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우리도, 그들도 애국자"

전창훈 기자 jch@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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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창훈 서울정치부장

헌재 선고 앞두고 진영 간 대충돌 위기 고조
'당사자들' 승복과 자성으로 압력 낮춰야
광장의 시민들도 최소한의 접점 만들어가야
결국 그들도 애국자라는 공존 의식 절실

어느 대통령의 마지막 대국민 담화다. “국민 여러분, 지금 우리가 처한 위기는 전혀 새로울 게 없습니다. 다만 이전과 다른 점은 우리가 건국 이래 최악으로 분열됐고, 그로 인해 위기에 취약해졌다는 것입니다. 사회 곳곳에서 진영 간 극한 투쟁으로 적색 경보가 울리고 있습니다. 누구의 잘못이 아닌 우리의 잘못입니다. 저 또한 문제의 일부임을 인정합니다. 변화가, 대담한 변화가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민주주의는 황혼처럼 저물어 갈 것입니다. 오늘 서로에게 약속 하나 합시다. 우리끼리 벼룩 잡는다고 초가삼간 다 태우지 말고, 조금이라도 공동의 선을 찾기 위해 매일 노력하자는 약속 말입니다. 지도자 한 사람이 민주주의를 구할 수 없지만, 신뢰할 만한 지도자가 없다면 그 또한 민주주의를 구하기 어렵습니다. 다음 대통령은 국민 여러분이 도와주셔야 합니다. 우리 미래가 달린 일입니다.”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결정을 눈앞에 둔 윤석열 대통령이 이 메세지를 전하는 모습을 상상해봤다. ‘12·3 비상계엄’ 이후 극한으로 갈라진 국민들에게 조금이나마 안심과 위로를 주지 않았을까 싶지만, 아쉽게도 ‘홈랜드’라는 한 미국 드라마의 대사를 조금 각색한 것이다. 극 중 대통령은 가진 권한을 총동원해 음모론과 가짜 뉴스로 정권을 흔드는 반대파들을 응징하려 하지만, 결국 보복의 악순환만 부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자 국민 통합을 호소하며 ‘하야’한다.

반면 현실의 대통령은 ‘야당 경고용’이라며 계엄이라는 엄청난 칼을 휘둘렀지만, 헌재 선고가 임박한 지금 이 순간에도 권좌로의 복귀를 기대하는 모습이다. 탄핵에 찬성하는 절반 이상의 국민들은 “계엄에 실패한 대통령이 다시 군 통수권을 행사하는 게 말이 되느냐”며 어이없어 하다 못해 공포감을 호소하고, 광장의 결집 이후 지지율 상승과 ‘석방’이라는 반전을 본 탄핵 반대 진영은 “이제 곧 대통령이 용산으로 돌아가 못다 한 종북좌파 척결을 끝낼 것”이라고 믿는다. 이 거대한 인식의 간극을 메울 방법이, 아니 두 진영의 공존 자체가 가능한 것인지 암울한 의문이 커지는 요즘이다. 양측이 뿜어내는 증오와 적의의 에너지는 한 궤도에서 마주 달리는 열차처럼 맹렬하고 무모해 보인다. 우리 민주주의 또한 중대한 위기 국면이고, 변화가 절실한 시점이다.

현 시점에서 충돌의 압력을 낮추기 위해 가장 긴요한 건 ‘당사자’들의 결자해지 의지다. 여야에서 최근 앞다퉈 요구하듯이 윤 대통령은 ‘파면’ 결정이 나더라도 승복할 것임을 분명하게 천명해야 한다. 만에 하나 탄핵이 기각되더라도 나머지 임기는 국정 운영보다는 조속한 개헌에 집중하겠다는 ‘최후 진술’을 다시 확약하는 것도 필요하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역할도 윤 대통령 못지 않다. ‘줄탄핵’과 ‘입법 독주’로 윤석열 정부를 내내 흔들었던 거대 야당의 무절제한 힘 자랑에 대한 자성과 변화를 약속한다면 보수의 분노를 조금이나마 누그러뜨릴 수 있지 않을까. 거기에 거대 야당이 행정권력까지 손에 쥘 경우 어떤 ‘폭주’가 있을지 우려하는 많은 국민들에게 진정성 있는 답을 내놓은 것도 차기 권력을 꿈꾸는 이의 마땅한 자세일 터다.

둘로 쪼개진 광장의 시민들 또한 한 치의 접점이라도 찾기 위한 노력을 시작해야 할 텐데, 그 출발점은 ‘사실(fact)’에 대한 존중이지 않을까. 일례로 ‘중국 간첩 99명 체포’와 같이 명백하게 허위로 드러난 가짜 뉴스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선을 긋는다면 좋은 시작이 될 수 있겠다.

내전이 운위되는 엄혹한 현실 속에서 참으로 한가하고 공허한 얘기로 들린다는 걸 잘 안다. 그런데 달리 다른 방법이 있을까. 스스로가 말도 안 되는 음모론의 피해자인 〈미스빌리프〉(misbelief·잘못된 믿음)의 저자 댄 애리얼리 교수가 이를 신봉하는 이들을 깊숙이 접촉하고 연구하면서 도달한 결론은 상대한 대한 조롱과 무시보다는 이해와 공감하려는 노력이었다.

며칠 뒤 우리 사회는 한 차례 큰 소요를 피할 길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광기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양 진영 모두 숨을 고르고 이성의 시간으로 돌아가야 할 테다. 대통령이 복귀해서, 반대로 야당이 집권해서 ‘반대 세력’을 다 쓸어버리면 평화의 시간이 올까? 옳지도 가능하지도 않은 얘기다. 2008년 미 대선 당시 공화당 존 매케인 후보는 상대인 민주당 오바마 후보를 ‘아랍인’이라고 공격하는 지지층을 향해 “그는 훌륭한 미국인이다. 나와 정책에 대한 이견이 있을 뿐”이라고 자제시켰다. 그런 최소한의 존중과 절제야말로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변화다. 사실 계엄 이후 핏대 세우면서 논쟁하고, 길거리까지 나선 우리 모두 결국 나라 잘 되기 위해 나선 애국자들 아닌가.


전창훈 기자 jch@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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