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년 전통' 부산 노포가
매년 간판 바꾸는 이유는?
지난 2일 오전 서면 ‘급행장’ 분위기는 여느 때와는 달라 보였다. 부산에서 가장 오래된 한우 전문점 급행장의 연례 신년 행사인 이른바 ‘간판 교체식’이 열리는 날이었다. 올해로 70세가 된 손재권 대표가 이날 직접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급행장 간판에 ‘76년 전통 한우전문점’이라는 문구를 새로 붙었다. 요즘 전통을 내세우는 가게가 한둘이 아니지만, 급행장처럼 매년 간판 교체식까지 하는 곳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급행장도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2대째인 손 대표가 가게를 물려받고 몇 년간은 ‘40년 전통’이 간판에 그대로 붙어 있었다. 어느 날 아버지 친구분이 찾아와 “올해가 47년째인데 왜 40년 전통이고? 다른 집은 없는 전통도 만드는 데, 니는 있는 전통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느냐”라고 호통을 쳤다. 대오각성하고 그때부터 매년 새해에 간판을 바꾸기 시작했다. 47, 48, 49…76까지 이어진 것이다.이제 손 대표의 남은 목표는 급행장 간판에 ‘100년 전통’이 새겨지는 모습을 보는 것이다. 그는 “매년 간판을 교체할 때마다 손님에게 더 잘해서 무탈하게 한 해를 보내자는 각오를 한다. 숫자가 하나 더해지면 각오가 새로워지면서 의미도 더 생기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급행장 식구들은 새해 벽두에 가게 앞에서 이 같은 각오를 담은 화이팅을 함께 외쳤다. ‘76’이라는 숫자를 달기까지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한국전쟁이 나기 직전이었다. 손재권 대표의 부친 손남출(1923~2009) 씨는 지금 급행장 자리 바로 앞 포장마차에서 1950년부터 고기와 냉면 등을 팔기 시작했다. 손 씨는 그전에는 대신동 구덕운동장 담을 넘어가 아이스케키를 파는 등 일찍부터 장사에 눈을 떴다. 서면이 한국전쟁 피란민들로 넘쳐나던 시절이었다. 부전천이 복개되기 전이라 급행장 앞 하천에는 장마철이면 통나무가 떠내려가기도 했다. 하천가에는 피난민촌이 있었다.전쟁 통에 꽤 돈을 번 손 씨는 1952년 지금 자리에 있던 2층 기와집을 사서 본격적으로 음식 장사에 뛰어든다. 급행열차와 완행열차밖에 없을 때였다. 손 씨가 ‘불고기를 빨리빨리 조리해서 낸다’는 뜻으로 직접 지은 이름이 급행장이다. 밥도 빨리 먹고, 빨리 돈 벌러 가야 했던 시절이었다. 1967년 건물을 증개축한 뒤 직원 35명, 지배인 3명을 둘 정도로 장사는 잘 되었다. 손 대표 가족과 함께 급행장에서 숙식하는 직원이 10여 명이나 되었다. 말 그대로 ‘식구’였다.급행장의 호시절은 부산의 신발산업 호황과도 맞물려 있다. 지배인 한 명은 외상 수금을 전담했다. 신발 공장 월급날이 되면 간부들이 달아놓고 먹은 외상값 받아오는 게 일이었다. 하지만 그 시절 급행장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자료가 사진 한 장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유일하게 찾은 흔적이 예전 백색 전화(3-2100)를 계승한 급행장 전화번호(051-809-2100)다. 1960~70년대 전화기 보급률은 매우 낮았다. 당시 백색전화 한 대를 놓는 것이 집 한 채 값과 맞먹을 정도로 귀했다. 3, 2, 1, 0, 0. 비싸게 산 급행장 전화번호는 그냥 순서대로 다이얼을 돌리면 되었다.막내였던 손재권 대표는 1997년 아버지로부터 급행장을 물려받는다. 건물과 땅을 절대로 팔지 말고 유지한다는 조건이었다. 하필이면 3남 4녀 가운데 막내를 선택했을까. 손 대표는 “살아보니까 내가 아버지와 생각이 똑같더라. 아버지는 내가 독해서 뭐라도 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라고 말했다. 이들 부자는 통풍마저도 부전자전으로 똑같이 심하게 앓았다. 손 대표는 “부모 잘 만난 덕에 엄마 뱃속에서부터 소고기를 먹었고, 이 세상 누구보다 소고기를 많이 먹었다. 지금도 혼자서 500g을 먹는다”라고 말한다.