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희창의 클래식 내비게이터] 거장의 황혼, 브람스 클라리넷 5중주
음악평론가
요하네스 브람스. 위키피디아
1890년, 브람스(1833~1897)는 자신의 인생이 후반부에 이르렀으며 이제 모든 것을 정리해야 할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현악 5중주 2번을 끝으로 이제 더는 작품을 쓰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음악적 영감이 다했다고 판단한 그는 편지 형식으로 유언장을 작성해서 출판사 사장인 짐로크에게 보내기까지 했다.
그러던 중에 마이닝겐 궁정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듣게 되었는데, 그 오케스트라의 클라리넷 연주자 리하르트 뮐펠트(Richard Muhlfeld, 1856~1907)의 소리를 듣고 감격하게 되었다. 당시는 클라리넷이라는 악기의 전환점이 되는 시기였다. 뮐러, 뵘 등에 의해 새로 개량된 클라리넷은 과거보다 훨씬 민첩해졌고, 짙고 어두우면서도 실크 같이 미묘한 음색을 가능하게 했다. 그 색다른 음색에 매료된 브람스는 연이어 4개의 클라리넷 곡(두 개의 클라리넷 소나타, 한 개의 3중주, 그리고 한 개의 5중주)을 잇달아 작곡했다.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5중주와 협주곡에 슈타틀러라는 연주자가 있었고, 베버의 협주곡에 베르만이 있었다면, 브람스의 클라리넷 소나타와 5중주 곁에는 뮐펠트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클라리넷 5중주 작품115는 모차르트의 작품과 함께 이 분야 최고의 명성을 자랑하는 곡이다. 1891년 12월 12일, 베를린 징아카데미 홀에서 뮐펠트의 클라리넷과 요아힘 4중주단이 공식적인 초연 무대를 가졌다. 참석한 음악가들은 한결같이 “브람스 최고의 실내악 중 하나”라고 극찬했고,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5중주를 잇는 걸작이라 평했다. 이 평가는 시대를 건너 현재까지도 변함이 없다.
다미앵 바흐만 (클라리넷), 에벤 4중주단
1악장, 흐릿하게 시작하는 첫 주제부터 쓸쓸한 감정이 물밀듯 밀려온다. 2악장 아다지오에선 클라리넷과 바이올린이 주고받는 모습이 가히 몽환적으로 아름답다. 대비되는 감정선이 교차하는 가요풍의 3악장을 거쳐, 4악장에선 주제에 의한 5개의 멋진 변주가 이어진다. 이 변주를 통해 작품 전체를 회고하다가 실구름처럼 하늘하늘 꺼져가며 사라진다.
후에 남긴 몇 개의 소품을 제외하자면, 이 곡이 사실상 브람스의 마지막 곡이나 다름없다. 작곡 시기로든, 곡의 성격으로든, 늦가을을 연상시키는 추억과 체념과 고독의 정서가 가득하다. 클라리넷 5중주를 쓴 후, 그의 주위에서 사람들이 하나씩 떠나기 시작했다. 누나 엘리제, 지휘자 한스 폰 뷜로, 평생의 친구인 엘리자베트 헤르초겐베르크, 아끼던 가수 헤르미네 슈피스…. 그러다가 1896년, 평생 사랑해 온 클라라 슈만마저 죽었다. 그 이듬해 브람스도 세상을 떠났다. 쓸쓸한 늦가을에 들어도 적적하게 어울리겠지만, 한 해를 마감하는 12월에 들으면 가슴 아리는 곡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