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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12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핸드폰을 들었을 때, 처음에는 목적이 있었다. LAFC 손흥민의 올 시즌 마지막 경기를 다시 보는 것.
2025 MLS컵 PO 서부 준결승 경기에서 손흥민의 동점 프리킥 골은 너무나 마법 같았다. 요즘 표현대로 도파민이 제대로 터지는 장면이었다. 공식 중계 쇼츠부터 시작해 ‘야유를 경악으로 바꾼 손흥민골’ ‘동료들 찐 반응’ ‘키퍼 시점 기적의 골’ 등 골 장면을 다른 각도에서 찍은 유튜브 쇼츠 수십 개를 반복해서 보다가, 어느 순간 알고리즘을 타고 뉴욕 추수감사절 ‘케데헌’ 퍼레이드에 누리호 4호 발사, 고 이순재 배우 별세 등을 거쳐 토트넘 팬들 반응, 청룡영화제 시상식 퍼포먼스 관련 영상까지 보고 나니 2시간이 훌쩍 지났다.
1분도 안 되는 짧은 동영상을 여러 개 봤을 뿐인데, 시간이 ‘순삭(순간 삭제)’이다. 내가 무엇 때문에 핸드폰을 들었는지 애초 목적이 언뜻 생각나지 않을 정도였다.
그야말로 뇌 썩음, 브레인 랏(brain rot) 현상이었다. 브레인 랏은 온라인 콘텐츠의 과도한 소비로 정신이나 지적 상태의 악화를 일컫는 말로, 2024년 옥스퍼드가 선정한 그해의 단어이기도 했다.
올해는 AI 기술의 발달로 디지털 콘텐츠의 ‘도파민 개미지옥’은 더욱 견고해졌다. AI 기술을 이용해 영상 제작이 이전보다 수월해지면서 디지털 콘텐츠 생산량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제작 속도도 빨라졌다.
영상 콘텐츠에는 영상 관련 제품의 구매 링크가 자동으로 노출되면서 온라인 쇼핑과 영상 사이를 무한반복으로 오갈 수 있는 환경도 구축되었다. 이제 물건을 사기 위해 검색이라는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 없는 시대가 됐다.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이 올 연초 발표한 ‘2025 콘텐츠 소비 전망’에 따르면 한국인의 주당 평균 유튜브 동영상 콘텐츠 소비 시간은 6.88시간으로 전년(6.54시간)보다 늘 것으로 전망됐다. 일활성이용자수(DAU)와 사용 시간을 분석한 한 통계에서는 한국인 5명 중 3명이 하루 2시간 넘게 쇼츠 등 유튜브 콘텐츠를 소비하며, 인스타그램의 짧은 동영상인 ‘릴스’는 1인당 하루 평균 50분을 사용한다는 분석도 있다.
과도한 디지털 콘텐츠 소비에 의한 ‘도파민 중독’의 폐해를 우려하는 목소리는 그동안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다. 최근 AI 기술의 발달은 그 폐해의 속도와 규모를 짐작하게 어렵게 만든다. 이 때문에 디지털 콘텐츠를 술이나 담배와 비슷한 부작용을 초래하는 것으로 보고, 이를 규제하려는 움직임이 세계적으로 확산하고 있다. 최소한 아동과 청소년은 보호하자는 조치들이다.
호주에서는 이번 달 세계에서 처음으로 16세 미만은 부모 동의 여부와 상관없이 SNS 사용을 규제하는 법안이 시행된다. 이 법의 특징은 플랫폼 기업을 규제하는 것으로, 페이스북·인스타그램·엑스(X)·유튜브 등 SNS 및 스트리밍 플랫폼은 16세 미만 사용자의 접근을 차단하는 기술적 조치를 해야 하고, 위반 시 최대 약 5000만 호주 달러(약 480억 원)의 벌금이 부과된다.
덴마크 정부는 15살 미만의 SNS 사용을 금지하는 법을 마련해 의회 상정을 앞두고 있고, 유럽의회도 지난달 말 13세 미만 청소년의 SNS 이용을 전면 차단하자는 내용의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술과 담배가 과하면 어른에게도 좋을 리 없듯이, 디지털 콘텐츠에 중독된 성인들의 부작용도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인 극단적인 정치 편향성이다. 편향적 디지털 콘텐츠에 과몰입한 나머지 ‘내가 옳다’는 신념에서 느껴지는 안정감과 우월감의 세계에 빠져 상식에 대한 감각마저 마비된 이들을 인터넷 댓글 창에서 수시로 목격한다.
역으로 디지털 콘텐츠 중독에 빠지지 않기 위해 스스로 노력하는 이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디지털 디톡스’를 실천한다. 모든 앱의 푸시 알림을 끈다거나 스마트폰과 특정 어플 사용 시간을 제한하는 식이다. 유튜브 알고리즘 추천을 피하기 위해 시청 기록을 주기적으로 삭제하는 방법도 있다.
달력을 한 장 남겨 놓은 12월. 2025년이라는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돌아본다. 힘겹게 버틴 날들 속에 도파민 분비를 자극하는 각종 디지털 콘텐츠는 일과 후 마시는 시원한 맥주 한 잔 같은 소소한 즐거움이기도 했다.
하지만 맥주 한 잔으로 시작했다가 소맥 폭탄주 십여 잔을 들이킨 날처럼, 잠깐만 봐야지 했다가 어느새 정신을 놓은 날도 부지기수다. 정보 습득과 여가 활용 그리고 제어하기 어려운 몰입 사이를 오가며 디지털 콘텐츠를 소비 중인 셈이다. 폭식과 술을 줄이고, 운동과 식단 관리를 하겠다는 내년 새해 다짐에 디지털 디톡스도 추가해 본다.
2025-11-30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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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해머' '김 부장' 그리고 '태풍' 속 우리
무용수가 객석으로 난입한다. 의자 위까지 점령한 29명의 다국적 무용수들은 관객들에게 스마트폰을 켜고 자신을 촬영하라며 포즈를 취해 준다. 합법적으로 공연을 촬영할 수 있게 된 관객들이 신이 나서 동영상을 찍고 ‘셀카’를 찍어 대던 것도 잠시. 자아도취에 빠진 무용수들은 다른 사람 말고 오로지 자신만 찍으라고 소리를 지르며 흥분하기 시작한다. 광기 어린 그들의 몸짓에 넋이 나갈 때쯤 1막의 무대는 정신 없는 카메라 플래시 조명과 함께 막을 내린다.
지난 21일과 22일 부산문화회관과 부산일보 주최로 열린 무용극 ‘해머’ 공연은 무엇이 진실이고, 진짜 나는 어디에 있는지를 묻는다. 안무가 알렉산더 에크만은 그리스의 한 레스토랑에서 ‘해머’의 아이디어를 떠올렸다고 한다. 젊은 관광객 1명이 스마트폰을 꺼내 친구들을 촬영하기 시작했는데, 모두들 카메라와 상관 없이 행동하는 듯 보였지만 안무가의 눈에 비친 모습은 달랐다. 무리의 머릿속엔 온통 카메라 생각밖에 없다는 게 에크만의 눈엔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SNS에 전시할 멋진 나의 모습과 일상을 포착하는 데 혈안이 된 현대인들은 점점 더 ‘나, 나, 나’를 외친다. 다른 사람의 처지나 의견, 어려움, 감정 등에는 별 관심이 없다. 어떻게 하면 내가 더 근사해 보일까가 가장 큰 관심사다. 이기와 기만, 가식이 지배하는 세계에 경종을 울리는 묵직한 한 방. ‘해머’는 진짜를 향한 여정, 진짜 나를 찾기 위한 망치질을 의미한다.
요즘 화제가 되는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 외우기도 힘들 만큼 긴 제목은 그 자체가 허울이다. 서울에 자가를 가지고 있고 대기업에 다니는 부장쯤 되면 사는 게 만만하고 여유로울 것 같지만 현실은 녹록하지 않다. 인생 내리막길에 접어든 50대 김낙수의 삶은 찌질하고 비루하고 짠하기만 하다. 그나마 그런 그의 노고를 이해해 주고, 처지를 헤아려 주는 가족이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싶을 정도다. 퇴직금을 상가 사기로 날릴 처지가 된 그에게 찾아온 것은 공황 증상. 그러나 정신과 진료를 권하는 의사에게 그는 사람을 정신병자 취급한다며 되레 화를 내며 현실을 부정하기 바쁘다.
드라마가 많은 시청자들의 공감을 얻고 있는 중에도 일부는 반감을 드러낸다. 애초에 상위 5% 인생인데 힘겹다는 서사를 씌우는 게 억지스럽다는 반응도 있고, 대부분의 중소기업 노동자들에 비하면 상황이 나은 거 아니냐는 볼멘소리도 나온다. 날로 치열해지는 취업 경쟁에 시달리는 젊은 세대들 입장에선 ‘김 부장 이야기’가 누릴 것 다 누린 기성세대의 넋두리로밖에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작가가 보여 주고자 한 진짜 현실은 다 가진 것처럼 보이는 누군가의 인생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살아남기 위한 생존 투쟁, 발버둥의 연속이라는 점일 것이다.
현실이 힘들수록 과거에 대한 향수가 커진다고 했던가. 불황과 단짝이라는 복고 트렌드가 최근 대중문화 속에 스며들고 있다.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시절 상사맨들의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 ‘태풍상사’의 인기가 그 예다. 이에 앞서 막을 내린 드라마 ‘백번의 추억’은 1980년대 버스 안내양들의 우정과 성장을 그린 바 있다. 그때 그 시절 이야기에 시청자들이 잠시라도 가슴 따뜻해지는 이유는 ‘그래도 사람 사이의 정이 살아 있었구나’ 느낄 수 있는 장면들 덕분이다. ‘태풍상사’ 속 남자 주인공 ‘태풍’의 어머니가 여자 주인공 ‘미선’의 집에 얹혀 살며 초등학생 막내 ‘범이’를 자식처럼 살뜰히 챙기는 모습이 특히 그렇다. 어느새 한 지붕 아래 한 가족이 돼 버린 그들의 에피소드를 보고 있으면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다시 ‘해머’로 돌아가 보자. 카메라에 비친 근사한 나의 모습에 도취해 성형과 꾸밈에 중독된 현대인을 비꼰 이 무용극은 관객들에게 쓴웃음을 남겼다. 객석까지 쳐들어와 나를 봐 달라고 소리치는 무용수들의 과장된 몸짓에 몸서리치다가 가족과 사람의 중요성을 말하는 주말 드라마에 잠시나마 위로를 받는다. 스마트폰에 고정된 우리의 시선이 화면 속 반짝이는 나와 누군가가 아니라 내 주변의 너, 그리고 현실에 발을 디딘 동료와 이웃으로 확장되기를 기대해 본다. ‘셀카’를 찍던 렌즈의 방향을 공동체로 돌려 보는 건 어떨까. 가령 본보가 매주 금요일 연재 중인 ‘사랑의 징검다리’ QR코드에 카메라를 갖다 대 보자. 번거롭더라도 댓글 한 줄만 남기면, 나를 대신해 부산은행이 1000원을 기부해 준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연말이 다가온다. 태풍 같은 험난한 세상에서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어쩌면 ‘허세’라는 보호막으로 위장하고 치열하게 달려 왔을 한 해를 되돌아보며, 이제는 진짜 나 그리고 우리와 마주할 때다.