그 덕분에 소고기 맛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라고 전국적으로 정평이 났다. 이름난 한우집에 들렀다가 먹은 고기가 한우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한 적도 여러 번이다. 그래서 그런지 고집도 아주 쇠고집이다. ‘음식 파는 사람은 음식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는 ‘고객’이라는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손님이라고 하면 되지 않나? 고객이라는 생소한 단어는 한 번도 안 써봤다”라고 말한다.언뜻 불친절해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만의 원칙을 고수하는 것이다. 수십 년 단골에게 나가는 고기도 예외 없이 똑같다. 급행장은 일찍부터 일본에 소문이 나서 일본에서 개별 관광객이 많이 오지만 단체 관광객은 거의 오지 않는다. 외국인 손님에게 바가지를 씌울 수 없다는 생각으로 가이드 리베이트가 포함된 가격에 일절 타협하지 않기 때문이다.손님을 생각하는 마음은 점심에 많이 찾는 갈비탕을 보면 알 수 있다. 요즘 보기 드문 한우 갈비탕이 나온다. 구이로 인기 높은 한우 갈비를 넉넉히 넣으려면 갈비탕 한 그릇 가격이 3만 원을 훌쩍 넘겨야 한다. 지팡이 짚고 힘들게 찾아오는 오랜 단골들을 위해 그 반도 안 되는 가격을 받고 있다. 알고 먹어서 그런지 갈비탕에 든 고기가 정말로 부드럽다.급행장은 일 년 365일 하루도 쉬는 날이 없다. 쉬지 않고 돌아가려면 더 많은 직원이 필요하다. 손 대표는 어느 순간 이상한(?) 생각에 꽂혔다고 했다. "우리 아버지는 돈 한 푼 없이 시작해서 배고픈 사람에게 밥 팔아 돈을 벌었다. 그런데 휴일이라고 배가 안 고플까? 휴일에도 가게 문을 여는 게 맞겠다 싶었다”라고 말했다. 심지어 영업시간도 얼마 전부터 오전 11시에서 10시 반으로 당겼다. 배고픈 사람, 밖에 세워 놓지 말자는 뜻이다. 손 대표는 “내가 쉽게 만들 수 있는 걸 어렵게 만들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아무튼 요즘 들어 멋쟁이였던 아버지가 발등에 어린 나를 태우고 춤을 추던 모습이 떠오른다”라고 말했다.신임 대표 손희철(38) 씨는 ‘급행장’ 3대를 이끌어갈 주역이다. 손 씨는 자동차 부품회사에서 5년간 해외 영업을 담당했다. 그 뒤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라고 생각해 급행장으로 돌아왔다. 손 씨도 이날 “간판이 바뀔 때마다 한 해가 무사히 지나갔다 생각하면서 감사한다”라고 아버지와 비슷한 말을 했다. 하지만 가게 영업에 관한 생각은 달랐다. 손 씨는 “지금 급행장은 정체되어 있는 느낌이다. 가게 인테리어나 반찬도 젊은 사람들의 취향과는 좀 다르다. 지금까지는 아버지의 뚝심으로 해왔지만 이제부터는 트렌드에도 맞춰서 가려고 한다”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급행장에 나오는 시간을 줄이고, 아들은 늘리고 있다. 백년가게를 향한 급행장의 변화가 이제 시작된 것이다.예전 사진이나 과거에 쓰던 불판 같은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는 점은 두고두고 아쉽다. 손재권 대표는 “급행장에서 찍은 옛날 사진을 가지고 있는 분이 있으면 사례하겠다고 광고를 낼 생각이다. 머릿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과거 급행장의 모습은 그림으로 한번 그려 보려고 한다”라고 말했다.또 손희철 신임대표는 “지금까지 급행장에서 있었던 흥미로운 일들을 모아서 ‘급행장의 100가지 이야기’로 정리하고, 웹툰 형식으로도 만들 생각을 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전통을 지키면서도 젊은 층에 다가가려는 참신한 시도로 보인다. 돌이켜보면 30년 가까이 이어진 간판 교체식 사진과 영상만 있었어도 훌륭한 사료가 되었을 것 같다. 구스타프 말러는 “전통은 불을 보존하는 것이지, 재를 숭배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시간이 흐른다고 전통이 아니라 공동체의 수용과 가치 부여가 있어야 전통이 된다. 글·사진=박종호 기자
다른 병 없는데
사레가 자주 들린다면?
