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 단상] 원화 스테이블코인, 이미 흐름은 시작됐다
황석하 경제부 차장
요즘 국회와 금융권에서 자주 등장하는 용어가 ‘원화 스테이블코인’이다. 말만 들어서는 어렵게 느껴진다. 쉽게 말해 ‘블록체인 기술로 구현된 디지털 원화’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런 스테이블코인은 기존의 현금처럼 1 대 1 가치가 고정된 디지털 화폐다. 예를 들면 1코인은 1000원과 같은 가치를 가진다.
스테이블코인이 발행되면 은행이나 카드사 중개 없이도 결제 속도는 더 빨라지고, 수수료는 줄며, 투명성도 높아진다. 특히 지역화폐나 온라인 결제, 해외 송금, 게임 머니 등 여러 분야에서 쓸 수 있다.
하지만 우려도 만만치 않다. 이러한 목소리의 근원지는 한국은행이다. 한국은행 이창용 총재는 지난 1일(현지 시간) 포르투갈 신트라에서 열린 유럽중앙은행(ECB) 포럼 정책토론에서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허용하면 달러 스테이블코인으로의 환전이 가속화하고, 이는 자본 유출입 관리 규제를 약화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이 총재는 또 “원화 스테이블코인 발행으로 통화 공급을 통제하기 매우 어려워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은 아직 우리가 가보지 않은 길이기에, 이러한 우려 역시 존중받아 마땅하다. 다만 우리가 인식하기도 전에 이미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사용되고 있음은 엄연한 현실이다. 다윈KS는 비트코인이나 이더리움, 테더 등의 가상자산을 환전해주는 ATM기 제작사다. 이 회사는 환전 뒤 잔돈을 지급하기 위해 원화 100원에 1 대 1로 연동된 디지털 머니 ‘DPEC(디펙)’을 자체 개발해 활용 중이다. 고객은 이를 페이퍼 월렛이나 선불카드(코나 DTK카드)에 충전해 사용할 수 있다. 일정 금액 이상이 모이면 현금 출금도 할 수 있다.
해당 서비스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ICT 규제 샌드박스 승인을 받아 사업화됐다. 다윈KS 이종명 대표는 “어찌 보면 저희가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활용하는 사례를 사실 지금 하고 있는 것”이라며 “관련 법제화가 진행되면, 이미 현장에서 운영 중인 다윈KS의 디지털 머니 시스템에 즉시 적용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과 홍콩, 싱가포르 등 금융 선진국들은 이미 블록체인 기반 금융 인프라를 빠르게 구축 중이다. 글로벌 전통 금융기관들 역시 이들 네트워크에 속속 참여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한국이 자체 플랫폼과 생태계를 갖추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서울대 경영대학 이종섭 교수는 이를 두고 “남들은 증기기관차를 탈 때 한국은 여전히 말을 타고 다닌다”고 비유했다.
서클이나 테더 같은 해외 기업들이 달러 스테이블코인으로 국내 결제·송금 시장을 장악하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가정해보자. 이럴 경우, 한국의 카드사와 은행, 기존 결제망은 설 자리를 잃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기술 실험과 인프라 구축은 ‘모 아니면 도’의 문제가 아니다. 처음부터 완벽한 제도를 갖춰야만 시작할 수 있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우려는 있지만,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변화의 흐름에서 완전히 소외될 수 있다. 제도는 시행 과정에서 드러나는 문제를 고쳐 나가며 다듬어가면 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완벽함이 아니라, 방향성과 의지다.
황석하 기자 hsh03@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