2025-11-23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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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죽음의 외주화, 수사의 외주화
6일 오후 울산 동서발전 화력발전소에서 63m 높이의 낡은 보일러 타워가 무너졌다. 타워 내부에서 작업 중이던 근로자 9명이 순식간에 잔해 속으로 사라졌다.
무분별한 하청 남발이 불러온 참담한 사고다. 노후 산단이 많은 울산에서는 위험한 해체 작업은 곧장 하청 업체로 향하는 게 하나의 관행이 됐다. 일감을 따낸 업체는 더 영세한 업체에 그 일을 던진다. 결국 ‘죽음마저 외주 줬다’라는 게 현장 기자의 보고다.
위험한 작업이라면 감리를 둬서 위험 요소를 제거하고, 힘든 작업이라면 근로 환경을 개선해야 한다. 그게 근로자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다. 그러나 이 예의와 상식마저 무색하게 만드는 게 하청의 악순환이다. 위험천만한 일터에 헐값으로 밀어 넣을 일용직이 존재하는 한 기업이 자발적으로 근로 환경을 개선할 날은 오지 않는다.
이번 사고에 희생된 이들은 하도급 업체 직원 1명과 일용직 8명이다. 해체 작업에 능한 기능공은 없었다. 인력사무소 소개로 출근한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았던 젊은 가장이 가장 먼저 시신으로 발견됐다. 힘들게 구직에 성공해 출근할 날만 기다리던 이다. 정식 출근 전 몇 푼이라도 더 벌 요량으로 그가 찾아간 새벽 알바는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한 발파 현장이었다.
울산에서 보일러 타워의 잔해에 파묻힌 매몰자를 구해낸다고 정신없는 사이 서울에서는 검란의 불길이 번졌다. 대선 정국을 뒤흔든 대장동 사건의 항소를 검찰 수뇌부가 포기했다. 내부 반발은 당연지사다.
이번 항소 포기로 허공에 뜬 범죄수익만 7000억 원에 달한다고 한다. 이 천문학적인 금액을 범죄 수익으로 추징하는 길이 사실상 막혔다. 성남시는 민간사업자를 가장한 도둑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민사 소송을 벌여 손해배상을 받아내야 한다. 형사 재판이 저 지경이 됐는데 민사라고 순탄하게 흘러갈까. 당장 자신의 몫 500억 원을 보전 당한 민간업자 남욱 씨는 서울중앙지검을 상대로 국가배상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울산에서는 절박한 가장들이 일당 35만 원짜리 기능공 대신 15만 원짜리 ‘핫바리’가 되어 돌아올 수 없는 철골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반면 구치소에서 재판을 받고 있던 대장동 민간사업자들은 송사만 마치고 나오면 돈방석에 앉을 판이다.
법무부 장관은 서울중앙지검의 항소 보고에 수 차례 ‘신중한 판단’을 권했다. 정권 초기 그 말의 무게를 장관씩이나 되는 인사가 과연 몰랐을까. 붕괴 사고의 발주처가 동서발전이듯 검란의 발주처는 명백히 대통령실이다.
발주처와 원청이 불화를 겪는 사이 하청이 난립하며 대목을 맞았다. 온갖 타이틀이 붙은 시국 사건은 줄줄이 특검의 몫이다. 특검이라는 단어가 공정함과 준엄함을 상징하던 시절은 지나간 지 오래. 이 특검이 저 특검인지, 저 특검이 이 특검인지 헛갈리는 사이 이력 모를 율사가 나타나 수사권의 칼을 쥐고 망나니 춤을 춘다.
급기야 부도 위기의 하청 업체인 공수처는 후발 업체인 해병대 특검으로부터 외압 의혹까지 제기당하는 굴욕도 맛봤다. 양산된 특검을 정권의 손쉬운 수사 하청이라며 다들 혀를 차는 이유다.
전인미답의 코스피 4000시대를 열고 한미 무역협상에서 핵추진 잠수함까지 얻어낸 여권이다. 정치적 호재는 봄바람처럼 이어진다.
부산에서도 바닥을 치던 여당의 지지세는 해양수산부 이전 급물살에 꿈틀댄다. 소주 한 잔 기울이는 자리마다 ‘내년 지방 선거는 그야말로 다이내믹’이라며 다들 장자방 행세를 하기 바쁘다. 본청에 이어 산하기관과 HMM의 구체적인 이전안까지 꺼내 놓는다면 지금의 기세는 우스울 정도가 될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비화한 검란을 무사히 수습한다는 전제조건 하의 이야기다. 잘 나가다도 검찰 이슈만 터지면 발작 버튼이라도 누른 듯 역선택에 역선택을 거듭하는 대통령실과 여당 모습에 부울경 유권자는 의구심을 거두지 않고 있다.
물론, 수습되지 않은 대장동의 잔해가 여권 입장에서는 두려울 법도 하다. 재판 과정에서 그 속에서 무엇이 더 튀어나올지는 모를 일이니 말이다. 그러나 특검의 수사는 난립하고 있는데 정작 검찰의 대장동 수사는 올스톱된 이 상황이 결코 상식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하청 놀음이 존재하는 한 근로 환경이 개선되지 않듯 검찰은 배제하고 특검만 줄줄이 출범하는 행태가 계속되면 여당의 법치주의에 대한 지역의 색안경도 벗겨지지 않는다. 제대로 된 수사와 재판만이 대통령실과 여당의 집권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내 편의 수사 결과가 절대 그럴 리 없다’라는 지극히 유아적이고 비이성적인 아우성은 혐오만 더 깊게 할 뿐이다.
권상국 지역사회부장 ksk@busan.com
2025-11-16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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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설령 '오천피 시대'가 된다고 해도
#1. 얼마 전 만난 한 기업인은 행복한 고민을 얘기했다. 그는 한 은행에서 투자를 받아 생산 캐파를 늘리게 됐다고 자랑했다. 투자 권유는 은행이 먼저 했고, 은행 담당자가 수시로 찾아와 준비 사항을 꼼곰히 체크하고 조언을 한다고 했다. 투자가 성공하면 기업공개까지 염두에 두고 있다고 했다.
#2. 중소기업에 다니는 한 지인은 고민 끝에 대출을 받기로 했다고 털어놨다. 주가가 뛰는 걸 보고 여러 달 여윳돈으로 실전 투자를 연습하며 자신감을 얻었고, 투자금을 늘리기로 했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는 중소기업 직장인에게 생활자금을 빌려주는 제도를 이용해 저렴한 금리로 돈을 마련했단다.
최근 통계나 발표를 보면 이런 사례가 예외적 경우는 아닌 것 같다. 중소기업 대출은 올해 하반기에 빠르게 늘고 있다. 5대 은행의 중소기업 대출 잔액은 지난달 말 기준으로 675조 8371억 원에 달했다. 8월에 전달보다 3조 2763억 원, 9월엔 2조 1254억 원이 늘더니 지난달에는 4조 7494 억 원 늘어났다. 올 들어 최대폭이다. 은행들의 기업대출 연체율도 덩달아 최근 1.3%까지 치솟았는데 이는 2010년 3분기 이후 최대 수준이다.
증시 주변에서는 ‘빚투 열풍’ 우려가 나온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증권사 투자자 예탁금은 지난 5일 기준 88조 2708억 원으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투자자 예탁금은 투자자들이 주식 투자를 위해 증권사 계좌에 맡겨놓은 자금이다. 석달 전과 비교하면 21조 2628억 원가량 늘어났다. 이 시기 5대 은행의 요구불예금 잔액은 647조 8564억 원으로 전달에 비해 21조 8647억 원 줄었다. 예금을 찾아 주식 시장에 뛰어든 셈이다.
대통령실에서 공공연히 ‘머니 무브’를 강조할 정도로 이재명 정부 정책 방향은 명확하다. 부동산시장, 정확히는 서울 아파트 가격이 비정상적으로 뛰면서 생산 부문으로 돈이 흘러들도록 유도해 경제를 부양시키겠다는 거다.
대출부터 바싹 죘다. 정부는 출범 후 서울과 경기 12개 지역까지 ‘삼중 규제’ 지역으로 지정한 ‘10·15 대책’을 비롯한 부동산 대책을 세 차례 내놨다. 대통령실은 공급 대책도 내놓겠다고 예고했다.
금융권도 적극 보조를 맞추고 있다. 앞서 언급한 중소기업 대출에 그치지 않는다. 정부의 생산적·포용 금융 확대에 발맞춰 5대 금융지주들이 투자 계획을 일제히 내놨다. 전체 투자 금액은 5년간 500조 원이 넘는다. 이 돈은 국민성장펀드, 모험자본 공급, 민간펀드 결성 등에 투입될 예정이다. 은행들이 ‘이자 놀이’가 가능하던 부동산 시장을 자발적으로 떠나지는 않았을 터이다. 더구나 산업 부문에 전대미문의 막대한 투자를 감행해야 하는 리스크까지 져야 하는 일이다.
부동산 투자가 막히니 개인들도 문턱 낮은 증시로 향한다. 자산이 부족한 젊은 층은 대출까지 내고 있다. 코스피도 얼마 전까지 ‘꿈의 지수’라던 ‘사천피’를 넘나들며 ‘오천피’도 가시권에 둘 정도로 강한 상승장을 연출하는 상황이다.
금융·부동산 시장을 압박해 인위적 ‘머니 무브’를 유도하는 정부 정책은 일단 유효해 보인다. 문제는 통제 불가능한 대내외 여건들이 적지 않다는 점이다. 실물 경제부터 호락호락하지 않은데, 한국 경제는 올해 잘해야 1%대 초반 성장에 그칠 것으로 전망된다. 내년 성장률 전망치도 1.8% 안팎에 머물고 향후 5년간 비슷한 수준에서 움직일 것으로 예상된다.
