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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이 대통령의 '지방 주도 성장' 강력한 분권이 전제돼야
이재명 대통령이 올해를 대도약 원년으로 삼고 기회와 과실을 고루 나누는 모두의 성장을 이루겠다는 뜻을 명확히 했다. 21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신년 기자회견 모두발언에서다. 이 대통령은 이날 모두발언에서 대도약을 위한 성장전략으로 가장 첫머리에 지방 주도 성장을 내세웠다. 이는 수도권 1극 체제를 ‘5극 3특 체제’로 개편함으로써만 가능할 것이기에 대통령은 지방이 그에 걸맞은 규모를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5극 3특 체제 개편에 걸맞은 규모를 갖추기 위한 방편으로 대통령은 대전·충남과 광주·전남의 광역 행정통합 사례를 꼽으면서 이를 반드시 성공시켜야 할 국가 생존 전략이라고까지 추켜세웠다. 이 대통령은 취임 직후부터 수도권에서 먼 거리에 재정을 우선 지원하겠다는 정책 방향을 분명히 한 바 있다. 이날 모두발언에서 지방 주도 성장을 가장 먼저 내세운 것은 정책 일관성을 보여줬다는 평가다. 광역 행정통합을 국가 생존 전략이라 내세운 점도 그 연장선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최근 여권을 중심으로 수십조 단위 재정 인센티브를 앞세우며 행정통합 속도전에 나선 것을 두고 지방선거용 쇼라는 비판이 불거지는 것도 현실이다. 특히 수년 전 정치권을 시작으로 부울경 메가시티를 하향식으로 추진하다 무산된 경험이 있는 동남권에선 인센티브를 쥔 정부 주도의 하향식 행정통합 추진에 대한 우려도 나온다. 동남권의 우려는 21일 김두겸 울산시장이 부산·경남과 진행할 광역 행정통합 논의에 대해 밝힌 입장에서도 드러난다. 김 시장은 이날 울산시청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광역 행정통합에 앞서 지방정부에 대한 실질적인 권한 이양과 시민 동의가 선행돼야 한다고 못박았다. 지방정부의 사무와 권한이 중앙정부에 귀속된 구조를 놔두고 행정 단위만 확대하면 균형발전보다는 지역간 쏠림이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는 주장도 펼쳤다. 이처럼 동남권에서는 권한과 재정이 수반되지 않은 상태에서 정부의 한시적 인센티브 부여로 추진하는 광역 행정통합은 부울경 메가시티가 실패한 전철을 되풀이할 수 있다는 지적이 끊이질 않는다. 이 같은 지적을 의식한 듯 이 대통령은 이날 모두발언에서 광역 통합의 방향이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흔들리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대통령은 성장 축을 분산시킴으로써 수도권 집값 과열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지역 균형발전의 필요성에 대한 강력한 의지 표명이다. 대통령이 그런 의지를 관철하겠다면 재정과 사무 이양을 통한 실질적 분권의 병행은 필수적이다. 정부 주도의 하향식 인센티브만으로는 선거용이라는 오해를 피하기 어렵다. 인센티브용 재정 감당 여부 우려도 나오는 형국이다. 제대로 된 분권을 토대로 강력한 다극체제 구축이 이뤄지지 않으면 지방 주도 성장 전략은 모래성에 불과하다.
[사설] "12·3 비상계엄 선포·포고령 발령 내란 해당" 법원 첫 판단
법원이 12·3 비상계엄이 내란에 해당한다는 첫 판단을 내렸다. 법원은 21일 비상계엄 당시 국무총리였던 한덕수 전 총리에 대한 ‘내란 중요임무 종사’ 1심 선고 공판에서 징역 23년을 선고했다. 12·3 비상계엄이 명백한 내란죄에 해당된다는 것을 처음으로 명확하게 규정한 것이다. 특히 헌정 사상 처음으로 전 총리를 법정구속했다. 이에 앞서 법원은 지난 16일 윤석열 전 대통령의 체포방해 사건을 선고할 당시 비상계엄의 위헌·위법성을 인정하면서도 내란죄와 연결 짓지는 않았다. 한 전 총리에 대한 이번 판결은 다음 달 19일로 예정된 윤 전 대통령에 대한 내란 우두머리죄 재판에도 직접적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한 전 총리 재판을 담당한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3부는 12·3 비상계엄 선포와 포고령 발령 등이 형법상 내란에 해당한다고 판단하며 이 사건을 ‘12·3 내란’이라 명명했다. 윤 전 대통령과 추종세력에 의한 친위 쿠데타라고 규정하기도 했다. 형법 87조는 내란을 ‘대한민국 영토 전부 또는 일부에서 국가권력을 배제하거나 국헌을 문란하게 할 목적으로 폭동을 일으킨 행위’로 정의한다. 법원은 국헌 문란과 폭동이라는 요건을 모두 충족한다고 본 것이다. 국무총리가 헌법 수호는커녕 내란에 가담한 것은 참담한 일이다. 더욱이 대통령 권한대행까지 맡았던 그가 지난 대선 후보가 될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아찔하기까지 하다. 재판부는 이날 한 전 총리에게 “12·3 내란이 성공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의무와 책임을 끝내 외면하고, 그 일원으로서 가담하기로 선택했다”고 질책했다. 또 “자신의 안위를 위해 비상계엄 관련 문건을 은닉하고 비상계엄 선포가 적법한 절차에 따라 이뤄진 것처럼 보이기 위해 허위공문서를 작성했다가 폐기했다“라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하지만 한 전 총리는 진실을 은폐하고 책임에서 벗어나는 데 급급했다. 작년 2월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탄핵심판 변론에 증인으로 나와 ‘계엄 선포문을 인지하지 못했다’는 취지로 위증을 하기도 했다. 일국의 총리까지 지낸 사람이 거짓말과 책임 회피로 일관하는 것은 너무 무책임한 처사다. 비상계엄 가담자들의 대다수는 재판에 회부된 상태다. 하지만 그들의 상당수는 아직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특히 윤 전 대통령은 지난 16일 공수처 체포영장 집행 방해 등 혐의로 징역 5년을 선고받으면서도 변명으로 일관했다. 재판부가 “잘못을 반성하는 태도를 전혀 보이고 있지 않다”고 질책하기도 했다. 12·3 비상계엄은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과 그 추종세력이 헌법과 민주주의, 법치주의를 위협한 비극적 사건이다. 대한민국은 국민 기본권과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를 파괴하는 독재의 구렁텅이에 빠질 수도 있었다. 이번 판결을 계기로 비상계엄을 둘러싼 소모적인 정치적 갈등과 국민 분열 상황이 개선되길 기대한다.
