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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수의 지금 여기] ‘중립’이라는 함정
광장에서 태극기·성조기를 들고 연일 시위를 벌이는 사람들. 함성의 기세가 갈수록 맹렬하다. 대통령은 불법 계엄 의도가 없었으며 그래서 구속기소라는 법적 대접은 억울하다는 것이다. 소수의 목소리라 해도 존중돼야 함은 물론이다. 다만 사회적으로 용인될 최소한의 요건을 갖출 경우에 그렇다. 이들은 온 세상이 보았고 대다수가 받아들이는 기본적인 사실조차 부정하고, 대한민국 사법 제도마저 흔든다. 거의 ‘망상’ 수준이다. 그럼에도, 분노 자체는 적어도 ‘거짓’이 아닌 듯하다. 거기서 느껴지는 것은 공허한 삶을 의미로 채울, 그러니까 뭔가 일을 하고 있다는 일종의 존재감이다. 어쩌면 탄핵 사태는 이들에 의해 이용당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국가가 포용 못 하는 복지 시스템의 구멍이라고 보는 시각, 설득력이 없지 않다.
어쨌거나, 8년 전 탄핵 풍경의 데자뷔를 마주하는 심정은 편치 않다. 헌정사의 비극이 되풀이되는 일만큼 국가적인 불행도 없다. 지금의 탄핵 사태를 당시와 비교하면 유사점이 많지만 상이한 대목도 없지 않다. 대표적으로 ‘기계적 양비론’을 꼽을 수 있겠다. “계엄 발동에 문제가 있다 해도 민주당의 국회 폭주 때문”이고, “(법원 난입) 폭도들이 잘못했지만, 경찰도 잘못이 있다”는 식이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다를 바 없다는, 중립을 가장한 양비론이 과거에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과도하게 부각된 적은 없다. 어느 잘못이 더 중대한가를 따지지 않는 기계적 중립은 사태의 본질을 흐리고 결국 편향을 낳는다. 그래서 위험하다.
‘중립’에 대해 생각해 본다. 중립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음을 뜻한다. 더 적합한 말로 ‘중용’이 있다. 상대방에게 베푸는 말과 행동에서 적절함을 지키라는 의미다. 언행을 돌아봄으로써 도덕적인 실천과 의미 있는 삶을 이루고자 하는 노력이 중용이다. 곧 내적 성찰과 자기 수양의 방편에 가깝다. 그런데 중용은 사람과 사람이 부딪치는 사회집단 내에서는 무용한 편이다. 가치 판단이 필요할 경우 어느 한쪽에 서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중립’이라는 말이 어울린다. 중용이든 중립이든 객관의 입장이든, 책임 회피 혹은 현실 도피에 가까울 때가 많다. ‘네 말도 옳고, 네 말도 옳다’(兩是)는 황희 정승의 태도는 미덕인가. 그렇지 않다. 무책임한 것이다. ‘이편도, 저편도 아니다’(兩非)는 입장도 마찬가지다. 비겁한 보신일 뿐 사태 해결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중립이 의도된 속임수일 때도 있다. 자신만의 기준을 세워놓고 거기 부합하지 않는 쪽을 비판할 때 주로 나타난다. 어느 한쪽을 두둔하기 위한 꼼수로 보아 무방하다. 중립의 허구성은 자동차를 생각해 보면 단박에 알 수 있다. 중립 기어는 경사진 곳에서 결코 머무르지 못한다. “인간적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는 없다”(프란치스코 교황)거나 “중립은 가해자에게만 이로울 뿐 피해자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으며, 침묵은 결국 괴롭히는 사람 편에 서는 것이다”(1986년 노벨평화상 수상자 엘리 위젤) 같은 통찰은 진실을 품는다.
12·3 내란 사태는 현직 대통령이 권력을 유지하려고 친위 쿠데타를 벌인 초유의 사건이다. 무장 군인이 국회의사당을 짓밟는 헌정질서 파괴 시도를 온 국민이 다 지켜봤다. 그런데도 내란 수괴 피의자의 불법적인 궤변을 정당한 주장인 것처럼 호도하는 목소리가 정치권 일부와 광장 일각에서 횡행한다. 진원지는 유튜버를 필두로 한 극우 세력이다. 이들은 시시비비가 명백한 사안까지 정쟁화하고, 법적 근거도 없는 말장난을 사실처럼 부풀린다.
검증 없이 이들 목소리를 스피커처럼 옮기는 여당도 한통속이다. 엊그제 윤석열 대통령을 구치소에서 접견한 지도부의 행태는 더 가관이다. 원내 제1정당을 독일 ‘나치’에 비유하며 대통령의 ‘옥중 변론’을 있는 그대로 퍼 날랐다. 가해자가 피해자인 양 약자의 언어를 도용하는 이들의 의도는 명백하다. 사태의 본질을 가려, 대중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고, 지지세를 확대함으로써, 탄핵 저지의 목표를 이루는 것. 그러니 중립의 함정에 빠지는 것은 내란에 동조하는 것이요, 반역사적 퇴행에 가담하는 것이다. 내란 세력은 바로 이걸 노린다.
국면마다 소재를 바꿔 가는 중립론과 양비론은 그 어느 때보다 집요하다. 당장의 효과는 거둘 수 있겠으나, 허구성과 불합리성을 알아차리는 데는 정교한 논리나 긴 시간이 필요치 않다. 이성적 사고를 하는 대다수 국민들의 일반 상식이면 충분하다. 가슴에 새길 만한 경구를 단테의 〈신곡〉에서 만날 수 있다. “지옥의 가장 뜨거운 곳은 도덕적 위기가 닥쳤을 때 중립을 지키는 자들에게 예약돼 있다.”