기업 부문에 자금을 공급하는 걸 무어라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장기 침체기에 기업 외형을 키우는 투자가 옳으냐 하는 점은 의문이 따른다. 오히려 산업 구조를 개혁하고 기업 내재 가치를 튼튼히 해야 할 시기다. 은행들도 실탄이 넉넉해도 투자처를 찾는 일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잘나가는 일부 분야에 투자가 집중되는 쏠림 현상이 나타나거나 도덕적 해이가 발생할 우려도 크다.
치솟는 주가에 혹해 대출까지 받아 주식에 뛰어드는 투자자에도 우려가 커진다. 단기적으로 주가가 경기와 따로 움직이는 사례는 빈번하지만 장기적으로는 흐름을 같이할 수밖에 없다. 미국 증시를 이끌던 AI 분야에는 거품론이 제기되고, 글로벌 증시에 흘러드는 유동성이 과도하다는 목소리가 커지는 등 해외에서 전해지는 경고도 적지 않다. 한국 경제와 증시엔 통화 불안정성까지 내재돼 있다.
뒤늦게 주식시장에 올라탄 개인 투자자들이 두고두고 눈물을 흘릴 가능성도 있다. 견조한 성장이 예상되는 건실한 기업이 과도한 투자에 부실을 키우지나 않을지 걱정도 된다.
당연한 얘기지만 정부 정책의 목표가 오천피 달성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정부를 필두로 각 경제 주체가 한국 경제를 상승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해법을 찾는 일이 더 중요하다. ‘한국 경제에 무엇이 중요한가’ 질문을 다시 던질 때다.
김영한 경제부장 kim01@busan.com
2025-11-09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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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지금 최민희에게 필요한 것이야말로 양자역학
한때 그는 언론 자유의 최전선에 서있었다. 군사정권 시절 언론 탄압에 맞서 누구보다도 처절하게 싸웠다. 그가 기자로 일했던 월간 ‘말’은 1990년대 언론 학도들에게 어떤 레거시 매체보다 믿음직한 언론이었다. 이후 수차례 이름을 바꾼 민주언론시민연합(민언련)에서 상임대표까지 지내며 민언련의 ‘대모’로까지 불리었다.
그의 현재 직업은 국회의원이다. 또한 과거의 이력을 바탕으로 현재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고 권력으로부터 언론을 지켜야 하는, 실제로는 언론을 감독하는, 국회 상임위원회의 위원장을 맡고 있다. 그리고 그는 언론의 자유를 헌신짝처럼 내다버렸다.
지난달 20일 국정감사장에서 최민희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장은 MBC 보도본부장을 퇴장시켰다. 자신의 발언이 포함된 리포트를 문제 삼으며,“이게 중립적이냐”라고 따져 물었다고 한다. MBC 보도본부장은 “개별 보도 사안에 대한 논의는 부적절하다”고 답했지만, 돌아온 건 ‘퇴장’이었다.
과방위원장은 신문과 방송, 통신 등을 감독하는 자리다. 하지만 감독이 간섭이나 통제가 되어선 안 된다. 언론은 국민의 눈과 귀다. 그런 언론이 권력의 통제 대상이 되는 순간, 눈과 귀라는 본질의 역할은 불가능해진다.
그는 MBC에 ‘친(親) 국민의힘 언론’이라는 딱지를 씌웠다. 누가 봐도 설득력이 없다. 지난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MBC는 누구보다 계엄 세력에 대해 비판적인 보도 관점을 지켜왔다. 게다가, 그런 사실과는 별개로, ‘친 국민의힘 언론’이라고해서 국감장에서 쫓겨나야 할 이유는 또한 뭔가. 그렇다면 반대로‘친 민주당 언론’에게는 도대체 어떤 VIP 대접을 해줄 셈인가.
사실 그의 이런 왜곡된 태도는 그다지 놀랍지는 않았다. 과거 그의 행적이나 발언에서 ‘나만 옳다’는 식의 확증편향을 느끼고 불편해했던 적이 어디 한두 번일까. 당장 지난해 당내 온건파 의원들을 향해 “움직이면 죽는다. 제가 당원과 함께 죽일 것”이라는 극단적 발언을 쏟아낸 것도 그였다.
오히려 놀라운 장면은 따로 있었다. 함께 불거진 딸 결혼식 논란이다. 이는 그가 공직자로서의 기본적 경계조차 지키지 못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국정감사 기간 중 치러진 결혼식에 피감기관 관계자들이 화환과 축의금을 전달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공직윤리 위반 논란이 일었다.
카드 결제된 축의금은 없었다, 큰 금액은 다시 되돌려줬다…, 최 위원장의 여러 해명에도 논란은 식지 않았다. 정작 국민이 문제 삼는 것은 금전의 흐름이 아니라 공직자로서의 감수성이기 때문이다. 국회의 상임위원장이 피감기관과 사적인 행사를 공유하는 게 부적절하다는 것은 이미 상식이다.
특히 이 과정에서 최 위원장은 국민들에게 해선 안될 거짓말을 했다. 양자역학을 공부하느라 딸 결혼식 날짜도 몰랐다는 취지의 황당한 해명으로, 온 국민에게 양자역학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딸 결혼식 날짜도 모를 정도로 양자역학 열공에 빠져 있어야 할 시간에 유튜브 방송에 나가 딸 결혼식에 입을 한복 이야기를 주고 받은 사실이 뒤늦게 드러났다.
확증편향에 빠진 정치인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 특정 진영의 확증편향에 빠진 정치인의 말은 해당 진영의 의견으로 가려 들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자신의 편의를 위해 아무렇게나 거짓말을 내뱉는 정치인은 다르다. 더이상 그의 말을 신뢰할 수 없다. 신뢰할 수 없는 정치인은 정치인으로서의 생명이 다했다고 봐야 한다.
기자 출신에서 언론 운동가, 시민사회 활동가를 거쳐 정치인으로 거듭난 그의 이력을 떠올려 본다. 이제는 퇴색되어버린 그의 초심을 떠올린다. 정치인으로서 위기에 빠진 지금 초심으로 돌아갈 때다. 그래서 그가 과방위원장 자리를 내려놓기를 바란다. 그는 이제 선택해야 한다. 신뢰가 사라진 권력의 자리에 남아 있을 것인가, 아니면 그 자리에서 내려와 초심으로 돌아갈 것인가. 그의 돌파구는 후자에 있다.
그리고 위원장직을 내려놓고 시간이 허락한다면 못 다한(?) 양자역학에 대해 제대로 다시 공부해보길 권한다. 양자역학의 주요 개념 중 하나가 불확정성의 원리라고 한다. 입자의 위치를 정확히 알면 속도를 알 수 없고, 속도를 파악하면 위치는 미지수가 된다. 입자의 운동량과 위치를 동시에 정확하게 알 수 없다는 의미다. 양자역학의 원리 속에 최 위원장이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것도 함께 담겨 있을 듯 하다. 양자역학의 핵심이 정답이 없다는 데 있다면, 양자역학을 통해 최 위원장 역시 자신의 생각과 주장만이 정답은 아닐 수 있다는 점을 깨달을 수 있을지도.
김종열 정치부장 bell10@busan.com
2025-11-02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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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나노 바나나 그리고 캄보디아
두 달 전만 해도 ‘나노 바나나(Nano Banana)’라는 이름은 세상에 없었다. 무슨 새로 나온 바나나 품종인가 싶겠지만, 실은 구글의 AI 이미지 서비스 코드명이다. 단순히 이미지를 생성하는 차원이 아니다. 명령만 하면 가지고 있는 이미지를 자유롭게 편집해 준다. 배경은 물론이고 강아지를 고양이로, 남자를 여자로 뚝딱 바꾼다. 옷도 갈아 입히고 헤어스타일도 바꿔주니 놀라울 따름이다.
자고 나면 새로운 AI 서비스가 등장했다는 뉴스가 들린다. 뭐가 뭔지 헷갈려도 AI를 잘만 활용하면 혼자서도 거뜬히 뭐든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긴다. 역사상 가장 효율적이고 편리한 세상이 펼쳐질 것 같다.
사실 이런 경험이 처음은 아니다. 1990년대 ‘전자상거래’ 수업에서 “앞으로 개인이든 기업이든 모두가 인터넷으로 거래하고, 모르는 것을 검색하면 알려주는 세상이 곧 온다”는 교수님 말씀이 그렇게 빨리 현실이 될 줄 몰랐다. 전화선 모뎀을 넘어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 월드 와이드 웹이라는 화려한 단어가 당연한 일이 됐을 때가 밀레니엄 2000년을 넘어서였다.
인터넷 세상에 적응이 됐다 싶으니, 2007년 별안간 ‘아이폰’이 나왔다. 첫 대면은 미국 출장 때였다. 스마트폰을 손에 쥔 미국인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게 모든 걸 빨아들일 겁니다. 세상을 바꿀 겁니다.” 충격적이게도, 폰 하나로 사진 촬영은 물론 일기 예보와 음악, 인터넷까지 모든 게 가능했다.
스마트폰이 생활 필수품이 되자, 다시 AI가 나타났다. 처음에는 인터넷, 스마트폰 정도겠거니 하던 것이 자세를 바로잡게 됐다. 이용자와 성능의 증가 속도부터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인터넷과 스마트폰 이용자가 세계적으로 늘어나는 데 최소 10년 이상이 필요했다면, 2022년 11월 30일 챗GPT가 등장한 이후 불과 3년도 되지 않아 전 세계 8억 명 이상이 다양한 AI 서비스를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상황이 됐다.
이러하니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특히 우리 아이들에게 너무나 힘든 현실과 미래가 이어질 것 같다. AI 앞에서 두 눈 부릅뜨지 않으면 안 될 일이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소프트웨어 개발자는 인기가 높았다. 이제는 ‘컴공’이라 불리는 컴퓨터공학과 지원자부터 조금씩 하락하는 추세다. AI가 웬만한 코딩을 모두 해치워 버리는 탓이다. AI 관련 최상위 인재 수요만 여전하다.
기업들은 신입사원 채용을 잘 하지 않는다. 스타트업마저 경력자 채용이 70%에 달할 정도로 소수 정예를 선호한다. 시니어 경력자 몇몇이 있으면 AI가 신입사원 역할을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다. 지난 추석 연휴에 대기업에 다니는 친구들이 “당장 경영 실적만 생각해 신입을 키우지 않으니 세월이 지나 경력자들이 퇴직하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한다. 국가데이터처 통계에 따르면, 지난 9월 청년 고용률은 45.1%에 불과했다. 17개월 연속 하락세로, 경력직 위주 채용이 고착되었음을 의미한다.
