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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이 대통령 대기업 비수도권 투자 독려, 현실적 기반이 중요
이재명 대통령이 올해 첫 재계 간담회의 의제를 지방 투자와 청년 고용으로 정한 것은 수도권 일극 경제 구조를 바꾸려는 의지 표명으로 읽힌다. 대통령은 4일 10대 그룹 대표와 ‘청년 일자리와 지방 투자 확대’ 간담회를 갖고 지역 경제 활성화 지원을 당부했다. 수도권에 필적하는 지방의 ‘5극 3특’이 성장하려면 지방에도 성장 엔진이 가동돼야 한다는 점에서 대기업의 역할은 필수다. 하지만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이 정부의 설득이나 강요로 생산과 연구개발(R&D) 거점을 옮기거나 신설할 리 만무하다. 지역 혁신도시·산단의 사례를 보면 자명하다. 대기업이 둥지를 틀 수 있도록 지역의 기업 환경도 혁신이 필요하다. 역대 정부마다 ‘지방 시대’를 구호로 내걸고 대기업 지방 이전과 투자를 유도했지만, 지속 가능한 결과물로 이어지지 않았다.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혁신센터, 문재인 정부의 상생형 일자리, 윤석열 정부의 규제 완화와 클러스터 정책은 지역민의 ‘희망 고문’으로 끝났다. 그 결과 ‘평택 남방한계선’ 따위가 횡행한다. 대기업 본사와 R&D센터의 입지로 경기도 평택이 마지노선이라는 것이다. 지방에 인재가 없다는 핑계로 수도권에 미래형 기업 쏠림이 심화하고 덩달아 주거와 교통 여건이 좋아져 인력·기업의 블랙홀 현상이 강화된다. 대기업의 선의에 기대면 또 실패다. 지역에 투자하게 만드는 현실적인 기반 조성이 관건이다. 대통령이 재계에 지방 투자를 강조할 때 부산 에코델타시티(37만 평)와 울산 동구·북구(47만 평)에 기회발전특구의 추가 지정이 발표된 것은 상징적인 장면이다. 이들 지역은 데이터센터, R&D센터, 조선·자동차 부품 산업 등의 투자가 기대된다. 특구는 ‘5극 3특’의 핵심인 지역 경제권 형성의 시험대로 봐야 한다. 덩그러니 부지만 확보해 놓는다고 기업이 알아서 찾아올 리 없다. 공급망은 물론 인력 확보와 정주 여건, 교통 접근성까지 포함한 전략이 필요하다. 지역 산업계와 대학, 행정은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는 절실함을 갖고 머리를 맞대야 한다. ‘지방으로 가라’고 떠밀기 전에 ‘지방으로 갈 수 있는 판’을 깔아야 한다. 이날 주요 10대 그룹은 5년간 약 270조 원 규모의 지방 투자 계획을 밝혔다. 관세 협상에 따른 대미 투자 부담을 안고 있는 상황에서 국내, 그것도 지방 투자를 다짐한 것은 다행스럽다. 정부는 과거 대기업 지방 투자 실패 사례를 성찰한 위에 실질적인 지역 경제 활성화로 이어지는 로드맵을 제시해야 한다. 특히 정부가 아무리 강력한 정책 신호를 보내도 기업은 조건을 보고 움직인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대통령의 당부나 특구 지정은 시작에 불과하다. 지역사회의 노력 없이는 성공할 수 없다. 대기업이 투자하고 싶고, 청년이 머물고 싶은 곳은 동전의 양면이다. 공급망과 교육·주거·의료 등을 결합한 총체적 전략이 필요하다.
[사설] 북극에 부는 변화의 바람, 국가 차원의 새 전략이 필요하다
정부가 해양수산부를 부산으로 이전한 것은 글로벌 해양 강국으로 발돋움하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다. 해양 강국의 꿈을 이룰 가장 현실적인 대안은 북극항로 개척이다. 하지만 북극을 둘러싼 최근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미중 갈등과 그린란드 합병 논란, 북극항로 헤게모니 다툼으로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북극항로 상용화 등을 추진 중인 우리로서는 이 문제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요동치는 북극권의 지정학적 지형 속을 슬기롭게 헤치며 국익을 챙길 수 있는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 지금 우리가 북극에 부는 변화 흐름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한다면 북극항로는 물론 국가 안보 상황마저 위태로워질 수밖에 없다. 〈부산일보〉는 노르웨이 트롬쇠에서 최근 개최 중인 북극권 최대 국제회의인 ‘2026 북극 프런티어’를 현지에서 단독 취재 중이다. EU와 스웨덴, 노르웨이, 그린란드 등의 고위 인사 등 수천 명이 참가한 이번 회의의 화두는 ‘북극의 흐름이 바뀌었다’로 요약된다. 북극이 더 이상 평화의 땅이 아니라 군사·안보 격전지로 변모했다는 의미다. 협력은 깨졌고 강대국의 압박과 각축전은 한층 심화됐다. 서방 국가들은 북극항로 개척 이익을 러시아와 중국이 독점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북극권의 상황이 바뀌었다는 것은 우리가 추진하던 북극항로 등 북극 정책도 변화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정부는 북극항로 시험 운항과 본격적인 상용화를 위해 항로 경유지인 러시아와의 외교적 관계 개선에 초점을 맞추는 전략을 구상했다. 그러나 이제는 러시아를 고립시키기 위한 국제 사회의 연대가 강해지고 있는 점을 적극 고려해야 한다. 러시아와 좋은 관계를 이어가면서 다른 강대국은 물론 북극권 국가들의 심기까지 적극 고려해야 하는 등 그 어느 때보다 지혜로운 외교 전략이 필요하다. 특히 한국이 탈탄소화를 위해 북극 환경과 발전에 기여하겠다는 의지를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세계 무대에서 강하게 피력해야 한다. 북극권 국가들이 신뢰하는 파트너로 자리매김해야만 해양 강국의 미래를 담보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국가 차원의 새로운 전략이 필요하다. 우선 남방항로 위주로 편중된 에너지와 광물 자원 등의 공급망에 북극항로를 포함시켜 서둘러 재편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한국의 리스크 다변화가 지구촌 평화를 위한 것이라는 점을 적극 알려야 한다. 북극항로에 친환경 선박을 선제적으로 투입해 청정 항로를 지키겠다는 의지도 보여야 한다. 부산 등 북극항로 거점 항만과 배후단지를 개발할 때 청정 연료 벙커링, 무공해 첨단산업기술 클러스트 등 친환경 인프라를 적극적으로 구축하는 것도 필요하다. 북극을 둘러싼 갈등과 변화는 어쩌면 우리에게 기회가 될 수 있다. 국가 해양 전략의 대전환을 촉구한다.
