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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중국 관광객 무비자 시대를 맞아
두 달 전 법무부는 지난달 29일부터 중국 단체 관광객 무비자 입국을 내년 6월 30일까지 한시적으로 시행한다고 보도자료를 냈다. 이후 지난달 26일 국가정보자원관리원 화재 사건에도 불구하고 중국 단체 관광객에게 대한민국 관광의 문을 열었다. 26일부터 29일 사이 많은 언론에서는 중국인 단체 관광객 입국에 대한 우려를 나타내었으며 입국을 연기해야 한다는 의견도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하지만 정부는 많은 우려와 언론의 공격에도 꿋꿋이 문을 열었다. 그리고 2주 정도의 시간이 흐른 지금, 많은 중국인 관광객들이 대한민국 전역에서 흔적을 나타내고 있다.
필자는 ‘사건반장’이라는 유튜브 채널을 자주 보는데, 여기서는 CCTV에 찍힌 영상과 함께 사건을 보여주며 가장 사실적인 보도를 한다. 원래 이 채널에는 음식점 먹튀, 악성 사기꾼, 지하철 민폐 행위자 등의 고발이 주를 이루었지만, 최근에는 관광지의 ‘꼴불견 관광객’과 아무 데서나 흡연하는 장면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리고 그 주인공은 대부분 중국인 관광객이다. 과거 같으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겠지만, 최근 국제 정세와 국가 정책의 흐름을 고려할 때 이러한 행동은 결코 가벼이 볼 문제가 아니다. 경주의 고분 유적지에서 한 중국인 가족이 아이를 왕릉 꼭대기에 올라가게 해 포즈를 취하게 하고, 제주도에서는 한 여성이 아이를 안고 해안가 돌바위 위에서 용변을 보게 하는 장면이 공개되었다. 서울과 경기 지역에서는 음식점 실내에서 흡연을 하고, 제지한 주인에게 복수하듯 화장실 앞에 용변을 본 사건도 있었다. 모두 중국인 관광객이 연루된 사례였다.
국정자원 화재 직후 시작된 무비자
문화적 충돌에 대한 사전대비 없어
문제적 뉴스거리 곳곳서 속속 등장
中 당국과 사전교육 등 협의했어야
정부 시스템 불안정 핑계 삼기보다
부산시 차원 지침이라도 마련 필요
일부 언론은 중국인 관광객을 폄하하는 ‘가짜 뉴스’가 많다고 하지만, 다른 언론은 실제 장면을 보도하며 중국 관광객의 문제적 행태를 비판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편견의 문제가 아니라, 실제로 중국인 단체 관광객의 대규모 유입이 뉴스거리를 만들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문제 없는 집단은 없다지만, 이제 시작된 무비자 제도가 본격화해 정부 목표인 100만 명이 입국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상상하기 어렵다.
미디어가 보여주는 중국 관광객의 행태를 보면, 1970년대 한국의 공중도덕 수준을 떠올리게 된다. 필자가 초등학교 시절만 해도 길가에 앉아 볼일을 보는 일이나, 잔디밭에 무단 진입해 사진을 찍는 일은 흔했다. 그러나 지금의 대한민국은 다르다. 공중도덕과 시민의식이 정착되어 흡연은 지정된 구역에서만 가능하고, 일부 아파트에서는 실내 흡연도 금지되고 있다. 그런 사회에서 중국인 관광객의 행태는 내국인과의 마찰을 피하기 어렵다. 반대로 국내 흡연자들이 동남아나 중국 여행을 선호하는 이유는 ‘아무 데서나 흡연이 가능하기 때문’이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반면 싱가포르가 세계에서 가장 질서정연한 도시로 평가받는 이유는 공중질서 위반에 대한 강력한 처벌 때문이다.
정부는 이러한 현실을 외면하지 말고 실질적 대책을 세워야 한다. 아무런 대비 없이 중국 단체 관광객을 대거 받아들인다면, 우리 문화재와 관광지의 훼손은 불 보듯 뻔하다. 최근 인천항으로 입항한 크루즈선의 관광객 중 6명이 귀선하지 않고 불법 체류자로 분류되었다는 사실은 그 위험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신원조차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더 큰 문제다. 최근 3년간 무단 이탈자가 3만 명에 육박한다는 통계도 이미 나와 있다. 국가정보자원관리원 화재의 여파로 각종 행정 시스템이 복구되지 않은 상황에서 무비자 입국이 유지된다는 것은 위험한 실험이다. 부산 해운대에서 관광업을 하는 한 관계자는 “연휴 기간 동안 방문객의 절반이 중국인 관광객이었다”고 말한다. 이대로라면 내국인 관광객보다 중국인 관광객이 더 많아질 날이 머지 않았다.
이제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이러한 관광 문화의 충돌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과거 우리나라 1980~1990년대 해외 여행객들은 출국 전 반드시 ‘사전교육’을 받아야 했다. 그 내용에는 공중질서, 문화적 예절, 외국의 민감한 문화에 대한 주의사항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정부는 이번 무비자 제도를 추진하기 전에 중국 정부와 협력하여 유사한 사전 교육 시스템을 구축했어야 한다. 제주도의 무비자 사례만 면밀히 검토했어도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일이었다.
국가정보자원관리원 화재의 여파로 지금도 공공 시스템은 불완전하다. 부산시는 정부 지침만 기다릴 것이 아니라, 지자체 차원에서라도 능동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김해공항과 부산항을 통해 입국하는 중국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K-문화 예절 가이드 라인’을 마련하고, 예절 위반 시 경고와 제재를 병행하는 방안을 고려할 수 있다. 또한 무단 이탈자 추적 시스템을 자체적으로 구축해 선제적 대응에 나서야 한다. 대한민국 정부가 완벽하지 않다면, 부산이라도 해내야 한다. 부산은 할 수 있다.
2025-10-15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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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정치가 가로막는 성평등
몇 해 전 부산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여성 시의원이 당선 이후 면담을 청한 한 기업체의 사장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고 한다. “(남자 시의원이라면) 보통은 룸살롱에서 뵙자고 하면 되는데 여성분은 어디서 뵙자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이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 사회에서 이런 일이 버젓이 일어났다. 오죽하면 룸살롱을 ‘비즈니스 클럽’이라고 불렀겠는가.
이 일화는 한국 사회의 정치가 어떤 방식으로 성차별적 문화를 가지게 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룸살롱은 그 안에서 벌어지는 ‘유흥’과 ‘접대’가 주로 남성을 대상으로 일어난다. 성 산업을 뿌리로 하고 있는 이러한 룸살롱 문화는 여성을 소외시키고, 성적 대상으로 취급하도록 만든다. 정치권에서 이러한 남성 중심의 네트워크는 여성의 정치 진입을 실질적으로 가로막는 비공식 제도로 작용해왔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유흥업소 접대 문화에 대해서 일반 시민 응답자의 76.6%가 “성차별, 성희롱 등 부정적 사회문화를 만든다”고 답했다. 일반 국민의 상식 수준에서도 수용하기 어려운 구습이 정치와 사법 등 우리 사회의 중심 영역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면 참담한 일이다.
국민의 상식에도 못 미치는 구습
정치권에서 자꾸 벌어지는 현실
조국혁신당 성비위 사건 공론화
성평등 내건 당이라 더 큰 실망
성차별적인 문화 바꾸려는 노력
거기에서 진정한 반성 시작해야
정당 내에서 여성 정치인 및 당직자에 대한 일련의 성희롱, 성폭력 사건이 벌어지는 이유도 이 같은 성차별적 정치 문화의 연장선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한국은 다방면에서 빠른 속도로 여권 신장을 이루어냈지만 여성의 정치적 대표성은 눈에 띌 정도로 낮다. 여성 정치인은 남성 중심의 조직 문화, 뿌리 깊은 성차별적 편견, 성적 괴롭힘 등 구조적, 문화적 장벽에 여전히 가로막혀 있다. 정당은 이러한 성차별적 문화를 바꾸어나갈 책임이 있지만, 그간 국민 뒤통수를 때리는 일이 많이 일어났다. 성평등 가치를 우위로 내세우는 비교적 진보적인 정당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최근 조국혁신당에서 당내 성비위 사건이 공론화된 바 있다. 여성 당직자에 대한 직장 내 괴롭힘과 성추행이 보고되고, 여성위와 시도당에서 가해자 업무 배제 및 빠른 진상 조사를 수차례 요청했다고 한다. 그러나 중앙당의 사건 처리 과정은 절차적 형식주의에 그쳤고, 주요 당직자마저 ‘성희롱은 범죄가 아니다’라며 가해자를 두둔하면서 혁신당의 지지율은 급락했다. 이는 몇 해 전 더불어민주당 출신 지자체장의 권력형 성범죄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성평등 민주주의를 주요 방향으로 삼고 있는 정당이기에 국민의 실망감이 컸다. 조직 보위를 더 우선시하거나 피해자를 공격하는 2차 가해도 일어났다.
물론 성비위 사건이나 권력형 성폭력 사건을 공개적으로 해결해가는 과정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 정당의 건강함을 보여주는 일이다. 가장 성평등한 나라로 알려진 스웨덴에서 성범죄 신고율이 높은 이유도 신고를 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어 있어서 그렇다는 분석을 상기해보면 더욱 그렇다. 피해자가 말을 할 수 있는 환경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조국혁신당의 경우도 당내에 우려와 자성의 목소리가 있었으며 중앙 조직의 미흡한 해결을 두고 탈당이 이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권력의 중심에 있는 이들의 국민 상식에 어긋나는, 반하기까지 하는 태도와 언행이 문제가 되었다. 2차 피해가 어김없이 일어나고 문제의 핵심을 외면한 사태로 이어진 것이다.
정당에서 반복되는 성희롱, 성폭력 사건과 이에 따르는 2차 피해가 일어난다면 이에 대한 구조적인 분석이 필요하다. 보다 근본적으로 성차별적인 조직 구조와 문화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특히 진보 진영의 경우 ‘성적 엄숙주의로부터의 자유’라는 미명 아래 왜곡된 성 관념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 성적 불쾌감을 주는 음담패설을 분위기 띄우는 농담으로 이해하고, 마음만 먹으면 폭력적이고 착취적인 방식을 동원해서 성희롱, 성폭력을 일삼는 일은 국민의 상식 수준과 동떨어져 있다. 성폭력, 성희롱 사건이 일어나는 환경도 문제지만 정치권에서 성희롱, 성폭력 사건을 해결하는 역량을 제대로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은 더 심각한 문제이다. 때문에 정치가 이룩해야 할 성평등은 스스로의 성차별적 문화를 인식하고 바꾸어나가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존폐 위기에 몰렸던 여성가족부는 이제 성평등가족부로 그 기능을 강화하고 확대 개편을 눈앞에 두고 있다. 지난 정부의 여성가족부 폐지 공약이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일에 지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결과다. 우리 사회는 미투 운동을 거쳐 일상 속에서 벌어지는 성폭력 문제를 가시화하고 피해자다움의 통념에 도전했다. 그 결과로 시민의 사회적 성인지 감수성이 향상되었다. 하물며 정당이 성평등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 정치권이 성숙한 시민의 상식 수준에서 문제를 바라보고 통렬한 자기 반성을 통해 거듭나기를 바란다.