[사설] 북항 트램 사업비 수익자 분담, 실용적 방안일 수 있다
부산항 북항 재개발 지역은 여전히 허허벌판이다. 2007년 기본계획 고시로부터 20년이 흘렀지만 랜드마크 시설조차 안갯속이다. 굳이 북항에 가야 하는 이유가 부족하니 민간 투자가 유인되기 어려운 구조다. 사업성을 입증하고 투자 매력을 높이는 대책이 시급하다. 그 방안 중 하나가 법률 해석과 재원 논쟁에 발목이 잡힌 트램(노면전차)의 해법을 찾는 것이다. 교통 인프라가 하세월이 되면서 전체 사업 속도까지 떨어뜨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북항 재개발 수혜 기업이 비용 분담 의지를 밝히고 나서면서 꽉 막혔던 트램 사업이 돌파구를 찾을지 주목된다. 걸림돌이었던 건설비 문제가 해결된다면 트램은 본궤도에 오를 수 있다. 도시철도 1호선 중앙역과 국제여객터미널을 잇는 1.9㎞의 트램은 재원의 이견으로 첫걸음조차 못 떼고 있다. 부산시가 항만법을, 해양수산부는 도시철도법 적용으로 맞선 탓이다. 항만법을 따르면 국비와 부산항만공사(BPA) 50%씩이고, 도시철도법은 국비 60%와 지방비 40%다. 20일 열린 ‘북항 재개발 활성화와 해양수도 부산 정책토론회’에서 정성기 부산항미래정책연구원장은 “도시철도법에 따라 수익자가 건설비를 일부 부담할 수 있다”고 분담 방안을 제시했다. 이어 트램 건설로 지가 상승의 수혜가 예상되는 기업이 410억 원 분담 의사를 밝혔다고 전했다. 재원 논란이 해소되면 해수부 구상대로 도시철도법에 따른 추진이 가능해진다. 수익자의 비용 부담은 도시 인프라 사업의 보편적인 원칙이며, 북항 재개발에서도 예외일 수 없다. 실용적인 해법이 제시된 만큼 북항의 미래 교통망은 이제 속도를 내야 한다. 이날 토론회에서 제안된 ‘인정엑스포’ 방식의 2단계 사업 추진도 적극 검토해야 한다. 2032년 엑스포 유치를 전제로 국비를 투입하고, 민간 투자도 유인하면 사업 추진이 용이해질 수 있다. 1단계 미매각 부지의 신속한 매각을 위해 건폐율 상향과 같은 규제 조정이 필요하다는 제안에도 귀 기울여야 한다. 부산시와 해수부, BPA가 북항 재개발 활성화라는 공동 목표로 협력에 나서야만 사업에 속도를 낼 수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부산시가 북항 랜드마크 부지에 외자를 유치해 세계적인 ‘영상문화 콤플렉스’를 건립하겠다고 한지 1년이 넘었지만, 가시적인 추진 성과는 없다. 부산 시민은 참담하다. 국책사업으로 진행되는 북항 재개발이 이렇게 지지부진하게 두어서는 안 된다. 불확실성과 불신, 무기력을 극복하는 계기가 필요하다. 그 출발선에 트램이 서 있다. 민간 분담이라는 실행 가능한 재원 방안이 제시된 이상, 정부와 부산시는 조속히 실행 로드맵을 마련해야 한다. 해수부가 오고 관련 기관·기업까지 동반 이전해서 탄생할 해양경제권과 북항 재개발의 성패는 동전의 양면이다. 트램이 힘차게 달려야 한다. 해양수도 부산의 미래가 걸려 있다는 각오가 필요하다.
