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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대선에서 사라진 관광
조기대선이 눈앞으로 다가오면서 각 후보들의 선거공약과 정책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날씨만큼이나 뜨거워지고 있다. 탄핵 정국 이후 급속히 치러지는 선거전 속에서, 각 후보들은 경제와 민생을 중심으로 공약을 쏟아내고 있다. 후보들의 공약을 보노라면 경제를 중심으로 한 일자리 창출이 현 대한민국의 최우선 현안이라는 점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하지만 시간을 들여 꼼꼼히 경제와 관련한 공약을 들여다 보는 순간 이상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제조업을 필두로 하는 전통적 2차 산업에 방점을 둔 점은 이해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3차 산업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관광 분야의 정책과 공약은 어느 후보에게서도 찾아보기가 어려워서였다. 후보들의 캠프에는 관광 분야에 관심을 두는 전문가가 아예 없다는 말인가. 선거 인력을 구하는 것도 후보들의 관심사가 반영된다고 봤을 때 후보들의 관심이 없거나 부족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관광을 전공한 필자의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었다.
얼마 전 부산 관광산업 관련 단체에서는 관광 실무자들의 의견을 반영한 정책을 모아 특정 정당의 국회의원에게 전달하는 행사를 한 바 있다. 또 다른 당은 관광 관련 대학교수들을 모아 지역 정책위원 간담회를 가진 것으로 기억한다. 이렇게 관련 정책 마련을 위한 움직임을 하고도 정작 대선 후보가 발표한 관광 관련 공약은 전혀 없는 것이 현실이다.
혹시 미처 발견하지 못한 팩트가 있을지 몰라 인공지능에게 물어보니, 후보들이 관광산업을 ‘언급’은 했다는 답변이 돌아온다. 하지만 역시나 세부적으로는 눈에 띄는 전략도, 실행력 있는 구체안도 보이지 않는다. 그나마 문화나 콘텐츠 분야를 통해 간접적으로 관광과 연결되는 공약이 있을 뿐이다. 디지털 전환(DX)이나 생성형 AI를 기반으로 한 관광 정책은 전무하다. 미래 먹거리로 관광산업을 키워야 한다는 ‘언급’만 반복된다.
부산을 예로 들면 더욱 걱정스럽다. 가덕신공항과 GTX 연결, 초광역 관광권 구축 같은 메가 인프라에 대한 후보들의 ‘언급’만 연일 계속되고 있다. 이 같은 인프라와 함께 어떤 콘텐츠로 지역 관광의 승부수를 던질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아예 없다. 이번 대선 과정만 놓고 본다면 부산 관광산업의 미래는 점점 깜깜이가 되어가는 듯해 심히 걱정스럽다.
2000년대 초반 태국과 싱가포르는 ‘의료관광’을 내세워 관광의 새 지평을 열었다. 기존 관광자원의 경쟁력을 유지하면서 이를 뒷받침할 인프라로 공항, 컨벤션센터 등 기반 시설을 대대적으로 개선한 결과다. 콘텐츠와 인프라가 함께 가야 한다는 교훈이다.
이번 대선이 끝나면 곧바로 지방선거가 기다리고 있다. 이번 대선 결과에 따라 지방선거에서 나올 정책이나 공약들의 방향이 구체화할 것이다. 부산은 과연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관광은 부산의 10대 전략산업에 항상 포함돼 있으면서도 관련 연구실도 관광 전문 연구원도 거의 없는 실정이다.
부산의 관광은 2030 엑스포 유치 실패 이후 뚜렷한 비전이 없다. 외국인 관광객 유치에 나섰다고 하지만 실행력 있는 전략은 잘 보이지 않는다. 디지털 전환에 대한 논의는 있어도 현장 실무자나 자영업자가 체감할 수 있는 실행 방법론은 부재하다. 데이터 활용과 관련해서도 ‘가능성’만 이야기할 뿐, 어떻게 수익을 만들 것인가에 대한 구체성은 없다. 그렇기에 이번 대선에서 이와 관련한 정책이나 공약이 전무한 점이 더더욱 안타깝다.
관광은 단순한 서비스산업이 아니다. 교육, 외식, 숙박, 교통, MICE, 콘텐츠, 부동산까지 복합적으로 융합된 미래 전략산업이다. 이 산업이 살아야 상인들은 장사가 되고, 기업은 활기를 띠며, 청년은 돌아온다. 부산이 관광도시로 지속 가능한 성장을 이루기 위해서는 전문적인 연구기관과 산업 지원센터 설립, 관광DX 예산 확대, 지역형 콘텐츠 전략 마련이 필요하다.
이번 대선에서는 관광이 실종됐다. 그렇다면 이제 다가올 지방선거에라도 기대를 걸어야 한다. 관광산업에서 생산되는 데이터와 이를 활용한 지역경제 자생력 강화 전략이 정책과 공약으로 등장하기를 바란다. 산업 전반에 걸친 디지털 전환의 기로에서 관광산업이 뒤처질 수는 없을 것이다. 제조업 기반이 빠진 자리에 관광산업이 앞장서서 경제적인 파급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 정책이 만들어져야 ‘다시 태어나도 살고 싶은 부산’을 만들 수 있다.
관광 산업은 교육, 외식, 숙박, 교통, MICE, 부동산, 콘텐츠 등 모든 것이 복합적으로 융합되어 있기에 미래 전략산업의 가치는 무궁무진하다. 디지털 전환(DX)의 시대에 걸맞은 산업으로 재창조 되기 위해 부디 다음 선거에서는 관련 공약과 정책을 볼 수 있길 간절히 바라 본다.
2025-05-28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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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대통령이라는 시대정신
대통령 선거가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계엄과 탄핵의 결과로 이어진 이번 선거는 민주주의의 위기 극복, 경기 침체와 불황의 돌파구로서 더욱 남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전문가들은 이번 선거의 핵심 키워드로 사회통합과 갈등해소를 꼽았고, 개헌 논의까지 굵직한 정치 과제들이 많은 만큼 변화에 대한 기대와 열망도 크다. 그러나 역대 선거 중 가장 늦은 공약집 제출, 통합이라는 키워드가 무색할 정도의 네거티브 공방전으로 실망을 안겨주고 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역대급 ‘노잼’ 선거라는 일각의 평가와 달리 선거운동 기간 내내 한국 사회의 축소판이나 다름없는 모습을 보여주어 마지막까지 조금의 긴장도 늦출 수 없다.
우선 시대착오적 발언들이 오갔다. 첫 신호탄은 김문수 후보가 쏘아 올렸다. 동료 여성 정치인을 ‘미스 가락시장’ 운운하며 낮은 성인지 감수성으로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후보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사안은 아니지만 판사의 룸살롱 접대 의혹을 두고 벌어진 공방에서 개혁신당의 함익병 공동선대위원장은 “내 나이 또래면 룸살롱 안 가본 사람이 없다”고 공개 발언하여 논란을 일으켰다. 2004년 성매매 방지법이 시행될 당시 한 정치인이 성구매자 처벌에 반대하며 “(그렇게 되면) 남자들이 대부분 감옥에 갈 것”이라고 말한 것을 연상시킨다.
이번 대선의 또 다른 특징으로 전반적인 ‘보수화’와 ‘여성정책의 실종’을 꼽는 전문가들도 있었다. 광장의 주역이 2030세대 여성들이라는 평가와 별개로 각 후보 캠프에서 발표한 10대 공약에 ‘여성공약’이라고 할 만한 정책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여성정책의 실종은 적어도 이번 선거에서의 문제의 핵심은 아닌 것 같다. 우리 모두는 역대급 불황이라는 경제적 위기 속에 이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힘이 민주적인 정치제도라는 것을 공감하는 보통의 시민들이기 때문이다. 2030세대 여성들은 물론 남성들이 당면한 문제는 똑같이 주거와 일자리와 같은 공통의 문제이며, 여성들의 경우 거기에 더해 안전의 문제까지 정책적 고민이 더 필요한 상황일 뿐이다.
사실 여성정책은 애초 진보나 보수의 의제로 뚜렷하게 구분하기 어렵다. 박근혜 정부에서 성폭력이나 가정폭력 대응 정책이 강화되었던 것처럼 보수적 성격의 정부에서 더 적극적인 여성정책을 내어놓는 경우도 있다. 성폭력 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해결이 보다 성평등한 사회를 앞당겨줄 것이 자명하다면 여성의제는 진보 프레임으로만 접근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니다. 여성의 정치세력화나 평등 의제를 적극 주장하는 여성운동 역시 좌우를 가리지 않는다.
문제는 여성정책을 고민하고 생산하는 정치 주체들의 가치관 실종이다. 성별은 표 계산을 위한 정치공학적 수단으로만 등장하는 것 같다. 보수든 진보든 각자의 가치 속에서 어떻게 여성과 돌봄, 안전과 같은 사회적 이슈들을 정책화할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없을 때 그 결과는 상상력의 빈곤으로 드러난다. 더불어민주당은 비공식적으로 ‘출산가산점제’ 공약을 언급하여 여론의 질타를 받았다. 국민의힘은 위헌적인 ‘군가산점제’를 다시 띄우며 채용갈등을 부추긴다는 비난을 받았다. ‘새로운 시대’를 슬로건으로 내세우며 젊은 대통령 후보로서 기대감을 불러일으킨 이준석 후보는 굳이 1호 공약으로 여성가족부 폐지를 내세우며 여전히 반여성주의와 성별 갈등을 정치적 지지기반으로 삼고자 하는 것 같다.
지난달 여성가족부에 따르면 ‘2023년 국가성평등지수’는 65.4점으로 2022년(66.2점) 대비 0.8점 줄었다. 윤석열 정부 집권 1년 만인 2023년에 사실상 처음으로 하락했다. 지난 3월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발표한 선진국 ‘유리천장 지수’에서도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9개국 중 최하위를 기록했다. 각자의 우선순위는 다를 수 있지만, 여기에 문제의식을 갖고 어떤 방향이 더 나은지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를테면 같은 여성가족부 폐지를 주장하더라도 성평등 정책을 더 잘 수행할 수 있는 정부 부처 개편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쪽도 있을 수 있다. 여성가족부에서 추진해 온 정책들의 더 나은 방향 모색을 위하여 새로운 그릇에 담아보겠다는 의지적 표현이라면 그때서야 비로소 우리 사회에서는 건강한 토론과 정책 생산이 시작될 것이다.
