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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준영의 집피지기] '똘똘한 한 채' 이제는 끝낼 때
부산의 한 이전 공공기관에서 근무하는 A 씨는 부동산 매매를 고민하고 있다. 경기도에 있던 집을 팔아 부산으로 가족들을 옮기며 ‘기러기 아빠’ 생활을 청산할지, 아니면 서울 외곽에 집을 사고 부산에서는 전세를 구할지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이런 고민을 A 씨만 해본 건 아닐 테다. 여러 직장 선배들의 조언은 ‘무조건 서울에 입성하라’는 후자였다고 한다. 어떤 정책 속에서도 언제나 우상향하는 서울 집값을 믿으라는 거였다.
이른바 ‘똘똘한 한 채’다. ‘영끌’을 통해 가치가 높은 집 한 채만 보유해 세금 부담을 최대한 줄이며 향후 차익 실현을 노리는 투자 방식이다. 여기서 ‘똘똘한’이라는 단어를 ‘서울’이라는 지명으로 대체해도 별 무리가 없다. 34평짜리 아파트 한 채가 수십억 원을 호가하는 강남3구나 한강벨트면 금상첨화다. 서울 아파트는 주거용이 아닌 전 국민이 눈독 들이는 투자처가 된 지 오래다.
다주택자를 억지로 때려 잡기 위해 만든 세제 체계가 이를 부추긴다. 실제로 같은 금액의 아파트를 보유하더라도 서울에 한 채를 보유한 사람이 지방에 여러 채를 보유한 사람보다 많게는 수억 원의 양도소득세를 아낄 수 있다. 지금처럼 지방이 침체된 상황이라면 서울의 한 채가 수억 원의 매매 차익을 더 챙길 수 있음에도 말이다.
정부는 지난 15일 서울 전역과 경기도 12개 지역을 규제지역으로 묶고 주택담보대출 규제를 강화하는 ‘초강력’ 대책을 내놨다. 앞선 두 차례의 부동산 대책에도 강남3구나 한강벨트의 집값이 잡히지 않고 서울 외곽으로 상승세가 확산되면서 실시한 조처다. 똘똘한 한 채를 정조준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강력한 규제 카드를 꺼내들었지만 효과는 미지수다. 똘똘한 한 채 현상과 부동산 초양극화는 기울어진 과세 구조에서 촉발됐다. 하지만 세금은 건드리지 않고 규제지역과 대출로만 때려 잡으니 ‘반짝’ 효과 외에는 별다른 파급력이 없을 수 있다는 것이다. 대출 없이 수십억 원을 감당할 수 있는 이들이 강남으로 더 쏠릴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연말까지 부동산 양극화 해소 효과를 지켜본 뒤 다음 부동산 정책 발표 때는 지방에 대한 부양책도 함께 나와야 한다. 지방에 한시적으로 취득세 중과를 완화하는 등 지방에도 눈을 돌릴 수 있는 정책을 만들어줘야 한다. 서울이 죽는다고 지방이 살아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한시적인 세제 완화 혜택으로 지방 부동산이 급등할 수 있는 여건도 되지 않는다. 부동산 양극화는 지역균형발전의 가장 큰 걸림돌이다. 지방에 있는 우리 집도 ‘똘똘한’ 한 채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줘야 한다.
2025-10-19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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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태우의 맛있는 여행] 과잉관광 부작용 없는 프랑스
2025년 세계 관광의 가장 큰 화두는 오버투어리즘, 즉 과잉관광이다.
세계관광여행위원회는 최근 발표한 자료에서 ‘지난해 세계관광 경제 규모는 11조 10000억 달러로 역사상 최대’라고 밝혔다.
또 유엔관광기구(UNWTO)가 최근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24년 전 세계 주요 관광대국의 여행객은 크게 늘었다. 프랑스는 지난해 1억 200만 명으로 2년 연속 1억 명을 기록하면서 ‘국가별 방문객 순위’ 30년 연속 1위를 차지했다. 스페인은 9376만 명으로 1억 명 돌파를 눈앞에 두면서 2위를 차지했다.
이처럼 세계관광이 코로나 팬데믹 이전 수준 회복을 넘어 사상 최대치를 기록하는 상황이 되자 여러 나라에서 과잉관광 부작용이 심해지고 있다. 이탈리아, 포르투갈, 스페인에서는 과잉광광에 반대하는 항의시위가 수시로 벌어지고, 그리스에서는 스프레이로 항의 문구를 새기는 그라피티가 확산했다.
유럽만 그런 게 아니다. 이웃나라 일본도 과잉관광 부작용에 시달린다. 지나치게 많은 관광객 때문에 지역 주민이 일상생활 영위에 어려움을 겪고 물가가 상승한 게 대표적인 부작용이다. 일본은 2022년 383만 명으로 ‘국가별 방문객 순위’에서 43위에 그쳤지만 엔저 덕분에 2023년 2507만 명으로 15위로 뛰어오르더니 지난해에는 3680만 명으로 7위를 기록해 ‘톱10’에 이름을 올렸다.
그런데 30년 동안 관광객 순위 1위를 차지한 프랑스에서는 일본이나 유럽의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과잉관광에 반대한다는 목소리가 그다지 심각하지 않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관광 전문가들은 프랑스의 상황을 두고 다양한 이유를 손꼽는다. 각 지역 관광 인프라가 다른 나라에 비해 튼튼한 데다 관광객 방문이 파리에만 한정되는 게 아니라 프랑스 전역으로 분산되는 게 이유라고 지적한다.
한국은 ‘국가별 방문객 순위’에서 2023년 1103만 명으로 26위였지만 K팝을 필두로 한 문화 수출에 힘입어 지난해 1637만 명을 기록하며 18위로 뛰어올랐다. 서울시 자료에 따르면 서울 방문객은 2024년 1212만 명이었다. 한국 전체 방문객 4명 중 3명이 서울에 갔다는 이야기다. 이 같은 상황이 계속된다면 서울도 머지않아 과잉관광으로 인한 심각한 부작용에 시달리게 될 것은 뻔한 일이다. 청년, 저소득층이 임대해야 할 주택이 외국인 관광객용 숙박시설로 바뀌어 심각한 주택난, 주택가격 상승, 생활고 압박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과잉관광 부작용이 조금씩 떠오르는 지금이야말로 프랑스에서 배울 때다. 관광객을 파리에만 머물게 하지 않고 지역 도시로 분산시키는 데 성공함으로써 후유증을 최소화시켰다는 분석을 눈여겨볼 때다.
