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 단상] 최첨단 향토기업

장병진 기자 joyful@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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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진 경제부 차장

언제부턴가 ‘향토’라는 단어는 세련미와는 거리가 먼, 조금은 촌스러운 수식어 취급을 받고 있다. 공장 기름 냄새나 막걸리에 담긴 정서 정도로 치부되곤 한다. 부산시가 지정한 향토기업 역시 마찬가지였다. 향토기업은 부산에 본사를 두고 30년 이상 운영하고, 상시 종업원 100명 이상, 최근 3년간 연평균 매출액 200억 원 이상의 양적 조건은 기본,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하고 다른 기업들의 모범이 되는 질적 조건도 충족해야 하지만 얻을 수 있는 타이틀이다.

전국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선정 기준을 가진 부산향토기업이지만 향토라는 단어 때문에 촌스러운 비즈니스 모델을 가진 기업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오죽하면 부산시도 2006년 전국 최초로 향토기업 제도를 만들고 65개 사를 선정해 관리해 오던 정책을 바꾸려고 공모전까지 진행했다. 고심 끝에 나온 결과가 바로 ‘명문향토기업’이다.

명문향토기업 명칭에 이럴 거면 왜 바꿨냐는 냉소적인 반응도 많았고 그 반응이 이해도 간다. 한편으로는 ‘향토’라는 단어가 품은 30년 이상의 무게를 대체할 단어를 찾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척박한 지역 현실 속에서 30년을 버티고 살아남았다는 자체만으로 그것은 단순히 오래된 것이 아니라 위대한 생존의 기록이자 부산의 산업사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명문향토기업들은 나름의 역사와 가치를 가지고 있다. 산업용 관이음쇠 분야 1위 (주)태광, 선박용 방화 판넬 1위 (주)비아이피(BIP)는 지역에서 기술력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준다. 조선기자재에서 친환경 선박 기술로 업종을 완벽히 바꾼 한라IMS, 전통 기계부품에서 로봇용 정밀 감속기로 피봇팅한 나라오토시스, 그리고 수도권 집중을 뚫고 부산 본사에 500억 원 규모의 대규모 투자를 감행한 대우제약은 부산 미래 먹거리의 좋은 사례가 되고 있다. 또 부산에서 가장 오래된 향토기업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대선주조는 향토기업이 지역사회에 어떻게 뿌리 내려야 하는지를 몸소 보여주고 있다.

이들이 ‘명문향토기업’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처절한 기업가 정신이 바탕이 됐다. 반대로 생각하면 부산이 가진 30년 이상 기업을 운영하기 좋은 여건, 즉 ‘부산 어드밴티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더 많은 명문향토기업이 나오기 위해서는 기업이 인재를 구하지 못해 떠나는 도시가 아니라, 매력적인 도시 환경 덕분에 우수한 청년들이 명문향토기업의 문을 두드리는 선순환 구조가 절실하다.

‘부산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 제조업이 고리타분한 산업으로 비치지 않도록 산업단지는 더 스마트하고 쾌적해져야 한다. 무엇보다 부산이라는 도시가 누구나 살고 싶고 머물고 싶은 강력한 브랜드가 되어야 한다. 도시의 매력도가 높아질 때, 비로소 향토기업은 촌스러운 ‘지역 업체’가 아닌, 세계에서 알아주는 명문 기업으로 거듭날 수 있다고 믿는다.

앞으로 전통적인 제조·물류업을 넘어, 더 다양한 영역에서 ‘부산의 이름’을 건 명문향토기업들이 나오길 기대한다. AI(인공지능), 문화 콘텐츠, 반도체 등 다양한 분야에서 차세대 엔진을 단 새로운 스타트업들이 오늘의 천일정기화물자동차나 대선주조처럼 50년, 100년의 역사를 써 내려가야 한다. 미래의 부산 명문향토기업이 더 잘 자랄 수 있는 부산을 기대한다. 여기에 더해 최첨단의 옷을 입은 향토기업들이 더 이상 촌스러운 취급을 받지 않기를 바란다.


장병진 기자 joyful@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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