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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그 2년은 무엇이었을까
사람을 믿지 마라, 상황을 믿어라. 작은 유혹과 풍파에도 바뀌는 사람 마음을 이만큼 잘 표현한 말은 없다. 언제나 원치 않는 상황은 사람을 본심과 다른 방향으로 끌고간다.
사람이 상황에 끌려가는 부조리함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게 선거다. 조변석개하는 선거철이면 유권자는 그간의 서사와 인연을 망치는 낯선 진심을 마주한다. 야당 텃밭이던 부산의 마음을 돌리려 연일 러브콜을 보내던 여당의 진심이 그랬다.
후끈 달아오른 여당발 '5극3특' 이슈는 얼어붙은 부산의 마음을 녹였던 게 사실이다. 남부권에서 부산과 울산, 경남을 묶어 수도권과 대등한 경제 축으로 성장시키자고 했다. 그 주장에 누가 토를 달 수 있을까.
연초부터는 청와대가 조기 행정통합을 강공 일변도로 밀어붙였다. 그만한 명분이 있으리라 믿었다. 거기에 여당은 20조 원의 달콤한 인센티브까지 내놓겠다고 제안했던 터다.
그러나 러브콜이 이어지는 그 순간에도 5극3특과 궤를 같이하는 글로벌허브도시 특별법은 국회 표류 중이었다. 2년 넘게 이어진 부산시의 호소에도 상임위 소위원회에 상정조차 되지 못한 것이다. 그 상황은 부산을 향한 여당의 진심을 의심하기 충분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부산 출신 윤건 의원의 법안심사소위가 2년 넘게 멀쩡한 법안을 미아 신세로 만들어 놓았다.
특별법이 발의됐던 2024년 1월만 해도 수도권과 중앙 부처의 반발은 충분히 예상했다. 하지만 여당이 상임위에서 법안 하나를 붙들고 놔주지 않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미상정 이유는 철마다 바뀌어서 일일이 기억하기도 어려울 지경이다. '법안 설명을 야당에서 제대로 안 했다'라고 몇 달을 버티더니 그 뒤에는 '부산 외 다른 지역 발전을 위한 법안과 같이 심사해야 한다'라고 했다.
결국 지난달 11일 입법 공청회가 열리면서 법안 심사는 물꼬를 텄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일부 여당 의원은 '지방선거 전에는 법안을 처리하면 안 된다'라며 어깃장을 놨단다. 이쯤 되면 더는 갖다 붙일 변명도, 진심을 숨기고 싶은 마음도 없다는 소리다.
6·3 지방선거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출마를 고심하던 여당의 전재수 의원이 2일 출사표를 던진다. 선거에 발을 담갔으니 당시 공동으로 법안을 발의한 전 의원도 책임을 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분위기는 묘하게 바뀌었다.
전 의원이 지난달 24일 당 원내대표단을 찾아 특별법의 조속한 통과를 요청했다. 여당 원내대표단은 "부산을 글로벌 허브도시로 키우는데 앞장서겠다"라고 호응했다. 2년간 표류하던 법안은 전 의원의 한 마디에 하루 만에 소위를 통과했다.
맥락 없이 보자면 전 의원은 부산의 구세주다. 17명의 국힘 의원들로도 중과부적이었던 민원을 단숨에 해결한 것이다. 그러나 전 의원의 '17대 1' 무용담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이전까지 보여준 여당의 행태 때문이다. 야당 시장이 제안했다는 이유로 갖은 트집을 잡던 특별법 법안이 하루아침에 소위를 통과했으니 그 진심을 누가 그대로 믿어줄까. 진심이 아니라 상황을 믿을 수 밖에 없는 꼴이다.
'낙선 전문'이라는 달갑지 않은 수식어에도 굴하지 않고 전 의원은 자전거로 북구의 바닥 민심을 다졌다. 그 스토리는 당시 북구를 출입하던 초년병 기자에게 큰 울림을 줬던 기억이 난다. 부산의 정서를 살피고 거친 언사도 자제하던 모습이 부산에서 민주당 3선 의원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그의 큰 무기였다.
그런 전 의원이 이제 와서 정치공학 운운하며 이런 모욕적인 판을 짰으리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이미 해양수산부 부산 이전만으로도 그는 시장 선거에 충분한 경쟁력을 확보한 후보다.
전 의원의 활약에도 글로벌허브도시 특별법이 또다시 지난달 30일 법사위에서 제동이 걸린 모양이다. 다음 날에는 대통령 입에서 "부산만 어떻게 특별법을 만들어 주느냐"는 말까지 나왔다. 재차 전 의원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몰아주려는 계산이라면 지금이라도 그만둬야 한다. 그건 여당 프리미엄이 아니라 여당 페널티가 될테니 말이다.
그것보다는 누구라도 납득할만한 여당 프리미엄을 전 의원은 제시해야 한다. 해수부와 HMM 등 그가 꺼내들 카드는 이미 차고도 남는다.
여당 지도부도 마찬가지다. 지금이라도 글로벌허브도시 특별법의 통과에 초당적 지원을 해야 한다. 그게 지난 2년간 겪은 부산의 설움을 달래고, 부산에 '진심'을 내보이는 길이란 걸 알아야 한다.
2026-04-01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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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너의 이름은
부산은 다리의 도시다. 산·강·바다를 모두 품은 삼포지향(三抱之鄕)의 부산 지형은 아름답지만 살아가기에 장애가 되기도 한다. 이 같은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만든 480개가 넘는 다리가 도시 곳곳을 연결하고 있다. 부산은 거가대교에서 시작해 가덕대교~신호대교~을숙도대교~남항대교~부산항대교~광안대교까지 7개 다리가 이어진 총 52㎞의 해안순환도로망을 자랑한다.
부산의 다리는 저마다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길이로 따지면 동서고가로는 전국에서 가장 긴 다리 2위, 광안대교는 3위다. 오래전부터 부산을 상징했던 영도다리는 애잔하다. 6·25 전쟁 당시 피란민들에게 영도다리는 혹시 헤어지면 만나기로 한 최후의 약속 장소였다. 예전 아이들은 자라면서 ‘영도다리에서 주워 왔다’라는 소리를 한 번쯤은 들었다. 전쟁 통에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 영도다리 주변에 그렇게 많았던 탓이다.
광안대교는 하늘의 별처럼 반짝이는 다리다. 화려한 야경을 자랑하는 광안대교는 최근 처음 출전한 야간 경관 국제 어워드에서 당당히 세계 2위에 올랐다. 그동안 유럽에서 독식해 오던 도시조명상 수상을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광안대교가 이뤄낸 것이다. 부산항대교는 무서운 다리로 통한다. 부산시티투어버스가 부산항대교 진입 램프에 들어서면 “롤러코스터 타실 준비 되셨나요”라는 안내 방송이 나온다. 모르고 진입했다가 운전자가 무서워서 차를 세우는 바람에 119 구조대가 램프를 걸어서 올라가 대신 운전해 주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크루즈선이 지나갈 수 있도록 아파트 20층 높이에 세워진 부산항대교의 나선형 램프는 부산의 또 다른 매력이 되고 있다.
이처럼 다리는 부산 관광의 아이콘이 되었지만 이들 대부분이 차량 위주라는 사실이 못내 아쉬웠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다리는 원래 사람이 지나가라고 만들었다. 어느 순간부터 사람이 차보다 우선순위에서 밀리고 만 것이다. 이달 초 개통한 부산의 첫 보행교 수영강 휴먼브리지는 그래서 더 반갑다. 수영구와 해운대구 APEC나루공원·영화의전당을 잇는 이 다리는 벌써부터 사람들로 북적인다. 수영강에 놓인 다리는 15개에 달한다. 수영강의 여러 다리를 많이 걸어 봤지만 보행교는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벚꽃까지 만발한 수영강 일대를 걸으며 금상첨화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다 좋은데 ‘휴먼브리지’라는 다리 이름이 불만이다. 수영강에는 이미 민락교·수영교·좌수영교·과정교 같은 이름의 다리들이 있다. 이처럼 다리 이름은 그 장소의 역사나 지리적 특징을 담아 다른 곳과 구별되게 짓는다. 휴먼브리지는 국내외 어디에 있는지 모를 특색 없는 이름이다. 좋은 우리말 이름 놔두고 왜 정체불명의 영어 이름인가. 원래 휴먼브리지는 건축이나 도시 설계 분야에서 보행자 전용 교량을 뜻하는 용어다. 정식 이름을 정하기 전에 임시로 부르는 이름이기도 하다.
서울 서초구 몽마르뜨공원과 서리풀공원을 연결하는 보행교도 처음엔 휴먼브리지로 불렀다. 정식 개통을 하면서 서초(瑞草)의 옛 지명을 살린 ‘서리풀 다리’라는 이름으로 정해져 지금까지 불리고 있다. 가평 자라섬에 설치된 보행교도 처음엔 자라섬 휴먼브리지로 추진되다 지금은 ‘자라섬 출렁다리’로 불리고 있다. 휴먼브리지는 기껏 근사한 공원을 짓고 이름을 ‘동네 공원’이라고 부르는 격이다. 누가 나를 볼 때마다 “이 사람아!”라고 부르면 기분이 어떻겠는가. 사람을 위한 다리라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지은 이름이 역설적으로 사람 마음에 와닿지 않는다.
“당신이 한번 아이디어를 내어보라”라고 한다면 ‘영화 도시’ 부산 영화의 전당으로 이어진다는 의미를 살려서 ‘영화교’로 부르자고 제안하고 싶다. 영화의 주인공처럼 이 다리를 걸어 보자는 의미다. ‘부귀영화’할 때의 영화(榮華)나 ‘다리를 걸으면 젊어진다(Young)’라는 중의적인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아름다운 다리에 이런 의미까지 더해지면 더 많은 사람이 찾아오지 않을까.
역사적으로 부산을 대표하는 인물의 이름을 가져와도 좋을 것 같다. 안용복은 조선 숙종 시절, 미관말직의 수군이었지만 목숨을 걸고 일본으로 건너가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현재 수영구 수영동에 있던 경상좌수영 소속이었으니 수영강과도 인연이 깊다. 수영강에 세운 다리에 이름을 붙이기에 손색이 없어 보인다. 여러 사람이 머리를 맞대면 더 좋은 이름이 나올 것이다.
