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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의 생각의 빛] 진달래, 지려고 피는 마음씨에 묻은 빛깔
“진달래야 진달래야 어느 꽃이 진달래지 내 사랑의 진달래 너만 홀로 진달래야/ 진달래 나는 진달래 임의 짐은 내질래”(유영모 ‘진달래’ 중에서)
이맘때쯤이면 마을 뒷산을 붉게 물들이던 진달래가 생각난다. 따뜻하고 화사한 봄볕 바람에 흔들리며 잔잔한 향기 번지던 진달래 군락지에 앉아 동무들과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뛰놀다 저녁 먹으란 소리에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꽃잎을 따던 이들도 있었는데, 화전을 해 먹기 위해서였다. 얇디얇은 분홍빛 이파리 한 움큼씩 전을 부쳐 찬가지 몇 없는 밥상에 올려 먹던 기억도 새록새록 난다. 진달래, 짧은 동안 활짝 피고 온 산을 순간 붉게 물들이곤 영락없이 지고야 마는 그 꽃을 생각하는 날이다. 김소월(1902~1934)의 시에도 등장하는 진달래는 국화나 장미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이 나라 산천 곳곳 봄의 들목에서 개나리와 함께 가장 먼저 피어나 다른 봄꽃의 길잡이가 되어준다.
‘진달래꽃’의 시인 소월이 다녔던 오산학교의 제8대 교장을 지냈던 다석 유영모(1890~1981)도 ‘진달래’란 시를 지었다. 그는 서울 구기동에 살 무렵, 진달래를 보고 그 꽃 이름을 한참이나 궁리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면서 누구보다 먼저 피우고 누구보다 먼저 지는 진달래의 모습에서 생명의 신비와 함께 영적인 삶의 본질을 깨달았다. 그가 지은 ‘진달래’는 언뜻 알쏭달쏭한 의미와 맥락으로 이해하기 쉽지 않아 보이지만, 오랫동안 지지 않고 아름다움과 명성을 유지하려고 발버둥을 치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뜻이 적지 않다. ‘지기 위해 피우는 꽃’이란 해석을 보태기도 했던 다석의 ‘진달래론’을 곱씹으면, 무릇 죽음을 피해 갈 수 없는 우리가 어떤 정신과 형식으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지 곰곰이 되짚게 된다.
제주 4·3과 4·19혁명 때 목숨을 잃은 수많은 이들이 다시 한번 우리에게 ‘말 없는 말’을 건네는 달이다. 희생당한 이들이 무슨 거창한 이념과 사상을 펼치기 위해서라든지, 혁명으로 나라를 뒤바꾸려는 장엄한 꿈을 이루려는 마음으로 국가 권력의 ‘제거 대상’이 되었던 건 아니다. 이들은 단지 거짓과 술수와 명분 잃은 폭력의 희생양이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희생되었지만, 살아남은 이들의 기억에서 결코 잊어서도 안 되고 잊을 수도 없는 우리 현대사의 상흔이 되었다. 역사의 한 페이지에서 한참이나 머뭇거리면서 여백에 묻은 젖은 피가 내지르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 우리가 끝내 찾아서 잊지 않고 동시대인들에게 전해야 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4월 지나 5월이 되면 각종 봄꽃이 피었다 지는 속에 수목은 그 푸르름을 더욱 짙게 가져갈 것이다. 진작에 피었다 진 진달래는 뒤를 줄줄이 이은 봄꽃 무리 속 상춘객의 밝은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스러지기 위해 찬란히 불 밝혔던 ‘사건’으로 남게 된다. 이를 기억하는 이들에겐 생명이 지녀야 할 의무 가운데 하나인 가없는 희생과 사랑만이 마음속에 오롯이 남아있을 것이다. 진달래, 진분홍 이파리의 떨굼이 연두 천지의 세상을 지피고 남긴 고귀한 소식. 우리 앞에 주어진 생명의 길을 내어주고 물러난 역사의 희생자들이 어느 곳 어느 때 불쑥불쑥 입술을 드러내어 참된 삶의 의미를 묻는다면 이에 곧바로 답을 할 자 몇이나 될까.
국가 폭력의 희생자를 기리고 기념하는 목적은 단지 이들이 희생당해야만 했던 역사적 사건이나 진실을 재구성해 오늘날 우리에게 남기는 의미를 되새기는 데에만 놓여 있지는 않다. 수많은 사람의 가슴속에 맺힌 한이 유전되어 면면이 쌓이는 과정에서 반드시 개선해야 할, 집단 이데올로기에 따른 소수자를 향한 기만과 폭력의 유대를 끊어야 하는 절체절명의 기회를 언제라도 붙잡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담겨 있다. 아울러 ‘살아남은 자’가 반성과 자책으로 값진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순간순간 돋아나는 삶의 뜻을 헤아리면서 잊지 말고 지녀야 할 시선이 들어 있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화학자이자 작가였던 프리모 레비(1919~1987)는 저서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이런 말을 남기기도 했다. “삶의 의미에 대한 믿음은 인간의 모든 힘줄 속에 뿌리박혀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 이 문제는 훨씬 더 단순하다. 오늘 그리고 여기서 우리의 목표는 봄에 도달하는 것이다.” 희망도 용기도 실종된 극한의 지대에서 부르짖은 말이었을지라도, 그가 힘주어 강조했던 점은 당장 ‘오늘 여기’에서 찾아야만 했던 생명의 목적이었다. 이 목적은 꽃봉오리 활짝 지려고 피었던 진달래가 우리 마음에 물들이는 빛깔이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던 모든 폭력의 희생자가 입을 열어 전해주려 했던 메시지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2026-04-02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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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호의 오픈 스페이스] K컬처의 외연 확장과 부산의 과제
최근 방탄소년단(BTS)의 컴백 무대를 둘러싼 담론이 뜨겁다. 디지털 플랫폼의 실시간 피드에는 찬사보다 날 선 비판들이 더 날카롭게 박힌다. 과도한 보안 시스템과 경직된 통제가 시민들의 일상적 권리를 침해했다는 항변부터, 한국적 정서에 무지한 해외 연출진이 빚어낸 미학적 패착이라는 지적까지 다양하다. 더욱이 지역 상권이 기대했던 낙수효과는 신기루에 그쳤고, 숙박업계의 기회주의적 폭리는 ‘관광 도시’의 민낯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그러나 이러한 소모적 논란의 이면에서 우리가 반드시 포착해야 할 본질적 함의는 따로 있다.
아시다시피 글로벌 OTT 기업 넷플릭스가 보여준 행보는 영리함을 넘어 치밀하다. 이들은 전 세계 팬덤의 시선에 맞추었고 해외 시청자들은 바로 눈치챘을 것이다. 사실 ‘방탄소년단(防彈少年團)’이라는 한자 명칭에서 알 수 있듯, 이 그룹의 초기 정체성은 동아시아 시장을 겨냥한 ‘전략적 수출 모델’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들은 예상을 깨고 서구권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으며 성장했고, 이제는 영어 가사로 세계인의 보편적 감성을 지배하는 아이콘이 되었다. 이제 BTS는 단순한 K팝 그룹이 아니다. 대한민국이 세계와 어떻게 조우하고 있으며, 글로벌 문화 지형도에서 어느 위치에 점유하고 있는지를 상징하는 ‘연결체’ 그 자체다. 그 상징의 중심부에 국뽕 넘치는 광화문과 아리랑이 자리 잡고 있다. 광화문은 한국 현대사의 굴곡을 관통하며 ‘K민주주의’의 역동성을 세계에 각인시킨 성소(聖所)이자 역사의 현장이다.
마셜 맥루언은 일찍이 “미디어가 메시지다”라고 역설했다. 메시지의 구체적 내용보다 그 메시지를 전달하는 형식과 매체 자체가 인간의 사고방식과 사회적 관계를 재규정한다는 뜻이다. 넷플릭스가 지난주 ‘데몬 헌터스’가 오스카 두 개를 차지하는 대박 사건과 BTS 생중계를 전 세계 3억 명 이상의 시청자에게 실시간으로 송출하는 현상은 단순한 공연 중계를 넘어선다. 이는 한국의 특정 장소를 세계적 ‘문화 성지’로 각인시키는 공간적 브랜딩 과정이다. 과거 파리의 에펠탑과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이 미디어를 통해 선망의 대상이 되었듯, 이번 광화문 공연의 전 세계적 노출은 대한민국을 향한 경외심과 방문 욕구를 비약적으로 증폭시킬 것이다. 아미(ARMY)라는 거대 팬덤의 결집과 이동은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의 경제적 낙수효과를 동반할 것임이 자명하다.
이러한 거시적 흐름 속에서 우리는 부산의 현주소를 냉철히 짚어보아야 한다. 최근 부산 원도심과 남포동, 국제시장 일대에는 외국인 관광객이 넘쳐나니 성공인가? 천만에다. 양적 팽창은 고무적이나, 질적 성숙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남는다. 현대 관광의 패러다임은 그 지역만의 고유한 ‘속살’, 즉 역사성과 시간성이 응축된 ‘지역성(Locality)’을 탐닉하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 과연 부산은 원도심의 기억과 이야기를 정교하게 직조하여, 이방인들을 다시 불러들일 만큼 섬세한 미학적 준비가 되어 있는가.
부산의 미래 산업이 해양과 관광에 있다면, 문화는 더 이상 주요 아젠다의 잉여물이나 행사용 수단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진정한 문화적 정체성은 관(官) 주도의 대규모 토건 사업이 아니라, 지역 예술가들의 창의적 실험과 자유로운 상상력이 놀이터처럼 펼쳐지는 토양 위에서만 자생한다. 한국 인디 문화를 선도했던 부산의 저력과 BTS 멤버 중 2명이나 속해있는 도시라는 문화적 유전자는 이미 훌륭한 밑거름이다. 부산은 ‘아미’들의 성지순례 코스가 되어 있다
하지만 며칠 전 발표된 영도 폐교 부지의 K팝 아레나 건립 계획은 당혹감을 안겨준다. 목불인견(目不忍見) 수준이다. 이미 북항 재개발 구역 내에도 민간 컨소시엄 주도의 아레나 건립이 추진 중이기 때문이다. 불과 6km 남짓한 거리, 물리적으로는 원도심권으로 묶이는 두 지점에 수조 원의 예산을 투입해 유사한 대형 공연장을 중복 설치하겠다는 발상은 정책적 효율성 측면에서 납득하기 어렵다. 선거철마다 반복되는 선심성 하드웨어 경쟁은 아닌지, 혹은 외형적 성과에만 매몰되어 문화의 내실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뼈아픈 성찰이 필요하다.
