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알고리즘 이겨내는 생활정치

박세익 기자 run@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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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익 플랫폼콘텐츠부 부장

내전 수준 치닫는 진영 혐오 적신호
알고리즘에 갇힌 국민 ‘소셜 딜레마’
나의 삶 좌우하는 정치 중요성 인식
생활 속 정치 참여로 미래 열어가길

2019년 봄, 부산에서 꽤나 흥미로운 정치 실험이 있었다. 당시 자유한국당 부산시당이 전국에서 처음으로 ‘자유시민 정치 박람회’를 열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시당의 부산행복연구원 산하 시민정치토론센터가 동력이었다.

시당은 부산 해운대구 벡스코에 공간을 마련했다. 18개 지역구 당협, 산하 단체들이 각각 부스를 마련해 정책을 소개하고, 정책 비전을 공유하는 시간이 진행됐다. 청년 당원들이 대거 참여한 것은 물론 당 대표까지 현장을 찾았다. 기대했던 젊고 자유로운 ‘스탠딩 파티’와 같은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척박한 정치 환경 속에서 그나마 선진 정치를 향한 첫걸음을 뗐다는 데 의미를 두기에 충분했다.

사실 이런 시도는 세계적인 모범 사례로 꼽히는 스웨덴의 ‘알메달렌 정치박람회’를 벤치마킹한 것이다. 그해 6월 시당은 ‘알메달렌 원정대 출정식’을 열고 현장을 체험하도록 청년 정치인을 보내기도 했다. 박람회는 1968년 7월 휴가지인 스웨덴 고틀란드섬의 작은 마을 알메달렌에서 씨앗을 뿌렸다. 당시 휴가 중이던 교육부장관이 광장의 트럭에 올라 작은 정책 간담회를 연 게 시작이었다.

총리가 된 장관은 이듬해에도 알메달렌에서 자신의 정책을 이야기하는 행사를 열어 주목을 받았다. 이후 다른 정당 지도자들에게 참여를 제안하면서 덩치를 키우기 시작했다. 1982년 진보와 보수, 극우와 극좌 정당, 성소수자와 환경 단체 등 이익단체, 어린이와 청소년, 기업들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국민의 생각을 대변하는 이들이 일주일간 대규모 정치 축제를 여는 ‘알메달렌 주간’이 공식 출범했다.

행사 기간 동안 알메달렌의 광장과 골목, 호텔, 카페, 식당은 서로 소통하는 축제의 장이 됐다. 수천 개에 달하는 크고 작은 세미나에서 수만 명이 얼굴을 맞대고 생각을 공유하는 시간은 전체를 바라보고 종합하게 하는 선순환을 가져왔다. 장소를 가리지 않는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삶을 바꿀 정책과 정치에 진심으로 다가가서는 모습을 보였고, 자신과 다른 생각을 이야기하더라도 상대를 존중하는 매너가 자리를 잡아갔다.

누구나 정치인이 되어 생활 속 정치를 실현하는 이 모델은 북유럽으로 퍼져 나갔다. 덴마크와 노르웨이, 핀란드 등지에서 유사한 정책 박람회가 매년 열린다. 알메달렌 박람회는 정치 꿈나무를 키우는 공간으로서 더욱 특별하다. 어릴 때부터 정치를 꿈꾸는 아이들이 알메달렌을 경험하면서 어엿한 국가 대표 정치인으로 커가는 것이다. 광장의 꼬마가 지역 정치인으로, 다시 국회의원으로 단계를 밟아가며 성장하니 청년 정치가 정치 입문의 필수코스인 셈이다. ‘나름 성공했으니 이제 정치나 해볼까’하며 나선 이들에 밀려 청년 정치인들이 들러리를 서게 되는 우리의 현실과 비교된다.

짐작했겠지만 굳이 지난 이야기를 들추어내는 것은 지금 대한민국 정치 상황이 녹록하지 않아서다. 지난해 12월 갑작스러운 비상계엄 발동은 정치의 중요성을 모두에게 일깨우는 각성 효과를 냈다. 정치를 혐오하고 무관심으로 일관하던 이들까지 매일 정치 뉴스에 귀를 기울이게 만든다. 정치가 나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뼈저리게 체감한 것이다.

정치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붕괴 직전이다. 심리적 내전 수준이라 해도 무방할 일들이 공공연히 벌어진다. 이 위기가 지난 뒤 시민들이 여전히 정치에 무관심하게 되면 무능력하고 자질 없는 정치인이 그대로 득세할 것이다. 알맹이 없는 섣부른 정책이 난무할 게 뻔하다. 예산을 나눠 먹으며 불평등, 양극화, 수도권 집중화 현상 역시 더욱 가중될 것이다. 정치적 혐오와 무관심의 피해자는 결국 국민 자신일 수밖에 없다.

부산에서 첫 정치박람회가 열릴 때만 해도 북유럽의 어느 나라처럼 우리 정치인들도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하며 생활정치를 실현하고,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이 한자리에 모여 소통하며 미래를 논의하는 모습을 언젠가 볼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을 품었다.

한데 지금 우리는 모두가 알메달렌의 교훈과 정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다. 2020년 이후 코로나19 팬데믹을 지나며 거리두기를 하는 사이에 돈벌이만 생각하는 유튜브 등 SNS 플랫폼 알고리즘과 더 자극적인 콘텐츠로 경쟁하는 크리에이터들에 의해 더욱 강력한 정신적 지배를 당하게 됐다. 나의 생각에 오류는 없는지 끊임없이 토론하지도 않고 마땅한 근거나 검증 노력 없이 상대를 혐오하며 ‘도파민 중독’에 빠져 허우적대는 건 아닐까. 우리나라뿐 아니라 인류가 이렇듯 공고한 ‘소셜 딜레마’에 빠져들었다.

어떤 정치적 다름을 지녔든, 그들도 누군가의 부모이자 아들딸이다. 모두가 대한민국 국민이다. 백척간두에 선 민주주의의 근간을 살리는 길은 결국 직접 대면하고 소통하며 생활 속 정치를 제대로 실현하는 것이다.


박세익 기자 run@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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