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195km 막막해…
1km부터 달리다 보면 만만해
[직장인 마라톤 풀코스 도전하기]
‘42.195km를 뛸 수 있을까.’ 모처럼 퇴근길에 러닝화 끈을 묶다가 걱정이 앞섰다. 괜한 걱정부터 하지 말자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새삼 러닝화 끈을 묶는 손끝에 힘을 더한다. 퇴근 후 가끔 5km, 날씨 좋은 주말 이따금 10km. 지난 2년을 드물게 달린 직장인에게 풀코스 마라톤은 다른 세상이다. 아예 달리지도 않는 직장인이 더 많다며 자신을 위로하고는 겨우 뜀박질에 나섰다.최근 소셜미디어(SNS)에는 직장인 풀코스 완주 인증 글이 홍수를 이룬다. 같은 직장인이지만 ‘넘사벽(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 기록 앞에 오늘도 의문의 1패를 기록했다.질 수 없다는 마음에 소셜미디어를 탐독했다. 폭발적인 러닝 인기에 각종 훈련법을 제시하는 계정은 넘쳐나지만, 뭔가 허전한 인상은 지울 수가 없다. ‘직장인인 내가, 지금 일상을 유지하면서, 마라톤에 도전할 수 있을까.’ 현실적인 질문에 명쾌하게 대답하는 계정과 콘텐츠는 찾을 수가 없다. 전문 서적으로 눈을 돌리자니 복잡한 훈련 이론에 선뜻 엄두가 나지 않는다. 엘리트 체육인도 아니고 겨우 직장인인데….우연히 발견한 한 권의 책에 눈길이 갔다. 30여 년을 크고 작은 기업에서 직장인으로 일하면서도 꾸준히 달리며 풀코스 완주를 이어왔다는 저자 소개를 읽으며 점점 동공이 커졌다. 그래, 바로 이거다.■달리기, 어떻게 시작할까우선은 ‘현실 진단’부터다. 책 <963 직장인 마라톤> 저자 곽원철 씨는 달리기가 처음인 직장인에게 먼저 ‘1km 달리기’를 권한다. 장소는 가까운 운동장. 보통 운동장은 한 바퀴 400m다. 두 바퀴 반을 달려 시간은 얼마나 걸리는지 측정한다. 운동장이 없다면 산책로를 달려도 무방하다. 일상에서 쉽게 달릴 주로를 확보하자. 다른 이들 시선이 신경 쓰인다면 헬스장 트레드밀(운동 기구)을 활용해도 좋다.중요한 것은 기록이다. 매일이 아니라도, 일주일 한두 번이라도 반복해 기록하기를 권한다. 숨이 살짝 가쁜 수준으로 속도를 유지해 1km를 완주하고, 어제와 오늘의 기록을 비교해 보자.조금씩 성장해 1km에 적응했다면 거리를 조금씩 늘린다. 남성은 2.5~3.5km, 여성은 2~2.5km 거리를 25~30분 정도 달려보자. 다음 목표는 5km 대회 출전이다. 곽원철 씨는 5km를 “일상을 유지하며 달리기의 즐거움과 성취를 체감할 수 있는 최적의 단위”라고 소개한다.당신의 달리기는 5km를 지나 언젠가는 10km, 하프 마라톤(21.0975km), 풀코스 마라톤으로 이어질 것이다. 어쨌든 시작은 한 걸음부터, 1km로 달리기를 시작하자.■인생도, 달리기도 ‘누적치’“반면 마라톤은 폭발적인 힘이나 순간의 집중보다, 누적된 동작의 총합이 중요하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수만 번, 수십만 번 반복되고 그 과정이 최소 수개월간 쌓여서 비로소 42.195km라는 결과물이 완성된다.”(<963 직장인 마라톤> 53쪽 중)곽원철 씨는 달리기 초보가 풀코스 마라톤을 완주하려면 최소 9개월, 10km 이상 달린 경험이 있다면 6개월, 숙련된 러너라도 최소 3개월의 누적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특히 9-6-3 구조는 직장인 평균 주기에 알맞다. 기업 실적을 평가하고 전략을 수정하는 최소 단위가 분기니까, 3개월은 직장인에게 익숙한 기간 단위라고 곽원철 씨는 설명한다. 3개월은 사계절이 뚜렷한 한국의 계절 주기와도 어울린다.중요한 것은 달리기 초보 직장인이 풀코스 마라톤을 목표로 9개월을 달릴 때 반드시 270일간 연속해 달려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는 점이다. 3개월을 하나의 주기로, 한 주기의 성공 경험을 세 번 반복한다고 가정하자.첫 3개월은 5km나 10km 달리기를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적응하는 과정, 다음 3개월은 달리는 거리와 시간을 늘리는 훈련을 거쳐 몸이 지방을 주 연료로 쓰도록 전환하는 단계다. 