요청하건대, 부산 시민들의 목소리를 듣는, 지역 사회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소통의 방식은 부산에는 불가능한가! 지금 부산에 시급한 것은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를 늘리는 일이 아니다. 지역 예술가들의 창의성이 고사하지 않도록 생태계를 조성하고, 시민들의 문화적 인식과 환대(Hospitality)의 온도를 높이는 소프트웨어의 고도화가 우선이다. ‘문화 도시 부산’의 진정한 경쟁력은 아레나의 규모가 아니라, 그 안을 채울 지역적 독창성과 지역 예술가들의 혼과 삶에 달려 있다. 하드웨어가 비대해질수록 소프트웨어가 빈곤해지는 ‘문화적 역설’을 경계해야 함을 모르는가!.
2026-03-26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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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성의 개념 쌓기] 지능과 능지 그리고 교만한 안도감
새삼스러운 지적이긴 하나, 사기가 횡행하고 있다. 곧 대박이 날 주식 정보를 알려주겠다거나 손쉬운 부업을 통해 고수익을 올리게 해주겠다는 등의 온갖 스팸 문자들이 쇄도한다. 금융기관을 사칭해 가짜 정책금융상품 가입을 유도하고 돈을 갈취하기도 한다. 사기는 유행에도 발 빠르게 적응한다. 최근 중동 사태가 불거지면서 주민센터 직원 행세를 하며 유류비 지원을 미끼로 악성 앱 설치를 유도하는 신종 수법까지 등장했다. 통신사와 경찰청 통합대응단이 손잡고 실시간 대응 체계를 구축하려 한다지만, 유감스럽게도 미래를 낙관하긴 힘들다. 지난날을 돌아보건대, 새로운 대책에 맞춘 또 다른 사기 수법이 등장할 것이 불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인간사에는 사기에 대한 일종의 절대량 보존 법칙 같은 게 작용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사기를 둘러싼 또 하나의 익숙한 풍경은, 가해자보다 피해자의 어리석음을 탓하는 경향이다. 보이스피싱 피해를 다룬 유튜브 영상에는 어김없이 이른바 ‘능지’를 비난하는 댓글이 넘쳐난다. 이 단어는 ‘지능’을 거꾸로 뒤집어 누군가의 지적 수준을 비꼬는 신조어인데, 곱씹어 보면 묘한 함의가 있다. 본래 지능이란 상황을 파악하는 ‘지’혜와 이를 실행으로 옮기는 ‘능’력이 조화를 이루는 개념인데, ‘능지’는 그 순서가 뒤바뀐 상태를 가리킨다. 즉 생각보다 행동이 앞서는 우둔함을 뜻한다. 결국 이는 수화기 너머의 사기꾼이 던진 미끼를 의심 없이 덥석 무는 모습과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통상 지능과 양(+)의 상관관계를 갖는다고 여겨지는 고학력자들은 사기로부터 자유로울까? 통상 이들은 사회에서 상황의 본질을 눈치 빠르게 파악하며, 복잡한 정보를 논리적으로 처리하는 존재로 인식되기에, 사기에 대한 절대적인 면역체계를 가졌을까? 자신 있게 대답하자면, 전혀 그렇지 않다. 필자는 직업상 상아탑 안에 있기에, 박사학위 소지자들을 종종 본다. 그런데 여기서도 사기 피해는 낯선 일이 아니다. 당장 지난 겨울에도, 검찰을 사칭하는 사기꾼 꾐에 넘어가 수사 협조를 명목으로 텔레그램을 설치했던 한 선생님의 소식을 들었을 정도다. 또한 회식 자리에서 주식 리딩방에 깜빡 속아 목돈을 급등주에 밀어 넣었다가 큰 손실을 본 교수의 이야기가 오르내리기도 했다. 다시 말해 학력과 사기 피해는 별다른 상관이 없다.
어떤 의미에서 고학력자들이야말로 사기꾼에게는 손쉬운 먹잇감이 될 수 있다. 근본적으로 사기는 심리적 허점과 정보의 불균형을 파고드는 기술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 두 요소는 서로를 강화하며 작동한다. 예컨대 사기꾼이 가장 신뢰하는 통로는 오만이다. 자신의 판단이 틀릴 리 없다고 믿는 사람일수록 주어진 정보의 왜곡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동시에 왜곡된 사실에서 비롯된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자만이 더 강화되기도 한다. ‘나 같은 사람이 속을 리 없다’라고 믿으며 감지된 논리적 균열을 애써 외면하는 것이다. 이처럼 오만과 오류는 서로를 조건 지으며 점점 증폭된다. 그렇다면 자신의 지식을 과신하는 경향이 있는 고학력자들이 사기꾼의 눈에 얼마나 매력적인 표적일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사기의 결정적 한 수는 공포다. 공포는 이성을 마비시킨다. 실제로 공포는 사고를 담당하는 대뇌피질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편도체에서 발산된다. 숲속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들었을 때, 그것이 무엇인지 확인 후 피하는 것보다 즉시 그 자리서 벗어나는 게 생존에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공포는 정확성보다 신속성을 우선하는 감정이다. 그렇기에 공포가 작동하는 순간, 고학력자들이 자부하던 대뇌피질은 사실상 먹통이 되고 만다. 마치 최첨단 무기는 있는데, 정작 그걸 작동시킬 전선이 뽑혀버린 꼴이다. 그렇다면 사기꾼은 고학력자에게 어떻게 공포를 심어줄까? 이는 어리석은 질문에 가깝다. 오만이 곧 공포로 전환되기 때문이다.
고학력자에게 공포는 자신의 최대 자산인 지능이 무력화되는 순간이다. 그래서 중간에 사기를 의심하게 되더라도, 이를 좀처럼 인정하지 못한다. 금전적 피해를 넘어, 스스로의 지능이 ‘능지’로 전락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렵기 때문이다. 일찍이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데서 지혜가 시작된다고 말하며, 이른바 ‘무지의 지’를 설파했다. 그러나 상아탑에서도 빈번히 벌어지는 사기 피해를 보면, 이 교훈이 제대로 계승되고 있다고 보긴 어렵다. 다만 이러한 문제는 비단 박사학위 소지자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시민을 향해 ‘무지의 지’를 강조했듯 자만은 인간에게 보편적인 약점이기 때문이다. 결국 사기 피해자를 조롱하는 이들은, 그들을 통해 자신의 지능은 아직 ‘능지’로 전락하지 않았다는 안도감을 얻는다. 그리고 바로 그 교만한 위안이야말로 사기꾼들이 가장 노리는 지점이다.
2026-03-19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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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학수의 문화풍경] 사라지기 때문에 아름답다
이른 봄이 오면 사람들은 나무를 올려다보기 시작한다. 거리와 공원, 하천가의 나무들은 불과 몇 주 전까지만 해도 마른 가지였지만 어느새 꽃망울이 터져 나온다. 한국에서 벚꽃 개화는 모두가 손꼽아 기다리는 특별한 사건이 된다. 가족들은 사진을 찍기 위해 모이고, 연인들은 꽃 아래를 거닐며, 여행사들은 꽃구경 관광버스를 운행한다. 온 나라는 짧은 기간 동안 펼쳐지는 색채의 향연에 잠시 걸음을 멈춘다. 고작 며칠이면 사라질 꽃에 사람들은 왜 이토록 마음을 빼앗길까.
생물학적 관점에서 보면 꽃은 단지 식물의 생애 주기에서 나타나는 한 단계일 뿐이다. 그러나 인간의 문화 속에서 꽃은 단순한 생물학적 현상을 넘어서는 상징이 되어 왔다. 시와 그림, 음악 속에서 봄꽃은 생명의 재탄생을 의미한다. 긴 겨울 동안 얼어붙어 있던 땅과 나무는 마치 생명이 멈춘 듯 보이지만, 봄이 오면 다시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운다. 그래서 많은 문화에서 봄꽃은 죽음처럼 보였던 자연이 다시 살아나는 순간을 상징한다.
봄꽃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삶도 오래 머물지 않아 감동적이며
찰나의 아름다움, 함께 즐기라는 것
그러나 우리가 꽃에 매혹되는 이유를 단지 부활 때문이라고만 설명할 수는 없다. 꽃의 아름다움은 그 연약함에 있다. 여기서 연약함이란 오래 머물지 않는 존재라는 의미다. 강한 바람이나 며칠의 비에도 꽃잎은 쉽게 흩어진다. 꽃은 잠시 피었다가 곧 사라진다. 꽃은 짧은 생을 지녔음에도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짧은 생 때문에 더욱 아름답다.
아름다움이 덧없음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일상 속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사람들이 석양을 바라보는 순간을 떠올려 보자. 하늘의 색이 몇 분 안에 사라질 것이라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을 멈추고 조용히 수평선을 바라본다. 만약 석양이 밤새 계속된다면 지금처럼 감동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 당나라 시인 이상은(李商隱)은 ‘등락유원’(登樂遊原)」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석양은 한없이 아름다운데, 이미 황혼이 가까이 왔다.”(夕陽無限好,只是近黃昏). 봄꽃의 아름다움도 이와 같다. 오래 머물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더 강하게 마음을 울린다.
예술 가운데 이러한 순간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장르는 음악일지도 모른다. 안토니오 비발디의 《사계》 ‘봄’ 1악장에서는 활기찬 바이올린 선율이 꽃이 피어나는 장면과 새들의 노래를 그려낸다. 그러나 곧 먹구름이 몰려오고 천둥을 동반한 폭풍이 몰아치며, 온화한 봄 풍경을 휩쓸어 버린다. 꽃과 새와 따뜻한 봄 공기는 빗속에서 사라져 버린다. 그렇게 음악 속에서도 봄의 아름다움은 한순간 스쳐 지나간다.
꽃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덧없음의 아름다움만이 아니다. 꽃이 피는 계절이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모인다. 공원과 강변에는 낯선 사람들이 모여 아름다움을 함께 나누는 작은 공동체가 만들어진다. 부산에서는 많은 시민들이 온천천 벚꽃길을 걷거나 삼락생태공원의 봄꽃을 찾아 나선다. 또 전국적으로는 진해 벚꽃축제가 열리면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든다. 며칠 동안 꽃은 평범한 공간을 사람들이 아름다움을 함께 나누는 장소로 바꾸어 놓는다.
