세계 항공 안전 기준을 마련하고 정보를 공유하는 핵심 플랫폼으로 기능을 한다.
대만은 동북아와 동남아의 교차점에 위치해 대체 불가능한 지정학적 위치를 지닌다. 2024년 타오위안 국제공항의 국제선 여객 수는 세계 13위, 화물 처리량은 10위를 기록하였다. 같은 해 대만 비행정보구역(FIR)은 164만 회 이상의 항공편을 관제하였으며, 이는 대만을 오가는 여객뿐 아니라 한국, 일본, 동남아시아를 연결하는 환승 항공편까지 포함한다. 예컨대 서울에서 싱가포르, 자카르타, 마닐라로 향하는 항공편 대부분이 대만 FIR을 통과한다. 이는 대만이 지역 항공 네트워크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를 보여준다.
대만과 한국의 관광 교류 또한 항공의 중요성을 분명히 보여준다. 1992년 양국 간 상호 방문객은 18만 명에 불과했으나 정책과 민간 교류의 노력으로 2019년에는 245만 명으로 13배 증가하였다. 2024년에도 상호 방문객은 243만 명에 달해 양국은 서로에게 세 번째로 큰 관광객 송출국이 되었으며, 그 중 대만인의 한국 방문은 143만 명이고, 특히 부산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 가운데에서는 대만인이 1위를 차지하였다. 현재 양국 간 직항 노선은 주당 약 270편으로 인천, 김포, 청주, 대구, 부산, 제주를 잇고 있다. 이러한 긴밀한 교류들은 안전하고 안정적인 항공망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항공 안전에는 결코 우연이 없다. 올해 중화항공은 두 차례의 착륙 활주로 오류 사건을 겪었으며, 감독 기관은 즉시 조사관을 파견해 ‘제로 톨러런스’ 원칙을 명확히 했다. 부산 김해공항은 지형적 특수성으로 인해 강한 측풍과 산곡 기류가 잦아 착륙이 어렵다. 이에 따라 중화항공은 최신 기종인 A321neo를 타이베이–부산 노선에 투입하였다. 이 기종은 더 높은 뒷바람 착륙 기준을 충족해 회항 및 지연 위험을 효과적으로 줄이고, 승객에게 보다 안정적이고 안전한 비행을 제공한다. 이는 대만 승객뿐 아니라 해당 공역을 통과하는 모든 항공편의 안전을 지키는 조치이다.
대만 항공 산업의 전문성은 국제적으로도 지속적인 인정을 받고 있다. 대만 교통부 민용항공국은 또한 지속가능 발전을 적극 추진하며, ICAO의 탄소배출 감축 제도(CORSIA)를 국내 법규에 반영하였다. 2025년에는 지속가능 항공 연료(SAF) 시범 계획을 시작해 탄소중립을 향한 의지를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나 대만이 ICAO에 직접 참여하지 못한다면 이러한 노력은 국제 규범과의 정합성을 확보하기 어려워지고, 결국 세계 항공 안전 협력 체계에 공백을 초래할 수 있다.
대만을 ICAO에서 배제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위험하다. 항공 안전에는 국경이 없다. 정보 공유의 사각지대가 발생하면 전체 시스템이 위협을 받는다. 대만의 ICAO 참여를 지지하는 것은 정치적 입장이 아니라, 지역과 세계 항공 안전을 지키기 위한 필연적 선택이다.
국제 사회, 특히 대만과 항공로로 긴밀히 연결된 국가들은 이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항공 안전은 전 인류의 공동 이익이다. 대만이 ICAO에 참여할 수 있어야 수백만 명의 한국인과 다른 국가 여행객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으며, 세계 항공 운송의 회복력을 강화할 수 있다. 실질적으로 책임을 지는 모든 이해 당사자를 포함해야만 ICAO는 ‘안전한 하늘, 지속가능한 미래’라는 비전을 진정으로 실현할 수 있다.
2025-09-29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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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눈빛으로 말한다, 당신의 ‘진짜 청렴’은 안녕하신가
‘청렴’. 입으로는 참 쉽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 단어는 종종 비현실적인 이상처럼, 때론 불편한 잣대처럼 느껴지곤 한다. 우리의 삶 자체가 수많은 작은 선택들의 연속임을 생각해보면, 길에 떨어진 쓰레기를 줍는 것, 약속 시간에 늦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 온라인 댓글 창에서 한 번 더 생각하고 쓰는 것 등등. 이런 소소한 행동들이 모여 우리 자신과 사회의 모습을 완성한다.
청렴 또한 다르지 않다. 단 한 번의 대형 비리 사건을 막는 것도 중요하지만, 필자는 매일매일의 작은 '선택'과 '습관'이 쌓여 만들어지는 청렴에 더 주목하고 싶다. EBS 다큐멘터리 '아이의 사생활-도덕성' 편에서 아이들이 순간의 충동을 억제하고 규칙을 지키는 '충동 조절 능력'이 도덕성 발달에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었다. 이는 거창한 이상이 아닌, 사소하지만 꾸준한 노력을 통해 길러지는 '도덕 근육'과도 같다.
여기서 더 나아가, 이 다큐멘터리 속 '부끄러움과 도덕성 실험'이 특히 인상 깊었다. 실험에서 일부 대학생들이 예상치 못한 돈을 더 받았을 때, ‘맞죠?’라는 질문에 부끄러움을 느끼며 사실을 고백하는 모습은 필자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전문가들은 말한다. “부끄러움을 아는 자만이 참으로 도덕성을 이룬다”, “부끄러움, 도덕의 시작이다”라고. 이 말은 단순히 법규를 달달 외우는 것을 넘어, 내 양심과 마주하며 진정으로 부끄러운 일은 하지 않으려는 내면의 기준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준다. 즉, 청렴은 외부의 감시가 아닌, 스스로 부끄럽지 않기 위한 매일의 양심 체크인 셈이다.
