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시선으로] 중립은 없다
김대현 동아대학교 젠더·어펙트연구소 공동연구원
언어 게임에서 찬반 구도를 나누고 그 사이 어디를 중립으로 일컫는 일은 쉽고 재밌다. 쉽고 재밌는 많은 일이 그렇듯이 그것은 정의와 별 상관이 없다. 가령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공산군이 개입했는가 아닌가를 논쟁 구도로 놓고 그중 어느 편도 들지 않는 것을 중립이라 칭하는 일이 그러하다. 그것은 내 엄마가 살아 계시는지 죽어 계시는지를 놓고 그 판단을 미루는 것을 중립이라 부르는 것과 같다. 그중 어느 한쪽은 확실하게 없었던 사실이지만, 중립을 둘러싼 언어 게임은 그것이 사실인지를 묻기보다 그 게임 자체의 재미에 빠지게 만든다.
실체적 진실이 거세된 언어 게임의 문제는, 모든 극단적인 주장에 그 나름의 명분을 쉽게 쥐어준다는 데 있다. 앞에서 보았듯이 찬반 구도 속 중립이 어느 한쪽의 주장을 어느새 의미있는 것처럼 만들기 때문이다. 가령 사람을 죽이는 것과 죽이지 않는 것 사이에 중립을 설정하면, 사람을 죽이는 것이 마치 논쟁 가능하고 유의미한 선택지가 된다. 여성을 강간하는 것과 강간하지 않는 것 사이에 중립을 설정하면, 여성을 강간하는 것이 한번쯤 논쟁해볼 법한 선택항이 된다.
그렇게 한번 말의 권리를 얻은 주장은 점점 반대쪽 주장과 평등한 가치를 갖는 것처럼 호도된다. 사람을 죽이는 것과 죽이지 않는 것이 등가의 가치일 수 없음에도, 언어 게임의 재미에 한번 말려들면 쉽게 그런 일들이 벌어진다. 그런 다음에는 사람을 죽이지 않아야 한다는 마땅한 주장에 하나둘 트집을 잡기 시작한다. 세상엔 죽어 마땅하거나, 강간당해도 싼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것이 한번 누군가에게 그럴싸하다고 여겨지면, 그 사람은 그 논쟁 구도가 적어도 무의미하지는 않다는 생각에 스스로 빠져든다.
현대 사회에서 극단적이고 비상식적인 주장이 쉽사리 성원권을 얻게 되는 과정이 이러하다. 이러한 사태를 막기 위해, 초·중·고등교육 현장에서는 보통 자유로이 논쟁할 주제와 가부를 분명하게 판단할 주제를 서로 구별하여 가르친다. 내 아빠가 살아 계시는지 죽어 계시는지를 논쟁하고 거기에 중립을 설정하는 것에 무슨 대단한 인문적 가치가 있다는 식으로 수업을 이끌지 않기 위함이다.
무엇이 일어난 사건이고 진실인지 자명한 상황에서 누군가가 외치는 중립 기어는, 자동차 기어를 중립에 놓는 것이 아니라 기어를 뽑은 차를 어디로든 내달리게끔 만드는 일이다. 그 때 해야 할 일은 기어를 중립에 두는 것이 아니라 핸들을 끝까지 놓지 않고 덜 위험한 방향으로 차를 트는 것이고, 잘못된 방향으로 내닫는 차에 브레이크 밟기를 멈추지 않는 것이다. 일어나지 않아도 될 일을 일어나지 않게 만드는 일에 중립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