이런 순간들은 종종 사람들에게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만든다. 가까운 친구와 저녁 식사를 하는 장면을 떠올려 보자. 앞으로도 수없이 다시 만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저녁은 평범하게 지나갈 것이다. 그러나 친구가 먼 나라로 떠나간다는 사실을 안다면 같은 저녁도 전혀 다르게 다가온다. 이러한 깨달음은 철학자들도 오래전부터 이야기해 왔다. 프랑스 철학자 미셸 드 몽테뉴는 〈에세이〉에서 “철학 한다는 것은 인간이 언젠가 죽는 존재임을 배우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죽음은 두렵기 때문에 사람들은 생각하려 하지 않지만, 몽테뉴는 그것이 어리석은 태도라고 보았다. 우리는 항상 떠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하며, 그럴 때 삶의 방향을 제대로 잡을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은 20세기 철학에서도 중요한 통찰로 이어진다.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인간의 존재를 ‘죽음을 향한 존재’라고 설명했다. 죽음은 삶의 끝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순간들에 긴장과 의미를 부여하는 지평이라는 뜻이다.
사람들이 꽃을 사랑하는 데에는 여러 겹의 이유가 있다. 꽃은 긴 겨울 뒤에 찾아오는 생명의 부활을 알리고, 사람들을 거리와 공원으로 불러 모아 함께 아름다움을 나누게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꽃이 우리 마음을 깊이 움직이는 이유는 그것이 오래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매년 봄 꽃잎이 하나둘 떨어질 때 우리는 깨닫는다. 아름다움은 사라질 것을 알 때 더욱 깊이 마음을 울린다는 사실을. 그래서 봄이 오면 사람들은 또다시 나무를 올려다보게 되는지도 모른다.
2026-03-12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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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동윤의 비욘드 아크] 부동산이 묻는 사회적 가치
필자는 2021년 4월 21일 자 본 칼럼에서 ‘토지의 주인은 원래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법적으로 소유권은 개인에게 귀속되지만, 토지가 만들어내는 가치의 상당 부분은 공동체가 형성한다는 문제의식에서였다. 도로와 철도, 학교와 병원, 산업단지와 공원, 그리고 무엇보다 도시라는 거대한 협업의 결과가 땅값을 만든다. 한 필지의 가격은 그 땅 위에 서 있는 건물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주변의 인프라, 사람, 제도가 함께 만든 총합이 토지의 가치를 형성한다. 더 나아가 원래 처음부터 토지는 특정인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공적인 것이었다는 문제 제기를 통해 부동산 문제의 근본 원인이 과다한 불로소득 발생에 있다면 불로소득 발생을 차단하거나 환수하지 않는 이상 투기를 잠재우기는 불가능하다는 내용이었다.
노무현 정부는 강한 세제와 보유세 강화를 통해 토지에서 발생하는 불로소득을 환수하려 했다. 종합부동산세 도입은 상징적 조치였다. 토지공개념의 정신을 정책으로 구현하려는 시도였지만, 사회적 갈등이 만만치 않았다.
양도세 유예 종료, 자본 흐름 재배치 정책
싱가포르, 다주택 자산 축적 어렵게 설계
집은 투자 수단 아닌 다수의 삶 기반 돼야
문재인 정부 역시 다주택자를 정책의 중심에 두었다. 다주택 보유에 대한 중과세, 양도세 강화, 대출 규제는 투기 수요를 억제하기 위한 장치였다. 그러나 정책의 빈번한 수정과 예외 조항은 오히려 매물 잠김과 가격 상승이라는 역설적 결과를 낳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 다주택자 양도세 한시적 유예였다. 일정 기간 양도세 중과를 완화해 매물을 시장에 유도하겠다는 취지였지만 집값을 안정시키지는 못했다. 이제 5월이면 그 유예의 종료 시점이 다가온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1일, “돈이 되니까 살지도 않을 집을 사 모으는 것”이라며 다주택이나 투자용 비거주 주택의 매도를 유도하는 취지를 설명했다. 이는 도덕적 의무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 정책의 실패 또는 방임 속에서 형성된 이익 구조를 급격한 충격 없이 정리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는 의미라고 했다. 그것이 사회적 비용을 줄이기 위한 선택이라는 설명이다.
양도세 유예 종료는 단순히 세율의 복원이 아니다. 그것은 다주택자에게 여러 주택을 계속 보유할지, 아니면 처분할지에 대한 판단을 하라는 것이다. 세금 부담이 높아진 상황에서 선택지는 세 가지다. 계속 보유하거나, 임대 사업 등 제도권 안으로 편입하거나, 매각해 다른 자산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자본의 이동이다. 매각이 이루어진다면, 그 자금은 금융시장으로 이동할 가능성이 높다. 주식, 채권, 펀드, 혹은 신성장 산업 투자로 이동할 수 있다. 이는 자산 포트폴리오의 다변화를 촉진하고, 과도하게 부동산에 집중된 자본을 생산적 영역으로 분산시키는 효과를 낳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양도세 유예 종료는 세제의 문제가 아니라 자본의 흐름을 재배치하는 정책적 장치로 이해할 수 있다.
최근 싱가포르를 방문한 대통령의 행보 역시 이런 맥락에서 읽힌다. 싱가포르는 국토의 대부분을 국가가 소유하고, 공공주택을 중심으로 주거 안정을 유지해 왔다. 다주택을 통한 자산 축적이 구조적으로 쉽지 않은 대신, 금융시장과 산업 투자로 자본이 흘러가도록 설계되어 있다. 토지에서 발생하는 이익은 공공 인프라와 주거 정책으로 환류된다. 토지의 공공성을 제도화한 사례다.
물론 우리는 싱가포르와 다르다. 한국의 토지는 사유재산권에 대한 감수성도, 개발 과정에서 형성된 이해관계도 복잡하다. 우리나라의 토지는 전쟁과 산업화, 압축 성장의 시간을 거치며 자산 축적의 핵심 통로가 되었다. 부모 세대의 아파트 한 채는 단순한 주거 공간이 아니라 생애의 노력과 불안을 보상받는 상징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토지와 주택은 경제적 대상이면서 동시에 정서적 대상이다. 그렇기에 부동산 정책은 경제 정책만이 아니라 한 사회가 소유를 어떻게 이해하는지, 공동체의 몫을 어디까지 인정하는지에 대한 문제로 확장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세대 간 자산 격차가 구조화되는 현실에서, 주거 문제를 외면한 채 불평등을 논하기는 어렵다. 자가 점유가 불평등 완화의 요인으로 작동한다면, 정책의 초점은 명확하다. 더 많은 이들이 안정적으로 거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 그리고 주택이 과도한 투자 수단으로 기능하지 않도록 제도적 균형을 맞추는 것이다.
건축설계를 하는 입장에서 보면 집은 재화이기 이전에 삶을 담는 그릇이다. 그 그릇이 소수의 투자 수단이 아니라 다수의 삶의 기반이 될 때, 비로소 토지는 공동체의 토대가 된다. 집을 가진 사람과 갖지 못한 사람 사이의 간극이 단순한 자산 차이를 넘어 불평등을 더욱 심화시키는 요인이 된다면 사회는 균열을 피하기 어렵다. 부동산 정책은 그래서 단순한 경제 운용의 기술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사회를 지향하는지를 보여주는 기준이 된다.
2026-03-05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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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화의 크로노토프] 거대함 숭배, 위험한 전문가들
대한민국 문화정책 중심에는 ‘거대함’에 대한 기묘한 집착이 자리한다. 바벨탑 숭배주의처럼, 전국 곳곳에서 제기되는 5만~7만 석 규모 아레나 건립은 K컬처 위상을 증명하는 랜드마크이자 지역 경제 해법인 양 제시된다. 현장 디테일은 지워진 채 일부 기획사와 학계에서는 “규모가 성공을 보장한다”는 장밋빛 수사를 반복한다. 낙관론 뒤에 정작 거대한 하중을 견뎌야 하는 전문예술노동자의 현실은 보이지 않는다. 초대형 인프라 신화 속에서 안전은 실종되었고, 숫자에 매몰된 담론은 예술노동자의 안전을 외면한다.
프랑스 사회학자 기 드보르가 지적한 ‘스펙터클’은 이미지가 사회적 관계를 매개하고 지배하는 ‘통치 질서’다. 이 질서에서 중요한 것은 실질적 내용보다 가시성이며, 경험보다 연출된 장면이다. 초대형 아레나는 바로 이러한 스펙터클 체제의 정치적 구현물이다. 완공은 곧 성과가 되고, 조감도는 정책을 선점한다. 이미지가 현실을 앞질러 성공을 선언할 때, 건축은 문화시설이 아닌 권력을 전시하는 장치로 변한다. 화려한 이미지가 실재를 압도하는 순간, 예술 터전은 위험이 외주화된 ‘공장’으로 전락한다. 예술가의 노동은 보이지 않는 곳으로 밀려나고, 안전은 비용 절감의 대상으로 처리될 뿐이다.
인프라 팽창 속도에 비해 이를 운용할 직접 고용된 무대예술 전문인력은 턱없이 부족하다. 현장의 비극은 반복되지만, ‘그림자 노동자’의 생명권을 위한 구조적 개선은 더디다. 심지어 공연 산업 확장세에 편승해 ‘단기간 속성 전문가’를 양산하는 풍경까지 펼쳐진다. 민간자격에 정부 명칭을 교묘히 섞어 국가가 전문성을 보증하는 듯한 ‘착시’를 파는 구조다. 수십 톤 구조물이 오가는 현장 지휘권을 숙련자가 아닌 단기 학습자에게 맡기는 일은 행정 편의를 넘어 안전 관리 체계의 취약성을 드러낸다.
공연장의 본질은 화려한 건축물을 넘어, 고도의 직무가 교차하는 유기적인 노동 조직 공간이다. 그러나 우리 정책은 건립 이후 운영 방안과 숙련 체계를 충분히 다루지 않는다. 공연 선진국 독일은 ‘독일 사고예방 규정 제17호’로 무대 안전 규정을 제도화했고, 일본 역시 ‘연출공간 운용 및 안전 가이드라인’으로 주체 간 책임 체계를 명문화했다. 그들은 ‘안전이 보장되는 무대’를 체계화하고 제도화했지만, 우리는 여전히 ‘공연장 건축’에 집중하고 있다. 건물은 완공되지만, 무대 운용 전문인력 시스템은 충분히 마련되지 않는 모순이 반복된다. 이 현상은 수출 신화를 위해 노동자 희생을 당연시했던 개발독재 시대의 비인간적 노동관과 소름 돋게 닮았다.
