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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가덕신공항이 빨리 개항해야 하는 이유
숱한 정치적 논란과 지역 갈등을 낳았던 가덕신공항. 착공과 개항이 눈앞 현실이 된 불가역적 국책사업이 됐지만, 김해공항이나 가덕신공항 관련 기사에는 으레 신공항에 대한 불신과 의혹, 비방을 담은 댓글이 이어진다. 좁은 땅덩이에 문제투성이 신공항 건설은 불필요하다거나, 김해공항을 확장하자는 주장들이다. 아마도 개항하는 그날까지도 구설꾼들 사이에서 입방아거리가 될 듯하다.
주장은 이렇다. 가덕도가 철새가 많고, 태풍의 길목이어서 조류 충돌과 강풍에 의한 사고 위험이 크다는 것이다. 2002년 돗대산 중국 민항기 추락 사고를 이용해 위험성을 과장, 국민을 선동하고 있다는 글도 눈에 띈다. 당시 참사는 기장의 부주의였을 뿐, 조종사들의 비행 실력을 늘리면 될 일이라는 글도 있다. 돗대산을 깎아버리면 되고, 산을 없애는 비용이 신공항 건설보다 훨씬 적게 든다는 주장도 있다. 남풍이 불면 김해공항의 북쪽 돗대산까지 근접 비행해 선회 착륙을 해야 하는 김해공항의 위험천만한 숙명을 두고, 가덕도에도 남풍이 부니 위험은 매한가지라는 주장과 김해공항의 활주로 방향만 바꾸면 되니 신공항은 필요 없다는 주장도 있다. 수도권 언론이 만들어낸 ‘멸치 말리는 공항’이라는 조롱을 소환하며, 부산 언론이 투기꾼과 건설업자의 배를 불리려 신공항을 못 지어서 안달이라는 글도 빠지지 않는다.
올해 김해공항에서는 안전과 공항 운영에 태생적 취약성을 드러낸 두 사건이 있었다. 6월 김해공항 활주로에 접근하던 대만 중화항공 여객기가 선회 착륙을 시도하다 정상 선회 비행 경로를 벗어나 돗대산 쪽으로 바짝 붙어 아찔한 비행을 했다. 대만 언론은 “129명의 사망자를 낸 돗대산 중국 민항기 추락 사고가 되풀이될 뻔했다”고 보도했다. 8월에는 김해공항에서 출발한 진에어 여객기가 이륙 직후 조류 충돌 사고가 발생해 약 338km 떨어진 인천공항으로 회항했다. 김해공항이 코앞인데도, 김해공항으로 회항할 경우 승객들이 대체 항공편으로 갈아탄 뒤 이륙할 시간이 커퓨 타임(야간 이착륙 제한 시간)에 걸리기 때문에 내려진 웃지 못할 결정이었다.
전자는 김해공항의 지형적 위험성을 보여줬다. 김해공항은 북쪽에 산이 자리 잡은 분지 지형이다. 특히 기후 변화로 여름이 길어지고 남풍이 부는 날이 잦아지며 산을 피해 선회 착륙을 해야 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이는 난도가 매우 높아 특히 지형에 익숙지 못한 외국 항공사 조종사들이 큰 어려움을 겪는다. 후자는 커퓨 타임의 존재로 24시간 운항이 불가능한 ‘반쪽짜리 공항’으로서 한계를 드러냈다.
활주로 방향을 바꾸거나, 김해공항을 확장하자는 주장은 김해공항의 이러한 구조적 한계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됐다. 어쩌면 의도적인 외면도 자리할 것이다.
김해공항 확장론은 김포공항과 인천공항의 사례와 견줘보면, 더욱 논리가 빈약하다. 김포공항은 주거지와 산업 시설이 인접해 있다. 소음 문제로 야간 운항 제한 시간이 존재한다. 항공기 이착륙 경로가 주거지와 산업 시설을 경유해 사고 위험도 상존한다. 공군과 함께 사용하는 공항으로 공항 운용의 제약도 존재한다. 이 모두가 김해공항과 같은 조건이다. 야간 항공기 운항과 시설 확장이 불가능해 수도권의 급증하는 국제선 항공 수요를 처리할 수 없게 되자, 신공항으로 인천의 섬 영종도에 건설한 것이 인천공항이다.
김해공항과 닮은꼴인 김포공항을 두고 보면, 가덕신공항 불가론은 철저한 수도권 중심적 시각이다. 그들에겐 반쪽짜리 김해공항의 한계로 어쩔 수 없이 인천공항을 이용하며 시간적·경제적 비용과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 동남권 주민들이 대수롭지 않을지 모른다.
가덕도에 철새가 많아 위험하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약하다. 김해공항은 물론, 인천공항과 김포공항도 철새 도래지와 인접해 있다. 공항 입지 조건의 특성과 조류 서식지의 특성이 본질적으로 겹쳐서다. 조류 충돌 위험은 ‘상수’로 예방과 관리가 중요한 문제다. 그렇게 따진다면, 철새 도래지와 인접한 김포공항은 물론, 인천공항 역시 애초에 없었어야 했다.
가덕도가 태풍의 길목이라는 주장도 어디 우리나라에 상륙하는 태풍이 가덕도로만 거쳐 가는가. 태풍이 오면 어떤 공항이든 항공기 운항이 어렵다.
적자 공항이 될 것이라는 주장 역시 터무니없다. 김해공항은 개항 이래 처음으로 올해 국제선 이용객 1000만 명 달성이 예상된다.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김해공항 국제선 이용 수요는 수용 능력을 넘어선 지 오래다. 연휴 등에는 이용객들이 몰려 극심한 혼잡을 보인다. 곧 신설되는 제2출국장은 궁여지책이다.
가덕신공항을 둘러싼 갖은 억측과 근거 없는 비방은, 공항이 마침내 개항해 위용을 드러내고 동남권의 관문 공항으로 비상할 때 비로소 잦아들 것이다.
이대성 사회부 차장 nmaker@busan.com
2025-10-29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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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영화 ‘범죄도시’와 캄보디아 사태
2017년 첫 개봉한 한국 영화 ‘범죄도시’ 시리즈는 폭력과 납치, 조직 범죄의 잔혹함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과도한 폭력과 거친 언어 등으로 순화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많았지만, 영화는 연속 1000만 관객을 동원하는 등 국내외에서 선풍적 인기를 얻고 있다.
일반적으로 영화는 영화일 뿐, 현실과 다르다는 인식을 깔고 있다. 그러나 최근 캄보디아에서 잇따르는 한국인 납치·감금 사건은 그 영화적 긴장감이 더 이상 픽션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스크린 속 ‘악당’이 아닌, 현실의 범죄조직이 한국인을 대상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지난달 20일 캄보디아에서 귀국한 20대 A 씨는 경남경찰청에 인신감금 피해 사실을 신고했다. 그는 지난 7월 17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캄보디아로 출국했다가 그대로 감금됐다. 중국인으로 추정되는 조직원들은 A 씨에게 몸값으로 3000만 원을 내라고 협박했다. 전화금융사기(보이스피싱) 일까지 시켰다. 휴대전화와 여권 등 소지품을 뺏긴 채 위치를 알 수 없는 건물 3층에 감금됐다.
그러나 A 씨는 다음 날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현지 건물의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며 탈출을 강행했다. 찰과상을 입는 등 다리에서 피가 났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인근 민가로 도주했다. 그곳에서 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겨우 한국 대사관과 연락을 취해 가까스로 귀국했다.
경찰청은 올해 말까지 국외 납치·감금 의심·피싱 범죄 특별자수·신고 기간을 운영하고 있다. 캄보디아에서 우리 국민을 납치, 감금하는 등 범죄가 잇따른 데 따른 조처다.
경남에서는 27일 기준 캄보디아 실종 관련 신고가 모두 17건 접수됐다. 다행히 이 중 10건이 해제됐다. 나머지 7건 중 4건은 가족·지인 등과 연락이 돼 현지 영사관을 거쳐 대상자 안전 여부를 계속 확인하고 있다.
캄보디아에서는 월 수백·수천만 원 수입, 숙식 제공, 비자 지원 등의 조건으로 사람을 유인한 뒤, 도착 후 여권을 압수하고 콜센터나 온라인 사기 업무를 강요하는 사례가 잇따른다. 특히 캄보디아에는 ‘웬치’라는 범죄 단지가 있다. 웬치는 동남아 보이스피싱 조직 사이에서 쓰는 은어다. 이곳에는 유인당한 외국인이 범죄조직 요구를 거절하면 폭행과 감금이 뒤따르고, 일부는 몸값 협박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캄보디아 범죄조직의 야만적 행각은 영화 속 상상력을 능가한다는 게 피해자들의 증언이다. 이 범죄 구조는 영화 범죄도시 속 조직범죄의 형태와 놀라울 만큼 닮아 있다. ‘캄보디아 드림’으로 한국 청년을 유혹하는 모집책, 감시자, 폭력조, 그리고 자금책이 분업화돼 있다.
그 과정에 피해자는 내부에서 철저히 통제된다. 차이점은 영화처럼 일회성이 아니라, 온라인 사기·인신매매·국제 자금 세탁이 복합적으로 얽힌 ‘지속형 범죄 시스템’이라는 점이다. 이는 단순 납치 사건이 아니라, 국제 인권 문제이자 외교적 위기다.
정부는 캄보디아 정부와 합동수사팀을 꾸려 단속을 강화하고 있지만, 가장 효과적인 방패는 여전히 개인의 경계심이다. 상식을 벗어난 고수익 제의와 특혜는 범죄와 연관된 함정이 있다는 의심을 가져봐야 한다.
일부에선 이번 사태를 ‘청년 실업시대가 낳은 비극’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그러나 제안을 받은 당사자부터 범죄 연관성에 대해 근본적 경계심을 가져야 한다. 해외에서 고수익 일자리를 제안받았을 때, 공식 채널(외교부 해외안전여행, 대사관 등)을 통해 반드시 사실 여부를 확인해야 한다.
연락 수단이 메신저뿐이거나 근무지가 불분명하다면 즉시 의심해야 한다. 여권은 절대 타인에게 맡기지 말고, 사본을 따로 보관해야 한다. 또한 출국 전 가족에게 여행 일정과 숙소 정보를 공유하고, 현지 대사관 긴급번호를 저장해 두는 습관이 필요하다.
