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야생의 본능
신호철 소설가
무인도에서 생존하는 상상
인간의 뇌에 남은 야생 본능
이제 성과와 실적으로 경쟁
두려움 무릅쓰고 나서는 용기
초등학교 시절에 〈로빈슨 크루소〉를 참 재미있게 읽었었다. 몇 번이나 다시 읽으며 상상에 잠기곤 했다. 아무도 없는 섬에서 나뭇가지를 비벼 불 피우고, 나뭇잎 집을 짓고, 해변을 돌아다니며 먹을 것을 구하는 상상. 그 모든 것이 신나고 짜릿했었다. 그런 모험에 열광했던 아이는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다.
분별없는 꼬맹이들이라 그런 모험을 동경했을까? 과학자 말을 빌리자면 오래된 야생 본능이 남아있기 때문이라 한다. 인간의 뇌는 야생에서 살아남기 위해 오랜 세월 다듬어졌다 했다. 낯선 영역 탐색에 성공하면 아무도 손대지 않은 새로운 먹거리를 보상으로 얻을 수 있었다. 물론, 그 못지않은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하지만 낯선 길을 선택하는 용기, 위험을 감수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간 발걸음이 결국 인간이 번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의 삶은 야생과는 거리가 멀다. 스마트폰의 지도 앱은 길을 찾아주고, 음식은 몇 번의 배달 앱 클릭으로 해결된다. 그리고 우린 정해진 시간에 학교, 회사와 집을 왕복한다. 맨손으로 식물 뿌리를 파헤칠 일도, 밤하늘 별자리를 보고 방향을 잡을 일도 없다.
그렇다고 수렵 행위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수렵은 어느새 ‘성과’와 ‘실적’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몰아붙인다. 더 많은 매출, 더 높은 고과점수, 더 많은 팔로워를 얻기 위해 우리는 경쟁의 숲을 누빈다. 컴퓨터 앞에 앉아 깨알 같은 숫자를 노려보는 누군가는, 사실 눈앞의 차트를 향해 창을 겨누고 있는 오늘날의 사냥꾼이다.
채취 역시 남아있다. 이제는 열매 대신 정보와 기회를 모은다. 세일 정보, 부동산 시세, 투자 종목, 자기계발의 팁들까지,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수백 개의 열매를 따 모은다. 광주리 대신 하드디스크와 클라우드가 무거워진다.
탐색도 이뤄지고 있다. 해변이나 정글을 뒤지는 대신에 손바닥만 한 작은 화면으로 새로운 맛집과 멋진 카페를 찾아 꼼꼼히 후기를 읽는다. 낯선 나라의 동영상과 브이로그를 보면서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도시를 속속들이 안다고 느낀다.
실제로 문명을 떠나 야생으로 들어가는 모험은 극히 어려운 선택이다. 직장, 가족, 대출, 계약서 같은 것들이 우리를 이 도시와 단단히 묶는다. ‘다 버리고 자연에 들어가고 싶다’라는 푸념을 입에 달고 살지만, 정작 전기요금 고지서 한 장에 우리는 다시 현실로 끌려 나온다.
머릿속엔 야생의 회로가 남아있지만, 우린 문명 속에서 살아간다. 문제는 주체할 수 없는 공허에 모든 것이 지겨워지고, 이유 없이 떠나고 싶어질 때가 있다는 것이다. 직장을 그만두고 싶고, 도시를 벗어나고 싶고, 아예 다른 사람이 되고 싶다는 충동이 밀려올 때가 있다.
그것은 오래된 본능이 “너, 너무 오래 한 자리에 서 있지 않았냐”고, 속삭이는 것과 다름없다.
우리 시대의 야생은 정글이나 무인도가 아니다. 우리의 야생은 우리가 수없이 구획해놓은 영역 너머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익숙함 너머의 그곳. 두려움을 무릅쓰고 한 걸음 내디딘 그곳이 바로 문명 속 야생이 아닐까.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 새벽 시간, 책을 펼쳐놓고 낯선 생각의 숲을 헤매는 것. 혹은, 정답이 없는 선을 그어 넣고,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색을 올리는 순간, 우린 잠시 체계의 공허에서 벗어난다.
희미하게 남은 야생의 본능은 사실, 우리 안에서 조용히 다음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한 사냥이 아니라, 더 깊은 삶을 위한 모험으로, 어쩌면 효율과 편리함만 추구하는 인공시스템에 잠식당하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저항 장치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