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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테러 경각심과 우리사회의 병폐
‘쾅!’ 8월 19일 오후 3시 울산공항 대합실에 폭발음과 함께 불길이 치솟았다. “사람이 죽고 다쳤다.” 신고를 받은 경찰, 소방관들이 화재 진압과 인명 구조에 나섰다. 긴박한 상황을 인지한 국정원과 유관기관이 대테러합동조사에 착수했다.
공항 밖에선 드론 여러 대가 공중을 활보하며 패닉에 빠진 시민들에게 독가스를 뿌렸다. 울산화학재난합동방제센터 탐지 결과 독일 나치가 유대인 학살에 사용한 살인 도구, ‘염소가스’였다. 특수 제독차량이 투입됐고, 경찰은 정부 비상령 중 최고 단계인 갑호비상을 건의했다. 한쪽에선 테러범들이 인질을 잡고 경찰과 대치했다. 당국의 위기협상팀이 고심 끝에 협상 결렬을 결심한 순간, 경찰특공대가 들이닥치며 테러범을 일거에 진압했다. 오후 3시 45분 상황 종료.
스릴러 영화에서나 볼 법한 일련의 장면은 실제 상황을 가정한 경찰청 주관 ‘제1회 국내 테러사건대책본부 훈련’에서 연출한 모습이다. 테러범을 잡기 위해 헬기에서 패스트로프로 하강하는 경찰특공대도 멋지지만, 훈련의 요체는 국가 핵심 기관들이 만들어내는 ‘협업 시스템’에 있다. 경찰과 소방, 국정원 등 11개 기관 367명이 각자 역할에 충실하며 빈틈없는 대비 태세를 구축하는 것이다.
경찰이 울산의 한 작은 공항을 낙점해 대테러훈련의 새 이정표를 세운 건 우연이 아니다. 훈련을 자청한 울산 경찰의 적극적 의지가 주효했는데, 무엇보다 원전과 공단 등 국가 중요시설이 즐비해 테러의 표적이 될 수 있는 울산의 장소성이 깊이 고려됐다고 본다.
‘우리나라는 과연 테러로부터 안전한가.’ 이번 훈련을 보고 자연스레 떠오른 물음이다. 국가정보원이 올해 4월 발간한 ‘2023년 테러정세와 2024년 전망’에 따르면 국내에서 테러단체가 개입한 사건은 발생하지 않았으나, 국내 거주 외국인들의 테러단체 지원 사례가 지속 적발됐다. 과도하게 불안해할 필요는 없지만, 마냥 안심할 처지도 아니라는 얘기다.
2023년 울산의 한 복지시설에서 발생한 대만발 독극물 의심 소포 사건은 전국을 초긴장 상태로 몰아넣으며 테러 공포에 취약한 우리 사회의 민낯을 들춰냈다. 전국적으로 관공서나 학교를 대상으로 테러 예고 메일이 발견돼 한바탕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주변에선 ‘에이 설마…’ ‘그러면 그렇지’ 하고 넘어가기 일쑤다.
테러는 이런 안이한 틈을 비집고 들어가 일상의 평온을 파괴하고 공포와 불안을 심는다. 최근 독일 축제현장에서 3명의 목숨을 앗아간 극단주의 이슬람세력의 묻지마 테러가 대표적이다. 미국 9·11의 악몽이 어김없이 생각나는 요즘 그저 남의 나라 얘기라고 치부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경찰 대테러 훈련에서 규정한 ‘가상의 적’, 그 실체는 무엇일까. 남쪽으로 오물 풍선을 날려 보내는 북한일까. 극단주의 무장단체일까. 혹시, 우리 내부의 편견과 혐오, 차별로 점철된 고질적 병폐가 있는 건 아닐까. 편가르기식 진영 논리는 각종 정치 테러로 이어지며 위험 수위를 넘어선 지 오래다. 빠른 속도로 악화하는 경제적 불평등은 어떤가. 젠더 갈등, 노사 갈등, 최근의 의정 갈등까지…. 갈등공화국의 어두운 그림자는 곳곳에 깔려 있다. 무더위에 열린 대테러훈련이 잠자던 경각심을 깨우고 우리 사회 양극화를 돌아보는 거울이 된다.
2024-09-09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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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이것이 왜 국가 재난이 아닌가?
어떤 뉴스는 읽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럽다. 딥페이크 성착취 텔레그램방이 개설됐다는 전국 대학과 중고등학교의 위치가 한반도 지도를 촘촘히 채울 때, 드러나는 ‘지인 능욕’ 텔레그램방 규모가 22만 명, 40만 명 식으로 불어날 때, 불법 합성 성착취물을 만들고 공유한 가해자들이 수사 기관을 비웃고 급기야 관련 기사를 쓴 기자를 ‘능욕’하는 방까지 개설될 때 분노와 참담함에 차라리 눈을 돌리고 싶었다.
딥페이크 집단 성범죄 사건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았다. 온라인 공간에서 무리를 이루어 여성의 신체를 대상화한 불법 콘텐츠를 돌려보는 디지털 성범죄의 역사는 인터넷의 역사와 시간대가 크게 다르지 않다. ‘○○ 비디오’가 있었고, 소라넷이 있었고,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이 있었다. 대부분 가해자와 피해자가 뚜렷하게 성별로 구분되는 젠더 범죄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것이 있다면 기술의 위력이다. 합성 기술의 보급으로 누구나 사진 한 장으로 가상의 성착취물을 손쉽게 만들고, 그것을 추적이 힘든 암호 화폐로 사고팔 수 있다. 텔레그램의 강력한 보안 기술은 성인 인증이나 개인 정보 공개도, 적발의 두려움도 없이 불법 콘텐츠에 무제한으로 접근할 수 있게 한다. 일상 사진이나 프로필 사진만으로 피해자가 될 수 있는 것 또한 무한히 연결되는 소셜미디어의 등장 때문이다.
딥페이크 집단 성범죄를 부추긴 게 기술만은 아니다. 과거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소극적인 수사와 가벼운 처벌, 부실한 대책이 이번 사건을 배양했다. 사건의 시발점인 서울대 딥페이크 사건도 피해자가 직접 나서서 노력한 끝에 수사와 기소를 이끌어냈다. 소라넷도 n번방 사건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2년 전 법무부 디지털성범죄 TF는 갑자기 해체됐고, 당시 이미 구체화된 대책은 서랍 속에 묻혔다.
더 근원에는 여성 혐오와 성차별이 있다. 여성을 동등한 인격체로 존중하는 사회라면 여성을 ‘능욕’하는 콘텐츠가 적어도 10대들의 놀이 문화가 되어서는 안 된다. 성평등이 국가적 의제였다면 외신이 이번 사건을 두고 “만연한 성희롱 문화 속에서 기술 발전이 디지털 성범죄의 폭발적 증가를 불러왔다”고 분석할 때 국내 정치인의 일성이 “과잉 규제가 우려된다”, “급발진 젠더 팔이, 그만할 때도 됐다”일 수도 없을 것이다.
딥페이크 집단 성범죄 사건은 징후가 아니라 무수한 경고음을 방치한 끝에 10대들까지 파고든 파국이다. 더 두려운 것은 이것이 끝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이다. 온라인에서 세를 키운 여성 혐오는 이미 현실의 여성 대상 폭력으로 나타나고 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주변의 지인이나 동료에 의해 성범죄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불안은 사회에 대한 신뢰의 근간을 허문다. 그 결말은 공동체의 실패고 국가의 위기다.