2025-10-13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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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청년 담론에 가려진 중장년의 비애
한국 사회에서 저항(86세대)과 자유(X세대)의 상징이었던 청년이 사회적 약자로 인식되기 시작한 건 2000년대 후반부터다. 당시의 청년 문제는 구조적인 측면이 강했다. ‘치솟는 등록금에 시급 3000~4000원짜리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대학을 졸업했더니 눈앞에 주어진 일자리라곤 비정규직뿐이었다’라는 이야기는, 개인의 별난 경험이 아니라 세대 전반이 마주한 문제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건 그 시기가 대한민국이 본격적으로 저성장 국면에 접어든 때였기 때문이다. 방아쇠를 당긴 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중국의 산업이 발전하면서 우리 수출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2000년대 한국 경제를 뜨겁게 달궜던 중국발 호황의 열기가 식어갔다. 2000년대 중반까지 5%를 넘나들던 경제성장률은 2010년대 들어 2~3%대로 주저앉았다.
상대적 소득 높아 각종 정책에서 제외
가난한 '4050' 냉혹한 현실에 방치돼
40대 사망 원인 암 아닌 자살이 1위로
반면 정부·지자체 청년 위한 정책 경쟁
사회 약자라는 공감대 온갖 지원 나서
세대별 정책 현실 맞게 재조정 나서야
인구구조도 유리하진 않았다. 당시 청년들은 베이비붐 세대의 자녀였다. 이들은 부모만큼 인구수가 많아 ‘에코 세대’라고도 불렸다. 2000년대에 태어난 요즘 20대 초중반은 나이마다 50만 명이 채 되지 않는다. 반면 1990년대 초반에는 매년 약 70만 명이 태어났다. 많은 수가 일자리 시장에 쏟아져 나오는데 이들을 받아줄 일자리는 점점 사라졌다. 청년들은 노동시장에서 ‘슈퍼 을(乙)’일 수밖에 없었다. 청년을 착취한다는 의미의 신조어 ‘열정페이’가 유행했다. 2015년 ‘헬조선’이 사회적 화두로 부상했다.
정부와 정치권이 청년 문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건 그즈음이었다. 전국의 많은 지방자치단체가 2015년을 전후해 청년 관련 부서를 신설했다. 다양한 청년 정책들이 속속 도입됐다. 부산에서도 2015년 청년취업지원팀이 신설된 이래 청년 지원 전담 조직이 지속적으로 확대됐다. 2017년엔 부산광역시 청년 기본 조례가 제정되며 청년들을 지원하기 위한 제도적 기반이 마련되었다.
전국의 지방자치단체가 청년 정책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인 결과, 청년 정책은 양적으로 꽤 많이 성장했다. 일자리·주거·참여 등 분야를 막론하고 여러 분야에서 청년들을 위한 정책이 도입되었다. 구직 비용을 지원하는 건 기본이다. 일정 기간 주택 월세를 보조해 주는 곳도 적지 않다. 부동산 중개보수나 이사비를 지원하는 지자체도 있다. 말 그대로 ‘없는 정책이 없는’ 실정이다.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청년은 사회적 약자’라는 컨센서스가 형성되어 있다. 반대로 중장년은 상대적 강자로 인식된다. 아마 이 시기가 개인의 생애주기에 있어 사회적 지위와 소득이 가장 높은 때이기 때문일 것이다. 통계청이 지난달 25일 발표한 ‘2023년 국민이전계정’에서도 한국인은 45세 때 노동소득이 가장 높은 걸로 나타났다. 이때 정점을 찍은 개인의 ‘흑자’는 점점 줄어 61세부터는 쓰는 돈이 벌어들이는 돈보다 많은 ‘적자’로 돌아섰다.
같은 날 발표된 ‘2024년 사망원인통계 결과’는 또 다른 장면을 보여주었다. 40대 사망원인에서 자살이 암을 누르고 1위로 올라선 것이다. 40대에서 자살이 1위를 차지한 건 1983년 관련 통계 작성 이래 처음이다. 특히 40대 남성의 자살률이 2023년 대비 2024년 18.8%나 증가해 다른 집단을 압도했다. 경제적 어려움이 주된 원인일 거라는 분석이 나온다. 경제의 핵심 주체로 활동할 나이이지만, 그로 인해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느끼게 될 압박감과 상실감도 더욱 클 거란 이유에서다. 전체 고독사에서 중장년층이 차지하는 비중이 노인층을 압도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 있다.
그간 청년층은 약자로서 시혜적 지원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많은 지자체가 이들을 하나라도 더 돕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그 결과, 당사자들조차 필요성에 의문을 가지는 정책이 넘쳐나게 됐다. 반면 중장년층은 생산성이 높은 시기라는 이유로 정책 대상에서 소외된 경우가 많았다. 온라인에서도 “왜 청년 정책만 있고 4050 정책은 없냐”는 중장년들의 넋두리가 심심치 않게 보인다. 이 집단이 소득·자산에 있어서 평균적으로 청년·노인보다 여유로운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건 평균이다. 개개인의 사정을 따져보면 그럴 수 없다. 어쩌면 양질의 일자리를 얻지 못하고, 자산을 형성하지 못한 중장년들이 직면한 현실은 청년들이 처한 것 이상으로 냉혹할 것이다. 새벽 인력시장에 나온 일용직 노동자들의 면면만 보더라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정체성은 계층이 가지는 문제를 가리곤 한다. 중장년층이 겪는 위기가 다른 집단에 비해 관심을 받지 못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거다. 40대 자살률이 급증했다는 통계는 그 현실에 경고음을 울리는 것만 같다. 세대별 정책에 리밸런싱(rebalancing)이 필요한 때다.
2025-10-01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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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재심, 법정 밖에서 시작되는 정의
1964년, 18세의 한 여성이 자신을 성폭행하려는 남성의 혀를 깨물어 절단했다는 이유로 기소되어 유죄를 선고받았다. 법원은 “과잉방어”라며 정당방위를 인정하지 않았고, 그녀는 범죄자로 낙인찍힌 채 평생을 살아야 했다. 그런데 2025년 9월, 무려 61년 만에 법원은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했다. 법원은 “당시 행위는 명백한 정당방위에 해당하며, 유죄 판단은 잘못이었다”고 밝혔다. 이른바 ‘최말자 혀 절단 사건’은 재심 제도의 본질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준다. 재심은 이미 확정된 판결을 다시 다투는 ‘사법의 마지막 문’이지만, 그 문턱은 매우 높다. 형사소송법 제420조는 재심 사유를 제한적으로 규정한다. 유죄 증거가 된 증언이나 감정이 허위로 밝혀진 경우, 무죄를 인정할 명백한 새로운 증거가 발견된 경우, 증거 조작이나 위법한 수사가 드러난 경우, 재판에 관여한 법관이 직무 관련 범죄를 저지른 경우 등이 그것이다. 이는 확정판결의 안정성과 권위를 지키고 사법권 남용을 방지하기 위한 장치다.
그러나 이러한 엄격한 요건 때문에 최말자 사건도 단순한 법적 절차만으로는 재심까지 나아갈 수 없었다. 새로운 증거가 발견된 것이 아니라 법리 해석이 달라졌을 뿐이기에, 수십 년 동안 사건은 기록 속에 묻혀 있었고, 그 전환점은 여성단체와 시민사회의 연대였다. 여성단체들이 사건의 역사적 의미를 조명하며 피해자의 방어권을 적극적으로 주장했고, 언론이 이를 다루면서 여론이 움직였다. 1·2심은 새로운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재심 청구를 기각했지만, 대법원이 파기환송 결정을 내리면서 재심의 문이 열렸고, 결국 법원은 61년 만에 무죄를 선고했다. 이 과정에서 법률 그 자체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사회적 관심과 여론의 힘이었다. 재심은 결코 법정 안에서만 시작되지 않는 것이다.
필자는 최근 성범죄 사건의 재심을 준비하면서 재심의 문턱이 얼마나 높은지를 깊이 체감했다. 이미 유죄가 확정된 사건에서 새로운 증거를 찾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다. 기록은 닫혀 있고, 수사기관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피해자의 진술만 남은 사건에서 그 신빙성을 다시 검증하거나 새로운 정황을 밝혀내기 위한 단서를 찾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그 사건이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다뤄지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언론이 직접 발로 뛰며 취재를 진행했고, 방송 이후 여론이 형성되자 침묵하던 사람들이 제보를 보내오기 시작했다. 새로운 증거를 찾을 수 있는 작은 실마리가 하나둘 나타난 것이다. 사법절차만으로는 도달하기 어려웠던 길이 언론과 여론의 도움으로 열리는 것을 보며 재심이 얼마나 사회적 힘에 의존하는 절차인지 절실히 느꼈다.
그리고 법조인으로서 이러한 현실에 회의감도 들었다. 사법제도는 정의를 세우는 최후의 보루여야 한다. 그럼에도 억울함을 풀기 위한 실마리가 언론 보도나 여론의 관심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은 제도만으로는 진실에 다가가기 어렵다는 현실을 보여준다. 법이 진실을 찾는 도구라면, 여론은 그 문을 두드리는 힘이다. 지금의 재심 제도가 이토록 높은 벽을 가지고 있다면, 법만으로는 결코 넘을 수 없는 벽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최말자 사건 역시 여성단체들의 꾸준한 문제 제기와 언론의 재조명이 없었다면 61년 만의 무죄 판결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현실은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처음부터 조금만 더 치열했다면, 재심까지 갈 필요가 있었을까?” 수사기관은 피해자의 진술만으로 사건을 송치하지 말고 객관적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끝까지 노력해야 한다. 검찰은 경찰 수사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위법이나 허점이 없는지 다시 점검해야 한다. 그리고 법원은 “검찰이 알아서 잘했겠지”라는 안일한 신뢰를 버리고 증거를 철저히 검토하며 법리를 엄격히 해석해야 한다.
