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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노쇠한 '조선 도시'에 믿을 건 외국인 노동자뿐?
전국 228개 기초지자체 중 청년(20~39세) 인구가 가장 빠르게 줄어드는 곳, 바로 경남 거제다. 얼마 전 한국고용정보원이 발표한 ‘청년층 이동과 지역의 인구 유출 보고서’를 보면 2014년 7만 7244명이었던 거제시 청년 인구는 2023년 4만 6283명으로 3만 960명 감소했다. 연평균 -1.26%꼴이다.
청년층 비중도 전국 평균에도 못 미치고 있다. 거제시 청년 통계에 따르면 2023년 기준 지역 19~39세 인구는 5만 2781명이다. 이는 전체 인구 23만 8671명 중 22.1%로 전국 평균 22.6%보다 낮은 수준이다. 청년 중에도 젊은 층에 속하는 19~24세 인구는 1만 326명에 불과했다.
청년 기준을 15~39세로 했던 2020년 첫 조사에서 32.1%로 전국 평균(31.9%)을 웃돌았던 거제시 청년 인구 비율은 2022년 28.3%를 기록하며 전국 평균(30.5%) 밑으로 떨어졌고, 이번 통계에서도 전국 평균을 넘지 못했다. 한때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젊은 도시’였던 거제가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걸까?
거제는 세계 조선 빅3로 손꼽히는 삼성중공업과 한화오션 사업장이 있는 명실상부 조선 도시다. 2000년대를 전후해 조선업이 초호황을 누리면서 지역 경제도 덩달아 신바람을 냈다. 인구도 급증해 자급자족이 가능한 30만 명에 육박했다.
그런데 2015년을 기점으로 해양플랜트 악재에다 상선 발주 시장까지 얼어붙으면서 상황이 급반전됐다. 양대 조선소가 경영난에 허덕이자, 정부는 국가 기간 산업 경쟁력 강화를 명분으로 고강도 구조조정을 밀어붙였다. 일감이 바닥난 상황에 감원 칼바람까지 불면서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찾아 하나, 둘 거제를 등졌다. 8만 명을 훌쩍 넘겼던 조선업 직접 종사자 수는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그러다 2022년을 전후해 업황은 살아났지만 노동자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불황을 거치며 임금 수준이 크게 낮아진 데다, 경기 부침이 심한 조선업 특성상 호황이 지나면 언제든 다시 칼바람을 맞을 수 있다는 불안감도 여전한 탓이다.
이 때문에 업계에서는 일감은 넘쳐나는데 일할 사람이 없다는 하소연이 잇따랐다. 이대로는 수주한 선박 납기를 맞추기 힘들 것이란 우려와 함께 조선산업 경쟁력이 떨어질 수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이에 정부가 내놓은 대책이 외국인 노동자 확대였다. 이후 지역 조선업계에도 외국인 노동자가 대거 수혈됐다. 2021년 5404명에 불과했던 거제 지역 외국인 수는 올해 5월 말 기준 1만 5465명으로 세 곱절 늘었다. 덕분에 업계는 급한 불을 껐지만, 부작용도 적지 않다.
일자리 대부분을 외국인 노동자가 차지하면서 정작 지역 노동자는 일자리를 찾아 지역을 떠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이 때문에 조선업 활황에도 정작 지역 인구는 줄어드는 구조적 문제도 드러나고 있다. 게다가 외국인 노동자들은 급여 대부분을 본국으로 송금하는 실정이라 지역 경제에는 긍정적인 소비 효과를 주지 못한다는 볼멘소리도 나온다.
이제 외국인 노동자는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됐지만, 이대로는 장기적 관점에서 지역의 성장 기반은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 지역과 산업 그리고 인구 문제를 아우를 수 있는 정책을 더 깊이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2025-06-30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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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직장 내 괴롭힘, 그리고 영화 ‘밀양’의 메시지
최근 재주목 받고 있는 영화 ‘밀양’. 직장 내 괴롭힘을 한 번이라도 당해본 사람이라면 결코 잊을 수 없는 장면이 있다.
자식을 잃은 신애가 교도소에 있는 아들의 유괴범을 찾아간다. 그녀는 절망 끝에서 용서라는 마지막 고비를 넘고자 한다. 그 순간, 유괴범은 담담하게 말한다. “하나님께서 제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아들을 잃은 그녀는 이 한마디에 다시 한 번 무너진다. 도대체 누구에게 용서를 받았는지, 영화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영화 속 ‘하나님’은 오늘날 한국 사회의 메타포라 볼 수 있다. 직장 내 폭행이나 갑질, 성희롱 등 직장 내 괴롭힘 사건에서 가해자 대다수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조직에 남고, 정작 피해자에겐 트라우마와 악몽이 삶의 일부가 되는 현실을 선명히 보여준다. 피해자는 무너진 자존감과 정체성, 다시는 회복하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 속에서 지옥 같은 삶을 견디는데 말이다.
통계는 이 비극을 수치로 입증한다. 직장 내 괴롭힘 피해자 10명 중 7명은 회사를 자발적으로 퇴사한다. 반면 가해자의 약 90%는 그대로 조직에 남는다. 일부는 30년 넘게 재직한다는 보고도 있다. 이 비정상적인 풍경이 너무나도 익숙한 게 한국 사회 문화다.
왜 이런 일이 반복될까? 그 중심에는 가해자 중심의 조직 구조가 단단히 놓여 있다.
심리학자들은 가해자의 자기 합리화 기제를 지적한다. “내가 그런 짓을 했다고?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닌데.” 이 불편함을 피하기 위해 가해자는 “순간의 실수였다”, “내 본심은 그런 게 아니었다.” “그땐 너무 힘든 상황이었다”, “그 사람도 날 자극했잖아” 식의 자기 구원 서사를 만든다. 영화 ‘밀양’ 속 유괴범 역시 그렇다. 그의 “신께 용서 받았다”는 말은 피해자를 향한 사죄가 아니라, 자신의 죄책감을 없애기 위한 자기중심적 언어였다.
한국 사회의 문화적 문제도 주요 원인으로 거론된다. 한국 사회는 갈등을 회피하고, 체면을 중시하며, 집단의 평온을 유지하려는 성향이 강하다. 공감보다 회피, 진실보다 침묵, 책임보다 체면이 우선 시 된다. 그래서 피해자에게 “분위기를 흐린다”, “그만 좀 해라”, “네가 너무 예민한 거 아냐?” 같은 말로 ‘용서’를 강요한다.
특히 “술에 취해 그랬다”, “몇 대 맞은 걸로 오버하냐?”라는 말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직장 내 괴롭힘을 정당화하는 핑계로 쓰인다. 한국 문화가 이렇다 보니 직장 내 괴롭힘을 방관하는 이들도 많다. 방관자들로 인해 그동안 ‘가족’, ‘선배’, ‘동료’라는 이름 아래 얼마나 많은 폭력과 폭언이 용인돼 왔는지 우리는 스스로 되물어봐야 한다.
마지막으로 현 사회가 여전히 형벌 중심의 구조인 점도 가해자에게 ‘가짜 반성’의 기회를 준다. 징계나 사과가 이뤄지면 사건은 끝났다고 간주된다. 그러나 피해자의 고통은 형벌로 끝나지 않는다. 실제 통계를 보면, 직장 내 괴롭힘 가해자의 사과와 징계 후에도 피해자는 심리적 후유증에 시달린다. 문제는 이러한 구조가 조직 생산성에도 심각한 손실을 초래한다는 점이다. WHO에 따르면, 직장 내 괴롭힘으로 인한 손실은 연간 1조 달러에 달한다. 영화 ‘밀양’은 일상이라 여기는 이 사회의 부조리를 직시한다. 진짜 잘못한 가해자가 고통을 안고 반성하며 살아가는 게 정상적인 사회다.
