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달식의 일필일침] '닫힌 산업 공간'에서 '열린 플랫폼'으로

정달식 논설위원 dosol@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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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

닫혀있던 동일고무벨트 동래공장
한원석 작가 전시 계기 잠시 개방
시민으로서는 너무나 반가운 일

유휴 산업유산 활용, 세계적 흐름
부산도 재생 가능성 높은 곳 많아
공공·민간 협업으로 숨 쉬는 공간을

2011년의 일이다. 대안공간 ‘반디’가 문을 닫을 위기에 처해 있었다. 다른 공간을 모색하던 반디의 김성연 디렉터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이렇게 물었다. “동일고무벨트(DRB) 동래공장은 어때요?” 1945년 설립돼 한국 산업화의 심장으로 뛰던 이 공장은 1980년 부산 금정구 금사동으로 신공장이 이전하면서 가동이 멈춘 상태였다. 그러나 당시 건물은 원형을 간직한 채 산업화 시대의 흔적과 시간을 품고 있었다. 김 디렉터 역시 그곳을 눈여겨보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여러 가능성을 타진하던 반디는 끝내 새 둥지를 찾지 못하고 그해 10월 말 문을 닫았다. 세월이 흘러 김 디렉터가 부산비엔날레 집행위원장을 맡으면서 다시 한번 이 공장을 비엔날레 전시 공간으로 활용하려 했지만, 끝내 문은 열리지 않았다. 이후에도 공장을 문화공간으로 바꾸려는 시도가 이어졌지만, 공장 측은 쉽게 마음을 내주지 않았다. 그 사이 ‘곧 아파트가 들어선다’는 등의 확인되지 않은 소문도 돌았다. 올해 초에는 부산의 한 공공기관이 공간 활용과 관련해 동일고무벨트와 접촉하기도 했다.

40년 넘게 닫혀 있던 이 공장이 지난 17일 마침내 시민들에게 문을 열었다. 한원석 작가의 개인전 ‘지각의 경계: 검은 구멍 속 사유’를 통해서다. 창립 80주년을 맞은 동일고무벨트가 공장을 처음으로 시민에게 공개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더한다. 비록 한 달 남짓의 짧은 개방이지만, 시민 입장에서는 매우 반가운 일이다. 오랫동안 담장 너머로만 바라보던 산업 공간이 예술의 언어로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전시장 안으로 들어서면 마치 이탈리아 베니스 비엔날레의 아르세날레 전시장이 떠오른다. 과거 공장 가동 시 사용되던 대형 기계들이 자리를 지켜 공간 전체에 시간의 켜가 느껴진다. 아르세날레 역시 옛 해군 조선소를 전시장으로 활용한 경우인데, 당시 사용했던 기계와 설비가 예술 작품과 어우러져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번 동래공장 전시 역시 산업의 기억과 예술의 상상력이 한 공간에서 맞닿는 드문 경험을 시민에게 선사한다.

세계 여러 나라들은 오래전부터 산업 공간을 재생해 문화공간으로 탈바꿈시켜 왔다. 베니스 비엔날레 전시장과 유사한 사례는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영국 테이트 모던 미술관은 템스강 남쪽 화력발전소를 개조해 런던 문화의 심장부가 되었다. 독일 루르 지역 졸페라인 박물관은 주 정부가 나서 탄광 공장을 문화공간으로 바꾼 대표적 사례다. 중국 베이징의 옛 군수공장 지대는 다산쯔 예술특구로 부활했다. 일본 요코하마 역시 근대 산업시설이 남은 공장지대를 창작 스튜디오와 전시장으로 바꾸며 지역 재생의 모범이 됐다.

부산에도 산업 공간을 복합문화공간으로 재생해 성공한 사례가 있다. 바로 F1963이다. 고려제강의 옛 공장은 기업 참여와 지자체 등의 지원, 지역 예술계의 기획력이 결합해 국내 대표 복합문화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이 사례는 산업 공간이 단순 개발 대상이 아니라 도시의 미래 자산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산업 공간은 더 이상 버려진 땅이 아닌 것이다. 도시의 기억과 정체성을 새롭게 짜 맞추는 문화 플랫폼으로 변모하고 있다. 산업시설은 지역 향수를 자극하고, 도시 문화관광과 산업 재창출을 유도하는 잠재력을 지닌다. 부산에는 동일고무벨트 동래공장과 F1963뿐 아니라, 금정구 구서동 태광산업 옛 공장처럼 재활용 가능성이 높은 산업 유산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부산시립미술관 서진석 관장은 “유휴 산업 공간을 도시와 통합된 문화 플랫폼으로 확장할 수 있다”고 말한다. 다만 공공과 민간의 협업을 기반으로 한 유기적 연대가 필수적이라고 강조한다. 철저한 준비와 협력을 바탕으로 산업 유산을 시민과 함께 호흡하는 문화의 장으로 만들어낸다면, 도시는 한층 풍요로워질 수 있다. 하지만 현실에는 과제가 존재한다. 기업 이해관계, 공공 리더십 부재, 지속 가능한 운영 모델 결여 등이다. 의지 없는 제안은 공허하고, 준비되지 않은 개방은 일시적 이벤트로 전락할 수 있다. 따라서 정책적 의지와 제도적 장치, 지역 사회의 지속적 참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단순 관광 콘텐츠가 아니라 산업유산 기반 공공 문화 실험이라는 정체성이 필요하다. 과거를 박제하는 공간이 아니라, 기억을 현재화하고 미래를 실험하는 무대로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살아 숨 쉬는 공간이 된다.

부산의 산업 공간들이 문화와 예술이라는 새로운 언어 속에서 다시 자신을 읽고 말하고 이어가기를 바란다. 닫혀 있던 문이 열리는 순간 부산의 기억도 깨어날 것이다. 공공과 민간이 손을 맞잡고 산업유산을 시민의 공간으로, 도시의 기억을 문화 현장으로 꽃피우는 날을 기다린다. 문화와 예술은 산업의 끝이 아니라 산업의 새로운 언어다. 산업유산을 어떻게 기억하고 미래 자산으로 전환할 것인가는 부산이 안고 있는 과제다. 이번 동래공장 전시가 그 가능성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정달식 논설위원 dosol@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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