비상계엄과 탄핵의 결과로 이어진 대선인 만큼 민주주의가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것은 전 국민의 염원이자 의지일 것이다. 시대의 열망에 부응하는 방법은 어떤 사회의 대통령이 될 것인가를 보여주는 후보들의 가치관과 사상이다. 대통령 후보들과 진정으로 소통하고, 유권자로서 투표를 통해 “이 세상 속에서 반복되는 슬픔 이젠 안녕”(‘다시 만난 세계’ 가사 중)이라고 말할 수 있기를 바라는 희망도 함께 가져본다.
2025-05-26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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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모룡 칼럼] 떨어져 갈라진 종이 울릴 때
지난달의 산불은 도처에서 무서운 기세로 타올랐다. 엄청난 산림을 태우고 민가와 축사를 덮쳤다.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치고 삶의 터전을 잃었다. 주변부 주민의 안위가 소멸하는 극한 상황을 보여주었다. 산사나 암자도 불길을 피할 수 없긴 마찬가지였다. 수목과 동물 등의 뭇 생명체와 집과 가게와 사찰이 한꺼번에 잿더미가 되었다. 이러한 비참의 국면에서 내게 유독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고 뇌리를 맴도는 이미지가 있었다. 바로 잔해 위에 덩그렇게 내려앉은 고운사의 범종이다. 고운사는 경북 의성에 있으며 681년 신라시대 의상대사가 창건했다. 주지하듯이 의상은 멀고 먼 서역으로부터 전해져 당나라의 장안에서 번역돼 들어온 〈화엄경〉을 요약해 〈법성게〉를 만들어 전파한 고승이다. 불교학에 어두운 만큼 그 세세한 내력을 알 길이 없으나, 온갖 꽃들이 만발할 화엄의 도량이 상당 부분 폐허가 되고 종루가 불타면서 추락한 종의 모습이 가슴을 때렸다.
새로운 생태적 재앙 ‘메가파이어’
그 잿더미 속 떨어져 갈라진 종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얼굴 봐
인간의 욕망과 자본 중심의 문명
자연의 질서 배반하며 파국 초래
은총의 빛 회복 사회로 나아가야
사월 초파일에 여러 불자가 떨어져 갈라진 범종을 둘러싸고 두 손을 모은 광경을 볼 수 있었다. 한시바삐 복원돼 심금을 울릴 종소리를 듣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한 표정이다. 따져 생각하면 붓다의 은총을 땅바닥에 떨어뜨린 이는 결국 대중이다. 실수로 저질러진 산불이라고 하지만 이토록 무섭게 타오른 연유도 인간이 기후를 붕괴한 데서 찾아야 한다. 이제 산불은 사람이 통제할 수 있거나 자연의 순환하는 현상으로 치부할 수 없는 양상에 이르렀다는 진단이 크다. 기후 위기와 함께 이전과 다르게 그 규모에서 본질 자체가 심각하게 변화한 양상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생태철학자 조엘 자스크는 그의 책 〈숲이 불탈 때〉에서 이 새로운 생태적 재앙을 ‘메가파이어’로 지칭한다. 이미 그린란드, 미국 캘리포니아, 그리스, 호주, 캐나다, 스페인 등 세계 도처에서 발생한 초대형 산불인 메가파이어는 매우 극단적인 현상이며 인간의 힘으로는 통제할 수 없는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인간의 ‘나쁜 삶의 기술’이라는 중력이 파국을 부르고 있다는 생각이다.
유독 떨어져 갈라진 종에 더욱 눈길을 둔 까닭은 자연과 신의 은총을 배반하는 인간의 욕망이라는 중력 때문이다. 제국 문화와 자본주의적 경제가 공포가 되었다. 이 대목에서 미국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가 쓴 〈성탄절에 종소리를 들었네〉라는 시편을 또한 상기하게 된다. 그도 남북전쟁으로 불에 타 쓰러진 교회의 잔해 위에 떨어진 종을 보면서 참혹한 인간의 비극을 외면하는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 집이 불타면서 아내가 죽자, 그의 비애와 우울은 더욱 깊어지는데 전쟁에서 부상을 입고 생환한 장남이 치유되는 과정과 더불어 서서히 그는 영혼의 종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다. 우연히 그의 생애를 다룬 영화 〈나는 종소리를 들었네〉를 볼 수 있었다. 전쟁과 재앙을 겪으면서 사람은 시몬 베유가 말한 ‘중력의 비극’에 그만 쉽게 사로잡히고 만다. 우리 또한 이처럼 은총의 빛을 외면하고 난파하는 맹목이 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잔해 위에 떨어져 갈라진 고운사의 범종에서 나 자신을 포함해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얼굴을 본다. 어쩌다 은총을 잃고 무례하고 품위 없으며 저급하게 되었을까? 말의 바른 의미를 왜곡하고 다른 이에게 거짓을 씌우며 배척하고 공격하는 현상이 일반화되었을까? 물론 권력은 오랜 역사 속에서 사슴을 말이라고 우기는 폭력을 행사해 왔다. 근대 독일에서 히틀러의 등장으로 1920년대의 10년 안에 사회가 급작스럽게 변화하며 평범한 사람들이 공격을 당하거나 서로 미워해 제대로 삶을 영위할 수 없는 사태를 직면한 역사적 사실이 있다. 편을 가르고 다른 한편에 낙인을 찍거나 악마화하는 현실이 되었다. 물론 우리 사회를 이와 같은 최악의 예외에 견줄 수는 없다. 하지만 사회적 분노를 감추느라 우울한 사람들이 하나둘이 아닌 형국이 되었는데 지난 6개월의 사태가 이를 더욱 심화했다.
마치 떨어지거나 갈라져 소리를 낼 수 없는 종처럼 우리 사회는 서로를 잇고 만나고 대화하는 장소를 상실한 듯하다. 절차적 정당성을 잃은 권력이 폭력으로 변질되면서 붕괴했다. 다시 근본을 살려 종탑을 재건하고 삼천리강산에 종을 울려야 한다. 자유, 민주주의, 법치주의 등의 말이 왜곡되거나 잘못 구축된 시스템과 엘리트주의 체제의 민낯이 드러난 모순된 현실을 개조해야 한다. 모든 국민이 분노와 우울, 증오와 혐오에서 놓여나 평화와 희망의 주권을 추구하는 과정이 요긴하다. 드론으로 내려다본 산불 현장은 너무 참혹해 바로 보기 힘들 지경이다. 그렇지만 긴 겨울을 지나고 더딘 봄을 겪으면서 매화 피고 벚꽃 지며 철쭉에 이어 장미가 만발하는 자연을 통해 은총의 종소리를 듣는다. 정치권력이 바뀌는 일이 곧 미래를 보장하는 일은 아니다. 장미 대선을 지나서 화엄의 연꽃이 제대로 우리 사회의 광명이 되기를 기원한다.
2025-05-21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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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앞뒤가 안 맞는 대선 공약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경제 책사’로 불리는 스티븐 미란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CEA) 위원장은 얼마 전 큰 곤욕을 치렀다. 블랙록, 시타델 등 주요 자산운용사 및 헤지펀드 대표 15명과의 회의에서다. 그는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정책으로 미국 채권시장이 크게 흔들렸던 사실을 해명하려 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그 자리는 미란의 역량에 대한 참석자들의 의문만 커지게 했다. 그가 추구하는 정책 방향이 앞뒤가 안 맞았기 때문이다.
트럼프 미 대통령의 무역·통화 정책은 스티븐 미란이 지난해 11월 발표한 보고서인 ‘세계 무역 시스템 재편을 위한 가이드(A user’s guide to restructuring the global trading system)’를 토대로 한다. 이른바 ‘미란 보고서’로도 불리는 이 보고서에는 미국의 무역 불균형을 해소하고 제조업을 부흥하기 위한 그의 아이디어가 담겼다. 그는 자국 제조업을 무너뜨리고 무역적자를 심화시킨 주범으로 ‘강(强)달러’를 지목했다. 달러가 강하면 미국의 수출품 가격은 상대적으로 오른다. 반면 미국에서 수입하는 제품 가격은 내려간다. 수입품의 매력이 커지니 무역적자가 심화할 수밖에 없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란은 달러를 약세로 만들어 자국 수출품의 경쟁력을 높이고, 관세를 인상해 수입을 억제해야 한다고 말한다.
트럼프의 목표는 만성적인 무역·재정 적자를 줄이고 제조업을 되살리는 것이다. 그러면서 물가도 안정시켜야 한다. 그의 핵심 지지층인 블루칼라 노동자, 서민층을 위해서다. 이들은 지난 수십 년간 진행된 세계화로 제조업이 쇠퇴하며 일자리를 잃었고, 팬데믹 당시 가파르게 치솟은 물가로 생계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안타깝게도 트럼프가 주어진 과제를 온전히 달성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목표들이 서로 상충하기 때문이다. 관세를 인상하면 자국 제조업은 보호할 수 있다. 그러나 그만큼 수입품 가격이 올라 인플레이션을 자극한다. 1인당 GDP가 8만 달러가 넘는 미국에서 대체품을 생산하는 것도 무리다. 약(弱)달러도 마찬가지다. 달러가 약해지면 수출 경쟁력은 높아지겠으나 수입 물가가 오르는 것도 감수해야 한다. 제조업 기업과 소비자, 어느 한쪽은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
흔히 정치를 ‘사회적 자원을 배분하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자원은 한정적이기에 정책 결정권자들은 우선순위를 짜고 중요한 걸 먼저 선택한다. 그 과정은 거센 반발을 동반한다. 욕먹는 게 두렵다고 이것저것 다 약속하다 보면 트럼프와 미란처럼 모순에 봉착하게 된다. 수도권 표심도 잡아야 하고, 비수도권 표심도 잡아야 하는 대선 후보들이 지금 그 상황에 놓였다.