2025-06-23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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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기다림을 해소하는 저출생 대책
“때 되면 다 한다. 걱정 안 해도 된다”
28개월 아이를 키우는 ‘초보 아빠’가 지난 2년 동안 가장 많이 들은 말이다. 뒤집기를 언제 하지 하며 아이를 지켜볼 때도, 첫걸음마를 기대하며 아이에게 눈을 떼지 못하는 순간에도 어른들은 이렇게 말했다. 지나고 보니 그 말은 정답이었다. 조금 느릴지언정 때가 되면 다행히도 아이는 곧잘 성장의 궤도에 올라섰다. 어른들은 그냥 응원하고 기다려주기만 하면 됐다.
2년간 아빠로 살아가며 가장 크게 각인된 단어는 기다림이다. 아이의 성장 과정에서 기다림도 컸지만, 아이가 커가는 순간순간 겪어보지 못한 기다림과 마주해야했기 때문이다. 아이가 태어나고 1년이 지나 맞벌이를 하는 탓에 어린이집에 아이를 보내야 했다. 저출생 시대에 어린이집을 보내는 일이 경쟁일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어린이집 신청을 하자 대기 순번이 나왔다. 앞 순번의 아이가 다른 어린이집으로 가면서 우여곡절 끝에 어린이집 개원 전날 어린이집에 가까스로 등록했다. 아내와 이야기했다. “우리나라 저출생 국가 맞아?”
아이가 아프자 기다림의 난도는 더 올라갔다. 우리가 흔히 아는 개인 병원이 문을 여는 시간은 오전 9시다. 하지만 소아과에 가는 시간은 오전 7시다. 병원 문을 열기 전 ‘오픈런’을 한다. 오전 7시 병원 줄을 서기 위해 문 닫힌 병원 앞에서 기다렸다. 줄을 서 받아 든 번호표는 28번이었다. 경험상 한 시간에 12명 정도 진료가 이뤄지니 오전이면 진료할 수 있다며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주말이 돼 기분 전환을 위해 간 백화점에서도 기다림은 이어졌다. 유아차를 끌고 도착한 백화점에서 엘리베이터 타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엘리베이터 한편에 ‘유아차 우선 탑승’이라는 문구가 적혀있었지만, 유아차가 먼저 타기에는 너무 많은 인파가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다. 엘리베이터 몇 대를 보내고 나서야 겨우 연신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외치며 아이와 함께 엘리베이터에 탔다.
지난해 출산율 0.75명. 한 가정당 아이 한 명도 낳지 않는 시대. 하지만 현실 육아는 기다림과 경쟁의 연속이다. 정부는 아동수당을 늘리고 출산지원금을 늘리며 저출생 극복에 사활을 걸고 있다. 하지만 아동수당이 늘어나고 출산지원금이 늘어나도 출산율은 극적인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 냉정히 말해 수당이 ‘둘째를 낳을까?’ 하는 고민까지 이어지지는 못하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테다.
실제로 한국조세재정연구원 인구정책평가센터에 따르면 지방자치단체의 출산장려금 100만 원이 증가할수록 출산율 증대 효과는 0.0089명에 불과했다. 정부가 0~1세 아동에게 2년간 1800만 원을 지급하고 200만 원의 바우처를 주는 정책인 첫만남꾸러미 정책도 예산 대비 큰 실효성이 입증되지는 않고 있다.
기다림을 해소해 줄 수 있는 정책이 필요하다. 소아과 오픈런 해소, 어린이집 입소 대기 문제 해결, 백화점과 같은 대중 장소에서 유아차가 배려 받을 수 있는 사회적 에티켓 만들기 같은 것 말이다. 저출생 극복을 위해 엄마, 아빠의 기다림을 줄여줄 수 있는 정책이 필요한 때다.
2025-06-16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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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건강하게 익어갈 우리들의 여름
절밥, 그러니까 사찰음식의 매력에 2030세대가 푹 빠졌다는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주말인 지난 7~8일 서울 aT센터에서 ‘제4회 사찰음식 대축제’가 열렸는데, 이틀 동안 무려 2만 여 명이 다녀갈 정도로 인기였다는 내용이었다. 지난 5월 사찰음식이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된 것을 계기로 개최된 행사라는 점도 의미 있지만, 20∼30대가 참석자의 57%를 차지할 정도로 젊은 층의 관심이 뜨거웠다니 놀라웠다.
이날 축제에서 선보인 표고버섯탕탕이찌개, 삼색두부찜, 시래기고추장구이, 늙은호박배추물김치, 육근탕, 석이버섯더덕초무침 같은 개성 있는 사찰음식이 요즘 젊은 친구들의 입맛에 맞았을까? 맵고 짜고 달고 자극적인 음식이나 햄버거 같이 빠르게 만들어진 인공의 패스트푸드가 아니라, 간소하고 담백하며 슴슴하고 소박한 자연식이 그들에게 은근히 스며든 것일까?
그러고보니 지난해부터 건강 트렌드는 이른바 ‘저속노화’가 대세다. 렌틸콩과 귀리, 현미로 만든 잡곡밥을 저속노화 식사법으로 소개해 화제를 몰고 온 서울아산병원 노년내과 의사, 정희원 교수는 노화를 촉진하는 음식을 줄일 것을 강조한다. 식단에서 설탕 같은 단순당과 흰 쌀밥, 빵 등으로 대표되는 정제 곡물, 붉은 고기와 동물성 단백질 등을 과감히 빼라고 조언한다. 튀김류, 버터, 마가린, 치즈 등도 줄여야 하고, 대신 푸른 잎 채소와 통곡물, 콩류, 견과류, 베리류 등을 더 섭취할 것을 권한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세대 불문 각자 만든 저속노화 식단의 사진과 식재료 목록을 공유하는 게시물이 넘쳐난다. 중년·노년층에게도 건강식단이라는 것이 더이상 종합편성채널 속 먹거리 프로그램에 소개되는 음식이 아니다. 밋밋하기 그지 없는 건강식이 어느새 자랑 삼고 싶은 ‘힙한 습관’으로 자리잡고 있다. 사찰음식에 대한 2030세대의 호응은 “천천히 늙어갈래요”를 표방하는 이들의 건강한 발로로 읽힌다.
잘 나이들기 위한 건강한 습관은 ‘러닝 열풍’과도 맞닿아 있다. 온천천을 따라, 광안리해수욕장을 끼고, 사직보조경기장을 도는 열혈 러닝 크루들은 달리기에 한껏 적당한 초여름 날씨에 힘입어 각자의 건강을 채우고 있다. 낯설긴 해도 어느새 패션 아이템 반열에 든 러닝화와 운동복 시장은 계속해서 상승세를 타고 있고, 크고 작은 마라톤 대회도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
‘100세+α시대’에 간소하고 느린 것을 좇는 슬로우 라이프는 “건강하게 나이 들겠다”는 의지와 섞여, 이제 많은 이들의 일상이 됐다. 새 것보다는 오래된 것, 화려한 것보다는 단순한 것, 자극적인 것보다는 은은하고 심심한 것을 향하는 라이프 스타일을 최소한의 할 수 있는 선에서 작게라도 한두 가지 실천해보는 건 어떨까. 내 경우엔 일주일에 세 번 이상 슬로우 조깅을 하고, 가능하면 하루 한 끼는 가벼운 샐러드로 대체하는 식으로 적응 중이다.