여성의 월경권
“가격이 저렴한 생리대를 위탁 생산해 무상 공급하는 방안을 검토해주십시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20일 국무회의에서 국내 생리대 가격 문제와 관련, “아주 기본적인 품질을 갖춘 생리대를 싸게 만들어 무상으로 공급하는 방안을 연구해보려 한다”며 주문한 말이다. 이 대통령은 전날 공정거래위원회와 성평등가족부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한국의 생리대 가격이 유독 비싸다”며 관계 부처에 실태 파악을 주문하기도 했다.‘생리대’ 가격 및 유통구조 개선에 대한 이 대통령의 의지는 확고하다. 찐진심이고 현재진행형이다. 이 대통령은 2016년 성남시장 당시에도 이른바 저소득층 소녀의 ‘깔창 생리대’가 이슈가 되자 “저소득층 청소년 생리대 지원 사업을 성남이 먼저 시작한다”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리기도 했다.이 대통령의 문제 제기를 계기로 부산, 경남, 서울, 인천, 경기 등 지자체 차원에서 추진 중인 생리대 무상 지원 및 무료 생리대 비치 사업 등이 국가 차원에서 ‘공공생리대 정책 및 여성의 월경권 도입’ 어젠다로까지 확산되길 기대해본다. 국가 차원에서의 생리대 무상 지원까지 포함해서다. 월경권은 경제적 여건과 무관하게 위생적인 생리용품을 사용할 수 있고, 학교·직장·공공시설에서 생리 중에도 불편 없이 생활할 수 있는 환경을 보장받을 권리 등을 말한다.한국의 생리대 가격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고 수준이다. 2023년 여성환경연대 조사 결과 국내 생리대 1개의 평균 가격은 196원으로 해외 제품보다 40% 더 비싼 것으로 나타났다. 여성의 일상과 건강에 필수적인 생리용품을 개인의 소비 영역에만 둘 것이 아니라, 보편적 인권 보장을 위한 필수재로 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차 커지는 이유다. 생리대 가격은 빈곤·소외계층에 더 큰 부담이 된다. 정부가 만 9~24세 저소득층 여성 청소년에게 월 1만 4000원 수준의 생리대 바우처와 현물 지원을 하고 있지만, 대상과 금액이 제한적이라는 한계가 있다.소비자주권시민회의는 지난 21일, 매달 반복 구매해야 하는 필수재인 생리대, 탐폰(삽입형 월경용품) 등 월경용품에 대해 부가가치세 감면이 아닌 폐지를 요구하고 나섰다. 실제로 독일, 영국, 미국, 캐나다, 인도, 호주 등 세계 각국은 생리대 등 월경용품에 대한 세 부담을 완화하거나 아예 폐지하는 추세다. 스코틀랜드, 뉴질랜드, 미국 등은 무상 제공 정책까지 적극 추진하고 있다.
논설주간/이사
강윤경
논설위원
김승일
정달식
이상윤
김상훈
천영철
[정달식의 일필일침] 부산 무형유산 전승자 재평가가 시급한 이유
무형유산은 여러 세대에 걸쳐 사람들의 삶 속에서 축적·전승돼 온 노래와 의례, 기술 등으로 한 사회의 정체성과 기억을 담은 문화적 자산이다. 국가나 시도 자치단체가 지정한 무형유산 전승자는 유산의 원형을 온전히 익혀 이를 다음 세대에 전할 공적 책임을 지닌 존재다. 현재 부산시에는 무형유산 전승자(보유자 포함) 32명을 비롯해 전승교육사와 명예보유자들이 활동하고 있다. 시는 보유자에게 매달 145만 원의 전승지원금을 지급해 전통기술과 예능 보존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렇기에 이들은 개인의 기량을 넘어 사회가 지켜야 할 공공의 문화자산을 대표한다는 상징성과 그에 걸맞은 책무를 함께 짊어진다. 이런 점에서 근래 부산에서 발생한 시 무형유산 전승자 폭행 사건은 결코 가볍게 넘길 사안이 아니다. 이를 개인의 일탈로만 보기 어려운 것은 관리와 점검이 미흡한 제도적 환경 속에서 유사한 문제가 반복돼 왔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해 8월에도 무형유산 기능 종목 교육관인 부산전통예술관에서 또 다른 전승자 관련 불미스러운 사건이 발생해 지역 전통문화계에 충격을 줬지만 이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성찰이나 개선보다는 외부 노출을 막는 데 급급했고, “당사자가 곧바로 사과했다”는 해명으로 관리 체계의 책임은 비켜 갔다. 그로부터 한 달여 만에 이번엔 폭행 사건이 벌어졌다는 점에서 이를 단순히 우연이라고 치부하기는 어렵다. 이런 상황 속에서 부산시의회가 지난해 말 전승자에 대한 자격 기준을 강화하는 조례 개정안을 통과시킨 것은 ‘소 잃고 외양간 고친 격’이지만 그나마 의미 있는 진전이다. 범죄 경력 조회 근거를 조례에 명시하고 결격 사유를 구체화 해 그동안 반복적으로 지적돼 온 법적 공백을 일정 부분 메웠다. 하지만 여전히 부족한 측면이 없지 않다. 개정된 내용은 전승자 사전 심사에 무게를 두고 있고, 지정 이후의 지속적 책임성과 공공성을 확보할 수 있는 재평가 또는 인정 해제 사유, 전승자 관리 등에서 미약하기 때문이다. 현장에는 무형유산 전승자가 한 번 인정되면 평생 그 지위가 보장된다는 인식이 깊게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현행 ‘무형유산의 보전 및 진흥에 관한 법률(무형유산법)’은 금고 이상의 형 확정, 결격 사유 발생, 국적 상실, 지정 해제 등의 경우 전승자 인정을 해제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당연히 개정된 부산시 조례에도 이런 내용이 반영돼 있다. 이를 보더라도 전승자 지위는 영구불변의 특권이 아니란 얘기다. 그럼에도 현실에서는 이 규정들이 거의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게 문제다. 