후보들은 하나 같이 균형 발전을 외친다. 동시에 수도권 확장 정책을 꺼낸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서울 재개발 조건 완화 및 용적률 상향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GTX 노선 연장·확대는 이 후보와 김문수 국민의힘 후보 모두 약속한 사안이다. 수도권의 극심한 주거·교통난을 해소하자는 측면이 있지만 이들 정책은 균형 발전이라는 과제와 배치된다. 용적률을 높여 주택이 늘어나면 더 많은 사람이 ‘똘똘한 한 채’를 찾아 서울로 몰릴 것이고, GTX 노선이 연장되는 만큼 서울 일자리가 갖는 매력도도 증가할 것이기 때문이다. 수도권 팽창을 도모하는 정책과 지역 균형 발전이라는 가치는 양립하기 어렵다. 결국 중앙에 집중된 자원을 나눠야만 하는데, 정치인들은 전체 50%를 넘는 수도권 유권자들의 표를 의식하여 이런 일에는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
여기저기 남발되는 선심성 공약이 지켜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럼에도 이러한 공약들이 반복되는 건 차라리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는 게 반대에 부딪히는 것보단 득표에 도움이 되어서다. 하지만 정책 결정권자들이 표 떨어지는 불편한 선택을 하기 싫다고 서로 충돌하는 목표를 동시에 내걸면, 세상은 흘러온 대로 흘러갈 뿐이다.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격차는 더욱 벌어질 것이다. 그 폐해는 양쪽 국민 모두에게 돌아간다. 반발이 두렵다고 ‘구조적 배분’을 외면하는 정치인들의 미필적 고의를 방관해선 안 되는 이유다.
요즘 ‘뜨거운 아이스아메리카노’라는 표현이 자주 보인다. 형용모순이라는 의미다. 현실에서 ‘뜨거운 아이스아메리카노’는 없다. 우리는 아메리카노를 마실 때 뜨거운 걸로 마실지 차가운 걸로 마실지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둘 다 마시고 싶다고 양쪽을 섞었다간 이도 저도 아닌 어중간한 아메리카노를 마시게 될 뿐이다. 지역 균형 발전이 그렇다. 수도권 팽창을 보조하면서 지역의 발전도 도모할 순 없다. 반대를 무릅쓰고 많은 공공기관을 지역으로 이전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처럼, 용기 있는 결단이 필요하다.
2025-05-19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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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해수부 부산 이전, 해양 전략 대전환 출발점
지금 세계는 ‘바다의 미래’를 놓고 총성 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다. 북극항로의 열림, 자율운항선박의 등장, 해양 디지털 전환의 가속화는 단순한 기술 경쟁을 넘어 국가의 생존과 번영이 걸린 전략적 패권 다툼의 최전선에 있다. 주요 해양 강국들은 이미 행정, 산업, 연구개발(R&D) 역량을 해양수도에 집결시킨 강력한 ‘클러스터’를 구축하며 미래를 선점하려 질주하고 있다. 이러한 추세와 달리, 대한민국의 해양 정책 중추인 해양수산부(이하 해수부)는 현재 행정 중심 도시인 세종시에 자리 잡고 있다. 이는 급변하는 해양 환경과 산업 현장의 역동성을 정책에 즉각적으로 반영하고 시너지를 극대화하는 데 구조적인 한계를 낳을 수 있다는 현실적인 고민으로 이어진다.
최근 조기 대선 국면과 맞물려 해수부의 부산 이전 논의가 또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하지만 이를 단순히 정부 청사 하나를 옮기는 지역적 사안으로 치부한다면, 우리는 다가올 거대한 기회를 놓치고 국가적 위기를 자초하게 될 것이다. 해수부 이전은 지역 이기주의의 산물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해양 백년대계를 바로 세우고 글로벌 해양 강국으로 도약하기 위한 ‘국가 전략의 재배치’이고,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대적 명령이다.
해수부 이전의 최적지로서 부산이 가지는 당위성은 여러 지표를 통해 이미 충분히 확인된다. 따라서 이제 논의의 초점은 ‘왜 부산인가’라는 물음을 넘어, 부산이라는 지리적 강점을 활용하여 어떻게 국가 해양 경쟁력을 극대화할 것인가로 나아가야 한다. 부산은 환적 물동량 기준 세계 2위를 자랑하는 항만이며, 연간 2천만 TEU 이상을 처리하는 세계 7위 컨테이너 항만으로서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제1의 항만도시다. 단순한 물류 거점을 넘어, 국립부경대학교와 한국해양대학교 등 해양 인재 양성 요람과 한국해양수산개발원(KMI), 한국해양과학기술원(KIOST), 한국해양진흥공사(KOBC), 국립해양조사원 등 핵심 연구·공공기관이 밀집한, 국내 유일의 ‘해양 지식·산업 융합 벨트’다. 정책 수립과 집행, 연구개발, 인력 양성이 유기적으로 맞물려 시너지를 극대화할 수 있는 최적의 생태계가 이미 부산에 갖춰져 있는 것이다. 해수부가 이곳에서 현장과 함께 호흡할 때, 비로소 대한민국 해양 정책은 현장성과 역동성을 갖추며 세계와 경쟁할 동력을 얻게 된다.
일각의 ‘지역 균형 발전 저해’ 우려는 해양산업의 본질과 미래를 제대로 보지 못한 단견이다. 해수부는 서류상의 정책 기획을 넘어, 해운·항만·수산·조선·해양과학기술 등 광범위한 실물 경제 현장을 지휘하고 지원하는 야전 사령부와 같다. 사령부가 최전선이자 심장부인 부산에 위치해야만 생생한 현장의 목소리를 정책에 녹여내고, 변화하는 조류에 기민하게 대응할 수 있다. 진정한 국가 균형 발전은 핵심 거점의 역량을 극대화하고, 이를 바탕으로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데서 시작된다. 인천, 평택·당진, 광양, 목포, 울산 등 전국의 주요 항만과 지방해양수산청의 기능과 역할을 오히려 강화하고, 부산의 중앙 본부와 유기적으로 협력하는 ‘허브 앤드 스포크(Hub-and-Spoke)’ 방식의 국가 해양 거버넌스를 구축하는 것이야말로, 국가 전체의 공동 이익을 확대하는 상생의 길이다.
해수부 이전은 시작일 뿐, 단순히 청사 하나를 옮기는 것을 넘어, 부산을 명실상부한 ‘글로벌 해양수도’로 만들기 위한 국가적 프로젝트가 함께 추진되어야 한다. 해양 관련 금융·보험·법률 서비스를 집적하고, 국제적인 해운거래소를 설립하여 투명하고 효율적인 시장 질서를 확립해야 한다. 또한, 해양 분쟁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해사법원을 신설하여 국제적 신뢰도를 높이고 고부가가치 해양 서비스 산업 생태계를 완성해야 한다. 나아가, 해양 신산업 R&D 허브 구축, 해양 스타트업 육성, 관련 국제기구 유치 등을 통해 정책·산업·금융·법률·연구가 융합된 ‘글로벌 수준의 해양 혁신 클러스터’를 완성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부산에서 그려야 할 국가 미래 청사진이다.
산업은행 본사 이전 추진, 가덕도 신공항 건설, 북항 재개발 등 부산의 미래 비전과 맞물려 해수부 이전은 단순한 행정 개편이 아닌, 대한민국 해양력 강화의 ‘퀀텀 점프’를 이루어낼 결정적 촉매제가 될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내륙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해양 지향적인 국가 전략으로 대전환을 이루어야 할 때다.
태평양과 인도양을 잇는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한 대한민국에게 해양 경쟁력 강화는 선택이 아닌 생존의 문제다. 해수부의 부산 이전은 특정 지역을 위한 시혜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밝은 미래를 열기 위한 필수적인 전략적 투자이다. 이제 결단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해양 시계는 지금, 부산을 향해야 한다. 이는 단순한 행정 효율화를 넘어, 미래 세대에게 풍요로운 바다를 물려주기 위한 책임 있는 선택이다.
2025-05-14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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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부산, STO로 금융혁신의 길 열자
부산이 처한 현실은 냉혹하다. 청년들은 일자리를 찾아 수도권으로 떠나고 있으며, 한때 지역경제를 견인했던 조선업과 신발산업은 이미 오랜 침체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기후 변화와 외국 어선의 불법 조업, 지속되는 경기침체까지 겹치면서 지역 경제의 버팀목이었던 수산업마저 위협받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내놓은 대책들은 대부분 일회성 보조금이나 단기 프로젝트에 머물러 장기적이고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하고 있다.
이제 부산은 기존의 전통적인 지원 방식을 넘어 근본적인 경제 혁신을 시도할 필요가 있다. 그 혁신의 열쇠는 바로 STO(증권형 토큰 발행, Security Token Offering)이다. STO는 부동산, 관광시설, 수산자원과 같은 실물자산의 소유권을 블록체인 기술로 디지털화하여 토큰 형태로 발행하는 새로운 금융 모델이다. 이를 통해 일반 시민들도 소액으로 손쉽게 투자할 수 있고, 관련 업체들은 기존 자본시장법을 준수하면서도 보다 효율적이고 신속하게 자금 조달을 할 수 있다.
부동산·관광시설·수산자원 등
실물자산 소유권 토큰으로 발행
소액 투자·업체 자금 조달 용이
글로벌 투자 유치에도 효과적
시, STO 법안 통과에 노력해야
금융기관 참여·행정 지원 필요
부산은 국내에서 STO 금융혁신을 실현할 최고의 조건을 가진 도시다. 연간 2000만 명 이상이 방문하는 대한민국 대표 관광도시로서 해운대 해수욕장, 광안리 해변, 용두산공원 등 우수한 관광 인프라와 다양한 호텔, 리조트 시설을 보유하고 있다. 또 부산국제영화제, 부산불꽃축제와 같은 글로벌 문화 콘텐츠도 풍부해 이러한 자산을 토큰화하면 국내외 투자자들로부터 새롭게 자금을 유치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해운대의 주요 리조트나 호텔을 STO 방식으로 토큰화하면, 일반 투자자들도 적은 금액으로 부산의 관광 인프라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 투자자들은 호텔 운영 수익의 일부를 배당받게 되고, 관광 시설은 유입된 자금을 활용하여 시설 개선과 서비스 품질을 높일 수 있다. 이는 결과적으로 관광객 증가와 지역 경제 활성화라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낸다. 영화제, 웹툰, 드라마 등 지역 콘텐츠 제작에도 STO를 도입하면 콘텐츠 제작자에게는 안정적인 자금 확보를, 투자자에게는 새로운 투자 기회를 제공하게 된다.
STO를 활용한 자산의 토큰화는 국내뿐 아니라 해외 투자 유치에도 효과적이다. 일본, 중국, 동남아시아 등 주변 국가 투자자들이 부산의 매력적인 관광·문화 자산에 보다 투명하고 쉽게 접근할 수 있어 글로벌 투자 유입 통로가 새롭게 열리게 된다. 특히 부산의 수산자원을 STO로 활용하면 지역경제 활성화에 중대한 전환점이 될 수 있다. 부산 지역 어민들은 최근 기후 변화와 외국 어선의 불법 조업, 장기화된 지역 경제 침체로 인해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양식 어류를 기반으로 한 STO를 추진하면, 초기 시설 투자에 필요한 자금을 효율적으로 확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기장군의 광어 양식장에서 1억 원 규모의 STO를 발행할 경우, 일반 시민들은 1만 원 단위의 소액으로도 투자할 수 있다. 어민들은 이 자금으로 스마트 양식 시설을 구축하거나 생산량을 늘릴 수 있고, 투자자들은 어류 판매로 발생하는 수익 일부를 배당받는다. 이는 어민들에게는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경영 환경을 제공하며, 투자자들에게는 명확한 수익 구조를 보장한다.
