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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대인도네시아 외교, 전환점에 서다
최근 며칠 사이 한-인도네시아 외교관계 지평에 지각 변동에 비유될 수 있는 대형 외교 사건이 발생했다. 필자는 지난 6월 중순께 한국에서 자카르타로 들어 오는 길에 인천공항에서 TV 뉴스를 통해 이재명 대통령이 캐나다에서 개최되고 있는 G7정상 회담에 참석해 서방 지도자들과 정상 외교 활동을 펼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같은 날 오후 자카르타 숙소에 도착하여 현지 TV를 통해 프라보우 인도네시아 대통령이 러시아가 G7회의에 맞대응하는 성격으로 개최하고 있는 SPIEF 2025에 참석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함께 글로벌 사우스의 단합을 논하고 있는 장면을 보았다.
물론, 프라보우 대통령이 참석 배경에 대해 "G7과 SPIEF 양쪽으로부터 초청을 받았으나, SPIEF로부터 먼저 초청을 받아 참석한 것이니, 너무 비약은 말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그러나 독립 후 전통적으로 비동맹 외교노선을 견지해 온 인도네시아가 "우리나라가 참가한 G7과 대립관계에 있는 SPIEF에 참가한 사실"에 대해 우리 외교 당국은 배경 분석과 함께 향후 한-인도네시아 관계에 미칠 여파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프라보우 대통령이 이러한 선택을 하게 된 이면에는 최근의 국제 정치 상황이 영향을 미친 측면과 함께 그의 담백한 퍼서낼리티(Personality)와 관계가 있다고 분석된다. 인도네시아와 종교 외교적으로 각별히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팔레스타인이 미국이 지원하는 이스라엘에 의해 1년 반에 걸친 무력 침공을 받아 5만여 명의 인명 희생을 겪고, 사회 인프라 대부분이 처참하게 파괴 당한 모습, 그리고 최근에는 미국과 이스라엘이 선제적으로 이란을 공격하는 것을 보면서, 그는 미국과 이스라엘의 행위를 이중잣대에 의한 심각한 반인도주의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사태에도 불구하고, 독립 후 비동맹을 일관되게 시그니처 외교 기조로 유지해온 인도네시아가 어느 한 쪽 진영에 적극 가담하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 다만, 한-인도네시아 관계의 하모니를 염원하는 필자가 우려하는 대목은, 양국 간 외교 관계 보다 경제 분야 협력에 미칠 영향이다. 일반적으로 국가의 외교 정책은 경제, 국방, 교육, 문화 정책보다 상위 개념으로 이해된다. 다시 말해, 인도네시아가 중-러에 밀착할 경우, 우리와의 통상, 투자, 문화 등 분야에서 특히 우리의 자원외교, 방산 수출, 대형 국책건설 부문에서 이미 중국에 비해 열세인 상황이 더욱 고착화될 가능성 때문이다.
아무튼, 이번 사건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나마 한-인도네시아 양국의 외교 노선의 차이점이 명백히 노출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지금까지는 양국 지도자들이나, 학자들은 양국 외교 노선의 차이점을 인지하면서도 애써 외면해 온 측면도 있다. 드러내 놓고, 차이점을 얘기하면 우호 협력 분위기를 깰 것을 염려하여 의도적으로 그렇게 대응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번 경우를 포함해 최근에 목격된 외교적 상황들, 이를 테면 정상외교를 중시하는 프라보우 대통령이 동북아 3국 가운데 우리나라만 패싱한 점, 이재명 대통령 취임 후, 정상 간 취임 축하 통화가 다른 아세안 나라들보다 지연된 점 등을 볼 때, 이제는 솔직히 차이점과 그 배경을 상호 이해하고, 존중하는 새로운 입장을 강구하며, 나아가 양국이 공통적으로 협력을 필요로 하는 통상, 투자, 관광, 문화, 교육, 인력 등 분야의 협력 강화에 보다 비중을 두는 자세를 취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아울러, 인도네시아 정치에서 대통령 프라보우의 파워가 외교는 물론 통상 등 전 영역에 걸쳐 절대적인 점, 그의 퍼서낼리티가 매우 강한 점, 그가 국방장관 시절 우리나라와 불편한 현안들이 있었다는 점 등을 유념하여, 인도네시아 현지에서 위기에 처한 양국 관계를 이끌어갈 차기 주인도네시아 공관장은 특별히 프라보우 정부 인사들과 폭넓은 인적 네트워크를 가지고, 현지 사정에 정통한 인사를 중용하길 바란다.
2025-08-31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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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사회복지사의 길, 사회복지의 달에 돌아보다
요즘 우리의 일상은 여전히 팍팍하다. 물가와 금리는 다소 안정세를 보이고 있지만, 경기 회복은 더디고 양극화와 불평등은 더욱 고착화되고 있다. 기후위기와 잦아지는 재난, 불안정한 노동환경과 돌봄 공백은 새로운 사회적 위험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이는 가장 먼저 취약계층의 삶을 위협한다. 특히 부산은 전국 최저 수준의 출산율과 빠른 고령화, 장애인구의 증가, 1인 가구 확대 등 복합적인 사회문제에 직면해 있다.
이런 시대에 최소한의 온기를 불어넣고, 무너지는 일상을 붙잡아 주는 존재가 바로 현장의 사회복지사가 아닐까. 부산에는 1만 5000여 명의 사회복지사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뛰며, 누군가에게는 작은 희망의 불씨가 되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삶의 전환점이 되고 있다.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지탱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은 사회복지사에게 주어진 소명이자 사명감이며, 또한 책임이다.
9월은 사회복지의 달이고, 9월 7일은 사회복지의 날이다. 1999년 9월 7일에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이 제정되었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전신인 생활보호법이 시혜적이고 단순보호 차원의 복지서비스를 지원해 왔다면,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은 빈곤을 개인이 아닌 국가의 책임으로 간주하고, 전 국민의 최저생활을 보장할 뿐만 아니라 자립자활서비스까지 제공한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즉, 국민기초생활보장법 공포일을 사회복지의 날로 지정했다는 것은 사회복지가 소외된 계층과 소수의 뜻있는 사람들만의 관심사가 아닌 전 국민이 사회복지의 대상이 되며, 그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동시에 사회복지의 날은 열악한 근무환경과 처우에 시달리는 사회복지사들을 돌아보는 날이기도 하다. 사회복지사의 낮은 임금수준과 열악한 근무환경은 사회적으로도 이슈가 되어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노력을 2011년 3월에 명문화하였다. 소위 ‘사회복지사법’이라고 일컬어지는 ‘사회복지사 등의 처우 및 지위 향상을 위한 법률’이 제정된 지 14년째이지만 여전히 사회복지사의 처우는 열악하다.
사회복지사들은 여전히 헌신과 희생의 이데올로기와 민간 중심의 전달체계 속에서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도록 강요받고 있다. 사회적 약자의 권리에 앞서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사회복지사로서 책임을 다한 결과는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 조건의 연속이다.
부족한 인력을 증원하거나 연장근로에 대한 보상을 확대하지 않아 노동자들은 무료노동을 강요받고 있으며, 시대의 변화에 따라 확충되는 일자리는 비정규직으로 최저임금 수준의 급여와 반복되는 계약 해지의 덫에 놓여있다.
또한 보조금으로 운영되는 시설임에도 5인 미만의 소규모시설은 근로기준법이 적용되지 않아 기본적 권리마저 보장되지 않고 있다. 공무원의 임금수준에 도달하도록 노력할 의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무원의 임금 인상만큼 사회복지사의 임금을 인상하지는 않고 있다.
고단하다. 여전히 날은 덥고, 갈 길은 멀고, 해야 할 일은 차고 넘친다.
지역 깊숙이 스며들어 세상의 그늘진 곳을 밝히는 사회복지사의 남모를 수고와 헌신에 조금이나마 보답할 수 있는 근로환경은 언제쯤 조성될까? 고단한 ‘사회복지사의 길’이라는 여정을 오늘도 묵묵히 걸어가는 사회복지사들의 발걸음이 한결 가벼웠으면 하는 바람은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뒷전이어야 할까?
2025-08-31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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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Thank You for the Movie, 영화로 이어지는 아시아 연대
부산아시아영화학교의 첫 학기 마지막 날, 교수는 아바의 곡 ‘Thank You for the Music’을 틀었다. 팍팍했던 수업과 과제를 버티며 지낸 학생들은 갑작스레 울려 퍼진 그 노래에 환호했고, 서로 손을 잡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췄다. 이 학교에는 흥미로운 전통이 하나 있다. 수업 전, 그리고 쉬는 시간, 각국의 노래를 들려주는 것이다. 17개국에서 온 20명의 학생들이 돌아가며 자기 나라 음악을 소개한다. 필리핀의 비틀즈를 알게 되었고, 싱가포르와 홍콩 래퍼의 스웨그를 느꼈고, 키르기스스탄의 전통 선율과 현대 팝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곡에 매료되었다.