남은 3개월은? 마지막 실전 점검 기간이다.■완주 목표는 긴 여정의 이정표<부산일보>와 전화 대담에서 곽원철 씨는 “밥 먹고 양치질을 하듯 달릴 수 있도록 ‘정체성’을 몸에 새겨야 오래 달릴 수 있다”고 조언했다. 책에 쓰인 것처럼 “꾸준한 이들은 의지의 변덕스러움을 알기에, 의지 없이도 몸이 저절로 움직이도록 루틴이라는 ‘장치’를 세팅하는 데 집중한다”는 것이다.습관은 신호, 반복 행동, 보상 3단계로 확보한다. 보상은 특히 즉각적이어야 한다. 매일 달린다는 행동에 보상을 연결하되, 보상은 잘게 쪼개야 한다는 것이 곽원철 씨 지론이다. 거창한 목표보다 작은 성취를 일상에서 자주 느끼는 것이 지속의 비결인 셈이다. 가령 전날 꺼내 둔 운동복과 조깅화는 신호, 새벽 달리기는 반복 행동, 시원한 샤워와 성취감은 보상이다.습관과 적절한 보상 끝에는 ‘완주’가 기다린다. 그런데 곽원철 씨는 완주 개념을 대회 당일에 한정하지 않았다. 산업공학을 전공한 곽원철 씨는 “반복을 거쳐 조금씩 나아지는 우상향이 산업공학 기본 개념이라고 생각한다”며 “42.195km를 달리는 행위도 누적치가 필요한데, 그 과정 자체가 곧 완주”라고 설명했다. 사실 잘 준비했다면 당일 결과는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다. 처음 시작은 완주가 목표일지라도 지나면 그저 과정에 불과한 것도 사실이다. 더 긴 여정을 밟기 전 이정표일 테니까.■잭 다니엘스부터 무라카미 하루키까지여전히 달리기가 고민된다면, 책에서 영감과 동력을 얻는 것은 어떨까. 곽원철 씨는 크게 두 가지 분류에서 각 한 권씩 책을 추천했다.러닝이나 운동이 직업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저자가 자신의 경험을 나누는 경우가 한 부류인데,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책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하루키가 마라톤을 중심으로 문학과 삶을 설명하는 회고록으로, 일 년에 한 번은 풀코스를 달린다는 초로의 소설가로부터 어떤 식으로든 영향받을 것이다.다른 부류는 달리기 전문가가 이론과 실천적 지침을 알려주는 책으로, 잭 다니엘스 박사가 쓴 <다니엘스의 러닝 포뮬러>다. 곽원철 씨에 따르면 지난 수십 년 동안 전 세계 러너의 명불허전 바이블로 자리매김했다고. 대부분 달리기 이론은 이 책을 인용했다고 봐도 무방하다고 한다. 여기에 <963 직장인 마라톤>까지.준비를 마쳤다면 이제 도전할 시간이다. 달리고 나서 후회할 일은 없을 것이다. 대신 중요한 것은 ‘누적치’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척추 감압술 우선,
최소 상처로 정상조직 보존”
허리 디스크라 불리는 추간판탈출증과 노년층에서 흔한 척추관협착증은 대표적인 척추 질환이다. 허리 통증이 심해지면 일상생활이 어려워지지만 대개는 약물이나 물리치료 등 비수술적 치료로 거의 대부분 해결된다.실제로 수술이 필요한 경우는 요통 환자의 5% 미만이다. 6주 이상의 적극적인 보존적 치료에도 불구하고 심한 신경압박으로 사지마비와 대소변 장애 증상이 나타날 경우에 최후의 수단으로 수술을 검토해 볼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수술을 받은 후에도 여전히 허리 통증이 계속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물론 원하던 대로 허리 통증이 말끔히 사라진 환자들도 있지만, 수술을 했음에도 통증을 안고 사는 환자들도 생긴다. 수술 주변 부위가 아픈 인접마디 증후군이나 척추수술 실패증후군 등의 후유증을 줄이려면 정확한 진단이 중요하다.■인접마디 증후군과 수술 실패증후군허리 수술로 통증이 사라졌다고 생각했다가 수 년이 지난후에 다시 아프다는 환자가 더러 있다. 핀으로 고정하는 척추 유합술을 받은 후에 발생하는 경우가 상대적으로 많다. 수술로 고정된 마디 주변의 척추가 변성되거나 협착을 일으키는 ‘인접마디 증후군’ 때문이다.수술로 척추의 마디를 고정시켜 움직이지 못하게 되면 대신에 그 위아래 마디가 과도하게 움직이게 된다. 