“동료 시민에 대한 집단적 모욕과 멸시가 용인되고 학습되는 사회는 존속할 수 있는가? 존속해도 되는가? 이는 국가 위기 상태이다.” 한국여성민우회의 성명이다. “국가적 재난 상황임을 선포하고 시급히 대안을 마련하라.” n번방 사건을 처음 공론화한 박지현 전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의 촉구다. 필요한 것은 국가의 의지다. 늦었지만 더 늦어서는 안 된다.
2024-09-02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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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그라이너의 눈물과 국가
지난 11일(현지시간) 폐막된 2024 파리 올림픽에서 미국은 16년 만에 중국에 1위를 자리를 뺏길 뻔 했다. 올림픽 마지막 날 열린 농구 여자부 결승에서 미국이 프랑스를 67-66, 단 1점 차로 금메달을 따면서 종합 1위를 지켰다. 성조기가 가장 높이 올라가고 미국 국가가 연주될 때 흐르는 눈물을 멈추지 못한 선수가 있었다. 바로 브리트니 그라이너였다.
2020년 미국에서 조지 플로이드 사태로 촉발된 ‘흑인 생명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시위의 소용돌이 속에 그라이너가 보여준 태도는 올림픽 시상대의 모습과는 판이하다. 그라이너는 경기 전 미국 국가가 울릴 때 항의의 표시로 무릎을 꿇었다. 심지어 그는 2020년 7월 지역언론 애리조나 리퍼블릭과의 인터뷰에서도 “솔직히 우리 시즌 동안 국가를 연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며 말하기도 했다. 그랬던 그라이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기자는 그라이너의 경기를 직접 본 적이 있다. 지난해 8월 10일 미국여자프로농구(WNBA) 피닉스 머큐리와 코네티컷 선의 대결을 관람했다. 홈팀 머큐리의 응원이 메아리친 피닉스 풋프린트 센터의 열기는 피닉스의 폭염보다 더 뜨거웠다. 머큐리 공격의 핵은 역시 2m 6㎝의 장신 센터 그라이너였다. 그는 이날 21득점을 기록하고 리바운드 10개를 잡아냈다. 경기 내내 펄펄 뛴 그라이너 덕분에 머큐리는 선을 90-84로 물리쳤다.
그라이너의 활약이 특별히 돋보인 이유가 하나 더 있다. 그는 10개월 동안 러시아에서 구금된 뒤 2022년 12월에 풀려나 친정 머큐리로 다시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라이너는 오프시즌 중 지난 2022년 2월 러시아 리그서 활동하다 대마초를 소지한 혐의로 체포돼 징역 9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의료용 대마초를 실수로 짐에 넣은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미국 정부는 수개월간 그라이너를 집으로 데려오기 위해 러시아와 협상을 벌였다. 결국 양국은 미국에 수감돼 있던 러시아 출신 ‘죽음의 무기상’ 빅토르 부트와 그라이너를 맞바꾸는 것으로 합의했다. 자국민을 데려오기 위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여길 수 있겠으나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부트는 미국의 안보를 위협하는 인물이었으며 2029년에 미국 감옥에서 석방될 예정이었다.
그라이너의 귀국 관련 백악관에서 이뤄진 백브리핑 때 한 기자는 날카로운 질문을 한다. “부트의 악명을 고려했을 때, 다른 정부들이 ‘우리도 미국인 중 한 명을 잡으면, 우리 쪽의 더 큰 인물을 되찾을 수 있겠네?’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어떻게 방지할 수 있나요?”
미국 관료는 기자에게 되물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브리트니 그라이너와 같은 사람이 허위 절차를 거쳐서, 러시아 교도소의 끔찍한 상황 속에 9년을 보내도록 강요받는 것이 어떻게 용납될 수 있을까요?”
미국 여자 농구팀의 올림픽 시상식에 대해 워싱턴포스트는 ‘그라이너의 눈물이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는 칼럼을 게재했다. 칼럼은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그들의 상징으로 오용하는 성조기를 그의 어깨에도 걸칠 수 있다. 흑인을 재산처럼 소유했던 변호사가 쓴 미국 국가는 그라이너의 노래이기도 하다”고 썼다. 그라이너의 눈물이 정말 모든 것을 말해줬다. 정부가 자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 제 역할을 다했을 때 국기와 국가를 외면했던 사람의 마음마저도 움직일 수 있음을 말이다. 그리고 그라이너는 올림픽 금메달로 미국에 보답했다.
2024-08-26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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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박형준 시장께 드리는 질문
일본 후지산 아파트 얘기로 시작해볼까 합니다. 아이에스동서(주)의 이기대 아파트 건립의 문제점을 짚는 보도를 시작한 후 최근까지도 기자에게 가장 많이 전달된 뉴스입니다. 요지는 이렇습니다. 일본의 한 건설사가 완공을 코앞에 두고 다 지은 아파트를 철거합니다. 이 아파트는 후지산을 가리고 조망권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건설 초기부터 주민들과 갈등을 빚었던 건물입니다. 4층 이하로 줄이라는 반발이 있었지만 건설사 측은 애초 11층으로 계획했던 건물을 10층으로 낮춰 건설을 강행했습니다.
하지만 후지산 경관을 해친다는 우려가 계속되자 건설사 측은 결국 다 지어 놓은 아파트를 철거하기로 했습니다. 100억 대의 손해를 감수하고도 철거를 결정한 이유는 부정적 여론으로 회사 이미지가 실추되는 것이 더 큰 손해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이 선례 덕에, 앞으로 일본에서는 경관을 훼손하는 건물은 쉽사리 짓기 힘들 겁니다. 이 뉴스는 무분별한 부동산 개발에 경종을 울린 사례로, 전 세계로 퍼져나갔습니다.
반대로 부산은, 나쁜 경험들이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습니다. 욕망을 포장해 폭력적으로 박아 올린 엘시티와 해운대 달맞이 능선을 깔아뭉갠 아파트, 이번엔 보란 듯이 턱밑에서 이기대를 정면으로 가리는 아파트라뇨. 업자들은 과거의 경험으로 부산시민을 기만하는 노하우를 축적해가고 있지만, 부산시민들에게는 나쁜 경험들만 쌓여가고 있습니다.
‘이 좋은 풍광은 땅 가진 우리 거야, 아파트 가진 우리 거야. 보고 싶으면 돈 주고 사서 봐.’ 나머지 부산시민을 2등 시민으로 만드는 이 같은 나쁜 경험들이 축적되면서 부산을 향한 자조는 늘어갑니다. 부산에 남아도는 게 아파트인데, 지을 데가 없어 이기대 앞 자투리땅까지 아파트냐, 해도해도 너무한다 소리가 봇물 터지듯 나옵니다. 쇠락해가는 도시를 보여주는 징조라는 자조 섞인 얘기도 나오고 심지어 부산을 떠나고 싶다는 얘기도 나옵니다. 내가 안 되면 내 자녀만이라도 부산을 떠나보내겠다 합니다. 언제까지 부산시민을 이렇게 2등 시민으로 만드실 건가요.
이기대 코앞에 만일 아파트가 지어진다면, 박형준 시장 때 허가 난 아파트라는 꼬리표가 내내 붙어 다닐 겁니다. 물론 “누가 저걸 허가해줬느냐”는 원망이 나올 때마다 오은택 남구청장의 이름도 빠지지 않겠지요.
