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 팠다 다시 메우고… 53억 날린 울산 배수터널

권승혁 기자 gsh0905@busan.com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태화동 배수터널 5년 만에 백지화
390m 중 50m 뚫다가 다시 메워
배수펌프장만 완공된 ‘반쪽 방재’
주민들 "발파하다 원상복구 황당"

28일 오후 울산 중구 태화강변 언덕 쪽에서 진행된 고지배수터널 공사 현장이 흙과 돌로 되메워진 채 주차장으로 변해 있다. 중구청은 태화동 수해 대책의 일환으로 이 지점부터 태화동행정복지센터까지 390m 가량 지하 배수로를 만들 계획이었으나 면밀하지 못한 사업 추진으로 수십억 원 세금만 날린 채 백지화했다. 권승혁 기자 28일 오후 울산 중구 태화강변 언덕 쪽에서 진행된 고지배수터널 공사 현장이 흙과 돌로 되메워진 채 주차장으로 변해 있다. 중구청은 태화동 수해 대책의 일환으로 이 지점부터 태화동행정복지센터까지 390m 가량 지하 배수로를 만들 계획이었으나 면밀하지 못한 사업 추진으로 수십억 원 세금만 날린 채 백지화했다. 권승혁 기자

울산 중구청이 상습 침수를 예방한다며 추진한 ‘태화산 고지배수터널’ 공사가 착공 5년 만에 백지화됐다. 공사에 투입된 예산 53억 5000만 원도 함께 땅에 묻혔다.

부실한 계획하에 첫 삽을 뜬 공사는 주민 민원을 극복하지 못하고 터널을 뚫었다가 되레 메우는 ‘황당한 행정’으로 이어졌다.

29일 오후 울산 중구 태화루를 지나 태화강변 먹거리단지 방향으로 도로를 달리자, 태화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탁 트인 언덕 사면이 나타났다. 불과 몇 달 전까지 중장비가 오가며 배수터널 굴착 공사가 한창이던 곳이다.

하지만 현재는 공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마치 언제 공사를 했냐는 듯 시멘트로 새로 포장한 빈터가 주차장으로 변해 있다.

근처에서 45년간 자영업을 해왔다는 70대 주민 A 씨는 “땅만 실컷 뚫다가 원상복구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라며 “애초에 불가능한 공사를 밀어붙여 주민들 애만 먹이고, 결국 피땀 같은 세금만 허공에 날린 꼴”이라고 혀를 찼다.

인근 아파트 주민 B 씨 역시 “공사 기간 내내 발파 소음과 진동 때문에 잠을 설치기 일쑤였다”라며 “구청이 갈등만 일으키고 큰돈 들인 공사는 원점으로 돌아갔는데 책임은 도대체 누가 지느냐”라고 말했다.

<부산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중구청은 총사업비 598억 원을 투입한 ‘태화 자연재해 위험개선지구 정비사업’ 중 핵심 구간인 고지배수터널(390m) 조성 공사를 최근 전면 중단하고 원상복구(되메우기)했다.

이번 정비 사업은 2016년 10월 태풍 ‘차바’ 내습 당시 큰 피해를 입은 태화종합시장 일대의 근본적인 수해 대책으로 추진한 것이다. 2017년부터 추진해 첫 삽은 2020년 12월에 떴다.


태화 재해위험 개선지구 정비사업 위치도. 중구청은 태화동 수해 대책의 일환으로 이 지점부터 태화동행정복지센터까지 390m 가량 ‘ㄴ’ 형태로 꺾이는 지하 배수로를 만들 계획이었으나 면밀하지 못한 사업 추진으로 수십억 원 세금만 날린 채 백지화했다. 울산 중구청 제공 태화 재해위험 개선지구 정비사업 위치도. 중구청은 태화동 수해 대책의 일환으로 이 지점부터 태화동행정복지센터까지 390m 가량 ‘ㄴ’ 형태로 꺾이는 지하 배수로를 만들 계획이었으나 면밀하지 못한 사업 추진으로 수십억 원 세금만 날린 채 백지화했다. 울산 중구청 제공

고지대에서 쏟아지는 빗물이 저지대인 태화종합시장으로 유입되기 전에 배수터널과 배수펌프장으로 나눠서 처리하겠다는 게 공사의 목적이었다.

그러나 현재 배수펌프장은 사업이 마무리 됐지만, 수방 대책의 또 다른 축인 배수터널 공사는 통째로 무산됐다.

배수터널 공사는 시작부터 난관의 연속이었다. 인근 주택가에서 30년 넘은 아파트의 옹벽 균열과 암반 진동을 문제 삼아 강하게 반발했기 때문이다. 중구청이 2023년 초부터 공사를 본격화하며 주민 설득에 나섰으나 굴착 공정률 10%(50m) 지점에서 결국 손을 뗐다.

일각에서는 민원뿐만 아니라 굴착 과정에서 확인된 지반 상태가 애초 설계와 달라 안전 문제가 불거진 것 아니냐는 해석까지 나온다.

중구청은 지난해 10월부터 추가로 예산 3억 5000만 원을 투입해 파냈던 흙과 돌로 배수터널을 다시 채웠다. 결과적으로 53억 5000만 원의 세금이 아무런 성과 없이 땅 속에 사장된 셈이다.

게다가 애초 계획한 수방 대책이 ‘반쪽 사업’으로 전락하면서 태풍 등 재해 대비에 차질을 빚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중구청 관계자는 “발파 소음과 진동에 따른 민원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고, 기계 굴착 등 대안 공법은 막대한 추가 예산이 소요돼 행안부 협의를 거쳐 중단을 결정했다”며 “공사 기간이 길어지고 몇 차례 설계 변경을 거치며 (고지배수터널을 포함한) 사업비 598억 원도 전액 집행했다. 현재 인사이동 등으로 자세한 사항은 파악 중”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공사를 두고 지역사회는 지질 조사와 주민 영향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진행된 ‘전형적인 행정 실패’라고 질타한다.

한 토목 전문가는 “설계 단계에서 지질 조사와 소음 시뮬레이션만 제대로 했어도 수십억 원을 낭비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며 “공공사업이 민원 때문에 착공 후 백지화되고 원상복구 비용까지 썼다는 것은 사업 타당성 검토가 요식행위였음을 자인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권승혁 기자 gsh0905@busan.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