결국 공직자에게 청렴이란, 단 한 번의 거창한 선언이 아닌, 매 순간 자신의 양심과 소박한 선택들로 쌓아가는 삶의 도리이자, 존재의 이유이다. 국민의 신뢰를 얻기 위한 공정하고 투명한 과정은 강력한 법규 이전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몸에 밴 습관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출근길 인사부터 작은 민원 하나하나 처리하는 과정, 동료와의 대화 속에서도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공정함이 자연스럽게 배어 나와야 마땅하다.
한국산업인력공단(HRDK)은 ‘상생을 바탕으로 청렴하고 안전하게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라는 ‘HRDK DNA’ 행동규범을 핵심 가치로 삼고 있다. 이는 단순한 표어가 아닌, 모든 임직원의 일상과 업무 속에 뿌리내려야 할 습관을 의미하며, 이런 청렴 습관은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기관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기본 중의 기본이다. 투명하고 공정한 행정이 뒷받침될 때 비로소 주어진 사회적 책무를 다할 수 있음을 늘 명심해야 할 것이다.
청렴은 한 순간의 특별한 사건이 아닌, 매일매일의 소박한 실천이며, 마음속 양심 체크의 반복이다. 공단은 부산 시민의 삶에 밀접한 직업능력개발, 국가자격시험, 기능경기대회 등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동안, 겉으로 보이는 성과뿐 아니라 그 과정이 얼마나 투명하고 공정했는지, 매 순간 여러분이 느낄 수 있도록 꾸준히 노력할 것이다.
한국산업인력공단은 HRDK DNA로 다진 원칙과 경험을 바탕으로, 법이 지키기 전에 먼저 청렴을 선택하고, 오로지 국민을 위한 행정 서비스에 집중하여 더욱 창의적이고 효율적인 공단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국민 여러분이 공단을 믿고 삶 속에서 함께 호흡하며, 깊은 신뢰를 드릴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2025-09-25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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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부산, 기후산업의 메가시티로 거듭나자
‘끓는 시대’로 지칭되는 오늘날의 기후변화는 인류가 직면한 중대한 도전이자 과제로서 심각한 인적․물적 피해를 초래하고 있다. 기후위기를 극복하는 기술과 산업의 성공 여부는 인류의 생존과도 직결된다. 지금은 ‘기후산업 입국’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도입이 필요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부산은 지리적으로 태평양과 아시아 대륙에 접하고 있어, 내륙 도시와는 달리 기후 기술 연구에 유리하고, 해양 환경과 내륙의 산업 형태에 의해 영향을 받는 기후산업을 조성하는 최적의 도시이다. 이러한 부산의 지리적인 장점은 국제적인 관점에서 기후 연구 전문기구인 유엔의 ‘세계기상기구(WMO)’와 유엔환경계획(UNEP)에 의해 기후변화에 대한 정부 간의 패널인 IPCC(Intergovernmental Panel on Climate Change)’가 설립되고,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로서 기후변화의 위험을 평가하고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UN FCCC COP)의 실행에 관한 보고서를 발행하는 가운데 더욱 주목받는다.
이미 국가 출연연구기관인 한국해양과학기술원과 국립수산과학원 등이 부산에 소재할 뿐만 아니라, 국내 최대 규모로 대기 과학, 위성 정보학, 지질과학, 해양 및 환경 분야의 관련학과가 특화되어 있어,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기후 기술과 산업을 조성하는 데 필요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해양수산부의 부산 이전도 기후산업 형성에 최적의 조건이다. 부산을 비롯한 동남권은 원자력과 신재생 에너지 등의 다양한 에너지 산업의 인프라가 형성되어 있고, 금융단지도 있어 부산은 기후산업을 바탕으로 하는 탄소금융, 기후보장 보험 등의 산업을 형성할 수 있는 기후산업 메가시티 조성에 매우 유리한 도시다.
부산에 소재한 기후 관련 정부 부처와 국제기구, 국가 출연연구원과 대학의 관련 분야 등의 인프라는 기후산업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 다른 어느 국가와 도시에서도 그 예를 찾기가 어렵다. 게다가 부산은 기후변화 정보의 실제적인 중심지로서 기후와 해양 환경의 정보를 제공하는 데이터 센터 및 기상 정책 및 R&D 등의 기후변화 대응에 적합한 공간구조와 산업구조 및 에너지 체계 등에 대한 ‘테스트 베드’로서 매우 적합하다.
세계 각국은 미래 발전과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기후 기술과 산업의 개발에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다. 영국은 에너지·기후·넷제로(Net zero) 정책을 전담하는 부처인 ‘에너지안보 및 순배출제로부(DESNZ)’가 신설되어 ‘Clean Power by 2030’ 및 ‘Net Zero by 2050’를 중심으로 추진되고 있다. 독일은 ‘연방경제기후부’ (Federal Ministry for Economic Affairs and Climate Action)를 신설했고, 네덜란드도 기후·녹색 성장 전담 부처인 ‘기후정책·녹색성장부’(Ministry of Climate Policy and Green Growth)를 만들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산업통상자원부, 환경부, 해양수산부 등 여러 부처가 서로 다른 목표로서 에너지·기후정책을 운영하고 있다. 그래서 탄소중립과 에너지 전환 목표를 일관되게 추진하고, 산업 경쟁력과 장기적 비전을 높이기 위한 ‘기후에너지부’ 신설의 필요성이 거론되고 있다. 기후에너지부의 설립은 정책 목표와 통합성 높이고 전문기관 중심 협력 체계와 관련된 법과 제도 정비를 일관되게 추진하는 통합된 부처가 지니는 다양한 이점을 지니게 될 것이다.
이러한 추이에서 기후에너지부가 부산에 설립된다면, 부산은 명실공히 글로벌 대규모 탄소 감축을 위한 CCS의 주도적 기술을 선도하는 도시, 기후 위기 대응 에너지 기술과 ESG를 실현하는 도시가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기후와 에너지 산업에 의한 우리나라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실현하는 교두보가 될 것이다. 따라서 지정학적 장점을 바탕으로, 부산이 기후 기술과 산업을 선도하는 글로벌 메가시티로 거듭날 수 있도록 모든 역량을 집중해야 할 것이다.