최근 재심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PD가 만난 한 담당 수사관은 방송 인터뷰에서 “직접적인 증거가 없을 때는 법정에서 가려질 것이라 생각하고 공판에 부친 것도 있다”라고 말했다. 법원이 알아서 밝혀줄 것이라는 믿음으로 사건을 송치했다니, 그 얼마나 무책임한 말인가. 수사기관이 증거를 끝까지 확보하지 않은 채 법원에 떠넘기는 순간, 사법은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한다.
재심은 사법의 마지막 양심이다. 그러나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목표는 재심이 활발한 사회가 아니라, 재심이 필요 없는 사회다. 수사기관과 법원이 처음부터 치열하게 의심하고 검증하는 구조를 갖춘다면 억울한 유죄도, 뒤늦은 무죄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잘못된 판결 하나가 한 사람의 삶을 송두리째 무너뜨릴 수 있다면, 올바른 판단 하나는 한 인간의 존엄을 지킨다. 재심은 법이 멈춘 자리에서 다시 정의를 향해 나아가는 두 번째 기회다. 잘못을 바로잡는 데 주저하지 않는 것, 사법의 흠결을 스스로 인정하고 고치는 용기야말로 법이 정의를 지키는 그 존엄함을 지키는 길이 될 것이다.
2025-09-29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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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부산 청년, 집 대신 디지털자산
한국 사회에서 집은 단순한 거주 공간이 아니라 자산 증식의 사다리였다. 그러나 그 사다리는 부산 청년들에게 닿을 수 없는 높이에 놓여 있다. 서울 아파트가 부의 상징으로 자리 잡는 동안, 부산 청년들은 다른 선택지를 찾아야 했다. 그리고 그들의 시선은 디지털자산으로 향하고 있다.
서울 아파트 가격이 급등하면서 서울 청년들의 자산은 빠르게 불어났다. 집을 사거나 청약에 당첨되는 것이 곧 ‘자산 증식의 공식’이 되었고, 전세마저 투자 수단으로 변했다. 그러나 부산 청년들은 단지 고향이 부산이라는 이유로 이 사다리에서 배제됐다. 서울과 부산의 자산 격차는 단순히 집값 차이를 넘어, 세대의 미래를 가르는 출발선의 차이로 이어졌다.
부산과 서울 아파트 가격 격차 심화
세대의 미래를 가르는 출발선 우려
부산 블록체인 규제자유특구 지정
청년들에 새 일자리·커리어 토대
누구에게나 새 자산 축적 경로 열려
장기적 흐름 읽고 자산 다변화해야
부산의 현실은 냉정하다. 집값은 정체되거나 하락했고, 미분양 아파트는 수천 가구에 달한다. 청년층 인구는 일자리를 찾아 수도권으로 떠나며, 부산은 최근 몇 년 사이 가장 큰 순유출을 기록했다. 고용률 역시 전국 최저 수준에 머물렀다. 제조업과 전통 산업이 버텨주던 시대가 저물면서 새로운 일자리는 충분히 늘지 못했다. 여기에 대출 규제까지 겹치면서 ‘서울처럼 빠르게 오르는 집’을 잡는 것은 더욱 멀어진 꿈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부산 청년들은 부동산이 아닌 다른 길을 찾기 시작했다. 그들이 눈을 돌린 곳은 비트코인을 필두로 한 디지털자산이다. 부동산처럼 수억 원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소액으로도 시작할 수 있고, 국경을 넘어 글로벌 시장에 곧바로 참여할 수 있다. 서울 아파트라는 높은 장벽 앞에서 부산 청년들에게 디지털자산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새로운 자산 축적의 경로이다.
이런 현상은 현장에서도 확인됐다. 이번 주 서울 워커힐 호텔에서 열린 ‘코리아 블록체인 위크’(KBW)에서 부산말이 정겨운 청년들을 만났다. 행사 티켓은 약 500달러, 우리 돈으로 50만~60만 원에 달한다. 대학생이나 사회 초년생에게는 부담스러운 비용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기차를 타고 올라와 연사들의 발표에 집중하고 있었다. 비싼 티켓값을 감수하면서 서울까지 올라온 이유는 미래의 자산 기회를 잡기 위해서였다. 부산 청년들이 디지털자산에 열정을 쏟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디지털자산 시장의 성숙도를 보면 단순한 투기 대상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시장의 규모와 성격은 이미 달라졌다. 대표적으로 스테이블코인 시장은 지난 몇 년간 수십 배 성장해 현재 시가총액이 수천억 달러에 이르렀다. 발행사들은 준비금으로 미국 국채를 대량 매입하며, 그 과정에서 달러 패권을 디지털 영역으로 확장시키고 있다. 이는 금융 질서가 이미 새로운 단계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단기적 가격 등락에 휘둘리기보다 장기적 흐름을 읽고 자산을 다변화하는 것이 필요한 이유다.
부산이라는 조건도 특별하다. 부산은 대한민국 유일의 블록체인 규제자유특구로 지정돼 각종 실증 사업과 기업 유치가 진행 중이다. 부산은행은 디지털자산 수탁 서비스를 준비하고 있고, 지역 기반 거래소 운영도 본격화하고 있다. 블록체인 보안·인프라 기업들도 속속 부산으로 들어오고 있다. 청년들에게 이는 단순히 투자 수익을 넘어, 디지털자산 산업 속에서 새로운 일자리와 커리어 기회를 잡을 수 있는 토대다. 서울이 부동산 자산의 도시라면, 부산은 디지털자산 산업의 도시가 될 수 있는 셈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장기적 흐름을 읽는 일이다. 투자 대가 레이 달리오는 “역사는 반복되지 않지만 운율을 맞춘다”고 말했다. 1970년대 오일머니는 미국 부동산으로, 2010년대 양적완화 자금은 미국 주식으로 흘러들었다. 이번 세대의 거대한 유동성은 디지털자산과 블록체인 산업으로 향하고 있다.
혁명은 언제나 중심이 아닌 변방에서 시작됐다. 블록체인이라는 혁명적 기술 역시 서울이 아니라 부산에서 더 큰 기회로 꽃필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 부산 청년들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시세에 매달리는 투기가 아니다. 공부하고, 기술을 익히고, 산업에 뛰어들어야 한다. 디지털자산은 단순한 자산 증식의 수단을 넘어 새로운 산업과 일자리를 만들어낼 무대다.
부산 청년들의 디지털자산 투자는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합리적 대안이다. 동시에 새로운 산업에 뛰어들어 미래를 개척할 기회다. 이런 양질의 콘퍼런스가 부산에서도 열려야 한다. 부산 청년들이 굳이 서울까지 올라가지 않아도 배움과 교류의 장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부산시의 시대적 과제다.
중요한 것은 오늘 비트코인이 몇 퍼센트 오르고 내렸는지가 아니다. 10년 뒤 “왜 그때 시작하지 않았을까?”라고 후회하지 않으려면, 지금 필요한 것은 큰 흐름을 읽는 안목과 차분한 준비다. 부산 청년들은 오히려 가장 앞선 무대에 설 수 있다. 그 기회는 이미 열려 있다.
2025-09-24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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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우리 주변에서 사라져가는 것들
무덥고 긴 여름이었다. 이제 겨우 선풍기를 끄고 잠들 수 있게 되었다. 기후변화를 온전히 체험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문득 과거의 기후 변화가 궁금해졌다. 과거에는 심각한 기후변화가 없었는데, 이 시대에 와서 비로소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일까?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사례가 있다. 바로 명태다. 우리나라는 특이한 식성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한데, 그중 하나가 명태다.
사실 세계에서 우리처럼 명태를 생태, 황태, 먹태, 북어, 동태, 코다리, 노가리 등으로 구분하고, 각각 다른 방식으로 조리해 먹는 나라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동태로 국을 끓이고, 황태로 해장국을 끓이고, 코다리로 찜을 만들고, 노가리로 안주 삼고, 내장은 창란 알은 명란으로 만들어 즐기고, 명태 껍질까지 무쳐 먹고, 제사상에도 북어를 올리는 사람들은 우리밖에 없다. 명태에 대한 사랑이 지극한 셈이다. 심지어 명태에 대한 찬가도 만들었다. “줄지어 떼지어 찬물을 호흡하고 길이와 대구리가 클 대로 컸을 때”로 시작해서 “그의 시가 되어도 좋다. 그의 안주가 되어도 좋다. 짜악짝 찢어지어 내 몸은 없어질지라도”라는 클라이맥스를 향한다. 세계에서 유일한 명태에 대한 노래다.
명태, 17세기 동해 한랭화로 남하
한반도에서 독특한 식문화로 발전
90년대 남획·수온 상승 탓 귀해져
기후변화 어자원 고갈 대표 사례
고온 지속 땐 바다 생태계 달라져
다음은 대구·오징어가 떠날 수밖에
그러면 다른 나라에서는 명태를 어떻게 소비할까? 일단 중국과 일본에서도 명태를 잘 모른다. 중국에서는 명태를 ‘밍타이’, 러시아에서 민타이, 일본에서도 명란을 ‘멘타이코’라고 한다. 모두 우리말 명태에서 유래한 말이다. 중국에는 아예 명태라는 물고기를 가리키는 말이 없었고, 일본에서는 ‘스케토오 타라’라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각 지방에서 방언이 통용되고 통일된 표준말이 없다. 즉 잘 알지 못하는 물고기였던 셈이다. 당연히 중국, 러시아, 일본에는 명태 요리가 아예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일본에서는 ‘멘타이코’ 즉 명란을 만드는데, 일본 음식 중에서 유일하게 고춧가루가 들어간다. 우리나라의 명란 만드는 기술이 일본에 정착한 희귀한 사례다.
그런데 명태는 지금도 한 해에 370만 톤 정도 어획되고 있다. 그중에서 우리나라가 20~30만 톤 이상을 소비하는데, 그것도 주로 명태의 원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한 채로 요리해서 먹는다. 다른 나라에는 명태 요리가 없는데, 나머지 많은 명태들은 어떻게 소비될까? 외국에서는 대부분 어육 곧 어묵의 형태로 소비된다. 심지어 게맛살의 주원료도 명태 살이다. 그래서 명태라는 물고기가 있다는 사실도 잘 알지 못하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전 세계에서 명태를 가장 사랑하고 즐기고 있다. 그럼 언제부터 명태를 사랑하게 되었을까? 명태라는 이름은 명천의 명서방이 처음 잡았다고 해서 명태라고 하였다는 속설이 있지만, 명천 지방에서 처음 잡혔기 때문에 붙은 이름일 가능성이 크다. 과거에는 이름이 없는 물고기는 먹지 않았기 때문에, 지명에 물고기를 나타내는 대/태를 붙여 급조한 이름일 것이다.