노래를 추천하는 친구들의 얼굴에는 자부심과 설렘이 서려 있었다. K-POP이 전 세계에 알려지기 전, ‘우리 음악도 해외에서 사랑받을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상상하던 그 시절 우리의 얼굴을 떠올리게 했다. 음악은 학생들을 자연스럽게 이어주는 통로였다.
올해 3월, 부산 금련산 자락의 이 학교에 아시아 각국에서 모인 20명의 영화 인재들이 입학했다. 일본인 토모미와 몽골인 올길마는 무려 스무 살 차이가 나고, 인도와 파키스탄 출신 친구들은 누구보다도 절친이다. 미얀마에서 의학을 전공하다 영화로 진로를 바꾼 티파니, 베트남 갓 탤런트 톱4 출신의 가수 헤일리는 독특한 사연을 가지고 있다. 방글라데시의 인기 배우 마노즈는 부산 거리를 걷다 자국 팬들에게 종종 사진 요청을 받고, 그때마다 환한 미소로 응해준다.
말레이시아 최대 미디어 기업 출신 렘, 네팔 최초 아이폰 장편 영화를 연출한 제이슨, 태국에서 영화 작가를 꿈꾸는 붐까지 각자의 이력과 열정을 품은 이들은 서로 경쟁자가 아닌 동료다. 여기에는 세대도, 국경도, 종교도, 정치도 없다. 오직 영화와 음악으로 연결된 우리만 있다.
하지만 우리가 꿈꾸는 영화산업은 지금, 커다란 격랑 속에 있다. OTT 플랫폼의 급성장으로 기존 극장 중심의 산업은 침체에 빠진 반면, 콘텐츠 경쟁은 과열되었다. 제작비는 치솟고, 불확실성은 커졌으며, 대형 극장 기업들은 생존을 위한 합병을 추진 중이다. 한편에선 원천 IP를 확보하려는 전쟁도 치열하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찾을 수 있는 여러 대안 중 하나가 바로 국제공동제작이 아닐까? 아시아에는 각기 다른 역사와 문화, 정서에서 비롯된 무수한 이야기들이 존재한다. 서로 다른 시선과 감각을 지닌 창작자들이 협업한다면, 그 결과물은 더 풍성하고 입체적인 서사를 품을 수 있다. 무엇보다 국제 공동제작은 제작비 분산을 통한 리스크 완화, 다양한 국가의 투자 유치, 그리고 보다 넓은 시장 접근이라는 현실적인 장점도 가지고 있다.
물론 국제 공동제작이 보다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창작자 간의 협업뿐 아니라, 관련 제도와 정책의 지원도 함께 고려될 필요가 있다. 국가 및 지방 차원에서의 정책적 관심과 적절한 예산 지원이 조금씩 확대된다면 긍정적인 변화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공동제작을 원활히 진행하기 위한 법률·제도 정비와 아시아 각국의 환경을 이해하는 전문 인력 양성도 앞으로 중요한 과제로 남아 있다. 아울러, 시민들의 영화에 대한 관심과 참여가 꾸준히 이어진다면 국제 공동제작의 기반을 다지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부산은 아시아 각국과의 교류 경험과 인프라를 바탕으로, 국제 공동제작을 꾸준히 준비해 나갈 수 있는 토대를 갖추어가고 있다.
영화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경계를 허문다. 우리는 영화를 통해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고, 서로 다른 언어와 감정을 이해하게 된다. 얼마 전 치러진 대통령 선거는 우리 사회 곳곳에 존재하던 갈등과 균열을 선명하게 드러냈다. 새 대통령은 ‘통합’을 약속했다. 그리고 시대는 지금, 서로 다른 생각과 경험을 가진 이들이 함께 살아갈 방법을 요구하고 있다. 그 시작은 ‘이해’다. 그리고 영화는 그 이해의 언어가 될 수 있다.
부산에서 시작된 특별한 배움의 여정은, 영화가 세대와 국경, 언어와 문화의 차이를 넘어 사람과 사람을 잇는 힘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해준다. 그리고 국제 공동제작은 어쩌면 산업적 선택을 넘어, 인류가 서로를 이해하고 공존하기 위한 대안 중 하나가 될지도 모른다. Thank you for the movie.
2025-08-26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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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일회용품 사용 장면, 방송 금지해야
기후위기와 자원고갈, 미세플라스틱 문제는 이제 단순한 환경 이슈가 아닌, 인류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심각한 재난으로 다가오고 있다. 특히 우리의 무분별한 일회용품 사용은 이러한 위협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개인의 편리함’이라는 명목 하에 사회적으로 묵인되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이러한 태도에서 벗어나야 할 때이다.
정부를 포함한 시민사회단체에서는 일회용품 사용을 더 이상 당연한 문화로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노출 자체를 제한하는 강력한 인식 전환과 제도적 대책 마련에 나서야 한다. 단순히 재활용을 독려하고 일회용품 사용을 줄이는 수준이 아니라,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일회용품을 사용하는 장면을 ‘없애는’ 수준의 변화가 필요하다.
방송, 유튜브, 드라마, 광고 등 다양한 매체에서는 출연자가 일회용 커피컵을 들고 대화하거나, 플라스틱 생수병을 마시고, 배달 용기에 담긴 음식을 먹는 등 종이컵, 플라스틱 빨대, 일회용 용기 등의 사용 장면이 아무 여과없이 등장한다. 이러한 장면들은 시청자들에게 무의식적으로 ‘이건 괜찮은 선택’, ‘당연한 일상’이라는 잘못된 인식을 심어주며, 이런 무의식적인 모방은 곧 행동으로 이어지고 결국 일회용품 사용을 습관화시키는 시각적 사회 교육이 되고 만다. 이러한 잘못된 교육은 누구의 허락도 없이, 누구의 책임도 없이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진행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시각적 영향력의 파급력은 이미 다른 사례에서도 입증되어 엄격한 법 적용을 받고 있다.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방송법에서 음주, 흡연, 사행 행위 등 유해 행위의 노출에 대해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방송심의에 관한 규정 제28조는 ‘방송은 음주, 흡연, 사행행위, 사치 및 낭비 등의 내용을 다룰 때에는 이를 미화하거나 조장하지 않도록 그 표현에 신중을 기하여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에 따라 공중파에서 방영되는 드라마나 예능에서는 흡연이나 음주 장면이 직접적으로 나오지 않으며, 나올 경우 모자이크 블러 처리를 하거나 사전 안내 문구를 삽입해야 한다.
그렇다면 왜 방송 매체에서 일회용품 노출 장면은 여전히 규제의 예외로 남아 있는가? 이제는 환경부와 방송통신위원회가 함께 나서야 할 시점이다. ‘일회용품 노출 제한’을 포함한 미디어 윤리 가이드라인을 수립하고, 이를 위반할 경우 경고, 제작 지원 배제 등의 실질적인 제재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이는 단순한 규제가 아니라, 방송의 공공성을 회복하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길이다. 동시에, 지속가능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기준이기도 하다. 방송은 이미 우리사회에서 단순한 오락이나 정보 전달을 넘어 시민의 행동을 변화시키는 강력한 사회적 도구다. 특히 공영방송과 지역방송은 ESG시민운동의 촉진자로서 큰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이미 공영방송의 긍정적인 사례도 존재한다. KBS의 다큐멘터리 ‘쓰레기 대란의 경고’는 해외에 수출되는 플라스틱 쓰레기 문제와 미세플라스틱의 인체 영향을 집중 조명하여 시청자들의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방송 이후 환경단체, 교육기관의 문의가 급증하고, 지역자치단체의 자원순환 정책 수립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방송이 얼마나 강력한 사회 변화의 촉매제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또한 서울특별시 민영방송국인 TBS는 지역 카페와 협력하여 ‘일회용 컵 Zero 캠페인’을 정기적으로 방송하고, 지역 사회의 참여를 적극 유도함으로써 실천적 시민운동의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이처럼 방송이 우리 사회의 변화를 촉진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희망적인 신호다.
이제 방송은 단순히 ‘보도하는 매체’를 넘어, 시민의 행동을 이끌어내는 ‘플랫폼’으로 진화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공공성을 기반으로 한 공영방송과 지역방송이 ESG 실천의 본보기를 보이는 것은 제도와 문화를 동시에 바꾸는 가장 강력한 전략적 수단이 될 수 있다.