2025-10-12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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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철의 정가 뒷담화] BIFF와 한국 정치 ‘그들만의 리그’
1996년 대한민국 최초 국제영화제로 시작한 부산국제영화제(BIFF)가 지난 26일 막을 내렸다. BIFF가 올해 서른 돌을 맞이하기까지는 부산시민들 그리고 영화를 사랑하는 국민이 있었다. 그런데 올해만큼은 작금의 대한민국 정치 현실을 떠올리게 한다.
BIFF가 첫발을 뗄 때만 하더라도 감독, 배우 등 영화인들만의 행사가 아닌 영화 자체를 사랑하고, 배우를 응원하는 전국에서 몰려온 일반 시민들도 뒤섞여 즐길 수 있는 말 그대로 축제였다. 초창기만 하더라도 해가 진 후 거리에는 쏟아진 시민들과 영화인들이 함께 가까운 거리에서 인사를 주고 받았으며, 때로는 소주잔을 함께 기울이며 취기가 오른 때에는 영화 업계 관계자나 배우 그리고 팬이 함께 한국 영화 산업의 미래를 그려나가는 훈훈한 분위기가 연출되기도 했다.
이제는 부산을 찾은 감독, 배우들은 공식 행사가 아니면 길거리에서 자연스레 만나긴 어렵다. 더 이상 영화제 기간 중 해운대의 밤에서 과거의 낭만을 느끼기란 쉽지 않다. 'OO의 밤' 등 공식 영화제 행사 이후 밤에 진행되는 BIFF의 '진짜 영화제'는 대관한 장소에서 관계자들만 모인 형태로 이뤄진다. 초대받지 못한 이들은 출입조차 어렵고, 경호원 제지를 받기 십상이다. 과거 영화제 성공의 기틀이 된 영화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함께할 공간은 드물다. 이른바 '그들만의 리그'가 된 셈이다.
안타깝게도 지금 거대 양당의 정치 행태도 BIFF 못지 않은 ‘그들만의 리그’로 전락하고 있는 실정이다. 거대 양당 모두 일반 국민이 모여있는 광장이 아닌 자기들만의 공간으로 더욱 깊게 들어가고 있는 모습이다.
3년 만에 정권을 되찾은 여당은 ‘개혁’이란 두 글자를 앞세워 자신의 입맛에 맞게 삼권분립을 뒤흔들고 있다. 정확하게는 강성 지지층 ‘개딸’들만 바라보며 내부의 공개적인 우려의 목소리에도 입법, 행정 권력에 이어 이제는 사법 권력까지 그들의 욕망은 끝이 없는 모습이다.
그렇다고 비상계엄과 탄핵을 거치며 바닥을 찍고 있는 제1야당 국민의힘에도 평범한 일반 국민이 기댈 여지는 없다. 2019년 황교안 체제 이후 5년여 만에 거리로 뛰쳐나갔지만 정작 선행돼야 할 쇄신은 없다. 여기다 각 당협별로 할당된 동원 인원수, 그리고 이들로부터 명목상의 회비는 받지만 이걸로 충당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비용은 내부에서도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대한민국은 헌법 제1조를 통해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규정하고 있다. 각 당에서 추산하고 있는 권리·책임당원(민주당 약 110만 명, 국민의힘 약 74만 명)이 아닌 대한민국의 5000만 일반 국민이 그들이 주장하는 ‘선출된 권력’의 근간이다.
2025-09-28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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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호의 금융포커스] 금융사 해킹 본질은 신뢰 위기
국내 주요 기업에 대한 잇따른 해킹으로 온 나라가 술렁이고 있다. 보안이 생명인 금융사들까지 해커들의 먹잇감으로 전락하면서 우리 사회 핵심 인프라의 허술한 보안 체계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더 큰 문제는 이를 쉬쉬하다 사태를 키우는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 식 대응에 소비자들이 분통을 터뜨리고 있다는 점이다.
대표적 사례가 롯데카드다. 회원만 960만 명에 달하는 이 회사는 지난달 14일 해킹을 당했지만, 2주가 지나서야 사태를 인지했다. 처음에는 약 1.7GB의 데이터 유출이라고 발표했으나, 실제 피해 규모는 무려 200GB. 카드번호·유효기간·CVC번호까지 유출된 고객만 28만 명에 달했고, 단순 정보까지 포함하면 고객 세 명 중 한 명이 피해를 입었다.
늑장 대응은 롯데카드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난 7월 SGI서울보증에 침투한 랜섬웨어는 전산 시스템을 마비시키기 전 이미 내부에 잠복해 있었다. 특히 서버 보안의 핵심인 VPN 비밀번호를 기본 값인 ‘0000’으로 방치했다는 사실은 충격을 더했다.
사고 자체보다 더 심각한 것은 금융사들 태도다. 해킹이 발생할 때마다 되풀이되는 답변은 “개인정보 유출 사실은 확인되지 않았다”는 안일한 변명 뿐이다. 침해 사실을 늦게 인지하고, 피해 규모를 축소해 발표하려는 모습은 공통된 행태다.
문제의 본질은 신뢰다. 금융업은 소비자가 자신의 소중한 재산을 맡길 수 있다는 믿음 위에서만 존립할 수 있다. 단순 시스템 마비에도 생활에 불편이 큰 시대에 민감한 개인정보가 범죄에 악용될 수 있다는 불안은 치명적이다. 한두 기업의 문제가 아닌 만큼, 금융권 전체의 신뢰 붕괴를 막아야 한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금융사들은 최근 수년간 디지털 전환(DX)과 인공지능(AI) 투자에는 열을 올리면서 보안 예산은 오히려 줄이고 있다. 국내 금융권의 보안 예산 평균 비중은 9.6%로, 미국(13.2%)에 크게 못 미친다. 롯데카드 역시 2021년 12%에서 2023년 8%로 하락했다. 혁신의 속도는 강조하면서 보안은 뒷전으로 밀어낸 결과가 이번 사태다.