명태는 원래 우리나라 해안에서 잡히던 물고기가 아니었다. 지금도 베링해 연안에서 주로 잡힌다. 가곡 명태에서 노래한 것처럼, 명태는 찬 물을 좋아하는 물고기로 섭씨 1~5도 정도의 수온에서 서식하며 얼음이 있는 해역에서도 살아간다. 그 정도로 우리나라 연안의 수온이 떨어진 시기는 17세기 숙종 무렵이다. 17세기는 한반도 일대가 급격하게 한랭화하였던 시기였고, 낮은 기온 때문에 곡물이 제대로 자라지 못할 때, 바다에서 처음 보는 물고기가 찬물을 따라 남하한 것이다. 기근을 해소하라고 하늘이 내려 준 선물이었다. 이후 명태는 조선 후기부터 근대까지 겨울철 대표 생선으로 자리 잡았고, 특히 1960~1980년대에는 동해안에서 풍부하게 잡히며 국민 생선으로 사랑받았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에는 남획과 해양 환경 변화, 수온 상승 등의 이유로 어획량이 급격히 줄어들었고, 현재는 대부분 러시아산 명태를 수입해서 버티고 있다. 수산 분야에서는 명태를 복원하려고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나, 무망한 일이다. 현재 우리나라 연안의 수온은 겨울철에도 명태에게는 열탕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명태야말로 기후의 한랭화 때문에 문득 나타나서 우리의 입맛을 사로잡다가 어느 순간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린 물고기다. 우리나라 주변의 기후변화를 상징하는 물고기라고도 할 수 있다.
수온은 계속 오르고 있다. 몇 년 후에 우리나라 연안의 수온이 30도가 되면, 어획되는 물고기가 아예 달라질 것이다. 시원하고 담백한 맛으로 우리의 입맛을 돋우는 대구 역시 우리 주변에서 사라질지 모른다. 영하 1도에서 10도 사이에 서식하지만 가장 좋아하는 수온은 5~7도이므로, 명태보다 조금 높은 온도에서 버틸 수 있지만, 지금보다 더 수온이 올라간다면 대구도 더 이상 우리나라 해안에서 머물 수 없게 될 것이다. 오징어는 적응력이 뛰어나기는 하지만 대부분 한대와 온대를 오가기 때문에, 조만간 우리 곁을 떠날지 모른다. 기후변화는 이미 발등에 떨어진 불이다. 우리만 난감한 것이 아니다. 바닷속의 생물들도 난감하다.
2025-09-22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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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그린에너지 인프라로 여는 친환경 스마트 해양 도시
부산항을 매일 오가는 수천 척의 선박과 항만을 가득 메운 컨테이너는 부산 경제의 활력 넘치는 심장이다. 그러나 이 심장이 내뿜는 연기는 여전히 석유와 중유에 의존하던 과거의 흔적을 담고 있다. 기록적인 폭염과 폭우, 예측할 수 없는 해수면 상승이 더는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닌 우리의 일상이 된 지금, 바다는 더이상 화석 연료의 배출물을 무한정 감당할 수 없는 한계에 이르렀다. 이 거대한 항만의 에너지가 한순간에 친환경으로 바뀐다면 부산은 어떻게 달라질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바로 항만과 도시를 아우르는 그린에너지 인프라 구축에 있다.
그린에너지 인프라는 석유나 중유 같은 화석 연료 대신 수소, 암모니아, 메탄올, 나아가 태양광이나 풍력처럼 친환경적인 방식으로 생산부터 저장, 운송, 공급까지 아우르는 새로운 에너지 시스템이다. 이는 단순히 선박의 연료 탱크를 바꾸는 것을 넘어 항만과 도시의 에너지 체계를 친환경적으로 전환해 탄소 배출을 획기적으로 줄이고, 미래 경제를 준비하는 기반을 마련하는 일이다. 부산이 이 길을 선제적으로 나아간다면, 미래 친환경 선박 연료 공급 역량을 갖춘 북극항로의 거점 항구로서 세계 해양산업을 선도하는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
화석 연료 대신 친환경 전환 시대
탄소 배출 제로 항만·도시 만들어야
북극항로 거점 해양산업 선도 필수
수소 전환·재생에너지 100% 자립
장기 전략·전환 로드맵 구체화해야
도시 패러다임 전환 부산 미래 좌우
2023년 7월 국제해사기구(IMO)는 2050년 국제해운 탄소배출을 2008년 대비 100% 감축하는 ‘넷제로(Net-Zero)’로 목표를 확정했고, 2027년부터는 연료 표준제와 온실가스 가격 부과 제도를 시행한다. 유럽연합(EU) 역시 2024년부터 국제해운을 탄소배출권 거래제(ETS)에 포함시켰다. 수출입 물동량의 99.7%를 해운에 의존하는 한국에 이러한 변화는 경제 전반에 걸친 중대한 도전이자 기회이며, 특히 세계 2위 환적 항만인 부산항은 이러한 전환의 최전선에 서 있다.
세계 주요 항만들은 이미 그린에너지 인프라 구축에 박차를 가하며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네덜란드 로테르담항은 유럽 최대의 그린수소 허브를 구축하며 미래 에너지 전환을 주도하고 있다. 싱가포르는 세계 최초로 메탄올 벙커링을 상업화하고 2030년까지 다중 연료 인프라를 완비할 계획을 발표하며 이 분야의 선두를 달리고 있다. 특히 싱가포르는 친환경 연료 선박에 항만 사용료 감면 혜택을 제공하고, 국제적 협력을 위한 ‘녹색 해운 회랑(Green Corridors)’ 구축에도 적극적이다.
하지만 부산항은 액화천연가스(LNG)와 메탄올 벙커링 실증 및 상용화 성공의 긍정적 진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인 무탄소 연료 시스템은 아직 계획 단계에 머물러 있다. 이는 몇 가지 복합적인 원인에서 기인한다. 무엇보다 부산항의 탄소중립 종합계획 수립에도 불구하고 관련 정책들이 개별 프로젝트 단위로 파편화되고, 정책 주체들 간 이해관계가 분절화되어 장기적인 통합 전략이 부재하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로 꼽힌다.
여기에 2050년까지 약 71조 원에 달하는 막대한 선박 전환 비용과 높은 무탄소 연료 가격은 민간 투자를 가로막는 현실적인 장벽으로 작용한다. 더불어 차세대 연료에 대한 안전성 확보 문제, 기술적 불확실성, 그리고 전문 인력 부족 등 해결해야 할 과제도 여전히 남아있다.
부산이 나아가야 할 길은 분명하다. 항만과 도시를 하나로 묶는 ‘부산형 그린포트·스마트시티 마스터플랜’을 수립하고, LNG를 시작으로 메탄올, 암모니아, 수소로 이어지는 단계적 에너지 전환 로드맵을 구체화해야 한다. 이를 위해 북항과 영도 재개발 지역을 활용한 수소·암모니아 벙커링 실증 클러스터를 성공적으로 구축하고, 동시에 글로벌 선사와 에너지 기업의 투자를 유치하는 컨소시엄 모델을 통해 민간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이끌어내야 한다.
또한, 항만 장비의 수소 전환 및 재생에너지 자립률 100% 달성을 목표로 하는 ‘탄소중립 항만’ 전략은 도시의 장기 계획과 긴밀하게 연계되어야 한다. 최근 한미 관세 협상에서 합의된 1000억 달러 규모의 LNG 등 대규모 에너지 제품 구매는 부산의 그린에너지 인프라 구축에도 힘을 보탤 것이다.
부산은 바다의 무한한 잠재력을 바탕으로 새로운 미래를 열 수 있는 도시다. 그린에너지 인프라는 단순한 시설물이 아니라 부산의 산업, 도시, 에너지 패러다임 자체를 전환하는 핵심 계기가 될 것이다. 지금 한국은 이 거대한 전환의 흐름 속에서 결정적 순간 위에 서 있다. 강력한 의지와 과감한 투자, 그리고 시민과 기업의 협력이 뒷받침된다면 부산은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친환경 스마트 해양 도시’로 거듭날 수 있다. 그 출발은 지금, 바다 위에 새로운 에너지의 길을 놓는 일이다.
2025-09-17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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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칼럼] 프랜차이즈에 대한 단상
지난해 밀리언셀러에 등극한 부자가 되는 방법을 다룬 자기계발서 〈세이노의 가르침〉에서 엉뚱하게도 필자가 가장 인상 깊게 읽었던 대목은 장사와 사업의 차이였다. 세이노의 분석에 따르면, 장사는 지리적 장소를 중심으로 근거리 원내의 사람들을 주요 대상으로 하는 반면 사업은 지리적 장소의 한계를 뛰어넘어 원거리에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다. 또한 장사는 지리적 장소가 곧 고객과 만나고 고객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영업장소이기 때문에 위치가 중요한 반면 사업은 지리적 장소를 벗어날 수 있다. 요식업을 떠올려보면 프랜차이즈는 ‘사업’이고 동네 음식점은 ‘장사’다. 물론 지리적 장소에 구속되지 않는 프랜차이즈 본사만 사업이고 실질적으로 지리적 장소를 가지고 운영하는 가맹점들은 사업이 아닐 것이다. 예컨대 프랜차이즈 본사 인테리어는 관심 대상이 아니지만 가맹점 매장의 인테리어는 비극적 갈등이 빚어질 만큼 장소를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현대국가 정치, 헌법 통해 표준화
비슷한 규범 약속 '가맹 체제' 닮아
미국 ‘갑질’ 민주주의 자체에 위기
본사·직영점 이익 우선시하는 듯
만연한 표준화·규격화·비인간화
자비·용서 없는 무한경쟁만 조장
그의 분석에서 핵심은 물리적 공간성(지리적 장소)의 여부다. 흥미로웠던 이유는 물리적 공간성의 차이가 종교와 정치의 본질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프랜차이즈의 가장 큰 장점은 모든 가맹점이 본사 기준에 따라 동일한 품질의 상품과 서비스를 약속한다는 것이다. 맥도날드 햄버거는 외국에서도 한국에서 먹는 것처럼 균질한 맛이다. 반면 장사는 편차가 존재한다. 만약 우리 동네에 엄청난 맛집이 있다면 덕분에 근거리 원내 사람들의 복지는 올라갈 것이지만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다. 장사는 탁월성과 유연성을 기대할 수 있지만 위생 불량과 같은 자의적인 횡포도 우려할 수 있는 반면 프랜차이즈는 표준화된 규격의 세계다. 따라서 프랜차이즈가 주는 신뢰는 대단한 맛집은 아니더라도 일정 수준을 보장한다는 안정감이다.