2025-09-25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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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느림에 대한 이해와 배려’의 태도 필요
느린 학습자(경계선급 지적 기능인·BIF)는 미국 지적장애 및 발달장애협회(AAIDD) 12판에 따르면, 지적장애의 진단 기준을 기술적으로 충족하지 않으나, 지적장애 진단을 가진 사람들의 많은 특성과 지원 요구를 공유하는 한 개인 집단을 역사적으로 지칭해 온 용어이다. 이들은 한 때 지적장애 중 최상위 범주로 포함되었다가(AAIDD, 1959년) 이후 삭제되었으며,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매뉴얼인 DSM-Ⅳ(1994년)에 경계선 지능에 대해 재언급하였으나 DSM-Ⅴ(2013년)에서는 해당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있다. 이는 이들을 조기에 발견하고 적절한 지원망을 통해 충분한 지원이 이루어진다면, 다수가 장애 범주에 미포함되는 수준까지 발달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국내의 경우, 최근 관심이 높아지면서 이들에 대한 연구와 지방자치단체의 조례 제정 등 지원에 대한 논의가 다각도로 진행되고 있다. 공교육에서의 지원(일반교육), 학생 수준에 따른 특수교육대상으로의 지원(특수교육), 그리고 복지관, 지역아동센터, 청소년상담센터, 치료센터 등 다양한 기관을 통한 지원(학교 밖 지원)이 잘 이루어진다면, 이들의 학업 및 사회적응 등의 어려움이 상당히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느린 학습자에 대한 제도 마련과 치료교육 지원도 중요하지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함께 고민해 볼 다른 지점들도 있는데, 좀 더 근본적인 부분으로 생각되는 것이 몇 가지 있다.
첫째, 우리 사회가 ‘느림, 다름에 대한 이해와 배려’의 태도를 함께 고민하고 성숙해 가야 한다. 느린 학습자 자녀를 둔 부모님 중 더러는 ‘우리 아이는 장애는 아니예요’라며, 장애군에 포함되고 싶어 하지는 않으나, 지원은 요구한다. ‘특별한 도움이 필요한데, 특별한 도움이 필요한 대상이라는 이름표는 붙이지 않고 싶어요’라는 말이다. 앞뒤가 안 맞는 말이지만, 일부 부모의 잘못된 인식이라고만 치부할 수 없다. 우리 사회가 ‘느림은 좋지 않은 것’이라고만 여겼던 태도를 버리고, 이제는 ‘느려도 괜찮아’, ‘느릴 수도 있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아이들마다 발달의 속도는 다르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또래와 혹은 또래 평균과 비교하고, 느린 경우 매우 조급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장애아동은 자라지 않는다는 잘못된 인식까지 있다. 느린 학습자의 부모가 우리 아이는 장애는 아니라며 불편해하는 이유 중 ‘장애가 있는 아이는 자라지 않는다’는 잘못된 인식도 한몫하는 것이다. 장애아동은 자라지 않는다는 잘못된 생각이다. 적절하고 충분한 지원이 제공된다면, 느린 학습자는 물론 장애가 있는 아동도, 지금보다 더 잘 자랄 수 있다. 모든 아이들은 자란다. 다만 속도가 다를 뿐이다. 느린 학습자, 장애아동들도 각자의 속도로 모두 자란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한다.
셋째, 느린 학습자의 인지 능력 발달에 대한 오해가 있다. 그래서 낮은 인지 능력을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 태도를 보인다. 자녀의 언어, 학습, 사회성 발달의 어려움이 ‘경계선 지적 기능’으로 인한 것임을 알게 된 경우, 낮은 인지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한 몸부림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러한 경우는 관심과 지원의 부족으로 인하여 생기는 문제와는 다른 결의 우울과 불안 등으로 학교 부적응 문제가 초래되기도 한다. 따라서, 현재 우리 사회의 느린 학습자 및 장애아동에 대한 인식 정도를 고려하면 쉽지 않겠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부모의 올바른 인식과 양육 태도는 중요하다. 자녀의 발달 수준과 기능에 맞는 적절한 지원과 자녀의 성장에 대한 기대를 갖고 격려할 수 있게 돕는 부모 교육과 양육 코칭이 반드시 함께 지원되어야 한다.
느린 학습자를 돕는 진짜 시작은, 아이의 현재를 인정하고 기다려주는 태도이다. 제도 마련과 치료교육 지원도 중요하지만, 사회 전체가 ‘느림’을 이해하고 존중할 때, 자기 속도로 건강하게 자랄 수 있다. 이제는 우리 모두가 느림을 따뜻하게 받아들일 때이다.
2025-09-24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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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우리는 모두 ‘알바생’이다
독일어 ‘Arbeit’는 흥미로운 여정을 거쳐 한국에 도착했다. 원래 ‘고아가 해야 하는 힘든 일’을 뜻했던 이 단어는 중세 독일에서 ‘고통스러운 노동’을 의미했다. 그러나 루터의 종교개혁을 거치며 ‘신의 소명’으로, 산업화 시대에는 ‘시민의 윤리’로 승화되었다.
전후 독일에서는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대학생들을 돕기 위해 ‘학생 아르바이트’ 제도가 만들어졌다. 이는 단순한 생계 해결책이 아니라 노동을 통해 사회에 참여하고 성숙한 시민으로 성장하는 교육적 장치였다. 메이지 시대 일본으로 건너간 ‘Arbeit’는 ‘아르바이토’가 되어 학생들의 부업을 지칭하게 되었고, 일제강점기를 거쳐 한국에 ‘아르바이트’로 정착했다.
그런데 한국에서 이 단어는 독특한 변화를 겪었다.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아르바이트’는 더 이상 학생들만의 전유물이 아니게 되었다. 구조조정으로 일자리를 잃은 중장년층이 생계를 위해 시간제 일자리를 찾게 되면서, ‘생계형 아르바이트’라는 새로운 개념이 등장했다. ‘알바’라는 축약형이 급속히 확산한 것도 이때부터다.