보안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 비용이 아니라 자산이다. 사고가 터지고 뒤늦게 땜질하는 방식은 고객 불안만 키운다. 이재명 대통령이 “보안 사고를 반복하는 기업에 대해 징벌적 과징금을 포함한 강력한 대처”를 지시한 것도 결국 금융권의 신뢰 위기를 우려했기 때문이다. ‘이자 장사’라는 비판에 시달리는 금융사들이 보안마저 등한시한다면 소비자들이 등을 돌리는 것은 시간 문제다. 신뢰를 잃은 금융사는 시장에서 존재할 수 없다. 해킹에 뚫린 것은 시스템이 아니라, 바로 우리 사회와 소비자 신뢰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2025-09-21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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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성의 타임 아웃] 11명의 축구 선수
‘캡틴’ 손흥민이 미국 로스앤젤레스를 뜨겁게 하고 있습니다. 잉글랜드 토트넘에서 미국 메이저리그사커(MLS) 로스앤젤레스FC(LAFC)로 이적한 손흥민의 열풍은 상상 이상입니다. 손흥민의 경기가 열리는 입장권 가격이 천정부지로 오르고, 티셔츠 판매량이 급증해 ‘축구의 신’ 리오넬 메시의 인기를 능가할 정도입니다. MLS 3경기 만에 환상적인 데뷔골을 터트린 손흥민은 14일 세너제이와의 경기에서도 경기 시작 52초 만에 리그 두 번째 골을 기록하며 월드클라스급 활약을 펼치고 있습니다. 손흥민이 MLS의 인기마저 끌어올리고 있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세너제이 원정경기에서도 한 경기 최다 관중 신기록을 세웠다는군요.
지난주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이 치른 미국과 멕시코의 평가전에서도 손흥민은 2골 1도움으로 맹활약했습니다. 당시 중계를 하던 TV 캐스터의 말이 생각납니다. “대한민국은 손흥민을 보유한 나라입니다”. 멋진 말입니다.
딸과 함께 A매치 평가전을 보다 문뜩 옛날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딸은 초등학교 때 프로축구 부산 아이파크 서포터즈를 할 정도로 축구를 좋아했습니다. 경기 직전 선수들과 함께 입장하는 ‘에스코트 키즈’ 경험도 있지요. 당시 딸은 “아빠! 축구는 왜 11명이서 해?”라는 질문을 한 적이 있는데, 지금 생각해도 식은땀이 납니다. 축구 담당기자가 축구 한 팀 선수가 왜 11명인 줄 몰랐기 때문입니다.
축구 한 팀은 왜 11명일까요. 축구의 기원은 고대 중국에서부터 중세 유럽에까지 다양하게 존재했습니다. BC 200년쯤 이미 축구와 비슷한 경기가 중국에서 행해졌고, 고대 그리스에서도 축구와 유사한 특징을 갖는 경기가 열렸다고 전해집니다. 당시에는 인원 제한이 없어 수십 명이 함께 뛰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1863년 영국축구협회가 설립되면서 현대 축구의 규칙이 정립되기 시작하는데요. 당시 한 팀의 축구 인원을 11명으로 했다는 게 정설입니다.
당시는 왜 11명을 기준으로 했을까요. 영국 사립학교 기숙사의 방 정원이 10명이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당시 각 방에는 10명의 학생 외에 방장 또는 사감 역할을 맡고 있는 사람이 있었는데 방 단위로 축구 경기를 하다 보니 팀 정원이 11명이 됐다는 것입니다. 영국에서 시작된 크리켓과 필드하키도 한 팀이 11명이라는 점도 이러한 설을 뒷받침합니다.
축구장의 크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축구장은 길이 100~110m, 폭 64~75m의 크기로 돼 있습니다. 이 규격에서 이상적인 경기를 할 수 있는 것이 필드플레이어 10명과 골키퍼 1명이라는 것입니다. 이유야 어찌됐건 현재 11명의 선수로 다양한 전술이 나오면서 재미를 더하고 있으니 축구는 흥미진진한 경기입니다.
2025-09-14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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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금아의 그림책방] 특별한 돌멩이
발부리에 툭 걸린 돌멩이. 그저 그런 평범한 돌 하나로 생각의 집을 짓는 작가들이 있다.
돌에 대한 편견을 깨기 위해 오소리 작가의 그림책 <돌머리들>(이야기꽃)을 펼친다. ‘돌머리’ ‘쓸모없는 돌멩이’ 같은 부정적 표현은 돌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에 나온다. 돌은 많은 창조의 시작점이다. 인간의 삶을 바꾼 수많은 도구가 돌에서 나왔다. 돌은 안식처를 만드는 건축 자재로, 감동을 주는 예술 작품의 재료로 사용됐다. 돌은 지구 생명체의 근원을 찾아가는 길을 알려주고, 간절한 믿음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이렇게 쓸모가 넘치는 돌이 그 속에 어떤 보물을 품고 있을지 겉만 봐서는 알 수 없다.
‘네가 의미와 이유를 찾으면 모든 돌은 중요한 돌이 돼.’
나만의 돌을 찾는 이에겐 메리 린 레이가 쓰고 펠리치타 살라가 그린 <딱 맞는 돌을 찾으면>(피카주니어)을 추천한다. 어린 시절 많은 아이가 돌을 갖고 놀았다. 바위에 기어오르고 돌탑을 쌓고 물수제비를 떴다. 조약돌을 주워 보관하는 친구도 있었다. 그저 놀이처럼 보이는 순간마다 ‘발견’이 있다. 유달리 반짝이는 돌을 발견하는 것처럼, 아이들도 자기 나름의 특별함을 찾는다. ‘너의 손에 꼭 맞는 딱 좋은 돌’이 어딘가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 위로로 다가온다. 그렇게 딱 좋은 돌을 찾기 위해 ‘마주치는 모든 돌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네 보라’는 이야기도 도움이 된다.