인접마디에 생기는 퇴행은 일상생활 중에 허리를 반복적으로 숙이는 행위를 하면서 나타난다. 수술된 부위는 움직임이 없는데 위아래쪽 마디는 굽히는 동작이 잦아지면서 퇴행 변화가 가속된다.명지오션척병원 박도영 병원장은 “이런 후유증을 줄이려면 수술법을 선택하기 전에 환자에게 허리가 안좋아지는 이유, 즉 허리를 전방으로 숙이는 자세를 최대한 피할 것을 충분히 교육한 후에 수술을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인접마디 증후군은 척추 유합술(후방유합술, 사측방유합술, 내시경 유합술)의 방식과 종류에 상관없이 발생한다. 논문에 따르면 증상이 없이 인접마디에 영상학적 퇴행만 보이는 경우가 30%, 증상이 동반되는 경우가 10% 정도로 보고되고 있다. 이중 5% 정도는 재수술이 필요하다.척추수술을 받은 후에 불편함과 통증이 지속되거나, 증상이 개선되지 않거나 더 악화됐다고 호소하는 경우를 척추수술 실패증후군이라고 한다. 인접마디 증후군도 크게는 척추수술 실패증후군에 속한다고 보면 된다. 진단이 잘못돼 엉뚱한 곳을 치료하거나 근본적인 치료를 하지 못할 때 생긴다.■유합술보다는 감압술이 우선유합술은 뼈의 정렬을 맞추기 위해 인공뼈를 넣고 핀으로 고정하는 치료법이다. 핀이나 나사못으로 척추를 단단히 고정하기 때문에 인접마디 증후군이 불가피하다고 할 수 있다.반면에 감압술은 좁아진 신경 통로를 넓히고 눌린 신경을 펴주어 통증을 줄이는 치료법이다. 척추 마디를 고정하지 않아도 되므로 인접마디 퇴행이나 추가 협착의 위험이 없다. 특히 고령 환자의 경우 수술시간, 출혈, 나사고정의 문제를 고려하면 유합술을 피하는 것이 좋다. 최근의 국제 가이드라인과 임상현장에서는 불필요한 유합술을 줄이고 최소침습 감압술 위주로 트렌드가 바뀌고 있다.박 병원장은 “굳이 척추를 고정 안해도 되는 환자까지 유합술을 할 필요는 없다. 그래서 최근의 척추수술은 가능하면 유합술은 피하고 내시경을 이용한 감압술을 시행하는 것이 추세다. 최소침습 접근법으로 감압술을 진행하면 합병증을 줄이고 정상적 조직을 보존할 수가 있다”고 말했다.또 환자의 상태를 정확히 분석해서 꼭 필요한 부분만 감압술을 시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협착증 환자의 경우 뼈가 두꺼워진 골극이라던지, 황색인대가 두꺼워진 비후증, 오래된 디스크의 팽윤으로 인한 신경관 협착 등 각각의 경우에 맞는 원포인트 감압을 진행하면 정상조직을 보존하고 척추 불안정성도 해결된다.그렇지만 유합술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척추의 불안정성이 심한 경우가 그렇다. 척추전방전위증이나 심한 척추의 변형 또는 불안정성이 나타날 경우에는 유합술을 시행해야 한다.■수술 후유증을 줄이려면 어떻게수술 후에도 기대했던 증상이 충분히 개선되지 않아 통증이 남아 있거나 오히려 악화되는 이유는 아주 다양하다. 신경유착, 재발성 디스크, 수술 부위 불안정성, 신경 손상, 심리적 요인 등이다.이런 후유증을 최대한 줄이려면 수술 전에 현재의 환자상태를 정확히 진단하는 것이 중요하다. 수술 전에 환자의 증상과 MRI 영상이 정확히 일치하는지, 신경학적 이상은 없는지 등을 잘 따져 보아야 한다. 또 환자의 보행시 허리, 골반, 무릎의 각도와 허리를 숙일 때 벌어지는 뼈가 있는지도 꼼꼼히 살펴야 한다.충분한 재활과 생활습관의 교정도 중요하다. 인접마디 증후군이 발생하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인 허리를 숙이는 습관을 가능하면 줄이는 것이다. 나사못으로 고정된 척추 위쪽에 퇴행변화가 오면서 인접마디 증후군이 나타나는데 전방 굴곡이 가장 안좋은 자세다.박 병원장은 “허리를 숙이는 자세를 반복하면 통증이 재발하거나 척추 불안정성이 심해져 재수술을 해야 할 수도 있다. 그래서 한 대학병원의 재활의학과 교수는 땅에 떨어진 돈도 허리를 굽혀 줍지 말라고 강조하기도 한다. 골다공증 관리가 안되면 나사못 유지가 어려워질 수가 있다”고 지적했다.무심코 허리를 숙이는 자세 이외에도 땅바닥에 앉기, 소파에 기대기, 말랑한 침대에 오래 누워있기 등도 피해야 한다. 푹신한 침대에 오래 누워 있으며 허리를 숙이는 자세와 같은 효과가 생기기 때문이다.
