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데스크 칼럼] 기업의 미래를 팔아 주가를 올릴 순 없다
상법이 시행된 1963년 이후 ‘역대급’이라고 불리는 상법 개정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더불어민주당은 이르면 3일 국회 본회의에서 상법 개정안을 처리할 방침인데, 통과되면 윤석열 전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했던 일반 법안 중 국회 문턱을 넘는 1호 법안이 된다.
그만큼 이재명 대통령의 증시 부양 의지가 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대통령은 수도권에 집이 없는 사람들을 ‘벼락 거지’로 만드는 수도권 부동산 가격 폭등을 가라앉힐 대안으로 주식시장 활성화를 꼽고 있다. 여당도 ‘코스피 5000 시대’로 가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 상법 개정이라고 보고 법 개정에 속도를 내고 있다.
그동안 상법 개정안에 반대해 온 국민의힘도 1400만 명에 달하는 개인투자자 여론과 코스피 3000 회복에 따른 증시 활성화 기대감을 의식한 듯 전향적인 검토 입장으로 돌아섰다.
내용을 보면, 사실상 윤 전 대통령의 거부권 이전보다 더욱 강력해진 안으로 돌아왔다. 민주당은 지난 3월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현행 ‘회사’에서 ‘주주’로까지 확대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개정안을 냈으나 대통령 거부권 이후엔 감사 선출시 최대주주 의결권 3% 제한, 집중투표제도 의무화, 감사위원 분리선출 등을 추가했다. 개미투자자 입장에선 높은 배당금과 주가 상승을 이끌어 낸다는 데 반갑지 않은 이가 있을까.
그렇다고 해도, 상법 개정은 더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장하준 런던대 교수는 한국 주주 자본주의가 시동을 걸고 있는 것과 관련해 “기업의 미래를 팔아 지금의 주가를 올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비판했다. 상법 개정안의 핵심은 주주에 대한 충실의무인데, 주주 중심의 관점으로는 노동자나 소비자, 국가 경제는 중요하지 않고 기업에서 얼마나 많은 이익을 뽑아낼지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결국 경영진의 최우선 의무가 주주 이익이 된다면 다른 사회적 가치는 후순위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 해고가 이윤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면 그렇게 해야 하고, 연구개발비보다 주주 배당이 우선 된다면 그에 따라야 한다. 외국 투기 자본이 이사회를 장악해 경영권 개입에 나서거나 규제 회피를 위해 해외로 이전해도 막을 도리가 없다.
미국도 생산설비 해외 이전으로 결국 제조업 불모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제조업 이외 산업들은 아무리 고부가가치라고 해도 광범위한 고용을 창출하지 못한다. 지금 트럼프 미 대통령이 제조업을 다시 살리겠다며 관세를 무기로 ‘패악질’을 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미국의 경우 지난 30여 년간 주주의 회사 지배로 주식시장 고유 기능이라 할 수 있는, 투자금을 회사로 공급하는 기능이 상실되다시피 했다. 오히려 회사가 순수익보다 많은 돈을 배당과 자사주 매입에 사용하면서 회사 돈이 빠져나가고 있다. 〈금융과 회사의 본질〉의 저자 김종철 서강대 교수가 분석한 바에 따르면 미국 상장사들은 1971년부터 1981년까지 이윤의 50% 정도를 주주에게 환원했다. 그러나 1982년부터 최근까지는 평균적으로 이윤의 123%를 주주에게 내놓고 있다.
물론 이번 상법 개정은 기업이 자초한 측면도 있다. 대표적인 예가 태광산업이다. 태광산업은 자사주 전량(지분율 24.41%)을 바꿀 수 있는 3186억 원 규모의 교환사채(EB)를 발행하려다 사외이사의 반대에 부딪히는가 하면 금융감독원으로부터 정정 명령을 받았다. 하지만 강행 입장을 밝혔고, 자사주 소각 의무화 방침을 내세운 이재명 정부가 들어서자 자사주를 담보로 교환사채를 발행하는 꼼수를 썼다는 비판을 받는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도 무려 3조 6000억 원의 유상증자를 발표했다 소액주주 반발을 샀다. 지난해엔 두산그룹이 연간 수천억 원의 흑자를 내는 두산밥캣을 만년 적자 회사인 두산 로보틱스와 합병하려다 주주 반발에 무산됐다.
“장기 투자하래서 우량주를 샀더니, 새끼를 낳았는데 그 새끼는 내 것이 아니었다”는 이 대통령의 말도 그동안 주주들이 당한 피해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한국 증시는 지배주주 지배력이 강하다 보니 코리아 디스카운트에 발목 잡혀 있고, 소액주주들이 피해를 봐온 건 맞다. 하지만 머지 않아 기업 기능이 산업발전과 국가경쟁력 강화가 아닌 ‘주가 상승’에만 머물러 있는 건 아닌지 물어야 할지 모른다. 주주가 회사 주인으로 자리매김 하는 순간, 경영진, 노동자, 하청업체, 지역사회, 국가는 ‘외부인’으로 전락한다. 3일 상법 개정안이 통과된다면, 그 이후로는 주주 자본주의가 가져올 폐단을 바로잡을 수 있는 보완책들이 시급하게 마련돼야 한다. 주주 이익만을 위한 마구잡이식 소송이 남발되지 않으려면 배임죄와 처벌 조항들에도 안전 장치를 만들어야 한다. 숙의도 더 필요하다. 한국 자본주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뜯어 고치는 '큰 일'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2025-07-02 [17:54]
-
[데스크 칼럼] '부산'을 장바구니에 담게 하는 힘
부산의 티셔츠 브랜드가 더현대서울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SNS를 타고 퍼진 입소문 덕에 온라인 쇼핑몰에서도 MZ세대의 장바구니를 채우고 있다. 부산 동구 초량동 골목의 한 작은 빵집은 전국적인 ‘빵지 순례지’로 떠오르더니, 올봄에는 스타벅스 메뉴에까지 이름을 올렸다.
부산에서 탄생한 로컬 브랜드들이 대기업과는 전혀 다른 영역에서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 가고 있다. ‘지역’을 넘어 ‘취향’이라는 새로운 가치를 중심에 둔 이들은, 이제 전국에서 통하는 브랜드로 자리 잡고 있다.
부산 토종 브랜드 ‘유핑’은 2007년부터 17년간 티셔츠만을 전문 생산해 왔다. 이들이 만든 무지 티셔츠 한 아이템은 ‘더현대서울’ 팝업스토어에서 고객들이 ‘결제 대기 줄’을 길게 서게 만드는 인기를 과시했다. 더욱 눈길을 끄는 것은 이 팝업스토어가 백화점 바이어의 러브콜로 단 3주 만에 입점까지 성사된 이례적인 사례라는 점이다.
유핑의 성공 비결은 담백하게도 오직 ‘품질’에 있다. 유핑은 최근 서울공연예술고등학교와 협업해 K팝 아이돌과의 컬래버레이션 의류를 선보이며, K팝 팬덤을 적극 활용해 브랜드 인지도를 넓히고 있다. BTS 정국, 레드벨벳 슬기, 트와이스 나연 등 K팝 스타들이 배출된 서울공연예술고는 국내외 팬들이 ‘성지’처럼 찾는 곳으로, 유핑은 아이돌과의 협업을 통해 글로벌 무대도 노리고 있다. 유핑은 ‘탁월한 품질이라면, 로컬 브랜드도 전국 시장에서 충분히 경쟁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부산 동구 초량동 골목의 작은 빵집 ‘초량온당’은 SNS를 타고 ‘빵지순례 성지’가 됐다. 이 빵집은 메뉴 이름부터 진열 방식, 테이크아웃 패키지까지 철저히 ‘공유’를 전제한 설계를 택했다. 현장에서 구매하고, 인증샷을 찍고, 후기를 남기고, 친구를 소환하는 일련의 흐름이 매출로 이어진다. 초량온당은 스타벅스와 협업해 올봄 시즌 프로모션 푸드로 ‘초량온당 더블 앙 고구마 맘모롱’을 내놓으며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다. 이 작은 동네 빵집은 이제 전국의 디저트 마니아들에게도 익숙한 이름이 됐다. 빵은 더 이상 배를 채우기 위한 식품이 아니다. 취향의 상징, 공유할 경험, 개인 정체성을 보여주는 콘텐츠가 됐다.
부산 막걸리 브랜드 ‘꿀꺽하우스’는 수영구 광안리에서 전통주 양조장 겸 펍을 운영하고 있다. 부산 사투리와 광안리 감성을 담은 네이밍과 감각적 디자인은 젊은 소비자들에게 ‘부산식 취향’으로 인식됐다. 최근 서울역에서 열린 팝업스토어에서는 ‘산, 초’ 막걸리가 하루 만에 준비 수량이 모두 소진될 정도로 큰 관심을 받았다. 부산 매장을 방문했던 경험이 있는 소비자들이 방문하거나 SNS로 브랜드를 접한 소비자들이 적극적으로 구매한 것으로 나타났다.
MZ세대는 단순한 상품보다 ‘스토리’와 ‘공감’을 산다. 동네에서 시작된 브랜드가 SNS를 통해 전국과 연결되면, 자발적인 전도사들이 등장해 이들을 퍼뜨린다. 이들은 유명 연예인의 광고보다, SNS에 올라온 진솔한 후기 한 줄에 지갑을 연다. 이런 흐름은 대형 유통사들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백화점과 대형마트들이 지역 브랜드와 협업하는 ‘로컬존’을 적극 확대하고 있다. 유통 거인들이 작은 로컬 브랜드의 힘을 빌리고 있는 셈이다.
부산은 이러한 흐름에서 로컬 브랜드들이 전국으로 뻗어 나갈 가능성이 크다. ‘바다 도시’ ‘미식 도시’ ‘골목 도시’ ‘피란수도’ ‘영화 도시’ ‘관광 도시’ 등 다양한 지역 정체성은 지역 기반 브랜드가 자라기에 훌륭한 뿌리다. 또한 브랜드가 ‘부산 출신’이라는 것 자체가 콘텐츠가 된다. MZ세대는 ‘어디서 왔는가’ 또한 중요하게 여기는 소비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로컬 브랜드가 홀로 성장하기엔 현실이 녹록지 않은 점은 사실이다. 전국 단위의 물류창고나 배송 시스템을 직접 갖추기 어렵고, 대형 유통망은 납품, 반품 대응, 재고 관리 등 기준이 까다롭기 때문이다. 제품은 뛰어나지만, 브랜드 네이밍·콘텐츠·SNS 운영 등에서 스토리텔링이 미흡하기도 하다. 지역 물류 공동망이나 마케팅 지원 등 공공 프로그램의 역할이 필요하다.
