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달식의 일필일침] 폐교 하나쯤은 이런 공간 필요하다

정달식 논설위원 dosol@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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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

외로움, 담배 15개비 피는 것만큼 유해
우리나라 80세 이상 절반 넘게 호소

기존 노인복지시설, 닫힌 공간 ‘한계’
부산에 폐교 50여 곳… 갈수록 늘어
교육·생산·보건 가능한 공간 전환
고독사 등 문제 해결 ‘생활 거점’으로

“외로움은 하루에 담배 15개비를 피우는 것만큼이나 건강에 해롭다.” 미국 연방정부 공중보건서비스단은 2023년 발표한 ‘외로움과 고립감이라는 유행병’ 보고서에서 이렇게 경고했다. 같은 해 세계보건기구(WHO) 역시 외로움을 긴급한 세계 보건 위협으로 규정하고 이를 전담할 위원회까지 출범시켰다. 영국은 2018년 세계 최초로 외로움 담당 장관을 임명해 국가 차원의 정책을 추진해 왔고, 일본도 코로나19 이후 고독과 고립 문제를 전담하는 장관직을 신설하며 관련 대책을 강화했다. 한국 역시 고독사 예방과 사회적 고립 해소를 위한 정책을 점차 확대하고 있다. 외로움이나 고독은 이제 전 지구적 사회 리스크가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데 이 문제의 한가운데에는 바로 노인이 있다. 노인과 외로움은 어쩌면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물론 독일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는 “얄팍한 행복 대신 단단한 외로움을 선택하라”고 말하며 외로움의 가치를 강조했다. 그의 말처럼 외로움은 내면의 성장과 자기 성찰의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 특히 노인에게 외로움은 철학적 성찰의 기회가 되기보다 삶의 무게를 더욱 가중시키는 현실적 고통으로 다가오곤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외로움은 더 이상 낯선 단어가 아니다. 국가데이터처의 ‘2025년 사회조사 결과’에 따르면, 연령대가 높을수록 외로움을 느끼는 비율이 증가했고, 특히 80세 이상 노인의 절반 이상이 외로움을 호소했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노인의 외로움은 삶의 질 저하를 넘어 신체·정신 건강의 악화, 우울과 사회적 위축으로 이어진다. 최악의 경우 고독사라는 비극적 결말에 이르기도 한다. 이 문제는 부산에선 더욱 절박하게 다가온다. 65세 이상 노인 인구 비율이 전국 특·광역시 가운데 가장 높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노인들이 여가와 활동, 생산적 참여를 동시에 지원하는 공간도 충분하지 않다. 기존 노인복지시설은 대체로 닫힌 공간 안에서 상담이나 강의, 여가 프로그램에 집중돼 있어 생산적 활동이나 폭넓은 사회적 참여를 담아내는 데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다. 이 지점에서 눈여겨볼 자원이 바로 폐교다. 학령인구 감소로 현재 부산에는 50곳이 넘는 폐교가 존재한다. 앞으로 그 수는 더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 지금까지 폐교는 매각 대상이거나 임시 활용 공간 정도로 취급돼 왔다. 그러나 시각을 달리하면 폐교는 고령사회가 요구하는 새로운 공공 자산으로 충분히 재탄생할 수 있다.

그래서 제안한다. 폐교를 노인을 품은 새로운 공간으로 전환하자는 것이다. 폐교 활용의 가능성은 이미 검증된 바 있다. 부산 서구 암남동에 위치한 ‘알로이시오기지1968’은 폐교를 복합공간으로 재탄생시켜 지역의 대표적 명소가 됐다. 카페와 영상제작실, 상담·치료실, 공방, 침묵의 방, 도서관과 사랑방, 부엌, 수직농장, 달빛 옥상과 옥상 텃밭, 체육관 등 다양한 시설을 갖춘 이 공간은 개관 4년 만에 10만 명이 넘는 초중고 학생들이 찾았다. 이제 필요한 것은 이 성공 모델을 노인을 위한 공간으로 확장하는 일이다.

기존 노인복지시설이 상담과 강의, 여가 중심의 비교적 닫힌 공간에 머물러 있다면, 폐교는 교육·체험·생산·보건 기능이 한 공간에서 유기적으로 이루어지는 열린 공간이자 지역의 생활 거점으로 재구성하자는 제안이다. 예컨대 교정과 운동장 일부를 공동 경작지로 활용해 노인들이 직접 작물을 기르고 이를 폐교 내 장터에서 판매하도록 하는 것이다. 여기에 식사 공간과 명상 프로그램, 교양 강좌, 체육·취미 활동, 보건소, 약국 등 간단한 의료 서비스까지 더해진다면 폐교는 노인의 일상과 관계가 회복되는 생활 공간으로 거듭날 수 있다. 나아가 지역 주민을 위한 카페나 독서실, 소규모 영화관을 함께 운영하는 것도 가능하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사라졌던 교실과 운동장이 노인의 대화와 활동, 지역민의 문화로 다시 채워진다면 폐교는 방치된 건물이 아니라 사회를 회복시키는 플랫폼이 될 수 있다. 최근 전남 고흥에서 지역 노인을 활용해 지자체가 운영 중인 ‘고흥손맛반찬’ 사례는 시사점을 던진다. 어르신들이 직접 음식을 만들고 배달하며 지역사회와 관계를 맺는 이 사업은 돌봄 등 그 어떤 지원보다도 생산적 활동이 노년을 가장 따뜻하게 지탱하는 복지임을 일깨워 준다.

외로움의 해법은 결국 관계와 활동이다. 폐교는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 될 수 있다. 폐교 활용은 노인 문제 해결을 넘어 도시의 구조적 난제에 답을 제시한다. 원도심 쇠퇴, 세대 단절, 공동체 해체라는 문제를 한꺼번에 다룰 수 있기 때문이다. 부산이 ‘늙어가는 도시’를 넘어 ‘노인까지 품은 도시’로 나아갈 수 있을지는 폐교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폐교의 재탄생은 부산의 미래를 다시 설계하는 일이 될 것이다.


정달식 논설위원 dosol@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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