[규슈를 후루룩]
듬뿍 파 토핑 속에 가족 생각이
부산에 돼지국밥이 있다면 일본 규슈에는 돈코츠라멘이 있다. 본보는 이달부터 본보 자매지 서일본신문 오가와 쇼헤이 기자의 ‘라멘 기자의 규슈 면(麵) 여행’ 연재 기사를 소개한다. 오가와 기자는 2014년부터 규슈의 라멘집 200여 곳을 소개해왔다. 2019년부터는 우동, 소바까지 소개하고 있다. 그의 저서 ‘라멘 기자, 규슈를 후루룩’의 제목처럼, 규슈의 면 이야기와 그에 얽힌 사람 이야기를 후루룩 삼켜보길 바란다.‘천지 뒤집기’는 농사에서 겉흙과 속흙을 뒤집는 작업을 말하지만, 라멘 세계에서도 쓰인다. 양배추와 숙주가 산더미처럼 쌓인 지로계 라멘에서 면(땅)을 야채(하늘) 위에 올리는 동작. 일본 후쿠오카 하카타구 ‘라멘 스미요시테이’도 천지 뒤집기가 필수다. 여기서 하늘은 가득한 파와 목이버섯이다.첫인상이 강렬하다. 대파로 뒤덮인 국물에 버섯이 무심히 뿌려져 있다. 분명 그 아래 있을 면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파를 추가하면 국물이 넘치지 않도록 더 섬세한 기술이 필요하다.“사실, 창업 당시엔 파가 적었어요.” 가게 주인 마쓰다 요스케(40) 씨는 이렇게 말했다. 야타이에서 라멘을 배운 큰아버지가 스미요시 신사 근처에서 1977년 개업했고, 아버지 토시오 씨도 함께했다. 처음에는 갓 썬 파를 적당히 올렸지만 양이 적다는 평을 듣곤 했다. “귀찮아져서 점점 늘어났대요”라며 요스케 씨는 웃었다. 목이버섯도 어느새 지금의 양이 됐다.버블 경기로 모든 게 상승세던 시절, 카운터 8석의 작은 가게는 손님으로 붐볐다. 어린 요스케 씨와 형 신고(44) 씨는 가게 2층에서 시간을 보냈다. 재개발로 1991년 지금 위치로 자리를 옮겼다.하늘이 있으면 땅도 있다. 새 가게는 순조로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큰아버지에게 빚이 있었고, 결국 가게 문을 닫았다. 아버지는 2000년 빚을 갚기 위해 라멘 가게를 다시 열었다. 6년 뒤 큰아버지가, 5년 뒤엔 형도 힘을 합쳤다.가족의 시간은 짧았다. 2016년 아버지는 영업 중 돌연 쓰러졌다. 향년 66세. 빚은 거의 다 갚은 때였다.가득 담긴 파가 눈길을 끌지만 국물도 일품이다. 큰 냄비 3개에 머리뼈와 껍데기를 끓인다. 한 입 머금으면 감칠맛이 제대로 스며있다. 뼈를 휘저어 부수는 작업은 하지 않는다. 감칠맛은 불 조절로 끌어낸다. 스프의 농도와 맛의 깊이를 혼동하지 말라는 아버지의 조언이 있었다.빚을 짊어진 채 가게를 다시 연 아버지는 어느 날 신고 씨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라멘이 체질이니 동생을 잘 부탁한다.” 천지를 뒤집는다. 그 한 그릇 안에 가족을 향한 마음이 담겨있다.후쿠오카시 하카타구 하카타에키미나미 5-5-1.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일요일 정기 휴무.