유통은 흐름이다. 그 흐름이 중앙에서 지역으로, 대규모에서 소규모로 옮겨가고 있다. 우리는 지금, ‘개인의 취향’이 트렌드를 바꾸는 시점에 서 있다. 부산의 작지만 강한 로컬 브랜드들이 만들어가는 새로운 소비 풍경은, 지역 경제뿐 아니라 전국에도 신선한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이제는 ‘부산 출신’이라는 수식어가 하나의 신뢰가 되고, 하나의 취향이 되고 있다. 그 성공담들이 더 많아지길 기대한다.
김동주 경제부 차장 nicedj@busan.com
2025-06-30 [17:56]
-
[데스크 칼럼] 미지의 부산
드라마 ‘미지의 서울’에서 미지는 두손리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젊은 여성이다. 혼자된 엄마 옆에서 요양병원에 있는 할머니를 간병하고 딸기밭 일용직 일자리를 구하려고 경력 한 줄 없는 텅빈 이력서를 낸다. 그러다 모종의 사정으로 서울에서 공사를 다니는 쌍둥이 미래와 당분간 인생을 바꾸기로 한다.
드라마에서 서울은 사람에 대한 믿음을 상처로 돌려주고 내 잘못이 아닌 일로 무릎을 꺾게 만드는 차가운 도시다. 동시에 새로운 희망과 사랑을 만나는 낭만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반면 두손리는 이웃간의 정이 남아있는 시골 마을이지만,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려면 익숙한 가족과 돌봄 부담을 뒤로 하고 떠나야 하는 고향으로 묘사된다.
가상의 마을 두손리는 유추해보자면 십중팔구 소멸위험 지역일 것이다. 소멸위험지수는 20~39세 여성 인구를 65세 이상 인구로 나눈 값으로 측정한다. 0.5 미만이면 소멸위험 진입, 0.2 미만이면 소멸고위험 단계로 분류한다. 지난해 주민등록통계를 기준으로 부산이 광역시 중 처음으로 소멸위험 단계에 진입했다고 해서 충격을 안긴 바로 그 지수다.
부산은 서울 다음 가는 대도시라고 하지만 청년 인구 유출과 급격한 고령화라는 측면에서 보면 오히려 두손리와 더 비슷할 수 있다. 기초지자체 단위로 봐도 부산은 16개 구·군 가운데 11개가 소멸위험 지역이다. 한국고용정보원의 분석을 보면 소멸위험도가 높을수록 인구 유출도 많은데, 특히 소멸위험지수가 0.4 미만인 광역시 구에서는 10년간 20~39세 인구 순이동률이 24.6%나 감소했다.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일자리가 없으니 청년이 떠나고, 청년이 떠난 도시는 활력을 잃는다. 박형준 부산시장이 민선 8기 출범 3주년을 전후한 주간을 경제 행보로 채운 이유도 마찬가지다. 대우제약 공장 증설 업무협약에서 시작해 청년이 일하고 싶은 기업을 발굴하는 ‘청끌기업’ 발대식으로 끝나는 주간 일정에서는 지방선거를 1년 앞두고 시정 성과와 지향성을 부각하려는 의지가 보인다.
시장이 최근 전 부서에 효과적인 홍보 전략을 주문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임기 동안 여러 유의미한 성과를 냈는데도 시민들에게 충분히 전달되지 않아서 정당한 평가를 못 받는 측면이 있다는 판단이 배경이다. ‘영향력이 미미한 레거시미디어’를 통한 보도자료 배포에 그치지 말고 소셜미디어, 인플루언서를 활용하는 방안도 논의하라는 구체적인 지시도 나왔다.
시정을 제대로 알리는 홍보는 물론 중요하고, 미디어 환경의 변화에 따라 홍보 방식을 다변화할 필요도 있다. 다양한 분야의 성과가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억울함도 일견 이해가 된다. 단적으로 재선 이후 부산시가 투자를 유치한 금액이 11조 원을 돌파했고, 취임 이전과 비교하면 부산의 투자 유치가 22배 이상 증가했다는 분석을 접하면 부산에 활력이 돌고 있다는 기대가 생긴다.
문제는 간극이다. 11조 원은 당장 손에 잡히지 않고, 청년들은 부산에서 일도 사랑도 찾기 힘들다. 지난해 2분기 부산 청년층(15~29세) 고용률이 46.6%로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고 하는데, 지난 10년간 같은 연령대 인구 비율이 전국 17개 시도 중에서 가장 크게 줄었다는 뉴스도 있었다. 2023년 부산 청년(18~39세) 통계를 보면 10년 전에 비해 혼인율도 40% 가까이 떨어졌다.
2021년 4월 보궐선거로 부산시장에 취임한 지 4년 남짓, 주력 과제의 진전에도 아쉬움이 있다. 재선 임기 전반부를 올인한 2030월드엑스포 유치는 실패로 돌아갔고, 다음 도시 비전으로 작심하고 추진한 부산 글로벌 허브도시 특별법은 국회 문턱을 못 넘더니 예상 밖의 계엄과 대통령 탄핵으로 동력을 잃었다. 조기 대선으로 한국산업은행 본사 부산 이전도 더 난망한 상황이 됐다.
‘지방소멸’과 ‘글로벌 허브도시’ 사이. 민선 8기 남은 임기 1년의 성패는 이 간극을 어떻게 좁혀나갈지가 관건이 될 것이다. 시장이 늘 강조한다는 ‘행정은 축적’이라는 말대로, 지난 4년간 시정의 방향성이 맞고 진정성이 충분했다면 이제는 시민들이 체감할 수 있는 변화를 추수해서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중단된 과제들도 중앙정부와 협력하고 필요하면 설득해서 부산에 도움이 되도록 되살려야 한다.
‘미지의 서울’은 이제 2회만 남겨두고 있다. 미지와 미래가 마지막에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장소에 남게 될지 모르겠지만, 자신의 쓸모를 고민하는 미지에게 남자 주인공이 해준 “네가 있는 곳이 네 자리”라는 대사가 청년들에게 위로가 된다는 건 알겠다. 부산에 살고 싶은 청년들이 부산을 떠나지 않고도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모든 미지들을 위한 시정을 기대한다.
최혜규 사회부 차장 iwill@busan.com
2025-06-25 [18:33]
-
[데스크 칼럼] 난 그런 노인이 좋더라
노화는 눈에서부터 시작됐다. 노안이 와서 침침하고 잘 안 보인다. 요즘 회사 출근은 내가 일등이다. 타고난 근면 성실 때문은 아니고, 아침에 잠이 너무 일찍 깨서다. 집에서 빈둥대기보다 차라리 지하철 덜 붐비는 시간에 조기 출근 중이다.
언제부터인가 오른팔이 아프고 들어올리기도 힘이 들어 병원에 갔더니 오십견이라고 했다. 아파트 놀이터에서 로프 당기기를 열심히 하는 중이다. 오십견 예방과 재활에 효과가 있다는데 좀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몇 년 전 우체국에 갔다가 날 보고 ‘아버님’이라고 불러 화를 내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오는 나이를 막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정년퇴직이 머지않은 이제는 차라리 어떻게 나이 들어갈 것인가, 장차 어떤 노인이 될 것인지 고민하는 편이 나아 보인다.
‘나이가 들수록 입은 닫고 지갑을 열어라’라는 유대인 속담은 동서고금의 진리다. 지하철 같은 대중교통에서 큰 소리로 떠들거나 정치 관련 유튜브를 크게 틀어 놓는 노인은 되고 싶지 않다. 가능하다면 지하철에서 보청기가 아니라 이어폰을 귀에 꽂고, 정치 유튜브 대신 음악을 듣는 교양 있는 노인이 되고 싶다. 한국의 노인 빈곤율은 38.2%로 OECD 평균보다 훨씬 높다. 노인이 되어서도 밥값 정도는 서로 내겠다고 경쟁하는 아름다운 사회가 되면 좋겠다.
기자 직업의 가장 큰 장점은 많은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다. 다가올 노인 생활에 롤모델로 삼고 싶은 두 분이 떠오른다. 첫 번째는 90세의 나이에도 현역으로 뛰고 있는 〈실버넷뉴스〉 방송보도부 이성용 기자다. 조선총독부가 신사참배를 강요하던 1935년에 태어난 그는 정년퇴직 후에야 컴퓨터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 뒤 영상편집지도사, 드론항공지도사 자격증 등을 차곡차곡 따서 지금은 노인복지관 컴퓨터 강사로도 활동하며, 틈틈이 영화도 찍고 있다. 장수의 상징 거북이처럼 느려도 꾸준하게 노력하면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또 한 분은 역시 부산에 사는 77세의 ‘할매 에세이스트’ 이옥선 작가다. 그가 지난해 생애 처음으로 출간한 책 〈즐거운 어른〉은 요즘 같은 시대에 19쇄를 찍으며 4만 5000부가 넘게 판매됐다. 예스24는 2024 올해의 책, 알라딘은 2024 올해의 신인상으로 선정했다. 세상에는 76세에 신인상을 타는 사람도 있다. 그가 지난 1월 북토크를 열었을 때 한 여성 독자가 “시어머니와 나이가 같은데 저의 시어머니였으면 좋겠다. 혹시 언니나 누나라도 불러도 괜찮겠느냐”라고 말해 환호성이 터졌던 기억이 난다. 이 책은 이미 대만에 진출했고 일본에도 판권이 팔려 곧 나올 예정이라니, K-컬처의 다음 주자는 K-할매가 아닌가 싶다.
새로 찍은 책의 뒤표지에는 그의 딸 김하나 작가가 쓴 추천 글이 다음과 같이 붙어 있었다. “부모가 자식의 성장을 지켜보는 기쁨에 대한 이야기는 많다. 한데 자식이 부모의 성숙을 지켜보는 기쁨도 못지않게 크다. 우리 엄마가 마침내 이런 할머니가 되었다. 자식으로서 무척 자랑스럽다.” 자식으로부터 이런 평가를 들었다면 이 세상 누구보다 성공한 삶이라고 생각된다.