보도 초창기부터 부산시장께 묻고 싶은 것이 있었습니다. 질문지를 보내라 하셨죠. 이제야 질문지를 보냅니다. 시장님이 공원 일몰제 위기에 놓인 사유지까지 사들여 이기대를 자연과 문화가 어우러진 예술공원으로 만들겠다 했을 때 많은 이들이 박수를 보냈습니다. 부산시민이 아끼고 사랑하는 이기대의 가치를 부산시장도 알고 있고, 시민들과 같은 마음이구나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이기대 예술공원 코앞에 얼토당토 않은 아파트 건립 계획이 수립되고, 공무원들은 지구단위계획 의제설정과 경관심의 프리패스라는 무리수까지 둬가며 원래 용적률을 넘어선 최대 용적률 아파트의 길을 터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장님은 왜 침묵하십니까.
부산시민은 공무원을 투표로 선출하지 않았습니다. 부산시민이 선출한 것은 부산시장입니다. 마땅히 부산시민의 입장을 대변하셔야 합니다. 답변을 기다리겠습니다.
2024-08-19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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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길들여지는 개인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를 소환한다. ‘1984’는 개인이 거대 시스템인 ‘빅브라더’에 잠식돼 자율성을 잃고 길들여지는 모습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오늘날 개인은 또 다른 ‘빅브라더’에 의해 길들여져 가고 있다.
지난달 영국 사회가 발칵 뒤집히는 사건이 발생했다. 한 괴한이 어린이 댄스교실에 침입해 세 명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슬람 이민자의 소행’이란 정보가 소셜미디어를 통해 빠르게 확산됐다. 이 짤막한 문장으로 촉발된 폭동은 전국으로 삽시간에 번졌다. 그러나 정보가 확산된 지 몇 시간 만에 ‘가짜뉴스’인 것으로 밝혀졌다. 그럼에도 폭동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았고, 1주일 넘게 이어졌다. 진실이 밝혀졌음에도 폭동은 왜 중단되지 않았을까?
그 이면에는 ‘확증편향’ 현상이 있다고 전문가는 분석했다. 확증편향은 자기가 믿고 싶은 것만 믿으려는 심리이다. 영국 폭동 가담자들에게 정보의 진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그들이 믿고 싶었던 정보인 게 중요할 뿐이다. 이슬람 이민자에 대한 자신들의 적대감을 정당화할 정보였기에 믿고 행동했던 것이다.
확증편향을 부추기는 원인 중 하나가 ‘알고리즘’이라는 거대 시스템이다. 알고리즘은 현대 사회의 또 다른 ‘빅브라더’이다. 과거에는 관습, 권력 등이 개인을 옥죄는 시스템이었으나 최근에는 포털, 소셜미디어 등 온라인 플랫폼의 알고리즘이 더 위험하다. 알고리즘은 진화를 거듭해 개인의 관심사와 선호도에 맞춰 정보를 제공한다. 이는 개인이 이미 알고 있거나 동의하는 정보만 접하게 된다는 얘기이다. 개인은 다른 관점이나 반대 의견을 접할 기회가 줄어들어, 점점 자신의 생각만 더욱 강화시킨다. 알고리즘은 개인을 ‘외눈박이’로 만든다.
이미 곳곳에서 이러한 폐해가 나타나고 있다. 알고리즘이 제공한 달콤한 정보에 취한 나머지 자신과 생각이 다른 상대 진영에 대한 적대감을 키운다. 실제로 미국 극우 집단은 ‘지난 대선이 조작됐다’는 가짜뉴스에 의회를 점거했고, 브라질 극우 세력도 선거 부정 주장에 대통령궁으로 쳐들어가기도 했다. ‘우리만 대안이고 옳다’라고 믿고 세력화하면 결국 ‘나쁜’ 집단 사고가 공동체를 갉아먹는다.
한국도 위험하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실시한 ‘2023 사회갈등과 사회통합 실태조사’에서 국민 10명 중 6명은 ‘정치 성향이 다르면 연애나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했다. 정치적, 이념적 갈등이 우리의 삶 깊숙이 파고들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문빠’, ‘개딸’, 극우 보수단체로 이어지는 팬덤 정치의 폐해는 이미 도를 넘고 있다. 이들은 자신의 뜻과 다른 사람이나 집단에 대해서는 좌표를 찍어 공격을 서슴지 않는다.
알고리즘은 인공지능(AI)과 함께 갈수록 정교하게 진화할 것이다. 결국 개인이 깨어 있지 않으면 알고리즘, 극단 정치 구조 등 거대 시스템의 부속품이나 노예로 전락할 위험이 크다. 조지 오웰은 1984에서 개인은 자유를 위해 끊임없이 저항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니체도 140여 년 전 '초인’을 역설했다. 개인이 ‘자유 의지’를 가지고 삶을 스스로 창조하고 새 가치를 만들어가자고. 개인은 지금 거대 알고리즘 시스템의 틀에 맞서 자유를 위해 저항해야 할 시점이다.
2024-08-12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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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콩가루 거제시의회, 민의는 안중에 없나
경남 거제시의회가 어수선하다. 후반기 원 구성을 둘러싼 여야 간 극한 대치로 한 달 넘게 파행하더니 이젠 당내 집안싸움으로 사분오열하는 모양새다.
발단은 2년 전 ‘합의’다. 2022년 7월 1일 임기를 시작한 제9대 거제시의회는 전반기 의장단 선출을 놓고 출발부터 파열음을 냈다.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이 의석을 ‘8 대 8’로 양분한 탓이다. 이는 1991년 지방의회 출범 이후 처음이다. 의장 자리를 놓고 20일 넘게 갑론을박하던 여야는 여론의 따가운 눈총에 뒤늦게 접점을 찾았다. 양측 협상단은 ‘보도자료’를 통해 ‘전반기엔 여당이 의장과 운영위원장, 행정복지위원장을 맡고 후반기엔 야당이 의장과 상임위원장 2석을 맡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후반기를 앞두고 여당이 말을 바꿨다. 앞서 불미스러운 사건·사고에 연루된 여야 의원 2명이 탈당해 무소속이 된 상황에 합의대로 한다면 이들 2명의 권리를 박탈하게 된다는 핑계로 합의를 파기했다.
발끈한 야당은 약속 이행을 촉구하며 의사일정 전면 보이콧을 선언하고 장외투쟁에 돌입했다. 설상가상 당시 여당 의원들이 전·후반기 의장 독식을 위한 ‘이면 합의서’를 작성한 사실이 〈부산일보〉 보도를 통해 드러나면서 논쟁은 가열됐다.
이후 의장단 선출을 위한 임시회 본회의는 개의 직후 정회, 속개, 산회를 거듭하며 공전했다. 민주당 의원과 민주당 출신 무소속 김두호 의원 불참으로 ‘의결 정족수’에 미치지 못한 탓이다. 표결을 위해선 재적의원 과반인 9명 이상이 출석해야 한다. 국민의힘과 국민의힘 출신 무소속 양태석 의원을 합쳐도 1명이 부족했다.
팽팽하던 힘의 균형은 야권 균열로 깨졌다. 민주당과 거리를 두던 김두호 의원이 지난달 31일 오후 속개된 제9차 본회의에 전격 출석하면서 정족수가 채워졌다. 이 자리에서 4선인 국민의힘 신금자 의원이 의장에, 김두호 의원이 부의장에 당선됐다.
민주당은 “의회 민주주의를 파괴한 야만적인 폭거”라며 반발했다. 국민의힘과 손잡은 김두호 의원에겐 ‘배신자’ 낙인을 찍었다. 그러면서 “의장, 부의장을 사퇴하고 원점에서 다시 협상하지 않으면 민주당 시의원 전원은 모든 의사 일정을 거부하고 끝까지 투쟁하겠다”고 경고했다.