물론 성공적인 STO 생태계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중요한 과제가 있다. 첫째, STO 법제화가 시급하다. 관련 법안이 현재 국회에서 논의 중이지만, 정치적 갈등으로 인해 처리가 지연되고 있다. 부산시는 중앙정부와 협력해 STO 법안이 신속히 통과되도록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둘째, 금융기관의 적극적인 참여가 필수적이다. 금융위원회와의 협력을 통해 STO에 대한 명확한 규제 가이드라인을 마련하고, 부산디지털자산거래소(BDAN)를 중심으로 금융기관들이 안심하고 참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특히 부산은행과 같은 지역 금융기관과의 긴밀한 협력은 시장의 안정성과 신뢰성을 높이는 데 매우 중요하다. 셋째, 부산시의 적극적이고 체계적인 행정 지원이 요구된다. 공무원과 관련 기관들의 이해도를 높이기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강화하고, 실질적인 투자 유치와 홍보 전략을 계획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초기 단계에서는 공공 주도로 성공 사례를 만들어 민간 시장의 참여를 촉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부산이 STO를 성공적으로 도입하고 운영한다면, 이는 전국의 지방자치단체들이 참고할 수 있는 중요한 사례가 될 것이다. 전통 산업과 자산을 혁신적으로 가치화하여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는 새로운 금융 모델을 제시함으로써, 부산은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다. 지금이 바로 부산이 금융혁신의 선두 주자로 나설 최적의 시기다. 서울과 수도권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디지털 혁신이 부산을 시작으로 해서 전국으로 확산되는 미래를 기대하며, 부산시의 과감한 결단과 적극적인 실행을 촉구한다.
2025-05-12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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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5월 장미보다 더 붉은
1592년 5월 임진왜란이라 부르는 긴 전쟁이 시작되었다. 일본군이 처음 상륙한 곳도 부산이었고, 첫 전투가 벌어진 곳도 부산이었다. 5월 25일에는 충렬사에서 임진왜란 당시 순절한 동래부사 송상현, 부산진 첨사 정발, 다대진 첨사 윤흥신에 대하여 제향을 올린다. 그러나 전쟁 직후에는 그 공적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우선 정발 장군의 경우는, 〈선조실록〉에서 “적선이 바다를 덮어오니 부산 첨사 정발은 마침 절영도에서 사냥을 하다가, 조공하러 오는 왜라고 여기고 대비하지 않았으며, 미처 진에 돌아오기도 전에 적이 이미 성에 올랐다. 정발은 어지러이 교전하는 중에 전사했다”고 기록하였다. 〈기재잡기〉라는 책에서도 “왜선이 차차 가까이 오면서 총을 연달아 쏘자, 정발이 비로소 당황하여 진영으로 돌아왔으나 적은 벌써 해안에 상륙하여 포위하고 있었다. 정발은 화살 하나 쏘지 못하고 죽고 성안 사람은 노소 없이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고 하였다. 일본군이 침입한 사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허둥대다가 죽임을 당했다는 식이다.
부산진 전투의 실상이 밝혀지게 된 것은, 부인 임씨가 정발 장군의 공적을 밝혀 달라고 청원하였기 때문이다. 부산진 전투가 끝난 후에 시신 더미 속에서 살아남은 가은산이라는 병사가 정발 장군의 행적을 생생하게 증언하였다. 영도에서 일본군 선박을 목격하고 성으로 돌아온 정발 장군은 성 밖의 백성들도 모두 성 안으로 들어오게 하였고, 다음날 새벽에 일본군이 쳐들어왔으며, 마지막에는 서쪽 성문을 지키다가 전사하였다고 하였다.
당시에 일본에서 예수회 선교를 담당하고 있었던 루이스 프로이스가 쓴 〈일본사〉에서도 “(부산진성의) 조선군들은 매우 용감하게 저항하였으며, 전투는 3시간 가까이 계속되었다. 해자에는 마름쇠가 뿌려져 있거나, 사람 키 높이로 물이 채워져 있었기 때문에 일본군들은 마름쇠에 찔리지 않도록 해자 위에 널판을 놓고 건너갔다. 조선군은 거의 모두 목숨이 다할 때까지 싸웠고, 단지 소수만이 살아남아 포로가 되었다”고 하였다.
송상현·정발 등과 대척점에 있는 인물로 종종 당시 경상좌수사였던 박홍이 거론된다. 경상우도 초유사 김성일이 1592년 6월 28일자로 올린 치계에서 “좌수사 박홍은 화살 한 개도 쏘지 않고 먼저 성을 버렸고, 좌병사 이각은 뒤이어 동래로 도망쳤다”고 하였다. 이각보다 먼저 성을 버렸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박홍은 이각·박진과 함께 소산역에 있다가 동래성이 함락되자 언양으로 퇴각하였고, 병사들을 이끌고 다시 경주로 갔다. 경주에서 이각이 울산으로 돌아가자, 박홍도 군사들을 해산시키고 일본군이 통과할 것으로 예상한 죽령 쪽으로 이동하였다. 예상과 달리 조령이 뚫리자, 선조가 있는 행재소로 가던 도중, 원수(元帥) 김명원을 만나 좌위대장에 임명되었고 임진강 방어전에 참전하였다.
박홍은 일본군의 임진강 진출을 막기 위하여 파주 지역에서 싸웠는데 다른 장수들은 모두 패하여 전사하였으나, 박홍만은 병력을 유지하여 돌아왔다. 박홍은 다시 김명원을 따라 북상하여 대동강 방어에 참여하였고, 이후에도 세자 광해군을 따라 종군하는 등 여러 전투에 참여하다가, 병을 얻어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배 안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는 병들어 더 이상 싸울 수 없을 때까지 전장을 떠나지 않았다. 이러한 그의 공적이 인정되어 〈국조인물고〉에 임진왜란 당시 적을 물리친 인물 28명 중 한 명으로 이름이 올라가 있다.
그렇지만 당시 사헌부에서는 “수사 박홍은 적이 나타난 관할 구역에서 한 차례도 싸우지 않고 천리 밖으로 물러나니, 남쪽 지방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그의 살점을 씹고자 합니다. 형벌의 집행이 이러하니 어찌 나라 꼴이 제대로 되겠습니까. 박홍이 전에 지은 죄를 소급하여 법률에 의하여 처단하십시오”라고 지독한 말로 탄핵하였다. 거듭되는 탄핵 때문에 박홍은 세 차례나 자신이 맡았던 직책에서 쫓겨나 백의종군하기도 하였다.
우리는 적이 쳐들어오면 맞서 싸워서 장렬한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는 순국사관을 선호한다. 그러나 당시 지휘관으로서는 자신이 농성(籠城)을 결정하는 순간 백성들도 모두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나라의 녹을 먹는 관리라면 모르겠지만, 백성들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일이다. 동래성전투에서는 어린아이도 머리에 총을 맞았고, 여성도 앉은 채로 머리가 잘렸다. 박홍처럼 창고를 열어 백성들에게 가져갈 것은 다 가져가게 하고 나머지는 불태워 후일을 기약한 선택을 비난할 수만은 없다. 부산은 이처럼 참혹한 전란이 시작된 곳이었고, 7년 동안 일본군의 억압 아래에 있었다. 선조들이 흘린 피는 여전히 5월의 장미보다 더 붉다.
2025-05-07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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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선택적 신속함
2025년 5월 1일, 대법원 선고를 받았다. 2021년에 맡은 사건이 1심과 2심의 판단이 엇갈렸고, 3년 전 상고한 민사소송에 대해 대법원이 마침내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그러나 같은 날, 전국의 이목을 끈 이재명 대선 후보에 대한 대법원 판결도 함께 선고되었다. 상고장 제출 후 약 35일, 전원 합의체 회부 후 단 9일 만에 나온 이례적인 속도의 선고였다.
언론은 수십 쪽에 달하는 판결문을 분석하며 정치적 의미를 해석하느라 분주했지만, 내 의뢰인이 3년을 기다려 받은 것은 두 장 남짓한 판결문뿐이었다. 같은 법정에서, 같은 날, 다른 속도로 정의가 도착한 것이다.
의뢰인은 상고심이 진행되는 동안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미루며 긴 기다림을 견뎌야 했다. 나는 매달 재판 경과를 묻는 질문에 뭐라 답하지 못하고 무력한 변호사일 수밖에 없었다. 이 기다림은 단순한 인내의 문제가 아니라, 당사자의 생계와 권리, 인생 계획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는 시간이었다. 반면, 정치인이 연루된 형사사건은 ‘공공의 이익’과 ‘정국의 안정’이라는 명분 아래 신속하게 처리된다. 이재명 후보의 사건도 예외가 아니었다. 대법원까지 이례적으로 빠르게 회부되었고, 정치 일정을 고려한 듯 절묘한 시점에 판결이 선고되었다.
물론 사회적 파장이 큰 사건에 대해 신속한 판단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사법부가 특정 사건에만 ‘선택적 신속함’을 보일 때, 정치와 사법의 경계가 흐려졌다는 의혹을 피하기 어렵다. 이번 판결 역시 그 결과보다 ‘그 시기’와 ‘그 방식’이 더 많은 의문을 남겼다. 아무리 법리가 정교하더라도, 이례적인 절차와 속도로 진행된 정치적 사건에서 법원이 오롯이 법리에 따라 판단했다고 국민의 신뢰를 얻기는 쉽지 않다. 비슷한 사례는 과거에도 있었다. 윤미향 전 의원은 검찰 기소 4년 만에 대법원 유죄 판결이 확정되어 임기를 마친 후에야 의원직을 상실했고, 조국 전 장관은 대법원 판결이 나오기 전 국회의원에 당선되기도 했다. 유독 정치적 사건에서 재판의 ‘속도’가 논란이 되는 것은 사법부의 신뢰를 저해한다. 대법원 판결이 정치적 해석과 연결될 때마다, 사법의 중립성은 시험대에 오르는 것이다.