돌멩이에 이름을 붙이고 노는 아이가 있다면, 힐데 헤이더크-후트 작가의 <돌멩이도 춤을 추어요>(바람의아이들)를 읽어주자. 동그란 돌멩이처럼 혼자가 된 날. 아이의 놀이에 여러 돌멩이가 등장한다. 돌멩이들은 모였다 흩어졌다 하면서 다양한 상황을 만들어낸다. 엄마·아빠와 함께하기도 하고, 친구들과 나란히 서기도 한다. 혼자 떨어져 보기도 하고 같이 춤을 추기도 한다. 그러다 돌멩이들이 둥글게 모인다. ‘모두들 둥글게 둘러앉아 있어요. 아무도 안 울어요. 다들 웃어요.’(그림)
돌멩이들이 하나씩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이 온다. 아이들이 겪을 수 있는 상황과 감정이 투영된 ‘돌멩이 놀이’의 끝이 쓸쓸하면 어쩌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혼자 남은 동그란 돌멩이 앞에 마법 돌멩이가 환하게 빛나고 있기 때문이다. 작은 돌 하나에서 얻은 생각이 삶에 깊이를 더한다. 발부리에 걸린 돌멩이도 참 특별하다.
2025-09-07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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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영의 문화시선] 35년 만의 귀환, 홍성담 판화
사진 한 장마저도 겁에 질려서 내놓을 수 없던 시절이 있었다. 엄혹했던 그때 그 시절, 민중미술가 홍성담(1955년생) 작가의 ‘오월 판화 연작’은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참상과 시민 항쟁 의지를 국내외에 생생하게 알리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 판화 연작은 〈새벽〉이라는 제목의 연작 판화집으로도 나왔으며, “항쟁 당시의 분노, 슬픔, 희망 등 다양한 감정과 진실을 담아내 민중미술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홍 작가가 1980년 5·18 민주화운동 이후 수배와 1989년 투옥을 거치는 동안 그의 초기 작품은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이때 그를 여러모로 후원한 것이 한국 가톨릭이었고, ‘오월 판화 연작’ 첫 작품 공개나 ‘오월 판화 연작’ 첫 전시도 가톨릭을 통해 이뤄졌다. 또한 일부는 홍 작가 구명 운동과 후원 목적으로 독일로 작품이 반출돼 한국의 비민주적인 현실을 알리는데 기여했다.
이번에 독일에 있던 판화 초기작 50여 점과 각종 자료 등 100여 점이 35년 만에 작가 품으로 돌아온다는 반가운 소식이다. 그것도 1989년 ‘오월 판화 연작’ 첫 전시가 이뤄진 것으로 추정되는 부산 가톨릭센터에서 ‘홍성담 독일 유배 작품 35년 귀환 기념 전시’(가제)가 추진돼 성사 여부에 귀추가 주목된다.
돌아오는 작품 대부분은 홍 작가가 1980년대에 제작한 판화들로, 광주민주화운동뿐 아니라 우리나라 탈춤과 농악 등을 표현했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작가 자신도 어떤 작품이 ‘반출’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어서다. 수배 중 제작한 것들이어서, 홍 작가 주요 판화(고무판화, 목판화)의 초기 희귀작일 가능성이 크다.
1990년 독일 순회전은 홍 작가가 1989년 ‘민족해방운동사’ 걸개그림 작업에 참여했다가 3년간 옥고를 치른 것이 계기였다. 독일에는 이미 홍 작가가 전시했던 작품 중 일부가 있었고, 그가 결성한 시각매체연구회가 찍은 판화를 더해 행사를 준비했다. 하지만 작가 본인은 1992년 8월 석방된 이후에야 독일 전시 존재를 알게 된다. 당시 유럽 전시는 큰 반향을 일으켜 국제사회의 석방 촉구가 잇따랐다.
홍 작가의 판화는 과거 한국의 민주주의와 인권 탄압을 보여주는, 살아 있는 기록이자 역사라는 점에서 의미를 더한다. 또한 홍 작가는 독일 유배 한국 미공개 작품 순회 첫 전시를 부산가톨릭센터에서 개최함으로써 종교와 사회, 종교와 예술의 동행을 다시금 성찰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했다. 작품은 독일에서 봉인된 채로 9월 1일 홍 작가 안산 작업실에 도착한다. 작가는 이 상자를 개봉하지 않고 부산가톨릭센터로 가져와 현장에서 봉인 해제한 뒤, 이를 공개할 예정이다.
2025-08-31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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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준영의 집피지기] 세컨드 홈
“국가에서 ‘투자 금지 지역’을 손수 알려주셨다.” “정부에서 사라고 하면 사면 안 됨, 사지 마라고 할 때 사야 함.”
정부가 지난 14일 발표한 ‘지방 중심 건설투자 보강 방안’ 뉴스에 달린 누리꾼들의 반응이다. 많게는 수천 개까지 ‘좋아요’가 달릴 정도로 커다란 공감을 얻은 댓글들이다. 어째서 이런 반응이 나오게 된 걸까.
정부는 이날 발표에서 ‘세컨드 홈’ 적용 지역을 ‘인구감소지역’에서 ‘인구감소관심지역’까지 확대한다고 밝혔다. 지난해 정부는 지방 도시의 생활인구를 늘리기 위해 집 한 채를 추가로 사도 1주택자와 같은 세금 감면 혜택을 주는 세컨드 홈 제도를 도입했다. 정부가 이번에 대상 지역을 확대함에 따라 강원 강릉·동해·속초·인제, 전북 익산, 경북 경주·김천, 경남 사천·통영 등 9곳에 추가로 세컨드 홈 특례를 받을 수 있게 됐다.