전년 대비 11.9% 증가한 문화예산은 수치상 ‘문화 강국’을 향한 과감한 투자처럼 비친다. 정작 내용을 들여다보면 콘텐츠 외연 확장에 무게가 쏠려 있다. 문화정책의 본령인 ‘공공성’과 ‘생태계 안전망’은 잘 보이지 않는다. 콘텐츠 수출이라는 화려한 성적표 뒤에, 창작자 권리 구조나 노동 조건 개선을 위한 제도적 고민은 좀처럼 확인하기 어렵다. ‘상품’의 양적 팽창에만 몰두한 나머지, 콘텐츠를 만드는 주체인 ‘사람’의 지속 가능성은 또다시 개인의 책임으로 남겨진 셈이다.
수도권 대형 공연의 지역 유통을 위해 140억 원 투입을 추진하는 문체부 계획 역시 우려스럽다. ‘수도권 공연을 지역에서 본다’는 명분은 지역 기반 시설을 수도권 콘텐츠 유통을 위한 단순 ‘하청 기지’로 전락시키는 처사와 다름없다. 국가 균형발전은 허울 좋은 구호로 메아리칠 뿐이다. 그 자리를 채운 시혜성 행정은 지역 예술 생태계의 자생력을 갉아먹는다. 더 큰 문제는 이 정책이 공연장 안전을 직접 위협한다는 점이다. 지역 특수성을 충분히 알지 못한 외부 인력이 단기 실적에 쫓겨 무대를 설치하고 철수하는 과정은 사고 위험과 직결된다. 현장에 대한 성찰 없는 ‘유통 지상주의’는 공연 현장을 언제든 ‘사고 현장’으로 바꿀 수 있는 시한폭탄과 같다.
도시는 기억을 축적하는 장치며, 공연 현장은 숙련의 시간이 켜켜이 쌓여 전문성이 형성되는 시공간이다. 한 장소에서 공연예술인들이 오랜 시간 호흡을 맞출 때, 비로소 위험은 예측 가능해지고 안전은 경험으로 자리 잡는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아레나의 조감도가 아니라 현장의 생명을 지켜낼 ‘안전 설계도’다. 공연장은 관객 수용시설을 넘어, 고도의 예술노동이 작동하는 기술집약적 공간이다. 이제라도 모든 공공극장에 공연 개시를 최종 승인하고 위험시 작업을 중지할 권한을 가진 ‘무대감독’의 상시 배치를 제도화해야 한다. 무대예술전문인의 안전 판단이 흥행 논리보다 우선한다는 원칙이 서지 않는 한, 어떤 대형 인프라도 사치스러운 신기루에 불과하다. 수만 명의 환호보다 먼저 응시해야 할 것은, 보이지 않는 현장에서 묵묵히 땀 흘리는 예술노동자의 존엄과 생명이다.
2026-02-26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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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의 생각의 빛] 가질 수 없는 너에게 보내는 엽서
도로명이 같은 동네 문인들 몇몇이 횟집에 모여 조촐한 ‘신년회’를 하였다. 지역 창작지원금 선정자도 두엇 끼어 있었는데, 이들이 구상하는 향후 출판 계획을 들으면서 부러웠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그로부터 1주일가량 지나 필자가 속해 있는 작가 모임의 정기총회가 열렸다. 신임 회장을 비롯한 임원 및 집행부 인선이 승인되고 난 뒤, 모임에서 연말이면 수여하는 작가상의 상금 배분 문제와 관련한 안건을 놓고 오랜 시간 회원들 의견이 갑론을박 진행되었다. 총회 막바지에 작가의 창작 정신과 문학상의 의미를 곱씹게 하는 고문 한 분의 귀중한 격려사를 마지막으로 행사는 끝이 났다. 늦은 저녁을 겸한 뒤풀이 자리에서 테이블마다 서로 마주 앉아 모처럼 총회의 피로를 잊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분위기였지만 마음 한편에 싸늘하게 올라오는 물음을 어쩔 수 없었다.
작가와 문학상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문학하는 일’의 의미였다. 요즘 부쩍 늘어난 각종 문학상 수상 소식을 듣는다. 글 쓰는 이라면 한 번쯤 문학상에 응모하거나 도전하려는 마음이 생기는 건 인지상정이다. 주위에서 굵직한 상금이 딸린 문학상이라도 받게 되면 집필에 집중하다가도 더러 ‘딴생각’이 들지 않는 건 아니다. 이를테면 ‘돈 안 되는’ 문학을 하면서도 이에 대한 격려와 보상의 차원에서 기관에나 단체에서 작가에게 주는 상은 윤택하고 안정적인 창작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계기요 에너지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런데 예전부터 문학상이 주는 순기능이 사그라들고 역기능이 도드라지는 현상을 심심찮게 듣거나 보게 된다. 창작 역량이 제각각 천차만별인 문단 사회에서 재능 있는 작가로 인정받는 손쉽고도 단순한 잣대가 문학상 수상 여부이다.
문학상 수상 이력이 화려할수록 독자는 작가와 작품을 예사롭지 않은 눈길로 바라본다. 반면에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창작의 한길만을 걷는 작가라도 문학상과 인연이 먼 이들이 있다. 그러니까 상 자체는 작가에게 부여하는 문학적 권위의 월계관이라기보다는 작품성이나 창작의 노고 여하와 관계없이 주어지는 ‘행운’의 일종이라는 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창작이 먼저고 그다음에 의도와 무관하게 상이 뒤따르는 것이다. 하지만 문학상 수상과 관련한 뒷얘기를 종합해 보면 수상을 목적으로 한 집필 활동이 우리 시대의 작가들 사이에서 공공연한 비밀처럼 널리 퍼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물론 모든 작가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열정적인 집필과 작품성이 별개인 것처럼, 너도나도 좇게 마련인 공동체의 기류와 관계없이 ‘쓰기’ 자체에 빠져 자신의 재능을 온전히 쏟아붓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궁핍한 시대에 시인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란 물음으로 잘 알려진 시인 프리드리히 횔덜린(1770~1843)은 청년기 짧은 시기에만 창작에 몰두하였고, 나머지 반평생을 정신질환에 고통을 받으며 숨진 독일 시인이다. 횔덜린이 살았던 시대의 독일과 지금의 한국을 단순하게 비교할 수는 없지만, 고전주의가 막을 내리고 낭만주의가 활짝 필 때의 독일 지성의 조류는 자연과 고대에 관한 관심과 아울러 작가의 개성과 상상력을 높이 샀다. 계몽주의와 과학의 비약적인 발전에 대한 반대급부의 일종으로서 팽배해진 당시 유럽 지성계의 흐름이었다. 그러한 지적 물결의 한복판에서 횔덜린은 당대를 궁핍한 시대라 규정하면서 진정한 시인의 태도와 자세가 무엇인지 되물었던 것이다.
인공지능(AI) 기술이 눈만 뜨면 새롭고 앞선 버전으로 업그레이드되고, ‘문학’이라는 이름이 포함된 인문학의 퇴조를 실감하고 있는 지금 우리 작가들에게 창작이 과연 누구를 위하며 무엇을 얻기 위한 행동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작가의 창작활동 지원과 보호를 위한 정부 기관 및 재단과 단체의 창작지원금, 그리고 여러 문학상 제정과 시행이 척박하고 곤궁한 정신문화의 허기를 앓고 있는 이 시대의 작가에게 어떤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지 나로서는 도무지 알 길이 없다. 허울뿐이며 뒷말이 무성한 문학상 제도를 없애자는 말이 아니다. 당연히 존재해야 하고 작가에게도 분명 큰 힘이 된다. 한편으로 그러한 문학상의 남발은 창작 동기와 근기가 허약하면서 창작 관행에 따른 글쓰기만을 문제의식 없이 ‘일삼는’ 작가들에게는 오히려 ‘달콤한 독약’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상기한다. 다시 말해 상금을 받기 위해 창작을 하는 주객전도, 혹은 쓰기 위해 쓰는 게 아니라 명성을 얻기 위해 쓰는 본말전도의 형국을 작가와 문단 스스로 자초할 때 횔덜린이 말한 궁핍한 시대의 시인이 떠맡아야 할 사명은 석양의 놀빛처럼 차차 사그라들기 마련이다. 정신은 결코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요즘엔 물질적인 허기를 참아가며 오로지 문학이라는 하나의 이름만으로 자신의 상상력과 재능을 탕진했던 지난 시대 진정한 작가가 그립기만 하다. ‘그런 시대’가 아니라 ‘그런 정신’이 아쉽다는 뜻이다.
2026-02-19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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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호의 오픈 스페이스] 한 발짝 다가온 예술인복지센터
지난 4일 발표된 2026년도 부산문화예술 지원 사업 1차 공모 결과는 외형적으로 괄목할 만한 성과를 보여주었다. 64억 9963만 원이라는 대규모 재원 투입과 49%에 달하는 역대급 선정률은 부산시가 추진 중인 ‘예술지원 고도화 로드맵’의 의지를 투영한다. 2027년까지 총사업비 100억 원 확충을 목표로 하는 시의 정책적 방향타는 분명 창작 생태계의 확장을 향하고 있다.
그러나 수치상의 풍요로움과는 대조적으로 현장 예술가들이 느끼는 체감 지수는 차갑기만 하다. 예산의 증액이 곧 예술적 삶의 질적 개선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역설은, 현재의 지원 체계가 창작의 마중물이 아닌 예술가 개개인의 ‘생존 기제’로 고착화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작년에는 처음으로 세 차례에 걸친 현장 설명회가 있었지만, 여전히 ‘나는, 나는 왜?’라는 볼멘소리가 들린다. 분절된 소통과 행정적 피로감 속에서 예술은 공적 자금에 의존하는 수동적 객체로 전락할 위기에 처해 있다.
기획재정부가 운영하는 ‘e나라도움’과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국가예술지원시스템’(NCAS)은 전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정교한 공공재 배분 장치다. 하지만 이 정교한 시스템은 역설적으로 예술 현장에 ‘행정적 억압’으로 작용한다. 대학 문을 나선 예비 예술인들은 창작의 본질을 고민하기도 전에, 공공 행정의 ‘텔레올로지’(Teleology, 목적론)에 매몰된 성과 지표와 복잡한 정산 체계를 먼저 학습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예술적 상상력은 행정적 가독성이라는 규격화된 틀로 치환된다. 이른바 ‘창작의 기술화’ 현상이다. 한정된 자원의 효율적 배분이라는 경제 논리는 모든 창작 활동에 ‘성공’이라는 가시적 결과를 강요한다. 이러한 강박은 예술 본연의 가치인 실험성과 불확실성을 거세하며, 반드시 성공이라는 이름으로 결과물을 도출해 내야 한다. 실패를 인정하는 장치는 어디에도 없다.