건망증 이즈 뷰티풀! 슬기로운 노인 생활에 관심을 가지다 아카세가와 겐페이가 쓴 〈노인력〉이란 책을 읽고 무릎을 쳤다. 노인력이 하나의 능력이라면 나는 걸음마 수준이고, 부산은 노인력 만렙의 세계적인 도시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나이 들어 단어가 잘 생각나지 않는 상황을 ‘노인력이 생겼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세월에 저항하는 대신 “이것은 약해지는 게 아니라 힘의 변화다”라고 간주한다니 참으로 지혜롭다. 저자는 나이를 먹어 건망증이 심해지는 일이 미지의 세계에 발을 들이는 듯해 흥분된다고 했다. 모든 게 생각하기 나름이다.
요즘 사람들은 신체의 노화를 늦추는 ‘저속노화’에 관심을 쏟고 있지만 노화 자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줄도 알아야겠다. 〈노인력〉은 유쾌하게 늙어가는 방법을 알려주고, 정신의 저속노화를 실현하고 있어서 좋았다. 돌이켜보면 청소년기에는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공부했고, 청년기에는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해 공부했다. 중년의 나이는 좋은 노인, 아니 더 좋은 인간이 되기 위한 공부를 하기에 딱 좋은 때인 것 같다. 누구나 노인은 처음이 아니던가.
가수 노영심이 불러 크게 인기를 끌었던 노래 ‘희망 사항’의 가사를 바꿔 중얼거려 본다.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노인, 술을 적게 먹고 배도 안 나온 노인, 내 얘기가 재미없어도 웃어주는 노인, 난 그런 노인이 좋더라.’ 꿈꾸던 노인이 된 내 모습을 그려본다. ‘노인과 바다’라던 부산이 노인력을 선도하는 도시로 거듭났으면 좋겠다.
2025-06-23 [18:07]
-
[데스크 칼럼] 부산을 위한 실리는?
지난 칼럼에서 기자는 부산이 지금까지 국가로부터 큰 실익을 챙기지 못했다고 말했다. 해양수산부와 HMM 본사 부산 이전, 해사법원 설립, 동남권투자은행 신설, 가덕도 신공항 적기 개항을 통해 부울경을 명실상부한 해양수도로 만들겠다는 공약을 걸고 이재명 대통령은 당선됐다. 실용주의 노선을 천명한 그와 마찬가지로, 이제 부산은 어떤 실익을 챙겨야 할까.
해수부와 HMM 부산 이전만 우선 살펴보자. 해수부 공무원들과 HMM 육상 노조의 반발을 잠재우는 것이 숙제다.
이들의 반대 논리를 보면, 해수부는 인접 부처·기관과의 정책·예산 협의에 부산이라는 물리적 거리가 장애 요인이 될 수 있다고 하고, HMM은 화주·선박금융 영업력 저하 우려가 크다고 한다. 직원과 가족들이 생활 근거지를 갑자기 옮겨야 하는 데 대한 반발은 공통적이다.
꼭 20년 전인 2005년 6월 24일. 정부는 공공기관 지방이전계획을 발표했다. 그해 제정된 국가균형발전특별법에 따른 조치였다. 노무현 대통령 때 시작된 공공기관 지방 이전의 당위를 지금 더 설명할 필요는 없다. 국가의 미래를 내다본 그의 혜안과 뚝심이 20년 세월이 지나서도 시행되지만, 한편으로는 수도권과 비수도권 사이 장벽은 오히려 높아진 것 같아 허탈하기도 하다. 그럼에도 그동안 부족했던 점을 보완하고, 이전 기관과 종사자들이 지역에 안착할 대책이 필요할 뿐이다. 금융·해양·영화 3대 분야 공공기관이 이전한 부산에선 다른 지역에 비해 그나마 낫다고는 해도 아직 나홀로 이주 비율이 높다. ‘공무원도 국민’이라는 관점에서 정주 여건 개선은 끊임없이 추구해야 할 과제다.
우리가 그동안 부족했던 점이 무엇일까? 이전한 공공기관들을 지역사회와 연결하는 데 소홀했다는 점을 지적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보자. 영도구 동삼동에 자리한 글로벌 수준의 해양 연구기관들을 지역 해양산업계와 연결하는 데 부산시와 지역사회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의문이다. 부산에 유치했다고 실적 발표 잔치만 하고 끝낼 일이 아니라, 유사 이전 기관들을 연결하고 그 연합체와 지역 산·학·연을 엮어내 명실상부한 클러스터를 만들어 냈다면 어땠을까. 자본은 차치하고, 우선 인력 면에서라도, 다양한 경험을 가진 우수한 지역 인재를 양성해내는 것만큼은 성공할 수 있지 않았을까. 지금처럼 산업은행, 해수부에 매달릴 필요도 없이, 부산에 있는 금융·해양·영화 관련 기업들의 역량이 크게 성장하지 않았을까. 좀 더 비약하자면 수도권 관련 분야 기업들이 스스로 우수한 인재가 넘치는 부산으로 본거지를 옮기려 하지 않았을까.
압축성장에 익숙한 우리는 공공기관 지방 이전 20년인데 왜 아직 성과가 없냐고 이렇게 닥달이다. 이제부터라도 늦지 않다. 이전 기관으로서도 지역 발전에 실질적으로 기여한다는 자부심이 들도록, 그래서 부산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게끔 부산시와 지역사회가 치밀한 전략을 세우고 차근차근 실천해 나가면 된다.
그 전략의 첫걸음은 해수부가 기존의 ‘국가예산 1% 꼬마 부처’ 그대로 오게 할 것이 아니라, 글로벌 해양패권 경쟁 흐름에 맞게 해운 분야와 매우 밀접하게 연관된 조선과 국제 물류 산업 만큼은 더 관장하도록 하는 일이다. 서울에서 세종으로, 세종에서 부산으로 두 번째 이삿짐을 싸야 하는 해수부에게 ‘이번 기회에 부처 업무 영역이 넓어지고 위상이 강화된다’는 비전을 보여줘야 한다. 외부 기관·부처와의 상시 협의가 필수적인 해수부와 HMM은 부산에 이전하더라도 불가피하게 서울·세종 사무소에 일부 인력을 남겨둘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 통째로 오지 않느냐’고 성마르게 굴 일은 아니다.
해수부 부산 이전을 계기로 해양 클러스터 구축이 충실히 진행돼 5~10년 내 인력과 산업 분야에서의 성과가 나온다면, 마침 그 무렵 북극항로 시대와 마주하게 된다. 지방이 아무리 외쳐도 불가능하던 거대 자본의 부울경 이전, 해외 투자의 부울경 집중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 HMM이 만나야 할 해양금융기관이 여의도가 아니라 문현금융단지에 밀집하면, 서울사무소를 남겨둘 이유도 없어질 것이다.
허황돼 보이지만 ‘남방항로의 요충’ 싱가포르 성공 사례를 보면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다만, 지금 우리가 어떤 전략 아래 실천을 충실히 해 나가느냐에 달렸다. 물론 북극항로 시대가 온다고 부산항이 저절로 거점항이 되는 일은 결코 없다. 인프라 구축 같은 내부 준비는 기본이고, 세계 최대 화주인 중국, 유럽행 북극항로 절반 이상을 영해로 보유한 러시아, 아직은 최대 패권국인 미국 등과의 협력이 필수다. 부산항이 한국의 성장을 견인할 미래를 위한 5년, 부산에 오는 해수부에게 30년 역사상 가장 중요한 시간이 될 것이다.
이호진 경제부 선임기자 jiny@busan.com
2025-06-18 [18:04]
-
[데스크 칼럼] 벌써 뜨거워진 부산시장 선거 관전 포인트
이재명 대통령이 1년 앞으로 다가온 지방선거, 정확히는 부산시장 선거에 각별한 관심을 가진 건 분명해 보인다. 첫 국무회의 때부터 ‘해양수산부 부산 이전’ 공약을 콕 찍어 “신속 추진”을 지시했고, 인수위원장 격인 국정기획위원장은 “해수부 이전은 워낙 강력한 공약인 만큼 ‘이례적으로’ 국정과제에 들어간다”고 그 의미를 한층 띄웠다. 대선 당시 이 대통령이 직접 발표한 부산 공약은 보통 지역 숙원사업 위주인 타 지역 공약과는 구성이 확연히 달랐다. ‘깜짝 선물’ 같은 ‘해양수도 패키지 공약’에 지역 정가에서는 내년 지선 공략의 신호탄이라는 반응이 나왔다. 이런 분석에 쐐기를 박듯, 이 대통령은 지난 7일 더불어민주당 인사들과 저녁을 먹으며 “내년 부산 선거 박 터지겠네요”라고 넌지시 말하기도 했다. 일거수 일투족이 뉴스가 되는 취임 초 대통령의 이런 행보를 우연으로 보긴 어렵다. 오히려 이 대통령 스스로 부산을 눈여겨보고 있다는 시그널을 분명하게 주고 싶어하는 것 같다.
이재명 정부 임기 초반 국정운영 성과를 인정받는 가장 명확한 잣대는 지방선거 승리이고, PK(부산·울산·경남) 결과는 그 기준점이 될 수 있다. 특히 PK 지선 승리는 민주당 전국정당화의 최대 성과인 동시에 이 대통령 개인으로서도 ‘헬기런’ 등으로 쌓인 지역 내 비토 정서를 일거에 뒤집는 정치적 설욕의 의미도 가질 테다. 부산시장 선거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지게 됐다.
임기 1년을 갓 지난 막강한 대통령이 지선을 염두에 두고 정책과 예산을 쏟아붓는다면 여당 후보에게 상당한 힘이 실릴 것은 자명하다. 물론 지역으로서도 실리적인 관점에서 이런 움직임을 환영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다만 무턱대고 좋아만 하기엔 그 이면의 냉엄한 현실을 간과하기 어렵다.
해수부 이전은 전임 정부 공약이자 지역 숙원인 ‘산업은행 이전’의 대체재다. 이 대통령이 대선 기간 부산에서 해수부 이전을 띄우면서 산은 이전은 ‘불가’라고 분명하게 밝힌 데서도 그 성격이 드러난다. 민간기업인 HMM을 이전하고, 동남권투자은행까지 설립하려는 마당에 산은은 더 이상 재론 말자는 게 여권의 솔직한 속내다. 시민 160만 명의 서명에도 민주당의 ‘태업’으로 멈춰선 글로벌허브도시특별법도 마찬가지 신세다.