고령 인구가 증가하면서 삼킴장애 환자가 늘고 있다. 단순히 나이가 들면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여겨 방치하다가는 흡인성 폐렴, 영양실조와 같은 치명적인 합병증으로 이어질 수 있어 조기 진단이 특히 중요하다. 인제대부산백병원 남희성 재활의학과 교수는 “기저질환 없이 삼킴장애가 생기게 되면 진단이 늦어지는 경우가 많다”고 밝혔다. ■신경학적 질환 원인일 수삼킴장애는 음식물이 안전하게 입에서 인두를 넘어 식도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생기는 모든 문제를 포함한다. 음식물이 식도가 아닌 기도로 넘어가는 상태가 대표적이다.연하는 음식을 삼키는 과정을 일컫는 의학적 용어로, 크게 구강기와 인두기, 식도기로 나뉜다. 구강기에서는 주로 침분비 감소, 혀와 입술을 포함한 구강 근육 약화, 저작기능 감소, 인지 저하로 인해 삼킬 수 있는 덩어리를 만들지 못하는 상태 등이 삼킴장애를 일으킬 수 있다. 인두기에는 여러 가지 신경계 질환에 의해서 연하반사가 부적절하게 이루어지거나 인두 감각이나 근육 운동의 조화가 떨어지는 상태가 원인이 된다. 식도기는 상부식도괄약근이 열리지 않거나 음식물이 식도에 고여서 넘어가지 않으면서 삼킴장애가 나타날 수 있다.삼킴장애는 신경학절 질환과 연관된 경우가 많은데 파킨슨병, 뇌경색과 뇌출혈을 포함하는 뇌졸중 등에서 흔히 발생한다. 외상성 뇌손상, 치매, 경추 수술과 관련된 인두 근육과 되돌이 후두신경 손상, 일명 루게릭이라고 불리는 근위축성 측색경화증, 다발성 경화증에서도 삼킴장애가 생길 수 있다.신경학적 질환보다는 빈도가 떨어지지만 두경부 암, 인두와 식도의 게실, 식도 이완 불능증 등 비신경학적 질환도 원인이 될 수 있다. 남 교수는 “고령 인구가 늘어나면서 근감소증으로 인한 연하장애가 증가하고 있다”고 덧붙였다.주된 증상으로는 식사 중 특히 물이나 국물 같은 액체를 마실 때 생기는 사레·기침, 식사 후 목소리가 걸걸해지는 목소리 변화, 목에 음식물이 남아있는 느낌이 꼽힌다. 치매 같은 구강기 문제에서는 음식물을 삼키지 않아 식사 시간이 너무 길어지는 증상이 생길 수 있다. 사레가 들리는 증상은 정상인에서도 충분히 생길 수 있는 만큼 바로 기침을 해서 사레를 배출할 수 있고, 가끔 생긴다면 굳이 진료를 받을 필요는 없다. 남 교수는 “사레가 들리는 빈도가 점점 잦아지고, 매일 사레가 들리는 정도라면 진료를 통해서 그 원인을 파악하고 그에 맞는 치료를 받는 것이 적절하다”고 조언했다.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진단 검사는 엑스레이 장비를 이용한 비디오 투시 연하검사다. 조영제가 첨가된 묽은 액체, 점도가 있는 퓨레, 고형식을 섭취하면서 음식물이 구강기, 인두기, 식도기를 거쳐 적절하게 삼킴이 일어나는지를 실시간으로 관찰할 수 있는 검사다. 일부 의료기관에서는 내시경을 이용한 내시경 연하검사를 시행하기도 한다. ■원인 질환에 따라 치료·관리 달라져원인 질환이 무엇이냐에 따라 치료법도 달라진다. 재활치료의 경우 구강 감각 자극, 구강 근육 기능 훈련, 삼킴 촉진 기법, 보상적 삼킴 기법, 전기자극치료 등 다양한 치료법이 있다.선행 질환이 없는 노인성 삼킴장애의 경우엔 근감소증이 가장 크게 작용하기 때문에 고령에서 할 수 있는 팔다리, 체간 근력운동을 챙겨주고 식사 시 단백질 섭취가 부족해지지 않게 관리해주는 것이 도움이 된다.인두가 아닌 다른 부위에 근력운동을 한다고 해서 인두 근육이 증가하는 것은 아니지만 근감소증으로 전신 근육이 함께 빠지는 만큼 근력운동이 인두 근육 약화를 막아줄 수는 있다.한번에 삼키는 양을 줄이기, 천천히 먹기, 식사 중 대화 줄이기, 고개를 앞으로 숙여서 턱을 목에 붙이기 등 식사 습관 개선도 필요하다. 특히 숨을 들이마시는 중에 음식물을 삼키면 흡인 위험이 증가할 수 있어 들숨 중에는 음식을 삼키지 않도록 한다. 남 교수는 “근거가 충분히 확인된 연구가 없어 식사 시 충분한 단백질 섭취를 챙겨주는 것 이외에 도움이 되는 영양제는 없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혀·입술·인두 근력 운동으로 혀를 입천장에 강하게 밀기, 혀 좌우·전후 이동, 입술 오므렸다 벌리기, ‘이-우’ 발음 반복하기, 호흡·발성 운동으로 큰 소리로 읽기, 길게 소리 내기, 복식호흡 훈련도 도움이 된다.뇌졸중 같은 삼킴장애 발생의 위험이 있는 기저질환을 가지고 있다면 일반 노인보다 삼킴장애에 더 취약한 상태이기 때문에 삼킴장애를 의심할 수 있는 증상이 생기면 빠르게 알아채고 의료진에게 알리는 것이 도움이 된다. 남 교수는 “삼킴장애 대부분은 선행 질환이 존재하는 만큼 삼킴장애 발생을 예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면서도 “가족들의 세심한 관심이 필요하며, 진료와 검사를 통해서 조기 진단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당부했다.