바람이 분다… 흔들리는 꽃들…
그 사이로 하늘이 스민다
지난해 이맘때 해인사 입승 스님과 거창 나들이를 한 적이 있다. 특별한 일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거창의 한 작은 토굴(암자)에서 수년간 수행했던 스님이 거창 나들이를 제안한 것이다. 스님을 모시고 거창으로 가면서 암자 이름을 물으니, 암자 대신 창포원으로 가자고 했다. “창포원? 정원 같은 곳 말씀이신가요?” 말로만 듣고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던 곳이었다. 스님의 토굴이 궁금했던 나로선 창포원행이 신나지 않았다. 하지만 스님과 함께 한 창포원 나들이는 1년이 지난 지금 다시 찾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꽃들의 향연, 활짝 핀 창포가 반기다거창 창포원은 경남 제1호 지방정원이다. 공원 면적 42만 4823㎡로 축구장 66배 크기의 대규모 수변생태공원이다. 이곳은 합천댐을 조성하면서 생겨난 수몰지역을 생태적으로 복원해 탄생된 공간이다. 2017년 12월 준공 때까지 6년여 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국가 하천인 황강의 수변 경관을 위해 습지와 정원이 어우러지는 생태공원이 만들어진 것이다. 현재 이곳은 친환경 생태공원으로 사계절 관람이 가능한 새로운 명소가 됐고, 올해 2월에는 문화체육관광부 주관하는 ‘제2기 로컬100(지역문화매력 100선)’에 선정되기도 했다.1년 만에 찾은 창포원은 지난해와 또다른 느낌이다. 꽃들이 많아졌다. 창포원 광장에 들어서니 맨드라미가 한가득이다. 광장 한편에 ‘제7회 거창 아라미아 꽃축제’를 열고 있다. 축제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아라미아 꽃축제는 거창 지역 화훼농가의 참여로 진행되는 축제다. 갖가지 꽃들 사이로 ‘한국 고유의 카네이션 육종의 중심지 거창’이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지리산과 덕유산, 가야산의 중심에 있는 거창이 지구 온난화 피해를 적게 받아 이곳에서 생산되는 카네이션이 색상과 수명 면에서 최고의 품질을 자랑한다는 것. 현재 거창을 대표하는 꽃이 카네이션이란 사실이 새롭다.창포원 정원에 들어서니 창포에 앞서 하얀 데이지가 반긴다. 순백한 데이지 앞에서 추억을 담는 사람들 너 나 할 것 없이 소년 소녀가 된다. 데이지를 뒤로 하니 이제는 작약 천지다. 끝없이 펼쳐진 검붉은 작약의 자태는 치명적이다. '창포는 어디있지?' 두리번거리니 노란색 창포가 수줍게 고개를 떨구고 있다. 그 옆엔 보라색의 꽃창포도 자신을 봐 달라며 얼굴을 붉힌다. 절정의 창포 속에 피어난 꽃들의 기세가 대단하다. 하얀색 천국에서 강렬한 붉은색. 이번엔 노란색과 보라색. 몇 걸음만 걸으면 딴 세상에 온 듯한 느낌이다. 이게 창포원의 매력이다.수변을 따라 이어진 산책로를 걸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꽃들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흔들린다. 마치 인생사 같다. 희노애락, 고진 풍파를 겪지만 사람들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겨내며 살아간다. 부는 바람에 자신을 맡기는 꽃들에서 삶을 배운다.꽃과 하늘이 겹친다. 걸음이 자연스레 느려진다. 수변을 따라 자연스레 이어지는 산책로가 아늑하다. 눈을 감고 손가락 사이로 지나는 바람을 느껴보고, 바람에 묻어오는 향기에 코를 실룩인다. 뒤에서 오는 자전거 소리에 눈을 떴다. 여기선 자전거 대여가 가능하다. 5~6인용도 있어 온가족이 이용할 수 있다. 손녀와 할머니까지 함께 탄 일가족 자전거가 사랑을 듬뿍 실은 채 지나간다. 정겹다.가족과 함께 흙길을 걷는 것도 또 다른 재미다. 