불과 2~3년 사이에 AI와 데이터센터가 세계 주가에다 일자리까지 좌지우지하게 됐으니, 이를 지켜보는 부모들로서는 난감하기만 하다. 과거와 달리 부모 세대가 무엇을 알고 모르는지 가늠하기조차 힘들어 자녀에게 어떤 공부를 하고, 어느 길로 나아가라고 조언할지 막막하다.
더구나 지역에 사는 부모들은 최근 불거진 캄보디아 사태를 보며 가슴이 더욱 미어진다. 피해자 다수가 지역 청년들이어서다. 캄보디아 사태는 한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최악의 구직난 속에 그들을 단순히 돈을 쫓아 스스로 찾아간 범죄자들로 치부하기에 힘든 지점이 많다. 수도권 일극화로 저임금에도 불나방처럼 서울로 몰려드는 청년들, 일자리가 없어 헤매는 지역의 청년들, 살기가 팍팍해 결혼과 출산을 미루거나 포기한 청년들…. 지역 소멸이 국가 소멸을 부르는 최악의 시나리오다. 모두 지역균형 발전에 실패한 기성세대의 책임이다.
‘AI 임팩트’는 이번 캄보디아 사태보다 더욱 심각한 사회 문제를 부를 것이 분명하다. 서울로 가도, 고향에 돌아와도 일자리가 없다면 청년들에게 남는 건 절망 뿐이다. 청년들을 그저 ‘시장의 원리’에 내맡겨서 안 되는 이유다.
기술을 발전시키고 주식으로 돈을 버는 일도, 중국의 약진을 따라잡는 일도 중요하다. 그렇지만 지금 가장 확실한 건 지역균형 발전을 방치하면 대한민국 청년의 삶 자체가 무너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청년들의 삶이 지속가능한 사회를 만드는 일이 최우선이다. 감당 못할 쓰나미 속에 고립된 청년들에게 살아갈 희망을 줄 실질적인 방안을 서둘러 찾아야 한다. 여야를 떠나, 정부와 정치권이 당장 국가 최우선 과제로 삼고 나서기에도 이미 한참 늦은 국가 최대의 난제다.
박세익 디지털영상센터장 run@busan.com
2025-10-26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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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누가 ‘발광체’가 될 것인가
연말이 다가오면서 내년 6월 지방선거에 대한 관심이 조금씩 높아지고 있다.
특히 최대 격전지로 예상되는 부산의 차기 시장으로 누가 될 것인가는 정치 고관여자에게 뜨거운 관심사다. 더불어민주당 입장에서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가장 크게 공을 들이는 곳이 부산과 서울이다. 우리나라 제1, 제2의 도시라는 상징성은 물론 재탈환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때문에 국민의힘 입장에서도 반드시 사수해야 할 곳이 부산과 서울로 꼽힌다. 사실상 이 지역의 결과에 따라 내년 지방선거의 성패가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산시장 선거에서는 벌써부터 전재수 해양수산부 장관과 박형준 부산시장의 양자 대결이라는 말들이 나온다. 최근에 나온 여론조사에서 전 장관과 박 시장이 각 당의 다른 후보들에 비해 지지율 격차가 비교적 컸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 많은 시간이 남은 만큼 얼마든지 후보가 뒤바뀔 가능성이 있지만 ‘밴드웨건’ 효과로 인해 고착화될 확률도 높다.
아직 대진표가 나오지 않은 서울에 비하면, 어쨌든 현시점 가장 유력한 양 후보로 인해 부산은 이른 대진표가 짜인 모양새다. 갈수록 경쟁은 뜨거워질 전망이다. 현직 장관과 시장이라는 신분 때문에 정치적 발언을 편하게 못 할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현직 프리미엄을 누리며 정책상의 추진력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전 장관은 최근 국정감사에서 HMM 본사 부산 이전과 해수부 산하 공공기관의 부산 이전 로드맵을 연내에 제시하겠다는 입장을 밝히며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고, 박 시장은 자신이 직접 프레젠테이션을 하면서 사업의 필요성을 설득한 BuTX(부산형 급행철도)가 KDI 민자적격성 조사를 통과하는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이들 양 후보에게는 넘어야 할 산들이 더 많다. 현직이기 때문에 미디어 노출이 잦아 인지도를 높였다는 것 이외엔 뚜렷한 장점과 성과가 보이지 않는다는 비판이 따르고 있다.
우선 전 장관이 박 시장과 박빙인 지지율을 보이는 것은 이재명 대통령의 지지도에 기인한다. 특히 이 대통령의 선거 공약이었던 해수부 부산 이전의 파급 효과는 상당히 크다. 해수부 이전은 행정 수도인 세종을 열외로 하고 정부 중앙 부처의 첫 지역 이전임과 동시에 부산이 명실상부한 ‘해양 수도’로 거듭날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겼다.
즉, 엄밀히 말해 이 대통령의 결단과 이번 정권에서 미는 후보가 전 장관이라는 후광 효과가 더 강하다. 부산 유일한 민주당 국회의원, 3선 중진이라는 타이틀에도 불구하고 임팩트 있는 자신만의 콘텐츠를 아직까지 확인할 수는 없다. 본격적인 선거전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장관이라는 직책 때문에 더욱 말을 아낄 것이 분명해 검증의 시간과 기회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전 장관에게 남은 과제는 짧을 수 있는 해수부 장관이라는 임기 동안 최대의 성과를 보이는 것이다. 목표가 정해진 HMM과 해수부 산하 공공기관의 부산 이전을 얼마나 갈등과 마찰 없이 순조롭게 이뤄내느냐, 그리고 중앙 부처 가운데 가장 힘이 미약한 해수부의 기능 강화, 복수 차관제 등 지역의 열망을 어떻게 얼마나 담아내느냐다.
이에 반해 박 시장은 현직 시장이라는 인지도와 보수세가 우세한 부산에서 민주당 후보에게 밀리고 있다는 현실은 뼈아프다. 그에게 꼬리표처럼 붙어 다니는 ‘한 게 없다’라는 부정적인 인식은 중도 확장성에도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가덕신공항 공기 지연, 글로벌허브도시특별법 제정 불확실, 산업은행 본사 부산 유치 실패 등 굵직굵직한 부산 현안들은 방향성을 잃은 채 후퇴하고 있다. 최근 8년간 교착 상태였던 침례병원 공공병원화 문제로 정은경 보건복지부 장관과 담판을 벌였지만 뒤늦은 감이 있다. 앞서 윤석열 정권 때 진즉에 해결해야 했을 현안을 정권이 바뀐 뒤 이 대통령의 공약 사항이라며 해결해 달라는 것은 궁색하다.
박 시장에게 남은 시간은 ‘일 잘하는 시장’이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것이다. 해결하지 못한 많은 현안 가운데 선택과 집중을 통해 일부라도 마무리해야 한다. 현직이어서 검증이 끝났다면, 이를 상쇄시킬 수 있는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고 이를 담보할 수 있는 강한 추진력을 강조해야 한다.
민주당과 국힘 양당의 지지도가 부산에서 박빙을 보이는 만큼 양 후보의 경쟁은 향후 더 치열할 전망이다. 하지만 현재 시점에서 이들 후보는 ‘양당 구도’에서 비롯되는 ‘반사체’에 가까운 모습이다. 개인의 능력으로 양당 구도를 뛰어넘는 ‘발광체’로는 아직 미흡하다. 정쟁보다는 현직 프리미엄을 가지고 각자의 영역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도의 합리적이고 효용성 있는 정책 경쟁을 어떻게 펼치느냐가 관건이다.
누가 먼저 자신의 능력을 보여줄 것인가.
2025-10-19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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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정치인의 TPO
이재명 대통령의 ‘냉장고를 부탁해’ 프로그램 출연에 대한 정치권의 논쟁이 뜨겁다. 길고 길었던 추석 연휴가 끝났지만, 정치권의 공방은 끝나지 않고 있다. 여야는 프로그램 방영 이후 상대 진영이 명예를 훼손했다며, 발언이 거짓말이라며 고소하고 고발했다. 이번 이슈는 오늘부터 시작되는 2025년 국정감사에서도 등장할 것이 뻔하다. 더 좋은 정치, 더 나은 민생을 부탁하며 표를 던진 상당수의 시민에게 정치권의 이번 논쟁이 마뜩하지 않다.
대통령 부부의 이번 예능 출연은 국민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인기 예능 프로그램에 대통령과 영부인이 동시에 출연한 경우는 한국 정치에서 보기 드문 장면이었다. 하지만 프로그램 제작 시점이 국가 전산망 화재로 국가적 혼란이 극심한 시점이었던 것은 비판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대통령 부부가 출연 목적으로 밝힌 ‘K푸드 세계화’에 대한 관심을 온전히 국민들에게 전달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 대통령은 한국 역대 대통령 중 대중과의 소통에 능한 지도자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여권에서는 이 대통령이 20여 년 전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중친화적인 언어로 시민들과 소통하던 모습과 비슷하다는 평가도 나온다. 그는 노 전 대통령 재임 당시와는 비교할 수 없는 규모로 성장한 온라인 SNS를 통해 국민과의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이 대통령은 더불어민주당 당대표이자 국회의원이던 지난해 12월 3일 밤 윤석열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언하자 국회로 향하는 차 안에서 SNS에 “국회로 모여달라”는 내용의 동영상을 올렸다. 이 대통령의 해당 게시물은 순식간에 온라인으로 퍼져나갔다. 최근 화제를 모은 경주 APEC 홍보 영상에서 이 대통령이 항공기 유도원으로 출연한 것 역시 그 연장선이다.
정치권에서 각종 SNS와 유튜브, 숏폼 영상 등은 정치인들의 중요한 의사소통 창구가 됐다. 정치인의 말과 행동은 온라인을 통해 짧은 시간에 시민들에게 퍼져나가며, 여러 해석이 덧붙여져 재가공된다. 메시지 전달력이 커진 만큼 의도하지 않은 파장도 그만큼 크다. 결국 정치인들의 미디어 노출은 소통인 동시에 위험 관리가 필요한 영역이다. 특히 국가 정책의 최고 결정권자인 대통령의 예능 프로그램을 비롯한 미디어 노출은 누구보다 철저한 메시지 관리가 필요하다. 대통령은 예능 프로그램이라는 무대에서 친근함을 얻을 수 있지만, 한순간에 신뢰와 정책 추진 동력을 잃을 수도 있다.