나고야 장어 덮밥,
홋카이도산 밀가루…
맛은 국경을 넘나든다
올해가 열흘도 남지 않았다. 한 해를 잘 마무리하고 알찬 새해 계획을 설계할 시기이다. 돌이켜 보면 2025년은 정치적 변수에도 불구하고 한일 관계가 잘 자리잡는 모습을 보인 한 해였다. 지난 10월까지 일본을 찾은 한국인은 766만 800명으로 역대 최대로 많았다. 엔화 약세에다 지리적 근접성으로 일본이 우리에게 최고 인기 여행지로 부상한 것이다. 1965년에 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되어 한일 간 국교가 정상화된 지 60주년이 되는 해다운 결과였다. 특히 지리적으로 일본과 가까운 부산은 오래전부터 일본 음식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한일 관계가 더욱 성숙해지기를 바라는 의미로, 일본과의 교류를 통해 부산에서 자신만의 맛을 내고 있는 두 곳을 소개한다. ‘이웃’이란 무엇인지 생각해 보면 좋겠다.■고향으로 돌아온 장어의 꿈 ‘우나쥬’나고야서 자수성가해 30년 만에 부산 돌아와30년 경력 일본인 셰프 모셔 장어덮밥 전문점민물장어는 바다에서 태어나 민물에서 성장한 뒤 다시 깊은 바다로 회유한다. 민물장어에게는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할 일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돈을 벌기 위해 맨몸으로 부산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지 벌써 30년 세월이 되었다고 했다. 일본 나고야에서 자수성가한 외식 사업가가 말년에 부산으로 돌아와 새로 음식점을 열고 고생을 사서 하는 모습이 처음에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장어덮밥 전문점 ‘우나쥬’ 김동섭 대표의 인생이 묘하게도 민물장어를 닮았다.민물장어는 일본어로 우나기다. 가게 이름 ‘우나쥬’는 우나기에다 목숨 수(壽)를 합쳐서 만들었다. 보양식으로 잘 알려진 장어를 드시고 건강하게 장수하라는 뜻을 담았다. 김 대표는 봉사를 통해 일본 땅에 단단하게 뿌리내린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2011년 동일본대지진이 일어났을 때는 수천 명분의 식사를 탑차에 싣고 달려갔다. 지진 발생 한 달 만에 민간인으로서는 가장 먼저였다. 큰 지진이 날 때마다 매번 그랬다. 금요일에는 십 년 넘게 보육원을 찾아가 김밥을 같이 말고, 한국 이야기도 하면서 봉사했다. 나고야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 그에게 먼저 연락이 올 정도로 그렇게 신뢰를 얻었다. 별다른 의도는 없었다. 일본에서 아이 낳고 키우며 사람들한테 도움받았으니 당연히 하는 일이었다.수구초심이란 말이 그래서 생겼을까. 나이가 드니 더 늦기 전에 한국에서 제대로 된 일본 음식을 선보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그래서 선택한 종목이 나고야의 명물, 장어덮밥인 히츠마부시다. 일본에서는 장어를 쪄서 구우면 도쿄식, 바로 구우면 나고야식이라고 부른다. 우나쥬는 초벌 장어를 다시 구워 쫄깃한 식감을 살렸다. ‘겉바속촉’(겉은 바삭하고 안은 촉촉하다)이라는 말 그대로다.민물장어는 조리법이 어려워 전문 셰프가 되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하다. ‘꼬치 끼우기 3년, 손질법을 익히는데 8년, 굽는데 평생’이라는 격언이 있을 정도다. 친구인 김 대표를 믿고 한국으로 온 나고야 장어전문점 30년 경력의 와키타 다이사쿠 셰프의 솜씨에는 한 치의 빈틈이 없었다. 주방에서 만난 다이사쿠 셰프는 “소스가 50%, 굽는 방식에서 50% 차이가 난다. 이 장어는 탈 것인가, 타지 않을 것인가?”라는 선문답 같은 질문을 던졌다. 장어가 타기 직전까지 잘 구어야 그 맛이 유지된다는 것이다. 노르스름한 소금구이에서 드러난 장어 빛깔은 황홀할 정도였다.히츠마부시를 먹기 위해선 약간의 인내가 필요하다. 즉석에서 굽고 모리츠케(플레이팅)까지 15분이 걸리기 때문이다. 처음엔 장어 그대로, 두 번째는 와사비와 고명을 풀어서, 세 번째는 오차즈케(녹차물)로 각각 다르게 즐겼다. 민물장어를 통해 일본을 느끼는 귀한 시간이었다. 전통 음식은 그 분야에서 오랫동안 종사한 현지 셰프의 솜씨를 보지 않고서는 제대로 안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 같다. 식약청 검사 결과 위생 상태가 매우 우수하다는 별 3개를 받았으니, 믿고 먹어도 되겠다. 김 대표는 잠잘 때 말고는 항상 앞치마 차림이라고 했다. ‘앞치마 표’ 김 대표가 고향에서 펼치려는 마지막 봉사가 제대로 결실을 보았으면 좋겠다. 