영화 속 폭력은 관객에게 일시적 긴장감을 주지만, 현실의 범죄는 누군가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간다. 캄보디아발 납치 사건은 더 이상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다. 스크린 속 장면이 현실이 되지 않도록, 우리 모두가 ‘의심하고, 확인하는’ 습관을 지녀야 한다. 경계심이야말로 지금 이 시대의 가장 현실적인 안전 장비다.
영화와 현실의 가장 큰 차이는 ‘엔딩이 없다’는 것이다. 스크린 속 마석도(마동석 분) 형사는 결국 악을 무너뜨리고 정의를 세운다. 그러나 캄보디아 범죄 단지의 실상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범죄는 발생하고 나면 피해가 크고 회복도 더디다. 예방이 최선의 무기다.
김길수 중서부경남본부장 kks66@busan.com
2025-10-27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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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나는 내가 영포티인 줄 몰랐다
얼마 전 30대 후배들에게 큰 웃음을 선사했다. 그들의 대화에서 ‘영포티’라는 말이 오갔다. 많이 들어봤지만 정확한 의미를 몰라, 뜻을 물었다. “자기 관리를 해서 젊게 사는 40대인데…”라는 설명까지 듣고, 말을 잘랐다. “그럼 난데”라는 충격적인 발언에 그들은 잠시 어이없는 표정을 짓더니, 크게 웃었다.
물론 40대 후반으로 기울고 있는 선배의 농담이었다. 그럼에도 내심 ‘약간은 젊게 사는 40대에 가깝지 않을까’하는 기대감도 있었다. 후배의 설명은 이어졌다. 후배는 “처음에 그런 좋은 뜻이었지만, 요즘엔 다르다. 젊게 산다는 자신감이 과해, 20대와 30대에게 뭘 계속 가르치려는 꼰대를 비꼬는 말이다”고 마저 설명했다.
그러니까 영포티는 좋은 뜻이 아니라, ‘진화한 꼰대’라는 것이다. 전통적인 꼰대는 나이와 계급으로 아랫사람을 누르는 스타일이라면, 영포티는 옛날 꼰대와는 다르게 젊은 감각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그런 노력에 심취해 자신이 꼰대라는 것을 모르는 이들이다. 어쨌든 20대와 30대에게 이들은 비호감이다.
영포티라는 말이 워낙에 퍼지다 보니, 관련된 기사도 제법 나왔다. 경제적 계급 차이가 이유라는 분석도 있다. 쉽게 표현하면, 20대와 30대들이 경제적 부담으로 구매하기 힘든 패션 브랜드를 영포티들은 쉽게 사 몸을 치장할 수 있다는 거다. 여기서 오는 상대적 박탈감이 반감을 부른다는 얘기다.
일리가 있는 분석인 듯 보이지만, 영포티에 대한 반감을 오롯이 박탈감으로 설명하기 힘들다. 영포티이든 올드포티이든 젊은 층은 40대 이상에게 부정적 이미지를 가지기 쉽다. 가장 큰 불만은 나이가 들수록 어린 사람들과 대화하기 보다 가르치려 한다는 지점이다.
대다수 조직에서 40세 전후의 구성원은 중추적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 흔히 말하는 조직 내 허리다. 경력이 붙어 일을 제법 잘 하면서, 아직 완전한 관리자 직위에 오르지 못해 일도 많이 하는 시기다. 10여 년 이상 한 분야에서 있었다면 일 처리에 요령이 생겼을 것이다. “일 좀 한다”는 칭찬을 종종 받게 된다.
그때가 위험하다. 작은 인정이라도 자주 받다 보면, 자신감이 많이 붙을 수 있다. 굳이 칭찬이 없더라도, 스스로 봐도 예전보다 일을 잘하니 자신감이 과해질 수 있다. 그러다 보면 후배를 비롯해 주변 사람의 업무 태도 등에 불만이 생길 수 있다. 좋은 뜻에서 후배들에게 조언을 하기 시작했는데, 어느새 잔소리를 많이 하는 사람이 된다.
결국 영포티이든, 50대 꼰대이든, 젊은 사람이 피하고 싶은 어른은 대화하기 힘든 사람일 것 같다. 윗사람은 대화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아랫사람은 일방적인 훈계인 경우가 많다. 회의를 한다고 했는데, 알고 보면 그냥 결국 장시간에 걸친 업무지시라고 느낀 적이 있지 않은가.
조직 안에서는 권위와 계급 차이가 분명히 존재한다. 그 차이 앞에서 진솔한 이야기가 나오기 어렵다. 윗사람이 입을 닫고 들으려 할 때 조금씩 진짜 속내가 나올 것이다. 권위적인 윗사람이 “아이디어를 내라”, “생각을 말해보라”고 강조해도 아랫사람은 그가 듣고 싶은 말을 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런 회의 뒤 윗사람은 소통했다고 판단하는 게 일반적이다.
꼰대 문화로 놀림 받는 권위적인 문화가 21세기엔 생산성을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창의력이 중요한 경쟁 구도가 됐는데, 아직도 옛 군사 문화 분위기에 젖어 있다면 회의 결과는 시대에 뒤처진 결론에 이를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이렇게 복잡한 세상에선 윗사람 혼자만의 판단보다는 여러 조직원들의 의견이 취합된 결과가 정답에 가깝다. 그런 면에서 미국이나 유럽의 IT기업까지는 아니더라도 실질적인 소통을 위해 노력하는 회사가 더 나은 결과물을 쥐게 될 것이다.
비단 기업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지자체장도 혼자만의 생각을 강요하면 도시가 엇나갈 수도 있다. 대통령이 자기 말만 하고 듣는 것을 싫어하면, 국정이 엉망이 될 수 있다.
요즘은 대통령이 주재하는 여러 회의를 국민이 직접 시청하는 시대다. 회의에서 결정되는 내용만큼이나 회의 진행 방식도 중요하다. 효율적이면서도 충분한 소통이 이뤄지는 회의라면 좋겠다. 딱딱한 기업 의사결정 구조를 합리적으로 바꿀 수 있는 리더십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대한민국의 경쟁력을 높이는 데 효과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대통령을 포함해 모든 40대 이상이 ‘꼰대’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
2025-10-22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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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양산 부산대부지 개발 마지막 기회 날리면
“부산대 양산캠퍼스 유휴부지 매각 가격 입장 차를 해결하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중앙기관의 높은 벽을 실감했고, 당근과 채찍 기능을 담당할 민간·공공거버넌스 구축의 필요성도 절감했습니다.”
최근 9개월간 활동을 끝낸 양산시의회 아카데미나폴리스 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정성훈 시의원이 기자와 가진 인터뷰 때 했던 말이다. 정 의원은 인터뷰에서 기초자치단체 의회의 한계성에 대한 푸념과 함께 문제 해결 방안도 제시했다.
양산시도 정 의원의 푸념처럼 ‘부산대 양산캠퍼스 유휴부지’ 활용 방안을 놓고 골머리를 썩고 있다. 110만㎡ 규모의 부산대 양산캠퍼스는 2000년 4월 분양 부진으로 어려움을 겪던 양산신도시 구원투수로 등장했다. 등장과 동시에 양산신도시 ‘분양 활성화’와 ‘지역 발전’의 일등공신이 됐다.
그러나 부산대가 양산캠퍼스에 계획한 것들을 미루면서 시민들의 불만이 쌓였고, 2015년 외부로 분출되면서 ‘양산 발전’을 막는 요인으로 전락했다.
양산시와 정치권이 ‘부산대 양산캠퍼스 유휴부지(이하 유휴부지)’ 개발을 위해 연구시설을 유치하고 개발할 수 있도록 법까지 개정했으나, 성과로 이어지지 않았다. 이런 와중에 기회가 찾아왔다. 2023년 국토교통부가 공모했던 ‘공간혁신구역(화이트존) 선도 사업’이 그것이다.
공간혁신구역은 국·공유지 등 사업 추진이 쉬운 지역에 국토부와 지자체, 한국토지주택공사(LH) 등 공공 시행자가 협력해 추진하는 공공주도 사업이다. 선정되면 땅의 용도와 용적률, 건폐율 등 밀도를 자유롭게 계획·개발할 수 있어 양산시의 고민을 한 방에 해결할 수 있는 획기적인 사업이었다.
양산시는 공모를 신청했고, 지난해 7월 선정됐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동안 불만을 표출했던 양산신도시 주민들도 환영과 함께 정부 규제 완화를 통해 세계적인 명소로 탈바꿈한 미국 뉴욕시의 허드슨 야드나 싱가포르 마리나베이처럼 장밋빛 기대를 하게 했다.
하지만 공모에 선정된 지 15개월이 넘었으나 후속 절차가 진행되지 않으면서 장밋빛 기대를 품었던 양산시와 시민들의 속을 태우고 있다.
이 사업이 원활히 진행되기 위해 부산대가 유휴부지 54만 2000여㎡를 LH 측에 매각해야 한다. 그런데 매각 가격을 놓고 양측의 입장 차가 좀처럼 좁혀지지 않으면서 후속 절차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부산대는 감정평가를 통한 현시세대로 매각을 원한다. 반면 LH는 20여 년 전 부산대에 양산캠퍼스 부지를 매각할 당시 가격에다 이자 등으로 환수하겠다는 입장이다. 나아가 양측은 이를 어기면 배임죄 등에 해당한다며 맞서고 있다.
문제는 정부 공모 전부터 이런 상황이 예견됐다는 점이다. 경남도와 양산시가 공모 전 문제 해결을 위해 부산대와 LH를 상대로 중재에 나섰지만, 합의점 도출에 실패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 공모를 신청했고, 선정 이후에도 지속되면서 무려 3년 가까이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다.
그렇다고 경남도와 양산시, 양산시의회, 정치권이 손을 놓고 있지도 않았다. 경남도와 양산시는 지난해 하반기 유휴부지 매각 가격을 ‘감사원 컨설팅’으로 정하자고 제안했다. 양측이 이를 수용해 급물살을 탈 것으로 기대됐다.