방송이 바뀌면 시민이 바뀌고, 시민이 바뀌면 정책도 바뀐다. 정부는 제도적인 기반을 만들고, 방송은 실천의 본보기를 제시하며, 시민은 참여를 통해 행동으로 응답할 때 비로소 ‘일회용품 Zero 사회’는 실현이 가능하다. 일회용에서 다회용으로의 전환은 선택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내일을 위한 당연한 실천이다. 그리고 그 실천의 동력은 바로 방송 매체와 시민 사회가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다.
2025-08-21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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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부산 MICE 산업의 재도약을 위한 제언
부산은 2016~2017년 UIA 국제회의 도시 순위에서 세계 10위권에 들며 글로벌 MICE 도시로 비상한 적이 있다. 하지만 최근에는 정부 회의와 전시회에만 기대며, 학회·협회 등 국제회의 유치를 사실상 놓치고 있다. 그 결과 많은 신규 MICE 행사가 3년을 넘기지 못하고 단발성 행사로 종료되며, 부산 MICE 산업의 체계적 성장은 요원한 상태다. 이 같은 침체의 핵심은 전문가 그룹의 과점 구조와 혁신의 부재다. 소수 인사들이 장기간 MICE 산업을 주도하며 네트워크는 폐쇄 안정화되었고, 새로운 아이디어와 트렌드 선도 기능은 사라졌다. 이러한 고착화된 구조 속에서 코로나 이후 급격히 변하는 글로벌 MICE 혁신에도 대응하기 어렵다.
부산은 매년 1000명 이상의 관광·MICE 전공자를 배출하지만, 지역 산업은 여전히 영세하고, 중간관리자급 인력을 확보하기 어렵다. 낮은 처우 탓에 지역업체는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채 정부 공모사업에서 ‘끼리끼리’ 용역만 맡으며, 국제 경쟁력은 더욱 약화되었다. 무엇보다 문제는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고도 이를 실천할 구심점이 없다는 점이다. 현장 실무자들의 피로감도 누적되어 있으며, 새로운 도전을 기획할 동기부여도 부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산 MICE 산업에는 기회가 남아 있다. 세계는 다시 국제회의 확대 국면에 접어들고 있으며, 탄소중립·디지털 전환 등 새로운 키워드가 산업 구조를 바꾸고 있다. 첫째, 부산컨벤션뷰로와 벡스코의 핵심 보직을 단기 순환이 아닌 전문 경력자 중심의 장기보직제로 전환하고, 책임경영 구조를 확립해야 한다. 전문성과 연속성 확보만이 국제 네트워크 구축과 비딩 경쟁력의 회복으로 이어진다.
둘째, 공공·산업·학계가 모두 참여하는 개방형 협력 거버넌스를 구축해, 글로벌 기획자와 외부 전문가 유입을 확대해야 한다. 싱가포르의 그린MICE, 말레이시아 KLCC의 베뉴 혁신, 도쿄 마루노우치의 지역 MICE 사례는 개방형 협업이 실질 성과로 연결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셋째, 부산 지역 대학과 MICE 산업체를 연계한 산학 인턴십과 채용 보조금, 경력 관리자 프로그램을 강화해 지역 인재의 유출을 막고, 중간관리자급 전문 인력 확보와 유지가 가능하게 해야 한다.
넷째, 벡스코에만 의존하던 행태를 벗어나 호텔·대학·문화공간 등을 활용한 다변화된 MICE 베뉴를 확보하고, 벡스코 3단계 확장과 함께 AI·메타버스 기반의 회의 인프라에 전략적으로 투자해야 한다.
다섯째, 부산만의 강점인 해양·영화·한류·IT를 활용한 주제형 국제회의와 ESG·그린MICE 콘텐츠를 기획해 지속가능하고 차별화된 행사 모델을 선도해야 한다. 특히 지역 문화와 연계한 스토리텔링 기반의 콘텐츠 개발은 외국인 참가자의 체류 가치를 높일 수 있다.
부산 MICE 산업의 재도약은 단순히 산업 발전이 아니라, 지역 대학생들이 부산에서 안정적이고 전문적인 커리어를 꿈꿀 수 있는 기회다. 이 기반 위에서 부산은 글로벌 MICE 허브 도시로 다시 우뚝 설 수 있다. 부산은 이미 과거의 교훈을 바탕으로 다시 일어설 준비가 되어 있다. 이제 부산 MICE 산업의 장밋빛 미래는 우리 모두가 선택하고 실천함으로써 현실이 된다.
2025-08-20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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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피난의 항구’ 부산, 난카이 대지진 준비해야 할 때
일본 정부가 최근 발표한 ‘난카이 해곡 거대 지진’ 피해 시나리오는 가정이 아니라 예고된 미래다. 시즈오카현부터 미야자키현 앞바다까지 이어진 해구를 따라 발생할 초대형 지진은 규모 9.0에 달하며, 약 100~150년 주기로 반복돼 왔다. 일본 정부는 향후 30년 내 80% 확률로 이 지진이 발생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지난 3월 일본 정부가 발표한 피해 시뮬레이션에 따르면, 직접 사망자는 최대 29만 8000명, 재해 관련 사망자는 5만 2000명에 이른다. 또 건물 235만 동이 붕괴되고 피난민은 무려 1230만 명이 발생할 것으로 전망된다. 일본토목학회는 경제적 피해가 1466조 엔(한화 약 1경 3800조 원)에 달하며, 피해 복구에는 약 22년이 소요될 것으로 분석했다.
문제는 충격이 결코 일본만의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난카이 해곡은 부산에서 불과 220km 떨어져 있다. 지진이 발생할 경우 규슈 남부에서 가까운 부산은 가장 유력한 피난지 중 하나가 된다. 수십만 명의 생존자가 바다를 건너 부산으로 향할 가능성이 크다.
우리는 이 시나리오에 준비돼 있는가? 지금까지 우리의 재난 대응은 대부분 단기적이며, 국내 중심의 수습에 그쳤다. 그러나 난카이 해곡 지진은 장기 이재민의 국제적 이동을 수반하는 초국경적 복합재난이다. 이제는 ‘국제 재난 대응체계’ 구축과 ‘장기 이재민 수용 전략’이 부산이라는 도시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돼야 할 시점이다.
부산은 김해공항과 부산항, KTX 등 접근성이 뛰어난 인프라를 갖추고 있다. 더불어 도심에는 리모델링 가능한 빈집과 저이용 공공시설이 1만 8000채 이상 분포해 있다. 이 중 절반만 활용해도 약 2만 5000명, 전면 활용 시 5만 명 이상의 장기 체류자를 수용할 수 있다. 또 부산은 의료거점 도시로서 감염병 전문병원, 외상센터, 다언어 진료가 가능한 대학병원 등의 기반 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트라우마 회복과 감염병 대응 역량도 충분히 축적하고 있다.
가능성이 곧 준비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핵심은 사후 수습이 아닌, 사전에 작동하는 재난 완화 체계를 구축하는 일이다. 첫째, 한일 간 조기경보 시스템과 UN 재난정보 공유시스템(API)을 확보해 신속한 정보 연계와 초동 대응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둘째, 민·관 협력 체계를 정비하고, 재난 수습이 정치화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셋째, 평상시 도심 빈집과 차량숙박(차박) 가능 구역을 관리하고, 비상시 커뮤니티형 이재민 주거지로 전환 가능한 체계를 갖추는 한편, 도시형 스마트팜을 연계한 자립형 회복 모델을 조기에 구축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시민 수용성과 예산의 투명성이다. 재난 수용 기반은 일방적 행정이 아닌, 시민사회와의 공감과 참여 속에서 조율돼야 한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한일 공동 재난회복력 특별기금’ 조성을 제안한다. 빈집과 차량 기반 시설의 리모델링, 의료장비 확보, 재난심리 전문가 양성 등에 투자가 이뤄져야 하며, 국제 NGO와 유엔기구의 참여도 유도할 필요가 있다.
제도적 기반도 병행돼야 한다. ‘재난대피 및 국제 이재민 임시주거 지원 조례’ 제정과 함께, 출입국관리법 개정을 통한 ‘재난 임시비자’ 제도 도입이 필요하다. 또한 후쿠오카, 사가, 나가사키 등 일본 지자체와 부산·울산·경남 간 ‘지방정부 간 재난 협정’을 체결해 피난 경로, 인적 자원, 이송 체계 등을 사전 공유해야 한다. 김해공항과 부산항에는 ‘국제 인도지원 게이트’를 설치하고, 정례적인 한일 공동 훈련과 정보 공유를 제도화해야 한다. 이는 재난을 ‘국경의 문제가 아닌 사람의 문제’로 다루겠다는 선언이며, 동북아 재난 거버넌스의 새 지평이 될 수 있다.