그런데 짚어봐야 할 건 현 여권이 산은 이전을 반대한 이유 대부분이 해수부에도 적용된다는 점이다. 해수부 역시 이전에 찬성하는 직원들은 극소수이며, 타 기관과의 연계성 등 여러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당연한 반응이라고 생각한다. 삶의 터전이 한 순간에 뒤바뀌는 충격을 쉽사리 수용하지 못하는 건 국책금융기관 종사자든, 정부 부처 공무원이든 마찬가지다. 결국 산은과 해수부의 운명은 기관의 역할이나 지위가 아니라 ‘소수 여당’ 윤석열 정부 공약이냐, ‘다수 여당’ 이재명 정부 공약이냐 그 차이에 갈린 셈이다. 더 세밀하게 들어가면 해당 기관의 이전을 강력 반대하는 최측근이 대통령 주변에 있느냐 없느냐도 무시할 수 없는 배경이다. 누구 얘기인지 부산시민이라면 익히 아는 바다. 정치적 유불리를 둘러싼 수 싸움이 국가적 자산의 재배치를 좌우할 수 있다는 사실은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그렇더라도 해수부 이전은 부산으로선 분명한 기회이며, 남은 1년 동안 단지 선거용 카드가 아닌 ‘해양수도’로의 도약을 위한 실질적인 발판이 될 수 있도록 견인해야 하는 건 지역의 당면한 숙제다. 얼마 전 해수부 직원은 익명 게시판인 ‘블라인드’에 올린 글에서 “3~4년 시행착오 뒤 부산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을 최대한 찾을 것”이라면서도 “진짜 걱정은 5년 뒤”라고 토로했다. 정부의 역점 사업인 북극항로 개척이 현재의 외교적 여건 상 성과 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그 다음 정권에서 해수부 재배치 문제가 다시 부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우려를 불식하기 위해 현 정부는 부산 시대를 맞는 해수부의 권한과 기능의 실질화에 분명한 의지를 보여야 할 것이다.
3전 도전이 유력한 박형준 시정에 대한 평가도 내년 지선의 향배를 가를 요소다. 대선 이후 지역 여권은 ‘박 시장이 그 동안 한 게 뭐 있느냐’며 본격적인 공세에 나설 분위기다. 부산월드엑스포 유치 실패, 공기 연장이 불가피해진 가덕신공항 등 굵직한 현안만 보면 부정적인 면이 두드러져 보이는 게 사실이다. 반면 최고 수준의 투자 유치 실적, 2019년 대비 절반까지 내려간 청년 유출율 등 각종 지표에서 확인되는 도시의 변화상 역시 시민들의 평가표에 함께 들어가야 정확한 판단이 가능할 테다. 마침 박 시장도 시정에 대한 오해를 불식하기 위해 대시민 직접 설명에 나선다는 얘기가 들린다.
이래저래 내년 부산시장 선거의 판이 커지게 됐다. 아무쪼록 여야 간 치열한 논쟁을 통해 소멸 위기에 직면한 지역의 미래 비전과 리더십을 정립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전창훈 서울정치팀장 jch@busan.com
2025-06-16 [18:14]
-
[데스크 칼럼] 정의선 회장의 '파격 행보'
수년 전 현대차그룹 한 임원이 자식 결혼을 앞두고 인사 대상이 돼 물러나야 할 상황이 됐다. 당시 그룹 경영을 총괄하던 정의선 수석부회장은 이 같은 소식을 듣고 인사를 결혼식 이후로 미뤘다.
이런 정 회장이지만 노조의 파업 사태나 시위에 대해선 강경한 모습이다. 올 초 실적부진 속에 계속된 현대제철 노조의 임금인상 요구와 부분파업 진행에 결국 공장폐쇄를 결정했다. 로봇과 자동차 부품 회사인 현대위아 하청업체 비정규직 노조의 정규직 요구 시위에 대해서도 경남 창원 본사의 ‘타 지역 이전’ 카드로 대응했다. 1년간 계속된 집회와 시위로 회사 영업에까지 막대한 지장을 초래했다는 판단에서다.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현대제철은 포스코홀딩스와 손잡고 8조 원 이상을 투자해 미국 루이지애나주에 전기로 제철소를 짓기로 합의했다. 이렇게 될 경우 향후 국내 생산 물량 감소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사실 포스코와는 오랜 기간 앙숙 사이였지만 과감하게 손을 잡았다. 과거 정 회장의 부친 정몽구 명예회장이 일관제철소를 세우는 과정에서 이를 막으려는 포스코와 갈등을 빚었고, 일관제철소 완성 후에는 서로 거래까지 끊었다.
지난해에는 창사 이래 최초로 현대차 최고경영자(CEO)에 외국인 호세 무뇨스 사장을 선임한 데 이어, 싱크탱크 수장에는 한국계 미국인 성김 전 주한미국대사를 앉혔다. 무뇨스 사장의 경우 주요 회의를 영어로 진행하면서 회사 내에선 “이제야 글로벌 기업이 됐다”는 얘기가 나왔다.
2018년 정몽구 회장을 대신해 수석부회장으로 경영 최일선에 오른 뒤 지금까지 보여주고 있는 정 회장의 파격적인 행보들이다.
정 회장은 미래 현대차그룹의 밑그림도 이미 그려놓았다. 미국의 로봇 스타트업 보스턴 다이내믹스 인수와 자율주행 기업 42닷 인수, UAM(도심항공모빌리티) 등에 대한 과감한 투자를 진행하고 있다. 자동차 회사가 아닌 모빌리티 회사로의 변화다. 정 회장은 이미 2019년 현대차 서울 양재본사에서 가진 타운홀미팅에서 그룹의 향후 사업 비중을 자동차 50%, UAM 30%, 로보틱스 20%로 꾸려갈 것이라는 구상을 밝히기도 했다.
2020년 그룹 수장에 오른 정 회장은 취임 2년 만에 그룹을 글로벌 ‘톱3’ 완성차 업체로 끌어올렸다. 일본 토요타그룹과 독일 폭스바겐그룹 다음이다. 현대차와 기아의 2023년과 지난해 2년 연속 역대 최대 영업이익 달성도 이끌어냈다.
정 회장은 지난해 신년사에서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한결같고 끊임없는 변화’를 통해 꾸준한 발전을 추구해야 한다”고 독려했다. 글로벌 자동차 톱3에 머물지 않고 모빌리티 분야를 선도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인 것이다.
전기차 분야 수요 확대에 대비하기 위해 현대차그룹은 지난해 하반기부터 미국 조지아주 전기차 전용공장(HMGMA)을 시작으로 기아 오토랜드 화성 전기차 전용공장, 현대차 울산 전기차 전용공장을 차례로 가동키로 했다.
정 회장은 이를 기반으로 2030년까지 글로벌 시장에서 연간 전기차 364만 대를 생산해 글로벌 전기차 판매 톱3에 오르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정 회장은 전기차를 기반으로 한 미래 모빌리티 구상을 미래항공모빌리티(AAM), 로보틱스, 자율주행, SDV(소프트웨어 중심 자동차) 등으로 구체화해 나가고 있다. 글로벌 자동차 업체로서 미래 시장에 대비하는 수준은 전기차 업체로 우주선을 띄우는 테슬라 못지 않다.
과제도 적지않다. 현대차는 수년 동안 전쟁, 판매 감소 등으로 어려움을 겪어 온 러시아 공장과 중국의 충칭 공장을 2023년 매각했다. 앞서 2021년에도 베이징 1공장을 팔았고, 창저우 공장도 매각을 추진 중이다. 미국시장에선 성장하고 있지만 러시아와 중국이라는 큰 시장에서 입지가 갈수록 쪼그라들고 있는 것이다. 이들 시장의 경우 언제 재진출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현대차그룹이 대규모 투자를 한 전기차 분야도 전기차 캐즘(일시적 수요정체) 등으로 시장이 쉽게 회복되지 않고 있다.
정 회장은 올 초 글로벌 자동차 시장 침체와 미국의 투자 압박이 있는 상황에서 신년사를 통해 현재의 위기를 ‘퍼펙트 스톰’(다발적 악재에 따른 경제적 위기)으로 간주하고 “면밀한 준비를 통해 위기를 이겨내자”고 강조했다.
정 회장의 이 같은 행보와 성과에 대해 재계 한 관계자는 “10대그룹 오너들 가운데 미래 시장에 가장 잘 대응하고 있는 인물”이라고 추켜세웠다.
2025-06-11 [18:08]
-
[데스크 칼럼] 야구팬과 부산 시민이 만드는 북항 야구장
야구팬이라면, 특히 부산의 야구팬이라면 참 야구 볼 맛 나는 시절이다. 부산을 연고지로 하는 롯데 자이언츠가 정규 시즌에서 초반 상승세를 중반까지 이어갈 기세다. 미국 메이저리그로 눈을 돌리면,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이정후 선수와 LA 다저스 김혜성 선수의 활약이 눈부시다.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BC)이나 프리미어12 같은 야구 국제 대회에서 KBO 소속 선수가 주축으로 구성된 국가대표팀이 대회 초기 호성적과 달리 최근 몇 개 대회에서 조기 탈락하거나 부진한 성적표를 받아 들면서 야구와 절연한 팬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롯데 자이언츠의 돌풍과 한국인 메이저리거들의 활약은 이들을 야구장이나 TV 앞으로 다시 불러 모으고 있다.
메이저리그를 즐겨보는 부산의 야구팬이라면 이정후 선수가 뛰고 있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홈구장 ‘오라클 파크’가 낯설지 않을 듯하다. 기자 역시 오라클 파크를 보며 ‘부산에도 저런 야구장이 있었으면’ 하는 행복한 상상을 해본 적이 많다. 오라클 파크는 아름다운 바다 풍광이 배경이 되는 입지 덕에 수많은 메이저리그 구장 중에 가장 아름다운 구장으로 손꼽힌다. 우측 외야 바깥쪽은 바다로 이어지는데, 타자가 타구를 장외 바다인 ‘맥코비 만’(미션 만)에 떨어뜨리는 것을 일컫는 ‘스플래시 히트’는 바다와 접한 오라클 파크의 매력을 완성하는 핵심 포인트다. 바다 야구장답게 오라클 파크 좌측 담당 뒤엔 요트 계류장이 있다. 많은 야구팬은 요트나 보트, 카약을 타고 스플래시 히트 야구공을 줍기 위해 바다에 뛰어들기도 하고, 뜰채로 바다에 떠 있는 공을 떠 올리기도 한다. 일부 팬은 수륙 양용 보트를 타고 등장하거나, 요트 위에 헐크와 스파이더맨 등 이색 복장을 하고 나타나는 등 바다 야구장에서만 볼 수 있는 진풍경과 묘미는 하나하나 열거하려면 끝이 없다.