이제 곧 한여름이다. 벌써부터 일기예보 속 낮 최고기온이 30도를 찍는다고 하니 슬슬 예민해진다. 푹푹 찌는 듯 후끈대는 올 여름 무더위를 건강하게 이겨낼 수 있을지 두려움마저 꿈틀댄다. 그럼에도 초여름의 싱그러움이 가시기 전에, 집에서 시간을 들여 만든 건강하고 맛있는 음식을 가족, 지인들과 나누는 그 순간, 잔잔한 행복이 입가를 타고 흐를 것이라는 상상만으로도 즐겁다. 생물학적 나이는 모두 달라도, 이 여름을 각자의 방식으로 건강하게, 그리고 천천히 통과할 수 있길 바라본다.
2025-06-09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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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대선에 묻혀버린 기름 유출 사고
지난 4월 25일 울산 온산공단에서 에쓰오일 송유관이 파손된 뒤 매일 아스팔트를 걷어내고 흙을 새로 까는 작업이 한창이다. 국내 석유화학업계 최대 공사라는 ‘샤힌 프로젝트’ 주변에서 케이블 매설 공사를 하던 중 그만 사달이 났다. 그날 4t의 원유가 왕복 4차선 도로를 뒤덮고 1km 떨어진 바다로 흘러들었다. 시공사인 롯데건설은 내년 4월까지 토양 정화 작업을 끝낼 참이다. 이만저만 품이 드는 게 아니나 사고 책임이 가볍지 않다. 그렇다면 바다는? 기름띠 제거 같은 방제 작업을 완벽하게 했다손 치더라도 사후 검증이나 실태 조사 등은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그 사이 테트라포드 깊숙이 엉겨 붙은 검은 독이 시나브로 바다에 풀리는지 모를 일이다. 시민들의 관심은 대선에 쏠려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분위기다. 올해로 서른 번째 ‘바다의 날(5월 31일)’이 유독 씁쓸하게 느껴진다.
온산공단의 토양과 연안을 기름 범벅으로 만든 이 사고는 해양 도시의 안전을 위협하는 ‘중대재해 중의 중대재해’로 톺아봐야 한다. 사람이 죽거나 크게 다쳐야만 중대재해가 아니다. 안 그래도 수십 년 산업단지를 껴안은 대가로 온갖 중금속에 오염된 바다가 급기야 기름세례에 몸살을 앓는다. 죽어가는 온산 바다를 한 번 더 짓밟는 꼴이다.
기름 유출은 자칫 바다에서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끼친다. 먹이사슬의 기초인 플랑크톤을 죽게 하고, 물고기의 아가미를 틀어막는다. ‘자연의 콩팥’ 갯벌도 제 기능을 상실한다. 연안 생태계가 괴멸적 피해를 본다. 온산에는 갯벌도, 양식장도 없고, 기름띠도 서둘러 걷어냈으니 그저 괜찮다고 치부할 건가.
이 사고가 ‘땅속 화약고’와 맞물려 있다는 사실도 크게 우려스럽다. ‘공단에 무수히 깔린 지하배관은 과연 안전하게 관리되고 있을까.’ 상당한 의구심이 생긴다. 사고 지점에만 0.8~2.5m 아래에 송유관과 화학, 가스 등 20여 가지 배관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굴착 과정에 조금의 실수가 있어도 치명적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그래서 지하시설물 통합정보시스템(GIS)으로 배관 위치를 미리 파악하게 돼 있다. 매설물 관리기관 등의 현장 감독도 필수 조건이다. 그런데도 이번에 지름 42인치 송유관에 천공을 내는 대형 사고가 났다. 원칙을 어겼거나, 감독에 소홀했거나, 매설 정보에 문제가 있었거나, 크고 작은 위험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어떤 경우이건 지하매설물 관리체계에 구멍이 난 것으로 봐야 한다.
관계기관 대응 체계도 허울만 요란하다. 노후 지하배관을 지상에 재설치하는 통합파이프렉 구축 사업은 법 기준을 맞추지 못해 10여 년째 하세월이다. 국가산단 지하배관을 관리하는 통합안전관리센터도 올해 5월 준공해 이제 걸음마 단계다. 배관 종류에 따라 관리부처도 제각각이다. 이대로라면 울산 국가산단에 깔린 1800여km 지하배관이 모두 언제 터질지 모를 지뢰밭이나 다름없다.
이번 기름 유출 사고는 도시 전반의 안전을 성찰하는 중요한 변곡점이 되어야 한다. 사고가 터질 때마다 불행 중 다행이라 여기면 답이 없다. 선제적이고 구조적인 예방책이 필요하다. 시간이 늘 우리 편이라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도시의 명운이 달린 산단 안전이 무슨 복권도 아니고 언제까지 행운에 기대야 하나.
2025-06-02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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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대선과 암살의 기술
“야 우리나라 대통령 없어졌어.”
KBS 예능 개그콘서트의 한 코너에 개그맨 김원훈이 조진세와 고등학생 이진(일진보다 아래 단계란 뜻) 역할로 출연해 대뜸 내뱉은 대사다. 대통령을 다시 뽑아야 하는 상황이라고 김원훈이 설명하더니 조진세에게 “너 누구 뽑을 거야”라고 묻는다.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조진세. 결국 “학생 신분이라 투표하기는 애매하기는 해”라며 위기를 넘긴다.
그리고는 경찰관 역할인 개그맨 송필근에게 “경찰관 아저씨는 투표권도 있는데 누구를 뽑을 거냐”고 묻는다. 송필근은 “경찰관복은 정당과는 무관하다”고 오해(?)를 푼 뒤 화를 내며 상황을 넘긴다.
이 장면은 커뮤니티에서 ‘개그콘서트 암살단’이란 제목으로 화제가 됐다. 정치적 소신을 밝히는 것이 ‘댓글 테러’는 물론 여러 곤란한 상황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분위기를 개그맨들도 알았기에 이를 개그 소재로 썼을 터이다. 과거 정권의 블랙리스트에 자신의 이름이 올라 자신도 모르게 슬그머니 활동이 끊기는 ‘사실상 암살’이 이뤄진 적도 있다.
암살 가능성은 수치로도 드러난다. 2023년 발표된 한국의 사회지표에 따르면 사람들이 크게 느낀 사회갈등은 ‘보수와 진보’(82.9%)가 가장 많았다. ‘빈곤층과 중상층’(76.1%), ‘근로자와 고용주’(68.9%)보다 더 높았다. 2년이 지났지만 이 갈등이 줄었다고 느끼는 이들은 없다. 굳이 수치를 나타내지 않더라도 체감되는 정치 성향에 갈등은 극에 달해있는 느낌이다.
여론과 트렌드에 민감한 마케터들이 이런 분위기를 놓칠 리 없다. 부산 향토기업 대선주조는 제21대 대선 한정판 특별 에디션을 출시했다. 대선주조의 브랜드 ‘대선159’가 대선과 동음이의어라는 점을 활용한 캠페인이다. 상표에는 ‘함께 대선 합시다’라는 간결하고 핵심적인 메시지를 흰색 배경 상단에 배치했다. 암살을 우려했기 때문일까. 태극기 이미지로 대통령 선거의 중요성을 강조함과 동시에 주요 정당 상징 색상을 디자인 요소로 활용하는 다소 ‘수비적인’(?) 모습도 보였다.