6·25전쟁 당시 부산은 수백만 피난민을 품은 ‘피난의 항구’였다. 다가올 초대형 재난 앞에서 부산은 ‘재난 회복과 연대의 항구’, ‘아시아의 재난 거점 도시’로 거듭날 준비를 지금 시작해야 한다.
2025-08-14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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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진영을 넘어, 다시 민주주의
작년 여름, 우리 대학 독서토론대회 도서로 민주주의 위기를 다룬 책을 제안했다. 책은 선정되지 않았지만, 그 제안은 교육 현장에서 민주주의 재건을 공론화해야 한다는 절박한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 무렵 나는 양당 정치에 대한 깊은 회의 속에서 진영 정당을 탈출해 제3지대 정치를 모색하고 있었다. 여당의 일방통행 폭정에 못지않게 야당의 팬덤 정치와 반민주적 작태 또한 시민으로서, 교육자로서 도저히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고 겨울, 반헌법적인 12·3 계엄이 선포되었다. 의원들이 국회로 몰려들었고 시민들도 국회 밖에서 밤새 촛불을 밝혔다. 계엄은 몇 시간 만에 해제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빛의 혁명’, ‘민주주의의 승리’라고 환호했다. 그러나 나는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려웠다. 이것이 과연 민주주의의 승리인가. 내 눈에는 민주주의가 승리한 사건이 아니라, 양당의 극단적 진영정치, 반민주세력 끼리의 충돌이 빚어낸 정치 붕괴의 현장으로 보였다.
올해 4월 4일, 계엄 넉 달 만에 대통령이 파면되었다. 며칠 뒤 교수노조에서 ‘새로운 공화국을 향한 시국선언’ 참여를 독려하는 메일이 왔다. 나는 1987년 체제를 넘어 제7공화국을 수립해야 한다는 대의에 적극 동의하면서도, 이의를 제기했다. 첫째, 헌법재판소 결정문에도 명시된 거대 야당의 의회독재 문제를 외면하고 있다. 둘째, 야당을 민주주의 수호세력으로 상대 진영을 극우 폭동세력으로 단정하는 것은 이분법적 시각이다. 셋째, 민주당 역시 헌정질서 파괴의 공범으로 민주주의 재건의 주체로 볼 수 없다.
그리고 다음의 내용을 포함할 것을 요구했다. 첫째, 이재명 대표와 민주당의 비민주적 행태에 대한 분명한 비판. 둘째, 대선 이전 공정한 재판과 선고 촉구. 셋째, 개헌안에 삼권분립, 헌재·선관위의 정치적 중립성 명문화. 넷째, 다당제 실현을 위한 중대선거구제 도입과 의회독재를 견제할 제도적 장치 마련. 물론 이 답신은 메아리 없는 아우성에 그쳤다. 이후 교수노조에서 탈퇴했다.
6월 3일, 조기대선이 치러지고 새 대통령이 선출되었다. 대선 기간 나는 제3지대에서 독재국가의 탄생을 저지하고 제7공화국을 수립하기 위한 개헌 운동에 시민으로서 참여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새 정부 출범 이후,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삼권분립이 무너지고, 사법부 독립이 흔들리며, 언론통제와 입법 독주가 이어졌다. ‘정치 개입’ 프레임으로 대선 이후로 연기된 이재명 대통령의 선거법 재판은 6월 9일, 다시 무기한 연기되었다. 국민 63.9%가 대통령 당선 뒤에도 재판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답했었다. 그런데 사법부가 권력 앞에 스스로 무릎을 꿇은 것이다.
브레이크 없는 절대권력, 무소불위 독재국가가 현현되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목도하며, 나는 1987년 ‘독재 타도, 호헌 철폐’를 외치던 거리 한가운데 다시 내던져진 듯한 현기증과 고통을 느끼고 있다. 이번에는 총칼도 군화도 없다. 그 대신, 더 정교하고 교묘한 방식으로, 법과 제도를 무기 삼은 ‘합법적 탈민주주의’가 민주주의를 오염시키고 압살하고 있다. 더 두려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이 민주주의 난장판을 위기로 인식하지 못하거나 오히려 정치 효능감을 만끽하며 상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민주주의에 인사를 건넨다. 이 인사가 민주주의의 건재함을 기뻐하는 축사가 될지, 민주주의의 종언을 알리는 고별사가 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것은 거리에 다시 내던져진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 시작은 미약했지만 끝내 위대했던 역사를 기억한다. 주춤하는 개헌 논의를 다시 추진하면서 1987년 체제를 청산하고 제7공화국을 수립하기 위한 새로운 정치 설계, 진짜 시민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그것은 오로지 진영을 뛰어넘은 시민들의 성찰과 연대 위에서 시작될 수 있다.
민주주의는 스스로 오지 않는다. 부디 시민들의 직시, 지혜, 용기, 그리고 힘찬 연대로 민주주의가 진영의 감옥에서 벗어나 온전한 모습으로 다시 ‘안녕’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진정한 ‘빛의 혁명’은 그제서야 완수될 수 있을 것이다.
2025-08-13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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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관심이 사라지면, 존재도 사라진다
부산에 발령받아 근무한 지도 어느덧 1년이 다 돼 간다. 가장 큰 변화라면, 나훈아의 ‘애인이 생겼어요’ 가사처럼 내 마음을 빼앗아간 새로운 존재가 생겼다는 것이다. 바로 ‘소나무 분재’다. 이제는 감히, 소나무를 어떻게 다듬어야 멋진 분재로 키워낼 수 있을지 어렴풋이 감을 잡을 정도는 되었다.
하지만 지난 5월 초 황금연휴 동안 돌보지 못한 탓에, 부산에 두고 온 분재들 대부분이 생사의 기로에 놓였다. 일부는 이미 운명을 달리했고, 몇 그루는 아직도 사경을 헤매고 있다.
금요일 저녁이면 서울행 열차에 몸을 싣고, 서울 집에 있는 사랑스런 짝꿍이 기다리고 있어 보러 올라가야만(?) 한다. 그 순간부터 내 관심은 오롯이 서울 아파트 베란다의 소나무 분재에 쏠린다. 안 보면 멀어진다는 말이 맞는 건지,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는 말이 더 적절한 건지, 부산에 있는 분재는 어느새 내 머릿속에서 사라진다.
그러다 월요일 새벽, 다시 부산행 열차에 오르면 그제야 비로소 부산 분재들이 떠오른다. 시든 가지와 마른 흙이 눈앞에 아른거릴 때쯤이면 늦었음을 깨닫는다. 관심이 멀어지면 존재조차 흐려지는 것, 그것은 나만의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이 소소한 경험은, 우리가 소방안전관리자를 대하는 방식과 닮아 있다. 소방안전관리자 제도는 명목상 ‘있다’. 건물마다 지정되어 있고, 서류에도 존재한다. 하지만 그들이 실제로 건물 안에 ‘존재’하는 경우는 우리가 들어봄직한 건물을 제외하고는 없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이른바 ‘건물의 유령 소방관’이다. 관심이 멀어지면 존재조차 지워진다는 진리는, 분재만이 아니라 제도에도 그대로 투영된다.
많은 이들은 이렇게 묻는다. “왜 우리는 미국이나 일본처럼 민간 자율 안전관리 체계를 만들지 못하는가”라고…. 답은 이미 여러 연구와 현장에서 반복적으로 제시됐다. 첫째, 한국 사회는 높은 법 의존성과 강한 정부 주도 성향을 기반으로 하는 구조다. 둘째, 단기성과 위주 행정문화와 결과주의는 안전처럼 지속적 관리가 필요한 가치와 배치된다. 셋째, 기업과 개인은 아직도 안전을 비용으로만 인식하는 경향이 강하다. 넷째, 안전을 신뢰가 아닌 통제로 접근하는 문화가 여전히 지배적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민간 자율 안전관리 체계가 상대적으로 잘 작동하는 국가들의 공통점은 명확하다. 첫째, 공공에 대한 신뢰가 바탕에 깔려 있으며, 둘째, 교육과 캠페인을 통한 장기적인 시민의식 함양이 일관되게 이루어졌고, 셋째, 정부는 최소한의 기준만 제시하고, 나머지는 민간의 책임으로 위임하는 사회적 합의가 존재한다. 넷째, 위반 시에는 엄정한 처벌이 뒤따라 실효성을 담보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간 정부 중심의 일방적인 캠페인과 규제에만 의존해 왔다. 단기성과 중심의 홍보, 보여주기식 행사, 형식적인 서류상 교육이 반복된 결과는 자명하다. OECD의 안전의식 조사(2023)에 따르면 한국은 회원국 중 최하위권 수준이다. 아무리 ‘캠페인’과 ‘홍보’를 해도, 자율적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공허한 외침일 뿐이다.