현대사회의 정치는 종교와 같이 민주주의와 헌법을 통해 표준화되었고 이 프랜차이즈는 지리적 장소, 곧 국가에 관계없이 비슷한 법적 규범을 약속하고 임의성을 면한다는 가치를 가진다. 그런데 민주주의가 세계적으로 위기를 맞고 있다. 사업을 주도해온 프랜차이즈 본사 격인 미국이 가맹점들을 상대로 갑질을 하면서 본사와 자신의 직영점 이익만을 우선시하는 탓에 가맹국들이 부담해야 하는 로열티 지불이 상당히 높아졌다. 또한 갈수록 첨예해지는 정치적 양극화와 사회적 갈등은 가맹점의 존속에 위협으로 등장하고 있다. 한편 가맹국들은 프랜차이즈를 재생산하며 자국 내 불평등을 초래하기도 한다. 마치 수도에 본사와 직영점을 두고 지방에 가맹점을 두려 하는 시스템이다.
표준화된 규격의 세계가 위기를 겪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질문을 다르게 바꿔본다면 물리적 공간성의 배제가 불가능한 이유는 무엇인가. 인간은 지리적 장소가 필수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육체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숨 쉬고 먹고 자고 살아가는 모든 순간에 우리 몸이 위치할 공간을 필요로 한다. 정신만을 가지고 사업하는 프랜차이즈 본사와는 다른 것이다. 삶의 직접적인 수행 공간에서 세계는 고정된 규정적 대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물리적 장소는 필연적으로 주변 환경에 영향을 주고받으며 변화하는 공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안정하다. 사람은 언제나 동일한 값을 산출할 수 없고 표준화될 수 없다는 점에서 기계와 다르다. 프랜차이즈는 기계의 논리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예외를 두지 않고 균일한 결과를 도출할 수 있다. 프랜차이즈 모델의 정치경제 시스템은 압도적인 기계적 효율성을 통해 사회를 빠르게 발전시키고 막대한 부를 가져다주었다. 어쩌면 장사와 사업의 스케일은 전혀 다른 것이다. 그러나 인간적인 공간, 즉 휴먼스케일을 넘어선 규모는 이제 기계의 논리 아래서 사람을 소외시키고 인간의 비인간화를 지향한다. 지리적 한계 너머에 원거리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업적 시야는 초고층 빌딩에 올라서 지상을 조망하며 행인들을 점으로 만드는 것과 같다.
극단적인 사례는 전쟁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현대 첨단화된 전쟁은 원거리에서 버튼만 누르면 미사일이 날아가 적이라고 명명된 아무 일면식이 없는 타인을 공격하고 드론을 띄워 무차별로 폭격한다. 상대는 타격할 점으로 존재할 뿐이며 마주치지 않은 채 살인한다. 물리적 장소의 소거는 인간성이 놓일 공간을 제거한다. 이제 전쟁에는 자비도 연민도 용서도 자리하지 않는다. 기계는 아픔을 모르고 프랜차이즈의 대리인이 된 인간은 주어진 명령 외엔 양심을 가질 수 없는 로봇이 된다. 한 동네에서 카페 바로 옆에 카페를 열고 그 옆에 카페를 또 여는 프랜차이즈의 무한 경쟁 상도덕은 추상적인 자유시장 경쟁뿐 아니라 무한히 희생당하는 산업의 노동 현장과 전쟁의 폭력적 참상에도 놓여있다. 피 흘리는 것은 언제나 서로의 취약한 생명과 삶을 안고 싸우는 인간들이지 프랜차이즈 본사는 아니다.
2025-09-15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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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시베리아 작은 마을의 향토사박물관
지난달 하순 몽골과 동시베리아 바이칼 지방을 열흘간 여행하고 돌아왔다. 투르카 항에서 샤머니즘의 알혼섬까지 왕복 7시간을 멀미에 시달리며 바이칼 호수의 혼이라는 샤먼 바위와 13개의 세르게(성스러운 솟대)를 찾아간 것도 인상적이었지만, 제일 큰 충격은 부랴티야 자치공화국 바르구진 마을의 작은 향토사박물관이었다. 전제정치와 농노제를 깨고 입헌군주제와 공화제로 세상을 바꾸려고 노력한 최초의 ‘운동권’ 지식인들인 데카브리스트. 쇠고랑을 차고 1826년에 시베리아로 111명이나 유배를 왔다. 이 마을에서 활동한 데카브리스트 이야기를 직접 들을 수 있을까 싶어 간 것이었는데, 감동은 다른 데서 왔다. 꽉 찬 전시물, 작은 박물관의 종합적 역할, 운영자의 열정이 두루 놀라웠다.
바르구진은 한때는 광산으로 유명한 곳이었지만 지금은 6000명의 주민이 사는 작은 시골 마을이다. 수학과 정보학을 가르쳤다는 할머니 교사가 관장이고, 역사 선생이라는 딸이 운영실장을 맡아서 일하고 있다. 박물관은 동네 유일의 슈콜라(11학년 제 초중고) 부설로 마을 입구에 허름하게 서 있었다. 삐걱거리는 전시홀은 크게 3개인데, 안은 콘텐츠로 넘치고 있었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마을에서 발견된 매머드의 이빨과 턱뼈, 마을 사냥꾼들이 남긴 총, 아이들이 만든 옛 코사크 성채와 마을교회 미니어처, 마을의 각종 생활 도구, 학교 깃발, 군(郡)과 마을의 문장(紋章), 데카브리스트 큐헬베케르 형제가 이 마을에서 야학을 연 증거, 그들이 조사한 광물 표본, 마을 유대인의 역사, 1848년 이 마을에 유배 온 헝가리 대시인 샨도르 페테피의 흔적까지, 없는 것이 없었다. 1904~1905년 러일전쟁 때 만주 심양 근처의 전투에서 이곳 출신의 참전 군인이 전리품으로 획득한 일본도 한 자루도 한쪽에 있고, 볼셰비키 혁명에 가담했던 이 마을 청년들의 유품과 사진, 1941~1945년 독소 전에 참전했던 이 학교 출신 청년들의 학교 졸업 앨범도 가지런하다. 학교 뒤의 목공소에선 사라진 옛집과 옛 목조 교회 등을 학생들이 작은 건축물로 복원하고, 마을 주민들도 마을의 역사와 주민 생활상을 보여주는 물건이라면 뭐든지 여기에 아낌없이 기증해왔다고 한다. 작고 낡았으나 내실로 충만한 이 작은 박물관은 외지인에겐 1648년부터 시작된 400년 가까운 마을의 역사를 타임캡슐처럼 한눈에 보여주는 귀한 문화시설이다. 학생들에겐 살아있는 역사교육, 생활교육, 체험교육의 현장이다. 주민들에게는 보존하고 싶은 모든 기억의 보물 창고다.
겉으론 평온한 것 같아도 여기에도 우크라이나 전쟁의 상흔이 깊게 패 있었다. 할머니 관장이 느닷없이 젊은이들 사진 한 장을 가리키며 이 마을 출신으로 우크라이나전에서 전사한 청년들이라고 했다. 그 가운데에는 자기 손자도 있다고 말했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렇다면 저만치 저기 어두운 구석에서 무표정하게 서 있는 운영실장의 아들이 이 사진 속의 청년이라는 소리가 아닌가! 할머니와 딸은 스스로 자신들에게 부과한 과업으로 개인적 불행을 억지로 덮으며 매일매일을 버티는 듯 보였다. 나는 울음을 참으며 조용히 한쪽 팔로 할머니를 안아드리고, 방명록에 몇 줄을 남긴 뒤에 박물관 문을 나섰다. 문화력은 요란한 소음 속에만, 큰 규모로 지은 국립박물관에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진정한 문화의 힘은 조용한 조직력, 포기하지 않는 진정성, 대를 잇는 열정, 실력을 갖춘 작은 동네 박물관에 있을지 모른다. 거대한 서사와 지배계급에 초점을 맞춘 역사가 아닌 나와 우리의 작은 생활사, 미시사의 중요성을 마을을 산책하며 다시 느낀다. 아울러 내가 사는 부산 기장군 정관에도 지역사회의 향토사와 얽힌 이런 학교 박물관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밖에는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바르구진 마을에서 27년간이나 살면서 사면이 되어도 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가지 않은 데카브리스트 미하일 큐헬베케르(1798~1859)의 무덤은 마을 공동묘지 뒤편에 있었다. 귀족으로서의 화려했던 삶을 버리고 그는 이 벽촌에서 읽기, 쓰기, 산수를 사람들에게 무료로 가르치고 가난한 이를 위해 새로운 농작물 실험을 했다. 약국과 병원을 자기 집에 열었고, 인근 지역의 광물자원과 지리를 연구했다. 그의 무덤 앞에서 작은 박물관의 전시물 하나하나를 머릿속으로 다시 만지며, 데카브리스트들에 바친 러시아 문호 알렉산드르 푸시킨(1799~1837)의 시 ‘깊은 시베리아의 막장에서’를 중얼거려본다. ‘깊은 시베리아의 저 깊은 막장에/ 콧대 높은 인내를 보관하게나/당신들의 비통한 노동은/ 달음질치는 저 높은 생각과 함께 /절대로 사라지지 않으리…!’ 비가 조심조심 걷히기 시작하더니, 멀리 하늘 한쪽에서 시베리아를 데울 해님이 고개를 내민다.
2025-09-10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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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개와 늑대의 시간, 한국 외교의 성패
지난주 중국은 국제사회에 ‘대국굴기’를 과시하는 두 장면을 연출했다. 그 첫 번째가 9월 1일 톈진에서 열린 상하이협력기구(SCO) 정상회의였다. 2001년 출범한 이 협력체는 유라시아 최대 규모의 정치·경제·안보 플랫폼으로 이번 회의에는 20여 개국 정상과 10개 국제기구 수장이 참석해 사상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시진핑 주석은 이 자리에서 “냉전적 사고방식과 패권주의, 보호무역주의의 그림자가 여전히 남아 있다”며 “보다 정의롭고 합리적인 글로벌 거버넌스 체제를 구축하자”고 강조했다. 회의는 유엔과 국제기구 중심의 다자주의를 지지하는 공동선언을 채택했고, 중국 주도의 제도적·경제적 협력 기반을 한층 강화했다. 특히 미국의 고율 관세(50%)로 갈등을 겪다 7년 만에 회의에 복귀한 인도의 모디 총리를 향해 시 주석은 “용과 코끼리가 함께 춤춘다”는 표현으로 협력을 당부했다. 미국이 지난 20여 년간 인도·태평양 전략의 핵심축으로 삼아온 인도가 이번에는 중국 쪽에 발맞추는 듯한 행보를 보인 것이다.