여당 분위기도 심상찮다. 시의회는 지난 1일과 2일 소관 상임위 배정과 위원장 선출을 위한 제10차, 11차 본회의를 소집했지만 이번엔 ‘의사 정족수’ 미달로 자동 산회했다. 의사 진행을 위해선 최소 6명이 필요한데 이틀 모두 국민의힘 신금자·김동수·김영규, 무소속 김두호·양태석 의원만 배석했다. 여당인 윤부원, 김선민, 정명희, 조대용 의원은 청가를 내고 불참했다. 이를 두고 앞선 의장 선거 앙금에다 상임위원장 배분을 놓고 여당도 내홍에 빠진 것 아니냐는 추측과 함께 의회 정상화를 기약할 수 없게 된 것 아니냐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경남 18개 시군을 통틀어 여태 후반기 원 구성을 하지 못한 곳은 거제가 유일하다. 볼썽사나운 감투싸움을 바라보는 시민 시선이 고울 리 없다. 단언컨대, 민의를 저버린 이번 사태를 시민과 역사는 냉정히 기억하고 평가할 것이다.
2024-08-05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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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또 또 또 아파트
부산의 한 중견 기업에 근무하는 A 씨는 회사가 타 지역으로 이전을 결정하면서 퇴직을 고민 중이다. 회사를 따라 부산을 떠나야 하지만, 송두리째 바뀔 가족들의 환경을 생각하면 부담이 크다. 다행히 회사 이전이 3년 정도 연기되면서 당장 걱정은 덜었다.
A 씨는 기자의 지인이며, A 씨가 다니는 회사는 YK스틸이다. 최근 YK스틸이 부산을 떠나 충남 당진으로 이전하게 된 속사정이 환기되면서 뜨거운 이슈로 떠올랐다. 부산이 광역시 중 처음으로 소멸위험지역이 됐다는 소식에 부산을 떠나는 YK스틸의 사연이 소환됐고, 이를 두고 “기업 내쫓고 아파트만 짓는 부산은 ‘노인과 바다’가 될 만하다”는 자조적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1966년 사하구 구평동에 자리잡은 YK스틸은 국내 5위 철강 회사로, 지난해 말 기준 매출 6132억 원, 직원 수 350여 명에 이르는 향토 기업이다. 부산에 협력업체도 많아 지역 경제의 한 축을 담당해왔다. 근무 여건과 연봉 등이 괜찮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YK스틸의 사연은 직접 취재해 유일하게 기사로 쓴 적 있어 누구보다 잘 안다. 2012년 YK스틸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공장 바로 옆에 아파트 건립이 추진되고 있는데, 민원이 불 보듯 뻔한 곳에 아파트 사업을 용인해서는 안 된다는 하소연이었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와 한 건설사는 1996년 부산시로부터 택지로 지정된 YK스틸 인근 지역에 2800여 세대 아파트 건립을 추진 중이었다. 신평장림공단과 인접해 당초 주거 취약 계층과 근로자 지원을 위한 공공임대와 사원주택 등이 계획돼 있었지만, LH 등은 사업성 부족 등을 이유로 2011년 시에 택지개발계획 변경을 신청했고, 시는 이를 승인했다. 용도는 대부분 일반 분양으로 바뀌었고, 용적률은 늘어나고 층수도 22층에서 30층으로 완화됐다. 당시 YK스틸 고위 관계자는 “공공임대와 사원주택을 일반 분양으로 바꿔 민원이 더 커질 것 같다. 적어도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는 상황이 돼서는 안 된다”고 기자에게 읍소했다. 시는 아파트 입주 후 주민들의 민원이 쏟아지자 공장 이전을 권유하면서 마지막까지 실기했다. 이는 뼈아픈 부메랑이 돼 돌아왔다. YK스틸은 2020년 당진시와 지역민 우선 채용 협약을 체결했다. A 씨는 실직 위기에 처했다. 당진시는 일자리가 늘고 부산의 일자리는 준다.
대형마트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평당 4500만~5000만 원을 호가하는 아파트 건립이 추진되는 등 해안가 곳곳은 고층 아파트가 점령하고, 공공의 자산인 이기대 경관을 사유화하는 아파트 개발 계획이 경관 보존을 위한 어떠한 용도 제한이나 절차적 고민 없이 일사천리로 진행된 곳이 부산이다. 부산 최초 공설운동장인 구덕운동장을 재개발하겠다며 사업성을 이유로 아파트 건립을 추진 중인 곳이 부산이다. 지난해 말부터 부산에서 분양한 아파트들은 모두 미분양 상태로, 악성 준공 후 미분양 물량이 갈수록 늘어나는데도 부산의 아파트 분양가는 천장을 뚫을 기세다. 비싼 아파트를 구입할 여력이 없고, 일자리도 없는 부산에 청년들이 남아 있을 이유가 없다는 동조론도 확산되고 있다. 부산시는 YK스틸 사례를 반면교사 삼아 소멸 중인 부산의 도시 계획을 다시 고민하고, 아파트에만 진심이라는 시민들의 비판에도 귀 기울여야 한다. 인천에 추격 당하는 부산의 미래가 어둡다. nmaker@
2024-07-29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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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글로벌 허브도시 특별법에 목맬 수밖에 없는 현실
최근 박형준 부산시장이 여야 지도부는 물론 소관 상임위 위원들까지 접촉하고 있다. ‘글로벌 허브도시 조성에 관한 특별법’(이하 특별법) 연내 제정을 호소하기 위해서다. 특별법은 지난해 말 2030세계박람회 부산 유치 불발 직후 민심 달래기에 나선 윤석열 대통령이 부산을 찾아 각종 지원책을 약속하면서 처음 제안됐다.
당시 윤 대통령은 국가균형발전 차원에서 “부산이 남부권의 거점 도시가 되어야 한다”며 북항재개발 사업과 특별법 제정 추진을 약속했다. ‘종합선물세트’와도 같은 특별법을 두고 “모든 것을 다 하겠다는 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는 뜻이라며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다들 특별법 통과에 기대를 걸었다.
물류와 금융을 중심으로 한 블록체인 기반의 새로운 산업생태계로 제조업 중심의 부산 산업지형을 탈바꿈할 기회였기 때문이다. 특히 지역 상공계는 부산형 복합리조트 설립의 근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특별법 제정을 크게 환영했다. 10년간 논의에만 그친 데다 관련법 미비로 대규모 외자 유치 기회마저 놓친 지역 상공계로선 특별법이 새로운 도약의 출발점이었다.
하지만 여야 이견이 없어 국회 통과가 무난할 것이라고 했던 특별법은 21대 국회 문턱조차 넘지 못하고 끝내 폐기됐다. 지역 여야 의원들이 힘을 모으고 시민·상공계까지 나서 힘을 실어준 특별법이 본회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는 사실에 지역민의 상실감은 실로 엄청났다.