이제는 공급자 중심의 창작 지원을 넘어, 사회민주주의적 복지 모델에 기반한 ‘보편적 예술인 복지 정책’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 최근 부산 예술인복지지원센터가 원도심 ‘한성 1918’로 이전하며 독자적인 거점을 마련한 것은 매우 고무적인 신호다. 이는 단순히 공간의 접근성을 높이는 문제를 넘어, ‘예술인 복지의 제도적 전위’를 확보했다는 정책적 함의를 지닌다.
센터가 수행하는 예술인 파견 사업, 법률·세무 컨설팅, 생활안정자금 지원 등은 예술가를 시혜의 대상이 아닌 전문직 직업군으로 승인하는 사회적 과정이다. 특히 예술의 공공 가치를 사회적 임금 형태로 보전하려는 ‘예술인 기본소득’ 담론은 예술적 노동을 가치 있는 사회적 행위로 인정하려는 진취적인 시도다. 예술이 더 이상 ‘배고픈 열정’에 기대지 않고, 안정적인 토양 위에서 지속 가능성을 담보 받아야 할 때다.
최근 이재명 정부의 예술인 복지정책의 핵심은 ‘예술을 직업으로 인정하고, 최소한의 생활 안정은 국가가 받쳐준다’는 것이다. 예술인에게 연간 100만 원 수준의 ‘예술인 기본소득’을 지급하겠다는 공약이 제시되었고, 출범 이후에도 예술인 기본소득 도입 필요성을 여러 차례 공개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제도적 안착을 위해서는 여전히 넘어야 할 산이 많다.
부산의 센터가 전국 최초의 독립 공간을 확보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산문화재단 내부의 부속 기구로 존치되어 있다는 사실은 운영의 자율성과 전문성을 제약하는 요소다. 복지 행정이 일반적인 지원 사업의 논리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서는 과감한 구조 개편이 선행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부산시 본예산에서 회계나 독립된 운영 구조를 구축하는 ‘재정적 디커플링’(Decoupling)이 시급하다. 복지 예산이 문화예술진흥기금의 변동성에 휘둘리지 않고 독립성을 확보할 때, 비로소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예술가의 복지 로드맵의 실현이 가능해진다. 이는 시의회와 주관부처, 그리고 지역 예술계가 결합한 강력한 정책 거버넌스를 통해서만 완성될 수 있는 과제다.
결국 예술인 복지의 완성은 예술가를 시혜적 복지의 수혜자로 보는 관점에서 벗어나, 사회적 권리의 주체로 존중하는 데서 시작된다. 독립 기구로서의 법적·제도적 지위를 공고히 할 때 부산의 기초 예술 토양은 비옥해질 것이다.
‘창작이 노동이자 직업이 되는’ 사회는 결코 요원한 꿈이 아니다. 행정의 ‘뷰로크라시’(Bureaucracy·관료주의)를 걷어내고 예술가들이 본연의 창작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지향해야 할 진정한 예술 행정의 고도화다. 예술인이 당당한 사회적 시민으로서 그 권리를 보장받을 때, 부산의 문화예술은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공공성을 획득하게 될 것이다.
2026-02-12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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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성의 개념 쌓기] 망치를 들면 모든 게 못으로 보인다
‘망치를 들면 모든 게 못으로 보인다.’ 미국의 소설가 마크 트웨인이 한 말로 잘못 알려진 이 말은 영미권에서 널리 통용되는 속담이다. 통상 모든 상황을 자신이 가진 특정 방식대로만 해석하고 해결하려는 편향된 태도를 일컫는다. 비슷한 버전으로는 2017년 개봉했던 아프가니스탄 전쟁 관련 미국의 블랙코미디 영화인 ‘워 머신’에서 저널리스트로 나오는 숀 컬런이 한 대사가 있다. 장군들이 전쟁을 벌이는 주된 이유는 오로지 전쟁 속에서만 자신들이 진정으로 중요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란 것이다. 물론 망치를 든 목수이건 교전 명령권을 가진 장군이건, 관건은 이 두 주체가 모두 자신의 자율성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데 있을 터이다. 다시 말해 이 장군은 자신이 장군이기 때문에 전쟁을 부르짖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상황을 타개할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 전쟁뿐이기에 전쟁을 선택한 것이라고 항변한다는 얘기이다. 만일 전쟁 이외의 방법이 있었다면 자신은 결코 교전 명령을 내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덧붙이면서 말이다.
이때 군인 출신이 아닌 이들에게는 이 장군의 오류가 금방 보인다. 지금 당신은 당면한 사태를 잘 해결하는 것과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것을 혼동하고 있다고 지적을 준비하는 건 쉬운 일이다. 문제는 지적이 아니라, 그 지적에 대한 수용이다. 쉽게 추측되듯, 이런 상황에서는 설득이 쉽지 않다. 저 주체들은 망치나 명령권과 같이 지금 자신의 손에 들린 도구를 스스로가 완전히 자유롭게 통제하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주체에겐 지금의 판단은 도구에 잠식된 결과물이 아니라, 지극히 합리적인 의사 결정이다. 견줘보건대 이는 치매 환자에게 그가 치매임을 납득시키는 것의 어려움과도 유사하다. 문제의 뿌리는 단순하게 지금 판단의 오류 여부에 있는 게 아니다. 이 표피 밑의 진정한 근저는 통제력의 환상이 똬리를 틀고 있다.
물론 이건 인간적으로 얼마든지 이해할 만한 비극이다. 수년간 목수 일을 하면서 망치를 자유자재로 다뤄오지 않았던가? 또한 평생 군에 몸담으면서 장군 계급장까지 달지 않았던가? 이러한 주체가 자신이 가장 익숙하고도 전문적인 분야에서 비합리적이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란 참으로 버거운 일이다. 게다가 자신이 가장 잘 다룬다고 믿었던 도구에, 되레 자신이 휘둘려지고 있었다는 사실 또한 큰 충격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이때 손상되는 건 자유의지이다. 자유의지를 갖고서 도구를 자유롭게 통제한다고 상상한 바로 그 신화화된 주체 말이다. 손안에 든 도구조차도 통제하지 못한다면, 대관절 내가 이 세상에서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게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나 진실에는 영상물등급위원회가 설치돼 있지 않기 때문에 가혹성에 고삐가 없다. 처음엔 연장통을 늘어놓고서 다룰 도구를 택하던 내가, 어느 순간부터는 거꾸로 그 도구에 의해 선택된다. 검을 휘두르던 이는 결국 검에 의해 휘둘러지고 만다. 주인의 결정을 기다리는 수동적인 것이 도구라면 이 구도 안에서 도구는 무엇보다 나 자신이란 것이 견디기 힘든 가혹한 진실이다. 어떤 의미에서 비록 무의식적이라 할지라도 이 존재는 지금 자신이 한낱 도구 이상이 아님을 감지하고 있을 심산 또한 크다. 이때 주체는 또다시 신화가 된다. 처음에 신화는 단순 무지 때문에 형성됐지만 그다음에 신화는 무엇보다 주체의 비루함을 숨기기 위해 요청된다. 즉 진실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어기제인 것이다.
참고로 철학에서는 이처럼 도구를 가치중립적 수단으로 보고, 도구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사용자에게 있다고 보는 태도를 ‘도구주의’라고 부른다. 강도 손에 들린 칼은 범죄를 낳지만, 요리사 손에 들린 칼은 맛난 음식을 낳는다는 식의 믿음인 것이다. 이때 칼은 전적으로 어느 주인을 만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지극히 수동적인 것으로서 상정된다. 당연히 이러한 규정의 짝패는 한낱 도구엔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을 정도로 절대적인 능동성을 지닌 주체에 대한 믿음이다. 그러나 앞서 봤듯 이는 신화에 불과하다. 그가 속한 세계가 혼탁할수록 어디에도 휘둘리지 않는 자신만의 무언가를 확보하고픈, 지극히 인간적인 욕망으로 추동되는 그러한 신화 말이다.
해가 바뀌고 벌써 한 달이 훌쩍 지났다. 무언가 진정으로 새롭게 시작하고자 다짐한 이가 돌아봐야 할 것은 눈앞의 세계가 아니다. 먼저 반추해야 할 것은 내 손에 든 도구와 여태껏 걸어온 길이다. 평범한 인간은 사태를 보고서 도구를 고르는 것이 아닌, 가진 도구를 통해 사태를 규정하려고 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명한 이라면 자신을 영웅이 아닌 평범한 존재라고 상정할 터이다. 도구는 도구 그 이상이되, 사람은 사람 그 이상이 아니다. 진정한 능동성은 수동성에 대한 깊은 자각에서 시작되는, 실로 얄궂은 것이다.
2026-02-05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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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학수의 문화풍경] ‘환단고기’를 다시 읽는 이유
“우리 동방의 사람은 하늘의 이치를 알아, 인간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한다.” 〈환단고기〉의 사상을 요약하는 이 문장은 역사적 사실 여부와는 별도로, 한 공동체가 스스로를 어떤 존재로 이해하고자 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1월 말은 새해의 결심이 서서히 힘을 잃는 시기다. 계획과 목표가 흔들릴수록 우리를 지탱하는 것은 ‘무엇을 할 것인가’보다 ‘나를 누구라고 믿고 살아가야 하는가’라는 질문이다. 자기개념, 곧 자기의식은 개인의 의지나 성취만으로 형성되지 않는다. 그것은 몸에 밴 태도와 습관, 기억과 분위기, 그리고 우리가 속한 공동체가 오랫동안 반복해 온 이야기 속에서 서서히 빚어진다. 개인이 자신을 이해하는 방식은 언제나 자신이 속한 더 큰 ‘우리’에 대한 이해와 맞물려 형성된다. 그래서 자기개념을 성찰하려는 시선은 자연스럽게 개인을 넘어 그가 속한 집단의 서사로 향하게 된다.
이 집단적 자기 이해가 한 사회 차원에서 응결된 형태가 바로 국민정신이다. 국민정신은 개인의 심리와 윤리를 떠받치는 중요한 토대다. 국가 공동체가 자신을 존엄한 존재로 인식할 때 그 안에 속한 개인 역시 좀 더 안정된 자존감을 가질 수 있다. 반대로 공동체가 스스로를 하찮거나 주변적인 존재로 내면화할 경우 개인의 자기 확신 또한 쉽게 흔들린다.