대선주조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매번 비슷한 전략을 쓰고 있다. 2017년 당시 카피는 ‘대선으로 바꿉시다’였다. 2017년 1월 ‘시원’(C1)을 대체하는 ‘대선’을 출시하고 5월 대선을 겨냥해 ‘대선으로 바꿉시다’라는 대선 마케팅을 펼친 셈. 이런 마케팅이 잘 통했기 때문일까. 당시 대선주조의 시장 점유율은 10%대에서 50%대로 올랐다. 5년 뒤인 2022년 대선을 앞두고도 대선주조는 ‘대선, 당신의 선택은’이라는 카피를 내걸고 캠페인을 진행했다. 아쉽지만 결과는 신통치 못했다. 이유야 다양하겠지만 소비자에게 크게 각인되지 못한 것은 확실하다.
이번 대선주조의 ‘함께 대선합시다’ 마케팅이 성공하기를 기대한다. 요즘 지역 기업 대선주조의 시장점유율은 2017년에 비해 많이 떨어져 있다. 대선 마케팅의 성공으로 지역 기업이 살고, ‘함께’해야 한다는 고민도 깊어진다면 더 바랄 것도 없다. 다행히 시장에서는 대선주조 마케팅 분위기가 좋다는 말도 들린다. 이것저것 재지 말고 소주 한잔 하며 속을 터놓으면 오해하고 미워할 일도 좀 준다. 이번 대선도 제발 좀 그랬으면 좋겠다.
2025-05-26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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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입만 터는 문과놈들' 행동할 차례다
기승전‘의료수가’.
의료담당이 된 지 두 달동안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의료수가(의료행위에 대한 대가)’다. 진료 과목·기관 규모에 관계없이 첫 만남의 통과의례와도 같은 말이기도 했다. 이들은 ‘의료수가 현실화’가 지역·필수의료 분야 공백을 메우기 위한 첫걸음이라고 강조했다. 의대 정원‘만’ 확대하는 것은 소위 돈 되는 진료분야의 쏠림 현상만 가속화할 뿐이라는 주장이다.
의료수가는 국민 모두가 기본적인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로 도입된 공공의료보험제도 아래 책정된 기준이다. 적정 수가 기준은 따로 없지만 OECD의 세계 각국 비교 자료를 보면 우리나라의 현행 의료수가가 상대적으로 낮은 것은 분명하다. 그 덕분에 의료 문턱이 낮아지고 병원 이용에 대한 국민 부담도 크게 줄어들었다.
문제는 진료과목별 급여진료 기준 비용 대비 수입(원가보전율)이다. 안과 등 특정과목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100%를 넘기지 못한다. 병원 입장에선 급여진료를 하면 할수록 손해를 보는 구조인 셈이다. 원가보전율이 특히 낮은 소아과, 산부인과는 인구 감소와 맞물려 줄폐업이라는 직격탄을 맞았다. 병원들은 대신 비급여 항목을 늘려 수익을 보전한다. 최근에 만난 한 의사 역시 ‘손’으로 수술을 성공적으로 해낼수록 적자가 커지는 바람에 비급여인 ‘보조’ 수술용 로봇을 활용해야 하는 현실을 자조했다.
필수의료 대부분은 낮은 의료수가로 인해 인력 부족이 디폴트가 됐다. 대한의사협회(의협) 의료정책연구원이 2023년 국민·의사 2159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필수의료 인식 조사’에서 국민은 과도한 업무부담(39.1%)과 낮은 의료수가(19.2%)를, 의사들은 낮은 의료수가(58.7%)와 법적 보호 부재(15.8%)를 필수의료 분야의 인력 부족의 주된 원인으로 꼽았다. 의협이 같은 해 전국 의대 본과 학생 811명을 대상으로 한 인식조사 결과도 마찬가지. 의대생 2명 중 1명(49.2%)는 필수의료 기피 현상의 원인으로 ‘낮은 의료수가’를 꼽았다. 낮은 의료수가가 필수의료 인력부족의 주된 원인으로 두루 인식된 것이다.
중증외상분야 권위자이자 드라마 ‘중증외상센터’ 주인공의 모델이 되기도 한 이국종 국군대전병원장이 지난달 군의관을 대상으로 한 강연에서 한 작심발언은 의료수가 문제에 더욱 힘을 실었다. 강연에서 “한평생 외상외과에서 열심히 일했지만 바뀐 건 하나도 없었다. 내 인생은 망했다”고 토로한 그는 ‘탈조선’과 ‘NO 바이탈(필수의료)’을 권했다. 이는 치료를 하면 할수록 적자 규모가 커지는 우리나라 필수의료체계에서 평생 헌신한 그의 절망이었다.
올해 건강보험 수가협상 막이 올랐다. 의정갈등 장기화로 인한 상급 종합병원 피해 복구에 수조 원이 투입된 상황에서 의료수가 현실화는 논란이 된 세월만큼 갈 길이 멀다. 지역·공공의료 공백이 갈수록 커지는 상황에서 현실화 해법을 찾기란 녹록지 않다. 하지만 일차의료 강화, 국민주치의 제도 도입, 중증질환·전문의 중심의 상급 종합병원 구조전환 등 의료전달체계 재정비 논의가 이뤄지는 지금이 기회가 될 수 있다. 의대 정원 확대를 기반으로 한 공공 인프라 확충 등의 움직임도 호기라면 호기다.
이 원장이 분노했던 ‘입만 터는 문과놈들’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때가 왔다. 정권 창출에만 급급하거나 갈라치기로는 국민을 위한 길을 찾을 수 없다. 의료 붕괴를 막고 양질의 의료 시스템이 유지되도록 행동으로 나설 차례다. onlypen@
2025-05-19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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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역성장 시대의 건설업
한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대만에 추월당할 처지에 놓였다. 국제통화기금(IMF)의 전망이니 신빙성이 상당히 높다. 손에 닿을 것만 같았던 GDP 4만 달러 시대는 5년 뒤에나 점쳐볼 수 있게 됐다.
역성장의 중심엔 건설업이 있다. 1분기 건설 투자는 건물 건설을 중심으로 3.2% 줄었다. 지난해와 비교하면 무려 12.2%나 감소했다. IMF 외환위기 이후 가장 큰 감소 폭이다. 건설업 총생산은 1.5% 줄었다. 국내 1분기 GDP 성장률이 -0.2%니 건설업이 한국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별달리 내세울 만한 주력 산업이 없는 부산에는 건설업 위기가 더욱 크게 다가온다. 사업이 지체되거나 무산되면서 지역 경제에 돈줄이 막혔고, 현장에 나가야 하는 근로자들은 일자리를 잃고 실직 상태에 놓였다. 중견 건설사들이 부도나 기업회생 절차에 돌입하니 수많은 하도급 업체들은 대금 받을 길이 묘연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건설업을 대체할 만한 새로운 먹거리를 찾았어야 했다. 금융이나 IT, 첨단 제조업 등 대안은 많다. 어느 것 하나 마땅한 산업을 육성하지 못했고, 지역 경제는 여전히 전통 산업인 건설업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장기적으로는 새 먹거리를 찾는 일에 발 벗고 나서야 하겠지만, 당장은 지역 건설업을 살리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조기 대선은 지역 건설업의 위기이자 기회다. 대권 결과에 따른 리스크가 분명히 존재하지만, 대선 과정을 통해 지역 업계의 요구사항과 목소리를 중앙 무대에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지금 업계 상황이 너무나도 엄중하다보니 누가 대권을 잡든 ‘지방 건설업부터 살리자’는 정책이 나와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지방 미분양 물량이 전국적으로는 11년 만에, 부산은 16년 만에 최대치를 경신하고 있다. 정치적 성향에 따라 부동산 정책이 좌우될 여지가 없어야 한다는 뜻이다.
