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진의 기록으로 그림 읽기]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알게 한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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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현대미술관 학예실장

눈보라 속에서 우산을 쓰고 걷는 연인들, 1769, 목판화, 25.7×19.1cm, 메트미술관 소장. 눈보라 속에서 우산을 쓰고 걷는 연인들, 1769, 목판화, 25.7×19.1cm, 메트미술관 소장.

연말이 다가와 그런지, 일상이 첨단화될수록 정서에 닿는 것을 더 찾는 것 같다. 요즘 문자와 카카오톡으로 대신하지만, 예전에 있었던 크리스마스카드, 문안 편지가 그리운 시절이다. 눈이 오려는 이 계절, 마음에 닿는 그림으로 허전한 맘 한구석을 달래 보고 싶다.

‘눈보라 속에서 우산을 쓰고 걷는 연인들’, 긴 제목이 붙은 이 그림은 스즈키 하루노부(1725?~1770)가 1769년 제작한 우키요에이다. 우키요에는 일본 에도에서 상업이 번창해 탄생한 신흥 부자인 상인들의 유흥문화로 등장한 미술 산업의 핵심 품목이었다. 책에 실린 삽화인 목판화가 인기를 얻자, 반쪽짜리에서 한 페이지로 그리고 단색에서 다색 판화로 기술이 발전하며 독립된 그림책 출판산업으로까지 성장한 것이다. 그 인기가 일본만 아니라 유럽까지 펴져 일본의 대표적 문화수출 산업이 되었다. 그래서 수준 높은 우키요에 작품이 유럽과 미국 미술관에 엄청나게 많이 수집된 이유이다.

대부분 스승 이름을 물려받아 활동한 우키요에 작가들과 달리 자신의 본명으로 활동한 스즈키 하루노부에 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지만, 1765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약 5년 동안 엄청나게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고 한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 시기에 제작법이 획기적으로 분업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리는 이, 목판을 파는 이, 찍는 이, 제작 단계별로 기술자를 모으고, 게다가 자본을 끌어오고 유통과 판매만을 담당하는 기획자까지 두어 우키요에 제작을 체계화했다. 지금으로 치면 프로덕션을 설립하여 대량 생산 체계를 구축한 것이다.

이런 체계 속에서 스즈키 하루노부는 그림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되자 신흥 부자인 상인을 대상으로 최고급 목판화를 제작하기 위해 기술을 개발했다. 두세 종 판목에서 열 개 이상 판목으로 늘려 색을 정교하게 표현할 수 있게 하고, 여러 번 찍을 수 있도록 질긴 종이도 개발하고, 각 판목에 종이 위치를 정확히 맞출 수 있도록 가늠 표시도 개발한다. 게다가 두꺼운 종이를 사용하게 되니까 입체적으로 보이도록 하는 엠보싱 기법도 개발한다.

‘눈보라 속에서 우산을 쓰고 걷는 연인들’은 하루노부가 개발한 판화 기법이 전부 들어 있는 최고 작품이다. 눈 덮인 나뭇가지 아래 흑백 옷으로 차려입은 연인이 각자 한쪽 손으로 우산대를 잡고 상대방으로 쳐다보는 눈에는 애틋함이 묻어있다. 섬세한 무늬가 새겨진 옷을 차려입은 연인들에게서 절절한 사랑이 드러난다. 바닥에 높이 쌓인 눈을 엠보싱 기법으로 표현하여 이들 사랑의 깊이를 느끼게 하고, 또 이들 배경으로 눈보라가 흩날리는 장면이 그 사랑이 심상치 않음을 눈치채게 한다. 부디, 이들의 사랑이 너무 아픈 사랑이 아니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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