2024년 대법원에 접수된 민사사건의 72.3%는 심리불속행으로 기각되었다. 같은 해 사법연감에 따르면, 민사소송에서 원심을 파기하고 대법원이 새로운 판단을 한 비율은 3.4%에 불과했다. 즉, 상고심에서 실질적인 판단을 받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긴 시간을 기다려도 결과가 바뀔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뜻이다. 이쯤 되면 한국의 사법제도는 실질적으로 ‘2.1심제’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상고심은 법률심으로 실체적 다툼이 제한되고, 대법원이 심리 개시 여부에 재량권을 갖고 있어 일반 국민이 실질적 판단을 받기는 더욱 어렵다. 결국 민생 사건은 오랜 기간 계류되고, 절박한 권리 구제는 늦어진다. 심지어 판결이 내려졌을 즈음에는 손해를 복구할 방법조차 사라지는 경우도 많다. 상고를 적극적으로 만류하지 않은 변호사 입장에선 죄송할 따름이다. 그렇다면 상고심 제도는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형사소송에서 피고인의 생존권과 직결된 사안에 집중하는 것이 필요하듯, 민사소송에서도 국민의 재산권은 생계와 직결된 중대한 권리다. 그러나 현재의 시스템은 이 권리를 수년간 유보하게 만든다. 지나치게 늦어진 정의는 더 이상 정의가 아니다.
물론 대법원이 모든 사건을 동등한 우선순위로 다룰 수 없다는 현실도 이해한다. 그러나 그 기준이 불투명할수록 국민의 불신은 깊어질 수밖에 없다. 지금 우리 사법부에 필요한 것은 모든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공정한 신속함’이다. 특정 계층에게만 예외적으로 빠른 재판을 제공하고, 나머지 국민에게는 ‘사건 적체’를 이유로 수년을 기다리게 하는 이중적 태도는 사법 불신을 심화시킬 뿐이다. 공정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자원을 일관된 기준으로 배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선택적 정의’라는 비판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법은 공정해야 한다. 그 공정은 속도의 형평, 관심의 균형, 정치적 중립성에서 비롯된다. 이제 대법원은 명확히 답해야 한다. 상고심 처리 기준의 투명한 공개, 우선순위 결정의 객관화, 모든 국민이 평등하게 대우받을 수 있는 구체적 방안을 제시해야 한다. 그것이 무너진 사법 신뢰를 회복하는 첫걸음일 것이다. 정의는 단지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속도’로 도달하느냐도 중요하다. 법은 모두에게 평등해야 한다. 단, 그 평등은 ‘속도’에서도 증명되어야 한다. 3년을 기다려 받은 두 장의 판결문과, 한 달여 만에 선고된 수십 장의 정치 판결문 사이에는 우리 사법부가 직면한 깊은 모순이 숨어 있다. ‘법 앞의 평등’이 더는 헌법 조문의 한 문장으로만 남지 않기를 바란다.
2025-05-05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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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칼럼] 트럼프 대통령이 미치지 않았다면
예측불허의 연속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행보에 혹시 그가 제정신인가 의문이 생길 수도 있지만 그는 미치지 않았을 것이다. 트럼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국가관에 대한 새로운 정립이 필요하다. 국가란 무엇인가. 국가란 시민이 출자한 주식회사다. 정확하게는 국가와 기업은 모두 이론적으로 영속가능한 법인격을 지닌 자본기계라고 주장하며 타당한 근거를 제시해야 하겠지만 본 글에서는 일단 트럼프식 사고를 파악하기 위해 그렇다고 가정해보자.
국가와 기업은 자동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자본을 투입해야 굴러간다. 주식회사의 자금조달은 회사채와 주식을 기본으로 하며 채권자와 주주가 관계한다. 국가의 자금조달은 국채와 세금을 기본으로 하며 채권자와 납세자가 관계한다. 여기서 납세자는 법인을 포함하며 국가 입장에서 기업은 법인세를 납부하는 시민이 된다.
미국은 작년말 기준 연방부채 규모가 약 35조 달러(약 5경 원)이며 국채 이자로만 1조 1330억 달러(1657조 원)를 지불했다. 이러한 빚잔치 배경에는 기축통화로 역할하는 달러의 책임도 있다. 기축통화국은 국제교역에서 전 세계에 유동성을 공급하기 위해 무역적자를 피할 수 없다는 ‘트리핀 딜레마’에 빠진다. 트럼프 정권은 재정적자를 완화하여 국가부채를 줄이고 국내 제조업을 회복하려는 확고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왜 관세일까? 국가 재정 측면에서만 보자면 관세로 세수가 늘어나면 재정에 도움이 된다. 관세를 피해 외국기업들이 미국으로 들어오면 미국에도 법인세를 내므로 재정에 도움이 된다. 제조업이 창출한 일자리로 근로자가 늘어나면 그들은 납세자가 되므로 재정에 도움이 된다. 미국은 직장에서 건강보험을 부담하기 때문에 저소득층에서 공장근로자로 전환된 사람들에 대하여 정부가 부담해온 저소득층 건강보험(메디케이드) 비용을 줄여 재정에 도움이 된다. 현재 연방빈곤수준에 준하는 19%의 인구가 메디케이드 대상자로 심각한 빈부격차를 짐작할 수 있다.
한편 트럼프는 사업가로서 미국의 기업지배구조인 주주우선주의를 체득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서도 상법 개정을 두고 논의된 주주우선주의는 경영학에서 한물간 이론으로 취급되곤 한다. 지금은 주주 대신 이해관계자모델이 공감받고 있다. 이해관계자는 주주뿐만 아니라 근로자, 채권자, 협력사, 고객, 지역사회를 포괄한다. 국가에게 주주가 납세자라면 이해관계자는 공무원, 채권자, 협정국, 내외국민, 국제사회 등으로 매칭할 수 있다. 트럼프식 ‘납세자우선주의’의 결과물은 공무원 대량해고, 동맹국 압박, 골든비자 판매와 강제추방, 파리협정 탈퇴 등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트럼프는 오너 경영자였기에 경영인의 권한 범위를 넓게 두는 듯하다. 주주가 반대해도 경영자가 반드시 해야 한다고 생각되면 밀어붙이는 것이다.
트럼프의 약점이자 미국의 진짜 문제가 채권자에서 드러난다. 기업의 주인이 주주인가라는 질문에 그렇지 않다고 답하는 경영학자들이 많다. 주주는 유한책임의 특혜를 고려하면 기업을 온전히 소유한다고 말할 수 없으며 대개 주가차익을 노리지만 이론적으로 배당수익을 기대하는 행위자다. 채권자는 기업청산 시 주주보다 우선변제권을 가지며 채권을 담보로 기업 의사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예컨대 한국이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지원받고 채권자의 말을 들어야 했던 것과 같다. 관세 정책의 충격과 저항으로 국채금리가 올랐을 때 트럼프 정부가 화들짝 놀란 것은 당연하다. 금리 상승으로 향후 지불할 이자가 늘어나면 재정은 오히려 악화되며 채무불이행에 빠지거나 경기침체가 오면 정당성을 잃는다. 아킬레스건은 과도한 부채로 공짜 점심은 없었다.
재무경제학에서 투자 판단의 중요 지표는 이익 여부, 성장 가능성과 규모, 지속 가능성이다. 국가가 주식회사라면 기준은 다르지 않다. 한국의 미래가 암담한 것은 이 모든 지표가 나날이 악화되고 있으며 좋아질 희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주주는 기업에서 부정적인 신호를 감지하면 출구전략을 짠다. 투자자는 매도하면 그만이지만 국민에게 국가에 대한 출구전략은 간단하지 않다. 그러나 지역에 대한 출구전략은 상대적으로 용이할지 모른다. 이는 부산에게 시사점을 준다. 지자체도 지방채와 세금으로 운영되는 조직이라고 보면 기업이 빠져나간 부산시는 법인세수 감소로 시 재정이 약화되고 일자리가 사라져 시민이 감소하고 청년층은 수도권으로 이탈했다.
세상은 이론만으로 움직이지 않지만 합리적선택이론을 참고하면 트럼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이에 따르면 그는 경제학이 전제하는 고도로 전략적이고 이기적인 인간형에 가까워 보이기도 한다. 그의 정권에서 제기되는 사익 추구 논란과 시민사회 탄압, 이민자 혐오, 약육강식의 강탈 외교 등은 정치란 무엇인가 질문을 남긴다.
2025-04-30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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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황령산 소월길에 올라
한반도 대표 시인이라면서 문학관 하나 없는 현실이 답답하여 국제 소월협회를 출범한 게 2022년 12월 26일이다. 그 이후 매월 세 번째 수요일 오전에 수영구의 (사)유라시아 교육원에서 ‘소월시 정기 감상회’를 열고 있고, 지난 11월에는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예술위원회로부터 ‘소월 선양기관’으로 선정되어 ‘외국인과 다문화 가정 대상의 제1회 국제 소월 시 낭송대회’를 부산역 유라시아플랫폼에서 개최하기도 했다. 첫 대회인데도 19개국에서 104명이 참가하였다. 세계적으로 부는 한국어 열기를 실감하게 했다. 이에 소월의 시나 또 다른 고급 콘텐츠를 보탤 수 있다면, 한류에 새로운 돌파구도 열리고 새로운 수요를 창출할 수 있다고 본다.