지역의 문화 관련 한 전문가는 “인정 해제 조항은 존재하지만 그 이전 단계인 부산시무형유산위원회 심의 등 재평가 시스템이 실질적으로 작동하지 않고 있는 게 문제”라고 말한다. 적어도 전승자가 실제로 제자를 양성하고 있는지, 전수 교육이 형식에 그치고 있지는 않은지, 공동체와의 관계가 건강한지 등을 묻는 장치가 있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번 사건은 바로 그 공백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준다. 그렇다고 재평가가 반드시 누군가를 퇴출하기 위한 칼날이 되어야 한다는 건 아니다. 다만 전승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한 관리 장치로 작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평가 기준 역시 전승자의 기량 하나로는 충분하지 않다. 전승 실적이나 전수 교육 여부, 제자 양성, 공동체와의 협력 관계, 윤리적 문제 발생 여부 등을 종합적으로 살펴야 한다. 이를 통해 개선 권고, 징계, 지원 조정, 활동 범위 제한, 명예보유자 전환, 인정 해제 등의 조치로 나아가야 한다. 평가 주체 역시 이해관계에서 자유로운 외부 전문가 중심으로 구성돼야 한다. 재평가는 통제가 아니라 행정 절차이며 제도는 신뢰를 확보하기 위한 최소 요건이다. 부산시는 이미 그 첫걸음을 뗐다. 범죄 경력 조회와 결격사유 명문화는 그 출발선이다. 이제는 조례 개정을 넘어 내실 있는 운영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그 시작이 바로 정기적인 재평가와 전승 실적의 체계적 관리다. 일찍이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은 “무형유산의 가치는 기술 그 자체보다 그것을 체득하고 실천하는 인간, 더 나아가 삶의 태도와 전승의 과정에 있다”고 했다. 기술적 성취가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개인의 품성과 공공성이 결여된다면 시민의 신뢰와 지지는 결국 거두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전승자들은 직시해야 한다. 전통은 기술이 아니라 삶의 질서이며 예술은 인간의 품격을 떠나 존재할 수 없다. 무형유산은 과거를 지키는 일이다. 그러나 제도는 미래를 향해야 한다. 아무것도 묻지 않는 것이 전승자를 보호하는 길이 아니다. 공정하게 묻고 필요한 지원을 보완·개선하는 구조만이 전통을 살린다. 재평가는 불신이 아니라 책임의 확인이다.
[허동윤의 비욘드 아크] AI 시대, 인간을 다시 생각한다
2026년 새해의 시작과 함께 전 세계의 이목은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소비자 가전 전시회)에 집중됐다. 이번 행사에서 가장 주목받은 것은 현대차가 선보인 피지컬 AI, ‘아틀라스’였다. 글로벌 IT 전문 매체가 선정하는 ‘베스트 오브 CES 2026’에서 ‘최고 로봇’상을 받기도 한 아틀라스는 현존하는 휴머노이드 로봇 가운데 가장 진보된 사례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아틀라스는 단순히 움직이는 기계가 아니다. 인지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로봇이다. 스스로 학습한 내용은 같은 작업공간에 있는 모든 아틀라스에게 바로 공유된다. 배터리가 부족하면 스스로 충전한다. 로봇이 인간의 노동을 대체할 날이 멀지 않았음을 선포하는 것 같다. 코로나 펜데믹 이후 AI는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오픈 AI의 샘 올트먼은 “인간의 모든 지적 능력을 대체하는 기계 AGI가 5년 안에 가능하다”고 말했다. AGI(범용 인공지능)는 특정 작업이 아닌, 인간처럼 다양한 영역에서 추론하고 학습하며 문제를 해결하는 범용 인공지능이다. 소프트뱅크의 손정의 회장은 한발 더 나아가 ASI(인공지능 초지능)에 베팅하고 있다. 인간보다 수천, 수만 배 뛰어난 지능이 10년 안에 가능하다는 전망도 나온다. 일부 연구자들은 AGI가 수백만 명의 개발자 지능을 시뮬레이션하며 단기간에 ASI로 진화할 수 있다고 예측한다. 이러한 변화는 노동시장에 즉각적인 충격을 주고 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최고의 직업으로 꼽히던 개발자는 이제 경력자만 필요로 하는 직군이 됐다. 신입사원이 맡던 일의 상당 부분을 AI가 수행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구글과 마이크로소프트 등 미국의 빅테크 기업들은 대규모 해고와 채용 중단을 단행했고, 해고는 입사 초기 인력부터 시작됐다. 경력을 쌓을 기회마저 AI가 대체하면서, 미래의 직업에 대한 불안은 더욱 깊어지고 있다. 건축 설계 역시 예외는 아니다. 우리나라 건축 설계 분야의 디지털 전환은 아직 더딘 편이지만, 최근 시장에서는 디자인 요구가 세분화되며 일회성 프로젝트가 늘고 있다. 소규모 주택이나 근린생활시설의 기본 평면 정도는 건축주가 직접 AI를 활용해 만들어 오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도면의 완성도가 곧 전문성과 권위를 상징하던 시대는 서서히 저물고 있는 듯하다. 공공건축과 도시계획 분야에서는 변화가 더욱 뚜렷하다. 디지털 트윈 기술은 도시계획을 종이 도면의 영역에서 ‘체험’의 영역으로 옮겨놓고 있다. 일조 변화, 침수 경로, 보행 동선은 더 이상 추상적인 선이 아니라 가상 도시에서 직접 확인하고 검증하는 대상이 된다. 