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진의 기록으로 그림 읽기] 현대조각의 한 페이지를 용접으로 남긴 조각가 송영수
경부고속도로 중간쯤에 있는 고속도로휴게소 1호인 추풍령휴게소는 90년대까지만 해도 많은 이가 낭만과 추억을 쌓던 곳이었다. 지금은 다른 고속도로가 많아져 명성이 퇴색되면서 그곳에 건립된 나들목을 형상화한 조형물을 직접 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서울대 교수였던 송영수는 1970년 경부고속도로 준공 기념으로 추풍령에 세울 조형물을 의뢰받았지만 완성하지 못하고 심장마비로 짧은 예술가 삶을 마치고 말았다. 그는 서울 태생이지만 천안에서 자랐다.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미술에 재주가 있어 서울대 조소과를 진학했지만, 곧바로 터진 6.25전쟁 때문에 서울대가 부산으로 이전하면서 제대로 수업받지 못했다. 1953년 다시 서울로 복귀하면서부터 제대로 된 수업을 받고 작품을 제작할 수 있었다.
1950년대 중반까지도 조각계는 일제강점기에 서구적인 조각 기법이 들어온 이래 크게 변화하지 못한 상태였다. 김복진을 비롯해 김경승, 김종영, 윤효중 등이 일본 유학을 통해 배워 온 조각 양식은 사실적 묘사에 바탕을 둔 인물상이 대부분이었고, 1949년 시작된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 이외에는 마땅히 조각을 발표할 기회도 없었다. 50년대를 통틀어 개인전에서 조각을 발표한 횟수는 4, 5회가 전부일 정도였다. 이런 상황은 송영수도 비슷했다. 대학을 마치고 대학원을 진학해 1958년 석사학위를 받을 때까지, 그는 스승 김종영의 영향을 받아 구상적인 인물상을 주로 발표했다. 전통적인 조각 재료인 돌과 석고로 제작한 것들이다.
송영수는 다른 이처럼 유일한 발표장이었던 국전에서 1953년 2회부터 56년 5회까지 연속해서 특선을 받아, 1957년 국전 추천작가가 되었다. 그래서인지 57년 국전에 그는 이전과는 사뭇 다른 용접 기법으로 제작한 추상성을 띤 작품을 출품했다. 6회 국전에는 송영수 이외에 몇몇 조각가들이 용접으로 만든 작품을 출품해 조각계가 변화하고 있음을 알렸다. 이는 한국전쟁으로 외국에서 서구 현대미술을 소개하는 책자가 유입되었고, 일본 잡지를 통해서도 용접을 활용한 조각과 조각가가 소개되었기에 생긴 기류였다. 또 아이러니하게 전쟁이 엄청난 고철을 만들어 냈고 이를 절단하고 붙일 수 있는 용접 기술이 수입되면서, 조각에 새로운 형식을 만들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송영수는 용접으로 작품을 제작하다가, 65년에 일본에서 동판이 수입되고부터는 동으로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새’이다. 그가 남긴 드로잉에는 “싸우다 죽은 새들”이라고 이 작품의 의미를 추론할 만한 글귀가 적혀 있다. 날카로운 날개와 심하게 꺾인 목의 형태가 의미를 잘 상징하고 있어 감상자에게 그대로 전달되는 듯하다.
부산현대미술관 학예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