부산 해운대구 청사포로67번길 39,■매일 1%씩 좋아지는 ‘쿠루미 과자점’법대 다니다 제과에 꽂혀 일본 요리학교 유학제과점 1년치 기록 적은 플래너서 진심 느껴져부산 대표 음식을 개발하는 사업인 ‘B-푸드 레시피’를 비롯해 올해 30주년을 맞이한 부산국제영화제 부대행사로 열린 ‘잇츠시네마’, 축하 이벤트 ‘부귀영화로:Scene to Table’ 등에 계속 이름을 올리는 가게가 있다. 부산도시철도 명륜역 앞의 ‘쿠루미 과자점’이다. 이름에서 일본 느낌이 난다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김성진 대표는 일본의 요리 명문 츠지제과전문학교를 나왔다. 법대를 다니던 학생이 군대에 가서 제과에 꽂힌 유별난 사연이 있었다.군에서 휴식 시간에 방송 ‘걸어서 세계 속으로’ 벨기에 편에서 나온 초콜릿 장인들을 보다 가슴이 뜨거워졌다고 했다. 그 즉시 휴가를 신청해서 제과 장인들을 찾아다녔단다. ‘쿠루미’란 이름도 일본 록밴드 ‘미스터칠드런’의 노래 쿠루미에 감동을 받아 지었다니, 김 대표가 어떤 감성의 소유자인지 대략 짐작이 간다.그는 남들보다 제과를 늦게 시작했으니, 유학을 다녀와야겠다고 결심한다. 프랑스 유학을 다녀온 분에게 조언을 구했더니 “프랑스에서 배운 걸 들고 오면 한국에서 바로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일본에 가서 같은 동양인에게 한 번 소화가 된 거를 배우는 게 어떠냐?”라고 말했다. 그렇게 입학한 츠지에서 처음 들었던 말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교장 선생님은 “빵 공부라는 건 기준을 만드는 거다. 100점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80점, 90점짜리도 만들 수 있다”라고 했다. 기준도 없이 자기 것을 100점이라고 생각하면 발전이 없다.일본과의 인연은 유학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지고 있다. 공기도 땅도 좋은 홋카이도산 밀가루 유메치카라를 직접 수입해 식빵을 만든다. 10년 동안 매주 식빵을 사는 단골들을 보면 그 보람이 느껴진다. 요즘 부르는 게 값이라고 할 정도로 비싼 팥은 강원도 정선에서 나오는 국산을 계약 재배해서 사용한다. ‘기술은 몰라도, 재료는 국내에서 제일 좋은 거를 쓴다’가 그의 겸손한 자부심이다.쿠루미 직원들은 모두가 빵을 만들고, 돌아가면서 카운터도 본다. ‘내가 만든 것을 내가 팔 수 있어야 한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만드는 사람이 직접 판매에 나서니 손님 입장에서 더 신뢰가 간다. 창업해 나간 옛 직원들도 "우리가 장사할 수 있게 만들어 준 그 대목이 제일 고맙다”라고 입을 모은다. 쿠루미는 매년 한 번씩 김 대표가 비용의 절반 이상을 부담해 전 직원들을 일본에 시찰 보내고 있다. 제품의 질을 올려 가게를 성장시키려면 혼자 힘만으로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주방 벽에 붙은 플래너에서 빼곡한 숫자들을 발견했다. 일 년간 매일의 기온, 주방 온도, 반죽 온도, 물 온도를 빠짐없이 모두 기록한 것이었다. 빵은 기온은 물론이고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습도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일 년 365일 똑같은 빵이 나가기 위해 모든 변수를 직원들과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날씨가 급변하는 계절에도 ‘오늘은 실수로 빵이 좀 안 좋아졌어도, 내일은 무조건 제대로 맞추자’라는 의미다. 쿠루미는 매일 1%씩 맛있어지는 가게를 지향하니, 시간이 지날수록 더 좋은 가게가 될 것 같다. 그날 빵은 무조건 그날 소진한다. 무릇 빵은 그래야 한다. 부산 동래구 온천천로 71-1. 글·사진=박종호 기자
어둠 밝힌 빛,
별처럼 반짝이니 마법같은 세상
추위 때문일까. 겨울밤의 공기는 유난히 밀도가 높다고 느껴진다. 무겁기도 하지만 무척이나 까맣다. 무겁고 까만 겨울밤엔 불빛이 유난히도 밝게 보인다. 연말연시만 되면 이러한 분위기를 그냥 넘길 수 없어 지역마다 앞다퉈 불을 밝힌다. 불빛 축제들이다. 대구 달성군 송해공원을 찾았다. 대구시가 올해 처음으로 송해공원에 ‘별빛 산타 레이크’를 만들었다. 크리스마스가 지났는데 웬 산타하겠지만, 이곳은 내년 3월까지 운영되면서 새로운 겨울 명소로 떠오르고 있다.■송해공원 산타마을송해공원은 대구시 달성군 옥포읍의 ‘옥연지’라는 대규모 저수지 인근에 마련돼 있다. ‘전국노래자랑’ MC로 유명한 방송인 송해 씨의 이름을 딴 공원이다. 이곳은 송해 씨와 특별한 인연이 있다. 옥연지 바로 옆 동네 ‘기세리’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은 송해 씨의 처가가 있는 곳이다. 