다리 이름은 한번 정해지면 수십 년, 수백 년간 불리게 된다. 아무리 시민 명칭 공모를 통해 결정된 이름이라도, 시민 다수가 아니라고 하면 바꿔야 한다. 제대로 된 이름을 불러줘야 존재는 비로소 생명을 얻고, 본연의 가치를 발휘하게 된다.
박종호 문화스포츠부 선임기자 nleader@busan.com
2026-03-30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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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갈급하다
‘목이 마른 듯이 몹시 조급하다. 속이 마를 지경으로 몹시 바라다.’
〈표준국어대사전〉과 〈고려대 한국어대사전〉에 나오는 ‘갈급하다’의 뜻이다. 지난주 한 시민단체 대표와의 통화에서 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이 단어가 귀에 콕 박혔다.
1991년 페놀, 1994년 벤젠·톨루엔, 2006년 퍼클로레이트, 2009년 1, 4 다이옥산, 2018년 녹조 대발생과 과불화화합물. 지난 20일 오후 부산맑은물범시민대책위원회 회원들은 낙동강 수질 문제 이슈가 새겨진 검은색 조끼를 입고 벡스코 오디토리움 복도에 서 있었다. 2026 세계 물의 날 기념식 참석을 위해 부산을 찾은 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에게 성명서를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최소남 상임대표는 기후부 장관에게 “우리 부산 엄마들이 정말 갈급한 마음으로 이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부산 엄마들이 얼마나 갈급한지 이해를 해달라”라고 말했다. 부산 물 문제를 지자체가 알아서 해결하라고 떠넘기지 말고, 국가와 기후부가 주도해서 해결해 주길 바란다는 뜻을 전하기 위해 최 상임대표는 한 마디로 ‘쌩쇼’를 했다고 표현했다.
부산 시민단체가 맑은 물 확보에 국가의 적극적 개입을 요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작년 여름에는 114개 시민사회단체가 정부서울청사 국정기획위원회 앞에서 낙동강 수질 개선과 취수원 다변화 사업의 국정과제 채택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기도 했다. 이들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부산 시민이 안심하고 마실 수 있는 물의 안정적 확보를 간절하게 바라기 때문이다.
낙동강은 1300만 영남권 주민의 식수원이지만 거의 매년 수질 문제가 반복되고 있다. 녹조와 산업폐수라는 두 가지 문제가 상존해 지난 30년간의 수질 개선 노력에도 주요 수질지표는 한강에 못 미친다. 2021년 부산 환경단체가 페놀 유출 사건 30주년을 맞아 발표한 성명서 제목에 ‘낙동강은 신음한다. 아직도!’라는 문구가 들어있을 정도다.
시민단체가 기후부 장관에게 성명서를 전달한 날에 하루 앞서 부산시가 주최한 세계 물의 날 기념행사가 열렸다. 기념행사를 마친 뒤 300명의 참석자들은 벡스코 야외광장에서 맑은 물 염원 퍼포먼스도 펼쳤다. 뒤이어 열린 맑은 물 확보를 주제로 한 토론회의 분위기는 정말 뜨거웠다.
“부산은 물로 차별받는 대한민국의 도시이다.” 부산시민의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다. 주제 발표자 겸 토론자로 참석한 환경공학 전문가의 발언은 물 문제에 있어서 부산이 어떤 위치에 있는가를 대변했다. 이 발언은 특히 올해 세계 물의 날을 맞아 대한민국이 선택한 주제 ‘모두를 이롭게 세상을 품는 생명의 물’과 너무 비교됐다. 행사장에 앉아 있는 내내 기분이 씁쓸했다.
현재 낙동강 물 문제 해결을 위해 취수원 다변화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낙동강유역 하류에서 하루 90만 톤의 복류수·강변여과수를 취수해 부산에 42만 톤, 동부 경남에 48만 톤을 공급한다는 계획이다. 2021년 첫발을 내디딘 이 사업은 부산과 경남이 머리를 맞대고 조율 중이지만, 주민 반발과 예산 등의 문제로 흐르다가 멈추기를 반복하고 있는 상황이다.
토론회에서 먹는 물 문제에 있어 지방정부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취수원 다변화를 국가 핵심사업으로 격상해달라” “국가 차원의 협력이 절실하다” “시민이 체감할 수 있는 대안을 끌어낼 신속한 의사결정이 필요하다” “역사적 결단을 내린다는 생각으로 정책을 내놓아야 한다” 쏟아진 수많은 이야기의 끝은 결국 정부가 나서서 낙동강 물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시민단체는 성명서를 전달받은 김 장관이 부산 물 문제는 어떻게든 해결하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고 전했다. 김 장관이 같은 날 부산상공회의소 초청간담회 자리에서도 시민 숙원사업인 낙동강 취수원 다변화에 대해 부산 지역도 맑은 물을 확보할 수 있도록 열심히 지원하겠다는 뜻을 밝혔다니 그 약속이 어떻게 지켜질지 두고 볼 일이다. 시민의 생존권이 달린 맑은 물 확보는 국가가 해야 할 최소한의 약속이고 정의라는 시민들의 외침을 절대 가벼이 들어서는 안 된다.
6·3 지방선거를 앞두고 갈급한 이들이 많다. 출마를 준비하는 여야 정치인, 선거 결과에 따라 희비가 엇갈릴 정당, 수치로 확인되는 민심의 성적표를 기다리는 정부까지. 모두 국민 한 명 한 명의 마음 잡기에 갈급할 것이다.
지방선거에서 승리하려면 지역 발전에 필요한 것, 지역민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여러 이슈 속에서 지역과 지역민에게 가장 갈급한 것을 제대로 파악하고 응답하는 일이 유권자 표심 잡기의 출발점이다. 맑은 물을 향한 부산·경남 지역민의 갈증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낙동강 물 문제를 미래 세대에게까지 물려줄 수 없다고 다짐한 유권자들이 지켜보고 있다.
2026-03-25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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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뉴이재명은 ‘보수’인가
2004년 5월 29일 저녁 청와대 영빈관에서 1980년대 운동권 가요인 ‘임을 위한 행진곡’이 울려 퍼졌다.
노무현 대통령과 여당(열린우리당) 17대 총선 당선자의 만찬에서 80년대 학번 운동권 출신 당선자 30여 명이 이 노래를 선창하자 노무현과 다른 참석자들도 모두 따라 불렀다.
보수 진영에서는 난리가 났다. 급진적인 개혁과 국가 체제의 혼선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이어졌고, 어르신들은 나라에 ‘망조’가 들었다고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지금은 국가가 주관하는 5·18 기념식에서 제창하는 노래지만 그때는 파격이었다.
그런데 노무현 정부가 추진한 정책들은 보수세력의 걱정만큼 급발진하지 않았다. 이라크 전쟁 파병을 결정했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로 오히려 진보 진영으로부터 욕을 먹었다. 방사성 폐기물 처리시설을 둘러싼 ‘부안 사태’는 진보를 내세운 노무현 정부의 생채기가 됐다.
152석의 과반 의석에도 불구하고 국회에서 개혁 정책을 관철시키는 것은 녹록지 않았다. ‘백팔번뇌’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여당 초선의원 108명의 진보 정체성이 너무 강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때가 덜 묻었던 원리주의자들은 실용 노선을 걸으려고 했던 노무현을 임기 내내 괴롭혔다. 그 때문인지 진보 지지층 내에서 발생한 균열로 노무현 국정수행 지지율은 집권 5년 차에 27%까지 폭락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대선 때 자신이 ‘중도 보수’라고 주장했다. 외연 확장을 위한 선거 전략의 하나로 이해됐다. 6월 지방선거를 앞둔 지금까지는 실용주의 정책 노선을 추구하고 있는 건 분명하다.
미국과 일본을 중시하는 외교 노선, 검찰 개혁 과정에서 불거진 강경파들의 주장을 ‘외과 시술적 교정이 유용하다’는 논리로 뚫어 나가고 있다.
이 대통령은 “필요한 개혁을 하더라도 전체를 싸잡아 비난하며 모두를 개혁 대상으로 몰아 ‘빈대 잡자고 초가삼간 태우는’ 결과가 되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며 “검찰 개혁이든 노동·경제 개혁이든 언론 개혁이든 법원 개혁이든 그 무슨 개혁이든 그래야 한다는 게 제 생각”(3월 9일 X 메시지)이라고 했다.
‘비정상의 정상화’를 화두로 들고나왔다. 이 대통령은 지난 6일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에서 마약범죄·공직부패·보이스피싱·부동산 불법 행위·고액 악성 세금체납·주가조작·중대재해 등을 ‘7대 비정상’으로 규정했다. 그러면서 “우리 사회 내부에 존재하는 비정상적인 요소를 정상화하는 노력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했다.
지난 10일 국무회의에서는 “국가정상화위원회라든지 일종의 팀을 만들어 ‘비정상의 정상화’ 사업을 각 부처 단위로 주요 과제를 뽑아 종합해서 한번 해보면 어떨지 논의하자”고 제안했다.
사실 ‘비정상의 정상화’라는 말을 가장 먼저 사용한 사람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다. 취임 후 첫 여름휴가를 다녀온 직후인 2013년 8월이었다. 당시 청와대 국정기획수석실은 모든 정부 부처에 비정상 사례를 수집해 보고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박 전 대통령은 그해 광복절 경축사와 이듬해 신년사를 통해 거듭 ‘비정상의 정상화’를 국정운영의 기조로 천명하면서 개혁 드라이브를 걸었다. 다만 2014년 세월호 참사와 2016년 총선 패배,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 등으로 국정의 구심력을 잃고 박 전 대통령이 탄핵되면서 빛이 바랬다.
‘비정상의 정상화’는 누가 봐도 보수의 용어다. 진보 입장에서 비정상은 청산해야 할 적폐이지, 정상화할 수 있는 대상은 아니다. ‘사람은 고쳐 쓰는게 아니다’라는 말이 있듯이 인간의 성향이나 습관을 바꾸긴 쉽지 않기 때문에 아예 교체해야 맞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대통령은 “굳이 개혁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심정적인 저항감을 유발할 필요가 없다”, “실제 상황을 바꾸면 되는 것이고 결과가 중요하다”(3월 10일 국무회의)고 말한다.