신화적 요소 지녀도 배척해서는 안 돼
사실 여부보다 사유 흔적으로 이해를
어떤 삶 자세 가능하게 했는지가 중요
이러한 국민정신은 처음부터 언어로 조성되지 않았다. 춤과 의례, 제의는 말보다 앞서 공동체 세계관을 몸에 새겨 왔다. 절기의 제사나 집단적 춤사위, 예절의 신체 동작은 개인에게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살아온 사람들”이라는 감각을 반복적으로 각인시킨다. 그러나 몸의 언어는 본질적으로 다의적이다. 이와 달리 텍스트는 의례와 몸의 실천에 담긴 의미를 개념적으로 정리하고 공동체의 자기 이해를 언어로 고정한다. 춤과 의례가 국민정신을 ‘느끼게’ 한다면, 텍스트는 그것을 ‘이해하게’ 한다. 문제는 어떤 텍스트가, 어떤 방식으로 이 역할을 수행해 왔는가이다.
이 물음의 연장선에서 〈환단고기〉를 둘러싼 논쟁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책이 신뢰할 수 있는 역사 문헌인가를 두고는 논란이 많다. 그러나 텍스트의 가치를 오직 사실 여부로만 판단할 수는 없다. 사실적 정확성이라는 질문 너머에는 또 다른 물음이 놓여 있다. 즉 이 텍스트가 독자에게 어떤 자기 이해의 가능성을 열어주는가 하는 점이다.
니체는 〈선악의 저편〉에서 이렇게 말한다. “어떤 판단이 거짓이라는 점은 그 판단을 반박하는데 결정적 이유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삶을 고양하고, 삶을 유지하며, 생을 지탱하는가 하는 점이다.” 니체에게 중요한 기준은 사실의 정확성이 아니라, 그 판단과 해석이 인간의 삶에 어떤 힘으로 작용하는가였다. 어떤 이야기가 인간을 위축시키고 자기 경멸로 이끈다면, 그것이 사실이라 해도 삶에 해롭다. 반대로 한 서사가 인간에게 자신을 긍정할 힘과 버텨낼 용기를 준다면, 그것이 신화적 요소를 지닌다 해도 섣불리 배척되어서는 안 된다. 니체는 진리를 삶과 분리된 추상적 기준으로 평가하지 않으며, 오히려 삶을 북돋우는 해석과 삶을 약화시키는 해석을 가려내는 데 철학의 역할이 있다고 보았다. 그에게 철학적 사유란 사실의 나열이 아니라, 삶을 견디게 하고 지속하게 만드는 해석의 기술이었기 때문이다.
이 관점을 텍스트 읽기에 적용한다면, 문제는 한 문헌이 ‘사실인가’보다 그것이 ‘어떤 삶의 태도와 자기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가’로 이동한다. 〈환단고기〉는 유구한 시간적 연속성과 선택된 공동체라는 상상을 통해 개인이 자신을 우연적 존재가 아니라 찬란한 전통의 흐름 속에 있는 존재로 이해하도록 이끈다. 이러한 서사는 개인의 자기개념 형성에 작용하는 중요한 문화적 자원이 된다.
이와 유사한 사례는 이스라엘 민족의 성경 전통에서도 찾을 수 있다. ‘선민’이라는 집단적 자기 이해는 유대 공동체가 오랜 유랑과 박해 속에서도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왔다. 이 믿음의 역사적 진위를 어떻게 평가하든, 그것이 개인의 자기의식과 존엄성을 지탱해 온 힘이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 사례가 보여주듯 중요한 것은 서사의 사실 여부가 아니라 그 서사가 개인에게 어떤 삶의 자세와 자기 인식을 가능하게 했는가이다.
〈환단고기〉는 맹신의 대상도, 냉소의 텍스트도 아니다. 그것은 한 공동체가 스스로를 존엄한 존재로 이해하고자 했던 사유의 흔적이다. 개인의 자아개념이 쉽게 흔들리는 시대, 우리는 어떤 이야기가 우리를 더 단단하게 살아가게 하는지를 물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과거가 ‘정확히 어땠는가’가 아니라, 그 과거를 해석하는 우리의 사유가 ‘오늘의 삶을 어떤 방향으로 열어 주는가 하는 점‘이다.
2026-01-29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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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동윤의 비욘드 아크] AI 시대, 인간을 다시 생각한다
2026년 새해의 시작과 함께 전 세계의 이목은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소비자 가전 전시회)에 집중됐다. 이번 행사에서 가장 주목받은 것은 현대차가 선보인 피지컬 AI, ‘아틀라스’였다. 글로벌 IT 전문 매체가 선정하는 ‘베스트 오브 CES 2026’에서 ‘최고 로봇’상을 받기도 한 아틀라스는 현존하는 휴머노이드 로봇 가운데 가장 진보된 사례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아틀라스는 단순히 움직이는 기계가 아니다. 인지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로봇이다. 스스로 학습한 내용은 같은 작업공간에 있는 모든 아틀라스에게 바로 공유된다. 배터리가 부족하면 스스로 충전한다. 로봇이 인간의 노동을 대체할 날이 멀지 않았음을 선포하는 것 같다.
코로나 펜데믹 이후 AI는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오픈 AI의 샘 올트먼은 “인간의 모든 지적 능력을 대체하는 기계 AGI가 5년 안에 가능하다”고 말했다. AGI(범용 인공지능)는 특정 작업이 아닌, 인간처럼 다양한 영역에서 추론하고 학습하며 문제를 해결하는 범용 인공지능이다. 소프트뱅크의 손정의 회장은 한발 더 나아가 ASI(인공지능 초지능)에 베팅하고 있다. 인간보다 수천, 수만 배 뛰어난 지능이 10년 안에 가능하다는 전망도 나온다. 일부 연구자들은 AGI가 수백만 명의 개발자 지능을 시뮬레이션하며 단기간에 ASI로 진화할 수 있다고 예측한다.
이러한 변화는 노동시장에 즉각적인 충격을 주고 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최고의 직업으로 꼽히던 개발자는 이제 경력자만 필요로 하는 직군이 됐다. 신입사원이 맡던 일의 상당 부분을 AI가 수행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구글과 마이크로소프트 등 미국의 빅테크 기업들은 대규모 해고와 채용 중단을 단행했고, 해고는 입사 초기 인력부터 시작됐다. 경력을 쌓을 기회마저 AI가 대체하면서, 미래의 직업에 대한 불안은 더욱 깊어지고 있다.
건축 설계 역시 예외는 아니다. 우리나라 건축 설계 분야의 디지털 전환은 아직 더딘 편이지만, 최근 시장에서는 디자인 요구가 세분화되며 일회성 프로젝트가 늘고 있다. 소규모 주택이나 근린생활시설의 기본 평면 정도는 건축주가 직접 AI를 활용해 만들어 오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도면의 완성도가 곧 전문성과 권위를 상징하던 시대는 서서히 저물고 있는 듯하다.
공공건축과 도시계획 분야에서는 변화가 더욱 뚜렷하다. 디지털 트윈 기술은 도시계획을 종이 도면의 영역에서 ‘체험’의 영역으로 옮겨놓고 있다. 일조 변화, 침수 경로, 보행 동선은 더 이상 추상적인 선이 아니라 가상 도시에서 직접 확인하고 검증하는 대상이 된다. 재난 대응 역시 사후 분석이 아닌 사전 시뮬레이션을 통해 설계 단계에서 결정된다. 이는 건축이 디자인을 넘어 사회적 안전망과 정책의 적합성을 판단하는 ‘도시 데이터 전문가’의 영역으로 확장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AI 시대의 건축가는 도면을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수많은 가능성 사이에서 조율하고 결정하는 존재로 재편될 것이다.
인간은 오랫동안 ‘이 행성에서 가장 뛰어난 종은 인간’이라는 자부심을 가져왔다. 도구를 사용하며 직립보행을 가능하게 했고, 고도로 발달한 뇌로 문명을 만들어왔다. 그러나 이제 도구를 다루는 능력은 휴머노이드 로봇이 더 능숙하고, 계산과 논리적 추론 역시 인공지능이 앞서는 시대가 됐다.
그렇다면 필연적으로 이제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봉착하게 된다. 다시 인간이 무엇인가를 묻는다는 것은 인공지능을 어떻게 위치시킬 것인지, 그리고 인간의 한계와 확장 가능성을 어떻게 이해하고 미래를 모색할 것인지에 관한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는 인간의 정의가 바뀌는 인류학적 지점에 서 있다. 빌 게이츠는 앞으로 가장 큰 과제는 인공지능의 강력함 그 자체가 아니라, 인간이 인공지능을 관리하고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한다. 그는 AI의 효과를 극대화하려면 그 한계를 인식하고, 적절히 통제하며 활용하는 새로운 철학과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AI가 할 수 없는 마지막 영역은 계산이 아니라 판단이다. 결국 방향을 정하고 의미를 캐내는 일은 인간의 몫이다. 기술은 선택지를 넓혀주지만, 선택의 책임까지 대신해 주지는 않는다. 건축 역시 마찬가지다. AI는 수많은 대안을 제시할 수 있지만, 어떤 공간이 공동체에 필요하고 어떤 도시가 지속 가능하며,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포기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판단은 인간의 사유에서 나온다. 인공지능이 도면을 그리고 도시를 시뮬레이션하는 시대에, 건축가의 역할은 기술을 앞서는 데 있지 않다. 기술이 닿지 못하는 질문을 끝까지 붙잡고, 인간의 삶과 사회가 향해야 할 방향을 사유하는 데 있다.
2026-01-22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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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화의 크로노토프] 해양수도 부산, '축적'의 시간으로
새해는 언제나 약속의 시간이다. 늘 계획과 목표로 시작된다. 지난해 12월 23일, 해양수산부 부산 이전 개청식은 구호로만 외쳐왔던 해양수도가 현실로 전개되는 새로운 한 해의 출발을 알렸다. 하지만 7조 3566억 원이라는 예산과 함께 온 해양수산부의 정착이 단순한 물질적 팽창이 될지 도시의 문화적 자생력과 자존심 회복으로 이어질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도시는 문화적 경험이 반복되고 기억이 축적되어 쌓일 때, 비로소 한 세대의 유행을 넘어 영속적인 생명력을 지닌 ‘문명의 그릇’이 된다. 도시에 생명을 불어넣고 지탱하고 유지하는 핵심적인 비결이자 에너지가 문화와 예술이다.