이어 9월 3일에는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 전승절 80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시진핑 주석은 “인류는 다시 한번 평화냐 전쟁이냐, 상생이냐 제로섬이냐의 기로에 서 있다”며 반패권주의 메시지를 발신했다. 열병식에서는 중국이 처음으로 육·해·공 전력을 통해 핵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는 ‘전략적 핵 3축 체계’를 공개했다. 그러나 세계의 시선을 가장 끈 장면은 시 주석이 푸틴 러시아 대통령,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함께 망루에 선 모습이었다. 1959년 이후 66년 만에 재현된 이 장면은 북중러가 이해관계를 넘어 전략적 연대를 공식화했음을 보여주었고, 동시에 김정은의 북한이 강대국 외교의 틈바구니 속에서 나름의 생존 방식을 확보했음을 상징하고 있었다.
이렇듯 중국은 SCO 정상회의와 전승절 기념식을 통해 경제적·군사적 연대와 위상을 과시하며 미국 주도의 국제질서에 새로운 규칙을 세우겠다고 정면 도전했다. 그러나 국제사회, 특히 유럽과 동아시아의 선진국들은 미국의 리더십에 의문을 품으면서도 여전히 중국을 그 대안으로 인정하지는 않는다. 반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자신이 공들였던 푸틴과 김정은이 중국 쪽에 손을 맞잡는 모습에 적잖은 실망을 느꼈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와 그로 인한 서방 내부의 균열이 시진핑의 ‘대국굴기’를 오히려 가속화하며 국제사회를 더 큰 불확실성 속으로 밀어 넣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편 지난 8월 말 이재명 대통령은 일본과 미국을 잇달아 방문했다. 역대 대통령들이 외교·안보의 중심축인 미국을 먼저 찾던 관례를 깨고 일본을 먼저 찾은 것은 일본과의 관계를 공고히 해 이를 미국과의 협력 강화에 지렛대로 삼으려는 실용적 의도가 깔려 있었다. 이어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이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과의 친밀도를 높이고 신뢰를 구축했다. 동시에 3500억 달러(약 487조 원) 규모의 대미 투자를 약속하고 관세를 15%로 낮추는 데 합의했다. 그러나 일본 사례에서 보듯 이 막대한 투자금은 사실상 미국 제조업 부흥에 일방적으로 활용될 가능성이 크며, 투자 지연 시 관세가 다시 인상될 위험도 배제할 수 없다. 관세 문제는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는 셈이다. 더욱이 이번 정상회담에서는 한미안보협력의 핵심인 북한 비핵화, 미국의 한반도 안보 공약, 확장억제 보장이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그러나 핵보유국 지위를 주장해 온 북한은 중국·러시아와의 연대를 강화하고 있다. 전승절 행사에서 드러났듯, 북한은 강성 대국을 내걸고 미중 사이를 오가며, 러시아에는 군사적 지원을 제공하며 입지를 확대하고 있다. 반면 한국에 대해서는 ‘적대적 두 국가론’을 내세우면서 대화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
결국 이재명 정부 외교의 핵심은 미중 전략 경쟁과 ‘한미일 대 북중러’라는 대립 구도 속에서 미국의 일방주의와 북한의 핵전략이라는 두 개의 과제를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달려 있다. 안보에서는 한미일 공조를 강화하되, 경제와 비안보 분야에서는 중국과의 협력도 필요하다. 북한 문제에 대해서는 도발에는 단호히 대응하면서도 ‘통일 경쟁’을 내려놓고 핵 리스크 완화와 군사 충돌 방지에 집중해야 한다. 나아가 민주주의와 규범에 기반한 국제질서 강화를 원하는 국가들과 연대해 미국의 일탈로 약화한 국제 공공재를 보완하는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지금 한국 외교는 황혼 녘, 멀리 있는 형체가 개인지 늑대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이른바 ‘개와 늑대의 시간’에 서 있다. 기회와 위협이 교차하는 이 불확실성의 시기에 실용과 원칙을 국력에 걸맞게 어떻게 조율하느냐가 한국 외교의 성패를 가를 것이다.
2025-09-08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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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스테이블코인, 은행 시스템의 위기 아닌 기회
최근 금융·블록체인 업계에서 가장 뜨거운 화두는 단연 스테이블코인이다. 디지털 자산 시장의 변동성을 최소화하고, 기존 금융시스템의 한계를 보완할 수 있는 새로운 결제·정산 수단으로의 가능성 때문이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스테이블코인의 확산이 은행 본연의 사업 기반을 위협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높다. 필자의 회사는 부산시가 지원하고 우리은행이 운영하는 부산 디노랩(Digital Innovation Lab) 1기 기업으로 선정된 뒤 디노랩이 주최한 ‘오픈 이노베이션 데이’에서 블록체인 혁신 사업에 대해 발표할 기회를 가졌다.
이 행사에는 7개 기업이 참가했는데, 비댁스(BDACS)는 첫 번째 발표를 맡아 스테이블코인의 도입 필요성과 발행 구조, 그리고 각 이해관계자의 역할을 주제로 발표했다. 스테이블코인이 워낙 ‘핫’한 주제였던 만큼, 발표 직후 청중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특히 은행 관계자들이 보인 반응은 흥미로웠다.
은행들이 가장 먼저 지적한 우려는 수탁고 감소였다. 고객 자금이 은행 예금으로 유입되지 않고 스테이블코인으로 전환돼 외부 지갑에 보관된다면, 은행의 전통적인 수익 기반이 약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어 제기된 우려는 빅테크와의 경쟁이었다. 글로벌 IT 기업들이 스테이블코인 기반 결제 시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들 경우 은행이 기존 금융상품만으로는 경쟁력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인식이 깔려 있었다. 또 다른 지점은 전통 금융상품의 매력 약화였다. 예·적금이나 카드 서비스보다 더 빠르고 저렴한 대안이 등장하면, 고객을 붙잡아 두기가 갈수록 힘들어질 것이라는 위기감이 엿보였다.
이에 대해 필자는 정반대 시각을 제시했다. 스테이블코인은 오히려 은행이 새로운 기회를 선도적으로 포착할 수 있는 기반이 될 수 있다. 구체적 가능성은 여러 영역에서 확인된다. 우선 결제 인프라 혁신이다. 블록체인 기반 스테이블코인을 활용하면 은행은 결제·송금 비용을 줄이고 해외 송금이나 대규모 정산 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할 수 있다. 지금도 글로벌 결제망은 복잡하고 수수료가 높은데 스테이블코인은 이를 단순화해 고객에게 더 나은 경험을 제공할 수 있게 한다. 또한 스테이블코인 연계 상품 개발도 가능하다. 은행이 직접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하거나 이를 기반으로 새로운 예금·투자·대출 상품을 설계하면 기존 금융상품보다 더 매력적인 옵션을 고객에게 제시할 수 있다. 초기에는 다소 생소하더라도 장기적으로 은행이 블록체인 금융의 중심에 서는 길이 될 수 있다. 신사업 영역 확장도 있다. 블록체인 기반의 청산·결제, 디지털 자산 수탁, 글로벌 자본시장 연결 등은 은행이 그간 쌓아온 신뢰 자산을 바탕으로 진출할 수 있는 분야다. 과거 인터넷·모바일 뱅킹이 위기가 아닌 기회였듯, 스테이블코인도 은행에 ‘도전과 확장의 발판’이 될 수 있다.
이 흐름 속에서 은행들뿐 아니라 한국은행도 긴장하고 있다. 오랫동안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를 준비해 왔는데, 이재명 정부가 스테이블코인 도입에 강한 의지를 표출하면서 보이지 않는 경쟁 구도가 형성된 것이다. 특히 한국은행은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활성화될 경우 해외로 국부가 유출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 우려가 다소 과도하다고 본다. 이미 국내 자본시장은 해외 주식과 채권 투자에 활짝 열려 있으며 기업과 개인의 해외 투자 역시 일상화돼 있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국내외에서 사용된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국부 유출로 이어진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글로벌 무역과 투자에서 활용된다면, 원화 국제화라는 긍정적 효과까지 기대할 수 있다.
한국의 IT 산업이 지금과 같은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은 2000년대 초 ‘인터넷 버블’ 시절 이뤄진 과감한 인프라 투자와 기업가들의 혁신 덕분이었다. 당시의 시도는 지금의 네이버, 카카오 같은 토종 플랫폼이 글로벌 경쟁자들을 제치고 국내 시장을 지킬 수 있는 토대가 된 것이다. 스테이블코인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불확실성과 우려가 더 크지만, 장기적으로는 금융 혁신의 생태계를 키우는 씨앗이 될 수 있다.
결국 스테이블코인은 은행에 위기이자 동시에 기회다. 위기만 바라보면 새로운 경쟁자에게 밀려날 수 있지만, 기회를 본다면 결제 혁신, 상품 혁신, 신사업 확장의 주도권을 쥘 수 있다.
특히 부산은 정부가 지정한 블록체인 특구로서 이 혁신의 최전선에 서 있다. 디노랩과 같이 부산시와 금융기관이 협력해 혁신 기업을 지원하는 시도는 좋은 출발점이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지 않고, 스테이블코인 관련 기술과 서비스 기업에 대한 더 적극적인 지원과 실증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그래야 부산이 단순히 국내를 넘어, 아시아의 블록체인 금융 허브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2025-09-03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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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칼럼] 비혼주의자의 결혼 선언
10년 동안 비혼을 이야기하던 친구가 곧 결혼한다. 30대 초입에서 결혼 소식은 흔해진 지 오래지만, 이번에는 다소 놀랍게 다가왔다. 그만큼 그 친구가 결혼하지 않을 거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것 같다. ‘결혼 안 한다던 친구가 제일 먼저 결혼한다’는 어른들 말씀 틀린 거 하나 없다는 우스갯소리를 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무념무상으로 쳇바퀴 같이 굴러가는 일상을 살아가는 내게 이 소식은 오랜만에 ‘생각’이라는 걸 하게 했다. 지난 10년간 우리가 함께 공부하고 토론해 온 페미니즘의 여정이 겹치며, 관점을 전환해주는 하나의 사건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던 ‘제도’에 눈을 뜬 건 20대 초반이었다. 왜 여성만 당연히 가사 노동을 하는지, 왜 아이의 성은 아버지를 따르는지, 왜 육아와 돌봄은 당연히 여성의 몫으로 여겨지는지, 익숙한 것들이 낯설게 보이던 시간이었다. 그 무렵, 한국 사회에는 여성 대상 범죄를 계기로 다시 한번 페미니즘의 물결이 일고 있었다. 친구를 만난 것도 그때였다. 당연히 결혼해 출산과 육아를 전담할 미래를 그리고 있었던 나는, 처음으로 자신을 ‘비혼주의자’라고 소개하는 친구를 만났다. 나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왜 비혼주의자가 되기로 결심했는지’를 물었고, 친구는 “1인 가구야말로 자신의 주체성을 지킬 수 있는 가족 형태라고 믿는다”고 답했다.