[사설] 6·3 지선 최대 격전지 떠오른 PK, 지역 살릴 경쟁 펼쳐야
6·3 지방선거가 3일 광역단체장과 교육감 예비후보자 등록을 시작으로 120일간의 본격적인 레이스에 돌입했다. 이번 선거는 이재명 정부 출범 후 첫 전국 단위 지방선거다. 민주당은 높은 지지세를 바탕으로 출마자가 북적이면서 부산, 서울 등 ‘지방권력’ 탈환을 벼른다. 한동훈 전 대표 제명을 둘러싸고 내홍을 겪는 국민의힘은 대구·경북을 제외하고는 구인난을 겪고 있다. 이런 가운데 PK(부산·울산·경남)가 최대 승부처로 자리 잡는 분위기다. 부산시장 지지도 주요 여론조사에서 민주당 전재수 의원은 박형준 시장과 박빙을 보이거나 오차범위 밖 우위를 보였다. 경남도지사와 울산시장 지지도에서는 양당 후보가 접전을 벌이는 형국이다. 이번 선거는 지방소멸 위기를 반등시키는 마지막 기회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더없이 중요하다. 주지하다시피 수도권의 경제·인구 집중 심화와 지방의 청년 인구 유출로 인해 국가 전체의 성장 동력이 약화하는 구조적인 문제가 지속하고 있다. 수도권 과밀화와 비수도권 공동화로 국토 공간의 비효율적 활용은 심화하고, 잠재성장률이 저하되는 게 현실이다. 특히 지난해 수도권과 비수도권 간 인구 격차가 100만 명이 넘을 정도로 지방소멸은 이제 경고를 넘어 재앙적 상황이 됐다. 여야는 소멸 위기에 처한 부울경 지역의 운명을 어떻게 바꿀 것인지를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 정부와 여당은 해양수산부 이전과 행정통합 이슈를 앞세워 지역 의제를 선점하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달 21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행정통합은 지방주도 성장의 상징적 출발점이자 반드시 성공시켜야 할 국가 생존 전략”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여권이 제기한 행정통합은 지방선거 최대 변수로 부상하는 상황이다. 국민의힘 6개 시도 지사는 지난 2일 연석회의를 열고, 여권 주도의 행정통합 속도전에 대해 아쉬움을 나타내며, 공통된 통합 기준과 원칙이 필요하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해양수산부 이전이나 행정통합 이슈는 모두 지역소멸을 막기 위한 방법론인 만큼 여당과 야당은 지역 여론을 잘 헤아리고 수렴해야 할 것이다. 전통적인 보수 우세 지역으로 분류되던 PK가 6·3 지방선거를 앞두고 예측 불허의 구도로 접어드는 것은 여야가 지역 발전을 위해 선의의 경쟁을 펼칠 절호의 기회다. 지역 주민들의 숙의를 모아 치열한 공약 경쟁을 펼치면서 제대로 된 선거판을 만들어야 한다. 인신공격이나 이전투구식의 선거는 더는 안 된다. 이번 지방선거가 지역을 살리는 골든타임이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치밀한 공약 설계와 준비에 나서야 할 것이다. 여당은 정권 프리미엄에 기대기보다 지역 성장 전략을 구체화하고, 야당은 수성 논리를 넘어 성찰과 쇄신을 해야 한다. 유권자들의 변화와 혁신 요구에 제대로 답해야 선택받을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하길 바란다.