달변가로 알려진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사례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현직 대통령 신분이던 2014년 TV 채널이 아닌 당시 미국 최고 인기 온라인 코미디 프로그램인 ‘Between Two Ferns’에 출연했다. 그는 풍자가 난무하는 해당 프로그램에서 ‘오바마 케어’로 불렸던 자신의 의료보험 개혁 정책을 홍보했다. 대중들은 현직 대통령이 풍자의 대상이 된 것에 열광했다. 출연 파장은 컸다. 출연 직후 미국 내 정부 의료보험 홈페이지 방문자 수는 프로그램 방영 전보다 40%나 증가했다.
파장은 컸지만 효과는 적었다. 달아올랐던 미국 국민들의 의료보험 개혁에 대한 관심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그라졌다. 관심이 사그라들면서 개혁을 위한 추진 동력은 더 얻지 못했다. 오바마의 예능 출연은 국민들의 관심을 끄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가 얻고자 했던 신뢰를 기반으로 한 정책 추진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후에는 정치의 품격이 희화화됐다는 비판과 국정 책임자로서의 권위가 훼손됐다는 부정적 평가가 뒤따랐다.
정치와 미디어의 연관성 연구로 잘 알려진 미국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소속 매튜 바움 교수는 “(예능이나 토크쇼 같은)소프트 뉴스는 정치 무관심층을 정치로 끌어들이지만, 정보의 깊이를 얕게 만들 수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정치인들에게 예능이나 토크쇼가 소통의 통로이지만, 던지고자 하는 메시지를 단순화시키는 위험이 뒤따른다고 설명했다. 이 대통령이 출연한 프로그램이 방영된 지 일주일밖에 안된 지금 ‘K푸드 세계화’라는 메시지는 온데간데 없고, 정치권의 싸움거리로 넘어간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정치인의 미디어 활용은 그 시점과 목적, 메시지의 일관성이 동시에 확보될 때만 긍정적인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명확하다고 해도, 시점과 상황이 맞지 않다면 메시지는 왜곡된다. 이번 예능 출연 역시 국가정보자원관리원 화재로 전국 곳곳에서 국민들의 생활에 피해가 발생한 상황이었으므로 메시지의 전달력은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정치의 본질은 신뢰다. 대중들로부터 신뢰를 얻으려는 정치인들의 미디어 활용은 피할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다. 대통령의 미디어 참여가 국민들의 신뢰와 정책 추진력을 얻는 기회로 활용되려면 소통의 진정성과 시점, 상황이 더욱 면밀하게 검토돼야만 한다.
2025-10-12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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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대법원장 청문회와 사법부 독립
국회가 사법부 수장인 대법원장을 청문회 증언대에 세우려 한다. 전례가 없던 일이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는 지난 22일 더불어민주당 단독으로 조희대 대법원장에 대한 청문회를 의결했다. 대선 전 이재명 대통령 선거법 위반 상고심 파기환송부터 한덕수 전 총리와의 비밀 회동설까지 대선개입 의혹을 오는 30일 청문회를 열어 따져 묻겠다는 것이다. ‘대선 개입 의혹’이라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근거는 약하다. 비밀 회동설 제보자의 신원과 발언의 맥락은 불투명하고, 당사자들은 모두 부인했다. 그럼에도 민주당은 현직 대법원장을 국회 증언대에 세워 정치적 추궁을 하겠다고 한다. 이는 정치 공세를 넘어 헌정 질서의 근간인 삼권분립에 대한 도전이란 비판도 나온다.
조 대법원장은 사법부 독립과 헌법상 재판 개입 금지 원칙을 이유로 불출석 의견서를 제출했다. 이에 민주당 소속 법사위원들은 26일 이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출석을 촉구했다. 민주당은 고발 조치, 대법원 현장 검증 등 후속 대응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사법부 독립은 민주주의의 기둥이다. 입법·행정·사법의 삼권분립이 제대로 작동해야 국가 권력이 균형을 이루고, 그 속에서 국민의 기본권이 지켜진다. 그러나 최근 국회는 특정 재판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사법부를 압박하는 위험한 길로 가고 있다. 법조계 안팎에서 “도를 넘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사실 정치와 사법의 긴장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다. 정권은 사법부를 늘 불편해했다. 이명박 정부 시절 광우병 촛불집회 관련 판결 등에서 법원이 정부의 기대에 어긋나는 결정을 내리자, 여권은 “법원이 국민 정서를 외면한다”며 공개적으로 불만을 표출했다. 하지만 정치적 공세 수준에서 그쳤을 뿐, 현직 대법원장을 증언대에 세우는 시도까지는 나아가지 않았다. 박근혜 정부 때도 정권 말기 각종 국정농단 사건 재판이 이어지며 법원은 여론의 압박을 강하게 받았다. 청와대와 여권은 일부 판결에 불편함을 드러냈지만, 대법원 자체를 정치 청문회의 대상으로 삼은 적은 없었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는 이른바 ‘사법농단’ 수사가 본격화되며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가 강한 정치적 타격을 입었다. 법원행정처 문건이 공개되며 재판 거래 의혹이 터져 나왔고,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결국 피의자 신분으로 법정에 섰다. 그러나 이 역시 구체적 증거와 수사 과정을 통한 사법적 절차의 문제였다. 국회가 근거 없는 의혹을 앞세워 현직 대법원장에 대한 청문회를 강행하지는 않았다.
윤석열 정부 시기에도 사법부와 정치권의 갈등은 이어졌다. 정치적 사건이 법원으로 넘어올 때마다 판결이 여당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코드 판결”이라는 비난이 여권에서 쏟아졌다. 그러나 여권 역시 대법원장 개인을 겨냥한 청문회 압박 같은 시도는 하지 않았다.
이처럼 역대 정부가 사법부와 갈등을 빚은 전례는 많지만, 지금까지는 권력이 사법부를 비판하거나 불만을 표출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그러나 민주당은 대법원장을 국회 증언대에 세워 사퇴를 압박하겠다는, 전례 없는 방식을 택했다.
이는 사법부에 대한 단순한 ‘간섭’을 넘어선다. 입법부가 사법부를 공개적으로 심판대에 올려놓고 길들이겠다는 신호다. 이 선례가 굳어지면, 대법원장은 정권과 국회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정치가 재판을 지배하는 위험한 구조가 제도화되는 것이다.
민주당은 제보를 근거로 의혹을 제기했지만, 그 제보가 누구인지조차 명확히 설명하지 못한다. 확인되지 않은 소문으로 대법원장을 증언대에 세우겠다는 발상 자체가 비상식적이다. 국회의 면책특권을 방패 삼아 법관의 명예를 훼손하는 행태는 민주주의를 위한 특권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해치는 특권 남용이다.
사법부 독립은 법관의 특권을 위한 구호가 아니다. 그것은 권력으로부터 국민의 권리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다. 대통령도, 국회도, 정당도 법 위에 서지 못하도록 막는 장치가 바로 독립된 사법부다. 정치권이 이 보루를 무너뜨리면, 가장 큰 피해자는 국민이다. 만약 대법원장이 정치 공세 앞에 위축된다면, 앞으로 국민 누구도 공정한 재판을 보장받을 수 없을 것이다. 법정이 법과 증거가 아니라 정치의 힘겨루기에 따라 움직인다면, 법치주의는 이미 무너진 것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사법부가 정쟁의 도구로 전락하는 악순환은 이제 멈춰야 한다. 대법원장 청문회 강행은 그 악순환을 극단으로 내모는 행위다. 민주당은 국민 앞에 사법부 독립을 존중하겠다는 정치적 책임감을 보여야 한다. 정치권은 더 이상 사법부를 흔들어선 안 된다.
강희경 사회부장 himang@busan.com
2025-09-28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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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61년을 버티게 한 응원 목소리
지난 10일 전국 언론을 비롯해 여성·시민단체의 눈과 귀는 모두 부산 연제구 부산고등법원으로 향했다. 사실 성폭력 피해자였지만, 억울하게 상해 가해자로 몰려 61년을 범죄자로 낙인 찍혔던 최말자 씨의 재심 판결이 있는 날이었다.
신문 방송이 모두 속보로 판결을 알리며 결과는 이미 많은 사람이 알고 있다. 10여 일 지난 이 시점, 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다시 하려는 건 여전히 여성을 향한 폭력과 오해로 고통받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먼저 1964년 발생한 최말자 씨의 사건부터 요약해 보자. ‘56년 만의 미투’로도 알려진 이 사건은 당시 만 18세였던 최 씨에게 접근한 노모 씨가 강제로 최 씨에게 입맞춤하려 했고, 성폭력을 저항하는 과정에서 최 씨는 노 씨의 혀를 1.5cm가량 절단했다. 이후 최 씨를 향한 노 씨의 괴롭힘이 시작된다. 집까지 찾아와 난동을 피웠고 최 씨를 겁박하기 위해 경찰에 상해죄로 고발한다. 경찰은 피해자인 최 씨를 오히려 중상해죄로 기소했고, 부산지법에서 최 씨에게 징역 10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한다.
반면, 성폭행 가해자인 노씨는 특수주거침입과 특수협박 혐의로 오히려 최씨보다 가벼운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성범죄 가해자였지만 정작 강간미수 혐의는 적용조차 되지 않았다.
18세 평범한 소녀는 갑자기 당한 성폭력의 피해만으로도 엄청난 고통이었지만, 이후 펼쳐진 상황에서 또 한 번 가해를 당한다. 6개월간 불법으로 체포, 감금당해 조사를 받았고, 당시 검찰과 재판부는 최 씨에게 “노 씨와 결혼해라” “당신은 이제 평범하게 결혼할 수 없는 사람이다” “노 씨와 좋게 합의하라”라며 강요했다고 한다.
최 씨의 재심 변호를 맡은 김수정 변호사는 “최말자님 고통의 시작은 가해자에서 비롯됐지만, 이를 가중한 것은 검찰과 법원이었다”라며 “보호해 줄 것으로 믿었던 검찰과 법원은 피해자의 행실을 탓하고 가해자와 결혼까지 강요하며 피해자를 가해자로 둔갑시켰다”라고 지적했다.
60년대 시대상을 고려해도, 당시의 기소와 판결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 누가 봐도 명백한 정당방위로 보이지 않는가. 그런데 나는 다시 한 번 재판부의 태도에 놀랐다. 무려 56년이 지나 용기를 낸 최씨는 법원에 재심 요청을 했지만, 현시대 재판부마저 2번이나 이 요청을 기각했다는 점이다. 사실상 여성 폭력의 심각성과 고통을 현시대 재판부마저 여전히 인지하지 못한다는 걸 드러낸 셈이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았던 최 씨의 용기는 마침내 대법원으로부터 원심 파기 환송을 끌어냈다.