타구 방향과 반대로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오라클 파크가 바다 야구장으로서 매력을 돋보이게 해주는 요소다. 역풍은 스플래시 히트의 매력을 배가시키는 오라클 파트의 개성으로 자리 잡았고, 바닷가에는 야구장이 적합하지 않다는 우려도 떨쳐냈다.
최근 부산에도 오라클 파크와 같은 바다 야구장 건립이 현실화될 수 있다는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북항 재개발 사업의 핵심 부지인 랜드마크 부지 일대가 실질적인 사업화 단계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데다, 사직야구장 재건축안이 사업비 확보 차질 등으로 난망한 상태에 빠져 있는 현실과 오버랩되면서다. 여기에다 부산의 한 기업가가 북항 야구장 건립에 2000억 원을 기부하기로 하면서 ‘어쩌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의 불씨가 되살아나고 있다.
국내 프로야구팀 중에 바다가 있는 지역을 연고로 한 팀이 없진 않지만, 해양 도시 부산의 바다 스케일이나 풍광에 감히 비할 바 아니다. 북항 야구장은 바다 야구장이라는 차별화된 입지 외에도 부산역과 가까운 지리적 이점으로 원정 팬들에게도 친화적인 야구장이 될 수 있다. 해외 성공 사례를 좇아 시즌 외에는 콘서트장으로 사용되고, 쇼핑몰, 호텔, 온천 등이 어우러진 복합스포츠콤플렉스 모델로 추진한다면, 투자 유치와 사업성 면에서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 나아가 북항 야구장은 단순한 스포츠 시설을 넘어 엄청난 경제 파급 효과로 부산의 부흥을 이끌며 부산의 지속 가능한 도시 브랜드와 미래 경쟁력을 상징하는 공간이 될 수 있다.
물론 1조 원이 훌쩍 넘을 것으로 보이는 비용을 어떻게 충당하느냐는 상당한 난제임이 틀림없다. 롯데그룹이 기대 이상의 통 큰 투자에 나설 가능성이 낮다는 점에서 막대한 공공 재정 투입이 필요하다는 점 역시 부정할 수 없다.
며칠 전 야구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한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그는 북항 야구장의 가능성에 고무돼 있다며, 야구팬과 부산 시민들이 북항 야구장 건립 기금을 조성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구체적으로는 기금 조성 참여 정도에 따라 할인 관람 또는 무료 관람이 가능하도록 하거나, 좌석에 참여자의 이름을 새겨 넣어준다면 기금 조성에 탄력이 붙을 것 같다고 했다. 300만 원은 기꺼이 내놓을 수 있다는 친구는 부산을 비롯해 전국에 부산의 미래와 상징이 될 야구장 건립에 참여하고 싶은 야구팬과 시민들이 많을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수도권 집중과 지역 소멸로 대기업의 투자 역시 수도권으로 더욱 몰리고 있지만, 부산시도 부산 부흥의 기회를 북항 야구장 복합스포츠콤플렉스에서 찾고, 이를 위해 대기업들을 상대로 적극적인 세일즈에 나서면 어떨까.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야구장 건립 기금 조성을 통해 야구팬들과 부산 시민들의 뜻까지 하나로 모은다면, 북항 야구장의 꿈이 이뤄지지 말라는 법도 없다.
2025-06-09 [17:58]
-
[데스크 칼럼] 몽골의 모래바람을 잠재운 K컬처
얼마 전 직장 동료와 함께 몽골에 다녀왔다.
몽골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드넓은 초원과 게르, 양, 말, 칭기즈칸 등이다. 이러한 이미지는 그동안 상상했던 몽골의 한 장면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초원이 많은 몽골에는 말과 양 떼만 있는 평온함, 그 자체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도심에 고층건물이 들어서고, 들녘에 비닐하우스가 생겨나는 등 산업화 바람이 거세다. 이 가운데 가장 센 바람은 대한민국이라는 사실이다. K-컬처가 세계적으로 확산하고 있지만, 몽골에는 유독 심하다는 점이다.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에는 고층 아파트 건설이 줄을 잇는 등 산업화가 한창이다. 도심에는 우리나라 편의점인 CU와 GS25가 진출해 성시를 이룬 지 오래다. 한국어 간판을 단 식당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또, E-마트를 비롯한 대형 유통시설도 몽골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도심에선 한국어로 길을 물어봐도 될 정도다. 한국이 몽골 산업화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은 가보지 않은 사람도 언론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기업이 몽골 자연환경까지 바꾼 성공 사례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울란바토르에서 북쪽으로 350km 떨어진 셀렝게 주 토진나르스. 이곳은 몽골 최 북단으로 러시아 국경과 인접해 있다. 특징이라면, 나무 한 그루도 보기 힘든 여느 몽골 평원과 달리 소나무 숲이 무성하다. 밖에서 보면, 몽골이 아닌 한국의 소나무 조림지라는 느낌을 준다. 조림 면적은 3250ha로 서울 여의도 면적의 11배다.
몽골에서도 오지나 다름없는 이곳에 세계 곳곳의 관광객이 몰려든다. 한국인은 물론 백색 피부와 푸른 눈을 가진 서양인도 흔하게 볼 수 있다. 숲 입구에는 매표소도 있다. 이와 함께, 관광객이 숲을 제대로 관찰할 수 있도록 4층 높이의 전망대도 설치됐다. 전망대 입구에는 숲을 조성하게 된 경위를 설명하는 한국어 안내판도 세워졌다. 이곳은 몽골 자연림이 아니라 인공적으로 조성한 숲이라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숲 전체에 높이 3~4m 소나무가 가로, 세로로 대형을 맞춰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
현지 산림관리자에 따르면 2000년대 초 이 곳에 큰 산불이 발생했다. 이곳에는 몽골 전체 소나무 숲의 16.2%를 차지할 만큼, 무성한 산림지역이었다. 산불로 인해 모랫바닥이 드러나고 사막으로 변할 우려가 높았다. 당시 몽골 정부는 국제사회에 도움을 청했다.
한국 기업인 유한킴벌리가 2003년부터 조림 사업을 시작했다. 올해로 20여 년이 지났다. 산불로 인해 모래 언덕으로 변했던 곳이 20년 만에 거대한 소나무 숲으로 환골탈태한 경우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소나무 숲은 망망대해나 다름없다. 누런 모랫바닥이 푸른색의 나무바다로 변한 셈이다. 몽골판 ‘상전벽해’나 다름없다.
이 숲은 몽골 사람은 물론 세계에서 몰려든 관광객에게 큰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다. 황량한 모랫바닥에 던진 ‘희망과 가능성’의 씨앗인 셈이다. 거대한 숲은 몽골 초원의 모래바람을 잠재운 한국 바람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러한 성공신화를 바탕으로 한국의 여러 기업과 지방자치단체가 수 년전부터 몽골 조림 사업에 나서고 있다. 조림 사업에 힘입어 최근 곳곳에서 생겨나는 것이 한국판 비닐하우스다. 울란바토르 외곽 도로를 달리다 보면 주택 인근에 설치된 비닐하우스를 흔하게 볼 수 있다. 나무 심기 전 육묘작업을 위해 설치했던 비닐하우스가 요즘에는 채소 재배와 각종 농작물 생산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
몽골에서 볼 수 없었던 수박과 방울토마토, 오이 등을 재배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유목민의 나라 몽골에서도 채소와 과일에 대한 신세계가 열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게 농업전문가 진단이다. 최근에는 K-스마트팜 기술까지 전수하고 있다.
한국은 1990년 몽골과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몽골 영토는 한국 면적의 15배가 넘지만 인구는 340만 명이다. 330만 명인 경남 도민보다 조금 많다. 그 때문에 몽골은 인구밀도가 매우 낮다. 그렇다고 해서 황량한 초원에 말만 키우는 나라가 아니다. 생산량 세계 9위의 몰리브덴을 비롯, 주석 등 다양한 희소금속을 보유한 세계 10대 자원부국이다.
특히, 희토류가 다량 매장돼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 올해로 수교 35주년이다. 몽골에서 유행하는 K-컬처를 바탕으로 한국과의 자원외교가 더욱 활성화되길 기대해 본다.
김길수 중서부경남본부장 kks66@busan.com
2025-06-04 [17:57]
-
[데스크 칼럼] 주민도 안 반기는 야구장을 지었는데…
부산의 야구팬을 설레게 또는 긴가민가하게 하는 두 가지 이슈가 있다. 롯데 자이언츠의 선방으로 이번엔 가을야구가 가능할 수도 있다는 기대감이 하나이다. 나머지는 정철원 협성종합건업 회장의 2000억 원 기부 약속으로 촉발된 북항 야구장 가능성이다. 어쩌면 정말 ‘바다 야구장’이 들어설 수도 있다는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그 덕에 여기저기서 모범 사례로 국내외 야구장이 소개되고 있다. 다들 화려하고 멋진 야구장들이다. 국내에는 서울 ‘고척스카이돔’이 있고, 일본에는 화려한 공연이 자주 열리는 일본 ‘조조 마린스타디움’이 있다. 스플래시 히트가 유명한 ‘오라클 파크’, BTS의 콘서트장이었던 ‘시티필드’ 등 미국의 야구장들도 단골 메뉴로 소개된다.
메이저리그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홈구장 ‘트루이스트 파크’는 잘 모르는 것 같다. 야구장만 보면, 4만여 명 관중석 규모의 평범한 곳이다. 시야를 넓혀 복합 개발 프로젝트로 추진된 ‘배터리 애틀랜타’ 단지까지 같이 함께 살펴보아야, 제대로 평가할 수 있다. 야구장을 잘 지은 사례라기보다 도시재생에 성공한 프로젝트다.