하지만 1년이 되도록 양측의 입장 차가 좁혀지지 않고 평행선을 달린다. 지난달 개최됐던 경남도와 양산시, 부산대, LH 간 4자 간담회에서 감사원 컨설팅에 포함할 내용에 대해 협의했을 정도다. 양산시의회도 문제 해결을 위해 특위까지 구성해 9개월간을 활동했지만, 합의점 도출에 실패했다.
이 때문에 시민들의 반응은 싸늘함을 넘어 폭발 직전이다. 20여 년째 흉물로 방치 중인 유휴부지 개발의 마지막 기회일 수 있는데 이를 날릴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나아가 시민들은 정부가 특별법 제정을 통해 해결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도 내고 있다.
부산대와 LH는 양산시와 시민 바람대로 이번이 유휴부지 개발의 마지막 기회로 보고 합의점 도출에 지금보다 더 전향적인 자세로 나서야 한다. 경남도와 양산시도 정 의원의 주장대로 당근과 채찍 기능을 할 민간·공공거버넌스 구축을 적극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정치권 역시 부산대와 LH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설득과 압박을 병행해야 한다. 만약 실패하거나 장기화하면 정부를 설득해 특별법 제정을 통해 문제 해결에 나서야 한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더 이상 좋은 기회가 없을지도 모르는 만큼 부산대와 LH가 최선을 다해서 문제를 해결하지 않을 시 엄청난 후폭풍에 직면할 것임을 명심해야한다.
김태권 동부경남울산본부장 ktg660@busan.com
2025-10-20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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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면세점'이 '본업'된 인천공항
인천공항이 5단계 확장을 주장하고 나서면서 가덕신공항 건설에 미칠 영향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인천공항 5단계 확장은 가덕신공항과 예산 배분과 우선 순위, 노선 확장 등에서 직접 경쟁 관계에 놓일 가능성이 높다. 이미 4단계 확장까지 마무리한 인천공항은 외국인 유입 확대 등 ‘허브공항’ 역할을 위해 5단계 확장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인천공항은 정말 허브공항 역할을 하고 있을까.
인천공항은 2024년 4단계 확장 사업을 완료, 연간 수용 능력을 1억 600만 명으로 확대했다. 지난해 인천공항 국제선 여객은 7066만 9246명으로 코로나19 이전인 2019년(7057만 8050명)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인천공항 5단계 확장을 추진하는 인천공항공사 등은 2033년 공항 시설이 또다시 포화 단계에 이를 것이라고 주장한다.
인천공항 5단계 확장 사업은 제5활주로와 제3여객터미널과 화물터미널을 신규로 건설하는 내용이다. 6조 원이 투입되는 5단계 확장이 완료되면 인천공항은 연간 여객 1억 3000만 명을 수용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인천공항 5단계 사업이 추진되면 2030년 가덕신공항 개항과 맞물려 신공항의 항공사, 국제선 노선 유치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가능성이 높다.
인천공항이 ‘허브공항’ 역할을 강조하며 ‘덩치 키우기’를 주장하고 있지만 실제 외국인 환승 등 허브공항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국토교통부가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소속 국민의힘 김도읍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인천공항의 환승률은 계속 하락하고 있다. 2021년 16.7%였던 인천공항 환승률은 2022년 15.6%, 2023년 12.8%, 2024년 11.6%로 떨어졌고 올해 상반기에는 11.2%에 그쳤다.
인천공항이 환승률 감소에도 ‘수요 증가’를 주장하는 배경에는 국제선 노선 몰아주기도 있다. 최근 김해공항을 비롯한 지방공항의 국제선 수요가 늘고 있지만 항공사 국제선 노선은 인천공항에 집중돼 있다. 국토교통부 항공통계에 따르면 올 들어 8월까지 국내 공항의 국제선 운항 가운데 77%가 인천공항에 집중됐다. 코로나19 이전인 2019년 75%에서 오히려 늘어난 수치다.
인천공항이 5단계 확장 사업의 근거로 제시한 국제선 수요가 과장됐다는 지적도 나온다. 지난 7월 국토부 장관후보자 인사청문회 당시 김도읍 의원은 인천공항의 수요에 대해 “정부의 제6차 공항개발종합계획보다 시기별로 300만~500만 명가량 더 높게 검토했다”고 비판했다.
인천공항의 수익 구조에 대해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나온다. 장거리 노선을 사실상 독점한 인천공항은 출국자의 면세점 이용과 연계된 ‘땅장사’로 주된 수익을 올리고 있다. 최근 10년간 인천공항 수익 가운데 착륙료, 탑승료 등 ‘항공 수익’은 20% 안팎에 머물러 있다. 반면 상업시설 사용료, 임대료 등 ‘비항공 수익’은 70% 안팎으로 높다.
인천공항의 비항공 수익 비율은 코로나19 이전인 2019년 81%를 기록했다. 코로나19로 공항 이용객이 줄어들자 60%대로 줄었던 비항공 수익 비율은 이후 다시 상승해 지난해에는 77%를 기록했다. 인천공항의 경우 전체 수익 가운데 ‘상업시설 사용료’ 비율이 50~60%를 차지한다. 사실상 ‘면세점 장사’로 공항을 운영하고 있는 셈이다. 이 때문에 인천공항이 5단계 확장에 나선다고 해도 결국 제3터미널 건설로 면세점을 확대하는 ‘땅장사’를 하는 게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다.
인천공항의 수익구조는 김해공항과 비교된다. 김해공항은 항공 수익이 전체 수익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30%대이고 비항공 수익 비율은 60%대다. 항공 수익 비율이 인천공항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다. 김해공항 수익에서 비항공수익이 차지하는 비율은 지난 10년간 코로나19 기간을 제외하고 61~63%로 유지되고 있다. 김해공항은 ‘운항금지시간’에도 불구하고 국제선 수요가 꾸준히 늘어나면서 슬롯(항공기 이착륙 횟수) 이용률도 80~90%대를 유지하고 있다.
김해공항은 늘어나는 국제선 수요 등에 힘입어 매년 흑자를 보고 있지만 인천공항과 달리 상당 부분 수익이 한국공항공사 산하 적자 공항을 지원하는 데 사용된다. 이런 실정에도 일부 중앙 언론은 인천공항의 ‘수익성’만 높이 평가하면서 전체 지방공항을 ‘고추 말리는 공항’으로 매도하는 행태를 반복하고 있다. 가덕신공항이 개항하고 인천공항이 5단계 확장을 주장하는 2030년대에는 지역별 항공 수요에 변화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이 때문에 정부가 항공 소비자의 편익과 직항 노선 확대에 중심을 둔 공항 정책을 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2025-10-15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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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1200만 관중 신기록… 챔피언은 누가 될까
국내 프로 스포츠 사상 최초로 단일 시즌 1200만 관중을 돌파한 올해 프로야구가 진정한 챔피언을 가리는 포스트시즌에 접어들었다.
2025 KBO리그는 관중 관련 기록을 경신한 한 해였다. 역대 최초 개막 2연전 전 구장 매진 달성을 시작으로, 매 100만 단위 관중을 모두 역대 최소 경기로 달성했다. 또 지난 9월 5일에는 지난해 작성한 단일 시즌 최다 관중 기록(1088만 7705명)을 넘어서며, 최종 관중 1231만 2519명을 기록했다.
전체 경기 수의 약 46%인 331경기가 매진됐다. 역대 최초로 160만 관중을 돌파한 삼성을 비롯해 LG, 두산, KT, SSG, 롯데, 한화, NC, 키움 등 9개 구단이 한 시즌 최다 관중 기록을 경신했다.
이제 남은 관심사는 단 하나. 올해 대망의 우승팀이 누가 될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정규시즌을 1위로 마친 LG는 2년 만에 통합 우승에 도전한다. LG의 대항마로 가장 먼저 꼽히는 팀은 아쉽게 정규시즌 우승을 놓친 2위 한화다. 또 3위 자리를 꿰찬 SSG와 4위 삼성이 막판 상승세를 몰아 ‘이변의 주인공’을 노리고 있다.
이번 포스트시즌의 관전포인트는 LG가 통합 우승을 꿈꾸는 가운데 이를 저지하려는 한화와 SSG, 삼성의 도전으로 압축된다. 역대 포스트시즌을 살펴보면 우승 가능성이 가장 높은 팀은 역시 한국시리즈에 먼저 도달한 LG다. 전후기 리그와 양대 리그 시절을 제외하고 정규시즌 우승팀의 통합 우승 확률은 85.3%(35회 중 29회)에 달한다. 특히 정규시즌 우승팀은 2019년부터 6년 연속 한국시리즈를 제패했다.
정규시즌 우승팀이 힘을 비축한 상태에서 난관을 뚫고 한국시리즈까지 올라온 팀과 경쟁한다는 건 매우 큰 이점이다. LG는 후반기 막판 다소 삐끗했지만, 정규시즌에서 가장 꾸준한 성적을 냈다. 시즌 내내 1~2위를 달리다가 3위에 딱 하루 미끄러졌을 뿐, 지난 8월 7일 이후 선두 자리를 단 한 번도 뺏기지 않았다.
LG는 팀 타율 1위(0.278)와 평균자책점 3위(3.79)로 투타가 매우 안정돼 있다. 통합 우승을 달성한 2023년과 비교해 불펜이 다소 약하다는 평가도 있지만, 요니 치리노스-앤더스 톨허스트-임찬규-손주영으로 이어지는 선발진은 2년 전보다 훨씬 강하다. 또한 이미 우승을 맛보는 등 큰 경기 경험이 많으면서 결정적 순간에 맹활약을 해줄 선수들도 즐비하다.
이에 맞서는 한화는 강력한 ‘원투 펀치’ 코디 폰세와 라이언 와이스를 내세워 한국시리즈 챔피언을 노리고 있다. 정규시즌 우승을 놓쳐도 한국시리즈 정상에 오른 사례도 다섯 번이나 된다. 2015년부터 시작한 10구단 체제로 범위를 좁히면 2015년 두산과 2018년 SK(현 SSG)가 각각 정규시즌 우승팀 삼성, 두산을 꺾고 한국시리즈를 제패한 바 있다.