지난해, 부산 지역 기업인들은 오페라하우스와 콘서트홀 등을 후원하기 위해 (사)부산클래식문화재단을 설립했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마저도 여전히 불안하게 보인다. 화려한 물질적 기반은 갖췄으나. 정작 그 공간을 채울 ‘부산만의 기억과 시간’이라는 준비 과정이 제대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공연예술 장르에서 공공 예산으로 유명세를 임대하는 일은 쉽다. 알려진 거장을 영입하고, 이미 완성된 대형 기획사의 공연 상품을 쇼핑하듯 사 오는 방식은 단기적인 박수갈채를 보장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도시 문화의 축적이 아니라, 아직 채워지지 않은 빈자리를 임시방편으로 가리는 ‘문화적 가림막’에 가깝다. 당장에 곶감만을 빼 먹는 근시안적 소모다.
예술과 문화는 시간을 먹고 자라는 본질을 갖고 있다. 도시는 사람들이 살며 일군 실천들이 모인 복합적인 산물이다. 한순간 화려한 박수보다 수십 년의 제작 역량과 실패와 재도전이 쌓이는 구조가 필요하다. 부산에 정착한 해양수산부 예산 중 아주 작은 일부라도 해양도시의 문화예술을 위해 사용되기를 바란다. 총예산의 0.3%만이라도 해양 문화와 해양 예술을 꽃피우기 위한 마중물로 쓰이면 좋겠다. 그 예산으로 부산이 완성품만 소비하는 ‘문화 변방’에서 벗어나게 되고, 지역 예술가들이 부산의 바다와 해양을 소재로 직접 콘텐츠를 빚어내는 주체가 되면 좋겠다.
해양문화도시는 개념이나 방향 없이 반복되는 전시와 축제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어딘가에서 무언가를 사오거나 빌려온다고 저절로 만들어지지도 않는다. 부산의 바다와 항구는 단순한 경관이 아니다. 전쟁을 통한 이주와 노동으로 이루어낸 삶이 켜켜이 쌓여 만든 ‘기억의 서사 공간’이다. 관광객들이 단순히 스치고 지나갈 ‘볼거리’가 아니라, 예술적 형식으로 정형화되고 반복 생산되어야 할 소중한 ‘문화 자산’이다. 도시의 문화예술은 연구와 기록, 창작과 재공연, 교육과 전승으로 이어지는 구조 속에서만 살아남는다. 예술과 문화는 단기적 성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그 과정을 제도적으로 유지할 수 있어야 지속적으로 꽃피울 수 있다.
우리는 흔히 사치품을 명품이라 부르며, 외부에서 가져온 비싼 공연에 ‘세계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곤 한다. 그러나 세계적인 것은 그 도시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것, 그곳의 사람과 시간이 축적된 것이라야 한다. 그리스 음악가 미키스 테오도라키스가 “가장 그리스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 한 이유도 마찬가지다. 바다와 해양, 그리고 부산만이 가진 독창성이 빠진 ‘수입산 콘텐츠’만으로는 이 도시의 정체성을 담아낼 수도, 세계적인 것이 될 수도 없다. 지역의 경험과 시간으로 만들어진 고유한 창작물이 지층처럼 쌓일 때, 부산은 세계적인 도시가 된다.
병오년 새해에 부산은 무엇을 더 빨리 가져올 것인가 보다, 무엇을 더 오래 키울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문화가 다시 ‘곁다리’나 ‘전시행정’으로 밀려난다면, 도시는 양적으로 팽창할지언정 질적으로는 같은 자리를 맴도는 공허한 성장에 그치고 말 것이다. 문화재단이나 문화회관 또한 수도권 대형기획사의 일회성 공연 유치를 위한 ‘부산분점’ 역할에 그치지 말고, 지역 예술가들의 자생적 제작 기지를 자처하며 ‘부산발 콘텐츠’를 길러내야 한다. 예술가가 다음 작업을 지속적으로 준비하는 시간과 조건을 보장해야 한다. 문화예술 예산은 미래를 담는 냉철한 정책의 언어라야 한다.
부산의 콘텐츠가 세계로 뻗어나가는 꿈을 꾸어야 한다. 부산의 꿈이 유명인들의 방문 횟수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 숫자로 만든 성은 모래성처럼 무너질 수 있지만, 부산 사람의 땀으로 쌓은 기억과 그 기억이 빚어낸 예술은 풍랑에도 휩쓸리지 않는다. 부산이 단순한 소비의 파동을 넘어, 깊고 단단한 창작의 심연을 담아낼 시간이 되었다. 자본이 잠시 스치고 지나가는 항구에 머물게 할 것인지, 오랜 세월 사람이 살며 문화와 더불어 빛나는 해양도시로 만들 것인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렸다. 새로 둥지를 튼 해양수산부가 사람을 부르고, 사람이 머무는 도시 부산을 만드는 데 진정한 문화적 동반자가 되기를 바란다.
2026-01-15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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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재파의 생각+] AI 시대의 평가 방향
최근 국내 최고 대학으로 손꼽히는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등에서 생성형 AI(인공지능)를 활용한 부정행위 사례가 언론을 통해 잇따라 보도됐다. 서울대에서는 ‘통계학실험’ 대면 중간고사 과정에서 다수의 학생이 AI를 이용해 답안을 작성한 정황이 확인됐고, 연세대와 고려대에서도 온라인 비대면 시험 중 많은 학생이 생성형 AI를 활용한 사례가 드러나 큰 충격을 주었다. 이제 일상의 필수 도구로 자리 잡은 AI가 대학의 평가 영역에까지 빠르게 침투해 대학가는 전례 없는 혼란에 빠지고 있다.
AI 활용 부정행위로 인한 혼란에 대학들이 선택한 대응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시험과 과제에서 생성형 AI 활용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려는 시도다. AI 생성물 탐지 프로그램을 활용, 생성형 AI 사용이 의심되는 결과물을 식별하고 적발될 경우 0점 처리나 징계를 적용하는 방식이다. 둘째는 AI 활용 가이드라인을 마련해 사용 범위와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이를 준수하도록 유도하는 접근이다.
대학서 AI 활용한 부정행위 사례 충격
시대 흐름에 맞는 평가 시스템 준비를
이해도·기초 지식 묻는 영역에선 제한
이용한 결과물엔 설명 요구 방식 필요
그러나 생성형 AI 활용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려는 첫 번째 방식은 현실적으로 뚜렷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현재의 AI 생성물 탐지 프로그램은 기술적으로 완벽하지 않아 단어나 문장을 일부 수정하는 것만으로도 의심률을 크게 낮출 수 있다. 또 반대로 학생 스스로 작성한 글이 AI 생성물로 오인돼 부정행위로 판단될 가능성도 존재한다.
이에 비해 AI 활용 가이드라인을 제정해 올바른 사용을 유도하자는 두 번째 방식은 첫 번째 방식보다 유연하고 근본적 해결 방식으로 보이지만 실효성 측면에서 큰 효용이 없다. 대부분의 가이드라인은 AI를 보조적 도구로만 활용해 참고만 하고 최종 결과물에 대한 책임은 오로지 학생에게 있다는 원칙을 제시하는 수준에서 그친다. 이처럼 판단 기준이 모호하고 강제력이 없는 가이드라인은 원론적 선언 이상의 의미를 담보하기 힘들다.
결국 기존의 평가 틀을 유지한 채 AI 활용을 통제하려는 방식은 구조적으로 실효성을 갖기 어렵다. AI 시대 대학이 고민해야 할 질문은 AI 사용에 대한 통제 여부가 아니라, 이 시대에 학생에게 요구되는 역량은 무엇이며 이를 어떻게 가르치고 어떤 방식으로 평가할 것인가에 있다. 다시 말해 대학 교육은 AI 시대에 학생에게 요구되는 역량을 중심으로 교육의 목표와 평가 기준을 근본적으로 재정립하고, 이에 걸맞은 평가 시스템으로의 전환을 본격적으로 준비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는 것이다.
AI 시대에도 학생은 여전히 자신의 학문 분야에 대한 기초 지식과 핵심 개념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AI가 생성한 결과물이 타당한지, 오류나 할루시네이션은 없는지를 판별하기 위해서는 이를 사용하는 인간의 지식과 비판적 사고가 필수적으로 요구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초 지식과 비판적 사고가 전제되지 않은 AI 활용은 학습이 아니라 단순한 의존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관점에서 학문 분야의 기초 지식과 이해도를 평가해야 하는 영역에서는 생성형 AI의 사용을 엄격히 제한할 필요가 있다. 핵심 개념과 원리, 기본적인 문제 해결 능력은 AI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 설명하고 적용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기존의 대면 시험이 유지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러한 평가를 통해 학생이 실제로 무엇을 알고 있는지, 어느 수준까지 이해하고 있는지를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AI 시대의 대학 교육에서는 학문 기초 지식에 더해 AI를 적절하게 활용할 수 있는 능력 역시 중요한 역량으로 평가해야 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AI 활용 능력은 단순히 AI를 사용해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기술이 아니라 목적에 맞게 질문을 설계하고 생성된 결과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며, 이를 자신의 사고와 결합해 창의적 결과물로 재구성할 수 있는 역량을 의미한다.
이러한 역량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AI를 활용해 도출한 결과물과 함께 그 과정과 판단 근거를 설명하도록 요구하는 평가 방식이 필요하다. 특히 결과물 제출에 그치지 않고 구술 설명이나 발표, 토론 등을 병행해 AI를 어떻게 활용했는지, 그리고 그 결과를 얼마나 깊이 이해하고 있는지를 보다 정확하게 검증할 수 있다.
물론 구술 시험을 비롯한 발표, 토론 중심의 평가는 기존의 평가 방식보다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러한 부담을 이유로 평가 방식의 전환을 미루는 한 대학 교육의 신뢰를 유지하기 어렵다. 강좌의 소규모화와 교수 인력 확충 등 구조적 투자가 병행되지 않는다면 어떤 AI 활용 정책이나 가이드라인도 교육 현장에서 실질적인 효과를 거두기 힘들 것이다.