부산의 경우 동구와 서구, 영도구는 인구감소지역이고 금정구와 중구는 인구감소관심지역에 포함된다. 하지만 광역시라는 이유로 지난 대책 발표 때와 마찬가지로 대상에서 제외됐다. 광역시에 세컨드 홈 혜택을 주면 주택가격이 급등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수도권에 속하는 인천 정도를 제외하면 부산, 대구, 광주 등 대다수 광역시들이 고질적인 집값 하락에 몸살을 앓고 있다. 부산만 해도 2022년 6월부터 시작된 집값 하락세가 3년 2개월째 한 차례 반등도 없이 계속되고 있다. 일부 세금을 한시적으로 감면해준다고 해서 아파트값이 널뛰는 정도의 폭등 상황이 되질 못한다는 것이다.
시골에 별장 하나 더 지으면 세금을 깎아준다는 정도의 인식으로 접근해서는 지금의 부동산 양극화를 막을 수 없다. KB부동산에 따르면 전국 5분위(상위 20%) 아파트 평균 가격이 14억 원을 돌파하면서 하위 20% 간의 격차가 최대치를 경신했다. 이 통계는 올해 1월 조사 이래 최고 기록을 깬 뒤 8월까지 6개월 내리 역대 최대치를 경신하고 있을 정도로 심각하다.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핵심은 세금이다. 현행 세제는 서울 1주택자를 지방 다주택자보다 우대한다. 실제로는 판이하게 다른 서울과 지방의 집값 상승률이 심지어 같다고 가정하더라도 지방 다주택자가 수천만 원의 양도세를 더 토해내야 한다.
지방에 아파트를 사는 사람이 언제까지 바보 취급을 당해야 하나. 갈수록 지역에 양질의 일자리는 줄어들고, 교육 환경은 열악해진다. 집값마저 양극화를 넘어 초양극화로 치닫는다면 지역 소멸을 가속화할 수밖에 없다. 세컨드 홈 정책의 과감한 확대가 절실한 시점이다.
2025-08-24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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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태우의 맛있는 여행] 여름에 갈 실내여행지는?
지난해 9월이었다. 경북 청송군 청송정원에 백일홍 수십만 송이가 화사하게 피었다는 블로그 글을 읽고 단숨에 달려갔다. 직접 살펴본 청송정원의 풍경은 블로그 글 그대로였다. 딱 한 가지만 달랐다. 햇빛을 가려주는 우산을 쓰고도 10분 이상 걸을 수 없는 뜨거운 태양이 바로 그것이었다.
2013년 처음 여행 담당 기자가 됐을 때만 해도 7~8월 여행이 그다지 힘들지는 않았다. ‘코로나 사태’ 이전까지도 상황은 비슷했다. 그런데 불과 3~4년 전부터 사정은 완전히 달라졌다. 이제 7~8월, 아니 6월과 9월에도 야외 여행을 한다는 것은 어지간해서는 용기를 낼 수 없는 일이다.
여행 출장을 갔다가 자동차 온도계가 40도를 오르내리는 것을 보고서도 차문을 열고 야외에서 서너 시간 걸어 다닐 엄두를 내기가 쉽지 않다. 덥더라도 글자 그대로 ‘더운’ 정도면 참을 수 있지만 ‘찌는 듯 덥거나’ ‘타는 듯 뜨거운’ 것은 도저히 견딜 수 없다.
여행 기사는 써야 하니 출장을 갈 수밖에 없는데, 너무 무더워 야외에서 걸어 다닐 수는 없으니 방법은 실내뿐이다. 그래서 최근에는 여름이 되면 미술관, 박물관 같은 실내공간을 주로 보러 다닌다.
다음 여행지를 고르려고 많은 사람에게 물어보고 휴대폰, 컴퓨터로 검색하면서 늘 느끼는 것은 ‘갈증’이다. 부산, 경남, 경북 등에는 한마디로 여름에 갈 만한 실내여행지가 많지 않다는 것이다. 실내여행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콘텐츠가 너무 허술하거나 미비해서 실제로 가보면 시간과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나마 최근에는 민간에서 투자해 크고 작은 실내여행지를 조성하고 있지만 이런 경우에는 입장료가 너무 비싸 한두 군데만 둘러봐도 4~5만 원은 쉽게 넘어가는 게 문제다.
국공립 미술관, 박물관 같은 시설을 둘러보기 위해 사전에 자료를 모으다보면 수십억에서 수백억 원이 투입됐다는 기사를 흔히 볼 수 있다. 그런데 막상 가보면 ‘돈을 어떻게 썼기에’라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다. 그런 시설을 볼 때마다 화가, 소설가, 시인 같은 지역 예술가를 초빙해서 ‘예술의 상상력’을 불어넣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해 거의 10년 만에 국립경주박물관을 방문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런 박물관이 있다니! 정말 신비한 것이 마치 1000년 전 신라로 되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큰돈을 들인 것 같지는 않았다. 10년 전과 같은 유물을 보여주면서 전시 공간, 전시 형태, 조명 등에 변화를 준 게 전부처럼 보였다. 이것이 바로 상상력의 발현 아닐까.
2025-08-17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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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철의 정가 뒷담화] 테토·에겐 정치
혈액형, MBTI에 이어 이제는 성격 유형을 새롭게 분류하는 테토-에겐 테스트가 밈으로 자리 잡았다. 테토와 에겐은 각각 테스토스테론(남성 호르몬)과 에스트로겐(여성 호르몬)을 줄인 말로 외향적이고 리더십이 있다면 ‘테토’, 세심하고 부드럽다면 ‘에겐’으로 분류된다. 아주 오래 전 일본에서 넘어온 ‘초식남’과 ‘육식녀’의 개념과 비슷하다. 전통적인 남성성과 여성성을 기준으로 구분 짓는다고 해서 젠더 감수성 차원의 일부 논란이 있기도 하지만 어찌 됐든 현재 가장 뜨거운 문화 현상인 만큼 내년 지방선거 출마자들도 이러한 기준에 따라 분류되기도 한다.