황해도 출신인 송해 씨는 생전 이곳을 ‘제 2의 고향’이라 여기며 실향의 아픔을 달랬고, 명예 군민과 홍보대사를 맡았다. 마을 주민들도 송해 씨의 장수 이미지에 걸맞게 백세교와 백세정을 지으면서 2015년 65만㎡ 규모의 송해공원이 생겨났다.계절마다 다양한 꽃을 볼 수 있는 송해공원은 둘레길 데크, 백년수중다리, 바람개비 쉼터, 전망대, 얼음빙벽 등 많은 볼거리로 조성돼 있다. 2018년 제21회 세종문화대상 대한민국 명인·명품·명소 대상 시상식에서 올해의 명소로 선정되면서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서울 청계천, 가평 자라섬에 이어 전국에서 세 번째로 선정됐다. 올해부터는 별빛 산타마을까지 조성되면서 사계절 관광지로 떠올랐다.송해공원 입구에 들어서기 전 산타복장을 한 거대한 조형물 ‘웰컴투 산타할아버지’가 반긴다. 입구부터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로 줄을 서 있다. 산타를 담으려면 횡단보도 밖에서 사진을 찍어야 해서 마치 횡단보도를 건너려고 줄을 서 있는 듯한 묘한 풍경도 연출된다.산타할아버지를 뒤로하고 마을에 들어서면 일명 별빛 터널인 ‘마법 터널’을 만날 수 있다. 수천 개의 작은 전등들이 별 형상을 하며 터널을 이루고 있다. 이곳을 지날 때면 마치 은하계의 한가운데를 통과하는 느낌마저 든다. 별빛 터널을 통과하면 10m 높이의 대형 트리와 그 주변에 8m 높이의 트리들이 어울어져 송해공원의 야경은 생기를 더한다. ‘ㄷ ㅏ ㄹ ㅅ ㅓ ㅇ(달성)’이라고 적힌 커다란 트리는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최고의 포토존이다.트리존을 지나면 추운 겨울 몸을 녹일 수 있는 훈훈한 공간이 나온다. 달성군이 관광객들의 위해 온기가 나오는 쉼터를 마련한 것이다. 세심한 배려다. 이곳에서는 아이들을 위한 다양한 체험행사도 마련돼 있다. 새해맞이 ‘소원지 작성’과 산타 복장을 입고 촬영을 할 수 있는 대여숍도 관람객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다.잠시 몸을 녹인 뒤 백세교와 백세정으로 향하면 산타할아버지와 사진을 찍을 수 있다. X-마스가 지나 다소 이상해 보이지만 여전히 산타할아버지는 모두에게 인기다. 생뚱맞은 산타를 뒤로 하고 프러포즈 포토존 ‘설렘 가득한 하트 터널’을 지나면 백세교를 만날 수 있다.백세교 입구에 삿갓 쓴 송해 씨의 모형물이 반긴다. ‘전국~ 노래자랑’이란 우렁찬 송해 씨의 음성이 귀가를 스쳐 지나간다.백세교는 태극 모양으로 이어져 있는데, 쉼터에서 작성한 소원지는 백세교 난간에 걸면 된다. 백세교를 따라가면 백세정이 나온다. 방문객들에겐 쉼터다. 2층 누각으로 지어진 백세정에서의 야경은 더욱 매력적이다. 태극 모양으로 이어진 백세교가 마치 새로운 세계를 이어주는 다리인 듯 하고, 백세교 양편으로 수면 위에 떠 있는 달 모양의 조형물에선 신묘함마저 들었다. 백세교와 백세정은 모두 송해 씨의 무병장수 이미지에 맞춰 이름 지었다. 송해 씨는 2022년 9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곳에서는 ‘백세교를 한 번 건너면 100세까지 살고 두 번 건너면 무병장수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가족과 연인이 함께 복을 비는 명소로 인기가 높다. 송해공원 산타마을은 일몰 후 자동 점등되고 오후 11시까지 매일 운영된다. 3월말까지 빛축제를 관람할 수 있다.■송해기념관송해공원 인근에 송해기념관을 가보는 것도 추천한다. 송해기념관은 방송인 송해 씨의 인생과 삶의 흔적을 한곳에 모아 놓은 곳으로 2021년 12월 문을 열었다. 지상 3층으로 지어진 기념관에는 송해전시관을 비롯해 체험실, 하늘정원, 송해카페 등으로 구성돼 있다. 또 송해 씨의 60여 년 활동상을 알 수 있는 432점의 소장품을 볼 수 있고, 달성군과의 인연, 전국노래자랑 코너 등도 관람할 수 있다.송해 씨는 생전 이곳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고 전해진다. 그는 기념관이 건립될 당시 “처음 달성군과 인연이 된 건 집사람 고향이 달성군이기 때문인데 그 인연을 시작으로 고맙게도 송해공원이 만들어지고 기념관까지 건립이 됐다. 많은 분들이 이곳에 오셔서 못다 한 저의 인생 이야기도 들어보시고, 제가 사랑하는 달성의 더 큰 매력도 듬뿍 느끼고 가시길 바란다” 고 밝히기도 했다.요즘은 이곳이 지역민과 관광객이 함께하는 지역문화 활성화 공간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재)달성문화재단 달성문화도시센터가 송해기념관을 선비체험관 등으로 운영하면서 치유명상과 자연인문학, 역사문화산책 등 문화아카데미 프로그램을 활용해 지역 문화 활성화에 기여하고 있다.