무죄 선고공판 직후 최 씨는 “주위에서 ‘달걀로 바위치기’라고 만류했지만, 이 사건을 묻고 갈 수가 없었다. 나와 같은 운명을 가진 피해자들에게 희망이 되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최 씨의 재심을 지원했던 송란희 한국여성의전화 상임대표는 “오늘 판결은 재심으로 여성 폭력 사건을 바로잡은 최초의 사례”라며 “여성 폭력 피해자의 정당한 방위 행위조차 폭행으로 인지하는 관행을 이제 끝내야 한다”라고 밝혔다.
최 씨는 그 오랜 세월에도 포기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건 1964년 공판 당시 자신을 응원하던 목소리였다고 강조했다. 당시 재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40, 50대 엄마들이 법원에 몰려와서 아우성을 쳤고, “죄 없는 최 양을 풀어줘라!”라는 그들의 목소리는 50여 년간 생생하게 최 씨 안에서 살아있었다. 1964년 응원의 목소리가 61년의 세월을 넘어 2025년 법정으로 이어졌다. 최 씨의 재판에는 그녀의 방통대 동기와 교수부터 전국의 여성단체, 변호인단, 일반 시민 등 수많은 조력자가 함께했고, 공판 당일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사람이 기차와 비행기를 타고 최 씨를 응원하기 위해 부산을 직접 찾았다.
최 씨의 투쟁을 가까이서 지원한 배은하 부산여성의전화 성·가정폭력상담센터 소장은 “여성 폭력 현장은 여전히 한 방울, 한 방울의 물방울이 바위를 뚫어야 하는 현실”이라고 표현했다. ‘물방울로 바위를 뚫는다’는 말은 불가능한 상황을 뜻하는 관용어구로 많이 사용된다. 그러나 수많은 물방울이 모여 시내가 되고 강으로 불어나 폭포처럼 쏟아진다면 바위를 뚫고 지형마저 바꿀 수 있지 않을까.
1964년 시작된 응원의 목소리가 이어져 2025년 폭포로 변해 두꺼운 벽을 뚫은 것이다. 여전히 숨어 울고 있는 여성폭력 피해자들이 언제라도 용기를 낼 수 있도록 우리의 목소리를 모아보자. 한 명의 목소리는 작지만, 많은 이들이 모이면 파렴치한 가해자를 벌벌 떨게 하는 천둥과 벼락이 될 수 있다.
김효정 젠더데스크 teresa@busan.com
2025-09-21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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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가을, 맥주, 그리고 롯데 자이언츠
롯데 자이언츠의 올 시즌 가을야구를 의심하지 않았던 6월 어느 날, 8년 전 부산일보 지면에 보도된 롯데의 포스트시즌 진출 기사를 찾아봤다. 정규리그 막바지 4위 롯데 자이언츠와 3위 NC 다이노스의 순위 다툼이 한창이었다. 팬들은 와일드카드전 대신 3위로 준플레이오프전을 치르기 바랐다. 팬들의 기대에 부응하듯 롯데는 당시 정규 리그를 3위로 마쳐 준플레이오프에 직행했다. 그해 롯데는 준플레이오프전에서 NC 다이노스와 5경기를 치르며 2승 3패로 아쉽게 탈락했다.
8년 전 신문을 찾아보며 올해는 잘하면 한국시리즈 진출도 가능하지 않을까 기대했다. 올 시즌 전반기 롯데는 예전과 달랐기 때문이다.
전반기 롯데는 47승 39패 3무, 승률 0.528로, 정규리그 3위에 올라 중위권 경쟁에서 확실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특히 전반기 롯데의 팀 타율은 0.280으로, 리그 1위를 찍으며 ‘공포의 소총부대’로 불렸다.
주장 전준우의 타율은 4월 0.284에서 6월 0.322까지 상승하며 팀 공격을 이끌었고, 빅터 레이예스는 리그 최다 안타로 팀 득점에 절대적 비중을 차지했다.
마운드에서는 김원중이 안정적으로 뒷문을 책임졌으며 복귀한 최준용은 필승조의 한 축으로 자리 잡았다. 여기에 알렉 감보아는 6월에만 5승 무패, 평균자책점 1.72로 KBO ‘이달의 선수’에 선정되며 선발진 불안을 상당 부분 해소했다.
무엇보다 황성빈, 윤동희 등 주전 선수들의 부상 공백을 신예들이 든든하게 채웠다. 장두성, 김동혁, 한승현, 이호준 등이 잇달아 나타나면서 팬들은 ‘마트료시카 야구’라는 애칭까지 붙여줬다. 롯데의 취약점이자 강팀의 조건인 선수층 뎁스가 강화됐다는 평가마저 나왔다.
팀이 지고 있더라도 끝까지 따라붙어 기어이 경기를 뒤집는 폭발력, 몸에 공을 맞고도 박수를 치고 진루하는 젊은 선수들의 패기, 펜스에 몸이 부딪히는 것을 겁내지 않고 공을 쫓는 집요함…. 롯데는 지난 시즌과 완전히 다른 팀이었다.
하지만 외국인 투수 터커 데이비슨이 한국에서 마지막으로 승리를 챙긴 8월 6일 이후, 롯데는 악몽같은 시간을 보냈다.
당시 10승 투수를 시즌 후반 교체하는 승부수에는 비장함마저 느껴졌다. 후반기 투수 교체는 롯데의 목표가 ‘가을야구를 넘어 한국시리즈’라는 것을 공표한 것이었다.
비장한 목표가 선수들에게 부담으로 느껴졌을까? 이후 롯데는 충격의 12연패 늪에 빠졌다. ‘타격 좋은 팀은 투수 좋은 팀보다 믿을 수 없다’는 말을 입증이라도 하듯 롯데 타선이 얼어붙어 급기야 8월에는 1할대까지 떨어졌고, 팀 순위도 6위로 추락했다.
여기에 롯데가 야심 차게 영입한 벨라스케즈는 6경기 24이닝 동안 평균자책점 10.50, 1승 4패라는 처참한 성적을 내고 있다. 13일 선발 경기서 5실점 후 1이닝도 못 채우고 내려갔을 때 관중석에서는 야유가 나올 정도다. 토종 에이스 박세웅은 불안하고, 홍민기와 이민석 등 전반기 활약했던 투수들도 부진에 시달렸으며 안정적인 클로저 김원중마저도 종종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 여기에 어이없는 수비 실책이 더해지며 한때 가을야구 희망은 고사하고 하위권 추락을 걱정할 지경까지 이르렀다.
롯데는 올해 포스트시즌에 진출할 수 있을까? 요즘은 매 경기마다 일희일비하게 된다. 최근 5연패를 가까스로 탈출한 롯데는 13일 오랜만에 살아난 타격으로 SSG를 12-11로 이기면서 5위로 다시 올라갔다. 하지만 끝까지 가슴을 졸이며 경기를 지켜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불안과 희망, 둘 다 놓을 수 없는 팬들의 심정은 역설적으로 사직야구장의 만원 기록을 낳고 있다. 올 시즌 롯데 사직구장에는 144만 명이 넘는 이들이 찾아 구단 역사상 최다 관중 기록을 세웠으며, 최근 홈 경기는 연일 관중이 가득하다. 연애 고수의 ‘밀당’처럼 롯데의 들쑥날쑥한 경기력이 팬들을 들었다 놨다 하고 있다.
올 시즌 롯데 경기 중 잊을 수 없는 장면들이 많다. 펜스 위쪽으로 날아가는 공을 끝까지 쫓아가며 잡아내고야 말겠다는 김동혁의 의지가 만든 슈퍼캐치, 4시간 13분의 혈투 끝에 연장 11회 말에 나온 이호준의 짜릿한 끝내기 안타, 견제구에 맞아 피를 토하면서도 2루를 향해 몸을 던진 장두성, 시속 157km를 찍은 좌완 알렉 감보아의 역대급 강속구, 6점차로 패색이 짙었던 경기를 12대 7로 뒤집으며 대역전극을 펼쳤던 6월 12일 kt위즈전….
올 시즌 최종 성적이 어떻게 마감되든지, 그 순간의 짜릿함과 뭉클함은 잊지 못할 것 같다. ‘경기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고, 야구는 9회말 2아웃부터’라는 말을 주문 걸듯 되뇌며, 남은 롯데 경기를 지켜볼 것이다. 가을야구 희망을 안고, 혹시나 모를 울화병 진정을 위해 맥주와 함께.
2025-09-14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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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이선좌'는 어쩔 수가 없다?
‘이선좌’. ‘이미 선택된 좌석’을 뜻하는 신조어다. 인기 있는 공연, 스포츠, 영화 등의 표를 온라인 예매할 때 자주 보게 되는 악몽 같은 단어다. 예매자가 좌석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이미 다른 사용자가 선택한 좌석을 클릭하면 ‘이미 선택된 좌석입니다’라는 메시지가 뜨는데, 손이 느린 사람들은 이 과정을 몇 번 반복하다 보면 곧 매진 사태를 맞는다. 온라인 예매 전쟁이 치열해지면서 이름난 연주자나 대중 가수의 공연 티켓은 1분 안에 매진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지난 5일 시작된 부산국제영화제(BIFF) 개폐막작 예매 과정은 어땠을까? 6일(현지 시간) 폐막한 제82회 베네치아국제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은 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수가없다’를 아시아 프리미어로 볼 수 있는 제30회 BIFF 개막식 티켓은 평소보다 빠르게 매진될 것으로 예상됐다. 하지만 이날 오후 2시 시작된 온라인 예매는 집중된 트래픽을 소화 못한 서버 탓에 지연을 반복했다. 예매 시작 40~50분이 지나서야 겨우 예매에 성공했다는 게시글들이 온라인에 올라오기 시작했다. 예매에 성공한 이들조차 기뻐하기보다는 “2시 44분에 예매 성공했어요. 이게 말이 되나요? 진짜 어이없어서 헛웃음 나왔음” 같은 후기를 남길 정도였다.
SNS에는 분통을 터뜨리는 관객들의 댓글이 넘쳐 났다. 한 예매 시도자는 △들어가자마자 무한 대기해야 하는 페이지 △대기해서 들어가고 좌석 선택했더니 무한으로 나오는 이선좌와 또 다시 무한 대기 △현황이랑 다른 좌석 선택 창 △유효 시간 만료로 중간에 튕김 △핸드폰 사용 시 화면도 제대로 로딩이 안 됨 등을 ‘열 받는 점’으로 열거했다.