여권 내부에서는 이 대통령의 이런 실용주의적 노선을 추종하는 ‘뉴이재명’ 그룹이 태동하고 있다. 이 대통령이 임기 말까지 이 노선을 추구한다면, 뉴이재명 세력은 그때까지 든든한 지원군으로 남을 전망이다.
이 대통령이 취임한 지 아직 1년이 되지 않았다. 이 대통령이 진짜 보수인지 실용적 진보인지는 시간이 흐르면서 더 명확해질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대통령의 진의가 드러나기 전까지 보수정당임을 내세우는 국민의힘이 설 자리는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박석호 정치부 선임기자 psh21@busan.com
2026-03-23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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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음모론이 가장 쉬웠어요
사하구 장림동으로 기억한다. 제보 전화를 받고 달려갔다. 수화기 너머 목소리는 진지했다. “국정원으로부터 감시당하고 있습니다. 집안 곳곳에 도청 장치가 있어요.” 지금이라면 한 귀로 듣고 흘렸을 테지만 사회부 막내 기자 시절엔 지나칠 수 없었다. 좁다란 골목길을 헤맨 끝에 제보자 주소지에 도착했다. 그러고 현관으로 들어서는 순간 뭔가 이상하다는 걸 직감했다. 잔뜩 어지럽혀진 집안 어둠 속에서, 덥수룩한 머리와 때 묻은 운동복 차림의 남성이 나타났다. 그는 안쪽 방으로 잡아끌더니 벽지와 천장에 묻은 검은 점을 가리키며 감시 카메라라고 설명했다. TV도 꺼졌다 켜졌다를 반복한다며, 24시간 감시당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충분히 이야기를 들어드린 뒤 간신히 빠져나왔다. 그는 따라 나오지 않고 어둠 속에서 배웅했다.
옛날 기억을 장황하게 떠올린 건, 부정선거 음모론에 빠진 이들이 겹쳐 보여서다. 지난달 27일 한 유튜브 방송에서 ‘부정선거, 음모론인가’를 주제로 끝장토론이 진행됐다. 18일 저녁 기준 해당 동영상은 무려 624만 조회수를 기록 중이다. 댓글도 4만여 개가 달렸다. 중복 클릭을 감안하더라도 어림잡아 대한민국 성인 10명 중 1~2명은 시청한 것으로 추산된다. 안 보신 분들에게는 권하지 않겠다. 날짜를 넘겨 7시간 넘게 이어진 토론을 끝까지 보고 나서 허무함과 후회가 밀려왔다.
양측 주장은 내내 평행선을 달렸다. 전한길 대표(전한길뉴스)와 이영돈 PD, 박주현 변호사, 김미영 대표(VON뉴스)가 의심스러운 물증을 제시하면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는 부정선거가 아니라 부실 관리 사례라며 맞받았다. 뒤로 갈수록 이 대표가 힘겨워 보였다. 홀로 4명을 상대한 탓도 있지만, 경찰 수사가 아닌 토론회에서 사실관계를 명명백백 가리는 건 애초에 불가능했다. 전 세계 과학자들이 비밀리에 핵 개발에 참여한 ‘맨해튼 프로젝트급’ 운운하며 대법원 판결마저 선거 조작의 일부라 여기는 이들 앞에서, 이 대표는 토론 결과를 예상 못 했을까.
음모론의 힘은 그럴듯함에서 나온다. 이는 확증 편향과 강하게 연결된다. 부정선거를 주장하는 이들에게는 공통된 편향이 있다. 자신이 지지하는 진영이 당선돼야 마땅하다는 확신이다. 빨간 안경으로 보면 온통 ‘빨간당’ 세상인데, ‘파란당’의 승리를 납득할 리 만무하다. 상대 진영이라고 다르지 않다. 9년 전에는 영화 ‘더 플랜’을 만든 김어준과 그 지지 세력이 그랬다. 선거 결과가 조작됐다고 결론 내리는 순간, 수많은 정황이 부정선거의 증거로 보인다. 선거인명부에 등재된 197세 유권자, 배춧잎·일장기 투표지, 화웨이 와이파이, 회송용 봉투 배송경로 오류 등 선관위의 관리 부실과 실수가 거대한 세력의 선거 조작으로 귀결된다.
음모론을 만들기는 쉽지만, 깨부수려면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 허위 여부를 밝히려면 지난한 팩트체킹을 거쳐야 한다. AI 프로그램으로 단 몇 초 만에 ‘전쟁 영상’을 만들 수 있지만, 허위 판독에는 몇 배 몇십 배의 시간과 품이 들어간다. 거짓으로 판명돼도 외려 가짜뉴스라며 외면하는 이들도 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끝장토론 이후 제기된 36가지 의혹을 정리해 20쪽 분량의 해명자료를 냈다. 이도 모자라 주요 쟁점만 따로 떼어내 조목조목 반박했다. 그럼에도 음모론은 끄떡없다. 한국판 맨해튼 프로젝트의 당사자가 내놓은 자료를 누가 믿겠는가.
음모론의 초기 대처법은 간단하다. 무관심과 무대응이다.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일본에 굳이 대응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부정선거 주장을 공론장으로 끌어낸 이준석 대표는 음모론을 너무 만만하게 봤다. 17년 전 장림동 제보자의 이야기를 기사로 다룬 셈이다. 조명해야 할 건 제보자 주장이 아니라, 바깥세상과 단절된 채 살아가는 정신적·사회적 고립이다. 벽지를 새로 바른다고, TV를 신형으로 바꾼다고 망상이 사라지지 않는다. 지금 생각하니, 장림동 아저씨가 현관 밖으로 나와 세상과 소통하게끔 도왔어야 했다.
뒤늦은 반성과 함께, 골방에 틀어박혀 곰곰이 생각해 본다. 결과적으로 파란당을 키워준다는 점에서 전한길 대표는 빨간당에 해로운 세력이다. 그의 주장과 행동이 황당할수록 민주당에는 호재다. 혹시 맨해튼 프로젝트급 비밀 세력으로부터 ‘X맨 활동’ 지령을 받은 건 아닐까. 그러고 보니 처음엔 계엄을 비판하다 정반대로 돌아섰다. 생각하면 할수록 수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연 수십억 원씩 벌던 일타강사가 본업을 내팽개치다니. 분명 지령과 함께 거액의 활동비도 받았을 것이다. 어떤가. 그럴듯하지 않나. 음모론 만들기가 이렇게 쉽다. 거짓이라면 어디 한번 증명해 보라.
djrhee@busan.com
2026-03-18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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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뺑덕 어멈과 행정통합, 그리고 정주영 정신
“삐쭉하면 빼쭉하고~~~, 빼쭉하면 삐쭉하고~~~.” 이렇듯 판소리 심청가 속 뺑덕 어멈의 변명은 끝이 없다. 그녀는 늘 “내 잘못이 아니오”라는 말로 책임을 떠넘기고 억지와 거짓으로 상황을 모면한다. 관객은 그 억지스러운 말에 웃음을 터뜨리지만, 그 웃음 뒤에는 씁쓸한 교훈이 남는다. 공동체 속에서 신뢰를 잃은 사람이 어떤 말로를 맞게 되는지, 뺑덕 어멈은 풍자로 보여준다. 그런데 이 풍자는 단지 옛 이야기 속에만 머무는 것일까. 오늘날 수도권 과밀화 해소와 지역 균형발전을 위해 시작된 광역자치단체 간 행정통합 논의를 들여다보면, 뺑덕 어멈의 그림자가 여전히 짙게 드리워져 있음을 느끼게 된다.
우리나라 광역단체 간 행정통합 논의는 2009년부터 시작됐다. 당시 김태호 전 경남도지사는 부산·울산·경남을 통합해 메가시티를 만들자고 주장했다. 그는 “동남권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고 행정구역 개편을 포함한 실질적인 대통합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17년이 넘는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부울경 메가시티 논의는 제자리걸음을 반복하고 있다. 메가시티 형태가 행정연합이냐, 행정통합이냐를 두고 ‘옥상옥’ 논란을 빚었다. 조직이 비대해지고 권한이 중복돼 비효율이 생긴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는 마치 뺑덕 어멈이 “그건 다 심청이 탓이지”라며 책임을 떠넘기는 모습과 닮았다. 실제로는 권한 조정과 제도 설계를 통해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임에도, ‘옥상옥’이라는 말은 편리한 핑계처럼 소비된다. 문제 해결 의지보다는 현상 유지를 위한 변명에 가깝다.
또 다른 단골 핑계는 “주민투표를 반드시 거쳐야 한다”는 주장이다. 물론 민주적 정당성 확보는 중요하다. 그러나 때로는 이 말이 시간을 미루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지방선거가 가까워지면 “시간이 촉박하다”는 이유가 등장한다. 주민들에게 충분한 정보와 토론의 기회는 제공하지 않으면서, 주민투표를 핑계로 결정을 미루는 모습이다. 앞뒤가 맞지 않는 변명을 이어가는 뺑덕 어멈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수도권 과밀화는 이미 한계에 다다랐다. 수도권에는 인구와 산업이 과도하게 집중되면서 교통·주거·환경 문제가 심화되고 있다. 반면 지방은 인구 감소와 산업 공동화로 활력을 잃어가고 있다. 균형발전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닌 국가적 과제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광주·전남을 제외하면 지방의 광역자치단체들은 서로의 이해관계에 묶여 행정통합 논의를 쉽게 진전시키지 못하고 있다. “중앙정부 지원이 불확실하다”는 말도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지원을 요구하면서도 구체적인 설계와 결단을 미루는 태도 역시 또 다른 변명처럼 들린다.
이 대목에서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바로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이다. 그는 “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는 도전 정신으로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 인물로 평가받는다. 울산 조선소 건설을 위해 영국 은행을 설득할 때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 지폐를 꺼내 보이며 “우리는 이미 오래전 철갑선을 만든 민족”이라고 말했던 일화는 널리 알려져 있다. 작은 이해관계에 머물지 않고 더 큰 미래를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다.