2013년 11월 브레이브스 구단은 애틀랜타 교외의 코브 카운티와 새 야구장 건설 MOU를 체결했다. 이어 시설 노후화 등을 이유로 2016년 계약 만료와 함께 도심의 ‘터너 필드’를 떠나고, 대신 교외에 새 구장을 짓고 주변을 엔터테인먼트 단지화하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사업은 극비리에 진행됐는데, MOU 발표와 동시에 난리가 났다. 예상보다 훨씬 저항이 컸다. 터너 필드 주변보다 코브 카운티에서 반발이 거셌다. 지역 사회는 사업 예정지가 지하철이 안 가는 곳이라 새 구장이 흥행할 리 없다고 우려했다. 그런 사업에 혈세를 지출할 수 없다고 반발했다.
트루이스트 파크 사업비는 6억 7200만 달러, 원화로는 9000억 원이 넘는다. 45%인 3억 달러, 4100여억 원을 지자체가 공공채권을 발행해 부담했다. 나머지는 구단이 마련했다. 추가로 함께 추진된 배터리 애틀랜타 단지의 사업비는 4억 달러, 5500억 원 정도다. 모두 민간 자금으로 이뤄졌다. 이 단지에는 4성급 호텔, 4000석 규모의 공연장, 각종 상업시설로 채워졌다. 500세대 주거지와 각종 오피스도 들어섰다.
코브 카운티 행정 당국은 새 구장 건설에 적극적이었다. 야구장과 엔터테인먼트 단지가 결합하면 파급효과가 상당할 것이라고 봤다. 하지만 여론은 반대였다. 도심 외곽이다 보니, 야구장 팬들도 줄고 단지도 텅텅 빌 것이라고 봤다. 극비리에 사업이 추진된 것에 대한 비판도 이어졌다. 밀실 행정이었다는 거다. 극심한 충돌로 의회 안건 심의가 안 될 정도였고, 주민들의 소송으로 대법원 판결까지 받아야 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2017년 야구장과 엔터테인먼트 단지는 겨우 준공했다.
어떻게 됐을까. 2021년 코브 카운티 상공회의소는 이 프로젝트를 “지역과 주 전체에 윈-윈이 된 홈런”이라고 평가했다. 2022년 한 해에만 1000만 명 이상 찾았으며, 세금 수입도 기대치를 초과 달성하고 있다. 파파존스 피자의 본사도 이전해 올 정도로, 배터리 애틀랜타 단지는 인파로 북적거린다. 부동산 가치가 너무 폭등해 문제가 될 정도다.
일각에서는 파급효과가 과장됐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때마침 2021년 애틀랜타 브레이브스가 메이저리그 월드시리즈 우승을 하는 등 운도 좋았다. 그럼에도 트루이스트 파크 일대가 애틀랜타의 명소이자 지역 경제의 핵심 엔진 역할을 하고 있다는 걸, 지금은 누구도 부정하기 어렵다.
브레이브스 구단주는 사업을 극비로 추진한 것에 대해 “일찍 알려졌다면 ‘정말 타당한지 검증해 보자’라며 반대하는 이들이 훨씬 많아졌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밀실 행정을 정당화할 수는 없지만, 예사롭지 않은 일에는 우려와 반대의 목소리가 불가피하다는 건 사실이다. 우려를 이겨낼 용기가 있어야 큰 일을 하는 법이다.
트루이스트 파크와 비교하면 북항 야구장은 오히려 전망이 밝다. 접근성이 좋고, 바다와의 연계 등을 고려하면 각종 사업을 유치하기도 상대적으로 수월하다. 많은 시민이 원하고 있어, 여론의 지지를 받을 수도 있다. 오히려 공공에서 주저주저하고 있는 분위기다. 정부와 부산시가 우려보다 가능성을 보려 하면, 다른 미래를 그릴 수 있는 상황이다.
사실 굳이 미국까지 갈 필요도 없다. 경부고속도로, 포항제철, 가덕신공항 등도 비슷한 경로를 겪었다. 처음엔 꿈 같은 소리처럼 들렸는데 현실이 됐거나 되고 있는 중이다. 부산이 추가 홈런을 날리려면, 우리가 한번 더 용감해져야 하는 때가 됐다.
2025-06-02 [17:56]
-
[데스크 칼럼] 예타 통과만 기다리는 부울경 광역철도
장미대선이 5일 앞으로 다가왔다. 대선 후보들이 전국을 돌면서 지지를 호소하고, 지역 맞춤형 공약을 쏟아내고 있다.
그럼, 부울경 지역 대표 공약은 무엇일까? 아마도 수도권 집중화를 막고 지역 균형 발전을 위해 부울경을 연결하는 광역철도 건설이 아닌가 싶다. 부울경에서는 수년 전부터 이 사업에 사활을 걸고 있다. 하지만 정부의 반응은 뜨뜻미지근을 넘어 소극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부울경 지역 관계자들은 최근 기획재정부와 국토교통부를 찾아 1년가량 늦어지고 있는 부울경 광역철도의 ‘예비타당성 조사(이하 예타)’ 통과와 조기 착공을 촉구했다.
〈부산일보〉와 지역 정치권 취재를 종합하면 기재부는 지난해 6월 부울경 광역철도에 대한 예타 결과를 발표하기로 했다. 그런데 같은 해 9월로 한차례 미뤄지더니 다시 12월로, 올해 상반기로 늦춰졌다.
결과 발표가 늦어지면서 급기야 ‘사업이 물 건너갔다’는 이야기마저 나돈다. 부울경 지역 시장·도지사는 물론 국회의원, 기초 자치 단체장들이 기재부와 국토부, 한국개발연구원(KDI)을 잇달아 방문해 예타 통과와 조기 착공을 건의했지만, 기재부는 말이 없다.
부울경 광역철도는 부산 노포동에서 양산 웅상을 거쳐 KTX 울산역을 잇는 총연장 48.8km 규모로 건설되는 사업이다. 건설비는 3조 424억 원으로 추정된다.
이 철도는 2021년 8월 국토부 국가 철도망 계획 선도 사업에 선정되면서 가시화됐다. 1995년, 이 철도가 처음 언급된 지 26년 만이었다.
국토부 사전 타당성 조사를 거쳐 2023년 6월 기재부 예타에 포함됐다. 사타 당시 비용편익이 기준치(1.0)에 미치지 못했으나, 예타에 선정되면서 사실상 사업이 확정될 것으로 기대를 모아었다.
그러나 결과 발표가 늦어지면서 지역 정치권은 물론 765만 부울경 지역 주민들이 동요하고 있다. 자칫 소문대로 ‘사업 무산’이 현실화할지 우려돼서다. 사업 시행 여부를 결정짓는 예타 결과가 ‘경제성이 없는 것으로 나왔을 가능성”을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이다.
기재부 예타는 인구나 경제력이 집중된 곳일수록 높게 나오게 돼 있어 인구와 경제력이 모여 있는 수도권이 비수도권보다 더 유리한 상황이다. 이 때문에 지방에서 추진되는 국책사업의 예타 통과가 수도권에 비해 어려운 것이다. 부울경 광역철도 역시 765만 명이 거주하는 곳에 건설이 추진 중이지만, 현재의 예타 잣대로는 경제성이 나오지 않고 있는 것이다.
정부 역시 이런 문제점을 알고 비수도권 사업에 대해 예타를 면제해 주기도 한다. 가덕신공항이나 부산신항~김해 고속도로, 남부내륙철도, 울산외곽순환고속도로 등 20여 개 사업이 이 혜택을 입었다.
정부의 예타 면제가 일부 사업에 그치면서 아쉽게 부울경 광역철도는 제외됐다. 이 사업은 2018년 당시 부울경 3개 시도가 동남권 메가시티 구축과 지역 균형 발전을 위해 계획한 비수도권 최초의 광역철도여서 예타 면제 대상을 기대했지만, 빠지면서 부울경 주민들의 속을 태우고 있다.
국회도 개별 사업을 지정해 예타 면제 등을 규정한 특별법을 발의하고 있다. 실제 김태호 국회의원도 부울경 광역철도의 예타 통과가 불투명해지자, 예타 면제 등을 규정한 ‘특별법’까지 발의했으나 국회의 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문제는 개별 사업마다 예타를 면제하거나 특별법을 발의할 수 없는 만큼 대선 공약으로 채택되는 지방 국책사업 중 필요 사업에 한해 예타 면제와 함께 국가가 신속하게 시행하도록 하는 관련 법 제정이나 개정이 절실하다.
특히 대선 후보들이 20여 년 전부터 선거 단골 공약이었던 부울경 광역철도를 대선 공약으로 채택한 만큼 예타를 통과시켜 주거나 면제해 조기 착공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부울경 광역철도가 완성되면 765만 명이 거주하는 부울경이 하나의 교통망으로 연결되면서 1시간 생활권으로 묶이게 된다. 이는 단순한 이동 편의성을 넘어 지역 경제와 사회 통합을 촉진하는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나아가 부울경 광역철도는 교통 인프라 확충을 넘어 인구 유출 방지와 지역 주민의 삶의 질 향상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공약은 흔히 ‘약속’이라고 한다. 자기가 행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언행에 제약을 가해야 하며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는 뜻이다. 부울경 광역철도의 예타 통과와 조기 착공은 공약 중 가장 중요한 대선 공약인 만큼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다. 만약 약속을 지키지 않고 계속해서 희망 고문을 이어간다면 엄청난 후폭풍에 직면할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2025-05-28 [18:05]
-
[데스크 칼럼] "믿으라"는 SKT와 정부, 못 미더운 행보
“믿고 안심하셔도 됩니다.”
SK텔레콤이 유심(USIM) 정보 유출 사태와 관련, 가입자에게 강조한 말이다. ‘보안 기술 고도화’로 해킹 2차 피해를 막을 수 있다는 설명이다. 금융 피해가 발생해도 100% 보상하겠다고 강조했다. 그럼 정말 안심해도 되는 걸까.
SK텔레콤을 공격한 해커는 2022년 6월 최초 악성코드를 심었다. 해킹 사태에 대한 민관합동조사단의 공식 조사 결과다. 해커는 먼저 서버 장악을 위해 웹쉘(Web Shell) 프로그램을 침투시켰다. 이후에는 ‘BPF도어’(BPFdoor)라는 악성코드를 심었다.