황령산 생태숲에 2.3km에 걸쳐 ‘김소월 시와 함께하는 길’이 조성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소월협회 회원들과 같이 단숨에 올라갔다. 부산시의회 정태숙 의원이 발의하고 부산시, 남구청, 산림청이 협조하여 지난해 10월부터 연말까지 3억 원의 예산을 들였단다. 소월 시비는 문현동 쪽의 황령산 유원지 야외놀이터 입구에서부터 임도를 따라 쭉 10기가 세워져 있었다. 각 시비 아래에는 진달래, 꽃무릇, 수선화로 수를 놓은 작은 화단도 꾸며져 있다. 맨 먼저 우리를 반긴 건 국민 시 ‘진달래꽃’이었고,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부모’ ‘산유화’ ‘못 잊어’가 그 뒤를 이었다. ‘바람고개’ 정상엔 ‘초혼’이 우뚝하다. ‘먼 후일’ ‘옛이야기’ ‘엄마야 누나야’ ‘금잔디’는 정상에서 오른쪽 아래로 조성된 편백나무 숲길에서 등산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생태숲 2.3km 시비 10기 건립
민족 대표 시인 기리는 명소 기대
백일장·시낭송회·음악회도 열리길
부산에 소월 국제문학관 들어서면
한국 문화 교육센터 등 두루 활용
K문학 새 수도 발돋움 기회 될지도
아쉬운 점이 있다면, 시비와 시비 사이의 간격이 너무 멀고, 소월의 바다 시가 몽땅 빠져있다는 사실이다. 소월은 집에서 서해가 내려다보이는 평안북도 곽산 땅에서 자랐고, 바다를 유난히 사랑하였다. 시인에게 바다는 늘 자유와 해방의 공간이었다. 외로움과 그리움의 표상이고 상징이었다. “저 오늘도 그리운 바다, 건너다보자니 눈물겨워라…!” 소월은 ‘여수’(旅愁) ‘어인’(漁人) ‘고독’ ‘바다’ ‘바다가 변하여 뽕나무 된다고’ ‘고향’ ‘삭주 구성’ ‘붉은 조수’ ‘바닷가의 밤’ 등 20여 편의 바다 관련 시를 남겼다. 바다 자체를 혹은 바다를 제재로 노래한 시가 전체 시 가운데 10%쯤 된다. 앞으로 황령산에 소월의 시비가 더 들어선다면 그런 점이 고려되었으면 한다. 어쨌거나, 서울 남산에는 한국일보사가 1968년에 세운 ‘산유화’ 1기뿐인데 우리의 황령산엔 소월 시가 무려 10기나 되니 반갑고 축하할 일이다. 서울에도 소월 문학관은 없다. 그러나 서울시는 이 ‘산유화’를 명분으로 중구의 숭례문 오거리에서 용산구의 한남동까지 3.7km를 ‘소월로’로 지정하고 걷기대회, 문화의 거리 조성, 시의 날 행사 등 다양하게 문화판을 벌이고 있다.
이젠 우리 부산이 서울을 대신할 차례다. 나라마다 대표 시인이 있지만, 꼭 그 나라 수도나 출생지에서만 국민 시인을 기리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러시아 문학의 아버지인 푸시킨은 전국의 18개 도시에 문학관이 서 있고, 칠레의 네루다도 전국 네 군데에 그의 문학 기념관이 있다. 필리핀도 국민시인 리잘을 마닐라와 세부에서 공원과 도서관으로 기린다. 평생 고향의 언어인 벵골어로만 시를 쓰고 한국을 사랑했던 타고르도 인도와 방글라데시 각지에 모두 여덟 개의 문학관이 있다. 1930년에 소련을 찾았다는 이유로 러시아 모스크바에도 타고르 문학관이 있을 정도다. 우리의 소월도 부산에서 관부연락선을 타고 1923년 초에 도쿄상대로 유학을 가고 그해 가을에 관동대지진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우리는 연고지 타령만 하고 생각의 틀이 너무 좁아 보인다. 이는 국민대표 시인에 대한 합당한 처우가 아닐 것이다. 이제, 황령산에 소월 시비도 대거 조성되었으니, 우선 이 생태숲에 전국의 학생들이 모여 소월 백일장도 열고 소월 사생 대회도 개최했으면 좋겠다. 소월 음악회, 시낭송회, 소월 바다 문학 예술제 등도 열렸으면 좋겠다. 소월은 남북통일의 상징이기도 하다. 통일 열차가 출발하는 부산에 언젠가 소월 국제문학관이나 번역 문학관이 들어서서, 부산으로 유학 오는 각국 학생들의 글쓰기센터나 한국 문화 교육센터로 두루 활용되고, 부산을 찾는 외국인에게 한국의 정신과 얼을 다양한 언어로 전달하는 새 명소가 되기를 희망한다.
부산이 도시의 새 비전으로 정한 ‘글로벌 허브도시’, 그 글로벌 허브의 꿈은 물류, 금융, 항만과 공항의 현대화로만 이루어질 순 없을 것이다. 문화는 도시의 품격이고, 늘 새로운 창발성을 요구한다. 글로컬 시대를 맞아 세계에 내놓을만한 부산발 문화브랜드가 무엇이라도 있어야 할 판이다. 이럴 때 소월 문학의 보편성과 국제성, 소월의 바다 문학을 우리 부산이 잘 살리고 가공하여 ‘K문학의 새 수도, 부산’의 이미지를 세계인 사이에 굳혀 나가자고 주장한다면, 이는 지나치게 도전적이고 발칙한 걸까?
2025-04-28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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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트럼프의 관세 폭탄과 한일의 대응
지난 2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백악관 로즈가든 행사에서 “오늘은 미국 해방의 날”이라고 칭하며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를 대상으로 한 새로운 관세 정책을 발표했다. 주요 내용은 모든 국가의 대미 수입품에 일률적으로 기본 관세 10%를 부과하고 ‘최악의 침해국’(대미 무역 흑자국)을 지목해 중국에 34%를 시작으로, 영국 10%, 유럽연합(EU) 20%, 한국 25%, 일본 24%, 인도 26%, 태국 36%, 베트남 46% 등 차등 관세를 책정했다. 이와 함께 ‘우선 협상 대상국’으로 기본 관세 10%만을 부과한 영국·호주에 더해 한국·일본·인도를 지정하고 상호 관세 유예 기간인 90일 사이에 미국과의 협상을 끝낼 것을 종용했다. 이들 5개국 중 영국은 미국의 전통적 우방 국가이다. 한국과 일본은 각각 한미상호방위조약과 미일안보조약을 통해 미국과 군사동맹을 맺고 있으며, 두 나라는 중국을 견제하고 봉쇄하려는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을 수행하는 데 있어 필수적인 존재다. 인도와 호주 또한 인도·태평양 지역의 비공식 안보 협의체인 쿼드(Quad)의 핵심 국가이다. 트럼프는 이러한 국가들과의 협상에서 안보와 통상을 연계해 유리한 합의를 빠르게 이끌어내고, 이를 바탕으로 중국 등 나머지 국가들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여 더 많은 이익을 확보하려는 전략을 펼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찌 되었든 세계 각국이 대응에 분주한 가운데, 미국의 목적이 단순한 무역 재균형이 아니라 중국의 경제를 체계적으로 붕괴시키려는 것으로 인식하는 중국은 보복 관세는 물론 희토류의 수출 통제 조치를 하는 등 미국과 관세 전쟁에 나섰다. 결국, 지난 17일 백악관은 중국 관세율을 최대 245%까지 인상했다. 이에 양대 경제 대국인 미중 두 국가 간의 교역이 실질적으로 불가능해진 것이다.
‘우선 협상 대상국’ 중 가장 먼저 미국과 협상에 나선 나라는 일본이다. 이미 일본은 트럼프 2.0 행정부가 출범하자마자 발 빠르게 미일정상회담을 개최하는 등 트럼프 대통령의 호의를 얻고자 했으나, 결국 24%의 관세를 부과받고 말았다. 이후 일본은 관세와 방위비를 별도로 다루면서 장기간에 걸쳐 협상을 추진하는 이른바 분리·장기 협상전략을 준비했다. 그러나 지난 16일(현지 시간) 미국 워싱턴 DC에서 열린 제1차 협상에 예고도 없이 참석한 트럼프 대통령은 관세와 방위비를 연계해 협상을 진행하고자 했다. 상반되는 전략으로 협상이 탐색전으로 끝난 후 일본의 이시바 시게루 총리는 “우리 방위비는 일본이 주체적으로 판단할 것”이라면서, 일본의 국익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협상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흘 뒤인 19일 백악관은 일본 측 관세 협상 대표인 아카자와 료세이 경제재생상에게 트럼프의 상징인 빨간색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모자를 씌운 사진을 공개했다. ‘게임의 규칙’은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결정한다는 사실을 일본과 국제사회에 재차 경고한 것이다. 그런데도 세계 3위의 경제 대국 일본이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정책에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않은 채,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하려는 모습은 리더십 결여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일본과 다르게 한국과 미국은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관세가 없다. 그런데도 미국은 한국을 ‘최대한 침해국’으로 상정해 25%의 상호 관세를 부과하고, ‘우선 협상 대상국’에 포함시켰다. 그리고 미국의 제안에 따라 이번 주 미국 워싱턴 DC에서 ‘한미 2+2 통상협의’가 시작된다. 미국이 일본에 이어 추진하는 관세 협의이다. 한국 측에서는 최상목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미국에서는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과 제이미슨 그리어 미국 무역대표부 대표가 참여한다. 한국의 경제·통상 구조는 물론 안보 틀까지도 흔들 수 있는 미국과의 협의가 국가적 리더십 공백 상태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대통령 후보 시절의 지적처럼 트럼프 대통령은 “머니 머신 한국, 돈 한 푼 안 내”라는 인식에 근거해 방위비와 관세를 혼합시킨 ‘원스톱 쇼핑 협상’을 추진하며, 일본과의 협상이 지연되었기 때문에 빠르게 가시적 성과를 손에 넣고자 할 것이다. 필요하다면 일본과의 협상 때처럼 깜짝 등장할 수도 있다. 또 지난해 윤석열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령 선포 이후 이어진 국내 정치의 불안정성을 미국이 이용하거나, 더 나아가 주한미군의 철수와 북한과의 교섭을 협상 카드로 꺼낼 수도 있다. 따라서 관세가 상징하는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와 일방주의로부터 한국의 국익을 지키기 위해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체제는 일본처럼 안보와 관세를 분리하고 협상을 장기화하면서, 한국의 전략적 중요성을 거듭 강조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6월 3일 출범하는 새 정부는 보다 전략적으로 협상을 마무리해야 할 것이다.
2025-04-23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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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지역화폐, 블록체인에서 해답 찾아야
지역화폐는 지역 내 소비를 유도하고 소상공인을 지원하기 위한 수단으로 지난 몇 년간 전국적으로 확산해 왔다. 각 지방자치단체는 이를 통해 지역경제를 자생적으로 회복시키고, 대형 유통망에 집중된 소비 흐름을 분산하려는 목적을 가져왔다. 그러나 실효성 논란도 끊이지 않는다. 예산 의존적 구조, 낮은 사용 편의성, 관리의 비효율성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제도의 지속 가능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부산의 지역화폐인 ‘동백전’도 사정이 다르지 않다. 도입 초기에는 시민들의 높은 관심을 받았지만, 국비 지원 축소로 인센티브가 줄고, 단순히 대체 결제 수단이라는 점 외에 지속 가능한 모델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게 한계로 드러났다. 캐시백 한도와 비율도 축소돼 소비자와 소상공인 모두에게 장점을 잃어가고 있다. 확장성과 자생력을 갖추지 못한 지역화폐는 결국 일시적 정책 수단으로 소모될 우려가 있다.