이곳에선 해마다 이맘때면 맨발걷기 행사를 한다. 지난 16일 이곳에서 군민과 관광객 400여 명이 참가한 걷기 행사가 있었다. 올해로 3년째다. 창포원 맨발걷기 코스는 황톳길과 흙길의 촉감을 체험할 수 있는 힐링 공간이다. 맨발걷기 코스가 약 2.8km나 된다.얼마를 걸었을까. 잠시 쉴 겸 정자에 앉았다. 창포원 곳곳엔 관람객들이 쉴 수 있는 정자가 있다.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어 쉬기에 제격이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물소리, 바람소리, 벌레들의 소리까지 다양한 소리가 들린다. 염치 불구하고 팔배게를 하고 잠시 누웠더니 스르르 잠이 온다.얼굴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 잠을 깨운다. 꽃창포습지로 향하니 이번엔 장미 군락지다. 화려하고 왕성한 빨간 장미가 ‘꽃의 여왕’의 자태를 뽐내고 있다. 장미 정원 가운데 마련된 휴식 공간에서 한 노부부가 서로에게 사진을 찍어주는 모습이 정겹다. ‘그대 꽃처럼 피어나라’는 정원 내 글귀가 장미 정원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장미 정원을 뒤로 하고 산책로를 따라 걸으면 황강전망정원 전망대를 만날 수 있다. 시기를 놓쳐 전망대 주변을 분홍 물결로 물들이는 분홍꽃잔디를 볼 수는 없었지만, 이곳에 서면 굽이쳐 흐르는 황강에서부터 창포원 전역을 볼 수 있다.■관람에만 그치지 않는 주민 참여와 다양한 체험창포원은 보기 좋은 정원에만 그치지 않는다. 다양한 체험과 주민 참여가 가능하다. 꼬마정원이 대표적이다. 꼬마정원은 주민들이 직접 참여해 자신만의 정원을 만들어 전시하는 곳으로 현재 총 14개 팀 68명이 주민들이 참여했다. 가로 세로 2m 규모의 정원을 주민들이 직접 만들어 전시하는 것이다. 김용덕·정현옥 씨가 조성한 ‘외갓집 가는길’이 눈에 띄었다. 이 꼬마정원에는 장구채, 사계국화, 파라솔, 채송화, 풍년화 등 다양한 꽃들이 장식됐는데, 풀꽃 사이로 그리움이 흐르고, 걸음걸음마다 따듯한 마음이 번지는 길!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외갓집 가는길의 따뜻한 정서가 느껴졌다. 거창군이 오는 10월 2일부터 6일까지 2026 대한민국 거창 정원유치박람회를 이곳 창포원에서 개최한다고 하니 관심이 간다.창포원에는 열대식물도 감상할 수 있다. 창포원 광장에 조성된 열대식물원 덕분이다. 이곳은 온실 형태로 돼 있어 추운 겨울도 관람(무료) 가능하다. 열대식물원으로 들어가면 키 큰 야자수가 반긴다. 영화 ‘아바타’에서나 나올 법한 독특한 잎모양의 열대 식물이 즐비하다. 열대식물의 상징인 선인장도 구경할 수 있다. 국내에서 쉽게 접하지 못한 다양한 식물들이 많아 인기다. 특히 실내 폭포는 열대 식물과 어우러져 마치 밀림에 온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 아열대식물원, 지중해원, 선인장원, 난초원, 유실수원, 온대식물원 등으로 구분돼 있어 체계적인 관람을 할 수 있다.창포원 매표소 인근에 있는 치유센터도 추천한다. 이곳에서는 족욕과 차명상, 아로마테라피 등을 체험할 수 있다. 많은 곳으로 데려다 준 발을 위해 족욕을 하려 했는데 예약이 차서 발 호강은 다음으로 미뤘다.조금 시간이 지나면 이곳에선 연꽃과 수련이 절정을 이룬다. 가을에는 국화가 창포원을 지배하고, 겨울엔 억새와 갈대 풍경의 습지가 관람객들을 반긴다. 사계절 다양한 얼굴을 하고 있는 곳이 있다는 사실이 반갑고, 감사하다.글·사진=김진성 기자 paperk@busan.com
간판 대신 결을 세운 곳,
달맞이길 숨은 보석 ‘에케’
