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그리움의 켜, 금강산
‘누구의 주제런가 맑고 고운 산, 그리운 만 이천 봉 말은 없어도’ 가곡 ‘그리운 금강산’의 가사 중 일부다. 1960년대 초 발표된 이 가곡은 금강산의 아름다움과 그리움을 담아냈다. 수학여행처럼 언젠가는 갈 수 있으리라 믿었지만 금강산은 늘 철책 너머였다. 그렇다 보니 금강산은 단순한 산이 아니라 오래도록 가슴속에 품어온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금강산은 주봉인 비로봉을 비롯해 많은 봉우리가 북한에 있어 자칫 금강산 전체가 북한에 속한 산으로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강원도 고성군과 인제군 경계에 있는 향로봉처럼 남한에도 금강산의 일부가 걸쳐 있다. 여하튼 남북 분단 이후 금강산은 대부분 우리 손이 닿지 않는 산이었다. 그러던 중 1998년 남북 화해 분위기 속에서 문이 열리며 금강산 관광이 시작됐다. 하지만 그마저도 2008년 관광객 피격 사건 이후 다시 중단되고 말았다.
유홍준 교수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5권-‘다시 금강을 예찬하다’에서 ‘금강산, 그것은 한민족으로 태어난 자의 가슴속에 거의 유전적으로 전래된 동경의 대상이다’라고 적었다. 그만큼 금강산은 백두산과 함께 한민족을 대표하는 명산이었다. 신라 화랑은 이곳에서 정신을 수양했고 조선 문인들은 그 절경에 감동해 붓을 들었다. 조선 후기 시인 김삿갓은 ‘구름 사이 흘러가는 백천(白泉)을 따라 나는 무심히 발길을 옮겼다’는 시구를 남겼다. 최남선은 1928년 〈금강예찬〉에서 ‘금강은 세계의 산왕(山王)’이라 극찬했다. 외국인의 찬사도 이어졌다. 1890년 금강산을 방문한 영국의 여행가 이사벨라 비숍은 ‘금강산 자태는 세계 여느 명산의 아름다움을 초월한다’고 했다. 금강산의 풍경을 사랑했던 수많은 이들이 남긴 문장은 ‘그리움의 켜’가 돼 쌓였다.
최근 세계는 금강산의 가치를 인정했다. 세계유산위원회의 자문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 등은 북한 측이 세계유산으로 등재 신청한 금강산에 대해 ‘등재 권고’ 판단을 내렸다. 세계가 유네스코라는 이름으로 금강산을 품으려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우리는 그 산에 제대로 발을 딛지 못하고 있다. 분단이 길어질수록 그리움의 켜가 더 깊어질수록, 금강산은 더 선명한 감정으로 우리 곁에 남는다.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 이천 봉, 볼수록 아름답고 신기하구나….’ 동요 ‘금강산’처럼 언젠가 발걸음으로 다시 걷게 될 그날, 금강산은 더 이상 ‘그리운 산’이 아니라 ‘함께 걷는 산’이 될 것이다.
정달식 논설위원 dosol@busan.com
정달식 논설위원 dosol@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