'혼자일 때 독립적이고 자유로움’ 인식
10년 전 비혼·독신 등 1인 가구 급증
최근 결혼·임신·출산 등 선택지 다양
각자의 욕망 솔직히 인정하는 분위기
남성·여성 성 역할 구분 짓지 않고
두 주체가 선택한 사랑 방식 존중을
학교에서 사회학 수업을 들으며 우리는 생각을 점점 더 구체화해 나갔다. 결혼, 임신, 출산은 여성의 주체성을 억압하는 제도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결혼을 거부할 수 있는 언어를 손에 쥔 첫 세대로서 목소리를 높이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런 생각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2015년 오마이뉴스에서 소개된 기획 기사 ‘결혼제도를 묻다 ④-비혼여성집담회’는 이렇게 전한다. “2015년에는 혼인 건수가 30만 건대까지 줄어들고, 1인 가구 비중이 전체 가구의 약 27%를 차지하는 등 비혼 및 독신 삶이 ‘소수의 선택’이 아니라 구조적 변화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실제로 통계청 혼인 건수를 보면, 2015년 혼인은 30만 2800여 건으로 2003년 이후 최저였고, 1인 가구는 급증해 4인 가구를 제치고 대표적 가구 형태가 되었다.
하지만 나는 결혼과 임신을 욕망하는 사람이었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나는 ‘페미니즘을 지지한다면 비혼을 선택해야 한다’는 분위기를 느꼈고, 결혼과 출산을 원하는 마음이 스스로 모순처럼 여겨졌다. 그 경계에서 갈팡질팡하며 제도를 비판하면서도, 내 안의 욕망을 인정하기 두려워했다. 그러나 그것은 여성의 선택지를 오히려 줄이는 관념이었다. 미국의 작가 록산 게이는 〈배드 페미니스트〉에서 이렇게 말했다. “페미니즘은 여성이 자신이 선택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결정을 내릴 때조차 그것을 지지하는 기반 위에 서 있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놓치고 있던 지점이었다. 다른 여성의 결정을 지지하는 것이 곧 페미니즘의 정신인 것이다.
시간이 흐르며 우리 세대는 더 복잡해졌지만, 동시에 더 자유로워졌다. 주변에는 결혼만 하되 임신과 출산은 하지 않겠다는 사람도 있고, 결혼은 하지 않지만 아이를 낳고 싶다는 사람도 있다. 입양을 꿈꾸는 사람, 1인 가구를 유지하겠다는 사람도 있다. 분명한 것은 선택지가 다양해졌고, 각자의 욕망을 솔직히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중요한 건 이 선택들이 더 이상 ‘정상 가족’에 비해 부족하거나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정상 가족의 경로를 따르지 않으면 어쩐지 잘못 살고 있다는 기분, 설명해야만 할 것 같은 분위기를 느끼기도 했지만, 이제는 각자의 방식이 자연스럽게 존중받아야 한다는 흐름이 조금씩 자리 잡고 있다.
10년이 흐른 지금, 나는 친구에게 ‘어떻게 결혼을 결심했느냐’고 묻는다. 친구는 오랫동안 혼자일 때만 독립적이고 자유로울 수 있다고 믿었지만, 이제는 둘이서도 서로의 주체성을 지킬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했다고 했다. 남성과 여성 모두 성 역할에 스스로를 구분 짓지 않고, 서로의 주체성을 지켜나갈 수 있다. 예를 들어 남성의 육아와 여성의 직장 생활이 더 이상 특별하지 않은 모습이 되어가고 있다. 두 주체가 가족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선택한 사랑의 방식을 존중하는 것, 그것이 2025년 우리가 그리는 이상적 가족의 모습 아닐까.
그래서 친구의 결혼 소식은 내게 단순한 소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세대를 관통하는 질문이자, 우리 사회가 어디까지 변했는지를 가늠하게 하는 계기였다.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세대의 고민을 증명하는 사건이자, 앞으로의 삶을 함께 모색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지난 10년간 우리가 페미니즘을 통해 배운 가장 중요한 교훈일지 모른다.
2025-09-01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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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바다에서 바다로
지난주 부산 관광 미래 네트워크 회원들과 함께 팬스타 크루즈 미라클을 타고 2박 3일 일정으로 오사카 박람회장을 다녀왔다. 하루 동안만 엑스포장을 둘러보는 일정이 과연 의미 있을까 잠시 고민했지만, 2030 부산세계박람회 유치에 실패하고 재도전을 준비하는 부산의 입장에서 현장을 직접 체험해 보자고 생각했다. 개인적으로도 이번 방문은 특별했다. 1993년 대전엑스포 공식 도우미로 활동했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당시 회장 곳곳을 누비며 600명의 회장 도우미와 1200명의 전시관 도우미들과 함께 관람객을 맞이한 기억이 생생하다. 93일간 이어진 축제는 20대 대학생이었던 필자에게 잊지 못할 추억의 장과 함께 관광학자의 길을 제공해 주었다. 이번 오사카 방문은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학자로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부산 관광의 미래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여정이었다.
오사카 엑스포 방문길 크루즈 경험
이동 아닌 '관광' 자체 효능감 높아
박람회장 일본 청결 수준 명불허전
외국어 서비스 등 섬세함은 낙제점
관람객은 환대·소통만 기억할 따름
엑스포 재추진 때 타산지석 삼아야
오사카로 향하는 길은 크루즈 자체가 주는 설렘으로 시작됐다. 팬스타 크루즈 미라클은 엄밀히 말하면 대형 크루즈선은 아니고 페리와 크루즈의 중간쯤에 해당한다. 이것은 호텔 등급으로 따지자면 육성급이나 오성급 호텔이라기보다는 비즈니스호텔 또는 관광호텔급에 해당한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좀 더 쉬울 것 같다. 규모는 작았지만 선상 생활은 기대보다 만족스러웠다. 객실은 쾌적했고, 사우나와 요가·줌바 프로그램, 저녁 식사 후에는 쇼와 이벤트 프로그램까지 마련되어 긴 이동 시간조차 여유롭고 즐겁게 보낼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세 끼 식사가 단조롭지 않고 균형 있게 제공되어 ‘이동’이 아니라 ‘휴식’을 체험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이 경험은 부산이 앞으로 해양관광을 어떻게 키워야 할지에 대한 작은 힌트가 되었다. 크루즈는 단순한 교통수단이 아니라, 관광 그 자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박람회장에 도착하니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일본 특유의 청결과 질서였다. 수많은 인파가 몰렸음에도 회장은 마치 개막 첫날처럼 정갈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바닥이나 조경, 안내 시설은 흠잡을 데 없이 잘 유지됐고, 화장실조차 시각과 후각 모두 쾌적했다. 10년 넘게 여러 지자체 축제 평가에 참여해 온 내 경험으로는, 이 정도의 청결 유지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고 있다. 일본이 가진 강점이자 우리가 배워야 할 대목이었다.
그러나 감탄만 할 수는 없었다. 오사카 박람회장의 상징인 대지붕링(The large roof ring) 주변의 식물은 고사하거나 잡풀이 자라난 부분이 많이 있어서 조금 아쉬웠다. 잡풀이 자라난 부분은 어쩌면 생명을 잇는다는 주제 측면이 아닐까 싶기도 했지만 확인하기는 어려웠다. 대부분의 전시관은 사전 예약제로만 운영되어 자유롭게 관람하기 어려웠고, 글로벌 행사를 표방했음에도 불구하고 외국어 서비스는 부족했다. 한국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긴 대기 끝에 입장했지만, 전시 내 내레이션은 일본어로만 제공되었고 영어 안내도 일부에 불과했다. 관람객 참여 유도 역시 일본어 위주라 외국인 방문객은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긴 대기 시간 동안 별도의 안내나 소통이 없었던 것도 아쉬웠다.
이 대목에서 1993년 대전 엑스포가 떠올랐다. 당시 우리는 줄을 서 있는 관람객에게 간단한 인사를 건네고, 프리쇼 공간에서는 전시 영상을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을 곁들였다. 메인 영상관에 들어가기 전후로도 안내 멘트가 이어져 관람객은 단순한 구경꾼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주인공이 되었다. 덕분에 수많은 전시관 중 몇 개만 관람해도 만족감을 얻을 수 있었다. 반면 이번 오사카 엑스포는 첨단 영상과 레이저쇼를 선보였음에도 설명이 없어 많은 관람객이 멀뚱히 서 있을 뿐이었다. 기술은 화려했지만, 관람객과의 교감은 실종된 느낌이었다.
이번 경험은 부산에 중요한 숙제를 던져주었다. 세계박람회를 꿈꾸는 우리는 단순히 새 공항과 전시장, 크루즈 터미널 같은 하드웨어에만 치중해선 안 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관람객 중심의 운영 시나리오다. 긴 대기 시간도 즐거운 체험으로 바꾸는 섬세함, 다양한 언어로 제공되는 안내, 그리고 사람 사이의 따뜻한 교감이 필요하다. 기술은 도구일 뿐, 결국 관람객의 기억에 남는 것은 ‘환대’와 ‘소통’이다.
부산은 바다를 품은 도시이자 바다를 통해 세계와 연결되는 관문이다. 앞으로 수많은 크루즈 관광객과 MICE 산업 방문객이 북항으로 들어오게 될 것이다.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은 단지 새로운 건물이 아니라, 그들을 맞이하는 도시의 태도다. 가덕신공항이 개항하기 전에, 부산은 어떤 누가 방문해도 불편하지 않을 관광도시 부산을 먼저 만들어야 할 것이다. 개인으로 와도, 단체로 와도 불편하지 않은 해양도시. 그것이야말로 부산을 진정한 해양관광의 메카로 만들고, 세계인의 기억에 오래 남을 엑스포를 완성하는 길일 것이다.
2025-08-27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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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연공서열 개혁 없이 '공대 한국' 만들 수 없다
2000년대에도 의대·치대·한의대 등 이른바 ‘메디컬 학과’의 인기는 대단했지만 요즘 같은 정도는 아니었다. 입시 학원에서 배포하는 정시 배치표(자연계) 최상위권에는 서울 소재 명문대학 의대와 더불어 서울대 이공계 학과들이 여럿 이름을 올렸다. 휴대전화·반도체·자동차·선박 등 우리 대기업의 수출이 나날이 증가하던 시절, 전기전자공학과·화학공학과·기계공학과를 의미하는 ‘전화기’ 학과들은 취업 보증수표처럼 여겨지며 높은 경쟁률을 기록했다.