이에 여야 지역 국회의원들은 다시한번 합심해 22대 국회에서 특별법을 재발의했다. 문제는 정부 부처와 논의를 거치면서 21대 원안에 비해 크게 후퇴했다는 점이다. 각종 지원·특례 문구가 ‘해야 한다’에서 ‘할 수 있다’는 식으로 바뀌었다. 특히 원안에 있던 ‘복합리조트’라는 단어는 모두 삭제됐다. 미래 먹거리 산업으로 주목 받던 부산형 복합리조트는 추진도 전에 중단 위기를 맞았다. 일본은 법까지 개정해 자국 첫 오픈카지노를 포함한 대규모 복합리조트를 오사카에 짓고 있다. 특별법을 토대로 오픈카지노를 운영 중인 강원도와 대규모 복합리조트를 잇따라 조성한 인천은 오사카의 행보에 발빠르게 대응하고 있다. 복합리조트 유치 단계부터 막힌 부산으로선 앞서가는 도시들을 바라만 볼 수밖에 없다.
‘무늬만 특별법’이라는 지역 사회의 거센 비판에 직면했을 만큼 통과 자체에 집중했음에도 특별법은 22대 국회 논의 테이블에 오르지조차 못하고 있다. 여야 극한 대결이 지속되면서 지역 관련 법안이 찬밥신세가 된 탓이다.
지역에서 특별법 제정에 목매는 이유는 간단하다. 먹거리가 없기 때문이다. 1972년부터 20년 넘도록 지역 기업에 지방세를 중과하고 제한정비지역 지정으로 공장 신설을 억제한 정부의 정책 탓에 한때 한국 경제를 이끌던 부산은 정책 전환 이후에도 줄곧 내리막길 신세다. 설상가상으로 부산시는 광역시 가운데 처음으로 소멸위험지역에 진입했다. 지난달 한국고용정보원의 연구 결과 광역시 소멸위험지역 8곳 중 절반을 부산이 차지하는 상황은 떠나가는 청년을 붙잡지 못한 제2 도시의 초라한 현실이다.
특별법은 지역 특혜가 아닌, 국가균형발전과 직결돼 있다. 지역 사회가 특별법에 끊임없는 관심을 표명하고, 법 제정과 관련한 거대 야당의 홀대를 강력 비판하는 것은 지역의 생존이 걸려있기 때문이다. 노인과 바다‘만’ 있는 도시가 아닌 노인과 바다‘도’ 있는 도시를 만들기 위한 이니셔티브로서 특별법은 지역민들의 마지막 몸부림이다.
2024-07-22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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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예산 불용'의 도미노 효과… '불용'은 누가 부담했나
지난 8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전체회의에 최상목 경제부총리가 출석했다. 최 부총리는 회의에서 지난해 정부의 ‘불용’ 예산에 대해 “사실상 10조 원”이라고 말했다. ‘2023년도 국가결산보고서’ 상의 불용 예산은 45조 원이다. ‘사실상 10조 원’은 어떻게 나온 수치일까. 정부가 예산을 45조 원 이상이나 쓰지 않았다면 그 부담은 누구에게 돌아갔을까.
정부 예산안에 편성됐지만 실제로 ‘쓰지 않은’ 돈을 말하는 불용 예산은 지난해가 역대 최대였다. 지난해 세금이 예상보다 덜 걷히는 세수 결손이 56조 원에 달하자 정부는 예산 불용 전략을 꺼냈다. 세수 결손에 따라 예산을 수정하는 ‘감액 추경’을 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었지만 정부의 선택은 불용이었다.
결국 결산서 상으로 45조 원의 불용이 발생했는데 정부가 ‘실제’로 인정한 불용은 10조 원이었다. 기재부는 감액조정한 지방교부세(금) 18조 6000억 원과 회계·기금간 중복 계상되는 내부거래 16조 4000억 원은 ‘실제 불용’ 대상에서 제외했다.
지방에 나눠주는 세금을 18조 원 넘게 줄였는데 이는 ‘불용’도 아니라는 게 경제부총리의 설명이다. 중앙정부의 세수부족을 지방에 떠넘기면서 ‘주지 않은 돈’도 아니라고 주장한 셈이다.
중앙정부의 불용을 떠안은 지방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2023년 결산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부산시 총수익은 전년 대비 2877억 원(2.03%) 줄었다. 중앙정부가 나눠주는 지방교부세가 전년 대비 1949억 원(10.8%)이나 줄어든 탓이다. 이는 지방 교육청에 지급되는 지방교육재정교부금 감소분은 제외한 수치다.
수익이 준 부산시는 각 구군에 나눠주는 조정교부금 등 ‘이전 지출’을 줄였다. 지난해 부산시는 시·도비보조금, 조정교부금 등의 ‘정부 간 이전 비용’을 전년 대비 3833억 원(5.02%) 줄였다. 민간에 지원하는 예산도 줄였다. 민간보조금, 출연금, 전출금비용 등 ‘민간 등 이전 비용’은 전년 대비 2323억 원(10.28%) 줄였다. 중앙정부가 인정하지 않은 예산 삭감의 영향이 각 지자체와 지역의 민간단체, 기관까지 도미노 효과를 낸 셈이다.
중앙정부 예산 불용에 타격을 입은 부산시는 허리띠를 졸라매고 예산을 아껴서 잘 쓴 걸까. 그렇지 않아 보인다. 지난해 부산시의 일반회계 세출 불용액은 3085억 원으로 전년 대비 127억 원(4.3%) 증가했다. 수입이 줄어 구군에 나눠주는 예산까지 줄인 부산시는 국비를 지원받았다가 쓰지 못해서 중앙정부에 되돌려 준 ‘보조금 반납’도 크게 늘었다.
지난해 부산시는 684억 원의 국비보조금을 반납(실제 반납 기준)했다. 이는 2022년의 국비보조금 반납액 169억 원의 4배 규모다. 식만~사상간(대저대교) 혼잡도로 사업은 국비 243억 원 가운데 2억 원만 지출해 240억 원의 보조금반납금과 보조금 정산잔액 1억 원이 발생했다. 전기자동차 구매지원 사업에서도 1389억 원의 보조금 가운데 264억 원을 반납했다.
지난해 세수 결손에 따른 도미노 효과는 지방정부, 민간단체까지 광범위한 타격을 입혔다. 최상목 부총리는 지난 8일 “올해도 세수사정이 썩 좋은 것 같지 않다”고 말했다. 현재 세수 진도를 감안하면 올해 지자체 보통교부세가 3조 원 줄어들 것이라는 민간(나라살림연구소)의 분석도 있다. 중앙정부는 올해 또다시 예산을 ‘안 쓰는’ 전략을 쓸 수 있고 지방정부는 또다시 예산을 ‘못 쓰는’ 상황을 겪을 수 있다.
2024-07-15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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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울산대병원 이전 논란의 함의
전국적인 의정 갈등의 불똥이 울산에서 때아닌 대학병원 이전 논란으로 옮겨붙었다. 김두겸 울산시장이 지난 4월 기자회견에서 울산 외곽인 동구에서 50여 년 자리한 울산대학병원을 핵심 시가지로 옮기자며 불씨를 댕겼다.
화들짝 놀란 민심은 두 동강 날 조짐이다. 동구민은 “지역 소멸을 부추기는 망상”이라며 발끈하고, 다른 구·군 주민은 “이참에 접근성 좋은 도심지로 옮겨 시민 이용 효율을 높이자”며 내심 반기는 눈치다.
당사자인 울산대병원이 어떻게 생각하든 한 번 타오른 논란은 꺼질 줄 모른다. 단순히 김 시장이 바짝 마른 민심에 불쏘시개를 던진 탓일까. 논란을 떠나 그 밑바닥을 걷어 보면 의료 불모지에 방치된 울산 시민들의 오랜 불만이 커다란 장작더미처럼 쌓여 있음을 느낀다.