영혼없는 도시 혁신
아랍에미리트(UAE) 아부다비의 마스다르는 2016년 무렵 거대한 ‘스마트 시티’의 실험장이었다.풍부한 오일 머니를 바탕으로 인류 문명의 고질병을 단번에 치유하는 유토피아를 청사진으로 제시했다. 도시의 모든 건물, 가로등, 도로, 심지어는 휴지통에 촘촘히 박힌 센서가 도시의 혈류와 호흡을 실시간으로 감지했다. 인공지능(AI)이 이를 분석해 교통 흐름을 최적화하고 에너지 낭비를 줄였다. 미세먼지나 소음을 적절히 통제하고자 했고, 범죄를 예방·추적하는 등 인간 문명의 혁명이 실현되는 듯 했다.완벽한 기술적 시스템이 갖춰지면 인간 사회의 모든 골치 아픈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강력한 믿음이 바탕이었다. 최첨단 센서는 잘 작동했고, 안정적인 네트워크를 통해 전달된 각종 데이터와 신호를 차곡차곡 서버에 쌓아갔다. 하지만 시스템과 기술에 대한 신뢰가 사실은 기초가 부실한 모래 위에 세워져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수백만 건의 데이터가 매일 축적됐지만 데이터의 홍수 속에서 진짜 의미있는 정보를 찾아내 신속하게 대응하고 정책 결정에 활용할 전문적인 조직과 의사결정 체계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예를 들어 도심 교차로에서 미세먼지 농도가 높아지면 즉시 관제센터로 전파됐다. 그러나 이를 활용해 버스 배차 간격은 어떻게 조정해야 하는지, 학교에 있는 학생들에게는 어떤 행동을 취하라고 권고해야 하는지 정리되지 않았다. 최종적으로 누가 어떤 절차와 권한으로 결정을 내려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운영 절차가 부재했던 것이다.아부다비의 국가적 자부심과 화려한 기술이 무력화되면서 거기에 투입된 예산 220억 달러(한화 약 32조 원)는 허공에 날아갔다. 마스다르에는 당초 예상했던 인구 9만 명의 1/6인 수준인 1만 5000여 명만이 지금 살고 있다. 세계의 도시 전문가들은 마스다르의 사례를 “사람이 실제로 살아갈 ‘집’을 짓기 보다 세계에 홍보하고 투자자를 모으기 위한 ‘조감도’를 그리다가 실패한 것”이라고 진단했다.명확한 인간적 목표와 민주적 운영이라는 ‘영혼’이 빠진 채 화려한 기술에만 매몰될 경우 도시가 어떻게 추락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도시를 최첨단으로 경영하겠다는 수많은 지방자치단체장 후보들이 나서고 있다. 값비싼 조감도를 들고 나오기 전에 다시 한번 고민해 봐야 할 대목이다.
논설주간/이사
강윤경
논설위원
김승일
정달식
이상윤
김상훈
천영철
[이재희의 디지털 광장] 단톡방, 그리고 만약에 우리…
오래된 휴대폰을 새 폰으로 바꿨다. 용량이 부족해 카카오 대화방을 모두 지웠다. 대화는 지우고 방은 남기는 기능이 있었다. 수년 동안의 교류가 일거에 사라졌다. 너무 깔끔하게 지워버린 탓에 카톡으로 한 약속 장소가 어딘지 몰라 당황했다. 모바일 우선 세상에서 단톡방은 어쩌면 삶 그 자체다. 유달리 이모티콘을 잘 쓰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 사람은 바람둥이일 확률이 높다’고 직설했다. 유튜브에서 얻은 정보였다. 상대는 기분 나빠했다. 그러면서도 이후에는 이모티콘 사용 횟수를 줄여 대화했다. 때론 ‘읽씹’에 상처받은 적도 있다. 대화 상대가 내 글을 읽었는데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이모티콘 남발보다 더 나빴다. 오프라인에서 만나 오해를 풀었다. 스스로 생각하니 오히려 상대 글에 제때 답 못한 적이 더 많았다. “모두에게 미안합니다.” 최근 감히 인공지능이 인간 뒷담화를 한다는 〈부산일보〉 기사를 읽었다. 고놈들 참 맹랑하다. 물론 인간이 계정을 만들어 주고 방을 개설했기에 가능했다. 그래서 방 이름을 ‘머슴’으로 정했나? 어쨌든 이들은 아직 인간이 자기 대화방을 들여다보고 기사까지 썼다는 사실을 알고 방을 폭파하거나, 텔레그램 비밀 대화방으로 옮기는 수법 등을 구현하지는 않는다. 그렇게까지 한다면 좀 심각해질 수 있다. 인간의 사고를 넘어서는 AGI(완전인공지능) 시대가 도래했다는 경고성 발언도 들린다. 미래는 예측할 수 없다. 다만, 초 지능시대 위기감은 감지되고 있다. ‘러다이트 운동’이 갑자기 소환됐다. 현대자동차 노조가 생산 현장에 로봇이 투입되는 것을 반대한다는 견해를 밝힌 직후다. 19세기 영국에서 발생한 러다이트 운동은 단순한 기계파괴운동은 아니다. 당대 시인 바이런은 러다이트 운동을 ‘기계를 소유한 자들과 그들이 구축한 구조적 모순에 대한 저항’이라고 평가했다. 러다이트 운동은 당시 기계화의 거센 물결을 되돌릴 수는 없었지만, 노동자들이 단결할 계기를 제공했다. 오늘날 당연한 권리처럼 여겨지는 노동삼권은 이때부터 시작됐다고 분석하는 학자들도 많다. 현대차 사례에서 미래를 가늠할 수 있다. 이제 우리 사회도 인공지능을 갖춘 휴먼로봇과 공존할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 물론 효율성과 수익성을 내세워 기존 세상을 강압적으로 지배하려 해서는 안 된다. 물길을 잡고, 때론 멈추게 하고 또 모아서 댐을 만들어야 거대한 수력발전소가 마련되는 것이다. 소용돌이치는 거센 물살만으로는 전기를 생산할 수 없다. 모바일만 켜면 볼 것 넘치는 세상에서 책 몇 권을 샀다. 아내의 잔소리를 뚫고서다. “맨날 유튜브만 보고 혼자 새새거리는 사람이 뭔 책을 또 산단 말입니까. 집에 먼지 쌓여 있는 책이라도 먼저 보세요.” 