재난 대응 역시 사후 분석이 아닌 사전 시뮬레이션을 통해 설계 단계에서 결정된다. 이는 건축이 디자인을 넘어 사회적 안전망과 정책의 적합성을 판단하는 ‘도시 데이터 전문가’의 영역으로 확장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AI 시대의 건축가는 도면을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수많은 가능성 사이에서 조율하고 결정하는 존재로 재편될 것이다. 인간은 오랫동안 ‘이 행성에서 가장 뛰어난 종은 인간’이라는 자부심을 가져왔다. 도구를 사용하며 직립보행을 가능하게 했고, 고도로 발달한 뇌로 문명을 만들어왔다. 그러나 이제 도구를 다루는 능력은 휴머노이드 로봇이 더 능숙하고, 계산과 논리적 추론 역시 인공지능이 앞서는 시대가 됐다. 그렇다면 필연적으로 이제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봉착하게 된다. 다시 인간이 무엇인가를 묻는다는 것은 인공지능을 어떻게 위치시킬 것인지, 그리고 인간의 한계와 확장 가능성을 어떻게 이해하고 미래를 모색할 것인지에 관한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는 인간의 정의가 바뀌는 인류학적 지점에 서 있다. 빌 게이츠는 앞으로 가장 큰 과제는 인공지능의 강력함 그 자체가 아니라, 인간이 인공지능을 관리하고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한다. 그는 AI의 효과를 극대화하려면 그 한계를 인식하고, 적절히 통제하며 활용하는 새로운 철학과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AI가 할 수 없는 마지막 영역은 계산이 아니라 판단이다. 결국 방향을 정하고 의미를 캐내는 일은 인간의 몫이다. 기술은 선택지를 넓혀주지만, 선택의 책임까지 대신해 주지는 않는다. 건축 역시 마찬가지다. AI는 수많은 대안을 제시할 수 있지만, 어떤 공간이 공동체에 필요하고 어떤 도시가 지속 가능하며,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포기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판단은 인간의 사유에서 나온다. 인공지능이 도면을 그리고 도시를 시뮬레이션하는 시대에, 건축가의 역할은 기술을 앞서는 데 있지 않다. 기술이 닿지 못하는 질문을 끝까지 붙잡고, 인간의 삶과 사회가 향해야 할 방향을 사유하는 데 있다.
[조희창의 클래식 내비게이터] 카페와 공연장 사이에서, 쇤필드의 '카페 뮤직'
카페나 레스토랑에 들어갔다가 음악이 너무 시끄러워서 그냥 나와버린 적 있다. 카페에서 듣고 싶은 음악이라는 게 사람마다 모두 다르겠지만 나로선 너무 무겁지 않은 음악이며 너무 번잡스럽지도 않은 음악이었으면 한다. 창밖의 풍경이 좋은 카페에선 음악이 아예 없었으면 하고 여길 때도 많다. 오래전 바로크 시대에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래서 생겨난 음악을 ‘타펠무지크’(Tafelmusik)라고 불렀다. 독일어로 ‘식탁’(Tafel)과 ‘음악’(Musik)의 합성어이니 말 그대로 ‘식탁의 음악’을 뜻한다. 궁정이나 귀족 저택의 연회 때 분위기를 조성해 줄 수 있는 편안한 음악이다. 대표적으로 텔레만의 기악 모음곡 ‘타펠무지크’를 들 수 있다. 현대에 와서도 비슷한 생각을 한 작곡가가 있었다. 폴 쇤필드(Paul Schoenfield)라는 작곡가가 있다. 1947년 1월 23일에 미국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고, 6세부터 피아노를 배웠는데 그다음 해부터 작곡을 시작했다는 자료가 있는 걸 보면 만만찮은 음악적 천재성을 가진 사람이었다. 팝, 라틴음악, 유대교 음악 등을 클래식과 자유롭게 결합하여 새로운 미국적 음악을 만들어냈다. 2003년에 퓰리처상 최종 후보에 오르기도 한 쇤필드는 미시간대학의 작곡과 교수로 있다가 2024년에 세상을 떠났다.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였고, 수학자이며 탈무드에 정통한 신학자이기도 했다. 쇤필드는 젊은 시절이던 1985년에 미네아폴리스에 있는 머리스 레스토랑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며 생활한 적 있는데,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레스토랑에서 연주해도 좋을 법한 ‘하이 클래스 디너 뮤직’을 구상했다. 이듬해에 ‘카페 뮤직’이라는 제목으로 피아노 3중주곡을 발표했고, 이 곡은 지금까지 쇤필드의 대표작으로 많은 인기를 끌고 있다. 그는 자신의 음악이 심각함과 즐거움이 공존하는 ‘고급스러운 유희’가 되기를 원다면서 “20세기 초의 미국풍, 빈풍, 경음악풍, 집시풍, 브로드웨이풍 음악을 모두 넣었고, 아름다운 유대교 하시드 멜로디도 빌렸다”라고 설명했는데, 들어 보면 말 그대로 각종 음악 재료들이 섞여서 초롱초롱 빛난다는 느낌이 든다. 총 3악장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1악장에선 래그타임, 스트라이드 피아노 등 초기 재즈 요소들을 빌렸다. 2악장은 블루스와 유대교의 클레츠머 음악과 할리우드 영화음악의 서정성을 담았다. 3악장은 왈츠, 집시 음악에 빠른 스윙재즈를 혼합해서 강력한 에너지를 뿜으며 마무리한다. 무조성과 각종 실험적 음향 때문에 현대음악을 힘들어하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경쾌하고 나긋나긋한 곡도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다.