전국 17개 광역시도 중 공공의료원도, 국립대 병원도 없는 곳은 오직 울산뿐이다. 인구 1000명당 의사 수는 2022년 기준 1.62명으로 전국에서도 바닥권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울산 시민들은 기를 쓰고 수도권 병원으로 달려간다. 2022년 기준 서울 ‘빅5병원’으로 원정 진료를 떠난 울산 환자는 2만 명에 육박한다. 소아암 환아들의 원정 진료는 심각성을 더한다. 2022년 울산대병원 소아암 전문 교수 퇴임으로 병동 운영이 중단되면서다. 울산의 유일한 병원학교도 올해 1월 개교 17년 만에 문을 닫았다. 아프면 서럽다는데 명색이 산업수도 울산에서는 더하다.
응급의료체계도 허약하기 짝이 없다. 지난 3년(2021~2023년)간 이른바 ‘응급실 뺑뺑이’는 총 549건에 달했다. 울산 시민이 뽑은 2023년 시정 베스트 1위는 ‘지역응급의료센터 추가 지정’이었다. 역으로 취약한 의료 인프라에 허덕이는 울산 현실이 여실히 반영된 것 같아 씁쓸함을 자아낸다.
지역사회가 손 놓고 있던 것은 아니다. 시는 22만여 명 시민 서명을 받아 울산 첫 종합 공공시설인 울산의료원을 건립하려 했지만, 번번이 정부 예비타당성조사 문턱을 넘지 못했다. 대선 공약이면 무슨 소용인가. 매번 ‘그놈의 경제성’이 발목을 잡았다. 사회적 약자와 재난 의료 상황에 대처한다는 명분에도 정부는 마이동풍이다. 시는 향후 정부에 울산의료원 예타 면제를 요청한다고 하나, 성사 여부는 장담하기 어렵다.
대한민국 최초 산업기지로 60년 넘게 혹사당한 울산에 공공병원 건립마저 돈벌이 잣대로 재단하는 건 가혹한 처사라는 지적이 많다. 정부가 언제까지 울산을 상대로 왕서방 노릇만 할 거냐는 실망 섞인 비판이 가득하다.
이런 상황에 지역에 하나밖에 없는 대학병원을 옮기자니 시민들 사이에 갑론을박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김 시장은 “의사 정원을 늘리는 지금이 울산대병원을 이전할 마지막 기회”라고 호소한다. 이 말이 울산의 낙후된 의료 환경을 발전시킬 ‘마지막 기회’란 말처럼 들려 안타깝다.
울산대병원 이전 논란은 정부 홀대로 곪을 대로 곪은 민심의 환부가 갈라지고 터지는 예상치 못한 후유증이다. 상급종합병원의 수도권 쏠림 현상, 필수의료서비스의 지역 간 불균형 등 국내 의료체계의 고질병이 울산에서도 합병증처럼 불거지는 것이다. 정부가 울산에 국한된 내홍쯤으로 치부해선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024-07-08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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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기후 소송을 기다리며 여름을
기후 변화는 과학이고 모든 과학은 암울한 전망을 가리킨다. “우리는 지구를 가지고 러시안룰렛 게임을 하고 있다. 기후 지옥으로 향하는 고속도로에서 빠져나갈 출구가 필요하다.” 이것은 극단주의자의 엄포가 아니라 유엔 사무총장의 논평이다. 남극 해빙은 역사상 가장 낮은 수위로 녹아내렸고 지구는 12개월 연속으로 역대 가장 더운 달 기록을 이어가고 있다. 세계기상기구는 2028년 내에 지구 연평균 기온 상승 폭이 ‘산업화 이전 대비 1.5도’를 한 번은 넘어설 확률이 80%라고 예측했다.1.5도는 전 지구적 기후 재앙을 피하기 위한 마지노선이다.
모두가 1.5도의 의미를 체감하진 못해도 갈수록 사나운 폭염의 위력은 안다. 최근 가장 더웠던 2018년 고온으로 인한 초과 사망자는 804명으로 2011~2020년 연평균(211명)의 네 배다. 특히 취약한 계층도 있다. 2022년 유럽 폭염 사망자(6만 1672명) 가운데 절반 이상은 80세 이상이었고, 여성이 남성보다 63% 많았다. 스위스 환경단체 ‘기후 보호를 위한 노인 여성’은 이런 상황에 정부의 책임을 묻기로 한다. 지난 4월 유럽인권재판소는 이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국제법원이 기후 변화 관련 정부의 책임을 인정한 첫 번째 판결이다.
그리고 지금 한국에서는 아시아 최초의 기후 소송이 진행 중이다. 헌법재판소는 시민 255명이 참여한 헌법소원 네 건을 병합해 4월과 5월 두 차례 공개 변론을 열었다. 청소년 19명이 정부의 소극적인 기후 대응이 미래 세대의 기본권을 침해한다며 첫 헌법소원을 제기한 지 4년 만이다. 청구인들은 탄소중립기본법 등에서 정한 2030년까지의 국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가 국제사회가 합의한 ‘1.5도’ 목표를 지키기에 불충분하고 2030년 이후에는 감축 목표조차 없어 생명권과 환경권, 행복추구권 등 헌법상 기본권을 침해한다고 주장한다.
소극적인 감축 목표와 경로 설정으로 ‘1.5도’ 목표 전까지 쓸 수 있는 탄소 배출량(탄소 예산)을 당겨 쓰면 미래 세대에 대응 책임을 전가해 평등권을 침해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2021년 독일 연방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도 소개했다. 같은 맥락으로 독일 정부의 2030년 감축 목표가 세대 간 형평성을 침해한다고 판단한 결정이다. 이후 독일은 2030년 목표를 상향하고 공백이었던 2040년 목표도 신설했다.
헌법재판소는 이르면 9월 최종 결정만 남겨 놓고 있다. 결정에 따라 정부의 향후 대응은 달라질 수 있다. 정부 측은 국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는 우리나라의 상황에 맞게 자율적으로 정할 수 있고, 미래에 기후 재난이 발생하더라도 국가 조치로 충분히 보호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어떤 결론이 나오든 변하지 않는 것은 코앞으로 다가온 기후 재난에서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보다 적극적인 대응이 필요하다는 것이고, 정부에 책임을 묻는 기후 소송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는 점이다. “어른들은 투표를 통해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을 뽑을 수 있지만, 어린이들은 그럴 기회가 없다”는, “지금 당장 행동하지 않으면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이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청구인, 서울 흑석초등학교 6학년 한제아 양과 함께 기후 소송의 결론을 기다린다.
2024-07-01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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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쓰레기 줍는 오타니
운동선수는 운동만 잘하면 될까. 올해 초 카타르 아시안컵에서 벌어진 한국 축구대표팀의 ‘탁구 사건’이 알려지면서 이강인 선수의 인성 논란이 일었다. 같은 값이면 인성 좋은 선수를 편드는 게 인지상정. 그런데 실력은 좀 모자라도 착한 선수, 성품은 그닥이지만 실력은 뛰어난 선수 중에 골라야 한다면? 얼마 전까지만 해도 후자를 택했지만, 최근 ‘이 선수’에 대해 알게 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미국 메이저리그(MBL)에서 뛰는 일본인 야구선수 오타니 쇼헤이다.
‘외계인’이란 별명이 붙을 정도로 우주 최강 실력을 갖춘 오타니는 인성도 ‘넘사벽’ 수준이다. 종종 야구장에서 쓰레기 줍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혀 화제가 되곤 한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연봉을 받는 야구선수와 쓰레기라니. 언뜻 부조화스럽지만 ‘학생 오타니’를 알고 나면 이해가 된다.