웹쉘은 서버에서 임의의 명령을 실행할 수 있도록 제작한 프로그램이다. 비교적 흔하게 사용되는 해킹 도구다. ‘BPF도어’는 보다 은밀하고 정교한 해킹 도구로 원격 제어형 백도어로 분류된다. BPF도어는 중국계 해킹 그룹과 연관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커는 SK텔레콤 서버 23대에 25종의 악성코드를 심었다. 감염 서버는 추후 조사로 늘어날 수 있다. 해커가 지난 3년간 무엇을 했는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드러난 것은 지난달 2695만 건의 유심(USIM) 정보를 빼내갔다는 사실이다.
SK텔레콤은 해킹 사실을 3년간 몰랐던 데 대해 “침해는 알기 어렵다”고 해명했다. 또 통신망의 원활한 유지를 위해 백신 프로그램 설치가 어렵다고 강조했다. 통신망이 백신 없이 운영된다는 사실은 국회 청문회 등을 통해서도 확인됐다.
SK텔레콤은 침해를 탐지하기 어렵지만 “(정보) 유출은 감지할 있다”고 자신했다. 그러나 이 설명대로라면 정보 유출이 발생한 뒤에야 해킹을 알 수 있는 셈이다. 이에 대해 SK텔레콤 측은 “뼈아픈 부분”이라고 설명했다. 웹쉘이라는 흔한 해킹도구 사용을 잡아내지 못한 데 대해서도 “뼈아픈 부분”이라고 말했다. SK텔레콤은 보안 관련 비판이 이어지자 당초 “어렵다”던 백신 설치도 “진행 중”이라고 입장을 바꿨다.
SK텔레콤 해킹 사태와 관련해선 정부의 발표도 오락가락이다. 정부는 지난달 29일 발표한 1차 조사 결과에서 “단말기 고유식별번호(IMEI) 유출은 없었다”고 강조했다. IMEI 유출이 없었다는 것은 이날 배포된 정부 자료의 제목이었다. 정부는 “유출된 정보로 유심을 복제해 다른 휴대전화에 꽂아 불법적 행위를 하는 행위가 방지됨을 확인했다”고 강조했다. IMEI가 없어서 ‘복제폰’을 만들 수 없다는 설명이었다.
그러나 정부는 한 달도 안 돼 IMEI 유출 여부에 대해 “모른다”로 입장을 바꿨다. 지난 19일 2차 조사 결과 발표에서 정부는 “악성코드가 감염된 서버들에 대한 분석 중 IMEI 등이 포함돼 있음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특히 해당 서버의 로그기록이 없는 2년여 기간에 대해 “자료 유출 여부가 확인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IMEI 유출 여부에 대한 입장이 바뀐 데 대해 정부는 1차 조사가 “조사 초기였고” “서버 분석 작업을 긴급히 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조사가 충분하게 진행되지 않은 상황에서 성급하게 IMEI 유출이 없었다고 발표함 셈이다. 성급한 발표에 대해 정부 관계자는 “광범위하게 확산됐던 우려를 해소하자는 목적이었다”고 설명했다. 정확한 진상 규명보다 ‘우려 해소’ 목적이 앞섰다는 사실을 인정한 발언이다.
IMEI가 유출됐을 경우 복제폰은 만들어질 수 있는 걸까. 정부는 “좀 어렵다는 판단”이라고 설명했다. “IMEI 숫자 조합만 가지고는 복제폰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 제조사들의 해석”이라고 밝혔다. 정부는 그러나 “복제폰이 가능한지 여부에 대해서 100% 말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기술적으로 100% (안전은) 장담하기 어려운 부분”이라는 설명이다. 가입자로서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통신리서치 전문회사인 컨슈머인사이트 조사 결과 SK텔레콤의 해킹 사태 '대응'에 대한 긍정 평가는 11%에 그쳤다. 신속한 처리, 충분한 사고 대응과 보상, 가입자 입장에서의 공감과 투명한 소통 모두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하다는 응답이 70%에 육박했다. 이번 해킹 사태가 본인에게 미칠 영향에 대해서는 3명 중 2명(63%)이 '우려한다'고 답했다. SK텔레콤 이외 KT와 LG유플러스 가입자도 이번 사태를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이다. 정부 대응에 대해서도 같은 조사를 한다면 SK텔레콤보다 나은 평가를 받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kjongwoo@busan.com
2025-05-26 [18:11]
-
[데스크 칼럼] 손기정과 일장기, 보스턴마라톤
마라톤 영웅 고(故) 손기정 선생의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출전과 우승 소식을 담은 ‘조선중앙일보 원본 신문’ 1936년 8월 10, 13, 14일 자 발행분 3점이 지난달 14일 경매에 나와 화제가 됐다. 손기정 선생은 한국 마라톤 역사에 큰 획을 그은 선구자다.
손기정은 일제강점기인 1912년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태어나 소학교 시절 때부터 마라톤을 시작했다. 손기정은 1932년 동아일보 주최 경영마라톤대회, 1933년 고려육상경기회 주최 제3회 15마일 크로스컨트리경주대회 등 각종 국내 대회에 출전해 우승하며 두각을 드러냈다. 이후 1936년 베를린 올림픽 국가대표 선발전에 참가했고 일제강점기 시기 한국인 신분으로 일본인들을 이겨 일본 국가대표에 발탁됐다. 이때 같이 선발전에 출전한 한국인 마라톤 선수 남승룡도 국가대표로 뽑혔다.
일제는 한국인이 올림픽에 출전하는 것을 막으려고 베를린 현지에서 2차 선발전을 진행하는 등 몽니를 부렸으나 손기정과 남승룡은 빼어난 실력으로 일본 선수들을 다시 한번 눌렀다. 손기정은 1936년 8월 9일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2시간29분19초로 골인해 당시 올림픽 신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따냈다. 남승룡은 2시간31분42초로 결승선을 끊어 은메달을 딴 영국의 어니 하퍼와 불과 19초 차이로 값진 동메달을 획득했다.
한국인으로서 따낸 자랑스러운 올림픽 금메달과 동메달이었지만 한국은 일제 치하 지배를 받았기에 때문에 이 두 선수의 가슴엔 일장기가 박혀있었다. 당시 남승룡은 시상대에서 고개를 푹 숙였고, 손기정은 월계수로 가슴의 일장기를 가렸다.
동아일보는 신문 지면에 손기정의 가슴에 박혀있던 일장기를 지우고 사진을 게재하는 이른 바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일제로부터 무기한 정간을 당하기도 했다. 나라의 주권이 상실된 상태에서 이 두 선수는 한국인의 뿌리와 절개를 잊지 않았다. 손기정은 한국인의 모습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선 오직 올림픽 무대 금메달 획득이 정답이라 생각하며 뛰었고 암울한 시대 상황 속에서도 ‘조선’을 세계에 각인시켰다.
특히 남승룡은 동메달을 획득하였음에도 자신의 가슴에 달린 일장기를 가리지 못한 사실을 부끄러워 했으며, 남달리 조국을 위한 신념이 강했던 그는 대회가 있을 때마다 각국의 기자들에게 자신이 일본인이 아닌 한국인임을 눈물로 호소함으로써 또 다른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남승룡은 손기정 못지않은 마라톤 실력을 발휘하며 1932년 제8회 조선신궁경기대회 1위, 1933년 제20회 일본육상경기선수권대회 2위 등의 빛난 업적을 이뤘다.
남승룡의 조카 남청웅씨는 “남승룡 선생은 양정고등보통학교 시절 서울에서 고향인 순천까지 하루에 200리(80㎞)에서 250리(100㎞)를 5일간 뛰고, 부모님의 심부름을 하기 위해 여수까지도 뛰는 등 달리기를 항상 생활화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손기정과 남승룡의 뒤를 이어 한국 마라톤을 빛낸 선수는 바로 서윤복이었다. 서윤복은 1947년 4월 19일 보스턴국제마라톤대회에서 광복 후 처음으로 태극기를 가슴에 달고 국제 대회에서 2시간25분39초의 세계신기록을 수립하며 감격의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당시 ‘국민 영웅’ 손기정은 마라톤 감독을 맡아 서윤복의 대회 우승을 이끌었다. 남승룡은 코치이자 페이스 메이커로 서윤복의 우승을 돕기 위해 35세 나이를 잊은 채 대회를 완주해 12위를 차지했다.
서윤복은 당시 최강으로 평가받았던 일본과 미국 선수들을 제치고 정상에 올랐다. 1947년은 해방된 지 2년이 채 되지 않은 시점으로, 서윤복의 우승은 단순한 스포츠 승리를 넘어 국가적 자존심을 회복하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지금까지도 보스턴마라톤은 세계 최고 권위의 마라톤대회 중 하나로 꼽힌다.
그의 우승이 더욱 값진 것으로 평가받았던 이유는 당시 한국은 해방 후 혼란기였고, 훈련 환경이나 지원 체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서윤복은 개인적인 노력과 투혼으로 세계 정상에 오른 것이다. 서윤복은 경기 후 “달리는 내내 조국과 민족을 생각했다”며 “일제 때 손기정 선수가 일장기를 달고 뛰어야 했던 아픔을 생각하며 반드시 이겨야겠다는 결심으로 뛰었다”고 소감을 밝힌 바 있다.
서윤복의 보스턴마라톤 우승 이후 한국 마라톤의 전통은 황영조, 이봉주 등으로 이어졌는데, 현재 한국의 최고 기록은 2000년 도쿄국제마라톤에서 이봉주가 세운 2시간7분20초로 25년째 깨지지 않고 있다. 즉, 2000년 이후 한국 마라톤은 제자리 걸음만 하고 있는 셈이다. 한국 마라톤의 부흥을 위해 정부와 체육계의 장기적이고 대대적인 대책이 필요한 시점이다.
2025-05-21 [18:09]
-
[데스크 칼럼] 지역의 모든 것은 연결돼 있다
우리는 모두 연결돼 있다. 기후위기를 마주하며, 코로나19 팬데믹을 겪으며 우리는 이 ‘평범한’ 진리를 상처 입으며 몸으로 깨달았다. 네가 안전해야 내가 안전하고, 내가 살아야 너가 산다고.