특히 한화는 정규시즌에서 LG를 상대로 7승 1무 8패를 기록하며 대등한 경기를 펼쳤다. 정규시즌 마지막 맞대결이었던 지난달 대전 3연전에서도 2승1패로 우위를 보였다. 무려 7년 만에 포스트시즌 무대를 밟은 한화는 내친김에 한국시리즈 우승까지 넘보고 있다. 한화의 한국시리즈 우승은 양대리그 시절이었던 1999년이 유일하다. 1000승 감독 중 유일하게 한국시리즈 우승 경력이 없던 김경문 감독도, 이번 가을야구에서는 그 한을 풀겠다는 각오다.
한화의 강점은 역시 강력한 선발 야구다. KBO리그 최초 ‘200탈삼진 듀오’ 폰세와 와이스를 필두로 류현진, 문동주가 선발진에 버티고 있다. 한화의 선발 평균자책점은 3.51로 리그 1위다. 시즌 막판 뜨거운 타격감을 보인 노시환을 비롯해 루이스 리베라토, 채은성, 문현빈, 이도윤 등 타선도 막강하다.
다만 가을야구 경험 부족은 한화의 아킬레스건이다. 한화는 11년 만에 포스트시즌이었던 2018년 준플레이오프에서 와일드카드 결정전 승자 넥센 히어로즈(현 키움)에 1승 3패로 밀려 조기 탈락한 바 있다.
2022년 한국시리즈 우승팀 SSG는 기적 같은 우승을 꿈꾸고 있다. ‘지키는 야구’가 팀 컬러인 SSG는 10개 구단 통틀어 가장 견고한 불펜(평균자책점 3.36)을 자랑한다. ‘홀드왕’ 노경은(35홀드)과 이로운(33홀드), 김민(22홀드), 그리고 마무리 투수 조병현(30세이브)으로 구성된 필승조가 강력하다.
삼성은 KBO리그 최초 50홈런-150타점 기록을 달성한 르윈 디아즈를 앞세워 파란을 일으키려 한다. 정규시즌 1~2위가 아닌 팀이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것도 세 차례나 있었던 만큼 SSG와 삼성에게도 희망은 있다. 하지만 두 팀 모두 최종 승자가 되더라도 투수진의 체력 소모가 한화와의 플레이오프전에서 큰 부담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변현철 문화부 독자여론팀장 byunhc@busan.com
2025-10-13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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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해양수도 부산, 해양부시장이 필요하다
“부산에 분명 기회가 왔고, 실행해 옮겨야 할 타이밍인데 위원회 만들고 계획만 세우고 있으니 답답할 노릇입니다. 계획이 없는 게 아니에요. 아이디어가 없는 게 아니에요. 전문가들이 오랜 기간 공들여 만든 계획들이 다 있어요. 계획이 없어서 못하는 게 아니라 실행할 사람이 없는 거죠. 더욱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어야 할 때입니다.”
“해양수산부가 부산에 온다고 해도 엄밀히 말해 해수부나 유관기관들은 전국구거든요. 해수부나 기관들이 직접 부산을 위해 뭘 해줄 수는 없어요. 부산시가 알아서 잘 활용하고 부산 것으로 만들어야 부산이 진짜 해양수도가 되는 거죠.”
부산이 진정한 해양수도로 거듭나려면 부산시 내에 ‘해양부시장’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부산이 해양수도로 도약할 수 있는 골든 타임을 맞이한 만큼, 해양 관련 전문성과 결정 권한이 있는 컨트롤 타워가 필요하다는 취지다.
부산이 가진 하드웨어는 세계적인 수준이다. 세계 7위 컨테이너 항만, 세계 2위 환적 허브라는 물리적 위용은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이다. 해양 관련 기능들이 부산을 중심으로 집적돼 있어 부산이 가진 여건을 부러워하는 나라와 도시들도 많다. 하지만 부산항이 세계적인 물동량을 처리하며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사이, 정작 그 화물과 선박에 얽힌 부가가치는 다른 도시나 해외로 고스란히 흘러가고 있다. 예컨대 해양금융의 주도권은 여전히 서울과 해외에 있고, 해양보험이나 법률 서비스 시장 역시 마찬가지다. 열심히 땀 흘려 화물을 나르고 있지만, 그 과실은 다른 도시들이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부산이 실속을 차리지 못하는 이유로 부산이 가진 훌륭한 하드웨어를 구동할 강력한 운영체제, 즉 컨트롤 타워가 없다는 점을 드는 이들이 많다. ‘부산시 고위직에 얘기했더니 한 귀로 흘리더라. 몇 번 얘기했는데 해양엔 전혀 관심이 없더라’며 아예 입을 닫아버린 전문가도 있다.
하물며 민간기업들도 해수부 이전에 맞춰 발 빠르게 해양 관련 조직을 새로 만들거나 키우는 판에 부산시는 ‘해양농수산국’ 틀에 아직 갇혀 있다. 해양산업은 항만물류, 해운, 해양금융, 해양관광, 해양바이오, 해양에너지, 친환경 선박기술, 스마트 항만 등 도시의 경제, 산업, 일자리와 직결된 거대 산업이다. 항만 재개발은 도시 계획과, 해양금융은 금융 정책과, 해양 스타트업 육성은 창업 지원과 맞물려 돌아가야 한다. 하지만 국 단위 조직은 다른 실·국과의 수평적 협력을 이끌어내고, 해수부, 부산항만공사 등 유관기관을 아우르는 수직적 조율을 해내기에는 역부족일 수밖에 없다. 부서 칸막이에 막혀 시너지 효과는 나지 않고, 좋은 계획들은 서랍 속에 잠들게 된다.
해양부시장은 이 칸막이를 허물고 흩어진 역량을 한데 모으는 ‘사령관’이 돼야 한다. 부시장의 책상에는 부산의 미래 먹거리가 될 해양 신산업 육성 로드맵이, 머릿속에는 글로벌 투자 자본을 유치할 청사진이 있어야 한다. 때로는 부산항만공사와 머리를 맞대고, 때로는 중앙정부를 상대로 규제 혁신을 설득하며, 부산의 해양 자산을 어떻게 ‘돈’과 ‘일자리’로 바꿀 것인지를 현장에서 지휘하고 투자를 이끌어내야 한다. 싱가포르, 로테르담 등 세계 유수 항만도시들과 교류하고, 국제 해양박람회 등을 유치하며 해양수도 부산의 브랜드 가치도 높여야 한다. 부산의 해양산업, 인재, 재정, 국제협력까지 지원할 수 있는 해양수도특별법 제정도 이끌어내야 한다.
국장이 그 역할을 할 수 있지 않느냐 반문할 수 있겠지만, 순환보직으로 수시로 바뀌는 국장이 해양수도 부산을 위한 전략을 실행하기에는 한계가 많다. 조직 규모나 예산도 턱없이 적다.
이는 결코 자리 하나 늘리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부산 경제의 체질을 바꾸는 ‘투자’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네덜란드 로테르담시는 ‘항만·경제 부시장’을 중심으로 항만공사, 정부, 기업과 유기적으로 협력하며 세계 2위 해양도시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부산도 해양부시장을 중심으로 단순 물류 허브를 넘어 해양금융, 연구개발, 법률 서비스가 어우러진 고부가가치 해양산업 클러스터로 도약해야 한다. 이는 단순 항구도시와 해양수도를 가르는 결정적 차이다.
해수부, 해양 관련 기관들의 부산 이전은 그저 ‘손님맞이’로 끝날 이벤트가 아니다. 부산의 미래 성장동력을 해양에서 찾을 수 있는 다시 오기 힘든 ‘골든 타임’이다.
“한강이 바다를 이길 수 있겠나! 부산 함 놀러 온나.” 한 달 전 제59회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서울 휘문고를 꺾고 우승컵을 거머쥔 경남고 야구부 선수가 환희에 차 방방뛰며 한 말이다. 부산 시민들은 이 정도로까지 벅차 있다. 부산시도 이 정도는 돼야 해양수도 타이틀을 가져갈 자격이 있다.
2025-10-01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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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부산 로컬의 맛, 바다를 건너다
일본 후쿠오카의 작은 식당에서 매일 김을 굽는 연기가 퍼진다. 식당 안에서는 20대 일본 여성들이 라면 국물에 소주잔을 부딪친다. 한국 드라마에서 보던 장면을 직접 실현하고 싶어 찾아온 손님들이다. 직접 참기름을 짜고 김을 굽는 퍼포먼스로 충무김밥을 내놓는 ‘바비킴’은 부산 기업 보리에가 만든 새로운 분식 브랜드다. 부산 사람에게는 흔하디흔한 분식 메뉴지만, 일본 젊은 세대에게는 한국 문화를 체험하는 특별한 무대가 된다. 분식이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한류 콘텐츠와 맞닿은 문화적 경험으로 소비되는 순간이다.
바비킴은 후쿠오카에서 첫발을 뗀 뒤 현지 호응을 바탕으로 일본 전역 확장과 미국 진출을 준비 중이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해외 경험을 토대로 다시 한국 시장에 새로운 방식으로 도전하겠다는 구상이다. 한국에서 이미 수없이 소비되던 분식이 해외에서 ‘경험’이라는 가치로 재해석되고, 그 성공이 다시 국내 시장으로 역류하는 흐름이다. 작은 매장이지만 글로벌 도전의 전진 기지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상징적이다.
부산의 전통 어묵 브랜드 삼진어묵은 또 다른 길에서 세계화를 시도하고 있다. 1953년 자갈치시장에서 출발한 삼진어묵은 이미 부산과 전국에서 확고한 입지를 다진 향토기업이다. 오랜 세월 부산 시민의 일상식이자 관광객의 기념품이었던 어묵은 이제 K푸드의 대표 주자로 해외 무대에 서고 있다. 호주 시드니, 베트남 호찌민, 대만 타이베이 등 해외 주요 거점에 매장을 열며 글로벌 소비자를 직접 만나고 있다. 어묵은 해외 소비자들에게 생소한 음식이지만, 단백질이 풍부하고 간편하게 조리할 수 있는 특성 덕분에 간편식·건강식으로 주목받고 있다.
바비킴은 오랜 F&B 경험을 가진 기업이 새롭게 내놓은 도전적 프로젝트다. 한국 드라마와 K컬처의 힘을 빌려 ‘문화 체험형 분식’을 만든다. 삼진어묵은 70년 가까운 역사를 기반으로 축적된 브랜드 자산을 활용해 ‘전통의 세계화’를 꾀한다. 둘 다 부산이라는 지역성을 앞세워 글로벌 시장에 도전한다는 점에서 같은 궤적에 있다.