오타니는 학창 시절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꼼꼼히 계획표를 세워 실천한 일화로 유명하다. ‘만다라트 기법’으로 알려진 이 계획표는 가로세로 9칸씩 81개 네모칸 한가운데 최종목표를 놓고, 이를 둘러싼 8칸에 중간목표, 나머지 칸은 중간목표를 이루기 위한 64개 실행 계획으로 채우게끔 돼 있다. 오타니는 ‘드래프트 1순위’란 최종목표를 이루기 위해 몸만들기, 제구, 구위, 스피드 160km/h, 변화구, 운, 인간성, 멘탈 등의 중간목표를 세웠다. 흥미로운 건 중간 목표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인간성’과 ‘운’, 그중에서도 운을 둘러싼 실행 계획이다. 인사하기, 물건 소중히 다루기, 긍정적 사고, 책읽기, 심판을 대하는 태도, 야구부실 청소 따위와 함께 ‘쓰레기 줍기’도 포함돼 있다.
오타니는 ‘남이 무심코 버린 행운을 줍는다’는 생각으로 쓰레기를 줍는다고 설명한다. 그의 계획표대로라면 쓰레기를 잘 주운 덕분에 남의 운까지 끌어모았고, 실력도 갖춘 야구선수로서 성공 신화를 이뤄낸 셈이다. 오타니의 ‘운 만들기’는 세계적인 스타가 된 뒤에도 한결같다. 억울한 판정에도 심판을 향해 미소 짓고, 출루할 땐 자신 찼던 보호장구를 두 손으로 공손하게 볼 보이에게 건넨다.
오타니의 이런 면모를 알고 나니, 운동선수의 실력보다 인성에 더 마음이 간다. 최근 롯데 자이언츠 선수 중에서는 손호영이 눈에 들어왔다. 잘할 때나 못할 때나 더그아웃에서 만난 그의 말과 행동은 한결같았다. 자신을 낮추고 동료 선수와 감독·코치진에 대한 고마움을 먼저 이야기하는 30살 늦깎이 신인을 보면서, 뜻하지 않은 트레이드로 자이언츠 유니폼을 입었지만 뒤늦게나마 잘 풀렸으면 좋겠다는 응원의 메시지를 속으로 건넸다. 한낱 출입 기자의 응원이 아니라 스스로 운을 쌓은 덕분일 테다. 손호영은 어느새 내야 주전 한 자리를 꿰찼고, 얼마 전 대선배 박정태의 31경기 연속안타 기록을 넘볼 정도로 KBO리그에 강인한 인상을 남겼다.
자신만의 만다라트 계획을 실천하는 선수들로 가득한 팀을 상상해 본다. 그런 팀의 만다라트 계획표에는 ‘우승’이란 최종목표 주변 칸이 실력 좋고 인성은 더 좋은 선수들로 둘러싸일 테다. 2000년대 들어 세계 축구계를 양분했던 메시와 호날두. 신이 둘 중 메시에게만 월드컵 우승을 선물한 걸 보면 실력 말고 다른 차이가 있음이 분명하다. 롯데 우승을 염원하는 팬으로서, 사직야구장에서 쓰레기 줍는 선수들을 많이 만나고 싶다.
2024-06-24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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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함무라비 법전과 사적 제재
함무라비 법전. 고대 바빌로니아를 통치한 함무라비왕이 기원 전 1750년께 반포한 법전이다. 현존 최고(最古)의 성문법이며, 이후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은 법전 제정에 영향을 미쳤다. 함무라비 법전은 동해보복법의 전형이기도 하다. 동해보복법이란 피해자가 입은 피해와 같은 정도의 손해를 가해자에게 가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 법을 말한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눈을 멀게 했다면 그 자신의 눈알을 뺄 것이다’ 등이 함무라비 법전의 대표적인 동해보복법 조항들이다.
함무라비 법전 얘기를 꺼내든 건 최근 사회적 이슈로 떠오른 사적 제재 논란이 갈수록 증폭되고 있어서다. 사적 제재가 논란이 된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근래만큼은 아닌 듯하다. 범죄자 신상 정보를 공개하는 사적 제재 사이트인 ‘디지털 교도소’가 2020년 문을 열었다 폐쇄된 뒤 4년 만에 재등장했다. ‘극악무도한 범죄자에 대한 관대한 처벌에 한계를 느끼고, 신상 정보를 공개해 사회적인 심판을 받게 하려 한다’는 취지는 사적 제재 논란에 불을 지폈다. 이를 두고 헌법이 보장하는 무죄 추정의 원칙에 어긋나는 데다, 무분별한 신상 공개가 피해자와 유족의 ‘잊힐 권리’를 앗아간다는 문제점이 있지만, 한편으론 신상 공개를 지지하는 양가적 감정을 느끼는 국민들이 많다.
이어 20년 전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 가해자들이 소셜 미디어를 통해 공개되면서 사적 제재 논란에 기름을 부었다. 당시 솜방망이 처벌을 받은 가해자들의 신상과 일상이 공개되면서 국민들은 과거의 충격을 떠올리며 또다시 공분하고 있다. 폭로전을 응원하는 댓글도 이어진다.
디지털 교도소가 재등장하고 20년 전 밀양 사건이 소환된 지금, 우리의 사법 체계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과거보다 더 피해자들의 편에 서 있는지, 가해자들을 엄벌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흉기를 이용한 교제 살인이 난무하고, 납치·강도·강간·살인과 묻지마 칼부림 등 충격적인 강력 범죄가 줄을 잇고 있다. 피해자나 유족의 엄벌 요구에도, 재판 과정에서 가짜 반성문 제출, 기습 공탁, 정신 질환 호소 등의 감형 시도나 국민 법 감정에 어긋나는 판결 등에 국민들의 분노는 치솟고 있다.
SNS의 발달로 강력 범죄자의 신상을 공개하는 사적 제재는 앞으로 더욱 늘어나고, 전파 속도도 빨라질 것으로 예상된다. 국민 알 권리와 공익을 위한 것인지, 사회적 심판으로 포장해 조회수를 늘리거나 상업적으로 이용하려는 목적인지 논란 속에 사적 제재는 위태로운 외줄타기를 계속하고 있다. 신상 공개를 통한 사적 제재에 많은 국민들이 열광하지만, 사적 제재가 난무하는 사회가 바람직하고 정의로운 사회라고 말하긴 어렵다.
뻔한 결론이겠지만, 형법 개정을 통한 처벌 규정 강화, 검찰과 법원의 엄격한 법 집행 등으로 사법 체계에 대한 불신을 해소하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이다. 극악무도한 범죄를 접한 많은 국민들은 동해보복형 형법 규정과 엄벌주의로 잘 알려진 함무라비 법전과 같은 강력한 처벌과 법치를 원한다. 함무라비 법전도 결국 사적 제재의 악순환을 막고 법치를 통해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었음을 되새겨본다.
2024-06-17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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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한국 정치, 정반합은 언제쯤
헤겔이 당황하고 있을지 모른다. 한국 정치판을 보면서. 헤겔은 변증법, 국내에서는 ‘정반합’ 이론으로 알려진 사상가이다. 정반합 이론은 1970~80년대 민주화 운동이 한창일 때 주목 받았다. 한국 진보 진영들이 군부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고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한 이론적 토대로 이용됐다. 세월이 지났지만, 정반합 이론은 사회와 개인이 성장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강력한 도구이다.