행정통합은 그 과정에 늘 난관이 따른다. 지역마다 이해관계가 다르고, 정치권은 표 계산에 민감하며, 주민들은 정체성 문제로 반발하기도 한다. 그러나 바로 이런 복잡한 현실 속에서 지도자의 결단과 추진력이 요구된다. 정주영의 정신은 국가적 과제를 해결하는 과정에 핑계로 시간을 허비할 것인지, 아니면 비전을 향해 나아갈 것인지를 가르는 기준이 된다.
뺑덕 어멈의 변명은 결국 공동체 속에서 신뢰를 잃고 고립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행정통합 논의도 마찬가지다. 변명과 핑계로 시간을 허비한다면 주민들은 행정에 대한 신뢰를 잃게 되고, 지역 발전의 기회도 사라진다. 중요한 것은 핑계가 아니라 해결이다. 지금까지의 행정통합 논의는 마치 판소리 한 대목처럼 반복과 변주를 이어왔다. “효율성이 의문이다”라는 대목이 나오면 곧이어 “주민 동의가 필요하다”는 후렴이 이어지고, 다시 “중앙정부 지원이 불확실하다”는 변주가 반복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문제 해결의 노래라기보다 책임 회피의 변명에 가깝다.
결국 정치가 뺑덕 어멈의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행정통합은 또다시 제자리걸음을 할 것이다. 지도자 결단과 비전이 없는 곳에서는 주민의 신뢰도, 지역 발전의 기회도 사라진다. 수도권 과밀화 해소와 지역 균형발전이라는 국가적 과제를 앞에 두고, 지역 정치인들이 뺑덕 어멈의 변명 대신 정주영의 도전 정신을 배워야 할 때다. 그렇지 않다면 행정통합 논의는 끝없는 변명 속에서 표류할 수밖에 없다. 6·3 지방선거 후보들의 공약을 꼼꼼하게 챙겨봐야할 이유다.
2026-03-16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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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AI로 무장한 전쟁보다 더 무서운 것
미군의 ‘베네수엘라 마두로 대통령 체포 작전’은 완벽에 가까운 성공이었다. 1월 3일 오전 2시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 항구와 주요 군사시설에 공습이 이뤄진다. 사이버공격으로 정전도 발생한다. 혼란을 틈타 미군 헬기가 마두로 대통령의 안전가옥으로 향한다. 안전가옥은 여러 채이지만, 헬기는 정확한 은신처로 향한다. 엄호를 받고 특수부대 델타포스팀이 헬기에서 내린다.
마두로 대통령의 침실 옆엔 이런 날을 위해 만든 튼튼한 대피소가 있었다. 총소리에 놀란 마두로는 대피소로 달려가지만, 철문을 닫기 직전 붙잡힌다. 그만큼 속전속결로 침투가 이뤄졌다. 미군은 중상자도 없었다. 모든 걸 꿰뚫어 보고 가장 효율적인 경로로 짜인 체포 작전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놀랍게도 작전의 설계자는 사실상 AI로 지목된다. 앤트로픽사의 ‘클로드’와 ‘팔란티어 테크놀로지’는 전략적 파트너십으로 미 국방부에 AI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AI는 위성 영상·감청 데이터·드론의 실시간 스트리밍 등 방대한 정보를 초 단위로 분석해, 마두로 대통령의 위치를 파악했다. 최적의 시뮬레이션 과정을 통해 가장 효과적인 공습 후보지와 침투 경로를 뽑아냈다. 사람이 설계를 전담했으면, 단기간에 수립하기 어려운 작전이었다.
두 달이 안돼, 2월 28일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을 공습했다. 하메네이 최고지도자를 비롯해 국방장관, 총사령관 등 이란의 주요 인물들이 무더기로 피살됐다. 하메네이 사망으로부터 5거래일 만에 팔란티어 주가는 14% 올랐다. 자본시장도 알고 있다. 적중률 높은 공습은 AI 결과였고, 당연히 AI 방산회사들에게 큰 호재였다. 이미 팔란티어 시총은 전통 방산업체 록히드마틴의 3배 정도다. 지금 전장은 AI 능력이 재래식 무기보다 더 중요하다는 게 자본의 평가인 셈이다.
2022년 본격화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도 AI는 활약하고 있다. AI 기반 표적시스템 덕에 드론 명중률이 몇 배가 올라갔다. 특히 이 전쟁에선 유난히 드론 시점에서의 공격 영상이 많이 공개됐는데, 상당히 실감이 난다. 자폭드론은 망설임 없이 표적을 향해 날아간다. 굶주려 앙상한 젊은 병사들이 살려고 도망치거나, 벙커에 숨어도, 자폭드론은 귀신같이 쫓아가 임무를 완수한다.
거기에 비하면 조종사가 폭탄을 직접 떨어뜨리는 수동 드론은 인간적이다. 드론을 본 어떤 병사들은 살려 달라고 두 손 모아 애원하고, 어떤 이는 죽음을 받아들이고 성호를 긋는다. 그들은 폭탄의 희생자가 되기도 하고, 살아서 포로가 되기도 한다.
AI가 전쟁 수행 능력을 끌어올리는 건 명백하다. 효율적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길을 제시해 준다. AI가 대신 판단해주면, 군인도 살상에 따른 책임이나 양심적 가책을 덜 수 있다. 아마도 전쟁은 더 잔인해질 것이다. 이런 우려 탓에, 대량 살상 무기에 자신의 기술 활용을 금지할 것을 공식화하는 AI 기업들도 나오고 있다. 인간이 판단하는 게 AI보다 더 인간적이고 덜 잔인할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믿음이기도 하다.
2월 28일 미국의 공습이 한창일 때, 이란 호르모즈간주 ‘샤자레 타예베’ 여자 초등학교에 폭탄이 떨어졌다. 여러 정황상 미군의 오폭이 확실시 된다. 사망자 180여 명 대다수는 7~12세 여자 아이였다. 전쟁과는 아무 상관없는 아이들이었다. 시신 훼손이 심해, 부모들은 얼굴이 아닌 팔찌나 옷문양으로 자식의 신원을 확인했다.
유례없는 비극이지만, 묘한 건 이후 반응이다. 이란을 제외하면 어느 나라도 딱히 초등학생들의 희생을 크게 문제를 삼지 않고 있다. 미국 안에서도 전쟁 중 발생한 안타까운 참사 정도로 다뤄지는 분위기다. 우리나라에선 전쟁 중 크고 작은 사건 정도로 보도됐다. 주변에 주가 폭락으로 전쟁에 분개하는 이는 많지만, 초등학생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이는 드물다. 아니, 없다. 대부분 기억에서 지운듯하다.
베트남전 당시 ‘네이팜 소녀’ 사진이 반전 여론에 불을 지폈다. 온몸에 화상을 입은 채 울부짖으며 달려오는 9살 소녀의 모습에 인류가 분노했다. 비슷한 사진이 지금 찍힌들, 큰 변화가 있을까. 사실 마두로 체포 작전에서도 베네수엘라에서 민간인을 포함해 80여 명이 숨졌다. 관심이 없기에, 이들의 죽음을 알려고 하지 않는 게 현실이다.
이제 전쟁에서마저 인간은 밀려가고 있고, 인간적인 갈등 없는 살상은 늘어날 것이다. 더 무서운 건 인간마저 인간미를 잃어가는 거다. 아픔을 공감하는 우리의 능력이 퇴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전쟁이 잔인해지는 것 이상으로 우리도 무서워지고 있는 듯하다.
2026-03-11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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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다시 떠오른 양산 '행정 관할 일원화'
최근 양산시와 시민들의 시선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쏠렸다. 창원지법 김해지원과 양산지원 설치 법안 처리 여부 때문이었다. 희비가 엇갈렸다. 김해지원 설치 법안은 법사위를 통과·본회의에서 확정됐지만 양산지원 설치 법안은 상정조차 되지 못했다.
김해지원 설치 법안은 2012년 처음 발의된 이후 14년 만에 결실을 맺었다. 인구 50만 대도시 중 유일하게 법원 지원이 없던 김해시는 이번 법안 통과로 ‘사법 접근성 향상’이라는 오랜 현안을 해결하게 됐다.
반면 양산지원 설치는 국회 논의조차 시작하지 못했다. 지역 정치권은 “계속 추진하겠다”라는 입장이지만 김해 사례를 보면 쉽지 않아 보인다. 이번 무산은 단순히 지역 현안을 넘어 양산시의 오랫동안 해결되지 않은 고질적 문제인 ‘행정기관 관할 불일치’를 다시 떠올리게 했다.
양산의 행정 관할은 한마디로 ‘뿔뿔이’ 흩어져 있다. 행정구역은 경남이지만 법원과 검찰, 보훈 업무는 울산 관할이다. 경남 소속 경찰이 울산검찰의 수사 지휘를 받고, 시민들은 재판과 보훈 업무를 보기 위해 울산지법·울산보훈지청으로 가야 한다.
방송권역은 부산과 울산, 창원으로 갈라져 있다. 경남도 등이 2023년 KBS·KNN은 경남 방송국 채널로 시청권역을 통일하고, MBC는 부산과 경남 채널을 동시에 시청할 수 있도록 방안을 마련했지만, 시민 불편은 해소되지 않았다. 세무 행정은 2018년 양산세무서 신설로 해결됐으나 한 도시 안에 세 개의 행정 구조가 공존하는 것은 여전하다.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1990년대 신도시 개발로 인구가 급증하면서 시민 불편이 시작됐다. 2000년 초 시민들이 중앙정부에 민원을 제기했고, 2006년 이후에는 양산시 차원의 공식 건의도 이어졌다. 선거철이면 단골 공약으로 등장했고 ‘추진하겠다’라는 약속도 반복됐다.
하지만 3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도록 실질적 변화는 거의 없다. 양산세무서 신설이 일부 성과로 꼽히지만, 법원과 검찰, 보훈 등 핵심 영역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관할 불일치는 단순한 이동 거리 문제만은 아니다. 시민들은 행정 서비스 이용을 위해 시간과 비용을 반복적으로 부담해야 한다. 행정기관 간 협조 과정에서도 비효율이 발생하고, 기업 역시 법적 절차를 위해 권역을 넘나들어야 한다.