두 사례에서 찾을 수 있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지역의 정체성을 지켜내는 일, 현지의 삶 속으로 들어가는 일, 음식을 단순한 상품이 아닌 문화적 경험으로 바꾸는 일이다. 충무김밥은 남해안 선원들의 소박한 식탁에서 시작해 일본의 도시락 문화와 만나 새로운 메뉴가 됐고, 어묵은 자갈치시장의 전통 먹거리에서 출발해 오늘날 글로벌 간편식으로 진화했다. 바비킴 매장을 찾은 일본 젊은 세대가 드라마 속 장면을 재현하듯, 음식은 이제 국경을 넘어 문화를 체험하는 언어가 되고 있다.
여기에는 글로벌 시장의 변화도 깔려 있다. 세계 소비자들은 대량 생산으로 표준화된 상품만을 원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지역성·스토리·경험이 결합된 상품을 선호한다. 글로벌 브랜드가 제공하지 못하는 틈새를 로컬 브랜드가 채운다. 부산에서 만들어진 어묵, 부산에서 온 분식이 해외에서 힘을 얻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글로벌 시대의 경쟁력은 오히려 ‘로컬다움’에서 나온다.
부산이라는 도시의 특수성도 빼놓을 수 없다. 부산은 항구도시로서 바다를 통해 세계와 이어져 온 도시다. 일본·중국은 물론 미주·유럽과도 연결돼 있고, 다양한 문화가 섞이며 외부를 향한 개방성이 생활에 녹아 있는 도시다. 국제영화제, 크루즈 관광, 마이스 산업으로 세계와 접속해 온 경험도 로컬 브랜드의 해외 진출에 힘을 더한다. 이런 토양은 로컬 브랜드가 해외 시장에 도전할 때 강점으로 작용한다. 바비킴과 삼진어묵의 글로벌 진출은 단순히 한두 기업만의 성과가 아니라 부산이 가진 문화적·지리적 자산이 어떻게 세계와 이어지는지를 보여준다.
과제도 분명하다. 개별 기업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해외 진출에는 자본과 네트워크가 필요하고, 현지화 과정에서 시행착오도 불가피하다. 지자체와 공공기관이 적극 나서서 해외 전시·팝업·브랜드 홍보를 체계적으로 연결하고, 기업들이 안정적으로 도전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바비킴과 삼진어묵의 사례와 같은 성과가 부산 경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세계화는 더 이상 대기업의 전유물이 아니다. 작은 분식집이 일본 젊은 세대의 문화 체험 공간이 되고, 부산 어묵이 대양을 건너 글로벌 식탁에 오르는 시대다. 부산 로컬 브랜드의 글로벌 도전은 단순한 해외 진출이 아니라, 지역 문화의 세계화이자 도시 전략의 진화다. 후쿠오카의 충무김밥, 시드니의 어묵 매장은 부산이 세계와 만나는 새로운 창이다. 작은 가게의 불빛이 해외 거리에서 환하게 빛날 때, 그 빛은 다시 부산의 내일을 밝힌다.
2025-09-29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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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인공지능과 기자의 일
스칼렛 요한슨의 목소리를 한 인공지능 ‘사만다’와 사랑에 빠지는 남자. 2013년 개봉작 ‘그녀’의 배경이 바로 올해, 2025년이었다. 올해 개봉한 ‘미션임파서블’ 시리즈의 마지막 영화 ‘데드레코닝’에서 톰 크루즈가 맞서 싸우는 빌런은 핵전쟁을 획책하는 인공지능 ‘엔티티’다. 인공지능은 어느새 SF에서 일상으로 훅 들어왔고, 지금도 하루가 다르게 진화하고 있다.
장강명 작가의 르포 〈먼저 온 미래〉는 2016년 이세돌 9단과 구글 AI 프로그램 알파고의 대국 이후 바둑계를 취재해 인공지능이 사회에 가져올 변화를 경고한다. 인공지능 이후 바둑 고수는 예술성과 권위를 잃었고, 바둑 중계는 인공지능이 시시각각 승률을 계산해 보여주는 경마식이 됐다. 바둑의 가치와 프로 기사의 일은 어떻게 달라졌는가. 그 변화는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 작가는 이 질문을 소설가라는 자신의 직업으로 자주 돌린다. 소설을 쓰는 인공지능이 진화해 5분에 하나씩 하루에 훌륭한 장편 288편을 써낸다면 문학의 가치와 소설가의 일은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 작가는 바둑계에서 ‘인간의 바둑’을 이기고 지는 승패의 서사에서 찾는 흐름이 생긴 것처럼, 문학과 같은 예술에서는 창작자의 스토리텔링과 팬덤이 갈수록 중요해질 것이라고 내다본다.
기자라면 이렇게 물을 수 있겠다. 인공지능은 언론의 가치와 기자의 일을 어떻게 바꾸어 놓을까. 최근 소식들은 이렇다. 네이버의 인공지능 뉴스 편집 알고리즘 때문에 가짜 ‘단독’과 유명인의 SNS를 베껴쓰는 뉴스가 늘었다는 연구가 있었다. 공영방송은 인공지능이 만든 영상을 메인뉴스에 써서 논란이 됐다. 미국에서는 한 신문사가 추천도서 기사에서 15권 중 10권이 존재하지도 않는 책으로 드러나자 인공지능으로 썼다고 인정했다. 구글의 인공지능 요약 서비스 때문에 트래픽과 매출이 줄었다며 소송을 건 언론사도 있었다.
인공지능은 이용자 취향에 기반한 알고리즘의 이름으로 ‘낚시성’ 기사 생산과 소비를 부추기고 있고, 인공지능으로 요약해서 보여주는 정보 때문에 정작 기사 원문을 읽는 사람은 줄어든다. 인공지능이 만든 가짜 정보가 버젓이 기사로 유통되는 일은 지금도 들키지 않았다뿐이지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가짜 추천도서 기사를 실은 미국 언론사가 인력을 20% 감축한 상태였다는 건 놀랍지도 않다.
이런 변화가 전적으로 인공지능 탓일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클릭을 유도하는 기사의 폐해는 포털 뉴스 서비스가 등장했을 때부터 유구하다. 즐길 거리들이 늘어나니 기사 원문을 읽는 사람은 원래 줄고 있었다. 대규모 인력을 갖춘 기성 언론사 모델은 위기인 지 오래다. 인력이 줄고 뉴스 유통이 실시간이 되면서 기자들의 노동 환경과 삶의 질은 나아지기는커녕 나빠진 쪽에 가깝다.
대신 인공지능은 앞선 어떤 기술보다도 압도적인 능력과 속도로 이런 변화를 가속화시키고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만들 것이다. 인공지능이 어떤 가치를 파괴한 뒤에야 우리는 그 가치가 어떤 의미인지,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 묻게 될 것이다. 이처럼 삶과 일의 방식을 뒤흔들 중대한 권한을 인공지능을 이끄는 글로벌 빅테크 기업에게 맡겨두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 〈먼저 온 미래〉의 핵심이다.
그러니까 언론은 지금 인공지능을 어떻게 활용할지만큼이나 언론의 가치를 다시 묻고 그것에 집중해야 한다. 시사인의 지난해 신뢰도 조사에서 유튜브 채널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은 ‘가장 신뢰하는 뉴스 프로그램’ 공동 2위였다. 미국에서는 ‘최고의 뉴스 브랜드’를 꼽는 설문조사에서 CNN 다음으로 팟캐스트를 운영하는 크리에이터 조 로건이 2위를 기록했다. 언론을 언론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기자는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하나. 인공지능은 언론에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그럴듯하게 거짓말을 지어내는 인공지능의 환각 때문에 언론사의 기사가 더 가치가 높아질 것이라고 말한다. 신뢰성이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최근 조사도 인공지능이 아니라 ‘사람’의 기사가 갖는 경쟁력에 기대를 갖게 한다. 응답자 절반 이상이 사진 대신 인공지능으로 만든 이미지를 쓰거나 인공지능에게 자료 조사를 맡긴 기사를 뉴스로 보기 힘들다고 답한 것이다.
인공지능과 연애하고 인공지능에 의존하다 목숨까지 버리는 사람들이 더 이상 새로운 뉴스가 아니게 됐다. 정치인과 국제분쟁 뉴스에서 얼굴과 목소리를 감쪽같이 재현한 딥페이크도 이미 현실이 되었다. 인공지능이 사회를 어떻게 바꾸게 될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그 질문을 던지는 것 또한 인문학뿐만 아니라 언론의 역할일지도 모르겠다. 그러기 위해서 더듬더듬 인공지능을 배우면서, 쉬운 냉소와 드문 낙관을 나누면서 기자들은 오늘도 마감을 한다.
2025-09-24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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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서울내기 다마내기'의 추억
‘고백의 역사’를 보셨는지 모르겠다. 광안대교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던 1998년 부산을 배경으로 아련한 첫사랑의 기억을 되살리게 해 주는 영화다. 넷플릭스 공개 3일 만에 글로벌 톱10 비영어 영화 부문 3위에 올랐다. 전 세계 시청자들이 부산을 지켜보면서 가슴을 두근거렸을 테니 반가운 일이었다. 다소 유치하게 느낄 수도 있었던 스토리를 맛깔나게 만들어준 일등 공신은 바로 부산 사투리였다.
부산 출신 배우들이 많이 출연한 이 영화에서 부산말은 변방의 언어가 아니라 사실상 표준어였다. 주인공 박세리 역할을 맡은 서울 출신 배우 신은수의 부산 사투리 연기도 부산 사람이 볼 때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꽤 괜찮았다. 특유의 발랄함과 풋풋함이 사투리 연기와 어우러져 더욱 매력적인 캐릭터를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오리지널 서울 사람이 부산말을 어떻게 그 정도로 찰지게 구사할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신은수 배우는 촬영 수개월 전부터 부산 사투리 선생님에게 수업을 받고, 높낮이와 억양 등을 상세히 적어둔 대본을 통째로 외워버렸다고 했다. 그는 “부산말은 규칙이 있는 듯 없고, 단어마다 높낮이가 은근히 디테일하다”라고 말했다. 열심히 공부하다 보니 부산 사람은 의식도 못 하고 쓰는 것까지 알아차린 셈이다. 또 “한 끗 차이인데 언어를 새로 배우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듣기에는 똑같은데 선생님은 틀렸다고 했다. 그 미묘한 차이를 캐치하는 게 어려웠다”라고 덧붙였다.
