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달식의 일필일침] 이것이야말로 부산 정신을 세우는 일이다

정달식 논설위원 dosol@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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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

세계 도시, 위대한 인물 곳곳에 새겨
부산은 이런 기념에 다소 인색한 편

시민의 날 뿌리 ‘부산대첩’ 조명해야
가덕신공항 등 명칭 깊이 고민할 때

‘이순신 기억’ 시민 긍지 심어주는 일
해양 비전 현실 속 미래 지표 역할

세계 주요 도시에는 그 나라와 도시의 자부심이 깃든 이름들이 곳곳에 새겨져 있다. 공항은 물론 미술관과 박물관, 문학관, 도서관, 심지어 도시의 작은 골목 하나까지 위대한 인물들의 숨결을 담아낸다. 이탈리아 로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예술혼을, 프랑스 파리는 샤를 드골의 굳건함을 공항 이름에 새겼다. 미국 뉴욕의 존 F. 케네디, 인도 델리의 인디라 간디 역시 그러하다. 이처럼 인물을 기리는 명칭은 그 도시의 정신과 정체성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강력한 상징이 된다. 하지만 여기에 비하면 부산은 인물에게 영광스러운 이름을 쉬 허락하지 않는 편이다. 향파문학거리, 우장춘 거리, 박태준 기념관, 요산김정한 문학관 정도만이 우리 기억 속에 겨우 자리한다. 그렇다고 부산이 내세울 만한 인물을 품지 못한 것도 아니다. ‘헌신의 아이콘’ 이태석 신부, 조선의 위대한 과학자 장영실, 임진왜란 당시 불굴의 저항을 이끈 송상현, 정발, 윤흥신 등은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부산의 위대한 정신을 대표하는 인물들이다.


매년 10월 5일은 부산 시민에게 의미 있는 날이다. ‘부산 시민의 날’인 이날은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부산포 해전에서 대승을 거둔 9월 1일을 양력으로 환산해 1980년 제정됐다. 부산포 해전은 약 70척의 조선 연합(경상·전라) 수군이 500여 척에 달하는 왜선을 상대로 싸워, 그중 100여 척을 격침한 전투였다. 그게 부산 앞바다에서 펼쳐졌다. 이순신 장군은 선조에게 올린 장계에서 “열 번의 승첩 중 이번 부산 전투보다 더 큰 것은 없습니다”라고 고했다. 그야말로 대첩이었다. 1956년 부산 용두산공원에 세워진 이순신 동상 비문에는 “왜적과 싸운 7년 전쟁 중 부산 앞바다에서 거둔 승첩이 가장 결정적이었으므로 이를 자랑하고자 함이며…”라고 새겨 부산포 해전의 무게를 오롯이 전한다. 김종대 부산여해재단 명예이사장은 “옥포승첩이 승리의 씨앗이었다면, 당포승첩은 그 씨앗이 무성한 잎과 가지로 뻗어난 것이고, 한산승첩이 활짝 피어난 꽃이었다면, 부산승첩은 그 열매를 맺은 것이다”라며 부산포 해전의 의미를 말해 준다.

45년 전 부산시는 잊힌 부산대첩일을 시민의 날로 정해 역사의 한 조각을 되살렸다. 이후 매년 이날 기념식과 다양한 행사가 열렸지만 정작 시민의 날의 근원이 된 이순신 장군과 부산대첩은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 부산 시민의 날이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그 뿌리인 부산대첩과 이순신 장군을 다시금 불러내야 한다. 2023년 ‘이순신 거리’ 조성과 같은 움직임이 그 첫걸음이 되었듯 말이다. 용역 중인 부산대첩기념관 건립 역시 마찬가지다.

북항 재개발지에 조성된 공원 명칭이 단지 ‘지역명이 익숙하다’는 이유로 ‘북항친수공원’이 된 것은 아쉬움이 크다. 그나마 최근 들어 공원 명칭을 그대로 두자는 의견과 북항의 역사성을 살려 ‘부산대첩기념공원’으로 바꾸자는 목소리가 맞서고 있다는 점이 반가울 따름이다. 북항의 깊은 역사성을 되살려 ‘부산대첩기념공원’으로 이름을 바로 세웠으면 한다.

영국의 도시 전문가 찰스 랜드리는 “도시는 그 자체로 울림과 흡인력을 지녀야 한다. 그리고 그 울림은 오롯이 스토리를 품을 때 비로소 잉태된다”고 했다. 통상 이야기의 중심에는 인물이 있기 마련이니, 부산대첩만큼 강렬하고 드라마틱한 서사가 또 어디 있겠는가. 장소성과 역사성, 스토리까지 갖춘 것이 바로 부산대첩이다. 무미건조하게 친수 기능만을 강조한 이름 대신, 이 찬란한 역사를 품은 ‘부산대첩기념공원’이야말로 시민의 가슴 속 자부심을 드높일 강력한 울림이 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가덕신공항 명칭 역시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에게 가덕도는 중요한 전략적 기항지였으니 장군의 탁월한 해양 전략과 그 숨결이 깃든 곳이라 하겠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깊이 새긴다면 단순히 지명을 딴 가덕신공항보다는 ‘이순신 공항’으로 명명하는 것이 훨씬 의미가 있을 것이다.

최근 해양수산부의 부산 이전과 북극항로 개척 구상으로 부산의 해양 비전은 점점 현실이 되어간다. 이 격변의 흐름은 부산을 세계적인 해양 거점으로 도약시킬 결정적인 기회다. 그 항해의 뱃머리에서 이순신 장군과 부산대첩의 굳건한 정신은 부산 미래의 강력한 지표도 되어 줄 것이다.

도시는 기억을 품을 때 비로소 살아 숨 쉰다. 하지만 오늘의 부산은 그 기억 앞에서 여전히 머뭇거린다. 부산대첩기념공원과 이순신 국제공항은 단순한 명칭 논쟁이 아니다. 이는 부산의 정체성을 새기고 시민의 긍지를 가슴에 심어주는 일이다. 마땅히 기억할 것을 잃어버린 도시는 병든 도시와 다름없다. 이순신 승첩의 강렬한 흔적과 불멸의 기억을 시대 속으로 소환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정 부산 정신을 바로 세우는 일이다.


정달식 논설위원 dosol@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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