부동산 실수요자들이나 투자자들을 ‘투기꾼’으로 바라보는 시각부터 바뀌어야 한다. 문재인 정부는 다주택자 양도소득세율을 70%까지 높이는 징벌적 세금을 거둬들였다. 부동산 대책만 28차례 발표했다. 그럼에도 집값이 잡히기는커녕 천정부지로 뛰었다. 누가 정권을 잡든 이런 과오를 반복해선 안 된다.
지금은 수도권과 지방을 이원화하는 부동산 경기 부양책을 써야 할 때다. 지방에 한해 다주택자 중과세를 폐지하고 미분양 주택에 대한 지원을 늘여야 한다. DSR 규제도 지방에서는 풀어주고, 멈춰버린 지방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도 활성화 방안을 찾아야 한다. 지방 건설업부터 정상화해야 한국 경제가 다시 중심을 잡을 수 있다.
지역 업계도 뼈를 깎는 자세로 쇄신해야 한다. 정부가 보따리 풀어주기를 기다리고만 있어선 안될 일이다. 세금으로 미분양 아파트를 사달라 요구하는 대신 분양가를 낮춰야 한다. 1군 건설사와 견줘도 쉽게 밀리지 않을 경쟁력을 길러야 가덕신공항 등 대형 프로젝트에서 지역 몫이 커질 것이다. 이참에 지방에 산재한 한계기업들에 대한 구조조정도 적절하게 이뤄져야 한다. 20~30대 젊은 직원들이 왜 건설사를 탈출하려 하는지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이번 대선은 건설업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짜는 계기가 돼야 한다.
2025-05-12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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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트럼프 말하길
그의 말 한마디는 전 세계 주요 언론사의 기사가 된다. 그게 단순한 농담이거나 ‘헛소리’라고 할지라도. 여기서 ‘그’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다.
매일 아침 엄청나게 쌓여 있는 외신 이메일을 확인하면서 일어난다. 최근 두 달 남짓 동안 못 해도 이메일로 받은 뉴스의 절반 이상은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에 따른 기사였다. 대부분 이런 기사의 제목은 “트럼프가 말하길”(Trump says)로 시작한다. “트럼프가 말하길, 앨커트래즈 교도소를 다시 열 것이다”(5일), “트럼프는 경제 상황은 바이든 탓이라고 말하지만, 기업과 경제계는 동의하지 않는다”(2일) 같은 종류다.
최근에는 “교황으로 선출되고 싶다”는 농담인지 진짜인지 모를 발언을 해서 전 세계를 경악하게 했다. 처음에는 다들 짓궂은 농담이라고 생각했지만, 트럼프 대통령과 백악관은 교황 옷을 입은 모습으로 합성한 트럼프 대통령의 모습을 SNS에 올렸다.
최근 전 세계를 대상으로 벌이고 있는 ‘관세 전쟁’을 두고도 마찬가지다. 어느 날은 “중국을 제외한 모든 나라는 협상 가능하지만, 중국에는 145% 초고율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으름장을 놨다가, 바로 다음 날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매우 똑똑한 사람이고, 그는 내 친구다”며 “협상의 문은 얼마든지 열려 있다”고 달랜다. 그의 말 한마디로 뉴욕 증시는 급락했다가, 다시 치솟는다. 촘촘히 연결된 세계 금융시장도 마찬가지다.
국제 뉴스를 다루는 기자로서 종잡을 수 없는 그의 발언에 전날 썼던 기사와 정반대되는 내용의 기사를 다음 날 쓰면서 허탈할 때가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지면에 쓸 외신 사진을 검색하다가 눈에 들어오는 사진이 있었다.
영국 런던의 한 벽면에 그려진 아트 작품이었다. 누가 그렸는지는 모르지만, 트럼프 대통령을 비롯한 전 세계 수장들과 주요 인물을 과장되게 그리고 그에 따른 설명을 붙인 풍자화(2025년 3월 25일 자 12면 보도)였다. 그래피티 아티스트이자 사회운동가 뱅크시의 나라답게 작품은 위트가 넘쳤다.
그 작품에 묘사된 트럼프 대통령은 이랬다. 왕관을 쓴 트럼프 대통령 밑에는 ‘거짓말하는 왕’(LYIN’ KING), 원숭이처럼 묘사한 모습 밑에는 ‘초거대 일진’(XL BULLY) 이라는 설명이 붙었다. 그가 마치 왕이 된 것처럼 국정을 주무르고, 누가 되었든 약자라면 공격하고 혐오하는 일진처럼 행동한다는 점을 꼬집었다.
지난 2월 백악관에서 열린 트럼프 대통령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회담은 그런 ‘초거대 일진’ 행동의 절정이었다. 말이 대화지 사실상 트럼프 대통령과 J.D 밴스 미국 부통령이 젤렌스키 대통령을 공격하며 설전을 벌이는 모습이었다. 이날 트럼프 대통령과 미국 보수 매체 기자가 정장을 입고 있지 않은 젤렌스키 대통령을 대놓고 조롱하는 모습이 전 세계에 생중계 되는 참사도 벌어졌다.
다행히 지난달 프란치스코 교황 장례식에서 마주 앉은 두 정상은 15분간 대화한 끝에, 광물 협상을 마무리하고 평화를 위해 한 발자국 나아갔다. 결국 필요했던 것은 ‘보여주기식 대화’가 아니라 ‘진정한 대화’였다. 앞으로 트럼프 대통령이 혐오와 조롱보다는 진정성이 담긴 목소리를 내기를 진정으로 기원한다.
2025-05-05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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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세계 STO 시장 뜨지만 법조차 못 만든 한국
부동산이나 채권 같은 자산을 블록체인 기술로 조각 내어 거래할 수 있다면 어떨까? 기술적으로는 충분히 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증권형 토큰 발행(STO)’이다. 기존에는 수십억짜리 빌딩이나 기관 전용 채권 같은 자산에 개인이 접근하기 어려웠다. STO는 그런 자산을 토큰으로 잘게 나눠 누구나 투자할 수 있게 만든다. 거래는 블록체인 위에서 이뤄져 더 투명하고 빠르다. 고금리와 부동산 불안정이 겹치는 시대에, 소액으로 안정적인 자산에 분산 투자할 수 있다는 게 큰 장점이다. 개인 투자자도 거대 자산가만 누리던 시장에 진입할 수 있게 된 셈이다.
전 세계는 STO 시장을 빠르게 키워나가고 있다. 28일 글로벌 통계 플랫폼 RWA.xyz에 따르면 전 세계 온체인 실물연계자산(RWA) 시장 규모는 약 216억 달러(약 31조 원)에 달한다. 참여 투자자는 약 9만 8439명, 자산 발행 기업은 189곳이다. 미국 국채, 사모 대출, 원자재 등이 주요 자산으로 거래되고 있다.