부산말 배우느라 억수로 고생했던 모양이다. 오죽하면 앞선 영화 ‘반짝이는 워터멜론’에서 그가 했던 수어 연기보다 부산말이 더 어려웠단다. “참말로 욕봤다”는 말로 칭찬해 주고 싶다. 뒤집어 생각하면 그렇게 배우기 어려운 부산말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우리 부산 사람들은 자부심을 쫌 가져도 되지 않을까.
‘서울내기 다마내기 맛 좋은 고래고기.’ 랩송 같이 들리는 이 말놀이를 기억하는 분이 얼마나 있을지 궁금하다. 1950~1970년대에 아이들이 서울말을 쓰는 아이를 놀릴 때 의미도 모르면서 쓰던 표현이었다. 전학생이 서울말을 쓰면 이렇게 놀림을 받았다. 하지만 지금은 되레 부산에서도 서울말을 써야 대접받는 시대가 된 것 같다.
얼마 전 지인은 아내로부터 ‘귀가 후 소파에 누워 뒹굴뒹굴하지 말 것’과 ‘집안에서 사투리 쓰지 말 것’을 요구받았다고 했다. 평소 그의 언행을 보면 이해는 가지만, 그렇다고 집안에서 묵언수행을 하란 말인지…. 취재차 만난 임영아 작가에게 들은 이야기도 충격적이었다. 부산에 있는 한 대학에 다닐 때 교수가 “PPT를 하는데 왜 사투리가 튀어나오냐”라고 질책했다는 것이다. 부산 사람도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을 써야 하고, 표준어를 못하면 교양 없는 사람이 된다는 말인지.
세상에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걸 보고, 듣지 못하는 걸 듣는 사람도 있다. 최근 〈쓰잘데기 있는 사전:말끝마다 웃고 정드는 101가지 부산 사투리〉를 출간한 전주 출신 부경대 양민호 교수와 서울 출신 최민경 교수가 그런 사람 같다. 이들은 부산에 살면서 대체 불가능한 부산말이 있는 걸 알게 됐다고 했다. 통증을 표현하는 ‘우리하다’, 뜻을 모르는 부산 사람이 없는 ‘속닥하다’는 표준어로 그 뉘앙스를 제대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바보축구온달’은 세 단어 모두 표준어로 이뤄졌지만 합치면 사투리가 된다니 헛웃음이 나온다.
두 저자는 이 책에서 “부산 사투리에는 부산의 시간과 정서, 생존과 유머,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온기가 담겨 있다. 하지만 정작 부산 사람들은 이렇게 재밌고 멋진 부산말을 제대로 자랑하지 않는 듯하다”라고 일갈했다. 예쁘고 좋은 부산말을 살려서 잘 사용하면 좋겠다는 이들의 주장에 크게 공감하게 된다.
일본에는 사투리 사전이나 사투리를 쓴 손수건 등을 굿즈로 판매하지만, 부산에는 그런 것도 잘 보이지 않는다. 롯데 자이언츠를 응원하는 부산팬들은 ‘아주라’와 ‘마!’ 같은 함축적인 말을 유행어로 만들었는데, 왜 그런 상품도 하나 안 만드는지 모르겠다. 세상에 부산말만큼 부산을 잘 드러내는 게 또 있을까.
10월 5일 ‘부산시민의 날’이 다가온다. 이날을 부산말을 쓰는 날로 만들면 좋겠다. 박형준 부산시장도 이날은 부산말로 연설하고, 지역방송 앵커들도 인사말 정도는 부산말로 시작하는 것이다. 〈부산일보〉를 비롯한 지역신문도 기사나 제목에서 부산말로 멋을 줘도 좋겠다. 학교에서도 부산말을 배우고 익히는 시간을 가지면 어떨까 싶다. 가을 야구의 시즌이 돌아오니 최동원 선수가 생각난다. 그가 이 이야기를 들었다면 뭐라고 했을까. “마 함 해 보입시더”라고 하지 않았을까.
2025-09-22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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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HMM 민영화의 원칙
길이 400m 폭 61m 높이 33.2m. 2020년 4월 부산항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HMM 알헤시라스호’의 위용은 대단했다. 20피트 컨테이너를 무려 2만 4000개나 한 번에 나를 수 있는 세계 최대 컨테이너선이었다. HMM(옛 현대상선)은 그 뒤로 3개월간 같은 크기의 배 11척을 인도받아 유럽 노선에 투입했다. 주인 잃은 현대상선을 산업은행과 한국해양진흥공사(해진공)가 넘겨받아 공적 자금을 과감히 쏟아부은 덕분에 현재 HMM은 세계 8위 수준의 수송 능력(선복량)을 갖추게 됐다.
현재 산은과 해진공이 보유한 HMM 지분 비율은 각각 36.02%와 35.67%다. 산은의 자기자본(BIS)비율은 13.9%로 금융당국 권고치 13%를 겨우 넘긴 상태다. HMM 지분이 자기자본의 15%를 넘기면서 위험가중치 1250%를 적용받게 돼, HMM 주가가 오르면 BIS비율이 낮아지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금융위원회가 지난 7월 HMM 지분에 대한 위험가중치 적용을 3년 미뤄줘 매각에 필요한 시간을 벌어준 점은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전체 산업군 지원을 맡는 산은의 자금 공급 여력이 줄어드는 결과를 초래하는 일을 더 미룰 수 없기에 신임 박상진 산은 회장이 지난 9일 “HMM 민영화에 속도를 내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HMM 민영화 논의에 앞서 한진해운 파산의 교훈을 다시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소유 기업의 의지 부족, 정부의 해운업에 대한 몰이해가 겹치며 세계 7위 선복량과 글로벌 네트워크를 갖고 있던 한진해운을 공중분해시키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당시 채권단은 한진그룹에 긴급자금 7000억 원을 요구했지만 한진은 경영권과 함께 4000억 원을 내놓겠다는 입장으로 평행선을 달리다 법정관리와 파산에 이르고 말았다. 불과 3000억 원 차이였다. 2017년 선복량 기준 세계 13위에 불과하던 현대상선을 오늘날의 세계 8위 HMM으로 키우는 데 투입된 공적자금은 약 6조 8000억 원. 호미로 막을 일을 포클레인으로 겨우 막은 셈 아닌가.
돈 문제가 다가 아니다. 한진이 40년간 확보한 선박과 부두 지분 같은 유형의 자산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 구축한 네트워크, 업계 전문 지식을 내재화 한 고급 인력들이 모두 산산히 흩어져버렸다. 무형의 자산은 돈을 쏟아붓는다고 당장 확보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현재 HMM은 미주와 유럽, 아시아 노선을 동시에 운영하는 국내 유일 글로벌 원양 선사다. 민영화에 단순한 금융·기업 논리로 접근해서는 곤란하다. 국내 수출입의 최전선을 담당하는 필수 기간산업이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공기업은 아니지만 실제 원양 선사가 맡는 공공적 성격의 업무에 맞게 소유 구조에서의 공공성도 확보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HMM 최대 주주인 산은 지분을 특정 기업이 독점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 최근 포스코그룹의 HMM 인수 검토에 대해 해운업계가 강력 반발하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다른 주력산업이 위험해지면 해운업을 먼저 희생시킬 가능성이 있고, 대형 화주이기도 한 기업이 자사 물량 위주로 해운업을 영위하면 기존 해운 생태계가 흐트러진다는 얘기다.
이와 관련해 전재수 해양수산부 장관은 지난 11일 기자간담회에서 “단순한 해운 선사 한 곳 민영화 하는 문제가 아니라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국적선사이자 기관으로서, 대한민국 해운산업이라는 측면에서의 지배구조 문제를 동시에 봐야 한다”며 HMM 민영화를 신중하게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다른 인터뷰에서 전 장관은 해운산업이 해양안보와 밀접하다는 점을 강조하며 산은의 HMM 지분을 여수·광양부터 부산·울산·포항에 이르는 동남권 지방자치단체와 지역 상공계가 나눠 갖는 방안을 제안한 바 있다. 이를테면 ‘지역성 강화’ 방안이다.
산은이 소유한 HMM 지분의 가치를 HMM이 지난 8월 실시한 자사주 공개매수 가격인 주당 2만 6200원으로 환산하면 약 10조 원에 이른다. 지자체와 상공계가 전체를 마련하기엔 부담스러운 액수다.
전 장관 아이디어에 생각을 보태보면 이렇다. HMM의 공공성 강화를 위해 해진공이 지분을 더 늘리는 것이다. 해진공이 굳건히 HMM 대주주 역할을 맡아 원양 해운의 공공성을 담보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 원양 선사와 연결돼 아시아 역내 해운을 책임지는 근해 국적선사들이 지분 참여를 한다면 HMM의 해운 전문성과 연결성도 동시에 꾀할 수 있을 것이다. 국내 화주기업들의 소액 지분 참여도 충분히 고려할 만하다.
부산으로 이전할 HMM의 지역성과 전문성, 공공성, 산은의 자본 건전성 제고를 모두 꾀할 수 있는 방안, 서두르지 말고 차근차근 여러 분야 관계자들의 머리를 맞대볼 필요가 있다.
이호진 경제부 선임기자 jiny@busan.com
2025-09-17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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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내란 세력 척결이라는 '절대 반지'
12·3 비상계엄은 무모한 도박이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은 자신과 측근들의 안위 뿐만 아니라 당시 집권당인 국민의힘의 명운까지 게임판 위에 ‘올인’했다. 도박은 실패했고, 위태로웠던 여야 간 힘의 균형은 완전히 무너졌다. 계엄 역풍을 등에 업은 다수 야당 더불어민주당은 결국 입법에 이어 행정 권력까지 차지했다. 여기에 내란 종식이라는 명분까지 손에 쥐었다. ‘내란 세력’이라는 단어가 주는 엄청난 위압감 앞에서 야당의 어떤 저항이 정당성을 얻을 수 있을까. 민주당으로서는 그야말로 영화 ‘반지의 제왕’에 등장하는 ‘절대 반지’가 수중에 떨어진 셈이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하듯, 막강한 권력을 절제력 있게 행사하는 건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때로는 정권을 떠받치는 핵심 지지층과 충돌을 불사해야 하는 일이다. 그러나 양립 불가능 지경인 여야 사이에 합의 정치에 대한 희망을 되살리는 일이기도 하다. 국회 시절에 누구보다 강성이었던 이재명 대통령이 임기 초반 통합과 협치를 강조할 때는 상당한 기대를 갖기도 했다.
