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메아리
신호철 소설가
온종일 통기타만 끼고 살던 시절이 있었다. 학업보다 동아리 방의 먼지가 더 친숙했고, 세상에 음악이 없으면 공허뿐이라 떠벌이며, 대단한 음악가가 된 양 노래를 불렀었다. 나름 기억에 남는 공연도 있었다.
유행하는 노래만 따라 불러서 되겠냐며 창작곡을 만들자고 의기투합했고, 우리 통기타 동아리는 부산에서 처음으로 창작곡으로 발표회를 열기도 했다. 요즘으로 치면 신곡발표회인 셈이다.
수많은 관객과 눈부신 조명 아래에서의 공연은 쉽게 접할 경험이 아니다. 게다가 공연을 끝내고 나면 허탈과 희열이 교차하는 묘한 잔향을 음미할 수 있다. 이렇게 강조하는 이유는 사실, 졸업 후, 학업에 열중하지 않았던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기 때문이다. 현실은 냉혹했고, 사회생활은 만만찮았다. 하지만 사회 초년생으로 어설픈 실수를 반복하면서도 학창시절 경험은 나름의 자랑이자 자긍이었다.
학창시절 음악 동아리 활동
노래 만들고 불렀던 기억 소중
최근 동아리 없어진 소식 충격
함께 공유하며 전통 이어가야
졸업 후에도 후배들에게서 연락이 오곤 했다. 정기 공연을 개최하니 선배로서 참석해 달라는 초대였다. 대부분 참석하지 못했다. 뭐가 그리 바빴는지 모르겠다. 그러던 어느 해부터 후배들의 연락이 끊겼다. 워낙에 참석하지 않았으니, 아예 연락 명단에서 뺐거니 짐작했다. 뭐,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는 처지였다.
하지만 비록, 연락은 닿지 않더라도 후배들은 여전히 노래 부르고, 낭만을 즐기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가끔은 무대의 먼 끝자리에서 후배들의 공연을 구경하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었다.
얼마 전에, 유일하게 연락이 닿는 동아리 선배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선배가 전해준 소식은 당혹스러웠다. 우리 동아리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요즘 신입생은 취업을 최우선 과제로 여기고, 기타 치고 노래 부르는 활동은 현명한 선택이 아니라고 했다. 좀 더 알아보니 내가 알던 몇몇 통기타 동아리는 여전히 활동하고 있었다. 대학가요제 수상자나 유명 가수를 배출한 동아리는 그나마 신입 회원을 유지할 수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 소식을 듣고 묘한 상실감에 한동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소중한 뿌리 하나가 썩둑 잘려나간 느낌이었다. 모교가 폐교 위기에 놓였다는 소식에 학교를 되살리기 위해 발 벗고 나섰다는 졸업생들의 심정이 그제야 이해되었다.
우리는 저마다의 역사를 쌓아가고 있다. 기타 반주에 다 함께 목청을 포개며 느낀 충만감, 공연장 뒤편의 퀴퀴한 커튼 냄새, 허름한 술집 막걸릿잔에 오르내리던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 이런 개인의 역사는 나를 구성하는 재료가 되었다. 그리고 언제든 문을 열면 학우들을 만날 수 있었던 좁은 동아리방은 바로 나의 유물이다.
유물의 상실은 곧 내 역사의 소실이다. 실체와 연결되는 정체성의 손잡이 하나를 잃어버린 격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의 잘못도 있다. 만약 선배들이 사회에 나와서도 후배들을 응원하고 여전히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을 줬다면… 음악에 흠뻑 빠졌던 선배가 ‘사회’라는 무대에서도 멋지게 춤을 추는 모습을 보였더라면…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세계인의 이목을 모으고 있다. 세계인이 관심을 두는 우리의 전통과 유적이 자랑스러운 만큼, 그런 전통을 아름답게 이어준 옛 선인들이 고맙고 자랑스럽다. 전통과 문화는 단순히 기억만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함께 일어서고, 함께 부르고, 함께 손을 잡았기에 다음 사람에게 공감되는 기억을 건넬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서 나는 함께하지 못해 잃어버린 내 유물이 몹시 애달프다. 그 유물은 ‘메아리’라는 이름의 동아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