간판 대신 결을 세운 곳,
달맞이길 숨은 보석 ‘에케’
붉은 벽돌 건물이 유독 기억에 남았다. 석양 햇살이 긴 그림자를 내는 오후에 방문했더니 붉은 벽돌 위에서 나뭇가지 흔들리듯 일렁이는 빛 그림자를 보는 것만으로도 여유로웠다. 건물 하부는 붉은 벽돌, 상부는 콘크리트 재질로 지어졌고, 마당 한가운데는 작은 정원을 넣었다. 크지 않은 5층짜리 건물인데 가장 낮은 쪽과 가장 높은 쪽이 10m 정도 차이가 나는, 삼각형 땅을 묘하게 살려서 지은 건물이다. 오죽했으면 건물 이름도 독일어로 모퉁이를 뜻하는 ‘에케’(ECKE)로 정했을까.2024년 10월 문을 열었고, 이듬해 8월 부산시가 발표한 ‘2025 부산다운 건축상’에서 금상을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부산 달맞이길의 숨은 보석 ‘에케’(해운대구 달맞이길 117번길 219)를 찾아갔다. 복합상업문화공간 ‘에케’를 처음부터 끝까지 기획하고, 그 안에서 큐레이션 리빙 편집숍 ‘에크루’(ecrue)도 운영하는 이효진 대표를 만나, 일상과 취향을 공유하는 ‘에케’의 어제와 오늘 이야기를 들었다.■‘느슨한’ 공동체를 꿈꾸는 ‘에케’“‘에케’를 오픈하고 1년까지는 정신이 없었어요. 이제 사계절을 다 지내봤으니까 조금은 알 것 같아요. 저는 여길 한 번이라도 찾으셨던 분이, 언제든 다시 찾고 싶은 곳으로 기억되면 좋겠거든요. 어떤 여행지를 두세 번째 간다면 꼭 다시 들르고 싶은 곳이 있는 것처럼요. 온라인 홈페이지 개통과 판매를 주저하는 이유도, 일부러 찾아오고, 온 김에 그 옆 다른 공간에도 들렀다가 가면 좋겠다 싶어서입니다.”이 대표의 말 때문이었을까, ‘에케’는 단순히 상업 공간이 모인 집합체가 아니라, 이 대표와 오랜 인연을 이어 온 사람들이 ‘느슨한’ 공동체처럼 모여 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닌 게 아니라 이 대표는 ‘에케’를 구상할 때 “함께 나이 들고, 오래도록 기억을 쌓아가는 공동체”를 만들고 싶었단다.“건축을 처음 해 보는 거니까 엄청 우여곡절이 많았어요. 설계부터 오픈까지 4년이 걸렸어요. 처음에는 2층짜리 단층 상가 건물을 생각했는데, ‘나도 함께하고 싶다’는 지인들이 하나둘 생기면서 갑자기 지하도 파게 되고, ‘스테이’까지 들어오면서 복합문화공간으로 점점 규모가 커졌어요. 다양한 브랜드를 한 건물에 담아내려면 전체적인 방향 정리도 필요했어요. 저는 이 안에서 먹고, 자고, 보고, 쇼핑하고, 느낄 수 있는, 오감을 만족시키는 곳으로 만들고 싶었어요. 이 모든 것이 한 공간에서 일어나면 시너지도 있을 것 같거든요.”■‘에케’에서 만날 수 있는 브랜드현재 ‘에케’에 입점한 브랜드는 11개. 작게는 여섯 평, 큰 곳은 마흔 평 규모다. A호는 ‘치즈치즈치즈’ 3호점 브런치 카페, 그 옆 B호는 이곳을 설계한 라라호호건축사사무소, C호는 공예 작품과 빈티지 오브제를 다루는 ‘에크루’, D호는 한국인 아내와 일본인 남편 부부가 운영하는 예약제 일식당 ‘오라 스키’이다. 중정을 사이에 두고 E호는 다양한 전시와 팝업을 여는 ‘에임.히어’, F호는 1인 베이크 숍 ‘사이에 베이크’, G호는 아트워크 숍 ‘마니 델 갸또’가 이어진다.층을 달리하면 H호는 미쉐린가이드 그린 스타와 원 스타의 예약제 파인다이닝 ‘피오또’, I호는 일본 세라믹 브랜드 아리타재팬의 한국 공식 판매처 ‘1616 아리타재팬’, J호는 소파 가구의 라이프스타일 서비스를 제공하는 ‘펠리토’, 그리고 K호는 빈티지 가구와 하루를 온전히 경험할 수 있는 스테이 ‘아파트먼트풀 포룸스’이다. 스테이의 경우, 4개의 방마다 콘셉트를 달리하고, 덴마크, 독일, 프랑스 등 나라별로 다른 빈티지 제품을 만날 수 있다. 일종의 ‘경험’을 파는 셈이다. 간간이 ‘에크루’나 ‘1616 아리타재팬’에서 파는 제품도 놓여 있다.“‘에케’라는 공간의 분위기를 크게 해치지 않는, 결이 맞는 분들이 함께하고 있어요. 사실 월세를 잘 내겠다는 병원 입주 요청도 있었지만, 우리가 그렸던 그림은 아니어서 거절했어요. 