부산의 A 자치단체장은 지역 정가 대표 에겐 정치인이다. 온화한 리더십으로 설명되는 그이지만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는 대대적인 조직 개편을 통해 승리를 거머쥐겠다는 구상을 밝히며 반전 테토미를 드러내기도 했다. 아직 세부 인선이 구체화되지 않았지만 그의 야심찬 계획에도 같은 정당 소속 인사들은 물론 A 씨의 캠프에서 활동했던 이들까지 우려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하마평에 오르내리는 이들이 A 씨의 성향과 비슷한 에겐으로 설명되는 특징인 섬세하고 차분한 성품을 지니고 있다. 쉽지 않은 수성전인 까닭에 전투적인 모습을 그에게 요구하는 이들이 아쉬움을 토로하는 이유다.
반면 2026년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이끌 각 정당의 수장들은 시스템을 통한 투명한 공천을 약속하고 있지만 이보다 앞서 남다른 테토적 면모를 뽐내며 강력한 공천권 행사를 벌써부터 거론하는 지역(당협)위원장들도 있다. B 지역(당협)위원장은 선거가 300일 가까이 남은 가운데, 특정 인사의 공천을 사석에서 공공연하게 약속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역(당협)위원회 회의도 해당 인사의 사무실에서 진행해 내부적으로 불만이 고조되고 있다는 후문이다. 이에 출마를 희망하는 이들이 반발하고 있지만 강력한 리더십을 앞세워 묵살하기 십상이다.
또다른 지역(당협)위원회의 경우 이른바 비선 실세 ‘문고리’의 횡포로 설명되는 ‘테토적 명성’(?)이 자자하다. C 지역(당협)위원장의 복심인 D 씨는 ‘영감’의 지시를 핑계 삼아 주중, 주말, 밤낮을 구분하지 않고 지방의원들과 사무실 관계자를 소집한다. 불참할 경우 내년 공천을 장담할 수 없다는 취지의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는 게 지역 정가에 유명한 일화로 떠돈다. C 위원장의 총애를 두고 D 씨는 또다른 누군가와 경쟁을 벌였지만 그가 밀려나면서 이제는 그를 아무도 말릴 수 없다는 이야기마저 흘러나온다.
일각에선 양극화 시대의 정치에서는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는 말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이러한 사례를 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다.
2025-08-10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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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호의 금융포커스] 흔들린 정책에 무너진 증시
새 정부 출범 이후 연일 뜨겁게 달아오르던 코스피가 지난 1일 하루 만에 4% 가까이 폭락했다. 한미 관세 협상 후폭풍이 가라앉기도 전에, 정부가 내놓은 세제개편안이 뜨거웠던 시장 열기를 단숨에 꺼뜨렸다. 단 하루 만에 증시에서 사라진 자금은 무려 116조 원. 정부는 ‘2조 5000억 원’의 추가 세수를 확보하겠다고 했지만, 시장은 ‘116조 증발’이라는 대가로 답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6월 취임 직후 “코스피 5000 시대를 열겠다”며 자본시장 활성화를 국가 어젠다로 천명했다. 부동산 중심의 자산구조에서 생산적 투자로의 전환, 즉 ‘돈의 흐름’을 바꾸겠다는 강한 메시지에 시장도 화답했다. 코스피는 두 달 만에 18% 가까이 상승했다.
그러나 지난 1일 공개된 세제개편안은 그 기대를 ‘산산조각’ 냈다. 정부는 주식 양도소득세 대주주 기준을 기존 50억 원에서 10억 원으로 대폭 낮추고, 배당소득 분리과세 최고세율도 35%로 정했다. 증권거래세율은 다시 0.2%로 높이고, 법인세율까지 인상하겠다고 밝혔다.
시장은 곧장 반응했다. 외국인과 기관, 심지어 국민연금까지 일제히 매도에 나섰고, 개인투자자들 사이에선 “정부가 시장을 배신했다”는 반발이 들끓었다. 주가 부양과는 거리가 먼 세율 환원, 대주주 기준 강화는 시장의 발목을 잡는 조치로 해석된다. 연말이면 어김없이 반복되는 ‘대주주 회피 매도’가 올해는 더 일찍, 더 급격하게 터질 가능성도 거론된다.
정부의 오락가락 정책에 투자자들은 큰 혼란을 겪고 있다. 자본시장 육성을 외쳤지만 실제로는 세수 확보가 우선순위로 보이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시장은 정부가 어디를 향하는지 늘 주시한다. 그 시선이 흔들리면 투자자들 역시 등을 돌릴 수밖에 없다. 국회 국민동의청원에 올라온 해당 세제개편안 반대안은 하루 만에 7만 명 이상의 동의를 얻었다. “역시 국장은 믿을 수 없다” “국장은 정리하고 미국 증시로 가자”는 자조적인 반응도 쏟아지고 있다.
혼란이 커지자 더불어민주당은 이날 장 마감 후 ‘대주주 기준 재검토’를 언급했지만, 이 역시 정책 일관성 부족을 드러내는 모습이라는 비판이 이어진다. 진성준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의장이 지난 2일 “주식시장 안 무너진다”며 재검토를 공개 반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장에서는 대주주 기준 하향이 주가 상승을 막는 근본 요인 중 핵심으로 꼽혀온 것이 자명한 사실이다.
문제는 일관성이다. 자본시장을 육성한다면 예측 가능한 세제 환경과 신뢰가 필수적이다. 오락가락 정책으로는 코스피 5000은커녕 시장 불신만 키울 뿐이다. 정부가 진정 자본시장을 성장 의지를 보여주고 싶다면 시장과 소통, 신뢰를 주는 일관된 방향성으로 답해야 한다.
2025-08-03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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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성의 타임 아웃] 개근상
초등학교 졸업식 때 개근상을 받는 아이는 존경의 대상이었습니다. 그것도 6년 동안 단 하루도 결석하지 않는 친구를 보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80년대 초였던 당시 개근상은 전교 1등이나 모범상보다 더 가치 있는 일로 받아들여졌던 것 같습니다. 누구나 힘들었던 시절 초등학교 6년을 하루도 빠짐없이 학교를 다닌다는 게 쉽지는 않은 일임을 사람들은 잘 알기 때문입니다.