한국은 그 흐름에서 한참 뒤처져 있다. 법, 제도를 정비해 기관투자자까지 적극 유입되는 미국이나 유럽과는 다른 추세다. 규제 정비가 투자 유입을 가속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제도 마련의 속도가 시장 선점의 핵심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일본이 이를 잘 보여준다. 일본은 2020년 금융상품거래법 개정으로 토큰증권을 ‘유가증권’으로 인정하고, 전통 금융과 유사한 규제 체계를 구축했다. 이를 바탕으로 부동산, 회사채 등 다양한 분야로 STO를 확장했으며, 누적 발행금액도 1600억 엔(1조 6000억 원)을 넘겼다. 일본은 자본시장 활성화와 국민 자산 형성, 지방경제 부흥을 목표로 규제 친화적 시스템을 정착시켜 실질적 성과를 거두고 있다.
국내에서도 시장 선점 시도가 이어진다. 부동산은 물론 음원, 미술품, 심지어 한우를 조각 내어 투자 상품으로 만든 플랫폼도 등장했다. 부산에서는 지난해 부산디지털자산거래소(BDAN·비단)가 출범, 디지털 실물자산 유통 중심지가 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하지만 제도적 기반 부재가 걸림돌이다.
업계 관계자들은 “금융당국 허가를 일일이 받아야 하는 구조 때문에 속도감 있는 사업 추진이 어렵다”거나, “정식 인허가가 없어 대출을 활용한 대규모 프로젝트를 시작조차 못 한다”고 토로했다. 한 지역 기반 기업은 “특구 사업으로 시작했지만 중앙 제도권과 괴리가 크다”며 “특정 지역에 국한된 사업자 취급을 받을까 우려된다”고 한숨을 쉬었다.
기업들이 잘못한 게 아니다. 법이 발목을 잡고 있을 뿐이다. 국회에는 이미 관련 법안이 발의돼 있다. 그러나 대통령 탄핵 정국 속에서 국회는 입법 기능을 사실상 방기했다. 그 피해는 시장을 준비해온 스타트업들과 투자자들에게 돌아가고 있다. 시간은 돈이고, 시장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다행히 최근 여야를 가리지 않고 STO 정책토론회가 열리고 있다. 이 흐름이 단지 6월 3일 조기 대선을 앞둔 ‘보여주기 이벤트’로 끝나지 않으려면, 법안 통과라는 실질적 성과로 이어져야 한다. 더 늦기 전에 국회는 서랍 속에 잠든 STO 법안을 꺼내 바로 처리하라는 것이 민생의 열망이다.
2025-04-28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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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민생회복지원금 20만 원 놓고 갈라진 거제
얼마전 새 시장을 뽑은 경남 거제가 초장부터 시끌하다. 징검다리 재선으로 3년 만에 시정에 복귀한 변광용 시장이 공언한 ‘민생회복지원금’ 때문이다. 지난 재선거 때 벼랑 끝에 몰린 민생경제 회복을 위해 당선되면 거제 시민 모두에게 1인당 20만 원을 지급하겠다고 공언했던 변 시장은 지난 16일 취임 후 첫 기자회견에서 약속을 지키겠다고 다시 한번 확언했다. 이를 위해 전담 TF를 구성한 거제시는 관련 조례안까지 입법예고하며 준비를 마쳤다.
수혜 대상은 23만여 명, 소요 예산은 470억 원 상당이다. 지원금은 관내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거제사랑상품권이나 선불카드로 지급한다. 자금의 외부 유출을 막으려는 조처다. 사용 기한도 정해 단기간에 효과를 극대화한다는 복안이다. 재원은 ‘통합재정안정화기금’을 활용한다. 이 기금은 안정적인 지방 재정 운용과 대규모 재난, 지역 경제 악화 등 긴급한 상황에 사용하려 적립해 둔 일종의 ‘비상금’이다. 민선 7기 변 시장 초임 시절이었던 2021년 1월 1일 시행에 들어가 1669억 원까지 적립금을 늘렸다. 그러나 코로나19 팬데믹 여파로 정부 교부세가 줄어들면서 2023년 753억 원, 2024년 400억 원 그리고 올해 100억 원을 당초예산 부족분으로 충당했다. 지금은 585억 9900만 원이 남았다. 기금 설 및 운용 조례에 따라 최대 90%, 526억 원까지 집행할 수 있다. 국비 지원이나 지방채 발행 없이도 재정건정성을 유지하며 충분한 재원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게 거제시 설명이다. 시는 ‘5월 원포인트 임시회’에서 입법 예고한 조례가 통과되면 7월 추경에 사업비를 편성해 여름 휴가철 전에 지급한다는 목표다.
남은 건 시의회 ‘동의’인데, 이게 쉽지 않다. 공약 발표 당시부터 ‘노골적인 매표 행위’라며 날을 세웠던 국민의힘 시의원들은 아예 공약 철회를 요구하고 있다. 이들은 가뜩이나 빠듯한 지방재정에 비상금을 털어 시장 공약 사업을 한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상당하다. 현재 거제시의회는 민주당 7명, 국민의힘 7명, 무소속 2명 구성이다. 양당 출신인 무소속 2명의 정치 성향을 고려하면 사실상 동수다. 첫 관문인 경제관광위원회는 민주당 4명, 국민의힘 2명, 무소속 2명이라 어렵지 않게 통과할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본회의 표결 시 ‘8 대 8’ 가부동수로 부결될 공산이 크다. 설령 조례가 제정돼도 ‘추경 심사’라는 큰 산을 또 넘어야 한다. 국민의힘 소속인 신금자 의장은 집행부가 요청한 5월 임시회를 거부했다. 시의회와 사전 교감이나 공감도 형성도 안 된 조례를 통과시키려 없던 회기를 만드는 건 적절치 못하다는 이유다.
정치권 공방에 시민 사회도 덩달아 갑론을박이다. 이 때문에 위기를 극복하려 준비한 지원금이 되레 분열과 위기를 자초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작년 10월부터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을 맡아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심판을 이끈 문형배 전 재판관은 18일 퇴임식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 적용되는 원칙과 너에게 적용되는 원칙이 다르면 어떻게 통합이 되겠는가. 관용은 의견이 다른 사람에 대한 존중이고 자제는 힘 있는 사람이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이다. 관용과 자제가 없다면 민주주의는 발전할 수 없다”. 20만 원 지원금을 놓고 갈라진 거제가 곱씹어봐야 할 대목이다.
2025-04-21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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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법 위에 선 자의 착각
한 사람이 법 위에 올라서는 순간 민주주의는 숨을 멈춘다. 스스로 국가를 구할 존재라며 국민과 공동체 위에 서려 했던 윤석열 전 대통령이 결국 탄핵 됐다. 헌법재판소의 탄핵 사유를 보면 윤 전 대통령은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속 라스콜니코프와 너무 닮았다. 인류 공동체의 약속인 법과 도덕을 넘어선 개인의 절대적 확신이 얼마나 위험한지 우리는 다시 마주했다.
도스토옙스키는 〈죄와 벌〉을 통해 물었다. “자신을 법 밖에 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그 의문은 〈죄와 벌〉의 라스콜니코프를 통해 풀린다. 라스콜니코프는 자신이 법 위에 있는 ‘비범한 인간’이라 믿었다. 법과 도덕을 초월했다. 그러니 한 노파를 살해해도 정당하다고 여겼다. 그 살인은 세상을 더 낫게 만들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논리. 그것은 곧 도스토옙스키가 경고한, ‘비범한 인간의 착각’이었다.