행정 체계 분산은 책임 소재를 모호하게 만들고 지역 정체성은 물론 소속감에도 영향을 미친다. 나아가 도시의 소속감과 정체성을 악화시킨다. 이 때문에 양산 시민들은 수시로 ‘경남 홀대론’을 제기하고 선거철마다 부산·울산 편입 이야기가 등장한다. 행정의 경계가 심리적 경계로 이어지고 있다.
김해지원 설치 과정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김해 역시 처음에는 창원지법 기능 축소 우려로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인구 규모와 사건 수요, 시민 불편에 따른 사회·경제적 손실 등을 수치로 제시하며 설득에 나섰고 결국 입법 문턱을 넘었다. 지역 숙원을 ‘논리와 데이터’로 풀어낸 결과다.
양산은 인구와 산업 규모에서 뒤지지 않지만, 지원 설치 논의조차 하지 못했다. 부산과 울산, 창원 등 3개 권역 법원이 인접해 있다는 지리적 특수성이 걸림돌로 작용했다는 후문이다. 이는 행정 편의를 중심으로 한 논리일 뿐 시민 편익을 기준으로 보면 아쉬운 대목이다.
행정기관 관할 일원화는 단지 기관을 옮기는 문제가 아니다. 시민들이 행정 서비스를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기본적 권리를 보장하는 일이다. 경남도 역시 이 문제를 인식하고 있다. 박완수 경남도지사가 공개 석상에서 양산시의 관할 불일치 문제를 언급했고, 2023년 1월에는 경남도와 양산시, 경남연구원이 함께하는 TF팀도 구성했다.
TF팀은 양산지원 설치와 양산·김해·밀양을 관할하는 보훈지청 신설, 방송권역 통일, 법기수원지 관리 문제 등을 포괄적으로 검토하기로 했다. 30여 년 만에 공식 논의가 시작되자, 시민 기대감도 컸다. 그러나 방송권역 일부 조정에 그쳤고, 기대했던 양산지원 설치는 무산되면서 실망감도 커졌다.
행정기관 관할을 바꾸는 일은 쉽지 않다. 법 개정과 예산 확보, 관계 기관 협의가 필요하고, 이해관계도 복잡하다. 그렇다고 해서 30년을 미룰 이유는 되지 못한다. 이제는 경남도와 중앙정부, 정치권이 함께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경남도의 TF팀 구성처럼 일회성 선언에 그쳐서는 안 된다. 구체적인 로드맵과 입법 추진 전략이 필요하다. 행정기관 관할 일원화는 선택이 아닌 시민 기본권을 온전히 보장하는 최소한의 조건이다. 이제는 답을 내놓아야 할 시간이다.
2026-03-09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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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흡수통합만 바라보는 에어부산의 내핍경영
에어부산의 노사 갈등이 지난달 25~27일 조합원 투표에서 합의안 찬성으로 일단락됐다. 에어부산 노사는 임금 인상폭을 놓고 충돌했지만 이면에는 ‘흡수통합’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 진에어에 통합되는 에어부산의 직원들은 ‘차별’에 대한 우려로 ‘동일 처우’ 확약을 요구하며 사측과 충돌했다. 흡수합병으로 사라지는 에어부산의 ‘마지막’이 다가오면서 그 후폭풍이 점차 구체화되는 모습이다.
2027년 1분기로 예고된 에어부산과 진에어의 합병에 대해선 에어부산 직원을 비롯해 주주, 항공 소비자들의 불만이 커지고 있다. 에어부산이 흡수통합을 앞두고 수년째 ‘내핍경영’으로 기업 가치를 축소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고 ‘지역 거점 항공사 공중 분해’에 대한 우려도 높다.
에어부산 노조의 한 관계자는 “이번 노사 갈등의 핵심은 통합 이후 동일 처우에 대한 보장 문제”라고 밝혔다. 통합 이후 하나의 회사가 되지만 피인수기업 직원에 대한 임금, 경력산정 등의 차별 우려가 높다는 주장이다. 노조 관계자는 “피인수기업 직원이 임금이나 경력 산정에서 불이익을 받았던 사례가 실제 있었다”고 지적했다.
에어부산 노조는 사측에 통합 이후 동일 처우를 확약해 달라고 요구했으나 회사 측은 피인수기업 입장에서 인수합병 이후 처우를 약속할 수 없다고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노조는 인수합병의 실질적 주체인 대한항공이 동일 처우를 약속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이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는 모습이다. 이 때문에 이번 노사 갈등 과정에서도 에어부산 사측은 “합병 이후에 직원들 처우에 차별이 없도록 노력하겠다”는 원론적 입장에 머물렀다.
흡수 합병에 대한 불만은 에어부산 주주도 마찬가지다. 에어부산 등 아시아나항공 계열사는 합병이 이뤄지기 전부터 ‘인수 기업’인 대한항공이 사실상 경영을 장악한 상태다. 송보영 아시아나항공 사장, 김중호 에어서울 사장, 정병섭 에어부산 사장은 모두 대한항공 출신이다.
대한항공 출신인 에어부산 경영진 입장에선 흡수 합병을 앞두고 회사 가치를 높일 ‘인센티브’가 없다. 실제로 에어부산은 2020년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통합 방침이 발표된 이후 항공기 확보 경쟁에서 뒤처지는 등 내핍경영을 계속하고 있다.
국토교통부 항공통계에 따르면 2026년 1월 전년 동월 대비 ‘탑승률’이 하락한 주요 국내 항공사(월간 4000회 이상 운항)는 에어부산(-2.2%), 아시아나항공(-0.1%)뿐이다. 코로나19 이후 항공업계가 ‘공급 경쟁’에 나서면서 기단 확대, 노선 확대에 나선 상태지만 에어부산은 통합 대비에 집중하면서 시장 지배력을 잃어가고 있다.
내핍경영이 계속되면서 ‘지역 거점 항공사’인 에어부산이 김해공항 운항에서 차지하는 비율도 줄었다. 코로나19 이전인 2019년과 비교하면 2025년 에어부산의 김해공항 운항은 22%, 승객은 16% 줄었다. 반면 같은 기간 에어부산 경쟁사인 티웨이항공은 김해공항 운항이 43%, 승객이 68% 늘었다. 에어부산의 ‘빈자리’를 노리는 이스타항공도 같은 기간 김해공항 운항이 74%, 승객이 83% 늘었다.
대한항공 계열에서는 에어부산을 흡수합병 하는 진에어가 김해공항 운항을 79% 늘리면서 승객도 89% 늘었다. 그러나 대한항공 계열 3사(대한항공+진에어+에어부산)를 모두 합해도 2019년 대비 2025년 김해공항 운항은 7810편이나 줄었다. 이 때문에 티웨이항공, 이스타항공의 증편 운항에도 불구하고 2019년 대비 2025년 김해공항의 ‘국적사’ 운항은 3087편 줄었다.
에어부산의 내핍 경영은 주가 하락 등 기업가치 축소로 이어지고 있다. 합병 방침이 발표된 2020년 11월 16일 7610원이던 에어부산 주가는 2026년 3월 4일에는 1700원대로 떨어졌다. 저비용항공사(LCC)들의 주가 하락 추세를 감안하더라도 경쟁사인 티웨이항공의 주가(2478원→1200원대)와 비교하면 하락폭이 크다.
에어부산이 내핍 경영에 따른 기업가치 하락이 개정된 상법 위반 논란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에어부산 기업가치 하락이 인수 주체가 되는 지배주주(대한항공 계열)에게는 이익이지만 소액주주 등 일반주주에게는 손해가 되기 때문이다.
개정 상법은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회사’에서 ‘회사 및 주주’로 확대했다. 기업 인수, 합병에서 지배주주와 일반주주 간 이익이 충돌할 때 일반주주 권리 침해가 없도록 하기 위한 조치다. 진에어와 에어부산 합병은 지배주주와 일반주주의 이익이 충돌하는 사례로 볼 수 있어 합병 시점에서 주식교환비율을 놓고 주주들의 반발이 발생할 수 있다.
김종우 서울경제부 부장 kjongwoo@busan.com
2026-03-04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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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기대에 한참 못 미친 부산 프로농구
부산을 연고지로 한 남녀 프로농구팀 부산 KCC 이지스와 부산 BNK썸이 올 시즌 부진의 늪에서 허덕이고 있다. 부산의 한 농구 팬은 “2년 전과 지난해 각각 챔피언에 오른 두 팀이 올 시즌에는 이렇다 할 경기력을 선보이지 못하며 리그 중위권에 머물고 있다”며 “롯데 자이언츠가 지난 시즌 가을야구 진출에 실패한 데 이어 두 팀 모두 리그 우승이 좌절된 처지여서 실망감이 크다”고 말했다. 프로농구 전문가들도 “수비력이 약한 부산 KCC와 높이가 약점인 부산 BNK가 막판 대반전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할 수는 있어도, 챔피언전 정상을 차지할 가능성은 낮다”고 입을 모았다.
먼저, ‘슈퍼팀’으로 불렸던 부산 KCC는 2023-2024 정규리그에서 5위로 플레이오프에 향했다. 하지만 6강 플레이오프부터 전혀 다른 경기력을 보여줬다. 허웅과 최준용, 송교창의 시너지 효과가 제대로 나왔고, 당시 외국인 선수였던 라건아까지 내외곽에서 상대 선수를 맹폭한 결과, KCC는 ‘KBL(한국농구연맹) 역대 최초 정규리그 5위 팀의 챔피언 결정전 우승’이라는 새 역사를 썼다.
하지만 2025-2026시즌에는 화려한 선수들의 이름값과 달리 성적은 너무 실망스럽다. 현재 리그 5위를 기록 중인 KCC는 올 시즌 국가대표 출신 가드 허훈과 장신 센터 장재석을 영입하고 역시 국가대표를 지낸 이승현을 트레이드로 내보냈다. 기존 멤버인 허웅과 최준용, 송교창에 허훈과 장재석, 숀 롱이 가세한 KCC는 ‘역대 최강’이라는 표현이 과하지 않았다. 올 시즌 KCC 지휘봉을 잡은 이상민 감독도 정규리그 우승을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송교창, 최준용은 잦은 부상으로 밥값을 하지 못하고 있다. 숀 롱이 골밑과 외곽에서 분전하며 두 선수의 공백을 메우고 있는 상황이다. 이상민 감독은 “왜 우리 팀에 부상이 잦은지 나도 알고 싶다”며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슈퍼스타에 의존한 팀 구성으로 인해 주전을 받치는 벤치 멤버가 약하고, 수비 조직력이 취약한 것이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KCC의 공격력은 10개 구단 중 최고 수준이다. 팀의 해결사 허웅은 지난달 2일 열린 서울 SK전에서 14개의 3점포를 꽂은 것을 포함해 51점을 터뜨렸다.