하지만 소위 개혁 속도전을 벌이는 최근 여권의 행태를 보면 절대 반지의 위력에 흠뻑 취한 듯하다. 반대는커녕 ‘좀 과하다’는 지적조차 수용할 뜻이 없어 보인다. 오히려 개혁 저항 세력으로 찍어 누르려는 고압적인 기류가 팽배하다. 사법부 개혁에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법원장들의 주문은 “자업자득”으로 몰아세우고, 왜 바꾸는지 설명이 부족한 정부 조직 개편을 비판하는 공무원에는 “불만이면 퇴사하라”는 날 선 목소리가 날아든다.
내란특별재판부든, 내란전담재판부든 결국 여권이 원하는 판결을 할 수 있는 판사로 바꾸기 위함이라는 본질은 같다. 정치 권력이 판사를 성향에 따라 취사선택하려는 행위 자체가 사법권 독립 침해이며, 삼권분립 원칙에 어긋난다는 지적은 상식적이다. 여당 지도부는 이 대통령의 선거법 위반 상고심 선고에서 ‘정치 판결’을 내린 사법부가 독립을 외칠 자격이 있느냐고 비판하지만, 집권당이라면 그런 감정적인 대응이 우리 사법 시스템에 두고두고 미칠 해악을 더 깊이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방송통신위원회를 해체하고 방송미디어통신위원회를 새로 설치하는 법안 역시 다분히 감정적이다. 현 이진숙 위원장 ‘찍어내기’ 의도라는 걸 민주당도 굳이 숨기려 하지 않는다. 이 위원장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특정인을 배제하기 위해 정부 조직의 근간을 흔들면서 일말의 망설임도 없다. 내란 척결이라는 깃발 아래서 수단의 적절성은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태도다.
검사의 힘을 남김없이 빼는 게 요체인 검찰 개혁안 또한 복수심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진보 성향의 법조인들조차 검찰의 보완수사권마저 사라질 경우 부실 기소와 사건 지체 등 부작용에 대한 우려를 쏟아내고 있지만 ‘검찰 없으면 나라가 망하냐’는 냉소적 반응만 넘쳐난다. 1% 정치 검사의 힘을 빼려고 99% 검사를 희생시키고, 사법 서비스의 질을 하락 시킨다면 이걸 개혁이라고 할 수 있나. 보다 근본적인 의문은 검찰에게 빼앗은 대부분의 권한을 넘겨 받는 경찰이 향후 ‘정치 경찰’이 되지 않으리라는 확신은 어디서 오느냐는 것이다.
내란 척결을 앞세워 지방선거 지형을 유리하게 만들려는 시도도 노골화되고 있다. 최근 행정안전부가 국민의힘 소속 지자체장을 겨냥한 감찰에 나선 것은 아무리 봐도 무리수다. 당일 행안부 지시 전 청사 폐쇄를 미리 해 계엄에 동조했다는 것인데, 일단 진위 여부가 명확하지 않고 그 날의 상황과도 맞지 않다. 박형준 부산시장과 오세훈 서울시장은 계엄 당일 밤에 “계엄에 반대한다. 계엄은 철회돼야 한다”는 입장문을 전국 지자체 중 가장 먼저 발표했다. 개인적인 얘기지만, 박 시장은 사석에서 계엄을 강하게 비판한 기자의 칼럼에 깊이 공감하기도 했다.
물론 여권의 내란 공세가 힘을 받는 건 야당인 국민의힘이 자초한 측면이 크다. 계엄 직후 윤 전 대통령과 절연하고, 반성과 쇄신에 나섰다면 내란 척결이 지금처럼 야당을 향한 전가의 보도가 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탄핵 트라우마’만 되뇌던 국민의힘은 정반대 방향으로 역주행 했고, 지금도 ‘윤 어게인’ 세력과 기묘한 동거를 하면서 내란 동조 정당이라는 굴레에 스스로 매여있는 형국이다.
그러나 절대 반지는 종래에 그 파괴적인 힘을 주체하지 못해 주인을 스스로 자멸케 한다. 첫 탄핵 이후 탄생한 문재인 정부도 임기 초반 80%가 넘는 지지율을 보였지만, 부동산 정책, ‘조국 사태’ 등에서 여론을 무시한 독선적 행태로 정권 재창출에 실패했다. 절대 반지의 어두운 운명을 반복하지 않는 길은 무엇일까? 영화 주인공처럼 스스로 반지의 유혹을 떨쳐내는 길 밖에 없다.
2025-09-15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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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안갯속 부산·경남 행정통합
수도권 일극주의에 대응하기 위해 광역자치단체가 추진하는 행정통합과 특별연합으로 전국이 혼란스럽다. 행정 전문용어인데다, 추진과정에 오락가락하는 지자체의 행보때문이다.
부산과 경남에서는 2022년 이미 만들어진 특별연합을 폐기하고, 다시 행정통합을 추진중인 상황이다. 박형준 부산시장과 박완수 경남도지사가 지난해 11월 경남도청에서 만나 수도권에 버금가는 ‘대한민국 경제수도’ 건설을 청사진으로 내걸며 부산·경남 행정통합 공론화위원회(이하 공론화위)를 출범시켰다. 공론화위는 지난달 29일 창원시 창원컨벤션센터에서 경남 중부권 행정통합 시도민 토론회를 마지막으로 부산과 경남 8개 지역을 순회하는 권역별 토론회를 종료했다.
공론화위는 8차례 토론회 성과를 발판으로 연말까지 행정통합 기본 구상안을 도출하고 두 지역민이 동수로 참여하는 여론조사를 해 행정통합 의사를 확인할 방침이다. 공론화위는 수도권 집중·인구 감소로 지방소멸이 현실화한 상황에서 토론회를 통해 “부산과 경남이 함께 가야 한다”는 공감대를 넓힐 수 있었다고 자평했다.
하지만 통합여부에 대한 결정권을 가진 시도민도 과연 그렇게 생각할지는 의문이다. 시도민 공론화 작업이 마무리됐지만 추진 동력은 갈 수록 떨어지는 상황이다. 그동안 토론회에서는 행정통합에 대한 시도민의 열기가 뜨겁지 않았다.
참여가 부족하면, 그만큼 추진력도 약해진다. 행정통합의 성패는 주민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고 지지의사를 표시하느냐에 달렸기 때문이다.
행정통합을 둘러싼 외부 여건도 좋지 않다. 올해 6월 대선으로 이재명 정부가 출범하면서 특별연합 형태인 부산·울산·경남(이하 부울경) 메가시티가 오히려 지역 화두로 다시 부상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 시절인 지난 2022년 4월 부울경은 특별연합을 출범시켰다. 특별지자체 제도가 국내에 도입된 이후 최초 사례였다.
하지만 그해 6월 지방선거에 당선된 박완수 경남도지사와 김두겸 울산시장은 입장을 번복했다. 특히 울산시가 독자 노선을 선언하면서 동남권에서 부산과 경남만 행정통합을 논의 중이다. 또, 행정통합을 추진하던 일부 광역단체도 특별연합으로 다시 눈길을 돌리고 있다. 이재명 정부가 ‘5극(초광역) 3특(특별자치)’을 국정과제로 채택함에 따라 광주·전남을 비롯한 광역자치단체들이 정책 선회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그동안 행정통합에 적극적이던 대구·경북은 민선 9기 장기 과제로 넘기는 분위기다. 대구·경북은 지난해 통합 특별법안 초안을 완성했다. 두 주체 중 한 곳인 대구시의회 동의까지 얻었다. 하지만 경북도의회 동의 절차를 진행하던 중 비상계엄이라는 돌발상황이 벌어지면서 동력을 잃었다.
행정통합을 위해선 정부 차원의 입법과 지원도 필수적이다. 그러나 정부는 지자체의 자율적 행정통합에 대해 반대하지 않지만, 특별한 지원도 없다는 방침이다. 다만, 국정 방향인 ‘5극 3특’에 편승하면 권역별 전략사업을 지원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이후 대구·경북은 통합보다는 오히려 ‘5극 3특’ 정책에 보조를 맞추고 있다. 한때 행정통합을 추진하다 무산된 광주·전남도 지난달 27일 특별연합 출범을 위한 선포식을 가졌다.
부산·경남도 영향을 받고 있다. 지난 7월 25일 이재명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부산 타운홀 미팅에서 지방분권과 지역 균형 정책을 총괄하는 김경수 지방시대위원장은 ‘선 협력 후 통합’을 언급하며 행정통합보다는 메가시티를 강조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부산·경남은 이제 막 행정통합 공론화 토론회를 마친 상황에서 갑자기 방향을 선회하기도 쉽지 않다. 내년 지방선거도 변수다. 누가 부산시장과 경남도지사로 당선되느냐에 따라 상황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이미 민선 7기 때 합의한 부울경 메가시티 결성이 민선 8기에서 폐기되는 경험을 했다.
여기에 내년 지방선거 이후 부산·경남 두 지역의 지자체장 중 한 명이라도 소속 정당이 바뀐다면 기존의 행정통합 방향이 크게 흔들릴 수 있다는 전망마저 제기된다. 부산·경남 행정통합은 주민참여가 낮은 상황에서, 내년 지방선거와 중앙 정부와 이견 등으로 안갯속을 걷고 있다. 전문가들은 행정통합의 완성을 위해 △정치적 리더십과 합의 △주민 공감 △제도 마련 등 3가지 요소가 필수적이라고 지적한다. 부산·경남에서는 3가지 요소 중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김길수 중서부경남본부장 kks66@busan.com
2025-09-10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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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부끄러움을 아는 사회
올해 사회부 생활을 시작하면서 맡은 주요 업무 중 하나는 제보에 대한 ‘게이트 키퍼’ 역할이다. 매일같이 회사로 걸려오는 제보 전화, 선후배 기자들이 건네는 이야기, 주변 취재원들을 통해 흘러 들어오는 제보까지, 많은 제보 가운데 무엇을 취재하고 기사화할지 취사선택하는 일이다.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단면을 보여주거나, 독자들의 공감을 이끌어내 더 나은 사회로 변화를 이끌 수 있다고 판단되는 제보는 취해 취재 등 기사화 과정을 거치고, 사회적 통념에서 벗어난 일방적인 주장만 일관하거나 사안이 너무 단편적이고 일면적인 제보는 배제한다. 취사선택의 기준은 제보의 내용이 보통의 사람들이 생각하고 공유하는 ‘상식’의 범주에 얼마나 벗어나 있느냐다.