[데스크 칼럼] 가열된 원전 논쟁, 첫단추는 '신뢰'
지난해 12월 17일 정부세종컨벤션센터에서 기후에너지환경부의 업무보고가 있었다. 김성환 장관이 원전 정책 관련 답변을 하려 하자, 이재명 대통령이 끼어들었다. 이 대통령은 “(김 장관 말은) 민주당 소속이라 못 믿겠다”는 농담을 하더니 “당적 없는 사람이 답해라”고 말했다. 원전만큼 가열된 논쟁도 드물다. 친원전이든, 탈핵이든 논쟁에 뛰어든 이들은 상당한 신념을 가지고 목소리를 높인다. 지금처럼 AI 열풍에 친원전 목소리에 힘이 실릴 때도,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 직후 탈핵이 대세를 이뤘을 때도, 늘 원전 논쟁은 거칠고 뜨거웠다. 각자가 핏대를 높이고 있는데, 이미 당파적 색깔이 묻은 김 장관이 아무리 논리적인 이야기를 한들 상대 진영을 설득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어 이 대통령은 “과학을 논하는데, 네 편 내 편이 어디 있냐”며 건설적인 토론을 하자고도 주문했다. 이게 쉬운 일이 아니다. 원전을 비롯한 에너지 관련 논쟁은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이 복잡하고 유동적이다. 그리고 과정이 복잡하면, 대부분 사람들은 자기에게 유리한 근거를 끌어오고 논리를 만들어, 결론에 이르게 된다. 원전이 싼 에너지인가? 싸다면 얼마나 저렴한가? 쉽게 답을 할 수 없다. 신재생에너지와 비교해 보자. 우리나라에선 원전이 훨씬 저렴한 에너지이지만, 서유럽에선 오히려 신재생이 더 싼 곳도 있다. 원료비나 기후 환경 같은 다른 외부 요인이 이유가 될 수 있다. 더 본질적인 것은 전력망 형태나 전력 공급 운영 방식 등이다. 전력 인프라를 어떻게 구성했는가에 따라 에너지별 발전 단가는 큰 차이가 난다. 발전소의 효율성은 정책 방향에 따라 유동적으로 결정되는 셈이다. 만일 우리나라가 대규모 발전에 적절한 전력망을 계속 강화하면, 원전의 경쟁력은 더 올라갈 것이다. 반대로 신재생 에너지망에 적합한 전력망을 구축하고 투자하기 시작하면, 신재생의 발전 단가는 떨어지고 원전은 올라가 언젠가는 경쟁력이 역전될 수 있다. 그러나 다수는 복잡하고 유동적인 에너지 문제를 이미 답을 정해 놓고 접근한다. 고정불변의 명제처럼 취급하는 것이다. 그러면 보고 싶은 것만 보인다. 어떤 이는 2023년 탈핵에 앞장선 독일이 전력 수급 문제로 프랑스로부터 전기를 수입한 것만 보인다. 다른 이는 2022년 원전 강국 프랑스가 원전 가동률 문제로 독일에서 전기를 수입한 것을 강조한다. 실제론 유럽에선 전력을 수입하고 수출하는 일이 흔해, 단일 사건으로는 그 의미를 판단하기 어렵다. 에너지 문제의 복잡성과 변동성을 이해하더라도, 건설적인 논쟁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상대를 신뢰할 수 있어야, 대화가 시작될 수 있다. 2024년 7월 한국은 체코의 원전 사업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다. 원전 당국은 “UAE 이후 15년 만의 수주”라고 환호했다. 그리고 지난해 원전 수출을 둘러싼 미국 웨스팅하우스와의 ‘굴욕 계약’이 드러났다. 거액의 기술 사용료와 향후 SMR 등을 포함한 원전 수출 시 미국 기업의 검증 의무화 등이 명시된 반영구적인 계약이었다. 원전 당국이 성과는 자랑하고 불리한 내용은 감춰왔던 것이다. 지난 20일 정부는 사용후핵연료 관리부담금을 13년 만에 인상했다. 경수로형 부담금의 경우 쓰고 남은 핵연료 다발당 처리 비용이 2배 가까이 인상돼 6억 원을 넘어섰다. 이런 식으로 원전 사후처리비용이 오르다 보니, 한수원이 부담해야 할 연간 처리비용이 한 번에 3000억 원 정도 늘어나게 됐다. 수년이면 조 단위 이상의 추가 비용이 발생하고, 결국 발전 단가에 영향을 줄 것이다. 지난 13년 동안 원전 당국은 이런저런 이유로 비용 인상을 외면했다. 사용후핵연료를 함부로 버릴 수 없으니 반드시 현실화가 필요한 비용이었다. 심지어 2023년엔 산정위원회를 열고 2배 이상 인상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놓고도, 고시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원전에 ‘숨은 비용’은 없다는 기조를 유지했다. 탈핵 진영은 원전의 낮은 발전 비용을 유지하려 비용 인상을 미뤘다고 주장한다. 불리한 계약과 필요한 비용을 애써 감추는 것은 친원전, 탈원전과는 무관한 일이다. 신뢰의 문제다. 가뜩이나 가열돼 대화가 안 되는데, 당국이 내놓은 자료들에 믿음이 가지 않는다면 상황은 더 악화된다. 지금도 추가 원전 건설 같은 뜨거운 감자들이 줄줄이 대기 중이다. 이대로라면, 원전 당국과 탈핵 진영은 서로가 각자 주장만 펼치다 결국 힘의 논리로 대한민국 에너지의 미래가 정해질 듯하다. 대통령의 지적대로 네 편, 내 편 없는 대화가 간절해 보인다. 그리고 대화의 시작은 믿을 수 있는 상대가 되는 거다.