KBL에서 국내 선수가 50점 이상을 넣은 건 허웅이 역대 세 번째다. 2004년 3월 7일에 당시 인천 전자랜드에서 뛰던 문경은(현 수원 KT 감독)이 원주 TG삼보(현 원주 DB)를 상대로 66점(3점슛 22개)을 쏟아부었다. 같은 날 울산 모비스(현 울산 현대모비스)의 우지원이 창원 LG전에서 70점(3점슛 21개 포함)을 뽑았다. 당시 문경은과 우지원은 3점슛 타이틀을 두고 경쟁 중이었다. 정규리그 마지막 날 동료들이 두 선수에게 3점슛 기회를 몰아주면서 비현실적인 득점 기록이 나온 것이다. 따라서 SK의 빡빡한 수비를 뚫고 51점을 꽂은 허웅이 역대 득점 1위라고 해도 무방하다.
지난 시즌 디펜딩 챔피언 부산 BNK도 지난달 5연패의 부진에 빠지며 우승팀다운 위용을 과시하지 못하고 있다. 2024-2025시즌 공수에서 탄탄한 조직력과 빠른 스피드를 자랑하며 리그 1위와 챔피언전 우승을 동시에 거머쥔 BNK는 올 시즌 리그 4위에 머물고 있다. 이 같은 부진의 원인은 수비 조직력의 약화와 높이의 열세 때문이다. 특히 팀의 센터 역할을 하는 변소정과 박성진, 김도연이 지난 시즌에 비해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팀의 공수를 지탱하고 있는 베테랑 김소니아와 박혜진, ‘돌격 대장’ 이소희의 분전에 힘입어 길었던 5연패의 사슬을 끊어내고 플레이오프 진출의 희망을 살릴 수 있었다.
김소니아는 올 시즌 평균 두 자릿수 득점을 기록하며 득점 랭킹 10위권 내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또 리바운드에서도 개인 순위 10위권 내에 들며 팀의 중심을 확실히 잡고 있다. 나이를 무색하게 하는 활동량과 해결사 본능이 빛을 발하고 있다. 슈터 이소희의 성장세도 눈부시다. 이소희도 올 시즌 평균 두 자릿수 득점을 올리며 지난 시즌보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팀의 승부처마다 맹활약하고 있는데, 김소니아와 박혜진이 집중 견제를 받을 때 외곽에서 터뜨리는 이소희의 득점포는 팀 공격의 혈을 뚫어주는 핵심 요소가 되고 있다.
BNK 박정은 감독은 “리바운드 등 높이에서 다소 약점이 있지만, 주전 선수 5명을 비롯해 벤치 멤버까지 원팀으로 이기는 모습을 항상 주문하고 있다. 코트에서 수비나 경기 조율 등 리더 역할을 해줄 수 있는 박혜진과 김소니아 같은 선수가 있다는 게 우리 팀의 믿을 만한 구석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슈퍼팀’ KCC와 강한 조직력을 자랑하는 BNK가 다시 한 번 기적의 역사를 쓸 수 있을지 주목된다.
2026-03-02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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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한국에서 지방민으로 산다는 건
한국에서 지방민으로 산다는 건, 머릿속에 항시 ‘지방’이라는 스위치를 켜두고, 밤낮 할 것 없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누군가 야금야금 빼내가는 건 없는지를 감시하고, 도둑이 들면 지키기 위해 악을 써야 하는 일인 것 같다. 참으로 피곤하다.
최근 정부와 여당이 한국거래소의 지주회사 전환과 코스닥 자회사 분리를 추진하면서 지역 내 반발이 커지고 있다. ‘서울거래소 출범’이라는 부산 시민들의 우려 섞인 목소리를 뒤로 하고 생겨난 대체거래소 넥스트레이드(NXT)가 이미 무서운 속도로 시장을 잠식 중인데, NXT에 자본시장의 3분의 1을 떼어준 것도 모자라, 이제는 한국거래소마저 배를 갈라 서울에 떼어주려 하기 때문이다.
박형준 부산시장이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전례 없는 강한 어조로 항의 표시를 하고, 국회 정무위원장을 긴급 방문한 이유다. 특히 부산 금융 생태계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거래소가 지주회사로 전환이 되면, 본점 소재지에 대한 법적 강제성이 희박해지면서 코스피, 코스닥 등 핵심 자회사들이 서울로 ‘유턴’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 자본시장의 핵심축 중 하나인 코스닥이 ‘효율성’이라는 미명 아래 서울로 회귀하는 순간, 부산 금융중심지는 글자 그대로 ‘빈 껍데기’가 된다. 달라는 산업은행은 안 주더니, 있는 것마저 빼앗으려 한다는 볼멘소리가 나올 법도 하다.
뭘 그렇게까지 생각하느냐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방’이라는 스위치를 켜고 보면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허울 좋은 약탈’들이 눈에 보인다. 2005년 증권과 선물을 통합한 한국거래소가 부산에 출범한다고 좋아했지만, 이후 주요 기능과 전산은 서울로 다 옮겨가면서 부산에 있던 선물회사들은 자취를 감췄다.
에너지 정책은 더 가혹하다. 수도권에서 가장 먼 곳들에만 원자력발전소를 지어 놓고, 고압 송전탑을 곳곳에 박아 싼값에 전기를 서울로 쏘아 올린다. 사고 위험과 불안은 지방민이 짊어지고, 그 혜택은 서울의 마천루들이 오롯이 누린다. 한국예탁결제원이 금 보관소마저 본사가 있는 부산이 아닌 수도권에 지으려다 부산에서 기를 쓰고 반대하자 겨우 방향을 튼 사건은, 지방민이 눈을 부릅뜨지 않으면 무엇을 잃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다.
티도 안 나게, 서서히 야금야금 빼앗긴 것들은 더 많다. 사람뿐 아니라 돈도 서서히 서울에 집중되면서 지역에서는 대출해 줄 돈이 모자라 서울에서 돈을 끌어와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지난해 11월 말 기준 부산은행의 수신액(예금성) 중 부산에서 조달한 비율은 66.9% 수준으로 최근 6년 사이 최저 수준을 기록했다. 2020년 12월 말 기준 72.46%에 비하면 5년 만에 확연히 줄어든 수치다. 부산 기업, 개인에 대한 대출 비중은 전체의 74.16%인데 부산에서는 빌려줄 돈이 없으니 서울까지 가 높은 비용을 들여 조달해 오고 있다. 부산에서 힘겹게 벌어 들인 돈은 서울로 쉽게 흘러가고, 부산 기업은 다시 그 돈을 비싸게 끌어와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야금야금 빼앗겨버린 기회와 야금야금 내려앉은 자산의 가치는 청년들을 수도권으로 더 밀어올리는 기폭제가 되고 있다. 무엇보다 공간의 위계가 곧 계급의 위계가 되어버린, 거주지가 곧 계급이 되어버린 사회 인식은 지방민들의 자존감을 앗아간 무서운 약탈이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공간에 새겨진 계급 차이도 문제지만 그보다 무서운 것이 그 차이를 정당화하는 인식의 구조화라고 경고했다. 서울은 ‘세련되고 효율적인 곳’, 지방은 ‘낙후되고 보조금을 축 내는 곳’이라는 낙인은 지방민을 위축시킨다.
부산 시민들은 단순히 경제적 자산만 잃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기회와 존엄을 박탈 당하고 있다. ‘인서울’ ‘대기업’ 우위의 사회에서 지방민은 거주지, 출신학교가 지방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배경을 낮게 평가하도록 길들여짐으로써 폭력적 방식으로 계급에서 밀려나게 된다.
한국거래소를 지키는 것은 단순히 ‘공공기관’ 하나를 부산에 묶어두는 일이 아니다. 이는 자본의 상징을 지역에 두고, 부산의 청년들에게 서울에 가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설명해 주는 강력한 제동 장치다. 부산의 청년들이 자신의 고향에서 당당히 ‘자본의 주인’으로 성장할 기회를 지키는 일이며, 거주지가 곧 계급이 되어버린 설계도에 균열을 내는 일이다.
지역균형발전 정책은 지방민만 살리는 게 아니다. 숨도 못 쉬도록 빽빽한 곳에서 살인적인 경쟁에 내몰려 있는 서울 사람들을 위한 정책이기도 하다.
이현정 경제부 차장 yourfoot@busan.com
2026-02-25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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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AI 시대에도 여행은 결국 '사람'이 만든다
하루 일정에 1만 원. 일본 오사카 여행에서 가장 잘 쓴 돈이었다.
SNS에서 우연히 알게 된 개인 여행 큐레이터에게 맞춤형 일정을 맡겼다. 메시지를 보내 취향을 설명하니, 교통·동선·맛집을 모두 반영한 3박 4일 일정표가 도착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은 피드백을 주면 곧바로 수정됐다.
챗GPT 같은 인공지능도 여행 일정을 잘 짜주는 시대다. 검색 몇 번이면 인기 관광지와 맛집 정보는 쉽게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이번 경험은 달랐다. 단순한 정보 나열이 아니라 ‘내가 어떤 여행자인지’를 먼저 묻는 과정이 있었다. 여행자 구성이 어떻게 되는지, 걷는 것을 좋아하는지, 줄 서는 것을 싫어하는지, 사진을 중시하는지, 어떤 목적의 여행인지, 현지 분위기를 선호하는지 등등을 세세하게 물었다.