몇 년간 확산 속 실효성 논란 이어져
예산 의존 구조로 지속 가능성 의문
블록체인 접목해 투명성·효율성 강화
수익형 지역화폐 모델로 진화도 가능
스마트 계약으로 정책 목표 정밀 구현
전국 연계 디지털 네트워크 기반 마련
이제 지역화폐는 단순한 종이 쿠폰이나 예산 보조형 전자화폐의 수준을 넘어, 지속 가능한 디지털 경제 플랫폼으로 진화해야 한다. 그 해답은 바로 블록체인 기술에 있다. 블록체인은 분산원장 기반 기술로, 거래 내역의 투명성과 보안성을 동시에 제공하며 중앙 서버 없이도 신뢰 기반의 네트워크 운영이 가능하다. 이를 지역화폐에 접목할 경우, 부정 사용 방지, 실시간 정산, 스마트 콘트랙트에 의한 자동화 정책 집행 등 다양한 기능을 기술적으로 구현할 수 있다.
특히 지역화폐는 본질적으로 막대한 자금이 사전에 예치되는 구조다. 이 자금을 시중은행이나 정책 금융기관과 연계해 안전자산에 투자한다면, 자금의 활용 효율성을 높이고, 수익 일부를 지자체 재정에 환원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 수 있다. 단순한 재정 지출을 넘어, 수익형 지역화폐 모델로 진화할 수 있는 것이다.
결제 인프라 측면에서도 블록체인은 기존의 전자결제대행(PG)사 기반 시스템을 능가할 수 있다. 블록체인을 기반으로 할 경우 결제와 정산이 거의 실시간으로 이루어질 수 있어 자금 회전율이 높아지고 상인들은 빠르게 대금을 회수할 수 있어 유동성 관리에 큰 도움이 된다. 특히, 스마트 콘트랙트를 통해 특정 업종 한정 사용, 기한 내 사용 유도, 소비 인센티브 지급 등 정책 목적에 맞는 설계를 손쉽게 구현할 수 있다. 이는 단순 행정 편의성을 넘어 지속 가능한 소비 유도 체계를 기술적으로 가능케 하는 기반이 된다.
한편, 최근 주목받고 있는 스테이블 코인 기반 지급결제 시스템은 지역화폐의 발전 방향과 맞닿아 있다. 스테이블 코인은 가치를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도록 설계된 디지털 자산으로, 지역화폐가 스테이블 코인의 구조를 응용하면 결제 안정성, 확장성, 국제 연계 가능성을 모두 확보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구조가 갖춰진다면, 지역화폐는 더 이상 지역에만 머물지 않는다. 부산이 보유한 풍부한 문화·관광 인프라와 연계하면, 지역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이 환전이나 세관 신고 없이 지역화폐로 간편하게 결제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할 수 있다. 이를 통해 관광 수요와 소비가 자연스럽게 연계되고 동백전의 사용 범위와 실질적 유용성이 확장되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나아가 부산은 아시아 최고의 항만 인프라를 가진 도시이기도 하다. 블록체인 기반의 지역화폐가 무역 결제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다면, 부산은 디지털 무역 금융의 허브로 도약할 수 있는 잠재력도 갖고 있다.
지역화폐가 지닌 큰 한계 중 하나는 지정된 지역 내에서만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블록체인 기술은 서로 다른 시스템 간의 연결과 상호운용성에 강점이 있다. 이를 활용하면, 각 지역에서 발행한 지역화폐를 하나의 공통된 디지털 네트워크처럼 연계할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부산의 지역화폐를 일정 조건으로 다른 지역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는 마치 각기 다른 은행의 ATM이 상호 연동돼 어느 지역에서든 인출과 이체가 가능한 것과 같은 개념이다. 지역화폐 간 ‘디지털 환전’이 가능한 시대가 열리는 셈이다. 이러한 구조가 마련되면, 지자체 간에는 수수료 분담이나 혜택 공유에 대한 협약을 통해 협력 체계를 구축할 수 있으며, 나아가 전국 단위의 상호 연계된 디지털 지역화폐 네트워크로 발전할 수 있다. 이처럼 기술과 제도가 함께 뒷받침된다면 지역화폐는 단순한 지역경제 활성화 수단을 넘어 분산형 디지털 경제의 핵심 인프라로 재탄생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지역화폐의 한계를 반복하며 머무를 시점이 아니다. 기술과 정책, 금융이 유기적으로 결합해 지역화폐를 새롭게 디자인할 시기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블록체인이 있다. 지역경제의 디지털 대전환, 이제는 실험이 아닌 실행이 필요하다.
2025-04-21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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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칼럼] 우리만의 애순이를 떠올리며
나의 친할머니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치매를 앓기 시작하셨다. 원래도 친구가 별로 없으셨는데, 할아버지가 떠난 이후에는 더 외로우셨을 것이다. 나는 그 외로움이 치매를 부른 원인 중 하나가 아닐까, 조심스레 짐작하곤 했다. 물론 할머니가 이 생각을 알게 되면 못마땅해하시며 화를 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점점 더 어린아이가 되어가는 듯한 할머니의 모습을 지켜보며 ‘왜?’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돌봄 시설에 계신 할머니를 조금씩 잊어가던 나였지만, 어느 날 할머니 생각이 유난히 간절하게 났다. 이유는 다름 아니라 최근 전 국민을 울리고 있는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때문이었다.
주변에 안 본 사람을 찾기 힘들 만큼 인기를 끌고 있는 ‘폭싹 속았수다’는 제주에서 태어난 애순이와 팔불출 관식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사계절의 흐름 속에 담아낸 16부작 드라마다. 이 드라마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단연 ‘사랑’이다. 인물들은 숱한 역경과 고난 속에서도 결국 사랑만큼은 놓지 않고, 어떻게든 그것 하나만은 붙잡는다. 많은 이들이 눈물을 흘린 이유는, 우리 역시 이 사랑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인생에서 포기하고 싶은 수많은 순간 속에서, 누군가의 보살피는 손길 덕분에 우리가 여기까지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할머니는 같이 놀 친구도 없어?”하고 묻던 내 어린 시절의 모습은 극 중 애순의 딸 금명이와 닮았다. 나는 요즘도 종종 부모님께 비슷한 질문을 던진다. “엄마 아빠는 취미 없어?” “수다 떨거나 맛집 갈 친구 없어?” 진짜 몰라서 묻는 건 아니다. 나는 그들이 친구 없이 살아올 수밖에 없었던 시대의 무게와 세월이 무엇인지, 이제는 어렴풋이 알아차릴 수 있는 나이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매번 친구들과 웃고 떠들며 지내는 내 모습이 괜히 미안해져서, 자꾸 그런 질문을 던지게 된다. 엄마 아빠의 희생과 그 길 위에 쌓인 삶의 무게를 알아 갈수록 더욱 그렇다. 그리고 나는 부모님이 지금이라도 친구를 사귀었으면 좋겠다는 이기적인 생각도 든다. 더 이상 자식을 위해 고생하지 않고 조금은 즐기면서 인생을 사셨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다.
애순이의 이야기는 사실 특별하지 않다. 오히려 아주 흔하다. 대한민국에서 부모의 사랑은 대개 자기희생을 전제로 한다. 그렇게 이루지 못한 부모의 꿈은 자연스레 자식에게로 향하고, 자식은 그런 부모와 부딪히며 성장한다. 드라마는 이 복잡한 관계를 아름다운 휴먼 스토리로 풀어냈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한국 사회의 여러 폐단이 발생하기도 한다. 부모의 과한 욕심과 왜곡된 애정이 자녀를 옭아매는 이야기를 조금 더하면, 드라마는 미스터리나 스릴러로 장르가 바뀔 수도 있다. 어쩌면 더 현실적인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극 중에서 부모의 사랑을 ‘짝사랑’이라고 표현한 대목이 인상 깊었다. 실제로 2023년도 한국리서치의 가족 인식 조사에 따르면, 자녀가 있는 응답자 중 자녀와의 관계에 만족하는 비율은 65%로 높은 반면, 자신과 부모의 관계에 만족한다고 답한 사람은 53%에 그쳤다. 만족도가 곧 애정의 크기를 의미하진 않겠지만, 자식을 향한 부모의 일방적인 애정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또 다른 금명이인 우리들은 부모의 자기희생에 죄책감과 부채감을 느낀다. 하지만 또 누군가의 부모가 되면서 애순과 관식처럼 묵묵히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된다. 드라마에서도 금명이가 애순과 관식을 이해하게 되는 장면이 중요한 갈등 해소의 순간으로 등장한다. 앞서 언급한 조사에서 흥미로웠던 또 하나의 결과는, 기혼자일수록 부모에 대한 인식이 좋아졌다는 점이다. 부모가 되어보니 비로소 부모의 마음을 알게 된다는 것일 테다. 그렇다면 나는 아직도 멀었구나, 하는 생각이 자연스레 든다.
‘폭싹 속았수다’는 시청자들의 눈물과 웃음을 이끌어내며, 부모의 자기희생이라는 양날의 검을 솔직하게 비춘 드라마가 아닐까 생각한다. 일각에서는 부모의 잘못된 사랑까지 미화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었고,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랑의 부재가 만연한 시대, 우리 존재의 시작은 결국 사랑이었다는 사실을 다시금 일깨워주는 이야기가 탄생한 것에 대해 고마움이 먼저 든다.
나만의 애순이인 할머니를 떠올린다. 괴로웠던 삶의 기억을 조금씩 지우면서 가장 순수하고 즐거웠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나의 할머니. 가족을 위해 평생을 바치다 기억을 잃은 그녀를 생각하면 죄책감을 느끼지만, 그 사랑의 결실이 모이고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음을 잊지 않으려 한다. 부모님에게도 같은 마음이다. 그것이 지금껏 사랑을 주며 살아온 사람들에게 드리는 나만의 조용한 보답이기를 바란다.
2025-04-16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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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산불과 안동… 부산의 '상생' 마케팅
지난해 12월부터 대한민국은 급격한 혼란에 빠졌다. 온 나라가 두 동강이 난 느낌이랄까? 갑작스러운 계엄과 곧이어 이어진 대통령 탄핵, 양극화한 지지자들의 아우성으로 온 나라가 들썩거렸다. 하늘이 노하셨는지 대한민국의 가장 아름다운 도시 중 하나였던 경상북도 안동에 화마가 덮치며 그 아우성을 잠재워 버렸다.