정책 설계에서도 유사한 오판이 반복된다. 마치 예비군 훈련을 애국심의 발로로 좋은 교육기관을 스스로 찾아갈 것이라는 전제에서 설계하듯 말이다. 주지하듯 피교육자 입장에서 교육의 내실과 무관하게 ‘가까운 곳에서 빨리 끝낼 수 있는 곳’을 선택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이 점을 간과하면, 정책은 늘 책상 위에서만 존재하는 공허함에 그칠 수밖에 없다.
건설현장에서는 CEO가 방문한다고 하면 일단 현장이 정돈되기 시작한다. 현장 정리만 잘 되어도 사고 가능성이 절반 가까이 줄어든다는 말처럼, 책임자가 직접 챙기는 현장은 그 자체로 달라진다. 한 언론에 따르면, 이는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이후 경영진이 안전관리에 발 벗고 나서면서 나타난 변화라고 한다. 실효성 있는 제도 설계와 집행이 얼마나 큰 차이를 만드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소방안전관리자 제도 또한 보여주기식이 아닌 실효적 방식으로 바뀌어야 한다.
소방안전관리자는 단지 법에 명시된 존재가 아니라, 화재 예방과 화기 취급 감독, 피난 유도 등 현장의 위험을 감시하고 조율하는 실질적 책임자여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정반대다. 야간, 주말, 휴일엔 관리자가 없고, 자위소방대 또한 실효성이 없다. 자율안전관리체계라는 이름 아래, 실상은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구조가 고착화된 것이다.
이제는 ‘소방안전관리자가 건물에 실제로 존재할 수 있도록’ 제도와 사회의 관점을 바꾸어야 한다.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또 다른 규제를 만들자는 거냐고. 하지만 이는 ‘감독의 강화’가 아니라 ‘실질적 존재를 위한 조건 마련’이다. 건물의 크기와 위험도에 따라 법적으로 상주해야 하는 기준을 마련하고, 비용 부담은 감면·지원 등의 방식으로 조율하는 것이다. 중요한 건 ‘진짜 책임지는 사람’이 그 공간 안에 존재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관심과 책임이 사라지면, 존재도 흐려진다. 건물의 안전 또한 마찬가지다. 소방안전관리자 제도는 이대로 방치되어선 안 된다.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기회가 남아 있을 때 손을 써야 한다. 그간 나의 부재와 어리숙함으로 운명을 달리한 소나무에게 마음 깊이 애도를 표한다.
2025-08-10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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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한일 대륙붕 협정 50년, 다시 해양주권을 묻다
지난 6월 22일, 한국과 일본은 국교 정상화 60주년을 맞았다. 양국이 우호 동반자 관계를 다져온 이 해에, 동아시아 해양질서는 중대한 시험대에 오른다. 바로 1978년 발효된 한일대륙붕공동개발협정이 2028년 종료될 가능성 때문이다.
이 협정은 제주도 동남방 약 8만 4000㎢에 달하는 대륙붕, 이른바 7광구를 한국과 일본이 공동으로 개발하기 위해 체결된 것이다. 석유와 천연가스 매장 가능성이 높은 이 구역은 양국의 주권적 권리가 중첩된 지역으로, 국제법상 '중첩 대륙붕' 개념이 적용된다. 그러나 해양법의 변화와 일본의 비협조로 인해 공동개발은 사실상 중단되었고, 협정의 유효기간 50년이 끝나는 2028년 이후 협정은 종료될 가능성이 커졌다. 한일 대륙붕 해양경계, 2028년 이후를 대비해야 한다.
만약 일본이 협정 종료를 선언한다면, 바다를 둘러싼 새로운 외교전이 시작된다. 이는 한일 간 해양경계획정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 현재 국제법 흐름은 해양경계획정에 있어 '자연연장론'보다는 '등거리·중간선 원칙'을 우선하는 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 기준을 적용하면 7광구의 상당 부분이 일본 측으로 넘어갈 가능성이 크다. 일본은 이미 협정 종료 이후 이 지역에서 독점적 권리를 주장할 준비를 해왔고, 한국은 자연연장론에 기반한 기존 주장을 국제사회에 설득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대륙붕 협정 종료로 동아시아 해양질서가 요동친다. 협정이 종료되면 해양경계 협상에 제3자인 중국이 본격 개입할 가능성이 높다. 중국은 오키나와 해구까지 자국 대륙붕이 연장된다고 주장하며, 한일 공동개발구역 대부분에 대한 관할권을 요구할 태세다. 이미 동중국해에서 일방적 해양 관할권 주장을 강화하며 해양 패권을 확장하고 있다.
동아시아 해양 패권의 판이 흔들리고 있다. 한일 간 해양경계 분쟁이 국제법정으로 가기 전, 정부는 외교적·법적 대응 방안을 세밀히 준비해야 한다. 특히 중국 변수를 고려한 전략 수립이 필수적이다. 중국이 협정 종료 후 한중일 대륙붕에서 단독 탐사 및 개발을 추진할 경우, 동중국해는 새로운 갈등의 진원지가 될 것이다.
협정은 끝나도 바다는 남는다. 지금이야말로 한일 관계와 우리의 선택이 절실한 시점이다. 정부는 첫째, 일본과의 조속한 협상을 통해 7광구의 공동개발 또는 경계획정 문제를 관리해야 한다. 둘째, 중국의 단독 개발 움직임을 저지하기 위한 국제법적 대응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셋째, 미중 해양 패권 경쟁 구도 속에서 미국 및 국제사회와 연대하여 우리의 입장을 효과적으로 전달해야 한다.
지자체와 해양 산업계도 지금부터 대비해야 한다. 부산 등 해양도시들은 7광구 개발에 대비한 해양과학기술 연구와 해양 인프라를 보다 더 확충해야 한다. 석유·가스 개발, 해양에너지 활용을 위한 지역 기반 조성을 통해 협정 종료 이후의 불확실성에 선제 대응할 필요가 있다.
국민들도 이 문제를 남의 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바다는 단순한 자원이 아니다. 해양주권은 국가의 미래와 직결된다. 국가적 이해가 걸린 이 사안에서 국민적 공감대와 지지가 절실하다. 해양주권 수호는 정부만의 몫이 아니라, 국민 모두가 함께 짊어져야 할 시대적 과제다.
2025년, 한일 해양분쟁의 신호탄이 울린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바다를 둘러싼 외교전에서 결코 주도권을 잃지 않는 것이다. 한일대륙붕공동개발협정의 종료는 끝이 아니라, 해양질서 재편의 시작이다. 동아시아 바다를 지키기 위한 준비는 이제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2025-08-05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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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교실이 아프다
최근 발생한 교실 폭행 사건을 접한 후 학교 교육에 대한 염려가 커졌다. 교실에서 고3 학생이 교사를 폭행해 해당 교사는 물론이고 현장의 교사들은 충격에도 속수무책이다. 수업 중 휴대폰을 사용한 것은 수업권과 학습권을 단숨에 침해받는 행위이며 학생이 분노를 조절하지 못한 돌발행동으로 교실은 아수라장이 되어도 누구 하나 나서지 않아 공교육의 붕괴를 확실하게 보여준 사례다. 수업 중에 폰 게임을 하던 학생을 지도한 여교사를 폭행해도, 다른 학생들은 방관과 비웃음으로 상황을 지켜보는 것은 그 자체로 충격이었다.
이런 사태가 항상 발생할 가능성은 점점 커지는데 그 원인은 무엇일까? 가르치고 길들이지 않으면 인간도 동물과 다를 바가 없다. 출생과 동시에 가족이라는 작은 사회에서 교육이 이뤄져야 하며, 취학 전에 이미 아이는 인성과 도덕성이 형성되어 유치원에 입학하면서 공동체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교실에서 교사의 권위와 역할이 무력화되고 학생들의 학습권도 동시에 무너지는 건 바로 공교육의 붕괴이다.