윤 전 대통령도 ‘국가적 혼란을 바로잡을 자’로 생각했을까? 그는 자신만의 신념을 감행하기 위해 민주주의 질서를 멈춰도 괜찮다고 여겼던 모양이다. 라스콜니코프가 살인을 해도 괜찮다고 여겼던 것처럼, 윤 전 대통령은 비상계엄을 통해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살해하려 했다.
‘혼란을 바로잡기 위한 계엄’ ‘탄핵은 불순한 세력의 시도’. 윤 전 대통령은 누구보다 옳고 비범하니 국민의 선택으로 구성된 국회를 ‘통제해야 할 대상’으로 간주했다. 또 자신을 반대하는 목소리는 하나의 ‘음모론’이나 ‘불순 세력’으로 여겼다. 권력자가 이러한 신념을 가질 경우 민주주의가 어떻게 후퇴하는지 우리는 이미 뼈아프게 경험했다.
이러한 사실을 도스토옙스키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라스콜니코프는 반성했다. 그는 범죄를 저지른 후 자신의 사상이 허상임을 깨달았다. 죄책감에 시달리고 사랑과 고통 앞에서 비범한 자의 껍질을 벗기 시작했다. 도스토옙스키는 그를 통해 말했다. “절대적 신념은 인간성을 대신할 수 없다.”
윤 전 대통령은 무너졌지만 현재까지 반성은 없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판단이 옳았다고 말한다. 계엄령은 국가 안정을 위한 합리적 조치였고, 탄핵은 정치적 음모였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대다수 시민들은 ‘착각’이라 생각하지 않을까? 특히 그는 검사 출신으로 법의 허점을 누구보다 잘 아는 ‘법 기술자’이다. 일반 시민에게는 어려운 법이 그에게는 참 쉬울 수도 있다.
라스콜니코프나 윤 전 대통령은 법보다 신념을 앞세우고 사회 질서를 자기 방식으로 재단하며 결국 공동체를 통제하려 했다. 그 모습은 신념이 아니라 오만이다. 그들이 알아야할 점은 민주주의를 통해 형성된 공동체는 책임지는 시민을 원한다는 점이다. 헌법은 개인의 신념이 아니라 늘 시민의 동의와 절차를 통해 정당화돼야 한다.
또 거대 야당인 민주당도 별반 다르지 않다. 친명계와 이재명 전 대표를 중심으로 한 ‘1인당’의 기득권 역시 그들의 생각과 신념이 다른 목소리에는 극도의 폭력성을 보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공동체의 기반은 대다수 시민들이다. 민주주의 공동체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절차와 합의를 우회해선 안 된다. 그것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깊게 무너진다. 이미 역사로 증명된 사실이다. 공동체의 약속인 법과 도덕을 초월한 비범한 사람은 없다. 그저 비범하다고 착각한 자들만 있을 뿐이다. 라스콜니코프의 반성을 돌이켜보길 바란다.
2025-04-14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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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마음까지 태운 산불… 이제는 온 마음을 나누자
지난주는 역대급 산불에 마음 졸이는 시간이었다. 전 국민 모두가 언제쯤 불길이 잡힐지 노심초사 걱정하며 애를 태웠다.
경북 동북부 5개 시·군을 초토화시킨 이른바 ‘경북 산불’은 축구장 6만 3245개, 여의도 156개 면적을 잿더미로 만든 뒤 149시간 만인 지난주 29일에 주불이 잡혔다. 성묘객 실화로 시작된 이번 산불은 역대 최고인 시간당 8.2㎞ 속도로 동해안까지 이동하며 26명의 소중한 목숨을 앗아갔다.
그보다 앞서 경남 김해시와 울산시 울주군, 전북 무주군과 충북 옥천군에도 산발적으로 산불이 번졌다.
지난달 21일 경남 산청군에서 발생한 산불은 약 213시간 만인 30일에 꺼지면서 역대 두 번째로 길게 지속된 산불로 기록됐다. 산청군 산불로 축구장 2602개에 달하는 면적이 피해를 봤고, 진화작업 중 불길에 고립된 창녕군 소속 산불진화대원과 공무원 등 4명이 숨지기도 했다.
영남 지역 산천을 태우던 불길은 사그라들었지만 곳곳에 상흔이 남았다. 화마가 할퀴고 지나간 야산은 울창했던 숲 대신 시커멓게 타다 남은 앙상한 나무들만 숯으로 남았다. 마을은 폭격을 맞은 듯 초토화돼 삶의 터전이 통째로 사라져 버렸다. 매캐한 냄새가 가득한 산불 피해 지역은 다니는 사람도, 차량도 없이 적막한 모습으로 변했다.
‘괴물 산불’을 피해 겨우 몸만 빠져나온 이재민들은 또 어떤가. 고령층이 대부분인 이재민들은 곳곳에 마련된 대피소 텐트에서 하루하루 버티고 있지만, 건강 상태가 악화되고 있는데다, 생계 걱정에 앞이 깜깜하다. 그나마 한때는 3만여 명에 육박했던 대피소 이재민의 수가 일주일 사이 6000여 명으로 줄어들었다고 하니 조금은 다행스럽다.
역대급 산불 사태를 제대로 수습하는 건 지금부터다. 이재민 대책에 산림·문화재 복구 등 풀어나가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다. 정부는 이재민들이 하루 빨리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서둘러 재난 복구 대응에 나서야 한다. 정치권은 대승적 차원에서 소모적인 논쟁은 자제하고 추경 예산 10조 원 편성을 신속하게 합의 처리해야 한다.
더불어 정부와 정치권의 움직임이 본격화될 때까지, 우리 모두는 산불 피해 지역에 더욱 마음을 모았으면 한다. 대피소에서 이재민들의 식사와 잠자리를 챙기는 봉사자들의 모습을 보면 참으로 감사하다. 잔불을 정리 중인 많은 소방 관계자들과 함께 봉사자들이 피해 현장을 든든히 떠받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 등 SNS(사회관계망)에서도 산불 진화와 이재민 지원을 위해 써달라며 적게는 10만 원부터 많게는 수 천만 원까지 십시일반 성금을 내놓는 이름 모를 사람들의 게시글이 눈에 띄었다. 삼성과 SK, 현대차, LG 등 4대 그룹은 이번 산불 피해 복구와 피해 주민 지원을 위한 성금으로 총 90억 원을 내놨다. 유재석, 아이유, 임영웅 등 유명 연예인들의 기부 소식도 줄을 이으면서 ‘선한 영향력’이 번지고 있다. 이밖에 심리 상담, 진료 봉사, 물품 기부를 하는 이들의 도움도 답지하고 있다.
봉사와 기부, 그 둘이 아니라도 작게나마 무언가 도울 일이 없을지 고민하게 된다. 이번 주말에는 아이와 함께 산불 피해 현장으로 가볼 참이다. 참담한 현장을 직접 마주한다면 화재 예방에 대한 교훈을 가슴에 새길 수 있을 것이다. 미처 수습이 안 된 현장이 있다면 청소와 정리에 손을 보탤 수도 있을 것이다.
마음까지 까맣게 태워버린 이번 산불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 모두의 마음을 더할 때다.