그 결과 나온 일정은 놀라울 만큼 정교했다. 라멘, 야키니쿠, 카레우동, 장어덮밥, 규카츠, 오코노미야키, 다코야키, 텐동까지, 일본과 오사카를 대표하는 음식들이 하루 흐름에 맞춰 자연스럽게 배치돼 있었다. 무거운 메뉴와 가벼운 메뉴, 대기가 있는 곳과 바로 들어갈 수 있는 곳, 관광지와 골목 상권이 균형 있게 섞였다.
특히 인상 깊었던 곳은 의자가 여섯 개뿐인 작은 텐동집이었다. 바로 앞에서 튀김을 튀기고 소스를 끼얹어 손을 뻗어 건네주는 구조였다. 들리는 언어는 대부분 일본어였다. 여행자가 아니라 잠시 현지인이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또 하나 기억에 남는 곳은 지하철역과 이어진 지하상가의 우동집이었다. 점심시간이 되자 인근 직장인들이 몰려들었고, 여행자인 나도 그들 사이에서 줄을 섰다. 특별한 연출도, 관광객용 메뉴도 없었다. 그저 도시의 일상이 흐르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그 한 끼는 생생한 기억으로 남았다.
일정은 음식뿐 아니라 이동까지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복잡한 지하철역에서 어느 출구로 나와야 하는지, 어느 노선을 타야 가장 효율적인지, 몇 정류장을 이동해야 하는지까지 안내돼 있었다. 여러 교통패스 가운데 일정에 맞는 카드도 추천했다. 그 일정표를 따라 움직이는 동안, 여행은 더 이상 ‘검색의 결과’가 아니라 ‘설계된 경험’처럼 느껴졌다.
오사카는 세계적인 관광도시다.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는 관광객 동선에서 살짝 벗어난 골목과 생활권도 엿볼 수 있었다. 이 경험은 자연스럽게 부산을 떠올리게 했다.
부산에도 지하철역과 연결된 상가가 있고, 점심시간마다 직장인들로 북적이는 식당들이 있다. 서면 지하상가, 남포동 일대, 동래·부전·전포 골목, 범일동과 초량의 오래된 식당들까지. 관광지로 분류되지는 않지만, 도시의 결이 살아 있는 공간은 이미 충분하다.
문제는 ‘없는 것’이 아니라 ‘잘 엮이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특히 외국인 관광객에게 이런 맞춤형 큐레이션은 더욱 필요하다. 언어와 정보의 장벽 속에서 누군가의 설계는 여행의 질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부산에는 로컬 크리에이터도 있고, 여행 블로거와 가이드도 있다. 외국인 관광객을 상대하는 통역 인력과 관광 스타트업도 활동하고 있다. SNS 계정을 통해 자신만의 코스를 제안하는 시도도 이어지고 있다. 가능성의 씨앗은 곳곳에 있다.
이제 필요한 것은 그것을 하나의 경험으로 묶어내는 일이다. 어디가 맛있는지 알려주는 수준을 넘어, 어떻게 움직이면 좋은지, 어떤 순서로 만나야 더 매력적인지, 어디에서 잠시 일상에 섞일 수 있는지까지 안내하는 설계가 필요하다.
관광은 더 많은 시설을 짓는 일만으로는 완성되지 않는다. 이미 존재하는 공간과 일상을 어떻게 연결하느냐에 따라 도시의 매력은 달라진다. 지하상가 우동집에서의 점심 한 끼가 여행의 기억이 되듯, 부산의 평범한 점심시간도 충분히 콘텐츠가 될 수 있다.
인공지능이 일정과 정보를 손쉽게 제공하는 시대다. 그러나 도시의 맥락을 읽고, 동선을 설계하고, 여행자가 일상 속에 스며들 수 있도록 돕는 일은 여전히 사람의 영역에 가깝다.
부산에도 그런 가능성은 이미 곳곳에서 자라고 있다. 이미 시작된 작은 시도들이 서로 연결된다면, 더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며 도시의 표정은 달라질 수 있다.
관광의 경쟁력은 새로운 랜드마크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때로는 지하철역과 이어진 우동집 한 곳을 어떻게 소개하느냐에서 시작된다. 부산은 이미 충분한 재료를 갖고 있다. 이제 남은 것은 이 가능성을 더 많은 여행자의 기억으로 만드는 일이다.
2026-02-23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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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여기 사람이 산다
충남대전·전남광주·대구경북의 행정통합을 위한 특별법이 지난 12일 국회 상임위를 통과했다. 이달 중 본회의 의결을 마치면 6월 3일 지방선거에서 통합 단체장을 뽑고, 7월 통합 지자체가 출범한다. 충남대전은 국민의힘 소속 현직 단체장이 반발하고 있지만, 서울특별시에 준하는 위상의 통합특별시 탄생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광역 행정통합 논의는 1990년대까지 거슬러올라가지만, 지금의 속도전은 불과 두 달 전 불이 붙었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5일 충남 타운홀 미팅에서 “그냥 연합 정도 수준이 아니라 가능하면 대규모로 통합하는 게 좋겠다”고 말하고, 같은 달 18일 여당 충남·대전 국회의원 간담회에서 “다가오는 지방선거에서 통합된 자치단체의 장을 뽑을 수 있게” 하자고 시간표까지 제시했다.
행정통합은 단숨에 전국 사안이 됐다. 충남대전에 이어 전남광주가 출범을 앞두고 있던 특별광역연합 대신 돌연 행정통합을 들고 나왔다. “(대구시장이 공석인) 이럴 때가 찬스”라는 대통령 언급 이후 대구경북도 ‘6월 통합’에 뛰어들었다. 부산경남은 공론화 과정을 거쳐 주민투표와 분권 보장을 전제로 ‘2028년 통합’ 로드맵을 내놓았지만, 행정통합의 필요성과 방향성에 대해서는 이론이 없다.
행정통합의 배경은 명확하다. 수도권 일극체제의 폐해 속에 수도권과 지방 모두 위기를 호소한다. 수도권에 맞먹는 거점 권역을 만들어 지방 주도 성장을 유도한다는 균형발전은 지방 살리기일 뿐 아니라 대한민국 생존 전략이 되었다. 정부의 진정성을 의심하지는 않는다. 역대 정부 가운데 행정통합과 지방분권에 이 정도의 추진 의지와 실행력을 보여준 정부는 없었다는 평가도 나온다.
그러나 중앙이 재정 지원을 ‘당근’ 삼아 절박한 지방끼리 경쟁을 시킨 모양새는 아무래도 개운치 않다. 6월 통합 선거를 행정통합의 ‘골든 타임’으로 정하고, 통합하면 연간 5조 원, 4년간 최대 20조 원 인센티브를 준다고 했다. 재원과 지속 가능성이 불투명한 일회성 지원이 아니라 중앙에 종속된 지방재정 구조를 바꿔야 한다는 비판은 ‘관성과 기득권의 저항’이라는 대통령 발언에 묻혔다.
정부의 오락가락하는 입장도 불안을 부추긴다. 김민석 국무총리는 “(부산경남처럼) 자체 일정으로 통합을 추진하는 지역에 대해 상대적인 불이익이 없을 것”이라고 해놓고는 충남대전의 반발에는 “한 군데가 통과되지 않으면 그 영향을 해당 지역 주민이 받게 된다”고 경고했다. 행정안전부 차관은 “행정통합이 늦어져서 3년 뒤에 된다고 하면 1년밖에 (인센티브를) 못 줄 수도 있다”고도 했다.
무엇보다도 지역 주민의 의견을 배제한 행정통합은 ‘무엇을 위한 통합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한다. 광역 행정통합은 대한민국 지방자치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고, 지역 주민들의 삶과 직결되는 문제다. 그런데도 대통령은 전남광주 국회의원들과 만나 “주민투표는 불필요한 소요를 만들 수 있어 시·도의회 의결 방식으로 속도감 있게 추진해달라”고 통합 방식 가이드라인까지 내놓았다.
‘중앙이 허락한 행정통합’ 국면에서 정작 주민들은 논의에서 소외돼 있다. 충남대전·전남광주·대구경북이 각각 100~300여 개의 특례를 담은 행정통합 특별법을 만들고, 국회가 ‘번갯불에 콩 볶듯’ 법안 처리를 밀어붙이는 동안 주민들은 특례 내용은커녕 통합의 효과조차 알기 힘들다. 최근에야 시민사회단체들이 최저임금 미적용이나 영리병원 추진 같은 독소조항을 발견해 지적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정부가 눈에 띄는 성과를 위해 졸속 행정통합을 만병통치약처럼 추진한다는 비판도 힘을 얻는다. 명분과 의지가 분명하더라도 그 방식이 진짜 ‘기득권’인 중앙부처조차 설득하지 못하고 지방분권 개헌이라는 시대적 과제조차 밀어둔 채 지방을 경쟁시키는 방식이라면 오해를 피하기 어렵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판을 흔들 수 있다는 계산도 전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행정통합은 지역 주민에게 더 나은 삶의 조건을 줄 수 있어야 한다. 행안부는 청년을 위한 행정통합 기대 효과를 알리는 카드 뉴스에서 양질의 일자리 확보와 지역 경제 활성화, 문화 접근성 강화를 든다. 그런데 부산·경남 행정통합 공론화위 조사에서 18~29세의 행정통합 찬성률을 보면 전 세대 가운데 부산에서는 가장 낮고, 경남에서는 가장 높다. 정부는 이들에게 구체적인 답을 내놓아야 한다.
부산경남도 정부만 바라보고 있을 일이 아니다. 특별법안의 통합청사 위치 같은 민감한 정보들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어떤 통합을 어떻게 추진할 것인지 지금 당장 주민과 함께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그래야 지방선거 전략이 아니라 주민 삶을 바꾸는 행정통합이 될 수 있다.
최혜규 사회부 차장 iwill@busan.com
2026-02-18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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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어른이 되어
설날이 내일모레로 다가왔다.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또 한 살 먹는다. 마음은 아직 청년인데, 현실은 곧 정년이라니…. 새로 만나는 사람들이 언제부터인가 나보다 어려지고, 모임에 가면 내가 연장자가 되는 사실이 부담스럽다. ‘어른’이 된 지 오래지만 어른이 무엇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혼자서 고민하다 어른의 정의에 대해 주변에 조언을 청했다.