[중앙로365] 블록체인은 누구의 편이어야 하는가
블록체인과 비트코인이 처음 세상에 등장했을 때, 그것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하나의 선언에 가까웠다. 중앙화된 금융 시스템, 소수의 기관과 권력자가 통제하는 화폐와 신용의 구조를 해체하고,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개방된 경제 질서를 만들겠다는 약속이었다. 은행 계좌가 없어도, 국경을 넘지 않아도 사회적 배경이나 자본의 크기에 상관없이 모두가 같은 규칙 아래에서 경제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세상. 그것이 우리가 기대했던 블록체인의 미래였다. 그러나 2026년 현재, 우리가 마주한 현실은 그 이상과는 점점 멀어지고 있는 듯하다. 최근 각국에서 논의되는 규제의 방향을 보면, 새로운 금융 질서를 만들겠다는 기술의 약속보다는 오히려 기존 금융 기득권에 새로운 기회를 부여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열린 참여, 개방된 경제 담긴 블록체인 2026년 현재 규제 흐름 속 점점 왜곡 조각투자 등 디지털 자산 인허가 논의 기존 기득권·금융권 중심으로 설계 이런 흐름 사회 불평등 문제와 맞물려 기술이 금융 민주화 도구로 기능해야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스테이블코인 발행 주체를 은행 컨소시엄으로 제한하고 지분도 50% 이상 보유해야 한다는 규제 논의, 조각투자 거래소 지정 과정에서 수년간 기술 실증을 수행해 온 기업이 배제될 위기에 놓인 사안, 디지털 자산 관련 인허가 구조 등 최근 이어지는, 이른바 핫한 규제 논의의 중심에는 기득권 금융권이 자리하고 있다. 블록체인 산업을 개척해 온 수많은 기업과 개발자, 그리고 개인 투자자들은 오랜 기간 불확실성과 규제 공백 속에서도 이 생태계를 지탱해 왔다. 이들이 투자한 시간과 비용을 합하면 천문학적인 규모가 될 것이고, 결코 가볍게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와서 “자본력이 부족하다”, “기존 금융과 맞지 않는다” 등 소위 기득권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제도권에서 배제되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이는 기술이 약속했던 공정성과는 분명 거리가 멀다. 블록체인 기술이 가진 본질은 탈중앙화와 참여의 개방성에 있다. 누구나 노드를 운영할 수 있고, 누구나 검증자가 될 수 있으며 누구나 거버넌스에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구조는 기존 금융 시스템과는 전혀 다른 철학 위에 서 있다. 비트코인은 중앙은행도, 단일 발행 주체도 없이 작동하는 최초의 화폐 시스템이었고, 이더리움은 전 세계 개발자들이 함께 규칙을 만들고 수정해 가는 거대한 실험장이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제도화의 방향은 이 기술을 다시 중앙화된 허가 시스템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것처럼 보인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큰 역설은 가장 큰 위험을 감수하고 가장 먼저 도전했던 주체들이 성공의 열매를 나누는 자리에서 밀려날 수 있다는 점이다. 수년간 적자와 불확실성을 감내하며 인프라를 구축하고, 기술을 고도화하고, 글로벌 파트너십을 만들어 온 개척자들이 이제 와서 기득권 금융이 중심이 되어 만든 기준에서 보았을 때 ‘자격이 없다’는 이유로 배제된다면, 이는 시장경제의 기본 원리에도, 혁신의 정신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결국 기술이 만들어 낸 가치를 누리는 것은 가장 늦게, 가장 안전하게 진입한 기득권이 되고, 진짜 혁신의 주체는 주변으로 밀려나는 구조가 될 위험이 있다. 이러한 흐름은 블록체인 산업만의 문제가 아니다. 전 세계 곳곳에서 기존 질서에 의해 억눌려 왔던 대중의 불만과 분노는 점점 더 강해지고 있다. 자산 불평등, 기회 불균형, 세대 간 격차는 정치와 사회 전반을 흔들고 있으며 디지털 기술과 금융 혁신은 그 해법으로 기대를 받아 왔다. 그런데 그 혁신마저 다시 소수의 손에 집중된다면 블록체인은 또 하나의 엘리트 금융 시스템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최근 논의되고 있는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발행 주체가 은행이 되어야 한다는 일각의 규제 논의는 원화스테이블코인의 리스크가 발행 주체의 업종이나 성격과는 무관하다는 점을 간과한 채, 기존 금융권의 막연한 걱정을 기반으로 신종 산업에 무혈 입성하려는 것과 다름없다. 지금이야말로 블록체인 산업에 종사하는 모든 이들은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한다. 우리는 누구를 위해 이 기술을 만들고 있는가. 규제는 필요하다. 투자자 보호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혁신의 진입 장벽이 되고, 새로운 기득권을 만들기 위한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기술이 처음 약속했던 것은 ‘안전한 독점’이 아니라 ‘열린 참여’였다. 2026년은 디지털 자산 산업이 새로운 전기를 맞이할 중요한 시점이 될 것이다. 스테이블코인, 토큰화된 실물자산, 온체인 금융 인프라는 이제 더 이상 실험이 아니라 현실이 되고 있다. 이 변화의 방향이 다시 한번 블록체인의 근본정신, 즉 탈중앙화, 개방성, 참여 민주주의로 조정되기를 기대한다. 기술이 다시 대중의 편에 서고 개척자와 도전자가 정당한 보상을 받는 구조를 만들어 갈 때, 디지털 자산은 비로소 금융의 민주화를 향한 진정한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김필남의 영화세상] 지워진 얼굴