최근 부산의 한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이른 아침 시간 골프를 치는 사람이 있다는 제보를 받았다. 모래에서는 벙커샷 연습을 하고, 인조 잔디에서는 퍼팅 연습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에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황당하면서도 학교 운동장을 골프 연습장으로 활용하는 기발함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여름방학 기간이었지만 분명 학교에서는 방과후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었다. 학교라는 공간에 대한 사회적 통념을 깨는 몰상식하고 비상식적인 행동이라는 판단에 따라 제보 내용은 사회부 기자들의 취재를 거쳐 기사화됐고, 해당 기사는 많은 독자들의 공분을 일으켰다.
사실 우리는 매일 수많은 ‘상식 파괴’ 장면과 마주한다. 오늘도 많은 신문과 방송,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상식을 저버린 이들의 말과 행동들이 전해진다. 시민들이라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부산의 한 등산로에 파크골프장을 만들어놓고 이용한 노인들이 있는가 하면, 부산의 한 시내버스에서는 한 승객이 좌석에 앉아 양산을 펴고 있다가 다른 승객들로부터 불편한 시선을 받기도 했다.
강원도의 한 해수욕장 인근 정자에는 한 캠핑족이 텐트를 설치하고, 텐트를 고정하기 위해 바닥에 피스까지 박아 이슈가 됐고, 대전의 한 아파트 주차장에 돗자리를 펴고 고추를 다듬는 주민에게 문제를 제기하자 자신의 차를 곧 댈 것이라는 황당한 대답만 들었다는 사연이 소개되기도 했다.
일상의 풍경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닫히는 지하철 문 사이로 몸을 밀어 넣은 승객은 “사고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러냐”는 한 승객의 핀잔에 되레 “그럴 수도 있지. 뭘 그렇게 뭐라고 그러냐”며 큰소리를 치며 승강이를 벌인다. 한 호텔에서는 두세 살배기 아이 둘을 데리고 호텔 수영장을 찾은 한 부모가 수영장 정비 시간이 됐음에도 수영장을 이용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며 수영장을 더 이용하게 해달라고 떼를 쓰고 언성을 높인다. 상식을 저버린 그들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다가 얼굴이 화끈거렸던 최근의 경험들이다.
과거에는 그냥 지나쳤을 법한 이런 풍경들이 이제는 SNS와 온라인 커뮤니티의 발달로 여과 없이 드러나고 있다. 덕분에 우리 사회의 부끄러운 민낯을 더 자주 목격하게 됐지만, 동시에 우리 사회가 과연 건강해지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도 깊어진다. 물질적으로 풍요하고 편리함이 우선시되는 시대, 개인의 삶과 가치가 중요시되고 사회 규범과 공동체 의식은 점점 설 자리를 잃고 있다. 이를 지켜보는 건강한 상식을 지닌 국민은 매번 분노하지만, 곧 잊힌다. 상식을 저버린 악행들은 또다시 반복된다.
맹자는 인간의 본성에서 비롯된 네 가지 도덕적 단서, 사단(四端) 중 하나로 ‘수오지심(羞惡之心)’을 들었다. 정의롭지 못한 행동을 부끄러워하고 잘못된 것을 미워하는 마음이다. 그는 부끄러움이 사라진 곳에는 탐욕과 이기심이 채운다고 했다. 상식이 파괴되는 숱한 일상들로 채워지고 있는 오늘날에도 꼭 되새겨봐야 할 덕목이다.
상식이 통하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의 최소 조건이다. 규범과 원칙이 존중받고, 예측 가능한 질서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사회다. 상식이 통하는 사회는 구성원들의 단순히 지식이나 논리적 판단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회 구성원 개개인이 공유하는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이 모이고 쌓여 만들어지는 것이다.
부끄러움을 아는 사회의 구성원은 자신의 행위가 사회적 규범이나 공동체의 도덕적 가치에 어긋났음을 깨달을 때 불편한 감정을 느낀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자신이 한 말과 행동이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고민한다. 부끄러워할 줄 아는 개인들이 많아질 때, 비로소 사회는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된다.
자신의 말과 행동을 끊임없이 성찰하고, 상대를 배려하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세상이다. 사회부 기자들이 상식을 저버리는 황당무계한 사건·사고들을 기사로 전하는 일이 사라질 날들을 기대해본다.
2025-09-08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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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정의선의 로봇 사랑
2022년 1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의 IT·가전 전시회 CES에서 화제 가운데 하나가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사족 보행 로봇 ‘스팟’과 함께 무대에 오른 장면이었다. 당시 정 회장은 “매일 휴대전화를 들고 다니는 것처럼 언젠가는 사람들이 스팟을 데리고 다니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로부터 2년후인 지난해 말 스팟이 미국 비밀경호국 요원과 함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플로리다주 팜비치 마러라고 리조트의 자택 주변을 순찰하는 장면이 언론에 공개됐다. 정 회장의 예고가 현실이 된 것이다.
이미 싱가포르 혁신센터 HMGICS에는 로봇개 품질 검사원으로 스팟이 투입돼 있다. 국내에선 기아차 광명 공장에서 로봇개가 활동하고 있다.
올 연말에는 현대차의 글로벌 생산라인에 본격 투입된다. 휴머노이드 로봇 ‘아틀라스’를 미국 조지아주에 있는 신공장인 현대차그룹 메타플랜트 아메리카(HMGMA)의 조립라인에 시범적으로 넣기로 한 것이다. HMGICS 내 차량 내부를 조립하는 의장 단계에도 ‘아틀라스2’ 투입이 예정돼 있다.
로봇이 자동차 생산에 들어가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어서 글로벌 자동차 업계도 예의주시하고 있다.
로봇은 배터리만 교체하면 24시간 작동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생산성이 획기적으로 높아질 수 있어서다. 하지만 정의선 회장에게는 단순한 생산성 향상 그 이상의 의미가 담겨있는 듯하다. 사용자 범위와 노동쟁의 대상을 확대하고 파업 노동자에 대한 기업의 손해배상 청구를 제한하는 등 노조에게 막강한 권한을 주고 기업을 옥죄는 이른바 ‘노란봉투법’(노동조합법 제2·3조 개정안) 국회 통과 등 집권 여당·정부의 노조 지원과 한국 노조의 과도한 요구를 컨트롤할 수 있는 ‘대항마’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예전에 현대차 울산공장과 기아 광주공장을 가보면 토요타 일본 공장이나 르노코리아 부산공장과 사뭇 다른 풍경을 볼 수 있었다. 라인의 한두 명은 휴대폰을 하거나 신문을 읽는 장면이다. 비상 상황에 대비하고 휴식을 위한 차원이라고 하지만 다른 글로벌 공장들에는 흔하게 볼 수 없는 모습이다.
자동차 생산성을 나타내는 지표인 UPH(시간당 생산대수)를 보면 바로 국내 현대차 공장의 현주소를 알 수 있다. 현대차 미국 앨라배마공장과 체코 공장은 UPH가 70에 육박하지만 울산공장의 경우 평균 45에 그치고 있다. 임금은 반대다. 지난해 현대차의 노동자 평균 임금은 약 1억 2400만 원이고, 미국 자동차 빅 3의 평균임금은 8만 4000달러(약 1억 1700만 원)이다.
고임금임에도 생산성은 미국의 3분의 2수준인 상황에서 정 회장의 로봇 전략은 오히려 박수받을 일이 아닐까.
정 회장은 지난달 이재명 대통령과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정상회담 때 지난 3월 발표한 4년간 총 210억 달러 투자에서 50억 달러(약 7조 원)를 추가한다고 했다. 미국에 연 3만 대 규모의 로봇 공장을 짓기로 한 것이다.
가뜩이나 미국 내 현대차그룹의 연간 자동차 생산량을 100만 대에서 170만 대로 확대키로 해 현대차·기아 노조가 한국 내 생산라인 축소를 우려하고 있는 상황에서 ‘메가톤급’ 소식을 추가로 알린 것이다.
현대차 노조는 발끈했다. “외국 투자에 대한 허탈함과 불안감을 느낀다. 성과에 걸맞는 공정한 분배와 조합원에 대한 투자가 가장 가치 있는 투자”라고 비판했다.
최근 미국의 관세 부과 등으로 올 2분기 영업이익이 1조 6000억 원이나 감소했는데도 현대차 노조는 임단협에서 억지에 가까운 요구를 늘어놓고 있다. 현대차뿐만 아니라 현대제철, GGM 등 현대차그룹 계열사에서도 파업 등 노조 이슈가 끊이지 않고 있다. 하지만 중·장기적으로 생산라인에서 근로자가 로봇으로 대체되면 상황이 바뀔 수 있다. 로봇 투입만으로 ‘생산성 향상’과 ‘노조 대응력 강화’라는 두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게 된 셈이다.
현대차그룹은 나아가 이번 달 중순 국내 기관 투자자들을 대거 이끌고 미국 보스톤다이나믹스 본사를 방문할 것으로 알려졌다. 로봇 투자를 본격적으로 이끌고 기업 가치를 올리기 위함이다. 증권가 반응도 좋다.
정 회장이 4년전 로봇 회사를 인수할 때만 해도 “일본 자동차 업체들처럼 포기할 것” “상업적으로 휴먼 로봇은 실패할 것”이라는 반응이었으나 이젠 그룹의 탄탄한 미래를 보장하는 ‘신의 한수’로 인식되고 있다.
배동진 서울경제부장 djbae@busan.com
2025-09-03 [18: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