반얀트리 공사장 화재로 인한 삼정기업의 기업회생 신청, 촉망 받던 2차전지 기업 금양의 상장폐지 위기는 지방은행의 건전성 악화로 연결됐다. 부산은행의 지난 1분기 당기순이익은 전년보다 33%나 감소했다. 대손충당금이 증가하고, 석 달 이상 연체된 부실채권 비율을 나타내는 고정이하여신비율이 상승하면서 자산 건전성이 눈에 띄게 나빠졌다. KB금융의 당기순이익이 전년 대비 62.9% 상승해 1조 7000억 원가량을 기록하는 등 시중은행·인터넷은행들이 당기순이익 역대 최고치를 갈아치우며 고공행진을 할 때, 부산은행은 지역 경제의 신음을 지표로 들려줬다.
연결 고리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지방은행인 부산은행의 위축은 결국 지역 경제 위축으로 이어진다. 당장 지역에서 경제 활동을 이어가는 기업과 소상공인, 가계 자금 흐름에 영향을 미치며, 이익을 다시 지역사회로 환원하는 사회공헌 사업 또한 위축될 수밖에 없다. 지역 우수 인재들을 지역에 머물게 하는 좋은 일자리도 줄어든다. 지방은행은 단순한 금융기관이 아니라, 지역경제의 핵심 축이다.
지난 17일 성황리에 개최된 부산은행의 대표적 사회공헌 사업 ‘I LOVE(아이사랑) 페스티벌’에 3000여 명의 시민들이 참가했는데, 3000여 명에게 선물했던 ‘소소한 행복의 하루’가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
지방은행은 그렇잖아도 인터넷 전문은행과 빅테크 기업들의 금융업 진출, 시중은행의 지방 영업 강화와 같은 위험 요소들에 직면해 있다. 인구와 산업, 자본시장 규모가 수도권에 비해 절대적 열위에 있고, 이 격차가 나날이 커져가고 있다는 점은 지방은행의 근간을 위협하는 가장 큰 위험 요소다. 앞서 외환위기 때는 많은 지방은행이 시중은행에 흡수되기도 했다.
유통업계의 한 관계자는 “온라인 플랫폼 시장 확대로 10년 후쯤 일어날 것으로 예상했던 일이 5년 이상 앞당겨져 일어나고 있다. 이제 막 준비하려 했는데 이미 들이닥쳐 손을 쓸 수가 없다”고 했는데 지금 일어나고 있는 변화들은 초기 인터넷, 스마트폰이 확대되던 때보다 훨씬 더 숨가쁘게, 급격한 곡선을 그리며 일어나고 있다.
지방은행의 위기 감지는 그래서 더 예민한 촉각으로 이뤄지고 있다. 전국금융산업노조는 지난달 열린 제1차 금융노동포럼의 주제를 ‘지역 경제의 위기와 지방은행의 역할’로 정하고 지방은행이 지역 밀착형 관계금융을 통해 지역경제의 버팀목 역할을 해온 만큼, 지방은행을 통해 지역의 돈이 지역에 재투자될 수 있도록 하는 제도 개선을 촉구했다.
부산경실련도 최근 대선을 앞두고 발표한 공약 제안에서 공공기관들이 지방은행 거래 비중을 더 높여야 하며, 이를 위해 공공기관 경영 평가 시 가산점을 주는 제도가 마련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앞선 조사에서 부산 이전 공공기관의 지방은행 거래 비중이 낮아 공공기관의 운영 자금 대부분이 시중은행을 통해 역외로 유출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한국금융연구원은 지난해 낸 보고서에서 지방소멸을 억제하기 위해 은행의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고 했는데, 지자체가 시 금고를 지정할 때 은행의 해당 지역 중소기업의 대출 실적에 가점을 주는 방안 등을 제안했다.
물론 지역 경제 순환의 고리 어디쯤에서 ‘나’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을 수도 있다.
이건 어떨까. 올 초 지역 신발산업을 대표하는 향토기업 트렉스타가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소식을 전해들은 부산, 경남 시민들과 지자체, 지방은행이 앞다퉈 향토기업 살리기에 동참하면서 내수에서만 매출이 지난해 대비 140% 상승하고 온라인 구매 실적은 260% 증가했다고 한다. 이에 화답하듯 트렉스타는 4000만 원 상당의 등산화를 경남 산불 피해 지역에 기부했다. 지역 경제의 핵심은 순환이고, 연결이다.
부산 커피 기업 모모스는 전국에 원두를 판매하며 모모스커피의 원두와 부산우유의 절묘한 맛의 조합을 알린 덕에 부산우유를 쓰는 곳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로컬의 미래〉의 저자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는 지역화는 글로벌 경제가 입힌 손상을 만회하는 가장 전략적이고, 효과적이며, 상식적인 방법이라고 했다. 수도권 과밀화와 지방소멸을 막을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도 하다. 지역화는 행복의 경제학이라고 했는데, 개개인을 공동체 그리고 자연과 다시 이어주기 때문이라고 했다.
지역 순환 경제는 가장 인간적인 모습을 한 경제다. 이 순환의 핵심 축은 지방은행에 있다.
2025-05-19 [18:10]
-
[데스크 칼럼] 부산 크루즈 관광, 첫인상이 중요하다
‘부산항국제여객 제2터미널입니다. 야외 주차장 안으로 들어와서 직진해 주세요.’
부산을 찾은 외국인 크루즈관광객이 손에 쥐고 다니는 명함 크기의 안내문에 적힌 내용이다. 이 명함은 부산시관광협회가 부산의 ‘헷갈리는 크루즈터미널 명칭’ 때문에 궁여지책으로 만들었다.
최근 크루즈를 타고 부산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이 늘고 있지만, 그들을 맞는 부산의 수용 태세는 부끄러운 수준이다. 지난해 부산 크루즈 관광객은 15만 2000명으로 2023년에 비해 1000명 이상 늘었다. 부산에 입항한 크루즈선도 2023년 105척에서 2024년 118척으로 증가했다. 올해는 증가세가 더 가팔라 크루즈 171척이 부산에 입항하며, 관광객 수도 21만 명이 넘을 것으로 예상한다.
부산시는 올해 외국인 관광객 유치 목표를 300만 명으로 정하고, 관광업계 활성화에 나서고 있다. 특히 부산항 크루즈 관광 활성화에도 기대를 걸고 있다. 정부는 올해 1년간 전담 여행사와 크루즈 선사가 모집한 3인 이상 중국인 단체 관광객에 한해 무사증 입국을 허용하기로 했다. 이 같은 ‘크루즈 관광상륙허가제 시범사업’ 논의는 지난해 부산시가 정부에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코로나19 이후 개별 관광을 선호하는 여행 행태가 바뀌고 있는데도 단체관광객 유치만 가능한 제도 때문에 일본에 밀려나고 있다는 점을 피력한 것이다.
이런 정책적인 노력도 필요하지만 전반적인 수용 태세 점검은 더 중요하다. 지역 관광업계가 입을 모아 심각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택시 호객’이다. 부산항에 크루즈가 입항하고 터미널 앞 주차장으로 외국인 관광객이 쏟아져나오면 일부 택시 기사들이 투어 팻말을 들고 호객에 나서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불법 호객도 문제지만, 턱없이 비싼 바가지요금을 받는 데다 단거리 승객은 태우지 않는 승차 거부도 예사다. 신용카드를 받지 않고 현금만 요구하다가 손님과 실랑이가 벌어지는 일도 많다. 관광업계 관계자는 “외국인 관광객들이 부산에 내려서 처음 마주치는 광경이 택시 호객 행위라니 부끄럽다”며 “망친 첫인상을 짧은 체류 시간 안에 회복하고 돌아갈지 의문이다”고 말했다.
현장에서는 지자체와 경찰 단속을 요구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다. 단속반이 현장에 잘 나오지 않고, 나오더라도 지켜보기만 한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강력 단속과 더불어, 호객 행위가 많은 공항택시의 거친 이미지를 바꾼 인천공항 콜택시 사례를 눈여겨볼 만하다. ‘거북이택시’는 미터기 사용, 청결한 차량, 친절한 기사, 사전 예약제와 24시간 상담 등 신뢰 기반 서비스를 통해 공항택시 이미지를 바꾸고 있다. 부산도 이를 참고해 단속을 넘어 서비스 체계를 정비해야 한다.
부산 크루즈터미널 명칭도 외국인 관광객을 당황하게 한다. 현재 부산에 크루즈가 입항하는 곳은 동구 초량동의 부산항국제여객터미널·부산항국제여객 제2터미널, 영도구의 국제크루즈터미널 등 총 3곳이다. 정기선은 부산항국제여객터미널을 이용하고, 대부분의 크루즈는 부산항국제여객 제2터미널로 입항한다. 제2터미널의 선석이 찼거나, 부산항대교를 통과하지 못하는 초대형 크루즈는 영도구의 국제크루즈터미널로 입항한다.
문제는 3곳의 명칭이 헷갈린다는 점이다. 특히 영어 명칭이 International Passenger Terminal(부산항국제여객터미널), International Cruise Terminal(국제크루즈터미널)로 비슷하고, 제2터미널은 부산항국제여객터미널 주차장 안에 있어 찾기가 쉽지 않다. 부산의 택시 기사들도 3곳의 터미널이 있다는 사실을 잘 모르다 보니, ‘크루즈를 타고 왔다’는 승객 말에 영도로 안내하는 경우가 종종 벌어진다. 관광 안내데스크 직원들이 콜택시를 불러줘서 겨우 출항 시간에 맞춰 오는 일도 벌어진다. ‘영도에서 국제여객터미널로 갔다가 마지막에 제2터미널로’ 오는 일도 있다.
관광 콘텐츠도 돌아봐야 한다. 대부분의 크루즈는 수도권 여행사와 계약해 ‘부산 겉핥기’ 식 상품으로 운영된다. 지역 업체들은 진입 장벽을 느끼겠지만, 특히 개별 관광객을 위한 특색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적극적으로 알리는 전략이 필요하다. 이들에게 부산 진면목을 보여주지 못하면 다시 돌아올 이유가 없다.
크루즈 관광은 단기 체류형이다. 짧은 시간에 도시 인상을 받는다. 그 짧은 시간이 혼란과 불쾌감으로 채워진다면 아무리 크루즈가 많이 들어와도 부산의 이름은 남지 않는다. 부산의 첫인상을 바꿀 때다.
김동주 경제부 차장 nicedj@busan.com
2025-05-14 [18: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