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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의 인사이트] ‘노인과 바다’를 만드는 세력들
중앙 정치판은 윤석열 대통령 탄핵과 조기 대선의 소용돌이 속에서 숨가쁘게 돌아가고 있다. 답답한 사실은 우리가 살고 있는 부산의 주요 현안이 쏟아지는 탄핵 찬반 뉴스의 파도에 휩쓸려 온데간데없다는 사실이다. 산업은행 부산 이전, 글로벌허브도시 특별법, 가덕신공항 조기 완공 등 현안은 여의도와 중앙정부 한구석에 내팽개쳐져 있다. 아무리 난리통이라도 할 일은 해야 하는데, 중앙정부는 물론이고 부산시와 부산 정치권은 두 손을 놓은 모양새다.
최근 민주당과 수도권 국회의원 중심으로 인천고등법원 설립안이 일사천리로 처리됐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는 민주당 의원 11명 전원 찬성으로 고등법원과 회생법원 설치 법안을 초고속으로 처리했고, 지난해 12월 28일 국회 본회의에서 재석 의원 270명 전원 찬성으로 통과됐다. 국무회의 의결을 거친 인천고등법원은 2028년 개원한다. 하지만, 함께 안건으로 올랐던 부산 해사법원 설치 법안은 심의조차 이뤄지지 못했다. 부산만 낙동강 오리알 신세다.
고등법원을 손에 넣은 인천시와 정치권은 이제 모든 역량을 해사법원 본원 유치에 쏟아붓고 있다. 해사법원은 해양·선박·물류 관련 분쟁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법원으로, 해양도시의 정체성을 정립할 수 있다. 매년 4000억 원으로 추정되는 소송비도 지역으로서는 큰 소득이다. 인천의 여야 정치 협력도 눈부시다. 2명밖에 없는 여당 국민의힘 의원이 인천 해사법원 설치를 위한 6개 법안 발의를 준비하고 있다. 해사법원 본원을 인천에 두고, 지원은 각각 부산·광주에 배분하는 내용이다. 민주당이 지지하면 그 어떤 법안도 통과될 수 있는 정치 지형이다. 부산변호사협회가 13년 전부터 그 필요성을 주창했지만,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다.
부산 정치권과 부산시의 무능이 초래한 ‘정치적 재앙’이다. 부산에는 국회의원 18명 중 단 1명만 민주당 소속이다. 반면 인천은 14명 중 국민의힘 의원 2명 외에는 모두 민주당이다. 국회를 장악한 민주당, 수도권 중심의 정치판에서 부산은 힘을 발휘할 수 없다. 힘이 없으면 ‘거래의 기술’이라도 있어야 하지만, 인천고등법원을 지렛대로 삼아 협상할 정치력도 없었다. 이젠 인천 정치권과 민주당에 해사법원 ‘부산 분원’ 설치라도 읍소해야 할 상황이다. 기가 찰 노릇이다.
인천시의회는 최근 ‘국립인천해양대학교 설립 촉구 결의안’을 통과시키고, 해양수산부와 협의체 구성을 논의하고 있다. 민주당 이병진 국회의원(경기 평택)은 국립평택해양대 설립을 내용으로 하는 법률안도 발의했다. 학령인구 감소, 수도권 일극 집중 폐해에도 불구하고 제3의 국립해양대가 개교될 수 있는 정치적 현실이다. 이렇게 부산 해양수도의 꿈과 이니셔티브는 서서히 침몰하고 있다. 부산 시민은 지쳐서 화도 나지 않는다. 애꿎은 바다만 멍하니 바라볼 뿐이다.
이 와중에 부산시와 지역 정치권은 시민을 상대로 희망고문만 하고 있다. 박형준 부산시장은 12일 ‘한국산업은행법 개정 촉구 국회 청원 대시민 홍보활동 본격 시작’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부산 시민의 결집된 힘으로 산업은행 부산 이전 완수할 것”이라는 제목이다. 부산 남구 용호별빛공원에서 열린 달맞이 축제에서 홍보활동도 벌였다. 산업은행 이전이 ‘부산 시민의 결집된 힘’이 부족해서 표류하고 있을까. 국가균형발전을 위해 필수적인 법안을 내팽개친 민주당과 수도권 의원을 설득할 정치력과 전략이 없기 때문이란 사실은 삼척동자도 안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와의 대화가 내키지 않으면, 민주당의 다른 대항마, 다른 세력과 사안에 따라 연대할 정치적 상상력조차 발휘하지 못한다. 그저 죽은 아들 다리만 만지는 꼴이다. 민주당을 설득할 엄두를 내기 싫은 것인지, 애초에 실력이 없는 것인지 애매하다. 대신에 보여주기 이벤트에만 몰두하고 있다. 일 못하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패턴이다.