‘이선좌’를 ‘이선자 씨’로 의인화해 “한 시간 동안 약 100분(명)의 이선자 씨를 만나고, 결제창으로 넘어갔을 땐 정말 믿기지 않았어요. 그런데 말입니다. 좌석만 잡으면 될 줄 알았지 결제창이 안 뜰 줄 누가 알았겠어요?”라는 허탈한 후기를 남긴 이도 있었다.
9일 시작될 일반 상영작 예매는 제대로 진행될 수 있을까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다. 지난 5일 속 터지는 예매를 경험한 이들은 “지금까지 예매하면서 역대급으로 불편했고, 최고로 기분 나쁜 예매 시스템을 경험했다” “모든 페이지 버튼마다 무한 대기, 오류 나는 예매는 난생 처음” “9일 일반 상영작 예매는 또 얼마나 전쟁 같을지…” “일반 예매는 다른 의미로 매우 기대되네” “일반 예매는 제발 순조롭도록 에러 해결해 주세요” 같은 댓글을 달고 있다.
앞서 BIFF는 2022년(27회)과 2024년(29회)에도 예매 오류 문제로 사과문까지 올리는 사태를 빚었다. 29회 행사 때는 트래픽 과부하로 인해 예매에 실패한 이들에게 결제가 진행되는 황당한 문제가 벌어졌다. 2022년에는 보다 빠른 결제를 위해 예매권을 미리 구매한 영화 팬들이 티켓 시스템 운영사의 설정 오류로 예매권을 쓰지 못하는 일도 있었다.
이처럼 온라인 예매 오류가 계속되자 30회를 맞은 올해 BIFF 측은 운영사를 바꾸며 시스템 안정화에 나섰다. 그러나 이용자들의 평가는 ‘오히려 예전만 못하다’는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로 좋지 않은 상황이다. “서버 진짜 역대급으로 최악이네요. 예매권도 다 사 놨는데, 호텔이고 기차표고 지금 다 취소할까 생각 중” “한국 사람도 이렇게 예매가 어려우면 외국인은 어떡하나. 영화제가 내수용이냐”라는 비아냥 섞인 목소리도 나온다.
일부에선 “부국제 30주년이라고 서버 30년 된 거 쓰는 거냐” “그냥 모르쇠로 가는 건가요? 나날이 좋아지는 기술에, 쇠퇴하는 시스템이라 신선하긴 하네요” 같은 말로 BIFF의 후진적 행사 운영을 꼬집기도 했다.
올해 BIFF 개폐막식 예매에 이처럼 접속이 폭증하고, 그에 따른 불만이 쇄도하는 것 역시 영화제에 대한 관심이 그만큼 크기 때문일 거다. 30회 행사를 맞아 BIFF 측은 역대급 게스트를 초청하고 경쟁 부문을 도입해 ‘부산 어워드’를 신설하는 등 관객들의 기대감을 높였다. 그렇기에 ‘예년보다 접속자가 많아서’라는 식의 해명은 영화 팬들의 불만을 누그러뜨리기엔 역부족일 듯하다.
200여 편의 일반 상영작에 대한 예매가 시작되는 9일에는 이 같은 불만이 재현되지 않아야 할 것이다. 30년간 시민들과 영화 팬들의 사랑으로 성장해 온 BIFF가 앞으로 펼쳐갈 30년의 미래 비전을 확인시켜 주는 의미 있는 행사로 올해 영화제가 잘 마무리되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선 온라인 예매 시스템 서버 점검을 비롯한 철저한 행사 대비는 필수다. 영화 팬들이 이번엔 ‘이선좌’의 악몽에서 벗어나 ‘어쩔수가없다’의 GV(관객과의 대화) 등 보고 싶은 영화 예매에 시원하게 성공하길 기대한다.
이자영 문화부장 2young@busan.com
2025-09-07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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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노란봉투법 마주한 '가짜 사장들'을 위한 항변
10명가량 둘러앉은 최근 저녁 모임에서 A 씨는 노란봉투법 얘기를 여러 번 꺼냈다. 자동차 협력사 대표인 A 씨 얘기에 개인 사업자이거나 월급쟁이인 동석자들은 “기업들이 외국으로 다 떠나면 어떻게 하느냐” “하루가 멀다 하고 파업으로 날 새게 생겼다” 같은 말로 맞장구를 쳤을 뿐, 대화는 번번이 다른 화제로 옮겨 갔다. 자리가 파할 때까지 A 씨 표정은 내내 어두웠다.
20년 노동계 숙원인 노란봉투법(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2·3조 개정안)이 지난달 24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 6개월 유예기간을 거쳐 시행에 들어간다. 수많은 근로자와 기업에 영향을 미칠 새 노사 관계 기준이다 보니 숱한 논란과 갈등이 벌어졌지만 제대로 된 사회적 합의는 거치지 못했다는 게 중론이다.
직접 당사자인 중소 하청업체 목소리가 전혀 담기지 못했다는 점이 무엇보다 안타깝다. 출범 3개월 만에 노란봉투법을 밀어붙인 정부여당과 노동계의 기세에 눌려서일까. 하청업체 목소리는 이따금 언론에 ‘익명의 하청업체 대표’ ‘기업 관계자’로 등장해 “원청 파업이 잦아지면 회사 운영이 될지 모르겠다”거나 “원청에서 계약을 끊을까 걱정”이라는 하소연 정도로 전해졌다.
당장 경제계가 우려하는 것처럼 해외로 생산시설을 옮기는 ‘코리아 엑소더스’가 벌어질 것 같지는 않다. 그것도 대기업이나 외투 기업에 해당되는 일이지 국내에서 공장을 옮기려 해도 직원 눈치를 살펴야 하는 중소 하청기업엔 ‘남의 일’일 뿐이다.
대신 기업인들은 향후 고소고발이나 파업이 잦아질 것이라 보고 살길 찾기에 나선 분위기다. 법조계 판단도 다르지 않다. 국내 주요 로펌들은 법 통과 이후 노사관계 대응팀을 꾸리고 노란봉투법 관련 세미나를 연이어 열며 호응했다. 세미나마다 1000명 안팎의 기업인이 몰렸고, 제조 부문 기업 관계자 발걸음이 많았다는 전언이다.
특히, 제조업을 산업 근간으로 한 동남권의 중소 협력사들은 타 지역보다 걱정이 더 크다. 원·하청 구조가 강고한 조선 자동차 기계 철강 등이 부울경에 몰려 있다. 이런 종속관계는 한때 ‘수출강국 대한민국’을 만드는 발판 역할을 톡톡히 했다. 하청기업들은 단가 후려치기 등 원청 횡포에 항변도 못한 채 한국 제품 가격 경쟁력 유지에 일조했다. 대기업은 돈을 벌어도 이윤을 나누는 일에는 인색했다. 그들이 지금 와서는 다단계 하청구조를 바꾸기 위한 노란봉투법이라는 또 다른 장벽을 만났을 뿐이다.
노사가 교섭 테이블에 앉아도 문제 해결은 쉽지 않아 보인다. ‘사용자 범위 확대’ ‘교섭·쟁의 대상 확대’ ‘손해배상·가압류 제한’ 등 노란봉투법 조항들이 모호하고 다툼의 여지가 많다는 평가가 노사 모두에서 나온다. ‘실질적 지배력’을 가진 사용자 여부를 가리는 일부터 책임 범위, 예상치 못한 돌발 변수 등 풀어야 할 과제가 적지 않다. 사안마다 장기 법적 분쟁이 이어질 가능성도 농후하다.
노란봉투법이 순조롭게 자리 잡아 노동자 권리가 신장돼도 하청기업들은 더 힘겨워지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원청이 권한과 교섭권이 강화된 하청 노동자와 직접 교섭을 벌이는 한편 그 손실은 원가 절감을 요구하며 하청업체에 떠넘기는 상황도 예상된다. ‘대화의 장’에 끼지도 못하는 하청기업들은 인건비 상승, 파업 리스크, 원청과의 거래 단절까지 걱정할 판이다.
노사 갈등이나 제도 개선 기간이 길어지는 것은 하청업체엔 더 암울한 상황이다. 노란봉투법 성공 여부는 법률의 모호함을 최대한 구체화하고 그 과정을 얼마나 단축시키냐에 달렸다. 정부와 노동계도 한동안 혼란이 불가피하다는 점은 인정한다. 하지만 “법을 시행한 뒤 문제 있으면 고치자”는 정책 핵심 당국자 언사는 지나치게 안이하다. 대립이 격화된다면 하청 중소기업 현실까지 고려될 기회는 더 줄어든다.
무엇보다 일순간 추락한 하청업체 기업인들 자존심은 어떻게 살려야 할지 걱정이다. “진짜 사장이 나서라”는 노동계의 외침에 수십 년 한국 경제 성장의 주역이라는 자부심으로 살아온 수많은 중소 기업인이 ‘가짜 사장’ 신세가 돼버렸다. 직원 월급 주려고 은행을 쫓아다니며 손을 벌리고, 제품을 개선하려고 국내외를 찾아다닌 노력은 노란봉투법에 짧은 수식어로도 담기지 않았다. 그저 ‘돈만 벌면 그만인 사람’으로 치부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재계는 정부에 입법 보완을 요구하고 있지만 유예기간 6개월간 제대로 된 목소리가 담길 수 있을지 우려한다. 사용자 범위, 노동쟁의 개념, 경영상의 권한 침해 여부 등 하나하나가 논란과 갈등의 요소인 만큼 보완책이 나온다 해도 부정적 영향이 제대로 제거될지 미지수다. 정부와 노사가 또 다른 ‘힘의 사각지대’로 내몰리는 경제 주체를 만들지 않겠다는 각오로 최선의 해법을 내주길 기대한다.
2025-08-31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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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지역을 위해 다시 공공의대 추진을
국립공공보건의료대학, 이른바 ‘공공의대’ 논의는 대입 수시와 닮았다. ‘현대판 음서제’가 될 거란 우려 속에 입시 결과나 졸업생 능력에 노골적인 의구심을 드러내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수능 시절 상대적으로 부진했던 서부산권 고교가 수시 이후 사립학교를 중심으로 돌풍을 일으켰다. 국영수 일변도를 벗어던진 고등학교 풍경도 한결 자유로워 보인다. 제도의 기본 취지는 이해할 생각도 않고 폄하만 하지 않았나 반성해 보는 요즘이다. 수많은 이해관계가 상충하는 사회다. 어느 제도든 그에 대한 작용과 반작용은 있기 마련이었던 거다.