인성은 가정에서 시작하여 학교에서 다듬어져야 한다. 가정에서 우선 인성과 품성이 길러지고 훈육되지 않으면 사회에서, 학교에서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 설사 인성교육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 효과는 장담할 수 없다. SNS에 정제되지 않은 영상들을 보면 우리 아이들의 실상이 너무나 놀랍고 충격 그 자체이다. 교육의 영역 밖 상황이라 논쟁거리로 삼지도 못하며 이에 성인들의 반응도 예상 밖이다.
가정은 아이가 규칙과 공동체를 경험하는 최초의 사회이다. 공동체 의식이 질서와 배려, 양보, 봉사 등등이라는 개념이 몸에 배도록 하는 가정교육과 청소년기의 의식이 평생을 좌우하는 학교 교육에서 이 점을 강조하고 실행해야 교육의 기본이 되고 공교육이 존재하는 가치와 근거가 된다.
또 회초리는 사라지고 교사의 수업권은 보장되어야 한다. 교사가 수업 중 학생의 스마트폰 사용은 당연히 지도해야 다른 학생의 학습권이 보장되어 수업이 정상화되는데 학생이 교사를 폭행하는 현장에서 다른 학생들의 반응이 더욱 끔찍하기만 하다. 다른 학생들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할지 선뜻 나서기도 쉽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웃고 촬영까지 한다는 사실에 분노와 비애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더구나 교사에 대한 사회적 불신과 공교육에 대한 부정적 견해와 입장이 점점 뚜렷해진 것이 현실이다. 학생의 인권은 당연히 보호되어야 하지만 그것이 교사의 수업권과 학습권을 보장해 주지 않으면 교육의 근본이 파괴된다.
공교육의 붕괴는 사회를 불안하게 하는 주된 요인으로 불평등과 분열로 이어지며, 미래세대의 역량 저하로 이어지고 더 이상 미래를 기대할 수 없는 비극을 초래한다. 공교육의 붕괴를 막기 위해 첫째, 학생인권조례와 교권의 균형과 이를 유지하는 확실한 제도 보완이 필요하다. 학생인권조례는 학생의 권리를 보호한다지만 교사는 수업권이 전혀 보장되지 않고 있다. 학생인권조례와 교사의 정상적인 교육활동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교사를 보호하는 법적·제도적 장치와 교사의 수업권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학생의 학습권도 보장된다는 당연한 논리를 거부해서는 답이 없다.
둘째, 마을이 아이를 키운다는 의미를 롤모델로 삼자. 교사, 학생, 학부모가 삼위일체가 되어야 한다. 교사의 수업권, 학생의 학습권은 당연히 보장되어야 하며 이에 학부모는 공동협력자의 역할을 아끼지 않으며 가정-학교-지역사회가 연계된 공동체 교육 시스템이 구축되어야 한다.
이번 교사 폭행 사건은 단순 사건으로 생각하고 더 이상 방치하고 방임할 수 없다. 아이들에게 제대로 훈계할 줄 아는 성숙한 사회교육이 절실하다. 가정에서부터 배움이 출발하여 학교로 배움이 연결되어야 교육이 바로 설 수 있다. 가정교육, 공교육의 본질을 회복하여, 교사들이 자신 있게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 공교육이 다시 교육의 중심이 될 수 있도록, 교사와 학생, 학부모와 사회가 함께 해야 한다. 교사, 학생, 학부모가 함께 협력하여 ‘정상적으로 수업하고, 제대로 배우는 교실’이 한국 교육이 나아가야 할 길이다.
2025-07-31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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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박형준 시장의 ‘고래와 참치론’
이재명 대통령의 대선 공약으로 부산의 오랜 숙원사업인 해양수산부를 부산으로 이전하겠다고 하는 발표와 함께 한국 최대의 선사인 HMM 본사 부산 이전과 부산 이전이냐 아니야로 내홍을 겪고 있는 산업은행 대신 동남투자은행을 부산에 설립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여기에 박형준 부산시장은 ‘고래와 참치는 맞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쓴소리를 했다.
17세기경 보험시장의 상징인 로이즈(Lloyd.s)의 시작이 런던항이었듯이 글로벌 금융도시는 대형 항만과의 공존 발전이 필연적이다. 싱가포르, 홍콩, 두바이가 그 좋은 예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부산은 금융도시로서의 최적의 입지와 천혜의 환경을 두루 갖춘 도시다. 세계 2위의 환적물 화물항과 세계 6위의 직항 화물항을 보유한 글로벌 항만 물류의 핵심도시이다.
더불어 인근 지역에는 타 금융도시들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세계 최고 수준의 생산 및 산업 클러스터들이 이미 구축되어 있다. 지정학적으로도 부산은 러시아, 중국, 일본으로 이어지는 동북아의 관문이자 환태평양의 경제권과 북항개발, 대륙철도 연결이 본격화될 경우 그 전진기지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수 밖에 없는 전략적 요충지다. 이처럼 최상의 조건을 두루 갖춘 여건 속에서도 그동안 글로벌 허브 금융도시로서의 위상을 실현하지 못했다면 이는 관련 책임자들의 창의력과 도전정신의 부재의 결과로 밖에 볼 수 없지 않을까?
노무현 정부 때 지역균형발전의 일환으로 1조에 가까운 예산을 투입해 문현동에 부산국제금융센터(BIFC)를 설립했다. 부산을 동북아를 대표하는 글로벌 금융도시로 만들겠다는 야심찬 프로젝트였다. 당시 지방으로 이전한 153개 공공기관 중 유일하게 글로벌, 즉 국제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을 보면 이는 아시아를 대표하는 금융도시 싱가포르, 홍콩, 두바이에 버금가는 금융도시로 육성시키겠다는 포부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0여 년이 지난 지금의 현실을 직시해 볼 때 과연 그 비전이 실현되었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국제금융센터’라는 이름에 걸맞게 실제로 외국계 금융회사와 국제금융기관이 얼마나 입주해 있는지, 붕어빵에 붕어가 없듯이 부산국제금융센터도 국내 금융 비즈니스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채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관치 금융공간으로 채워져 중앙의 금융기관을 보조하는 브릿지 역할로 전략한 것은 아닌지….
산업은행 유치는 단기적으로는 정부 정책 금융기관으로 외형적 상징적 의미는 클 수 있으나 장기적 확장성에 있어서는 극히 제한적일 수가 있다. 불확실한 제로섬 게임에 갇혀 에너지를 소진할 수 밖에 없는 산업은행 유치보다 동남투자은행 설립이 장기적 전략적 측면에서는 활용만 잘한다면 더 유리할 수도 있지 않을까.
정부가 지원하는 3조의 투자금과 민·외자 유치의 유연성과 함께 자본 외형을 확대시키고 부산국제금융센터와 연계한 새로운 AI 생태계의 미래형 금융플랫폼 시스템으로 거듭날 수 있다면 부산은 새로이 도약하는 반전의 기회가 될 것이다.
유럽은 이미 AI 기술을 기반으로 한 산업 전면 재구조화가 본격화되고 있고 한국 역시 SK에서 아마존과 손잡고 울산에 AI 산업데이터센터 건립을 발표했다. 어차피 금융도 소용돌이치는 거대한 AI의 변화의 배 위에 승선하지 않으면 존재 자체가 불확실 할 수 있는 위기의 시대에 온 것 같다.
다행히 부산을 비롯한 동남권은 1960년대부터 누적되어 온 방대한 실물산업생산 데이터의 보고(寶庫)이다. 해운, 조선, 자동차, 기계, 섬유, 방산, 수소바이오, 수산, 푸드에 이르기까지 수십년 동안 실물산업의 기록 데이터들이 원석과 같이 쌓여 있다.
이것들을 정형화시키고 데이터 라벨링 및 표준화와 반복된 AI 학습 훈련을 금융과 연계시킨다면 부산에 맞춤형 거대한 AI 금융데이터센터가 탄생되는 것이다.
물들어 올 때 노 젖는다고 박형준 시장의 고래와 참치론을 인용하자면 정부에다 고래는 포기할테니 AI 금융데이터센터 부산 설립이라는 ‘튼실한 참치 한 마리’를 달라고 역발상 제안을 해보자.
부산을 AI기반 금융데이터 베드로 조성하고 이를 기반으로 부산국제금융센터와 동남투자은행이 한국 최초 아니 세계 최초 미래형 AI 플랫폼 금융도시로 다시 태어난다면 수도권 중심의 일극체제를 넘어서는 이극체제가 아닌, 다극체제의 첫 출발을 부산에서 시작하게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2025-07-30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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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고령자가 안전한 사회 만들기
부산 광안리 해수욕장 인근에서 지난 5월 21일 오후 7시께 고령 운전자가 인도로 돌진해 보행자 5명이 부상당하는 사고가 있었다. 운전자는 80대, 동승자는 79세로 고령자다. 최근 부산 지역에서 고령 운전자에 의한 사고가 빈발하고 있는 것은 지역사회 전체가 고민하고 대책을 수립해야 하는 중차대한 문제다. 이와 같은 고령 운전자 교통사고는 통계적으로도 확인이 된다. 2024년 고령자 교통사고는 23.5%(2672건)로 2020년 15.2%(1834건)에서 건수가 31.4%나 증가했다.