평소 영화를 보고 나면 늘 “그냥 그랬어”라던 친구가, 웬일로 “돈이 아깝지 않은 영화”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배우 박정민의 열혈 팬이라 극장에 간 것을 알았기에 그다지 신뢰가 가지 않는 말이었다. 그러나 친구는 영화의 주제와 연상호 감독의 연출력까지 들먹이며 흥행을 단언하기까지 했다. 그쯤 되니 도대체 어떤 영화기에 친구의 마음이 움직였는지 궁금해졌다. 친구의 강력한 추천에도 불구하고 극장에서 영화 ‘얼굴’을 보지 못했다. 제작비 2억 원의 저예산 영화라 상영관 확보가 어려웠던 건지, 바쁜 일상에 치인 탓인지 영화는 곧 기억에서 잊혔다. 하지만 이 영화는 친구의 장담대로 흥행에 성공했다. 소규모 자본의 한계를 극복하고 백만 관객을 동원한 것은 물론, 제작비 대비 50배의 수익이라는 압도적인 성과를 기록했다. 소문으로만 듣던 영화가 넷플릭스에 공개되었다고 해서 얼른 찾아보았다. 영화는 40년 만에 백골로 돌아온 어머니 ‘영희’(신현빈)의 죽음에서 시작한다. 시각장애를 가진 전각(篆刻) 장인 ‘영규’(권해효)는 아내가 타살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소식에 무덤덤하다. 그런 아버지 곁에서, 얼굴도 모르는 어머니의 유골을 마주하게 된 아들 ‘동환’(박정민)은 당혹스럽다. 동환은 장례를 치르는 것으로 자식 된 도리를 다하고, 어머니와 관련된 일을 서둘러 매듭짓고 싶어 한다. 하지만 어머니를 기억하는 이들을 마주하며 그녀의 삶과 죽음이 평범하지 않았음을 직감한다. 영희를 기억하는 이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그녀가 “못생겼다”고 증언한다. 영화는 이 지점에서 1970년대 과거로 시선을 옮긴다. 시각장애인 영규가 멸시와 조롱의 대상이었던 시절, 오직 영희만은 그에게 온기를 건넸다. 그런 그녀에게 영규의 마음이 기우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게다가 주변에서 영희가 “절세미인”이라고 부추기니 영규는 그녀가 운명이라 확신한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가 영희의 얼굴이 “괴물 같다”는 말을 전하면서 평화는 깨진다. 앞을 볼 수 없기에 아름다움이라는 환상에 매달렸던 그에게 아내의 못생긴 외모는 재앙과도 같았다. 결국 세상이 자신을 농락했다는 배신감 속에 영규의 분노가 폭발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서늘한 지점은 정작 영희의 얼굴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다. 감독은 의도적으로 영희의 얼굴을 볼 수 없게 만드는데, 이는 70년대 청풍피복에서 ‘시다’로 일했던 여성 노동자들의 지워진 얼굴과 궤를 같이한다. 산업화의 영광 속에서 그들의 노동은 대체 가능한 부속품으로 폄하되었고 존재는 망각되었다.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했던 영희의 얼굴은 현대사의 그늘 속으로 사라져간 여성 노동자들의 초상을 소환해낸다. 우리가 끝내 보지 못했던 그녀의 얼굴이 곧 시대의 외면 속에 지워진 이들의 실체였던 셈이다. 이 지점에서 시각장애를 가진 영규가 갈망해 온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의 정의 또한 처참히 무너진다.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명확하다. 우리는 무엇을 본다고 믿으며, 무엇을 기어이 외면하려 하는가. 아무도 영희의 얼굴을 본 적 없고 보려는 의지조차 없었지만, 모두가 각자의 잣대로 그녀를 재단하기 바빴다. 결국 영화는 보지 않고도 안다고 믿었던 이들의 오만이 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음을 폭로한다. 그래서 영화의 엔딩, 한 장의 사진으로 마주하는 영희의 얼굴은 경악을 넘어 지독한 씁쓸함을 남긴다. 연상호 감독의 ‘얼굴’은 미추(美醜)를 가리는 영화가 아니라, 그동안 우리가 제대로 보지 않았음을 고백하게 만드는 영화다. 영희의 얼굴을 묵묵히 응시할 때, 비로소 편견과 조롱에 가려졌던 한 사람의 실존을 마주할 수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기어이 외면했던 얼굴을 회피하지 않고 직시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이 영화가 요구하는 진정한 ‘보기’의 방식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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