2026-01-08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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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의 생각의 빛] 모시는 마음 가득한 새해 되길 소망하며
어김없이 새해를 맞이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지난 새해를 맞이했던 기억이 떠오르면서 지금의 기분과 교차한다. 만나서 이야기 나누는 사람들이 화젯거리를 떠나 공통으로 내뱉는 말이 시간이 참 빠르다는 것이다. ‘시간’이라는 말이 주는 어감과 의미는 때와 장소, 그리고 상황에 따라 변주되겠지만 늘 엇비슷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게 사실이다. 나이나 계획과 관련해서 더욱 그렇다. 새해를 맞았다는 산뜻한 기분 이면에는 한 살 더 먹는다는 일종의 ‘낭패감’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새해를 즈음해서 생겨나는 부산하고 어수선한 마음과 환경은 봄기운을 타고 넘어오는 따뜻한 공기에 스며들면서부터 본래의 일상 리듬과 감각을 되찾게 됨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해가 바뀌게 되면서 묵은 계획이나 일거리, 혹은 관계를 차근차근 되짚게 된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이런 과정에서 말끔하게 정리되어 다음 차례에 들어서면 되겠다고 생각하는 경우는 별로 없을 것이다. ‘서기(西紀)’로 표현되는 연도의 중요성을 감안해도 단지 ‘숫자’의 증가가 주는 일종의 ‘착시효과’가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시간의 절대적인 본질이라는 인식을 부채질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시간은 숫자로 범주화되어 고정된 실체로 돌변하면서 삶과 생활의 다양한 측면과 가치 영역을 가늠하는 기준이나 척도가 되어버린다. 지혜의 정도를 생물학적 나이로, 성공 여부를 자산이나 연봉 액수로, 능력이나 외모의 평가를 성적 순위나 신체의 비례로 곧잘 인식하는 편견이 우리 사회에 얼마나 퍼져 있는가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사회에서 단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한마디 거들면 ‘꼰대’가 되고, 가진 것 많다는 이유로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자칫 ‘졸부’로 전락하며, 능력이 뛰어나거나 잘생긴 외모는 자주 ‘뒷담화’의 주연이 되곤 한다. 비슷한 시간과 환경이 주어지더라도 결국 개인의 의지와 계획, 그리고 가치관에 따라 다양한 삶의 무늬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세상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나 사회일수록 욕구 불만과 조급증이 시간의 증가와 함께 자신을 옥죄는 올가미가 될 수도 있겠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경제 규모와 소득의 지표로 나라와 사회를 평가하던 시대는 이미 지났다. 삶의 만족도와 행복이 물질적 이득이나 수치의 증가와 비례하지 않는다는 말도 오래전부터 들어왔다.
능력과 재화의 우열로 순위를 결정하고, 이런 순위에 따라 삶의 성공과 가치 여부를 결정하는 사회가 지닌 가장 큰 병폐는 자신보다 열등한 자리에 있는 존재에 대한 우월감과 차별 의식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의식이 만연한 사회는 경쟁과 속도와 정보가 ‘미덕’이 되어버려 사회적 양극화, 그러니까 정서적 풍요와 빈곤의 격차가 벌어지면서 양극단에 자리 잡은 사람과 세대 및 계층 사이의 거리감이 점점 격화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요즘 ‘세대 차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연령별, 세대별, 성별, 지역별, 계층별 등에 따라 복잡하고 세분화된 인식의 단절을 떠올리면 될 것이다.
새해가 들어서면 지난날의 과오와 실수를 되새기면서 다시는 그런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마음도 아울러 다진다. 그런데 아무래도 사람인지라 마치 사계절의 순환처럼 똑같은 과오와 실수를 종종 범하게 마련이다. 문제는 개인적인 실수나 잘못의 범위를 넘어 타인과 사회에 악영향을 미치게 되는 경우다. 자기가 앉은 자리에서 지켜야 하는 최소한의 권한과 영역을 넘어 사익이나 감정의 편의를 부추기는 욕망의 메커니즘에 의지가 무릎을 꿇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특히 공직자가 이런 방향성으로 돌진할 때 생겨나는 폐해는 지난해부터 어지럽게 흘러온 ‘비상계엄 정국’의 혼란만 생각해도 될 것이다.
우리 사회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기후 위기를 비롯한 생태계 교란이 화두로 떠오른 지 오래되었다. 수많은 전문가와 학자들이 우리에게 경고한 말은 저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생명 경시 풍조만큼은 대체로 공통적이다. 직분을 넘어서는 권한 남용을 불러왔던 갖가지 차별 의식의 팽배는 이러한 생명에 대한 인지 불능과 관련이 있다. 김지하 시인(1941~2022)은 ‘가랑잎 한 잎/ 마루 끝에 굴러들어도/ 님 오신다 하소서/개미 한 마리/마루 밑에 기어와도/ 님 오신다 하소서’(‘님’ 중에서)라고 했다. 생명은 동식물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에 깃들어 있어서 이를 모셔야 한다는 자각이 생기지 않으면 아무리 새해가 거듭되어도, 아무리 풍족한 자리에서 여유를 부려도 ‘온탕 속 개구리’마냥 결국 자멸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이런 모시는 마음이야말로 위기에 빠진 이 사회를 소생하게 할 바탕임을 되새겨 본다.
2026-01-01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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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호의 오픈 스페이스] 예술의 3대 요소
“기쁘다 구주 오셨네.” 성탄절의 축복이 지나면서 일력이 며칠 남지 않은 을사년 끝자락이다. 불안한 시국 속에 해를 맞이했지만, 4월 4일 윤석열 탄핵을 기점으로 세상은 다시 작동하기 시작한다. 아우토반처럼 달려온 시간이다.
최근 “국민께 보고드립니다”라는 슬로건으로 국민들은 대통령 정부 업무보고가 안방에서 생중계되는 장면을 맞이한다. 혹자는 넷플릭스보다 재밌다고 한다. 밥그릇 사정이 그렇다 보니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체부) 업무 보고에 관심이 갈 수밖에 없다. 올해 초 1월 10일 문체부에서 2025년 업무계획을 발표했다. ‘모두를 위한 문화, 세계를 잇는 문화강국’이라는 비전 아래, ‘민생경제 지원’ ‘지역균형발전’ ‘콘텐츠·관광·스포츠산업 육성’ ‘미래를 만들어가는 문화’ ‘K아트 글로벌 문화교류 확대’ 등 5대 핵심 과제를 발표했다. 그리고 며칠 전 업무보고 내용을 보면 K컬처와 예술인 복지에 대한 언급이 대부분이었다. 단연 목소리를 높이는 대목이 K컬처다. 대중문화는 민간의 성장 영역인데 정부 기관이 산업화 계획으로 목표치를 정한다. 대한민국의 브랜드 확장에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국가의 역할은 상위 몇 퍼센트보다는 문화예술 생태계에 주목해야 한다. 그 일을 도맡아서 해야 할 문체부는 예술가들의 성역 없는 활동 터전 마련을 우선시해야 한다.
문체부는 ‘K컬처 300조 원 시대’를 선포하며 2026년도 예산을 7조 8555억 원으로 최종 확정했다. 올해 본예산 대비 7883억 원(11.2%)이 증가한 규모다. 국민 향유·관광 확대가 핵심이다. 예술 관람을 통한 향유 확대는 소비의 시선이다. 물론 문화산업의 발전을 위해 공연, 영화, 대중음악 등을 통해 문화복지를 증대하는 지점이 중요하다. 안타깝게도 정부 기관의 정책 방향에는 동시대 실험 예술, 비주류 예술, 융복합 등 기초예술 지원에 관한 정책과 실천이 해가 갈수록 보이지 않는다. 지원 주체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광역 및 기초지자체, 문화재단 등으로 급격히 늘어났다. 지원의 다변화가 시대의 유행처럼 행사성 사업이 많아지고 있다. 그런데 왜 우리 예술(인)은 가난할까?
시장이 외면하는 영역, 당장의 성과가 나지 않는 창작, 실패할 권리를 허락해 주는 예술은 여전히 국가의 보호가 필요하다. 모두가 1등이 될 수는 없다. 1등도 탄탄한 생태계 내에서 나온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수상과 차트 성과를 전면에 내세우는 것은 지역 간 문화 격차를 가중시킨다. 비수익 문화 영역, 창작 노동의 지속 가능성과 같은 문화정책의 핵심 과제를 처음부터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는 것이다. 이로 인해 문화정책의 성과 기준은 제도 개선, 권리 보장, 접근성 확대와 같은 정책 본연의 목표가 아니라, 글로벌 수상 여부와 흥행 지표로 그 온도는 지역문화재단까지 스며든다. 그렇게 공공재의 투여가 성공이라는 신화를 쫓아가는 동안 예술가들은 도구로 활용되고 다시 그들은 창작 앞에서는 제자리걸음만 반복하게 하는 것이다.
결과적 수치가 보이지 않지만 문화강국의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창작활동에 전업으로 살아가는 예술가들의 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 안정적이지는 않더라도 최소한의 장치를!
최근 아일랜드 정부는 예술가 기본소득 프로그램을 영구 제도로 전환했다고 한다. 앞으로 예술가 2000명에게 조건 없이 매주 325유로(약 47만 원)를 지급하게 된다. 시범 사업으로 2022년부터 2025년까지 시행했었다. 기본소득을 받은 예술가들의 작품 생산량이 증가했고, 예술가들의 주당 창작 시간이 4시간 더 늘어났다. 여기에, 시범 사업을 영구적으로 정착시킬 경우 작품 생산량이 22% 증가한다는 연구 보고가 발표됐다. 부러울 따름이다.
바야흐로 2026년도 문예진흥기금 신청과 금년도 사업들을 정산하는 기간이다. 연말은 예술가들에게 무수한 서류 작업과 각종 영수증을 챙겨 증빙자료를 만드는 시간이다. 세모의 끝을 즐기거나 할 여유 따위는 없다. 해가 갈수록 지원사업 서류는 촘촘해지고 절차는 복잡해져 간다. 그래도 매번 반복되는 일들을 해야만 내년도 창작 여건을 기대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최근 부산문화재단은 3번에 걸쳐 권역별로 차기 연도 지원 사업에 대한 안내와 공개 토론회를 가지며 예술가들에게 가까이 다가간다. 어느 현장의 중장년층의 목소리가 기억을 떠나지 않는다.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작업을 해 왔는데 지원을 안 해 주는지 모르겠다”라고 원로에 대한 예의가 없다는 성토를 하기도 한다. 간극은 현장에서도 멀게 느껴진다.
예술가란, 예술이란, 무엇이길래 이토록 쓰린 겨울을 마주해야 하는가. 예술의 힘은 그렇게 안 배웠고 세상을 바꾼다고 했는데 작금의 현실은 혹독하기만 하다. 시쳇말로 예술의 3대 요소가 지원, 교부 그리고 결산이란 말인가!
2025-12-25 [17: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