오늘날 한국에서 알바는 모든 형태의 비정규 노동을 포괄한다. 편의점 직원부터 배달 라이더, 온라인 과외 교사, AI 데이터 라벨러까지, 정규직이 아닌 모든 일이 알바로 불린다. 2024년 기준 한국의 비정규직 비율은 38.2%에 달한다. 이는 독일(12-13%)의 3배에 이르는 수치다.
특히 주목할 점은 세대별로 알바에 대한 인식이 다르다는 것이다. 베이비부머 세대에게 알바가 불가피한 생계 수단이라면, MZ세대에게는 경력 개발과 자아실현의 기회다. 2022년 조사에 따르면 직장인의 58.2%가 “아르바이트 경험이 취업에 도움이 됐다”고 답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여전히 알바하는 사람들을 온전한 노동자로 인정하지 않는다. 같은 일을 해도 직원과 알바는 다르게 대우받는다. 사회보험 혜택도, 고용 안정성도, 심지어 인간적 존중마저도 차별받는다. 독일에서 Arbeit가 모든 노동을 포괄하는 중립적 개념인 것과 달리, 한국의 알바는 2차 노동시장의 불안정 고용을 지칭하는 차별적 용어가 되었다. 이는 우리 사회의 극단적인 노동시장 이중구조를 그대로 반영한다.
언어는 현실을 반영하지만, 동시에 현실을 만들어낸다. 알바라는 말에 담긴 무의식적 차별과 하대는 수많은 노동자의 자존감을 깎아내리고, 그들의 노동 가치를 폄하한다. 새벽에 신문을 배달하는 사람, 깊은 밤 편의점을 지키는 사람, 폭염과 한파 속에서 음식을 배달하는 사람 등 이들 없이 우리의 일상은 가능할까? 그들은 단순히 ‘알바생’이 아니라 우리 사회를 떠받치는 필수 노동자들이다.
더 나아가 4차 산업혁명 시대, 평생직장이 사라진 지금,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경계는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 오늘의 정규직이 내일의 프리랜서가 되고, 은퇴한 임원이 카페에서 일하는 시대다. 우리는 모두 언제든 알바생이 될 수 있고, 이미 그렇게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는 알바생이 아닐까?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우리는 모두 삶이라는 거대한 프로젝트에서 각자의 파트를 담당하고 있다.
독일어 Arbeit의 원래 의미가 ‘고아의 힘든 노동’이었다는 것을 떠올려보자. 우리는 모두 이 세상에 홀로 던져진 존재로서,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가기 위해 노동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알바와 정규직을 나누는 경계는 얼마나 허구적인가?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태어나면서 부여받은 각자의 삶의 책무를 다하는 알바생이다. 그 일이 대기업 임원이든, 편의점 야간 근무든, 플랫폼 배달이든 말이다. 중요한 것은 일의 형태가 아니라 그 일을 하는 사람의 존엄성이다. 모든 노동은 신성하고, 모든 노동자는 존중받아 마땅하다. 알바라는 말에 담긴 차별의 시선을 거두고, 서로의 노동을 존중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진정한 ‘노동하는 인간’(Homo Laborans)으로서 함께 살아가는 첫걸음이 아닐까.
2025-09-18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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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50만 청년의 ‘혼밥 삶’
우리가 어릴 때 식구들이 둘러앉아 엄마가 만든 큰 바가지에 담은 비빔밥을, 서로 많이 먹겠다고 숟가락 싸움을 한 적이 있다. 지금 아이들이 사는 세상과는 너무나 다른 세계였지만, 배고팠던 그때가 행복한 삶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최근 발표된 세계행복지수에서 우리나라는 세계 147개국에서 58위였다. 영국 옥스퍼드대학 웰빙리서치센터와 유엔 지속가능발전해법네트위크(SDSN)와 함께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핀란드가 1위, 덴마크 2위, 미국이 24위, 일본 55위, 한국 58위, 중국 68위, 아프카니스탄 147위이다. 이번 발표자료가 흥미로운 것은 식사 공유 횟수가 행복지수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행복은 단순한 부(富)나 경제 성장의 문제가 아니고, 신뢰와 유대감 그리고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가 중요함을 말한다.
문제는 ‘혼밥’이 인간의 외로운 감정을 고조시키고, 외톨임을 스스로 느끼게 한다. 요즈음 한국적 현실에서 모든 세대가 삶의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출근길에 일찍 나서야 하고, 아이들은 정규수업 마치고 이내 학원으로 뛰어다니고, 엄마도 벌이를 위해 시간에 관계없이 바쁘다 보니 가족이 모여 식사하는 시간이 많지 않다. 또한 직장을 구하려 해도 일자리는 없고 막막하게 집안에서 쉼을 자처하는 청년이 50만 명이 넘으니, 그들은 혼밥을 즐길 수 밖에 없다.
게다가 한국은 자살, 약물 중독,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절망사(死)가 해마다 증가하고 있는 실정이다. 해마다 한국은 1만 4000명, 하루에 40명이 죽어가고 있다. 왜 우리 사회가 이렇게 한 생명의 가치를 헌신짝 버리듯 쉽게 하는지, 정말 앞으로의 미래가 걱정된다. 절망사 증가는 단순히 현재 삶의 비교보다 미래에 대한 장기적인 희망이 없다고 판단되는 부정적 결정으로 나타난다.
이런 사유가 우리 사회의 노인 인구가 급증하는 원인도 있지만, 노인의 빈곤으로 인한 원인보다는, 자신의 질병이나 더한 고독감에 삶을 한탄하며 생을 마감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평균수명을 넘는 나이에 자식들에게 짐을 지우기 싫어하고, 독립적인 부부의 삶을 살다가 한 분이 먼저 가시면 밀려오는 외로움에서 혼밥을 견디다 못해 비관하는 경우가 많다. 이에 우리 사회가 노인의 여가 및 평생교육의 확대로, 그들을 지역사회로 끌어내어 공동체의 삶의 기쁨으로, 자원봉사나 재능기부로 보람을 더 해가는 교육이 필요하다.