개근상의 남다른 의미는 프로야구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1년에 팀당 144경기를 치르는 KBO리그에서 전 경기를 출장하는 선수가 몇 명이나 될까요? 올 시즌에는 10개 구단 통틀어 6명뿐입니다. 23일 현재 롯데 자이언츠 빅터 레이예스와 키움 히어로즈 송성문이 팀이 치른 94경기에 모두 출전했구요. LG 박해민이 93경기, 한화 이글스 노시환 92경기, 삼성 라이온즈 르윈 디아즈가 91경기, NC 다이노스 김주원이 88경기에 나서면서 올 시즌 팀이 치른 모든 경기에 출전했습니다.
프로야구가 전반기를 지나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아직 팀별로 50경기 이상 남겨두고 있습니다. 이들 6명의 선수가 올 시즌 전 경기에 출전할 수 있을지도 관심이군요.
프로야구에서 출장 기록은 선수의 실력은 물론 성실함, 꾸준함, 자기 관리 능력 등을 엿볼 수 있는 지표입니다. 한마디로 모든 걸 다 갖추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프로선수들은 늘 부상을 달고 삽니다. 한 경기 한 경기 최선을 다하는 선수들이 몸을 던져가며 경기를 하는데 어떻게 부상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일까요. 팀이 144경기를 치르는 동안 체력 저하와 부상을 딛고 전 경기에 출전하는 선수는 몇 명 되지 않습니다. 지난해엔 5명이 144경기에 출장했구요. 2023년엔 LG 트윈스의 외야수 박해민이 홀로 ‘개근상’을 받았습니다.
올 시즌 전 경기에 출장하고 있는 선수 중에는 모든 경기를 선발로 나선 선수도 있습니다. 롯데의 레이예스와 한화 노시환 선수입니다. 두 선수는 교체 출전 없이 모든 경기를 처음부터 뛰었습니다. 정말 대단하죠. 이들을 보면 금강석처럼 부서지지 않고 매우 단단한 ‘금강불괴’를 보는 듯합니다.
LG 박해민은 프로야구 현역 선수 중 가장 오랜 기간 개근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박해민은 2022년부터 4시즌 연속 전 경기 출장을 노리고 있습니다. 박해민은 삼성에서 뛰던 2021년 10월 13일부터 최근까지 538경기 연속 출장 기록도 이어가고 있습니다. 현역 최다 기록입니다. 박해민이 올 시즌 남은 경기에 모두 출전하면 연속 출장 기록을 589경기로 늘릴 수 있습니다. 존경스럽습니다. KBO리그 역대 최다 연속 출장 기록은 최태원 경희대 감독의 1995년부터 2002년까지 쌍방울 레이더스와 SK 와이번스 등에서 세운 1009경기 기록입니다.
2025-07-27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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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금아의 그림책방] 함께 걷기
보비와 보브.
토미 드 파올라의 <오른발, 왼발>(비룡소)에 등장하는 손자와 할아버지의 이름이다. 손자 보비에게 보브 할아버지는 ‘가장 친한 친구’였다. 아기 보비가 처음 한 말이 ‘보브’였을 정도로 말이다. 보비에게 걸음마를 가르쳐 준 것도 보브였다. 그는 손자의 두 손을 잡고 찬찬히 걷는 방법을 알려줬다. “오른발, 왼발. 따라 해 보거라.”
보비의 다섯 번째 생일이 지난 며칠 뒤 보브 할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했다. 한참 뒤 집에 돌아온 할아버지는 예전과 달랐다. 아무 말 없이 의자에 앉아 있기만 했다. 보비는 어떻게 할아버지를 다시 웃게 만들 수 있을까. 보비는 할아버지가 자신에게 해준 방식으로 보브를 대했다. 블록 쌓기를 보여주고, 식사하는 것을 도와주고,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줬다. 어느 정도 회복한 보브 할아버지가 집 밖에 나온 날, 보비가 그 앞에 섰다. 자기 어깨를 짚은 보브에게 보비는 말했다. “오른발, 왼발. 따라 해 보세요.”
자신에게 걷는 법을 가르친 이에게 같은 방식으로 걷기를 알려주는 일. 자신이 받은 돌봄을 되돌려주는 시간은 모두에게 온다. 1981년에 세상에 나온 ‘보비와 보브의 이야기’로 사랑하는 이와의 함께 걷기를 생각한다. 잔잔하게 울림을 전하는 그림책이 오랜 세월 독자와 함께한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난 다시 걷기 시작했어.’ 올봄에 나온 홍우리의 <나는 다시 걸어요>(밝은미래)도 누군가의 걷기를 응원한다.
휠체어에서 일어난 주인공은 천천히 공원을 걷는다. 그의 시선을 통해 사람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걷고 있음을 알게 된다. 손을 잡고, 지팡이를 짚고, 유모차를 몰고, 안내견의 도움을 받으며 걷는 이들이 있다. 각자의 방식으로 걷고, 걷다가 쉴 수 있고, 새로운 길에 도전할 수 있다. 사람마다 걷는 모습·속도·방향이 다르겠지만, 걸으면서 각자 나름의 길을 만들어 나간다. ‘저마다 가능한 걷기에 나선 모두의 한 걸음에 응원을 보내며!’라는 작가의 말에 ‘공감’의 하트를 더한다.
며칠 동안 미친 듯이 내린 폭우에 많은 것을 잃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 ‘다시 일어나서 같이 걸어보자’라며 손을 내미는 따뜻한 마음. 실의에 빠진 이웃을 위로하고 복구를 돕기 위해 길을 나선 이들의 발걸음에 감사 인사를 전한다.
2025-07-20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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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영의 문화시선] '핫플'이 된 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의 ‘론 뮤익’ 전시가 개막 90일 만인 지난 10일 누적 관람객 50만 명을 돌파했다. 4월 11일 개막 이후 하루 평균 5590명 이상이 관람해 올해 상반기 국내에서 가장 흥행한 전시가 됐다. 13일 막을 내린 이 전시는 서울에서 열렸지만, 기자도 5월 초 보고 왔다. 처음 간 날은 너무 많은 인파로 관람을 포기하고 돌아섰고, 다음 날 아침 ‘오픈런’ 대열에서 돌아볼 수 있었다.