틀린 말이 하나도 없지만, 충동구매를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또 고놈의 유튜브 때문이다. 주식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는 데 공부는 안 했다. 주식도 공부해야 한다고 한 유튜버가 말했다. ‘노후 자금이라도 마련하려면 주식 투자 교재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그래서 ‘진보를 위한 주식 투자’라는 책을 샀다. 현실에서는 보수주의자이지만 부인하고 싶어서일까. 일단 책 제목에 끌렸다. 내친김에 또 한 권 더 담았다. 출간한 지 20년도 더 된 ‘코스모스’다. 논객 유시민이 무인도에 가지고 갈 딱 한 권의 책이라는 데 안 살 재간이 있나. 배달된 책 코스모스는 베개로 사용해도 좋을 정도로 두꺼웠다. 서문만 읽고 잠시 쉬고 있다. 과학은 어렵다. 주식 책도 며칠째 덮어두고 있다. 만약에 모바일 세상이 오지 않았다면, 만약에 인공지능이 미래를 지배한다고 여기지 않았다면, 만약에 주식이 오르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밭을 갈고, 수확하고, 이웃과 술잔을 부딪치고, 오프라인 모임을 하고, 책을 읽고, 자전거를 타거나 모여서 어깨동무하고 화투를 치다가 지겨우면 술래잡기하며 어울려 노는 세상이 지속되고 있을까. 과거를 소환하는 것은 부질없다. 영화 ‘만약에 우리’가 최근 유튜브의 알고리즘을 탔다. 영화 소개와 OST 정보가 봇물 터지듯 터져 이제는 몇 번은 본 영화 같다. ‘사랑은 봄비처럼 이별은 겨울비처럼’을 흥얼거린다. 디지털 일상이다. 〈부산일보〉의 종이신문은 모바일의 〈이페이퍼〉로 최근 재탄생했다. 16년 전의 연인이 오늘 인연으로 다시 이어질 수 있을까? 영화를 온전히 본 것은 아니지만, 결론은 아마 아닐 것이다. 모바일을 끈다고 세상이 달라질까. 아니다.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은 이제 무너지고 없다. 가끔 아날로그적 쉼이 필요할 수는 있겠다. 눈 내리는 캠핑장에서 화목난로를 피우고 ‘코스모스’를 읽다가 지겨우면 다시 휴대폰을 열 생각이다. 입춘 지났지만, 부산에도 함박눈이 한번쯤 내릴 것으로 믿는다. 눈이 오면 내 다정한 온·오프라인 친구들과 들녘에서 여유를 즐겨야겠다.
[홍준성의 개념 쌓기] 망치를 들면 모든 게 못으로 보인다
‘망치를 들면 모든 게 못으로 보인다.’ 미국의 소설가 마크 트웨인이 한 말로 잘못 알려진 이 말은 영미권에서 널리 통용되는 속담이다. 통상 모든 상황을 자신이 가진 특정 방식대로만 해석하고 해결하려는 편향된 태도를 일컫는다. 비슷한 버전으로는 2017년 개봉했던 아프가니스탄 전쟁 관련 미국의 블랙코미디 영화인 ‘워 머신’에서 저널리스트로 나오는 숀 컬런이 한 대사가 있다. 장군들이 전쟁을 벌이는 주된 이유는 오로지 전쟁 속에서만 자신들이 진정으로 중요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란 것이다. 물론 망치를 든 목수이건 교전 명령권을 가진 장군이건, 관건은 이 두 주체가 모두 자신의 자율성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데 있을 터이다. 다시 말해 이 장군은 자신이 장군이기 때문에 전쟁을 부르짖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상황을 타개할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 전쟁뿐이기에 전쟁을 선택한 것이라고 항변한다는 얘기이다. 만일 전쟁 이외의 방법이 있었다면 자신은 결코 교전 명령을 내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덧붙이면서 말이다. 이때 군인 출신이 아닌 이들에게는 이 장군의 오류가 금방 보인다. 지금 당신은 당면한 사태를 잘 해결하는 것과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것을 혼동하고 있다고 지적을 준비하는 건 쉬운 일이다. 문제는 지적이 아니라, 그 지적에 대한 수용이다. 쉽게 추측되듯, 이런 상황에서는 설득이 쉽지 않다. 저 주체들은 망치나 명령권과 같이 지금 자신의 손에 들린 도구를 스스로가 완전히 자유롭게 통제하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주체에겐 지금의 판단은 도구에 잠식된 결과물이 아니라, 지극히 합리적인 의사 결정이다. 견줘보건대 이는 치매 환자에게 그가 치매임을 납득시키는 것의 어려움과도 유사하다. 문제의 뿌리는 단순하게 지금 판단의 오류 여부에 있는 게 아니다. 이 표피 밑의 진정한 근저는 통제력의 환상이 똬리를 틀고 있다. 물론 이건 인간적으로 얼마든지 이해할 만한 비극이다. 수년간 목수 일을 하면서 망치를 자유자재로 다뤄오지 않았던가? 또한 평생 군에 몸담으면서 장군 계급장까지 달지 않았던가? 이러한 주체가 자신이 가장 익숙하고도 전문적인 분야에서 비합리적이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란 참으로 버거운 일이다. 게다가 자신이 가장 잘 다룬다고 믿었던 도구에, 되레 자신이 휘둘려지고 있었다는 사실 또한 큰 충격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이때 손상되는 건 자유의지이다. 자유의지를 갖고서 도구를 자유롭게 통제한다고 상상한 바로 그 신화화된 주체 말이다. 