지금 우리 학교 교육은 부모들의 ‘1등 제일주의’가 아이들의 미래를 망치게 하고, 사교육비는 유치원부터 시작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제 우리 사회는 이런 문화가 확 바뀌어야 한다. 1등 제일주의에서 벗어나 참다운 사회인으로 사는 삶을 자신이 새롭게 정립해 나가야 한다. 바로 개인주의가 아닌 이타주의 정신으로, 더불어 사는 사회의 공동체 삶을 터득하는 것이 우선이다.
학교에서 자원봉사의 가치를 배우며 이웃을 위해 돌아보는 심성이 학습되어야 하고, 실천하는 행동을 배우는 것이 지름길이다. 왜 세계 경제대국 10위 나라의 행복지수가 하위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를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보길 바란다.
2025-09-17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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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50만 명이 지지한 담배소송, 국민 건강권 회복의 시작
국민건강보험공단이 담배 제조업체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은 국민의 건강권을 바로 세우기 위한 중대한 과제다. 비록 1심에서 기각 판결이 내려졌지만, 공단은 굴하지 않고 항소를 제기했다. 이는 단순한 법적 절차가 아니라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지키려는 책임 있는 선택이다.
정기석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은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담배 제조업체가 흡연의 폐해를 알면서도 축소하거나 은폐해 왔고, 그 피해 비용을 국민이 떠안아 왔다”며 항소의 불가피성을 강조했다. 이는 흡연 피해를 더 이상 방치하지 않겠다는 공단의 강력한 의지를 보여준다.
이 같은 의지는 범국민적인 지지로 이어졌다. 공단이 추진한 서명운동에는 애초 목표였던 100만 명을 훌쩍 넘어선 150만 명 이상이 참여했다. 이는 흡연 피해를 국민이 더는 감내할 수 없다는 사회적 공감대이자, 이번 담배소송이 결코 외로운 싸움이 아님을 증명하는 결과다.
담배의 유해성은 이미 과학적으로 확인됐다. 담배 연기에는 7000여 종의 화학물질이 포함돼 있으며, 그 가운데 70여 종은 발암물질로 흡연은 폐암과 후두암, 심근경색, 뇌졸중 등 치명적 질환의 주요 원인이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매년 약 7만 명이 흡연으로 조기 사망하고 있으며, 사회·경제적 비용은 연간 12조 원을 웃돈다. 결국 그 결과는 국민 모두의 부담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처럼 흡연의 사회적 비용이 확인되면서, 공단은 2014년 KT&G 등 3개 담배 제조업체를 상대로 약 533억 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하루 한 갑씩 30년 이상 흡연한 환자 3465명의 건강보험 진료비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이는 흡연으로 발생한 비용이 국민에게 전가되는 구조를 개선하려는 시도였다.
우리 지역도 예외가 아니다. 2023년 지역사회건강조사에서 부산 동래구 성인 흡연율은 36.1%로 전국 평균보다 높게 나타났다. 동래구보건소 금연클리닉에는 매년 수천 명이 상담을 신청하고 있으며, 국민건강보험공단의 금연치료 지원사업을 통해 니코틴 보조제와 상담 치료를 받는 주민도 꾸준히 늘고 있다. 지역 보건소와 공단이 협력해 건강 기반을 마련하고 있지만, 흡연과 간접흡연 문제는 여전히 지역사회가 함께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로 남아 있다.
이번 담배소송은 단순한 배상 요구가 아니라 국민 건강권을 지키고 건강보험 재정을 보호하기 위한 공익적 실천이다. 담배 제조업체의 책임을 법적으로 분명히 하는 것은 정의이자 상식이다. 소송이 성공적으로 결실을 맺는다면 사회적 책임은 한층 강화되고, 국가와 지역의 금연 정책에도 큰 활력을 불어넣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 소송은 공단만의 과제가 아니다. 이미 150만 명이 국민이 함께 뜻을 모았다. 공단이 앞장서고 국민이 함께할 때 건강권 회복의 길은 반드시 열릴 것이다. 담배 없는 건강한 사회, 그것은 우리 모두가 함께 만들어가야 할 미래다.
동래구의회 또한 구민과 함께 국민 건강권 회복을 위한 노력에 공감하며,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자 한다.
2025-09-11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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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직원 평가의 본질…납득 가능한 평가
무더웠던 여름이 지나가고 있다. 이제 곧 4분기, 2025년을 돌아보고, 조직과 개인에 대한 회고와 평가를 준비해야 하는 시기이다. 부산 지역경제를 이끄는 기업의 대표님들과 인사담당자들은 또 다시 '평가'라는 숙제 앞에서 깊은 고민에 빠질 것이다. 매년 반복되는 이 과정에서 우리는 왜 늘 구성원의 불만과 논란에 직면하게 될까?
객관성과 공정성을 최우선 가치로 내세우며 제도를 설계하지만, 정작 보상 시즌만 되면 불협화음이 끊이지 않는 이유, 오늘은 그 본질적인 문제와 해결 방안에 대해 함께 고민해 보고자 한다. 평가, 왜 이토록 어려운 것인가?
나는 25년 동안 인사 업무를 하며 삼성, SAP와 같은 세계적인 기업에서도 평가와 보상에 대한 불만과 어려움을 마주했다. 심지어 최고의 시스템을 갖췄다고 자부하는 이들 기업조차 평가의 난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놓치고 있었던 걸까?
평가와 보상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는 것은 크게 두 가지 문제에서 기인한다. 첫째는 제도 설계 단계에서의 문제이고, 둘째는 운영 단계에서의 문제이다. 설계는 대표와 인사의 책임 영역이며, 운영은 실제 평가를 수행하고 피드백을 제공하는 리더의 책임 영역이다.