지난달까지 관광 데이터들을 살펴보면 코로나19의 여파를 거의 모두 극복하고 예년 대비 40~50%를 뛰어넘는 회복세를 보이고 있었다. 경기 침체의 암울한 분위기 속에서도 국내 관광시장만큼은 인바운드 외국인들의 증가 추세가 지속되면서 그래도 봄날 분위기가 유지되고 있었다. 하지만 대통령 탄핵이 인용되고 다음 대통령이 누가 될지 불확실한 이 상태에서 외국인 방문객으로 유지되고 있는 관광 봄날이 계속될 수 있을는지는 미지수다. 두 달 후에도 혼란이 수습되지 않는다면 관광산업 역시 외국인들의 방문이 줄어들며 적신호가 켜질지도 모르겠다.
화마가 할퀸 안동의 처참한 현실
국내 관광산업 위기와 닮은 모습
그래도 재건 희망의 싹은 피어나
경상권 친구 도시인 부산 역할론
웰니스 관광 확장해 도움 나서야
신체·정신 치유 프로그램 만들길
지난주 역대급 산불 피해 현장의 하나인 안동을 방문하면서도 직업병처럼 국내 관광산업과 안동에 대한 걱정이 이어졌다. 코로나19의 폭풍을 견디고 일어선 관광산업이 계엄과 탄핵의 생채기 속에서 위기를 맞았듯이 유네스코가 인정한 세계유산이 즐비한 안동도 화마의 생채기로 위기를 맞는 건 아닐까.
필자는 몇 년 전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방문했던 하회마을과 퇴계 이황 선생이 후학을 양성했던 도산서원, 도산서원과 함께 유네스코에 등재된 병산서원 등이 유명한 관광명소로 안동을 기억하고 있다. 지난달에 이 서원들을 좀 자세히 볼 기회가 있어서 기억이 생생한데 화마가 할퀴고 간 이후에 다시 안동을 방문해야 할 일이 생겼다. 지난달 함께 도산서원을 거닐었던 수녀님과 여름이 오기 전에 두봉 주교님을 만나 뵈러 가자는 무언의 약속을 남긴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만 주교님께서 뇌경색으로 돌아가신 것이었다.
두봉 주교님의 장례식장 방문을 위해 찾은 안동의 화재피해 실상은 뉴스에서만 보던 것보다 처참했다. 군위를 지나면서부터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예사롭지 않았다. 보통의 4월이면 연둣빛이 초록초록하게 빛나야 할 산들은 온통 검은색과 갈색으로 변해 있었다. 그나마 남아있는 나무들도 잎새 색깔까지 초록이 지쳐버린 빛깔이 역력한 채 기둥도 검게 그을음으로 감싸져 있는 암울한 풍경이 남안동 톨게이트를 들어설 때까지 계속됐다. 요금소를 빠져나가자 여기저기 불타버린 건물, 아예 전소돼 폭삭 내려앉은 건물들이 여기저기서 보이기 시작했다. 창문을 여니 과민한 반응일지 모르나 아직도 탄내가 나는 것 같았다.
96세라는 노령의 나이에도 의성에서 농사일을 하시며 건강하게 신자들을 돌보셨던 두봉 주교님도 이 화마로 인한 충격 때문에 뇌경색이 와서 돌아가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두봉 주교님은 71년간 한국을 위해 일하셨는데 1969년부터는 초대 안동교구장으로서 안동교구의 농민들과 함께 남은 평생을 보내셨던 분이었기 때문이다. 외지인인 필자가 보기에도 이 참담한 현장을, 그 불타오르던 장면을 직접 목격하셨을 르네 뒤퐁 주교님. 두봉이라는 한국인 이름을 더 사랑하셨던 두봉 주교님 마음은 어떠셨을까? 이미 잔재만 남아있는 흔적만으로도 화재 당시 정말 생지옥이었을 것 같은 장면이 자동으로 상상될 만큼이었으니 안동을 누구보다 사랑하셨던 주교님의 마음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을 것이리라 짐작됐다.
장례식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불현듯 일본의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 사건이 기억났다. 폭발 사건 이후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후쿠시마의 너무나 달라졌던 풍경은 지금 안동의 모습과 너무나 비슷했다. 그런 절망 속에서도 후쿠시마에서는 블랙 투어리즘을 기반으로 도시 재건을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었다. 국내 대표적 보물을 간직한 도시 안동. 가덕 신공항이 들어서게 되면 부산, 경주, 안동으로 이어지는 경상권 관광의 보고가 될 안동도 화마의 아픈 기억을 없애기 위한 노력을 시작할 것이라 확신한다. 두봉 주교님의 장례식장에서 끊이지 않았던 방문객들의 발길을 보며 주교님은 끝까지 안동을 위해 선물을 남기셨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분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에서 아름다운 안동 재건이 시작되지 않을까 싶다.
부산도 경상권 친구 도시로 안동 재건을 도우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최근 웰니스 관광을 전략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부산은 그 의미를 새롭게 다듬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사회 가치를 실현하는 마케팅, 공존을 위한 상생 가치를 위한 마케팅 전략의 일환으로 안동을 도와 줄 수 있는 방법은 없을지 고민 좀 해보면 좋을 듯하다. 신체적 치유와 함께 정신적인 치유도 할 수 있는 프로그램 만들기를 제안해 본다.
2025-04-14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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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새로운 남성성을 찾아서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클라우디아 골든 교수는 최근 ‘아기와 거시경제’라는 주제의 연구에서 남성이 가사노동에 덜 참여하는 국가에서 합계출산율이 낮다고 지적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한국을 지목하며 그는 “한국은 부부 평등 측면에서 과거에 갇혀 있다”고 지적했다. 부부의 성역할에 대한 인식의 충돌이 출산율의 급격한 하락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골딘 교수는 한국이 얼마나 빠르게 변하는 사회인지를 예상하지는 못한 듯하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지난해 육아휴직 사용자 중 남성이 4만1829명으로 최초로 30%를 넘어섰다고 보도했다. 2015년 남성 육아휴직자 수가 5.6%임을 감안하면 10년 사이에 9배나 증가한 것이다. 여전히 한국 여성은 남성보다 매일 3시간 더 많이 가사노동을 하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지만 이 수치는 조만간 드라마틱한 변화를 겪을 것이다.
그저 희망회로를 돌리는 것만은 아니다. 2024년 트렌드 키워드 중 하나로 ‘요즘 남편 없던 아빠’가 선정될 정도로 한국의 많은 남성들이 기존의 남성성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이나 통념을 탈피해서 육아나 살림에 적극적인 주체가 되어 가고 있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유튜브에서는 대세 이수지와 더불어 ‘아조씨’ 추성훈의 유튜브가 화제였다. ‘강한 남자’의 전형처럼 보이는 추성훈이 아내의 집에 셋방살이 하는 서열 꼴찌라는 반전(?) 모습에 많은 사람들이 크게 호응했다. 조금 맥락은 다르지만 가히 최고의 화제작이라 할 수 있는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서 아내와 자식에게 한없이 헌신적인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준 양관식 캐릭터에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열광하는 이유도 단지 박보검이 젊은 시절 역할을 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남아 있는 문제는 인식의 충돌이다. 어쩌면 우리의 통념보다도 더 빠르게 현실이 변하고 있음에도, 남성성을 둘러싼 통념과 갈등은 여전히 심각한 수준이다. 성착취나 성범죄 가해자를 둘러싼 문제가 범죄와 폭력에 대한 문제와 해결 모색으로 끝나지 않고 소위 ‘성별 갈등’의 문제로 번지는 것이 대표적인 경우다. 성범죄 피해가 모든 여성이 겪을 수 있는 피해라는 점을 강조한다고 해서, 가해자가 모든 남성을 대변하지 않는다.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남성성을 비판한다고 해서 그것이 남성성의 유일한 대안이 아님은 더더욱 명백하다. 그럼에도 성범죄 사건에 대한 문제 제기와 비판이 성별 갈등으로 이어지는 일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우선 이것은 갈등을 자양분 삼아 권력을 키우고자 한 정치권의 책임이 크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후보 시절 선보였던 ‘여성가족부 폐지’ 일곱 글자 공약이나 일부 정치인들의 성별 갈라치기 전략은 모두 갈등을 더욱 더 뾰족하게 만들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기 위한 수단으로 동원되었다는 생각을 감출 수 없다. 지역 사회의 유력 정치인에 의해 저질러진 성폭력 사건과 가해자의 죽음 앞에서 정치권이 보여준 기이한 침묵도 비상식적이기는 마찬가지다. 이러한 권력형 성폭력 범죄가 한두 번이 아니라는 점에서 반복에 대한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시민의 상식이 되어야 할 것이다.
‘진짜 사나이’라는 비영리 단체의 운영자 잭슨 카츠는 미국에서 영향력이 큰 폭력 예방 멘토링 프로그램을 공동 설립한 교육자다. 스포츠계와 군대에서 시행하고 있는 성폭력 예방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그는 성폭력은 힘과 통제, 권력 남용과 관련된 문제라고 지적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성폭력은 여성과 그들을 돕는 몇몇 선한 남자들의 문제가 아니라 가장 우선적으로 남자들의 문제라고 말했다. 이러한 폭력에 침묵하지 않고 권력 남용에 단호한 대처를 하는 것이 진짜 추구해야 할 남성성이라는 것이다.
지난 4월 4일,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소추 사건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선고를 들으면서, 비로소 상식이 제자리로 돌아온 듯한 느낌을 받았다. 억지 논리와 억측이 난무하는 가운데 시민들은 100일이 넘게 불안과 혼란의 날들을 보냈다. 그러나 그 동안의 극단적인 대립이 무색할 정도로 빠르게 일상을 회복해가는 시민들을 보면서 우리에게 상식이라는 공통감각이 있었음을 다시금 확인했다.
앞으로도 우리 시민은 변화하는 세상을 상식의 수준에서 받아들이고 살아갈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고정관념과 편견보다 세상이 더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고, 최소한 우리의 상식 수준으로 세상이 바뀌고 있다고 믿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통념과 규범이 변화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이미 수많은 지표들이 변화를 증명하고 있는 가운데, 낡은 인식과 통념 속에 갇혀 ‘젠더 갈등’이라는 허상을 좇지 말자. ‘폭싹 속았수다’의 캐릭터에 빗대어 말하자면, 현실에 양관식이 없다고 부상길이 될 필요는 없지 않은가.
2025-04-09 [18: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