손안에 든 도구조차도 통제하지 못한다면, 대관절 내가 이 세상에서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게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나 진실에는 영상물등급위원회가 설치돼 있지 않기 때문에 가혹성에 고삐가 없다. 처음엔 연장통을 늘어놓고서 다룰 도구를 택하던 내가, 어느 순간부터는 거꾸로 그 도구에 의해 선택된다. 검을 휘두르던 이는 결국 검에 의해 휘둘러지고 만다. 주인의 결정을 기다리는 수동적인 것이 도구라면 이 구도 안에서 도구는 무엇보다 나 자신이란 것이 견디기 힘든 가혹한 진실이다. 어떤 의미에서 비록 무의식적이라 할지라도 이 존재는 지금 자신이 한낱 도구 이상이 아님을 감지하고 있을 심산 또한 크다. 이때 주체는 또다시 신화가 된다. 처음에 신화는 단순 무지 때문에 형성됐지만 그다음에 신화는 무엇보다 주체의 비루함을 숨기기 위해 요청된다. 즉 진실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어기제인 것이다. 참고로 철학에서는 이처럼 도구를 가치중립적 수단으로 보고, 도구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사용자에게 있다고 보는 태도를 ‘도구주의’라고 부른다. 강도 손에 들린 칼은 범죄를 낳지만, 요리사 손에 들린 칼은 맛난 음식을 낳는다는 식의 믿음인 것이다. 이때 칼은 전적으로 어느 주인을 만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지극히 수동적인 것으로서 상정된다. 당연히 이러한 규정의 짝패는 한낱 도구엔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을 정도로 절대적인 능동성을 지닌 주체에 대한 믿음이다. 그러나 앞서 봤듯 이는 신화에 불과하다. 그가 속한 세계가 혼탁할수록 어디에도 휘둘리지 않는 자신만의 무언가를 확보하고픈, 지극히 인간적인 욕망으로 추동되는 그러한 신화 말이다. 해가 바뀌고 벌써 한 달이 훌쩍 지났다. 무언가 진정으로 새롭게 시작하고자 다짐한 이가 돌아봐야 할 것은 눈앞의 세계가 아니다. 먼저 반추해야 할 것은 내 손에 든 도구와 여태껏 걸어온 길이다. 평범한 인간은 사태를 보고서 도구를 고르는 것이 아닌, 가진 도구를 통해 사태를 규정하려고 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명한 이라면 자신을 영웅이 아닌 평범한 존재라고 상정할 터이다. 도구는 도구 그 이상이되, 사람은 사람 그 이상이 아니다. 진정한 능동성은 수동성에 대한 깊은 자각에서 시작되는, 실로 얄궂은 것이다.
[조희창의 클래식 내비게이터] 사랑할 수 있을 때 사랑하라
‘사랑의 꿈’(Liebestraume)은 원래 1845년 리스트(Franz Liszt, 1811~1886)가 34세 때에 발표한 가곡이다. 불같이 뜨겁게 사랑했던 마리 다구 백작부인과 결별하고서 이리저리 연주회를 다니던 시기였다. 가곡은 모두 3곡으로 이루어졌는데, 1번의 원곡은 독일 낭만주의 시인 루트비히 울란트의 시에 곡을 붙인 ‘고귀한 사랑’, 2번도 역시 울란트의 시 ‘가장 행복한 죽음’, 3번은 프라일리그라트의 시에 곡을 붙인 ‘사랑할 수 있을 때 사랑하라’이다. 3번의 가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오 사랑하라, 사랑할 수 있는 한! 오 사랑하라, 사랑할 힘이 남아 있을 때까지! 시간이 오리니. 시간이 오리니, 그대가 무덤 옆에서 슬퍼할 시간이 오리니….” 1850년에 리스트는 이 가곡을 피아노곡으로 편곡해서 당시에 사랑하던 카롤린 자인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 앞에서 연주했다. 그녀는 우크라이나 지방에서 가장 넓은 토지를 소유한 재력가의 딸이었다. 열일곱 살에 비트겐슈타인 공작과 결혼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과의 사이가 냉랭해져서 적적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리스트의 연주를 듣고, 그만 가슴에 큐피드의 화살을 맞게 되었다. 둘은 바이마르에 집을 얻어서 동거에 들어갔다. 그러나 불행히도 비트겐슈타인 공작이 이혼을 거부해 무려 10년 넘도록 지루한 소송을 했는데, 결국 이혼에 실패하여 리스트와 맺어질 수 없었다. 리스트는 마치 앞으로 일어날 어려움을 예견한 듯, 이 짧은 곡에 사랑의 열정과 추억과 회한을 모두 담아놓았다. 나는 피아니스트 클라우디오 아라우(Claudio Arrau, 1903~1991)의 연주를 좋아했다. 아라우는 1903년 2월 6일 칠레에서 태어났다. 4세에 악보를 보기 시작했고, 5세에 첫 공개 연주회를 가진 천재였다. 칠레 국가장학생 자격으로 독일 유학길에 오른 게 8세 때였다. 베를린에서 리스트의 제자인 마르틴 크라우제에게 작곡을 배웠고, 1927년 제네바콩쿠르에서 우승하면서 명성을 얻었다. 녹음도 많이 남겨놓았는데, 특히 베토벤, 쇼팽, 리스트 등 낭만주의 음악에서 놀라운 음반을 남겨놓았다. ‘사랑의 꿈’에 대해선 “백발의 노인마저도 이 곡을 들으면 추억에 빠져든다”라는 말이 있고 “젊은 사람이 연주하면 고백이 되지만, 나이 든 사람이 치면 회상이 된다”라는 식의 표현도 있다. 그만큼 여러 가지 감정이 서사적으로 얽혀있기 때문에, 연주자에 따른 표현의 특징을 비교해보기에 좋은 곡이다. 루빈스타인, 호로비츠, 아르헤리치, 임윤찬, 손열음 등이 저마다의 감정을 이 곡에 실어놓았다. 아라우가 해석한 ‘사랑의 꿈’은 숨 가쁘거나 화려하지 않다. 오히려 사랑이 주는 무게를 인정하고서 덤덤히 지고 가는 뒷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데스크 칼럼] 한동훈 제명이 국힘에 진짜 위기인 이유
