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난 그런 노인이 좋더라
박종호 스포츠라이프부 선임기자
90세 현역 ‘실버넷뉴스’ 이성용 기자
77세 에세이스트 이옥선 작가 롤모델
유쾌하게 늙어가는 ‘노인력’에도 관심
중년은 좋은 인간 되는 공부 나설 때
노화는 눈에서부터 시작됐다. 노안이 와서 침침하고 잘 안 보인다. 요즘 회사 출근은 내가 일등이다. 타고난 근면 성실 때문은 아니고, 아침에 잠이 너무 일찍 깨서다. 집에서 빈둥대기보다 차라리 지하철 덜 붐비는 시간에 조기 출근 중이다.
언제부터인가 오른팔이 아프고 들어올리기도 힘이 들어 병원에 갔더니 오십견이라고 했다. 아파트 놀이터에서 로프 당기기를 열심히 하는 중이다. 오십견 예방과 재활에 효과가 있다는데 좀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몇 년 전 우체국에 갔다가 날 보고 ‘아버님’이라고 불러 화를 내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오는 나이를 막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정년퇴직이 머지않은 이제는 차라리 어떻게 나이 들어갈 것인가, 장차 어떤 노인이 될 것인지 고민하는 편이 나아 보인다.
‘나이가 들수록 입은 닫고 지갑을 열어라’라는 유대인 속담은 동서고금의 진리다. 지하철 같은 대중교통에서 큰 소리로 떠들거나 정치 관련 유튜브를 크게 틀어 놓는 노인은 되고 싶지 않다. 가능하다면 지하철에서 보청기가 아니라 이어폰을 귀에 꽂고, 정치 유튜브 대신 음악을 듣는 교양 있는 노인이 되고 싶다. 한국의 노인 빈곤율은 38.2%로 OECD 평균보다 훨씬 높다. 노인이 되어서도 밥값 정도는 서로 내겠다고 경쟁하는 아름다운 사회가 되면 좋겠다.
기자 직업의 가장 큰 장점은 많은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다. 다가올 노인 생활에 롤모델로 삼고 싶은 두 분이 떠오른다. 첫 번째는 90세의 나이에도 현역으로 뛰고 있는 〈실버넷뉴스〉 방송보도부 이성용 기자다. 조선총독부가 신사참배를 강요하던 1935년에 태어난 그는 정년퇴직 후에야 컴퓨터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 뒤 영상편집지도사, 드론항공지도사 자격증 등을 차곡차곡 따서 지금은 노인복지관 컴퓨터 강사로도 활동하며, 틈틈이 영화도 찍고 있다. 장수의 상징 거북이처럼 느려도 꾸준하게 노력하면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또 한 분은 역시 부산에 사는 77세의 ‘할매 에세이스트’ 이옥선 작가다. 그가 지난해 생애 처음으로 출간한 책 〈즐거운 어른〉은 요즘 같은 시대에 19쇄를 찍으며 4만 5000부가 넘게 판매됐다. 예스24는 2024 올해의 책, 알라딘은 2024 올해의 신인상으로 선정했다. 세상에는 76세에 신인상을 타는 사람도 있다. 그가 지난 1월 북토크를 열었을 때 한 여성 독자가 “시어머니와 나이가 같은데 저의 시어머니였으면 좋겠다. 혹시 언니나 누나라도 불러도 괜찮겠느냐”라고 말해 환호성이 터졌던 기억이 난다. 이 책은 이미 대만에 진출했고 일본에도 판권이 팔려 곧 나올 예정이라니, K-컬처의 다음 주자는 K-할매가 아닌가 싶다.
새로 찍은 책의 뒤표지에는 그의 딸 김하나 작가가 쓴 추천 글이 다음과 같이 붙어 있었다. “부모가 자식의 성장을 지켜보는 기쁨에 대한 이야기는 많다. 한데 자식이 부모의 성숙을 지켜보는 기쁨도 못지않게 크다. 우리 엄마가 마침내 이런 할머니가 되었다. 자식으로서 무척 자랑스럽다.” 자식으로부터 이런 평가를 들었다면 이 세상 누구보다 성공한 삶이라고 생각된다.
건망증 이즈 뷰티풀! 슬기로운 노인 생활에 관심을 가지다 아카세가와 겐페이가 쓴 〈노인력〉이란 책을 읽고 무릎을 쳤다. 노인력이 하나의 능력이라면 나는 걸음마 수준이고, 부산은 노인력 만렙의 세계적인 도시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나이 들어 단어가 잘 생각나지 않는 상황을 ‘노인력이 생겼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세월에 저항하는 대신 “이것은 약해지는 게 아니라 힘의 변화다”라고 간주한다니 참으로 지혜롭다. 저자는 나이를 먹어 건망증이 심해지는 일이 미지의 세계에 발을 들이는 듯해 흥분된다고 했다. 모든 게 생각하기 나름이다.
요즘 사람들은 신체의 노화를 늦추는 ‘저속노화’에 관심을 쏟고 있지만 노화 자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줄도 알아야겠다. 〈노인력〉은 유쾌하게 늙어가는 방법을 알려주고, 정신의 저속노화를 실현하고 있어서 좋았다. 돌이켜보면 청소년기에는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공부했고, 청년기에는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해 공부했다. 중년의 나이는 좋은 노인, 아니 더 좋은 인간이 되기 위한 공부를 하기에 딱 좋은 때인 것 같다. 누구나 노인은 처음이 아니던가.
가수 노영심이 불러 크게 인기를 끌었던 노래 ‘희망 사항’의 가사를 바꿔 중얼거려 본다.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노인, 술을 적게 먹고 배도 안 나온 노인, 내 얘기가 재미없어도 웃어주는 노인, 난 그런 노인이 좋더라.’ 꿈꾸던 노인이 된 내 모습을 그려본다. ‘노인과 바다’라던 부산이 노인력을 선도하는 도시로 거듭났으면 좋겠다.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