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카니발의 시간은 지나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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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화 수필가

카니발, 문학과 인간의 연결고리
비프의 역할과 맞닿아 있는 듯
영화제 기간 하루 3~4편 관람
피로 속에 살아 있음 느껴져

러시아 인문학자 미하일 바흐친은 카니발에서 문학과 인간의 연결고리를 찾아냈다. 사육제라고도 번역되는 카니발은 중세 유럽에서 실제로 열렸던 축제였다. 부활 대축일 이전 금욕적인 삶을 앞에 두고 40일 동안 질펀하게 놀면서 에너지를 비축하였다.

축제 기간에는 금기와 구속이 일시적으로 사라지고 우스꽝스러운 인물이 등장하며 위계질서와 예절과 지위도 무시된다. 왕이 거지가 되고 거지는 왕이 되며 성직자는 모독당하고 광대는 추앙받는 거꾸로 된 논리가 상식을 제압한다. 위와 아래, 공포와 웃음, 죽음과 탄생 등이 자리를 바꾸며 권위는 추락하고 조롱당한다. 해학과 풍자가 만들어내는 이 집단적 해방 속에서 인간은 자기 존재의 밑바닥을 들여다보는 용기를 얻는다.

나는 그 카니발이 가을이면 부산에서 열리는 국제영화제와 맞닿아있다고 생각한다. 영화제라는 또 다른 축제 속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목소리들이 스크린 위에서 살아 움직이고 경계와 위계가 흐릿해진 채 모두가 예술이라는 언어로 소통한다. 낯선 이야기들이 웃음과 감동과 조롱과 성찰을 불러일으키며 억압된 현실을 잠시나마 잊게 만든다.

그러므로 나는 ‘시민평론단’이라는 배지를 십 년 넘게 목에 걸고 올해도 영화의 카니발 속으로 뛰어들었다. 이때는 평소의 일정 대부분이 정지된다. 전화도 잘 받지 않고 사람도 만나지 않으며 밥도 하지 않고 마트도 가지 않는다. 내 수업을 듣는 학생들도 영화제에 간다고 표를 제시하면 출석을 과제로 대체해준다. 열흘 동안 하루에 서너 편의 영화를 보고 평론단의 의무인 상영작 리뷰도 세 편 이상 써야 한다. 시간 여유가 있으면 비전부문 심사까지 맡게 된다.

그뿐인가. 아침마다 티켓 온라인 예매 시간이 되면 초를 다투느라 모니터를 뚫어지게 응시하며 키보드 위를 미친 듯이 누른다. 단 몇 초 차이로 봐야 할 영화를 놓쳤을 때의 허탈함과 운 좋게 자리를 확보했을 때의 짜릿함은 그 자체로도 축제의 일부가 된다. 상영 시간에 맞춰 영화관을 이동하고 호평과 혹평에 따라 급조정된 티켓 교환을 시도하며 관객과의 소통 무대도 참가하느라 제때 식사하기도 어렵다. 그러기에 일주일만 지나면 평론단 동지들은 마치 전쟁이라도 치른 듯 눈자위가 움푹 꺼지고 몰골이 초췌해진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피로 속에서 나는 살아 있음을 느낀다. 낮에는 영화를 보고 밤에는 글을 쓰고 다음 날의 스케줄을 고민하면서도, 그 시간을 포기하고 싶어지지 않는다. 올해도 역시 개봉이 예상되는 인기작보다는 배급사에서 외면할 것 같은 비주류 영화를 많이 보았다. 전쟁 다큐멘터리와 신화나 전설이 등장하는 영상물과 아프리카나 아시아 빈민국이 배경인 작품들이 매력적이다. 완성도나 서사의 밀도만으로는 평가할 수 없는, 어딘가 거칠고 낯설지만 그래서 더욱 진실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체제와 규범에 들지 않는 인물들의 어눌하지만 강렬한 언어와 때때로 세상의 구석에 놓인 낮고 거친 목소리들을 들었다. 이제는 폐광이 된 강원 태백의 ‘장성광업소’를 배경으로 한 다큐멘터리 ‘이슬이 온다’처럼, 잊힌 사람들과 버려진 장소에 대한 진혼곡 같은 영화가 강한 울림으로 남았다. 숨이 턱턱 막히는 열기를 이겨내며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막장 앞에서도 탄가루를 훌훌 불어 밥을 삼켜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그들이 검은 막장에서 검은 울음을 토하면서 채탄 광부로 버텨낸 이유는 오직 가족이었다. “나 혼자 참으면 가족들이 즐겁다”는 대사가 아직도 가슴을 때린다.

그렇게 올해도 내게 허락된 짧지만 농도 짙은 현대판 카니발의 시간이 모두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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