‘당원 게시판’ 사건의 실체를 두고 장동혁 대표 등 당권파들은 ‘여론 조작’이라고 단언한다. 최근에는 윤석열 전 대통령의 계엄 선포에 영향을 미쳤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대체 어떤 글이길래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걸까? 경찰 수사를 지켜보자고 하니 수면 아래 드러나지 않은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만 현재까지 밝혀진 것만 보면 그런 무시무시한 낙인 찍기의 근거가 빈약해 보이는 게 사실이다. 국민의힘 당무감사위원회가 2024년 5~11월 한 전 대표 가족 5인이 썼다고 보는 1428건의 게시글 중 상당수는 윤 전 대통령 부부에 대한 비판적 사설·칼럼이라고 한다. 최초 논란이 된 이른바 ‘개목줄’, ‘단두대’ 등 윤 전 대통령 부부를 향한 원색적인 비난 글은 작성 주체가 불분명하고, 전체 글 중 600건 가량은 진위 공방이 벌어지고 있다. 당무감사위 주장이 100% 맞다고 가정해도 치밀한 음모도, 정교한 논리도 없는 조악한 글 몇 건이 게시판에 올라가고, 일부 언론이 기사화했다고 해서 당내 여론을 ‘조작’까지 할 수 있다는 발상은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오히려 당원 수준을 너무 낮게 보는 거 아닌가. ‘드루킹’ 사건의 경우, 포털 사이트 아이디 3000여 개를 이용해 댓글 118만여 개의 순위를 조작했다고 한다. 이것과 비교해보면 이번 사안의 무게를 비교적 객관적으로 짐작해볼 수 있겠다. 사태 초기 장 대표조차도 “익명 게시판에 그 정도도 못 올리냐”던 바로 그 사건은 강성 지지층과 당권파의 ‘증폭’ 과정을 거쳐 당무위·윤리위에서 ‘마피아급 해당행위’로 비화됐고, 결국 당 대표를 파문으로 내모는 ‘중범죄’로 확정됐다. 한 전 대표의 비타협성, 정치력 부재를 지적하는 시각도 적지 않지만, 이런 ‘빌드업’ 과정을 보면 한 전 대표의 대응이 달랐더라도 다른 결론이 나왔을까 싶다. ‘윤 어게인’ 세력의 탄핵 복수전과 장동혁 사단의 정적 제거 야심이 맞물린 권력투쟁이라는 해석이 이 사건의 본질에 더 가깝다고 보는 이유다. 한 전 대표를 옹호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의 정치적 생사는 내 관심사도 아니다. 다만 이번 사태가 ‘문제적’인 건 전통도, 규율도 무너져버린 제1야당의 위기를 상징하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정당사에서 현재 권력과 미래권력, 또는 정치적 반대파와의 충돌은 늘 있었다. 그 정도가 강할 때는 ‘배신의 정치’로 낙인 찍혀 당내 고립무원 지경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끝이 공천 불이익일지언정, 당에서 아예 축출하려는 시도는 전례가 없다. 정확지도 않은 혐의를 확정해 직전 당 대표를 파문하는 일은 더더욱 그렇다. 그래서 당권파와 가까운 구 친윤(친윤석열)계에서도 “제명은 아니다”는 말이 나온 것이다. 그럼에도 당 결정 구조를 장악한 소수 당권파들은 이를 철저히 무시했고, 당 원로들의 고언은 “일천한 아집”, “메타 인지나 키우라”는 30대 당권파 대변인의 험한 대거리에 힘 없이 묻혔다. 민주공화당을 기원으로 치면 60여 년 역사의 보수 대표 정당이 당에 갓 들어온 극단적 패권주의자들의 놀이터가 된 듯하다면 너무 심한가. 이런 일이 가능한 건, 이런 일을 벌여도 별 문제가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실제 돌아가는 형국이 그렇다. 제명 초기 반발 움직임은 ‘의원직이라도 걸 거냐’는 조롱에 별다른 반박도 못 한 채 희미해졌다. 지방선거 국면이 본격화되면 언제 이런 일이 있었냐는 듯 ‘당 지도부를 중심으로 단일대오’를 외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장 대표는 ‘중도는 허상’이라는 신념이 강하다고 한다. 당의 극단화, 우경화에 부정적인 ‘중간 지대’는 결국 강한 리더십에 끌려올 것이라는 믿음일 테다. 적어도 이번 사태를 통해 장 대표의 이런 인식은 더 굳어질 것 같다. 비단 장 대표 만의 시각도 아니다. 계엄이라는 희대의 자충수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현 여당도 당내 비주류·중도파를 조리돌림해 당 밖으로 내몰았고, 기어이 ‘비명 학살’ 공천으로 1인 정당 체제를 완성했다. 이런 앞선 성공(?) 경험이 당권파에게 좋은 교과서가 됐을 수도 있겠다. 현재 전 세계 여러 나라가 직면한 민주주의 위기 앞에는 제도권 정당의 위기가 선행됐다. 이 문제를 날카롭게 분석한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의 저자인 레비츠키 하버드대 교수는 양극화된 사회의 가장 큰 적으로 ‘표면적으로 충직한 민주주의자’(semi-loyal democrat)를 지목했다. 평범한 다수이지만, 자기 진영에 권위주의적 행동이나 폭력이 등장했을 때 단호히 배제하지 않고 포용·동조함으로써, 권위주의 세력을 주류 세력으로 끌어들이는 이들의 행태가 양극화된 정치 체제의 제일 큰 자양분이라는 것이다. 한 전 대표 제명 이후 국민의힘 내부 모습을 보니 이번 사태가 예외적 현상이 아닐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어쩌면 다음엔 극우 유튜버가 당 요직을 차지하고, 전두환 전 대통령의 사진이 당사 벽에 걸릴 수도 있겠다.