수시 이야기를 꺼낸 건 공공의대에 대한 거부감을 누그러뜨려야 할 시점이 됐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다. 특히나 지역에서는 말이다.
공공의대 논의는 10년 전 박근혜 정부 시절 순천대 의대 관련 법안을 놓고 시작됐다. 사관학교처럼 학비와 기숙사를 전액 국비로 지원하고, 면허 취득 후에는 일정 기간 국가에서 지정하는 의료 취약 지역 공공의료기관에서 의무적으로 복무하도록 하는 게 골자다. 논의는 문재인 정부 시절까지 이어졌지만 반발이 상당했다. 그 후 바통을 넘겨받은 윤석열 정부는 공공의대 대신 의대 증원 쪽으로 가닥을 잡으며 논의는 수면 아래로 가라 앉은 상태다.
지금도 ‘공공’의대가 배출한 의사와 그들의 의료 서비스를 믿을 수 있겠느냐는 의구심이 크다. 그러나 지난해부터 불거진 의정 갈등에서 가장 큰 피해자가 된 건 지역이었다. 이제는 지역이 나서서 공공의대를 더 강하게 요구할 시점이다. 현장을 지킬 필수 인력도 아쉬운 터라 공공의대의 입시 결과와 의사의 질은 따질 계제가 아니다.
이달 경남 밀양에서는 밀양윤병원이 지역응급의료기관 지정을 자진반납했다. 응급실을 운영해야 하는데 의사 5명 중 전공의 출신 3명이 수련병원으로 돌아간다며 동시에 사직서를 낸 것이다. 이 병원은 밀양의 유일한 지역응급의료기관이었다. 강릉의료원 응급실에서도 의사 2명이 수도권 수련병원으로 복귀하겠다는 의사를 밝혀 비상이다.
과연 이 난리통이 밀양과 강릉에만 그치고 말까. 모르긴 해도 하반기 전공의 모집이 가속화될 수록 지역의 응급의료 체계는 더 흔들릴 게 뻔하다. ‘우리 요구 안 들어줬으니 잠시 지방에 가셔 알바라도 하고 오겠다’고 생각한 전공의들이 과연 저들뿐이었을까.
급한 대로 경남도 등 일부 지역에서 지역 필수 의사제가 시범 운영에 들어갔고, 순조로운 출발을 보이는 모양새다. 경남으로 전입온 필수과 의사에게는 병원 약정 급여 외에 매달 400만 원의 근무 수당을 주기로 했다. 전입 환영금에 매달 양육 지원금까지 약속했더니 정원 24명에 19명이 지원했다.
그러나 지역의사제 자체는 대증 요법에 지나지 않는다. ‘의료 태업’ 사태를 거치며 수당 몇 푼으로는 고삐 풀린 의료진을 붙들어 둘 수 없다는 게 드러났다. 시급한 지역의 필수 의료 인력은 지역 필수 의사제로 충당하고, 장기적으로 부울경처럼 3~4개의 광역지자체가 뭉쳐서 지역별로 공공의대를 도입할 수 있도록 고삐를 조여야 할 타이밍이다.
이번 사태를 거치며 의료야말로 그 어느 분야보다 더 로컬이 강조되고 공공성을 부여해야 한다는 걸 다들 여실히 깨달았다. 수도권을 제외한 지역 의대 출신 의사의 지역 정착률은 30% 안팎. 그 동네에서 의사 면허를 따도 그 동네에서 장사는 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지역에서 의사를 하는 게 싫다면 차라리 ‘로컬 보이’에게 그 기회를 주고 그에 대한 충성심과 의무를 요구하는 게 맞다. 적어도 40대까진 면허를 받은 지역에서 의술로 보답할 수 있도록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이후 거취는 스스로 자신이 정하도록 하면 될 일이다. 추가적인 지역 봉사에 대해서는 지역 필수 의사제 등으로 이를 보전한다면 더 큰 시너지가 기대된다.
다들 제 자식 의사 만들지 못해 안달인 시절에 의사 진입 장벽이 낮고, 지원도 파격적이라는 인식이 확산하는 건 지역 입장에서도 반길 일이다. 당장 지난해 의대 증원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수도권 극성 학부모의 전학 문의로 부산시교육청 전화통에 불이 났던 해프닝을 기억해 보라.
다행스러운 건 의외로 공공의대 추진에는 여야가 큰 대립각이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물론, 의료계는 공공의대 논의마저도 반발할 게 뻔하다. 그러나 지금 와서 의료계의 입장에 공감할 이들은 극소수다. ‘공공의대는 제대로 된 의사를 배출할 수 없다’는 논리로 다시 여론을 호도하겠지만 그간 의료계가 보여준 민낯이 너무 추했다.
서글프게도 당장 지역에서 필요한 건 의료진의 질에 앞서 의료진의 숫자다. 새 정부와 광역 지자체들의 빠르고 탄력 있는 공공의대 추진을 기대한다.
2025-08-24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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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지연된 정의'마저 내팽개친 광복절 특사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지연된 정의’조차 아쉽기만 하다. 국고보조금 부정 수급과 횡령 등의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뒤늦게 징역 1년 6개월(집행유예 3년) 형을 확정 받은 윤미향 전 국회의원이 판결 선고 불과 4개월 만에 특별사면됐다.
징역 1년 6개월은 의원직 상실형에 해당한다. 그러나 윤 전 의원은 임기 4년을 보란 듯 채웠다. 터무니없이 지연된 재판 덕이다. 검찰 기소 후 무려 4년 2개월이 지나서야 판결이 났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윤 전 의원 사례를 두고 법철학의 오래된 경구를 떠올렸다.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그런데 이번 사면은 ‘지연된 정의’마저도 헌신짝으로 만들었다.
더 황당한 것은, 일부 정치권이 이번 사면을 ‘죄의 사면’이 아니라 ‘억울한 피해자 구제’로 포장한다는 점이다. 민주당 추미애 의원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윤 전 의원을 ‘사법 피해자’로 표현했다. 돈만 세탁되는 것이 아니다. 범죄도 세탁된다.
굳이 다시 확인하지만, 법원 판결에 따르면 윤 전 의원은 명백한 범죄자다. 단순히 회계 절차를 소홀히 한, 예를 들어 단체 명의의 통장을 사용해야 함에도 개인 명의 통장을 사용했다던지 하는, 그런 수준이 아니다.
2019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고(故) 김복동 할머니의 장례 당시, 조문객들이 낸 현장 조의금만으로도 장례비는 충분히 충당됐다. 그럼에도 윤 전 의원은 장례 후로도 한 달 가까이 SNS에 ‘장례비가 부족하다’는 글을 남겨 1억 2000만 원가량을 모금했다. 기부자들은 당연히 그 돈이 장례비로 쓰일 줄 알았지만, 그 중 1억 원 이상이 여러 시민단체 후원과 단체 활동가 자녀 장학금 등 엉뚱한 용도로 사용됐다.
그뿐 아니다. 윤 전 의원은 십수 년 동안 단체 지원금과 위안부 피해자 후원금 8000만 원 상당을 용도 불명으로 사용했고, 국고보조금 6000여만 원을 부정하게 사용한 혐의도 법원에서 인정됐다.
야당은 이번 사면에 대해 격분하고 나섰다. 국민의힘 송언석 비상대책위원장 겸 원내대표는 사면 발표 직후 “사면권이 대통령 고유 권한이라고 하지만, 일말의 반성도 없는 파렴치한 범죄자들에게 면죄부 주는 사면은 모독”이라며 “국민의힘은 어떤 비리 정치인 사면에도 반대한다”고 밝혔다.
‘야당이 모처럼 옳은 말을 하는구나’ 놀랐고, 그 말이 송 위원장의 발언이라는 점에서 재차 놀랐다. 송 위원장은 격분하기 며칠 전 대통령실 관계자에게 자당 홍문종·정찬민·심학봉 전 의원의 사면을 부탁하는 문자를 보냈다. 홍 전 의원은 횡령, 정·심 전 의원은 뇌물수수로 각각 징역형을 선고받았고, 이들 모두 윤 전 의원과 함께 사면됐다. 송 위원장은 자신의 문자 내용 따윈 며칠 새 모조리 잊어버린 듯 하다.
송 위원장은 윤 전 의원을 ‘파렴치범’으로 규정했다. 같은 사면 명단에 오른 당 동료들에 대해선 뭐라고 평가할지 궁금하다. 혹여 추 의원이 그러했듯 ‘사법 피해자’라 우길 생각일까. 이렇게 제 식구는 사법 피해자로, 상대는 파렴치범으로 규정해 목소리를 높이고, 정작 뒤로는 포로 교환하듯 사면 거래를 한다. 이쯤 되면 대통령 특별사면권의 존재 이유 자체가 무색하다.
윤 전 의원은 사면 직전 페이스북에 자신을 비난하는 이들을 향해 “참 불쌍하다”고 썼다. 맞다. ‘파렴치범’임에도 ‘사법 피해자’로 둔갑한 힘있는 사람들을 보며, 힘없고 빽 없는 선량한 서민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곤 메마른 욕지거리 정도일 테다. 힘있는 사람들의 시선엔 그런 그들이 그저 불쌍하게만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윤 전 의원은 당신이 불쌍하게 여기는 사람들 중 과거 당신이 활동했던 단체에 기부한 이도 적지 않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결국 당신이 함부로 쓴 후원금 또한 (일부이나마) 바로 힘없고 빽 없는 그들의 주머니에서 나온 셈이다. 그들 중 일부는 자신의 후원금이 엉뚱한 곳에 쓰인 것에 분노해 후원금 반환 소송을 벌였고, 법원은 “후원금을 모두 돌려주라”고 화해 권고 결정했다. 윤 전 의원은 반환을 거부하고 있다. 윤 전 의원은 그들이 불쌍하다고 혀를 차기 전에 법원의 결정부터 따라야 할 테다.
그리고 이번 사면을 결정한 집권 여당의 모든 사람들, 또 사면을 거래하려 했던 야당 정치인들은 “법무부는 이용수 할머니에게 사면 여부를 여쭤봤나”라는 김재련 변호사의 질문에 답해야 한다.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 중 생존자는 이제 이용수 할머니를 비롯해 6명밖에 남질 않았다. 이용수 할머니는 윤 전 의원의 사면에 대해 말을 아꼈다. 윤 전 의원 사면에 대한 그분들의 심경을 함부로 추측할 순 없지만, 하나만큼은 확실하다. 어떤 권력도 그분들보다 먼저 윤 전 의원의 죄를 용서할 순 없다.
김종열 정치부장 bell10@busan.com
2025-08-17 [18: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