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은의 문화 캔버스] 상징과 그림으로 전망해 보는 뱀의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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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이아크 김해미술관장

동서고금 통틀어 천의 얼굴 가진 동물
원시적 생명력, 지혜·치유의 상징처럼
긍정성 회복하는 을사년 한 해 됐으면

2025년은 뱀의 해다. 동서고금 뱀만큼 천의 얼굴을 가진 상징이 또 있을까, 뱀은 전 세계 신화, 전설, 종교, 예술, 삶 속에서 부정과 긍정의 상반된 다의적 상징들로 나타난다. 많은 동식물들이 여러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지만, 뱀처럼 양면적 의미를 나타내는 존재는 찾기 어렵다.

뱀은 독을 가지고 있어 악, 파괴, 죽음 등과 연관되는데, 특히 성서에서는 유혹, 타락, 원죄의 표상으로 등장한다. 구약성서 창세기에 따르면, 뱀은 아담과 이브를 유혹하여 선악과를 따먹게 했던 악과 교활함의 상징이다. 또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흉측하고 무시무시한 얼굴로 그것을 본 사람을 공포에 빠트려 돌로 만들어 버리는 능력을 가진 메두사의 머리카락은 다름 아닌 뱀이다.

다른 한편 뱀은 많은 알을 낳아 자손을 번식시키고 대지 가까이 살기 때문에 풍요와 다산, 생명의 힘, 창조 등을 나타낸다. 뱀은 수태와 연관된 남성적 생산 능력의 상징으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여신들과 임신한 여성의 상징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특히 주기적으로 허물을 벗으며 성장하는 반복적 탈피 과정의 경이로움 때문에 뱀은 변화와 갱신, 부활과 치유, 영적·육체적 재생, 불사영생과 같은 신비로운 상징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설화나 민화에서 뱀은 인간에게 약초가 있는 곳을 알려 주며 은혜를 갚는 덕 있는 동물로 묘사되기도 한다. 집에 있는 뱀은 복을 가져오며 뱀 가죽을 지니고 있으면 부를 얻는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 뱀은 수호신 이미지도 있다. 〈삼국유사〉에서 김수로왕의 보물을 훔치려는 도적을 물리친 것도 30척이나 되는 뱀이었다.

한국 근대 화단에 뱀 그림으로 일약 스타로 떠오른 이가 있다. 1951년 화폭을 뱀으로 가득 채운 ‘생태’라는 작품을 그린 27살 때의 천경자 화가다. 산수나 인물을 주로 그렸던 한국화 화단에 뱀이라는 소재는 특이하고도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특히 여성 화가가 뱀을 그렸다는 사실은 한층 더 큰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해방 이후 6·25 전쟁의 격동기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젊은 여성 화가가 그려 놓은 뱀 떼는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수십 마리 뱀들이 얽혀 꿈틀댄다. 투명하고 화사한 색채 때문일까, 이상하게도 바라보고 있으면 징그럽거나 무섭기보다 오히려 청명하고 순수하게 느껴진다. 뱀들을 과감하게 배치한 화면 구성력과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역동적이고 사실적인 묘사가 돋보인다. 그러한 치밀한 정확성은 광주역 앞 뱀 집에서 수십 마리 뱀을 유리 상자 속에 넣고 한 달간 직접 관찰하며 스케치 작업을 진행한 끝에 나온 것이다. 작가는 이 작품을 25일 만에 완성했는데 애초에 뱀은 33마리였으나 고통과 상처를 남기고 떠난 35살의 뱀띠 연인 생각이 나 둘을 더해 35마리가 되었다고 한다.

‘생태’는 또한 전쟁 피난지였던 부산과 인연이 깊다. 이 작품은 1952년 부산 칠성다방에서 열렸던 대한미협전에 출품되었지만 자극적이고 괴기스럽다는 이유로 전시 목록에서 제외되었다가 이후 부산 국제구락부 개인전에서 첫선을 보였다. 전시 개최 전부터 칠성다방 주방 한편에 놓여 있던 그림을 본 사람들 사이에 입소문이 퍼지면서 마침내 화단의 큰 주목을 받기에 이른다. 당시 이 그림을 보기 위해 밤 9시까지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천 작가는 이를 계기로 명성을 얻어 2년 후 홍익대 미술대학 동양화과 교수로 임명되었다.

뱀은 천경자의 작품 세계에서 중요한 모티프 중 하나다. 어쩌면 작가는 인생 고비에서 수호신처럼 그것을 그렸던 것 같기도 하다. 천경자 화가는 뱀을 그림으로써 처절한 삶의 현실에 대한 저항을 형상화하며 생명과 삶의 의지를 피력했다. 고통과 슬픔, 분노 등의 내면 감정을 표현한 뱀을 그림으로써 작가는 여동생의 죽음, 실패한 사랑, 경제적 어려움 등과 같은 삶의 역경을 넘어섰다.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던 날 꿈틀거리는 뱀이 주었던 강렬한 느낌, 그 원초적 생명력을 통해 작가는 현실로부터의 탈피를 꿈꾸었던 건 아닐까.

뱀은 자신의 죽음으로부터 성장하는 동물로서 현명함, 지혜를 갖춘 영물로 언급된다. 머리와 꼬리를 맞대고 이어지는 원 모양의 뱀은 오래전 신화 속에서 시작과 끝, 삶과 죽음이 하나로 연결되는 영원 회귀를 뜻하기도 한다. 생과 사의 근원적 비밀을 간직한 뱀이라는 소재는 천경자에게 상상력의 원천이었으며, 참혹한 현실의 고통을 정면으로 돌파할 수 있는 영감과 힘을 불어넣어 주었던 것이다.

뱀의 해인 2025년은 여러 가지 사회적인 진통과 시련 속에서 시작되었다. 올 한 해 시간이 갈수록 생명, 치유, 지혜와 같은 뱀의 긍정적인 상징들이 회복될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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