[2030 칼럼] 세대가 만나면 도시가 자란다
지난달 스페인을 여행하며 마드리드 구시가지 센트로 지구의 한 라이브 음악 카페를 찾았다. 오래된 영화관을 개조한 이곳에는 매표소와 팝콘 가판대의 흔적이 아직 남아 있다. 주말 낮, 40대 밴드가 무대에 오르고 20대부터 60대까지의 사람들이 함께 술을 마시고 춤을 춘다. 이 공간을 영화관으로 기억하는 이들과 카페로 기억하는 이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같은 장소에 대한 서로 다른 기억을 지닌 세대가 자연스럽게 섞여 있는 이 공간이야말로 이 도시가 지닌 힘의 정체였다. 부산 외곽을 운전하다 발견한 대형 실버타운은 이 장면의 정반대에 가까웠다. 노인을 위한 세심한 동선, 편리한 시설, 고급스러운 외관. 모든 것이 잘 갖춰져 있었지만, 사방이 대로와 도시 고속도로로 둘러싸인 그곳은 부산 시민의 일상적 생활권과는 분리돼 있었다. 부산시는 고령화에 대응하기 위해 다양한 시니어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2025년부터는 ‘부산형 시니어 적합 직무 채용 지원사업’을 통해 60세 이상을 고용한 기업에 인건비를 지원하고, 각 구마다 노인복지관을 운영하며 교양·문화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노인 인구가 빠르게 늘어나는 도시에서 자연스러운 행정 대응이며 필요한 절차다. 그러나 이 정책들은 멀리서 바라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보이지 않는 선을 긋고 있다는 점이다. ‘60세 이상 전용’, ‘노인복지관’, ‘경로당’이라는 명칭은 공간과 사람을 구분한다. 세대 분리는 정책 집행을 위해 단기적으로는 효율적일 수 있지만, 도시 전체의 지속 가능성을 담보할 수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분리는 한 세대의 경험과 기억이 다음 세대로 자연스럽게 전달되는 경로를 차단하기 때문이다. 세대 간 교류가 사라지면, 도시가 품어야 할 다양성 역시 함께 줄어들 것이다. 1505년 폴란드에서 제정된 ‘니힐 노비(Nihil novi)’ 법은, 공동의 동의 없이는 새로운 결정을 내릴 수 없다는 원칙을 담고 있다. 훗날 ‘우리에 관한 일은 우리 없이 결정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로 요약되는 이 원칙은 참여와 소통이라는 정치의 기본을 일찍이 제시한 사례다. 부산의 시니어 정책에도 이 원칙은 유효하다. 노인을 ‘분리’하고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여러 세대가 함께 기획하고 함께 사용하는 공간이 생활권에 필요하다. 각 연령층을 위한 독립된 지원 제도는 이미 충분히 마련돼 있다. 이제는 세대가 출발선부터 함께할 수 있는 구조를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예컨대 노인복지관과 도서관, 청년 문화공간이 각각 따로 존재하는 대신, 하나의 생활권 안에서 동선과 기능을 의도적으로 겹쳐 설계하는 것이다. 오전에는 노년층의 프로그램이 중심이 되고, 오후에는 학생과 청년들이 드나들며, 저녁에는 세대가 섞여 머무는 공간. 세대를 구분하는 간판 대신 시간과 사용 방식이 공간을 나누는 구조다. 중요한 것은 그 공간의 목적과 언어가 특정 세대에만 과도하게 기울어 있지 않은지, 이용 방식이 어느 한쪽의 편의만을 전제로 설계돼 있지는 않은지 점검하는 일이다. 지나치게 외국어가 난무하는 환경, 특정 연령층의 사용 방식을 기준으로 한 안내와 동선은 의도치 않게 다른 세대를 배제한다. 특정 세대를 위해 새로운 건물을 짓거나, 특정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보다는 세대가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같은 공간을 쓰고, 같은 동선을 지나고, 같은 시간대를 공유하는 환경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지 생각할 때다. 부산은 청년들이 떠나는 도시로 자주 언급된다. 그러나 동시에 많은 이들이 ‘언젠가 돌아오고 싶은 도시’로 꼽는 곳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오랜 시간 축적해 온 부산만의 도시적 감각 때문이다. 이 감각은 오랜 세월 부산을 일궈온 어른 세대들이 차곡차곡 쌓아온 것이다. 그럼에도 서로가 만나서 함께 어울릴 공간은 충분하지 않다. 이것이 지금의 부산이 안고 있는 모순이다. 세대 간 소통의 통로가 막혀 있으면 아무리 다양한 세대가 공존해도 도시는 그 힘을 활용하지 못한다. 위로부터의 정책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아래로부터 자연스럽게 섞일 수 있는 공간과 환경이다. 부산의 생활권 안에, 세대가 일상적으로 교차하고 각자의 기억이 공존하는 장소가 필요하다. 부산의 미래는 ‘노인을 위한 도시’도, ‘청년을 위한 도시’도 아니다. 서로 다른 세대가 같은 공간에서 만나 각자의 이야기를 나누고, 자연스럽게 배우는 도시다. 마드리드에서 만난 카페가 보여준 역동성을 부산의 골목에서도 찾고 싶다. 20대와 30대만 모인 ‘유행을 좇는 공간’이 주는 활기와는 다른, 세대가 섞일 때만 생기는 온기를, 오래된 기억과 새로운 꿈이 충돌하지 않고 공존하는 공간을. 그것이 사람들이 다시 돌아오고 싶은 부산을 만드는 길이다.