더 큰 문제는 이에 대한 문제의식과 도시의 지향점마저 잃어버렸다는 점이다. 점점 늪으로 빠져드는 기분이다. 최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부산을 콕 집어 “부산은 젊은 층의 탈출이 심해 도시가 소멸할 위기에 처했다”라고 보도했다. 세계 2위의 환적 중심항만 부산이 ‘해양수도, 부산’을 선포한 지 올해로 25주년, 내년에는 개항 150주년이다. 꿈을 현실로 만들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부산시와 지역 정치권의 역량 부족이다. 3월, 개나리가 필 즈음이면, 조기 대선 정치판이 열릴 듯하다. 0.1%의 지지율이라도 얻기 위한 정치권의 발걸음이 한층 빨라질 것이다. 부산시와 지역 정치권의 뼈를 깎는 각성과 정교한 전략 수립이 시급하다. 이 겨울이 다 가기 전에…. 민주당 탓, 중앙정부 탓만하는 낡은 변명도 이제 듣기 지겨울 따름이다.
2025-02-13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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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의 인사이트] 아픈 국민은 더 서럽다
‘아프지 말자. 다치지 말자!’ 2025년 새해 다짐이다. 매년 하는 신년 결심이지만, 올해는 조금 처절하다. 지난해 망년회에서 만난 부산의 한 대학병원 의사 K 교수 때문이다. K 교수는 “혹시 크게 다치더라도, 우리 병원에서 치료 못 해 드립니다. 칼 잡을 의사가 없어요. 의료 파업 끝날 때까지는 절대 다치지도, 아프지도 마세요”라고 간곡하게 말했다. 수북한 소주병 너머로 목소리마저 흐릿했지만, “다치면 죽을 수 있다”라는 위기감에 술이 다 깰 정도였다. 실제로 최근에 간 파열로 복강에 피가 가득 차 부산의 한 중형병원 야간 응급실에 입원한 60대 남성을 지역 대학병원에서 수술하지 못해, 119구급헬기로 서울로 긴급 이송했다고 한다. 평상시에는 대학병원 영상의학과 전문의가 혈관 촬영을 통해 출혈 부분을 막는 처치로 위기를 넘길 수 있는 어렵지 않은 수술이었다. 부산의 모든 대학병원에서 “의료진이 없다”는 이유로 거부했고,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 겨우 연락이 돼 환자를 살릴 수 있었다.
‘야간 긴급 수혈→영상의학과 교수 호출 및 시술→중환자실 사후 처치’를 담당할 전공의가 의료 파업 이후 사라졌기 때문이다. 응급실을 찾지 못해 구급차 안에서 분만하는 뉴스는 새롭지도 않을 정도다. 전쟁터에서나 상상할 수 있는 일이 대한민국 제2 도시 부산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 2025년 대한민국에서 전 국민이 난민 체험을 하고 있는 셈이다. 지난 1년간 전공의 없는 병원에서 수술 준비부터 처치, 진통제 처방까지 업무를 도맡았던 대학병원 교수들은 이제는 지쳐서 더 이상 환자를 보지 못하겠다고 손사래 치는 형편이다. 4개의 대학병원을 가진 부산에서 간단한 처치로 치료가 가능한 병으로도 위험할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누군가는 심각한 산업재해나 교통사고, 강력범죄의 피해로 대학병원을 찾을 수밖에 없지만, 이젠 안심할 수가 없다. 국민의 생명이 위태로운 지경이다.