전체 교통사고 4건 가운데 1건이 고령자가 가해자인 교통사고다. 그렇다고 나이가 교통사고 발생의 상수가 되는 것은 아니다. 운전 경력이 아무리 많아도 당황하거나 급해지면 가속 페달과 정지 페달을 혼동할 수 있다. 모든 연령층에서 교통사고의 우려는 있지만 고령 운전자는 집중력 및 시력의 저하와 반응 속도가 늦어지는 경향이 겹쳐져 발생 우려가 높다는 것이다. 장시간 운전으로 인한 졸음운전으로 인도로 돌진하기도 하고, 비교적 가벼운 추돌이나 충돌의 1차사고 후 당황하여 2차 대형 사고로 이어지는 사례가 많다. 아무리 보도에 차량 진입 방지 시설물을 설치한다고 해도 차량이 첨단화되어도 운전자의 잘못이 모든 사고의 근본 원인이 된다. 그래서 운전자의 적성검사를 강화하고 치매나 다른 질병이 있을 경우 반드시 확인하고 또 확인해서 운전면허증을 발급하는 것이다.
고령자를 위한 교통안전 대책은 한국도로교통공단을 비롯한 많은 기관에서 다양하게 수립되어 시행되고 있다. 하지만 고령자 교통사고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고 있고, 오히려 고령자들은 나이가 많아서가 아니라 급발진과 같은 자동차나 도로 환경으로 그 책임을 전가하는 경향이 있다. 스스로 시력이 저하되고 반응속도가 느려지고 집중력이 떨어진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치매 진단을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운전면허증이 없으면 생계가 어려워져서 면허증을 반납하지 못하는 분들이 의외로 많다. 치매 진단과 운전면허증 중 하나만 선택하라고 하면 둘 다 포기하지 못한다고 역정을 내시는 분들도 계신다.
고령자의 이동권 문제가 아니라 이 분들이 인생에서 퇴출되지 않도록 하는 사회적 합의가 있어야 한다. 운전면허증은 그 분들의 마지막 자존심으로 여겨지고 있다. 늙어서 이제 운전도 하지 못하는 신세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다 급한 일이 있으면 과감하게 운전대를 잡고 교차로에서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서, 왜 지금 여기 있는지도 몰라서 어쩔 줄 몰라 하시는 경우도 생기는 것이다. 99세인 할아버지가 본인은 아직도 건강하다며 운전면허 적성검사를 받으려고 하는데 아들과 손자가 와서 제발 운전면허증을 취소시켜달라고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고령자의 신체적·정신적 문제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가족이다. 본인은 몰라도 가족은 아는 것이 고령자의 운전 능력이다.
가장 큰 효도는 부모님의 운전면허증을 확인하고 지금 바로 당장 운전면허 적성검사를 받게 하는 것이다. 치매 검사도 하고 시력 검사도 하고 가까운 운전면허시험장에 오셔서 운전 능력에 대한 컨설팅을 받으시고 운전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스스로 운전을 포기하게 하는 것이 자식 된 도리다.
교통사고는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의 불행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다른 가족의 불행과 겹쳐져 큰 곤혹을 치르는 악몽의 뫼비우스 띠에 올라타는 것이다. 운전하는 부모님을 수시로 보호하며 조금이라도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면 교통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전조 신호로 받아들여야 한다.
운전면허증이 없어도 행복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함께 노력하는 것이 급선무다. 무작정 운전을 못하게 하는 것은 그분들에게 더 큰 상처를 줄 수 있기에 대중교통의 확충과 걷기 편하고 안전한 보도 정비가 우선되어야 한다. 건강한 노후를 위해서 걸어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고령자들이 운전하지 않고도 인생을 즐길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젊은 우리의 책무다.
2025-07-27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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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해양수도에 찾아온 기분좋은 ‘변화의 바람’
그룹 스콜피온즈의 노래 ‘윈드 오브 체인지’(Wind of Change’)에도 담겼듯이 바람은 때로 변화를 예고한다. 오래된 질서를 흔들고 낯선 길로 인도하며 멈춰있던 흐름에 방향성을 불어넣기도 한다. 독일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자 냉전 종식을 예견하며 발표되었던, 이 곡은 지금 우리 지역이 맞이한 전환점을 상징하는 노래로 다시 들린다. 이곳 부산에도 최근 들어 부쩍 기분 좋은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부산은 오랜 시간 대한민국 산업화의 핵심축이자 동북아 해양경제의 거점으로 성장해 왔다. 그러나 수도권 집중 현상이 심화되고 지역경제가 침체되면서 ‘지방소멸’이라는 단어조차 공공연히 회자될 만큼 위기의식이 팽배했다. 그러나 최근 이 흐름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
새 정부 출범 이후 기민하게 추진 중인 해양수산부 부산 이전 프로젝트, 그리고 HMM 의 본사 부산 이전 계획은 단순한 기관 재배치 그 이상의 상징성을 가진다. 이것은 그동안 서울 및 수도권 일극체제에서 벗어나 해양산업의 중심은 바다 곁에 있어야 한다는 당연한 원칙의 회복이자, 정책과 실행 그리고 산업과 인프라가 한자리에 모이는 새로운 균형과 질서의 시작이다.
해수부 이전은 정책과 집행의 현장 일치를 통한 시너지 제고를 의미하며, HMM을 비롯한 민간기업의 이전 로드맵은 글로벌 해양물류 중심지로서 부산의 위상을 민간 영역에서도 공고히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이런 변화는 산업과 행정, 공공과 민간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지역균형발전의 좋은 모델이 될 것이며, 정부의 핵심 국정과제로서 대한민국 신성장의 놀라운 동력이 될 것이다.
변화는 단지 물리적 이동이 아니라 산업과 인재, 그리고 금융과 인프라가 함께 재배치되고 융합되는 화학적 결합이어야 한다. 해양 관련 민간기업이 부산에 터를 잡고 지역 학계와 유관기관이 협력을 통해 다양한 비전을 제시하며 해수부가 관련 정책을 기획하고 금융이 이러한 연결의 촉매제 역할을 한다고 상상해 보라. 인재 유입은 덤이며 지역 대학의 경쟁력 강화는 물론 지방이 겪고 있는 여러 문제들이 해소됨과 동시에 부산은 ‘대한민국 제2의 수도’가 아닌, 세계가 놀라는 ‘글로벌 해양수도’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그리고 최근 기후변화로 인해 해빙이 가속화되고 쇄빙선 기술이 발전하면서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북극항로’(Arctic Sea Route) 개척이 정부 핵심 어젠다로 주목받고 있다. 지난 25일 부산에서 개최된 타운홀 미팅에서도 대통령과 해수부 장관은 북극항로 개척에 대한 의지를 재차 표명하기도 했다. 이 프로젝트는 지역에 있어 경제·물류·산업 지형 전반에 구조적 변화를 가져올 중대한 기회다. 이는 부산을 단순 거점에서 북극항로의 전략적 기착지로 격상시키고 울산·경남은 조선해양 산업의 허브로 성장시키는 등 부울경을 글로벌 북방경제 시대의 핵심축으로 이끌 것이다.
BNK금융그룹도 이러한 변화 속에서 정부를 비롯한 다양한 이해관계자를 연결하는 구심적 역할을 하려 한다. 최근 부울경 해양수도 완성을 위한 금융 로드맵을 마련하고 해양·조선·물류 등 지역 주력산업 협업을 위해 지주사와 은행 계열사 조직도 선제적으로 개편했다. 선박뿐 아니라 해양 인프라, 항만물류 등으로 금융 지원을 확대하고 정부 정책과제인 북극항로 개척과 관련해서도 중장기적 관점에서 BNK의 역할을 찾겠다는 포석이다.