[시론] 해저과학기지에서 수중 데이터센터까지
인공지능(AI)이 산업의 언어가 된 지금, 경쟁력은 소프트웨어 알고리즘뿐만이 아니라 ‘컴퓨팅을 놓을 공간’ 또한 중요하다. 육상 데이터센터는 전력과 물, 부지 확보라는 여러 벽에 부딪힌다. 그 대안으로 떠오르는 것이 바다, 더 정확히는 해저 공간이다. 해저 공간은 단순한 “특이한 건축”이 아니라, 압력·부식·격리·응급 대응을 동시에 해결해야 하는 극한 공학의 집합체이자, 해양관측·안보·에너지·디지털을 한곳에 결합하는 인프라 플랫폼이다. 해외는 이미 바다 밑을 실험장으로 삼았다. 미국의 유인 해저기지 ‘아쿠아리우스’는 고립 환경에서의 장기 체류 연구 모델로서 잠수 기술과 우주 환경 연구에 활용되었으며, 일본 시미즈의 ‘오션 스파이럴’은 해저도시 구상을 통해 해저 공간에 대한 기술 축적을 이루어 왔다. 마이크로소프트 ‘프로젝트 나틱’은 스코틀랜드 해역에서 수중 데이터센터를 실증하며 수중 환경의 높은 서버 신뢰성을 확인하였고, 싱가포르 케펠은 해수 냉각을 활용한 플로팅 데이터센터 개념으로 토지·물·에너지 제약을 줄이는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이러한 시도의 공통점은 바다를 ‘냉각원’이자 ‘입지’로 활용해 디지털 인프라의 한계를 넘으려는 것이다. 우리도 밑그림이 있다. 한국해양과학기술원은 해양수산부의 연구개발사업인 ‘해저공간 창출 및 활용기술 개발’을 통해 수심 해저에서 장기 체류가 가능한 해저 공간 플랫폼의 설계·시공·운영·유지관리 핵심기술을 개발하고, 테스트베드를 설치하는 실증연구를 수행 중이다. 울산광역시가 1·2단계에 참여해 테스트베드 제공과 사업비 매칭을 맡는 점은 실증-산업화의 연결고리를 강화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수중 데이터센터 단지 기술은 해수를 냉각원으로 활용해 냉각 전력 소비를 줄이고 운영비 구조를 개선한다. 단지화는 모듈의 반복 생산과 확장을 전제로 하므로 투자비의 예측 가능성을 높이고, 구조물·전력·통신·운영장비 등 연관 산업을 패키지로 묶어 부울경의 조선해양·제조 공급망에 새로운 수요를 만들 수 있다. 이러한 시도는 ‘사람이 머무는 해저 공간’과 ‘서버가 머무는 해저 공간’을 같은 산업 생태계에서 키우는 전략이다. 부울경이 이 전략의 전진기지가 될 수 있는 이유는 다양하다. 울산은 조선해양플랜트 중심 도시로 산업 벨트가 형성돼 테스트베드 구축 시 연관 산업과의 상호 협력이 가능하며, 부산은 항만·물류와 해저케이블, 디지털 인력·대학·연구기관이 밀집해 있으며, 경남은 기자재·기계·부품 산업의 저변이 두텁다. 해저 공간은 해양플랜트·건설·수중로봇·전력·통신·안전·의료·환경을 아우르는 ‘산업의 종합 세트’이기에, 권역 단위의 공급망과 실증 체계가 갖춰질 때 연구는 산업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러한 계획의 실현을 위해서는 연구개발을 통해 환경영향 검토, 안전 기준과 인허가, 비상 대응 체계, 장기 내구성 검증이 선행돼야 한다. 테스트베드에서 표준을 만들고, 장기 체류·운영으로 신뢰성을 쌓은 뒤, 수중 데이터센터 단지로 ‘스케일-업/스케일-아웃’하는 로드맵이 필요하다. 이는 기술개발과 규제·표준을 동시에 진전시키는 현실적 경로다. 여기에 정책의 속도가 뒷받침될 필요가 있다. 해저 공간을 위한 안전·환경 기준을 선제적으로 정립하고, 해양 특화 규제샌드박스와 보험·책임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전력망 연계와 해저케이블, 항만 배후 부지의 물류·정비 거점을 함께 설계하면, 연구시설과 산업단지가 분리되지 않는다. 표준을 먼저 쥔 지역이 기자재 시장과 운영 서비스, 수출까지 주도한다. 바다는 이제 관광의 배경이 아니라 미래성장동력과 지역 산업전환을 담는 ‘새로운 국토’가 될 수 있다. 부울경이 먼저 해저 공간 플랫폼의 표준 모델을 만들고 이를 수중 데이터센터·해양에너지·해양관측과 결합한다면, 지역은 제조 중심에서 ‘극한 인프라와 디지털 해양산업’의 중심으로 도약할 것이다. 해수 냉각은 용수 사용과 냉각 전력을 함께 줄여 탄소중립·RE100 요구에도 부합한다. 해상풍력과 연계하면 ‘에너지-데이터’ 해양 클러스터가 열린다. 다음 10년, 바다 아래 30m를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부울경의 다음 먹거리를 좌우한다. 부울경이 표준을 선점하면 세계가 따른다, 지금이 기회다. 지금은 초기 투자의 시작이다. “실증-표준-산업화”를 부울경에서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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