알고 보니 그즈음이 관람객 10만 명을 돌파할 때였고, 국립현대미술관 담당 학예사는 “론 뮤익의 인물 조각은 보편적인 모습을 담은 익숙한 인간상을 리얼하게 구현해서 보는 즉시 감성을 자극하고 공감을 끌어낸다”고 그 이유를 설명했지만, 그렇게까지 많은 사람을 불러 모을 전시였나 싶기도 했다.
물론 아시아 최초로 소개한 론 뮤익(1958년) 회고전에다 생애 통틀어서 48점밖에 안 되는 작품 가운데 두개골 100개로 이뤄진 ‘매스’ 등 조각 작품 10점과 스튜디오 사진 연작 12점, 다큐멘터리 필름 2편 등 총 24점을 선보이고, 작가가 워낙 대중한테 드러나지 않은 점도 흥행에 한몫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론 뮤익 전시의 성공 원인을 당시엔 이해하기 힘들었는데, 뒤늦게 나온 분석을 종합하면, 2030 관람객이 70%나 됐고 국립현대미술관 SNS 채널의 관련 게시물 노출 수는 325만 건이 넘는 등 2030이 미술관의 변화를 강하게 추동했다는 것이다. 한편에선 SNS로 소비되는 2030의 전시 관람 방식을 평가절하하는 의견도 없지 않으나, 이것조차도 2030 세대의 소통 방식이라고 한다면 그렇게 터부시할 건 아니라고 본다. 젊은 층이 모여들며 ‘핫플’이 되고, 일상으로 파고든 미술관이 그저 부러웠다.
다가오는 주말인 19일 부산서도 또 하나의 화제 전시 ‘힐마 아프 클린트: 적절한 소환’이 국내 처음으로 개막한다. 10월 26일까지 부산현대미술관에서 열릴 이 전시는 스웨덴의 추상화가 힐마 아프 클린트(1862~1944)의 예술 세계를 국내 처음으로 조명하게 된다. 특히 그의 대규모 회화 연작은 당시 유럽 추상 미술의 대표 예술가인 칸딘스키(1866~1944)나 말레비치(1879~1935)보다 앞서 추상에 도달했다는 점에서 미술사의 흐름도 재고하게 만든다.
일본 도쿄국립근대미술관에 이어 서울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부산을 찾는 전시여서 얼마나 많은 국내 관람객이 찾을지 궁금하다. 유료이긴 하지만, 입장료는 도쿄(성인 기준 2300엔)의 절반 수준인 1만 원이다. 18일까지 사전 예매는 더 싼 6000원에 구매할 수 있다. 어렵사리 부산에서 유치한 대형 전시인 만큼 많은 이가 보고 즐기면 좋겠다. 올여름 피서는 미술관에서 즐기는 것도 한 방법이다.
2025-07-13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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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준영의 집피지기] 벼락 거지
‘벼락 거지’라는 단어가 등장한 건 코로나19 때였다. 코인으로 수십억 원을 벌어 퇴사를 했다는 이들의 ‘영웅담’이 전염병처럼 번지던 시기였다. 주식이나 암호화폐, 부동산 등 투자 자산들은 천정부지로 치솟는데, 월급만 그대로였다. 벼락 거지는 그런 상대적 박탈감을 자조적으로 드러낸 신조어다.
수년간 잠잠했던 벼락 거지라는 단어가 다시 유행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고삐 풀린 서울 아파트값이 고공행진 하면서, 서울에 아파트 한 채 가지지 못한 이들은 또다시 벼락 거지가 된 기분을 느끼고 있다. “그때 그 돈으로 해운대에 대형 평수가 아니라, 서울 외곽에 자그만 구축이라도 샀더라면 몇억은 벌었을 것”이라는 넋두리가 곳곳에서 나온다.
정부의 고강도 수도권 대출 규제책 발표 이후 한풀 꺾였다고는 하지만, 서울 집값은 22주 연속 상승했다. 대책 발표 전까지만 해도 강남 3구와 용산구 등의 아파트값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성동구와 마포구는 일주일 새 1%가 올라 2013년 한국부동산원이 주간 아파트 가격 통계 공표를 시작한 이후 가장 높은 상승률을 찍었다. 문재인 정부 급등기의 상승률마저 뛰어넘은 것이다.
서울 아파트는 이제 주거용이 아닌 전 국민이 눈독 들이는 투자처가 됐다. 지난해 기준 서울 외 거주자의 서울 아파트 매입 비율은 21.5%였다. 이 역시 2006년 관련 조사를 시작한 이래 역대 최고 비율이다.
반면 지방 상황은 처참하다. 부산 아파트값은 2022년 6월 이후 3년 넘게 한 번도 반등하지 못한 채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부산의 악성 미분양 통계는 최근 3개월간 달마다 최대치를 경신할 정도로 심각하다.
이런 초양극화를 해소할 지방 맞춤형 대책이 절실하다. 다주택자 규제의 풍선효과로 생겨난 ‘똘똘한 한 채’ 선호 현상은 지방 시장을 누르고 서울만 부풀어 오르게 하고 있다. 지방 부동산 시장이 정상화되지 못하면 전국의 투자 자본은 결국 규제를 피해 서울로 몰려들 수밖에 없다.
지역 업계에서는 ‘정권을 누가 잡든 부동산 정책을 세울 땐 수도권만 바라보는 것 같다’는 말이 나온다. 지금 서울과 지방의 부동산 시장은 완전히 다른 처방전이 필요하다. ‘지방 부동산마저 들썩이면 어쩌나’ 걱정하며 머뭇거린다면 적기를 놓쳐버리고 말 것이다.
집값 폭등을 부추기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부동산 양극화는 이재명 정부가 강조하는 ‘지방 시대’ 앞길을 막는 핵심 요소다. 개인 자산의 대부분이 아파트에 묶여 있는 나라에서, 내 집값만 떨어진다면 어느 누가 그곳에 살려고 할까. 서울뿐만 아니라 지방도 집값이 완만하게 상승한다는 믿음을 줘야 한다. 지방에 산다는 이유로 벼락 거지가 돼선 안 될 일이다.
2025-07-06 [17: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