정반합 이론은 ‘정’, ‘반’, ‘합’의 세 단계로 이뤄진다. ‘정’은 현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주장이나 개인의 상태, ‘반’은 ‘정’에 대한 반대 또는 대립되는 주장 그리고 ‘합’은 ‘정’과 ‘반’의 갈등을 통해 도출된 새로운 개념이나 상태를 의미한다. 이러한 과정을 반복하며 사회나 개인이 성장한다는 것이 요점이다.
그런데 헤겔이 지금의 한국 정치 현실을 보면 머리가 아플 듯하다. ‘정반합 이론이 틀렸나’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거대 양당 중심의 한국 정치 구조상 ‘정’은 4·10 총선에서 승리해 최대 의석을 차지하고 있는 민주당일 것이다. 이에 맞선 국민의힘을 ‘반’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정’과 ‘반’은 ‘강 대 강’ 대립과 극한 갈등만 되풀이할 뿐 민생을 담은 발전적인 ‘합’은 내놓지 못하고 있다.
민주는 총선 승리에 고취된 것일까? 아니면 헤겔을 따르던 진보 진영이 지금은 기득권인 ‘정’이 돼 ‘합’을 망각한 걸까? 선거 이후 입법 독주를 밥 먹듯 이어가고 있다. 자기들에게 유리한 원 구성을 위해 단독 표결도 강행할 모양새다. 소수 강성 지지층이 상식적 다수를 지배하는 ‘뉴노멀’이 당내 자리 잡는 것 같아 안타깝다. 무엇보다 특정인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당헌·당규 개정까지 이뤄지고 있다. 또 국힘은 총선에서 참패하고도 쇄신은 말뿐이고 당권을 둘러싼 내부 권력 투쟁에 몰두해 있는 모습이다. 민주의 입법 독주에 마땅한 방법을 찾지 못하고 대통령 거부권만 남발하고 있다. 특히 해외직구 규제 철회 등 굵직한 정책 이슈마다 헛발질을 하고 있다. 결국 22대 국회 첫 본회의가 여당이 불참한 가운데 ‘반쪽’으로 시작됐다. 야당이 단독으로 국회를 개원한 것은 헌정 사상 처음이다. 22대 국회 역시 21대처럼 지루한 갈등만 이어가며 민생을 외면하는 최악 국회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이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이 있다. 사실 4·10 총선에서 민주가 압승한 것처럼 보이지만 득표율을 따지면 민주가 승리했다고 보기 어렵다. 실제로 민주와 국힘의 득표율 차는 5.4%에 불과했다. 5.4% 격차에도 민주는 승리자가 됐고, 국힘은 패배자가 됐다. 지역구에서 득표 수 1위 후보만 당선되고 나머지 후보의 표는 ‘사표’가 되는 현행 소선거구제 영향이 크다. 민심이 반영된 득표율만 놓고 따졌을 때에는 그 누구도 승자가 아닌데 말이다. 현행 소선거구제 탓에 절반 정도가 사표가 됐으나 그 민심은 여전히 살아있다. 민주는 사표가 50%에 육박한다는 생각을 하면 승자로서 자신의 입장만 고집해서는 안 된다. 국힘 역시 사표가 패배의 핑곗거리나 되는 것처럼 기존 입장을 고수할 명분으로 삼을 수 없다. 양당 모두 승리자가 아니라 패배자 입장에서 민심을 바라보자. 사표로 얻은 승리 대신 민심이 반영된 승리 말이다.
2024-06-10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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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묻지 마 공모 사업, 누가 누굴 탓하나
정부 긴축 재정에 재정자립도가 낮은 지방자치단체들이 정부나 공공기관 ‘공모 사업’에 사활을 걸고 있다. 단체장 입장에선 부족한 재원을 충당하면서 치적도 쌓을 수 있으니 일석이조다. 그런데 괜한 욕심에 ‘일단 되고 보자’는 식으로 사업을 따냈다가 낭패를 보는 사례도 적지 않다.
경남 고성군은 2019년 해양수산부 공모를 통해 유치한 ‘스마트양식 클러스터’ 사업권을 최근 반납했다. 스마트양식 클러스터는 노동집약적인 양식산업을 디지털화해 미래 식량산업으로 전환할 거점을 확보하는 사업이다. 한국남동발전이 운영 중인 삼천포발전본부 내 회처리장 부지에 국비 220억 원을 포함해 400억 원을 들여 스마트양식 시험·실증 센터를 구축하는 게 핵심이다. 여기에 남동발전이 400억 원을 들여 온배수 공급 설비를 제공하기로 해 지자체와 기업이 협력하는 모델로도 기대를 모았다. 계획대로라면 1780억 원의 생산 유발과 586억 원의 부가가치 유발, 1112명의 일자리 창출 효과가 있을 것으로 분석됐다. 하지만 부족한 경제성 탓에 실제 사업 추진은 가다 서기를 반복했고, 사업비를 감당 못 한 민간사업자가 사업 포기를 선언하면서 없던 일이 됐다.
‘에어돔 구장’이나 ‘일자리연계형 지원주택’도 마찬가지다. 에어돔은 사계절 운영 가능한 체육시설이다. 고성군은 스포츠마케팅 인프라 구축을 명분으로 문화체육관광부·국민체육진흥공단 공모에 도전, 사업자로 선정됐다. 그런데 허술한 사전 용역 탓에 시작도 못 한 채 하세월 하다 1년 만에 백지화했다. 뒤늦게 따져보니 실제 공사비와 운영비를 고려할 때 배보다 배꼽이 크다는 이유였다.
일자리연계형 지원 주택은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청년 노동자나 항공 등 전략산업 종사자에 공공임대아파트를 공급해 지역 정착을 유도하는 사업이다. 문제는 고성군 자부담이 너무 크다는 점이다. 총사업비 944억 원 중 정부 재정 지원은 348억 원이 전부다. 나머지는 모두 군비로 충당해야 한다. 자칫 에어돔, 스마트양식 전철을 밟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통영시 ‘삼도수군통제영 실감콘텐츠 체험존’(통영VR존)은 두고두고 애물단지가 된 경우다. 통영VR존은 2018년 문화체육관광부 고용산업위기지역 문화콘텐츠 지원을 받아 국비 25억 원에 도비 7억 5000만 원, 시비 17억 5000만 원을 보태 조성됐고, 2020년 5월 개장했다. 연평균 이용자 10만 명을 예상했지만, 실제로는 하루 20명에도 못 미쳤고 불어난 적자에 사실상 폐관 수순을 밟고 있다.
무분별한 공모 사업은 가뜩이나 열악한 지방 재정을 압박하는 족쇄가 된다. 이는 행정 서비스 질 저하로 이어져 지역민에게 돌아온다. 횡성군의회는 2019년 전국 지자체 최초로 ‘공모사업 관리 조례’를 제정했다. 조례에 따라 집행부는 10억 원 이상 공모사업은 신청 전 의회와 협의를 거쳐야 한다. 주민과 지역에 꼭 필요한지, 사업을 수행할 역량은 충분한지 따져볼 최소한의 제도적 장치인 셈이다. 고성군과 통영시도 각각 2019년과 2023년 같은 조례를 제정해 시행 중이다. 하지만 일련의 사태를 볼 때 제대로 작동 했는지 의문이다. 이제 와 집행부 탓만 할 게 아니라 악순환의 고리 끊어내기 위해 지방의회는 어떤 노력을 했는지도 곱씹을 필요가 있다.
2024-06-03 [17: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