붉은 벽돌 건물이 유독 기억에 남았다. 석양 햇살이 긴 그림자를 내는 오후에 방문했더니 붉은 벽돌 위에서 나뭇가지 흔들리듯 일렁이는 빛 그림자를 보는 것만으로도 여유로웠다. 건물 하부는 붉은 벽돌, 상부는 콘크리트 재질로 지어졌고, 마당 한가운데는 작은 정원을 넣었다. 크지 않은 5층짜리 건물인데 가장 낮은 쪽과 가장 높은 쪽이 10m 정도 차이가 나는, 삼각형 땅을 묘하게 살려서 지은 건물이다. 오죽했으면 건물 이름도 독일어로 모퉁이를 뜻하는 ‘에케’(ECKE)로 정했을까.2024년 10월 문을 열었고, 이듬해 8월 부산시가 발표한 ‘2025 부산다운 건축상’에서 금상을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부산 달맞이길의 숨은 보석 ‘에케’(해운대구 달맞이길 117번길 219)를 찾아갔다. 복합상업문화공간 ‘에케’를 처음부터 끝까지 기획하고, 그 안에서 큐레이션 리빙 편집숍 ‘에크루’(ecrue)도 운영하는 이효진 대표를 만나, 일상과 취향을 공유하는 ‘에케’의 어제와 오늘 이야기를 들었다.■‘느슨한’ 공동체를 꿈꾸는 ‘에케’“‘에케’를 오픈하고 1년까지는 정신이 없었어요. 이제 사계절을 다 지내봤으니까 조금은 알 것 같아요. 저는 여길 한 번이라도 찾으셨던 분이, 언제든 다시 찾고 싶은 곳으로 기억되면 좋겠거든요. 어떤 여행지를 두세 번째 간다면 꼭 다시 들르고 싶은 곳이 있는 것처럼요. 온라인 홈페이지 개통과 판매를 주저하는 이유도, 일부러 찾아오고, 온 김에 그 옆 다른 공간에도 들렀다가 가면 좋겠다 싶어서입니다.”이 대표의 말 때문이었을까, ‘에케’는 단순히 상업 공간이 모인 집합체가 아니라, 이 대표와 오랜 인연을 이어 온 사람들이 ‘느슨한’ 공동체처럼 모여 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닌 게 아니라 이 대표는 ‘에케’를 구상할 때 “함께 나이 들고, 오래도록 기억을 쌓아가는 공동체”를 만들고 싶었단다.“건축을 처음 해 보는 거니까 엄청 우여곡절이 많았어요. 설계부터 오픈까지 4년이 걸렸어요. 처음에는 2층짜리 단층 상가 건물을 생각했는데, ‘나도 함께하고 싶다’는 지인들이 하나둘 생기면서 갑자기 지하도 파게 되고, ‘스테이’까지 들어오면서 복합문화공간으로 점점 규모가 커졌어요. 다양한 브랜드를 한 건물에 담아내려면 전체적인 방향 정리도 필요했어요. 저는 이 안에서 먹고, 자고, 보고, 쇼핑하고, 느낄 수 있는, 오감을 만족시키는 곳으로 만들고 싶었어요. 이 모든 것이 한 공간에서 일어나면 시너지도 있을 것 같거든요.”■‘에케’에서 만날 수 있는 브랜드현재 ‘에케’에 입점한 브랜드는 11개. 작게는 여섯 평, 큰 곳은 마흔 평 규모다. A호는 ‘치즈치즈치즈’ 3호점 브런치 카페, 그 옆 B호는 이곳을 설계한 라라호호건축사사무소, C호는 공예 작품과 빈티지 오브제를 다루는 ‘에크루’, D호는 한국인 아내와 일본인 남편 부부가 운영하는 예약제 일식당 ‘오라 스키’이다. 중정을 사이에 두고 E호는 다양한 전시와 팝업을 여는 ‘에임.히어’, F호는 1인 베이크 숍 ‘사이에 베이크’, G호는 아트워크 숍 ‘마니 델 갸또’가 이어진다.층을 달리하면 H호는 미쉐린가이드 그린 스타와 원 스타의 예약제 파인다이닝 ‘피오또’, I호는 일본 세라믹 브랜드 아리타재팬의 한국 공식 판매처 ‘1616 아리타재팬’, J호는 소파 가구의 라이프스타일 서비스를 제공하는 ‘펠리토’, 그리고 K호는 빈티지 가구와 하루를 온전히 경험할 수 있는 스테이 ‘아파트먼트풀 포룸스’이다. 스테이의 경우, 4개의 방마다 콘셉트를 달리하고, 덴마크, 독일, 프랑스 등 나라별로 다른 빈티지 제품을 만날 수 있다. 일종의 ‘경험’을 파는 셈이다. 간간이 ‘에크루’나 ‘1616 아리타재팬’에서 파는 제품도 놓여 있다.“‘에케’라는 공간의 분위기를 크게 해치지 않는, 결이 맞는 분들이 함께하고 있어요. 사실 월세를 잘 내겠다는 병원 입주 요청도 있었지만, 우리가 그렸던 그림은 아니어서 거절했어요. 예를 들면, H호에 들어온 파인다이닝 ‘피오또’는 직접 운영하는 농장의 채소와 지역 재료를 활용한 코스를 구성하는, 자기만의 철학을 가진 곳이죠. G호의 ‘마니 델 갸또’는 고양이의 손이라는 뜻인데, 이 브랜드를 만든 분이 진짜 손재주가 좋아요. 