우리는 평가 제도를 설계할 때 '모두가 만족할 만한 객관적이고 공정한 평가'라는 목표에 집착한다. 그러나 평가 제도는 사람이 만들고 사람이 운영하는 것이기에 완벽한 객관성이나 공정성을 달성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주관이 개입될 수밖에 없고, 각기 다른 이해관계가 충돌한다.
이제 우리는 평가의 객관성이나 공정성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수용성, 즉 납득 가능성에 집중해야 한다. 진정으로 좋은 평가는 피평가자가 그 결과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수용할 수 있는 평가이다. 보상 시즌마다 뒷말이 무성한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구성원이 자신의 성과에 대한 리더의 평가 결과를 납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피드백 수용성이 낮아지는 걸까? 이는 리더가 인지하는 구성원의 성과와 구성원 스스로 인지하는 성과 간의 불일치, 즉 서로 간의 인지 부조화에서 비롯된다. 이것이 바로 평가 운영단계의 문제이다. 리더와 구성원 간의 인지 부조화는 리더가 잘못 전달했거나, 구성원이 잘못 이해했거나, 또는 둘 다의 문제로 인해 발생한다. 경험상, 리더가 명확하게 전달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 이는 리더가 몰라서 또는 어려워서 제대로 피드백을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알면서도 인간적인 선의나 어려움 때문에 말을 아끼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두 경우의 결과값은 똑같다. 결국, 리더와 조직에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그럼 어떻게 하면 구성원 입장에서 납득 가능한 평가를 할 수 있을까?
첫째, 평가 주기를 짧게 가져가 즉각적이고 주기적인 피드백을 전달해야 한다. 최근 스타트업에서 분기 단위 목표 설정 및 리뷰가 확산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짧은 주기로 피드백을 주고받으면 과거의 불분명한 기억에 의존하는 대신, 최근의 성과를 명확하게 논의하고 개선할 수 있다. 이는 리더가 피드백을 주기가 훨씬 용이하며, 구성원 또한 자신의 성과를 명확히 인지하고 개선 방향을 설정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둘째, 리더는 싫은 소리라도 할 말은 정확하게 전달해야 한다. 선하고 약한 마음에 싫은 소리를 회피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리더에게나 구성원에게나 독이 된다. 구성원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정확하고 구체적인 피드백이 필수적이다. 또한, 리더와 구성원 간의 다른 이해를 막기 위해 피드백 내용을 기록하고 쌓아두는 습관이 중요해 진다. 이는 불필요한 오해를 줄이고, 나아가 평가의 신뢰도를 높이는 기반이 될 것이다.
셋째, 보상과 연계된 상대적 평가의 현실을 인정하고 구성원의 보상에 대한 기대치를 관리해야 한다. 가장 어려운 부분이지만, 반드시 해내야 할 과제이다. 모든 구성원에게 동일한 보상을 해줄 수 없는 현실에서, 리더는 평가 과정에서부터 구성원의 보상에 대한 기대치를 명확하게 관리해야 한다. 잘한 부분은 확실히 인정하고 격려하되, 아쉬운 부분에 대해서는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개선을 위한 계획을 함께 수립해야 한다. 이를 통해 구성원은 자신의 위치와 보상의 수준을 보다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평가의 본질은 객관적인 점수 부여나 등급 매기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구성원의 성장을 돕고, 조직 전체의 성과를 견인하는 데 있다. 납득 가능한 평가를 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역할은 인사팀보다는 리더에게 있다. 그래서, 인사팀은 리더가 이 중요한 역할을 잘 해낼 수 있도록 지원하고 코칭하는 역할로 변해야 한다.
4분기 평가와 보상의 준비 시즌을 맞아, 부산의 모든 기업들이 형식적인 평가를 넘어 구성원들이 진심으로 납득할 수 있는 평가 문화를 정착시켜, 지속 가능한 성장의 발판을 마련하기를 바란다.
2025-09-11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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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샷초동맹’이 던지는 교훈…지방대학 연합과 혁신
1866년. 일본의 근대화를 연 주춧돌 하나가 놓였다. 그 이름은 ‘샷초동맹(薩長同盟)’. 당시 일본의 유력 번(藩)이었던 사쓰마(薩摩)와 조슈(長州)가 손을 맞잡은 이 동맹은 도쿠가와 막부라는 구체제를 무너뜨리고,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의 기폭제가 됐다.
사적 이해와 정치 노선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사쓰마와 조슈는 일본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공동의 위기의식과 미래에 대한 비전을 공유했다. 이들의 연대는 단순한 정치적 동맹이 아닌 과감한 자기혁신과 체제 해체를 동반한 체질 자체를 바꾸는 결단이었다.
158년이 흐른 지금. 대한민국의 지방대학은 똑같은 질문 앞에 서 있다. 과연 이대로 유지될 수 있는가? 아니면 해체 수준의 수술을 통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것인가? 최근 정부는 “지방대 위기는 곧 국가의 위기”라며 구조적 개혁과 집중 투자를 예고했다.
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무기력하다. 학령인구는 계속 줄고 있고 청년들은 지역을 떠나 서울로, 수도권으로 몰리고 있다. 서울 외 지역대학 상당수는 존폐 기로에 섰고 몇몇은 이미 문을 닫았다. 이제는 본질을 묻고 답할 시간이다. 샷초동맹처럼 우리는 우리 시대의 ‘유신’을 준비하고 있는가?
샷초동맹의 핵심은 ‘위기 앞에 비상한 연대를 선택했다’는 데 있다. 사쓰마와 조슈는 원래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념적 차이도 컸다. 그러나 ‘도쿠가와 체제’라는 공통의 장벽을 넘기 위해 연합을 택했다. 오늘날 우리 지방대학의 모습은 이와 정반대다. 지방대 간의 연합이나 협업은커녕 오히려 정원 경쟁, 지원금 경쟁, 지역 인재 쟁탈전으로 서로를 깎아내리고 있다.