2025-02-04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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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수의 지금 여기] 다시, 새로운 시간 앞에 서다
2025년 을사년(乙巳年)이 밝았다. 을사년이라면, 1905년 일제에 국권을 뺏긴 을사늑약의 치욕이 먼저 떠오른다. 육십갑자가 두 번이나 돌았으니, 햇수로 120년 만이다. 올해 을사년의 시작도, 무슨 운명처럼 ‘을씨년스럽다’.
무엇보다 예년과 달리 시간의 경계를 못 느끼겠다. 새로운 시간 앞에서 결심을 세우고 잊었던 다짐도 애써 찾아보지만, 허사다. 시간의 경계 이쪽에서의 새로운 출발이란, 경계 저쪽에서 하나의 매듭이 지어져야 가능한 법이다. 그러나 계엄으로 촉발된 국정 혼란은 해소될 기미가 없고, 역사의 반역 세력들은 계엄 비호와 탄핵 심판 지연에 혈안이 돼 있다. 그래서 지금은 ‘2024년 13월’이다.
역사의 물줄기는 도도하다. 만절필동(萬折必東)이라는 말이 여기에 부합한다. 굽이굽이 꺾이고 뒤틀리고 휘청거릴망정 끝내 당도해야 할 곳을 잊지 않는다. 이 장대하고 거센 흐름을 거스르는 자들은 어느 시대나 있기 마련이다. 시간을 거꾸로 돌리려는 무지몽매의 몸부림은 결국 소멸의 운명을 맞을 수밖에 없다. 역사의 가르침이 그러하다.
18세기 프랑스는 구질서와 새 질서의 전쟁터였다. 왕정을 무너뜨리고 공화 제도를 이룩한 시민혁명의 결과, 자유와 평등·인권의 가치를 기초로 하는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현대 민주국가의 정치·사회 체제의 근간이 상당 부분 여기에 의지한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숱한 희생과 피의 대가다. 당시 ‘반혁명’ 세력의 준동이 끊이지 않았음을 주목해야 한다. 반혁명 세력이란 왕정복고와 구체제로의 회귀를 도모하는 이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목적 달성을 위해 외국군을 끌어들이는 반동적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혁명-반혁명을 가르는 기준은 민중이다. 민심과 함께하면 혁명, 그것과 분리되면 반혁명. 그 싸움의 결정적 역할은 바로 민주주의를 향한 시민들의 열망이었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반혁명 세력은 누구인가. 물론 ‘혁명’은 시대에 맞지 않는 과격한 언어다. 하지만 상황 자체는 그에 못잖게 엄중하다. 반혁명 세력을 현재에 맞게 고쳐 말하면, '반민주적' '반헌법적' 세력이다. 바로 불법 계엄을 자행하고 내란을 옹호하는 사람들이다.
그 우두머리는 두말할 것 없이 윤석열 대통령이다. 국회에 대한 무력 장악이 대통령 본인의 적극적인 의지였음이 다 드러났다. 검찰은 적어도 지난해 3월부터 계엄에 대한 구체적 논의가 있었다고 본다. 치밀하게 계획된 국헌 문란 목적의 폭동. 이게 검찰 수사의 결론이다. 형법상 내란죄 구성 요건을 모두 갖췄고 대법원 판례에서 규정한 조건에도 맞는다.
집권여당인 국민의힘은 어떤가. 계엄과 내란 수괴를 비호하는 반민주, 반헌법 세력임이 분명해졌다. 탄핵소추안 가결 뒤 비상식적인 명분으로 헌재 재판관 임명을 거부하고 권한대행의 탄핵 의결정족수 문제를 들어 헌재에 권한쟁의심판까지 청구한 상태다. 대다수 국민들의 마음을 대놓고 무시하는 후안무치한 행보는 점입가경이라는 말로도 모자랄 지경이다.
놀라움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대통령과 소속 정당의 현실 인식이나 행동양식이 극우 세력의 자장 안에 있다는 사실. 이들은 종북좌파론, 부정선거론 같은 각종 허위·사이비 논리를 앞세워 윤 정권을 흔들더니 지금은 계엄 엄호와 여론 반전을 위한 집단행동을 선동하고 있다. 이미 정권 외곽에서 정권 내부로 깊숙이 들어와 있는 관련 인사들도 부지기수다. 극우 세력이 그동안 저지른 폭력 행위의 정점에 12·3 계엄이 있다는 주장에 설득력이 실린다. 극우 세력은 한 마디로 반민주, 반헌법 세력의 본산이었던 것. 이들이 원하는 건 혼돈 상황의 지속, 결국은 윤 대통령의 직무 복귀다. 탄핵안 가결 뒤 계엄 옹호와 탄핵 지연에 필사적으로 나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프랑스 혁명은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국을 수립한 뒤 국왕을 처단했다. 왕의 처형은 공화국 수립의 필연적 결과이자 시대적 상징이다. 하지만 이것이 혁명의 완성은 아니다. 희생을 무릅쓰고 얻은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나라 안팎의 반혁명 세력과의 싸움에서 승리해야 한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새로운 을사년, 대한민국 주권자가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있다. 도저한 역사의 흐름 앞에서 한 줌도 안 되는 반민주, 반헌법 세력의 저항을 가만히 보고 있지 않을 것이다. 나라와 민생보다 자신의 안위와 기득권 지키기에 매몰된 자들은 이 땅에 설 자리가 없다. 을사년의 진정한 출발은 이 문제를 매듭짓는 일에서부터 시작한다. 새 시대를 열어나갈 우리 국민들의 저력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2024-12-31 [17: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