예를 들면, H호에 들어온 파인다이닝 ‘피오또’는 직접 운영하는 농장의 채소와 지역 재료를 활용한 코스를 구성하는, 자기만의 철학을 가진 곳이죠. G호의 ‘마니 델 갸또’는 고양이의 손이라는 뜻인데, 이 브랜드를 만든 분이 진짜 손재주가 좋아요. 감각적이고 위트 있는 소품을 참 잘 만들어요.”■아늑하고 힙한, 공간이 주는 힘H와 G, 무슨 암호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공간을 나타내는 호수 표기이다. 그러고 보니 건물 외부, 눈에 보이는 사인물도 콘크리트 담벼락에 써 놓은 ‘ECKE’라는 로마자 알파벳 네 글자가 전부이다.“사실 간판을 크게 하면 인식은 쉬운데, 우리가 생각하는 ‘결’과는 다른 방향이어서 최대한 자제했어요. 사인이 없더라도 모일 수 있는 아이덴티티를 만드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으니까요.” ‘에케’를 설계한 B호 입주자 라라호호건축사사무소 조호제 건축가의 말이다. 그는 “공간 건축이지만 지역적인 특성과 아름다움에 대한 고민, 그리고 기존에 있던 주변 사람들과 조화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전했다.‘에케’가 부산다운 건축상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입체적인 도시경관과 자연 지형을 존중한 설계”가 높은 평가를 받았다. 지하 1층부터 지상 2층까지 각각의 층이 도로와 직접 연결돼 다양한 방향에서 자연스럽게 진입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특히 중정은 윗마을과 아랫마을을 이어주는 공공 계단과 연결돼 지역 공동체(커뮤니티)의 유기적인 흐름을 만들어낸다.이 대표는 “설계를 의뢰할 때부터 가장 먼저 중정을 두면 좋겠다고 말씀드렸어요. 문을 열면 마켓이 펼쳐지고, 사람들이 벤치에 걸터앉아 공간을 즐기는 장면을 상상했거든요.” 작지만, 의미 있는 도시의 새로운 문화적 거점이 탄생한 배경이다.■수시로 열리는 전시·팝업 스토어‘에케’에 입주한 11개의 브랜드 중 대부분은 큰 틀에선 ‘고정’된 형식을 취한다. 공간 플랫폼이라는 성격이 말해주는 것처럼 E호 ‘에임.히어’는 방문할 때마다 ‘콘텐츠의 주인공’이 달라졌다. 그동안 회화, 주얼리와 조명, 디자인, 공예 전시 등을 다양하게 선보였다.지금은 ‘나무, 곁’이란 제목의 김수근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지난 18일 시작한 이 전시는 부산에서 목선반과 도자기 작업을 하는 부부 공예가 ‘예누하’의 강진주(부인) 작가가 남편 김수근 작가를 위해 특별히 마련해 준 것이다. 강 작가는 “흙을 만지는 사람으로서 저는, 그가 나무라는 생명에 새겨온 고독한 시간을 이해한다”면서 “그는 매일 묵묵히 나무를 깎아 왔지만, 그 가치를 세상에 내놓는 일에는 늘 서툰 사람이었고, 그가 쑥스러움 뒤에 숨겨 두었던 나무의 내밀한 언어를 제가 빚어온 이해의 그릇에 담아보려 한다”고 전했다. 전시는 3월 1일까지로, 오전 11시~오후 5시에 관람할 수 있다.이 대표가 운영하는 곳은 C호 ‘에크루’이다. 그가 여행이나 출장을 다니며 모은 빈티지 가구와 아기자기한 소품,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을 조명한다. ‘에크루’를 만들기 전에는 생활소품 브랜드 ‘코코로박스’를 만들어 이름을 알린 바 있다. 마지막으로 1년 4개월의 소회와 바람을 들려준다.“처음에 생각했던 대로 굴러가는 거 같아요. 다만, 이 공간이 널리 알려져 좀 더 많은 사람이 와서 온기가 채워지길 바라요. 사실, 식당도 예약제여서 북적북적한 것과는 거리가 멀고, 주차 공간도 협소한 편이거든요. 지금 조성 중인 달맞이공원에서 언덕 쪽으로 에스컬레이터가 생기거나 지난해 <행복이 가득한 집>에서 개최한 ‘2025 행복작당’ 행사 때처럼 해운대 일대 명소를 도는 ‘셔틀버스’를 해운대구청 같은 데서 운영해 주면 참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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