지방대학을 살릴 외부적 전략은 분명 존재한다. 지역산업과의 연계 강화, 공공기관의 지역 이전 확대, 지역대학 출신 의무 채용제 도입, 국가 차원의 예산 집중 투자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샷초동맹이 단순히 정치적 타협이 아니었듯, 외부의 물적 지원만으로는 위기를 넘기기 어렵다. 중요한 것은 내부의 자발적 변화, 혁신 의지다.
조슈는 유신 이전 이미 ‘하구 번정 개혁’을 통해 낡은 사무라이 체제를 혁파하고 신분제를 완화하며 서양의 군사·교육시스템을 과감히 도입했다. 사쓰마 또한 서양과 교역을 확대하고 군제 개편을 단행하며 국제 감각을 갖춘 인재를 길러냈다. 그 결과 당시 ‘지역 소국’에 불과하던 이들은 일본 전체를 바꿀 중심축이 됐다.
우리 지역대학은 지금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가? 여전히 내부 혁신은 더디고 변화를 주도할 리더십도 부족하다. 지역산업과 연계한 실질적 교육은 드물고 지역 주민과 소통도 거의 없다. 학생들은 지방대에 들어왔다가 다시 수도권 대학으로 편입할 방법만 찾는다. 이런 구조 속에선 아무리 예산을 퍼부어도 근본이 바뀌지 않는다.
해법은 혁신이다. 교원시스템을 새로 짜고 수업 방식을 전면 개편하며 지역과 함께하는 ‘사회적 대학’으로 거듭나야 한다. 동시에 각 대학은 서로 경쟁자가 아닌 협력자로 인식하고 샷초동맹식 연대를 만들어야 한다. 지역 내 대학이 뭉쳐 공동학위제를 도입하고 강의와 인력을 교류하며, 공동 연구소를 설립하는 등 실질적인 협업 모델이 필요하다.
정부의 역할은 분명하다. 단순한 예산 지원을 넘어 ‘선택과 집중’의 전략을 실행해야 한다. 변화할 의지와 능력을 갖춘 대학에 대해선 서울대 수준의 전폭적 투자를 하고 변화 없이 낡은 구조만 유지하려는 대학은 과감한 구조조정과 통합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 국민 세금이 투입되는 만큼, 투자 효과와 지속 가능성은 철저히 검증돼야 한다.
서울대 10개 만들기는 그 자체로 거대한 국가 전략이다. 단지 명문대 숫자를 늘리는 게 아니라 인재가 수도권에서 지방으로 분산되고 지역이 자립할 수 있도록 만드는 일이다. 그 출발은 오늘의 지방대 위기를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과감하게 수술대에 올리는 것이다. 샷초동맹은 불가능해 보였던 연합을 통해 일본의 근대화를 만들었다.
지금 우리에게도 ‘그 결단’이 필요하다. 지방대학·정부·지역사회 등의 새로운 동맹. 실용을 위한 타협이 아닌 혁신을 위한 연합이 요구된다. 모든 구조적 변화는 한순간에 온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연합과 혁신’으로 시작됐다.
2025-09-10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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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해양수도 부산 25년, 미래 25년은 ‘해양AI 부산’
올해는 ‘해양수도 부산’ 선언 25주년을 맞이하는 뜻깊은 해이다. 지난 25년간 부산시는 선언에 그치지 않고, 조선·해운·항만·물류·해양 기자재 등 해양산업 전반을 유기적으로 집적시키며, 대한민국 최고의 해양산업 중심지이자 동북아 물류의 핵심 거점으로 입지를 굳건히 다져왔다.
2024년 기준 부산항은 총 2440만TEU의 물동량을 처리하며 세계 6~7위 규모를 기록했고, 환적 물동량은 1350만TEU로 세계 2위 수준에 이른다. 이는 부산이 단순한 국내 항만 도시를 넘어, 글로벌 해양 물류 네트워크의 중심 도시로 자리매김했음을 방증한다.
또한 부산은 500여 개의 중소 선박 건조, 수리기업과 조선해양 기자재 기업이 밀집한 국내 최대 조선해양산업 집적지이다. 울산과 거제가 대형 선박 건조 중심지라면, 부산은 중소형 선박 건조와 기자재 산업, 항만 운영, 물류 서비스 등 해양 밸류 체인의 핵심 역할을 담당한다. 연구개발, 생산, 물류, 교역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부산의 산업 생태계는 ‘해양산업 복합 허브’로서의 잠재력을 입증하고 있다. 또 해수부와 한국해양과학기술원 등 부산 이전 공공기관들을 중심으로 산학연 해양클러스터 생태계를 조성해 해양 중심도시로서의 발전 가능성도 높아졌다.
부산은 이와함께 물류와 금융, 첨단산업, 관광을 중심으로 ‘글로벌 허브 도시’로의 도약을 주요 정책으로 추진하고 있다. 북항 재개발을 통해 물류와 관광의 중심지로 자리잡고, 금융특구 지정으로 글로벌 금융기관을 유치해 경제적 기반을 강화하고 있다.
이제 해양산업은 새로운 전환점에 서 있다. AI를 비롯한 디지털 기술의 발전이 해양산업 전반의 구조를 빠르게 변화시키고 있다. 스마트 조선, 자율운항 선박, 무인 항만, 빅데이터 기반 물류 최적화, AI 기반 해양 방산 기술 등은 더 이상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다. AI 기술을 선도적으로 적용하지 못하면 글로벌 경쟁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정부는 ‘AI 3대 강국’을 국가 전략으로 선언하고, 산업과 공공 전반에 걸친 AI 전환을 본격화하고 있다. 부산은 해양과 AI, 두 분야에서 모두 경쟁력을 갖춘 도시로, ‘해양AI 도시’로의 전환은 지역 전략이자 국가 전략의 교차점에 놓여있다. 더불어, 해양수산부의 부산 이전은 단순한 행정기관 이전이 아니라, 정책·산업·기술 삼중 거점이 부산으로 집결함으로써, 지역의 전략적 위상을 실질적으로 끌어올리는 분기점이 될 것이다.
