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칼럼] 직업에 귀천이 없을까
주영은 공모 칼럼니스트
‘노동(勞動)’이라는 낱말을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찾아보면 ‘몸을 움직여 일을 함’이라고 되어 있다. 몸을 움직여 일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살기 위해서다. 현대 사회에서 노동은 다름 아닌 먹고 사는 수단이다.
그런데 이 단어가 가끔 머리를 어지럽게 할 때가 있다. 이 간결한 단어에 지나치게 많은 의미가 첨가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노동은 단순히 몸을 움직여 일을 하는 의미에 그치지 않는다. 그 사람의 생활 수준을 나타내는 지표이자 사회적 지위를 암시하는 단서가 되기도 한다. 개인적인 이름인 동시에 매우 사회적인 명칭이라는 뜻이다.
노동은 사회적 지위 드러내는 지표
직업에 따른 귀천 없다고 하지만
현실에서 차별 의식은 엄연히 존재
삶의 다양한 층위는 구조적 문제
사회가 나누는 기준에 따르지 말고
자기 일의 소중함 느끼는 게 중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인서울’ 명문대 학생들을 볼 때면 이상한 감정이 밀려왔다. 예컨대 ‘나보다 더 노력했으니까 저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겠지’ 혹은 ‘저들은 선망받는 직업에 금세 올라서겠지’, ‘내가 그렇게도 갖고 싶어 했던 이름들을 갖게 되겠지’ 같은 생각들이다.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는 감정이 이렇게 불거지곤 한다. 나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고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며 살아왔다. 그런데도 종종 나보다 잘난 것 같은 이를 보면 이렇듯 부끄러운 생각에 빠지는 것이었다.
나는 자립할 만한 임금을 받으며 사회생활을 하고 있다. 그런데도 내가 서 있는 사회적 위치를 조금 부끄러워할 때가 있었다. 어릴 때는 ‘이곳은 한시적인 직장이고 아직 장래를 고민하는 중’이라는 핑계로 내 노동의 가치를 폄훼했다. 현재 내 위치를 자꾸 타인에게 설득하려 한다는 건, 내가 나를 떳떳하게 여기고 있지 못하다는 걸 방증한다. 그런가 하면 대학생 때의 아르바이트 경험은 잘도 늘어놓았다. 과거의 아르바이트 경험은 어린 나이에도 적극적으로 삶을 살아내려 했다는, 자랑할 만한 훈장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는 이 말은 어쩌면 엉터리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면 아파트 경비원들을 마음대로 부리는 사람은 무엇인가. 음식점에서 종업원에게 진상을 부리는 사람은 또 뭔가. “직업에는 귀천이 없는데, 계급을 나누는 사람들이 문제야!” 이런 말은 형식적이고 겉치레의 말일 뿐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도덕책에나 있을 법한 이 문구는 세상에서 어떠한 변화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더 악착같이 살아서 성공해야지’, ‘더 열심히 공부해서 취직해야지’라는 생각을 한다. 여기서 자유로운 이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대한민국의 입시, 취업, 결혼, 노후 등 모든 것이 그렇다. 삶 전체가 계급의식을 바탕에 깔고 있다. 언제까지 구조가 아닌 개인의 탓을 할 수는 없다.
한편으로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말은 때 묻은 양심을 덜어내고 싶을 때 자주 인용되는 듯하다. 나는 초등학교에서 처음 이 개념을 배웠다. 생각해 보면, 귀천이 없다는 관념을 아이들에게 학습시키려 한다는 건 오히려 직업의 귀천이 엄연한 지금의 현실을 부정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경험한 바로는 학교라는 곳부터가 직업에 귀천 의식을 부여하는 대표적인 사회조직이었다. 선생님들은 윤리 시간에 노동의 평등함을 가르치면서도 댄서를 꿈꾼다는 아이는 은근히 괄시했다. 의대에 진학할 거라는 아이에게는 지나치다 싶을 만큼 관심과 애정을 쏟았다. 학교 현장이 이러니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어떻게 하면 사회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는지를 몸으로 체득하게 된다.
개인의 계급적 상황에 따라 사람을 구분하고 괄시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면죄부도 너무 많다. 모두가 기를 쓰고 위로 올라가려 하는 모양을 보고 있자니 살아남으려는 모든 행위가 어떨 때는 다 가엾게 여겨지기도 한다.
모든 노동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하나의 ‘이상’이다. 이런 이상이 실현되는 그런 때가 오기는 할까. 어쩌면 나도 지위나 신분의 상승에만 관심을 두고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아직 지위랄 것도 없는 나는 오늘 깨끗하고 순수한 내 스펙을 조금 부끄러워하면서도, 잔인한 세상의 기준에 혼란을 겪는다.
그럼에도 나는 오늘, 일기장에 ‘되고 싶은 게 너무 많다’며 수많은 꿈들을 적는다. 어린 시절에는 되고 싶은 것이 참 많았다.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그중 몇 가지를 이루어가고 있다.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은 나는, 요령이 없어서 힘들었지만 여기저기 부딪히니 이제야 내가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 알 것 같다. 이제 나는 되고 싶은 것은 없다. 하지만 하고 싶은 게 많아졌다. 꿈이란 건 반짝하는 순간이 아니라, 내가 계속 써 내려가야 하는 역동적인 드라마 한 편임을 깨닫는다. 더이상은 사회가 나누는 기준으로 나의 직업을 규정하고 싶지 않다. 다만 내가 하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느껴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