이런 현상은 올해 더욱 심해질 양상이다. 영남권 최대 거점 병원인 부산대병원에서 위암, 폐암, 간암, 대장암을 진료하는 혈액종양내과 의료진 5명 중에서 퇴사와 병가로 2명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지역 최고의 부산대병원이 이런 중증 치료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다른 대학병원, 다른 과도 간당간당한 실정이다. 시스템이 아닌 버티기로는 한계점에 이르렀다. 그동안 대학병원에서 진료하지 못하는 환자들을 담당했던 지역 중형병원의 경우 의사 부족으로 신장내과 등 몇몇 과는 수술에 두달 이상 기다리기 일쑤다. 의사들의 피로 누적으로 일부 과는 야간 당직을 중단하는 상황까지 이르고 있다. 이 와중에 맹추위로 인한 독감 환자들이 한겨울밤 병원 응급실 앞에서 ‘호흡기내과 전문의가 없다’는 이유로 진료를 거부당하고 동동거리는 신세다.
문제는 의료 대란이 발생한 지 벌써 1년이 가까워지지만, 비상계엄 사태와 서울 한남동 대통령 관저의 고성에 묻혀 환자들의 고통은 관심조차 받지 못한다는 점이다. 정국 혼란으로 환자와 보호자의 간절함을 해결할 주체도, 의지도, 동력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는 사태 촉발의 원인이 무엇인지도 가물거릴 정도이다. 병원에서 자기 차례만 마냥 기다리는 환자들만 애를 태우고 있다. 하소연할 곳도, 분노할 시간조차도 없이 허둥지둥할 뿐이다. 암 환자들은 수술이 지연될수록 암세포가 커져 안절부절한다. 김영란법 이후 공공병원 예약 청탁은 법으로 금지됐지만, 환자와 보호자들은 학연·지연·혈연 등 ‘빽과 네트워크’를 모두 동원해서 외래 진료와 입원 예약을 잡는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결국 난리통에 힘없고 ‘빽’ 없는 서민만 더 힘들게 생겼다. “아픈 놈만 서럽다”는 어른들 말씀이 틀린 게 하나도 없다.
설 연휴가 다가오고 있다. 눈 내리고, 추운 계절에 민족 대이동으로 누군가는 불행한 사고를 당할 수 있다. ‘아프고, 다치면 응급실 가면 되지’라는 그 당연한 사실이 이렇게 힘든 일이 되었다. 아무리 나라가 어수선하지만, 이제는 정치권과 정부, 의료인, 대학이 모두 머리를 맞대고 당면한 의료 대란을 해결하길 간절히 바란다. 마침 8일 대한의사협회 제43대 신임 회장이 선출된다. 국민은 의사가 이겨도 되고, 정부가 이겨도 된다. 이기고 지는 ‘명분 싸움’이 아니라, 살고 죽느냐의 ‘생존 게임’이기 때문이다. 생명이 경각에 달린 중환자들이 제대로 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측이 진실로 이긴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모두가 패배자다. 신임 의협회장과 전공의 단체, 정부, 정치권, 대학까지 모두가 테이블에 앉아서 어떻게 국민을 살릴 것인지만 이야기해야 한다. 새해 결심을 되뇌어 본다. “아프지 말자. 다치지 말자.”
2025-01-07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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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의 인사이트] ‘계엄 폭거 무혈 진압’을 이룬 나라
변 형! 한국에서 계엄령이 선포되던 3일 자정. 미국 LA에서 걸려 온 “지금 2024년입니다. 왜들 이러십니까”라는 변 형의 울먹인 전화에 마음이 아렸습니다. LA는 새벽이었지요. 올해 초 가족여행에서 변 형 부부와 함께한 LA 베벌리힐스의 점심 식사가 떠오릅니다. 30년 이민 생활에서 세계 10위 경제 강국으로 발전한 모국 덕분에 이제는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는 말에 뿌듯했습니다. 그때 레스토랑에서 흘러나오던 K팝이 귓가에 여전한데, 난데없이 CNN에 쏟아지는 비상계엄 뉴스에 그 모든 자부심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기분이었을 겁니다. 변 형! 저는 이런 절망의 끝에서 희망을 보았습니다. ‘친위 쿠데타’에서 한국의 헌법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했습니다. 계엄 선포 직후 여당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조차 “헌법 질서 내에서 문제를 바로잡겠다”라고 밝혔습니다. 헌법 77조 5항은 ‘국회가 재적의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계엄의 해제를 요구한 때에는 대통령은 이를 해제하여야 한다’라고 규정돼 있습니다. 국회 본회의장 입구까지 계엄군이 들이닥치고 보좌진과 직원이 인간 바리케이드를 치는 긴박한 상황이었지만, 국회 담을 넘어 들어온 우원식 국회의장은 안건 상정을 기다려 절차를 모두 밟은 뒤 계엄 선포 두 시간 만에 여야 재석의원 190명 전원 찬성 표결로 해제 결의안을 통과시켰습니다. 헌법에 따라 계엄은 6시간 만에 해제됐습니다. ‘친위 쿠데타’ 과정에서 대한민국 헌법이 ‘권력의 시녀’가 아니라 ‘민주정치의 여왕’으로 기능했습니다.