감각적이고 위트 있는 소품을 참 잘 만들어요.”■아늑하고 힙한, 공간이 주는 힘H와 G, 무슨 암호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공간을 나타내는 호수 표기이다. 그러고 보니 건물 외부, 눈에 보이는 사인물도 콘크리트 담벼락에 써 놓은 ‘ECKE’라는 로마자 알파벳 네 글자가 전부이다.“사실 간판을 크게 하면 인식은 쉬운데, 우리가 생각하는 ‘결’과는 다른 방향이어서 최대한 자제했어요. 사인이 없더라도 모일 수 있는 아이덴티티를 만드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으니까요.” ‘에케’를 설계한 B호 입주자 라라호호건축사사무소 조호제 건축가의 말이다. 그는 “공간 건축이지만 지역적인 특성과 아름다움에 대한 고민, 그리고 기존에 있던 주변 사람들과 조화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전했다.‘에케’가 부산다운 건축상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입체적인 도시경관과 자연 지형을 존중한 설계”가 높은 평가를 받았다. 지하 1층부터 지상 2층까지 각각의 층이 도로와 직접 연결돼 다양한 방향에서 자연스럽게 진입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특히 중정은 윗마을과 아랫마을을 이어주는 공공 계단과 연결돼 지역 공동체(커뮤니티)의 유기적인 흐름을 만들어낸다.이 대표는 “설계를 의뢰할 때부터 가장 먼저 중정을 두면 좋겠다고 말씀드렸어요. 문을 열면 마켓이 펼쳐지고, 사람들이 벤치에 걸터앉아 공간을 즐기는 장면을 상상했거든요.” 작지만, 의미 있는 도시의 새로운 문화적 거점이 탄생한 배경이다.■수시로 열리는 전시·팝업 스토어‘에케’에 입주한 11개의 브랜드 중 대부분은 큰 틀에선 ‘고정’된 형식을 취한다. 공간 플랫폼이라는 성격이 말해주는 것처럼 E호 ‘에임.히어’는 방문할 때마다 ‘콘텐츠의 주인공’이 달라졌다. 그동안 회화, 주얼리와 조명, 디자인, 공예 전시 등을 다양하게 선보였다.지금은 ‘나무, 곁’이란 제목의 김수근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지난 18일 시작한 이 전시는 부산에서 목선반과 도자기 작업을 하는 부부 공예가 ‘예누하’의 강진주(부인) 작가가 남편 김수근 작가를 위해 특별히 마련해 준 것이다. 강 작가는 “흙을 만지는 사람으로서 저는, 그가 나무라는 생명에 새겨온 고독한 시간을 이해한다”면서 “그는 매일 묵묵히 나무를 깎아 왔지만, 그 가치를 세상에 내놓는 일에는 늘 서툰 사람이었고, 그가 쑥스러움 뒤에 숨겨 두었던 나무의 내밀한 언어를 제가 빚어온 이해의 그릇에 담아보려 한다”고 전했다. 전시는 3월 1일까지로, 오전 11시~오후 5시에 관람할 수 있다.이 대표가 운영하는 곳은 C호 ‘에크루’이다. 그가 여행이나 출장을 다니며 모은 빈티지 가구와 아기자기한 소품,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을 조명한다. ‘에크루’를 만들기 전에는 생활소품 브랜드 ‘코코로박스’를 만들어 이름을 알린 바 있다. 마지막으로 1년 4개월의 소회와 바람을 들려준다.“처음에 생각했던 대로 굴러가는 거 같아요. 다만, 이 공간이 널리 알려져 좀 더 많은 사람이 와서 온기가 채워지길 바라요. 사실, 식당도 예약제여서 북적북적한 것과는 거리가 멀고, 주차 공간도 협소한 편이거든요. 지금 조성 중인 달맞이공원에서 언덕 쪽으로 에스컬레이터가 생기거나 지난해 <행복이 가득한 집>에서 개최한 ‘2025 행복작당’ 행사 때처럼 해운대 일대 명소를 도는 ‘셔틀버스’를 해운대구청 같은 데서 운영해 주면 참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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