이 설레는 변화가 그저 지나가는 흐름이 아니라 새로운 미래를 여는 서곡으로 승화되기를 바란다. 명곡의 노랫말처럼 우리 곁에 찾아온 기분 좋은 ‘변화의 바람’이 다음 세대와 부울경 그리고 대한민국을 영광스러운 내일로 데려다 주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필자와 BNK도 그동안 묵묵히 준비해 온 모든 역량을 한데 모아 해양도시에 온 절호의 기회가 헛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다시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2025-07-27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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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아동복지를 넘어 아동기본권으로
제3의 물결, 정보혁명 이후 세계의 변화 속도가 가파르다. 세계인의 교류, 디지털 세상의 교류, 기후 위기가 미치는 영향 등 전 지구적 시민 체감도가 매우 높아지고 있다. 우리는 100여 년 전 5월 ‘어린이 그들이 고요히 배우고 즐거이 놀기에 족한 각양의 가정 또는 시설을 만들어야 한다’는 방정환 선생의 어린이 선언을 기억한다. 그것이 선언에 그치지 않고 국가적 약속 이행을 위해 유엔아동권리협약(UNCRC)에 대한민국이 비준한 지 36년째 되는 해를 맞이하고 있다. 그럼에도 2025년에 이른 지금, 아동빈곤과 아동학대, 온라인 성범죄 등 아동의 안전과 행복을 위협하는 사회문제는 오히려 증가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아동에 대한 대표적인 법은 ‘아동복지법’이다. 그러나 아동을 보호와 복지가 필요한 시혜적 대상으로만 보아서는 아동을 둘러싼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 아동을 어른과 같이 독립된 인격을 갖춘 주체로 보고 아동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아동기본법 제정을 통해 보다 포괄적이고 근원적 문제에 대한 접근이 필요한 시점이다.
대한민국 소멸 위기를 둘러싼 저출생 문제는 ‘내가 아이를 낳아 안전하고 행복하게 잘 키울 수 있을까’에 대한 물음에서 출발한다. 이 질문에 대한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공교육과 필수 의료의 회복, 경험과 기회의 격차를 메우기 위한 복지, 보건, 교육 영역의 정책이 연결되어 작동해야 한다. 또한 최근 대두되고 있는 디지털 환경과 이주배경아동들에 대한 새로운 대응들도 필요하다.
먼저, 디지털네이티브세대로 태어난 아동세대는 디지털 도구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삶의 질이 달라진다. 그럼에도 아직 디지털 역량 교육이 부족하거나 디지털 안전망이 헐거워 원치 않는 정보 위험과 범죄에 노출되는 경우가 많이 발생하고 있다. 호주나 영국, 미국은 이미 온라인 안전법, 아동 온라인 안전법을 제정하여 부모나 보호자, 기업, 정부에 책무를 부여하고 있음에도 우리나라는 사회적 의무와 책임을 규정하는 입법이 부재하다.
다음으로 대한민국은 고용보험 신규가입자 3명 중 1명이 외국인, 전체 국민 대비 이주민이 5%가 넘는 다문화국가에 진입했다. 외국인 근로자가 이주해 오는 것은 그의 삶과 가족, 자녀가 함께 온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주배경 아동들이 한국어를 배우고 한국사회에 적응하는 것을 돕는 정책은 부족한 실정이다. 한국어 학급, 다문화가족지원센터 등의 교육과 지원이 있으나 그 이용과 체감률은 한참 못 미치고 정부 부처는 분절돼 있는 탓에 체계적이고 통합적인 지원이 절실하다.
거대한 변화의 물결 속에 가장 영향을 많이 받는 존재는 아동이다. 아동은 진화하는 힘과 권리를 가진 존재로 성장하면서 어른과 사회, 정부의 영향을 스폰지처럼 흡수한다. 아이들은 지금도 이야기하고 신호를 보내고 있다. 잠시 눈을 감고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보자. 나의 어린 시절 가장 행복했던 일, 진심으로 간절했던 일을 누군가 들어주기를 바라지는 않았었는지…. 그 누군가가 나로부터 시작돼 가족, 사회, 국가가 응답한다면 아동도 어른도 행복한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2025-07-22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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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땅꺼짐 현상과 평형이론
최근 대도시 건설 현장 인근에서 지반침하사고가 잇따르면서 시민들의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전체적인 지반침하사고 건수는 매년 줄어드는 추세이지만 사고가 나면 인명피해가 발생하는 등 대형사고화 되고 있다. 지하안전정보시스템(JIS)에 따르면 지반침하사고의 발생 건수가 최근 5년간 부산시(89건), 경상남도(26건), 울산시(10건) 순으로 집계됐다. 지반침하는 자연적 요인인 비와 인위적 요인인 지하시설물간 복합적 요인으로 대부분 발생한다. 호우 시 생긴 많은 물이 지반에 침투하면서 지하수위를 형성하고 인위적으로 매설된 지하매설물의 빈 공간으로 흘러가면서 유로를 형성하고 이때 토사가 함께 유실되면서 생긴 ‘공동’이 지반침하 혹은 땅꺼짐으로 이어지는 구조이다.
공동 발생이 노후 하수관 파열이나 굴착 등 지하개발공사로 유발된다는 것과 지반 이완이 해동기와 우기에 확장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은 일반론이다. 보통 하수관은 지하 1.5~3m 내외에 묻혀있다. 하수관 손상 때문에 공동이 만들어졌다면 중력으로 토사가 하부로 내려앉게 되고 공동은 위쪽에 생기게 된다. 공동이 2m 이내에 생겼다면 GPR탐사로 공동을 찾을 수 있고, GPR 탐사 실적으로 제시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이렇게 발견되는 공동들은 규모가 작고 지반침하현상으로 생기는 포트홀이나 거북등 균열 등으로 일상적인 도로 점검, 유지관리 활동으로 사고 예방이 가능하다.
그러나 사상구 학장동 횡단보도에 가로 5m, 세로 3m, 깊이 4~5m 가량의 땅꺼짐, 서울 강동구의 폭 20m, 깊이 18m의 땅꺼짐은 하수도 노후화가 아니라 인근 대형 지하공사 현장 주변이라는 특성과 함께 GPR 탐사로는 예측할 수 없는 대규모의 땅꺼짐 현상이다. GPR 탐사 예찬론자는 지하 깊은 곳에서 공동이 발생해도 점차 규모가 커지면 GPR 탐사 한계라 지칭되는 지하 2m까지 공동이 형성될 것이고 그때 발견하면 공동침하 피해를 막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보통 사람들이 정기 건강 진단을 받을 때는 암을 발생 초기에 발견하기 위해 비싼 돈을 들여 검사를 받는다. 일반 X-레이 검사에서 발견될 정도로 암덩어리가 커지면 치유가 힘들게 된다. 선진 기술은 광섬유를 통한 분포형 음향 센싱 탐사(DAS)를 통하여 싱크홀 발생 가능성을 예측하는 기술을 개발 연구하고 있다. 이러한 신기술은 기술 축적이 많이 되어야 하므로 우선 대형 공사장 주변 지하수위 자동 측정 및 경보장치를 활용하여 3차원 지하수 유동을 감시함으로서 땅꺼짐 현상을 조기 예측하고 사고 예방할 수 있다.
지반공학의 평형이론은 지반에 작용하는 하중, 지반 내부의 마찰력, 수압, 지반이 겪는 변형이나 응력 등이 평형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이들 요인 중 변수는 지하수위에 따라 변하는 수압이다. 강수로 지상에 떨어진 물은 흙속으로 스며들어 지하수를 이루고 그 나머지가 지표로 흐르는데 이중 약 25%는 증발되어 버린다. 지표수의 8분의 1이 땅 위로 흐르고 8분의 7이 지하수가 되거나 일시적으로 지하로 스며들었다가 다시 하천으로 나와 흐르기도 한다. 지하 약 800m 이내에 존재하는 지하수량은 전체 하천수량의 약 3000배에 달한다. 지하수의 수압은 평형상태를 유지하다 지하수위보다 낮은 곳에 빈 공간이 있으면 그 곳으로 집중되면서 토사를 운반한다.
지하수위보다 낮은 곳을 굴착할 때는 차수벽 공사를 철저히 하여 굴착 바닥이 비배수 상태에서 시공 가능한 환경을 조성하여야 한다. 굴착공사 현장에서 차수벽을 설치하고도 굴착 바닥에 고이는 물들을 펌핑하면서 시공하는 사례가 빈번한데 강수에 의해 고인물이 아니면 공사 현장 주변 지하수위 체크부터 먼저 하여야 한다. 우리가 건강을 유지하기 위하여 평소 건강 상태를 체크하듯이 굴착공사 현장 주변에는 상시 지하수 유동에 대한 3차원 모니터링을 철저히 하여 공동이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또 인근 주민들은 땅꺼짐 사고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고 서로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플랫폼이 마련되어, 불안하지 않은 시민 생활 환경이 조성되었으면 한다.
2025-07-20 [14:28]