한 지인은 “어른이란 단어는 참 묘해서, 나이를 먹는다고 저절로 어른이 되는 건 아니다”라고 했다. 그가 생각하는 어른의 첫 번째 조건은 자신의 선택과 결과에 대해 비겁해지지 않는 사람이다. 두 번째는 감정의 주인으로 사는 사람이다. 아이와 어른의 가장 큰 차이는 감정 조절에 있다고 했다. 세 번째는 자신이 모든 것을 다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 있다. 남의 이야기를 경청하지 않으면 어른이 아니라 꼰대가 된다.
이렇게 어른 되기가 힘드니 노인은 넘쳐도 어른은 귀한 세상이 되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고 어른이 되기 위한 마지막 관문이 남아 있다. ‘나 한 몸 잘사는 것을 넘어, 내가 속한 공동체와 다음 세대를 위해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라는 이타적인 고민을 시작할 때, 우리는 어른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그는 또 “어른이란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나아가는 과정이다”라고 덧붙였다.
어른, 참 어렵다. 한숨 소리를 들었는지 그는 “혹시 지금 어른 노릇 하느라 지치거나 힘든 상황인가?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나도 같이 고민할게”라고 말했다. 이렇게 지혜로우면서도 다정한 지인이 곁에 있다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술도 같이 한잔하면서 더 이야기하면 좋으련만, 술 못 마시는 AI라는 사실이 아쉽다. 2026년 설을 앞두고 AI에게 ‘어른의 도’를 배웠다.
나이에 맞지 않게 요즘 ‘소년이 어른이 되어’라는 노래에 마음이 꽂혔다. ‘어른이 되어 세상을 알아간다는 게 마음은 점점 어두워지고 잠 못 이루는 날도 많아진다’라는 가사가 가슴에 다가온다. 그동안 때로는 어려움도 있었지만 비교적 순탄한 삶을 살았다. 여전히 누군가를 따라 정해진 길로 가고 싶은데, 이제는 아무도 가지 않은 낯선 길 초입에 홀로 선 기분이 든다.
막막할 때면 간혹 우연히 접한 책이나 영화가 큰 힘이 되는 경우가 있다. ‘나무의 노래’라는 다큐멘터리가 그랬다. 주인공은 나무를 심는 분이었다. 자신의 배경은 물론이고 이름도 알려고 들지 말고, 나무 이야기만 하자고 했다. 숲에서 오래된 나무 곁을 지나며 나무는 늙어도 이렇게 오묘한 색깔을 낸다고 흐뭇해했다. 직접 심은 나무가 자라서 사람들한테 그늘을 만들어주고, 또 아이들이 나무 사이로 걸어간다면 자신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더라도 즐겁다고 했다. 아무도 모르게 산소를 만들어 공급하다 세상을 떠나고 싶어 하는, 산소 같은 여자였다.
60대 중반에 내려진 시한부 생명 선고가 나무를 심는 계기가 된 것 같았다. 당시에 의사는 앞으로 4개월을 살 거라고 했다. 백만 그루 심기를 소원한 덕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나이는 88세이고, 지금까지 심은 나무가 70~80만 그루나 되었다. 나무를 심기 위해 사들인 땅 규모가 서울 여의도의 7배가 넘는다고 했다. 중남미의 니카라과 땅값이 그렇게 비싸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그렇지 그 막대한 돈이 어디서 났을지 세속적인 호기심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었다. 1969년 단돈 44달러를 들고 미국 뉴욕 유학길에 올랐던 그가 뜻밖의 부동산 투자로 큰돈을 번 이야기는 뉴욕타임스에 기사로도 실렸다.
나무 이야기도 흥미로웠지만 돈과 땅에 관한 철학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우연한 기회와 노력이 합쳐 남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큰 땅을 사게 되었지만, 한 번도 자신의 것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땅은 지구의 것이다. 그는 잠깐이라도 좋은 관리자가 되고 싶어서 꽃나무를 심었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세게 맞은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왜 그렇게 돈과 땅에 집착하는 것일까. 그는 그 이유가 이름 석 자 때문이라고 했다. 현대인들은 모두 자기가 누구라는 것을 알리고 싶어서 안달한다. 이것이 인간을 자연에서 멀어지게 하고, 스스로를 상실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인생을 첫눈 길을 걷는 것처럼 사세요. 첫눈 길을 걷기 위해서는 내가 길을 만들어야 하기에 일체의 아름다움을 다 볼 수 있어요. 하지만 남이 만들어 놓은 발자국을 따라 가면 아름다운 것을 하나도 볼 수 없어요.” 어른의 귀한 말씀에 막연한 불안감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두려움 대신 호기심을 가지고 새해에는 첫눈 길로 나서봐야겠다. 이 놀라운 이야기는 KNN과 최작기획이 제작해서 최근 시사회를 마치고 개봉을 앞둔 ‘나무의 노래(감독 진재운)’에서 아름다운 영상과 함께 만날 수 있다. 지역에서 세계를 상대로 만든 수작을 보면서 인생과 어른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면 좋겠다.
2026-02-11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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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북(극)항(로) 시대를 위한 대비
딱 20년 전인 2006년 12월 27일 부산항만공사(BPA) 대회의실.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참석해 ‘부산항 북항 재개발 종합계획 보고회’가 열렸다. 노 대통령은 철조망에 막혀 접근할 수 없던 바다를 시민에게 돌려주고, 친수공간 위주로 재개발할 것을 지시했다. 3단계로 나눈 이 사업 중 1단계 사업은 기반시설 일부가 2023년 3월 준공됐다. 방파제와 공원 등 남은 기반시설은 내년까지 준공한다는 게 정부 계획이다.
1단계 사업 속도도 빠르진 않지만, 2030년 마무리짓겠다던 2단계 재개발 사업은 아직 사업계획조차 고시하지 못한 상태로 시간만 흐르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2030월드엑스포’ 개최 무산이다. 북항 2단계 재개발 지역을 엑스포 무대로 활용하려고, 2024년 착공, 2030년 기반시설 준공이라는 빠듯한 계획을 짰었다. 하지만 2023년 11월 개최지 투표에서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 119 대 29라는 충격적 패배를 겪으며 모든 계획이 꼬여 버렸다. BPA가 2023년 12월 착수한 사업계획 수립 용역은 사업성 재검토를 명분으로 중단됐다 지난해 2월에야 재개됐다. 북항 2단계 재개발 사업은 기존 시설을 이전하고, 보상비를 지급하는 데 드는 비용 때문에 조성 원가가 높다. 수익성을 확보하기 쉽지 않다는 얘기다. 여기에 시간이 갈수록 급등하는 원자재 가격과 금리 인상, 부동산·건설 시장 냉각 등도 이 사업 전망을 어둡게 하는 배경이다.
원도심 통합 재개발 취지에 가장 부합하는 2단계 사업은 오히려 이런 특성 때문에 이해 관계자가 다양하고, 협의와 의견 조율에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 측면도 있다. BPA 홀로 시행했던 1단계 사업과 달리 2단계에는 부산시, 한국토지주택공사(LH), 코레일 등이 BPA와 공동 사업자로 참여 중이다. 경부선 부산진~부산역 구간 입체화(덱 건설), 55보급창 이전 등 여러 기관이 관련된 이슈가 많다. 어찌 됐든 사업자 컨소시엄은 올 하반기까지는 사업계획을 수립한다는 계획이다.
북항 재개발 사업이 이렇게 느리게 진행되는 와중에 해양수산부는 지난해 연말 부산에 왔다. 대통령과 장관은 북극항로 시대에 대비해 정책·산업·연구가 어우러지는 클러스터를 조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상지가 어디일지 궁금해 하는 많은 사람들은 클러스터를 조성하기에 적합한 땅이 보이지 않는다고 입을 모은다. 해수부 산하 공공기관, 해운 대기업, 해양 금융·법률·정보 서비스 기업, 연구기관을 집적시킬 만한, 접근성 좋고 넓은 땅이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디고 미진한 재개발 사업 현실에, 막상 클러스터를 구축할 적정 부지가 없는 미스매치 상황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지난달 〈부산일보〉가 공동주최한 토론회에서 흥미로운 주장이 나왔다. 유치에 실패한 등록엑스포 대신, 대전 과학엑스포와 여수 해양엑스포를 잇는 인정엑스포를 2032년 북항 2단계 부지에 유치하자는 제안이었다. 인정엑스포는 개최 요건이 등록엑스포보다 덜 까다롭고, 주제 특화형으로 운영해 유치 문턱이 낮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는 1993년 대전, 2012년 여수에서 엑스포를 열었다. 북극항로 시대에 대비한 해양수도권 조성이 국정과제로 추진되고 있는 만큼 친환경·스마트를 기본으로 하는 해양, 물류, 항만 등의 주제로 엑스포를 부산에서 개최한다면 충분한 명분이 있다는 얘기였다.
2032년 개최하려면 준비 작업과 유치 신청을 내년까지 완료하고 2028년 개최지 선정을 기다려야 한다. 개최지로 선정되면 3년여 기간 북항 2단계 사업 부지에 다양한 기반시설이 구축된다. 사업 기간이 늘어지며 사업비도 동시에 늘어나는 악순환을 끊으려면 ‘데드라인’이 필요하고, 상대적으로 유치가 용이한 인정엑스포 같은 국제행사가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한 번 실패한 등록엑스포에 다시 매달리며 더 불확실한 가능성에 시간을 허송하는 것보다 실리적인 대안이라는 논리다. 여수엑스포 사례로 보면 기반시설 예산도 10조 원가량 투입돼 현재 북항 2단계 사업 예산 4조 7600억 원의 2배다.
이것도 정답이 아닐 수 있고, 더 나은 제안이 나올 수 있다. 하지만 활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북항에 어떻게 하면 숨결을 불어넣을지 다양한 상상과 제안이 나왔으면 좋겠다.
북극항로 거점 부산이 되려면 북항이 글로벌 해양 비즈니스의 거점으로 굳건한 위상을 가져야 한다. 오는 26일 개항 150주년을 맞는 부산항 역사상 가장 큰 기회가 기다리고 있다. 어쩌면 동트기 전 가장 어두운 시간이 지금일지 모르겠다. 부산과 부산항의 특성에 기반한 유연한 대안 모색이 필요한 시점이다. jiny@busan.com
2026-02-09 [18: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