2025-03-31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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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죽어도 되는' 노동자는 없다
‘죽어도 되는’ 노동자가 있다. 그것도 16번이나 죽임당했다. 이름은 미키 반스. 얼음행성 개척에 투입돼 온갖 위험한 임무를 도맡는다. 마루타처럼 생체 실험에도 동원된다. 얼음행성은 어떠한 사회적 안전망도 없는 죽음이 예정된 일터다. 미키가 믿을 건 죽고 나면 신체와 기억이 복제된다는 사실 뿐. 그는 다시 태어나는 게 아니라 다시 죽는 노동자다. 고통스러운 죽음이 반복되면 두려움마저 사라지는 건지…. 미키가 죽음의 고비마다 보여주는 체념 섞인 평정심(?)은 기이할 정도로 놀랍다. 비인간적인 공동체는 임무를 수행하는 미키가 살아있는지, 아니 ‘죽었는지’ 확인하지도 않는다. 그저 프린트하면 그만인 ‘익스펜더블,’ 인간 소모품이기 때문이다.
영화 ‘미키17’은 자연스레 한국사회에 만연한 산업재해 현실을 떠올리게 한다. 올해 2월 부산 반얀트리 화재는 6명 노동자의 생명선이 타들어 간 대가로 휘황한 도시에 숨겨진 안전불감증의 민낯을 한순간에 들춰냈다. 10명의 인부가 숨지거나 다친 서울·세종고속도로 다리 붕괴 사고는 충격 그 자체였다. 툭하면 어선 침몰 사고로 목숨을 잃는 이주노동자는 얼음 행성에 투입된 미키나 다름없다.
지난해 12월 ‘노동의 메카’를 자부하는 울산에선 20대 잠수 노동자가 차디찬 겨울 바다에 들어갔다가 주검이 돼 돌아왔다. 2018년 태안 화력발전소에서 죽어간 24살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 씨, 그보다 2년 전 서울 구의역에서 열차에 치여 숨진 19살 하청 노동자 김 군을 우리는 어느새 잊어버린 걸까. 세 사건 모두 기본적인 2인 1조 수칙조차 지키지 않아 발생한 참극이었다. 위험의 외주화에 희생당한 제2, 제3의 김용균은 시나브로 영화 속 열일곱 번째 미키를 넘어선 지 오래다. 동일한 형태로 반복되는 죽음은 어쩌면 ‘죽임’에 가깝다. 고용노동부가 펴낸 ‘2024 중대재해 사고백서’에 따르면 2023년 전국에서 일하다 숨진 노동자는 593명에 달한다.
언제나 그랬듯 법의 처벌은 약하기 짝이 없다. 산재 다발 사업장 고려아연은 2021년 노동자 2명이 질식사한 사고와 관련, 4년 뒤 법원에서 원하청 책임자 모두 벌금 700만~1000만 원을 받는 데 그쳤다. 2019년 9개월간 4명의 노동자가 숨진 HD현대중공업에선 사업부 대표 3명이 집행유예와 벌금형을 받았다가 이마저 “형이 무겁다”고 항소했으나 기각당했다. 대중의 관심이 시들대로 시든 지난 2월에 있었던 일이다. 이 또한 산재공화국을 떠받치는 숱한 사건 중 작은 조각에 불과하다.
10명의 사상자를 낸 2022년 5월 에쓰오일 폭발 사고는 중대재해법을 빠져나간 채 1심 재판을 받고 있다. 비슷한 처지에 놓인 대기업들이 쾌재를 불렀다. 중대재해처벌법이 산업안전중점검찰청을 둔 울산에서조차 종이호랑이로 전락했다는 노동계의 자조 섞인 한숨이 들린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기업이 노동 현장의 재해를 두려워하겠나.
일터에서 돌아오지 못한 노동자는 대부분 온갖 통계에 묻혀 기억에서 멀어진다. 이러한 숫자들은 때로 우리를 현상에 무감각하게 만든다. 재해와 죽음에 둔감한 사회. 영화 미키17은 기실 인간의 존엄성이 죽어가는 현실을 겨냥하듯 반복해서 한 가지 질문을 던진다. “죽는 건 어떤 기분이야?”
2025-03-24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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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해태껌 롯데껌 논쟁을 끝낼 때
“우리는 해태껌 이런 건 취급 안하지예. 롯데 이런 것만 딱 갖다 놓지.”
영호남 지역 갈등은 ‘껌’에서도 드러난다. 부산을 연고로 하는 프로야구팀 롯데 자이언츠 따라 영남 지역은 롯데껌을, 호남 지역은 광주를 연고로 하는 해태 타이거즈(KIA 타이거즈의 전신)를 따라 해태껌을 주로 찾았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호남에서 롯데껌을 찾는다거나 영남에서 해태껌을 찾는 것이 매우 위험한 일임을 장난처럼 보여주는 장면도 많았다. 정치적으로도 영남은 보수색이 강했고, 호남은 진보색이 강했기에 둘 사이 간극은 메우기가 쉽지 않았다.
단순히 지역 갈등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말인 줄 알았는데 수도권에서는 영남과 호남을 진짜 ‘껌’으로 알았나 보다. 수년 전부터 호남 지역은 농협중앙회 본사를 호남으로 이전하기 위해 공을 들였는데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산업은행 본사 부산 이전 반대 논리가 그대로 농협 본사 이전 논의에도 거의 ‘복붙’(복사해 붙여넣기)처럼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일단 노조들은 산업은행과 농협중앙회의 본사 이전이 시행되면 노동자의 거주지 이전이 불가피한데 이는 노동자의 삶과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라며 반대한다. 산업은행과 농협중앙회의 본사 이전이 졸속 행정이자 정치적인 표 계산 때문으로 실적 악화 등 부작용이 우려된다는 목소리도 있다. 결국 이러한 복붙 반대 논리에 정치권과 정부는 지역민의 염원을 씹던 껌 뱉듯이 무시하고 있다.
영호남을 비롯한 지역이 공공기관 이전을 원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산업은행 이전과 농협중앙회 이전은 단순한 위치 이동이 아니다. 국가 균형발전과 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한 중요한 정책적 움직임이다. 특히 수도권에 인구와 돈이 몰리는 상황에서 새로운 경제 활성화를 위한 트리거로서도 매우 중요하다.
최근 박형준 부산시장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충돌한 영상이 화제였다. 박 시장이 이 대표와의 비공개 회담 후 굳은 표정으로 취재진과 만나 “산업은행 이전이 단순히 하루이틀에 걸친 사안이 아니고 2년여 동안 부산 시민들이 요청하고 심지어 부산 민주당도 함께 요청한 사안인데 일언반구도 하지 않은 것은 대단히 안타깝고 실망스럽다”고 말한 영상이다. 비슷한 영상 클립이 많았는데 대부분 수만 건의 클릭을 기록했다. 이는 산업은행 이전에 대한 지역의 관심이 크다는 것을 방증한다. 아마 전남도지사나 전북도지사가 같은 식으로 반응을 했다 해도 이 같은 화제성은 따놓은 당상일 것이다.
같은 논리로 반대라니 차라리 잘됐다. 그동안 껌으로도 싸웠던 지역 감정을 해소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산업은행, 농협중앙회의 본사 이전은 국가 균형발전이라는 명분도 같고 지역 경제가 살아난다는 기대 효과도 같다. 이를 계기로 부산과 호남 지역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수도권의 논리에 대응할 수도 있겠다. 부산과 호남이 함께 벌이는 이색 이벤트도 좋을 것 같다. 적의 적은 동지라는 말을 넘어 강력한 우군을 만난 느낌이다. 에어부산의 분리 매각도 어려워 보이고, 글로벌허브도시 특별법의 통과도 요원하지만 이번에는 꼭 보여주기를 바란다. 우리가 롯데껌이든 해태껌이든 껌 좀 씹던 언니야 오빠야들이라는 것을.
2025-03-17 [1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