부산이 나아갈 방향은 분명하다. 해양산업과 AI 기술이 융합된 ‘해양AI’ 선도도시로의 전환이다. 이는 단순한 기술 적용이나 산업 고도화에 그치지 않고 부산 경제의 구조를 혁신하고, 미래 글로벌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대전략이다. 특히 북극항로 확대 등 기후 및 지정학적 요인으로 해상 물류 구조가 재편되는 가운데, 부산은 AI와 해양산업 역량을 결합해 새로운 국제 물류 중심지로 부상할 수 있다.
이제는 ‘대한민국 제2의 도시 부산’이라는 서열적 위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세계 주요 도시는 도시의 순위보다 고유한 기능과 미래 비전으로 자신을 정의한다. 상하이는 ‘아시아의 글로벌 금융 허브’, 오사카는 ‘물의 수도’(Aqua Metropolis), 함부르크는 ‘세계로 가는 관문’(Gateway to the World)이라 불린다. 도시의 정체성은 위계가 아닌 기능과 방향성에서 비롯된다.
해양수도 선언 25주년을 맞은 지금, 부산은 더 이상 과거의 성과에 안주할 수 없다. 전통 산업과 혁신 기술이 만나는 이 전환의 시점에서, ‘해양AI 도시’로의 도약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부산정보산업진흥원은 AI·IT 산업 육성 전문기관으로서, 해양산업과 AI 기술을 연결하는 실행 플랫폼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나갈 것이다. 부산의 이 도전이, 곧 대한민국 해양산업의 미래가 될 것이다.
2025-09-07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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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지역 혁신 중소기업도 ESG 경영에 관심을
어떤 결말에는 반드시 그 원인이 있다. 1929년 미국 주식시장 붕괴로 시작된 대공황은 극심한 부의 불평등과 시장의 비효율성이 초래한 결과였다. 당시 미국의 상위 1%가 국부의 60%를 차지했으며, 기업들은 단기적 경기 호황에 집중해 무분별한 과잉투자를 감행했다. 그러나 소비는 생산을 따라가지 못했고, 결국 세계 경제는 붕괴했다. 이는 기업이 경제적 역할을 넘어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중요한 교훈을 남겼다.
오늘날 기업은 단순한 이윤 창출을 넘어, 지속가능한 경제와 사회 발전에 기여할 책임이 있다. 사회적 책임을 외면하고 단기 수익에만 몰두할 경우, 경제적 위기와 사회적 갈등을 불러올 수 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ESG(환경, 사회, 지배구조) 경영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닌 필수 요소로 자리 잡았다. 이는 대기업뿐만 아니라 지역 혁신 중소기업에도 중요한 과제가 되고 있다.
국제표준화기구(ISO)는 ISO 26000을 통해 설명책임, 투명성, 윤리적 행동, 이해관계자 존중, 법치 존중, 국제 행동규범 존중, 인권 존중의 7대 원칙을 제시했다. 이는 ESG 경영의 근간이 되는 요소들로, 지속가능한 경영을 위한 필수 가이드라인이다.
최근 글로벌 기업들은 협력업체에도 ESG 기준을 적용하고 있으며, 유럽과 미국 수출기업은 ESG 성과를 중요한 평가 요소로 삼고 있다. 투자시장에서도 변화가 뚜렷하다. 대표적으로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BlackRock)의 CEO 래리 핑크는 2020년 연례 서한에서 “ESG 성과가 높은 기업이 장기적으로 더 높은 재무 성과를 거뒀다”고 강조하며, ESG 기반 투자 전략을 발표했다.
기후변화 대응 역시 ESG 경영의 핵심 요소 중 하나다. 1992년 리우 유엔기후변화협약부터 2015년 파리협정에 이르기까지, 세계 각국은 온실가스 감축과 지속가능한 경제 전환을 위해 협력해왔다. 한국 또한 기후변화의 영향을 직접 체감하고 있으며, 중소기업의 대응 역량이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원부자재 사용 절감, 에너지 효율 향상, 폐기물 및 오염물질 배출 감소 등 환경 이슈를 기업 경영 전략에 적극 반영해야 한다.
ESG 경영은 단순한 환경 보호 활동을 넘어, 기업의 지속가능성과 경쟁력을 높이는 전략적 선택이다. 기업 이사회는 ESG 안건을 정기적으로 상정하고, 심의 및 의결 과정을 통해 ESG 전략을 체계화해야 한다. 또한, 이해관계자의 의견을 적극 반영하고 협력업체와의 상생을 강화함으로써 기업의 장기적 가치 창출에 기여할 수 있다.
ESG는 중소기업에게도 부담이 아니라 기회가 될 수 있다. 인텔과 IBM은 절전 기술을 개발해 시장 경쟁력을 확보했고, 월마트는 포장 축소 및 배송 경로 최적화로 비용 절감과 환경 보호를 동시에 달성했다. 네슬레는 커피 생산지에 농업, 금융, 물류 기업을 유치해 지역사회와 상생하는 모델을 구축했다. 국내에서도 중소기업들의 ESG 실천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 예를 들어, 한 중소 가구업체는 FSC(국제산림관리협의회) 인증 친환경 원목을 사용하고, 폐목재 재활용 시스템을 도입해 친환경 경영을 실천하며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추게 되었다.
지역 혁신 중소기업 역시 이 흐름을 외면할 수 없다. ESG 경영을 도입함으로써 지속가능한 비즈니스 모델을 구축하고, 투자 유치와 글로벌 시장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 친환경 소비자의 증가, ESG 평가의 기업 신용 및 정부 지원 연계 등 환경 변화는 ESG 경영을 선택이 아닌 필수로 만들고 있다. 이해관계자의 신뢰를 얻고 장기적 이익을 극대화하는 길, 그것이 바로 ESG 경영이다.
2025-09-03 [1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