2010년대 들어 지방대 의대들의 서울대 공대 추월이 시작됐다. 의대라면 대학 브랜드도 상관없다는 신호였다. 변화는 2020년대에 완전히 굳어졌다. 2020년까지만 하더라도 서울대 수리공학부나 컴퓨터공학부 등이 자연계 상위 20위권에 이름을 올렸지만, 2022년부터는 의학 계열 학과들이 상위 20위를 모두 장악했다(종로학원 배치표 기준).
기업 보상, 성과 아닌 근속연수 중심
걸출한 인재에 천편일률적 보수 적용
연구개발에 열심히 몰두할 필요 없어
미국·중국 업체, 글로벌 '스카웃 전쟁'
10년간 연평균 3만 명 국내서 해외로
실적 중심 연봉 책정 등 대책 서둘러야
‘의대에 미친 한국’은 최근 청년층에서도 뜨겁게 논의된 이슈다. KBS가 지난달 방영한 ‘다큐 인사이트-인재전쟁’은 우리나라 의대 열풍을 ‘공대에 미친 중국’과 비교하며 큰 충격을 주었다. 무엇보다 요즘 중국이 1980년대 우리나라와 닮았다는 사실이 씁쓸함을 전했다.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전환을 꾀하던 당시 우리나라에서도 자연계 최고 인기 학과는 의대가 아닌 공대였다. 수재들이 공대로 모여 치열하게 경쟁한 덕분에 우리나라 제조업 역량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IMF 외환위기가 이런 흐름을 꺾은 계기가 됐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어 보인다. 외환위기가 어떤 위기였나. 1997년 1월 한보를 필두로 삼미, 진로, 한신, 기아, 해태, 뉴코아 등 내로라하는 대기업이 줄줄이 무너졌다. 기업들은 당장 불필요해 보이는 연구개발(R&D) 예산을 우선 삭감했다. 관련 인력들은 불황의 칼바람을 곧이곧대로 맞아야 했다. “이공계 일자리는 불안하다”라는 인식이 확산했다. 수능 도입 초기만 해도 반반이었던 인문계와 자연계 응시생 비율은 2000년대 초반 7대 3 이상으로 벌어졌다. 그때의 청소년·청년들이 지금 학부모가 됐다. 이들이 자녀에게 어떤 전공을 권유할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모든 일에는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다. 안정적이면 보상이 작고, 보상이 크면 높은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게 세상 이치다. 그런데 의사라는 직업은 안정적이면서도 높은 소득을 얻는다. 면허로 보호받기 때문이다. 의대 정원은 2025학년도 신입생을 제외하곤 2006년부터 줄곧 3058명으로 동결된 상태다. 고령인구가 크게 늘고 있고, K-뷰티가 각광받으며 외국인 관광객의 피부과·성형외과 수요도 급증하는 중이다. 의사로선 위험은 적은데 잠재 수익은 무궁무진한 셈이다.
반면 이공계 일자리는 안정성을 담보하지 못한다. 일단 산업 변화가 너무 빨라졌다. 정년 보장은 언감생심이다. 불과 몇 년 전까지 우리나라 경제를 이끌었던 화학·정유·디스플레이·배터리 산업이 최근 큰 어려움에 직면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성공한다고 해도 따르는 보상은 제한적이다. 기업의 보상 체계가 실적이나 성과가 아닌 근속연수를 중심으로 짜여있기 때문이다. 연공서열제는 걸출한 천재에 대한 보상을 평범한 직장인의 월급으로 제한한다. 제아무리 특출난 성과를 보인다고 하더라도 받는 보상이 무능한 상사보다 적다면 굳이 아등바등 연구개발에 몰두할 필요가 없다. 의대로 향하거나 회사에서 적당히 자리를 지키는 게 개인으로선 합리적 선택이 된다.
대한상공회의소 지속성장이니셔티브(SGI)는 지난 6월 공개한 ‘한국의 고급인력 해외 유출 현상의 경제적 영향과 대응방안’ 보고서에서 “지난 10년간 연평균 3만 명의 이공계 인력이 해외로 유출됐다”며 “컴퓨터공학, 바이오공학, 로봇공학 등 첨단분야에서 인재 유출이 두드러졌다”고 분석했다. 인재 유출의 주요 원인으로는 단기 실적 중심의 연구평가 체계, 수직적 조직문화와 함께 낮은 보상 체계가 꼽혔다. SGI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성과 중심 보상을 강화하는 게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올해 초 중국에서 생성형 인공지능 딥시크가 공개되며 전 세계에 충격을 준 뒤, 샤오미가 딥시크 개발에 참여한 개발자 뤄푸리에게 스카웃 제의를 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1995년생인 그녀에게 샤오미가 제안한 연봉은 우리 돈으로 약 20억 원이었다. 어디 그런 연봉을 제안하는 기업이 샤오미뿐이며, 그런 제안을 받는 개발자가 뤄푸리뿐이겠나. 화제가 된 다큐멘터리의 제목처럼 세계적으로 ‘인재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미국과 중국의 기술 기업들이 전 세계 이공계 인재를 싹쓸이해 가는 동안, 우리 기업들은 연공서열 문화에 손발이 묶인 채 바라만 보고 있는 건 아닐까.
2025-08-18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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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디지털자산시장 불장에 대비하는 자세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 퇴직연금 ‘401K’의 암호화폐 투자 제한 규정을 해제하자, 비트코인은 11만 7000달러 선을 넘어서며 사상 최고가 갱신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이어 트럼프 대통령이 암호화폐 친화적 경제학자 스티븐 미란을 연방준비제도(Fed) 이사로 지명하면서, 디지털자산시장의 대규모 불장(강세장)이 임박했다는 전문가들의 예측이 잇따르고 있다.
미국은 이미 디지털자산시장 강세장에서 미국의 국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제도적 기반을 완성했고, 개인부터 기관까지 전방위적 투자에 나서고 있다. 반면 한국은 여전히 규제 미로에 갇혀 있고, 그 사이 우리 기업들은 하나둘 해외로 떠나고 있다.
미, 퇴직연금 암호화폐 투자 제한 해제
8조 9000억 달러 디지털 자산 유입
비트코인 사상 최고가 갱신 기대 커져
제도 설계 지연 땐 글로벌 경쟁 밀려
부산, 블록체인 특구 지위 최대한 활용
혁신 기업 비즈니스 검증 환경 조성을
트럼프 행정부가 추진하는 ‘지니어스법’(GENIUS Act, 미국 스테이블 코인 국가 혁신 지침법)은 단순한 규제 완화를 넘어선다. 이는 달러 연동 스테이블코인을 제도권으로 편입시켜 디지털 시대의 달러 패권을 공고히 하려는 국가 차원의 전략이다. 현재 스테이블코인의 99% 이상이 달러 기반이며, 대표주자인 테더(USDT)의 시가총액만 1400억 달러를 넘어섰다.
더 주목할 점은 테더가 미국 국채 보유량을 1270억 달러로 늘리며 한국을 제치고 세계 18위에 올랐다는 사실이다. 스테이블코인 발행사들이 담보로 미국 국채를 대량 보유하면서 국채 수요가 증가하고, 결과적으로 금리 상승 압력은 줄어들며 미국의 재정 부담도 완화된다.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를 디지털 금융 영역까지 확장하는 치밀한 설계다.
이와 대조적으로 한국에서는 안타까운 일들이 반복되고 있다. 음악 저작권 기반 디지털 증권을 개발한 뮤직카우가 대표적 사례다. 국내에서는 규제 불확실성으로 영업 손실만 거듭하던 이 회사가 미국에서는 증권거래위원회(SEC) 승인을 받아 완판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같은 기술, 같은 상품이지만 제도적 환경의 차이가 성패를 갈랐다.
국회에서 ‘디지털자산기본법’이 발의되고 원화 스테이블코인 논의가 시작됐지만, 속도는 여전히 더디다.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와 민간 스테이블코인이 공존하는 시대가 다가오는데, 제도 설계에서 뒤처진다면 한국은 글로벌 디지털 금융 경쟁에서 변방으로 밀려날 위험이 크다. 시장 신호 역시 명확하다. 한때 한국의 뜨거운 투자 열기를 상징했던 ‘김치 프리미엄’은 사라졌고, 오히려 해외 가격이 더 비싼 ‘역프리미엄’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글로벌 흐름은 정반대다. 비트코인 반감기 후 나타나는 4년 주기 강세장, 미국의 비트코인 ETF 승인, 상장 기업들의 대규모 비트코인 매입, 연말 금리 인하 전망까지 모든 조건이 사상 최대 규모의 불장을 예고하고 있다. 스테이블코인 발행량이 역대 최고를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도 시장의 팽창 모드를 뒷받침한다.
특히 401K 투자 제한 해제는 게임의 판을 완전히 바꿨다. 8조 9000억 달러 규모의 거대 자금이 디지털자산 시장으로 유입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이것이 미국 정부의 ‘묵시적 보장’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수천만 미국인의 노후 자금이 비트코인에 연동되면, 미국 정부가 비트코인 시장을 일정 수준 이상 방어해야 할 동기가 생긴다. 이를 간파한 미국의 개인과 기업들은 이미 ‘전략적 진입’에 나서고 있다.
그렇다면 핵심 질문은 이것이다. 부산은 준비하고 있는가?
부산은 대한민국의 블록체인 규제자유특구로 지정되었고, 디지털 금융 중심도시를 표방하고 있다. 하드웨어 인프라는 어느 정도 갖춰졌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것은 ‘소프트 인프라’다. 관련 기업과 인재가 모이고, 글로벌 디지털 금융의 흐름을 체감할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드는 일이다.
부산이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글로벌 수준의 디지털자산 콘퍼런스와 네트워킹 행사를 정기적으로 개최하며, 사람과 기업을 부산으로 모이게 해야 한다. 동시에 중앙정부가 부여한 블록체인 특구 지위를 최대한 활용하여 샌드박스를 통해 디지털자산 혁신 기업들이 부산에서 실제 비즈니스 모델을 검증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야 한다.
핵심은 유망한 디지털자산 기업이 서울에서 실행하지 못하는 비즈니스 모델을 검증하기 위해 싱가포르나 두바이로 나가지 않고, 부산에서 비즈니스를 검증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부산의 대학과 공공기관이 참여하는 체계적인 인재 양성 프로그램을 구축하여 디지털 금융 전문가를 키우는 데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미국이 이미 달리고 있다면, 우리는 최소한 시동을 걸어야 한다. 불장은 준비된 자에게만 기회가 된다. 부산이 그 선봉에 설 수 있을지는 지금 이 순간의 선택에 달려 있다. 대한민국의 디지털 금융 미래가 부산의 결단을 기다리고 있다.
2025-08-11 [18: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