두 번째는 주권자 국민의 높아진 수준입니다. 법조문에 불과할 수 있던 자유 대한민국의 헌법을 제대로 작동시킨 힘입니다. 국회 앞에 집결한 국민은 군경과 그들의 차량을 저지하며, ‘1980년대 회귀’를 막아냈습니다. 주권자가 계엄 폭거를 무혈 진압한 것입니다. 5일 NPR(미국공영라디오방송)마저도 톱뉴스로 “한국 국민은 2024년에 한국에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믿지 않으며, 공산주의 위협을 명분으로 자신들의 권리를 박탈하려는 시도에 대해 거부하고, 거리에서 시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라고 보도했습니다. 한 일본인은 “한국인이 민주주의를 지키려고 하는 모습이 와닿아서 울컥했다”는 댓글을 남겼다고 하더군요. 우리 국민은 철수하는 계엄군에게 “고생했다”라며 박수로 배웅하기까지 했습니다.
세 번째는 성숙한 군인들입니다. 비열한 대통령과 국방부 장관이 우리의 아들들을 정권 보호의 꼭두각시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비록, 완전무장한 계엄군이 무엄하게 국회 유리창을 깨고, 군홧발로 짓밟았지만, 계엄군이라는 완장에 분에 넘치는 행동을 하거나, 유혈사태를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광주민주항쟁에서 학살을 주도했던 군에 대한 철저한 수사와 징벌 등 학습효과와 트라우마, MZ세대로 구성된 대한민국 청년 군인의 시민적 성숙함이 어우러진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한 계엄군은 복귀 도중 무리를 이탈해 시민들에게 “죄송합니다”라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고 합니다. 외신에서도 “군대와 경찰이 효과적으로 집행하지 않아, 계엄 시행 시도가 몇 시간 만에 실패했다”라고 평가할 정도입니다. 물론, 내란죄 등에 대한 역사적 후과는 철저히 물어야겠지만, 더 이상 군대가 정치에 개입해서 독재자가 나올 수 없는 국가란 점은 확실해졌습니다. 전후 70년간 축적한 한국 민주주의의 성과입니다.
변 형! 이번 사태가 한국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요. 저도 궁금합니다. 분명한 것은 한국이 쌓은 민주주의 전통, 헌법 시스템은 어떤 폭력과 위협으로도 되돌릴 수 없는 뉴노멀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1789년 프랑스 평민 대표들의 ‘테니스 코트 서약’이 결국 대혁명을 일으키고, 수백 년 동안 프랑스 민주주의의 상징이 되었다면, 국민과 헌법의 힘으로 막은 ‘6시간 비상계엄’이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새로운 브랜드가 되리라고 확신합니다. 민주주의의 후발국 모두로부터 ‘배우고 싶은 나라, 대한민국’이 될 수 있는 반전의 기회입니다. 저는 한국인 특유의 회복탄력성으로 충분히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앞으로 내란죄 수사, 대통령 탄핵 표결이 진행됩니다. 거리에서도 국민이 활발하게 의견을 피력하는 광장의 정치가 열릴 겁니다. 시끌벅적하겠죠. 그 와중에 우리가 얻을 것은 대한민국 시스템은 정치생명 유지를 위해 계엄을 선포하는 한낱 독재자를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만큼 우리 조국은 발전했습니다.
변 형! 사설이 길었습니다. 내년 봄, LA의 약속대로 가족과 함께 제주도 한라산 둘레길을 걷는 날이 기대됩니다. 한라산 동백길에서, 겨울을 뚫고 피어나는 동백처럼, 온갖 간난을 이겨내는 대한민국, 두 가족의 미래를 이야기할 생각에 가슴이 설렙니다. 잘 익은 막걸리도 준비하겠습니다. 그때까지 평강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2024-12-05 [18: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